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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한반도에 인류가 등장하다 - 인류의 기원과 등장

한반도에 인류가 등장하다.

1. 인류의 등장과 기원은 언제일까요?

한반도에 인류는 언제부터 등장했을까요?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한반도가 언제 생겼냐부터 알아야 합니다. 한반도라는 땅이 지금과 같은 형태가 된 것은 약 1만 5천~2만년 전의 일이죠. 그 전에는 중국, 한국, 일본이 대륙으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홍적세라고 하는 세계적으로 추었던 빙하시대가 200만년전부터 약 12000년전까지 계속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홍적세가 끝나고 충적세가 되면서 해수면이 100m이상 높아졌는데, 그 때부터가 본격적인 한반도 시기입니다. 구석기 인들이 우리 조상이 아니라고 보는 이유중 하나도 바로 이 지리적 요인도 포함되는 것이죠.

보통 인류의 기원하면 라마피테쿠스를 떠올리는데, 약 450만년전 인류인 이 인류는 화석이 발견되지 않아 증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최초의 인류라고 하면 교과서에 나오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남방의-원숭이 : 아프리카인, 350만년전)입니다. 또 최초의 석기사용은 약 370만년전 탄자니아 지방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때부터 약 1만년전 까지를 역사에서는 구석기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구석기인들은 도구를 사용하고 직립보행을 했다는 사실을 주지하더라도 현생인류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냥 도구를 사용한 원숭이라고 보면 될 듯하네요. 단지 생활근거지를 확보하고 성에 따른 분업을 했으며, 도구를 보관했다는 점에서 인간의 특징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정도입니다.

2. 우리나라의 구석기 시대의 특징 - 모비우스의 학설을 뒤집었다.

우리나라의 구석기 유적지는 평양 근처 상원 검은모루 유적지, 경기도 연천 전곡리 정도입니다. 특히, 우리나라 구석기 역사에서 최근 고증되고 있는 중요한 사실은 모비우스학설을 뒤집는 양면핵석기의 등장입니다.

모비우스 학설이란, 전기 구석기 시대를 구분하는 모비우스의 학설을 말합니다. 그는 인도를 기준으로 인도 서쪽은 발달된 양면핵석기(양면을 사용하는 돌)를 사용했으며, 인도 동쪽의 아시아는 찍개(덜 발달된 외날의 석기)만을 사용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동북이나 동남아시아보다 유럽이 훨씬 발달된 구석기 문화라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 모비우스 학설은 우리나라 경기도 연천 전곡리 유적지의 발견으로 뒤집어 집니다. 전곡리에서는 양면핵석기인 주먹도끼, 자르개 종류의 돌들이 나와서 세계 구석기 이론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습니다.

3. 한반도 구석기 시대의 발전 과정을 살펴봅시다.

구석기 시대는 엄청나게 느린 발전속도를 보입니다. 수백만년을 걸쳐 거의 변한게 없는 생활이지요. 200만년 이상이 지나면서 50만년 전에야 겨우 불을 사용하는 단계에 왔고, 10만년 전에야 겨우 돌을 깨서 도구를 사용하는 정도의 수준이었습니다. 전차 시체를 매장하는 풍습도 생겼는데, 이 무렵부터가 중기 구석기 시대입니다. 중기 구석기 시대는 약 8만년 전~3만년 전으로 봅니다. 우리나라는 이 때 함북 웅기군 굴포리, 평남 덕천 승리산 등이 대표적 유적지입니다.

후기 구석기 시대는 간접떼기 등의 기술도 등장합니다. 보통 돌을 돌에 부딪혀 직접 깨는 것을 직접떼기, 돌을 큰 암석에 쳐서 깨는 것을 모루떼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간접떼기란 원석에 아주 뽀족한 돌을 하나 정처럼 대어 놓고, 이 정처럼 대놓은 돌을 망치로 때려 박편(격지)나 돌날을 이차로 가공하여 만든 유물을 말합니다. 이 후기 구석기 이후 인류는 활을 발명하여 여우, 토끼, 새 등의 사냥도 가능해 졌습니다.

4. 우리 나라에서는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인이 있었는가요?

중요한 점은 전기, 중기, 후기 구석기인들은 진화했다고 보는 것보다 새로운 인류가 출현하여 전 단계의 기술을 더 발전시켜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겨집니다. 왜냐면, 평남 덕천인, 승리산인, 평양시 역포인, 만달라인 등 한반도의 구석기인들은 모두 다른 지층에서 출연하여 같은 시기, 같은 인이라 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 구석기인들은 많지만, 그 계통을 하나로 묶기는 어렵습니다.

5. 초기 인류는 모계사회였을까요?

이것도 증명하기 어렵습니다. 모통 학설은 인류는 초기부터 모계사회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결혼제도가 정착되지 않은 상태에서 실제 아이를 낳은 어머니는 확인할 수 있지만, 아버지는 확인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최근에는 모계제 사회가 아닌 1부 1처의 남성중심사회가 초기 인류부터 있었다는 주장도 많습니다. 그 이유는 사회집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남성들간의 성적인 갈등이나, 아이들에 대한 폭력을 제어할 수 있는 사회적 규약이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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