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역사이야기들'와 관련있는 히스토리아의 글 목록101건

  1. 2013.02.28 군계일학 : 죽림칠현과 해소의 이야기 (6)
  2. 2013.02.28 고사 속 역사여행 15 : <화씨의 벽>에서 <문경지교>까지 (1)
  3. 2011.07.16 칼 포퍼 VS 토마스 쿤 제 2부 : 진보와 다른 관점의 패러다임 (3)
  4. 2011.03.03 칼 포퍼 VS 토마스 쿤 : 역사이론에 큰 영향을 미친 두 과학자들 이야기 (1) (1)
  5. 2010.05.20 후한 말 청의파 진식이 남긴 <양상군자 이야기> (3)
  6. 2009.10.02 토정비결의 이지함은 사회복지 혁명가였다. (4)
  7. 2009.10.02 역사 속의 인물 이야기 - <카사노바> : 역사적 변화가 낳은 이단아 (1)
  8. 2009.10.02 역사 속의 고사 이야기 - <홍일점>의 '빨갛다'는 빨갱이를 지칭하는 말이다. (3)
  9. 2009.10.02 쌍화점 속의 고려왕들 - 개혁가인가, 변태들인가? (60)
  10. 2009.10.02 조선 상고사와 신채호 선생 (1) - 어둠의 시기, 역사를 바라보는 틀은 <민족>일 수 밖에 없었다. (3)
  11. 2009.10.02 상투머리가 유행인가요? - 상투머리의 간략한 역사 (2)
  12. 2009.09.13 아우구스티누스(1) : 마니교를 믿었던 기독교의 성자 (4)
  13. 2009.08.23 히파티아 : 불타 버린 그리스 철학자의 시대 (3)
  14. 2009.08.22 <테오도시우스>의 이루지 못한 꿈 (2)
  15. 2009.08.14 배교자 율리아누스 : 전통신 지키기 프로젝트 (7)
  16. 2009.08.13 콘스탄티누스의 예수 꾸미기 프로젝트 (5)
  17. 2009.08.11 인류의 기원 - 진화론 vs 창조론(1장) (4)
  18. 2009.08.07 석기시대와 원시시대.. 그리고 원숭이들 (3)
  19. 2009.08.06 석기시대는 역사책에 왜 적어놓나요? (3)
  20. 2009.08.05 역사를 다 아는 자만 돌을 던져라~ (4)
  21. 2009.01.03 동아시아의 토지 이야기 (2) - 동아시아의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22. 2008.12.27 동아시아의 토지 이야기 (1) - 황하문명이 절대적인 문명이었는가? (4)
  23. 2008.12.21 한토막 역사 6화. 조선 시대의 궁녀들 - 어떻게 살아가야 했을까? (11)
  24. 2008.12.17 (복원) 불교편에서 다른 불교 역사 도표 (3)
  25. 2008.12.07 남한 지폐에 그려져 있는 이황, 북한에서는 질낮은 반동분자로 평가받는다. (8)
  26. 2008.06.24 history 1 - 인류는 언제부터 인류가 되었을까? (3)
  27. 2008.05.31 역사적으로 본 <자유주의>와 <평등주의>의 길고 긴 대립과정 (1) (2)
  28. 2008.05.09 (한토막 역사 14화) 3가지 이야기 : 일본의 구석기 유적지 조작사건, 몽고가 아닌 몽골이다 등 (4)
  29. 2008.05.09 <음악 속 역사여행> 독립군 아리랑 (1)
  30. 2008.05.09 환타스티아 (6장) : 서구의 신화에 대한 깊은 환상 - 드루이드 (1)

고사 속 역사 여행

백안시와 군계일학 : 죽림칠현과 해소의 이야기

1. 완적 : 백안시와 청안시 이야기

이 이야기는 죽림칠현의 이야기에서 시작되지. 죽림칠현은 중국 진나라의 혼란기 노장사상을 흠모하고 정치를 멀리했던 7인조 그룹. 즉, 완적, 혜강, 왕융, 향수, 완함, 유형, 산도를 뜻해.

죽림칠현이 왜 등장했냐 물으면... 중국이 너무 난세였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게 맞을꺼야. 삼국지 알지? 조조랑, 유비, 원소 같은 애들 나오잖아. 그 혼란한 시기를 통일하려고 했던 조조의 위나라와 사마중달의 후예들이 세운 진나라가 바로 죽림칠현이 살았던 시기거든.

죽림칠현 중에서도 시대가 좀 위고, 사상적으로도 빼어난 중심적인 인물이 완적과 혜강이었어. 즉, 죽림칠현의 리더격이었지. 그 중 완적(210~263)의 이야기를 좀 해볼까?

우린 죽림칠현이 난세에 은둔하고,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들이 정치적으로 무관심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 하지만, 죽림칠현의 멤버들은 사실 엄청나게 <정치적 수완>이 좋았던 자들이야. 생각해봐. 무능한 애들이 대나무 숲(죽림) 속에 숨어서 놀았다면 후대에 이슈가 될게 없잖아. 전해지는 기록에 의하면 죽림칠현은 모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자들이었고, 그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명문 귀족가문 출신들이었지.

완적 역시 명문가 출신으로 재능이 뛰어났지. 당시 위나라 왕은 완적을 관직에 등용하려고 많이 노력했지만, 완적은 잠시 관직에 있다가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서 거절하곤 했어.

저기, 낙양 공기가 좀 안좋아서 그런지 자꾸 병이 납니다. 요양을 해야겠어요....

남들은 못해서 안달인 고위직을 거부하고, 완적은 시골에서 거문고나 타면서 불안한 시대를 벗어나려고 했지. 그래서일까?

사마씨가 정변을 일으켜서 진나라를 세우고, 위나라의 관리들이 몰살당하고 때죽음을 당했어. 하지만, 선견지명을 가지고 정치에서 벗어나 거문고를 키며 놀았던 완강은 살아남았지.

이번엔 지배자 사마염이 완적을 자기 딸과 결혼시키려고 했어. 완적은 어떻게 거절했을까?

술가져와 술... 딸꾹... 마시고, 마시고, 흔들고, 또 마시고....

바로 이 방법이었지. 결혼 얘기는 꺼내지도 못하게 걍 계속 마시는 거야... 왕 앞에서 직접 거부했다가는 맞아 죽을지도 모르니 계속 퍼 마시는 거지.

그 남자가 살아남았던 이야기는 중국 정사에도 자세히 나와있어.

아픈 척 구르기, 술먹고 뻗기, 심지어 자고 자고 또 자고... 술 취한 척 자면서 버티기...

그런데, 다음 지배자 사마소는 명성이 높은 완적을 국가 정책에 홍보용으로 이용해 먹고 싶어서 아예 강제로 관직을 줘 버렸어.

 

완적의 방법은? 수도에서 먼 지방 관리를 자청한 다음에 가는 도중에 말을 타고 튀어 버렸지. 그리고 아름다운 강산을 구경하겠다면서 유람을 떠나 버려.

완적이 죽림칠현의 리더로 뽑히는 이유는, 이런 자유로운 생활 패턴이 큰 몫을 담당하지. 후배 죽림칠현들이 동일시 대상으로 삼을만 하잖아. 완적은 당시 사회 예법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사상을 선보였는데, 그것이 은둔자들에게는 너무 멋져보였거든.

당시에는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는 술이랑 고기 먹고 떠드는 것이 금기 사항이었거든. 그런데 완적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술을 잔뜩 퍼먹고 술기운으로 슬픔을 토하기도 했어. 조문객들에게 예를 차리지 않고 자기 슬픔만 멋대로 토해낸 거야.

자, 여기서 <백안시>라는 고사가 등장한거지.

<백안시(白眼視)>는 <눈의 흰자위 부분>으로 사람을 쳐다보는 걸 뜻해. 완적은 예절을 잘 지키는 척하면서 몇마디 말이나 나누려는 사람을 그렇게 째려봤거든. 백안시는 <그를 경멸해서 차가운 대접을 한다>는 뜻이 되었어.

반대로, 예절같은 걸 무시하고, 거문고를 타며 술을 마시고 거리낌 없이 대하려는 사람에게는 <맑은 눈>으로 맞이하였지. 그래서 <청안시(靑眼視)>라는 말이 나온거야.

2. 혜강 : 광릉산의 이야기

완적과 쌍벽을 이루는 죽림칠현의 또 다른 리더는 혜강(223-262)이야. 완적보다는 약간 늦은 시기에 태어났지.

혜강도 명문가 태생이야. 아버지는 조조 군대의 참모였지, 어머니는 조조의 친척이었거든. 그래서 조씨집안의 위나라는 그를 높은 직위에 두려고 했지만, 혜강이 거부하지.

혜강은 완적과 같이 <관직>을 가지라고 달달 볶이지 않았지. 일단 자기 집안이 빵빵하잖아...

그래서 혜강은 <노장사상>을 연구하면서 청년기를 행복하게 보냈어. 산에서 약초를 캐다가 수명을 연장하는 비법을 연구한다던가, 거문고를 타면서 신선이 되길 기원한다던가 하면서 보냈지. 그의 거문고 타는 솜씨는 당대 최고라고 불릴 정도였어.

그런데, 거문고 연주가 최고에 이르렀다고 생각할 무렵의 일이야. 뽕~ 하고 어떤 노인이 나타나서 연주를 하는데, 그 연주가 자신의 경지를 뛰어넘는 거야. 흥분한 혜강은 그 노인과 대화를 시작했어.

노인 : 연주 기법은 훌륭하지만, 무릇 음악에는 감정이 들어가야 하는 법. 음악에 감정이 없구나.

혜강 왈 : 노인의 연주는 신기에 가깝군요. 감정의 비법이 무엇입니까?

노인은 자신이 연주한 광릉산의 유래를 설명하기 시작하지.

전국시대에 한나라의 대신 협루가 진나라와 내통해서 나라를 팔아 넘기려고 하자, 백정인 섭정이 분개해서 협루를 암살한 뒤에 신분을 감추려고 자신의 얼굴을 으깬 뒤 자결했어. 한나라는 그의 시체를 거리에 내걸었는데, 섭정의 누나가 동생의 의로운 행동을 알리려고 시체 앞에서 동생의 신원을 밝히고 자결해 버렸어.

혜강은 그 이야기를 듣고, 음악에는 감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지. 그리고 정권이 바뀌어 조씨의 위나라가 망하고, 사마씨의 진나라가 들어선거야.

그는 광릉산의 이야기처럼 간신들을 멀리하고, 새로운 왕이 주려던 관직을 거부했어. 그리고 자연으로 돌아가 거문고를 연주하면서 살려고 했지.

하지만, 위나라 조조의 일족이었던 혜강은 자연에 숨어있었어도, 새로운 정권은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어. 혜강은 결국 형장으로 끌려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지.

그리고 유명한 말을 남기게 되.

내가 죽는 것은 억울하지 않지만, 광릉산아~ 네가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것이 원통하구나.

하지만, 광릉산은 사라지지 않고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지.

김용 소설 중에 유명한 <소오강호> 있지? 그 소오강호에 나오는 음악이 광릉산의 음악을 포함하고 있지. 소오강호에 보면, 마교장로 곡양과 형산파의 유정풍이 나오잖아. 진나라 시대 무덤을 모조리 파헤쳐서 광릉산을 찾아내고, 소오강호라는 곡을 만들어 정파와 사파가 나란히 연주하지. 그 소오강호가 동방불패를 물리친 마교 임영영이랑, 화산파 영호충에 의해 연주되잖아.

3. 해소 : 군계일학 이야기

해소는 혜강의 아들이야. 역시 재능이 뛰어났지. 아버지가 사형을 선고받고 죽었을 때, 11살이었어.

해소는 다른 죽림칠현들 덕분에 보호를 받으면서 자랐지. 죽림칠현인 산도는 진나라 사마염에게 해소를 적극 추천해서 혜소는 고위 관직에 오르게 되었고, 또 다른 죽림칠현인 왕융, 완함도 혜소를 지켜주려고 했어.

해소가 낙양에 오자 사람들은 혜소의 지혜와 기상에 감동을 받았어. 그래서 이렇게 표현했지.

해소를 보니 기상이 좋고, 의기가 있군요. 마치 학이 닭의 무리들 속에서 서 있는거 같으니, 군계일학(群鷄一鶴)입니다.

그러자, 죽림칠현은 이렇게 대답했지.

그런 아니야. 당신들은 해소만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지. 그의 부친의 빼어남을 보았다면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거야.

해소는 아버지를 빼어 닮았지. 거문고를 잘 탔고, 정치적인 수완도 뛰어났어. 그렇지만, 헤소는 완적과 혜강이 가진 능력이 하나 부족했지. 바로, 정치를 멀리하고 자연에서 살아야 오래 살수 있다는 거 말야.

왕의 신임을 얻고 승승장구하던 혜소는 어느날, 전투중에 왕을 지키기 위해 앞에 나섰어. 모두에 도망간 후에 홀로 화살을 다 맞으면서 죽음으로서 왕을 살렸지.

그는 아버지와 달리 왕 옆에서 충성을 다하는 것이 행복이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야. 혜강과 해소... 누가 더 현명한 삶을 살았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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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 속 역사여행  15

<화씨의 벽>에서 <문경지교>까지

한비자는 생각했다. 장인은 보석을 식별할 줄 알아야 하듯이

국왕은 사람을 식별할 줄 알아야 한다.

인상여는 말했다.

나는 너를 두려워해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나의 싸움으로 나라가 희생되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피하는 것이라고...

 

  1. 한비자가 남긴 우화 : <화씨의 벽>

벽(壁)이란 단어는 구슬 옥(玉)이란 단어 위에 빛난다는 뜻을 얹어놓은 단어로 <최상품의 구슬>을 뜻한다. 여기에서는 쉽게 한글로 풀어서 <옥돌>이라고 부르도록 하자.

이 이야기는 중국 춘추전국시대라는 혼란의 시대를 살아갔던 여러 영웅들의 이야기가 모여서 이루어졌다. 먼저 법가사상의 대가였지만,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누명 속에서 불구가 되었던 철학자 한비자가 만든 이야기부터 한번 들어보자.

춘추시대의 혼란기, 남쪽 초나라에는 변화라는 인물이 있었다. 어느 날 변화는 초나라의 산기슭에서 조각하지 않은 순수한 옥돌을 하나 발견하고는 초나라 왕인 여왕에게 진귀한 옥돌이라면서 보여주었다.

그러자, 여왕은 옥돌가공 장인에게 그 돌이 어떤 돌인지 감별하라고 하였다. 옥돌가공 장인은 '그냥 일반돌인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여왕은 변화가 사기꾼이라고 생각해서 그의 왼발을 잘라 버렸다.

시간이 지나 초나라의 왕은 무왕으로 바뀌어 있었다.

변화는 무왕이 즉위하자 다시 그 옥돌을 왕에게 바쳤다. 무왕 역시 옥돌가공 장인에게 그 돌을 감별하라고 했다. 옥돌가공 장인은 귀찮다는 듯이 '이 돌은 그냥 일반돌입니다'라고 말해 버렸다. 무왕변화가 사기꾼이라고 생각해서 그의 오른발마저 잘라 버렸다.

시간이 흘러 초나라의 왕은 문왕으로 바뀌게 되었다.

변화는 새로운 왕이 즉위하자마자 그 옥돌을 품에 안고서 초나라 산에 올라가 3일동안 대성통곡을 하였다. 그의 통곡 소리가 산을 울렸고, 눈물은 다 말라 버렸으며, 눈에서는 피까지 흘릴 정도였다.

이 소식을 들은 문왕은 사람을 시켜 왜 울고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변화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저는 제 다리가 잘린 것이 서러워 우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보석을 돌이라 하고 충심을 다하는 백성을 사기꾼이라고 하니 괴로울 뿐입니다."

문왕은 옥돌가공 장인에게 이 옥돌을 소중히 다루어 가공하라고 지시했다. 이 옥돌을 가공해보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석이 되었다. 이 보석을 변화(卞和)가 피눈물로서 만들 보석이란 뜻으로 화씨의 벽(和氏之壁 )이라고 이름지었다.

한비자는 이 일화를 말하면서 피눈물을 흘리는 자신의 모습을 생각했다. 한비자가 겪은 고통이란 것은 무엇이길래, 이 일화를 자신의 책에 남기고자 한 것일까?

  2. 한비자의 눈물 : <한비의 눈물(韓非之淚)>

한비자는 춘추전국시대의 강국들이 끝없는 전쟁을 계속한다면 결국 고통을 받는 것은 국민들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국가를 통일하기 위해 <참된 권력>을 가지고 백성을 위할 수 있는 강인한 군주가 나라를 통일해야 한다고 말했다.

즉, 속좁은 학자들이 말로만 떠드는 유가니, 묵가니, 명가니 하는 것들을 모두 없애야 한다고 말했다. 또, 농민들의 고혈을 빨아 유통의 이익만 남기는 상인들을 몰아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임금의 눈을 어지럽히며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는 관리들도 모두 죽여야 국왕이 백성을 위한 통일전쟁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비자의 저서인 '고분', '오두' 라는 책이었다.

중국 전체를 최초로 통일했던 진시황제는, 나라를 통일하기 전 한비자의 저서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내가 이 책을 저술한 한비자를 만날 수만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진시황은 초나라까지 사람을 보내어 한비자를 진나라로 데려왔다. 그리고 그를 곁에 두고 조언을 들으려고 했다.

진시황제가 재미있게 들었던 한비자의 이야기 중에 모순(矛盾)이라는 말이 있다.

어느 거리에서 창과 방패를 파는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이 창으로는 그 무엇도 뚫을 수 있습니다. 이 방패로는 그 무엇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러자, 지나가는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그럼 그 창으로 그 방패를 뚫어보시오. 어떤 결과가 나오던지 당신 말은 거짓말이 될 터이니..."

진시황제는 이렇게 그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들어면서 그를 옆에 두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한비자가 완전히 충성하는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높은 벼슬을 주지 않았다.

그러자, 한비자와 어렸을 때부터 같은 스승을 모시고 공부했던 이사가 한비자를 모함하기 시작했다. 한비자와 이사의 스승은 유명한 법철학자인 순자이다. 만약 진시황제가 한비자의 능력을 알아보고 그를 옥벽(玉壁 : 옥구슬)로 사용한다면, 이사와 같은 중신들은 2인자로 물러나게 될 것이다.

이사는 한비자가 초나라 출신이라는 지역주의를 물고 늘어졌다.

"한비자는 한나라 왕족과 연결된 자입니다. 지금 진시황제께서는 천하의 제후들을 통합하여 최초의 통일제국을 만들려고 하십니다. 한비를 등용한다 해도 한비는 결국 한나라를 위해 일할 것이고 진을 위할 사람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람이라면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다고 한비자를 한나라로 돌려보낸다면, 왕께서는 가장 큰 적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것입니다. 차라리 가장 가혹한 법을 적용하여 그를 죽여 버리십시오"

진시황제도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해서 한비자를 일단 감옥에 가두라고 하였다. 한비자는 진시황제를 만나기만 하면 자신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한비자는 결국 진시황제를 만날 수 없었다. 얼마 후, 이사는 한비자를 속여 한비자 스스로 독약을 먹게 만들어서 죽여 버렸다.

한비자는 화씨의 벽 이야기에서 초나라, 진나라 어디에서도 뜻을 펼 수 없었던 자신의 처지를 담아 이야기를 했다. 자신은 초나라 출신이었지만, 화씨와 같이 자신의 보석같은 정치 주장들을 초나라의 왕들은 '일상적인 시시한 이야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보석이 돌이라고 배척당하는 그 심정을 누가 알아줄까?

그리고 진나라에서도 그의 뜻은 끝내 펼칠 수 없었다. 평소의 한비자의 글 내용으로 보아, 감옥에서 '화씨의 벽' 이야기를 다시 읇조린 그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옥돌가공하는 장인은 옥을 식별할 줄 알아야 한다. 국왕은 누가 충신이고 누가 간신인지를 파악해야 성군이다. 허나, 증명되지 않은 돌이 보물이라는 것을 알아본 자는, 그 돌이 보물이 되는 순간까지 희생을 각오해야만 할 것이다.

한비자가 죽은 뒤, 어떤 일이 발생했을까? 진시황은 곧 한비자의 말이 옳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한비자를 감옥에 가둔 것을 후회하고 그를 사면하려고 했으나 한비자는 이미 죽고 없었다.

훗날, 진시황이 죽고 그의 아들 호해가 통일제국의 왕이 되자, 이사는 또 다시 2인자로 밀리지 않기 위해 환관 조고와 충성 경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에 패자는 이사였다. 이사는 자신과 한비자가 만든 가장 가혹한 형벌로 고통스럽게 죽게 된다.

얼굴에 상처를 낸 뒤 먹물을 바르고, 코를 베어 버리고, 발뒤꿈치를 자르고, 성기를 자르고, 마지막에 허리를 자르는 잔인한 5단계 형벌을 오형(五刑)이라고 하는데, 이 법은 이사와 한비자 등 법가 사상가들이 법을 지키기 않은 이들을 죽이던 잔인한 형벌이다. 이 형벌은 몸을 6토막 내는 육시(六屍)와 함께 가장 잔인한 형벌인데, 당대 법가사상가들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자신이 만든 이런 형벌들로 죽음을 당하곤 했다.

욕중에 육시럴~ 이라는 욕이 있다. 이 욕이 얼마나 잔인한 욕인지 이젠 상상이 가는가?

이사를 죽인 조고에게도 유명한 일화가 있다. 조고는 이사를 죽인 뒤, 호해 황제마저도 두렵지 않았다. 어느 날, 조고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자를 고르기 위해 황제에게 사슴을 보여준 뒤 '이것은 말이다'라고 말하게 하였다. 이것에 반대하거나 분개한 사람들을 기억해 두었다가 모두 죽이게 되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지록위마(指鹿爲馬)라는 고사성어이다.

  3. 인상여의 일화 : 완벽(完璧)하다의 어원

다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서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하기 전 춘추전국시대로 돌아가보자.

한비자가 일화로 남긴 <화씨의 벽>이라는 보물구슬은 무현이라는 사람이 보관하고 있었는데, 조나라의 혜문왕이 무현을 협박하여 이 보물을 차지하였다. 이 보물은 워낙 유명한 것이라서인지 조나라가 이 티하나 없이 푸른(완벽 : 完璧) 구슬을 가졌다는 소문이 전국에 퍼졌다.

당시, 전국시대의 강대국으로 훗날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했던 '진나라'는 소양왕이 다스리고 있었다. 진나라왕은 화씨의 벽을 갖고 싶어서 조나라에게 성 15개와 보물을 바꾸자고 제안하였다.

예로부터 분수에 맞지 않는 보물을 가지고 있으면 항상 화근이 밀려오곤 했다. 만약 조나라가 보물을 주지 않으면 보복공격을 당할 것이다. 그렇다고 보물을 줘도 진나라는 강한 나라이므로 성 15개를 준다는 약속을 지킬리가 없었다.

조나라왕은 여러 신하들의 추천을 받아 인상여라는 식객에게 진나라에 가서 협상을 하고 오라고 했다. 식객(食客)이란, 높은 사람의 집에서 밥을 얻어먹으면서 조언을 해주는 밥손님을 말하는데, 인상여는 조나라왕의 충신 류현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밥을 얻어먹었던 인물이었다.

인상여는 진나라 왕에게 완벽(完璧)한 보물을 넘겨주었다. 하지만 진나라왕은 보물만 받고 성 15개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럴 것이라고 미리 짐작한 인상여는 이렇게 말했다.

"그 벽은 완벽(完璧)한 구슬같지만 사실 한군데 희미한 티(불완벽)가 있습니다. 저에게 주시면 그 것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구슬을 돌려받은 인상여는 기둥 근처로 이동한 뒤 왕을 쏘아보고 이렇게 협박하였다.

