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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토막 역사 6화. 조선 시대의 궁녀들 - 어떻게 살아가야 했을까?

초중고방/짧은 역사 이야기 한토막 2007/07/03 01:36

조선 시대의 궁녀들 - 어떻게 살아가야 했을까?

1. <일평생을 혼자 사는 궁녀>로 만들기 위한 눈물겨운 부모의 선택

조선시대의 궁녀는 왕의 선택을 받지 못하면, 결혼을 하지 못합니다. 조선 시대 궁궐에 사는 모든 여자는 왕의 여자로서 살아야 하니까요. 그렇다면 조선시대의 궁녀들 중에서 왕의 선택을 받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요?

10분의 1, 혹은 100분의 1일까요? 아닙니다. 조선시대 궁녀의 수는 적을 때에는 300 정도, 많을 때는 700이상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많은 궁녀 중에서 왕의 눈에 들어서 왕의 잠자리 수청을 들었던 궁녀는 10명도 채 안된다고 합니다. 왕이 몇백명의 궁녀를 모두 책임질 수는 없으니까요.

그리고 궁녀의 일이 편하지도 않았습니다. 온갖 허드렛일을 하면서도 왕실의 예법에 규제된 생활만을 해야 했고, 평생을 질시와 투기가 만연하는 궁전안에서 살아야 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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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조선시대의 일반 백성출신인 부모들은 자신의 딸이 왕궁에 들어가기를 희망했습니다. 궁녀는 국가에서 강제로 모집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들의 의사를 물어서 입궁시킵니다. 그럼 왜 자신의 딸들을 궁녀로 보내려고 했을까요?

이유는 보릿고개조차 넘기기 힘든 가난 때문입니다. 가난한 백성은 자신의 딸을 궁으로 보내어 얼마안되는 국록이라도 받고, 딸이 입에 풀칠이라도 하길 바라기 때문이었죠. 궁녀들은 어릴 때는 5-6살, 보통은 10살 정도에 궁에 들어오게 됩니다.

처음 궁에 들어온 궁녀들은 견습생 신분입니다. 이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왕실의 예법과 서법, 다도 등을 배우게 되는데, 이러한 견습 나인들을 <생각시>이라고 합니다.

견습 나인이 지나면, 성년식을 거쳐 정식 궁녀가 되는데, 정식 궁녀를 <나인>이라고 합니다. 나인이 되면 스스로 자신의 삶을 책임져야 합니다. 견습나인들이 나인을 부르는 명칭은 <항아님>이라는 칭호인데, 대장금 등 사극에서 이 칭호를 사용하는 것을 종종 보셨을 거에요. <나인>은 자신의 독립된 방을 가질 수 있고, 하녀도 둘 수 있습니다. 나인의 하녀를 <방아이>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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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왕에게 선택받아야만 산다.

궁녀들은 봉록을 받지만, 그 봉록은 보통 쓸데가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순종 때 기록을 보면 궁녀의 봉록이 190원 정도라고 하는데, 현재 화폐가치로 약 150-200만원 정도라고 합니다. 실제 왕에게 눈도장 받은 궁녀들이 아주 극소수인 것으로 보아 궁녀들은 왕의 여자라기보다는 궁전 안의 사무를 맡아보는 여성 전문직이라고 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양반집 규수들은 나인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명문가의 딸이 궁전에서 독수공방하면서 살 필요는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궁에서 혹시라도 집안의 딸을 데려갈까봐 조혼을 시키는 풍속이 생기면서 폐단이 많았답니다. 18세기 영조는 이러한 폐단을 생각해서 조혼 금지령을 내림과 동시에 양가집 규수를 생각시로 모집하지 않기로 했습니다.이후 동학농민운동과 갑오개혁 때 조혼 금지가 법제화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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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가 되기 위한 조건은 상상 외로 까다로웠답니다. 궁녀는 일단 선조에 죄인이 없고, 집안에 병에 걸린 사람이 없어야 합니다. 또 첩의 자식은 절대 안되며, 집안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 있어도 무조건 궁녀 선택에서 탈락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궁녀 선발 때 처녀성을 확인하는 절차였습니다. 왕의 여자가 부정하면 안되기 때문이지요. 이 테스트는 최소 12살 이상의 성숙한 여자에게 실시하는 테스트였는데, 앵무새의 피 한방울을 팔에 떨어뜨려 피가 묻지 않으면 처녀가 아니라고 해서 탈락시키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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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어렵게 궁녀가 되었는데, 이 중에서도 왕의 눈에 드는 궁녀는 몇백에 하나라는 점은 비극이네요. 궁녀들은 성년식을 치를 때, 결혼식도 함께 합니다. 무슨 말이냐구요?

