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의 위력 : 역사를 바꾼 한 표들

 

한 표가 뒤바꾼 역사

 

우리 나라는 '투표합시다' 하는 날은 놀러가는 날, 쉬는 날, 또는 직장이 바빠서 나랑 상관없는 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최근 얼마전 대통령 선거를 제외하고는 투표율이 60%를 넘기는 경우가 많지 않거든요.

 

그러나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제도를 완성하기 위해 피눈물나는 투쟁을 했거나, 1표의 차이로 역사가 바뀐 전례가 있다면, 투표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고 있겠죠? 선거 제도를 처음 도입한 선진국들은 1표의 소중함을 역사 속에서 배웠답니다.  물론 지금은 국민직선제이지만 백년전만 해도 대부분이 간접 선거 방식이거나, 여성 또는 노동자를 제외한 투표이기는 했지만 말이죠.

 

그럼 지금부터 역사를 바꾼 투표들, 특히 1표를 살펴볼까요?

 

 

먼저, 민중들이 한 표를 행사하기 위해 처절하게 투쟁했던 프랑스!!! 대혁명의 국가이죠.

 

프랑스 대혁명 때 국왕 루이 16세와 왕비 앙투와네트는 오빠가 황제로 있는 오스트리아에게 군사파견의 밀서를 보냈습니다. 프랑스 혁명군은 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열세를 보였는데, 그 이유는 왕비가 적군에게 프랑스 전력을 알려주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혁명기 과격파인 자코뱅파는 국왕 일가를 모두 사형시키자는 안건을 투표에 부쳤습니다. 그러나 내통의 결정적 증거가 없어서 투표 전날까지 국왕이 사형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우세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 문서가 투표 전날 발견되었죠. 721명이 참여한 투표에서 334대 387로 사형 선고가 내려졌습니다. 당시 자코뱅파와 지롱드파의 숫자가 비슷한 것으로 미루어 하루 차이가 프랑스 역사를 바꾼 것이죠.

 

최초로 사형을 당한 루이 16세는 민중이 아버지인 '국왕'을 사형시키는 비윤리적인 만행을 허용한 투표제도가 프랑스를 망칠 것이라고 했지만, 프랑스의 투표 사례는 전세계 민주주의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이후, 프랑스는 왕국을 계속할 것이냐, 공화국을 할 것이냐를 놓고 1875년, 투표가 시행되었습니다. 이 선거는 프랑스의 국가형태를 결정하는 중요한 투표였습니다. 당시 왕당파와 공화파의 국회의원은 똑같이 353명이었답니다. 투표 결과는 알 수 없겠죠?

 

그러나 막상 당일.... 왕당파 의원 한명이 급성 복통으로 투표에 불참하게 되면서 1표 차이로 공화파가 이겼답니다. 제국주의 시대부터 1, 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프랑스를 이끌었던 제 3 공화국은 이렇게 탄생했답니다. 반면, 1940년에 3 공화국이 몰락한 것도 1표 차이었습니다. 공화당 의원 중 한명이 점점 우월의식에 빠진 공화당에 반기를 들면서 1표 차이로 공화당이 몰락했거든요.

 

 

이제 영국의 경우를 볼까요?

 

투표제도를 전세계에 확산시킨 영국... 영국 역사 역시 1표 차이로 운명이 바뀐 경우가 많았답니다.

 

1645년. 영국은 청교도인이었던 크롬웰이 독재관이 되어 정권을 잡았습니다. 대대로 왕정이었던 영국에서 의회대표가 독재권력을 잡은 일은 충격적이었지요. 크롬웰은 이후 항해조례와 같은 법령으로 북유럽에 자신의 업적과 이름을 남기게 됩니다. 또, 크롬웰의 독재를 참지 못한 개신교도들이 신대륙으로 이주해 미국 동부연안 등을 개척하게 되면서 북미의 서부개척시대도 시작된답니다.

 

이렇게 역사에 이름을 남긴 크롬웰의 등장은 극적이었습니다. 성공회와 카톨릭, 청교도, 개신교 등 종교가 다양했던 영국 의회는 크롬웰을 영국 총사령관으로 임명할 지 치열한 논의끝에 투표를 시작했습니다. 투표결과는 91대 90... 한표 차이로 크롬웰이 임명되었고, 영국과 유럽, 미국의 역사가 바뀐 것이지요.

 

크롬웰은 1표 차이의 신임을 토대로 국왕인 찰스 1세를 처형하고, 영국을 공화정으로 바꿔 버립니다. 또 영국이 해외진출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죠. 단지 청교도를 너무 좋아해서 영국 전역을 수도원처럼 만들었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술도, 담배도, 자유연애도 엄격히 금지하는 그의 성향 때문에 영국인들은 감옥같은 세월을 보냈으니 말이죠.

 

 

결국, 영국의회는 크롬웰을 추방했습니다. 그리고 급히 독일에서 왕실의 후손인 하누버를 데려와 영국의 왕으로 삼고 영국 왕가를 다시 살리려고 했답니다. 그러나, 아무리 왕실재건이 급해도 독일핏줄이 섞인 영국인을 왕으로 삼기는 무리겠죠? 영국의회는 독일인 등 타지역 사람들도 영국에서 살 수 있다는 '주거법'을 급히 만들어 투표를 실시하였습니다. 대부분 영국인들은 반대했지만, 주거지가 다른 웨일즈, 스코틀랜드 등 다른 지역 의원들은 주거법을 좋아했지요.

 

이 투표는 영국본토 국회의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타지역 출신 국회의원들의 전폭적인 지지 때문에 1표 차이로 통과되었습니다. 그래서 18세기 영국 하노버 왕조가 탄생하면서 영국 왕실의 전통이 이어진 것이지요.

 

1표 차이로 만들어진 이 주거법은 영국 왕실 뿐 아니라 영국 본토(잉글랜드) 외의 타주민들이 영국인들과의 지역 차별을 없애는 1등 공신이 되었답니다. 뭐, 왕도 수입하는데 노동자 이주 쯤이야 문제도 안되는 일이 된거죠.

 

이제.... 민주주의의 지킴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미국의 경우를 한번 볼까요?

 

미국의 초기 역사는 극적인 한표로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초창기, 미국 대통령을 뽑는 하원의원 선거에 토머스 제퍼슨이 후보로 나왔습니다. 제퍼슨은 미국 독립선언서 초안을 잡고, 미국의 행정 제도를 구상한  유명한 대통령이죠? 그는 강력한 후보인 아론 버르 후보를 단 1표차이로 이겼답니다.

 

미국 역시 초창기에는 상원, 하원 국회의원들이 간접투표로 중요안건이 결정되었습니다. 아직 국민투표도 없었고, 여성이나 노동자, 흑인은 지역대표를 뽑는 일조차 참여할 수 없었답니다. 따라서 100~300명이 투표했던 미국의 간접선거에서는 유독 1표차이의 결과가 많답니다.

 

잭슨 대톨령, 루서포드 대통령, 루즈벨트 대통령, 코픈비 대통령 등 많은 대통령들이 한표차이로 대통령이 되거나, 동점 상황에서 캐스팅보트를 쥔 국회의장의 결정으로 대통령이 되었답니다.

 

대통령 뿐 아니라 미국의 50개 주도 1표 차이로 운명이 갈렸습니다.

 

1843년. 미국인들은 서부개척으로 얻은 워싱턴, 오리건, 아이다호를 미국의 주로 편입시킬 것이냐, 독자적인 지역으로 분류할 것이냐를 놓고 치열하게 공방전을 벌였습니다. 사유재산을 주장하는 이들은 개척으로 얻은 땅은 독립적인 지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반면, 미국을 하나의 연방으로 세울 것을 주장하면서 올-아메리카로 편입해야 한다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관련 국회의원들이 참여한 투표는 51:51로 팽팽했고, 미국의 운명을 가를 시간을 계속 지나고 있었습니다. 끝없는 토론 끝에 결국 상원의원 마티유가 찬성표로 돌아서면서 워싱턴은 미국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남부의 텍사스도 마찬가지랍니다. 당시 텍사스 국회의원들은 26:26으로 텍사스의 미국 편입 찬반이 팽팽했습니다. 끝없는 토론이 계속되면서 미국 남부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랐답니다. 결국 헤네가라는 상원의원이 편입 찬성으로 돌아서면서 텍사스도 1표차로 미국 영토가 되었습니다.

 

 

자, 이제 미국 뿐 아니라 전세계의 운명을 바꾼 1표를 알아볼까요?

 

1939년, 세계 2차대전이 발발하면서 미국은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 군국주의 국가와의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필요한 병력을 의무적으로 징병해서 군인으로 활용할 수 있는 '징병제도법'을 만들었답니다. 그러나, 징병법은 임시법이었습니다. 본토가 공격당한 것도 아니고, 원한다면 미국은 전쟁에서 빠지면 되거든요. 세계평화를 위한다는 목적으로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끝없이 내몰 수는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세계 2차대전은 끝날 기미가 없었습니다. 1941년 8월. 미국은 징병제도법을 연장할 것이냐, 끝낼 것이냐를 놓고 전체 연방 의원들과 각 주의 대표들이 모여 투표를 했습니다. 전쟁과 관련이 없었던 주에서는 징병을 반대했고, 미국 참전의 필요성을 인식한 주에서는 징병법 연장에 찬성했습니다.

 

그 결과 단 1표 차이로 징병법의 18개월 연장이 통과되었답니다. 그런데 이 법안이 통과된지 4개월만에 일본이 미국령인 진주만을 폭격하면서 미국은 세계대전의 중심국가가 되었습니다. 미국은 징병법으로 마련된 군수물자와 병력으로 대항하였습니다. 일본은 자살특공대인 가미가제까지 동원하면서 미국의 군수자원과 병력을 감당하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답니다. 만약, 징병법이 부결된 채로 미국이 일본에 전쟁을 했다면 좀더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전쟁이 되지 않았을까요?

 

 

전국민이 투표에 참여하는 21세기에는 1표로 운명이 바뀌는 일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아니, 투표인단이 3000만명이 이르기 때문에 1표차의 역전이란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3000만명 중에 '나하나 쯤이야'라고 생각하고 빠지는 사람이 0.3%인 10만명만 되어도 국가의 운명은 바뀔 수 있습니다.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단 몇천표 차이로 역전되는 지역이 많고, 대통령 선거에서도 몇십만표 차이정도로 운명이 바뀌니까요.

 

역사를 통해 1표의 무서움을 알고 있는 국민들은 투표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투표가 미래를 바꾸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한답니다. 대한민국에서 대표를 뽑는 선거는 대부분 표를 행사하는 투표로 이루어집니다. 지금까지 투표가 귀찮다, 혹은 하기싫다고 생각한 40%의 국민들이 투표에 참여한다면 0.3%의 차이로 결정되는 나라의 운명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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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일제시대 : 공산주의 단체들을 이름으로 해석해보자!!!

북성회, 북풍회, 화요회, 흑도회, 정우회...

이 이야기는 초보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쉬운 용어와 비약된 줄거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여기 등장하는 모든 사회주의자분들은 독립을 위해 헌신한 애국지사분들이며, 이 분들의 일화는 여기 짧게 나오는 용어 이상으로 구체적인 이야기와 열정적인 내용이 더 있음을 말씀드립니다.

1919년. 우리 민족은 거국적인 3.1운동을 전개해서 일본과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인지 1920년엔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출범하였고, 일제 역시 조선인들을 때려잡는 무단통치를 중지하고, 형식적이나마 문화통치를 약속하였습니다.

1919년 3월 중순. 농촌까지 퍼진 3.1운동

이런 분위기가 되자 공산주의 사상을 통해서 조선의 독립을 추구하려는 <공산주의자>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답니다. 특히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가 탄생하자,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은 러시아를 본받아 일본으로부터 해방하자는 움직임도 있었지요.

그래서인지 우후죽순 공산주의 단체들이 대거 등장하기 시작했답니다. 그런데, 그 단체들의 이름을 지금 들어보면 유명한 무협지에나 나올 것같은 무시무시한 이름이 많았답니다. 한번 살펴볼까요?

먼저, 1921년 흑도회(黑濤會)!!!

그 이름으로 보자면 검은 물결이 밀려온다는 뜻이네요. 여기서 검은 물결이란 사회적으로 약자인 노동자들을 일컫는 말이랍니다. 빨간색이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붉은 피의 상징이라면, 검은 색은 무정부주의와 사회적 약자를 싱징하는 혼돈의 색이었습니다. 이 단체는 박열, 김약수 등 조선 고학생 동우회 회원들이 일본 무정부주의자들과 연대해서 만든 단체랍니다.

박열 선생과 김약수 선생

그것도 제국주의의 심장인 일본 본토 한가운데서 말이죠. 이 사람들은 일본에서 발생하는 조선인 노동자 집단학살에 반대하는 투쟁을 하면서, 일본-조선인 노동자들이 마르크스의 깃발아래 함께 모일 것을 꿈꾸었죠. 하지만, 이들이 꿈꾼 세상은 인간의 존엄성이 지켜지는 참된 세상이었습니다. 그 존엄성이 지켜지고, 그것을 가로막는 일본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마르크스이던 크로프트킨이던 이념은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했죠. 이념은 인간을 지키기 위한 도구일 뿐이니까요.

이렇게 인간의 존엄성과 실존에 대한 자각이 모든 것을 앞선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밖에서 보는 이들은 흑도회를 무정부주의자들이라고 규정한 것이랍니다.

흑도회 선언문

박  열(1921. 1. 1)

1. 우리는 어디까지나 철저하게 자아에 산다. 일상의 일거일동이라도 그 출발을 모두 자아에서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철저한 자아주의자로서 인간은 서로 헐뜯는 것이 아니라 상부상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과, 미워하지 않고 친하게 지내며 도울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2. 우리는 사람마다의 자아를, 자유를 무시하고 개성의 완전한 발전을 방해하는 그 어떤 불합리한 인위적 통일에도 끝까지 반대하며 전력을 다해 그를 파괴하는 데 노력한다.

3. 우리에게는 아무런 고정된 주의는 없다. 인간은 일정한 틀에 박혀 있게 될 때 타락하고 사멸하는 것이다. 맑스와 레닌이 뭐라고 지껄였던, 크로프트킨이 뭐라고 말했던 우리에게는 필요없다. 우리 길에는 우리의 귀중한 경험이 있고 방침이 있고 또 뜨거운 피가 있다.

4.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을 위하여 우리들 자신이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일을 우리 자신 스스로 규율한다. 외부에서 오는 어떤 강한 권력도 우리의 행동을 규율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5. 우리들은 자기를 희생하라는 어떠한 강요도 받아들일 수 없다. 사회 인류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라고 말하는 자들은 모두 예외없이 위정가爲政家들이다. 그중에는 이른바 인도주의 등을 가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우리들에게는 만일 자기희생이 있다면 그것은 자아의 의지에서 비롯된 일일 뿐이다.

6. 우리들은 모두 자유롭다. 배고플 때는 먹고 하고 싶을 때 하고, 울고 싶을 때 울고, 화낼 때 화를 낸다. 우리의 자아, 우리의 감정, 우리의 이성중 어떤 한 가지도 다른데서 강요와 지휘를 받는 일은 없다. 의지가 있는 곳에 삶이 있고 마음 다한 곳에 감격이 있다. 자아의 강한 요구에서 생긴 것이라면, 그것이 우리들에게는 신이고, 선이며, 미이다. 우리에게는 소위 절대 보편의 진리대법칙이란 것은 없다. 그런 것들은 모두 자신의 내면적 요구의 진화 발전과 함께 변화해간다.

7. 우리들은 이 인성과 자연의 변화중에 참된 질서가 있고 참된 통일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곳에 인간의 진화가 있고, 새로운 창조가 있다.

8. 이곳에서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에 의한, 우리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선언하는 바이다.

