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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히스토리아 역사 스토리

에비타과 아르헨티나

에비타과 아르헨티나

포스트를 읽으면서 들을 수 있는 에비타의 주제가 Don't cry for me Argentina를 배경음악으로 포스팅 하겠습니다. 상단 블로그 음악의 2번째 단추를 눌러 일시중지시킨 후 이 음악을 감상하면서 글을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누구나 인정하는 세계 최고의 first lady 에바 페론.... 그녀의 역사를 아르헨티나의 페로니즘과 연결하여 적어보겠습니다. 단, 그녀는 <성녀>였다는 관점에서 적는 포스트가 아니라 에바페론이 불운한 시대를 살다간 한 인간이자, 독재자의 여인이었으며, 창녀이자 성녀였다는 점을 아르헨티나의 역사랑 연결해 보려고 합니다.

영화 에비타의 주제음악 : 날 위해 울지마요, 아르헨티나여!

It won't be easy, you'll think it strange. When I try to explain how I feel.. That I still need your love after all that I've done. You won't believe me. All you will see is a girl you once knew. Although she's dressed up to the nines. At sixes and sevens with you. I had to let it happen, I had to change Couldn't stay all my life down at heel. Looking out of the window, staying out of the sun.

So I choose freedom. Running around trying everything new. But nothing impressed me at all. I never expected it to

Don't cry for me Argentina! The truth is I never left you All through my wild days. My mad existence, I kept my promise. Don't keep your distance And as for fortune, and as for fame. I never invited them in Though it seemed to the world they were all I desired They are illusions They are not the solutions they promised to be The answer was here all the time I love you and hope you love me.

Don't cry for me Argentina! Don't cry for me Argentina The truth is I never left you All through my wild days My mad existence, I kept my promise Don't keep your distance

Have I said too much? There's nothing more I can think of to say to you But all you have to do is look at me to know That every word is true.

1. 1919년 팜파스에서 태어난 가난한 소녀

에바 페론(에바 두아르테)은 1919년 아르헨티나의 젖줄이라 불리는 대초원(팜파스)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팜파스에서 나오는 엄청난 낙농업과 기업적 목축업, 밀로 인해 엄청나게 부유한 나라였습니다. 우리는 보통 라틴 아메리카가 유럽의 식민지 수준이었고, 낙후된 지역으로 알고 있지만 19세기 중반 - 20세기 초반의 실상은 우리의 상식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우리가 지리시간에 배운 팜파스는 단순한 목초지가 아니였습니다. 팜파스의 농업은 아르헨티나의 경제력을 세계적 수준으로 올려놓고 있었죠.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아메리카를 통털어 그 수준을 비교할 도시가 뉴욕 외에는 없었다고 하니까요.

실제 1차대전까지의 아르헨티나의 국민소득은 스웨덴, 스위스, 이탈리아보다 높았다고 합니다. 1880년대 후반 유럽인들은 앞다투어 아르헨티나로 이민오려 하였고, 아르헨티나는 남미의 종주국이 될 정도로 부강하였습니다. 특히 당시 세계 1, 2차 대전은 아르헨티나의 곡물들이 전쟁 호황으로 유럽에 비싸게 팔리는 전성기를 불러왔습니다.

에바페론은 이 세계의 중심이라 불릴 정도의 곡창지대인 팜파스에서 농장 주인의 사생아로 태아났습니다. 에바의 어머니는 농장주인과의 사이에서 사생아를 5명이나 낳았는데, 에바는 그 중 4번째 사생아였습니다. 에바는 유년기를 무척 서럽게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에바는 설움이 많은 자신의 인생에 회의를 느끼고, 15살 때 무작정 수도인 꿈의 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상경합니다. 그러나 무식한 시골처녀가 환락의 도시에서 할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하루 세끼를 해결하기 위하여 시키는 모든 일을 해야 했으며, 이 당시를 두고 에바의 정적들은 그녀를 <더러운 창녀>라고 몰아붙이기도 했답니다. 그녀는 싸구려 잡지의 싸구려 모델일을 하였고, 알려지지 않은 몇 편의 영화에 출연하였을 뿐입니다. 그녀는 군 장교들을 접대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고, 먹고 살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하려 했습니다.

결혼 전의 에비타 사진 모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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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에비타와 후안 페론의 운명적인 만남

1920년대 아르헨티나의 역사는 각종 사상과 이념의 격전지였습니다. 아르헨티나의 팜파스로 이민 온 수많은 유럽인들은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파시즘 등 여러 사상들을 아르헨티나에 전파하였습니다. 반면, 대농장에서 나오는 엄청난 생산력을 독점하는 지주들에게 하층민들은 염증을 느끼고 반발하는 분위기가 있었으며, 크나 큰 빈부격차는 아르헨티나의 미래가 어디로 가야할 지를 쉽게 판단할 수 없게 하였습니다.