"왕은 어찌 귀국과의 정의를 지키지 않고 벽만 가지려 하시오. 이제 벽은 이 사람의 수중에 되돌아왔소. 만약 3일 안에 성 15개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내 머리통과 함께 이 벽도 기둥에 부딪혀 깨질 것이오"

왕은 구슬이 깨질까봐 무서워 성 15개를 준다는 약속을 하였다. 그러나 그 약속도 거짓임을 안 인상여는 시간을 질질 끌다가 부하를 통해 구슬을 조나라로 보내 버렸다.

진나라 왕은 괴쌤했지만 이미 구슬은 사라진 뒤였다. 그리고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구슬을 빼았을 수도 있었다. 진나라 왕은 인상여의 지혜가 뛰어남을 알고 그를 정중하게 대접한 뒤 무사히 조나라로 돌아가게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실수였다고 할까? 이 인상여가 바로 훗날 장군 염파와 함께 문경지교를 맺어 조나라를 강대한 국가로 만든 인물이 된다. 그리고 진나라는 그만큼 통일정책이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4. 인상여의 일화 : 문경지교(刎頸之交)

인상여는 싸움을 잘하는 인물이 아니였다. 그렇다고 가문이 좋거나 특별히 학식이 뛰어난 인물도 아니었다. 그러나 IQ가 낮으면, EQ라도 높으라고 했던가? 그는 정서지능이 높고, 순간 판단력이 빠르며 정의감이 높고 충성심이 강한 인물이었다.

화씨의 벽을 찾아온 일로 벼슬을 시작한 인상여는 이후에도 진나라왕이 조나라왕을 괴롭히는 순간마다 특유의 재치와 말주변, 빠른 상황파악으로 왕을 도와주었다. 그 결과 인상여는 조나라의 이름난 장군인 염파보다도 더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염파인상여가 맘에 들지 않았다. 염파는 죽음을 각오한 수많은 전투를 하면서 나라를 지킨 인물이고, 인상여는 겨우 말 몇마디로 더 높은 자리에 오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염파는 들으란 듯이 이렇게 말하고 다녔다.

"언젠가 내가 인상여를 만난다면 꼭 수치를 안겨주고야 말리라"

이 이야기를 들은 인상여는 염파를 피해다녔다. 조정에 그가 나오면 병이라 핑계대고 집안에 숨었고, 길에서 가마나 수레가 마주칠 것 같으면 길을 피해갔다. 상황이 이러니, 인상여를 모시던 제자들도 인상여를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묻기 시작했다.

"우리는 선생님의 높은 뜻을 사모했는데, 지금 선생님은 염장군을 두려워만 하십니다. 백성들도 아는 수치를 선생님만 모르십니까? 저희는 참을 수 없으니 떠나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나 인상여가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우리 조나라의 염파 장군과 진나라왕 중에 누가 더 무서울까?"

"그야 강대국인 진나라의 왕이 더 두렵지요"

그러자 인상여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진나라 왕 앞에서도 당당했고 오히려 그를 면박주었다. 내 아무리 못났어도 염파 장군이 무서워서 피하겠는가? 그러나 생각해보라. 강대국인 진나라가 화씨의 벽을 빼았는다는 핑계를 대면서도 우리를 공격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염파 장군과 나 인상여가 둘다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 기둥이 싸워서 하나가 쓰러지면 어찌 되겠는가? 내가 염파 장군을 피하는 것은 국가의 보존이 첫째 사명이고, 개인의 수치스러움은 뒤의 일이기 때문이다"

이 말을 들은 염파 장군은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인상여의 집에 머물고 있는 식객에게 부탁해서 그를 만난 뒤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무 어리석은 탓에 선생님의 관대한 뜻을 몰랐습니다. 진심으로 사과하니 나를 친구로 받아주시지오"

그 후, 그 둘은 '친구를 위해서는 목이 잘리더라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문경지교(刎頸之交)를 맺고 조나라를 지켰다고 한다.

- 사기 열전 한비자, 인상여 中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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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벌전 : 누구의 영향력이 더 클까?

칼 포퍼 VS 토마스 쿤 제 2부 : 진보와 다른 관점의 패러다임

- 제 2부 서문 : 칼 포퍼의 위대한 보수 정신

요컨데 칼 포퍼는 자신의 과학이론을 이용하여 자신의 사회 이론까지 정당화한 인물이다.

과학이란 논리나 실증과 다르게 <검증>할 수 있는 학문이라고 규정한 포퍼는 역사에서도 어떤 상황에서 어떤 특수한 조건이 성립되면, 법칙적으로 당연한 결과를 가져온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것은 검증할 수 있는 <과학적>인 것이었다.

예를 들어 국왕이 무능이 불안하면 <혁명>이 발생한다는 법칙이 있다. 그 법칙은 여러 혁명을 통해 증거가 쌓여서 알게 된 것이 아니다. 일단, 하나의 혁명에서 왕정의 무능력, 지배층의 부패, 경제적 불안감, 농민들의 불만 등등 여러 가설들을 주장한 뒤 그것이 진정한 원인이거나 원인이 아니라는 <반증>이 가능한가를 시험하고,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법칙에 다가가는 것이다. 즉, 과학이든 역사든 모든 주장과 이론은 엄격한 비판적 시험에 맡겨져서 검증받아야 한다. 이렇게 <검증> 또는 <반증>이 가능한 것이 과학이며, 역사 또한 예외가 아니기 때문에, 과학적 검증 절차가 필요한 것이다. (이 이야기를 나열한 대표적인 저서가 바로 <추측과 논박>이라는 유명한 책이다.)

그럼 이런 검증과 절차를 통해 발전한 역사적 결과물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서구 사회의 윤리>였다. 칼 포퍼는 <인간의 정신으로 세상은 진화한다>는 계몽주의적 역사관을 긍정하였다. 또, 다윈의 진화론을 인정하면서 사회 역시 진화한다는 것을 믿었던 인물이다. 역사는 올바른 인물들의 건전한 윤리 정신과 보수의 도덕심으로 발전하고 진화한다. 그 진화의 정점을 찍은 나라는 <미국>이다. 따라서 포퍼는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자본주의 정신에 우호적이고, 사회주의자들에 대해서는 적대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이 등장하다.

포퍼가 제국주의 시대의 위대함을 보고 자란 보수성향의 인물이라면, 토마스 쿤은 세계대전 속에서 실존주의와 사회주의적 사고 방식을 접하면서 자란 인물이다. 그는 과학적 업적이 계속 쌓여가며, 과학은 진보한다는 포퍼의 이론에 의구심을 보였다.

먼저 그의 초기작인 <코페르니쿠스 혁명>에서 그는 코페르니쿠스의 과학적 이론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지구가 돈다>라고 주장한 그의 업적이 얼마나 혁명적이면서도, 또한 보수적인지에 대한 사상 검증을 시도했다. 그리고 과학혁명의 구조 서문에서 이렇게 이야기 했다.

<역사라는 것이 연대기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고 할 때, 그 이미지는 ... 주로 고전적 서적들이나 연구자들 자신에 의해 그려진 것이다. 본 논문은 그것들이 우리의 이해를 얼마나 왜곡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과학이 객관적 지식이며, 인류의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발전하고 있다는 포퍼의 과학관을 부정했다. 과거의 업적들이 쌓이고, 진화한다고 믿는 것, 누군가를 <계몽하고 교육할 절대적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자기 오류일 뿐이다. 아울려 기존의 것을 지키고 발전시켜 가는 것이 <사명>이라고 믿는 것은, 기득권자들이 가진 가장 위험한 발상의 한 단면인 것이다.

그는 과학의 역사에 <패러디임>이라는 것을 도입했고, 그 후 그의 이론은 과학사 뿐 아니라 사회의 모든 분야에 큰 파급을 주었다. 그럼 토마스쿤이 주장한 패러다임이라는 것을 무엇일까?

원래 패러다임(paradigm)은 <다양한 관념을 묶어주는 체계>를 말하는데, 그리스어로 패턴, 모델, 전형 등을 의미하는 파라테이그마(paradeigma)을 영어로 바꾼 말이다. 토마스 쿤은 이 단어를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라는 뜻으로 사용했다. 즉, 문제를 보고, 문제를 접근하며, 문제를 풀어가는 방법을 모두 묶어 패러다임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토마스쿤은 이 문제풀이 방식이 모든 인문, 사회, 과학에 적용되는 연구 방법이라고 말했다. 만약, 기득권을 가진 하나의 이론에 심각한 오류가 생긴다면 기득권자들은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은 그 이론의 문제점을 더 크게 부각시키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 결과 새로운 이론이 등장하는 데 이것이 바로 <새로운 패러다임>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패러다임이 교대하면서 하나의 과학 혁명이 발생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만 과학의 역사란 일관적으로 연구 성과가 축적되고 진보하는 역사가 아니다. 문제가 있을 때마다 새로운 이론이 등장해서 패러다임이 교대한다. 역사로 본다면, 하나의 공동체에 심각한 균열이나 오류가 생길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방법을 찾게 된다. 그 새로운 대안은 <혁명적 이론>이 될 수도 있고, 새로운 <시대정신>이나, 사회적 <대세>가 될 수도 있다.

이 이론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도 바꾸어 놓았다. 현대 이전의 모든 역사가들은 역사는 <인과 관계> 속에서 진행된다고 믿었다. 포퍼는 특정한 사건은 어떤 원인에 의해서 발생하며, 그 결과는 법칙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했다. 포퍼를 반대하는 역사가들 역시 인과관계는 인정했다. 특정한 역사는 커다란 사회 구조 속에서 어떻게든 관련을 맺고 있거나, 원인과 결과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믿었다. 만약 개인의 역사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역사상과 사회성을 무시한 역사는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패러다임> 이론은, 지금까지 연속적으로만 여겼던 개인과 사회의 역사를 비연속적인 다양한 문화가 <병렬적으로 묶어서 이루어진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어떤 역사적 사건은 법칙적으로 설명할 수도 없고, 특정한 원인이 전부라고 설명할 수도 없다.

예를 들어 프랑스 혁명의 원인이 <바스티유 감옥의 습격>이라면 말이 안된다. 그것은 혁명을 상징하는 하나의 사건일 뿐이지, 감옥을 습격하지 않았어도 혁명은 일어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구제도의 모순>이 혁명의 원인이라는 점도 혁명을 전부 설명하지 못한다. 귀족과 부르조아의 대립 뿐 아니라, 상인과 농민의 대립, 자본가와 소시민의 대립, 왕권에 대한 불신과 국제 전쟁, 나폴레옹의 등장 등 수많은 크고 작은 원인들이 있을 것이다.

즉, 프랑스 혁명은 수많은 이유들이 존재하며 이런 이유들이 <병렬적>으로 묶여서 발생한 것이다. 어느 이유가 근본적인 이유이며, 어떤 사건이 발단이라는 것은 역사가들이 멋대로 적어놓은 것이다.

이 이론이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가치를 갖게 된 것은, <포스트모던 역사학>과 상호작용을 했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던은 역사를 발견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과거의 어떤 자료를 발견하고 그것을 진리로 여기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 텍스트(문서)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역사는 그 문서를 가지고 해석하는 사람들의 역사이다. 역사가가 100명이면 100개의 역사가 나와야 정상이다. 또한 그 100개의 역사를 100명의 독자가 읽었다면 그것을 인정하고 부정하는 것, 또한 저자의 숨은 의도를 알거나,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는 것도 독자의 몫이다. 즉, 역사는 접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따라서 역사는 발견이 아니라 <발명>이다.

과학에서의 패러다임은 역사로 넘어와서 역사의 <다양성>을 옹호하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 포퍼의 자본주의적 윤리정신과 맞선 토마스 쿤의 사회주의 이론

포퍼가 계몽주의적 발전과 과학적 진보를 주장했다면, 토마스쿤의 과학적 패러다임은 기존 이론에 대한 새로운 이론의 등장과 또 다른 교체에 대한 변화 과정을 사회주의적 시각에서 <변증법>으로 설명하였다.

어느 한 시대가 존재한다면, 그 시대를 풍미하는 과학이나 역사, 시대정신이 존재한다. 토마스쿤은 기득권을 가진 과학을 <정상과학 Normal Science>이라고 말한다.

원래 초기에는 세계를 보는 방법과 연구방법의 차이 때문에 과학자들이 자신들의 주장이 옳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 물이냐, 불이냐, 흙이냐 등으로 학파를 만들었지만 완전히 이질적인 학문은 아니었다. 그 중에서 그 현상을 포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이론이 주류 이론이 되어서 <정상과학>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세상은 물, 불, 흙, 바람 등 4원소로 이루어졌다는 이론이 다른 이론을 포괄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정상과학은 100% 완벽하지는 않다. 이것은 당대의 다른 이론을 포괄할 수 있거나 장점이 많기 때문에 주류가 된 것이지 모든 현상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기득권을 가진 정상과학이 되면, 새로운 현상에 도전하기 보다는 기존의 이론이나 기득권을 옹호하는 데 더욱 힘을 쓰기 마련이다.

기득권이란 퍼즐 풀이와 같다. 어떤 문제라도 기존의 이론에 대입하고 조각을 맞추어서 문제를 풀어 버리면 되기 때문에, 기득권자들은 어떤 문제든지 퍼즐안에 집어넣고 자신들의 규칙 속에서 해결하려고만 한다. 만약 기득권의 패러다임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한다면 그것은 과학자의 실수이거나, 역사학자의 잘못된 연구결과이거나, 종교학자의 이단 발언과 같은 경우로 취급된다.

그런데, 기존 정상과학의 방법, 즉 <패러다임>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가 나오면 상황은 달라진다. 이상하게도 기존 이론과 모순되는 법칙이 계속 나오면, 사람들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인식을 하게 된다. 그리고 변칙적인 상황 때문에 패러다임의 역할을 부정하게 된다면 사건은 커지게 된다.

쿤은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과학자들이 새로운 패러다임을 받아들인다고 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코페르니쿠스, 뉴턴, 아인슈타인과 같은 혁명적인 이론가들의 이론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새로운 패러다임은 낡은 패러다임의 연장선이 아닌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을 <비누적적인 발전과정>이라고 한다. 즉, 패러다임의 변화는 가장 기초적인 이론의 일부까지 변화시켜서 새로운 이론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이론은 낡은 이론에 비해 우월한 것일까? 토마스쿤은 기존의 이론과 새로운 이론은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비교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렇게 서로 다른 개념 사이에 우열을 비교할 기준이 없는 것을 공약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라고 하는데, 이전 기득권과 새로운 기득권은 공약불가능성을 갖는다.

예를 들어 천주교의 이론에 모순이 많다고 개신교로 개종한 사람이 있다. 그럼 개신교는 모순이 없을까? 그리고 두 종교간에 우열을 가릴 수 있을까? 즉, 새로운 기득권이란 일종의 종교 개종 행위와 같다. 종교의 다양성처럼 이론의 다양성은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번의 과학혁명으로 기득권 이론이 바꾸어도 진보는 없는 것일까? 역사로 따진다면, 역사에서의 발전이란 명제는 사라지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쿤은 발전이란 특정한 목표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전의 기득권은 그 범위 안에서 이루려는 목표가 있었다. 그러나 해결할 수 없는 모순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하면, 새로운 패러다임에서 이루려는 목표가 존재한다. 그 목표는 차분히 이루어지기 때문에 어느 시대의 어느 패러다임이든지 올바른 목표가 설정되는 한 발전이란 가능한 것이다.

- 변증법 패러다임의 역사적 활용

토마스쿤은 과학 혁명의 구조를 변증법으로 설명하였다. 어느 한 과학이 체계를 잡기 전의 전과학의 단계에서 기득권을 잡은 과학이 정상과학이 된다. 그런데, 정상과학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새로운 과학이 등장한다. 즉, 정상과학(정) - 위기(반) - 새로운 과학(합)의 구조가 성립되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이론도 영원히 완벽하지 않는 한 또 다른 위기에 의해 새로운 과학으로 변하게 된다.

역사에서는 <시대 정신>이라는 것으로 패러다임 이론을 수용하였다. 역사를 이끌어가는 주체들은 옳고 그름을 떠나서 자신의 신념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곤 한다. 그것을 넓게 보면 이념(이데올로기)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의 이념은 수많은 이론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또 개인이나 지도자의 신념도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들 중에 하나에 불과하다. 그 무엇도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 없으며, 악한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역사는 항상 연속적으로 발전하며 진보한다는 것도 역사를 이끌어가려는 사람들의 편견에 불과하다. 역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원인과 결과들이 난립해서 구성되었고, 어느 특정한 이론이 완벽하다는 것도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착각일 뿐이다.

단지, 하나의 시대에는 그 시대를 상징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시대 정신>이 있고, 그것을 기준점으로 우리는 역사를 바라보고 구성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시대의 중요 정신이 무엇이었는지 판단하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몫이다. 특히 정치, 경제, 문화, 민중 등 다양한 키워드를 통해서 본다면 어느 하나 뒤쳐지는 <시대 정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토마스 쿤은 과학과 역사의 유사점을 이렇게 말한다. 정치혁명이 시작될 때 정치 집단 중에서는 기존의 제도로 새로운 사회 상황을 해결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느낌이 대중에서 확산될 때, 사회 변화는 가속한다. 과학 역시 그 느낌은 마찬가지다.

또한 정치나 역사에서의 혁명이란 기존 제도를 금지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지만, 그것은 기존 제도를 염두에 두고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제도를 만들기 위해 기존의 제도를 폐기하는 과정에서 공백기가 생기며, 그 공백기에 위기를 느낀 사람들은 새로운 틀을 만들기 위해 당파를 만들고 다양한 의견을 만들어간다.

그 결과 혁명에서 혁명에서 승리한 이들이라고 할지라도 대중을 설득하고 정당성을 계속 광고한 이들이 주도권을 잡게 된다. 그들이 바로 역사 혁명의 승리자들이라고 말이다. 과학 역시 최후의 승리자는 역사의 승리자와 마찬가지의 인물들이다.

원래 포퍼와 토마스 쿤의 이론은 과학적으로 논쟁이 되는 부분이다. 그 논쟁은 <현대과학철학 논쟁>이라는 책에 잘 나와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이 둘의 생각의 차이점과 역사관의 차이를 중심으로 다른 점을 나열해보았다. 역사에서의 법칙을 찾고, 건전한 정신을 강조한 포퍼와 패러다임이라는 관점을 통해 역사의 변화를 강조한 토마스 쿤.... 이 둘은 과학을 넘어 역사철학에서도 큰 영향을 준 인물들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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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벌전 : 누구의 영향력이 더 클까?

칼 포퍼 VS 토마스 쿤 : 역사이론에 큰 영향을 미친 두 과학자들

- 위대한 <과학자>들의 이야기

오늘 전개할 이야기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역사철학에 너무 지대한 영향을 미친 두 <과학자> 이야기이다.

바로 20세기 최고의 지성인이라는 <칼 포퍼>와 과학사 뿐 아니라 모든 인문과학분야에 <패러다임>이라는 명제를 던진 <토마스 쿤> 이야기이다. 그럼 두 인물의 상반된 이론을 이해해보고, 후대 역사학자들이 왜 이들의 이론을 역사에 수용할 수밖에 없었는지 알아보자.

칼 포퍼가 1902년, 토마스 쿤이 1922년에 태어났으니까 두 학자는 20년의 차이가 있다. 그래서인지 토마스 쿤이 이미 <유명한 이론가>였던 칼 포퍼의 이론을 반박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칼 포퍼가 전성기를 누렸던 시기는 서양의 제국주의 시기였다. 그래서인지 칼 포퍼는 관용이나 열린 사상과 같은 것을 강조하면서도 그것이 서구적인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에 긍지를 가지고 있었던 듯 하다. 하지만, 두 철학자의 역사관에서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바로 19세기 사상에 대한 <수용>이라고 볼 수 있다.

토마스 쿤은 학창시절부터 사회주의에 빠진 인물이다. 노동운동이나 자본에 따른 사회의 변화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었는데, 그 학창시절이 바로 <세계 2차대전> 중이었다. 반면, 칼 포퍼는 제국주의를 직접 경험한 세대인 만큼 서구의 미덕과 도덕정신을 자랑스럽게 여겼고,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라는 유명한 저서에서도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반감을 보였던 인물이다.

여기에서 두 철학자의 핵심 이론의 배경이 엇갈리기 시작한다. 칼 포퍼는 스스로 <계몽주의>자이기를 원한 인물이다. 그는 문명국가인 서구사회가 미개한 <비문명사회>를 개화해야 한다고 생각한 듯 하다. 그리고 그 서구사회의 길잡이는 <미국>이라고 생각한 듯 하다. 그의 글에는 미국과 서구에 대한 자부심이 많이 들어가있다. 어떤 경우에는 역사가 특정한 법칙과 사회진화사상에 따라 <발전>한다는 담론까지 제시하기도 한다.

반면, 토마스쿤은 <계몽사상>을 인정하지 않는다. 아예 더 나아가 과학이 우리에게 진리를 제공하고 진보를 준다는 생각자체를 오류라고 말해 버렸다. 그래서 토마스쿤은 기존의 과학이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상이 기존의 사상을 대체한다고 말해 버렸고, 그것을 <패러다임>이라고 부른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큰 영향을 준 19세기 최고의 사상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1850년대 동시에 등장한 혁명적인 이론 2가지였다. 하나는 바로 다윈의 진화론이 포함된 <종의 기원>이라는 과학사 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다. 또 하나의 책은 사회주의의 아버지 마르크스의 역작 <자본론>이었다. (마르크스는 종의 기원과 자본론이 같은 시기에 출판된 것을 두고, 최고의 역작들이 동시에 탄생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칼 포퍼는 마르크스는 철저히 비판했고, 진화론은 사회진화론으로 어느 정도 수용했다. 반면, 토마스쿤은 과학이론에서의 진화는 불신했고, 마르크스가 주장한 <변증법>은 어느 정도 인정했다. 토마스 쿤이 주장한 <패러다임 이론>은 사회현상이 일반적으로 발전한다는 것이 아니라 <정-반-합>의 과정을 거치면서 전혀 새로운 사회나 문화로 변한다는 것이었다.

자 그럼 이 두 과학자를 왜 역사 이야기에서 다루는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이들의 이론이 과학 뿐만 아니라 정치, 문화, 역사, 사회 전반에 너무나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역사철학에서도 이 두 학자의 이론을 완전히 배재한 채 역사적 현상을 설명하기가 버겁다.

그럼 먼저 <칼 포퍼>의 이론과 역사철학을 한 번 볼까?

- 칼 포퍼와 <과학적 검증>

19세기 독일의 랑케를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랑케가 <역사학>을 다른 인문과학분야에서 독립시켰기 때문이다. 랑케는 국가의 공적인 자료들을 가지고 있는 그대로 해석해서 과거의 사실을 밝히는 것을 역사학이라고 말했다. 역사학은 역사가의 편견이나 해석이 들어가서는 안된다고도 말했다. 과거의 정치, 제도, 문화를 밝히는데 있어서 편견이 들어간다면 그것은 정치학이나 사회학이 될 것이다. 역사학의 임무는 <과거> 그 자체의 본질을 밝히는 것이다.

그럼 과거 그 자체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가장 명확하게 밝히는 방법은 무엇일까? 20세기 역사학자들은 그 기준을 세우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했다. 그리고 랑케의 역사학을 넘어서서 다양한 시도를 하기도 한다.

