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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고려사절요에서 국왕과 관련된 부분만 발췌하여 운영자가 재편집한 글입니다. 고려사절요가 <신진사대부>의 입장에서 고려 건국을 정당화하면서 만들어진 만큼, 조선 초기의 고려 인식이 눈에 확 띕니다. 태조는 <도량이 깊다>라는 표현부터 우왕을 신돈의 씨앗인 <신우>라고 표현한 부분, 공민왕이 갈수록 음란해졌다 등등의 표현이 눈에 들어오네요. 이 글은 예약포스팅으로 작성되었습니다. ---------------------------------------------- 태조 신성대왕 휘(諱)는 건(建)이며, 자(子)는 약천(若天)이요, 성은 왕씨(王氏)이다. 한주(漢州) 송악군(松嶽郡) 사람으로 금성태수(金城太守) 융(隆)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한씨(韓氏)이다. 당(唐) 나라 희종(僖宗) 건부(乾符) 4년, 신라 헌강왕(憲康王) 3년 정유(877) 정월 14일 병술에 태조를 송악 남쪽 사제(私第)에서 낳으니, 신비한 광채와 자줏빛 기운이 종일토록 방 안에 비치고 뜰에 가득히 서리고 둘러 있었는데 형상이 마치 교룡(蛟龍)과 같았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용모는 용안(龍顔)과 일각(日角)이며 턱이 풍만하고 이마가 넓었다. 기우(氣宇)와 도량이 크고 깊었으며, 목소리가 우렁차고 컸으며, 너그럽고 후하여 세상을 구제할 도량이 있었다. 왕위에 있은 지는 26년이고, 수(壽)는 67세였다. 혜종 의공대왕 휘(諱)는 무(武)요, 자(字)는 승건(承乾)이니, 태조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吳氏)이며, 후량(後梁) 건화(乾化) 2년 임신(912)에 태어났다. 오씨가 일찍이 용이 품속에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얼마 안 가서 태조가 나주(羅州)를 지키러 나갔을 때 오씨를 보고 사랑하여 드디어 아기를 배게 되었다. 나서 성장하자, 도량이 넓고 지혜와 용기가 뛰어나서 태조를 따라 후백제를 정벌하는 데 공이 있었다. 왕위에 있은 지는 2년이요, 수(壽)는 34세였다. 정종 문명대왕 휘(諱)는 요(堯)요, 자(字)는 의천(義天)이니, 태조의 둘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신명왕후(神明王后) 유씨(劉氏)이며, 태조 6년 계미(923)에 태어났다. 천성이 불교를 좋아하고 두려움이 많았으며 도참(圖讖)을 믿었다. 왕위에 있은 지는 4년이요, 수(壽)는 27세였다. 광종 경성대왕 휘는 소(昭)요, 자는 일화(日華)이니, 정종의 동모제(同母弟)로 태조 8년 을유(925)에 태어났다. 신하에게 예를 갖추어 대우하고 송사를 처리하는 데 현명하였으며, 빈민을 구휼하고 유학을 중히 여기며, 밤낮으로 부지런하여 거의 태평의 정치를 이루었는데, 중세 이후로는 참소를 믿어 사람을 많이 죽이고, 불법(佛法)을 지나치게 좋아하며 절도가 없이 사치스러웠다. 왕위에 있은 지는 26년이요, 수(壽)는 51세였다. 경종 헌화대왕 휘(諱)는 주(?)요, 자(字)는 장민(長民)이니, 광종(光宗)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대목황후(大穆皇后) 황보씨(皇甫氏)이며, 광종 6년 을묘(955) 9월 정사일에 났다. 성품이 온량(溫良)하고 인후(仁厚)하며 놀이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말년에 와서는 정사를 게을리하여 날마다 오락을 일삼고 음악과 여색에 빠지며 바둑 두기를 좋아하고, 소인을 가까이하고 군자를 멀리하니 이로 말미암아 정치와 교화가 쇠퇴하였다. 왕위에 있은 지는 6년이요, 수(壽)는 27세였다. 성종 문의대왕 휘는 치(治)요, 자는 온고(溫古)이니, 태조의 일곱째 아들인 욱(旭)의 둘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선의왕후(宣義王后) 유씨(柳氏)이며, 광종(光宗) 11년 경신(960) 12월 신묘일에 났다. 타고난 자품이 엄정(嚴正)하며 기품이 너그럽고 넓었다. 법과 제도를 제정하고 절의를 숭상촵장려하며, 어진이를 구하고 백성을 사랑하여 정치가 볼 만한 것이 있었다. 왕위에 있은 지는 16년이요, 수(壽)는 38세였다. 목종 선양대왕 휘(諱)는 송(誦)이고, 자(字)는 효신(孝伸)이며, 경종(景宗)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헌애왕후(獻哀王后) 황보씨(皇甫氏)이다. 경종 5년 경진(980) 5월 임술일에 났다. 성종이 궁중에서 기르다가, 스승에게 나아가 학문을 배우자 내서랑(內書郞) 김승조(金承祚)에게 명하여 시독(侍讀)하게 하였다. 성품이 침착하고 굳세며 어려서는 임금의 도량이 있었으나,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하고 술을 즐기며 사냥을 좋아하여 정사에 마음을 두지 않으며, 폐행(嬖倖)을 믿고 친압(親狎)하다가 화를 당하였다. 왕위에 있은 지는 12년이며, 수(壽)는 30세였다. 현종 원문대왕 휘(諱)는 순(詢)이며, 자(字)는 안세(安世)요, 안종(安宗) 욱(郁)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효숙왕후(孝肅王后) 황보씨(皇甫氏)이며, 성종(成宗) 11년 임진년(992) 7월 1일 임진에 났다. 천성이 총명하고 어질었으며, 학문에 통달하고 문필을 잘하였다. 처음에 머리를 깎고 숭교사(崇敎寺)에 우거하였는데 그 절의 중이 일찍이 꿈을 꾸기를, 큰 별이 절 뜰에 떨어져서 용으로 변하였다가 또 사람으로 변하니 곧 왕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왕을 기이하게 여기는 이가 많았다. 신혈사(神穴寺)로 옮겨 거처하였는데, 또 꿈에 닭소리와 다듬잇소리를 듣고 술사(術士)에게 물으니 방언(方言 우리말)으로 해석하기를, “닭의 울음 소리는 '꼬끼오’라는 소리와 비슷하다는 말이요, 다듬잇소리는 어근당(御近當)이니, 이는 즉위할 징조입니다." 하였다. 왕위에 있은 지는 22년이요, 수(壽)는 40세였다. 