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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히스토리아 역사 스토리

로마사 이야기 8 - 디오클레티아누스, 콘스탄트누스, 그리고 콜로누스 제도

디오클레티아누스, 콘스탄티누스 그리고 콜로누스제도

1.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제국 분할 통치>

군인황제 시대 이래 약해진 로마는 제국의 영광을 되찾기 위한 최후의 노력을 시도합니다. 제정 로마가 후기로 가면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트누스는 강력한 황제권을 유지하기 위한 독재적 개혁정치를 실시합니다. 그럼 이번 장에서는 이들 철인황제들의 개혁 정치를 한번 볼까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정치는 <제국 분할 통치>로 총괄할 수 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2명의 황제와 그 2명의 황제 아래 2명의 부황제로 이루어진 황제단이 제국을 나누어 통치하는 4제통치를 실시합니다. 이중 디오클레티아 누스가 최고 황제권을 가지며, 그가 죽을 시 아래에 속한 직속 부황제가 제국을 계승하는 형태의 정치체제입니다. 이것을 실시한 목적인 황제가 죽은 후 군인들에 의해 <제위계승분쟁>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함입니다.

또 동방으로 수도를 옮김으로서 동방의 초인간적이고 신적인 <전제군주제>를 도입하였습니다. 즉, 동방 페르시아식의 강력한 전제군주제를 답습함으로서 강력한 황제권을 갖추는 것입이다. 그리고 여러명의 황제가 제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는 것이지요.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제국분할과 동시에 속주 분할도 추진합니다. 그런데 속주 분할은 로마 제국에 엄청난 재정압박을 가져옵니다. 당시 로마제국은 그 규모가 엄청났으며, 그 엄청난 로마를 유지하기 위한 행정관리의 수와 군대의 수도 엄청났습니다. 이것은 황제에게 커다란 재정적 압박으로 다가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제국분할과 속주분할의 후속조치로, 로마의 군제 개편을 했습니다. 수도에는 중무장한 기동부대로서 야전 기병을 두었습니다. 국경지배에는 변경주둔군을 둡니다. 기동부대는 출신과 관계없이 능력이 우수한 자를 선별하여 변경에 무슨 일이 생겼을 때, 기동력을 발휘하여 변경에 지원가는 부대입니다. 이 당시 싸움을 잘하는 자들 중에는 겁 없는 게르만인들이 많았습니다. 기동부대의 주력은 게르만인이 차지합니다.

변경주둔군은 현지인으로 충당하였지만, 군인수가 현저하게 모자라자 병역의 의무를 세습화시켜 버립니다. 따라서 변경주둔군은 세습화된 현지인들로 구성되었고, 이들은 강제징집된 경우가 많았으므로 로마에 대한 충성심이 그리 높지 않았습니다.

2. 콜로누스제도가 정착되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은 사실 군대, 행정 개혁이 중심인데, 이러한 개혁은 엄청난 국가재정의 압박을 가져오는 것이였습니다. 따라서 개혁에 뒤따른 세금 증세는 필연적이였고, 이것은 로마 사회의 기본 제도를 흔들어버릴 만큼 파격적이였습니다.

황제는 증가된 세금을 속주에 할당합니다. 속주는 그러한 세금을 각 도시에 할당합니다. 도시의 시참사회와 도시의원들은 그 세금을 몽땅 내야하므로 상당히 부담이 되었겠죠. 따라서 도시에서 떠나려는 사람이 늘고, 도시 의원을 포기하려는 자들이 속출합니다. 황제는 이러한 현상을 막기 위해 도시사람들의 직책을 고정시키고, 그 직책을 세습하도록 강요합니다.

상인과 수공업자들에게도 많은 세금을 부과했는데, 이들도 도망가지 못하도록 직업을 고정시키고, 세습화합니다.

또 대지주나 황제령의 경영자는 많은 토지세를 내게 되어 있는데, 이들 경영자는 그 세금을 소작인이나 소농에게 전가합니다. 소작인이나 소농들은 많은 세금을 감당하기 힘들어 토지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이 발생했습니다. 황제는 이러한 현상을 막기 위해 농민들을 토지에 묶어두고, 직업을 고정화, 세습화 하였습니다. 농민들은 토지에 강제로 묶이게 된 것이지요.

황제는 이렇게 대부분의 세금원이 될 직업들을 고정화, 세습화해버렸습니다. 그 중 가장 힘든 것은 엄청난 토지세와 인두세, 재산세를 내야 하는 농민들이였습니다. 결국 농민들은 어마어마한 세금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자, 파산선고를하고 스스로 자유민으로서의 권리를 포기하게 됩니다. 왕에게 세금을 내느니, 차라지 유력한 대지주 밑에 소작농민으로 들어가 대지주 땅을 경영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대지주에게 스스로 투탁해서 토지에 결박된 농민들이 생겼고, 이것이 새로운 소작제도은 <콜로누스제도>입니다.