프랑스의 아날 사학자들은 인간의 역사를 아주 오랜 기간동안 관찰하면서 일상적인 부분에서 이루어지는 변화까지도 심층적으로 분석하였다. 그리고 그 인간들이 한 사회 속에서 어떻게 변화하고 대처하는지에 대한 법칙을 찾고, 전체적인 역사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지중해의 어떤 섬에 인간이 살게 된다면 그 인간은 스스로 판단하여 생활하게 된다. 하지만 다양한 시도와 과정을 거친다고 해도 그 섬의 모든 인간은 낚시를 하거나 사냥을 하면서 의식주를 해결하게 된다. 결국 그 섬에 사는 인간들은 일정한 패턴을 공유하게 된다는 것이다.

독일의 사회구조사학자들은 인간이 역사 속에서 만들어 온 모든 유산들을 하나의 인과관계로 만들어서 구조화시키려고 했다. 예를 들어, 머리모양의 역사, 방부제의 역사와 같은 시시한 것들도 하나의 역사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머리카락의 역사가 어떻게 변해왔는지 과거부터 현재까지 밝혀낸 뒤 원인과 결과를 정리하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가 무엇을 밝혀야 하고, 어떤 방법을 활용해야 하는지는 역사학자들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칼 포퍼>의 과학 법칙을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칼 포퍼>는 <논리주의> 또는 <경험주의>와 과학은 완전히 다른 것이라면서 <과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

예를 들면, 근대인들은 점성술을 믿거나 신에 대한 믿음, 별자리와 같은 것을 통해서 운명을 알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 있었다. 칼 포퍼는 말한다. <신은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인간이 아니라고 증명할 수 있는가? 당연히 증명할 수 없다. 따라서 <신의 존재>는 과학이 아니다.

과학이 되려면 제일 먼저 그것이 아니다라는 <반증>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신>은 증명도, 반증도 할 수 없다. 그렇다면 과학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반증가능성>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신>이 무의미한가? 그렇지 않다. 신을 믿는 사람은 그 마음에 따라 행동한다. <교회에서는 불경이 아니라 찬송가를 부른다>는 증명할 수 있다. 따라서 <신>은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지만, 신의 존재가 무의미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논리나 경험만을 따지는 <논리학, 경험주의, 실증주의>에서의 신은 과학도 아니고, 의미도 없다. 그러나, <과학>에서는 신이 과학은 아니라고 해도 <의미>는 있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건전한 보수주의자이자, 서구학자인 포퍼의 <도덕적 논리>인 것이다.

반면, <앞으로 비가 올 것이다> 라는 명제가 있다고 하자. 이건 <과학>적인 것일까? <논리주의>에 따르면 이것은 맞는 명제이다. 비는 언젠가 올 것이니까.... 하지만 포퍼는 이것이 과학이 아니라고 말한다.

첫째, 이것은 과학을 모르는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초등학생도 비온다는 말은 할 수 있다. 단지, 그게 장마철에 올지, 3년 뒤에 올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둘째, 이것은 <반증>이 안된다. 앞으로 천년간 비가 안왔다고 해서 저 명제가 틀릴까? 아니다. 만년 뒤에, 혹은 백만년 뒤에 비가 올 수도 있다. 따라서 지구가 망하지 않는 한 영원히 증명이 안되기 때문에 이런 말들은 과학이 안되는 것이다.

즉, 포퍼에게 과학이란 <100% 완벽하게 검증>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럼 검증이란 어떻게 해야 과학이 되는 것일까?

카르납이라는 과학자가 검증이란 <확률>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최고의 투수가 연속으로 스트라이크를 1000개를 던졌다. 그럼 100% 검증은 못하더라도 저 투수는 다음 번에 스트라이크를 던진다는 법칙은 거의 맞을 것이다. 즉, 신뢰도가 무지 높아지기 때문에 검증이 곧 <확증>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포퍼는 아니라고 말한다. 아무리 만개의 스트라이크를 던져도 반증가능한 확률이 0.00001% 만 있다면 그것은 거짓이기 때문에 <확증>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자 논리를 중요시하는 <햄펠>이라는 실증주의자가 이렇게 말했다. 그럼, 과학적 명제나 지식을 일상적인 언어가 아니라 기호(원자명제)로 바꿔서 번역해 버리면 <확률적인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말이다. 예를 들면 <수소와 산소가 만나면 반드시 물이 이루어진다.>는 100% 확증일 수 없지만, <H2 + O = H2O> 라고 과학적으로 바꿔 버리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포퍼는 말한다. 그것은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어떤 과학적 실험에서 <반증>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과학인가, 아닌가>를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즉, 포퍼가 생각한 과학이란 <100% 완벽한 검증>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검증의 문제를 놓고 포퍼와 햄펠이 격론을 벌였는데, 여기서 바로 <역사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라는 난제를 중점적으로 살펴보자.

- 칼 포퍼와 <역사의 법칙>

칼 포퍼는 위에 언급한 역사학의 아버지 <랑케>의 연구방법이 역사의 핵심을 밝히는데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랑케처럼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원문을 번역하듯이 밝혀놓기만 하면 어떤 역사가 중요하며, 그것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밝혀낼 수 없기 때문이다. 역사는 원인과 결과를 명확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안에 어떤 법칙이 숨어있으며, 그것이 정당한지를 판단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포퍼는 역사학을 자연과학과 같은 것으로 보았다. 자연과학이 <100% 옳은지 검증>할 수 있는 것들을 밝히는 학문이라면, 역사학은 어떤 과거의 사건들을 전후관계(인과관계)를 따져서 100% 법칙으로 규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자 그럼, 알기 쉽게 포퍼가 생각한 법칙을 정리해보자.

조건(Control) : 2월 혁명의 원인은 왕정의 무능력함이었다.

법칙(Low) : 지배층이 무능력할 경우 혁명은 발생한다.

결과(Effect) : 2월 혁명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포퍼는 어떤 조건이 제시되었을 때, 그것이 역사법칙과 맞아떨어진다면 100% 결과가 도출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20세기 사회과학이 발달하면서 역사를 규칙 속에서 바라보려는 역사학의 분위기와 맞아떨어진 이론이었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이와 비슷한 조건이 있었는데도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경우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포퍼는 간단히 말한다. 법칙에 해당하는 어떤 조건이 빠진 것이라고.... 한마디로 빠진 걸 알아서 잘 찾아보라는 이야기다.

그러자, 햄펠이 포퍼의 이론에 바로 반박하였다. <미국독립혁명>과 같은 경우에는 프랑스 혁명의 원인과 상관없는 <조세문제, 식민지 문제> 등이 혁명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역사를 설명할 때는 굳이 어떤 법칙이나 증거를 들이대지 않고, 원인과 결과만 나열하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은 법칙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자신에게 <유리한 조건> 또는 <가장 합리적인 이유> 때문에 움직인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프랑스 2월 혁명에서 지배층들은 왕정의 무능함으로 많은 피해를 보고 있었다. 피지배층들은 왕정의 재정파탄으로 생계가 어려웠다. 그들이 정상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혁명을 일으키는 게 맞다는 것이다.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 가만 있다가 피해를 보는 것보다 훨씬 <합리적>이기 때문에 혁명은 당연한 것이라는 내용이다.  햄펠은 과학적 <기호>를 이용하여 이런 공식을 만들어낸다.

a : 지배층 / b : 피지배층 / c : 왕정의 무능 / d : 혁명

c라는 상황에 직면한다면 a + b는 아주 은 률로 d라는 결과를 만들어 낸다.

포퍼는 햄펠의 기호논리에 대해 부인한다. 기호를 이용한 수식은 <과학>적이지 못할 뿐더러, 100% 확증이 없이 <확률> 일어날 수 있는 상황에 대한 것은 아무 것도 <증명> 하거나 <반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주 높은 확률>은 실험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어느 정도가 높은 확률인지 증명을 할 수 없지 않는가?

위에서도 계속 말했지만 포퍼의 핵심 주장은 <반증>이 가능한가였다.

하지만 포퍼의 주장에는 문제가 있었다. 역사라는 학문은 인간의 과거를 다루는 데, 과연 100% 확고한 법칙으로 역사를 설명할 수 있을까?

포퍼는 여기서 한발 물러난다. 모든 역사적 사실을 100% 법칙으로 증명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가 법칙으로 생각한 것은 누구나 너무나도 당연해서 법칙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그런 것들이거나, 당연히 법칙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걸 증명하는 과정이 난해해서 대부분 그냥 넘기는 그런 법칙들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천동설을 주장하는 교회세력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이는 종교재판을 받았다.> 라는 내용이 있다. 여기에는 너무나 당연해서 빠진 법칙이 있다.

<기득권 세력에게 위협을 줄 수 있는 언행을 하면 제재를 받는다> 라는 법칙이 있지만, 너무 당연해서 그냥 원인과 결과만 설명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 칼 포퍼의 <계몽주의>

자, 그럼 칼 포퍼의 역사이론을 통해 <역사를 어떻게 이야기하는가?>를 살펴보자. 포퍼는 역사를 이야기할 때 하나의 사건은 반드시 하나 이상의 법칙들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 법칙들은 반드시 선후관계(인과관계)를 가진다고 믿었다.

나폴레옹이 황제가 된 것도 러시아에 진격한 것도 반드시 그 원인이 있었고, 그에 따른 결과가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역사에서 필연적으로 이루어지는 법칙에 따라서 이루어진 것이다.

20세기 사회는 19세기 서구 문명이 이루어낸 문명 이기의 총합이다. 산업혁명과 계몽주의라는 조건(Control)이 있었고, 진보한 문명은 반드시 성공한다는 법칙(Low)이 있었다. 그 결과 서구사회는 진보의 정신으로 발전해왔다. 아프리카 등 제 3세계는 같은 조건과 법칙을 적용하여 서구 문명과 같은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고 생각한 듯 하다. 다윈이 생명체의 세계에서 진화의 법칙을 찾아냈듯이 서구사회는 다른 사회에 그러나 이러한 진화를 전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 주의와 파시즘적 공산주의는 그러한 진보의 과정에 걸림돌이라고 생각하였다.

결국, 칼 포퍼는 자연과학이든,사회과학분야에서든, 역사에서든 변화와 발전에는 법칙이 있으며, 그것의 결과로 사회는 발전해나간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 포퍼의 과학연구가 <과학이 역사적으로 전개해 온 방식>과 전혀 다르다고 생각한 학자가 있다. 그는 과학의 역사를 살펴보았더니 변화나 발전이라는 말보다 <전환>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고 말했다. 그는 과학에서 법칙을 찾으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다양한 <다른 세계>들이 공존한다고 말하였다.

토마스쿤은  이런 주장들을 묶어 <패러다임>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그 용어는 과학사 뿐 아니라 모든 인문사회과학과 역사학에서도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잡았다. 그럼 다음장에서 토마스쿤의 이야기를 전개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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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고사여행

양상군자(梁上君子) : 대들보 위의 군자

1. 청의가 사라지고, 탁한 자들이 설치니...

때는 후한 말, 삼국지에 원소가 지방 호족으로 등장했던 그 시기의 이야기이다.

당시 중국은 중앙과 지방이 모두 혼란한 시기였다. 중앙에서는 환관이 득세하여 왕권을 농락하고, 대의정치를 외치는 지식인들을 옥에 가두고 있었다. 당시 지식인들은 <청의 운동>이라고 하여, 혼탁한 환관들을 모두 죽이고 깨끗한 정치를 외치곤 했지만, 환관들에 의해 제거 당하곤 했다.

지방에서는, 중앙과 별도로 세력을 가진 <호족>들이 등장하였다. 호족들 중에는 환관들을 척결하고 <한나라 왕실>을 지키자는 <청의파>들도 있었다. 반면, 원소나 조조와 같이 자신의 영지와 군사력을 통해 한나라 왕실에 무력을 보여줌으로서 세를 늘리려는 세력도 있었다.

세상이 흉악하니, 농민들은 살기가 힘들었다.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었고, 전쟁이 나면 그나마 땅마저 황폐해질 뿐이었다. 화적이나 도적이란, 원래 <먹고 살기 힘든 농민> 들이 변심한 것이다. 즉, 도둑은 국가의 책임이지 않겠는가?

2. 양상군자(梁上君子) : 대들보 위의 군자

궁중에 환관들이 설쳐대고, 한나라는 점점 망해가고 있었다. 유학을 받드는 지식인들은 환관들에게 잡혀가 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태구현의 <현령> 진식이라는 사람도, <청류파>들을 잡아죽이는 사건에 연루되어 잡혀갔다. 시절이 수상하니, 도망을 치면 되었지만, <내가 도망가면 나의 백성들은 누구를 기대어 살란 말인가?> 라고 말하며 기꺼이 잡혀간 사람이다. <양상군자>라는 고사 성어는 바로 이 진식에게서 비롯되었다.

진식이 다스리는 <태구현> 역시, 흉년과 전염병, 전쟁으로 백성들의 삶이 힘든 상황이었다. 진식이 어느 날 책을 읽고 있는데, 한 사나이가 몰래 그 방에 들어왔다가 슬그머니 대들보 위로 올라가서 숨었다.

진식은 도둑이 든 것을 알았지만, 그를 붙잡지 않고 모르는 척 했다. 그리고, 아들과 손주들을 불러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무릇 사람이라는 존재는 스스로 힘쓰지 않으면 안된다. 나쁜 사람들도 원래 본성이 그런 것이 아니다. 습관이 잘못되어 반복되면 자신도 모르게 옳지 못한 짓을 하는 것이다. 이를 테면 지금 대들보(양상) 위에 있는 군자도 그런 사람일 것이다.

진식의 말을 듣고 있던 도둑은 밑으로 뛰어내렸다. 상황을 파악한 도둑은 방바닥에 이마를 대고 엎드린 뒤 벌을 받으려고 하였다. 진식은 이렇게 말해주었다.

자네의 모습과 얼굴을 보니 자네가 악인이라고 생각이 들지 않는군. 아마도 가난이 너무 심해서 견디기 힘들었고, 그래서 이런 짓을 한 것이겠지.

그리고는 비단 2필을 주어 돌려보냈다. 그 일이 알려진 후, 태구현에서는 더 이상 도둑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3. 양상군자는 비꼬는 말이 되어....

진식의 일화는 후한서 <진식전>에 나온다.

원래, 진식전에 나오는 <양상군자>는 <가난함에 어쩔 수 없이 지붕위에 떠밀려 올라간 도둑>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그 뜻은 점차 바뀌게 된다.

후대의 유학자들은, 비열하게 남의 이목을 숨기면서 지붕위로 올라간 사람을 <양상군자>의 뜻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진식은 <군자>라는 말을 가난한 이들을 배려하는 뜻으로 사용했지만, 후대인들은 <군자>라는 가면을 쓴 도둑놈을 표현하는 말로 사용한 것이다. 또, 대들보 위에 몰래 오르는 동물을 <쥐>라고 생각해서, <쥐새끼 같은 놈>을 뜻하는 것으로 와전되어 오늘 날에 사용되기도 한다.

후한 말에 살았던 진식은 <도둑>이란, 국가가 백성을 지켜주지 못해서 백성이 국가를 <배신>한 존재로 생각했을 것이다. <가난>은 본인의 죄가 아니라, 혼란한 <국가>가 낳은 것이다.

21c 대한민국... 지금의 정부는 실업도 해결하지 못하고, 민주주의를 지켜내지도 못하고 있으며, 북한과의 대립각만 세우려 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고통을 국민들에게 떠 넘기면서도, 국민들이 한 목소리를 내는 것마저 탄압하고, 심지어 <촛불>하나 들고 거리로 나오는 것 마저 두려워하고 있다.

진식은, 후한 말 <하진> 대장군이 높은 벼슬을 줄 터이니 중앙 정치에 나오라고 있지만, 자신의 마을을 지키며 묵묵히 살다가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국가의 지도자도 아니였고, 유명세를 탄 인물도 아니였지만, 그가 죽을 때 나라 안에서 그를 추모하고 제사 지내기를 희망했던 사람이 3만이 넘었다고 한다.

서구에서 예수가 태어날 무렵 활약했던 옛 관리가 가졌던 인식을, 21세기의 현 정부 지도자들은 생각지 못하는 것일까? 진정 존경받는 인물은 어떤 인물인가라는 사실을 과거에서 찾을 수는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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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인물 이야기

토정비결을 쓴 이지함은 사회 복지 운동가였다.

1. 자연의 모든 것이 공부였던 천재

이지함 하면 <토정비결>로 유명한 사람이다. 일반인들은 그가 특출한 예언력을 가지고 있다는 정도로 알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토정비결의 이지함이 실존인물이 아니라 가상의 인물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지함은 독특한 자신의 철학을 가지고 조선 시대를 살아간 일종의 <기인>이었다.

일단, 토정비결의 저자 이지함이 <실존 인물이 아니다>라는 오해를 사게 된 원인을 살펴보자. 토정비결이란 책에는 저자가 나와있지 않다. 토정비결이 운수와 풍수 등에 관련된 책이라는 걸 감안해볼 때, 다른 어떤 풍속서에도 이지함의 이름이 나와있지 않은 점이 이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지함(1517-1578)은 당당히 역사 속을 살아간 인물이며, 그의 인생 행적들을 추적해 볼때 토정비결을 그가 저술했음을 알 수 있다. 이 글은 그가 토정비결을 적었는지 안 적었는지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단지, 인간 이지함이 얼마나 조선시대의 이단아였으며, 개혁적 사상을 가진 인물인지를 설명하려는 것이다.

이지함은 고려말 유명한 학자였던 이색의 6대손이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관직에 있었다. 그는 중종 때 충남 보령에서 태어났는데, 14살때 아버지가 16살때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시묘살이를 시작하였다.

이지함은 어렸을 때부터 천재 소리를 들을 만큼 머리도 좋았고, 공부도 열심히 하였다. 밤에도 책에 빠져 있는 걸 본 주변 사람들은 지함의 눈이 나빠질까봐 등불의 기름을 주지 않았다. 책을 읽고 싶은 지함은 장작에 불을 지펴 책을 보았다. 한번 책에 빠지면 끝까지 읽었다. 장작마저 사람들이 치워 버리자, 이번엔 직접 도끼를 들고 나뭇가지들을 모아 불을 피워 공부를 하였다. 연기에 숨이 막히고 컥컥 거리면서도 꼭 책을 읽어야 했던 것이다.

시묘살이를 끝내고 서울에 온 이지함은 왕족인 이성량의 딸과 결혼하였고, 더욱 공부에 매진하였다. 사람들은 지함이 과거를 단번에 패스할 줄 알았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그는 출세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과거 시험에 필요한 사서 삼경이나, 제자백가, 각종 경서 들을 통달했지만, 그는 과거 시험을 보지 않았다.

명문가의 자제이면서도 스승조차 없었다. 책이 그의 스승이었고, 그는 하고 싶은 공부를 자유롭게 하였다. 양반들이 꺼려하는 음악과 산수, 의학, 천문과 지리학 등의 책도 잡으면 손에서 놓질 않았다.

책에서 진리를 구하던 청년 이지함은 직접 자신의 공부를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삿갓을 쓰고 전국을 돌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역사와 문화 유적지를 따라 돌아다녔다. 유적 탐방은 문화와 지리에 대한 많은 깨달음을 준다. 이곳 저곳의 풍속과 사람사는 이야기들을 듣게 되고, 유통되는 물자들과 지리적 여건에 따른 생활 양식들도 보게 된다. 인간과 지리를 접하고, 민중들의 삶을 직접 바라보면서 토정은 자신의 학문이 어떻게 쓰여야 할지 본격적으로 고민했을 것이다. 특히, 전국 곳곳마다 비참하게 살아가는 대다수 백성들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았을까?

2. 기인과 기인의 만남.

지함이 살았던 이 당시 까지의 조선은 유교적 문화와 함께 불교, 도교의 사상도 용인되던 시기였다. 율곡은 지함보다 19살이나 아래였으며, 이황의 성리철학도 막 정리되어가던 시기였다.

지함은 중국의 죽림칠현과 같이 자연을 돌면서 풍류를 즐기는 것을 좋아했고,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만나 대화하는 것을 소중하게 여겼다. 자연 속을 여행하다가 서울에 올 때면, 당대 최고의 명사들과 어울려 같이 풍류를 즐기곤 했다.

당대 이율곡은 지함보다 후학이었기에 토정을 마음 속 깊이 존경하였다. 토정은 딱딱한 학문을 이야기하는 것보다 풍류와 농담, 익살 같은 표현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표현에는 정치적 모순과 사회 비판에 대한 정확한 칼날이 있었다. 당대 최고의 학자인 성혼, 조식, 이항복 등은 토정과 토론하면서 그의 박학함에 놀라곤 하였다.

훗날, 조식은 마포에서 빈민과 생활하는 이지함을 직접 찾아와 이야기하곤 이렇게 말하였다. 

<깨끗한 거울과 같은 마음에 청렴하고 욕심이 적고 그 행실이 바르게 서 있어서 세상에 모범이 될 만한 사람이다.>

실제 이지함은, 고대 청담 사상가들이 꿈꾸어왔던 도사의 수련을 하기도 하였다. 엄동설한에 가벼운 옷 한벌을 걸치고 버티는 수련이라던가, 오랫동안 서서 명상을 한다던가 하는 기이한 일도 하였다. 그에게 있어 학문이란, 유교만을 고집할 것이 못되었다. 자신이 보고 느끼고 생각한 모든 것이 곧 학문이었던 것이다.

여러 사람들과 토론을 하며 학문의 범위를 넓혀가던 지함은, 당시 이름이 높던 <서경덕>을 찾아 개성으로 떠났다. 서경덕은 정치와 담을 쌓고 제자들과 학문을 토론하던 유생이었기에 지함의 스타일과 딱 맞아 떨어졌다.

서경덕과 성혼, 이율곡의 철학은 이황과 달리 주기론 철학이었다. 당시 주기론은 이황의 주리론과 달리, 다른 학문에 포용력이 있었다. 이황은 주자의 철학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였지만, 주기론자들은 주자의 철학을 현실에 맞게 응용하려는 움직임을 가졌다.

훗날, 이율곡이 <임진왜란을 대비해 10만 양병을 해야한다>는 현실적인 방안을 내놓았는데, 이것 역시 이지함이 풍수지리와 천문지리를 토대로 예언한 <큰 전쟁이 있을 것이다>라는 비유교적 철학을 인정한 결과였다.

이지함은 서경덕의 제자로서 더 넓은 공부를 하려고 했다. 서경덕의 이기일원론은 역학, 천문학, 지리학, 수학 등 인접학문을 총정리하여 구성된 것이었기에, 이지함 역시 스승의 영향을 받아 여러 학문에 더욱 능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스승이 정치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그 역시 출세에 관심이 없었다. 과거시험에 백지를 내거나, 쓸데없는 말을 적어 제출하는 등 기인의 행동을 했던 것이다. 그는 왜 과거 시험에 흥미를 잃었을까?

3. 서경덕을 떠났으나 정치에도 관심이 없는....

어느 날, 이지함이 공부를 하고 있는데 그 집 주인의 부인이 지함을 유혹하려고 했다. 지함은 그 부인을 달래다가 지쳐 결국 그 부인에게 인륜을 설명하였다. 집주인은 그 모습을 보고 서경덕에게 사실을 말하자, 서경덕은 지함의 공부는 이미 인륜에 대한 깨달음에 이른 경지라고 생각하였다.

<더 이상 내가 가르칠 것이 없으니, 돌아가서 하고 싶은 공부를 하게.>

서경덕은 스승을 떠나게 되었고, 다시 여행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는 왜 그 높은 학식을 가지고 정치에 입문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정치에 대한 회의 때문일 것이다.

알려진 바로는 친구인 안명세의 죽음 때문이라고 한다. 안명세는 사관으로서 당대 큰 사건인 을사사화를 바탕으로 <시정기>를 저술한 인물이다. 그러나, 당시 집권자들은 그 기록이 불순하다는 이유로 안명세를 죽여 버렸다. 권력이란 게 얼마나 허무한 것이며, 권력을 잡은 자들이 얼마나 비열한 사람들인가?

