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토막 역사 8화. 조선시대 신참 길들이는 여러 가지 방법들

1. 조선 시대 신참 길들이기가 있었다.

우리 나라 대학생들은 선후배의 관계가 상당히 엄격하고, 위계 질서를 중요시 합니다. 중학교, 고등학교에서도 1년 선배는 직장 1년 선배보다도 더 크게 보입니다. 하늘과 같은 선배님이지요. 대학에 들어가면, 폭탄주를 마시고 신입 신고를 해야하며, 어느 곳에 가더라도 일종의 통과의례라는 것이 있습니다. 일종의 성인식도 그런 측면이 있죠. 그렇다면 조선시대에도 이런 것들이 있었을까요?

당연히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에 과거시험에 합격한 사람들도 예외없이 신고식을 치루어야 했습니다. 아무리 점잖은 양반이라도 신입에게 텃세를 부르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겼지요.

일반 과거 예비시험인 소과에 합격하여 생원, 진사가 된 경우에는 첫 번째 관문으로 먹을 것을 대접해야 합니다. 이것을 접방례라고 합니다. 이것은 선배격인 생원, 진사들이 이제 막 합격한 합격자의 집에 쳐들어가서 먹을 것을 대접받는 것이었습니다. 요즘으로 따지면 한턱 크게 쏴~~~ 같은 것이지요.

만약 조선시대 최고 학부인 성균관 대학에 입학했다면 대학 선배들에게 크게 한 턱을 꼭 내야 합니다. 그것도 아주 크고, 맛나게 대접해야 학교 생활이 편하였습니다. 선배들을 대접하지 않았을 때 왕따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크게 대접을 해야 학교생활이 편하였겠지요.

관청에 부임한 경우에는 예비신고식(허참례), 정식신고식(면신례)를 꼭 거쳐야 했습니다. 관청에 막 온 신참을 신래라고 불렀는데, 신래는 선배 관료들에게 생선과 닭을 바쳐야 했습니다. 신참들이 선배들에게 낸 음식이나 재물은 선배들의 음주 파티에 이용되었습니다. 선배들이 음주파티를 할 때 신참들은 최고참 선배에게는 기생 2명을, 나머지 선배들에게는 기생 1명씩을 대접해야 했습니다.

또 음식의 숫자도 장난이 아니였습니다. 예로 청주가 3병이면, 물고기 3마리, 과일 3개, 나물 3반 등등 백여가지의 먹을 것을 모두 3개의 숫자로 맞춰야 했습니다.음식을 제대로 맞추지 못해도 벌을 받습니다. 3의 숫자로 주연을 5번을 한 뒤, 다시 5의 숫자로 음식을 준비하여 3차례 잔치를 벌이고, 다음에는 7의 숫자로 잔치를, 다음에는 9의 숫자로 잔치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허참연, 면신연이라는 잔치를 해야 신고식이 끝납니다. 엄청난 권세가가 아니면 사채를 빌려서라도 잔치를 해야 합니다. 이 잔치를 제대로 못하면 소위 말하는 <왕따>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조선 시대의 관료제는 이 신고식의 순서대로(관직에 오른 순서대로) 승진이 이루어집니다. 물론, 행수제라고 해서 예외도 있지만 극히 일부이고, 이 순서를 꼭 지킵니다. 따라서 조선의 관료들은 이 신고식에서 잘못 보일 수가 없는 것이지요.

이 때 신참자는 자신이 취임했다는 인사를 돌기 위해 자신의 신상을 적은 종이를 자신이 아는 모든 선배와 아는 이들에게 돌려야 했습니다. 문제는 물자가 넉넉하지 않았던 조선시대에 이 종이 값도 만만치 않았고, 그 비용 중 선배자가 부담하는 비용은 전혀 없었다고 합니다.

신참자는 선임자에게 생각보다 많은 유흥비를 제공해야 했고, 이러한 돈으로 관직자들은 음주가무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신참자에게 걷은 돈은 선임자들이 훗날 행사를 위해 요긴하게 쓰입니다. 복숭아 꽃이 피는 시기 교서관 행사(홍도연), 장미가 피는 시기 예문관 행사(장미연), 성균관에서 하는 파티(벽송연) 등의 잔치는 원래 국왕이 음식을 내려줄 때 하던 파티였으나, 점차 신참자들이 내는 돈으로 자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과거에 합격한 경우 보통 하인들을 거느리고 길을 나서서 나팔과 꽹과리를 동원해 마을을 도는데 이것도 신고식을 끝마친 관리들만 할 수 있는 특권이었습니다. 그러나, 신고식을 마친 뒤라고 해도 선배들에게 찍히거나 공손하지 않은 경우에는 과거급제나, 취임을 했다는 이유로 마을을 돌 수가 없었습니다. 또, 마을을 돌던 중이라도 중간에 선배를 만나면 바로 말아세 내려 공손히 예를 갖추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새로 과거에 합격한 자나, 새로 임관한 자가 선임자에게 음식 등을 제공하여 그들과 겨우 친하게 지낼 수 있을 때까지 겪는 과정을 <신래첨학>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원래 새로 들어온 신참의 기를 꺽어 놓아서 상하의 구분을 확실히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 관직에 처음 나서는 사람들은 십여일이 지나야 선임자와 같이 앉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처음에 이러한 신고식은 신참자에 대한 정신교육식으로 처음에는 장난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문신들에게서 주로 있었던 신고식이지요. 그러나,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그 장난은 장난이 아니게 되고, 그 신고식의 범위가 문신, 무신, 하급관리까지 확대되었습니다. 요구되는 신고식의 강도도 점점 강해져갔죠.

