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천무후를 역사 흐름 속에서 분석해보자!

측천무후는 영화, 책으로도 많이 나온 중국사의 재미있는 소재거리입니다. 중국의 유일한 여황제로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인물이었고, 잔인하면서도 영특한 면모를 지닌 요부로 나오기도 합니다. 절세미인이자, 절세요부로 평가된 이 측천무후... 하지만 절세의 미모 하나로 중국 전체를 호령하면서 82살까지 중국 대륙을 장악하고 나라까지 건국하였다는 점에서 뭔가 다른 것이 하나 쯤 있지 않았을까요? 이번 장에서는 당나라 3번째 포스트로 측천무후를 다루되, 영화 이야기가 아닌 역사적 관점에서 한 번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당 고조 - 당 태종 - 당 고종 - 당 중종 - 당 예종 - 측천무후 - 당 중종 (복위) - 당 예종 (복위) - 당 현종 - 당 숙종 - 당 대종 - 당 덕종 - 당 순종 - 당 헌종 - 당 목종 - 당 경종 - 당 문종 - 당 무종 - 당 선종 - 당 의종 - 당 희종 - 당 소종 - 당 애종

(표) 당 왕가에서 측천무후의 등장 및 영향력과 관련된 시기... 거의 1/3의 시기에 이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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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무후의 젊은 시절, 고령의 시절 사진화>

1. 베일에 쌓인 그녀의 신분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보통 중국 당나라 2대 태종의 후궁이자, 3대 고종의 황후이자, 중종과 예종의 어머니이자, 스스로 황제가 되었던 여자를 측천무후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스스로 황제가 되었는데 왜 무후? 무후란, 스스로 황후임을 인정하는 칭호입니다.

그녀의 칭호가 측천무후인 것은 그녀가 죽기 전 자신을 스스로 <황제가 아닌 황후였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측천대성황후>라고 일컬은 것이 명칭의 유래라는 설이 가장 다수설입니다. 또, 그녀의 아들 중종이 어머니를 <측천대성황제>로 부른 것도 있구요.

실제 그녀의 이름은 스스로 <조>라고 말했기 때문에, <무조>라고 불리며, 그녀가 주나라를 건국하여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무측천>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측천무후의 아버지는 거상인 무사확으로서, 무사확은 수나라 시절, 당의 시조 이연에게 군자금을 제공해주고 성장한 상인이었습니다. 무사확은 이연을 밀어준 대가로 개국공신이 되어 세력을 떨치게 되었죠.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이 무사확이 산둥지방(옛 북제시절 귀족들의 본거지)과도 연계된 세력이라는 점입니다.

측천무후는 당태종의 아내인 장손왕후가 죽자, 후궁으로서 총애를 받습니다. 물론, 측천무후가 눈부신 미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도 강조되지만, 그녀의 신분이 개국공신에다가 여러 세력에게 도움을 준 자금력이 탄탄한 상인집안이었다는 점도 한 몫 하였을 것입니다. 태종은 그녀를 <무미랑>이라고 부르며 매우 아끼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태종은 측천무후의 미모를 상당히 아끼다가 어느날부터 그녀를 멀리하기 시작합니다. 그 이유는 그녀의 아버지와 연계된 세력들이 당 개국공신들과는 차이가 있는 구귀족 세력이었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예로, 당시 집권층이자 개국공신 집단들은 <궁 내 여자의 기가 너무 강하여 문제가 심각할 지경이다. 이후의 세상은 무씨 여인의 천하가 될 것이다.> 등등의 소문 등을 이유로 무미랑을 적극 견제하였기 때문입니다.

측천무후는 결국 황제의 총애를 잃자 황태자인 진왕 이치(이후 고종 황제)에게 접근하여 그와 사랑에 빠집니다. 즉, 태종의 비였던 그녀가 고종의 여자로서 다시 힘을 얻게 된 것이지요.

