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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히스토리아 역사 스토리

중세유럽사5-프랑크 왕국의 분열과 이민족의 2차 침입

프랑크 왕국의 분열과 이민족의 2차 이동

1. 프랑크 왕국의 붕괴 원인

<마르텔 - 피핀- 샤를마뉴>로 이어지며 영원할 것 같던 프랑크 왕국이 멸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샤를마뉴 대제가 죽은 바로 직후부터 멸망의 징조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첫 번째 이유는 제국 자체가 여러 부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강력한 왕인 샤를마뉴가 있을 때에는 모두가 충성하는 듯 보이지만, 이 강력한 왕이 죽은 뒤 각 부족들은 충성할 구심점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점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메로빙거 왕조가 망한 이유가 같습니다. 프랑크 왕국이 분할 상속제라는 점입니다. 샤를마뉴 대제가 죽은 뒤 재산 분할과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이 발생하였고, 이것은 3왕자에게 각각 국가가 분할되어 상속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세 번째 이유는 샤를마뉴가 죽은 시점이 제 2차 민족 이동기라는 점입니다. 샤를마뉴라는 강력한 왕이 죽으면서, 노르만족, 마자르족 등의 활동이 가속화되었고, 이슬람 세력도 다시 영역을 확장하기 시작합니다.

2. 베르됭-메르센 조약(9-10c)

샤를마뉴가 죽으면서 제국의 상속은 막내인 루이 경건왕에게 넘어갔습니다. 프랑크족의 상습기준에 의한 것이자, 샤를마뉴가 아끼었던 아들에게 넘어간 것이지요. 그러나 형제들은 이것을 인정하지 못하였고, 형제간 내분이 지속되었습니다. 그 결과 <베르됭 조약>으로 영지는 분할 상속되었습니다.

<베르됭> 조약의 내용으로 서부프랑크는 찰스 대머리왕에게, 동부프랑크는 루이 독일왕에게 넘겨졌습니다. 그리고 중부 프랑크와 이탈리아지방은 장자 로테르에게 넘겨졌고, 로테르가 프랑크 왕국의 전체 황제를 칭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장자 로테르가 사망하면서 또 다시 영토 문제가 대두되었습니다.

이번에는 <메르센 조약>으로 영토를 다시 재정리했습니다. 그 내용은 로테르의 땅이였던 중부프랑크를 동프랑크, 서프랑크가 나눠갖는다는 조약입니다. 이로서 영토는 동프랑크, 서프랑크, 남이탈리아로 나뉘게 됩니다.

<메르센 조약>으로 나뉜 영토는 오늘날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동프랑크는 10c 오토 1세에 의해 신성로마제국이 됩니다.

서프랑크는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되면서 카페 왕조가 14c까지 아주 미약하게 버텨나갑니다.

남부이탈리아는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된 이후 수없이 분열되어 통일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이 3개의 프랑크는 하나라는 인식이 남아있었습니다. 특히, 신성로마제국(동프랑크 왕국)은 옛 로마의 영토를 통일한 책임이 있다며 로마와 샤를마뉴의 후계자를 자처합니다. 따라서 신성로마제국은 끊임없이 남부이탈리아 및 기타 지역 통일을 추구하게 되며 이것은 프랑크 왕국의 지원자였던 교황과의 피할 수 없는 싸움이 시작됨을 의미합니다. 훗날 카노샤의 굴욕은 로마 교회와 신성로마제국 황제간의 문제였습니다.

3. 9-11c 이민족의 재침입

9세기 이후 게르만에 이어 제 2차 민족 이동이 시작됩니다. 이 민족이동은 스칸디나비아 반도 지역 주변에 살던 게르만족의 일부 민족인 노르만의 이동을 말합니다. 이들이 북부에서 오면서 유럽사회는 한차례 큰 지각변동을 겪게 됩니다. 또 동부에서는 마자르족이, 남부에서는 이슬람 세력이 서유럽을 위협하면서 유럽은 또 다시 사면초가가 됩니다.

