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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히스토리아 역사 스토리

중세의 미술 - 2. 게르만과 프랑크 왕국의 미술

중세의 미술 - 2. 게르만과 프랑크 왕국의 미술

이 글에 대한 원문 포스트 : http://blog.naver.com/tori2984?Redirect=Log&logNo=10013241401

위 블로그를 클릭하시면 유럽 미술사에 대한 많은 자료를 얻으실 수 있습니다. 너무 정리가 잘 되어 있어서 위 사이트에서 가져온 글입니다. 제가 정리하는 것보다 100배는 나은 듯 하네요. 역시 제 사이트는 전문가의 손길이 필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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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

중세를 흔히 암흑기라고 부르곤 했지만 이 또한 인간 중심적인 사고를 중시한 르네상스인들이 신중심적인 중세를 비하한 표현이었다. 그러나 실제의 중세는 지중해 중심의 라틴민족과 유럽북방의 게르만민족이 융합하여 근대의 유럽국가의 원형을 형성하고 그 문화를 낳은 역동적인 역사의 시기였다.

 로마제국의 쇠망기에 유럽으로 침입해 들어온 고드 족, 반달 족, 색슨 족, 바이킹 족 등의 야만 종족들은 독특한 상상력이 배어 있는 정교한 목공예와 금속공예를 보여주고 있다. 괴수의 형상이나 뱀 등 각종 동물들이 등장하는 그들의 공예미술은 대부분 복잡한 무늬로 이루어져 있는데, 여기에는 그들 특유의 원시적 신앙의 요소가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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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1) Sutton Hoo의 금 버클-7세기/길이 13cm/대영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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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수톤 후의 나무상자 경첩-7세기/금과 에나멜/대영 박물관

 그림 1, 2는 앵글로색슨의 서튼 후의 래드월드 왕(Raedwald: 624-25에 사망)의 무덤에서 발견된 부장품들로 이 곳의 미술을 알려주는 귀한 자료이다. 왕의 의관 중의 일부라고 짐작되는 버클이나 나무 상자의 경첩의 문양은 언뜻 보면 뒤엉켜있는 듯 보이지만 복잡한 교차 무늬와 기하학적 무늬들이 질서 있고 매우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이와 같은 문양들은 기독교 미술에도 반영되었는데, 복음서의 필사본에 그려진 문양들과 금속을 타출하여 만든 표지가 그 예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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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두로우 서적의 삽화- 660-80년경/24.4×15.5cm/더블린 트리니티 컬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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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린다우의 복음서표지-800년경/은에 금도금/ 에나멜/귀한 돌과 보석/34.4×26.2cm/뉴욕 J.피에르폰트 모르간 도서관

 필사본 성서란 글자 그대로 손으로 베껴서 쓴 성서를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나라는 700년대에 이미 목판 인쇄술이 발명되어 서책의 대량 인쇄가 가능해 졌지만 이에 비해  서양에선 15세기경에야  비로소 목판인쇄가 이루어져 중세 내내 책을 보급하려면 일일이 손으로 베껴서 쓰는 필사본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값비싼 양피지에 손으로 쓰고 그린 당시의 필사본 성경책은 성직자나 왕 같이 소수의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매우 귀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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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영국 캔터배리 시편 삽화-다비드/8세기 중엽/18.1×13.1㎝/런던대영박물관

  18세기경에 그려진 영국 캔터배리 시편 삽화의 ‘다비드’는 소박한  묘사와 강렬한 표현, 화려한 색채로 눈길을 끈다. 다비드 왕은 하프를 연주하는 모습으로 옥좌에 앉아 있고, 그 주위에는 악사들이 나팔을 불며 춤을 추고 있다. 악사들보다 다비드 왕이 훨씬 크게 그려져 있는 것은, 이 시대의 화가들이 등장 인물의 중요성에 따라 그 크기를 다르게  그렸기 때문이다. 고대 이집트 회화의 관념이 다시 부활한 것이다. 인물들을 감싸고 있는 장식띠의 무늬에서 여전히 동물 문양과 복잡한 기하학적 무늬의 잔영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고대의 고전적 전통과 야만족이라 불리던 이들의 토착미술이 충돌과 융합을 하게 되면서 서유럽에서는 비잔틴과는 다른 새로운 미술이 자라나게 된다.

 현재의 독일 서북쪽 아헨Aachen을 수도로 하고 있던 카롤링거왕조의 샤를르마뉴는 800년 12월 25일 로마의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으로부터 황제의 왕관을 받았다. 전 유럽의 지도자로서 그 정통성을 인정받고자 한 이 사건은 샤를르마뉴 개인의 욕망의 소산일 수 있지만, 북 유럽 지배자가 이탈리아에서 교황의 승인을 받았다는 점에서는 매우 시사적인 사건이다. 샤를르마뉴는 또한 고대문화를 적극 받아들임으로써 당시까지만 해도 야만족 취급을 받던 북방의 문화를 발달시키고자 당시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학자들을 초청하여 자제들을 가르치고, 공식서류는 라틴어로 작성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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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6) 성 마태오-800년경/필사본복음서의 한페이지/아헨에서 제작된것으로 추정/빈미술사박물관