박열이란 사람은 아예 <흑도>라는 기관지까지 발행하면서 무정부주의를 외쳤답니다. 그런데 이 무시무시한 무정부주의 및 폭력 혁명 단체는 내부 분열로 해체된답니다.

흑도회가 발행한 <흑도>

김약수 등 사회주의 이론과 마르크스를 동경하는 사람들은 박열이 주장하는 폭력 혁명 및 무정부주의가 과격하다고 생각하면서 따로 북성회(北星會)를 만들었어요. 이름이 왜 북성회냐구요? 북쪽의 별을 모으다... 즉 러시아를 따라가겠다는 거죠.

반면에 무정부주의가 조국 독립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박열은 흑도회, 흑우회 이전에 있었던 풍뢰회(風雷會)를 다시 만들어서 활동했답니다. 바람과 번개라는 조직 이름만 들어도 이 무정부주의자들의 성향이 어떤 것인지 짐작이 가죠?

이 무정부주의자들은 우파, 좌파, 사회주의자들 누가 비난하던지 혹은 일제가 탄압하던지 말던지 꿋꿋하게 무정부주의를 통한 독립활동을 전개했답니다. 그것도 제국주의의 심장인 일본에서 말이죠. 탄압이 거세지면 살짝 이름만 더 폼나게 바꿔주었죠. 불령사(不逞社), 흑풍회(黑風會) 등등 더욱 더 무시무시한 이름을 지어서 <인간 존엄성을 지키려는 우리의 노력은 멈추지 않는다>를 보여준 것입니다. 사실 독립운동가들이 무정부주의라고 말했던 박열의 노력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서구의 <실존주의 철학>을 앞서간 것으로 볼 수도 있답니다.

이 사람들은 어느 단체이던지 약간만 친일 경향이 보인다 싶으면 꿋꿋하게 저항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인 성향으로 공격했답니다. 노동단체이지만 친일파가 있었던 상애회(相愛會)와 충돌했고, 민족주의 범국민단체인 신간회(新幹會) 일본 지부마져도 <진정한 인권 보호과 독립의 정신이 없다>고 습격했답니다.

이들이 발행한 신문들도 이름이 무시무시하답니다. 기관지 이름이 호조운동(互助運動)이고, 신문 이름은 흑색신문(黑色新聞)이랍니다. 물론 무시무시한 전투적 기사들만 계속 내보냈으니 일본에 의해서 바로 발행 중지 당했겠죠?

반면 정직한 사회주의 운동을 표방한 북성회는 그나마 이름이 좀 점잖은 편이랍니다. 김약수 등 이 단체 사람들은 국내 사회주의 운동의 주도권을 먼저 잡으려는 생각으로 건설사(建設社)라는 단체를 만들었답니다. 일본이 보기엔 이 단체가 독립운동단체인지 말 그대로 건설 단체인지 헷갈릴 정도였죠. 하지만, 이건 사회주의 세력을 모으기 위한 잠깐의 위장술이었고 어느 정도 국내 본부가 완성되자 북풍회(北風會)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답니다. 북에서 부는 바람이라면.... 바로 러시아의 마르크스 주의겠죠?

북풍회 선언문

현재 조선의 사회운동은 극히 혼돈스런 상태에 있지만 바야흐로 조직을 필요로 하고 실천을 요구하는 신기운이 감돌고 있다. 운동의 초기에는 오직  소수의 전위분자가 대중과 비교적 간격을 두고 현실로부터 유리되어  학문적인 이상만을 추구하는 폐해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조선의 대중은 이미 움직이고 있다. 따라서 이제까지의 전위분자들은 어디까지나 현실을 토대로하여 대중과 함께 자본가의 본진을 향해 돌진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개혁하고 이러한 신국면에 적응하는 진용을 새롭게 준비하고 전술과 전략을 수립하여 싸움에 임해야 한다.  

  강령  

  1.사회운동이 본질적으로 대중 자체의 운동인 이상 우리는  어디까지나 현실에 입각한 대중의 실제적 요구에 따라 종국적인 이상을 향해 매진해야 한다.  

  1.우리는 대중운동 보몬인 노동자. 농민. 청년. 여성. 형평운동의 지적 교양과 계급적 훈련을 병행, 모든 현상타파 운동을 지지함과 동시에 경제문제에  비중을 두어 과학사상을 보급하고 도시와 농촌의 협동을 기한다.

  1.우리는 이제까지 노선이 불투명한 운동을 정리하고 조직의  분류를 면밀히 하여 종래의 소극적 부인의 태도를 버리고 더욱더 질서있게 정진할 것이다.  

  1.우리는 계급관계를 무시한 단순한 민족운동을 부인한다. 그러나 현재 조선에 있어  민족운동도 또한 피할 수 없는 현실로부터 발생하는 이상 우리는 특히 양대운동 즉 사회운동과 민족운동의 병행에 대한 시간적 연합을 기한다.  

  1924년 12월 27일  

  북풍회 중앙집행위원회  

반면, 3.1운동 직후 처음부터 국내에 터를 잡고 공산주의 운동을 했던 단체가 있었습니다. 그 이름은 바로... 무슨 단체인지 이름만으로는 성향을 알 수 없었던 화요회(火曜會)였습니다. 이 단체의 리더인 김재봉 외에도 역사적으로 유명한 박헌영, 임꺽정의 저자인 홍명희, 김찬, 김단야 등등 유명한 인물들이 포진한 최강의 공산주의 운동 단체였죠.

화요회의 맴버 : 김재봉, 홍명희, 김단야, 박헌영

그런데 이름은 왜 화요회일까요? 그건 마르크스의 생일이 화요일이기 때문에 만든 명칭이랍니다. 원래는 마르크스 사상을 연구하는 신사상 연구회였는데, 화요회라는 이름으로 바꾼 것이죠.

이 화요회는 소련의 공산주의를 신봉했기 때문에 중국 상해 공산당쪽 계열인 서울청년회와는 대립관계였답니다. 사실 1920년대 공산주의 3대 단체하면 북풍회, 화요회, 서울청년회였는데, 그럼 서울청년회는 뭐하는 단체였을까요?

원래 서울청년회는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같이 모여 만든 <서울파>라는 이름의 조직이었답니다. 서울파라고 하니깐 무슨 힘쓰는 조직같죠? 그래서인지 청년단체라는 걸 분명하게 하기 위해 서울청년회라고 이름을 지었지요. 하지만, 장덕수 등 일부 민족주의자들이 소련 코민테른에서 내려온 자금을 횡령하는 사건이 발생해서 사회주의자들 중심으로 단체로 변했답니다.

사기공산당 사건의 관련자들 : 이동휘, 장덕수, 최팔용

이동휘, 김철수 등을 통해 전해진 코민테른의 공산당 자금을 장덕수, 최팔용 등이 횡령한 사건으로
서울파에서 민족주의가 몰락하고 사회주의 단체로 변모하게 된 사건이다.

사회주의 단체가 된 서울파는 노동자, 농민들을 집중적으로 교육하면서 마르크스 주의의 위대함을 알리고, 민족주의자들이 농촌에 침투하는 것을 막는 역할을 했답니다. 그 결과로 1924년에는 조선청년총동맹, 고려공산동맹 등을 만들어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자, 문제는 지금까지 말한 단체들의 1925년 활동이었습니다. 북풍회는 한국-일본의 못사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모두 연대해서 혁명을 일으킨다는 범국제적인 마인드를 가진 독립운동단체였습니다. 반면, 화요회는 소련의 마르크스 주의를 신봉하면서도 조선의 실정에 맞추어 공산당 창립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단체였답니다.

그리고 서울청년회소련보다는 상해의 중국 공산당, 고려공산당과 연관이 많아서 화요회의 러시아파와 대립하는 관계였답니다.

하지만, 이 단체들은 조국 독립을 위해서 뭉쳐야만 했습니다. 우파나 민족주의와 협력은 고사하고, 공산주의자들끼리 대립하고 있으니 독립운동이 제대로 될리가 없었지요.

1925년 초반, 일본의 북성회는 일월회(日月會)라는 밝은 이름으로 바꾼 후 사회주의자들은 파벌을 버리고 모두 협력해서 독립운동을 할 것을 주장합니다. 그것에 영향을 받은 화요회와 북풍회는 서로의 생각을 조금씩 양보해서 1925년 제 1차 조선공산당을 창립했답니다.

문제는 서울청년회였습니다. 서울 청년회는 공산주의 운동보다 빈민이나 노동자를 돕기 위한 국제연대가 독립하는데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부갈등이 많았답니다. 결국 서울파는 분열되어서 일부는 일월회로 가서 조선공산당에 합류하게 된답니다.

이제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거창한 이름들을 다 버리고 하나의 단체로 모일 때가 되었습니다. 1926년 4월... 수많은 공산주의 단체들은 서로를 벗으로 인정하면서 정우회(政友會 : 바른 친구들)라는 이름으로 모였습니다. 그리고 여성 공산주의자들은 근우회(槿友會)라는 이름으로 뭉쳤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독립운동을 위해서 우파, 민족주의자, 좌파, 무정부주의자들이 모두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것에 공감했습니다. 그 결과 1926년. 우리 역사상 전무후무한 좌-우 연합 단체가 등장했답니다. 그것이 바로 새로운 근간을 알린다는 뜻의 신간회(新幹會)였던 것입니다.

신간회와 근우회의 강령

1. 신간회의 강령

우리는 정치적·경제적 각성을 촉진한다.
   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한다.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한다.  

2. 근우회의 강령

조선 여자의 공고한 단결을 기함
  조선 여자의 지위 향상을 도모함

3. 강령 실천을 위한 근우회의 행동 강령

 조혼 폐지 및 결혼의 자유
   
여성에 대한 사회적·법률적 일체 차별 철폐
   
일체 봉건적 인습과 미신 타파
   인신 매매, 공창 폐지
   농촌 부인의 경제적 이익 옹호
   
부인 노동의 임금 차별 철폐, 산전·산후 임금 지불
   
부인 및 소년공의 위험 노동과 야간 작업 철폐

- 신간회 창립 기사 : 좌우합작을 이룬 민족의 쾌거 -

신간회는 우리 역사상 유일하게 이념과 나이, 국내외를 떠나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모인 엄청난 단체였습니다. 신간회에 참여하지 못한 건 일제에 협력한 기회주의자들과 일부 서울청년회 극우파들 뿐이었죠. 그 규모도, 국내 지부 숫자도, 가입 회원도, 독립운동에 대한 영향력도 이전 어느 단체보다 막강했답니다.

신간회의 정치 규약  

  제1조. 본회는 신간회라 칭함.  

  제2조. 본회의 본부는 서울에 둠.  

  제3조. 본회는 본회의 강령을 관철키를 목적함.  

  제4조. 본회 회원은 연령 20세  이상 조선인 남녀로서 본회강령을 승인하는  자로 함. 단, 학생 및 20세 미만의 청년은 본회 학생부에 입회케 함.  

  제5조. 본회회원은 본회임원의 선거 및 피선거권 그리고 결의권을 가짐.  

  제6조. 본회회원은 본회의 일체의 결의 및 지휘에 복종함을 요함.  

  제7조. 본회회원은 회비로 1년에 금 30전을 본회에 납입함을 요함.  

  제8조. 본회는 각 지방을 구로 나누어 매구에 지회를 설치함.  

  제9조. 본회에 다음과 같은 기관을 둠.  

        1.대회 2.간사회 3.총무간사회 4.각 부회(특별부를 제외함)  

  제10조. 본회 대회는 본회 지회에서 선출된 대표로 성립함.  

  제11조. 대표회원은 30인의 1인으로 선출함.  

  제12조. 본회 대회는 본회에 관한 일체 사건을 결의하고 본부임원을 선거함.  

  제13조. 본회 정기대회는 매년 1차(2월), 본회 임시대회는 본부간사회가 필요로 인정할 때 또는 지부 대표회원 반수 이상의 요구가 있은 때에 회장이 소집함.  

  제14조. 간사회는 대회와 대회 사이에 있어서 대회의 직능을 행함.  

  제15조. 본회임원은 다음과 같이 둠.  

         1.회장1인 2.부회장 1인 3.총무간사 약간인 4.상무간사 약간인 5.간사 약간인  

  단, 회장,부회장 및 총무간사는 필요를 따라 비서를 본회회원 중에서 스스로 둘 수 있음.  

  제16조. 회장은 본회를 대표하며, 본회회무의 통일을 도모함.  

  제17조. 부회장은 회장을 보좌하고, 회장이 유고할 때에는 회장의 직책을 대리함.  

  제18조. 총무간사는 간사회 또는 총무간사회 결의에 의하여 각부의 사무를 집행함.  

  제19조. 상무간사는 총무간사를 보좌하여 부무를 처리함.  

  제20조. 본회에는 다음과 같은 부를 설치하고, 매 부에 총무간사 1인 및 상무간사  약간인을 둠.  

         1.서무부 2.재무부 3.출판부 4.정치문화 5.조사연구부 6.조직부 7.선전부  

  제22조. 본회에는 다음과 같은 특별부를 둠.  

  제23조. 본회 경비는 회비와 기타 수입으로 충당함.  

  제24조. 본회 대회에 관한 상세한 규정과 간사회, 총무간사회, 각 부회, 지회 및  특별부에 관한 규약은 별도로 정함.  

  제25조. 본규약은 본회 본부대회에서 증삭할 수 있음.  

임시규약  

  제1조. 지회규약 제3조,제4조에 관하여 지회가 설립되지 못한 구역은 본부에서 직접  처리함.  

  제2조. 본규약 제10조에 관하여 해구역에 지회가 설립되지 못하므로 본부에  직속한 회원은 본부에서 전형하여 대표회원을 지정함.  

대회규정  

  제1조. 대회는 회장의 소집으로 대표회원이 과반수를 출석할 때 성립함.  

  제2조. 대표회원은 1년간 그 대표권을 보유함. 단, 지부대회에서 필요로 인정할 때에는 개선할 수 있음.  

  제3조. 대회에서는 그 계속기간에 한해 다음과 같은 임원을 선출하여 둠.  

        1.의장1인 2.부의장1인 3.서기장1인 4.서기 약간인  

  제4조. 의장은 대회의 질서를 유지하며 의사를 진행하며 대회를 대표함.  

  제5조. 부의장은 의장이 유고할 때 의장의 사무를 대리함.  

  제6조. 서기장은 의장 지휘하에 서기사무를 총괄함.  

  제7조. 서기는 의사록 및 기타 문안을 작성하고 사무를 처리함.  

  제8조. 의사순서는 본부 총무간사회에서 정하여 대회에 보고함.  

  제9조. 지회로서 의안을 제출할 때에는 설명서를 첨부하여 대회개회 전4일 이전으로 본부 총무간사회에 제시함을 요함. 단, 대표회원으로서 특별의안을 제출할 때에는 5인 이상  연서를 요함.  

  제10조. 제출의안을 기각 또는 수정동의를 발할 때 3인  이상의 찬성이 없으면 논제를 삼지 아니함.  

  제11조. 본부 회장, 부회장 및 총무간사는 대회에서 결의권이 없음.  

  제12조. 본회임원 및 본부임원의 선출방법은 전형위원을  선출하여 정원의 배수되는 후보자를 선출케 한 후 무기명투표로써 행함.  

  제13조. 대표 중으로서 대회의  질서를 교란하고 기타  불법한 행동이 있을 때  대표 3인 이상의 동의로 3분 2이상의 찬동이 있으면 다음과 같이 징계함.  1.진사 2.대표권정지 3.대표권박탈  

발기인  

김명동 김준연 김탁 권동진 정재룡 이갑성 이승훈 정태석 이승복 이정 문일평

박동완 백관수 신석우 신채호 안재홍 장지연 조만식 최선익 최원순 박내홍

하재화 한기악 한용운 한위건 홍명희 홍성희 이정섭 이종린 이순탁 이종목  

그러나 신간회는 얼마가지 못해 사라졌습니다. 일제의 탄압에 의한 것이었나구요? 아닙니다. 신간회는 사회주의 계열이 스스로 이탈했답니다. 일제의 강압에 의해 <해산>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해소>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민족주의 계열의 집행부가 절대 독립보다는 실력양성을 추구하자는 애매한 노선으로 돌아섰기 때문이죠. 반면, 러시아에서는 12월 코민테른 테제를 보내왔는데 그 내용은 기회주의자나 민족주의를 가장한 제국주의자를 멀리하라는 지침이었습니다. 거기에 중국에서는 국민당과 공산당의 국공합작이 깨지면서 공산주의는 나쁜 것이라는 인식이 퍼지기 시작했답니다.