먼저 이슬람의 침입부터 볼까요? 이슬람은 시칠리아를 정복하면서 지중해 연안을 통일할 계획을 세웁니다. 그들은 <지중해에는 크리스트교인의 배는 널빤지 1조각도 띄울 수 없다>고 호언하면서 밀고 올라왔습니다. 시칠리아는 비록 10c 동로마 제국에 의해서 유럽사회에 환원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베리아 반도는 이슬람이 오랜시간 정복하면서 지중해 바다를 사이에 두고 끝없는 쟁탈전을 벌이게 됩니다.

이슬람 세력보다 더 광범위하게 유럽사회를 흔든것은 바이킹이라 불리는 노르만족입니다. 이들은 민족이동을 통해 유럽 곳곳에 국가를 성립시킵니다.

슬라브 땅에는 노브고로드 공국, 키예프 공국을 세웁니다. 특히 키예프 공국은 최초의 러시아 국가로서 러시아의 기원이 됩니다. 그들이 시칠리아 왕국과 노보고로드 왕국을 세움으로서 하천과 해로에도 내륙교통로를 개척하였습니다. 진정한 바이킹의 후예다운 업적이네요.

덴마크계인 데인족인 영국에 침입하면서 활약했습니다. 그들은 영국 북동부를 점령하였는데, 훗날 크리스트교로 개종하게 되어 앵글로-섹슨족에 융화되어 버렸습니다. 노르만인 중 일부는 아일랜드에도 침입하였는데, 게르만인도 막아낸 아일랜드의 캘트족들은 노르만마저 격퇴합니다. 이들 노르만인들은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북미대륙쪽으로 진출했다고 합니다.

이 당시 노르만족의 세운 국가중 가장 문제가 되는 국가는 <노르망디 공국>입니다.

이 노르만족들은 영국, 프랑스 해안을 약탈하면서 해안을 따라 이동하였습니다. 이들의 영토는 프랑스 북부에서 영국에 이르기까지 광대했죠. 서프랑크의 카페 왕조는 이들을 막을 힘이 전혀 없어서 이들에게 봉토를 수여하고, 노르망디 공국을 인정하였습니다. 즉, 이들은 서프랑크왕에게 땅을 받는 댓가로 충성하는 봉건영주화 된 것이지요. 그래서 왕국이 아니라, 공작이 다스리는 <공국>입니다. 하지만, 노르망디 공국의 힘은 서프랑크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였습니다. 이들은 11c 시칠리아를 이슬람에게 탈환한 뒤 남이탈리아에 시칠리아 왕국까지 성립시킵니다. 또 영국을 정복한 이후에는 노르만 왕조를 만들기도 합니다.

문제는 이 노르망디 왕국의 영토가 프랑스 지방의 1/3에 이르고, 영국땅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노르망디 공국의 공작이 누구를 첫 번째 왕으로 모시는가, 또는 누가 이 공국의 공작이 되는가에 따라 영국과 프랑스의 운명이 바뀔 지경이였습니다. 이 문제가 하나의 원인이 되어 14c 영국과 프랑스는 116년에 걸친 백년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이렇게 노르만족이 이동하면서 유럽사회는 다시 한번 파탄납니다.

게르만의 이동 이후 가까스로 정리된 유럽의 질서는 다시 박살나고, 샤를마뉴 이후의 문예부흥은 좌절당합니다. 마자르족, 노르만족, 이슬람 세력의 서유럽 침입으로, 유럽 사람들은 강한 기사나 제후, 국왕에게 자신을 의탁하게 됩니다. 또 국왕과 실권계급은 실력있는 기사에게 땅을 주어 노르만족의 침입을 격퇴할 구실을 찾습니다. 또는 노르만족 자체를 봉건영주로 인정하여 국왕과의 협조체제를 꾀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제도가 바로 유명한 유럽의 <봉건제도>입니다. 즉, 노르만족의 이동의 역사적 의의를 찾으라고 한다면 유럽사회의 봉건화이겠네요. 봉건제도는 유럽이 다시 회복하기 위해 마련한 사회안전장치이며, 이 제도 속에서 유럽사회를 복구한 이후 다시 문예부흥과 도시성장이 이루어집니다. 도시가 다시 성장하게 되면서, 이 봉건제도는 점차 사라지게 됩니다.

그럼 다음 번 서유럽사를 다를 때 제목은 봉건제도 이겠네요. 봉건제도로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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