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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편집글) 발해의 건국과정

이 글이 인용된 원문 : http://www.koguryo.org/(사단법인 고구려 연구회 사이트)
  이 글은 고구려 연구회 사이트에 있는 발해사 부분을 편집하여 다시 게재한 것입니다.

668년 평양에서 고구려 보장왕 당나라에 항복 -그러나 압록강 이북은 절반 이상 항복하지 않고 항거 시작

보장왕이 항복한 668년 당시 압록강 이북은 절반 이상의 행정구역이 계속 항복하지 않고 투쟁을 계속하였다.(자료: 삼국사기 지리지)

1. 당나라가 장악한 성 - 14개(성은 현재의 시나 군 같은 고구려의 행정단위임)

1) 당나라가 정복한 성(3개) - 혈성, 은성, 사성

2) 평양이 함락되자 항복한 성(11개)

- 양암성, 목저성, 수구성, 남소성, 감물주성, 능전 곡성, 심악성, 국내성, 설부루성, 후악성, 자목성










국내성

2. 당나라가 장악하지 못한 성 - 18개

1) 항복하지 않고 계속 대항한 성(11개) - 북부여성, 절성, 풍부성, 신성, 도성, 대두산 성, 요동성, 옥성, 백석성,
       다벌악주, 안시성

2) 항복하지 않고 당나라에 항거하여 도망한 성(7개) - 연성, 면악성, 아악성, 취악성, 적리성, 목은성, 이산성

 
 
백석(암)성 1
백석(암)성 1

9년 동안 고구려의 저항이 거세지고 전쟁은 계속된다

한편 남쪽에서는 신라와 고구려 백제의 연합군이 저항

669(2) 2월 보장왕의 서자 고안승이 4000여 호(약 2만 명)를 거느리고 산라로 망명

670년(3) 3월 - 1만명의 정병으로 구성된 고구려와 신라 연합군이 압록강을 건너가서 옥 골

                     (또는 개돈양)에서 당나라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6월 검모잠이 고안승을 왕으로 삼고 고구려 재건(당나라 고간 군대와 싸워 패함)

671(4) 당나라 장군 고간(高侃)이 안시성을 치다.

672(5) 당나라 고간의 군사와 고구려 군사가 백빙산에서 크게 싸웠다. 이때 신라가 군사를 보내 고구려를 도왔으나 실패    673(6) 호로아(瓠瀘荷) 전투 - 당나라 장군 이근행(李謹行)과 싸움 - 실패한 군사 신라로 망명

676(9) 평양에 있는 안동도호부를 요동성(현재 중국 요령성 요양)으로 철수



보장왕이 돌아와 다시 통치한다 - 소고구려


677(10)

2월 안동도호부를 다시 신성(현재 중국 요령성 무순)으로 옮김 보장왕을 요동도독 조선왕으로 봉해 신성으로 가 고구려인들을 무마해 다스리게 함. 이 때 당나라로 잡혀간 고구려 백성들도 함께 돌아온다. 보장왕은 흩어진 백성들을 모으고 말갈 등 소수 종족들을 규합하여 당나라를 치기 위 해 열심히 국력을 키웠다. 이 때를 [소고구려]라고 한다.

 
681(13)

보장왕은 4년간 고구려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끝까지 노력했으나 이 계획이 사전 에 누설되어 좌절되고 만다. 다시 당나라로 잡혀가 공주로 귀양을 간다.

 
682(14) 보장왕 서거
686(18)

당나라는 보장왕의 손자 고보원을 조선군왕으로 봉하고 698년에는 좌응양위(左鷹 揚衛)대장군으로 진수시켜 충성국왕으로 봉해 안동도호부의 옛주민(舊戶)을 맡겨 통치(統攝) 하려 하였으나 끝내 실행하지 못했다.(구당서 고려전) 이 때 발해가 태동하기 시작한다.

보장왕이 귀국해 고구려 재건을 꾀한 신성

(요령성 무순시에 있는 고이산성)

대조영이 고구려 계루부에서 진(振)나라를 세운다

(후에 발해로 고친다)


* 진(振)은 진(震)이라고도 한다. 진은 주역에 황제가 동방에서 나왔다는 진괘(震掛)에서 유래되었다(稻葉岩吉)


696년(28)

거란인 이진충이 영주(지금의 조양)도독을 살해하고 당나라에게 반기를 들었다. 영주로 강제이주 당한 고구려의 대조영과 말갈출신 걸사비우도 이진충을 도와 당 나 라와 싸워 고구려의 독립을 꾀함. 갑작스런 돌궐의 등장으로 이진충이 패하고 말 갈 출신 걸사비우 사망.

 
698년(30)

당나라 추격부대를 격멸시킨 대조영이 고구려 계루부 옛땅에서 고구려 사람들을 모 아 진(振)이라는 나라를 세움

 

699년(31)

(당나라는) 또 보장왕의 아들 고덕무를 안동도독에 제수하여 본번(本蕃)을 통솔하게 하였다. 이때부터 안동(도호부)에 있는 고구려의 옛 주민이 점차 줄어들어 돌궐, 말갈 등으로 흩어지자 고씨의 군장은 마침내 끊기고 만다.(구당서 고려전) - 이때 말갈 땅으로 간 고구려인들은 바로 발해에 흡수된 것이다.

 
713년 (발해 건국 후 16년) 나라이름을 [발해]로 바꿈



동모산: 현재 길림성 돈화시에 있는 성산자산성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1. 이 글은 인터넷에 게재되어 오픈된 학술자료들을 출처를 밝히고 인용한 것입니다.
   2.
이 글이 인용된 원문 : http://www.koguryo.org/(사단법인 고구려 연구회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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