덕종 경강대왕 휘는 흠(欽)이고 자는 원량(元良)이며, 현종(顯宗)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원성태후(元成太后) 김씨이며, 현종 7년 병진 5월 을사일에 태어났다. 성품이 과단성 있게 결단하여 지조가 있었다. 왕위에 있은 지는 3년이요, 수는 19세였다. 휘는 형(亨)이고 자는 신조(申炤)이니, 덕종의 동모제(同母弟)로 현종 9년 무오 7월 무인일에 태어났다.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너그럽고 마음이 넓으며 영특하고 슬기롭고 과단성이 있었으며, 작은 절개에 구애하지 않았다. 왕위에 있는 지 12년이요, 수는 32세였다. 문종 인효대왕 휘는 휘(徽)요, 자는 촉유(燭幽)다. 그 전의 휘는 서(緖)이다. 현종의 셋째 아들이고 어머니는 원혜태후(元惠太后) 김씨이니, 현종 10년 기미 12월 계미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현철하였으며, 자라서는 학문을 좋아하고 활을 잘 쏘았으며 포부가 넓고 원대하였으며, 너그럽고 어질어서 남을 포용하였고 모든 정사를 한번 처결한 것은 기억하여 다시는 잊지 않았다. 왕위에 있은 지는 37년이요, 수는 65세였다 선종 사효대왕 휘(諱)는 운(運)이며, 자(字)는 계천(繼天)인데, 처음에는 휘를 증(蒸) 또는 기(祁)라고 하였다. 순종(順宗)의 동복 동생으로서 문종(文宗) 3년 기축 9월 경자일에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슬기로웠으며, 성장해서 효도촵공경촵공손촵검소하고 식견과 도량이 넓으며, 경사를 박람하였고 제술을 더욱 잘하였다. 왕위에 11년 동안 있었고 수는 46세였다. 헌종 공상대왕 휘는 욱(昱)이고, 선종의 원자(元子)이다. 생모는 사숙태후(思肅太后) 이씨이며, 선종 원년 갑자 6월 을미일에 출생하였다. 성품이 총명하고 슬기로워서 9세에 서화를 좋아하였으며, 보고 들은 것은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다. 왕위에 1년 동안 있었으며 수(壽)는 14세였다. 숙종 명효대왕 휘는 옹(?)이며, 자는 천상(天常)인데, 처음 휘는 희(熙)였다. 선종(宣宗)의 동복 아우로서, 문종(文宗) 8년 갑오 7월 기축일에 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슬기로웠으며, 자라서는 효도하고 공경하며,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웅걸스럽고 굳세어 과단성이 있고, 오경촵제자서(諸子書)와 사서를 해박하게 열람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문종이 사랑하여 항상 말하기를, “뒷날에 왕실을 부흥시킬 자는 바로 너다." 하였다. 선종 9년에 대가(大駕)를 호종하여 서경(西京)에 갔는데, 그가 머물던 막차(幕次) 위에 자기(紫氣)가 날아오르니, 망기(望氣)하는 사람이 왕자(王者)의 상서라 하였다. 왕위에 있은 지는 10년이었고, 수(壽)는 52세였다. 예종 문효대왕 휘(諱)는 우(?)요, 자는 세민(世民)이니 숙종의 태자이다. 어머니는 명의태후(明懿太后) 유(柳)씨인데, 문종(文宗) 33년 기미년 정월 정축일에 낳았다. 깊고 침착하여 도량이 있었으며, 평소 유학(儒學)을 좋아하였다. 왕위에 있은 지 17년이며 수(壽)는 45세였다. 인종 공효대왕 휘(諱)는 해(楷)이며, 자는 인표(仁表)이고, 고휘는 구(構)이다. 예종의 장자로 어머니는 순덕왕후(順德王后) 이씨(李氏)이며, 예종 4년 기축 10월 을해일에 태어났다. 성품이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너그럽고 자비로웠다. 학문을 좋아하고 재주가 많으며, 스승과 벗을 대할때는 예를 잃지 않았다. 재위 24년이며, 수는 38세였다. 의종 장효대왕 휘(諱)는 현(晛)이며, 자는 일승(日升)이요, 구휘는 철(徹)이니, 인종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공예태후(恭睿太后) 임(任)씨인데, 인종 5년 정미 4월 경오일에 출생하였다. 성질이 놀이와 잔치를 좋아하였고, 여러 소인들과 친압하여 마침내 화란을 당하였다. 24년간 왕위에 있었고, 수는 47세이었다. 명종 광효대왕 휘는 호(晧), 자는 지단(之旦), 구휘(舊諱)는 흔(昕)이니, 의종(毅宗)의 동복 아우이다. 인종(仁宗) 9년인 신해년 10월 경진일에 출생하였다. 성질이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문학(文學)을 좋아하였다. 처음에 익양후(翼陽侯)로 봉해졌더니, 정중부(鄭仲夫)가 의종을 폐위하고 그를 맞아들여 왕으로 세웠다. 마음이 부드럽고 약하여 결단성이 없으므로, 정권이 아랫사람 손에 있었다. 최충헌(崔忠獻)에 의해 폐위되었다. 재위 27년이고 수명은 72세였다. 신종 정효대왕 휘(諱)는 탁(晫)이니, 그전 휘는 민(旼)이요, 자(字)는 지화(至華)이다. 명종의 동모제(同母弟)이다. 인종 22년 갑자 7월 경신일에 태어났다. 장성하여 평량공(平?公)으로 책봉되었는데, 최충헌이 명종을 폐하고 그를 맞아 왕으로 세웠다. 왕위에 있은 지는 7년이요, 수(壽)는 61세였다. 희종 성효대왕 휘(諱)는 영(?)이요, 자(字)는 불피(不陂)이다. 전 휘는 덕(悳)이며, 신종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정선태후(靖宣太后) 김씨이다. 명종 11년 신축 5월 계미일에 태어났다. 신종 3년에 태자로 책봉되고, 7년 정월에 유명(遺命)을 받아 왕위에 올랐다. 후에 최충헌에게 폐위 되었다. 왕위에 있은 지 7년이요, 수(壽)는 57세였다. 강종 원효대왕 휘(諱)는 오(?)요, 자(字)는 대화(大華)이며, 또 자를 법주(法柱)라고 하였다. 명종의 태자이다. 어머니는 광정태후(光靖太后) 김씨(金氏)이다. 의종 6년 임신 4월 을사일에 태어났다. 최충헌이 명종을 폐위하고 태자를 강화(江華)로 내쫓았는데 희종이 불러 돌아오게 하여 한남공(漢南公)으로 책봉하였다. 충헌이 희종을 폐위하고 왕을 받들어 즉위하게 하였다. 왕위에 있은 지는 2년이요, 수(壽)는 62세였다. 고종 안효대왕 휘는 철(?)이요, 자는 대명(大明)이며, 또 자를 천우(天祐)라고도 하였다. 그전 휘는 진(瞋)인데 또 질(?)로 고쳤다. 강종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원덕태후(元德太后) 유씨(柳氏)이다. 명종 22년 임자 정월 임술일에 태어났다. 