결국 신간회는 이대로 해소하자는 안건을 표결로 정했고, 투표결과 신간회는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답니다. 우리 역사상 유일하게 사회주의 단체가 주도권을 잡았던 신간회. 그러나 신간회의 해소 이후 사회주의세력은 우리 근현대사(남한)에서 한번도 주도권을 잡아보지 못하였답니다.

이렇게 이름을 통해서 우리 근대사에서 공산주의 단체와 그 활동을 알아보았답니다. 일제의 눈치를 보지 않았던 열혈독립운동가들은 자극적이고 극단적인 이름을 사용했으며, 일제의 눈을 피해 비밀리에 결사단체를 만든 단체들은 평범하고 애매한 이름을 사용했답니다.

하지만, 이름이 무섭고 파격적이라고 해서 꼭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단체라고 생각하지는 마세요.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이라고 해서 나쁘게 생각해서도 안된답니다. 그분들 역시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가장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던 방법으로 일제 저항운동을 했던 애국자분들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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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혁명이 내 신념이라는 것을 믿고 죽음을 택하겠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데카브리스트의 12월 반란이 실패하고 죽음을 맞이한 한 시인은 평소에 이렇게 노래하였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그대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

즐거운 날이 오고 말리니....

그리고 얼마 후 러시아의 국민시인은 자국의 군인과 총을 들어 결투를 마친 뒤 세상을 떠났다. 그의 이름은 푸쉬킨이었다.

1장. 혁명은 끝났으나 그것은 새로운 시작이었다.

프랑스에서 대혁명이 일어나고 나폴레옹이 유럽을 한바탕 뒤흔든 이후.....

나폴레옹이 유배되면서 유럽의 국왕들은 혁명이란 단어를 너무나 끔찍하게 생각했다. 그래서일까? 국왕은 신이 선택한 존재이기에 국왕에게 칼을 겨눈다는 것은 절대 금기로 만들어야 했다. 유럽의 왕들은 비엔나에서 회의를 열고 세상을 <혁명 이전>으로 돌리자고 결의했다.

메테르니히

유럽을 나폴레옹 이전의 시대로 되돌리자고 주장했던 오스트리아의 재상

그러나 프랑스 혁명은 서유럽과 동유럽, 그리고 러시아 대륙까지 깊은 흔적을 남겨 두었다. 나폴레옹과 싸웠고, 혁명이 무엇인지 깨달았고, 자유와 해방의 소중함이 무엇인지 민중들이 알게 된 것이다.

- 나폴레옹의 전쟁과정과 고뇌를 표현한 우표들 -

사실 그건 나폴레옹이 남긴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폴레옹이 자유로운 여러 나라에 쳐들어왔기 때문에 여러 나라의 국민들은 스스로 뭉쳐야 했고, 그 결과 <민족주의>라는 것이 탄생한 것이었기 때문이리라. 또한 자유란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는 <자유주의> 사상도 나폴레옹과 싸우면서 배웠던 결과물이었다. 단지, 그 대상이 이젠 나폴레옹이 아니라 수백년간 자신들을 억압했던 국왕이라는 존재라는 사실만 변했을 뿐....

나폴레옹은 물러갔지만, 혁명과 전쟁이 무엇인지 경험한 사람들은 이제 스스로를 <국민>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자 유럽 곳곳에서 자유를 찾기 위한 혁명의 횃불이 곳곳에서 올라오기 시작했다. 총뿌리는 자신들을 억압했던 국왕에게 향하였다. 프랑스의 7월혁명, 2월혁명, 영국의 차티스트 운동, 독일의 학생운동, 이탈리아의 까르보니리 혁명 등은 모두 민족주의와 자유주의가 남긴 새 시대를 위한 유산이었다.

2장. 꿈은 다르나 목적이 같았던 혁명 장교들.

그리고 그 자유주의 운동은 유럽보다 한참 후진국이었던 제정 러시아에도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러시아의 군인들은 나폴레옹 전쟁 중 유럽 곳곳을 돌면서 전쟁을 한 탓에 유럽의 선진 문물을 배우고, 자유와 평등 사상에 대해서 자세히 알게 되었다.

대부분 귀족 출신이었던 러시아의 장교급 청년들은 나폴레옹 전쟁을 통해 세상이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을 보았다. 그들은 조국이 후진국에 머문 이유를 후진적인 황제제도, 즉 제정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중세 서유럽에서나 있을 법한 농노제도 때문에 상업이 발전하지 못하고, 자본가 계급이 성장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면서 낡아빠진 사회제도를 고쳐야겠다는 희망을 갖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러시아에도 조국을 개혁하자는 마음으로 사회개혁을 추진하려는 군인들의 비밀결사가 생겼다. 특히 남쪽 지방 비밀결사의 리더였던 베스테리황제도 왕도 없이 국민이 주인인 나라가 생긴다면 얼마나 좋을까 꿈꾸기 시작했다. 만약 국민들이 공화국의 개념을 알고, 군인들이 혁명에 가담한다면 세상이 바꿀 것이라는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이다.

반면 북쪽지방의 지식인들과 군인들은 현실적인 면이 강했다. 왕은 일단 그대로 두고 법으로서 나라를 다스리는 법치국가를 만드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북부 지방의 리더인 뮈라뷔에프는 국왕이 백성들을 위해 법을 지키고, 나라를 발전시킬 수 있는 제도인 입헌군주제도를 꿈꾸었다.

이 두 비밀결사 단체는 마지막 꿈꾸는 결과는 달랐지만,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는 점은 공감했다. 그래서인지 두 결사단체는 서로 연락을 하면서 혁명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비밀 결사 사이에는 러시아의 민족시인인 푸쉬킨이 있었다.

3장. 뮈라뷔에프의 미완의 팜플렛

북부 비밀결사의 지도자인 뮈라뷔에프는 혁명이 일어나고, 새로운 세상이 생길 때를 대비해서 많은 준비를 해두었다. 러시아 백성들을 위한 새로운 헌법을 만들어 두었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줄 세금 제도와 새로운 세상을 위한 산업 발전책을 적고 또 적어가면서 꿈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뮈라뷔에프는 <어느 진기한 회화>라는 팜플렛도 만들어 두었는데, 이 팜플렛은 대중 계몽을 위해 대화체로 구성한 것이었다. 그 내용 중 질문을 제외한 답변만 보자면 이런 내용이었다.

자유란 하나님이 인간에게 선물로 주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소수의 사람이 다수를 노예로 삼고 있기 때문에 진정한 자유를 얻지 못했다. 고대 러시아에는 전제군주라는 것이 없었고, 모두가 규칙과 법에 의해서 평등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전제군주는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제멋대로 빼앗고, 하나님이 만드신 토지를 자신의 것으로 하여 통치하는 자를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어떤 악도 만들어내지 않으셨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전제군주에 대하여.....

이 팜플렛이 미완인 것은 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1825년 황제 알렉산드르 1세가 죽고 니콜라이 1세가 즉위하자, 혁명가들은 12월 14일 페테르부르그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니콜라이 1세

그러나 혁명은 너무 빨랐다. 팜플렛이 미완이듯이, 아직 일반 대중과 하급 군인들은 혁명가들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인지 몰랐으니까... 대중과 군대의 지지를 얻지 못한 혁명군은 황제의 군대에게 진압당하고 만다. 이 혁명은 12월에 이루어졌고, 12월을 러시아말로 데카브리라고 하기 때문에, 역사가들은 이날의 혁명을 <데카브리스트>라고 불렀다.

혁명의 독려

데카브리스트의 난이 예정보다 빠른 이유는 남부 비밀결사를 이끌었던 이들이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북부 비밀결사를 이끌던 이들은 성공과 실패를 따질 겨를도 없이 혁명을 일으켜야만 했다.

데카브리스트의 실패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비밀결사를 주도한 지도자들은 모두 사형을 당했고, 살아남은 자들은 평생을 시베리아와 같은 혹독한 땅에서 유배생활을 해야만 했다. 이 혁명의 실패로 러시아의 개혁은 오히려 훨씬 늦춰지게 되었다.

혁명군과 황제군의 싸움

그리고 니콜라이 1세는 반란을 진압한 뒤, 뮈라뷔에프가 쓰다 만 팜플렛을 읽은 뒤 이렇게 적었다. '도대체 얼마나 뻔뻔스런 짓을 한 것이냐' 라고. 그러나 그날 이후, 시인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 팜플렛을 대중들에게 돌렸다면 혁명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지도 모른다고...

이 이야기는 훗날 톨스토이라는 대문호에 의해서 소설로 남겨졌다. 그 소설은 나폴레옹 전쟁에서부터 시작한다. 민족과 자유, 평등을 알게 된 한 지식인이 나중에 데카브리스트에 가담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표현하였는데, 그 유명한 대작이 바로 <전쟁과 평화>라는 소설이었다.

영화로도 유명한 전쟁과 평화

4장. 난 신념이 아닌 것에는 굴복하지 않겠다.

러시아의 위대한 문호 푸쉬킨은 단지 글을 잘 적었기 때문에 대문호가 된 것이 아니었다. 톨스토이가 데카브리스트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표현해서 대문호가 되었다면, 푸쉬킨은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목숨을 바친 위대한 인물이었다.

푸쉬킨은 시인이자 유명한 소설가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의 작품인 <스페이드의 여왕>은 그가 어떤 운명을 이끌어갈지 암시하는 작품이었다. 스페이드의 여왕에서 주인공 헤르만은 빠져나올 수 없는 도박의 유혹과 세 장의 카드의 비밀을 풀기 위해 한 때 스페이드의 여왕이라고 불렸던 백작부인을 총으로 협박하다가 백작부인을 죽게 만든다. 그리고 그 자신도 스페이드의 여왕이라는 카드 때문에 결국 백작부인을 따라 죽게 된다.

그는 자신의 소설처럼 죽을 수밖에 없는 길을 스스로 걸어간 인물이었다. 스페이드의 여왕은 러시아 카테리나 2세 여제의 통치기 이야기이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는 니콜라이 1세의 독재 시대였다. 그리고 그는 비밀결사의 친구들과 함께 전제군주가 없는 자유로운 러시아를 꿈꾸었던 문학가였다.

그러나 1825년. 그의 친구들은 데카브리스트의 혁명에 가담하여 모두 죽고 말았다. 그러나 정작 푸쉬킨은 반정부적인 시를 적었다는 이유로 추방을 당했기 때문에 혁명에 참여하지 못했다.

어느 날 니콜라이 황제가 푸쉬킨을 불러 물어보았다. 만약 추방당하지 않았다면 혁명에 참여했을 것이냐고 말이다. 푸쉬킨은 이렇게 대답했다.

당연합니다. 제 친구들은 모두 혁명에 가담했으니, 저 역시 가담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폐하!

황제 앞에서 그는 죽기를 각오하였지만, 황제는 국민시인인 그를 죽일 수 없었다. 그러자 그는 혁명에 실패하고 차디찬 시베리아에 유배된 친구들을 위해 용감하게 시를 적었다.

시베리아 광산의 깊은 골짜기에서도 자랑스런 인내를 잊지 말 것이다.

그 숭고한 의지 속에서 그대들의 뼈져린 고생은 헛되지 않을 것이니.

푸쉬킨은 자유로운 조국을 만들고자 하는 신념이 없다면 이미 자신은 죽은 것이라 생각했으리라. 결국 황제는 국민 시인을 직접 죽일 방법을 찾지 못하고, 우회적인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 시기는 데카브리스트 혁명이 일어난지 13년이나 지난 때였다. 그 방법이란 것은, 단테스라는 군인이 푸쉬킨을 모욕해서 둘이 총을 들고 결투를 벌이도록 유도한 것이다. 그리고 황제는 그 결투를 중지시킬 마음이 없었다.

총소리가 들렸다. 스페이스의 여왕에서 죽음을 예감한 주인공이 <슬픔에 지친다>는 말을 했듯이 그는 오랜 세월동안 죽음을 생각하면서 서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가 남긴 시는 불후의 명작이 되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그대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

즐거운 날이 오고 말리니...

5장. 죽는 날까지 난 그를 애도하겠다.

푸쉬킨이 비열한 결투로 죽게 된 뒤, 사람들은 국민 시인을 애도하면서 황제가 너무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황제는 절대적이라는 믿음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한 시인이 황제의 절대권 앞에서 대중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러시아의 대문호들 : 톨스토이, 푸쉬킨, 레르몬토프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 레르몬토프는 푸쉬킨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시인의 죽음>이라는 시를 적었던 것이다.

너희들의 검은 피를 모드 짜낸다 한들,

시인의 식어 버린 피를 씻어내지 못할 것이다.

니콜라이 1세는 이 시를 혁명을 부추키는 팜플렛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레르몬토프는 위험한 코카서스 전선으로 1년간 파견되어 유배와 같은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민중들의 가슴에 대시인으로 기억되기 시작했다.

그는 신념을 위해 끊임없이 시를 적었다. 그리고 황제는 그를 계속 코카서스 전선으로 추방하였다. 그리고 추방당할 때마다 그는 작품을 남겼다.

하늘아 구름아.... 누가 너를 쫒던가, 운명의 시킴인가?

... 그럴리 없지 너는 영원히 자유롭지 않느냐?

... 너에게는 조국도 없고 유배도 없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담은 소설 <현대의 영웅>을 남겼다. 그리고 또 다시 코카서스 전선으로 추방되던 중 함정에 빠지고 만다. 푸쉬킨이 죽었던 것처럼, 레르몬토프도 음모에 빠져 총을 들고 옛 친구와 결투를 하게 되었다. 그는 웃었다. 상대는 바로 총을 쏘았고, 그는 총을 들어올리는 일을 서두르지 않았다.

푸쉬킨과 똑같은 신념을 갖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던 또 다른 대문호 역시 푸쉬킨과 똑같은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게 된 것이다.

이후 니콜라이 1세는 자신의 독재에 반발하는 개혁가들을 멀리하였다. 그러나 그의 시대에 발전은 없었다. 그가 서아시아 진출을 위해 시도했던 오스만 투르크와의 크림전쟁은, 러시아의 대패로 끝나고 말았고, 대중들은 그를 원망하였다.

니콜라이 1세가 죽은 뒤 이후 독재자들은 새로운 문화와 기술을 받아들여서 러시아를 후진국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했지만, 데카브리스트 이후 황제의 독재체제가 계속된 백여년간 러시아는 서양 세력에 비해 계속 후진국에 머물 수 밖에 없었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이상적인 개혁가들. 그리고 그들의 뜻을 존중하고 그 신념을 지키려고 목숨까지 바친 대문호들. 근현대 러시아에서 시대를 뛰어넘는 대 작가들이 계속 나온 이유는 바로 옳은 신념을 위해 목숨까지 바쳤던 이들이 존재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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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대중가요 이야기 : '나는 가수다'

NO. 008

일제시대에 국민의 사랑을 받았는 가수는 누구일까?

*** 배경 : 1920-1930년대 일제 강점기  ***

2011년.... 한국의 대중가요 시장은 일부 거대한 기획사가 장악했습니다. SM, JYP, YG 등 영어 이니셜을 쓴 한국의 <엔터테인먼트> 기획사들이지요. 그럼, 대중가요가 처음 등장한 시기에도 이런 기획사들이 있었을까요? 그리고 당시 대중가수들은 어떻게 해서 가수가 되고 인기를 얻었을까요? 자, 오늘은 이런 이야기를 역사 속에서 살펴볼 거랍니다.