처음에 조선시대 일반 관직의 신참들은 보통 먹을 것을 가져다 주는 신고식을 했네요. 먹을 것이 중요하고 귀한 시대인만큼 이런 신고식을 했겠죠? 하지만, 그렇다고만 생각하기에는 도가 좀 지나칩니다. 조선시대에는 관직의 위계질서를 잡기 위한 방편으로 좀더 잔인한 신고식을 많이 했었습니다.

2. 신참자 치르는 의식과정

1, 새로 들어오는 관리는 신기한 이야기나 색다른 음식을 10가지 이상 내놓아서 연회를 베풀어야 합니다. 만약 기생도 없고, 음악도 흥이 나지 않으면 선임자들은 후임자를 질타합니다.

2. 연회가 맘에 들지 않을 때 신참자들은 무거운 나무를 들어야 하는데 이것을 들지 못할 때 신참자는 무릎으로 선임자에게 기어가 꿇어 앉고 선임자는 신참자를 때립니다.

3. 신참자에게 검정이 묻은 부엌벽을 문지르게 하여 손이 까매지면 손을 씻게 하는데, 손을 씻은 물을 신참자가 먹게 합니다.

4. 음식을 대접받는 선임자가 신참자의 집에 가면, 신참자는 사모를 거꾸로 쓰고 선임자를 맞이합니다. 신참은 두 손을 뒤로 하여 가장 비굴한 자세로 선임자를 맞이합니다.

5. 새로 부임한 신참자에게 선임관리가 얼굴에 똥칠을 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똥 뿐 아니라 미친년의 오줌물, 먹물, 돼지우리의 찌꺼기 등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상태로 광대 놀음을 해서 선임자의 마음에 들어야 했습니다.

6. 겨울에는 차가운 물에 손을 넣고, 여름에는 뜨거운 볓을 쬐게 하며, 매질까지도 합니다.

7. 선임자가 웃으라고 하면 웃고, 화내라고 하면 화내고, 개의 교미 시늉을 하라면 시늉을 해야 합니다. 만약 이러한 일을 수치스럽다라고 하며 못하면 더 큰 신고식을 해야 합니다. 사모관대를 한 채 연못에 뛰어들어 고기를 잡는 흉내를 내기도 합니다. 이렇게 동물등으로 별명을 붙여주고 이를 흉내내게 합니다. 이 때에도 얼굴 등에 오물을 바릅니다.

8. 최고 상관은 기생 2명을 끼고 놀면서 신참자를 욕하고 희롱합니다. 이 때 한림별곡 등의 노래를 부릅니다.  희학이라고 하여, 연회 중 신참이 간단한 게임에 지면 벌주를 먹이고 신참을 욕합니다.

9. 관련있는 벼슬 이름을 외우게 하고 그대로 읽게 하고, 다시 거꾸로 읽어 올라가게 합니다.

10. 연회가 끝난 다음 날, 신참은 연회에 참석하지 못한 선임자에게 정중히 인사를 하는데, 선임자는 신참에게 목침을 집어 던집니다. 만약 신참이 달아나지 않으면 한 대 맞습니다.

11. 신참자의 이름을 거꾸로 써 불에 태운 다음 그 재를 물에 타 먹이기도 하여, 구토를 하게 합니다.

12. 초도라고 하여 신참자는 열흘에서 한달 이상 연속으로 숙직 근무를 맡깁니다.

3. 신참을 괴롭히지 말라!

이 신고식은 고려 이전의 문서에서는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고려 말, 무신정권과 원 간섭기를 거치면서 과거가 공평하지 못하고, 신분이 문란해 지면서 이런 관습이 생겼다고 합니다.

세종은 이러한 신고식이 가혹하다는 이유로 뿌리를 뽑기 위해 신참을 괴롭히는 자들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하옥시킨다고 하였습니다. 실제 하옥당한 고관들도 있습니다.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는 신참자를 괴롭히는 자는 60대의 곤장형에 처한다는 법률도 있었습니다. 단종 대는 정윤화라는 신참자가 가혹한 신고식 때문에 죽기도 하여, 당시 신고식과 관련된 권신들이 태형을 맞고 파직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조선 성종은 신참자에 대한 신고식이 가혹하다고 하여, 이런 신고식을 금지시키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종 때 잠시 이런 풍속이 없어졌을 뿐, 이후에도 계속 신고식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신고식이 불합리하다면서 저항한 신참들도 있습니다. 태종대 박이창은 공손하지 않다는 이유로 선배들이 신고식을 하지 않자 스스로 자신의 자리에 앉아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율곡 이이 선생은 승문원에 발령을 받았으나, 이러한 풍습에 수치스러워해서 관직을 버렸고, 선조에게 이 풍습의 폐단을 적어 상소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신고식을 전통이라고 여겼을까요? 신고식은 양난 이후 영정조 때까지도 계속 조선의 문제점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신고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