당시 세계 2차 대전으로 전 세계가 혼란해지자 아르헨티나의 지도자들은 팜파스의 곡물을 노리는 미국의 압력에 맞서 독일에게 관대한 <정치적 중립>을 시도하였습니다. 지도자들은 특히 소외 계층에게 복지를 확충하고 빈부격차를 줄임으로서 대중 인민의 지지를 얻어내려는 <파시스트 사상>을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당시 아르헨티나의 지도자들은 대부분 군 쿠테타로 집권한 군부독재 정권으로서 미국과 사이가 멀어진 정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들은 미국에 협력하지 않고 <파시스트 세력>과도 외교를 함으로서 미국으로부터 눈에 가시로 남게 되었습니다. 당시, 미국에 반대한 유일한 남미 국가가 아르헨티나였습니다.

1940년대 후안 페론은 <파시즘>에 매료된 대표적인 정치가였습니다. 그는 독일 나찌당이나, 이탈리아 파시당과 같은 <국가사회주의>적인 전체주의 사상을 가지고 정치를 추구하였습니다. 그는 전체주의적 우파 세력을 규합하면서 좌파세력들을 철저히 격파하고, 빈민들에게 토지제공, 높은 임금보장, 사회보장제도의 확충을 약속하면서 하층민의 영웅으로 등장합니다.

이 후안 페론이 영웅으로 승승장구 할 때, 어린 나이로 후안 페론과 동거했던 여인이 바로 에바 페론입니다. 후안 페론은 에바와 만나는 자체가 자신의 이력에 흠집이 날 수 있었습니다. 국민적 영웅 정치인이 <창녀>와 놀아나는 상황이 연출되었으니까요. 하지만, 에비타에게는 뭔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타고난 미모의 에비타와 페론의 동거는 꽤 오래 갔으니까요.

그러나 세계 2차 대전에 참전하고 있던 미국은 이 후안 페론을 <민주주의의 반역자>로 생각하면서 후안 페론을 구금하였습니다. 후안 페론이 연금을 당하자, 에바에게는 인생 역전의 기회가 찾아옵니다. 에바는 타고난 미모와 엄청난 정치적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페론의 추동자들을 규합하고, 노동자들을 설득하면서 <후안 페론>이 아르헨티나를 위해 얼마나 필요한 인물인지 역설하였습니다.

"나 역시 당신들과 같은 하층민 출신입니다. 우리 가난한 자들과 이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사람, 미국으로부터 자유를 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후안 페론 뿐입니다. "

그녀는 자신 역시 하층민이라는 신분적 측면을 부각하면서 노조 총파업을 이끌어 내였고, 후안 페론은 석방되어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게 됩니다. 후안 폐론은 출감하는 날 약 30만명의 군중 앞에서 전국에 라디오로 자신의 입장을 연설하였는데, 이 연설은 아르헨티나의 모든 국민들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리고, 후안 페론은 자신을 위기에서 구원해준 에바와 정식으로 결혼하고 나서, 1946년 국민투표로 대통령에 오르게 됩니다. 이로서 세계 최고의 퍼스트 레이트 에바 페론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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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아르헨티나의 페론주의

후안 페론 대통령과 에비타의 정책을 보통 <페로니즘>이라고 부릅니다. <페론의 정책>이라는 뜻이지요. 페로니즘의 기본 정책은 다음과 같이 정의내릴 수 있습니다.

1. 공정한 사회를 건설하여 강하고 활기찬 아르헨티나의 건설

2. 공업의 발전을 통하여 대외적 자립을 이루는 아르헨티나

3. 모든 계급과 계층의 타협을 이끌어내어 사회 통합을 이끌어 내는 아르헨티나

이 페로니즘은 1946년부터 실시되어 초기 5개년 계획으로 큰 성과를 거둡니다. 그는 우선 모든 사회 집단을 개별적 조직으로 묶었습니다. 예로 교회와 군부조직, 노동자 조직, 기업가 조직, 교수 조직, 심지어 학생 조직까지 만들어 내고는, 이 모든 조직들을 정부가 강력한 카리스마로 통합하는 정책을 실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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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조직들은 각각 이익집단으로 활동하면서, 각기 페론 정부의 각료가 되어 활동하였습니다. 이러한 페론의 정책은 국가 통합에 기여하였고, 이것을 바탕으로 다른 정책을 펼쳐나갑니다.

