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익의 삼한 정통론 주장

1. 이익의 삼한 정통론

동국의 역대 흥망은 대략 중국민족과 그 기원을 같이 한다. 단군은 중국 요임금과 같은 시기에 흥하였다. 주나라 무왕대에 이르러 기자가 와서 조선왕에 책봉되었다. 그 뜻한 무엇인가? 단군조선의 후예들이 점점 쇠퇴하여 미약하였고, 국가의 임금이 돌아오지 못하였으므로 기자가 와서 새롭게 문을 연 것이다. 여기에 8조의 교를 내리니 지금 전하는 바가 3개조이다. (중략)

무릇 문명의 개화는 실로 기자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후손들이 그 국가의 업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위만이 와서 간사함으로 준왕을 몰아내었다. 준왕은 오히려 군대를 이끌고 남으로 내려가 영토를 다시 넓히니, 준왕에게 복속한 나라가 50여국이었다. 이로서 동쪽 국가의 정통은 끊기지 않게 된 것이다. (중략)

(그 이후..)삼국(고구려, 백제, 신라)은 모두 동서로 나뉘어 있고, 그 정통이 무엇인지 모르게 되었다. 이에 마땅히 강목을 따져 보니, 남북조 시대의 선례를 따져보는 것이 좋겠다.(중국 남북조 시대에 정통이 없는 것처럼 삼한도 정통은 없는 것으로 하겠다는 뜻인 듯 합니다.) (중략)

지금 경주는 진한의 옛 터이며, 그 땅의 지계가 바르게 잡혀있다. 그 땅이 속되지 아니하며, 모자람이 없으니 이것이 어찌 어리석은 오랑캐의 풍속이란 말인가? 나는 이렇게 추론하여 말하겠다. 이것은 필시 기자가 와서 개화한 것의 영향이 큰 것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문헌에 증거가 있다면 내가 능히 밝힐 수 있다고 하였다. 또, 과거 문헌에 그것이 없다면 이것은 가히 추론하여 알아낼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 해석은 한문사료를 임의적으로 하다보니, 약간 맞지 않는 것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

2. 삼한 정통론의 사회적 배경

이익이 삼한정통론을 주장한 것은 당시 사회가 <중화의식>이라는 것을 놓고 치열하게 논쟁을 벌인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17세기 중국에서는 명이 망하고, 청 왕조가 들어섰게 되었습니다. 조선은 병자호란 등을 통해 청에게 굴복하면서 북벌론, 북학론 등 다양한 대청 대응방식을 보였고, <청>이란 왕조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를 놓고, 호락논쟁을 벌이기도 하였습니다.

이익은 이러한 시기에 <명>의 멸망으로, 중화적 전통은 중국에서 단절되었으며, 그 전통이 조선으로 이어졌다는 <소중화 의식>에 입각한 삼한 정통론을 주장하였습니다. 청이 중국의 지배권을 가진 이상 청의 중국 지배 자체는 인정하고, 청의 문화는 수용해야 하지만, 국가의 정통성 만큼은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에서 나온 것이지요. 이익이 말한 소중화 의식이란, 청을 유학체계로 보았을 때 오랑캐 국가로 보고 중화전통은 어디서 보존하고 있는가라는 의식에서 나온 것입니다.

3. 단군이 정통이고, 기자는 전통을 보조한 인물이다

위 사료를 보면 일단 기자조선의 전통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번 볼까요?

동국의 역대 흥망은 대략 중국민족과 그 기원을 같이 한다. 단군은 중국 요임금과 같은 시기에 흥하였다. 주나라 무왕대에 이르러 기자가 와서 조선왕에 책봉되었다. 그 뜻한 무엇인가? 단군조선의 후예들이 점점 쇠퇴하여 미약하였고, 국가의 임금이 돌아오지 못하였으므로 기자가 와서 새롭게 문을 연 것이다.

이 부분의 내용은 가자조선은 인정하지만, 기자가 조선의 개창시조라는 부분은 부정한 내용입니다. 즉, 기자는 문명의 상징일 뿐이지, 조선의 민족시조는 아닙니다. 결국 조선의 시조는 단군을 시작으로 합니다. 기자 이전에 이미 고조선은 중국 요임금과 같은 고도의 문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고조선의 기원을 중국 전설 시대인 <요, 순> 시대로 상정함으로서 우리의 기원이 중국의 기원보다 밀릴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익 이전의 정통론 중에는 사림의 유학적 학풍에 따라 <기자-삼한-삼국>의 정통설을 주장하여, 기자를 아주 높이 숭상하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익은 이 기자 전통보다는 <단군전통>을 강조하였고, 기자는 단군조선의 보조적 역할로 축소합니다.

