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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근현대사 정리 15 : 6.25 전쟁

34. 6.25 전쟁
  사실 6.25 전쟁은 그동안 수능에서 크게 다루어지는 주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전에 수능을 출제했던 정권과는 정치적 성향이 다른 정권이 들어서고, 또한 총체적으로 근현대사를 한번 짚고 넘어가자는 나의 의도와 완성도를 높여보자는 생각으로 6.25를 간략하게 서술하기로 한다.
  남북한에 각각 정권에 들어서고,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승만은 반공을 내세우면서 북진통일(北進統一)을 주장하였다. 남한과 북한의 군대는 그 규모가 크지 않았으나 38선에서 종종 무력적인 충돌이 있었다. 1949년 무렵에는 남북한에 각각 주둔해 있었던 미국과 소련이 물러났다. 더욱이 미국은 1950년 애치슨 선언을 통해 남한을 미국의 방어지역에서 제외하면서 한반도의 긴장은 더욱 고조되었다.

사료. 애치슨 선언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은 류쿠(일본 오키나와)에 이르고 (중략) 필리핀으로 이어진다. (중략) 그 밖의 태평양 지역의 군사적 안전 보장에 대해서는, 누구도 이 지역(남한)을 군사적 공격으로부터 보장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명백히 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동시에 그와 같은 보증은 실제적으로는 거의 필요가 없다는 사실도 명백히 해두어야 한다. 공격이 있을 경우 첫째로 의지해야 할 것은 전 문명 세계가 유엔 헌장 아래에서 맞은 약속이다.

ㅡ애치슨(미 국무 장관), 아시아의 위기 1950

  6.25일 북한은 남침을 강행하였으며 파죽지세로 7월 말에는 낙동강까지 이르렀다. 이에 유엔은 결의를 통해 유엔군 만들어 한국전쟁에 개입하게 된다. 8월부터 남한군에 합류한 유엔군은 낙동강에서부터 반격을 시작하여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상황을 역전시켜 나갔다. 9월 말에 서울을 수복하고 10월 26일에는 압록강에 다다르지만 11월 25일에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다시 38선 지대로 후퇴해야만 했다. 뒤이어 1951년 소련도 공군으르 통해 전쟁에 부분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점차 세계 대전으로 확산될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맥아더는 만주까지 전선을 확장하고, 핵무기를 사용할 것을 주장했으나 미국은 그를 해임하고, 소련이 유엔에서 제의한 휴전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홀로 남한은 북진통일을 주장하고 있었다. 1953년 7월, 결국 휴전이 성립되었다.
  남북한은 전쟁 시기 동안의 엄청난 경제적인 손실을 져야만 했고, 살아남은 많은 사람들도 생활고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6.25로 득을 본 것은 이승만, 김일성과 같은 소수의 정치인들이었는데 그에 대한 이야기는 대한민국의 민주화 과정과 북한의 역사를 통해 차차 설명하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