궁녀의 성년식은 왕의 여자가 성년이 되었다는 것을 축하하는 것으로 이것은 혼례를 의미합니다. 물론 신랑인 왕은 없이 혼자 하는 결혼입니다. 궁녀의 전각에서는 궁녀들에게 사은품을 보내고, 궁녀의 부모들은 살림살이를 보내줍니다. 이 성년식, 즉 결혼은 모두의 축복을 받는 행사이지만, 평생 혼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서글픈 일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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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궁녀는 어디까지 출세가 가능할까?

궁녀도 왕실의 예법을 받고 그 위계질서가 뚜렷합니다. 보통 생각시로 출발한 10살의 궁녀가 최고 궁녀자리인 상궁까지 오르려면 최소한 40이 넘어야 합니다. 자 그럼 궁녀의 품계표를 한번 볼까요?

궁녀의 품계

궁녀의 명칭

정 5품

상궁, 상의

종 5품

상복, 상식

정 6품

상침, 상공

종 6품

상정, 상기

정 7품

전빈, 전의, 전선

종 7품

전설, 전제, 전언

정 8품

전찬, 전식, 전약

종 8품

전등, 전채, 전정

정 9품

주궁, 주상, 주각

종 9품

주섭징, 주징, 주우, 주섭궁

궁녀의 삶으로서 가장 높이 올라갈 수 있는 것은 정 5품의 상궁입니다. 특히 상궁 중에서 가장 높은 상궁은 제조상궁인데, 제조상궁은 모든 궁녀를 총괄하는 최고 상궁을 말합니다. 제조상궁은 모든 내전의 재산을 관리하고, 왕의 측근에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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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째 높은 상궁은 부재조 상궁인데, 부제조 상궁은 왕의 개인 재산을 관리하고, 내전의 창고를 관리하였습니다.

또 왕의 심부름을 담당하는 지밀상궁(대령상궁)도 파위가 있는 상궁입니다. 이 지밀상궁은 왕의 최측근이기 때문에 엄격한 심사를 거쳐서 4살 이전에 뽑아 교육시키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왕의 자식에게는 교육을 위해 보모상궁을 뽑았고, 궁녀들을 감시하기 위한 감찰상궁, 왕실 가이드 역할을 하는 시녀상궁도 있었습니다.

4. 궁녀들이 각각 맡은 임무는 무엇일까?

궁녀의
임무

품  계

해야할 업무는?

상궁

정 5품

궁중의 최상위직이다.

상의

정 5품

예의와 기거에 관한 일의 총책임자이다.

상복

종 5품

복용, 채장의 수요와 공급을 맡는다.

상식

종 5품

반찬을 만드는 품종을 찾추어 공급하는 책임자이다.

상침

정 6품

일의 순서를 정하고, 행사를 담당한다.

상공

정 6품

여공과 정과를 담당한다.

상정

종 6품

계율, 죄, 벌을 담당한다.

상기

종 6품

군내 문부의 츨입을 관장한다.

전빈

정 7품

빈객, 조견, 연회를 담당한다.

전의

정 7품

의복, 수여의 일을 담당한다.

전선

정 7품

제팽전화(과리)의 일을 맡는다.

전설

종 7품

장식, 청소 등의 일을 맡는다.

전제

종 7품

의복과 재봉의 일을 맡는다.

전언

종 7품

선전, 계품을 맏는다.

전찬

정 8품

빈객의 조견, 연식을 돕는다.

