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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세계사 정리 16 : 유럽사 7 / 크리스트교의 전개1(로마제국~프랑크 왕국)

크리스트교의 전개
① 로마시대의 크리스트교
  크리스트교는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과 조로아스터교의 천당, 지옥, 최후의 심판, 영생 등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 예수는 믿음과 사랑을 기반으로 하여 제자들과 함께 선교활동을 하였으나, 로마는 황제 숭배를 거부한다고 하여 예수와 제자들, 그리고 신자들을 박해하였다. 그래서 크리스트교가 공인되기 이전에 많은 신자들은 카타콤과 같은 지하묘지에 몰래 모여 예배를 드리고, 여러 사도들의 편지를 보면서 교리를 공부하였다.
  크리스트교가 만들어지고 300년이 지났을 무렵,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전선(戰線)의 하늘에 새겨진 붉은 십자가를 보고 역전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각주:1] 그는 하늘에 크리스트교로 개종할 것을 약속했으며, 그 약속은 곧 크리스트교를 공인하는 밀라노 칙령(313)으로 지켜졌다.
  크리스트교가 공인된 이후에는 많은 신자들이 카타콤과 같은 곳에서 비밀리 모일 필요가 없어졌으며, 그들은 이제 지상에 나와 떳떳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이 연구한 교리였다. A 카타콤과 B 카타콤의 교리 연구는 똑같은 자료를 가지고 했음에도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었다. 세상으로 나온 교도들은 성경과 교리에 대한 해석을 통합할 필요가 있었는데, 니케아 공의회(325)는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고 성경의 교리와 해석을 통합하기 위해 열렸다.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아리우스파(派)와 아타나시우스파(派)가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아리우스는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의 신성성은 하느님에 미치지 못하다고 주장하였고, 이는 그 당시 대다수 사람들의 의견이었다. 반면 아타나시우스는 하느님과 그의 아들 예수는 모두 신성하며 성부(聖父) - 성자(聖子) - 성령(聖靈)은 모두 같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삼위일체(三位一體, Trinity)를 주장하던 아타나시우스파는 그 당시 아리우스파에 비하면 소수였다. 하지만 소수였던 아타나시우스파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인정을 받으면서 아리우스파를 압도하고, 크리스트교의 정통교리로써 자리 잡았다.[각주:2]


Tip. 아리우스파와 아타나시우스파


아리우스파 : 다수 / 하느님과 예수의 신성이 같지 않다고 주장


아타나시우스파 : 소수 / 하느님과 예수, 성령의 신성이 같다고 주장

  이후 크리스트교는 데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국교화(392) 되었다. 이후 콘스탄티노플,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 예루살렘이 성지로 지정되었고 다른 지역들도 교구 단위로 조직되었다. 또한 교황이 등장한 것도 이 시기인데, 로마 주교는 베드로의 후계자라는 인식과 니케아 공의회 이후 여러 우월권을 로마교회가 확보해 가면서 교황은 서유럽지역에서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② 프랑크 왕국 시대의 크리스트교
  게르만인들이 대거 유럽으로 이주하면서 유럽에는 게르만인들이 세운 많은 나라들이 들어섰다. 게르만들인이 유럽사회로 스며들면서 크리스트교 역시 게르만에게 젖어들었다. 사실 많은 게르만들은 다수파였던 아리우스파로 개종하였었다. 하지만 프랑크 왕국 메로빙거 왕조의 개창자 클로비스만은 아타나시우스파로 개종하였는데, 이는 프랑크 왕국의 성공에 주된 요인이 되었다.
  메로빙거 왕조 말기 카롤루스 마르텔(칼 마르텔)은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이슬람 군을 막아냄으로써 크리스트교의 수호자로서 여겨졌고, 그의 아들 피핀은 로마 지역의 땅을 정복하여 교황에게 기증하여 교황과 서로마 교화의 지지를 받았다. 카롤링거 왕조를 개창한 카롤루스 대제(샤를 마뉴)가 800년에 서로마 황제로 대관하면서 서로마 교회와 프랑크 왕국의 연계는 더욱 공고해졌다.

  1. 종교에서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하늘의 기적으로 인해 승리하고 감동을 받아 크리스트교로 개종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역사학에서는 당시 도시에서 권력을 잡고 있던 종교 - 크리스트교의 입장으로 보면 이교異敎 - 지도자들이 있었는데, 콘스탄티누스는 이들을 견제하고 종교적인 형평성을 지키기 위해 크리스트교로 개종했다고 설명한다. [본문으로]
  2.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역사학에서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아타나시우스파를 정통으로 인정한 것은 종교적인 형평성 때문이었다고 평가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