그는 죽장에 삿갓을 쓰고 자연을 벗삼아 사람들의 세상으로 떠나 버린다. 북쪽의 오지에서 남쪽의 제주도까지 그는 전국 방방 곳곳을 유랑하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하고, 토론하면서 살기 시작했다.

그의 옷차림은 정말 남루하였다. 천민이나 상민들이 쓴 패랭이 갓을 쓰고, 발에는 짚신을 신고, 옷은 누더기처럼 다 떨어진 도포자락을 걸치고 다녔다.

당시에 제주도는 어떻게 갈수 있었을까? 당시 기술로 제주도를 혼자 간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그는 작은 조각배를 만들어 네 귀퉁이에 큰 바가지들을 달아두어 균형과 함께 부력을 이용하였다. 그리고 그 배를 이용하여 제주도를 자주 드나들었다고 한다.

그가 45살이 되었을 때, 국가에서는 지함의 가문을 고려하여 그에게 포천현감 자리를 주었다. 지함을 알고 있던 학자들이 적극적으로 천거한 것이다. 일종의 특별 채용이자, 어찌보면 낙하산일 수 있었지만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출세의 기회였다.

그는 현감이 되어서도 걸인과 같은 생활을 하였다. 향리들의 접대는 모두 거부했고, 평소 식사도 잡곡밥과 소금국을 먹었다. 백성들의 음식과 똑같거나 못해야 그들의 삶을 더 잘 알 수 있다는 것이 지함의 철학이었다.

지함은 고을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낚시대와 그물을 보내달라고 조정에 건의하였다. 물고기를 잡아 경비를 마련하면 백성들의 세금 부담이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조정에서 그 의견을 무시하는 것을 보고 현감 자리 조차 버리고 다시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4. 빈민의 삶을 이해한 방랑자

지함은 오랜 여행을 통해 빈민들의 삶이 얼마나 고단한 것인지를 몸소 체험하였다. 그는 하층민들 역시 자신과 똑같은 인간이라는 기본 전제를 신념으로 삼은 것 같다.

신혼 다음날 추위에 떨고 있는 부랑아를 위해 자신의 옷을 벗어주고 떠난 일화도 있다. 노예의 아이가 책을 읽고 싶어하면 자신이 아끼던 책을 주고 그 아이의 부역을 빼주기도 하였다. 그래서일까? 그의 제자 중에는 상인과 노예들도 꽤 많았다.

지함은 어느 날, 한적한 섬에 들어가 박을 심었다. 그 박을 팔아 곡식을 사니 그 곡식이 가난한 사람들이 마음껏 먹을 만큼 많았다. 지함은 곡식을 마포로 가져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대가로 빈민촌 한가운데 조그만 땅을 얻었다. 빈민들은 그가 빈민촌에 흙으로 쌓은 정자에서 산다고 하여 <토정> 선생이라고 불렀다.

그가 왜 하필, 박을 팔아 곡식을 만들어 빈민을 도왔을까?

그것은 빈민들에게 단순히 곡식을 나눠주는 것 외에 큰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토정은 자신이 터득한 장사방법을 빈민들이 볼 수 있게 하고, 그것을 주민들에게 전수해 주려는 것이었다.

조선 초기 유통경제는 포구를 통해 이루어졌다. 지금처럼 고속도로나 지하철이 있는 것도 아니여서, 강 자체가 물자 운송의 핵심이었다. 배를 통해 지방의 산물과 서울의 시장이 만나는 곳이었으며, 유통을 통한 이익은 빈민들이 구걸해서 얻는 이익보다도 막대한 것이었다. 양반으로 태어나 상업에 손을 댄다는 것은 당시 큰 수치였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꼭 필요한 것이란 사실을 직접 보여준 것이다. 조선 초기에 등장한 양반 계급 출신의 상인이라고 할까?

5. 통상무역론을 주장한 혁신적인 사상가

57살의 늦은 나이, 그는 드디어 정치에 본격적으로 입문하게 된다. 정치를 혐오했던 그가 본격적으로 정치에 들어선 것은, 자신의 꿈을 현실화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서로 죽고 죽이는 사화의 시대가 끝났다. 훈구파와 사림파의 싸움은 선조가 즉위하면서 종말을 맞이했다. 서경덕, 성혼, 이율곡, 조식 계열의 학자들이 사림이라는 이름으로 정계에 진출하였다. 이들은 적극적으로 이지함을 추천하였다.

이지함은 빈민을 위한 복지사업의 가능성을 제시하였고, 국가에 많은 정책을 제시하였다.

그 핵심 사업은 부유층의 재산에서 좀더 많은 세금을 걷자는 것과 부유층의 부동산을 국유지로 설정하여 활용하자는 것이었다. 당시, 선조시기에는 조선 건국 세력인 훈구세력이 어느 정도 척결되었고, 그들의 불법 보유지를 국가가 환수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마련된 상태였다.

이지함이 생각한 것은, 산림자원과 해양자원이었다. 산림과 해양은 지배층의 것이 아니라 국유 재산이 되어야 한다. 성리학의 왕토사상과 고대 정전법의 토지공유사상을 도입하면 쉽게 자원을 확보할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토지와 바다 자체가 아니라 거기서 나오는 생산물이다. 광산의 금, 은과 바다에서 나오는 수산자원은 막대한 부를 축척할 수 있다. 그 자원을 통해 국고가 충당하면 빈민들을 도울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여기서 한걸음 나아가 이지함은 <국제통상>의 가능성을 주장하였다. 금, 은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빈민들의 생활 수준 자체가 나아지지 않는다. 산림자원과 광업자원이 부족한 국가에 비싼 가격으로 자원을 팔아 무역체계를 확립하면 막대한 이익이 생간다는 것을 생각한 것이다.

섬에서 만든 박을 가지고, 섬사람들이 나눠 먹는건 비효율적이다. 넓은 시장에서 다양한 물자와 교역하면서 서로의 이익을 남기는 것이 훨씬 현실적이라는 것이다. 이지함의 이론은 당대 유럽의 <중상주의 정책>과 비교해서 손색이 없는 것이었다.

6. 조선 시대 복지 사업의 선구자

이지함은 죽음을 앞둔 어느 순간, 고향은 충청도로 돌아와 아산 현감 자리를 맡았다. 그는 상인 신분의 친구들, 노예 신분의 제자들과 함께 중앙에서 원할하지 못했던 개혁을 실천에 옮겼다.

그가 생각한 빈민 구제 개혁안은 <걸인청>의 설립이었다. 국왕은 백성들을 하늘처럼 모셔야 한다. 그것이 성리학에서 말한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이다. 그러나, 백성들은 국왕을 생각하지 않는다. 백성들은 굶지 않고, 죽지 않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백성들을 굶기지 않기 위해 쌀 한바가지를 주는 것이 효율적인 것일까? 그것은 복지가 아니라 자선일 뿐이다. 진정한 복지는 백성들 스스로가 굶지 않는 방법을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혁신적인 철학으로 시작된 <걸인청> 사업은 여러 가지 사회 복지 사업과 연결되었다.

걸인들에게 먹고 잘 곳만 계속 제공해주면, 지원이 끊겼을 때 그들은 죽고 만다. 따라서 먹고 잘 곳보다 중요한 것은 일을 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주는 기본 자금이다.

걸인청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장사를 할 수 있는 기본 자금을 대여해주고, 값싼 이자를 거두어 들인다. 그 이자로 다른 이들에게 기술 교육을 시킨다. 기술 교육을 받은 이들은 해당 기관에서 일을 하여 수입을 얻는다.

힘없고 늙은 노인들은 짚신을 만들거나, 작은 나무를 깎도록 한다. 관청에서 그것을 사서 판매한 후, 이들에게 쌀을 대가로 지급한다. 일하지 않고 구걸만 하는 자는 처형하지만, 일을 하겠다는 자에게는 최대한 협조하여 일자리를 마련해준다.

2008년 실업자가 넘쳐나는 이명박 정부에서도 제대로 실시하지 못한 사회 사업이다. 그러나, 이지함은 빈민들을 위한 이 사업을 순조롭게 추진하였고 성과도 얻었다. 문제는, 이지함이 현감으로 부임한지 1년도 되지 못하여 생을 마감했다는 것이다.

그는 마포의 토굴에서 <토정>으로 살아갈 때부터 시작했던, 빈민들을 위한 한 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빈민들이 결혼날짜를 잡아달라던가, 좋은 일이 있을 지 점을 쳐달라고 했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비결>집을 만들었던 것이다.

우리는 토정비결을 단순한 <운수책>, <점보는 책>으로 여기곤 한다. 만약 토정비결을 쓴 사람이 이지함 본인 맞다면, 이 책은 빈민들에게 삶의 위안을 주면서도, 일하지 않고 요행만 바라는 이들에게는 경고하기 위해 쓴 책이 아닐까?

토정비결은 좋은 말들이 많이 있다. 약 70% 정도는 좋은 운수가 적혀있다. 그러나, 30% 확률로 경계해야 할 운수들이 적혀있다. 즉, 희망을 가지고 살다보면 좋은 일들이 있을 것이라는 삶의 제시를 하면서도, 운에 의지하지 말고 노력해야 한다는 지함의 경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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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인물 이야기

<카사노바> - 역사적 변화가 낳은 이단아.

1. 베네치아 공화국의 몰락

1천년간 상인의 도시로 전성기를 누렸던 카사노바의 고향, <베네치아 공화국>

베네치아 공화국은 유럽에서 가장 부러운 자치 도시였다. 르네상스의 본거지인 이탈리아 반도에서 문화와 예술을 이끌어간 도시가 바로 베네치아 공화국이었다. <베니스의 상인>은 세계 무역을 주름잡는 이 지역 상인들을 일컫은 자랑스런 단어였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무역 거점이었다. 이 도시는 주변이 석호로 이루어진 까닭에 바다에 떠 있는 해양 도시였다. 그래서, 아시아의 지배자 투르크인들도 감히 베네치아를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베네치아보다 우수한 함선을 더 많이 동원해야 겨우 이 지역을 침공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기 때문이다.



   아무도 침공할 수 없는 난공불락의 해양 요새 베네치아.

천연의 조건을 갖춘 이 해상 도시는 유럽의 모든 물품과 정보가 넘어오는 요충지로서 상업과 첩보 산업이 발전하였다.

그러나 유럽의 해상 중심지 베네치아도 16세기를 넘어가면서 조금씩 기울기 시작한다. 스페인 지역을 중심으로 미국이라는 신대륙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유럽의 해상 중심지는 베네치아에서 마드리드, 런던을 잇는 서부 해안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18세기...

영국, 프랑스 등 서부 지역의 국가들은 비교적 강력한 왕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해양 산업에서 몰락한 베네치아는 가진 것이 없었다. 도시 시민들은 점점 불만을 갖기 시작했고, 도시 지도부는 이 불만을 어떻게든 해소해야만 했다.

베네치아가 택한 것은 <유흥 산업>이었다. 도시 곳곳에서는 합법적인 도박판들이 벌어졌다. 누구나 오락을 즐길 권리가 있었으며, 술을 마실 권리가 있었다. 여자들은 도박판에서 돈을 번 남자라면 누구에게나 윙크를 보냈다. 도시 전체가 하나의 유곽이 되었고, 모든 여성들이 창녀와 구분되지 않았다.

유럽인들은 베네치아를 유럽의 <환락가>로 여겼다. 프랑스의 파리가 <예술과 향락의 중심지>라면, 베네치아는 <퇴폐와 유흥의 중심지>였다.

1725년... 위대한 자치도시의 몰락 속에서 한 남자가 태어났다. 그가 바로 세계 최고의 바람둥이 <카사노바>였다.

2. 누구나 바람피는 사회.

카사노바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얼굴이 반반한 무명 배우들이었다. 어머니는 확실하지만,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알 길이 없다. 당시 베네치아에서는 아버지를 확인하는 일이 불가능할 정도로 난잡한 사회였기 때문이다.

1743년. 성 치프리아누스 신학교에 들어가 성직자로서 성공하려던 카사노바는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모두가 부도덕한 세상을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성직자로서 홀로 고고한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설교를 위해 단상에 올라간 그는 너무 술에 취해 자신의 몸도 가누지 못했다. 그러나, 돈이면 무엇이든 해결되는 베네치아 사회였기 때문에 그는 성직자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성직자가 깨끗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도시 전체가 창녀촌인데, 이곳에서 무슨 설교를 한단 말인가? 그는 보란 듯이 교회를 다니던 여성을 유혹하고, 떳떳하다는 듯이 감추지 않았다. 그래도 교회는 그를 눈감아 주었다. 그러나, 참다 참다 못한 교회는 그를 쫓아낸다.

그리고, 유명한 카사노바의 여정을 시작되었다.

카사노바는 생각했다. 가장 순결한 교회의 여인도 멋진 남자가 하나 하나 신경써주면 넘어올 수밖에 없다. 세상에 정조가 있는 여자란 없다.

카사노바는 잘생긴 외모와 뛰어난 사교 능력, 다방면에 박식하여 남녀를 불문하고 많은 친구가 있었다.

성직자란 직업은 교황이 거주하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휼륭한 직업이었다. 그러나, 카사노바에게 성직이란 여성을 유혹하기 위한 간판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가장 완벽한 직업인 로마 교황청에 들어가 일을 하였다.

그리고 그는 간판을 내세워 수많은 여인들을 유혹하였다. 고위층 집안의 부인과 그녀의 딸, 유부녀와 소녀를 가리지 않은 그의 행동은 수많은 남자들의 질타를 받았다.

그리고 결국 그는 로마에서 쫓겨나게 된다. 명문가의 부인들과 만난 사실이 문제가 되어 로마 지배층들의 공공의 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도망간 곳은 기독교가 존재하지 않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었다.

투르크 제국에서 다시 이탈리아 반도로 돌아온 카사노바는 <프리메이슨>에 가입하고, 비밀 첩보 요원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그는 첩보의 왕국 베네치아 사람이자, 교황청에서 일한 사람이었으므로 교회에 대해 남모르는 무언가를 많이 알고 있었다. 또, 천성이 바람둥이인 그였기에 엄격한 규율을 강조하는 교회 자체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전해진다...)

그는 여성들을 유혹히기 위한 기술로 탁월한 바이올린 연주 능력을 익히고 있었다. 17살에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바이올린 천재... 어느 여자가 넘어오지 않겠는가? 20살의 카사노바는 그 능력을 이용하여 예술의 도시 파리, 음악의 도시 빈을 돌면서 수많은 여성들을 유혹하였다.

3. 카사노바의 쇼생크 탈출

카사노바가 여성들을 유혹하기 위한 자금줄으로 이용했던 것은 <도박>이었다. 그는 도박에도 탁월한 능력이 있었던 듯 하다. 항간에는, 프리메이슨 비밀 활동을 통해 일종의 지원금을 받은 것이 아닐까라고도 한다.

하지만, 카사노바의 가장 든든한 자원줄은 양아버지 <브라가딘>의 지원이었다. 종교 재판관이었던 브라가딘은 갑작스런 발작으로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 이 때, 물불 가리지 않는 성격의 카사노바가 적절한 응급조치를 취해서 그를 살렸던 것이다.

21살의 젊은 카사노바.

브라가딘가의 양자가 된 카사노바는 이제 거칠 것이 없었다. 그의 일상은 여행이었고, 여행중 만난 모든 여인을 그의 침실로 끌어들였다. 카사노바의 여인이 100명이 넘는 것은 과장이라는 설이 있지만, 실제로는 100여명을 휠씬 뛰어넘는 숫자라고 한다. (그의 회고록에는 122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환락의 도시 베네치아는 일상적으로 섹스 파티가 유행하였고, 카사노바는 수녀들까지 파티에 초대하여 환락을 즐겼다고 한다. 그러나, 이 섹스 파티로 인해 카사노바의 인생은 꼬이기 시작한다.

카사노바와 파티를 즐긴 여인들 중에는 성직자의 부인, 종교 재판관의 애인 등 고위층들이 많았다. 이들은 카사노바가 <프리메이슨> 등 이단과 연결되어 있다는 정보를 듣고, 그를 협박하기 시작한다.

1755년. 카사노바는 금지된 이단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라는 죄명으로 종교 재판관에 의해 체포된다. 속내는, 여자를 유혹하는 그의 기술이 악마의 속삭임이란 뜻이다.

이로부터 5년간 카사노바는 피옴비 감옥의 가장 더러운 감방에서 가장 더러운 수감생활을 해야 했다. 지상최대의 바람둥이가 일생의 황금기를 감옥에서 보낸 것이다.

그러나, 카사노바는 누구도 탈옥할 수 없다는 혹독한 감옥. 피온비를 5년만에 탈출하였다. 피온비 감옥의 탈출은 그를 영웅으로 만들어 버렸다.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낸 바람둥이... 완벽한 쇼생크 탈출...

나를 이곳에 가둘 때 나의 동의를 구하지 않았듯이, 나 역시 동의를 구하지 않고 이곳을 떠나노라.

감옥을 탈출한 그는 바로 이탈리아 반도를 떠난다. 그럼 이 바람둥이가 갈 곳은 어디? 베네치아 다음으로 문화와 예술이 발달한 도시, 프랑스의 <파리>였다.

4. 혁명 전야의 프랑스에서 비밀 첩보원으로...

프랑스에 넘어간 카사노바가 할 수 있는 일은? 일단 연주를 할 줄 아니 문화예술계에 진출해도 돠겠고, 도박을 잘하니 타짜로 성공해도 되겠다.

파리에 도착한 카사노바는 옛 친구의 소개로 프랑스 재정 전문가로 활동하게 되었다. (말했듯이 카사노바는 남자들에게도 무척 인기가 많았다.) 재정전문가니 돈은 많이 벌었을 것이고, 30대의 바람둥이는 또 다시 프랑스 여자들과 달콤한 시간을 보내게 된다.

프랑스 정부는 천부적인 사교 능력에, 탈옥능력까지 갖춘 카사노바를 다국적 스파이로 이용하려고 했다. 프랑스에서 많은 경제적 혜택을 받은 그는 이제 <프랑스 비밀 요원>이 된 것이다.

그는 첩보 활동을 하면서도 틈틈이 여자들을 만날 자금이 필요했고, 많은 사람들에게 돈을 빌렸다. 그러나, 빚이 많아지자 그는 프랑스를 떠나 남부지방으로 여행하면서 도피 생활을 시작한다. 이때부터 <생갈의 기사>라는 가명을 쓰면서 살아간다.

남부 지방으로 도망다니던 그는 계몽사상의 아버지 <볼테르>를 만나게 된다. 볼테르는 사회 변혁을 위해 인간의 <이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고 다녔다. 카사노바 역시 <성직>이 따분하던 차에 인간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볼테르와 카사노바는 둘다 계몽 사상에 깊은 관심을 가졌지만,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랐다.

볼테르는 인간의 <생각하는 힘>, 즉 이성이 모든 것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카사노바는 이성보다는 열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머리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시키는 대로 따라가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인생을 살면서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그것을 행하는 것은 내 자유의지에 의해서 이루어질 뿐이다.

카사노바는 마음과 몸이 시키는 대로 행하는 자유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5. 산업 혁명의 고장 영국으로, 그리고 계속된 실패...

1763년. 영국으로 떠난 카사노바는 차가운 대우를 받는다. 카사노바의 잠자리 기술은 18세기 영국에서 전혀 먹히지 않았다. 영국은 산업혁명을 통해 새로운 산업 사회로 나아가던 시기였다. 큰 도박판도 없었고, 그의 능력을 알아보려는 사람도 없었다.

오히려 카사노바는 일생 일대의 수치를 맛보게 된다. 우습게 보았던 영국 창녀에게 속아 가진 돈을 모두 빼앗기고 버림받았던 것이다. 카사노바는 평소에 수많은 여성들을 만난 관계로 숭어알집 등을 이용한 콘돔을 만들어 성병을 예방하곤 했는데, 영국에 다녀온 이후 악성 성병으로 고생하게 된다. 최초의 콘돔 고안자가 스스로도 예방하지 못했다고 할까?

베를린으로 여행을 시작한 카사노바는 계몽사상을 맹신하는 프리드리히 대왕으로부터 관직을 받기도 한다. 여행의 견문을 넓히고자 러시아로 떠난 그는 러시아 여성들과의 만남 때문에 곤욕을 치르게 된다.

러시아 남성의 도전으로 결투까지 치르며 러시아를 쫓겨난 중년의 카사노바. 더 이상 카사노바의 신화는 없었다.

그는 결국 스페인으로 도망치게 되었다. 스페인에서 글을 쓰면서 몸을 추스린 그는, 고향 이탈리아로 돌아온다. 이탈리아에는 자신도 모르게 태어난 그의 딸도 있었고, 자신에게 원한을 품은 남자들도 있었다. 카사노바는 종교 재판소와 화해를 하고 다시 베네치아로 귀환하였다.

50살의 카사노바는 일리아스를 번역하며, 종교 재판소의 비밀 첩보원으로 활약하였다. 경력이 많은 카사노바에게 비밀 첩보원 일을 맡긴 것이 귀환의 조건이었을까? 아무튼 오랜 방황 끝에 탈옥범이 모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6. 회고록의 작성

1779년. 베네치아로 돌아온 카사노바는 <프란체스카>라는 가난한 처녀를 만나 평범한 가정을 꾸리게 된다. 물론 그의 정적들과 빚쟁이들이 카사노바를 괴롭히긴 했지만, 카사노바 일생에서 유일하게 행복한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행복도 5년을 넘기지 못하였다. 카사노바가 쓴 <사랑도 싫고, 여자도 싫다>는 풍자시가 문제가 된 것이었다. 그가 쓴 글에는 유력 귀족들의 비밀이 노출되어 있었다. 결국, 처음으로 진심어린 사랑을 했던 프란체스카와 강제로 헤어져 도망친 그는, 보헤미아로 도망친다.

그곳에서 그는 가난한 사서가 되어 13년간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면서 살아간다. 그가 말년에 적은 회상록은 젊은 날의 여행과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것이다.

그가 죽고 얼마 뒤, 카사노바를 낳은 환락의 자치 도시 베네치아는 멸망한다. 볼테르의 영향을 받은 프랑스 민중들이 혁명을 일으켜 새로운 정부를 세웠고, 정권을 잡은 나폴레옹의 군대가 유럽을 휩쓸며 베네치아 자치 공화국을 지도에서 지워 버렸기 때문이다.

몰락한 지중해의 역사를 보여주는 베네치아, 그 환락가에서 태어난 카사노바.

그리고 프랑스와 영국, 독일, 러시아의 변화를 몸으로 보면서 스파이로 살아간 카사노바.

역사는 이런 절묘한 시기에 절묘한 인물을 낳아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려는 게 아니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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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노바의 귀향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아르투르 슈니츨러 (신아출판사,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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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노바의 베네치아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로타 뮐러 (열린책들,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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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유혹(카사노바 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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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조반니 자코모 지롤라모 카사노 (휴먼앤북스,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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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인 3(카사노바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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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진형준 역 (살림, 19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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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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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양재홍 (지경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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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후지사와 미치오 (일빛,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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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노바
감독 라세 할스트롬 (2005 / 미국)
출연 히스 레저, 시에나 밀러, 제레미 아이언스, 올리버 플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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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고사 이야기

<홍일점>이란 말이 과연 아름다운 여성을 지칭하는 말일까?

수많은 꽃 사이에 눈에 띄는 색이 있으니...

우리는 흔히 수많은 남성 가운데 서 있는 아름다운 여성 한 명을 홍일점이라고 한다. 그럼 홍일점이라는 말은 누가 처음 쓴 것일까? 그리고, 그 말은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의미와 같은 것일까?

그럼 한번 따져보자...

그 말이 처음 등장한 문헌을 따져 올라가면 중국 송나라의 변법가 왕안석임을 알 수 있다.

