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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신라 하대로 접어들면서 신라가 무너져가다 - 96 각간의 난

96각간의 난
  "신라가 점차 귀족연립사회로 접어들면서 친왕파와 반왕파의 치열한 대립으로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었다."

                                                                                                                                               
   신라중대의 전제 왕권이 무너지는 시기적 상황에서 일어난 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라 중대의 강력한 왕권은 신문왕과 성덕왕을 거치면서 절정에 이르게 되었는데요. 신문왕 때 실시한 관료전과 성덕왕 대의 정전제도 등 일련의 조치들은 귀족들의 강한 반발을 사게 됩니다. 경덕왕 대에는 결국 강력한 왕권을 추구하는 왕과 귀족집단과의 타협접을 찾게 됩니다. 경덕왕 대의 한화정책도 그런 측면이 가미되어 있고, 녹읍이 부활된 것도 그러한 시대 상황과 연관이 있습니다.

   문제는 이후 혜공왕대의 상황입니다. 점차 왕권이 약해지는 상황속에서 친왕파와 반왕파의 대립이 있게되는데, 이 것이 96각간의 난의 시작입니다. 먼저 혜공왕 4년에 대공의 난(각간의 난)이 발생하는데, 이것은. 기록에 따라 사건의 연도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8세기 후반부터 신라에서는 국왕을 정점으로 한 집권적인 지배체제가 서서히 무너지면서 귀족연립적인 성격으로 복귀하고 있었고, 이것은 혜공왕대에 집중적으로 일어난 정변을 통하여 결정적인 계기가 마련된 것입니다.

   정치적인 안정기를 누린 경덕왕대와는 달리 아들인 혜공왕은 즉위과정에서부터 귀족들의 반발이 있었던 듯합니다. 일단, 8세라는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태후가 대리 섭정을 하였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또한 혜공왕은 장성한 후에도 무절제하여 기강이 해이해지고 귀족들간의 권력다툼이 끊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혜공왕의 즉위 후 곧바로 일길찬의 직위에 있던 대공이 그 아우 아찬 직위의 대렴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33일간 왕궁을 에워싸고 공방을 벌였으나, 결국 진압되어 9족이 죽음을 당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를 시작으로 왕경을 비롯한 전국의 96각간이 서로 싸우는 전란이 일어났구요.

  이 전란은 당(唐)에까지 알려져 중국측 기록에는 3년을 끌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삼국유사〉에는 대공이 각간으로 되어 있다. 이 과정에서 남산신성 안에 있던 장창이 불탔고 패배한 귀족들의 재산 가운데 사량·모량 등지에 있었던 것을 왕궁으로 실어날랐다고 하며, 전란은 석 달 만에 진정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상을 받은 자가 많았고 죽임을 당한 자도 헤아릴 수 없었다고 합니다. 전란은 겨우 진정되었으나 이후 빈발한 왕위계승전으로 결국 혜공왕은 재위 16년 만에 김지정(金志貞)과 김양상(金良相)·김경신(金敬信)의 세력다툼 과정에서 살해당했답니다.

   혜공왕 16년 김지정의 난이 발생하였습니다. 김지정의 목적은 왕권 탈취로서 혜공왕과 왕비를 죽이고 잠시 국가의 주도권을 잡았으나, 상대등 김양상(선덕왕)과 이찬 김경신(원성왕)의 반격으로 죽고 맙니다. 이것을 기준으로 신라 사회를 중대 - 하대로 나누게 됩니다. 상대등 김양상이 왕이 되면서 김경신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고, 이것은 곧 상대등 자체가 왕권을 계승할 수 있는 세력화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음 상대등 김경신이 왕이 되면서 신라 하대의 특징은 상대등계열과 왕계열이 분화되어 상대등이라는 명칭 자체가 왕권을 계승할 수 있는 세력화가 되었다는 엄청난 의미를 지니지요. 즉 골품제가 족 내부에서는 분화를 이루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김양상의 왕위 등극은 결국 신라 사회 자체가 하나의 변동기를 맞이하고 있으며, 이후 치열한 왕권 다툼의 불씨를 마련했다는 의미를 지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