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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발해 멸망의 원인은?

발해멸망 원인
 


金 恩 國(중앙대 강사)

10세기에 들어 발해를 통치한 왕은 제15대 마지막 왕 대인선(大 )이었다. 발해의 멸망은 그가 재위에 오른 지 20여 년 뒤의 일이다. 발해 멸망을 살필 수 있는 기록은 현재 {요사(遼史)} 뿐이다. {遼史} 야율우지전(耶律羽之傳)에 "거란 태조가 그 갈린 마음을 틈타 움직이니 싸우지 않고 이겼다 (先帝因彼離心 乘 而動 故不戰而克 )" 라는 기록이 유일하다 하겠다.

현재까지 발해 멸망에 대한 연구는 이 기록과 함께 진행되었다. 곧 발해는 대인선 통치시기에 내분에 의해 우왕좌왕하던 중, 거란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고 허무하게 멸망하였다는 것이다. 이른바 '발해 내분에 의한 자멸'설은 현재까지도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발해 내분설을 뒷받침할 근거는 전혀 없다. 내분설 자체가 추론일 뿐이다. 내분설의 유력한 근거로는 {고려사(高麗史)} 등에 등장하는 '발해 유민 의 고려 망명'이 그것인데, 고려 태조 8년(925년) 이후 각계 각층 발해민의 망명, 특히 고관과 무관직의 주요 인물들이 대거 망명한 기사가 보인다. 곧 발해 멸 망 직전에 발해 지도층 내부에 분열이 일어나, 민심이 이반된 가운데, 일부가 고 려로 망명하는데, 이 틈을 이용한 거란의 기습적이고도 대대적인 공세에 결국 발 해가 멸망하였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발해인의 고려 망명은 고려 태조 때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고려 예 종대인 12세기까지 근 2백여 년에 걸쳐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또 {요사}라는 사료의 성격 또한 전쟁에서 승리자 중심의 전승물임을 상기하여야 할 것이다. 발해는 전쟁에서 지고 또 기록에서 또 한번 진 것이다. 이러한 내분설 위주의 발해멸망 시각은 최근 방송매체의 전파를 타고 백두 산 화산폭발설과 연결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 설의 진앙지인 일본에서도 이미 부정적 견해가 나왔는데도, 우리 는 이 설을 재활용하고 있음은 아이러니컬하다. 폭발에 대한 기록이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고, 발해 상경용천부 일대에 광범위하게 사용된 용암들이란 폭발 시 점이 역사시기 이전임을 분명히 말해주는 것이다.

이밖에도 발해 멸망에 대해서는 많은 견해가 있지만, 대부분이 위에 든 {遼 史}의 기록에 의거하여 발해 내분설을 보강하고 있다. 따라서 발해 멸망의 모든 책임은 발해인 특히, 발해지도층, 그 중에서도 마지막 왕인 대인선에게 귀결되곤 한다. 이처럼 발해말기 사회의 부패, 나약, 내분 등 부정적 요소로 '발해멸망=내 분' 이라고 이해되어 왔던 것이다.

발해 멸망은 이제 다른 각도에서 보아야 할 때이다. 즉 빈약한 사료에서나마 발해인을 중심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에 따르면 마지막 왕 대인선은 거란이 세력을 확장할 시기, 활발한 대외 외교를 전개하였음을 볼 수 있다 한반도 내의 신라, 고려 등은 물론 중원, 일본 등과 교류를 하였으며, 특히 거란과도 사신교류 를 하였음을 볼 수 있다. 특히 신라를 포함한 여러 나라와 결원(結援)을 맺었다 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거란의 공세를 대비한 나름대로의 대비책을 강구하였음 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10세기 동아시아는 공교롭게 혼란 시기에 놓여 있어, 발해의 이 러한 요청에 부응할만한 국가가 없었다. 발해는 말기까지 전통적인 방어체제를 구축하여 놓았다는 것을 유적의 존재 와 발굴을 통해서 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란의 대규모 공세 앞에 무 너졌던 것은, 바로 거란이 발해의 전통적인 군사력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상 정할 수 있겠다.

따라서 거란으로서는 발해의 영토의 서쪽에 위치한 요동의 공략에 주력을 한 다. 요동이라는 곳은 당시 동북아시아 요충지에 해당되는 곳으로, 그 전략적 중 요성은 오늘까지도 빛을 발하는 곳이다. 사료({요동행부지(遼東行部志)})에서도 요동에 대하여, 거란이 발해와 수십 년간 혈전(血戰)을 치루고서야 겨우 차지하였 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전략적 교두보를 확보하였으므로 거란은 발해공략을 쉽게 전개할 있었던 것이다.

이상의 언급을 토대로, 발해의 멸망 원인을 다음과 같이 정리 할 수 있겠다. 곧 발해 말기의 어떤 내분이나 혼란만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점이다. 내분설의 근거는 추론 이상의 어떤 의미도 없다. 이제는 발해를 중심으로 보는 발해멸망관 이 필요할 때이다. 이는 발해 말기까지 지속적으로 유지되어 온 전통적인 방비체 제에서 찾을 수 있다. 또 마지막 왕 대인선은 거란의 압박에 대하여 대내외적인 조치를 강구하였으며, 다만 주변 국가가 발해의 원조 요청에 부응할 수 없었던 것이 한계였다고 본다.

아울러 이제는 다각적인 발해 멸망에 대한 인식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는 발 해의 왕계가 단절된 이후 발해전역에서 전개되는 유민부흥운동의 조명이 부각되 기 위해서도 그러하다.

이 글이 인용된 원문 : http://www.koguryo.org/(사단법인 고구려 연구회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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