강종 2년 8월에 유조(遺詔)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원(元) 나라에서 충헌왕(忠憲王)이라 추시(追諡)하였다. 재위 44년이요, 수는 68세이었다. 원종 순효대왕 휘는 식(植)이요, 자는 일신(日新)이며, 그 전의 휘는 전(?)이니, 고종의 장자이고, 어머니는 안혜태후(安惠太后) 유씨(柳氏)이다. 고종 6년 기묘 3월 을유일에 나서 장성하자 태자로 봉하였다. 46년에 몽고에 들어가 조회하고 다음 해에 환국하여 즉위하였다. 뒤에 원나라에서 충경왕(忠敬王)이라 시호하였다. 재위 15년이요, 수(壽)는 56세였다. 충렬왕 휘는 거(?)요, 처음 휘는 심(諶)이다. 원종의 장자이며 어머니는 순경태후(順敬太后) 김씨(金氏)인데, 고종 23년 2월 계축일에 탄생하였다. 천성이 관후하여 희노를 나타내지 않았으며, 어렸을 때에 오로지 학문에 뜻을 두고 글을 읽어 대의(大義)를 알았다. 그러나 연락에 빠지고 여러 소인들을 친근히 하였으며, 부자간에 사이가 좋지 않았다. 재위 34 년이요, 수는 73세였다. 충선왕 휘(諱)는 장(璋)이고, 자(字)는 중앙(仲?)이며, 고휘는 원(?)이고, 몽고의 휘는 익지례보화(益智禮普化)이다. 충렬왕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이다. 충렬왕 원년인 을해년 9월 정유일에 출생하였다. 성품이 총명하고 굳세며 결단력이 있었다. 이로운 것을 일으키고 폐단을 제가하여 시정에 그런대로 볼 만한 것이 있었으나 부자 사이는 실로 부끄러원 일이 많았다. 오랫동안 상국에 있었는데, 스스로 귀양가는 욕을 당하였다. 왕위에 있은 지 5년이며, 수는 51세였다. 충숙왕 휘(諱)는 도(燾)요, 어릴 때 이름은 의효(宜孝)이며, 몽고식 휘는 아라눌특실리(阿刺訥?失里)이다. 충선왕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몽고 여자인 야속진(也速眞)으로 의비(懿妃)로 추증(追贈)하였다. 충렬왕 20년 갑오 7월 을묘일에 출생하였다. 성질이 엄격하며 굳세고, 침착하며 무게가 있고, 총명하고 고결하였다. 제술(製述)을 잘하였으며, 예서(隷書)를 잘 썼다. 재위가 전후 25년이고 수(壽)는 46세였다. 충혜왕 휘(諱)는 정(禎)이요, 몽고식 이름은 보탑실리(普塔失里)이다. 충숙왕(忠肅王)의 큰아들이며, 어머니는 명덕태후(明德太后) 홍씨(洪氏)이다. 충숙왕 2년 정월 을묘일에 출생하였다. 성품이 호협하여 말타고 활쏘는 것을 좋아하였고, 재리(財利)에 밝으며 황음무도(荒淫無度)하여, 여러 소인들이 뜻을 얻고, 충직한 신하들은 배척을 당하였다. 바른말만 하면 반드시 베어 죽이므로 사람들이 처벌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과감하게 말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재위연수는 전후 6년이고, 수(壽)는 30이다. 충목왕 휘(諱)는 흔(昕)이며, 몽고명[蒙古諱]은 팔사마타아지(八思麻朶兒只)이다. 충혜왕의 장자이며, 어머니는 덕녕공주(德寧公主)이다. 충숙왕 6년 정축 4월 을유일에 출생하였다. 천성이 총명하였다. 재위 4년, 수(壽)는 12세였다. 충정왕 휘(諱)는 저(?)요, 몽고 휘는 미사감타아지(迷思監朶兒只)이다. 충혜왕(忠惠王)의 서자이니, 어머니는 희비(禧妃) 윤씨(尹氏)이다. 충숙왕(忠肅王) 7년 무인에 출생하였다. 재위 3년, 수는 15세였다. 공민왕 휘(諱)는 전(?)이요, 옛 휘는 기(祺)이고, 몽고 휘는 백안첩목아(伯顔帖木兒)이다. 충혜왕의 동모제(同母弟)이다. 충숙왕 17년 경오 5월에 출생하였다. 성품이 엄격촵중후하고 또한 자애로우며 어질어 여러 백성의 인심을 많이 얻었으나, 만년에 이르러서는 시기심이 많고 음란하여 화를 당하는 데에 이르렀다. 재위 24년, 수(壽)는 45세였다. 신우 어렸을 때의 이름은 모니노(牟尼奴)인데, 신돈(辛旽)의 비첩(婢妾) 반야(般若) 소생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반야가 낳은 아이는 죽고 다른 아이를 훔쳐다 길렀는데, 공민왕이 자기 아들이라고 일컬었다."고 하였다. 왕이 훙(薨)하니 이인임(李仁任)이 세워서 임금으로 삼았는데, 공양왕(恭讓王)이 즉위하자 그를 죽였다. 참람하게 왕위를 차지한 기간이 14년이다. 공양왕 휘(諱)는 요(瑤)이며 신종(神宗)의 7대손이다. 일찍이 정창부원군(定昌府院君)에 책봉되었는데, 기사년 11월에 우리 태조가 심덕부촵정몽주 등과 계책을 세워 왕으로 세웠다. 재위 4년이다. 임신년 7월에 왕위를 사양하고 원주(原州)에 있었는데 간성군 공양군(杆城郡恭讓君)으로 강봉되었다가 후에 왕으로 추봉되었다. - 고려사절요, 각 권에서 국왕에 관련된 서지문만 발췌하여 편집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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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가 좋은 것이 많군요. 이 글 퍼가겠습니다. ^^;
원나라의 통치를 받았던 충선왕~충정왕대 까지의 글을 읽어보니,몽고는 왜 고려를 부마국으로 삼았을까? 라고 생각된다. 몽고의 역사에서 이것은 사상 유례가 없는 파격(?) 이었다. 몽고는 모두 알다시피 징기스칸(成吉思汗)이 전 몽고의 제 부족을 통일하고 전 세계를 정복한 대제국 이었다. 세계를 정목하며 학살을 자행 하였고 인류가 남긴 문화유적을 파괴 하였다. 호라즘 왕국을 공격했을때 몽고군은 그 나라의 수도를 완전히 초토화 시켰다. 高麗(918~1392,34世 475年)도 몽고의 전화를 피할수 없어서 거의 40여년에 걸쳐 대몽투쟁을 벌여 나갔으나 결국,몽고 즉,원나라의 속국이 되고 말았다. 원나라가 마음만 먹었다면 고려를 멸망 시킬수도 있었다. 하지만 몽고의 황제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고려의 왕자들에게 자신들의 딸을 주어 부마(왕 또는 황제의 사위)로 삼았다.
원이 고려를 직접 지배하지 않았던 것은 첫번째 몽골 고유의 통치방식상의 체제가 고려에 적합하지 않았던 부분이 있었고, 두번째 몽골 쿠빌라이칸과 고려와의 특수한 관계설정 때문인 면이 있었습니다. 그 외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그 부분은 나중에 고려 대외관계사 포스팅 할 때 자세히 할 예정입니다.
