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답변자료실) 백제 성왕이 552년 일본에 보낸 국서의 내용과 일본 불교의 수용 과정

(답변자료)백제 성왕이 552년 일본에 보낸 국서의 내용

1. 국서의 내용 정리

방명록에 문의하신 자료입니다. 백제 성왕이 일본에 보낸 문서에 대한 해석본입니다. 문제는 완역본을 제가 친구 빌려줘 버려서리... 완전히 한글로 된 부분이 없네요. 한자로 된 문서가 있어서 대충 해석을 했는데, 좀 이상하더라도 그냥 읽어주세요. 제가 원문을 알아서 원 뜻은 대충 통할거에요.

2. 백제 성명왕이 552년 일본에 보낸 국서 - 일본서기에 작성된 내용

흠명 13년(552) 10월, 백제 성명왕(聖明王, 성왕) 이 서부희씨(西部姬氏) 달솔(達率)인 노리사치계(怒唎斯致契) 등을 보내어 석가불금동상 1구와 번개(幡蓋) 약간, 경론(經論) 약간 권을 바쳤다. 따로 표를 올려 불법을 유통시키고 예배하는 공덕을 다음과 같이 찬양하였다.

"이 법은 여러 법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입니다. 이해하기 어렵고 들어가기도 어려우니, 주공(周公)과 공자(孔子)라도 오히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법은 헤아릴 수 없고 끝이 없는 복덕(福德)과 과보(果報)를 생겨나게 할 수 있으며, 나아가 위 없는 보리(菩提)를 이루게 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백제왕 신 명은 삼가 노리사치계를 보내어 황제의 나라를 받드니, 기내(畿內)에 유통하시어 부처가 '나의 법이 동쪽으로 흘러갈 것이다'라고 한 가르침을 실현시키는 것입니다"

이날, 천황은 다 듣고 나서 기쁨에 말씀하시기를, 백제 사인에게 조를 내리셨다.

"짐이 옛부터 지금까지 아직 이렇게 미묘한 법을 들은 일이 없다. 그러나 짐이 혼자서는 결정하지 아니할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군신에게 하나하나 물었다.

- 니혼쇼키 권19, 흠명천황 13년 10월 -

3. 기사에 대한 해설 참조

백제 성왕 30년 10월, 노르사치계를 왜(일본서기의 대화왜)에 파견하여 불교 포교에 대해 말한 기사입니다. 그런데, 일본 서기의 내용은 이 내용에 대해 약간 사실과 다른 기술을 했을 수 있습니다. 일단, 일본서기가 일본 왕실을 기준으로 한 내용이기 때문에 백제와 일본사이의 일들은 모두 <신하인 백제의 왕이 대화왜인 왜국 천황에게 무엇인가를 바치고 경의를 표하다>는 관점에서 쓰여진 것이지요. 여기서도 백제 성왕이 일본에 불교를 전파해 준 것을 <성왕이 글을 올려 일본에 불상 등을 헌상하였다>는 입장에서 글이 쓰여지 있습니다.

일본의 천황은 불법을 전수해준 것을 대환영(기쁨에 넘침)하면서도, 혼자 결정할 일이 아니다는 식으로 미룹니다. 이것은 당시 천황이 불법 전수를 단독으로 결정할만큼 강력한 권력을 가진자 가 아니였다는 점을 반영하면서, 고대 일본이 야마토 시대이후 호족 연합적인 성격이 강하였음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백제는 오경박사나 승려 등을 파견하여 일본에 문화전파를 해 주었으며, 실제 일본서기의 기사를 다시 해석하면 말투나 분위기가 좀 바뀌어야 할 것 같네요.

4. 당시 상황에 의해 재조합된 기사라면...

만약 백제의 기록서가 남아있다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을 것입니다.

성명왕 30년(왜 흠명 13년) 10년에 성명왕은 달솔 노리사치계 등을 대화왜에 파견하였다. 성명왕은 석가상과 경론 약간을 백제에 하사하였다. 사인이 말하기를, "성명왕은 왜에게 불교를 전하며 큰 베품을 내린다. 불법으로 너희가 진정한 깨달음을 얻기 바란다. 아울러 우리와의 관계를 계속 지속하였으면 한다." 라고 전하였다.

흠명은 대단히 기뻐하며 성명왕의 하사품을 받아보았다. 그러나 본인 단독으로 이 문제를 결정할 수 없으므로 두루 이야기한 이후에 결정하겠다고 사인에게 전하였다.

<문제는 백제의 기록서는 지금 전해지는 것이 없다는 것이죠. 아쉬운 일입니다. 그냥 이런 내용이 아니였을까 적어봅니다.>

5. 일본의 불교 전래 문제

일본의 불교는 552년 위 문서에 기록된 시기에 전래되었다는 설과 538년 전래설이 있습니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공식 전래 이전부터, 한반도 도래인들에 의해 불교가 숭배되고 있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한반도의 불교 역시 국가가 공인하기 이전부터 이미 민간이나 왕실에서 불교를 알고 있었죠.

한반도와 일본 등 불교가 전래된 국가들의 공통점은 불교 전래 자체가 정치적인 논쟁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특히 중국과 먼 남방일수록 불교 전래로 인한 국왕권과 귀족권의 갈등의 골이 깊었습니다.

신라는 보편적인 왕권을 옹호하는 불교를 수용하고자 했을 때, 귀족들의 격렬한 반발이 있었습니다. 결국 이차돈의 순교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불교가 수용됩니다.

일본에서의 불교는 더욱 더 큰 문제를 초래합니다. 일본의 고대국가는 호족들이 연합한 야마토 정권이었기 때문에 불교의 수용 자체가 호족연합국가를 국왕일원적 국가로 재편하고자 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따라서 당시 집권 호족이었던 모노노베 일가는 불교 수용을 거부하면서 국왕에게 불교는 안된다는 건의를 올립니다. 반대로, 왕권을 옹호하는 호족세력인 소가 일가는 불교 수용을 지지하면서 국왕권 강화가 시대적 흐름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결국 흐름은 소가 일가에게 흐릅니다. 소가 일가는 불교를 수용하면서 한반도의 선진적 문화와 불교 문화를 받아들였고, 체제에 안주하는 모노노베 일가를 몰아내었습니다.

소가 일가의 소가노 우마코는 모노노베 일가를 축출하고 소가 일족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화를 추진합니다. 우마코는 일본 최초의 여제인 스이코 천황을 내세워 개혁을 추진하였는데, 이 스이코 천황을 도와 셋쇼로서 조정을 지배하도록 허락받는 소가 일가의 황태자가 바로 <쇼토쿠 태자>입니다.

쇼토쿠 태자는 왕인, 아직기 등 고구려인과 백제인을 스승으로 모시고, 불교를 적극 수용하면서 왜 왕실의 중앙집권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쇼토쿠 태자는 진정한 중앙집권은 <천황중심>이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뿌리이자 자신을 지원해준 소가 일가마저 몰아내고, <호족이 없는 진정한 천황 일가>를 구상합니다. 그는 관위 12개조, 헌법 17조 등을 만들고, 소가 일가를 견제하였습니다. 그러나, 천하를 주름잡는 호족세력인 소가 일가를 누를 수는 없었습니다. 쇼토쿠 태자는 소가일가를 누르지 못하고 불교에 빠져 말년을 보내다가 성불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