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루묵에 대한 유래와 광해군 이야기

말짱 도루묵이라는 말 아시나요? 오늘 이야기할 주제는 말짱 도루묵이라는 말의 <도루묵>과 임진왜란시 <선조>와 <광해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1. 멀고 먼 유배를 떠나게 된 정철의 세자 책봉 문제

조선에 동인당, 서인당 등 붕당정치가 시작되고, 사림이 집권할 무렵 왕이 된 <선조>는 사림파를 적극 등용한 왕입니다. 그러나, 16세기 왕이 된 선조에게는 말하지 못할 큰 콤플렉스가 있었답니다. 그것은 선조 자신이 정통성 있는 왕위 후계자가 아니라 앞 왕인 명종과 별 상관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선조는 사실 중종의 아홉번째 서자의 세 번째 아들이었다고 합니다. 선조는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서 당시 집권층의 도움으로 왕이 되었지만, 항상 자신의 왕위계승에 대한 콤플렉스가 많았답니다. 따라서 선조는 자신의 태자만큼은 꼭 정식 왕비의 자식으로 책봉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선조의 정식 부인인 의인왕후 박씨가 아이를 낳지 못하였다는 점입니다. 선조는 후궁이 6명에, 왕자 13명, 옹주가 10명이었습니다. 정식부인이 아이를 낳지 못하자, 대신들은 각각 원하는 후궁의 왕자들을 지지하면서 국론이 분열되기 시작합니다.

이 때 좌의정 정철은 분열되는 정치상황을 막기 위해 빨리 세자를 책봉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여, 유성룡과 같이 선조의 둘째아들 광해군을 태자로 세우려고 하였습니다. 정철과 유성룡은 당시 기성사림은 서인계열이었고, 그들은 첫째아들인 임해군보다 둘째 아들인 광해군을 더지지하였습니다. 물론 둘 다 후궁의 자식이었죠. 그러나 선조는 후궁의 아들인 광해군을 왕으로 책봉할 생각이 없었고, 오히려 정철을 <왕을 넘어서는 위세를 보인다>면서 유배보내고 맙니다. 이 것이 역사상 유명한 정철의 세자책봉 사건입니다. 선조는 나이 40이 넘어서도 세자 책봉은 미루고 정실이 태어나길 기다렸던 것이지요.

이 사건으로 동인당은 확실한 집권당의 입지를 갖추게 되었고, 서인당은 입지가 좁아졌습니다. 임진왜란 직전 통신사 중 서인당 황윤길이 보고한 <일본이 침략할 것 같다>는 의견이 묻혀버리고, 이율곡의 십만양병설이 실현되지 못한 배경도 어찌보면 당시 집권당인 동인의 파워에 밀려 버린 여파도 있었을 것입니다.

2. 이 묵을 <은어>라고 불러라!

임진왜란이라는 큰 전쟁이 일어나자 선조는 서울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백성들은 후궁만을 사랑하고 백성을 나몰라라하면서 붕당 정치를 파탄으로 이끈 선조를 질타하고 왕궁에 불을 질러 버렸습니다. 선조는 도망가면서 광해군을 태자로 책봉하였지만, 광해군에게는 이 태자 책봉이 최고의 기회이자 최고의 위기였습니다.

선조는 북으로 북으로 도망을 갑니다. 이 도망생활은 아무런 준비조차 없이 급하게 떠나게 된 것이라, 피난처에서의 생활은 너무나 형편없었습니다. 훗날 동의보감을 쓴 어의 허준 등 당대 최고의 신료들도 선조의 피난생활을 편안하게 해줄 수는 없었지요. 선조는 왕으로서 체면이 말이 아니였습니다. 잠자리는 초라하고, 먹을 것도 부족하였지요.

그러던 어느 날, 배가 고팠던 선조는 한 백성에게서 어렵사리 생선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전쟁 중이라 생선 1마리도 감지덕지 하였죠. 선조는 그 생선을 요리해 먹으면서 감탄하였습니다. 배고플 때 먹었던 생선인 만큼 너무나 꿀맛이었습니다. 선조는 그 생선을 준 백성을 칭찬하면서 그 생선의 이름이 묵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선조 임금은 그 생선을 차분히 보더니 다시 말하였습니다.

