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인물 이야기

토정비결을 쓴 이지함은 사회 복지 운동가였다.

1. 자연의 모든 것이 공부였던 천재

이지함 하면 <토정비결>로 유명한 사람이다. 일반인들은 그가 특출한 예언력을 가지고 있다는 정도로 알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토정비결의 이지함이 실존인물이 아니라 가상의 인물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지함은 독특한 자신의 철학을 가지고 조선 시대를 살아간 일종의 <기인>이었다.

일단, 토정비결의 저자 이지함이 <실존 인물이 아니다>라는 오해를 사게 된 원인을 살펴보자. 토정비결이란 책에는 저자가 나와있지 않다. 토정비결이 운수와 풍수 등에 관련된 책이라는 걸 감안해볼 때, 다른 어떤 풍속서에도 이지함의 이름이 나와있지 않은 점이 이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지함(1517-1578)은 당당히 역사 속을 살아간 인물이며, 그의 인생 행적들을 추적해 볼때 토정비결을 그가 저술했음을 알 수 있다. 이 글은 그가 토정비결을 적었는지 안 적었는지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단지, 인간 이지함이 얼마나 조선시대의 이단아였으며, 개혁적 사상을 가진 인물인지를 설명하려는 것이다.

이지함은 고려말 유명한 학자였던 이색의 6대손이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관직에 있었다. 그는 중종 때 충남 보령에서 태어났는데, 14살때 아버지가 16살때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시묘살이를 시작하였다.

이지함은 어렸을 때부터 천재 소리를 들을 만큼 머리도 좋았고, 공부도 열심히 하였다. 밤에도 책에 빠져 있는 걸 본 주변 사람들은 지함의 눈이 나빠질까봐 등불의 기름을 주지 않았다. 책을 읽고 싶은 지함은 장작에 불을 지펴 책을 보았다. 한번 책에 빠지면 끝까지 읽었다. 장작마저 사람들이 치워 버리자, 이번엔 직접 도끼를 들고 나뭇가지들을 모아 불을 피워 공부를 하였다. 연기에 숨이 막히고 컥컥 거리면서도 꼭 책을 읽어야 했던 것이다.

시묘살이를 끝내고 서울에 온 이지함은 왕족인 이성량의 딸과 결혼하였고, 더욱 공부에 매진하였다. 사람들은 지함이 과거를 단번에 패스할 줄 알았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그는 출세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과거 시험에 필요한 사서 삼경이나, 제자백가, 각종 경서 들을 통달했지만, 그는 과거 시험을 보지 않았다.

명문가의 자제이면서도 스승조차 없었다. 책이 그의 스승이었고, 그는 하고 싶은 공부를 자유롭게 하였다. 양반들이 꺼려하는 음악과 산수, 의학, 천문과 지리학 등의 책도 잡으면 손에서 놓질 않았다.

책에서 진리를 구하던 청년 이지함은 직접 자신의 공부를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삿갓을 쓰고 전국을 돌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역사와 문화 유적지를 따라 돌아다녔다. 유적 탐방은 문화와 지리에 대한 많은 깨달음을 준다. 이곳 저곳의 풍속과 사람사는 이야기들을 듣게 되고, 유통되는 물자들과 지리적 여건에 따른 생활 양식들도 보게 된다. 인간과 지리를 접하고, 민중들의 삶을 직접 바라보면서 토정은 자신의 학문이 어떻게 쓰여야 할지 본격적으로 고민했을 것이다. 특히, 전국 곳곳마다 비참하게 살아가는 대다수 백성들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았을까?

2. 기인과 기인의 만남.

지함이 살았던 이 당시 까지의 조선은 유교적 문화와 함께 불교, 도교의 사상도 용인되던 시기였다. 율곡은 지함보다 19살이나 아래였으며, 이황의 성리철학도 막 정리되어가던 시기였다.

지함은 중국의 죽림칠현과 같이 자연을 돌면서 풍류를 즐기는 것을 좋아했고,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만나 대화하는 것을 소중하게 여겼다. 자연 속을 여행하다가 서울에 올 때면, 당대 최고의 명사들과 어울려 같이 풍류를 즐기곤 했다.

당대 이율곡은 지함보다 후학이었기에 토정을 마음 속 깊이 존경하였다. 토정은 딱딱한 학문을 이야기하는 것보다 풍류와 농담, 익살 같은 표현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표현에는 정치적 모순과 사회 비판에 대한 정확한 칼날이 있었다. 당대 최고의 학자인 성혼, 조식, 이항복 등은 토정과 토론하면서 그의 박학함에 놀라곤 하였다.