 그림 6은 사를마뉴 대제의 궁정에서 제작된 필사본 성경의 한 페이지로 복음서를 쓰고 있는 성 마태오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스와 로마의 책에서는 첫페이지에 저자의 초상화를 싣는 것이 관례였는데 복음서를 쓰고 있는 이 성인의 그림도 이런 종류의 초상을 매우 충실하게

모사한 것이라 생각된다. 고전적인 방식의 토가를 몸에 걸친 모양과 머리를 명암과 색채로 모델링한 방법을 보면 이 중세의 화가가 당시 존중되었던 모범적인 예를 가능한 한 정확하고 훌륭하게 모사하려고 무척 공을 들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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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성 마르코-에보의 복음서/816-35년/26×19.7cm/에페르네이시립도서관

 9세기의 또 다른 필사본 성경의 삽화인 그림 7을 그린 화가도 초기 기독교 시대에서 유래하는 앞의 예와 대단히 유사한 고대의 표본을 앞에 놓고 그린 것 같다. 손을 비교해 보면 둘 다 잉크가 담긴 뿔통을 든 왼손이 책상 위에 놓여 있고 오른손은 펜을 잡고 있으며, 다리와 무릎 주변의 옷주름도 매우 흡사하다. 그러나 그림 6을 그린 화가가 가능한 원본을 충실하게 복사하려고 노력을 한 반면에 그림 7을 그린 화가는 이와는 다르게 해석하려 한 것 같다. 그는 이 복음서 저자를 서재에 조용히 앉아 있는 나이 많은 침착한 학자처럼 묘사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에게는 성 마태오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쓰고 있는 영감을 받은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가 의도했던 초상이나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의 형상 속에 자신의 경외심과 감동 같은 것을 전달하는데 성공했다는 것은 미술사적으로 지극히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 성인이 큰 눈을 부릅뜨고 엄청나게 큰 손을 가진 사람으로 묘사된 것은 이 화가의 솜씨가 서툴거나 무지해서가 아니라 성인에게 긴장해서 집중하고 있는 인상을 주려고 한 의도적 표현으로 보인다. 옷주름과 배경을 표현한 필치를 보아도 이 그림을 그릴 때 화가가 소용돌이 모양의 선과 지그재그 형의 옷 주름을 그릴 때 느꼈을 그의 즐거움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원본 자체에도 이러한 화법을 암시해 주는 요소가 있었을 것이나 이것이 중세의 화가에게 매력적으로 보인 이유는 그것이 북유럽 미술의 제일 큰 업적이었던 복잡하게 얽힌 리본 모양과 선의 문양을 상기시켜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같은 그림에서 고대 오리엔트 미술이나 고전 미술이 하지 못했던 것을 할수 있게 만들어 준 중세 양식의 출현을 보게 된다. 이집트인들은 그들이 존재한다고 ‘알았던’ 것을 그렸고, 그리스 인들은 그들이 ‘본’ 것을 그린 반면에 중세의 미술가들은 그들이 ‘느낀’ 것을 그림 속에 표현하는 방법을 배웠던 것이다.   

 성경의 내용과 가르침을 전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던 중세의 미술가들에게는 자연을 닮게 그리거나 아름다운 것을 만드는 것에 관심이 없었음을 다시 한번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내용 전달을 위한 명확한 표현 탐구는 필사본의 그림뿐만이 아니라  조각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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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8) 선악과를 따먹은 후의 아담과 이브-1015년경/힐데스하임 대성당의 청동문 부조 부분

 1000년경에는 주물기법의 발전으로 큰 덩어리를 주물로 뜬 기둥과 청동 문이 많이 제작되었는데, 그림 8은 독일의 힐데스하임Hildesheim 대성당을 위해서 제작한 청동제 문의 일부분이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 하느님에게 혼나는 장면이다. 이 부조에서 성경의 이야기에 속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의미를 갖는 사물들만을 강조해서 인물상들이 단순한 배경으로부터 한층 부각되어 있을 뿐, 묘사는 매우 빈약하여 낙원은 고사리 같은 나무 두어 그루로 묘사되고 있다. 하나님은 아담을 가리키고, 아담은 이브를, 이브는 뱀을 가리키고 있다. 이들의 손짓만으로도 그 내용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당시 미술의 목적이 성경의 내용과 가르침을 전달하는 것이었음을 다시한번 볼수 있는 부분이다.

 한편 이와 같은 종교 미술 이외에 세속적인 미술도 존재하였는데, 봉건 영주들의 성을 장식하던 비종교 미술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을 위한 미술 작품들은 종교미술처럼 소중히 여겨지지 않았고 유행이 지나면 버려지고 파괴되었기 때문에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다. 그 중 바이외 태피스트리Bayeux tapestry는 비종교적 미술의 훌륭한 예이다. 만들어진 연대가 불분명하지만 이 작품은 정복왕 월리엄의 영국 침입을 표현한 태피스트리로 이야기의 내용을 간결하고 소박하게 전달하는 장식적인 형태표현과 탁월한 구성미가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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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9) 바이외 태피스트리- 노르만의 영국 정복/바이외 태피스트리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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