이러한 불륜이 가능했던 이유는 2가지 정도가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 이유는 당이 전통 중화제국을 표방하고는 있지만, 아직까지도 북방민족으로서 중국을 지배하였던 남북조 시대 북위, 북주 등의 풍습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을 동시에 사랑한 여자, 여자로서 황제를 꿈꾸는 여자는 중국 전통의 가부장적 윤리관으로서는 절대 수용이 안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북방계통의 유목사회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할 정도의 일은 아니였고, 이러한 북방적 관념이 당 초기까지는 지속되었다고 볼 수 있겠네요.

두 번째는 이러한 불륜적 상황을 인정해줄 수 있는 지지기반으로 고종의 황후인 왕황후의 지지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당시 고종에게는 정식 왕후인 왕황후와 고종이 사랑하는 여자인 소숙비가 있었는데, 왕황후는 고종에게서 소숙비를 떼어놓기 위해 <무미랑>을 고종에게 붙여놓은 것입니다. 왕황후의 이러한 선택은 훗날 자신이 처참하게 죽게 되는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2. 왕황후파와 측천무후파의 대결은 정권 다툼이었다.

지난 포스팅에서 당 초기 건국 상황에서 <관롱집단>과 <산둥귀족>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였습니다. 관롱집단이란, 북방민족도, 전통 한족도 아닌 관중지방의 의협집단으로 북위가 분열된 이래, 서쪽 지역에서 성장한 서위 - 북주 - 수 - 당으로 이어지는 지연적 집단임을 말했습니다. 이 관롱집단이 곧 수, 당을 건국한 지배세력이었고, 이들의 성격상 과연 당나라가 전통 중화제국인가에 대한 논의를 전개했었습니다. 관롱집단은 서위 우문태 장군부터 시작한 공신집안들로 구성되었고, 당의 개국공신으로서 역대 왕과 왕후들에게 충성하면서 자신들을 특권을 공고히 하고 있었고, 고종의 황후인 왕황후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하였던 집단이었습니다.

반면 산둥귀족은 북위가 분열된 이래 동위 - 북제 - 수 - 당으로 이어지는 동안 명맥을 이어온 낙양 명문가를 비롯한 전통 귀족 집안입니다. 수, 당의 건국세력인 양견, 당고조 이연은 관롱집단으로서 양견과 이연 자체가 이종사촌간입니다. 따라서 산둥귀족은 상대적으로 권위가 약화되었고, 정권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과거 북제 출신 귀족인 이 산둥귀족이 곧 측천무후를 지지하면서 개국공신 집단을 견제하려던 세력이었습니다.

따라서 왕황후가 소숙비를 견제하기 위해 데려온 측천무후는 소숙비의 10배 이상되는 강적이었습니다. 역사상 사료에는 왕황후가 착한 여인, 측천무후는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여인으로 후대에 평가됩니다.

예로, 자식이 없던 왕황후는 측천무후의 딸을 아끼고 사랑했다고 합니다. 측천무후는 자신의 딸을 죽인 뒤 슬피 울면서 딸을 죽인 범인으로 왕황후를 지목하여 그녀를 축출합니다. 그래서 측천무후는 <정권에 대한 욕심으로 혈연도 버린 비정한 여인>으로 묘사되곤 하죠.

이 사건으로 태종의 후궁이었던 측천무후는 고종의 황후가 됩니다. 그리고, 측천의 책봉은 곧 관롱집단의 몰락 및 장안, 관중 세력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반대로 과거 북제지방의 산동지방, 즉 낙양중심의 관료군이 새롭게 떠오르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나 당 고종은 당나라 최전성기의 왕이었습니다. 직전 포스트에서 설명했듯이 시베리아 남부, 파밀 고원, 고구려 정복 등등 당의 최대 영토를 회복한 왕이었죠. 측천은 당 고종이 건재할 때는 감히 황제의 꿈을 꾸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종이 약해지자 자신의 아들과 남동생인 중종, 예종을 입맞에 따라 왕위에 올리면서 전권을 행사하다가, 아예 아들들을 폐위하고 자신이 직접 황제가 되어 나라를 다스립니다. 이 나라의 이름은 <주>나라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측천을 옹호한 집단은 당에서 자신들의 기반을 잃었던 구귀족들이었습니다.