훗날, 조식은 마포에서 빈민과 생활하는 이지함을 직접 찾아와 이야기하곤 이렇게 말하였다. 

<깨끗한 거울과 같은 마음에 청렴하고 욕심이 적고 그 행실이 바르게 서 있어서 세상에 모범이 될 만한 사람이다.>

실제 이지함은, 고대 청담 사상가들이 꿈꾸어왔던 도사의 수련을 하기도 하였다. 엄동설한에 가벼운 옷 한벌을 걸치고 버티는 수련이라던가, 오랫동안 서서 명상을 한다던가 하는 기이한 일도 하였다. 그에게 있어 학문이란, 유교만을 고집할 것이 못되었다. 자신이 보고 느끼고 생각한 모든 것이 곧 학문이었던 것이다.

여러 사람들과 토론을 하며 학문의 범위를 넓혀가던 지함은, 당시 이름이 높던 <서경덕>을 찾아 개성으로 떠났다. 서경덕은 정치와 담을 쌓고 제자들과 학문을 토론하던 유생이었기에 지함의 스타일과 딱 맞아 떨어졌다.

서경덕과 성혼, 이율곡의 철학은 이황과 달리 주기론 철학이었다. 당시 주기론은 이황의 주리론과 달리, 다른 학문에 포용력이 있었다. 이황은 주자의 철학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였지만, 주기론자들은 주자의 철학을 현실에 맞게 응용하려는 움직임을 가졌다.

훗날, 이율곡이 <임진왜란을 대비해 10만 양병을 해야한다>는 현실적인 방안을 내놓았는데, 이것 역시 이지함이 풍수지리와 천문지리를 토대로 예언한 <큰 전쟁이 있을 것이다>라는 비유교적 철학을 인정한 결과였다.

이지함은 서경덕의 제자로서 더 넓은 공부를 하려고 했다. 서경덕의 이기일원론은 역학, 천문학, 지리학, 수학 등 인접학문을 총정리하여 구성된 것이었기에, 이지함 역시 스승의 영향을 받아 여러 학문에 더욱 능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스승이 정치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그 역시 출세에 관심이 없었다. 과거시험에 백지를 내거나, 쓸데없는 말을 적어 제출하는 등 기인의 행동을 했던 것이다. 그는 왜 과거 시험에 흥미를 잃었을까?

3. 서경덕을 떠났으나 정치에도 관심이 없는....

어느 날, 이지함이 공부를 하고 있는데 그 집 주인의 부인이 지함을 유혹하려고 했다. 지함은 그 부인을 달래다가 지쳐 결국 그 부인에게 인륜을 설명하였다. 집주인은 그 모습을 보고 서경덕에게 사실을 말하자, 서경덕은 지함의 공부는 이미 인륜에 대한 깨달음에 이른 경지라고 생각하였다.

<더 이상 내가 가르칠 것이 없으니, 돌아가서 하고 싶은 공부를 하게.>

서경덕은 스승을 떠나게 되었고, 다시 여행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는 왜 그 높은 학식을 가지고 정치에 입문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정치에 대한 회의 때문일 것이다.

알려진 바로는 친구인 안명세의 죽음 때문이라고 한다. 안명세는 사관으로서 당대 큰 사건인 을사사화를 바탕으로 <시정기>를 저술한 인물이다. 그러나, 당시 집권자들은 그 기록이 불순하다는 이유로 안명세를 죽여 버렸다. 권력이란 게 얼마나 허무한 것이며, 권력을 잡은 자들이 얼마나 비열한 사람들인가?

그는 죽장에 삿갓을 쓰고 자연을 벗삼아 사람들의 세상으로 떠나 버린다. 북쪽의 오지에서 남쪽의 제주도까지 그는 전국 방방 곳곳을 유랑하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하고, 토론하면서 살기 시작했다.

그의 옷차림은 정말 남루하였다. 천민이나 상민들이 쓴 패랭이 갓을 쓰고, 발에는 짚신을 신고, 옷은 누더기처럼 다 떨어진 도포자락을 걸치고 다녔다.