전식

정 8품

고목건즐을 맡는다.

전약

정 8품

의약 처방과 시약을 맡는다.

전등

종 8품

등촉을 맡는다.

전채

종 8품

겸백사시를 맡는다.

전정

종 8품

상정(궁정)의 일을 맡는다.

주궁

정 9품

주궁, 주상, 주각은 궁상각치우의 5계이다. 내명부 궁품의 질서를 상정하기 위한 첨설직이다.

주상

주각

주섭징

종 9품

궁상각치우의 5음계 위에 변징, 변궁의 2음계를 더하여 7음계로 구성한 것이다. 내명부 위계를 위해 첨설한 첨설직이다.

주징

주우

주섭궁

5. 궁녀는 궁중문학을 이끌어간 선도자였다.

궁녀가 궁에 들어가면 먼저 한글로 궁체 쓰기를 익힙니다. 어렸을 때부터 하는 것으로 필수사항이지요. 따라서 궁녀들은 전문적인 서예 교육을 받은 전문가들입니다. 궁녀들의 문체는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남성 문장가들의 문체와는 다르게 우아하면서도 부드러운 필체와 내용이 특징이라고 합니다. 인목대비의 궁중비사를 다룬 계축일기,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갈등을 다룬 인현왕후기는 궁정 문학의 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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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궁녀들의 복색은?

견습나인인 생각시의 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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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인의 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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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궁의 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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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말년이 쓸쓸한 궁녀들...

궁녀가 가장 출세하는 길은 왕의 성은을 입어 출세하는 것이지만, 이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대부분의 궁녀는 40정도에 상궁이 되어 위세를 떨치는 것이 소원이었지만, 이것도 일부의 궁녀들만 가능했습니다. 상궁의 자리는 한정되어 있기에 대부분의 궁녀들은 그냥 늙어가는 것이었죠.

국가에서는 국가에 가뭄이 오거나 문제가 발생하면 그것을 궁녀의 한으로 돌리곤 했습니다. 유교주의 사회이고, 남존여비의 사회인데다가 농업중심의 국가이기 때문에, 자연의 재앙을 음양의 조화가 깨진 것으로 해석하여 여자들에게 죄를 전가하는 것이지요.

가뭄이 들거나 국가 재정이 빈약해지면 쫒겨나는 것은 가장 힘없는 나인들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궁밖으로 나온 궁녀가 결혼이 가능했을까요? 궁녀들은 이미 왕과 결혼한 몸입니다. 말했지만, 성인식 자체가 결혼식이었으니까요. 조선사회에서 <여성의 재혼을 금지한다>는 사회 윤리상 궁 밖의 궁녀는 평생을 수절해야 합니다. 만약 궁녀가 남자와 불륜(?)의 관계였고 현장에서 적발되었다면 이것은 재판없이 참수가 가능했다고 합니다.

- 이 글을 위해 참고한 역사도서 모음

1. 이 포스트는 <김용숙, 조선조 궁중풍속연구, 일지사, 1987>의 내용을 참조하였습니다.
  2. 포스트의 그림과 일부 내용은
http://cafe.naver.com/nouas.cafe을 참조하였습니다.
  3. 포스트 내에 정리된 표와 일부 내용은 <테마로 읽은 우리 역사, 김경수, 이영화, 동방미디어, 2007>을 참조하였습니다.
  4. <조선의 뒷골목 풍경, 강명관 지음, 푸른역사, 2003>의 내용을 참조하였습니다.