왕안석이 살던 중국 송나라는 역대 중국 왕조 중에서 가장 허약한 왕조였다. 전쟁과 반란의 역사를 끊어 버리고자 송나라 태조가 실시한 <문치주의> 때문에, 송의 국방력은 너무도 허약했다. 송의 국방력이 허약한 것과 비례하여 주변국들은 송나라를 업신여기고 국력을 키워나갔다.

송나라는 역대 중국 왕조가 겪은 치욕중에서 가장 큰 치욕인 정강의 변을 겪게 된다. 중국 황제가 이민족에 의해 끌려가고, 주변 민족에게 세금을 바치면서 겨우 왕조를 유지해나간 것이다. 김용의 원작소설로 알려진 사조영웅전도 바로 이 정강의 치욕에서 스토리가 시작되었다. 거란의 요나라, 탕구트족의 서하, 여진족의 금나라, 훗날 몽골족의 원나라까지.... 송나라는 주변국에 의해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하였다.

그러나, 송나라의 보수세력들은 하나같이 일신의 안위를 챙기기에 급급하였다. 주변국에 내야 할 세금은 백성들의 고혈이었지만, 백성들을 위한 획기적인 부국강병책은 없었다.

송의 황제 휘종과 흠종이 이민족의 군대에 의해 잡혀가고 송나라(북송)는 곧 망한다. 그러나, 정강의 변보다 앞서 신종 치세 때 등장한 왕안석은 약해빠진 송나라를 부유하게 만들고,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였다.

  왕안석은 국가를 바로 세우기 위한 법을 바꾸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가려고 했다. 그는 전통적 유학사상에 얽매여서는 국가의 발전이 없다고 생각했다. 굳이 공자 사상에만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필요에 따라서는 요순시대의 초기 태평사상과 춘추전국시대의 법가사상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왕안석은 뜻을 같이하는 이들과 함께 개혁을 추진해 나가려고 했다. 그의 진보적인 정당을 역사에서는 <신법당>이라고 부른다. 지금으로부터 천년전에도 과감한 진보적 신당이 존재했던 것이다. 
   
   신법당은 기존 사회질서를 유지하려는 <구법당>과 대립하면서 왕안석은 백성들을 위한 과감한 대책들을 쏟아내었다. 송나라의 시기는 중국 역사상 가장 허약한 시기이면서도, 가장 활발하게 붕당정치가 이루어진 시기였다. 신법당은 끊임없이 개혁안을 던져놓았고, 구법당은 신법당의 개혁이 부당하다는 것을 조목 조목 반박하였다. 이 두 당의 공존 시기에는 각자의 입장을 밝히기 위해 등장한 수많은 학자와 문예가들이 있었고, 제법 유명한 시인과 소설가들도 구법당에 들어가 왕안석과 논쟁을 하곤 하였다.

신법당은 국가 인력 확충을 위해 과거제도를 개방적으로 확대하고, 신분보다는 태학의 유학생 등 지식을 우선으로 하는 인재 등용을 논의하였다. 또 가난한 농민과 상인들에게 싼 이자로 농기구와 물자를 대여해주는 획기적인 방안을 제시하였다. 일반 농가에 군용말을 키우게 하여 국방을 강화시키는 대신 농민들에게 물자를 제공하자고 하였으며, 농촌 사회를 군 행정구역과 일치시켜 국방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당대 유명한 지식인이자 학자들인 사마광, 구양수, 소식 등은 왕안석의 획기적인 방법을 비판하였다. 기존의 사회 질서를 벗어난 개혁은 무리가 따른다는 것이었다.

왕안석은 좌절하였다. 보수적인 유학자들이 자신의 본문을 다하지도 못하면서 현실에 안주하려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보수의 가치는 <도덕성>이다. 기존 질서를 유지하려는 자들이 인정받기 위해서는 도덕적으로 청렴하다는 인식이 있어야 일반 민중들이 수긍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라가 부패하고 망해가는데 도덕성도 없는 보수에게 무엇을 믿고 맡긴다는 것인가?

그렇게 망가진 보수주의자들이 왕안석을 서슴없이 비판한다.

  - 모나게 튀어나온 못이 누군가를 찌른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무엇을 바꾼다는 말인가? -

왕안석은 자신의 개혁 사상이 결국 좌절될 것임을 알고 비통해했다. 국왕의 신임이 얻고 있는 동안에야 개혁이 가능하겠지만, 왕이 바뀌고 자신이 죽고 난다면 누가 또 굳이 힘들게 기존의 질서를 바꾸려고 하겠는가?

왕안석은 자신의 시 <석류>에 <홍일점>이라는 말을 남긴다.

수없이 푸르고 푸른 것들 중에서

홍일점이 있구나.

사람을 움직이는 아름다운 색은

생각해보면 많은 것이 아니구나.

수많은 꽃 사이에 눈에 띄는 붉은 점이 있으니 눈에 띄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눈에 띄는 색은 그리 많지가 않다. 붉은 점이 많았다면, 흔했다면 관심을 받지도 않았을 것이다. 왕안석이 생각한 홍일점은 수많은 꽃 중에 눈에 띄는 하나의 꽃이 아니라, 하나밖에 없어서 질투를 받아야 하고, 홀로 걸아야 하며, 그 색이 바래지면 더 이상 주목받지 못하는 그런 하나를 말한 것이 아닐까?

왕안석이 사라지면, 더 이상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 붉은 색들이 많았다면, 붉은 색들이 푸른 색들을 압도한다면... 세상을 바뀌지 않을까?

갑작스럽게 색깔론이 생각난다. 우리 사회에서는 모두가 푸른 색이여야만 한다. 하나라도 붉은 색이 있어서 튄다면, 빨갱이란 소리를 듣는다. 국회에 가보면 아직도 색깔론이 판친다. 빨갛다는 것은 하나라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푸른 것과는 별개의 것이라서 탄압받는다.

왕안석 역시 자신만이 붉기 때문에 슬퍼했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파란 식물 속에 빨간 꽃을 홍일점이라고 말한다. 홀로 고고하니 아름다울 것이라고 말한다. 남성들 사이에 유독 아름다운 여성이 있다면 홍일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 왕안석이 말한 홍일점도 그런 것이었을까?

결국 송나라는 왕안석이 죽은 이후 얼마 못가 금나라에게 국토의 절반을 강탈당하고, 몽골제국에게 멸망하게 된다. 그 북방민족들은 왕안석이 그토록 가지고자 했던 강력한 기마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결과를 생각해본 왕안석이 시에서 남긴 <홍일점>은 아름다운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소연할 곳 하나 없이 외로운 자신의 개혁사상에 대한 비통함을 적은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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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인물 이야기...

쌍화점 속의 고려왕들 - 개혁가인가, 변태들인가?

1. 영화 쌍화점?

유하 감독이 만든 쌍화점이 극장가에서 화제라고 한다. 19세 이상 볼 수 있는 작품인데, 동성애를 본격적으로 다룬 작품이란다. 개인적으로는 유하 감독의 작품은 머리 아파서 잘 보지 않는다. 예전에 전직 대통령과 한국 정치 상황을 <무림>이라는 코드로 때려맞춰 만든, <바람부는 날에는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라는 시집을 읽은 기억이 난다. 아이디어는 기발했지만, 그 이상은 없었다. 박정희가 무림최고수, 무림인들이 먹는 금단의 술 <에이주 AIZu>, 5.18을 풍자한 듯한 무림의 난?.... 뭐 그 정도 껴 맞추기 수준?

압구정동이나 말죽거리 잔혹사같은 영화에서 뭔가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의도보다는 이슈가 앞선 감독이었다. 쌍화점에서도 동성애 코드에 뭔가 의미를 부여한다고 하는데, 일단 보고 와서 칭찬을 하든, 비판을 하든 해야 하니 볼 수 밖에 없다. 결국 다 보게 되는 건가?

영화 쌍화점이 히트 상품이라니까, 쌍화점에 대한 이야기를 짧게 적어보야겠다. 고려의 왕들이 과연 동성애자인가?

2. 무신보다는 몽골쪽을 택했던 원종

영화 쌍화점은 어느 왕의 이야기인지 밝히지 않고, 그냥 그랬다라는 여운을 남기는 포스트모던 코드를 지향한다. 왜냐면, 역사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성애 코드와 멋들어지게 만들어진 스토리를 꾸미기 위한 배경으로 역사를 차용한 것 뿐이니까...

그럼 실제 역사에서의 쌍화점은 어떤 분위기에서 만들어졌을까?

<쌍화점>이라는 고려 가요가 역사에 등장한 시기는 최초로 <충>자 항렬을 사용한 <충렬왕>부터이다. 고려 25대 충렬왕은 몽골에 저항하던 최후의 세력인 삼별초가 완전 타도된 직후, 왕이 되었다.

충렬왕의 아버지 원종은 몽골에 항전한 <무신정권>을 뿌리뽑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몽골>쪽에 협조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였다. 1264년 몽골에 가서 몽골왕의 신임을 얻음으로서 고려가 망하는 것만큼은 방지하려고 했는데, 사실 국내 무신들들 제거하여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숨어있었다. 

무신 임연을 시켜 실세인 무신정권의 김준을 죽여 버렸고, 다시 임연을 죽이려다가 왕에서 쫒겨났다가 돌아온 일도 있었다. 몽골의 원조를 위해 원종은 동녕부(서경을 비롯한 서북부 영토)를 몽골에 바치기도 하였다.

몽골과 마지막으로 항전을 준비한 임연과 무신들은 결국 원종과 몽골(원)의 연합부대에 밀려, 결사항전을 시도했는데, 이것이 역사에서 유명한 <삼별초의 최후 항쟁>이다.

   삼별초가 탐라(제주도)에서 모두 제거당하자, 몽골은 무리한 요구를 하기 시작한다.
일본 원정을 위한 비용을 고려에 전가하기 위해 정동행성이란 임시기구를 만들고, 고려의 부녀자들을 몽골에 보내기 위해 결혼도감을 만든 것이다. 고려의 풍속은 문란해졌고, 부모들은 딸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어린 딸들을 일찍 시집보내기 시작한다. 

   원종이 삼별초를 제거한 직후 죽자, 그 아들이 왕이 되었는데, 아예 몽골에 충성한다는 뜻에서 <충>자를 붙여 <충렬왕>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3.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충>자 돌림의 왕들...

왕이 된 충렬왕은 할 수 있는 것이 딱히 없었다. 왕비는 몽골 쿠빌라이칸의 딸인 <제국대장공주>였다. 신하들 역시 친원파들이 대세였다.

그나마 고려가 망하지 않은 것은 아버지인 <원종> 덕분이었다. 몽골은 1대 징기스칸 - 2대 오고타이에 이어 다시 칸을 뽑아야 했는데, 고려 원종은 후계구도에서 멀었던 비주류 왕족 쿠빌라이를 적극 밀어주었고, 쿠빌라이는 고려의 도움을 받아 <원 제국>의 창시자가 되었다.

원종의 도박이 성공한 것이다. 덕분에 고려는 망하지 않았지만, 충렬왕은 몽골 공주를 아내로 맞이해야 했다. <종>을 붙이던 왕호는 <충>자가 붙은 <왕>으로 격하되었다.

황제국의 예법은 부마국(사위국)인 고려에 적용되었다. 태자는 몽골이, 세자는 고려가 사용하였다. 왕을 칭하는 <짐>은 몽골이, <고>는 고려가 사용했다. <폐하>는 몽골이, <전하>는 고려가 사용하게 되었다.

그나마 충렬왕은 원종이 실시했던 <전민변정도감> 사업 등 토지개혁을 하면서 친원파에게 소극적으로 대항하려고 했지만, 그 조그만 반항만으로도 친원파들에게 크게 찍히고 말았다. 충렬왕의 유일한 보호막인 몽골 부인이 죽자 마자, 충렬왕은 바로 폐위당한다.

충렬왕 24년.... 쿠빌라이칸의 외손자이자, 충렬왕의 아들이 <살아있는 아버지>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이 되니, 이 사람이 유명한 <충선왕>이다.

그런데, 충선왕은 충렬왕보다 더 친원파들을 미워했다. 충선왕의 부인은 쿠빌라이의 황태자인 친킴 가문의 공주였다. 충선왕은 대놓고 몽골 공주를 구박하였다.

여기서 쌍화점의 줄거리로 알려진 <바람피우는> 이야기들이 실제 역사 속에서 시작된다. 충선왕은 부인을 구박하기 위해 보란 듯이 바람을 피워 5명의 첩과 비를 두었다. 특히, 몽골의 천한 여자인 <의비> 등과 바람을 피워 몽골 공주를 자극하였다.

실제로, 27대 충숙왕은 몽골 공주가 아닌 의비가 낳은 아들이다. 거기에 친원파들이 아닌 신진 유학 세력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개혁조서>를 발표해 버린다. 그 개혁조서는 친원파들의 불법점유 토지를 원주인에게 되돌린다는 내용이었다.

이 때 아버지 충렬왕은 다시 왕위를 되찾기 위해 아들에게 여자를 붙여주거나, 바람 피는 것을 묵인하였고, 심지어 며느리인 몽골 공주에게 이혼과 재가까지 권유하였다. 몽골 공주는 충선왕에 맞서 계속 맞바람을 피웠고, 국정을 파탄으로 몰고갔다.

결국, 원나라 왕실은, 충선왕을 단 4개월만에 다시 짜르고, 충렬왕을 왕으로 재즉위 시켰다. 그러나, 아들과 며느리마저도 적으로 돌린 충렬왕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4. 아들의 개혁정치를 뒤로 하고...

충렬왕 본인도 개혁정치에 뜻을 두고 있었다. 충렬왕도 초기에는 능력있는 인재를 선발하고, 친원파를 숙청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원나라에게 패한 치욕을 갚기 위해 영토 수복도 원하였다. 그러나, 아들의 개혁정치를 무산시키고 다시 왕이 된 이후, 점점 힘이 빠지고 있었다.

충렬왕은 불교도였던 제국대장공주가 살아있을 때에는 눈치보며 바람을 피웠지만, 이젠 눈치볼 사람이 없어졌다. <쌍화점>이라는 속요가 원래 민간 속요였는지는 모르지만, 늙고 할 일 없는 국왕이 즐기기에는 딱 좋은 뮤직컬이었다.

쌍화잠이 처음 궁중에 들어온 것은 충렬왕 5년부터였고, 충렬왕은 이 공연 뿐만 아니라 다양한 공연을 궁궐내에서 즐겼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더 자극적인 공연을 찾았고, 왕위를 빼앗겼다가 되찾은 후에는 거의 공연에 미쳐산 듯 하다.

일설에는 충렬왕의 신하인 <오잠>이 왕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쌍화점을 뮤직컬로 개편하여 공연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오잠이 누구일까?

대표적인 <친원파>였다. 그는 고려라는 나라를 원나라에 바치자고 말한 <입성운동파>였다. 입성운동이란, 몽고의 행정단위인 <성>으로 편입하자는 것이었다. 요즘으로 따지면, 미국의 51번째 주로 편입하자는 것과 같다.

이 입성운동은 공민왕 직전까지 집요하게 진행된 운동이었다. 친원파 입장에서는 까질한 고려왕에게 아부하는 것보다는, 몽골 부족에 편입되는 것이 더 빠른 출세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입성책동운동은 <원나라>가 거부하였다. 우리가 나라를 미국에게 넘기자는데, 부시가 거부했다고나 할까? 이유는, 명분과 실리 때문이었다.

고려를 원왕조로 편입한다면, 삼별초의 40년 항쟁을 책임져야 했고, 끔찍한 내란이 일어날 경우 뒷감당도 해야 했다. 또, 고려를 자주국으로 둔다는 것은 고려에 은혜를 입은 쿠빌라이칸의 유언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원 입장에서는 고려를 편입해서 제국화하려는 시기가 아니라, 점령한 중국인들에게 신경써야할 시기였다. 이 입성운동을 행했던 일파는 훗날 공민왕이 시시비비를 따져 척살해 버린다.

아무튼, 친원파 오잠은 쌍화점을 국립 뮤직컬로 만들어 버리곤, 왕의 총애를 받으려 노력하였다.

5. 쌍화점은 변태적인 궁정 공연일까?

쌍화점에 쌍화병을 사러 갔더니 / 회회아비(몽고인, 혹은 아랍인)가 내 손목을 잡더이다.

만약에 이 소문이 이 가게 밖에 번지면(소문나면) / 조그만 어린 광대(심부름하는 아이) 네 탓이라 하리라.

그 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 그 잔 곳같이 난잡한 데가 없다.

삼장사에 불을 켜러 갔더니 / 그 절 사주가 내 손목을 잡더이다.

만약 이 소문이 이 절 밖에 번지면 / 조그만 어린 상좌 네 탓이라 하리라.

그 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 그 잔 곳같이 난잡한 데가 없다.

두레박 우물에 물을 길러 갔더니 / 우물의 용이 내 손목을 잡더이다.

만약 이 소문이 이 우물 밖에 번지면 / 조그만 두레박아 네 탓이라 하리라.

그 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 그 잔 곳같이 난잡한 곳이 없다.

술 파는 집에 술 사러 갔더니 / 그 집의 아비가 내 손목을 잡더이다.

만약 이 소문이 이 집 밖에 번지면 / 조그만 바가지야 네 탓이라 하리라.

그 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 그 잔 곳같이 난잡한 곳이 없다.

쌍화점은 궁중악 대본이었고, 실제 공연은 기생들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여자배우들이 노래, 춤, 미모 등을 뽑내며 남장을 하고 나와 춤을 추었는데, 이것으로 단순히 <동성애 코드>가 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왜냐면, 유목국가인 몽골에서 바지를 입는 것은 단순한 문화적 차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고려풍이 몽골에 유행했듯이, 몽골 양식이 고려에 유행하였다.

   남장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지만, 그것이 곧 변태적 취미라고 몰아붙이기에도 이상하고, 일상적인 동성애 코드라고 보기에도 좀 그렇다. 몽골인들도, 그들과 다른 고려의 사냥술 등을 새로운 문화인 양 받아갔기 때문이다.

쌍화점은 궁중악으로 연출되기 위해 대화식으로 구성되었다. 한명이 <만두 사러 갔더니 내 손목 잡더라>라고 말하면, 다른 한 명이 <나도 가고 싶어..> 하는 식으로 되받고, 후렴구를 같이 노래하는 형식이다.

원래 이 노래가 민중 속요에서 비릇된다고 볼 때는, 왕궁은 우물, 왕은 용 등으로 풍자해서 혼란한 시대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의미짓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 원나라의 지배 속에서 충렬왕 때만 혼란한 시기였을까? 충자 돌림의 모든 왕들은 개혁정치와 자주정치, 그리고 친원파 사이에서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25대 충렬왕은 무능력한 자신을 탓하며 개혁을 실패한 자신을 자책하면서 살았고, 26대 충선왕도 아버지가 죽은 뒤 개혁정치를 하기 위해 <사림원>을 만들었지만, 결국 친원파들이 제공(?)한 미녀들 속을 허우적거리며 고뇌했다. 심지어 유학자 이제현은 충선왕이 사랑한 여자가 다른 곳에서는 창녀와 다를바 없이 즐기고 산다는 거짓말까지 하면서 하면서 왕의 여자들을 떼어놓으려고 노력하였다.

27대 충숙왕은 자신이 사랑한 여자를 버리고 몽골 공주와 살아야 하는 것이 싫어서, 이유없이 몽골 공주를 때리고 구타했다고 한다. 몽골 공주가 골병들어 죽자 17살의 어린 몽골 공주를 데려와 아이를 낳게 했는데, 그 공주도 어린 나이에 출산하다가 죽고 만다. 결국 충숙왕은 몽골 여인들을 학대한 죄로 왕에서 쫒겨나게 된다.

28대 충혜왕은 몽골 공주가 아닌, 고려 여인이 어머니였다. 그러나, 몽골의 정권이 바뀌자 빽없는 충혜왕은 쫒겨났고, 아버지 충숙왕이 다시 왕이 되는 헤프닝이 벌어진다. 충혜왕은 여기에 앙심을 품고, 훗날 다시 왕이 되어 아버지의 부인이었던 왕비를 공개적으로 성폭행하고, 외숙모, 황태후도 욕보인다. 결국 충혜왕은 엽기적인 행각으로 나라 망신을 시킨 죄로 원에 압송당하였는데, 가는 길에 쓸쓸히 죽어 버린다.

충혜왕이 죽고서, 고려의 왕은 친원파가 선출하는 분위기였다. 충목왕, 충정왕은 나이 어린 꼬마였고, 어린 나이에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원에서는 친원파 기철의 누이가 <기황후>가 되어 영향력을 행사했다. 고려는 친원파 세상이었다.

이 때 등장한 공민왕은 왕위계승과 거리가 멀었지만, 원의 노국대장공주와 원의 수도에서 정략결혼을 함으로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공민왕은 이전의 왕돌과 다르게 바람을 피우지도 않았고, 몽골 공주를 적대시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몽골 공주가 죽자 식음을 전폐하고 슬퍼할 정도였다고 한다.

왕호에 <충>자를 사용하는 저주가 없었기 때문일까? 공민왕은 드디어 <충>자 왕들을 따라다녔던 <몽골 여자의 저주>에서 벗어났다. 몽골 공주 외에는 몽골 여인이 없었으며, 유력 신하들과 신돈의 딸만을 귀비로 받아들였을 뿐이다.

혼란한 시기가 서서히 끝나면서, <충>자 돌림 왕돌의 엽기적인 행각도 끝이 났다. 그리고, 조선이 건국되면서 이들 <충>자 돌림 왕들의 행적은 <남녀상열지사>로 기록되어 나쁜 왕의 선례로 거론되었다.

  쌍화점은 단지, 충렬왕 때의 엽기적인 행각만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충>자 돌림의 왕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주었던 좌절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그들은 그토록 몽골 여인이 싫었을까? 몽골 공주들은 부인이 아니라 원의 황제가 보낸 감시인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실제 고려의 역사를 살펴보면 <충>자 돌림의 왕들처럼, 왕권 확보를 위해 치열하게 투쟁한 왕들도 찾아보기 힘들다. 이들은 어떻게든 원나라를 벗어나기 위해 각종 개혁안을 발표했다. 친원파를 대신할 세력을 찾기 위해 유학을 공부하고, 유학자들과 끊임없는 교류를 하기도 하였다. 원나라만 물러가면 만주와 요동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면서 어두운 시기를 참고 견뎌내었다.

  고려 전시기를 통털어 각종 제도 개혁을 가장 많이 발표했던 시기도 이 시기이고, 조선왕조를 건국한 유학 세력이 태동한 시기도 이시기이다. 그러나, 그들의 다양한 개혁은 모두 원나라와 친원파에 의해 실패했으며, 그들은 좌절감에 묻혀 살았다. 몽골 공주에게나 한풀이하면서 살았던 그들의 행적은 <엽기>로 기록되었다. 조선시대에 남겨진 <고려사> 등의 기록은 그들을 방탕한 왕으로 기록하였다.

  언젠가는 공민왕이나 신돈 뿐 아니라, 그 이전 시기의 <충>자 왕들에 대한 평가도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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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상고사와 신채호 선생 (1)

어둠의 시기, 역사를 바라보는 틀은 <민족>일 수 밖에 없었다.

1. 1910년 이전의 신채호....

오늘 소개할 역사책은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 상고사>이다. 먼저, 책의 내용을 소개하기 전에 신채호 선생이 살았던 시기를 간략히 짚어보자.

신채호 선생이 태어난 1880년은 민씨 정권에 의해 본격적인 <개화>가 시작되던 시기였다. 흥선대원군을 대신하여 <일본>으로부터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개화 정책으로 인해, 조선 사회는 술렁이고 있었다.

