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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히스토리아 역사 스토리

수능 세계사 정리 8 : 중국사 6 / 국민혁명과 국공합작

① 5.4 운동
  임시총통에 앉은 위안스카이는 혁명 등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권력을 혼자 독차지하려고 하였다(위안스카이의 반동). 이를 위해 위안스카이는 중국에게 불리한 21개조 요구를 수용하면서 중국인들에게 많은 원성을 샀다.(Tip. 21개조 요구 : 그동안 독일이 누리던 이권을 일본에게 넘기고, 일본이 중국에 일본의 영향력을 늘리는 조항들을 요구함.)
  서구의 영향을 받으면서 중국에서는 지식인들이 신문화운동을 통해 중국에 팽배했던 유교적 인습 등을 비판하고 합리적인 사상을 수용을 주장하였다. 루쉰 등의 계몽사업과 백화문체가 보급된 것도 이 때이다. 신문화운동은 훗날 5.4운동의 정신적인 기반이 되었다.
  5.4운동은 위안스카이가 굴욕적인 21개조 요구를 수용하고 산둥반도를 일본에게 넘기자, 분노한 베이징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중국인들이 크게 일어난 사건이다. 과거 한국에서 행해졌던 거국적인 3.1운동은 중국인들에게 큰 인상을 심어주어, 5.4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5.4운동의 참가자들은 21개조 요구를 철폐와 산둥반도의 반환, 군벌 타도, 반일을 주장하였다. 운동은 날로 커져 전국적인 대중운동으로까지 확장되었다. 5.4운동을 통해 국민당과 공산당은 그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② 국민혁명과 항일전쟁
  5.4운동으로 기반이 다져진 국민당을 이끄는 쑨원은 삼민주의에 의거하여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를 표방하였으며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연소용공(聯蘇用共 : 소련과 연합하고 공산당을 이용함) 정책을 통해 공산당과의 연합을 꾀하였다. 당시 국민당은 베이징의 군벌과 대립을 하고 있었으므로, 국민당과 공산당은 서로 합작하여 군벌을 토벌하기 위해 나선다(1차 국공합작, 1924). 쑨원 사후에 국민혁명은 장제스가 이어받았으며 국민혁명군은 북진하여 난징, 상하이를 점령하였다. 북진 과정에서 끊임없는 좌우대립으로 결국 1차 국공합작은 해체되었다(1927). 장제스는 국공합작이 분열된 이후에도 북진하여 베이징을 점령하고, 중국을 통일하여 국민혁명을 완성시켰다(1928).
  자본가들과 결탁한 국민당은 부패해갔으며 그 결과 민중의 지지를 상실해갔다. 반면 공산당은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가기 시작했으며, 농촌 등을 거점으로 개혁 세력을 확보하면서 소비에트 임시 정부를 일으켰다. 점차 공산당의 영향력이 확대되자 국민당은 공산당을 공격하였으며 이를 피하기 위해 마오쩌둥은 대장정을 단행하게 되었다. 대장정 기간 동안 공산당은 농사 등을 거두는 등의 일을 통해 더욱 국민들의 지지를 공고히 할 수 있었으며, 반면 가는 곳마다 약탈 등을 일삼았던 국민당은 국민들에게 불만을 샀다.
  일본 제국주의의 마수가 뻗쳐오자 많은 중국인들은 이에 불만을 품었다. 일본은 만주에 있던 철도를 폭파하는 자작극을 만들었고(류타오거우 사건), 이를 통해 만주로 군대를 이동할 구실을 얻었다.
일본은 무력을 동원하여 만주지역을 점령하고 그 자리에 만주국(滿洲國)이라는 괴뢰국을 세워 청의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를 다시 만주국의 황제로 앉혔다.(만주사변, 1931 / Tip. 괴뢰국 : 괴뢰정권은 국내 정치세력이 자주성이 없고, 외국에 영향력에 의해 지배되는 정권이다. 이러한 정치형태를 띠고 있는 나라를 괴뢰국이라고 한다.) 만주사변으로 중국의 항일감정은 극에 달했으나 국민당은 여전히 공산당의 홍군(紅軍)을 토벌하기 위해 노력할 뿐이었다.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공산당은 국민당과 손잡고 항일전선을 구성하려고 하였으나 장제스가 단숨에 거절하는 바람에 실패하였다. 하지만 상황이 긴박해짐에 따라 장쉐량이 장제스를 시안에서 가두고 공산당과 협력하여 항일전쟁을 수행할 것을 제안하였다(시안사건, 1936). 장제스는 이에 공산당과의 합작을 재고(再考)하여 토의를 통해 중일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공산당을 인정하고 다시 한 번 손을 잡게 되었다.(제2차 국공합작, 19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