용어를 좀 구별하자면, 고대의 <라티푼티움>이 노예노동을 기반으로 한 제정초기의 대농장 경영체제라면, <콜로누스제>는 로마 제정후기 자유를 버린 농민들인 콜로누스를 이용하여 대농장을 경영하는 체제를 말합니다. 이렇게 자유를 버린 농민들은 훗날, 중세시대의 농노라 불리게 되면서 노예도 아니고, 자유민도 아닌 어정쩡한 신분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또, 콜로누스 제도가 정착되면서, 기존의 노예들도 콜로누스인(자유를 버린 예속농민)과 같은 위치로 올라서게 됩니다. 즉, 대지주들이 노예에게도 토지를 주고 예속농민처럼 토지 경작을 하라고 강요합니다. 노예들은 지주에게 소작료만 꼬박꼬박 내면 이전 노예생활보다는 좀 더 나은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죠.(물론 일부 노예에 한정된 이야기입니다만....) 이러한 노예들도 중세에는 농노로 업그레이드 될 것이라고 예언할 수 있겠네요.

콜로누스(콜로나투스)가 생긴 원인 중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정복전쟁의 중단으로 전쟁 노예공급이 감소했다는 점입니다. 노예가 부족해진 로마 지배층이나 대지주는 농민을 노예로 활용하기 위해 <소작제도>를 적극 도입하였고, 이 것이 당시 황제의 토지결박제도와 맞물린 측면도 있습니다. 또, 고위관직자와 국가의 지배층은 대지주로서 스스로 면세특권을 획득하고, 자신의 땅에 대한 일종의 <불입권>을 관습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중세 장원의 불입권과 연결된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러한 개혁 속에서 모든 사회 계층이 황제권에 종속되고, 농민들은 토지에 결박되었습니다. 이것은 세금을 토지에서 나는 현물로 받게 되는 것을 일반화시켜 화폐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인플레이션을 심화시켰습니다. 황제는 이러한 현상을 막아보고자 <최고가격제>를 실시하여, 물가 상승을 막고 물건 가격의 상한선을 규제하려고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3. 황제의 개혁 결과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동방적 전제군주제를 도입하면서 제국을 4분통치하고, 속주를 세분화하는 정책입니다. 그러나, 속국의 세분화의 목적은 속주총독이 군인화하는 것을 막아 군인정치를 억제하려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속주 세분화로 행정관리가 너무 증가하였고, 군제 개편으로 재정지출이 너무 많았습니다. 황제는 재정 위기를 극복하려고, 병역을 세습화시켜버리고, 연좌적 납부제를 도입하여 직업을 고정화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직업의 세습화와 토지결박은 <콜로누스>라는 예속적 소작제를 발생시켰습니다.

이러한 황제의 개혁은 3세기 무렵 흔들리던 로마를 일시적으로 안정시킨 공로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말 그대로 <일시적>인 것이였습니다. 왜냐면, 이러한 개혁은 문제가 된 근본원인을 해결한 것이 아니라, 강력한 황제권을 바탕으로 문제점을 감춘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직업의 고정화와 엄격한 신분계층화를 바탕으로 방대한 관료군과 군대에 의존하는 정치체제입니다. 또, 동방적인 절대 군주를 표방하여 사회를 엄격한 군사독재체제로 몰고가서 사회 모순을 감히 꺼낼 수 없게 만든 체제이기도 하죠. 결국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은 강력한 황제가 사라지면, 그 모순이 더 커져서 나중에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곪아버릴 개혁이였습니다.

4. 콘스탄티누스의 재개혁

콘스탄티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이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그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대안을 찾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일단 5황제 통치체제를 혁파하고, 단일황제체제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로마의 향락적인 문화와 로마인들의 부패한 생활상을 개탄하면서 밀라노 칙령을 발표합니다. 밀라노 칙령의 내용은 <크리스트교에 대한 공인>이였습니다. 그러나, 실제 황제가 크리스트교를 믿었다기 보다는, 경견한 생활을 하는 기독교인을 이용하여 로마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함이였습니다. 그리고, 강력한 동방적 전제군주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수도를 동방의 <콘스탄티노플>로 이전합니다. <콘스탄티노플>은 황제의 이름을 따서 만든 도시인데, 후에 비잔틴 제국의 수도인 <비잔티움>으로 바뀌었다가, 오스만투르크가 점령하면서 <이스탄불>로 이름이 바뀝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전 황제시 인플레이션과 화폐제도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솔리두스 금화를 만들어 화폐개혁을 시도했습니다. 그리고 콜로누스제도를 강화하여 농민들이 토지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강격하게 규제했습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역시 강력한 동방적 전제군주제에 입각한 power로서 정치했을 뿐, 사회적 모순의 근본원인은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그가 죽은 후 로마 사회는 계속적으로 강력한 동방적 전제군주제를 시도했지만, 차츰 먹히지 않게 되었고, 결국 로마의 서로마와, 콘스탄트노플의 동로마로 분열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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