<글 내용중에 잘못된 내용, 오탈자가 있으면 댓글을 주세요 by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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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습나인, 계축일기, 궁녀, 궁녀결혼식, 궁중비사, 나인, 대령상궁, 보모상궁, 부재조상궁, 상궁, 생각시, 성년식, 시녀상궁, 앵무새검사, 연현왕후기, 영조, 재조상궁, 조혼금지령, 지밀상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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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필마온 2007/07/12 07: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궁녀의 9품계 중 정/종9품은 상설직이 아니라 임시직이었습니다.
    궁녀는 주악과 가무를 배우지 않습니다. 궁녀의 임무는 로열패밀리의 시중 뿐입니다. 궁녀는 오락의 대상이 아니거든요.
    궁에서 잔치가 있거나 행사 때 궁녀들이 술시중을 들고 악기를 연주하거나 춤을 추지 않죠. 따라서 잔치 등 행사가 있을 때에는 외부에서 그런 분야의 전문가, 즉 기생을 불러옵니다. 그런데 벼슬이 없는 사람은 누구도 대궐에 들어갈 수 없는 규정이 있으므로 부득이 입궐해야 할 사정이 있는 평민은 임시로 참봉 정도의 벼슬을 줘서 입궐시켰습니다. 물론 퇴궐할 때는 임시벼슬을 회수하고요.
    기생도 입궐할 때는 반드시 벼슬이 있어야 하므로 임시로 발급한 벼슬이 주궁 주상 등 정/종 9품직입니다. 이름도 아뢸 주(奏)에 궁상각치우, 음악과 관련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주섭치, 주섭궁이 아니고 주변치(奏變徵), 주변궁(奏變宮)입니다.

  2. 필마온 2007/07/13 21: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패스워드를 안 넣고 올렸더니 어떻게 수정할 방법이 없네.... 뭐 어때.

    고사기 원문, 잘 훔쳐갑니다.

  3. 필마온 2007/07/13 21: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좀 보충.


    조선조 내명부의 품계와 칭호(관)는 아래와 같습니다.


    정1품 빈(嬪)

    종1품 귀인(貴人)

    정2품 소의(昭儀)

    종2품 숙의(淑儀)

    정3품 소용(昭容)

    종3품 숙용(淑容)

    정4품 소원(昭媛)

    종4품 숙원(淑媛)


    여기까지는 임금의 후궁이므로 맡은 일이 없고, 실제 궁의 살림은 정5품 상궁 이하가 맡아서 합니다.


    ♧ 정5품 상궁(尙宮) 상기와 전언을 통솔..

    상의(尙儀) 일상생활의 모든 예의와 절차를 맡았으며, 전빈과 전찬을 통솔

    ♧ 종5품 상복(尙服) 의복과 수로 무늬놓은 채장을 공급하고, 전의와 전식을 통솔.

    상식(尙食) 음식과 반찬을 관리하였으며, 전선과 전약을 통솔.

    ♧ 정6품 상침(尙寢) 왕을 일상으로 뵐 때와 왕이 옷을 입고 먹는 일의 진행을 맡았으며 전설과 전등을 통솔.

    상공(尙功) 여공(女功)의 과정을 맡았고, 전제와 전채를 통솔.

    ♧ 종6품 상정(尙正) 궁녀의 품행과 직무단속 및 죄를 다스림.

    상기(尙記) 궁내의 문서와 장부의 출입을 담당.

    ♧ 정7품 전빈(典賓) 손님 접대, 신하가 왕을 뵐 때 접대, 잔치 관장, 왕이 상을 주는 일 등.

    전의(典衣) 의복과 머리에 꽂는 장식품의 수식을 맡음.

    전선(典膳) 음식을 삶고 졸여 간에 맞는 반찬을 만듦.

    ♧ 종7품 전설(典設) 장막을 치고 돗자리를 준비하며 청소하는 일과 물건을 베풀어 놓는 일.

    전제(典製) 의복 제작.

    전언(典言) 백성에게 널리 알리고 왕에게 아뢰는 중계구실 담당.

    ♧ 정8품 전찬(典贊) 전빈과 같음.

    전식(典飾) 머리를 감고 화장하는 일과 세수하고 머리빗는 일을 담당.

    전약(典藥) 처방에 따라 약을 달임.

    ♧ 종8품 전등(典燈) 등불과 촛불을 맡음.

    전채(典彩) 비단과 모시 등 직물을 맡음.

    전정(典正) 궁관의 질서를 바르게 하는 일을 도움.

    ♧ 정9품 주궁(奏宮) 음악에 관한 일을 맡음.

    주상(奏商) 음악에 관한 일을 맡음.