일제시대에도 대표적인 기획사들이 있었는데, 이 때에는 유성음반시대이기 때문에 음반회사가 음악유통과 시장 흐름을 주도했지요. 그 대표적인 6대 회사가 <콜럼비아, 빅타, 시에론, 오케, 포리돌, 태평> 이였죠. 그리고 나머지 음반회사들은 중소 회사였는데, 그나마 <잠자리표>라는 회사와 유일한 한국인 회사인 뉴코리아 정도가 유명하답니다.

그 중에서도 현재 SM 처럼 가장 큰 위력을 발휘한 회사가 바로 미국 콜럼비아 회사였습니다. 우리나라 첫 상업 음반도 1907년 콜럼비아 회사에서 제작했다고 합니다.

콜럼비아 레코드사 소속가수들

자 그럼 이제 우리 나라의 대중 음악은 언제 등장했는지 한번 볼까요?

조선 후기, 우리 나라의 서민 음악은 민요, 잡가, 판소리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서양과 만남이 잦은 개항기부터 서양 음악이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했죠. 특히, 선교활동을 하던 선교사들이 <찬송가>를 대중들에게 전파했는데, 이건 대중음악이라기 보다는 종교음악에 가까웠습니다. 아무튼, <찬송가>처럼 전통음악과 다른 새로운 서양식 노래를 <창가>라고 불렀죠.

따라서 개항기인 1880년대부터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까지는 판소리, 민요, 잡가 등을 녹음한 음반이 대중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교회음악도 미국 콜럼비아사가 음반 제작을 하기도 했답니다. 하지만, 이건 대중가요라고 보기 어려웠죠.

그나마 이런 음악들을 대중들이 들을 수 있었던 건 에디슨의 1877년 발명품인 <유성기> 때문이랍니다. 1899년, 대한제국에서 피리, 거문고 소리를 유성기로 재생하자 사람들은 크게 놀랐지요. 전화, 전기와 더불어 유성기는 조선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신기한 볼거리였답니다.

발명왕 에디슨과 그의 발명품은 축음기

이 유성기 덕분에 <대중음악> 이라는 개념이 생긴 거랍니다. 원래 전통음악에서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천하고 듣는 사람이 귀했습니다. 기생이나 광대는 양반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도구에 불과했으니까요.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부르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 있답니다.

그것은 바로 음악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자본>이었지요. 유성기를 통해 대중음악이 널리 전파되면서 돈을 벌기 위해 음반을 제작하고 유통하는 기획사가 <가수>와 <대중>을 통제하기 시작했답니다. 그 대표적인 회사가 아까 말한 콜럼비아와 빅타를 비롯한 6대 음반사였죠.

유성기 광고

하지만, 조선인이 노래를 부른다고 조선의 자본력이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답니다. 당시가 일제 강점기였기 때문이죠. 1930년대, 레코드판은 불티나게 팔렸지만, 그 중 조선 사람이 만들고 부른 것은 1/3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일본 음악이었답니다. 당시 음반시장은 일본과 미국 유통사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죠.

또 조선인이 노래를 부른다고 해도 그 장르가 <트로트>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1920년대 일본의 엔카 음악을 번안한 음악이 트로트 장르로 바뀐 경우가 많았죠. 하지만, 조선의 가수들은 트로트를 우리 전통 박자인 3박자로 편곡해서 불렀기 때문에 대중들에게 친숙한 노래가 되곤 했답니다. 대표적인 노래가 1932년 이애리수가 부른 <황성 옛터>였죠.

반대로, 우리 전통 민요 형식으로 새로운 노래를 창작한 <신민요>라는 장르도 있었습니다. 문호월의 <노들강변> 과 같은 노래였죠. 또, 도시문화라는 새로운 형태의 삶 등을 꼬집은 풍자 형식의 <만요>라는 노래도 있었답니다.

또한 서양 대중 가요들도 많이 소개되었는데, 일제시대에는 서양의 모든 노래를 묶어서 <재즈송>이라고 불렀답니다. 즉, 미국식 팝송이나 유럽식 비트송, 프랑스의 샹송이나 스위스의 요들송은 모두 재즈송인 것이지요. 지금의 재즈음악과 개념이 다르기 때문에 혼동할 수도 있답니다.

자, 지금까지 간략히 몇몇 노래 장르를 이야기했는데, 이것들은 사실 대중가요는 아니랍니다. 왜냐면, 이들 노래는 전통가요를 유성기로 다시 불렀거나, 외국곡을 번안한 노래에 불과하고, 또 작사, 작곡이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죠. 결정적으로, 대중가요라고 하면, 그 노래를 부른 <인기 가수>가 있어야 하는데 이들 노래는 <가수> 위주의 노래가 아니였거든요. 즉, 1930년대 이전의 노래들을 <대중가요>라고 부르지 않는답니다.

예를 들어, 연극 부활의 주제가인 <카츄사의 노래>, 나운규의 영화 주제가 <아리랑>, 영화 낙화유수의 주제가인 <낙화유수>는 크게 히트를 쳤지만, 번안가요이거나 영화 주제가였기 때문에 공식적인 대중가요라고 보기엔 어렵답니다. 단지 낙화유수는 김서정이라는 작사, 작곡자가 명시되어 있는 한국식 창작곡이기 때문에 최초의 창작 대중가요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카츄사의 노래 송민도 / 아이랑의 나운규 / 영화 낙화유수

그럼 우리 역사에서 대중가요 첫 히트곡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윤심덕>이 부른 <사의 찬미>라는 곡이었답니다.

이 노래에는 사연이 있답니다. 1920년대, 기성세대는 보수적이었고 젊은 사람들은 자유연애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답니다. 그러나, 이런 자유연애는 문제가 많았어요. 왜냐면, 당시 어린 나이에 결혼하는 풍습 때문에 신여성들이 연예대상으로 삼은 멋진 남자들은 거의 대부분 유부남이었거든요. 남자는 첩을 거느리는데, 여자는 왜 자유연예를 하는 것도 안되는 것인가? 당시 사회는 여성들에만 가혹했지요.

<사의 찬미>를 부른 가수 윤심덕은 일본 음악학교에서 성악교육을 받은 재원으로 <도나우 강의 푸른 물결>이라는 노래를 번안하여 <사의 찬미>를 불렀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번안가요이기 때문에 제대로 된 대중가요는 아니죠) 그리고 음반 녹음을 마치고 돌아오다가 애인 김우진과 함께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합니다. 1926년의 일이었습니다.

 

최초의 대중히트가요 사의 찬미(윤심덕)

이 쇼킹한 사건은 당시 큰 파장을 일으킨 연예뉴스(?)였죠. 이 사건으로 그 때까지 생소했던 유성기 음반이 폭발적으로 팔리기 시작한 것이랍니다.

이 사건으로 음반을 좀 팔아서 돈을 번 <일동축음기 주식회사>는 다음 해, <강명화가>라는 앨범을 내놓습니다. 기생 강명화가 부잣집 아들과 연애하다가 자살했다는 내용의 노래였죠. 그래고 여급원 봉자과 유부남 의사 병운의 사랑과 자살을 다룬 <봉자의 노래>, <병운의 노래>도 히트를 쳤답니다.

   강명화 : 평양출신 기생으로 강향란이라고도 하며, 신극에 많이 등장하는 비련의 여인이다. 미모와 지성을 겸비했으나 기생이라는 신분상의 한계를 넘을 수 없었던  여인으로, 우리 나라 최초의 여성 단발 여인으로 유명하다. 기생 시절의 자유연애와 실연, 사회주의 여성해방운동, 자살 사건 등 다양한 사건으로 당시 언론에 핫이슈로 종종 등장했던 인물로 그녀의 행적이 신문 1면을 장식할 정도였다.

그러나, 1930년대를 넘어가면서 남녀의 비극적인 연예 이야기와 관련된 노래는 줄어든답니다. 일본이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 등 무의미한 전쟁을 시작하면서 전시체제를 강화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미 레코드판이 돈벌이가 된다는 것이 증명된 이상 <가수>라는 직업은 대중의 선망을 받는 직업으로 자리매김 한답니다.

특이한 것은, 가수 출신 중에 이북출신들이 많았다는 점입니다. 왜냐면, 조선시대에 남부지방은 양반의 집안이라는 개념이 좀 강했고, 이북지방은 직업에 대한 인식이 한결 자유로웠기 때문이죠.

콜롬비아 등 6대 음반사들은 작사가와 작곡가들을 자신의 기획사에 소속시켜서 월급을 주고, 작곡을 할 때마다 약간의 수당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당대의 유명한 가수들도 섭외해서 <전속가수제도>를 만들었답니다. 그러나 전속가수들도 음반 인세만으로는 먹기 살기 힘들었기 때문에 소속사에서 주는 월급과 공연 수당을 받았는데, 이 월급과 수당은 가수레벨 뿐 아니라 <신분>에 따라서도 달랐답니다.

똑같이 노래 앨범을 취입했을 때 수당부터 달랐죠.  기생음악은 <하>의 급료인 10원~70원을 받았고, 일반 가요음악은 <중>은 20원~ 100원을 받았습니다. 가장 급료가 쎈 것은 연극음악출신 배우들인데, 최하 30원에서 120원가지 받았답니다. (당시 일반여성의 급료는 20원, 여교사나 여간호사 등 선망직업의 월급료는 50원 정도입니다)

그렇다고 기생들이 돈을 못벌었을까요? 그건 또 아니랍니다. 여배우 출신으로 고급 이미지를 가진 이애리수가 200-300원을 벌었다면, 기생가수인 왕수복은 잘나갈때 700-800원을 벌었답니다. 왜냐면, 기생출신들은 본업인 기생 생활도 같이 하기 때문에 소위 말하는 <행사>가 많았기 때문이죠. 요즘으로 따지면, 잘나가는 건 소녀시대지만 돈 잘버는 건 행사의 여왕인 <장윤정>이라고나 할까요?

이애리사와 왕수복

그러나, 1930년 후반으로 가면 기생가수나 배우출신 가수보다는 <직업가수>가 더 많아진답니다. 가요를 듣는 수준이 높아지면서 대중들도 이젠 노래 자체를 잘하는 가수들을 선호하기 시작한 것이죠. 아이돌 가수들을 계속 보다가 노래에 몰입하는 <나는가수다> 출신의 가수들을 더 선호하게 된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이러다 보니 1930년대 중반부터는, 기획사들이 직접 나서서 <노래를 잘하는 가수>를 공개적으로 모집하는 <오디션>을 보기 시작합니다. 소위 말하는 <가수선발대회>를 공개적으로 시작한 거죠. 콜럼비아 기획사는 당시 10대 대도시를 모두 돌면서 각 지역에서 3명 정도의 가수를 선발하고, 그 가수들 중에서 일부를 데뷔시키는 대회를 열었답니다. 요즘으로 따지면 <슈퍼스타 K>를 연다고 홍보한 뒤 가수들을 지역단위로 모은 것이지요.

이러한 가수선발대회는 실력있는 가수를 선발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일반인들에게 <가수의 꿈>이 대단하고 치열한 것임을 보여주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또한, 선발된 가수는 당대 인기스타가 되는 행운을 누리게 되는 만큼, 기획사로서는 홍보 효과가 매우 큰 것이었죠. 고복수, 박향림과 같은 가수들은 오디션 스타로서 한 달에 수백통씩의 편지를 받고, 직접 찾아오는 팬들도 많았습니다. 우리 나라 최초의 <팬돔>가수들이자, 오빠부대의 시초라고 볼 수 있겠네요.

고복수와 그의 슈퍼앨범 / 얼짱가수 박향림

음반사들 역시 이런 슈퍼스타 가수들을 빼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겠죠? 그만큼 가수들의 위상이 올라갔고, 몇몇 가수는 당대를 이끌어간 스타가 되었답니다.

이렇게 일제시대 대중가요는 전통가요부터, 일본노래의 번안곡, 트로트, 재즈송 등을 거치면서 조금씩 발전하였고 점차 우리식 창작곡과 대중가수들이 활약하면서 그 폭을 넓혀갔답니다. 일제시대, 특히 1930년대는 대중가요가 태동한 시기라고 볼 수 있는 것이죠.

  p.s : 대중가요 역사를 굳이 사상적으로 봐야한다면, 일본의 의도라는 점도 짧게 짚고 넘어갈 수 있답니다. 일제는 1919년 3.1 운동이 발생하자 한국인들의 불만과 독립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음악, 스포츠, 교육, 남녀평등 등을 신사상이라면서 홍보합니다. 전두환이 군부쿠테타를 감추기 위해 3s(스크린, 스포츠, 섹스)를 개방한 것과 마찬가지죠. 일제시대 대중가요는 일본 자본과 미국 자본이 한국의 경제권을 침탈하고, 한국인의 독립정신을 음악으로 해체시키는 전략전술도 가미되어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시면 더 좋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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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받고 똥을 팔아야했던 선교사들

NO. 007

일본에서는 돈을 주고 받으면서 똥을 팔았다.

*** 배경 : 일본 전국시대(오다 노부나가의 전국 전쟁기)  ***

일본에서 크리스트교가 공인된 최초의 시대는 어느 시대일까? 정답은 일본 전국시대인 <오다 노부나가>의 시대랍니다.

당시 서양에서는 카톨릭을 수호하고 루터교를 견재하기 위해 예수회라는 단체를 만들었답니다. 그 창시자 중 한명이 바로 프란시스코 샤비에르라는 인물이었죠. 예수회는 유럽에서 루터나 칼뱅 등 개신교 교회가 성장하는 것을 막고, 전 세계에 카톨릭의 이념을 전파하기 위해 선교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답니다.

샤비에르는 로욜라 등과 함께 예수회를 창시한 인물이면서도 직접 인도에 진출해서 포교활동을 하다가 일본 포교까지 시작한 헌신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점차 세월이 흐르면서 일본에서는 신도가 급증하였답니다. 그리고 일본의 규수 지역은 크리스찬 지역과의 무역을 위해 아예 크리스찬 영주가 탄생하기도 했죠.

일본의 혼란한 전국시대.... 도요토미 히데요시나 도쿠가와 이에야스 같은 인물들을 이끌던 명장 <노부나가>는 크리스트교를 적극 후원하기로 맘을 먹었답니다. 그 이유는 당시 대항해 시대를 이끌던 에스파냐, 포르투갈의 화포술을 적극 도입하려는 의도가 있었죠. 또, 전통적인 불교세력이나 토착종교세력을 억압해서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 새로운 이념의 종교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노부나가의 전국시대에 이르자 크리스트교는 막부의 지원으로 교토와 같은 대도시에 큰 교회를 세우고 교세를 자랑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청빈한 생활을 하던 선교사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답니다.

그것은 바로, 변소에서 똥을 퍼내는 사람들이 돈을 받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맙다고 돈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전국시대의 <토지정책> 때문이었답니다. 영주들은 수많은 강적들이 존재하는 전국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엄청난 토지개간작업을 했답니다. 심지어 산을 허물어서 논과 밭을 만들 정도였죠. 일본은 섬나라이다 보니 원래 평야갸 매우 적습니다. 국가세금을 확보하기 위해 식량 생산을 늘리는 것은 전쟁으로 평야를 불태우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었죠.

그런데 논밭을 늘리다보니 더 심각한 문제가 생겼답니다. 산을 평야로 바꾸다보니 풀과 나무가 부족해서 비료로 쓸 것들이 없어진 거에요. 사람들은 농사를 짓기 위해 비료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답니다. 그러다가 생각해낸 것이 바로 사람의 똥, 즉 인분이었던 거죠.