당시에 제주도는 어떻게 갈수 있었을까? 당시 기술로 제주도를 혼자 간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그는 작은 조각배를 만들어 네 귀퉁이에 큰 바가지들을 달아두어 균형과 함께 부력을 이용하였다. 그리고 그 배를 이용하여 제주도를 자주 드나들었다고 한다.

그가 45살이 되었을 때, 국가에서는 지함의 가문을 고려하여 그에게 포천현감 자리를 주었다. 지함을 알고 있던 학자들이 적극적으로 천거한 것이다. 일종의 특별 채용이자, 어찌보면 낙하산일 수 있었지만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출세의 기회였다.

그는 현감이 되어서도 걸인과 같은 생활을 하였다. 향리들의 접대는 모두 거부했고, 평소 식사도 잡곡밥과 소금국을 먹었다. 백성들의 음식과 똑같거나 못해야 그들의 삶을 더 잘 알 수 있다는 것이 지함의 철학이었다.

지함은 고을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낚시대와 그물을 보내달라고 조정에 건의하였다. 물고기를 잡아 경비를 마련하면 백성들의 세금 부담이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조정에서 그 의견을 무시하는 것을 보고 현감 자리 조차 버리고 다시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4. 빈민의 삶을 이해한 방랑자

지함은 오랜 여행을 통해 빈민들의 삶이 얼마나 고단한 것인지를 몸소 체험하였다. 그는 하층민들 역시 자신과 똑같은 인간이라는 기본 전제를 신념으로 삼은 것 같다.

신혼 다음날 추위에 떨고 있는 부랑아를 위해 자신의 옷을 벗어주고 떠난 일화도 있다. 노예의 아이가 책을 읽고 싶어하면 자신이 아끼던 책을 주고 그 아이의 부역을 빼주기도 하였다. 그래서일까? 그의 제자 중에는 상인과 노예들도 꽤 많았다.

지함은 어느 날, 한적한 섬에 들어가 박을 심었다. 그 박을 팔아 곡식을 사니 그 곡식이 가난한 사람들이 마음껏 먹을 만큼 많았다. 지함은 곡식을 마포로 가져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대가로 빈민촌 한가운데 조그만 땅을 얻었다. 빈민들은 그가 빈민촌에 흙으로 쌓은 정자에서 산다고 하여 <토정> 선생이라고 불렀다.

그가 왜 하필, 박을 팔아 곡식을 만들어 빈민을 도왔을까?

그것은 빈민들에게 단순히 곡식을 나눠주는 것 외에 큰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토정은 자신이 터득한 장사방법을 빈민들이 볼 수 있게 하고, 그것을 주민들에게 전수해 주려는 것이었다.

조선 초기 유통경제는 포구를 통해 이루어졌다. 지금처럼 고속도로나 지하철이 있는 것도 아니여서, 강 자체가 물자 운송의 핵심이었다. 배를 통해 지방의 산물과 서울의 시장이 만나는 곳이었으며, 유통을 통한 이익은 빈민들이 구걸해서 얻는 이익보다도 막대한 것이었다. 양반으로 태어나 상업에 손을 댄다는 것은 당시 큰 수치였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꼭 필요한 것이란 사실을 직접 보여준 것이다. 조선 초기에 등장한 양반 계급 출신의 상인이라고 할까?

5. 통상무역론을 주장한 혁신적인 사상가

57살의 늦은 나이, 그는 드디어 정치에 본격적으로 입문하게 된다. 정치를 혐오했던 그가 본격적으로 정치에 들어선 것은, 자신의 꿈을 현실화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서로 죽고 죽이는 사화의 시대가 끝났다. 훈구파와 사림파의 싸움은 선조가 즉위하면서 종말을 맞이했다. 서경덕, 성혼, 이율곡, 조식 계열의 학자들이 사림이라는 이름으로 정계에 진출하였다. 이들은 적극적으로 이지함을 추천하였다.

이지함은 빈민을 위한 복지사업의 가능성을 제시하였고, 국가에 많은 정책을 제시하였다.

그 핵심 사업은 부유층의 재산에서 좀더 많은 세금을 걷자는 것과 부유층의 부동산을 국유지로 설정하여 활용하자는 것이었다. 당시, 선조시기에는 조선 건국 세력인 훈구세력이 어느 정도 척결되었고, 그들의 불법 보유지를 국가가 환수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마련된 상태였다.

