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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4세기 고구려의 위기 - 모용씨의 침입, 근초고왕의 침입

 

고구려의 위기 - 모용외의 침입

12년 봄 2월에 환도성을 수리하고, 또 국내성을 쌓았다. 가을 8월에 왕이 거처를 환도성으로 옮겼다. 겨울 10월에 연나라 왕 모용황이 용성으로 천도하였다. 건위 장군 모용한이 먼저 고구려를 빼았은 다음 우문씨를 멸망시키고, 나아가 중원을 차지하자고 청하였다.

고구려로 가는 길은 두 곳이 있는데, 북쪽 길은 평탄하고 넓은 반면 남쪽 길은 험하고 좁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북쪽 길로 가려고 하였다. (모용)한이 말하였다.

<적군은 상식으로 헤아려 대군이 반드시 북쪽 길로 오리라고 예상할 것이므로 당연히 북쪽을 중히 여기고 남쪽은 소흘할 것입니다. 왕께서는 마땅히 정예군을 거느리고 남쪽 길로 들어가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곳을 치십시오. 환도는 크게 공격하지 않아도 쉽게 점령될 것입니다. 그리고 따로 적은 군사를 북쪽 길로 보내면 비록 차질이 있더라도, 그 몸체가 이미 무너지고 나면 사지는 쓸 수 없는 법입니다> 모용황이 이말을 따랐다.

11월에 모용황이 스스로 날랜 군사 4만을 거느리고 남쪽 길로 진군하여 모용한과 모용패를 선봉으로 삼았으며, 따로 장사 왕우 등을 보내 15000명을 거느리고 북쪽 길로 침략해왔다. 왕은 아우 무를 보내 정예군 5만명을 거느리고 북쪽 길을 막게 하고, 자신은 약한 군사들을 거느리고 남쪽 길을 막았다. 모용한 등이 먼저 와서 싸우고 모용황이 대군을 이끌고 뒤이어 오니 우리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 좌장사 한수가 우리 장수 아불화도가의 머리를 베니 여러 군사들이 승기를 타고 마침내 환도로 들어왔다.

왕은 말 한필을 몰고 도망가 단웅곡으로 들어갔다. 모여니가 쫒아가 왕의 어머니 주씨와 왕비를 사로잡아 돌아갔다. 이 때 왕우 등은 북쪽 길에서 싸우다가 모두 패하여 죽었다. 이로 말미암아 모용황이 다시 끝까지 쫓지 못하고 사신을 보내 왕을 불렀으나 왕은 나가지 않았다. 모용황이 장차 돌아가려 할 때, 한수가 말하였다.

<고구려 땅은 지킬 수 없습니다. 지금 그 왕이 도망하고 백성이 흩어져 산골짜기에 숨어 있으나, 대군이 돌아가면 반드시 다시 모여들어 나머지 무리를 모아 오히려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왕의 아버지 시신을 싣고, 친어머니를 잡아갑시다. 왕이 스스로 몸을 묶어 항복해 오기를기다려 그 뒤에 돌려주고 은덕과 신뢰를 어루만지는 것이 상책입니다.>

모용황이 그 말을 듣고, 미천왕의 무덤을 파서 그 시신을 싣고, 창고 안의 여러 대의 보물을 거두고, 남녀 5만여명을 사로잡고 그 궁실을 불지르고, 환도성을 허물고 돌아갔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국원왕 12년 -

사료해석 : 4세기 초 고구려의 위기에 대한 사료입니다. 4세기 모용씨가 강성해져서 고구려에 침입하고, 백제의 근초고왕이 평양성에 침입하여 고국원왕이 전사하는 고구려의 가장 큰 위기 시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소수림왕은 율령반포, 불교수용, 태학건립 등을 통해 새로운 기반을 닦았고, 이후 광개토대왕, 장수왕이 영토를 넓힐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