인분은 옛날부터 훌륭한 비료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그건 자연적인 것이었지 전국시대처럼 <인분>이 거금에 거래될 정도는 아니였죠. 사람들은 이제 자신의 영토에 <공중변소>라는 걸 만들기 시작합니다. 특히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상점과 공공장소, 대로변은 권리금을 내고 공중변소를 만들기도 했죠. 어떤 이들은 변소사업으로 투잡생활을 하기도 합니다.

자... 교회를 만들어 선교를 해야했던 선교사들도 이것을 이용할 수 있었겠죠? 교회에 만든 공중변소는 교회 텃밭에 뿌리는 비료도 될 수 있고, 팔아서 교회 자금으로 쓸 수도 있었겠죠. 신도들이 교회의 공중변소를 오가는 건 신성한 일이었답니다.

그러나, 가까이에 공중변소가 많으면 설교할 때 얼마나 힘들까요? 일본사는 <똥 냄새 때문에 설교를 듣던 사람들이 신앙심으로도 참기 힘들었다>라고 말하고 있답니다. 그리고 똥의 거래 가격이 달랐답니다. 부자의 똥은 기름진 음식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똥보다 비싼 것이었다고 해요.

그러나, 이런 특이한 역사를 경험한 카톨릭 선교사들의 일본 체류는 길지 않았답니다.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크리스찬 신도가 늘고, 각 영지에 교회의 입김이 세지는 것을 우려해서 선교사 추방령을 내립니다. 하지만 서양 및 동남아와의 무역 때문에 적극적인 추방정책을 펴지는 못했죠.

이후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신교국가인 네덜란드와 손을 잡으면서 카톨릭 선교사들을 추방했답니다. 이들을 추방하기 위해 수만명의 농민과 전쟁까지 한 도쿠가와 정권의 혹독한 탄압으로 카톨릭은 일본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신도들은 300년간 어둠 속에서 신앙을 지켜가게 된답니다. 훗날, 메이지 유신 때 일본 정부가 종교의 자유를 공인하자 자신이 카톨릭 신자였다고 밝힌 숫자가 많았다는 사실에서 한번 뿌리내린 종교의 믿음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 알 수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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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제 테오도라 왕비 : 천민에서 황후가 된 여인 이야기

NO. 006

천민출신 황후와 그녀를 지지해준 황제의 이야기

*** 배경 : 6세기 동로마 제국(비잔틴 제국 : 유스티니아누스 치세기)  ***

이 이야기는 6세기 동로마 제국의 위대한 황제인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아내 이야기랍니다.

고대 찬란했던 영광을 자랑하던 로마 제국은 게르만족이 서유럽 지역을 장악하면서, 서로마와 동로마로 분열되었습니다. 그리고 게르만과 투쟁하던 서로마는 5세기말 멸망하였답니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이라고도 불린 비잔티움 제국은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전성기를 맞이하면서 천년동안 로마 제국의 영광을 이어갔답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서유럽과는 달리 카톨릭이 아닌 <동방정교회>라는 종교를 만들었고, 유명한 성소피아 성당을 지었으며, 훗날 유럽의 법체계에 큰 영향을 준 로마법대전을 편찬했던 유명한 황제였습니다. 이 황제의 뒤에는 현명한 조력자인 왕비가 있었는데 그녀가 바로 <테오도라> 황후였습니다.

테오도라 황후(가운데 : 이탈리아 라벤나, 산비탈레 성당, 비잔티움 양식의 모자이크)

동방정교회에서는 이 황후를 성인으로 여기고 11월 14일에 기념하고 있습니다. (카톨릭에서는 예수탄신이 12월 25일이지만, 동방정교회는 1월 6일 이듯이 각종 기념일이 다르답니다.)

그녀는 출생의 비밀 때문에 더 유명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예수가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신분을 초월한 성인으로 추앙받듯이 그녀도 전차경기장(히포드롬)에서 동물 조련을 하는 비천한 아버지를 두었기 때문이죠.

   또, 그녀는 검투사들이 피를 튀기며 싸우는 경기장에서 춤을 추며 연기하는 배우였는데 재능이 출중했다고 합니다. 당시 춤꾼(무희)이나 여배우는 매춘부와 동급으로 취급했기 때문에, 그녀를 악의적으로 보는 이들은 그녀가 아무에게나 몸을 파는 천한 여자라고 기록했지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면 소녀시대였을텐데 슬픈 현실이네요.)  

16살이 되자 그녀는 아프리카와 알렉산드리아로 건너가 세상 경험을 좀더 쌓은 뒤,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로 다시 돌아와 궁전 근처에서 양모를 짜면서 소박하게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이때 유스티니아누스와 만나게 된 것이죠. 황제는 그녀의 미모와 지성, 삶에 대한 열정을 확인한 뒤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심했답니다.

그녀와의 결혼을 위해 당시 귀족일 뿐이었던 유스티니아누스는 자신의 이름으로 기존의 법체계를 바꾸는 모험을 했습니다. 하나님께 회개를 하면 여배우 출신도 로마 귀족과 결혼할 수 있다는 특별법까지 만든 것이지요. 원래 로마제국에서 천민과 귀족은 결혼할 수 없었습니다. 황제는 자신의 삼촌까지 설득해가면서 법을 고친 후, 그녀와 결혼했답니다. 그리고 황제가 된 후 테오도라 역시 황후가 되어 '아우구스타(여제)'의 칭호를 받게 됩니다.

그 후, 38년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제위 중에 만든 많은 법들에는 테오도라의 이름이 빠지지 않았답니다. 왕비는 외국의 법들도 공부했으며, 가장 이상적이고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방법으로 법령을 개정하곤 했답니다. 또한 천한 여자 출신이라는 것 때문이었는지 여성 인신매매 금지법을 만들고, 여성에게 유리한 이혼법, 성폭력금지법 등을 만들어 여권 신장에 신경쓴 여성이라는 점도 특이합니다.

그리고 그녀가 법을 개정할 때엔 그녀의 입장을 지지한 황제가 있었습니다. 황제는 황후가 외교사절을 만나거나, 상인들을 통해 바깥정세를 파악하거나 할 때에도 그녀를 믿고 일을 맡겨서 처리했답니다.

그러나, 그녀가 유명해진 것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재위 초창기 시절의 니카 폭동 사건 때문이랍니다.

<니카>란 <이겨라!>라는 뜻으로 경기장(히포드롬)에서 외치는 일종의 구호같은 거랍니다. 롯데 자이언츠 야구팬들이 상대방에게 <마!마!> 하면서 소리치는 것과 같은 거죠.

옛 로마제국에서부터 로마의 전차경기장은 국가가 공인한 시민들의 휴식처였고, 동로마에서는 <히포드롬>이라고 불렀습니다. 요즘의 야구장과 같이 편안하게 볼거리를 즐기는 곳이었죠. 야구장에 가면 야구도 하지만, 이쁜 연예인이 시구도 하고, 재미있는 퍼포먼스도 있고, 가족의 날엔 특별 행사도 있고, 치어리더도 있죠? 또 먹을 것도 먹을 수 있구요.

   히포드롬(hippodrome) 유적지 : 히포는 말이라는 뜻. 드롬은 돔(경기장)이라는 뜻.
   즉, 마차경기를 주로했다는 뜻으로 지어진 경기장으로 터키어로는 '말의 광장' 이라는 뜻이다. 당시에는 400개의 계단에 20 여만명을 수용할 수 있었던 최대 규모의 경기장이었다고 한다.

히포드롬은 그 모든 재미를 충족시켜 주는 곳이랍니다. 전차경기를 주로 했지만, 검투사들의 생사를 건 싸움에 돈을 걸기도 했고, 맹수들의 싸움을 볼 수도 있었죠. 또, 무희나 여배우들의 공연을 보면서 욕을 하거나 먹을 것을 던질 수도 있었고, 서커스를 보면서 빵을 먹을 수도 있었죠. 특히, 정치적인 변화에 민감한 시민들을 공짜표를 줘서 경기장에 묶어두고 공짜 음식을 주면 국가에 대한 충성도가 올라갈 수 있었답니다. 이것을 <빵과 서커스 정책>이라고 불렀죠. (이것을 처음 시도한 사람은 로마 공화정의 카이사르(시저)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전차싸움이나 검투사 싸움이 계속되면서 경기를 보는 사람들도 편이 갈렸답니다. 요즘도 야구장에 가면 각 팀의 팬들이 팀의 색깔을 상징하는 유니폼이나 응원막대, 비닐 봉지 등을 가지고 다니죠? 로마 시민들도 전차경주의 기수가 입는 옷 색깔에 따라 흰색파, 붉은색파, 청색파, 녹색파 등 4가지 파가 생겼답니다. 이 중 청색파와 녹색파는 계급도 다르고 진보, 보수적인 성향도 달라서 축구장의 홀리건처럼 툭하면 난동을 부리고 심지어 폭동까지 주도하곤 했답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처음에 청색파와 손을 잡고 진보적 개혁을 하려고 했지만, 그의 개혁이 너무 과격했고 왕비마저 비천하다보니 청색파와 녹색파 모두 황제의 개혁을 의심하고 반대했답니다. 그 결과 황제가 주관한 기념행사에서 이 두 파 모두 니카 니카!(이겨라, 이겨라!)를 외치면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황제는 제위 5년만에 은신처로 피난갈 준비를 했죠. 그러나 테오도라 황후는 피난을 결사 반대했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도 권위를 잃고는 절대 살아남을 수 없답니다. 황제여, 생명에 연연하여 몸을 떨고 계신다면 필연코 비참한 망명생활의 끝에 불명예스러운 죽음만이 남을 것입니다. 황제의 자리란 영광스러운 무덤이랍니다. 황제의 자주색 옷이야말로 (쳥색이나 녹색을 비롯한) 어떤 색깔보다도 위대한 영광스런 색의 옷이랍니다.>

그녀는 피난을 결사 반대하였고, 아내에게 감동을 받은 황제는 벨리사리우스 장군에게 결사병을 이끌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그 결과 정예병 단 3천명의 결사항전으로 폭동을 진압할 수 있었죠.

그러나, 그토록 현명하고 지혜로웠던 그녀도 황제와 뜻이 다른 부분이 있었답니다. 그것은 <종교> 부분이었죠.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아타나시우스가 주장한 <양성론>을 주장했답니다. 양성론이란, 예수는 신성과 인간성 모두를 갖추었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하나님 자신이라는 주장이었죠. 그러나 테오도라 황후는 <단성론>을 주장하는 사람이었답니다. 단성론이란, 예수는 인간과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신성만이 존재할 뿐 인성은 모두 허물에 불과하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녀는 단성론자였지만, 남편의 주장을 대립하지는 않았답니다. 단지 단성론자들에 대해서 탄압하지 말 것을 주장하는 법령 정도를 만드는 것에서 타협을 했죠. 그리고 남편이 동방정교회의 수장으로서 행사하는 것을 지원하였습니다.

동방정교회는 서유럽 교회의 카톨릭과 교리가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틀린 것이 있다면 <자율성>을 크게 강조한 점 정도이죠. 카톨릭은 교황-주교-사제 등 서열이 확실하지만, 동방정교회는 이 것에 반항해서 개별 교회의 자율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죠. 따라서 카톨릭에서 교황을 교회의 수장으로 하는 것도 동방정교회는 반대했답니다. 교회는 개별적으로 대우받으며, 그것을 통제하는 권한은 국가의 수장인 <황제> 일뿐, 교회는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동방정교회는 예배 언어도 자유롭답니다. 카톨릭은 라틴어로 예배를 드리지만, 정교회는 각 국가의 모국어로 예배를 드릴 수 있죠. 또 카톨릭이 성모 마리아와 같은 성상을 숭배하는 것을 정교회에서는 <우상 숭배>라고 생각해서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차이 때문에 같은 하나님을 모시는 두 종교는 결국 <교회 수장의 문제와 성상 숭배의 문제>로 대립하다가 갈라서게 된답니다. 

  ( p.s : 동방정교회는 카톨릭과 예배형식이 다르고 자율성이 강조되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정통 교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십자성호를 긋는 것은 카톨릭과 똑같이 했답니다. 단, 카톨릭은 머리에서 복부로 그은 뒤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어깨로 십자성호를 긋지만, 정교회는 머리에서 복부로 그은 다음에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어깨로 십자성호를 긋는답니다. 똑같이 하더라도 차별성은 반드시 두는 것이죠.)

황후는 단성론을 주장했기 때문에 서방교회와 동방정교회가 이념까지도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는 단순히 <자율성>의 차이일 뿐, 예수의 신성이나, 성자성부성령의 문제 등 이념은 절대 건드릴 수 없다는 입장이었죠. 결국 황후는 황제의 뜻을 따르기로 했답니다.

이렇게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곁에는 38년간의 통치를 조력한 현명한 황후가 있었습니다. 위기의 순간에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황제를 돕고, 나서지 않아야 할 때는 적당히 타협할 줄 알며, 황제가 옳다고 생각할 때는 자신의 생각을 버리는 현명한 황후. 그리고 신분의 차이를 넘어 그녀를 사랑했으며, 마지막까지 그녀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존중했던 황제.

이들의 사랑과 믿음이 이후 동로마 제국이 천년을 유지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고,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를 비잔티움 최고의 황제이자 정교회의 성인으로 만든 것이 아닐까요?

   그리스 정교를 상징하는 하기야-성소피아 성당 : '그리스도의 경배' 라는 뜻을 가진 성당이다. 외부가 둥근 돔으로 되어 있어서, 히포드롬의 돔과 마찬가지로 비잔틴 문화의 특징인 돔을 볼 수 있다. 그러나 15세기 오스만투르크가 점령하면서 이슬람식으로 주변에 4개의 미나렛(첨탑)이 추가되었다. 원래 내부 벽에는 모자이크 양식의 무늬가 있었지만, 이슬람의 메카 방향을 가르키는 키블라(금글씨로 적은 코란 내용)가 걸렸다.

   (p.s : 이슬람 교도들은 메카 방향을 가르치는 표식을 곳곳에 남긴다. 하루 5번식 메카를 향해 절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삼성 애니콜 핸드폰이 이슬람권에서 성공한 이유 중 하나는 어느 곳에서든 메카 방향을 가르쳐주는 나침반 기능을 핸드폰 기본 기능에 넣어두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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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노사의 굴욕을 조종한 한 여인의 이야기

NO. 005

역사를 뒤흔든 마틸다의 복수 이야기

*** 배경 : 11세기 중세 서유럽(1077년 : 카노사의 굴욕)  ***

이 이야기는 종교적 영향력이 강했던 11세기를 살아가면서 <카노사의 굴욕>을 기획한 마틸다라는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세계사 교과서에서 황제 하인리히 4세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이야기만을 배웁니다. 그리고, 교황이 강했는지, 황제가 강했는지를 생각하보는 정도에서 이야기를 끝내곤 하죠. 하지만, <카노사의 굴욕>을 이끈 또 한명의 영웅은 따로 있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카노사의 굴욕 : 하인리히와 마틸데

우리가 교과서에서 보아서 알고 있는 카노사의 굴욕 사진의 의문점.
젊은 황제가 무릎을 꿇고 바라보는 사람은 남자 교황이 아닌 <여인>이다. 이 여인은 누구일까?

흔히 중세 서유럽은 봉건제도, 기사도, 기독교적 위계질서와 같은 단어로 설명하곤 합니다. 11세기에도 서유럽은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신성로마제국(현재 독일 지역)이라는 국가의 황제가 서유럽을 대표하였지만, 각 지역의 영주들은 황제권이 세지면 간섭이 많아질까봐 황제권을 견제하기 위해 교회세력과 교황을 끌어들이는 일이 많았답니다.

그러다보니, 교회가 국가일에 간섭하는 경우가 많아졌고, 교회가 타락했다는 소식도 많았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3세는 이것을 이용하여 교회의 교황과 국가의 황제가 연합해서 큰 세력을 이룬 뒤 각 지역의 영주들을 토벌하고, 마지막에는 교회까지 점령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희생양이 된 가문이 바로 카노사를 근거지로 하는 토스카나 가문이었습니다. 토스카나 가문은 타락한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 청렴한 개혁파 교황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가문이었습니다. 그러자 보수 세력들은 토스카나 가문의 대영주인 보니파치오를 암살해 버린답니다.