4. 기자전통은 삼한으로 이어지다

무릇 문명의 개화는 실로 기자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후손들이 그 국가의 업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위만이 와서 간사함으로 준왕을 몰아내었다. 준왕은 오히려 군대를 이끌고 남으로 내려가 영토를 다시 넓히니, 준왕에게 복속한 나라가 50여국이었다. 이로서 동쪽 국가의 정통은 끊기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익은 위만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고조선의 전통은 단군과 그를 이은 기자가 이어갔기 때문에, 위만의 등장은 왕조찬탈로 간주한 것입니다. 따라서 국가를 빼앗긴 준왕이 남쪽에서 왕조를 개창하여 삼한을 이끌어 갔기 때문에, 조선의 전통은 단군 - 기자 - 삼한 으로 이어집니다.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자세히 적혀있습니다. 신채호는 신조선 - 불조선 - 말조선의 3조선이 <고조선>으로 존재하였으며, 말조선의 후예가 다른 2조선을 후에 받아들여 <신한 - 불한 - 말한>이라는 삼한을 형성하였다는 체계적인 논리를 변증법적으로 제시하였습니다. (이 사이트내에서 신채호를 검색하면 관련 기사를 여러 포스트 보실 수 있습니다.)

5. 삼국은 무통의 시대이다.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은 모두 동서로 나뉘어 있고, 그 정통이 무엇인지 모르게 되었다. 이에 마땅히 강목을 따져 보니, 남북조 시대의 선례를 따져보는 것이 좋겠다.

이익은 준왕이 남하하여 남부에서 왕조를 개창하였기 때문에, 삼한과 삼한을 이은 삼국에 정통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삼국 중 어느나라가 고조선의 정통인지는 알 수 없는 문제입니다. 모두가 단군의 후예이고, 모두가 단군의 핏줄입니다. 제왕운기에서 삼한 70여국이 모두 단군의 자손이라고 말하였듯이 이 문제에서 이익은 삼국의 어느 한 나라에 정통성을 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중국 위진남북조의 시대의 선례에 따라 각기 전통을 가진 나라가 병존하는 <무통>의 시대로 처리하였습니다.

6. 역사는 도덕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공자가 말하기를, 문헌에 증거가 있다면 내가 능히 밝힐 수 있다고 하였다. 또, 과거 문헌에 그것이 없다면 이것은 가히 추론하여 알아낼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익은 고조선의 계승의식과 민족의 전통의식을 주장하면서 우리 민족의 자주성의 폭을 상당히 넓혀놓았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익이 종래 사림 유학자들이 주장하던 <도덕사관>을 뛰어넘어 역사를 교훈으로 보지 않았다는데 있습니다.

그는 소중화 의식은 단순히 명이 망하고 오랑캐 왕조가 들어섰으니, <조선>이 중화의 전통을 물려받은 <소중화>이다는 차원이 아니고, 화이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관점도 아닙니다. 그는 유교적 명분론이 무리한 북벌론과 지배층의 보수화를 가져왔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산림세력을 대표하는 송시열의 주자학 이념에 학문적으로 반기를 든 사람입니다. 송시열의 유학이 명분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라면, 이익의 유학은 명분을 현실에 이용하는 유학입니다.

그가 소중화를 주장한 것은 중화사상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청나라라는 거대 국가의 탄생에 대하여 국가적 자존을 지키기 위해 <소중화 의식>이라는 유교 이념을 채용하여 실리를 챙기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실제, 그는 농업부분 등에 있어서 한전법 등 실학적인 개혁의지를 가진 실학자였죠.

그는 교훈으로서의 역사가 세상을 지배하지 않는다고 보고, 교훈보다는 운수(행, 불행)이, 운수보다는 시세(권력)이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힘이라고 말합니다. 명분과 교훈은 권력을 가진 자가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이용하는 이데올로기적 수단이 불과한 것이라는 획기적이고, 사회적 이슈가 될 사상을 말한 것입니다.

위 지문에서 문헌에 없는 것도 추론하면 알 수 있다고 말한 것도 그러한 사상의 연장일 것입니다. 굳이 사실만을 밝히여 그 시대의 상황에 대해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 역사가 아니라, 문헌에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 당시 세력과 상황을 추론하여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서양의 역사학자 콜링우드가 말한 재현이나, 역사학에서 말하는 보간, 삽입 같은 개념이라고 할까요? 콜링우드는 역사가가 과거인의 사상에 직접 개입하여 역사적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조선 시대 이익의 사상에서도 이러한 추론적 역사학을 논했다는 것은, 역사를 보는 관점이 좀더 다양화되고, 개방화되었다는 것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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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