당나라의 역사서인 신당서(新唐書)에 보면 열전(列專)이 잇다. 그런데 그 신당서의 열전 138권에 보면,이 정기(李 正己)라는 인물이 있다. 그리고 열전 138권에 분명히 이렇게 적고있다. {李 正己, 高麗人...} 이라고 여기서 고려라함은 고구려의 준말이다. 그런데 중국 당나라의 역사서에 분명히 이렇게 적고 열전도 있는데 왜,현존 우리 한국의 역사 교과서에는 그 이름이 나오지 않는가? 신당서의 기록을 신뢰하지 못해서? 천만의 말씀이다. 신당서는 기존의 구당서(舊唐書)보다 기록이 더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이 정기는 지금의 산동지방에 제나라(齊)를 세워 그 위세가 대단 하였다. 나도 신당서를 대충 훝어 봤는데(100% 한문 이라서 대충 봤지만...어느 정도는 해석이 가능 하더라) 정말 놀라운 사실이 그 기록속에 있더라. 이 정기는 40세의 아까운 나이에 죽음을 맞았는데 당나라의 황제와 신하들이 이 정기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3일 주야로 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당날라의 황와 신하들이 이 정기에 대해 얼마나 심적인 압박과 골머리를 앓게 했으면 이리했을까? 이 정기는 당시,혼란한 당나라의 여러 절도사(또는 번진) 중에서도 세력이 가장 강대한 절도사였다. 그가 다스리던 치청지역(현,산동성과 그 주변 지역)은 삼국통일을 달성한 신라보다 더 큰 나라였다. 통일신라가 130,000 평방 km인데 반해 치청국(제나라)은 180,000만 평방 km였다. 그리고 인구도 5,000,000만에 달했다고 한다. 당시,당나라의 인구는 40,000,000만 정도였다. 우리는 장 보고란 인물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전해 들엇다. 그런데 그 장 보고는 잘 알면서 이 정기란 인물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뜻이 있는 자들은 (한문을 어느정도 알고 있어야 함) 신당서 권 138의 이 정기 열전을 한번 보시라. 우리는 일제강점기시대, 쪽바리 일본 놈들이 조작한 역사를 지금껏 배우고 그렇게 알고있다. 식민사관이 그것인 것이다. 그리고 고조선, 고구려, 신라, 백제, 고려는 모두 다 대륙에서 건국 되었다라고 생각한다. 나는 역사 교과서를 신뢰하지 않는다. 지금의 경북 경주에 가보라. 그곳에 가면 왕릉과 신라의 궁궐터가 있다고 하던데,왕릉은 그렇다치고,신라의 궁궐터가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가서보니 주춧돌이 남아 있던데 그것이 왕궁의 주춧돌인지,커다란 어느 호족 집의 주춧돌인지 도모지 알 수가 없더라. 끝.
글에 주장하는 요점이 무엇인지, 말하고자 하는 부분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서 답변을 드릴 수가 없네요. 너무 감정적인 글이라서 글의 의도를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댓글의 요점을 알기 쉽게 정리해 주시기를.... 글에서 주장하는 내용에 대한 정확한 근거가 없고, 질문의 요점도 흐려서 무슨 말인지 파악하기 힘들군요.
저도 역사교과서를 신뢰하는 편은 아니지만, 이 글은 아예 요점이 없어서 교과서보다 더 신뢰할 수 없군요. 내용을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무슨 주장을 하는지가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요점만 말하자면,이 정기란 인물을 왜 역사 교과서에서 다루지 않느냐 이것 입니다. 분명히 고려인(고구려인) 이라고 기록해 있는데 말입니다. 뭐,재야학자들 뿐만 아니라 여러 학자분들도 신당서와 구당서를 보았을 겁니다.
그리고 또 하나 있습니다. 중국 남북조 시대의 역사서인 南齊書(남제서)와 梁書(양서)에 보면,중국의 대혼란기인 5호 16국 시대를 통일하고 화북을 장악한 北魏(북위)가 백제와 10년간에 걸친 전쟁을 벌였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백제가 한반도에 있었다면 이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갑니다. 백제는 수군을 동원해 북위와 전쟁을 벌였을까요? 그런데 백제가 수군을 동원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중국의 역사들은 자국에 유리하지 않으면 그 사건을 축소하거나 없애 버리는 속성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즉,춘추필법에 의거해 역사를 기록했다는 거죠. 하지만,이 백제와 북위의 전쟁은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해 놓았더군요. 이런점을 보면,이 백제와 북위의 전쟁이 대단히 중요 하다는 것이라고 봐야죠.
또,삼국사기(三國史記)에 보면 말갈이란 단어가 특히 많이 나옵니다. 백제의 초대왕인 온조왕은 이 말갈족의 공격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고 합니다. 백제가 한반도에 있었다면 <말갈>이란 기록은 나오지 않았을 겁니다. 한반도 백제위에는 고구려가 버티고 잇엇으니까요. 그러면 말갈이 고구려를 거쳐서 한반도의 백제를 공격 했다는 말이 되는데...??? 말갈이란 단어는 백제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신라의 기록에서도 나옵니다.
교육과정에 백제의 요서 정벌이 기록되기에는 아직 풀어야할 숙제가 많습니다. 백제의 요서 정벌을 학자들이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기록에 대한 확실한 신빙성과 추가 자료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로, 남조에서 적은 백제의 요서 정벌에 대한 글은 중국 북조사서에는 나오지 않고, 남조측의 기록도 백제의 요서정벌에 촛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백제가 북조를 괴롭혔다는 점을 부각시켜서 북조의 무능함을 질타하는 식의 글입니다.
백제가 요서를 정벌했다는 기록외에는 유물이나 기타 증거자료가 부족하여 논의만 있고, 실제 역사는 없는 실정입니다.
또 지리적인 면이나, 당시 역사 상황으로 볼 때 백제의 요서 경영론은 잘못 기술하면 질타당할 위험이 크게 작용합니다.
또, 백제의 요서 정벌에 대하여 학자들 가운데에서는 은주 시대 이후 남은 동이족 일파와 한반도 세력과의 연계로도 보는 학자가 있지만, 역시 가설입니다.
현재 산둥지방의 무씨사당이나, 백제의 요서 경영 등 해결되지 않는 역사적 문제들이 많습니다.
수십, 수백개의 역사적 사실들을 기록조차 없는 상황에서 감정적으로, 또는 민족적으로 몰아 붙여서 사실로 만들어 버린다면 그 자체가 중국의 동북공정을 도와주는 꼴이 됩니다.
중국이 한반도를 중국사에 편입시키려고 할 때, 가장 크게 펼치는 논리가 바로 <중국 중화지역과 동이족간의 영토, 문화적 유사성>이니까요.
우리가 우리 역사를 중국 대륙으로 확장시킬 때, 감정적으로 대응하면, 그것이 곧 중국이 의도하는 바가 될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성적으로 대응해야 합니다.
중국에서는 백제의 요서 정벌을 기반으로 백제마저 자국의 영토로 편입시키려는 움직임이 이미 50년전부터 있었습니다.
어제판 동아일보인가.... 어제 신문만 해도 중국 50년전 교과서에서 한반도를 자신의 영토로 규정한 내용의 글이 실려있습니다.
중국은 백제의 요서 경영을 우리가 근거없이 서툴게 인정할 경우, 고구려 뿐 아니라 백제에 대한 고구려 소수민족 정권론을 주장하려는 움직임을 보일 것이라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실제 최근 중국학계에서는 백제를 중국의 소수 지방 정권으로 보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합니다. 그 근거중에 백제의 요서 정벌론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부분의 자료를 구하면 블로그에 포스팅 해봐야 겠네요.)
백제와 신라가 북방에 있었다면, 그걸 기정사실로 놓고 역사를 전개해보세요.
단, 중국측, 우리측 모든 사서에 나온 기록들을 모두 하나하나 짚어서 오류를 수정하셔야 할 것입니다.