    주각(奏角) 음악에 관한 일을 맡음.

    ♧ 종9품 주변치(奏變徵) 음악에 관한 일을 맡음.

    주치(奏徵) 음악에 관한 일을 맡음.

    주우(奏羽) 음악에 관한 일을 맡음.

    주변궁(奏變宮) 음악에 관한 일을 맡음.


    그 아래에 무수리(방아이).


    이상은 왕에 딸린 것이고, 세자에게는 따로 내명부가 있었습니다.


    정1품 빈(세자의 정실부인)

    종2품 양제

    종3품 양원

    종4품 승휘

    종5품 소훈

    종6품 수윤, 수칙

    종7품 장찬, 장정

    종8품 장서, 장봉

    종9품 장식, 장의


    왕비를 제외하고 궁 안에 근무하는 여자를 통칭해서 내명부, 나인, 궁녀, 궁인, 여관, 여시, 홍수라고 부릅니다.
    이 중 종4품 숙원 이상은 대개 임금의 숙은을 입은 궁녀인 후궁이므로 조용히 몸조심만 할 뿐, 실제 궁의 살림에는 관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실질적으로 궁녀들을 통제하고 지휘하는 사람이 정5품 상궁입니다.

    위에서 보인 다양한 궁녀의 명칭은 의식 때 직무를 나누어 처리할 때에나 쓰이고 평상시에는 단지 '상궁'과 '나인'의 두 종류로 나뉩니다.
    여기에서 나인이란 궁중에서 왕과 왕비의 시중을 드는 종5품 이하의 궁인직 여인을 말합니다. 궁인직 여인은 보통 7~ 8세에 입궁하게 되는데 어릴 때에는 '애기 나인'으로 불리다가 18세 이상 성인이 되서 관례를 치르고 나면 비로소 나인(항아님)이 됩니다. 나인은 직책에 따라 지밀나인, 침방나인, 수방나인, 세수간나인, 생과방나인, 소주방나인, 세답방나인의 7개 분야로 나누어 궁중 안살림을 각각 분담하여 처리하였습니다.

    입궁 후 대체로 35∼36년이 되면 정5품의 상궁 봉첩을 제수받게 되어 이 때 부터는 상궁이라 불리며 임금의 숙은을 입지 않는 한 정4품 이상으로는 승급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7세에 입궁한 애기나인이 상궁이 되려면 빨라도 40세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상궁은 그 직책에 따라 다음과 같이 이름이 붙고 등급이 나뉩니다.

    ① 제조상궁: 상궁 중 가장 지위가 높습니다. 그 직책은 내전의 어명을 받들며, 대궐 안살림을 관장하므로 권세를 쥔 상궁도 많았다고 합니다.
    자격은 궁녀 중에 연조가 오래되고 위품이 있고 인격이 높아야 합니다. 학식이 많고 수많은 궁녀를 통솔할 수 있는 영도력이 있어야 하고 인물도 출중하여야 하고요.
    제조상궁은 단 1명인데 권세가 대단하여 제조상궁이 움직이면 반드시 2인 이상의 나인이 붙어 수행했지 혼자 다니는 법은 없으며 식사를 임금의 수랏상과 가짓수를 꼭같이 했다합니다. 다만 분량이 좀 적었을 뿐이라는군요. 굉장하지 않습니까?

    ② 부제조상궁: 제조상궁의 버금가는 위치이며 제조상궁이 세상을 떠나면 그 자리를 잇습니다.대궐 안살림의 장부와 곳간 관리의 실무를 관장하였습니다. 보석과 의식주에 걸친 왕의 귀중품은 물론 수라에 쓰이는 반상기용인 은기(銀器), 자기(磁器) 및 유기(鍮器)와 비단 등이 있는 아랫곳간의 물품들의 출납은 부제조상궁의 담당입니다.

    ③ 대령상궁: 지밀상궁이라고도 하며, 대전에서 잠시도 떠나지 않고 왕과 왕비를 모시는 상궁입니다.