개화가 사회의 큰 화두가 되었던 그 시기, 동학농민들이 개혁을 외치다 총탄을 맞고 쓰러진 그 시기, 구체제의 모든 것을 버리고 서구식 새 옷을 마련한 1894년의 갑오개혁이 일어난 바로 그 때의 조선... 

그 변화의 한가운데에서 신채호는 19세의 나이로 성균관에 입학하여 유학을 공부하였다.

약관의 나이로 독립협회에서 활동한 그는, 훗날 삼균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조소앙과 함께 <항일 성토문>을 발표하여, 친일파를 규탄하는 운동을 시작했으며, 산동학원을 만들어 교육자로서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1905년에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자진 사퇴하고, 장지연의 황성신문사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그는 객원논설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계몽사상을 전파하려고 했으나, 장지연이 을사조약 반대를 표명한 <시일야 방성대곡>을 발표하면서 신문사 자체가 일본에 의해 탄압받게 되었다. 이후, 황성신문은 무기한 정간당하였고,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1906년, 양기탁과 베델이 이끌어가던 대한매일신보에 들어가 주필로 활약하면서 일본의 침략에 대한 부당함을 다양한 글로 적어 내었다. 초창기 그의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역사논문

   독사신론(讀史新論)

신문논설

   일본의 삼대충노     한일합병론자에게 고함    역사와 애국심과의 관계
   한일합방의 부당       대한의 희망   등...

연재시론

   천희당시화

영웅전기

   을지문덕전    이순신전     이태리 건국 삼걸전

다양한 영웅전기는 그가 <민족주의>를 선호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역사 속의 <민족>이란, 생명체와 같은 것으로 나라는 주체(아我)는 다른 모든 것(비아非我)과 구별되는 실체이다. 우리 역사 속에 살아숨쉬는 영웅들은, 민족이라는 <생명체>를 숨쉬게 한 매개체와 같은 것이다. 영웅이 제시해줌으로서 민족을 계몽하려던 신채호의 초기 계몽사상은, 일제 강점기에 <좌절감>을 느끼던 대중들에게 반항의 힘을 주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반대로 <독사신론>은 위대한 민족의 역사를 부정하면서, 일본에 의지하려는 편협한 개화주의자들을 비판하기도 한다. 개화와 매국은 뭐가 다른 것인가? 일본에 의지해서 선진문물을 받아들이자는 이들이, 일본과의 조약에 서명하고 나라를 일본에 넘기는 것까지 선진문물과 개화로 연결시킨다. 이것은 로마제국에서 노예로 살면서 로마를 찬양한 이들과 무엇이 다른 것인가?

독사신론은, 단군에서 출발한 우리 민족은 <부여>, <고구려>로 이어지는 위대한 시기를 구가했었다고 주장한다. 일본보다 위대한 역사를 가진 민족이 노예근성으로 타락해서는 안된다고 역설한다.

하지만, 1908년 무렵 대한매일 신보에 연재된 이 글들은, 신채호가 민족의 위대함만을 강조하기 위해 적은 글이 아니다. 일본에 의지하여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노예근성이 망국으로 이어졌다는 현재의 상황을 직시하고자, 고대사 이야기를 계속 꺼내고 있는 것이다. <독사신론>의 이야기는 그 이후,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사연구초, 조선상고사 등에서 계속 반복되고 있다.

신채호는 한일합방이 이루어진 1910년까지, 국내에서 다양한 독립운동단체에 가입하거나, 직접 주도하여 친일파들과 항전하였다.

1905년 장지연의 <황성신문>, 1906년 양기탁의 <대한매일신보>에서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는 논설을 지속적으로 실었고, 1906년 대한자강회에서 활동하면서 조선인의 교육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또 국채보상운동을 장려하기 위해 직접 활동에 참가하였으며, 윤치호, 안창호와 같이 결성한 청년학우회의 창립취지문을 작성하기도 했다.

링크 : 신채호가 대한협회 원보에 올린 글(1906) http://historia.tistory.com/189

그러나, 1907년 일본에 저항하기 위해 만든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가 한일합방 무렵부터 일본에 의해 탄압받으면서, 일제강점기 시기 내내 망명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중국으로 망명하면서도 안정복의 친필이 담긴 <동사강목>을 품에 꼭 안고 있었다고 한다.

링크 : 신민회의 설립 취지문 http://historia.tistory.com/188

2. 1910년 이후의 신채호

1910년, 31살의 신채호. 그의 30대는 너무나 암울하고 어두운 시기였다. 독립을 위해 발버둥칠수록 더욱 암담한 현실의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고나 할까?

1910년 안창호와 같이 산둥지방으로 도망간 신채호는 독립운동가들의 모임인 <청도회의>에 참여한 뒤, 독립운동자금을 모아 무관학교를 세우고 <무장독립투쟁>을 할 것을 결의한다.

링크 : 청도회의 <daum 신지식인 검색>

1911년 이동휘와 함께 광복회를 조직하여 부회장을 역임하면서, 청구신문 등 민족신문에 끊임없이 글을 기고하였다. 1913년에는 상하이에 <동제사>를 건립하여 신규식, 조소앙, 박인식, 정인보 등 민족주의 학자들과 함께 조선 독립운동을 알리는 역할을 하고 다녔다. 30대의 신채호가 독립운동과 계몽활동을 위해 노력한 흔적들은 다음과 같다.

1910년

  대동공보 주필, 청구신문 발행

1911년

  광복회 부회장으로 활동

1912년

  권업신문 주필로 국외 조선인 계몽활동

1913년

  동제사 활동 - 박은식, 조소앙, 정인보, 문일평 등과 민족주의 저술활동

1914년

  대종교 동창학교 교사 활동, 조선사 집필 착수, 광개토왕릉비 현지 답사

1915년

  신한혁명단 조직 후 무장독립운동 활동 시작(일본에 의해 실패)

1916년

  소설 <꿈하늘> 집필, 도제사언문 집필(나철 추모)

1918년

  <조선사> 집필, 무오독립선언 33인에 참가

1919년

  3.1운동 국외 참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원 활동, 신대한 주필 활동

1920년

  만주 독립군 단체를 통합한 군사통일촉진회 발기

  1910년대 신채호는, 망명 생활을 하면서도 틈틈이 글을 지었고, 독립운동과 계몽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적어나갔다. 특히 1915년에는 무장독립활동이 독립에 필요하다는 전제하여, <신한혁명당>을 조직하여 1차 무장독립운동을 시도하였으나, 일본의 철저한 감시로 실패하였다.

일찍이 민족 영웅을 통한 애국심 고취에 관심이 많았던 신채호는 직접 광개토대왕릉비를 답사하여, 비석을 일본이 위조했다는 것을 밝혀내고, 그 비석이 가진 의미를 재발견하기도 하였다. 신채호의 노력으로 광개토대왕릉비를 위조한 일본의 만행을 논리적으로 지적할 수 있게 되었다.

링크 : 광개토대왕릉비 비문 조작설(출처 : 조선상고사) http://historia.tistory.com/323

 

 

다음 장에서는 3.1운동이 신채호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으며, 신채호의 사상이 3.1운동 전후로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이야기 해본 뒤, 당시 민족주의자들이 생각한 3.1 운동과 독립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하자. 신채호의 일대기를 정리한 뒤, 3-4편부터는 대표작인 조선상고사에 나오는 신채호 사상을 정리해보면서 마치도록 하겠다. (블로그에 적는 주관적인 글이기에 일부 다른 견해가 있어도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p.s : 요즘 백범 김구선생의 기념관을 짓는 것, 김구선생을 모델로 한 10만원권을 발행하는 것 등이 전면 중지되었다. 신채호는 무정부주의자이고, 김구는 건국을 반대한 빨갱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홍경래, 전봉준은 내란을 일으킨 좌파 빨갱이이고, 안중근, 윤봉길은 테러리스트에 불과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황당함과 짜증을 넘어 색다른 이론을 창조적으로 만드는 그 분들에게 경의까지 표한다.

단, 근현대사 교과서는 만든 사람끼리만 읽어주세요.. 제발..

링크 : 그 분들이 수험을 출제한다면 이런 문제가???

 

역사 이야기 <히스토리아 > http://historia.tistory.com    by 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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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신채호 (비봉출판사,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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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푸른 역사가 신채호
카테고리 아동
지은이 김남일 (창비,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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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그생애와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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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임중빈 (명지사, 19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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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문화사(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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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신채호 (비봉출판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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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의 역사사상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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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신일철 (고려대학교출판부,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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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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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문집(사르비아문고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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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신채호 (범우사,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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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투머리가 유행인가요?

상투머리의 간략한 역사

1. 상투머리의 재발견?

최근 연예인들의 머리 모양을 보면 특이한 상투 모양을 하고 있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웬 상투 머리가 유행??? 하지만 주변머리를 쑥~ 올려서 깔끔하게 단장한 이 머리 모양은 간편하기도 하지만, 잘못 묶으면 뭔가 어색하기도 하고...

특히 여자연예인들, 그것도 아이돌이라고 불리는 연예인들은 이 머리를 통해 귀여움을 강조하는 듯 싶다. 특히 일본에서 간단히 머리를 말아올린 스타일이 우리나라에서는 상투머리라 불리면서 더욱 다양한 스타일로 진화하고 있다. 한국, 일본 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한류의 영향으로 이 머리 스타일을 쉽게 받아들인다고 한다.

일본의 아요이 유우라는 배우로 상징되는 일본식 머리가 한국에 들어와 남성들의 머리 패션으로 자리잡았다.
한국에서 유행하던 서인영식의 바가지 머리와 정반대의 이 패션은 새로움을 추구한다는 맥락 때문인지, 
뒤늦게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원래 인류의 역사에서 머리모양은 기본적인 신체적, 생리적 역할 외에도 미적 기능과 사회적 기능을 함께 하였다. 인류가 의복생활을 시작한 시기부터 머리 모양에 대한 관심은 지속되었으며, 머리 모양은 그 사람의 외관을 표현함과 동시에 그 사람의 신분이 무엇인지까지 가늠할 수 있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인류가 도구를 사용한 이후, 몇만년전의 인류들도 손을 이용하여 머리를 손질할 수 있었으니, 다양한 석기구 중에는 머리를 짜르기 위한 도구도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뼈바늘이 옷을 입기 위한 도구였다면, 갸름한 반달돌칼은 충분히 이발도구로도 이용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청동기 시대에는 동물 뼈로 만든 비녀가 등장하였다.

서기 1900년경, 메소포타미아의 헤브라이족은 범죄를 저지른 이들의 머리를 삭발한 뒤, 죄를 뉘우칠 때까지 머리가 자라는 것을 지켜봐 주었다고 한다. 이 때 이용사들은 재판관이자 죄를 정화시켜추는 신관이었다. 고대인들은 전쟁 등으로 부상을 당한 사람이 있을 때, 머리에 기를 불어넣어주는 것이 치료법이라고 믿었고, 머리 카락은 우주의 기가 주입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실제로, 그러한 관점에서 머리모양을 다듬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 나라의 머리 역사를 보면 머리카락을 아무 이유없이 다루지는 않았던 것 같다.

2. 고구려의 상투틀기

사마천의 사기에 보면, 위만이 상투를 하고 조선에 들어왔다고 말한다. 위만이 상투를 튼 것은 조선인임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이 전통이 고구려에 연결되어 초기 고구려인들도 상투를 하였다.

고구려 안악 고분 벽화 사진들(위)을 보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외상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좌) 고구려 고관들 (중) 수박싸움을 하는 병사들 (우) 안악고분의 문지기 모습

고구려의 상투는 일반적으로 외상투가 많았고, 간혹 쌍상투가 보이기도 한다.(중국 집안현 5호 벽화의 문지기 사진) 쌍상투는 생머리를 2갈래로 땋은 뒤, 말아올려 뒷통수의 머리 위까지 올린 상투를 말한다.

(좌) 상투를 튼 석상 (중) 고구려 각저총에 나타난 상투 (우) 신라인의 상투를 보여주는 작품

벽화의 시기를 보면, 오래된 것일수록 상투가 높고, 시기가 지나가면서 상투가 낮아진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정치적 변화 때문이다. 4-5세기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전성기 때 중국 한나라와 다양한 교류를 하였고, 6세기 이후에는 중국 남북조 및 돌궐, 유연 등의 민족과 교류하면서 이질적인 헤어스타일이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점차 가벼운 단발을 하거나 북방식 변발을 하는 모습이 나타나게 된다.

중국 벽화에 나타난 고구려의 상투튼 병사들의 훈련장면(좌)과 복원도(우)

남쪽의 삼한에서는 괴두라고 하여 동글동글하게 말아올린 상투를 틀었는데, 이것이 백제 남성의 머리 모양으로 이어진 듯 하다. 신라는 정수리를 뽀족하게 만든 상투를 볼 수 있으나, 점차 삼한 시대의 머리 모양을 벗어나 독자적인 형태를 이어간 듯 하다. 특히 삼국을 통일 한 이후 지배층은 중국 당나라의 영향으로 화려한 머리 모양을 한 듯 하다. 발해는 <머리를 땋아 길레 늘어뜨렸다>는 기록이 나온다.

3. 조선 시대의 상투틀기

상투를 쓸 때 쓰던 망건

원래 상투는 여진족과 강족, 인도인, 막부시대의 일본 무사, 심지어는 아메리카 인디언에게서도 볼 수 있는 풍습이다. 그러나, 고대 사회의 기록과 벽화를 볼 때 우리 민족 고유의 상투 트는 풍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지역의 상투와 우리의 상투 모습이 확연히 다르기도 하지만, 우리의 상투 풍습이 이들과 관련있음이 입증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말기, 몽골의 침입으로 변발이 성행하였다. 몽골인들은 머리의 앞부분 반을 모두 밀어 버렸는데, 고려인들은 이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따라서, 상투를 트는 풍습은 중지되었지만, 그렇다고 몽골식으로 앞머리를 모두 밀지도 않았다.

조선시대에 이 변형된 변발 풍습이 소위 말하는 <백호치기>로 연결된다. 상투를 틀때 정수리 부분의 중앙 머리(소갈머리)를 깍아 버린다. 가운데 머리가 뻥~~ 하니 사라지면, 주변머리를 가운데로 말아올려 상투를 트는 것이다.

소갈머리를 없애는 것은, 상투 머리의 부풀어오르는 문제점 때문이기도 하지만, 상투를 감싸주는 망건과 동곳이 잘 고정되게 하는 효과도 있기 때문이다. 또, 결정적으로는 머리를 안깍을 경우 여름철에 너무 덥다는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원래 상투는 결혼을 하거나 성인식을 거쳤을 때 올리기 때문에 상투를 올리지 못했다는 것은 성인대접을 받지 못하거나, 양반이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양반이지만 결혼을 못한 이들은 대놓고 상투를 하고 다니기도 했는데, 이것을 <건상투>라고 한다.

<소갈머리 없다>나 <주변머리가 부족하다>는 말도 여기서 유래되었다. 소갈머리는 상투를 틀어야만 생긱는 것이기 때문에, 아이들과 양반이 아닌 계층은 소갈머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문이 미비한 중인들이 능력으로 높은 자리에 앉아있다면 신분 파악을 못하는 놈이기 때문에 <소갈머리 없는 놈>이 되는 것이다.

<주변머리가 없다>는 것은, 상투를 틀지 못한 아이들이 머리를 땋아서 말아올린 쌍상투를 튼 것에서 이야기 된다. 아이들은 주변머리가 아닌 생머리를 땋아서 <새앙머리>를 만들어 다니는데, 만약 주제 파악을 못하고 양반집 자제와 같은 머리를 하는 평민이 있다면 눈치, 코치도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4. 단발령

상투가 사라진 것은 1895년 고종황제의 단발령에 의해서이다. 이 때, 유생들은 <부모님이 주신 머리를 베는 것은 오랑캐의 풍속>이라고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따라서 단발령은 국내 여론을 고려해 일부만 실시되었고, 성년식을 거친 유생들이 몰래 상투를 하는 것까지 제재하지 않았다. 실제로 상투가 사라진 것은 1910년 한일합방 때였다.

반면, 상투가 사라진 조선 사회에서 유생들은 짧은 머리를 부끄러워 해서 모자를 쓰고 다나기 시작했다. 신여성들이 다양한 악세사리로 첨단 패션을 보여주고, 개화파들이 멋진 양복과 구두를 뽐낼 때 이들의 유일한 악세사리는 머리를 가리는 모자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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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견문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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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대는 낙서 세계사 (9)

아우구스티누스(1) : 마니교를 믿었던 기독교의 성자

1. 한 교부의 투쟁 : 고백록

354년. 11월 13일.

성 아우구스티누스

기독교  교부 가운데 최고의 사상가가 아프리카에서 태어났어. 그의 이름은 <아우구스티누스>. 교부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사람이지. 오늘은 너무나 유명한 이 사람을 주물럭 거리면서 고대라 불리던 서양 사회가 <기독교 사회>라고 불리는 시기로 넘어가는 이야기를 전개할거야.

사실, 그는 앞장에 이야기했던 <테오>만큼 종교가 절박하게 필요한 사람은 아니였어. 그렇다고, <갈라>처럼 기독교를 수호해야할 의무가 있는 사람도 아니였고, <히파티아>처럼 학문적 신념이 견고한 사람도 아니였지. 그런 그가 왜 기독교 철학을 집대성한 최고의 성인이 되었을까?

그의 인생과 사상을 알기 위해서는 그가 스스로 인생을 돌아보면서 적은 <고백록>을 보면서 이야기를 전개할 수밖에 없어.

성 아우구스티누스 교회

<고백록>은 그의 기억에 의존해서 적은 것이기 때문에 정확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그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거든.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5세기 이후 기독교 사회가 그의 <논리적인 사상> 뿐 아니라, <허무맹랑한 주장>까지도 다 수용했기 때문에, 더욱 더 그의 마음을 자세히 읽을 수밖에 없지.

그런데 말야. 그를 보통 <교부> 철학의 아버지라고 부르잖아? 그럼 먼저 <교부>가 뭔지부터 알아야겠지? <교부>는 <테오시대>를 살면서 국교화된 기독교 사회를 수호하기 위해 이교도와 싸운 사람들을 말해. 근데, 교부들이 주장하는 <이교도>란 <주신>이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만을 지칭하는 게 아냐. <테오>가 종교를 통해서 로마 사회를 통일하려고 했고, 이민족을 융합하려고 했잖아?

교부들은, 테오가 주장한 것과 그 이후 로마 황제들이 주장했던 <정통적인 기독교> 교리를 만든 사람들이야. 따라서, 자신들과 다른 기독교 교리를 주장하는 자들을 배척하고, 이단으로 만들었던 자들이지. <테오>시대에 수많은 기독교 수호자들이 있었고, 그들은 나름대로 하나님을, 예수님을 정의내리려고 했어. 교부들은 그 수많은 기독교 수호자들과의 논쟁을 승리하면서 이후 기독교 철학을 정립한 사람들이야. 교부들과의 논쟁에서 져 버린 기독교 주교들은 이단으로 분류되어 유럽사회에서 떠나야만 했지.

자, 그럼 기독교 최고의 교부 이야기를 통해, 로마 사회에서 게르만 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한번 살펴보도록 할까?

2. 신학적 사고보다 철학적 사고를 중시했던 아이.

354년의 아프리카.  로마보다도 더 오랜 역사를 가진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

이집트 문명을 접하면서, 지중해의 상권을 장악했던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는 로마라는 나라가 제국으로 발전하면서 로마의 속주가 되었어. 한니발 장군 이야기 알지? 코끼리떼를 몰고 알프스 산맥을 삥 돌아 로마를 공격했던 카르타고의 명장 말야. 카르타고는 로마 제국과 3차에 걸친 포에니 전쟁을 치룬 끝에 로마의 속주가 되었지.

속주란, 로마의 직할 지배 지역이 아닌 식민지를 말해. 로마의 속주 중 유럽을 벗어난 지역엔 아주 큰 속주가 2개 있었지. 로마는 지중해 남쪽 카르타고를 무찌르면서 <아프리카>라는 이름의 속주를 만들었고, 페르시아를 무찌르면서 <아시아>라는 이름의 속주를 만들었지.

4세기... 로마의 속주인 북아프리카의 알제리 지방. 당시에는 그곳을 <누미다아>라고 불렀지. 그곳에 <히포레기우스>라는 항구가 있었어.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근처의 <타가스테>라는 곳에서 태어났지.

<아우구스>의 아버지 <파트리키우스>는 로마제국을 위해 봉사하는 세금징수관이었어. 당시 아프리카에서는 로마제국의 명령에 따라 <크리스트교>를 보급하려는 자들과, <이단교>를 믿는 자들이 있었는데, <아우구스>의 아버지는 <마니교>를 신봉하고 있었지. 반면, <아우구스>의 어머니 <모니카>는 너무나 열정적이고 경건한 <크리스트교 신자>였어. 훗날, 기독교에서 <삼현모>라고 부를 정도의 독실한 분이었지.

그런데 말야. 4세기의 카르타고는 분위기가 참 애매한 곳이었어. 로마의 속주였으니 기독교 사상이 들어왔을테고, 아프리카 특유의 전통 사상과 이교사상도 혼합되어 있었지. 지중해의 해상국가이니 무역에 눈을 뜬 현실적인 상인도 있었고, 로마를 위해 충성하는 관료들도 존재했지. 카르타고는 로마로 가는 교통의 요지이자 아프리카의 토속 물질문명, 상업적인 오락시설들이 섞여있는 문명의 집합소같은 곳이었지.

<아우구스>의 아버지는 아들을 <공무원>으로 만들고 싶어했어. 세금징수관보다 높은 <법관>을 만들면 물질적으로 풍요로울 것이라고 생각했지. <아우구스>는 6살 때 문법학교에 입학해서 초등 교육을 받았어.

그런데, 이 아이가 의외로 똑똑한 거야. 맨날 장난질만 하고, 노는 것만 좋아하는 아이같은데도, 암기를 잘하고 웅변술도 뛰어났던거지. 어머니는 아이를 기독교 신앙에 따라 엄격하게 가르치려고 했지만, 아버지 생각은 좀 달랐어. 아이를 더 공부시켜야겠다고 생각한거야. 그래서 365년. <아우구스>는 중등학교 수준의 공부를 하기 위해 <마다우라>로 갔고, <아플레아우스>라는 이름있는 철학자 밑에서 공부하게 되었지.

하지만, 16살때 학비 문제로 공부를 중단한 채 고향으로 돌아오게 돼. 이 때를 <아우구스>는 방탕한 생활이 시작되었다고 말하였지. 친구들과 모여서 남의 집 정원에서 배를 훔쳐먹기도 하고, 불량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기도 했고, 여자 아이들을 괴롭히기도 했지.

열받은 아버지는 아들을 빨리 결혼시켜 버리려고 했는데, 어머니가 반대했어. 아들이 <죄>가 무엇인지를 알면 하느님의 곁으로 돌아오리라는 믿음 때문이었지. <아우구스>의 부모는 여기 저기에서 학비를 구해서 아들을 다시 대도시 <카르타고>로 유학보내었어.

뭐... 지금도 <조기 유학>같은 거 보내면 결말이 어떤건지 잘 알잖아? 문제아가 부모 곁을 떠나서 혼자 대도시에서 살면 무슨 짓을 하고 놀겠어? 19살에 카르타고 학생이 된 <아우구스>는 신학이나 법학에는 큰 관심이 없었어. 오히려 인간이 뭔지, 고독이 뭔지를 설명한 키케로의 글 같은 걸 좋아했지. 그가 좋아했던 철학 서적은 <호르텐시우스>였어.

그 외의 시간에 그가 한 일은 <연애 사업>이었지. 피끓는 젊은 유학생들이 해야 할 일은 오직 그것이라고 생각했나봐. 그가 생각한 인간이란,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할 정도로 나약한 존재에 불과해. <육체에 대한 욕망>은 인간이 제어할 수 없다고 생각한 시절이었어. 만약, 육체에 대한 욕망을 제어할 수 있는 학문이 있다면 그것은 철학 뿐이었지.

