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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신라 하대 사회의 동요를 보여주는 삼국사기의 사료들

신라 하대 사회의 동요를 보여주는 삼국사기의 사료들

선덕왕(宣德王)이 즉위하니 성은 김(金)씨요 휘(諱)는 양상(良相)이며 내물왕(奈勿王)의 10세손이었다. 아버지는 해찬(海瑗) 효방(孝芳)이며 어머니는 김씨 사소부인(四炤夫人)이니 성덕왕(聖德王)의 딸이다. 비(妃)는 구족부인(具足夫人)으로 각간(角干) 양품(良品)의 딸이었다.

(《三國史記》 9, 新羅本紀 9, 宣德王)

원성왕(元聖王)이 즉위하니 휘는 경신(敬信)으로 내물왕의 12세손이었다. 어머니는 박씨 계오부인(繼烏夫人)이며 비는 김씨 신술(神述) 각간의 딸이다. 처음에 혜공왕 말년에 반신(叛臣)들이 발호할 때 선덕(宣德)이 상대등(上大等)으로 있으면서 임금 측근의 나쁜 무리들을 제거하자고 먼저 부르짖자 경신이 참여하여 난을 평정한 공이 있었으므로 선덕이 즉위함에 이르러 그는 곧 상대등이 되었다. 선덕이 돌아가고 아들이 없었으므로 군신(群臣)이 후사(後嗣)를 의논하여 왕의 족자(族子)인 주원(周元)을 세우려고 하였다. 주원의 집은 서울 북쪽 20리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마침 큰 비가 와서 알천(閼川)의 물이 불어 주원이 건너오지 못하니 어떤 이가 말하되 "사람이 임금의 큰 자리에 즉위한다는 것은 진실로 사람이 도모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오늘 폭우가 쏟아진 것은 하늘이 혹시 주원을 세우는 것을 원하시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지금 상대등 경신(敬信)은 전왕의 아우로서 평소에 덕망이 높았으며 임금으로서의 풍체를 갖추었다."고 하였다. 이에 여러 사람의 의논이 일치하여 그를 세워 왕위를 계승하게 하니 이윽고 비가 그치매 국인(國人)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

(《三國史記》 10, 新羅本紀 10, 元聖王)

[애장왕(哀莊王) 10년 7월] 왕의 숙부(叔父) 언승(彦昇)이 그 아우 이찬(伊瑗) 제옹(悌邕)과 더불어 군사를 이끌고 궁안에 들어와 난을 일으켜서 왕을 시해하였다. 왕의 아우 체명(體明)도 왕을 시위(侍衛)하다가 함께 해를 입었다.

(《三國史記》 10, 新羅本紀 10, 哀莊王)

[헌덕왕(憲德王)] 14년 3월, 웅천주(熊川州) 도독(都督) 헌창(憲昌)은 그 아비 주원(周元)이 앞서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이유로 반란을 일으켜 국호(國號)를 장안(長安)이라 하고 건원(建元)하여 경운 원년(慶雲元年)이라 하며 무진(武珍)·완산(完山)·청주(菁州)·사벌주(沙伐州) 등 4주의 도독(都督)과 국원경(國原京)·서원경(西原京)·금관경(金官京)의 사신(仕臣) 및 여러 군현(郡縣)의 수령(守令)을 협박하여 자기 소속을 삼았는데, 청주 도독 향영(向榮)은 몸을 빼어 추화군(推火郡)으로 달아났고 한산주(漢山州)·우두주(牛頭州)·삽량주(?良州)와 패강진(浿江鎭)·북원경(北原京) 등의 여러 성은 헌창의 역모를 미리 알고 병력을 일으켜 스스로 지켰다.

(《三國史記》 10, 新羅本紀 10, 憲德王)

[헌덕왕(憲德王)] 17년 정월, 헌창의 아들 범문(梵文)이 고달산적(高達山賊) 수신(壽神) 등 백여 인과 함께 모반하여 도읍을 평양(平壤)에 세우고자 하여 북한산주(北漢山州)를 치매 도독 총명(聰明)이 군사를 이끌고 그를 잡아 죽였다.

(《三國史記》 10, 新羅本紀 10, 憲德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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