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의 토지 이야기 (2)

동아시아의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신석기 시대가 도래하다....

인류가 땅을 이용하여 생상력을 확보한 시기는 약 1만년 전부터이다. 1만년전을 훌쩍 뛰어넘어 70만년전에 이르는 <구석기 시대>는 토지에 관련된 이야기를 전개하기가 어렵다.

그 이유는 수십만년 동안 지속된 빙하기와 간빙기 때문이다. 그 오랜 기간 인류의 시조인 <원숭이>들은 생존을 위한 사투를 벌여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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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오스트랄로 피테쿠스 - 아프리카누스(약 215만년전 유인원 : 미세스 플레스)의 두개골로 재현한 고인류. 당시 인류는 인간보다는 원숭이에 가까웠지만, 직립보행과 도구의 사용을 근거로 인류의 시조로서 대우를 받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상징적인 의미일 뿐, 현생 인류의 조상이라고 보기엔 미흡한 점이 너무나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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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사진은 직립 보행의 근거인 골반 구조이다. 침팬지와 인간을 놓고 보았을 때, 가운데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인간쪽에 훨씬 가깝다. 손과 발의 구조도 인간쪽에 가깝다. 그러나, 인간에게 필요한 문자를 가지지 못하였고, 빙하기를 거치는 수십만년 동안 큰 진화를 보여주지 못하였다.

 

지구상에 마지막 빙하기가 끝난 1만년 전쯤부터 본격적인 <토지 이용>이 시작되었다. 고고학 연대로 보면 이 시기가 <신석기 시대>에 해당한다. 물론, 채집과 수렵 생활은 계속 되었지만, 토지를 이용한 생활도 병행되었다.

이제, 토지를 이용하여 도토리, 수수 등의 작물을 재배하는 초보적인 농경이 이루어졌고, 토기와 같이 작물을 보관하는 기구도 등장하였다. 그러나 최초의 농경은 그 생산력이 너무나 낮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제약이 있었다. 물고기를 잡을 수 있고, 농사도 지을 수 있는 <물>이 필요했다.

그리고 인류는 초보적인 <종교>를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자연물과 동식물에 대한 경배가 시작되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숭배 대상은 <하늘과 태양>이었다. 특히 태양신은 농경이 이루어진 주요 문명 지역에서 빠지지 않는 신이었다.

그럼 동아시아의 사람들은 <신석기 시대>에 어떻게 살았을까?

2. 신석기 시대와 토지 이용

중국의 신석기 시대는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전설의 시대>이다. 사기에는 3황 5제의 전설이 나오는데, 이 3황 5제가 바로 농경의 시작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3황은 단군신화에 나오는 천, 지, 인과 같은 개념이다. 사기의 3황은 천황(天皇)·지황(地皇)·태황(泰皇)이라고 나오는데, 후대 역사가들이 복희, 신농, 여와, 수인 등 다양한 개념을 가져다 붙였다. 중요한 것은 3황이 하늘, 땅, 사람을 뜻하는 것으로서 그 중 <땅의 신>이 농경을 전해주었다는 것이다. 3황 이후 등장한 5제는 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황제, 전욱, 제곡(帝嚳),·당요(唐堯),·우순(虞舜) 이다.

삼황의 기록

내용

사기의 진시황본기

천황(天皇),·지황(地皇),·태황(泰皇)

사기의 보삼황본기

천황(天皇), 지황(地皇), 인황(人皇)

풍속통의의 황패편

복희(伏羲), 여와(女臥), 신농(神農)

통감외기

복희(伏羲), 신농(神農), 공공(共工)

예위의 함문가

수인(燧人), 복희(伏羲), 신농(神農)

백호통

복희(伏羲), 신농(神農), 축융(祝融)

십팔사략의 제왕세기

복희(伏羲), 신농(神農), 황제(黃帝)

3황이 하늘, 땅, 사람을 뜻하면서 농경의 전파를 전설로 설명하고 있다면, 5제는 음양오행의 돌고도는 5행을 기반으로 설명할 수 있다. 원래 5제는 중국 최초 왕조은 <하> 왕조의 전설을 뒷받침하기 위해 탄생했다고 보여졌지만, 한나라 때 동중서가 <추연의 음양오행설>을 받아들여 정리한 것이다.