<그렇구나. 맛이 뛰어난 고기이다. 이 고기의 배쪽이 은백색으로 빛나는 것이 아주 귀해 보이는 생선이다. 이 생선을 앞으로 묵이라 하지 말고 은어라 하여라>

선조 임금은 광해군의 활약으로 임진왜란의 전세가 조금씩 조선에 유리해지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광해군에게 진심어린 편지도 적습니다.

<내가 살아서는 망국의 임금이요, 죽어서는 이역의 귀신이 되겠구나. 우리 부자가 헤어져 다시 볼 수도 없없겠다. 종이에 쓰니 눈물이 앞을 가려 말할 바를 모르겠구나.>

광해군은 이 편지를 읽으면서 통곡하였고, 더 부지런히 싸웠다고 합니다.

3. 이렇게 맛이 없을 수가... 도로 묵이라고 하여라!

임진왜란이 끝나고, 다시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어느 날 선조는 피난길에 먹었던 맛있는 물고기가 생각났습니다. 선조는 은어를 잡아 수랏상에 올리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상에 올라온 은어를 맛보던 선조는 얼굴을 찌뿌렸습니다. 예전의 고생길에서 먹었던 담백한 맛이 안나는 것입니다. 다시 평안해지고, 호화로운 입맛을 찾은 왕에게 백성들이 먹는 싸구려 물고기가 입에 맞을 리가 없었습니다. 선조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렇게 맛이 없는 물고기가... 은어가 이렇게 맛이 없었다니, 이 물고기를 도로 묵이라고 불러라>

그러새 묵이라는 물고기는 도로 묵이 되었고, 이후 도루묵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우리가 흔히 고생했는데,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것을 말짱 도루묵이라고 부르죠? 이 고사는 여기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중요한 사실.... 선조의 이 고사는 그대로 광해군에게도 적용되었다는 점입니다.

선조는 전쟁이 끝나자 다시 광해군에 대한 의심이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정식 부인도 아닌 후궁 출신의 광해군이 맘에 안들었던 것이죠. 선조는 의인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5이 넘어 다시 19살의 인목왕후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습니다. 드디어 정식 왕자가 탄생한 것입니다.

당시 조선의 세자는 중국 명나라에서 형식적으로 세자 책봉을 해주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런데 중국은 광해군이 둘째아들이라는 이유로 세자 책봉을 미루었고, 선조는 광해군을 미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광해군은 실컷 고생하고 죽을지도 모를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나 천운으로 정식 왕자인 <영창대군>이 2살밖에 안 되었는데, 선조가 위급한 병에 걸린 것입니다. 선조는 광해군에게 대신 정치를 맡기려 하였습니다. 광해군은 죽었다 살아난 것이지요. 그러나 선조의 병이 다시 나아지자, 선조는 또 다시 광해군을 구박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중국의 책봉도 받지 못한 세자는 왕도 인정할 수 없다는 괴팍한 논리로 광해군을 핍박하였고, 광해군은 피를 토하고 죽으려고도 하였답니다.

그러나 다행으로 선조의 병은 악화되어 광해군이 왕이 되었습니다. 광해군은 이후 <명나라와 후금>사이에서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를 따져 적절한 중립외교를 펼치는 왕이 됩니다.

광해군이라는 자기 자식을 때에 따라 사랑하면서, 때에 따라 미워하면서 세상을 살다간 선조.... 도루묵의 이야기는 이러한 선조의 마음을 반영하면서 나온 말이 아닐까요?

- 이 글을 위해 참고한 역사도서 모음

1. 7차 교육과정 국사 교과서
  2. 한국 근현대사 누드 교과서, 이투스
  3. 조선 왕 독살사건, 이덕일 지음, 다산초당
  4. 조선의 뒷골목 풍경, 강명관 지음, 푸른역사
  5. 명강의 노트, 박원기, 배순훈, 허정 외 지음, 도서출판 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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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