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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신라하대의 족적 강등 - 골품제의 모순

 

신라하대 족적 강등<골품제의 모순>

성주산파(선종 9산의 하나)를 처음 연 낭혜(朗慧)는 속성(俗姓)이 김씨이며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 그 8대조가 된다. 조부 주천(周川)은 품(品)이 진골이고 위(位)가 한찬(韓粲)이었으며 고조와 증조가 모두 나가서는 장군이 되고 들어와서는 재상을 지냈음은 집마다 아는 바다. 아버지는 범청(範淸)이다. 족(族)은 진골에서 한 등급이 떨어지니 이른바 득난(得難)이다. 나라에 5품이 있는데, 첫째가 성이진골(聖而眞骨)이고 둘째가 득난(得難)이다. 귀성(貴姓)의 얻기 어려움을 말한 것이니, 《문부(文賦)》에도 "혹 구하기는 쉬워도 얻기는 어렵다[惑求易而得難]"고 한 대목이 있다. 6두품부터는 숫자가 큰 신분일수록 귀한데, 이는 마치 일명(一命)에서 구명(九命)에 이르는 것과 같다. 그 4·5품은 족히 말할 바가 못된다.

- 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 -

사료해석 :  진골 세력의 분화에 대한 하대의 글입니다. 진골의 분화과정을 신라 초기부터 3단계로 살펴보면

1단계 : 김씨 내물왕계가 스스로의 차별성을 강화하기 위해 김씨 세습집단을 진골이라는 신성시된 집단으로 규정하였습니다.

2단계 : 대등이 분화되는 단계입니다. 즉, 왕위계승자인지 아닌지로서 차별을 하면서 1골을 우선시하는 분위기가 생겨납니다. 즉, 왕권계승자를 1골로 보면서, 점차 소외되어가는 집단을 2골로 차별화하는데, 개론서에 따라 2골을 <득난>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즉, 2골은 왕권에서 밀려나 관료화되는 진골로서 중위제가 붕괴되면서 6두품 이상이 대아찬에 진출하자, 2골과 하위 품족의 차별이 사실상 없어지게 되는 것이죠. 즉, 득난이라는 개념은 개론서에 따라 밀려난 진골(2골)과 치고 올라오는 세력(골품제의 한계를 넘어선 일부 6두품)을 합한 말로 쓰기도 합니다.

3단계 : 왕족과 상대등 세력의 분화입니다. 이것은 상대등 김양상이 김주원을 물리치고 왕에 등극하면서 생긴 새로운 현상인데, 김양상은 진골 상대등으로서 더 유력한 왕위 계승자를 재치고 왕이 되었습니다. 즉, 상대등계 왕이라는 원성왕계가 등장하게 됩니다. 상대등의 세력과 왕의 세력이라는 새로운 세력분포가 등장하면서 왕과 상대등이 각각의 세력을 가진 존재로 분포하는 시기입니다. 신라 하대의 혼란함을 보여주는 사례이죠.

이 사료는 특히, 신라 후기 심한 족적 강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의 사료입니다. 신라 후기에 이르면, 신라는 진골사회의 모순으로 더 이상 초기 골품제의 단단한 운영원리를 고수하지 못하고, 골품제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입니다. 특히 사회운영원리가 바뀌게 되는데, 범청이후 공신집안인 무열왕의 후손은 득난으로 족적 강등을 당하게 됩니다. 이것은 신라 사회가 7세대 친족 공동체를 고수하고 있지만, 점차 골품제의 운영원리의 모순으로 이것이 지켜지지 못하고, 친족공동체의 규모가 줄어들게 됩니다.

혹자들은 7세대 공동체가 5세대 공동체로 줄어들면서 폐쇄적인 신분사회의 규모가 줄어들었으며, 고려 초기 이후 골품제가 폐지되고 최승로의 시무 28조에서의 유교이념이 도입되는 시기를 중세사회의 시작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이 견해는 7차 교과서에 반영된 시대 구분의 견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