1가지 역사적 사실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수천가지 역사적 기록들을 모두 뒤짚어 엎으시려면 그만한 증거와, 역사전개 논리를 제공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감정적인 역사논리밖에 되지 않습니다.
좋은글,정말 감사 합니다. 글을 읽어버니 제 역사인식에 대한 소견이 좁은것을 알았습니다. 아무래도 역사를 전공하는 전문인이 아니기 때문에.....그리고 역사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게 가져야 겠군요.
그리고 역시 역사란,유물을 통해서야만 그것이 실존 한다는 것이죠. 유물외에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겠습니까. 아무런 증거없이 기록한 것만 보고 백제가 중국본토에 있었다느니,고구려가 중국의 양자강까지 세력을 확장 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너무 성급하지 않았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쪼록 좋은글 많이 올려 주시고 좋은 가르침 부탁 드립니다. 저도 궁금한 점이 있으면 계속 글을 올려 보겠습니다.
여기서 제가 말씁 드리고자 하는것은,우리 젊은이들(저도 나이가 그리 많지는 않지만)의 歷史에 대한 인식 입니다. 정말 이 문제는 정말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 됩니다. 가령 예를 들자면,대학생들에게 조선의 12대 왕(11대 中宗의 아들인 仁宗)이 누구냐-하고 물으면 절반이 모른다고 말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역사를 어렵다고들 말합니다(그런데 저는 더 흥미가 생기는 걸요). 그건 저도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기본적인 것은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알고 있는 후배중에 강원도 강원대학교(江原大學校)를 나온 애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놈이 얼마나 한심한지 자기가 나온 학교의 漢字를 모르고 있더군요. 저의 고향이 강원도 원주이기 때문에 강원대가 어디에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강원대에 가면 학교 간판에 한자로 <江原大學校>라고 적혀 있습니다. 물론,이건 극소수에 불과 하겠죠.
요즘,학교나 일반학원 같은 경우는 영어, 국어, 수학을 중요시(물론,영,수, 국어도 중요 하지만) 했지,역사를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더군요.오로지 입시를 위한 공부 뿐입니다.
역사를 잃어버린 민족은 그 민족의 얼을 빼앗긴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과거,淸나라(1616~1911)를 세운 女眞族이나, 세계를 정복한 몽골족의 元나라(1206~1368)가 어떠 했습니까. 지금은 완전히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몽골의 경우 외몽골 제외). 바로 민족의 얼을 빼았겼기 때문 입니다.
제가 두서없이 글을 올린것 같은데,이 점 양해 바랍니다.
참고로 저는 역사전문가가 아니라 그냥 일반인입니다. 직장인이구요.
그리고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으신 거 절대 나쁜 거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많은 역사적 지식을 가지신 거 같고, 관심도 높으신거 같네요.
문제는 제가 한국사쪽에 관심이 적어서 올리신 글에 대한 적절한 답변을 해드리지 못했다는 점인 것 같군요.
좋은 글 있으시거나, 관심있는 글 알려주시면 한국사쪽도 틈틈히 포스팅 해보겠습니다.
아,그리고 하나 빠뜨린 점이 있습니다. 재약 역사 학자인 이 중재(李 重載)씨의 저서인 <새 高麗史>라는 책을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해 이 책을 대출받아 읽어 본적이 있습니다. 이 책을 읽어보니 뭐랄까.....너무 황당 하다고나 할까요? 처음에는 웬 정신나간 놈이 이런 책을 냈나하고 생각 되더군요. 그 책에 보면,왕 건(王 建) 이라는 인물이 등장해 지금의 중국 四川省에 前蜀(907~925) 이라는 왕조를 세웁니다. 그런데, 이러한 왕 건을 高麗의 太祖인 왕 건이라고 설명 하면서 전촉이 925년에 망하자 중국 대륙에 고려를 건국 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지도까지 곁들이고 있더군요. 전촉을 세운 왕 건과 고려의 태조 왕 건은 이름과 한자만 같았지,완전히 다른 인물 입니다. 하여튼,목 읽어 보셨으면 적극 추천 합니다. 그리고 발해가 지금의 만주가 아닌,중국의 북부 즉,중원(中原)에 존재하고 있다라고 적고 있더군요(지도도 있습니다). 새 고려사의 저자인 이 중재씨의 노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이건 정말 너무 황당 하더군요. 저도 우리나라의 삼국(三國)이 대륙에 존재햇다라는 것을 믿고 있는 사람중의 한 사람 입니다. 그런 데 이 책은 좀...허허허...
전촉의 왕건은 이후 후촉 왕조의 맹씨 집안에 의해 계승된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고려의 사천성 건국설은 그 논의에 대해서 앞뒤 맥락이 너무 맞지 않는 것 같군요. 전 이책 읽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습니다.
<고려는,남쪽은 요해로 막히고 서쪽은 요수와 맞닿았고 북쪽은 옛 거란땅과 연속되고 동쪽은 금나라와 맞닿았고 또 일본, 유구, 담라, 흑수, 모인등의 나라와 견아상제(犬牙相制-개 이빨처럼 서로 맞물려 있다)의 모양으로 되어있다.
오직 신라와 백제가 스스로 그 국경을 견고히 하지 못하여 고려 사람들에게 합병되니,지금의 나주도(羅州道)와 광주도(廣州道)가 그것이다. 그 나라는 경사(京師-남송의 서울 卞京,지금의 하남성 開封市)의 동북쪽에 있는데,연산도(燕山道)로부터 육로로 가다가 요수(遼水)를 건너 동쪽으로 그 나라 국경에 이르기까지 무릇 3천 7백 90리이다.
만약 바닷길로라면,하북(河北), 경동(京東), 회남(淮南), 양절(兩浙), 광남(廣南), 복건(福建)에서 모두 갈 수 있는데,지금의 세워진 나라는 바로 등주(登州), 래주(萊州), 빈주(濱州), 체주에서 서로 바라다 보인다. ...(中略)...옛적에는 봉경이 동서는 2천여리, 남북은 1천 5백여리 였는데 지금은 신라(통일신라)와 백제(견훤이 세운 후백제)를 합병하여 동북쪽은 조금 넓어졌지만,그 서북쪽은 거란과 연속 되었다. 옛적에는 대요(大遼)와 경계를 했었는데,뒤에 요나라의 침벌을 받게되메,래원성(來遠城)을 쌓아 요새로 삼았다.>
이것은 본 사이트에 있는 고려도경(高麗圖經)의 봉경편(封境篇)에 있는 내용 입니다. 중요한 것만 가려서 발췌 했는데,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 여러 가지 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우선,가장 중요한것이 일본,유구, 담라, 흑수, 모인등의 나라와 개 이빨처럼 서로 맞물려 있다라는 내용과 고려라는 나라가 지금의 개봉시 북쪽에 있다라는 내용 입니다. 그리고 고려의 봉경(영토)이 남북으로는 좁고 동서가 넓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한반도는 남북이 길고 동서가 좁은 지형 입니다. 고려도경을 저술한 서 긍이 착오를 한것일까요? 하지만 이 고려도경 이라는 책은 당시의 황제인 휘종(徽宗-재위,1101~1125)에게 올려진 책입니다.