오제의 기록

내용

사기 오제본기

황제(黃帝), 전욱(颛顼), 제곡(帝喾), 당요(唐堯), 우순(虞舜)

황왕대기

복희(伏羲), 신농(神農), 황제(黃帝), 당요(唐堯), 우순(虞舜)

예기 월령

태고(太皋: 복희), 염제(炎帝), 황제(黃帝), 소고(少皋), 전욱(颛顼)

도장의 동신부

황제(黃帝), 소고(少皋), 제곡(帝喾), 제지(帝摯), 제요(帝堯)

십팔사략

소호(少昊), 전욱(颛顼), 고신(高辛), 당요(唐堯), 우순(虞舜)

한반도와 요동지방의 신석기 시대도,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이 등장하기 이전의 시기이다. 그러나, 남겨진 기록이 없기 때문에 어떤 방식의 토지 이용을 했을지는 알 방법이 없다.

일단 빗살무늬 토기와 탄화된 좁쌀 등의 유적으로 미루어 초보적인 농경이 부락단위로 이루어졌다는 정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특히, 만주지방의 칠무늬 토기(채도)는 한반도와 유사하다. 많은 학자들이 요령 지방의 홍산 문화와 같은 신석기 문화가 중국보다는 한반도 계통과 비슷하다고 말하고 있다.

링크 : 한반도와 홍산문화는 같은 문화권이다.

한반도의 신석기 농경을 <토기>의 형태로 비교하는 경우가 많은데, 신석기 초기의 토기는 시베리아 계통의 토기와 비슷하며, 신석기 후기로 갈수록 중국식 토기와 비슷한 유물이 많다고 한다.

링크 : 시베리아와 한반도의 유물 비교

반면, 일본의 신석기는 조몬 시대(縄文時代) 후기를 말한다. 일본인의 인종은 고몽골족으로, 1만년전 경부터 한반도 등에서 이동한 이들이 농경 등을 전파하면서 토지 이용을 시작하였다. (일본 국립유전학 연구소에 따르면 약 65% 정도가 한반도에서 건너온 사람들이라고 한다.)

링크 : 일본 유전학 연구

   

신석기 때의 토기 : 한반도의 빗살무늬토기(좌), 일본의 조몬토기(우)

동아시아의 신석기인들이 농사를 지으며 먹었던 주식은 도토리와 밤 정도였다. 당시 농사 기술로는 계절에 따라 다른 음식을 먹어야만 했는데, 봄에는 나물류를 채집하고, 여름에는 강이나 바닷가 근처에서 어류를 많이 먹었을 것이다. 가을에는 도토리와 밤 등의 수확물을 먹을 수 있었고, 겨울에는 버섯류와 칡, 마, 겨울 생선 등을 먹을 수 있었다.

즉, 신석기 때 토지 이용이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가을 정도에 수확되는 일부 견과류 정도였고, 사냥과 채집이 여전히 큰 비율을 차지할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 된다.

이렇게 초보적인 농경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에, 당시 촌락은 지도자를 중심으로 식량을 구하는 씨족 단위 체제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다수견해이다. 씨족들은 한 해를 무사히 넘기기 위해 부족의 수호신에게 기원을 했을 것이다.

또, 당시 사회가 모계제인가, 부계제인가도 논란이 되고 있다. 중국인들의 전통 견해에 따르면, 신석기 시대의 생산력은 극히 낮았고, 채집과 수렵 등 여성들의 생산력이 중요시되던 시기였다. 또, 결혼제도가 정착되지 않아 일부다처제를 시행했다고 가정하면, 아이를 직접 낳은 여자측의 발언권이 강했다는 주장이다. 3황5제의 모계사회가 현재의 부계사회로 넘어온 것은 중국 최초의 왕조인 <하왕조>가 성립되면서부터라고 말한다.

그러나, 최근 한국과 일본의 일부 학자들은 그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신석기 시대에도 일부일처제의 기본적인 가족관계가 성립되었고, 동아시아 사회에 모계 사회는 성립된 것이 없다는 생각이다. 신석기 시대에도 남성이 힘든 일을 하면서 경제권을 조금 더 가지고 있었다는 생각이다.

누가 경제권을 가지고 있었던지는 열심히 싸우라고 냅두고 토지이야기를 해보자.

신석기라는 1만년전후의 오랜 시간은 토지 사용의 주체가 누구인지에 대한 의문을 던져준다. 누가 토지의 주인일까?

신석기 시대의 토지 이용을 놓고, <원시 공산제 사회>라는 학설을 제기한 사람들이 있다. 먼저 사회주의자인 <마르크스>부터 사회학자인 <베버>, <뒤르껨>... 지금의 대부분 역사학자들까지 그렇게들 주장한다.