미망인이 되어버린 토스카나 가문의 베아트리체 부인은 가문의 영광을 위해 고트프리트라는 힘있는 공작과 재혼을 합니다. 그러자 교황과 황제 연합군이 토스카나 지역을 공격했답니다. 고트프리트는 도망가고, 토스카나 가문은 모두 살육당했으며, 처참하게 멸망하게 됩니다. 미망인 베아트리체는 살려달라고 굴욕적으로 애원해서 그녀와 그녀의 어린 딸 마틸다만이 간신히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쁘장한 여인 계집아이라고 생각해서 살려놓은 영특한 마틸다가 신성로마제국을 위협할 철의 여인이 될 것이라는 것은 현명한 어머니인 베아트리체 외에는 아무도 몰랐지요. 베아트리체는 마틸다에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3세를 죽이는 <복수>가 중요하다는 것을 끊임없이 강조했답니다.

얼마 후, 하인리히 3세가 죽고 나이 어린 황태자가 하인리히 4세로 즉위했습니다. 그러자 전에 도망쳤던 베아트리체의 재혼남편인 고트프리트가 베아트리체와 마틸다를 구출합니다. 고트프리트는 영약하게도 어린 황제를 이용하여 권력을 잡고, 자신의 동생을 교황 스테파누스 9세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런 뒤 고트프리트가 죽자 권력은 뜻밖에도 멸망한 가문의 여인인 <베아트리체>에게 넘어간 것이죠.

그리고 베아트리체는 교황청의 청렴한 개혁파 수도사인 <힐데브란트>를 교황으로 밀기 시작했습니다. 토스카나 가문이 추구했던 청렴한 개혁파 교황의 꿈은 힐데브란트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로 즉위하면서 마침내 이루어졌습니다.

베아트리체는 교회의 힘을 강화시키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게 지난 날 복수를 하기 위해 교회 개혁운동을 시작합니다. 교황은 그것을 당연하다고 따르게 되었고, 옛 토스카나 가문의 전략적 요충지인 카노사를 마틸다에게 넘김으로서 토스카나 가문은 화려하게 부활하였습니다.

그리고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아주 강력한 교회 개혁운동을 시작합니다.

먼저, 성직자의 결혼제도를 없애고 성직매매자를 강력하게 처벌하였습니다. 아예 모든 성직자와 전쟁을 벌일 각오로 결혼한 모든 신부들을 강제 이혼시켜 버립니다. 또 마틸다의 계획을 받아들여 예루살렘을 탈환할 성지 탈환 십자군을 모집할 계획을 세우는데,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아서 준비작업만 시작하였습니다.

문제는 황제와 관련된 개혁이었습니다. 교황은 황제의 성직자 임명권을 철폐하고, 모든 교회는 교황을 수장으로 하여 통일한다고 발표해 버린 것입니다. 황제 하인리히 4세는 열받기 시작했겠죠.

하지만, 토스카나의 마틸다는 한술 더 뜨기 시작합니다. 교황에게 주교 회의를 열어 황제를 자극할 수 있는 대단한 문구를 발표하자고 말했으니까요. 그 내용의 핵심은 이런 거랍니다.

<돈으로 성직자를 산 황제의 고문 주교들을 모두 파문하며, 교황은 황제까지 폐위시킬 권한이 있다.>

이 말을 들은 황제는 어이가 없어서 교황에게 맞 포고문을 발표합니다.

<교황은 악한 자이며, 토스카나의 마틸다에게 흑심을 품어 둘이 부정한 관계이기 때문에 가짜 수도자인 교황을 폐위한다>  라고 발표한 것이죠.

이 말을 들은 마틸다는 기뻐했습니다. 황제가 이런 반응으로 나올 것을 예상했기 때문이죠. 교황은 이 말을 들은 즉시 <불경한 황제를 폐위하고, 황제에게 충성한 신하들의 서약은 모두 무효이다>라는 선언을 합니다.

교황의 선언문을 들은 영주들은 바로 교황의 편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왜냐면, 황제의 힘이 세질수록 지방의 영주들은 간섭을 많이 받을테니까요. 열받은 황제는 영주들의 군대를 모아 교황을 공격하려고 했지만, 동조하는 영주의 숫자가 적어서 도저히 전쟁에 이길 방법이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교황과 마틸다의 계략에 완전히 넘어간 것이지요.

황제는 자신이 뭔가 잘못했다는 판단을 내리고 토스카나 가문의 카노사까지 찾아갑니다. 그는 눈오는 성문 앞에서 3일간 무릎꿇고 빌면서 교황의 용서를 빌었답니다. 토스카나 가문의 마틸다는 드디어 가문의 원수를 갚았다는 생각에 너무나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황제를 죽이려고 했죠. 그러나 자비로운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이 정도면 된 듯 하다면서 하인리히 4세를 용서해 줍니다. 하지만, 마틸다의 말을 듣지 않은 교황은 이 일을 곧 후회하게 된답니다.

하인리히 4세는 카노사의 굴욕을 새로운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비록 육체적인 고통은 있었지만, 황제권은 유지되었고, 한번 비굴해짐으로서 파문당한 것도 회복되었으니까요.

더 중요한 것은 교황이 황제를 용서했기 때문에 영주들도 황제를 적대할 명문을 잃었다는 점입니다. 독일 영주들은 이미 황제에게 반기를 들었는데, 교황이 황제를 용서해 버렸습니다. 이것은 황제에게 반기를 든 영주가 누구누구인지 황제에게 확실히 알려주는 결과만 되어 버린거죠. 결국, 독일과 북부 이탈리아의 영주들은 우왕좌왕하면서 서로 내전에 빠졌고, 하인리히 4세는 이 내전을 진압하면서 황제권을 강화했습니다.

이제 황제는 반대파 영주들을 숙청한 뒤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파문을 선언합니다. 뒤늦게 후회한 교황은 노르만의 장군을 불러들여 황제의 군대를 간신히 막았습니다. 하지만, 이민족에게 반감을 갖고 있던 로마 시민들이 노르만과 연합한 교황을 추방해 버려서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홀로 방랑하다가 죽게 된답니다.

이를 본 마틸다는 다시 한번 복수의 칼을 갈게 됩니다. 마침, 새 교황 선출 문제로 황제와 교회 모두 혼란한 가운데, 마틸다는 가장 청렴하고 개혁적인 주교를 우르바누스 2세로 선출합니다. 로마 시민들도 이 청렴한 교황을 적극지지했고, 마틸다는 황제 하인리히 4세의 세력을 막아내었습니다.

이제 마틸다는 하인리히 4세를 비참하게 파멸시킬 계획에 돌입합니다. 먼저 황제의 아들인 <콘라드>를 유혹한 거죠. 콘라드에게 이탈리아 지방의 왕의 자리까지 준다고 유혹한 뒤, 황제의 측근들도 돈과 권력으로 유혹하여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답니다.

마침내, 하인리히 4세의 부인인 프락세디스 마저 아들의 영광을 위해 남편을 배신하고 마틸다의 근거지인 카노사로 망명하였습니다. 하인리히 4세는 부인과 아들을 저주하면서 아무도 없는 외로운 황제 자리를 살아야 했답니다. 하인리히 4세는 차남을 하인리히 5세로 지목하여 복수를 부탁하지만, 그 마저도 마틸다의 공작에 넘어가 아버지를 배신하고 교황에게 가 버린답니다.

마틸다는 황제의 첫째 아들 콘라드를 신성로마제국과 이탈리아의 통합왕이라고 불러주었지만, 아무던 영지도 신하도 없는 황제자리였답니다. 콘라드는 마침내 울화통이 터져서 마틸다를 원망하면서 후회하다가 27살의 나이로 죽고 맙니다.

황제의 둘째 아들인 하인리히 5세는 아예 황제인 하인리히 4세를 납치해서 스스로 황제가 됩니다. 이후 하인리히 4세는 백성들의 도움으로 다시 황제가 되지만 홀로 비통해 하면서 쓸쓸히 죽어간답니다.

그리고 마틸다와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황제와 싸우느라 실행하지 못한 <십자군> 원정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답니다. 마틸다는 십자군 원정이 실제로 실행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영지 카노사에서 삶을 마감합니다. 그리고, 그녀가 생각한 1차 십자군은 전 그리스도를 묶어줄 만큼 가장 열정적인 십자군이었고, 유일하게 성지인 예루살렘을 탈환한 성공적인 십자군이었습니다.

기독교 중심이었던 중세, 근대 서구 역사는 기록합니다. 그레고리우스는 교회 개혁을 위해 헌신한 성자라고... 그리고 하인리히 4세는 교권과 투쟁했던 유명한 황제라고 말이죠. 그러나 기독교와 근대 서구역사는 또 한명의 여인을 기록해두었습니다. 그녀와 그녀의 가문이 없었어도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카노사의 굴욕과 1차 십자군 원정이라는 사건이 역사에서 똑같이 일어났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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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 : 상징물들의 대결

004. 마리안과 헤라클레스가 대리전을 벌이다.

*** 배경 : 프랑스 대혁명 초기(1791~1800) ***

프랑스 대혁명하면 떠오르는 것은?

수능 공부를 열심히 했던 대한민국의 학생이라면, 삼부회, 국민의회, 국민공회, 쟈코뱅당, 로베스피에르, 나폴레옹.... 정도를 떠올릴거에요.

그런데 이런 의문을 가진 사람들도 있을거랍니다. 프랑스 대혁명은 왕과 귀족들만 잘사는 사회를 바꾸기 위해 부자들(부르조아지), 농민, 시민들이 일으킨 혁명이라는데, 그럼 부자와 시민, 농민들은 같은 편이라는 걸 어떻게 알고 혁명을 일으켰을까요? 자, 그 의문을 파해치면서 최근 프랑스 혁명을 연구하는 분들이 관심을 갖는 <상징물>이라는 것에 대해서 알아볼거립니다.

귀족과 민중의 봉기

   프랑스 파리고등법원의 젋은 변호사인 <데물렝>이 네케르의 해임에 반발하여 모든 귀족이 봉기해야 한다고 연설했다. 이를 동조한 민중들이 튈르리궁전으로 들어가려다가 독일 용병대에게 피살되자 곳곳의 봉기와 더불어 바스티유 감옥 습격까지 이어져서 혁명이 시작된다. 데물렝은 이 연설로 일약 스타 국회의원이 되었으나, 훗날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 때 단두대에 목이 잘린다.

우리는 프랑스 혁명으로 민족주의, 공화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 공포정치 등등 많은 상황들이 발생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용어를 알고 있었던 이들은 부르조아지 계급 정도였을 거에요. 일반 시민들조차 어려운 사회개념이 적힌 책들을 읽을 기회가 적었을 뿐 아니라, 18세기 농민층은 글자 자체를 아는 사람도 많지 않았거든요.

혁명의 중심이었던 농민들이 과연 <구체제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왕과 가톨릭 질서를 바꾸고, 각 계급의 성향을 고려하여 새로운 사회질서를 창출한다> 라는 어려운 목표를 이해할 수나 있었겠어요?

그래서인지 프랑스 혁명 초창기에 주도권을 잡았던 <국민의회>는 어느 정도의 재산과 지식을 갖춘 <부르조아지>들이 이끌었답니다. 이들은 농민에게 땅을 돌려주자는 토지개혁이나 모두가 평등하다는 개념을 보여주지 않았어요. 오히려 <재산권>은 신성한 것이지 때문에 절대 빼앗을 수 없다라는 헌법을 만들어서 농민들이 부르조아지의 재산을 넘볼 수 없게 못 박았답니다.

특히 혁명을 일으킨 농민들은 <이참에 세상을 바꾸자>라는 단순한 논리로 폭동을 일으키거나, 지금 밀리면 왕한테 잡혀서 다시 죽을 수 있다는 공포 때문에 귀족들을 무조건 학살하는 분위기가 있었답니다. 시민대표인 부자들은 이런 농민들의 <광기>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구요. 그런 이유에서 부자들이 만든 문서가 바로 <인권선언>이었습니다. 프랑스 인권선언은 자유를 상징하는 프랑스인의 권리 선언으로 너무 훌륭한 선언이지만, 그 선언문 안에는 <재산권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라는 조항이 삽입되어 있답니다.

<인권선언 6조 : 재산권은 불가침한 또는 신성한 권리이다. 법적으로 공공의 필요한 분명한 경우가 아니면 절대 빼앗기지 않는다.>

자자... 그런데 문제는 <인권선언> 같은 문서를 백날 발표해봤자 글자를 모르는 농민들은 관심이 없었다는 거죠. 따라서 프랑스 혁명에서 일반 시민이나 농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적인 문서>가 아니랍니다. 그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상징물>이 훨씬 중요했던 거죠.

그래서 혁명을 이끈 부르조아지들은 농민들에게 혁명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이벤트>를 기획하기 시작했답니다. 그것은 바로 <축제>였습니다. 피터지게 사람이 죽어가고, 전쟁과 폭동이 난무하는데 무슨 축제냐구요? 역사적으로 전쟁 중에 기획되는 축제는 <계급간의 단합대회>랍니다. 축제를 통해서 부르조아지와 농민들은 우리가 하나라는 인식을 갖게 되고, 대중문화를 서로 공유하면서 가까워지는 거죠. 요즘이나 TV나 인터넷이 그 역할을 하지만, 당시에는 축제가 문화와 계급을 초월한 동질성을 갖게하는 역할을 했답니다.

그럼 이 축제에서 부르조아지 정부는 무엇을 보여주려고 했을까요? 먼저 민중을 통제하고 민심이 어디로 흐르는지를 파악하려고 했겠죠? 또 민중이 기독교에 호감을 갖는지 반감을 갖는지도 살피게 됩니다. 또 국가제도와 도량형, 달력 같은 것들 민중에게 설명하겠죠. 혁명이 일어나면 혁명력이라는 새로운 달력을 사용하고 새로운 화폐단위, 새로운 길이 및 무게 단위 등등을 사용하니깐 그런 것들도 민중들과 공유해야 하구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같은 편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거랍니다. 그래서 민중들이 혁명의 상징으로 쓰고 다니는 <자유의 모자>와 같은 상징물을 같이 사용하고, <자유의 나무> 아래서 혁명군, 성직자, 민중이 같이 춤추며 즐기는 행동 같은 것을 하는거죠. <자유의 모자, 애국의 제단, 자유의 나무>와 같은 것들이 바로 우리는 모두 같은 편이며, 하나이다라는 것을 상징하는 상징물이랍니다.

자자... 이렇게 상징물들을 통해 민중과 교류하는 부르조아지 혁명 정부는 더 중요한 작업을 시작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새로운 <정부>이며, 국가 기관이라는 것을 민중에게 인식시켜야 하는 것이죠. 그럼 그 상징물로 가장 적합한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도덕과 윤리를 지키며, 기독교적인 마인드로 살아가면서 재산권을 지키는 부르조아지를 상징하면서도 농민들도 인정할 수 있는 새로운 정부의 상징물.... 그것은 바로 카톨릭의 성모 마리아 상의 개념에 접근한 <마리안 상> 이였답니다. 마리안상은 보편적인 포근함과 기독교적인 윤리를 상징하면서도, 민중들에게 적대적이지 않은 개념이었거든요.