3. 황후 옹립사건과 중종폐위 사건

측천무후가 황제가 되기 까지의 중요한 사건들은 크게 3가지 사건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왕황후 일파를 몰아낸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단순히 황후를 몰아낸 사건이 아니라 개국공신인 관롱집단을 숙청하고, 구귀족인 산동 귀족들을 등용한 사건입니다.

2번째 큰 사건은 중종폐위 사건입니다. 무후는 자신의 아들은 중종을 폐위해 버리면서 중종과 연결된 당의 종실 제왕들과 대신들을 대거 숙청합니다. 이 사건이 갖는 의미는 종래 측천무후를 지지하였던 산둥귀족들도 일부 숙청당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이 사건으로 무후는 거의 전무후무한 전권을 휘두르게 되며, 자신의 새로운 지지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과거제를 통한 새로운 신진관료 육성에 힘쓰게 됩니다.

마지막 사건으로는 스스로 여제가 된 사건입니다. 여제가 된 뒤 무후의 업적을 간략히 개관해 볼까요?

4. <주> 제국의 건설

측천무후가 새로운 칭호로 건국한 <주>나라는 중국 하, 은, 주 시대의 고대 <주나라>를 뜻합니다. 이것은 고대 주나라의 이상으로 돌아가서 주나라의 제도를 통한 이상적 국가 수립을 이루겠다는 야심에서 나온 국호입니다.

고대 주나라의 이상적인 체제들을 역사에서는 <주례체제>라고 부릅니다. 측천무후가 생각한 고대 주나라의 주례체제의 핵심은 정전제를 이상으로 하는 <경자유전 : 농자짓는 자가 토지를 가지는 것이 옳다> 이념의 토지공유제도, 국왕을 중심으로 신료들과 합의하는 것을 이상으로 하는 <합좌제도> 등등의 이상적인 이념들입니다.

그녀는 새로운 국가의 최초의 황제로서 스스로를 <황제>라 부릅니다. 따라서 측천무후가 아닌 <무측천>이 맞는 용어겠네요. 그녀의 새로운 나라 건국으로 당제국은 일시 중지되고, 당의 수도이자 관롱집단, 개국공신들의 중심지인 장안대신 산동의 구귀족 중심지인 낙양이 새로운 수도가 됩니다. 낙양은 이제 중국의 정치, 군사적 중심지로 새롭게 떠오르게 됩니다.

측천무후는 개국공신에 대한 특혜를 대부분 없애 버리고, 신진관료를 대거 등용합니다. 즉, 중국 역사상 과거제가 본격적으로 시행되면서 확대된 것이 바로 이 <주>나라 때입니다. 그리고, 나라의 정치이념으로 법장의 화엄경을 중심으로 한 불교를 채택하여 국가주의적이면서도, 민중적인 불교로서 국가 통합을 이루려고 하였습니다. 실제, 당 건국시기부터 건국이념은 구겸지의 도교 사상을 기반으로 하였지만, 측천무후기에는 도교가 탄압받고 불교가 융성하게 됩니다.

실제, 측천무후기에는 당 건설 이후 확대된 영토와 안정된 사회 기반을 바탕으로 중국 역사상 아주 크게 경제력이 급상승한 시기입니다. 농업은 발전하였고, 이미 건설된 수나라 때의 대운하를 통해 강남과 강북의 경제력이 서로 원할하게 교차 수송될 수 있었습니다. 중국의 혈맥이 뚤리고 건강한 피들이 온 몸을 돌던 시기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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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무후의 건릉 사진 : 입구>

5. 무후의 꿈을 꾸는 자들이 등장하다.