그렇다고 그가 큰 철학적 포부를 가진 것도 아니였어.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철학을 공부하는 게 아니라, 어렸을 때 배운 <신학>같은 학문이 너무 비이성적이고, 논리에 안 맞아서 반발심에 철학책을 읽은 것이었거든.

20살. 그가 소중히 여겼던 것은 여자 앞에서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논리적인 웅변술, 인간 육체가 지니는 한계에 대한 철학적 고민 같은 것 뿐이었어.

3. 마니교 : 육체와 이상 사이의 갈등

19살 때, 그는 노예 출신의 천한 여자와 동거를 시작했고, 얼마 후 아들까지 낳게 되지.

그는 고민했어. 자신이 생각하는 철학적인 이상은, 항상 육체적인 유혹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진다는 것을... 그리고 젊은 시절부터 생의 마지막까지 그를 따라다닌 인생의 고민은 인간 육체의 나약함을 극복하는 것이었고, 그 핵심이 바로 성(sex)과 관련된 것이었지.

<아우구스>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택한 종교가 바로 <마니교>였어.

크리스트교는 신앙에 대한 <귄위>만으로 신도들을 설득하려 했기 때문에 비이성적이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마니교는 우주의 원리를 <이성적인 사고방식>으로 설명해주려고 했어.

마니교의 핵심 교리는 <금욕주의>였지. 마니교의 고위 성직자들은 모두 선택된 자들로서 <금욕>을 실천에 옮긴 자들이었고, 모두가 <독신>이었거든. 육체적인 욕망을 참지 못하는 <아우구스>에게 마니교는 너무나 대단한 종교였어.

자, 그럼 <아우구스>가 젊은 시절 내내 믿었던 마니교가 뭔지 한 번 살펴볼까?

마니교는 3세기 페르시아에서 예언자 <마니>가 만든 종교야. 3세기 페르시아는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서아시아 최강의 통일국가였지. 마니교는 한마디로 말하면, 모든 종교사상의 융합체야.

로마 제국의 예수 중심의 크리스트교 사상, 페르시아의 국교였던 조로아스터교, 인도의 불교까지 합쳐진 고대 종교의 종합 선물세트였지.

쉽게 말하면, 태초의 <신>이 있었는데, 그 신이 구원을 약속했어. 구원의 약속을 아담이 들었고, 아브라함이 신에게 구원을 약속 받았지. 그 구원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예언자들이 지상에 내려오게 되지. 그 예언자들이 예수, 부처, 조로아스터 등이야. 그런데, 구원의 약속을 마지막으로 전한 최후의 예언자가 바로 <마니>야.

그럼 마니가 남긴 최후의 예언은 뭐냐... 그건 유럽의 그노시스파나 조로아스터교에 나오는 <빛신과 어둠의 신의 대결>이야. 조로아스터교의 예언자인 조로아스터가 말하길, 세상에는 빛의 신인 <아후라 마즈다>와 악의 신인 <아리만>이 투쟁한다 - 라고 했거든. 그런데 최후의 성전에서 빛의 신이 이기면, 인류는 구원을 받는 거야. 그게 바로, 신이 남긴 구원의 약속인거지. 따라서 <마니>는 빛의 사도, 또는 빛을 비추는 예언자라고 불러.

   그리고, 마니는 그 구원이 유대인만의 구원이 아니라, 부처와 조로아스터까지도 포함한 보편적 구원이라고 설명하였지. 유대인민의 종교를 예수가 전 세계의 종교로 만든 것처럼, 마니 역시 모든 이들을 위한 <보편적인 종교>가 있다는 것을 주장한거야.

그런데, 이런 큰 흐름을 가진 방대한 종교는 시간이 지나면 그 교리가 이상해 질 수 있잖아? 후대에 잘못 전달될 수도 있고... 그래서 마니는 자신이 생각한 교리와 계시받은 내용을 책으로 만들어 두었어. 그것이 바로 마니교의 성경인, <생명의 서>, <신비의 서>, <거인의 서>, <샤브라칸> 등이지.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믿는 페르시아는 <마니교>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어. 조로아스터교랑 비슷한거 같으면서도, 핵심 교리는 <기독교와 불교>에서 따왔고.... 결국 페르시아는 <마니교>가 국교를 해치는 사악한 종교라고 판단을 내린거야. 결국 마니는 박해를 받고 죽게 되지. 

   마니교는 아까 말한대로 <보편적인> 종교였어. 모든 종교의 좋은 점만 쏘옥~ 합쳐놓았는데, 그것도 앞뒤가 딱맞는 논리적인 내용이니 얼마나 환상적이겠어? 우주에 존재하는 빛과 어둠이라는 물질적인 개념에, 신과 구원이라는 초월적인 개념, 불교의 이론까지 두루 포함한 종교였던거지.

이 종교는 영지주의 이념이 강했던 4세기 이집트 등 북아프리카에서 크게 유행하였고, 서로마, 동로마에서도 많은 신자가 생겼어. 하지만, 교부들이 이단이라고 선고를 내려서 유럽에서 추방하였지.

반대로 동쪽으로 전파된 마니교는, 조로아스터교의 박해를 피해 동으로 동으로 전파되었어. 특히 비단길, 사막길 등 동서교역로를 따라 쭈욱~ 이동해서 중국, 인도까지 전파되었고, 하나의 종교로 인정받기도 했지. 유목국가인 위구르에서는 <국교>로 선포되기도 했어.

하지만, 중국에서 성리학 사상이 본격화될 무렵, 인도에서 이슬람교가 전파될 무렵, 그리고 중앙아시아에서 징기스칸의 유목민족이 서아시아까지 진출할 무렵부터 마니교는 탄압을 받게 되지. 그리고 14세기 무렵엔, 인류의 역사에서 <지나간 종교>의 발자취만 남기고 사라졌어.

바로 이 종교가 가장 융성했던 때가 4세기 아프리카와 로마 제국이었어. <아우구스>는 이 종교를 9년간 믿었고, 또 훗날 이 종교를 이단으로 탄압하게 되지.

<아우구스>가 이 종교에 심취했던 이유는, 이 종교가 가진 <영지주의> 사상 때문이었어.

영지주의란, 타락한 인간의 육체를 <지혜>가 해방시켜 준다고 믿는 사상이야. 마니교는 빛의 세계와 어둠의 세계가 투쟁하고 있는데, 인간의 영혼은 원래 빛의 세계에서 나왔다고 믿거든.

그런데, 살아가면서 인간의 영혼은 점점 때가 묻어서 더려워질 수밖에 없지. 인간이 태어나기 전에는 빛과 어둠이 분리되어 있었는데,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은 빛과 어둠이 같이 존재하잖아. 그래서 빛과 영혼은 타락할 수밖에 없지. 만약, 빛의 속성인 영혼을 잘 지키는 사람이 있다면 죽어서 천국에 갈꺼야. 하지만, 육체적인 것에 푹 빠져있고, 본성이 더러운 것인 성(sex)에만 집착한다면 천국에 갈 수 없어. (마니교는 간음 뿐만 아니라 출산 자체도 육체적인 것으로 분류하고 있었어.)

  
천국에 못가면 어떻게 되지? 그 땐 브라만교와 불교의 윤회설을 적용하면 되지. 더러운 육체로 천국에 갈 수 없으니, 다시 더러운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 태어나겠지. 그런 인간은 또 다시 성(sex)에 집착하게 되고, 영원한 환생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는 거야.

결론적으로 말하면, 악이란 자기의 내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규칙대로 진행되면서 생긴 <악의 원리>에서 나온다는 거야. 선과 악은 외부에 이미 존재하는 것이고, 인간은 그 악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영혼을 닦아야 한다는 것이지.

<아우구스>는 마니교회가 참된 <기독교 교회>라고 믿었어. 육체적 욕망을 고민하던 그에게 마니교의 완벽한 철학적, 논리적 이론은 너무나 감동적인 것이었지.

하지만, 그는 9년이 지난 뒤.... 이 종교를 떠나게 돼. <아우구스>의 지적 수준과 철학적 소양은 한참 높아졌는데, 마니교 성직자들은 <아우구스>의 철학적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했거든. 단지, 육체를 멀리하고, 금욕적인 생활만을 하라는데.... 무조건 그러라는 건 결국 귄위적인 기독교 교회와 같은 것이잖아.

그리고, 또 하나... 그는 마니교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면서도, 생활은 그렇지 못했어. 카르타고라는 도시의 향락적인 생활과 도시적 분위기는 너무 멋진 것이었거든. 28살에 마니교를 빠져나온 <아우구스>....

이제 그는 어디로 향하게 될까?

아이러니 하게도, <아우구스>는 남은 인생동안 자신이 겪었던 마니교, 영지주의, 윤회설 등을 모두 부정하였고,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기독교의 이론을 만들게 되지.

그럼, 다음 이야기에서 계속 진행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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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대는 낙서 세계사 (8)

히파티아 : 불타 버린 그리스 철학자의 시대

1. 로마 vs 알렉산드리아

오늘 설명할 여성 철학자는 시대를 잘못 태어난 죄로 비참하게 죽은 인물이야. 지난 장에서 설명했던 <테오>보다 20년 늦게 태어났고, 기독교 교부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이지.

오늘 하려는 이야기는 <그리스의 전통 유산>을 가진 인물이 <테오>의 시대를 살아가다가 <갈라>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역사의 먼 뒤안길로 사라진 이야기이지. 이 인물은 역사적으로 크게 알려져 있지 않았는데, 최근에야 로마의 역사책 한 귀퉁이에 등장하기 시작했어.

370년... 히파티아가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어. 그녀의 아버지는 테온인데, 알렉산드리아 대학의 수학 교수였지.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학문의 중심지였어. 로마 제국의 동부 교통로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만큼, 동양과 서양의 철학, 종교, 사상, 자연과학이 뒤섞인 문명의 땅이었지.

그런데, 히파티아가 유년을 살았던 시기의 로마는 엄청난 위기를 맞아하고 있었어. 지난 장에서 이야기했지? 동로마의 발렌스 황제가 게르만족들에게 대패해서 죽고, <테오>가 황제가 되어서 게르만을 로마백성으로 통합하려고 했다고... 그리고, 그 통합 정책은 크리스트교를 통한 민족 대통합이 핵심이었다고...

로마 제국은 크리스트교를 국교화 시킨 자들과, 전통신을 믿는 자들의 전장으로 바뀌고 있었어. 황제가 국가 통합을 위해 내세운 크리스트교는 점차 체계적인 교리를 잡아가면서 <전통신과 전통 철학>을 위협하고 있었지.

로마에서 철학이란, 점차 신학을 지칭하는 말이 되가고 있었어. 어느 날부터인가 진리는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 되어 버렸고, 민중을 계몽하는 일은 교회가 도맡아 하게 된 것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리아는 <전통 학문>의 중심지로서 꿋꿋하게 갈 길을 가고 있었어. 하지만, 동서 학문의 중심지이자, 그리스 철학의 보루였던 그곳에도 <크리스트교 국교화>의 바람이 불면서 한 여성 철학자를 비극적인 죽음으로 끌고가게 되지. 그녀의 시대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2. 알렉산드리아의 여성 철학자

그리스의 저명한 철학자인 플라톤이 이렇게 말했다고 해.

사람은 동굴 속에 갇혀있는 것과 같다. 동굴 밖에서 누군가 지나간다면 벽을 보고 있는 우리는 누군가의 그림자를 보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그 그림자를 실체라고 생각하지만, 결국 실체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지나가 버린 어떤 것이다. 우리는 본질인 <이데아의 세계>를 보지 못하고, 눈으로 본 것만을 생각한다.

라고...

알렉산드리아 대학에서 히파티아가 배우고 자란 것은 그런 것들이였어. 문명은 수많은 지식을 남겨주지만, 그 지식을 형성하고, 받아들이면서 절대적인 <이데아>가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은 사람의 몫이라는 걸...

그녀가 생각한 <신>이라는 것, <종교>라는 건 <실재에 대한 근원>이 무엇인지, <이데아>가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는 것이었지. 그녀는 이런 방법을 알기 위해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과 <비밀 단체>를 만들어서 공부를 했다고도 해. 진리의 궁극적인 발견은 <영혼>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영혼이란 것은 우리의 마음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야.

이렇게 세상에 대한 실제 근원인 <이데아>가 존재하기 때문에, 절대적 진리가 무엇인지, 진리를 이루는 <이데아>의 규칙이 무엇인지 찾아내는 철학이 바로 <신플라톤 철학>이야. 사실, 그녀가 합리적인 수학자, 과학자, 철학자라고 생각하는 건 지금 기준은 아니야. 그녀 시대의 수학은 하늘의 규칙성을 찾아내는 천문학이나 점성술과 연관되어 있었고, 철학 역시 우주의 진리와 <이데아>를 찾는 것이였거든.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자연현상은 만물의 근원을 찾아가는 탈레스식 자연과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철학은 소피스트의 현실 정치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어. 물론, 그 완성은 <이데아>의 세계를 통해 우주와 인간세계의 모든 규칙을 정리한 플라톤에서 이루어지지만....

  내가 하려는 말은, 당시 과학이라는 것 역시 종교적인 것, <이데아>적인 것, 영혼에 관한 것 들이 혼재되어 있는 일종의  신앙이라는 점이야. 그래서 당시 과학은 이중적인 면을 가질 수 밖에 없지. 기독교라는 종교처점 종교성을 가지고, 다른 종교들 속에서 께 살아남던가.... 기독교와 같은 종교에 의해 미신이라는 오명을 쓰고 사라지던가...

  지금 나는 2가지 이야기를 하려고 해. 하나는 기독교에 의해 처참하게 불태워진 신플라톤 철학 이야기를 히파티아를 통해 해보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독교 교리를 완성하는데 이용된 아우구스티누스의 교부 철학을 이야기하려고 해.

그녀의 어린 시절.... 그녀의 선생은 바로 아버지이자 대학교수였던 <테온>이었어. 아버지의 교육으로 그녀는 알렉산드리아가 자랑하는 모든 철학적, 과학적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지.

그녀는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이 사용했던 웅변술과 수사법도 배웠어. 여성답게 미소지으면서 상대방의 기분에 맞추어 목소리 톤을 조정하는 법, 열정적인 톤으로 사람을 감동시키는 법, 소크라테스와 같이 문답을 통해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는 법 등등... 그리고,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인 이라면 배워야 할 승마, 체조, 등산 등으로 아름다운 육체를 가꾸었고, 주변 지역으로 여행을 떠나는 등 다양한 교육을 받았지. 사람들은 그녀를 학문의 여신인 <뮤즈>라고 칭송하기도 했어.

가장 효과적인 교육 덕분일까? 그녀의 지성과 미모는 널리 알려졌고, 알렉산드리아의 수학, 철학 교수가 되었지. 서양 역사상 최초의 수학자라고 봐도 될 것 같아. 과거 그리스의 민주주의도 여성에게는 참정권 조차 주지 않았잖아.

그녀는 수많은 제자들을 거느렸고, 뭇 남성들에게 수많은 구애를 받기도 했어. 하지만, 그녀는 <진리와 결혼했다>면서 결혼하지 않았다고 해. 하지만, 그녀의 시대는 <그리스 철학>이 크리스트교 철학에게 자리를 양보해야만 하는 <교부의 시대>였어.

(위) 아테네 학당 (라파엘로작) / (아래) 학당에서 유일한 여성으로 묘사된 히파티아 부분

3. 종교 전쟁의 시대에서...

390년.... 로마에서는 이미 크리스트교를 국교화 하였고, 제우스교를 믿는 수많은 군인들이 <테오>에 의해 박해를 당하던 시기였어. 문제는 <그리스 철학> 역시 크리스트교와 융합하기 힘들었다는 점이지.

크리스트교가 그리스, 로마의 전통 종교, 전통철학과 싸우는 동안, 이 둘은 합의점을 찾지 못하였어. 교회에서는 <그리스 수학>을 이교신앙으로 보기도 했거든.

고대의 수학이라는 것은 사실, 종교적인 부분이 많았지. 수학자들은 하늘의 별의 위치를 연구하는 천문학이나 점성술을 수학이라고 생각했거든. 우리가 <수학의 아버지>라고 알고 있는 <피타고라스>있지? 사실 그 양반도 원래는 <오르픽교>를 믿는 종교인이었어. 오르픽교는 영생의 신 디오게네스를 믿는 종교인데, 불멸과 부활이라는 것을 믿는 종교라는 점에서 후대 기독교의 교리체계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고 말하는 종교이지.

중요한 것은, 크리스트교의 입장에서 그리스 철학과 수학, 과학을 인정할 여유가 없었다는 점이야. 395년, <테오>가 죽은 뒤, 전통 종교주의자들과 크리스찬 사이에는 크고 작은 분쟁들이 계속 발생했고, 거기에 유대인들까지 종교문제로 뒤섞여서 문명의 도시 알렉산드리아도 <종교 폭동>이 종종 일어나곤 했지.

기독교라는 종교가 전통주의자들을 억누르려는 사회에서 인기있는 <얼짱 여성 철학자>의 존재... 교회가 보기에 얼마나 눈에 가시였을까?

그녀의 집에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힘좀 쓴다는 부자들과 정치인들이 찾아들었어. 그녀의 철학은 논리정연하고, 과학적이었어. 복잡한 수학적 1,2차 방정식도 그녀의 손에서 쉽게 해결되었지.(그녀의 천문학적 계산법과 원추곡선에 대한 이론은 17세기 뉴턴 시기까지 더 이상의 발전이 없었다고 해.)

5세기, 이제 크리스트교의 시대가 왔어...  사람들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교회를 찾아가야만 하는 시기가 왔어. 철학자가 인생을 상담하고 사회를 이끌어가는 시기는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 살았던 옛날의 일이여야 해. 인생의 기쁨과 슬픔은 모두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해.

그런데, 이렇게 변해가는 시기에, 대중의 사랑을 받는 <철학자>는 존재해서는 안돼. 그것도, 여성이라는 비천한 존재가 대중의 사랑을 받는 다는 것은, 당시 기독교의 입장에서 용서가 되는 일이 아니였지.

4. 그녀의 죽음.

그녀는 알렉산드리아의 총독 오레스테스와 가깝게 지내고 있었어. 유명한 대학교수인 그녀가 총독과 아는 사이라는 것이 큰 문제가 될 것은 없었지.

그런데 문제는 이 총독이 <교회>와 대립하고 있다는 것이였어. 총독 오레스테스는 알렉산드라아 내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을 보호하면서, 도시의 행정적인 문제들을 히파티아에게 물어보곤 했지.

<테오>가 죽은 뒤, 로마 제국 곳곳에서는 크리스찬과 전통주의자들의 충돌이 곳곳에서 발생했는데, 알렉산드리아에서는 <히파티아>가 희생양이 된거야.

총독에게 불만이 많았던 과격한 크리스찬들은 비난의 화살을 <히파티아>에게 돌렸지. 사실, 당시 전통주의 철학자와 기독교 교부 중에서도 철학적 교류를 하는 경우도 많았고, 히파티아는 기독교 지도자들과도 친분이 있었어.

하지만, 412년.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 온 <키릴루스>는 이러한 분위기를 인정할 수가 없었지. 격동의 시대에 교회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전통 철학자가 지도자가 되는 것>을 막아야만 했을 거야.

키릴루스는 히파티아가 마차를 타고 시내를 도는 것을 즐긴다는 것을 알고, 그녀를 납치했어. 마차에서 내린 그녀는 무자비한 폭행을 당한 채 교회로 끌려갔지. 히파티아는 교회 안에서 옷이 모두 벗겨진 채로 살을 찢기는 고문을 당했어. 그리고 죽기 전에 화형에 처해졌지.

히파티아의 최후(1885년작)

5. 네스토리우스파의 먼 여행....

415년... 그녀는 어이없게도 불에 타 죽고 말았어.

그리고, 그녀와 같이 전통 철학, 과학을 신봉했던 이들은 이단이라는 딱지가 붙게 되지. 이 당시, 알렉산드리아처럼 과학과 역사, 철학이 발전했던 지역의 크리스찬들은 과학의 힘을 부정하지 않았어.

특히, 예수를 철학적으로 생각하고 연구한 이들은 예수가 과연 신성만 가지고 있었을까? 그 역시 생물학적인 육체를 가지고 지상에 내려왔기 때문에 <인간으로서의 예수>의 모습도 당연히 존재하지 않을까?.. 라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지.

이렇게 과학적 사고를 가지고, 예수의 존재를 생각했던 이들을 <네스토리우스파>라고 해.

네스토리우스는 예수의 인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기존 교리와 팽팽하게 맞섰지. 하지만, 네스토리우스는 에페수스 공의회에서 이단이라고 판정받아. 그런데, 네스토리우스가 이단이라고 끝까지 주장하면서 그들을 몰아낸 자가 바로 히파티아를 죽인 <키릴루스>였어.

결국, 히파티아의 죽음은 단순히 지성과 미소를 갖춘 여성 철학자를 죽였다는 것에서 끝나지 않아. 철학과 과학의 이념이 존재하는 한, 전통주의자들과 끝없이 싸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은 교회의 극단적 분위기를 보여주는 거야.

히파티아가 죽고, 네스토리우스가 탄압당한뒤 반세기... 450년경.

수많은 과학자들과 지식인들은 전통 교리의 탄압에 못이겨 동쪽으로... 동쪽으로 이동하게 되지. 시리아와 요리단 등 서아시아에 정착한 네스토리우스파 교인들은 <경교>라고 불리면서 아시아 크리스트교 일파가 되었어. 경교는 중앙아시아를 거쳐, 훗날 중국 당나라까지 전파되었고, 만주와 신라에서도 성모마리아상이나 십자가상이 나왔다고 해. (경주 기독교 박물관을 만드신 분의 말에 의하면....)

히파티아가 죽은 415년. 고대 철학은 이제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혀지게 되. 알렉산드리아는 로마가 망한 뒤 서유럽의 교인들에게 잊혀지게 되지. 그리고, 히파티아가 죽을 무렵 기독교 철학을 완성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을 적어서 기독교 전통 교리를 완성하게 돼...

신국론은 <인류의 역사는 곧 하나님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역사를 쓰고 있지.

이제 플라톤의 철학도 교회의 철학으로 흡수당했어.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 철학은 이슬람 지역으로 넘어가서 몇백년 동안 유럽인들의 머릿속에서 사라지게 돼. 이슬람과의 십자군 전쟁이 벌어진 먼 훗날이 오기 전까지는....

그럼... 다음 편에서는 다른 인물을 다뤄보자. 이번엔 기독교를 전통신과 그리스철학에서 분리해서, 독자적인 체계로 만든 <교부 철학의 아버지>, 아우구스티누스의 이중적인 인생에 대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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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대는 낙서 세계사 (7)

<테오도시우스>의 이루지 못한 제국의 꿈

1. 게르만의 이동과 몰락하는 로마

오늘 이야기는 테오도시우스에 관한 이야기야. 우린 이 인물에 통해 크리스트교가 로마의 상징인 <독수리>를 제압하게 되는 이야기를 하게 될 거야. 독수리는 전통신인 제우스의 상징이기도 했던거 알지?

이 이야기는 로마 제국의 전성기였던 기원후 2세기부터 시작하지.

역사에서는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4세기 무렵>이라고들 이야기하지. 그런데, 그건 대이동을 말하는 것이고, 실제로 게르만 족의 일파가 로마 사회에 진출하려고 했던 건 2-3세기 부터야.