    ④ 보모상궁: 왕자나 공주/옹주 등 왕녀의 양육을 도맡은 나인들의 총책임자로서 동궁(東宮)을 비롯하여 각 왕자녀궁에 1명씩 있었습니다. 단, 동궁에는 2명.

    ⑤ 시녀상궁: 왕이나 왕비 곁에서 왕가에서 관리하는 책들을 관장하고 글을 읽거나 문서를 작성하는 일을 하였으며 왕실의 잔치 때 시중을 들거나 왕실 대소사를 현장에서 관리하고 내외명부 부녀자들에 대한 감사도 하는 등 현장에서 실무를 직접 담당하였습니다. 봉명상궁이라고도 합니다.

    그외에 각 처소마다 뚜렷이 직함이 붙지 않은 상궁이 7,8명이 있어서 그 아래의 나인들을 총괄하고 처소에 대해 책임을 집니다.

    상궁 첩지를 받으면 궁안에 독방을 하나씩 주고 따로 세간을 내주며 따로 밥짓고 빨래하는 하녀를 두고 살림을 하는데 이 일을 하는 사람을 각방서리 또는 방아이라 합니다.

    제조상궁은 실제 궁에서 부를 때는 '큰방상궁', 부제조상궁은 '아릿꼬(阿里庫,下庫)상궁'이라고 불렀다 합니다. 그리고 상궁이 되기 전에는 서로 항아님으로 부르고 불리며 상궁이 되면 마마님으로 불립니다.

    복장은 상궁 이상은 당의를 입고 그 이하는 평상복이었습니다. 따라서 일반 항아들이 궁 밖에 나가도 여염의 여자들과 구분할 수 없습니다. 상궁 이상은 머리에 첩지를 했다 하는데 첩지에 따라서 품계를 알 수 있었다고 합니다만 지금 그 첩지가 구체적으로 어떠했는가는 자료가 거의 사라지고 없습니다.

    드라마 대장금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아시아권에서 인기라 하는데 이 드라마에서, 물론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역사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지만, 가장 큰 오류는 궁녀들이 수랏간에서 음식을 만든다는 설정입니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실제 대궐에서 음식을 만드는 사람들은 궁녀가 아니라 모두 남자들이었습니다.
    이조 산하에 대궐의 그릇 등 기물을 책임진 사옹원이ㅆ는데 사옹원 소속의 각색바치(신분은 천인)들이 대궐의 요리사였습니다.
    장을 봐오고 물을 긷고 설거지를 하는 사람들이 모두 각색바치인데 궁녀들이 주방에 들락거릴 일은 밤에 출출할 때 몰래 지짐이를 부치거나 감자를 삶을 때 뿐이었습니다.

    수라간에서 밥을 짓는 일은 반공(飯工)이 담당하였고, 생선 요리는 자색(炙色), 두부 요리는 포장(泡匠), 고기살 요리는 별사옹(別司饔), 떡은 병공(餠工), 술은 주색(酒色), 차는 차색(茶色) 등이 담당하였으며, 각자의 특장에 따라 책임지는 요리가 달랐습니다. 이들을 관리하는 책임자(주방장)는 반감(飯監)이라 했습니다.
    각색바치들은 궐 밖에서 출퇴근을 했는데 신분이 천인이었지만 모두 벼슬을 가졌으며 정2품에 오른 반감도 있었다 합니다.

    순종 때 일본이 궁의 살림을 확 줄이자 예산절약을 위해 각색바치들을 모두 내보내고 궁녀들이 음식을 하기 시작했으니 궁녀들이 수랏간에 들락거린 것은 불과 몇 년 뿐입니다.

    • BlogIcon 히스토리 2007/07/12 09:49  댓글주소  수정/삭제

      정말 대단하시군요.
      조목조목 많은 것을 배워봅니다.
      종종 오셔서 잘못된 부분들을 지적해 주시고,
      좋은 내용들을 많이 첨부해 주세요.
      필마온님, 감사드립니다.