전통적 개념의 성모 마리아 : 기독교적이고 윤리적인 이미지

그래서 초기 프랑스 혁명을 주도한 국민의회 정부는 민중혁명의 창을 든 젋은 여인의 모습으로 마리안 상을 제작하였습니다. 또 공공 기관에는 모성의 이미지로 아이와 함께 조용히 책을 읽는 마리안 상을 세워서 혁명정부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려고 한 것이죠. 이 두가지 마리안 상은 <민중과 함께 한다> 라는 대외적 의미와 <보편적인 정권이다> 라는 부르조아지적 이미지를 동시에 보여준답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에서 두 번째로 정권을 잡은 쟈코뱅 당의 로베스피에르는 앞의 부르조아지 정권과는 성격이 너무 달랐습니다. 쟈코뱅 당은 보다 급진적인 혁명을 원했고, 부자들이 원하는 <자유와 재산권의 보장> 보다는 <민중의 평등>이라는 개념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답니다. 즉 <자유권> 보다 <평등권>이 혁명에서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죠.

그래서 로베스피에르는 엄청난 개혁을 실시한답니다. 부자가 아닌 이들도 투표권을 주어야 한다는 <보통선거제도>, 모든 이들을 위한 민주주의, 국왕이 없는 <공화국> 건설, 모든 봉건제도의 무상폐지 등등.... 당시 유럽에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급진적인 개혁을 기획하였죠.

급진적인 평등 이념에 기초한 공포시대의 정치가 : 로베스피에르

그 개혁의 실행을 위해 로베스피에르는 자신의 의견에 반대되는 모든 세력을 숙청하였습니다. 민중을 위하여 같은 혁명세력까지 제거해 나간거죠. 단두대(길로틴)에는 매일 수많은 이들의 목이 잘리고, 시체를 태우는 연기가 하늘을 뒤덮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개혁이 왕권 유지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한 유럽의 모든 왕정 국가와 전쟁을 해야 했습니다.

이제 혁명의 상징물이 달라지기 시작한답니다. 1793년의 마리안 상은 성모가 아니라 투사가 되었습니다. 마리안은 일분 가슴을 드러낸 채 투쟁을 지휘하는 사나운 모습이 되었고, 성모가 아니라 혁명을 이끄는 살아있는 여인으로 변하였답니다.

그리고, 여인인 마리안 상을 대신하여 광폭한 이미지의 남성상이 등장했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헤라클레스 상> 이였죠. 공포정치의 쟈코뱅당은 곳곳에 헤라클레스 상을 내놓기 시작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농민들은 기독교적인 기존의 부자 정부에 반감이 커져갔기 때문에 마리안 상은 공포정치에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헤라클레스는 기독교와 반대였던 고대 제우스교의 상징물이었거든요. 또, 헤라클레스는 신화에 나오기는 하지만 신에게 고통받는 민중적인 영웅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답니다. 또, 헤라클레스는 반여성적인데다가 부친을 살해하는 이미지가 있어서 국왕을 죽인 공포정치 정부에게 딱 맞아 떨어지는 이미지였죠.

토르발센의 헤라클레스(덴마크 코펜하겐)

   프랑스 혁명기 헤라클레스는 '프랑스 구체제의 악을 격파하라'라는 명령을 지혜의 여신에게서 받고 쟈코뱅 정부의 상징으로 등장하였다. 이 임무는 기독교적인 보편정신의 마리안느가 아닌 고대 신화 속의 인간 영웅에게 하달된 것이었다.

민중의 혁명 시대.... 헤라클레스는 부르조아지의 상징물은 마리안을 누르고 대중교류의 수단으로 이용된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공포스러웠던 정치를 한 나머지 죽게된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시대가 끝나고, 다시 온건한 부르조아지 정부가 들어서자 헤라클레스의 이미지는 프랑스 곳곳에서 파괴되었습니다. 이제 프랑스 혁명 공화국의 상징물은 다시 추상적이고 감히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존재인 <마리안>으로 대체되었답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정권을 잡자 1800년 콩코드 광장에 <자유의 여신상>을 만들어 자신의 정체성을 민중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곧 이 여신상 대신 그 자리에 <개선문>을 만들어 버려서 자신이 이전과 다른 <위대한 영웅>이라는 것을 다시 보여준답니다.

그럼 <마리안> 즉, <자유의 여신>은 사라진 것일까요? 아니랍니다. 이후 프랑스의 7월 혁명에서는 <돈 있는 사람들을 위한 선거권 확보>가 혁명의 주 목표였는데, 이 때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라는 이미지가 다시 등장한답니다. 또, 프랑스 출신의 위대한 건축가이자 에펠탑을 세웠던 에펠은 미국에 <자유의 여신상>을 건립함으로서, 미국이 자유와 기독교 정신을 수호하는 국가라는 것을 보여준답니다.

들라크루아 :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7월 혁명의 마리안)

우리는 프랑스 혁명을 볼 때, 국민의회니, 국민공회니, 공포정치니 하는 변화에만 주목해 왔답니다. 그러나 프랑스 사람들은 이런 문화적인 교류와 공감을 통해 프랑스 혁명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커지고 있으며, 프랑스 혁명 뿐 아니라 모든 사회 변화에서 민중들과의 교류가 어떤 형식으로 진행되어 가는지를 파악하려고 노력하고 있답니다.

우리 역사에서도 많은 혁명과 민란, 봉기가 있었답니다. 세월이 많이 흐르고 시간이 지나 역사 연구가 깊어진다면 우리도 이렇게 상징물의 관점으로 역사를 바라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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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발전의 비밀 : 전쟁이 과학을 진화시킨다!

003. 전쟁으로 현대 문명은 진화하다

*** 배경 : 1, 2차 세계대전 ***

인류의 역사에서 전쟁은 큰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전쟁은 문명을 파괴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무서운 재앙을 초래합니다. 그러나 전쟁은 '싸우고 있는 집단들'에게 과학의 발전을 가져다 준답니다. 인류가 가장 잔인해지는 순간, 생존을 위해 과학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게 되는 것이죠.

고대 서아시아의 히타이트 민족이 최초의 철제 무기로 수많은 문명을 제압한 뒤 철제 기술이 보급되어 오히려 이후 수많은 문명이 번영하게 되었습니다. 고대 로마에서는 제국을 유지하고 정복전쟁을 지속적으로 하기 위해 철기 제련을 연구하는 특수기관을 두기도 하였죠. 중국의 철기 제련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도 가장 전쟁이 많았던 춘추전국시대였습니다. 서구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과학의 성장기에는 십자군이라는 큰 전쟁과 전쟁 후 아시아와의 교역이 있었답니다. 나침반, 화약, 인쇄술 등 과학적 업적을 가장 많이 남긴 중국 송나라는 역사상 가장 침략을 많이 받은 중국 왕조였습니다.

그것은 근대의 전투에서도 마찬가지였답니다. 특히,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서 국가는 어떤 과학 기술도 필요하다면 수용했으니까요. 전쟁의 승리에 필요한 것은 과학 뿐... 그 과학이 도덕적인 것인지 윤리에 어긋나는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윤리나 도덕에 얽매이지 않는 시기에 과학은 자유롭게 발전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과학 만능주의는 너무나 위험하답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순식간에 파괴할 수도 있기 때문이죠.)

교통혁명으로 지구촌을 하나로 묶어준 비행기도 2차 대전이라는 전쟁의 덕을 보았답니다. 미국은 전쟁의 승리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래서 엄청난 파괴력을 갖춘 폭격기를 만들기 위해 백년도 더 걸릴 과학기술을 엄청난 투자로 몇 년만에 이루었어요. 2차대전 당시 일본은 이 고속 비행기를 추적하기 위한 레이더를 개발하는 데 많은 돈을 쏟아 부었는데, 그 결과 '마이크로파'를 개발했고 그것이 오늘날 주방의 필수품인 전자렌지의 핵심기술이 되었답니다.

또 컴퓨터 역시 2차 대전 당시 대포의 탄도 거리를 계산하기 위해 만들어졌답니다. 삼각함수 아시죠? 대포의 사정 거리와 포탄이 날아가는 각도 등을 정확히 계산할 수 있는 인공지능을 개발하면서 만들어진 초기의 컴퓨터는 어마어마한 크기였지만, 그 성능은 지금의 사무용 컴퓨터 1대 수준였죠.

그럼 인터넷은? 1957년 소련이 인공위성을 띄우자 미국은 공산주의 국가의 핵공격에서 군사통신망을 안전하게 유지하기 위해 "로그인(log in)' 이라는 메시지를 먼 거리로 전송하는 테스트를 했는데, 그것이 성공하면서 알파넷이라는 최초의 군사용 인터넷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스위스의 물리연구소에서 윌드와이드맵(www)으로 창안한 것이죠. 1992년 미국의 마크 앤드리슨이 윕브라우저라는 것을 발명해서 지금은 전세계인의 인터넷으로 발전한 것이랍니다.

또, 인터넷 이전의 통신수단이었던 무선 전파시스템도 전쟁을 통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고, 지금의 핸드폰에 이르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세계 2차 대전 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초토화시켰던 원자폭탄의 개발은 인류가 원자력이라는 원료를 사용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답니다. 또한, 일본과 독일에서 자행된 인간생체실험은 매우 끔찍했지만, 미생물분야와 의료분야의 발전에 도움이 되기도 했지요. (물론, 전쟁을 통해 수많은 인간의 희생으로 이런 발전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인간의 잔인함을 극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부끄러운 역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쉽게 먹을 수 있는 통조림도 전쟁의 산물이랍니다. 프랑스 혁명기, 나폴레옹은 유럽 전역에서 전쟁을 하다 보니, 이곳 저곳으로 이동을 많이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발명한 것이 프랑스 와인병을 밀봉해서 음식이 상하지 않도록 만든 전투식량, 즉 병조림이었죠. 프랑스와 치열한 전투를 벌인 영국에서는 오랫동안 바다에 나가 배를 타고 작전을 수행해도 먹을 것에 대한 걱정이 없는 전투식량을 연구했는데, 그것이 바로 병조림보다 더 밀봉효과가 강한 통조림이었답니다. 결국 통조림은 나폴레옹의 작품을 섬나라인 영국에서 해상 식품으로 개발한 것이지요.

통조림과는 좀 다르지만, 징기스칸이 아시아와 유럽이라는 넓은 대륙을 점령할 때도 '보르츠'라는 말린 육포가 큰 힘을 발휘했답니다. 보르츠는 소의 생살을 말려서 건조시킨 뒤 잘게 빻아둔 것인데, 무게도 가볍고 영양가도 높아서 말을 타고 무한정 달리는 몽골 부대에게 아주 적합한 전투 식량이었죠. 오늘날 육포의 유래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답니다.

그러나, 전쟁은 승리를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전쟁을 통한 발전은 '인류를 위한 과학 발전'이라고 볼 수 없답니다. 사람을 잘 죽이기 위해 회전력이 강한 총탄을 만드는 것이 인간을 위한 과학은 아니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과학 발전과 인류의 발전을 구분해야 한답니다. 예를 들어 정확한 포탄을 날리기 위해 일기예보를 연구해서 기상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은, 의도는 불순했으나 결과적으로 우리가 그 혜택을 입은 것이랍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상학의 발전은 <전쟁이 가져다 준 혜택>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 혜택을 누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를 잊고 살아서는 안되겠지요. 목적과 수단, 결과를 모두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면, 훗날에도 끔찍한 전쟁이 끝나지 않을 거에요.

자 그럼 이번엔 전쟁이 끝난 뒤 기발한 아이디어로 창조된 제품들을 한번 볼까요?

먼저 사무용품인 <스템플러 stapler>는 세계 1차 대전과 상관이 있답니다. 세계 1차대전 때 벤자민 호치키스는 총 하나로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연발 기관총인 <호치키스 기관총>을 만들었답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 버리자 마피아같은 조폭을 빼고는 총을 살 사람이 없는 거에요. 그래서 호치키스는 기관총의 탄창처럼 침을 장전해서 종이를 찍는 기계를 대신 팔았답니다. 그것이 바로 널리 쓰이는 스템플러, 즉 <호치키스>라는 사무용품이었죠.

또, 우리가 알고 있는 껌도 세계 2차 대전 중 식량난에 허덕이던 일본이 개발한 특허상품이랍니다. 원래 껌은 고대 마야족이 즐겨 씹었던 천연 치클이 그 유래입니다. 일본은 2차 대전 전쟁중 방탄 탱크에 사용할 수 있는 비닐 수지를 발견하였습니다. 하지만 전쟁 중 식량이 너무 부족하자 전쟁용 초산비닐수지를 허기를 달랠 수 있게 씹을 수 있는 용도로 다시 개발하였고, 이후 화학약품처리를 해서 '플라스틱 초산비닐수지'로 만들어 오늘은 껌의 대중화를 이끌었답니다.

먹는 것 하나 더.... 2차 대전의 패전국인 일본에서 껌을 이용해서 먹는 것에 대한 불만을 해소했다면, 또 다른 패전국인 독일에서는 마실 것을 이용해서 국민들의 불만을 해소했답니다. 그 음료수가 바로 '환타'라는 것이죠.

세계 2차대전 때 미국과 전쟁을 하던 독일은 적국인 미국에서 코카콜라의 원액을 공급받지 못했습니다. 독일 국민들은 불안한 전시 상황에서 콜라조차 먹지 못하는 것에 불만이 많았죠. 코카콜라 독일 지사장인 막스 카나트는 콜라를 대체할 음료수 개발을 지시했는데 이것이 바로 '환타'였답니다. 콜라를 먹지 못하는 미국의 적국들은 환타를 마시게 되었고, 환타는 세계 5대 탄산음료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또 세계 1차대전 때 너무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당하자 붕대를 만들 면이 부족했답니다. 이 때 <킴벌리> 라는 회사가 종이의 원료인 펄프로 셀루코튼이라는 대체 면을 개발했답니다. 이 면이 너무 흡수력이 좋고 부드러워서 부상자들에게 필수품이 되었죠. 그런데 전쟁이 끝나자 문제가 생겼어요. 너무 많이 생산하다보니 엄청난 재고를 처리할 방법이 없었던 거에요. 그런데, 전쟁 중 여성들이 이 인공면을 생리대로 사용하는 것을 보고 바로 발상을 전환했답니다. 바로 생리대, 화장솜 등 세계최초의 여성용품으로 포장해서 판매하기 시작한거죠. 그리고 더 나아가 화장을 지우는 휴지로 팔았는데, 이게 바로 유명한 <크리넥스 티슈>라는 박스에서 한 장씩 뽑아쓰는 휴지랍니다.

또 하나.... 여성용품과는 좀 다른 개념이지만 여성들의 가슴 수술에 이용되는 실리콘. 이것은 원래 세계 2차대전 때 각종 유리제품이나 파손될 수 있는 무기를 포장하는 용도로 개발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실리콘 재고는 처리할 방법이 없었죠. 당시 전쟁의 패전국 일본은 나라가 망해서 수많은 여자들이 거리에 나와 성매매 업소에서 생활했답니다. 미군은 남아도는 실리콘을 일본 게이샤들의 가슴에 주입해서 성형으로 실리콘을 처분했답니다. 이것이 소문이 나서 전쟁후 미국에서도 실리콘 성형 수술이 시작된 거죠.

자 이렇게 전쟁이 낳은 수많은 과학기술과 물품들은 우리의 생활을 윤택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어떤 것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면서 이루어진 것들도 있고, 또 다른 것들은 전쟁 중에도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개발한 물품들도 있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수많은 과학의 혜택을 누리는 우리가 이 혜택만을 찬양하는 결과론자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입니다. 전쟁으로 상처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과정'을 생각하면서 겸허하게 과학의 혜택을 누려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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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안 시대 후지와라 가문의 비밀

002. 자식은 딸, 손자는 아들이여야 가문이 살아남는다.

*** 배경 : 일본 헤이안 시대 (1016~1067년 후지와라 북가 시대) ***

이 이야기는 일본 헤이안 시대를 살다간 <미치나가>라는 유명한 사람의 이야기랍니다.

