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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강화도 조약 전 일본의 강화도 침략

 

일본의 강화도 침략

(1) 식량이나 음료수 양은 항해 계획과 기항지를 생각해서 전문적인경리 장교가 미리 준비해 두지 않을 수 없다. 식수를 구하려고 강화도에 접근했다는 것은 구실에 불과할 것이다.

山邊健太郞 <日本の韓國倂合>, 태평출판사, 1966 -

(2) 구로다 기요다카에게 내린 일본 정부의 비밀 훈령

조선이 그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거나 거짓을 꾸며 도저히 일본 요구에 응하지 않을 때에는, 가령 헌저하게 난폭한 행동이나 능멸하는 따위는 없더라도, 사절은 두 나라의 화호를 단념하고 우리 정부에서 모종의 별도 조치가 있을 것임을 전하고 교섭을 중단하는 문서를 던지고 조속히 귀국하여 다시 명령을 기다려 사절의 체통을 잃지 말 것이다.

- 일본외교문서 8권 -

(3) 우리나라와 일본은 300년 동안 통신사를 교환하고 왜관을 설치하여 무역하여왔다. 비록 수년 이래 서계를 가지고 서로 버티어 왔으나 우호 관계를 존속하려는 처지에서 통상을 굳이 거절할 필요가 없으므로 통상 조약 등의 절차를 잘 협상하여 양국의 편의에 맞춰 조치하라.

- 승정원일기, 고종 13년 1월 24일 -

참고글 : 강화도 조약을 맺기 위해 일본이 쳐들어 온 상황적 배경에 대한 사료입니다. (1)번 사료의 내용은 일본의 운양호 사건인데, 일본 운양호는 식수를 구하러 강화도에 와서 약탈과 살인을 저질렀다고 말했다는 내용입니다.

조선에서는 운양호 사건에 주목하여 일본에 항의하였습니다. 일본은 (2)번 자료에서 보듯이 교섭을 하되, 잘 안되면 교섭을 중단하고 무력을 사용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조선은 전통적인 교린체계를 바탕으로 일본을 대하려 하였습니다. 박규수 등 친일 개화파와 청나라의 권고 등으로 일본과 협상을 하였고, 그 결과 조선은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