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프랑스사 2 - 13c 중앙 집권이 이루어지다.
1. 13c 왕령은 계속 확장되다 : 알비즈와 십자군 필립 2세 존엄왕의 왕령 확장 노력으로 카페왕조는 어느 정도 왕조라고 할 만큼의 형식은 잡아갔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카페왕조는 미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왕령의 관리를 위하여 바이이와 세네샬이 파견되었지만, 이들만으로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기에는 미약했으니까요. 13세기의 프랑스 왕권 강화는 당시 교황권의 전성기라는 점을 최대한 이용하여 <교회세력에게 빌붙은> 왕권강화책을 실시한 시기입니다. 당시 11, 12세기에는 교황권이 이단으로 규정한 많은 종교파들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파가 바로 알비즈와파(카다리파)와 왈도파 였습니다. 알비즈와파는 동방에서 들어온 마니교의 영향으로 철저한 금욕주의 사상을 내포한 크리스트교 교리를 확립한 종파였습니다. 이들은 영혼의 구원을 중시하면서 육체를 죄악시하는 철저한 금욕주의를 주장하였죠. 하지만, 이러한 알비즈와의 교리는 카톨릭 교회에서 강조하는 <성사>를 부정하였다는 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카톨릭은 알비즈와를 악마의 속삭임이라고 규탄하였습니다. 왈도파는 초기 교회인 그노시스파의 영향을 받은 <영지주의파>의 성격을 갖는 종파였습니다. 이들은 12세기에 유행하였는데, 교황권에 대하여 상당히 부정적인 교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이들은 구원이란 교회에서 단순한 복음을 전파하고 전파받는 과정에서 생기는 것으로 <성경>과 <믿음>이 교황권보다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또, 교회의 세속화와 성직자의 부패, 성직임명권을 통한 세속사회와 교회의 결탁 등을 부정하는 파였습니다. 따라서 교황의 입장에서 이들은 <구원받지 못할 망종들>로 보였던 것이지요. 교황권의 최고 절정기였던 13세기 <이노센트 13>는 <교황은 태양, 황제는 달>이라는 유명한 비유를 남길 정도로 절대적인 교황이었습니다. 이노센트는 알비즈와파를 소멸시키기 위한 <알비즈와 십자군>을 구성하였는데, 여기서 맹활약한 것이 바로 <카페왕조>였습니다. 카페왕조는 이 십자군에 참여함으로서 <이단처벌을 위한 십자군>뿐 아니라 남부 프랑스의 왕령을 확대하는 데 주력했던 것입니다. 즉, 예전 필립 2세 존엄왕이 영국의 존왕을 물리치고 북부 프랑스를 획득했다면, 알비즈와 십자군은 프로방스, 랑그독 등 남부 프랑스를 회복함으로서 프랑스 왕령의 비약적인 증가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이 십자군으로 인하여 프랑스 북부의 탈환(필립 2세) + 프랑스 남부의 획득(알비즈와 십자군)을 완성하여 프랑스 왕령이 <남북간 통일적인 완성>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2. 13세기 성왕 루이 9세는 윤리적 군주였다. : 기독교적 윤리의식 확립 이 13세기 프랑스 왕령 확대에 결정적 역할을 한 왕은 성왕이라 불리는 루이 9세입니다. 그는 가장 이상적인 중세적 군주라고 불립니다. <성왕>이라는 칭송을 받을 정도로 왕권에 대한 <정의감>이 남달랐습니다. 그는 왕권이라는 것을 <정의감>과 <기독교적 윤리의식>이라는 2가지 측면에 결부시켜 독특한 중세적 왕권사상을 실천한 왕입니다. 그는 왕령이 확대되면서 지방관인 바이이들이 잘못된 정치집행이 많아지자 지방 감찰관을 파견하는 한편, 왕령 외의 모든 지역 소송도 왕이 처리하기 시작합니다. 또 늘어나는 항소에 대하여 <고등법원>을 설치함으로서 프랑스 법적 질서의 근간이 되는 법원이 탄생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지나치게도 <기독교적 윤리의식>에 충실하였던 관계로 무리하게 십자군에 참가하였고, 그 결과 원정 중 포로가 되어 병사하게 됩니다. 4. 14세기 교황권의 그늘마저 벗어나다. : 아비뇽 유수와 관료제 정비 필립 4세의 시기는 이제 13세기를 벗어나 14세기로 나아가는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 유럽의 사회를 보면, 교황이 십자군 원정을 실패하면서 <교황권>, <기사권>이 약화되는 시점이었죠. 필립 4세는 이제 교황과의 제휴를 벗어던지고, 교황 및 기사들을 압박해가며 왕권 강화를 추구합니다. 이 시기가 바로 프랑스 중앙집권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는 시기입니다. 