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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히스토리아 역사 스토리

수능 근현대사 정리 9 : 일제 식민지 방식의 변화

16. 일제의 식민지배
 1) 무단 통치기(헌벌 경찰 통치기, 1910 ~ 1919)
  을사조약 이후 세워졌던 통감부의 이름이 총독부로 바뀌면서, 일제의 식민통치의 중추로 자리매김하였다. 친일 기구인 중추원(독립협회의 의회적 기능을 가진 중추원 관제와는 다른 것이다. 헛갈리지 말자.) 총독부에게 자문하도록 하였다. 
  무단 통치기의 주된 특징은 헌병 경찰을 통한 통치라는 것이다. 치안을 담당하는 것이 경찰이 아니라, 헌병에게 하도록 하였다. 또한 헌병은 즉결 처분권을 가지고 있어 언제든지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 태형령(조선인에게만 곤장을 때릴 수 있는 법)과 교원 및 공무원에게 제복과 칼을 착용하도록 하면서 위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일제의 식민지배를 굳혀나가기 시작하였다.
  일찍이 일제는 1907년 보안법을 제정하여 정치 단체, 결사, 언론, 출판의 자유를 박탈하였다. 105인 사건, 3.1 운동들도 보안법에 적용을 받아 탄압받은 대표적인 운동이었다.(참고로 보안법은 1925년까지 지속된다.)
  일제는 토지제도의 근대화를 구실로 토지 조사령을 공포하고, 토지 조사 사업을 시작하였다(1912). 하지만 사실 일제는 이를 통해 토지를 약탈하고 지세(地稅)를 확보하려하였다. 기한을 정해놓고 신고하도록 한(기한부 신고주의) 토지조사사업에서 황실, 관아, 종문(宗門) 등의 공동 경작지에선 신고를 어떻게 할까, 라고 고민하다가 기한을 지나기 일수였고, 신고를 하였다 하더라도, 절차가 복잡하여 일반 서민들은 신고할 엄두를 내질 못하였다. 그리하여 미신고 토지는 약탈되어 동양 척식 회사가 관리하었다(토지 조사 사업은 일제가 시행하였고, 동양 척식 회사는 그 토지를 보관하였을 뿐이다. 착각하지 말자). 토지 조사 사업은 지주의 소유권을 인정하되 소작권은 인정하지 않아 봉건적 지주-전호제가 강화되기에 이른다. 동양 척식 회사는 이렇게 약탈한 토지를 일본인 지주에게 싼 값에 넘겼다.
  또한 사전에 허락을 맡아야 회사를 세울 수 있는 회사령(1910)을 만들어 민족 자본의 육성을 방해하고, 산업령(1911), 어업령(1911), 광업령(1915) 등을 제정하여 자원을 침탈하기도 하였다.

 2)
민족 분열 통치(문화 통치, 1919 ~ 1931)
  3.1 운동으로 충격을 받게 된 일제는 '문화 통치'를 표방하게 된다. 이들은 헌병 경찰을 보통 경찰로 바꾸고, 문관 총독을 부임시키기로 하였으며, 조선인의 교육 확대와 언론의 자유, 지방에 어느정도의 자치를 허용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보통 경찰제로 바뀐 이후에 오히려 경찰의 인원, 장비, 예산이 증가하였고, 치안유지법의 제정(1925)을 통해 사회주의자를 억압하였으며 고등 경찰제를 실시하여 실질적인 탄압을 강화였다. 또한 문관 총독도 임명된 바가 없으며, 언론 활동을 보장하기로 했던 것도 검열, 정간, 폐간 위협으로 언론을 통제하였다. 조선인의 교육 기회를 확대한 것도 초등, 산업 교육에 국한된 것이었으며, 지방 행정에 참여할 수 있는 조선인은 일부 친일 자산가 층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문화통치의 본질은 친일파를 양성하여 민족을 분열시키는 데에 있다. 결국 일부 민족주의자들(이광수, 최남선 등)이 일제에 타협하여 「자치론(自治論)」이 대두되기에 이른다.
  이 때 일제는 산미 증식 계획(1920 ~ 1934)을 통해 일본 자국의 산업화로 인한 식량 부족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일제는 비료 공급과 수리 시설 확충, 종자 개량 등을 통해 식량을 증식하고 그 증식양만큼만 수탈해 가기로 하였으나, 비료 대금, 수리 조합비 등은 모두 농민에게 부과되었고, 실질적인 증식량 또한 많지 않았음에도 일제는 수탈량을 늘려갔다. 이렇게 하여 유랑민과 화전민, 해외로 이주하는 사람이 늘어나자, 일제는 이를 막기 위해 만주에서 소, 돼지 사료보다 못한 잡곡을 들여와 해결하려 하였다.(산미 증식 계획은 2기로 간주한다. 주의)
  또한 회사령이 철폐(1920) 되어 민족 자본의 육성이 쉬워지는 듯 하였으나, 오히려 이것은 일본의 자본이 국내로 유입하는 결과를 갖게 되어 더더욱 곤란하게 되었다. 일제는 관세도 철폐(1923)하여 이에 위협을 느낀 민족 자본가들은 평양에서 조만식을 중심으로 물산 장려회를 세우고, 물산 장려운동을 전개하여 대항하였다.

 3) 민족 말살 통치(1931 ~ 1945) 
  미국에서 대공황(1929)이 일어나자 그 영향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미국은 뉴딜 정책을,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들은 자신의 식민지들과 블록(Block)을 형성하여 경제를 되살릴 길을 모색하였다. 하지만 일본과 같이 후기에 산업화된 제국주의 국가들은 식민지를 늘림으로써 경제 공황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은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개조하기 위해 내선 일체(內鮮一體), 일선 동조(日鮮同祖, 단군은 1대 천황의 동생이다 라는 또라이 주장-_-)을 내세우고 황국 신민 서사, 신사 참배, 궁성 요배, 창씨 개명 등을 강요하였다. 조선, 동아 등의 언론도 폐지되었으며 조선어 학습도 금지시켰다.
  일제는 식민지를 늘리기 위해 중국 쪽을 통해 대륙으로 침략하려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북부 지방에 군수 공장을 집중 건설하였고, 공업 원료의 증산을 위해 남면 북양(南綿北羊, 남쪽에선 면을 짜고 북쪽에선 양을 침) 정책을 실시하였다.
  1937년 중일 전쟁을 필두로 미곡 공출과 금속 그릇을 수탈하여 갔으며 지원병제(1938), 징병제(1944), 징용제, 정신대 등을 통해 인적 자원까지 수탈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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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 시기별 수탈 비고 : 땅 -> 쌀 -> 다(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