또,등주, 체주, 래주, 빈주에서 서로 바라다 보인다라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것에 대해 설명해 주실수 있는지요?
고려도경에 재미있는 글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고려도경은 아직까지 논의를 불러일으키는 정도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저도 고려도경 번역본 재미있게 읽었던 경험이 있긴 합니다. 특히 이 부분이요. 요즘은 민족문화연구회에서 제대로 번역한 번역본이 있으니, 그 사이트 들어가시면 인터넷에 떠도는 해적판보다 훨씬 객관적으로 번역된 고려도경 보실수 있을 거에요.
그런데, 고려도경에서 주의해야 할 점이 몇가지 있습니다.
첫번째는 서긍이 고려에 머문 것은 약 1달에, 실제 사신역할외에 고려 사회를 돌아다닌 기간은 약 1주일 남짓하다는 점입니다.
즉, 고려도경에 대한 내용 중 중요한 부분들이 이전 기록들에 의거해 작성되었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겠네요.
따라서 고려도경에서 항해일지에 해당하는 해도기록은 충분히 공감이 가지만, 실제 40권에 이르는 모든 글들이 순수한 창작이라고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또, 서긍이 고려를 기술한 관점도 중화주의적 관점에서 송나라의 전통적 조공, 책봉 관계를 중시하는 관점에서 씌였습니다. 솔직히 고려도경은 고려의 민족사를 연구하는 것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고려인의 자주성이나 진취성 부분을 찾을 때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실제, 고려인을 비하하는 말이 많이 나오는 것도 사실입니다.
지금 인용하신 글은 고려도경을 인용하신 것인데, 사실 이런 류의 글은 고려도경 뿐 아니라 여러 문건에 나옵니다. 특히 이민족 왕조가 쓴 요사, 금사에 고려의 위치가 <남북보다 동서가 긴 위치였다>라는 내용이 종종 나온다고 합니다. 물론 정사인 송사에도 그런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재야사학자들 중에서는 이러한 여러 문건을 종합하여 고려도경에 나오는 고려의 위치가 알려진 고려와의 위치와는 다른 곳이라고 주장합니다.
저 역시 의문을 많이 가지고 있긴 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른 곳이라는 곳이 확실하지 않으며, 오히려 사료에 나와있는 내용이 알려진 고려의 위치에 더욱 부합하다는 점입니다.
중국 남송의 개봉부에서 동북으로 올라갔을 때, 적합한 해도가 고려의 위치가 맞다는 해석도 나왔고, 북의 거란, 동의 금나라, 남의 일본도 맞습니다. 위에서 개봉시 북쪽이라고 해석하셨는데, 한문 원사료에는 개봉시 동북쪽이라고 나와있습니다. 남송의 동북쪽은 고려가 맞습니다.
단, 문제가 되는 것은 해도의 집결지와 거리상의 문제입니다. 남송에서 고려로 가기 까지 너무 먼 거리를 설정하였다는 점과 고려를 동서가 긴 나라로 표현한 점입니다.
해도 문제는 관련 논문에 관심이 없어서 모르겠고,
고려가 동서로 긴 나라라는 점은 삼국통일 후 대동강과 평양유역까지만 차지한 고려의 영토를 비하하여 표현한 내용이라는 글은 읽어본 적이 있는 것 같네요. 관련 내용에 대해 전문성이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고려도경에 대한 내용은 중화사상에 너무 치우쳐 있어서 많이 인용을 안하는 듯 싶습니다. 영토에 관련된 부분때문에 종종 인용하는 듯 싶은데, 제가 고려사부분에 거의 문외한이라서 제대로 된 답변을 드릴 수가 없네요.
(제 사이트를 보면 아시겠지만 고려사부분의 포스팅이 거의 없습니다. 관심분야가 아니라서요.)
제대로된 답변을 해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참고로,서 긍은 선화(宣和-송나라 휘종의 연호) 연간에 고려의 사신으로 직접가서 고려도경(원래는,선화봉사 고려도경 宣和封使 高麗圖經)을 저술 했다고 합니다.
가만히 읽어보니 백제의 요서경영설에 대해 한마디하죠. 물론,유물이나 확실한 증거가 필요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 사실이 남조의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다라는 겁니다. 남조의 사관(史官)들이 없는 사실을 기록해 놓았을까요? 남제서와 양서는 중국 25사(史)에 들어가는 권위있는 역사서 입니다. 이건 감정적인 역사논리가 아닙니다. 저는 그 기록이 있다라는 사실 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우리나라의 학자들이 이 기록들을 역사교과서에 올려 보십시오. 한마디로 기존의 역사적 사실들을 완전히 뒤집는 엄청난 사태가 일어날 것입니다. 물론,이 정기에 대한 사실을 왜 역사 교과서에 올리지 않느냐라는 사실은 조금 감정이 앞선것은 사실 입니다. 하지만,우리나라 사람들이 중국에 가서 중국땅을 파헤치고고 유물을 발견해 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 기록이 존재하고 있다라는 사실이 중요 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 당연히 의문점이 생기는건 당연 하다고 봅니다. 중국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 입니까. 자기에게 불리한 역사적 사실은 아예 삭제하거나 축소해서 기록해 놓는 사람들 입니다. 아니면 자국에 유리하게 기록해 놓는 것이죠.
백제의 요서 경영설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신경준의 동국문헌비고중 여지고에 제시된 글에 백제가 요서를 정복했다는 구체적 기사가 나오는데, 이것을 한국학자인 신채호, 정인보, 김상기, 김철준 등이 의문을 제기하였습니다.
즉, 백제 요서경영설은 이미 일제 침략기 전부터 시작하여 한국사학계에서 <사학의 거두>라는 사람들에 의해 끊임없이 제기된 알려진 논쟁입니다.
교과서에 실리지 못한 것은 이들이 식민사관의 영향에 찌들어서가 아니라, 올리고 싶어도 논의를 불러일으키는 이외에는 구체적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개정되는 2010년 국사교과서에서도 재야사학의 여러 논의들이 교과서에 실릴 수 있었지만, 사회적 합의를 본 것이 적어서 올리지 못하였습니다.
반면 백제 요서 점령론에 대한 부정적 입장은 한진서의 해동역사에서 비롯되는데, 이것은 일본인 연구자들이 주로 주장하는 입장입니다.
그 근거는, 첫째 백제가 요서지방을 점유한 진나라 말기에 모용씨가 이미 요서를 점령하고 있었다는 중국 정사들의 구체적 사건 기록들이 있었고, 당시 중국과 백제의 세력 관계상 수긍하기 어렵다는 입장때문이였습니다.
최근에는 수정론이 제기 되었습니다. 이것은 요서지방을 영유한 것은 맞으나, 그 주체가 백제 세력과 연관된 낙랑이나 동이세력이였다는 주장입니다.
각 주장이 서로 여러 가지 사료와 주장 내용을 가지고 팽팽하게 대립하는 관계로 구체적 규명이 어럽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는 단순한 증거 자료의 문제를 벗어나서, 고조선 멸망 이후 유민들이 어떤 형태로 집결하여 어디에 모였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가 필요합니다.