일단 그는 이후 절대왕정에서의 관료제, 상비군의 전신이 될 수 있는 제도적 정비를 단행합니다. 루이 9세가 만든 고등법원의 기능과 조직을 강화하고, 왕실재정 확보를 위한 <희계원 : 상브르 데 콩트>을 창설합니다. 그리고 <왕실평의회>를 국왕의 자문기구화 하여 왕권을 강화합니다. 왕권의 자문기구 및 재정권, 재판권의 왕권 귀속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영국의 경우와 비슷합니다.(영국중세사1-5편 참조) 영국에서 끊임없이 재정권, 재판권의 왕권 귀속문제로 <대헌장>기 및 그 이후까지 싸웠던 내용(9-13세기의 영국사)이 프랑스에서는 14세기에 정비되는 것이지요. 필립 4세는 관료제를 정비한 뒤 본격적으로 <교황권>에 도전하게 됩니다. 이 도전은 곧 유명한 <삼부회 사건>과 연결됩니다. 필립 4세는 <성직자도 국왕에게 세금을 내야 된다>는 원칙을 천명하면서, 교회세력에 도전하였습니다. 십자군 실패로 약화된 교황권을 누를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죠. 이를 위해 <성직자, 귀족, 평민대표>라는 3계급을 모아 회의를 창설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삼부회>입니다. 이중 <성직자>계급은 절대 세금을 낼수 없다며 항명하였고, 당시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는 필립 4세에게 항명하였습니다. 단, 이 당시 3부회는 전국민적 기구가 아닌 필립 4세를지지하는 프랑스 북부 대표들의 모임이었다는 점을 유의하셔야 합니다. 필립 4세는 프랑스 북부 국민들의 지지를 확보하는 한면, 교황을 압박해 나갔습니다. 이 때 필립 4세가 교황을 압박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이 <아나니 사건>입니다. 아나니는 로마 남쪽의 마을인데, 교황의 탄생지였습니다. 필립 4세가 교황의 양해없이 프랑스 내 교회에서 임시세를 부과하자, 교황은 <성직자에 대한 속인> <들으라 가장 사랑하는 아들들아> 라는 글을 남기고 교황권이 우위에 있음을 주장합니다. 왕이 3부회를 소집하여 국내 프랑스 인들의지지를 얻어내였습니다. 당시 필립 4세를 압박하려던 교황은 필립 4세가 쿠르토레 전투에서 패한 것을 빌미로, 칙서를 발동하여 왕을 압박합니다. 이 때 왕 측근인 기욤드 노가레가 교황을 아나니에서 습격하였습니다. 그리고 교황을 이단자로 고발하였지요. 하지만, 로마 시민들은 교황을 구출하였습니다. 이것이 아나니 사건입니다. 그러나 교황이 1년 뒤 병사하자 교황청 내 추기경단은 프랑스 필립 4세파와 로마 교황파로 분열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결과 1305년 선출된 교황 클레멘스 5세는 프랑스지지세력에 의해 교황이 되었고, 프랑스 왕의 간섭을 받아 로마가 아닌 프랑스 아비뇽에 거주하게 됩니다. 특히 클레멘스 6세는 아예 아비뇽에 교황청 궁전을 건조하였고, 이후 교황청의 주요 기능은 아비뇽에 잔류하게 됩니다. 이러한 교황의 프랑스 잔류 시기를 바빌론의 유수에 빗대어 <아비뇽의 유수 시대>라고 부릅니다. 이후 그레고리우스 11세 시대에 교화청이 로마에 복귀하였지만, 프랑스인파는 반발하여 교황 클레멘스 7세를 다시 선출하여 아비뇽에 교황청을 다시 엽니다. 이후 교황청은 다수의 교황이 존재하는 시기를 맞이하여 교회의 대분열이 일어나게 됩니다. 필립 4세는 이렇게 교황세력을 왕권에 복속시켜 가면서 왕권을 강화하였습니다. 특히 3부회를 연 것은 당시 성장하던 도시와 시민계급을 왕권에 끌어안게 됨으로서 강력한 국왕 지원세력을 얻게 된 결과를 낳습니다. 즉, 시민들은 국왕에게 세금을 지불하고, 국왕은 그 돈으로 시민을 지켜줄 강력한 <상비군>을 마련함으로서 국왕 - 도시의 제휴체제가 성립하게 된 것이죠. 이 제휴체제에서 공동의 적은 <교황권>, <장원의 영주권>이었던 것입니다. 시민세력이 왕권에 강력한 후원자가 됨으로서 이제 프랑스 사회는 중앙집권국가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국왕은 교황을 대신하여 신의 대리자임을 자처합니다. 교황이 <신의 대리자>였다면, 왕은 <왕권신수설>을 내세워 <왕은 신으로부터 권리를 위임받은 자>를 자처합니다. 즉, 교황에게 있었던 신성권을 왕으로 옮긴 것이지요. 이러한 왕권의 강력함은 곧, <로마법>을 통해 제도적으로 완성됩니다. 국왕은 시민에게 걷은 세금으로 강력한 <관료제>를 마련하여 로마법에 충실한 전문 관료군을 육성하였고, 이러한 관료제는 이후 프랑스 절대왕정의 근간으로 작용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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