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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최치원, 설계두의 골품제 모순 비판

 

최치원과 설계두 : 골품제의 모순 비판

최치원이 서쪽으로 당에 가서 벼슬을 하다가 고국에 돌아왔는데 전후에 난세를 만나서 처지가 곤란하였으며 걸핏하면 모함을 받아 죄에 걸리겠으므로 스스로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한탄하고 다시 벼슬할 뜻을 두지 않았다. 그는 세속과 관계를 끊고 자유로운 몸이 되어 숲 속의 강이나 바닷가에 정자를 만들고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으며 책을 벗하여 자연을 노래하였다.

신계두는 신라의 귀족 자손이다. 일찍이 친구 네 사람과 술을 마시며 각기 그 뜻을 말할 때 <신라는 사람을 쓰는 데 골품을 따져서 그 족속이 아니면 비록 뛰어는 재주와 큰 공이 있어도 한도를 넘지 못한다. 나는 멀리 중국에 가서 출중한 지략을 발휘하고 비상한 공을 세워 영화를 누리며, 높은 관직에 어울리는 칼을 차고 천자 곁에 출입하기를 원한다>라고 하였다. 그는 621년 몰래 배를 타고 당으로 갔다.

                                                                                         - 삼국사기 -

사료해석 : 골품제는 능력과는 관계없이 골품에 따라 정치, 사회적 진출에서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특권과 제약이 부여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일정한 관직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을 규정한 관등에 대한 제약입니다. 골품 제도와 관등제도는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이러한 골품제 하에서 최치원은 관직을 내놓고 난세를 비관하면서 유랑하다가 가야산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칩니다. 반면, 설계두는 당으로 건너가 버립니다. 골품제는 6두품 이하와 지방 세력들에게 큰 장벽이었죠. 결국 이러한 폐쇄적인 골품제로 인해 반신라적인 사회 세력이 형성되고 신라가 망하는데, 골품제가 큰 역할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