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인용글) 발해의 5경 천도과정

 발해의 五京 천도과정
 

신 형 식 (이화여대 교수, 고구려연구회 학술자문위원)

발해는 존속기간 229년간(698∼926)에 서울을 여러 번 옮겼다. 수도의 빈번한 이동은 강력한 국가행정 수행에 있어서 막대한 지장(정치적 공백)을 가져올 수도 있으며, 반대로 토착세력의 기반을 억제시켜 효과적인 왕권강화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다만, 발해를 구성하는 여러 이민족과 그 문화적 전통을 배려한 구체적 타협은 결국 국가적 구심력을 잃게 되었다. 그러나 발해의 천도배경에는 정치·군사·외교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하였으며, 고구려·백제의 경우와 달리 사전계획이나 수도보완시설의 고려 없이 추진한 결과 허약한 방어시설(산성)로 인한 수도 기능의 한계 로 문제점을 노출시켰다. 더구나 절대왕권을 지지하는 재지세력(在地勢力)의 부재로 정치적 불안은 가중되 었다. 무엇보다도 방위성(산성)이 철저하지 못한 것을 평지성으로 보완하기 위해 광대한 외성(外城)을 축조 해 이를 극복하려 했으나, 그것은 외형적인 조치에 불과하였다. 첫 번째 천도는 제3대 문왕 때(742년) 중경 현덕부로 옮긴 것이다. 고조(대조영)과 무왕(대무예)이 어느 정도 국가체제를 정비하였기 때문에 문왕은 무치시대(武治時代)를 벗어나려고 했던 것이었다. 동시에 토착 의 백산 말갈부에 대한 강력한 통제와 해란강 유역의 경제개발은 문치시대를 뒷받침해 줄 수 있기 때문이 다. 두 번째는 755년 상경 용천부로 옮긴 것이다. 문왕은 중경에서 어느 정도 정치적 안정과 문치정치의 기틀 을 확립하였다. 한편 흑수말갈을 제압해야 했고 안록산의 난 이후 만주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중국과 관계 를 멀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다음으로 상경 일대는 넓은 목단강 평야의 경제적 가능성도 크게 작용하였 을 것이다. 세 번째는 상경에서 30년만에 동경 용원부로 옮긴 것이다. 이것은 신라와의 정치 군사적 대치상황과 일 본과의 원활한 교섭을 위한 조치로 생각된다. 네 번째는 동경에서 다시 상경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성왕이 들어서면서(794) 장기집권을 한 문왕 이후 새로운 통치질서 확립이 필요했다. 기대했던 일본과의 정치 경제적 이익도 수준이하였기 때문에 서울이 귀 퉁이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794년 두 번째로 상경으로 천도한 뒤 발해가 멸망한 926년까지 발해의 중심수 도가 되었다.


발해의 수도이전 과정

서 울
위 치
기 간
동모산
돈 화
698∼(10)
구국시대
구 국
영 승
?∼742
중 경
서고성
742∼755
중경시대
상 경
발해진
755∼785
1차 상경
동 경
혼 춘
785∼794
동경시대
상 경
발해진
794∼926
2차 상경

이 글이 인용된 원문 : http://www.koguryo.org/(사단법인 고구려 연구회 사이트)

<http://historia.tistory.com 역사전문블로그 히스토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