이지함이 생각한 것은, 산림자원과 해양자원이었다. 산림과 해양은 지배층의 것이 아니라 국유 재산이 되어야 한다. 성리학의 왕토사상과 고대 정전법의 토지공유사상을 도입하면 쉽게 자원을 확보할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토지와 바다 자체가 아니라 거기서 나오는 생산물이다. 광산의 금, 은과 바다에서 나오는 수산자원은 막대한 부를 축척할 수 있다. 그 자원을 통해 국고가 충당하면 빈민들을 도울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여기서 한걸음 나아가 이지함은 <국제통상>의 가능성을 주장하였다. 금, 은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빈민들의 생활 수준 자체가 나아지지 않는다. 산림자원과 광업자원이 부족한 국가에 비싼 가격으로 자원을 팔아 무역체계를 확립하면 막대한 이익이 생간다는 것을 생각한 것이다.

섬에서 만든 박을 가지고, 섬사람들이 나눠 먹는건 비효율적이다. 넓은 시장에서 다양한 물자와 교역하면서 서로의 이익을 남기는 것이 훨씬 현실적이라는 것이다. 이지함의 이론은 당대 유럽의 <중상주의 정책>과 비교해서 손색이 없는 것이었다.

6. 조선 시대 복지 사업의 선구자

이지함은 죽음을 앞둔 어느 순간, 고향은 충청도로 돌아와 아산 현감 자리를 맡았다. 그는 상인 신분의 친구들, 노예 신분의 제자들과 함께 중앙에서 원할하지 못했던 개혁을 실천에 옮겼다.

그가 생각한 빈민 구제 개혁안은 <걸인청>의 설립이었다. 국왕은 백성들을 하늘처럼 모셔야 한다. 그것이 성리학에서 말한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이다. 그러나, 백성들은 국왕을 생각하지 않는다. 백성들은 굶지 않고, 죽지 않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백성들을 굶기지 않기 위해 쌀 한바가지를 주는 것이 효율적인 것일까? 그것은 복지가 아니라 자선일 뿐이다. 진정한 복지는 백성들 스스로가 굶지 않는 방법을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혁신적인 철학으로 시작된 <걸인청> 사업은 여러 가지 사회 복지 사업과 연결되었다.

걸인들에게 먹고 잘 곳만 계속 제공해주면, 지원이 끊겼을 때 그들은 죽고 만다. 따라서 먹고 잘 곳보다 중요한 것은 일을 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주는 기본 자금이다.

걸인청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장사를 할 수 있는 기본 자금을 대여해주고, 값싼 이자를 거두어 들인다. 그 이자로 다른 이들에게 기술 교육을 시킨다. 기술 교육을 받은 이들은 해당 기관에서 일을 하여 수입을 얻는다.

힘없고 늙은 노인들은 짚신을 만들거나, 작은 나무를 깎도록 한다. 관청에서 그것을 사서 판매한 후, 이들에게 쌀을 대가로 지급한다. 일하지 않고 구걸만 하는 자는 처형하지만, 일을 하겠다는 자에게는 최대한 협조하여 일자리를 마련해준다.

2008년 실업자가 넘쳐나는 이명박 정부에서도 제대로 실시하지 못한 사회 사업이다. 그러나, 이지함은 빈민들을 위한 이 사업을 순조롭게 추진하였고 성과도 얻었다. 문제는, 이지함이 현감으로 부임한지 1년도 되지 못하여 생을 마감했다는 것이다.

그는 마포의 토굴에서 <토정>으로 살아갈 때부터 시작했던, 빈민들을 위한 한 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빈민들이 결혼날짜를 잡아달라던가, 좋은 일이 있을 지 점을 쳐달라고 했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비결>집을 만들었던 것이다.

우리는 토정비결을 단순한 <운수책>, <점보는 책>으로 여기곤 한다. 만약 토정비결을 쓴 사람이 이지함 본인 맞다면, 이 책은 빈민들에게 삶의 위안을 주면서도, 일하지 않고 요행만 바라는 이들에게는 경고하기 위해 쓴 책이 아닐까?

토정비결은 좋은 말들이 많이 있다. 약 70% 정도는 좋은 운수가 적혀있다. 그러나, 30% 확률로 경계해야 할 운수들이 적혀있다. 즉, 희망을 가지고 살다보면 좋은 일들이 있을 것이라는 삶의 제시를 하면서도, 운에 의지하지 말고 노력해야 한다는 지함의 경고가 아닐까?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by 히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