또 고조선 멸망 후 요서, 요동 유민들이 백제, 고구려와 어떤 관계였는지가 중요하며, 요서, 요동의 세력들이 어떤 동향을 가지고 장기적으로 활동하였는지에 대한 규정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규명이 이루어진 후에 역사적 사료들과 대조하여 백제의 요서지방 경영론에 대한 실마리를 풀어야합니다. 따라서 아직은 이 부분에 대한 논의가 충분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중국 25사를 말 그대로 인용하는 것도 문제지만, 기록을 무시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이후리님의 주장도 충분이 공감이 갑니다. 백제가 요서를 정벌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아직는 논의정도의 수준이라, 실제 정벌했다거나, 정벌했을 것이라는 가설을 기정화하면서 논의를 전개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아서 슬픈 역사입니다.
우리민족은 정말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소위,5천년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하던데,실제로는 7,8천년은 될겁니다. 그리고 외침(外侵)도 수없이 당한 민족이 우리민족 입니다. 하지만,우리민족 즉,우리들의 조상들께서는 이러한 국난을 슬기롭게 극복해 이땅을 우리 후손들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의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요즘 보면,얼짱이니,몸짱이니 하면서 외모에만 관심이 있는 모양인데,이 모두가 다 허황된 겁니다. 물론,모두 그렇지는 않습니다. 개 중에는 올바른 청년들도 있죠. 소수의 사람들이 그러는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요즘 TV를 보면,사극(史劇)이 거의 안방을 점령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대조영)이나 (연개소문)을 보면 저래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문득 스치고 지나 갑니다. 대조영의 경우,발해의 건국자(高王)인 대 조영의 일대기를 사극으로 극화 했는데 그 중에 <동명천제단>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이것은 있지도 않은 허구 입니다. 물론,극의 전개상 어쩔수가 없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 합니다. 하지만,모르는 사람들은 이를 사실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연개소문도 마찬가지 입니다. 연 남생은 연 개소문의 장남 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을 두고 벌써부터 나라의 환란을 가져올 아이라고 탤런트인 이 세은씨가 말하는 것을두고 웃음밖에 나오지 않더군요. 연 남생은 그렇게 무능한 사람은 아닙니다. 무능한 사람이 어찌 연 개소문의 뒤를 이어 대막리지의 자리에 올랐겠습니까.
그렇다고 제가 연 남생을 두둔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연 남생은 비록 그 아우인 연 남건과 연 남산의 정변으로 당나라에 항복 했지만 그 사람도 고구려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노력을 했겠지요. 하지만 그는 지금까지 매국노라고 욕을 듣고 있는 인물 입니다. 외세인 당나라(唐,618~907, 20代 290年)를 끌어 들였기 때문이죠.
신라(新羅, BC 57~AD 935, 56代 992年)도 마찬가지 입니다. 신라는 진흥왕(眞興王) 시대에 비로소 국력이 일취월장해지기 시작 합니다. 하지만 고구려와 백제의 세력에 막혀 어쩔수 없이 외세인 당나라를 끌어들여 백제(660년)를 무너뜨리고 이어 당나라와 함께 고구려를 협공해 결국 동북아시아의 강자(强者)인 고구려를 무너뜨리는데 성공 합니다. 하지만 신라는 지금의 대동강 이남만을 통치했을뿐,대동강 이북은 모조리 당나라의 땅이 되었습니다.
뒤이어 발해(渤海, 668~926,15대 229年)가 만주에서 일어나 일시적으로 이땅을 되찾는데 성공 합니다. 북에는 발해,남에는 신라, 이렇게 우리민족은 남북국 시대(南北國時代)를 겪게 됩니다. 통일신라라는 용어는 최근에 들어 잘못된 용어라고 점차적으로 수정되어 가는 편이라고 들었습니다. 발해를 우리민족이 세운 역사라고 인정 한다는 것이죠.
하지만 발해멸망후,만주지역은 우리만족의 영역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맙니다. 발해의 뒤를 이어 新왕조가 들어섰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지만 역사는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대신,발해유민들의 요나라에 대한 끈질긴 저항이 이어 집니다. 정안국(定安國), 후발해국(後渤國), 흥요국(興遼國), 대발해국(大渤海國)등의 나라들이 일어서서 요나라에 대한 투쟁을 이어 갑니다. 그러나 이들 나라들은 오래가지 못했죠. 정안국만이 십수년을 버텼을뿐, 다른 <정부>들은 맥없이 요나라와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 의해 맥없이 멸망 되었죠.
요나라의 태조인 야율 아보기는 서방을 평정한뒤 926년 1월에 발해의 주요 요충지중의 하나인 부여부를 공격해 이를 3일만에 점령하고 곧바로 발해의 국도인 상경 용천부를 포위,발해의 마지막 왕인 대 인선의 항복을 받아들여 발해를 멸망 시켰습니다. 어떤 이들은 발해가 멸망되기전,정권쟁탈전으로 인해 발해의 국력이 쇠퇴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추축일 뿐입니다.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요동지방(遼東地方)을 요나라(936년에 거란에서 요나라로 국명을 바꿈)에게 빼았겼기 때문 입니다. 즉,발해는 멸망힉전,20년 가까이 거란과 전쟁을 벌였다는 것이죠. 결국 전쟁에서 패배한 발해는 주요전략상의 요충지 중의 오충지인 요동지방을 적국에게 빼앗김으로써 멸망 햇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당시 발해가 멸망할 당시의 국제정세 입니다. 중국에서는 907년에 세계제국임을 자랑하던 당나라가 멸망해 혼란기인 오대십국시대(五代十國時代,907~960)가 전개되고 있었고,한반도 에서는 신라가 왕위쟁탈전으로 세력이 약화돼 후삼국시대(後三國時代,892~936)로 접어들어 혼란기에 있었습니다. 만약,중국에서 통일왕조가 있었다면 요나라가 섣불리 발해와 전쟁을 치루지 못했겠죠. 한마디로 발해는 이웃국가들의 지원을 받지못한 상황에서 외교적으로 고립 되었고 결국 요나라와의 전쟁에서 패배해 멸망한 것입니다.
거란족의 요나라는 중국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이리되자 배후에 버티고 있는 발해가 눈의 가시였을 겁니다. 요나라의 태조는 발해를 멸망 시키자 그 아우인 야율 배(耶律 倍)를 수장으로 임명해 그 땅에 동단국(東丹國-동쪽의 거란국 이라는 뜻)을 둡니다.
고려는 936년에야 후삼국을 통일하고 북으로 영토를 확장해 압록강까지 이릅니다. 하지만 더 이상은 북진하지 못합니다. 북에는 강대한 세력을 자랑하는 요나라가 버티고 있었으니 말이죠. 요나라는 발해를 멸하는데 성공하자 마음놓고 중국을 공략해 후진(後晉, 936~946)을 세운 석 경당(石 敬塘)을 지원해 나라를 세우게 만들죠. 석 경당은 나라를 세우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요나라에 대해 신하라 자청하고 연운 16주(連雲 16州)를 갖다 바칩니다. 하지만 후진은 요나라에게 멸망 당하고 맙니다. 오늘은 이만....끝.