무후는 82세까지 장수하면서 중국 대륙을 호령한 여걸중의 여걸이었습니다. 그러나 무후 말년에는 상황에 조금씩 바뀌기 시작합니다. 먼저 중종의 왕비인 위후와 그 딸 안락공주는 또 다른 <무후>가 될 꿈을 꾸었습니다. 위후와 안락공주는 남편이고 아버지인 중종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또 다른 여제가 되어 여제 세상을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측천무후와 같은 정치적 지략이 부족하였습니다. 그녀들은 측천무후의 딸 태평공주와 대립하다가 태평공주 세력에게 처참하게 무너집니다. 태평공주는 조카인 예종과 함께 그녀들을 제거하였지만, 나중에 당 현종에게 정권을 빼앗기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여인천하는 끝나고 맙니다. 당 현종은 무후가 남긴 유산들을 가지고 당나라의 전성기를 구가합니다. 그러나, 당 현종 후반에는 그 유산들을 모두 탕진하여 당 제국이 기울기 시작합니다. 이 현종 때 등장하는 역사적 인물이 바로 양귀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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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무후 건릉 앞 석상>

6. 역사는 여자들의 세상을 여화의 난이라 적다.

중국 전통 역사에서는 측천무후와 같은 여걸들의 평가가 아주 부정적입니다. 중국의 전통적인 유교사관에 입각한 남존여비 사상은 여자들을 비하함으로서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지배 사관을 계속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 남성들의 잘못된 업적, 국가적인 제도상의 미비점들을 여자로 인한 문제로 만들어, 이것을 <교훈으로서의 역사>로 삼으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예로 하, 은, 주나라의 멸망을 달기, 포사 등 미녀들 때문이라고 기록하기도 합니다. <주색>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지요. 달기가 국가를 망하게 하기 위해 <미녀와 함께 술로 담근 연못에서 마시고 놀며, 고기를 걸어놓은 나무에서 배를 채운다>는 주지육림의 이야기도 여자의 미색을 조심하라는 교훈이고, 포사가 <웃지 않는 미녀>가 되어 왕을 괴롭혔다는 이야기도 여색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당나라의 시조 이연이 새로운 국가를 새운 이야기도 수양제의 후궁과의 연정 문제였다고 하거나, 당태종의 현무문의 변이 동생의 처를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하거나, 측천무후가 등장한 것도 고종이 그녀의 여색에 빠졌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 위후와 안락공주가 무후의 뒤를 이어 여인천하를 만들려고 한 것을 독한 여자들의 쓸데없는 욕심이라고 기록한다던가, 현종의 몰락을 양귀비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기록한다던가 하는 내용입니다. 특히 당나라의 역사에는 여자의 여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이것은 당의 역사를 기록한 송나라가 철저한 유교중심의 사대부 국가였기 때문에 더욱 심한 것 같습니다.

실제 무후의 시기에는 중국 역사가 발전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개국공신등의 구세력들이 몰락하면서 새로운 과거 관료들이 등장하여 중국 사회가 점차 능력 위주의 사회로 정착되던 시기였습니다. 실제, 과거제도가 합리적으로 개편되는 것이 바로 이 무후기이니까요.

그러나, 무후의 시대가 끝나면서 중국 사회는 더욱 더 급격히 보수화되어 갑니다. 당나라 하면 떠오르는 개방주의적, 귀족주의적 성격의 국가는 태종기부터 무후 전후의 시기를 말합니다. 무후 사후, 중국 당나라에서는 북방적인 진보성은 사라져가고 점차 보수적이면서 전통 중화주의적인 사회로 급변합니다. 특히, 현종 후반기 탈라스 전투의 패배, 안사의 난 등이 발생하면서 더욱 사회는 경직되어 갑니다.

그럼 다음 장에서는 당 현종의 시기와 양귀비의 이야기를 다뤄보겠습니다. 이 시기는 무후 이후 전개된 당나라 최대의 전성기이자, 당의 몰락기가 동시에 보여지는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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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 : 측천무후의 릉과 고종의 릉>
     <우 : 측천무후의 이름이 새겨지 있지 않은 무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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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