  4. 이후리 2007/07/16 00: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국사 중에서 중요한 부분의 하나라고 하면 발해사(渤海史,698~926)를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행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는 발해사를 아주 빈약하게 다루고 있는 듯한 느낌 입니다. 뭐,자료가 빈약해서 그런것은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발해가 멸망하고 난 후의 역사는 거의 다루지 않고 있더군요. 고등학교 사회과 부도에 보면 지도로 정안국(定安國) 등 발해의 부흥운동사가 나오긴 나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교과서의 내용 입니다. 발해는 926년에 거란의 기습적인 공격에 의해 忽汗城(홀한성)이 점령 당함으로써 나라를 세운지 228년만에 멸망하고 맙니다(거란 즉,요나라는 발해를 무력으로 멸망시켰으며 이로인해 200년간에 걸쳐 벌어진 발해유민들의 항쟁으로 혹독한 댓가를 치룬 왕조 임). 그러나 발해의 유민들은 줄기차게 나라를 되찾기 위한 투쟁을 이어 갑니다. 이것이 1115년 金
    (1115~1234)나라가 일어나기 전까지 190년동안 이어집니다. 이러한 역사를 교과서에서는 찾아볼수가 없으니 참 뭐라 말할수가 없군요. 발해의 항쟁사도 분명한 우리 한민족의 역사 입니다. 우선 항쟁을 이끈 주체가 발해의 유민들 이었고 그 땅 역시 발해의 땅 이었습니다.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어느나라 사람들인지,이러한 부분에 대해 매우 소홀한건지,아니면 무시하는건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식민사관에 너무 찌들어서 입니까?
    그리고 발해사외에 또 하나 더 있습니다. 중국 당나라의 역사서인 당서(唐書)에는 이 정기(李 正己)라는 인물에 관한 열전(列傳)이 실려 있습니다. 열전에 그 이름과 그의 생애가 실려 있다는것은 그 인물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 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열전에 보면 그 첫 머리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이 정기는 고려인이다, 李 正己,高麗人也...>
    고려라 함은 고구려를 줄여서 부르던 이름 입니다. 분명히 이렇게 정확하게 기록돼 있는데도 현행 국사교과서에는 그 이름을 찾아 볼래도 찾을수가 없더군요. 우리는 고 선지(高 仙之)라는 인물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알고 있습니다(고선지와 이 정기는 같은 시기에 활동했음. 고 선지 장군은 안록산의 반란<755년>때 당나라 사람의 모함을 받아 진중에서 참수 당했고 이 정기는 732년에 태어났다). 고 선지 장군에 관한 것도 당나라의 역사서에 실려 있습니다. 대단한 명장 이었죠. 그런데 이러한 인물이 유물ㅇ을 통해서 세상에 알려 졌나요? 아닙니다. 기록에 의해서 세상에 알려진 것입니다.역사라는 것이,기록과 유물을 통해서야만 그것이 검증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정기가 통치했던 땅은 지금의 중국 산동성(山東省)과 그 일대 지역 이었습니다(당시 인구가 500만에,병력은 10만,그 면적은 통일신라보다 넓은 지역 이었음). 이 정기에 관한 유물을 발굴 하려면 한국 사람이 중국땅에 가서 그곳을 파헤쳐야 하는데 한국인이 중국에가서 그곳을 파헤칠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기록을 봐야 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다른 나라의 기록이라해도 버젓하게 고구려인이다라고 못박고 있는데 이를 외면하는(?) 우리나라의 역사학자들이 참으로 미워지네요. 얼마전,KBS에서는 한국사전(韓國史傳,토요일 저녁 8시 방송)에서 이 정기에 관한 방송을 내보냈습니다. 공영방송에서 이러한 내용을 방송 했다는것이 한가닥 희망을 가지게 하더군요.
    또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백제에 관한 것인데,백제는 분명히 요서지방과 산동지방에 왕국을 건설해 그곳에서 북조의 하나인 북위(北魏)와 10년간에 걸친 전쟁을 치룬 대단한 강국 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중국 동해안 지방을 차지해 그 위세를 중국천하에 떨쳤습니다. 그런데 교과서에 보니까,단지 <진출 進出>했다라고만 표기해 놨던군요. 과거에 비해 현저하게 발전한 표현 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많이 부족하다라는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단군조선에 관한 기록 입니다. 단군조선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실려 있습니다. 정사인 삼국사기에는 그 이름도 나오지 않습니다. 보니까,단군조선을 <신화 神話>로만 치부하고 있더군요. 단군조선을 신화로 만든 장본인들은 저 바다건너 오랑캐인 일본놈들 입니다. 그들은 일제강점기 시대에 우리민족의 얼과 정신을 말소시키기 위해서 실존했던 단군조선을 신화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런것을 아직도 신화라고만 치부하고 있으니,통탄할 노릇 입니다. 일본놈들은 일제강점기때 한국의 고서(古書) 20만권을 죄다 불살라 버렸습니다. 그 20만권의 고서중에 얼마나 대단한 기록들이 들어 있었을까요?
    이런 여러가지 문제를 우리는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합니다. 중국놈들이 우리를 보고 뭐라 하겠습니까 엄연히 자기네들 역사서에 한국인이라고 표현해 놨는데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한국인들을 바보라고 욕할지 누
    가 압니까. 인터넷 어떤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까 중학교 2학년생이 현행 국사 교과서의 문제점을 지적하고는 불쌍한 대한민국 이라고 올린 글을 본적이 있습니다. 그 학생도 선생님들의 말을 듣고 그러한 글을 올렸겠지만 중학교 2학년생이 대한민국이 불쌍 하다고 하네요. 허허...참... 끝.