우리나라의 역사만큼 중요한 나라가 있습니다. 바로 이웃 나라인 중국 입니다. 중국은 우리나라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나라임은 다 알고 계시겠죠? 불교(佛敎)가 중국을 통해서 들어왔고..등..등...우리나라에 이루 헤아릴수 없이 많은 영향을 끼친 나라가 중국 입니다. 중국은 동북공정(東北工程)으로 인해 남의 나라 역사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 시키려는 음모를 행하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중국의 역사를 무시해서는 안된다고 생각 합니다. 그리고 이 글을 보면서 모르시는 분들이 있으면 좋은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 입니다. 미력하나마 중국의 역사를 간략하게 올립니다.
중국왕조의 시초는 3대 왕조(代-夏,殷,周--하왕조는 유적이 발굴되지 않음으로써 실존왕조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부터 시작 됩니다. 그 이전에는 제요(帝堯), 제순(帝舜) 이라는 태평성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신화에 가까운 시대 입니다. 진정한 중국의 왕조의 시발(始發)은 3대 왕조라고 봐야죠. 사마 천의 사기(史記) 하본기(夏本記)에 의하면 하나라의 시조 우왕은 기원전 2070년에 왕조를 개국했으며 멸망은 17대 왕인 걸왕(桀王)때에 멸망 합니다. 그 뒤를 이어 은나라가 시작됐는데,은나라는 하나라와는 달리, 20세기에 들어와 은허(殷墟)에서 유적이 발굴됨으로써 실존왕조로 인정 받았습니다. 은왕조는 기원전 1600~1046년까지 계속 되다가 폭군인 주왕시대에 周나라의 개국한 무왕(武王)에게 멸망합니다.
주(周)나라는 기원전(BC) 1046에 건국되어 기원전 771년에 멸망한 왕조 입니다. 주나라는 중국 후대 왕조들에게는 가장 이상적인 왕조로 불리운 왕조 였습니다. 하지만 주나라는 견융족(犬戎族)의 침략으로 수도인 호경(鎬京)에서 지금의 낙양인 낙읍(洛邑)으로 수도를 천도 했습니다. 주나라는 낙읍으로 천도한뒤,왕권이 현저하게 약화 됐습니다. 이 때문에 지방의 우두머리들은 각기 세력다툼을 벌입니다. 이것이 춘추시대(春秋時代-춘추란 말은,공자 孔子가 저술한 <春秋>라는 책명에서 따온 명칭) 입니다. 이 시대에 그래도 주왕조는 지방 우두머리들의 존경을 받았으나 전국시대(戰國時代,기원전 403~221, 183년간 계속)에 이르자 천하는 약육강식의 살벌한 시대로 변해 버리고 맙니다. 전국시대의 시작은 진(晉)의 유력한 성씨인 위씨(魏氏), 한씨(韓氏), 조씨(趙氏)가 정식 제후로써 인정을 받았던 시대부터 시작 되었는데(기원전 403년) 혹자는 진나라가 위,한,조씨로부터 분열되기 시작한 기원전 453년부터 시작 되었다라고 주장 하기도 합니다.
전국시대에 중국의 영역은 남방으로 확장 되었고 오월동주로 유명한 오.월(吳.越)의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후,기원전 221년에 너무나도 유명한 진(秦,통일후 221~207)의 시황제(始皇帝,통일후 재위기간,221~210)가 등장해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루었습니다. 진 시황제는 천하를 통일하자 중앙집권과 황권(皇權)을 크게 강화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분서갱유(焚書坑儒)와 아방궁(阿房宮) 건설,만리장성(萬里長城)의 축조로 백성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 주었습니다. 이 때문에 진나라는 천하통일후 겨우 15년만에 멸망하고 맙니다.
주인을 잃은 중국은 이후 한 고조(漢 高祖) 유 방(劉 邦)과 서초패왕(西楚覇王) 항 우(項 羽)가 겨루는 한초전쟁(漢楚戰爭,기원전 206~202, 장기의 유래가 여기서 시작됨)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천하통일은 유 방이 이룩하게 되었고 이후 전한(前漢,기원전 202~서기 8), 후한(後漢,서기 25~220)을 합친 한나라 시대(기원전 202~서기 220)가 전개 됩니다. 전한은 무제(武帝)시대에 전성기를 이루나,그가 죽자 나라는 왕 망(王 莽)에게 멸망하고 맙니다. 왕 망은 신(新.8~23)이라는 왕조를 세워 주나라와 같은 이상국가를 구현 하려고 했으나 백성들과 호족들의 저항에 의해 나라는 겨우 16년만에 망하고 맙니다. 후한을 창시한 세조 광무제 유 수(世祖 光武帝 劉 秀)와 그의 아들인 명제(明帝)시대에 후한왕조는 황금기를 이루었으나 이후,외척과 환관의 싸움으로 나라가 쇠약해지기 시작 합니다. 이른바 당고의 화(黨固의 禍)라는 것이 그것인데 후한은 이 당고의 화로 나라가 기울어지다가 황건적의 난(黃巾賊의 亂)에 의해 통치기반이 완전히 흔들리고 맙니다.
황건적의 난 이후 중국은 분열기를 맞으니 이것은 수나라가(隋,581~618) 통일 하기까지 장장 370년(220~589)간에 걸쳐서 계속 되었습니다. 후한이라는 통일 왕조가 끝나자 그 뒤를 이어 조 조(曺 操-武帝)의 아들인 조 비(曺 丕)가 위왕조(魏,220~263)를 열었으나 이 조씨의 위왕조는 사마 의(司馬 毅-宣帝)의 손자인 사마 염(炎-武帝)에 의해 망하고 맙니다. 무제 사마 염은 남방 즉,강남에 자리한 오나라(吳,227~280)와 사천에 자리한 촉나라(蜀,221~265)를 멸해 일시적으로 삼국을 통일 하는데 성공 합니다. 하지만 진(晉) 즉,서진왕조(西晉,263~317)는 팔왕의 난(八王의 亂,301~316) 이라는 내란을 껵게 되었고 이 내란은 오호(五胡)가 발흥하는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 합니다. 서진은 영가의 난(永嘉의 亂,317)으로 성한(成漢)을 세운 유 요(劉 曜 )에게 멸망 되었고 남은 무리들은 강남으로 내려가 그곳에 다시 진나라를 세우니 이것이 동진(東晉,317~420)입니다. 동진이 남쪽 강남지방에서 건국되자 중국의 북방 소위, 중원지방은 오호가 난립해 제각각 지방정권을 세워 서로 약육강식의 전쟁을 이어 갑니다. 이중에서 전진(前秦0의 부 견(扶堅)은 동진을 멸해 천하를 통일 하려고 했으나 그는 비수의 전투(?水의 戰鬪,383년)에서 동진군의 반격으로 대참패를 당하고 전진은 멸망하고 맙니다.
비수의 전투이후,동진 또한 세력이 약화돼 송나라(혹은,劉宋, 420~479)를 건국한 유 유(劉裕)에게 멸망 합니다. 이후 남조(南朝)는 송(宋)-제(齊)-양(梁)-진(陳)으로 이어졌고 북조(北朝)는 북위(北魏,386~534)는 오호십육국시대(五胡十六國時代,304~439)를 종결짓고 화북(중원)을 통일 하는데 성공 합니다. 북위와 남조의 4왕조가 대립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