특히 페론은 <파시스트적인 전체주의>를 국가 사회주의 사상으로 도입하는데, 이에 따라 철도를 국유화하는 등 모든 기간산업의 국유화를 추진합니다. 또한 독일, 이탈리아, 스위스 등 외국 회사들을 추방하고, 자본을 몰수하는 등 외국 자본을 추방하여 경제적 자립을 이루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경제적 자립은 아르헨티나가 세계 2차 대전을 이용하여 팜파스의 농축산물을 외국에 비싼 값으로 팔게 된 경제적 호황기에서 비릇된 것이었습니다. 페론 정부는 농목축업의 수출로 인한 수입을 공업으로 돌려 공업화를 추진하고, 경제적 자립을 이루려고 외국 회사를 추방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페론은 노동자와 여성 등 사회적 역사를 보장하기 위한 수많은 법을 만듭니다. 노동입벙, 여성법, 혼인법, 남녀평등법, 이혼법, 여성의 공무담임권 획득, 공공사업의 추진, 교육개혁법 등은 하층민들을 열광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입법들의 대부분은 페론 정부에서 강력한 정치력을 발휘하던 에비타에 의한 것이었고, 그녀는 아르헨티나의 <성녀>로 추앙되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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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수많은 법들은 하층민을 위한 법임과 동시에 노동자 계급의 소득향상을 통해 경제적 자립의 원천인 공업발전을 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유야 어떻게 되든 에바페론은 수많은 입법을 통해서 아르헨티나의 평등주의를 완성하려 노력하였고, 실제 하층민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에바 재단을 설립하여 모금을 하였고, 그 기금으로 의료 사업, 장학 사업을 하였으며, 하층민들이 국민생활에 전혀 지장을 받지 않을 정도로 복지를 확대하였습니다. 그녀는 그 사업을 위해 지지기반의 일부였던 상류계급의 국가 보조금을 삭제하면서 빈부격차를 줄이고, 하층민 지원정책을 확대하였습니다. 또, 여성의 사회 참여를 위한 수많은 입법을 만든 뒤에 여성 정당을 만들고, 여성의 참정권을 허용함으로서 약자들의 <성녀>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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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후안 페론의 위기와 정의주의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페론주의는 위기를 맞이합니다. 페론 부부의 공업화 정책은 일시적으로 성공한 듯 보였으나, 문제점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실제 페론의 공업화 정책은 중화학 공업의 국가기간산업이 아니라, 하층민의 필수품 위주인 경공업, 소비재 산업이었는데, 이것은 국가 경제를 침체시키고 말았습니다. 국가 성장을 위한 공업항목을 잘못 정한 것이지요.

페론은 공업화 정책이 위기를 맞자 국민을 위한 <정의주의>라는 것을 강조하기 시작합니다. <정의주의>는 페론주의에 이데올로기적 특징을 가미한 것으로, 사회 정의 실현을 위하여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는 것을 내용으로 합니다. 대통령 임기가 6년으로 늘었고, 하층민들에게는 계속적으로 <인기 영합>을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습니다. 역사에서는 이러한 인기주의를 포퓰리즘이라고 부르죠.

에비타는 실제로 자신의 과거를 생각해서 하층민들을 진정 사랑하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수많은 학교, 병원, 고아원을 짓고, 실제 누구도 할 수 없는 헌신으로 하층민들을 위해 발로 뛰었을 테니까요. 그녀는 스스로 전국을 돌며 무료진료를 하였고, 천사의 모습을 보이곤 합니다. 또 전 세계 여러나라에 빈민과 이재민을 위한 거금을 보내기도 합니다. 그녀의 헌신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정권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에비타의 헌신을 정권 안정에 이용하기 좋았습니다. 실제, 초등학교에서는 페론 부부의 찬양 글이 학교 숙제였고, 스페인어 수업의 교재는 에비타의 자서전이었다고 하니까요. 에비타 역시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직접 비판한 적이 없습니다. 후안 페론의 정치적 생명을 위해서는 이런 인기주의가 필요했을 테니까요.

1951년 에바 페론은 이제 권력 2인자에 오르기 위해 부통령 후보로 까지 오르려고 하였습니다. 히지만, 군부와 상류층은 에바의 정치적 실권을 두려워하여 반대하였고, 에바와 군부는 심한 마찰을 겪기도 합니다. 또 2차 대전 후의 유럽은 자국의 산업 보호를 위해 아르헨티나 농산물에 대한 수입을 규제하기 시작하였고, 아르헨티나의 공업화 정책은 초보적 수준으라 국가는 혼란하였습니다. 상류층은 페론 부부를 비판하였습니다. 그러나 페론 정권의 인기주의는 계속 하층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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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에비타는 성녀인가, 창녀인가

에비타는 아르헨티나를 위해 수없이 많은 봉사와 헌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에 대한 평가는 너무나 상반됩니다. 그녀는 하층민들에게는 너무나 자상한 <성녀>였습니다. 그녀는 일반인이라는 할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을 초인적인 힘으로 봉사하면서 백성들을 사랑한 국모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를 비판하는 입장의 논리도 부당한 것은 아닙니다.