  5. 이후리 2007/07/16 00: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임진왜란(1592) 기간중,조선은 왜군의 무자비한 공격으로 수세에 몰려 있었습니다. 이때,북쪽 여진족의 추장인 애신각라 누르하치(愛新覺羅)가 선조에게 편지를 보내어 원한다면 조선에 3만명의 원병을 파견해 도와줄 수 있다라고 합니다(내용중에 어버이의 나라를 침략한 무도한 왜군을 응징 하겠다...). 이걸 어찌보면,자국의 이익에 의한 편지인데(왜군이 조선을 완전히 점령하면 만주로 나올것이 뻔하므로 자국의 이익에 의한 편지라고도 볼 수 있음--이 편지를 받은 선조와 백관들은 여진족이 오랑캐이니 믿을수 없다라고 하면서 이를 없었던 일로 처리함) 또 한편으로는 누르하치가 진정으로 조선의 형편을 염려해 보낸 편지라고 생각(?) 합니다. 여진족은 엄밀하게 따지면 고구려와 발해인들의 후손 이라고 생각 합니다. 우선,이상한것이 누르하치의 성씨(性氏) 입니다. 애신각라. 신라를 사랑하고 생각한다라는 뜻으로 풀이 됩니다. 왜 그 많고 많은 글자중에 이런것을 그들의 성씨로 삼았을까요?????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그냥 지나칠수가 없어서 올려 봅니다.
    애(愛-사랑할 애)
    신(新-새로울 신)
    각(覺-깨달을 각)
    라(羅-그물 라)

  6. 필마온 2007/07/17 06: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누르하치가 선조에게 조선이 <어버이의 나라 云云>한 글을 보냈다는 이야기는 인터넷에 많이 떠도는데 그 출전이 어디인지 궁금합니다. 실록입니까? 야사입니까? 어느 쇼비니스트 누군가의 머리 속입니까?
    임진왜란 때 누르하치가 선조에게 글을 보내 <군대를 이끌고 조선에 처들어가서 조선을 휩쓸어버리겠다>고 협박한 일은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에 지원군을 보내겠다는 글을 보낸 일은 없습니다.
    누르하치가 명의 병부상서 석성에게 자기 군사 3만을 명군에 포함시켜 조선에 출병시켜달라고 요청했으나 석성이 거부했습니다. 이것이 전부이고 누르하치가 조선을 어버이의 나라 운운 한 일은 없습니다.

    • BlogIcon 히스토리 2007/07/17 09: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듣고 보니 저도 궁금하군요.
      그 문서의 출처를 찾을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