후지와라 가문... 일본 고대사에는 이 가문을 빼놓고 역사를 이야기할 수 없다라고 말할 정도로 유명한 가문이 있답니다. 그 가문이 바로 <후지와라> 가문이죠. 일본에서는 법(율령)이라는 것이 생긴 이래, 하늘의 자손인 <천황>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불변의 진리라고 생각했답니다. 그것은 고대부터 메이지 유신까지 절대 변함이 없는 불변의 법칙이었죠. 그 법칙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 갖은 계략을 사용하여 천황 못지 않은 권세를 추구한 가문이 바로 귀족 중의 최고 귀족 <후지와라> 가문이었답니다.

710년, 후지와라 가문의 후히토는 법을 준수하는 국가, 즉 율령국가를 만들기 위해 천황을 설득해서 <헤이죠쿄>로 수도를 옮겼습니다. 후히토는 막강한 권력을 누렸죠. 그러나 후히토가 사망한 뒤 황족인 <나가야>가 왕권 강화를 주장하자, 후히토의 아들들인 후지와라 가문의 네 형제가 나가야 왕과 왕비를 자살로 몰아 죽였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 후지와라 가문의 천적은 <전염병> 이라는 거에요. 어이 없게도 네명의 형제와 식솔들이 모두 천연두에 걸려서 가문의 대부분이 몰살당해 버렸답니다. 결국, 정권은 다시 천황가문의 외척들에게 돌아갔죠. 그래도 후지와라 가문은 천황의 조언자로 계속 살아남았답니다.

그러고 8세기 이후, 후지와라 가문은 <셋칸 정치>라는 형태로 정권을 잡기 사작한답니다.

셋칸 정치라는 것은, 천황의 외할아버지가 나이 어린 천황, 또는 여성 천황을 대신해서 정치를 하는 것을 말한답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이런 <셋칸 정치>가 있었어요. 고려시대, 이자겸이라는 귀족은 자신의 딸 3명을 차례로 왕과 결혼시켜 강력한 귀족 가문이 된 일이 있었지요. 조선시대에는 안동 김씨 가문이 딸들을 왕과 결혼 시켜 정권을 잡았는데 우리 역사에서는 <세도 정치>라고 부르고 있죠. 이것과 비슷한 개념이랍니다. 

천황이 나이가 어려서 외할아버지가 대신 정치할 때, 이 외조부를 <셋쇼>라고 부르고, 그 가문을 <셋칸가문>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 셋칸 가문을 이끌어간 집안이 바로 <후지와라> 가문이었죠.

그런데 만약 나이 어린 천황이 나이가 많아져서 어른이 된다면?

쉽습니다. 천황을 잘 구슬려서 계속 외할아버지가 정치를 하게 되는데, 이 때 외할아버지는 <셋쇼>라고 부르지 않고, <간파쿠>라고 부른답니다. 원래 간파쿠는 천황을 돕는 신하로서 대신 정치를 이끌어가는 사람을 말하는 개념이지만, 후지와라 가문은 이것도 정권 유지를 위해 이용한 것이지요.

자, 그럼 <셋쇼>가 무엇인지 알 것 같죠? 이제, 일본 고대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셋쇼>였던 <미치나가>라는 인물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께요. 이 이야기는 일본 11세기 초반의 이야기랍니다.

이 미치나가라는 사람은 참 운이 좋은 사람이었답니다. 대귀족 가문인 후지와라 가문에서 태어났고, 아버지가 <셋쇼>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대를 이어 셋쇼를 할 수 없었답니다. 왜냐면 넷째 아들이었기 때문에, 형들에게 우선권이 있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아까도 얘기했듯이 일본 고대사의 최대 반전은 <전염병>이라고 했죠? 첫째형이 전염병으로 죽었고, 연이어 둘째, 셋째 형마저 전염병으로 죽었답니다. 물론, 형들이 이미 천황에게 딸들을 시집 보냈지만, 그 딸들이 아들을 낳지 못했기 때문에 천황의 후사도 없었던거죠.

일본 드라마나 옛 이야기에서는 이 미치나가가 너무 잘생기고,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아서 여러 여자에게서 딸을 낳았다고도 합니다. 또 일본 고전 중 최고라는 <겐지 모노가타리>의 주인공 히카루 겐지는 바로 이 미치나가를 모델로 했다고도 합니다.

일본 최고의 고전 : 겐지 모노가타리

   주인공 히카루겐지를 통해 일본 고대의 귀족사회의 일상과 삶을 알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이 미치나가를 모델로 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한 것은, 저자가 후지와라 가문의 딸들을 교육하여 천황에게 시집보내도록 했던 가정교사였기 때문이다.

   겐지 모노가타리 : 겐지는 주인공 이름. 모노는 영(靈)이란 뜻, 가타리는 스토리라는 뜻, 즉 제목자체가 일본 헤이안 시대 문화의 특징인 주술적인 이야기란 뜻을 내포하고 있다. (전염병이 많은 풍토의 일본 고대사에서도 특히 헤이안 문화는 악령 퇴치 등 주술적인 면이 매우 강한 토속적이고 불교적인 문화였다.)

자자... 이제 미치나가는 정권 유지 작전에 돌입합니다. 미치나가에게는 천만 다행으로 딸이 4명이나 있었던 거에요.

여기서 잠깐!!!!

왜 딸만 있는게 행운이었냐구요? 당연하죠. 나이 어린 천황이 남자니깐 딸들이 많아야 줄줄이 대를 이어 천황들에게 시집보내서 권력을 잡을게 아니겠어요? 그리고 그 딸들은 무조건 <아들>만을 낳아야 합니다. 손자는 후대 천황이 되기 때문에 권력이 영원히 이어지지만, 공주는 결혼을 통해 권력을 다른 이에게 넘겨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미치나가가 후지와라 가문의 영광을 영원히 이어가기 위해서는 이런 법칙이 필요했던 거랍니다. 이 법칙은 모든 <셋쇼 가문>에 해당하는 법칙이랍니다.

<그들만의 법칙 : 나의 자식은 무조건 딸이여야 한다. 딸의 자식은 무조건 아들이어야 한다.>

미치나가는 이 법칙에 맞게 4명의 딸이 있었기 때문에 반세기 동안 정권을 잡을 수 있었답니다. 첫째딸은 이치조 천황에게, 둘째딸은 산조 천황에게, 셋째 딸은 고이치조 천황에게, 넷째딸은 고슈사쿠 천황에게 시집보내었죠. 일본 역사상 전무후무한 외척 가문이겠네요.

그러나, 미치나가의 영광은 또 다시 좌절되고 말았는데 그것은 <딸의 자식은 아들이여야 한다>는 법칙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그들 가문의 저주가 발동되어 미치나가의 딸들이 <전염병>으로 생각보다 일찍 죽었답니다. 그리고, 결국 원했던 황태자도 태어나지 못했죠.

결국 미치나가가 원했던 후지와라 가문의 영광은 <아들>이 태어나지 않는 불운으로 마감하게 되었답니다. 그럼 정권은 누구에게 넘어갔냐구요?

당연히 천황의 외가가 망했으니, 천황의 친할아버지가 실권을 장악하겠죠. 우리 나라에서 세도 정치가 몰락하고 흥선대원군이 왕의 아버지로서 집권했던 것처럼 말이죠. 이것을 <셋칸 정치>의 반대말로 <원정 정치>라고 합니다. 천황의 친부나 친할아버지는 <원>이라는 공간에 <원청>이라는 기구를 만든 후, 용병들을 고용하여 귀족들을 견재했답니다.

요컨데, 일본의 고대사에는 후지와라 가문의 강력한 힘이 있었고, 그 중 미치나가 시기에 그 영광이 가장 화려했지만, 결국 황태자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가문은 쇠퇴하였답니다.

그리고 가장 불쌍한 이들은,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 정략 결혼의 도구로 이용된 여인들이지요. 후지와라 가문의 정략 결혼은 이후에도 일본 역사에서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답니다.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도, 유력 가문의 여인들은 집안의 이익을 위해 운명처럼 정략 결혼해야만 했지요.

일본 최고의 고전 <겐지 모노가타리>를 쓴 저자 무라사키 시키부는 후지와라 가문의 여인을 천황의 마음에 드는 가장 완벽한 교양과 미모, 센스를 갖춘 여인으로 완벽하게 탈바꿈시키는 가정 교사의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후지와라 가문의 여인들을 다루며 살았으니, 일본 귀족사회에 대한 최고 작품을 쓰지 않았을까요?

겐지 모노가타리, 마지막 와카

마음 속 연인을 잃고 깊은 생각에 잠겼네 / 비애 속에 보낸 지난 세월,

나도 모르게 오늘이 왔네, / 나의 모든 것을 끝내려 하네.

그리고 이렇게 교양을 쌓아서 천황과 결혼한 여인들은 아들을 낳을 때까지 조마조마한 삶을 살아야 하고, 아들을 낳지 못할 경우 평생을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살아야 했겠지요. 그녀들의 이른 죽음은 전염병이라기 보다는 마음의 병이 더 큰 원인이었을 것입니다. (실제 아들을 못 낳은 미치나가의 딸들은 이유없이 병사했다고 합니다.)

가문이 영광의 길로 들어설 때마다 하늘이 <전염병>으로 가문의 앞길을 막은 것은 후지와라 가문의 여인들이 남긴 저주는 아니였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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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마고우(竹馬故友) 이야기

001. 죽마고우란 과연 가장 아끼는 친구를 뜻하는 말이였을까?

*** 배경 : 중국 위진남북조 시대 (진나라) ***

이 이야기는 중국 진나라 시대의 이야기랍니다.

중국은 강력한 통일제국인 한나라가 망하고, 위나라, 촉나라, 오나라로 분열되는 삼국시대를 맞이했습니다. <삼국지>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결국 통일은 조조 일가의 <위나라>가 했어요. 하지만, 최후의 승자는 조조의 후예가 아니라 <진나라>를 세운 사마중달의 후예, 즉 사마씨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중원의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북쪽 만리장성에서 다섯 오랑캐(오호)가 밀고 내려오면서 진나라 역시 몰락하게 됩니다. 이 시대를 중국 역사에서는 <위.진.남북조 시대>라고 부른답니다.

바로 이 시대에 살았던 은호와 환온이라는 친구의 이야기에서 <죽마고우(竹馬故友)>라는 고사가 생겼답니다.

은호와 환온은 어릴 때부터 친구였습니다. 그러나 둘은 나아가는 길이 달랐습니다.

환온은 일찍이 진나라 정치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는 진나라를 위협하는 오랑캐 민족들을 토벌하고 다녔답니다. 특히, 남방의 촉나라를 토벌한 일로 그는 누구도 무시못할 세력을 갖게되었습니다.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지지를 얻고 있는 환온을 국왕도 두려워할 정도였죠.

반대로 은호는 풍류를 아는 숨은 지식인이었습니다. 당시 혼란스러운 시대를 피해 자연을 벗삼아 살았던 죽림칠현(竹林七賢)처럼 은호 역시 정치나 전쟁을 멀리하고 노자의 책을 읽으며 자연의 삶을 동경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은호는 숙부인 융과 함께 노자의 책과 주역을 읽었는데, 입으로 책의 내용을 주고 받으면 그를 이길 사람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은호는 누가 뭐라고 해도 관리가 되지 않고 10년이라는 세월을 선조 무덤을 지키면서 살았답니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와서 이렇게 물었답니다.

" 관직에 있을 때 꿈에 관을 보고, 재물을 얻게 될 때 꿈에 더러운 것을 보는 것은 무슨 이유인 것이요?"

은호는 이렇게 대답했지요.

"관리란 본래 썩은 것이니 냄새가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꿈에 시체가 보이는 것이지요. 또, 돈이란 본래 더러운 것이니 꿈에 더러운 것만 나타날 따름이지요."

당시, 위선을 떠는 정치가들과 전쟁만을 일삼는 장군들 때문에 살기가 어려웠던 모든 사람들은 은호의 말이 너무나 옳은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은호의 명성이 높아지자 국가에서는 그에게 관직에 나올 것을 계속 부탁했답니다. 은호는 왕인 간문제의 청을 끝까지 물리치기 어려워 결국 승낙했습니다. 하지만, 국왕이 은호를 데려온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당시에 세력이 대단했던 <환온>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답니다.

은호와 환온을 서로 대립시켜서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던 왕의 계략으로 이 두 사람은 서로 의심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당시 유명한 귀족인 <왕희지>가 이 두 사람을 화해시키려고 했지만, 은호는 그것마저 거부했습니다.

마침, 오랑캐가 세운 국가 중 하나인 <후조>에서 내란이 일어나자 진나라는 은호를 장군으로 임명하여 중원을 회복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은호는 오히려 오랑캐들에게 참패를 당하고 말았답니다. (여기서 오랑캐라고 말하는 것은 중국인들이 적은 <진서>라는 책의 내용을 토대로 말하는 것이랍니다.)

그러자, 환온은 왕에게 상소를 올려서 은호를 귀양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답니다.

"나는 어릴 때 은호와 같이 죽마(대나무로 만든 말)를 타며 놀았는데, 내가 죽마를 가지고 놀다가 버리면 반드시 은호가 주워가졌다. 그러고 보면 그는 내 아래에 있음이 당연한 것이다."

우리는 어릴 때 한 동네에 같이 살면서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친구를 소꿉친구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어릴 때의 추억을 공유하면서 같이 자란 친구에게는 특별한 정을 두기 마련이죠. 죽마 고우란 어릴 적 장난감을 공유하면서 친하게 지낸 벗을 말합니다.

그러나, 환온이 말한 죽마고우도 그런 뜻이었을까요?

어렸을 때 가장 친했던 친구가 일생의 라이벌이 되어 자신을 견제하기 위해 정치를 하자, 그를 제거하기 위해 상소를 올렸고, 결국 그를 귀양살이로 내몰았습니다. 그리고 은호가 자신의 아래에 있다는 뜻으로 '죽마를 주워 간 친구' 라고 말했습니다. 요즘말로, 내가 쓰다 버린 것도 기쁘게 가져가는 <땅거지>라고나 할까요?

하지만, 귀양살이를 떠난 은호는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자연 속에서 사는 삶을 버리고 친구와 대립한 자신을 돌이켜보면서 처음의 마음, 즉 초심으로 돌아가려고 했답니다. 오히려 귀양살이는 조용한 자연 속의 삶을 살 수 있기에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손가락으로 글자를 쓰는 버릇이 생겼다고 합니다. '돌돌괴사(정말 괴이한 일이였구나)' 라는 네글자였죠.

그렇다면 환온은 <은호>를 죽여야만 할 정적으로만 생각했을까요?

시간이 지나고 모든 일들이 잊혀질 무렵, 환온은 온호에게 <상서령>의 벼슬을 줄 것이니, 자신을 도와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적었답니다. 은호 역시 그 편지를 기쁜 마음으로 읽고 승낙하였죠. 그런데, 은호는 답장을 확실하게 하려고 봉투에 넣었다가 다시 꺼내보고를 반복하다가 실수로 빈봉투만 환온에게 보냈답니다.

환온은 빈봉투만 답장으로 온 것을 보고는 크게 화를 내었습니다. 자신은 옛 친구를 끝까지 거두고 싶었는데, 옛 친구는 자신을 적으로만 생각한다고 느낀 것이지요. 환온은 그날 이후 은호를 다시는 찾지 않았고, 은호는 귀양살이를 계속하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시대가 서로를 적으로 만들 수밖에 없었던 환온과 은호.... 그들의 끝내 이루지 못한 우정에서 <죽마고우>라는 고사가 생겼답니다.

지금 당신에게는 자신을 끝까지 믿어줄 수 있는 어릴 적 친구가 있나요? 기분이 울적할 때, 허물없이 옛 이야기를 나눌 친구가 있을까요?

만약 그런 친구와 사이가 벌어졌다면, 서로의 마음과 상관없이 <빈봉투>를 보낸 실수를 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세요. 오랜시간 서로를 알고 지낸 벗과의 타툼은 은호가 <빈봉투>를 보낸 것처럼,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 틀림없을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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