그녀를 비판하는 주된 입장은 그녀의 모든 행동이 <페론주의>의 독재에 기여했다는 점입니다. 후안 페론 대통령은 수많은 정치적 위기가 있었고, <파시즘적> 독재로 인하여 많은 지탄을 받기도 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때 마다 에비타가 있었고, 그녀의 <성녀>다운 헌신은 그 독재를 정당화시켰습니다.

따라서 가장 피해를 많이 본 상류층은 에바를 <성녀>가 이나라 창녀라고 부릅니다. 일단, 에바의 정책 자체가 하층민을 위한 인기주의일 뿐이라는 점이지요. 또 에바의 출신 자체가 천박한 사생아이자, 창녀이자, 자궁암에 걸린 술집 여자였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실제 에바도 이러한 점이 부끄러웠는지, 자신의 과거에 대하여 말하는 것만큼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처벌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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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에바의 죽음....

1952년 에바는 백혈병과 자궁암으로 쓰러졌습니다. 페론의 집권기간 내내 초인적인 모습으로 그 미모를 빛내며 하층민들을 포섭한 결과 너무 무리했기 때문이지요. 그녀가 죽기 직전 하층민들을 위한 새로운 법안을 만들 때, 그녀의 몸무게는 34kg 이였다고 합니다. 노래에서는 이 부분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날 위해 울지 말아요, 아르헨티나여! 이제 내가 보이지 않더라도, 사라지더라도 영원히 아르헨티나인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을 영원히 떠나가지 않을 것이랍니다. 그러니 울지 말아요, 아르헨티나여! 나의 말은 모두가 진심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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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서는 그녀의 장례식을 역대 가장 큰 국장으로 한달동안이나 성대하게 치루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후안 페론은 에바가 죽은 뒤 얼마 안되어 아사벨이라는 하층민 출신 무용수와 다시 결혼하게 되는데, 이 이사벨도 정치에 뛰어들게 됩니다. 그리고, 에바의 가족들도 에바 사후 바로 후안 페론에게 외면당하게 되어 모두 비참하게 죽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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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페론의 망명과 에바의 시신을 둘러싼 알력

에바가 죽은 뒤 3년 뒤 후안 페론은 쫒겨나 망명을 하게 됩니다. 페론은 에바 사후 좁아진 정치적 입지를 외자 유치를 풀려고 하였는데, 이것은 국민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카톨릭 단체를 공격함으로서 <하층민의 지지>를 유도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후안은 이혼, 사생아 인정, 매춘 인정 등의 법률을 제정하여 하층민의 지지를 얻으려 했지만, 이것이 카톨릭의 반발을 사서 결국 쫓겨납니다. 페론은 스페인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 20년 만에 돌아와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지만, 당선 후 사망합니다. 그녀의 새로운 부인 이사벨이 대통령직을 승계했지만, 쿠테타로 쫒겨나면서 페론시대는 막을 내립니다.

문제는 에바의 시신문제였습니다. 페론의 정적들은 하층민들의 성녀, 에바의 시신이 가장 중요한 문제로 생각하였습니다. 1955년 페론이 망명한 후 에바의 시신은 정적들이 이탈리아에 비말로 옮겨졌는데, 시신은 크게 훼손되어버립니다. 1971년 페론주의자들은 이 시신을 후안에게 넘겼는데, 훗날 이사벨이 대통령에 당선된 후 정치적 목적에 의해 시신을 대통령궁에 묻습니다. 그러나, 이사벨이 쫒겨난 후 시신은 다시 대통령 궁에서 추방됩니다. 에바의 시신은 이렇게 끝도 없이 떠돌다가 결국 가족들에게 인계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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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그녀의 삶은...

그녀의 삶은 한마다로 정의내리기 힘듭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사생아, 타고난 미모, 15살때 부터의 창녀같은 생활, 후안 페론과의 동거, 성녀로서 하층민들을 위해 펼친 극한의 헌신, 독재정권에 대한 기여, 그리고 짧은 생에 찾아온 죽음...

삶은 복잡하였고, 그녀의 시대도 복잡하였지만, 그녀는 자신의 자리에서 누구도 할 수 없었던 헌신과 사랑을 하층민들을 위해 보여주였습니다. 역사는 시대가 변하면서 평가도 달리한다지만, 그녀가 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퍼스트 레이디로서 보여준 정치적 역량과 사랑, 헌신에 대한 평가만큼은 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참고자료 : 영화 에비타, 뮤지컬 에비타, 성녀 에비타(마르티네즈, 자작나무), 몽고메리의 에비타, 기타 인터넷 자료들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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