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에도 파벌이 존재하였다.
이 글은 운영자의 글이 아닙니다. 신라의 화랑도는 원천적으로 파가 나뉘게 되어 있었다. 사다함에게 낭도가 따랐고, 문노가 일찍이 낭도 5백 명을 거느리고 사다함을 따랐던 사실이 있다. 한마디로 화랑들이 각기 낭도를 거느렸던 것은 처음부터 화랑들을 중심으로 파가 나뉠 소지를 마련한 것이었다. 화랑도에서 파가 나뉜 것은 7세 풍월주 설화랑(설원랑) 때였다. 그 때 문노 일파가 세종을 따라 지방에서 전공을 세웠는데, 위를 얻지 못하여 설화랑에게 불복하고 일문(一門)을 스스로 세웠다. 이 때 낭도들이 나뉘었다고 한다. 설화랑의 낭도들은 운상인, 문노의 낭도는 호국선이라 한 것이 파맥이 나뉘는 출발이었다. 마침내 당파가 나뉜 것은 9세 풍월주 비보랑 때였다고 한다. 10세 풍월주 미생랑 대에는 화랑도가 5개의 파로 갈라졌다. 미생랑 대에 나뉜 5개의 파는 통합원류(문노파 중 가장 정예-임종·대세·수일), 대원신통(미실일파-하종·구륜공), 진골정통(문노일파-보리공·숙리부), 이화류(문노정파와 혼합파 중 혼성된 자-정숙태자·원광), 통합파 중 가야파(천주공·서현랑)였다. 미생랑 대에 화랑도의 파가 이와 같이 갈라지자 상선들이 걱정하여 미생이 물러나게 되었다. 먼저, 화랑도의 두 파에 대하여 보기로 한다.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은 원래 혼인의 계통을 의미하는 인통이다. 인통은 여자들로 이어지는, 모계계승을 하는 것이었다. 인통은 부계계승을 거울에 비친 것과 같은 원리로 이어졌다. 인통은 왕을 비롯한 지배세력이 혼인을 한 계통이었다. 풍월주나 국선의 부인이 인통이 있어야 하였던 것으로 보아 왕들도 인통을 가진 왕비를 얻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진골정통은 구도공과 혼인한 소문국왕의 딸 운모공주의 딸 옥모의 모계 후손으로 이루어졌으며 지소태후를 우두머리로 할 때가 있던 집단이었다. 대원신통은 보미로부터 시작되어 진흥왕의 왕비인 사도를 우두머리로 할 때도 있던 집단이었다.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에는 늘 수주(首主)가 있었고 세대가 바뀌면서 그 수주도 바뀌었다.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은 모계로 이어졌으며 『화랑세기』의 시대의 지배세력 남녀가 대부분 그 계통 중 하나에 속하였다. 그것은 지배세력의 어머니의 계통을 따랐기 때문이다. 남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남자들은 한 대에 한하여 어머니의 계통을 이었다. 그런데 인통은 모계계승이었기에 부자간에도 인통이 달라지기도 하였다. 실제로 용수공·용춘공과 춘추공은 부자간이었는데 용수공·용춘공의 어머니는 대원신통 지도부인이었기에 그 계통을 이어 대원신통이었다. 그 아들인 춘추공은 진골정통 천명부인의 아들이었기에 진골정통이었다. 그러한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에 속한 여자들은 각자의 계통을 왕비로 삼아 왕을 같은 계통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그러한 사정은 풍월주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11세 풍월주 하종은 그 어머니 미실을 따라 대원신통이었다. 하종의 부제 보리공은 그 어머니 만룡을 따라 진골정통이었다. 따라서 풍월주와 부제가 인통을 달리하게 되었다. 혼인의 계통이었던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은 풍월주의 파가 나뉘는 기준이 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한 현상은 이미 미생랑 대의 5파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화랑도의 파는 단순히 화랑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사실 당시 신라는 많지 않은 지배세력들이 왕을 둘러싸고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다툼을 벌였다. 그 중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은 왕비·태후를 중심으로 그 계통이 유지되었다. 화랑이나 화주도 모두 그들의 아들과 딸이었기에 파로 인한 다툼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거기에 더하여 가야파가 등장하였다. 미생랑 대의 5파 중에 하나의 파로 자리 잡았던 가야파는 점차 세력을 키워 나가게 되었다. 특히 가야파는 천주공, 서현랑을 중심으로 세력을 뭉친 집단이다. 천주공은 진흥왕과 월화궁주 사이에 태어났다. 월화궁주는 가야(북국) 이뇌왕과 양화공주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천주공은 가야계통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서현랑은 무력의 아들이고 무력은 가야(남국)의 마지막왕 구충(구해 또는 구형)의 아들이다. 따라서 가야의 북국과 남국 출신 화랑들이 가야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 가야파는 부계계승을 하는 집단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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