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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고구려 부흥운동 사료

고구려의 부흥운동 사료

3월에 사찬 설오유가 고구려 태대형 고연무와 각각 정병 1만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옥골에 이르렀는데, 말갈병이 먼저 개돈양에 와서 기다렸다. 4월 4일 말갈과 마주 싸워 아군이 크게 이기고 목을 밴 것이 이러 셀수 없었으며 당병이 계속 이르니 아군은 백성에 물러났다.

고구려 수림성(水臨城) 사람인 검모잠(劍牟岑) 대형(大兄)이 유민(遺民)을 수습하여 궁모성(窮牟城)으로부터 패강(浿江)의 남쪽에 이르러 당의 관리와 승려인 법안(法安) 등을 죽이고 신라로 향하여 서해 사야도(史冶島)에 이르러 고구려 대신 연정토(淵淨土)의 아들 안승(安勝)을 만나 한성으로 맞아들여 임금을 삼고 소형(小兄) 다식(多式) 등을 신라에 보내어 호소하였다. … 그리하여 신라의 문무왕은 그들을 나라 서쪽의 금마저(金馬沮)에 있게 하였다.

(《三國史記》6, 新羅本紀6 文武王 10年 6月)

고구려민 3만명을 강회와 산남으로 옮겼다. 고구려 대장 검모잠이 무리를이끌고 반란을 일으켜서 장(보장왕)의 외손 안순(안승)을 왕으로 삼았다. 고간을 동주도행군총관으로 삼고, 이근행을 연산도행군총관으로 삼아 토벌하게 하였다.

안순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달아나자 고간이 도호부의 치소를 요동주로 옮기고 반란군을 안시성에서 격파하였다. 또 천산에서 쳐부수고 신라 원병 2천명을 사로 잡았다. 이근행은 그들을 발로하에서 쳐부수고, 다시 싸워서 포로와 참수한자가 1만에 이르렀다. 이에 평양의 패잔병들은 다시 군열을 정비할 수 있게 되자 함께 어울려 신라로 망명하였다. 무려 4년만에 평정되었다.

신당서 권 220, 열전 145, 동이 고려 총장 2년조(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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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해석 : 고구려의 부흥운동 사료입니다. 당은 초기에 안승을 왕으로 하여 고구려를 당에 복속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안승은 왕이 된 후 말을 듣지 않았지요. 검모잠이 왕족 안승을 맞이하여 왕으로 추대했는데, 당은 이를 토벌하려고 하였습니다. 검모잠은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도움을 요청하였고, 신라가 고구려 부흥운동을 지원하면서 당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신라는 익산 지역을 부흥운동의 전초기지로 내 주고 당과의 싸움을 장려합니다. 신라와 고연무의 부흥운동군은 당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둡니다.

당은 요동지방에서 보장왕 안승을 왕으로 하여 요동도독조선왕에 봉하고, 당의 명령을 들을 것을 요구하나, 보장왕은 오히려 고구려 부흥운동을 전개합니다. 당은 보장왕을 유배한 뒤 손자 보원을 왕으로 삼았으나, 보원 역시 부흥운동을 전개하여 당은 다시 보장왕의 아들 덕무로 대체합니다. 그러나 고구려 부흥운동은 끊임없이 전개됩니다. 후고구려국, 정안국, 흥요국 등의 후속 국가들이 고구려 땅에서 계속 일어났고, 결국 발해가 건국됨으로서 고구려의 부흥운동은 실제로 역사적 사명을 다 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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