신석기 시대의 생산력이 극히 낮고, 당시 사람들은 절대 빈곤에 처해 있었다. 농경은 초보적이었다. 사람들은 수천년간에 걸쳐 서서히 나아지고 있는 농사기술의 발전보다는 <자연신>에게 좋은 날씨를 부탁하고 있었다.

아마도 토지 소유권을 놓고 일어난 분쟁은 극히 적었을 것이다. 설령 있었다고 해도 지금까지 밝혀진 바가 없다. 또, 공동체 전체의 생존을 위해서는 토지 소유가 아닌 <점유> 형태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당시 사회가 부족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 사회였기 때문에, 토지는 부족민 전체가 <점유>하는 것이었다. 토지를 <점유>하다는 개념이 토지를 <소유>한다는 개념으로 바뀐 것은 정복전쟁이 활발해지는 <철기 시대>쯤에 등장한다.

3. 청동기와 토지 이용

동아시아에서 금속 문명이 등장하고, 농경기술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3000년 경이다. 이 시기는 석기 문명과 청동 문명이 공존하던 시기로, 황하 문명을 비롯한 다양한 동아시아 문명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이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5000년경 양자강 근처에서 벼농사가 시작되었고, 기원전 2000년경에 공동체를 장악한 종교 제사장이 등장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권력을 가진 자가 성장하여 기원전 1600년경 최초의 왕조인 상 왕조(은)를 건설했다고 한다.

만주에서는 기원전 1600년 경에 북방 유목 계통인 스키타이인들에 의해 청동기가 전파되었고, 한반도에도 기원전 15세기 전후에 청동기가 보급되었다. 일본에는 기원전 1000년경 야오이 시기에 청동기가 전파되었다.

청동기가 전파된 것과 비슷한 시기에 각 지역에 벼농사가 급속히 증가하였다. 그러나, 청동기와 벼농사의 직접적인 관련성을 찾기가 힘들다고 한다.

청동기는 요즘으로 따지면 <보석>과 같이 귀한 것이었다. 구리와 주석, 아연 등을 합금해야 제조가 가능한 청동은, 희소성 때문에 지배층의 무기나 제사용품으로 주로 사용되었다. 여전히 농기구는 돌이었다.

청동기를 만드는 기술이 전파되면서 농사를 짓는 기술도 같이 전해져 들어왔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특히 벼농사의 전파경로는 청동기 전파 경로와 유사하다. 만주 계통에서 한반도로, 그리고 일본으로 전래된 경로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럼 창동기와 함께 보급된 농사 기술은 어떤 것이었을까?

동아시아 사람들이 처음 시도한 농사는 견과류 등을 수확하는 것이었다. 밤을 많이 수확하였고, 깨, 도토리, 박 등이었다.

조금 시기가 지나면서 사람들은 비옥한 땅과 비료를 사용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화경농법>이다. 화경은 말 그대로 그 자리를 불태워서 비옥한 땅과 비료를 만든 후에 농사짓는 초보적인 방식이었다. 화전 농법으로 보리, 수수, 조, 팥 등을 재배할 수 있었다.

신석기 후기가 되면서 농사 기술은 더욱 발전되었다. 각 지역의 화경 농법이 발달하였고, 중국 강남지방에서 시도되었던 <수경농법>과, 만주지방의 <화경농법>이 유행하였다.  

특히 <수경농법>은 물을 이용한 농법으로 한층 진화된 농사법이었다. 물을 이용함으로서 <벼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벼가 동아시아인들의 주식으로 자리잡게 된다.

처음 중국식 수경농법은 강가와 저습지를 이용한 농사였으나, 철기시대로 접어들면서 한반도, 일본 등에서 개량을 거치게 된다. 저습지를 찾아다닐 필요없이 직접 <관개시설>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동아시아 각지에 관개 시설이 등장하고, 농사기술은 한층 발전하게 된다.

농사기술을 발전으로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생산물과 관개시설을 놓고 다툼이 시작되었다. 청동기와 철기 시대는 서로 많은 생산력과 생산물을 차지하려는 전쟁이 활발히 진행된 것이다.

즉, 당시의 농업기술 수준으로 볼 때, 당시 생산력을 높이는 주요 수단은 직접적인 생산력보다도, 생산력을 획득하려는 싸움이었다는 점이다. 일정 지역을 확보한 지배자의 출현은 생산 영역을 놓고 벌이는 전쟁에서 시작되었다.

다음 장에서는 금속기 시대의 생활 단위인 <읍>과 중국인들이 생각한 이상적인 토지제도 <정전제도>에 대해 간략히 짚고 넘어가도록 하자.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by 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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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공동체: 신화와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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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