아참, 게르만의 이동은 알고 있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게르만족의 이동은 멀리 아시아에서 시작되었다고 하지. 중국에서 가장 위대한 황제 중 한명으로 여겨지는 한나라의 <한무제>는 동아시아 전역을 중국의 지배권에 두려고 했어. 동으로는 고조선을 멸망시켜서 한사군을 설치했고, 남으로는 한서사군을 설치하는 등 지배 영역을 넓히고 있었지.

그런데, 한무제도 해결하지 못한 골치거리가 바로 북방의 <흉노>야. 흉노는 중국식 표현이고, 사실은 <훈>족이라고 부르는 민족이지. 원래 중국애들이 주변 민족을 낮춰 부르고, 자기네만 높여 부르는 <중화 사상>인지 뭔지가 강하잖아. 중국 역사서에 나오는 동이, 서융, 남만, 북적... 이런 말들이 다 오랑캐를 지칭하는 말이듯, 흉노(匈奴)는 한자 그대로 흉약한 노예같은 넘들이라고 중화인들이 지칭한 말이지.

뭐 그게 중요한게 아니라... 한무제가 결국 훈족을 토벌했다는 사실이 중요해. 한나라에서 밀린 훈족은 중앙아시아로 진출해서 월지국을 공격했는데, 그 결과 인도에 생긴 왕조가 쿠샨 왕조야... 위 표의 빈칸 (1)에 쿠샨 왕조가 들어가면 되겠지?

남하하지 않고 서부로 계속 진출한 일부 훈족들은 동유럽과 북유럽에서 놀고 있던 게르만 민족들을 공격하게 돼. 훈족에 밀린 게르만 애들은 로마로 넘어와서 용병 생활을 하게 되지. 하지만, 훗날 게르만 족들이 로마 곳곳에 게르만 국가를 세워 버리면서 서쪽 로마는 결국 멸망의 길을 걷게 되고, 거기에 훈족의 왕까지 서로마를 협박하게 되지...

여기까지가 교과서적인 설명이야.

그런데, 사실 4세기 이전에도 게르만의 이동은 있었어. 중국 진나라의 유명한 <진시황제> 알지? 그 양반도 골치아픈 흉노족이랑 열심히 싸우다가 만리장성까지 만들잖아.

그리고 게르만 애들도 뭐 꼭 훈족에게 밀려서 로마로 갈 필요는 없었겠지... 조금씩이지만 이미 로마 영내에 게르만 용병들이 존재했거든. 실제로, 게르만 족의 무서움을 로마가 뼈져리게 느낀 건 378년 동로마와 게르만족의 일파인 서고트 족의 대 전투부터야.

378년... 게르만족의 일파인 서고트족은 서쪽으로 밀고 들어오는 훈족의 기마부대에 밀리다 밀리다 로마 제국의 국경까지 도망쳤어. 서고트인들은 울면서 로마 황제에게 애원을 했지.

게르만인 : 제발 도나우강을 건너게 통나무라도 던져주세요. 물에 뜨는 것들을 던져주세요.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학살당할 겁니다.

로마황제 : 내가 너희를 어떻게 믿냐? 모두 무기를 버리고, 아이들을 로마에 맡겨라. 그럼 국경을 건널 수 있게 해주마.

게르만인 : 정말이죠? 약속하신 겁니다. 모두 무장을 해제하고 도나우강을 건너자.

그런데, 서고트인들은 속은거야. 겨우겨우 로마 국경을 넘은 서고트인들을 로마는 학살해 버렸지. 늙은이는 죽이고, 젊은이는 노예로 만들었지. 어린 소녀들은 로마 귀족에게 팔려가고 말았어.

로마의 이민족 탄압은 로마 제국 내에 용병으로 있던 게르만족들을 자극하고 말았지. 서고트족의 난민들과 로마 제국내의 게르만 용병들, 또 노예로 팔려간 게르만인들까지 반로마 운동에 가담하면서 엄청난 전쟁으로 번진거야.

378년... 동로마 황제 발렌스의 로마부대와 게르만족의 부대는 엄청난 대 전투를 벌이게 되지. 그런데 말야. 이미 로마의 국경을 게르만 용병들에게 맡기며, 탱자탱자~ 놀면서 향락에 빠져있던 로마인들이 게르만 투사들을 이길 수가 없었어. 로마를 지탱하던 제국의 부대는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고, 황제마저 죽어 버린 거야.

4세기... 바야흐로 게르만 용병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지. 이 때 죽은 황제를 대신해서 동로마 황제로 등극한 것이 바로 <테오도시우스>, 이 사람이야. 379년의 일이지.

2. 군인 황제의 탁월한 군인 정치

349년... 스페인에서 <테오도시우스>가 태어났지. 그의 아버지 <플라비우스>는 로마의 뛰어난 장군이었어. 일단 이름이 기니깐 대충 <테오>라고 부르자.

테오는 아버지를 따라 수많은 전장을 누비고 다녔어. 특히 374년 사르마티아족을 무찌를 때는 선두에 서기도 했지. 문제는, 아버지가 너무 뛰어난 장군이라는 점이야. 테오의 아버지는 로마의 귀족들의 질투와 시기 때문에 죄를 뒤집어쓰고 사형을 당했지. 이 사건으로 테오는 싸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치적 처세술>이라는 점을 배웠을거야.

서고트족에게 동로마 황제가 죽자, 서로마의 <그라티아누스> 황제가 테오를 동로마 황제로 임명했어. 게르만 부대를 제압하려면 테오같이 전장에서 뼈가 굵은 장군이 필요했던 거지.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이민족들을 다스리기 위한 <처세술>이 그라티아누스보다 뛰어났다는 점이야.

그라티아누스 : 지금, 게르만족들 때문에 로마는 위기에 빠졌네. 자네를 동쪽 황제로 임명한다면, 나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겠는가?

테오 : 사치와 향략에 빠진 로마의 군대로서는 게르만족을 막을 수 없습니다. 로마군대와 튜튼족, 게르만족을 모두 군에 포함시키고 그들을 로마의 시민으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라티아누스 : 로마인들은 게르만인들을 야만인이라고 하여 무시하네. 수많은 이민족들이 어떻게 로마인으로 융합될 수 있겠는가?

테오 : 일단, 게르만인을 <변방의 야만족>이라고 차별하는 로마인의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그들은 뛰어난 군인들입니다. 싸움보다는 협상을, 차별보다는 화해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로마 시민이 되었을 때, 그들을 로마로 흡수할 수 있는 공통된 사상이 필요합니다.

그라티아누스 : 그것은 무엇인가?

테오 : 바로, 콘스탄티누스가 제국 통합을 위해 제시했던 <크리스트교>입니다.

바로 그거야. 군인 황제는 테오는 로마인과 튜튼족, 게르만인을 모두 동등한 군인으로 대우하면서, 그들에게 크리스트교를 통한 <로마시민 사상>을 강조하려고 한거야.

379년... 왕이 된 바로 그 해. 테오는 크리스찬들과의 관계를 해결하려고 했어. 하지만, 제우스교를 믿는 로마 군인들도 문제였고, 아리우스파, 아타나시우스파 등 다양한 크리스트교 교파 문제도 복잡했지.

380년. 테오도시우스는 아주 심한 병을 앓더니, 신의 도움으로 살아났다고 말하곤 <세례>를 받았어. 그리곤 <로마의 모든 백성은 크리스트교로 통합해야 한다>는 칙령을 발표해 버리지. 이것이 역사에서 유명한 <크리스트교의 국교화>야.

사실, 크리스트의 국교화와 가톨릭이란 말은 <콘스탄티누스>가 먼저일 수도 있어. 그러나 콘스탄티누스는 <종교 공인>이라는 애매한 표현을 사용했고, 가톨릭이란 표현을 당대에 사용하지는 않았어. 후대인들이 <콘스탄티누스>가 가톨릭이란 말을 사용했다고 후대 문서에 남긴 것 뿐이지. 그래서 최초의 <국교화>, 최초의 <가톨릭>은 테오라고 말하곤 해.

381년. 테오는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소집해서, 문서로 만들었던 <국교화>를 공식으로 선포해 버리지. 그리고, 로마 교황 다음으로, 콘스탄티노플의 동로마 주교가 가톨릭 세계의 2인자라고 결정했어. 이제 서로마 동쪽의 교회는 모두 콘스탄티노플에서 해결하도록 조치를 취한 거야.

3. 크리스트교 수호 작전

383년. 제우스교를 숭배하는 막시무스가 서로마, 동로마 황제를 부정하면서 <정통 로마 군인> 시대로 돌아갈 것을 선언했어. 로마의 전통신인 제우스와 독수리를 상징으로 하는 반란군은, 로마 주변을 잠식하더니 서로마에 쳐들어갔지.

서로마의 어린 황제 발렌티니아누스는 동로마로 피신해서 테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 그러나, 테오는 서로마를 도울 수가 없었어. 로마군, 게르만군, 튜튼군 등을 통합해야 했기 때문에 대규모 전쟁에 나갈 시기가 아니였다고 판단한거야.

기독교 이념을 보급하고, 군을 하나의 사상으로 통일한 뒤, 388년.... 테오는 막시무스와 싸우기 위해 서로마로 향했어. 그리고 대승을 거두었지.

390년... 겨우 기독교 이념을 보급했다고 생각했는데, 또 하나의 큰 사건이 생겨. 그것은 역사에서 <테살로니카 폭동>이라고 불리는 사건이었지. 지난 번에 <빵과 서커스> 정책을 설명한 적이 있지? 그것 때문에 발생한 사건인데, 사건의 전말은 이런 거야.

게르만족들이 로마의 국경을 지키는 동안, 시민권을 얻어서 군대를 안 가게 된 로마인들은, 투기장에서 노예들의 싸움이나, 연극 등을 즐기고 놀았어. 저번에 이야기 했지? 3s 정책 말야.... 스포츠, 스크린, 섹스를 3대 산업으로 하는 거...

로마인1 : 야... 오늘 김나지움 밑에서 야한 연극이랑 스트립 쇼를 한데. 같이 보러 갈까?

로마인2 : 그것보다는 검투장에서 노예 경기를 보러가자. 요즘 스태리우스가 15명을 다 죽이고, 16연승에 도전하잖아. 진짜 멋지더라. 요즘 최고 스타는 그 넘이야.

로마인3 : 야... 소식 들었어? 요새 마차 운전으로 스타된 애 있잖아. 무지 멋있는 넘. 그넘이 범죄 용의자로 끌려갔대. 아니, 왜 영웅을 끌고간거야?

로마인1 : 뭐? 그럼 우리 이번주에 경기 못보는 거야? 무슨 낙으로 살라구? 이런 미친...

마차 경주의 기수가 끌려갔다는 소식에 대중들은 그를 석방하라고 폭동을 일으키고, 난리를 피웠어. 그런데, 이민족 출신인 총독이 단호하게 거부한거야. 하찮은 이민족 출신 따위가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들의 요구를 거부하자, 로마인들은 이민족 관료들을 잡아다가 찢어죽였어.

테오는 이 소식을 듣고 <충격>을 먹었지. 테오가 원한건 이민족과 로마인이 같이 화합해서 살아가는 건강한 로마 제국이었거든. 인종 차별은 테오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었구.... 테오는 크게 분노했어. 이민족 군대를 이끌고, 폭도들을 찾아간 테오는, 무차별 학살 명령을 내렸지. 로마인 1만 5천명이 끔찍한 학살을 당했어.

문제는 로마인을 학살한 테오를 교회가 비판한 거야.

주교 암브로시우스 : 어떻게, 로마인들을 끔찍하게 학살할 수가 있습니까? 폐하가 죄를 참회하기 전까지는 성당에 발도 들일 수 없습니다. 공의회는 폐화의 행동을 탄핵하고, 참회를 요구할 것입니다.

테오 : 그것은 모든 로마인들이 평등하기를 바란 내 소망의 표현이었네. 그것은 다 교회를 위한 일이었고. 그 참사로 억울하게 죽은 크리스찬이 있다면 내 사과하겠네.

주교 암브로시우스 : 아닙니다. 교회는 폐하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반성하세요. 또 반성하세요. 그리고 이런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칙령을 내리세요.

테오는 몇 달동안 계속 교회에 죄를 빌었어. 교회의 용서를 받아야만 로마인과 이민족이 같이 살수 있다는 이상을 실현할 수 있고, 크리스트교를 통해 제국을 재건한다는 꿈도 이룰 수 있었거든.

테오는 교회에게 반성문을 쓰고, 교회가 원하는 칙령까지 써 주었어. 교회는 황제를 이겼다는 기쁨에 <데 라우다무스>라는 찬미가까지 만들었지. 그래도 황제는 참고, 또 참았어. 참는 것만이 로마 제국을 유지하는 길이라고 믿었거든. 이 사건은 크리스트교 공인 후, 교회와 황제권과의 최초의 싸움이었어. 황제가 참고 참으면서 교회를 얼르고 달랬거든...

392년. 테오는 아예 이교신 숭배를 전면 금지시켜 버렸지. 이제, 로마의 전통신들은 모두 역사에서 사라져야 했고, 소크라테스부터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진 그리스 철학은 신학에 밀려 사라지게 된 거야. 하지만, 전통신을 믿는 장군들의 도전은 끊임없었지.

393년. 제우스신을 동경하는 전통주의자 아르보가스트가 반란을 일으키고, 서로마 황제를 죽여 버린 사건이 발생했지. 아르보가스트의 참모 유게니우스와 장군 니코마쿠스는 강력한 전통 군대를 이끌고 테오에게 도전했어.

아르보가스트는 번개창을 들고, 독수리를 날리는 제우스신의 동상을 전장에 늘어놓았지. 테오는 기독교의 순교자 성 요한네스의 계시를 받았다면서 전쟁에 참여했어. 아르보가스트가 이교세력을 주축으로 한 군대라면, 테오의 군대는 서고트족과 반달족으로 이루어진 군대였어.

이 역사적인 전투에서 테오의 군대가 대승을 거두었지. 하지만, 이 큰 전투로 테오 역시 건강이 약화되어 죽고말았어.

테오는 모든 이민족들을 기독교로 통합해서 강대한 로마를 재건할 꿈을 꾸었어. 하지만, 그 꿈을 채 이루기 전에 죽은거야. 그는 죽어가면서도 훗날 로마가 이민족에 의해 분열될 생각을 하면서 슬퍼했을지도 몰라. 그렇다면 그 후손들은 테오의 꿈을 이해하고, 테오와 같이 노력했을까?

4. 이민족간의 전투

테오가 죽은 뒤 테오를 모시던 이민족들도 분열되었어. 반달족의 장군 스틸리코는 테오의 뜻을 받들어 모두가 힘을 합친 로마를 만들려고 했지. 스틸리코는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로마 집정관이 되었고, 테오의 꿈을 이루려고 했어. 반면, 서고트족의 장군 알라리크는 로마인들을 절대 믿지 못한다면서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어. 테오의 무덤에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남긴 채...

로마의 귀족들은 <이민족>을 경멸했지. 감히, 반달족의 스틸리코가 집정관을 하다니... 반달족이 훗날 로마를 공격할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돌았어. 그런데, 그 유언비어를 퍼뜨린 장본인은 테오의 아들로서 황제가 된 <호노리우스>였지. 결국 이민족 출신의 충신 스틸리코는 로마의 반역자라는 오명을 쓰고, 황제군에 의해서 참수 당했지.

스틸리코의 화합정책은 실패로 돌아갔고, 게르만 출신의 장군들은 갖은 죄명을 뒤집어쓰고 학살당했지. 반달족들은 로마에 협조한 죄로, 로마를 다민족국가로 만들려고 했다는 죄로 몰살당했지. 수만명의 게르만 용병들은 로마에서 탈출했고, 결국 로마의 적이 되어 버린 거야. 테오의 아들 <호노리우스>는 아버지의 꿈을 짓밟아 버렸어.

스틸리코가 죽은 뒤, 테오의 충신 중 한명이었던 알라리크 장군이 게르만족들을 모아 로마 제국에 쳐들어가지. 알라리크 역시 모든 민족을 융합해서 강력한 제국을 이루고자 했던 테오의 이상을 알고 있었어. 하지만, 지금의 로마는 썩어빠진 귀족들밖에 없었기에 멸망시킬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거야.

알라리크는 황제 호노리우스가 있는 곳을 제외한 모든 도시들을 박살내 버렸지. 하지만, 테오에 대한 충성심에서 <기독교> 지역만은 절대 건드리지 않고, 동맹으로 삼았어. 반면, 황제 호노리우스는 기독교가 나라를 망친 원흉이라고 생각해서 기독교인들을 죽이고, 전통 로마신을 섬긴다고 자랑하고 다녔지.

알라리크는 테오를 생각해서 로마에게 협상을 요청했어. 전쟁으로 테오의 제국을 모두 불태워 버리기는 싫었는지, 로마의 황제에게 최대한 기회를 주었지. 그러나 황제 호노리우스는 이민족을 무시하는 발언만을 계속 보내왔어. 결국 서고트의 병사들은 로마를 박살내고, 시민들을 학살하였지. 유일하게 불타지 않은 지역은 기독교의 보호를 받는 지역 뿐....

로마제국은 바로 망할 것 같았어. 그러나, 로마를 최후까지 지킨 여제가 있었으니... 그녀가 바로 테오의 딸 갈라 플라타키아였지. 갈라는 알라리크 장군의 동생인 아타울푸스와 결혼을 한 뒤, 로마와 게르만의 다민족 국가를 만들 이상을 같이 나누었어. 하지만, 아타울푸스는 갈라의 꿈을 이루어주기 위해 전장에 나갔다가 죽고 말았지. 갈라는 테오의 이상을 잇기 위해 호노리우스가 죽은 뒤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돼.

그리고, 테오와 갈라의 꿈을 알았던 서고트족은 전대의 인연을 생각해서 갈라 플라타키아가 여제로 있던 서로마를 건들이지 않았어.

갈라 플라타키아는 로마 최후의 현명한 여제였지. 서로마 주변에서 이민족들이 수없이 전쟁을 하는 동안에도, 갈라의 서로마는 전쟁 대신 재건 사업이 이루어졌어. 하지만, 이미 망해가는 로마에서 갈라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어. 단지, 살아있는 동안 로마제국을 유지하고 주변국과 평화협정을 맺는 것 뿐이었지.

그녀는 테오가 남긴 최후의 사업을 추진하게 되지. 바로, 기독교를 보호해야 한다는 테오의 유언을 실천에 옮기는 거야. 에페소스 공의회, 칼케돈 공의회 등 역사적으로 유명한 공의회를 열고, 기독교의 공의회를 보호하는 데 전력을 다했어.

그리고, 기독교의 정신을 후대에 보급할 수 있는 <교부>들을 키워냈지. 갈라가 여제로 있는 동안, 네스토리우스파 등 다양한 계파들이 정통파로 분류되거나, 또는 이단으로 분류되었고, 콘스탄티누스와 테오도시우스가 확립한 정통 교리가 갈라 시대에 완성되지. 이 시대를 역사에서 <초기 교부>의 시대라고 해.

그녀가 죽은 뒤 얼마 안되서 서로마는 망했어. 그러나 그녀는 테오의 이상을 지키기 위해 기독교를 수호했고, 게르만과 로마인이 함께 공존하는 이상 제국을 위해 헌신한 마지막 황제였지.

자, 그럼 다음 장에서는 그녀의 기독교 보호 정책에서 언급된 <교부>가 누구인지,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인물을 통해 이야기해보자. 그리고, 교부와 동시대에 살았던 그리스의 철학자 히파티아의 불행한 최후를 통해 그리스 철학과 교부철학의 갈등관계를 짚어보려구 해.

오늘의 글은 기독교에 우호적으로 적었지만, 다음 글은 반대편 입장에서 쓸 수도 있을 거야. 비교해서 보는 게 더 재미있거든. 그럼 계속 달려볼까나....

http://historia.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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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끄적대는 낙서 세계사 (6)

배교자 율리아누스 : 전통신 지키기 프로젝트

1. 크리스찬을 꼬시기 이전의 정책들 - 시민권과 빵, 그리고 서커스

오늘 전개할 이야기는 크리스트교가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로마 제정 말기에 대한 이야기야.

우리는 흔히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수많은 순교자들이 희생을 해서 크리스트교가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 그런데 말야...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크리스트교를 인정한 것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정치적 입김도 작용한 것이었어.

로마의 전성기인 제정 초기에는 황제권이 워낙 막강했기 때문에, 굳이 크리스트교가 필요없었지. 오히려 하나님 숭배니 뭐니 하는 종교적 믿음은 황제권을 위협하는 것이었기에 탄압의 대상이었어.

하지만, 황제권이 약해질대로 약해지던 로마 제정 말기의 상황은 달랐지. 크리스트교를 인정하지 않고는 더 이상 황제권을 유지할 수 조차 없었거든. 시민권을 남발해서 인기를 끄는 것도 한계가 있었고, 빵과 서커스 정책으로 로마 시민의 탱자탱자~ 놀자는 욕구를 채우기도 어려웠거든.

여기서 잠깐~~~ 제정 시기, 황제권 강화에 이용되었던 로마 시민권과 빵과 서커스....그건 뭐였을까? 잠시 로마 초기로 돌아가볼까?

로마 정관 : 아... 좀만 싸우면 이탈리아 반도를 몽땅 일하겠구나.  쌈박질 열심히 해준 우리 군바리들이 너무 고맙구나. 농사짓다가 땅준다니깐 열심히 싸워 군바리 농민들아... 뭐 필요한거 없냐?

군바리1 : 저기... 우리 원래 농민이거든요... 땅 주세용.. 땅땅....

로마 집정관 ; 오케이.... 땅도 주고 전리품도 줄테니 앞으로도 제국을 위해 열심히 봉사해라. 전쟁에 직접 참여한 니들은 특별히 <로마 시민권>을 주마. <로마 시민권>은 서울랜드 자유이용권보다 더 좋거든? 앞으로 로마가 관리하는 모든 영토 안에서 투표도 할 수 있고, 농사도 지을 수 있고... 바이킹 먼저 탈 수 있고... 귀신의 집 들어가는 것도 무제한 리필 가능하고.. 어쩌구 저쩌구... 여~기~는~  꿈과 희망으로 가득찬 곳... <로.마.랜.드>~~~

동맹국 백성 : 저기... 우리도 로마를 사랑하는 로마 동맹국인데요. 우리는 뭐... 이용권 같은거 없나요?

로마 정관 : 니들은 동맹국 백성이지 우리 백성이 아니잖아? 음... 그럼 <로마인증 자치권>을 주마. 뭐.. <로마 시민권> 처럼 각종 투표 참여, 각종 토지 이용권, 로마시 행사 참여... 그런건 없거든? 대신 니들 동맹국 마을에서는 니들 맘대로 행사를 만들어서 하든, 서울랜드를 만들든... 알아서 할 수 있는 권리를 줄께.

동맹국 백성 : 뭐... <로마랜드>는 못가겠지만, 일단 뭐 <자치권>으로 만족하죠.. 뭐.. 쩝..

식민시 백성 : 저기... 우리도 정복당하긴 했지만, 암튼 로마 백성으로 편입된거 잖아요. 우리도 로마랜드가는 <자유이용권> 주시면 안될까요?

로마 정관 : 시꺼... 니들은 점령당한 백성들이랑 같이 살잖아. 동맹국처럼 다는 못주고... 하는 것 봐서 단계별로 <이용권> 한 장씩 줄께... 일단 투표권 같은 건 없구.. 음... 좋다. 뭐 돈 많은 애들까지는 <로마 통행증> 발급해줄께.. 그럴로 되었지?

식민시 백성 : 아나... 우리도 로마 시민인데, 전쟁한다고 여기 끌려와서 여기 산거잖아? 로마에 사는 저 자식들, 목 위에 달린 건 방울토마토인가? 생각하는게 왜 저래?

기원전 91년.... <로마랜드> 이용권을 달라며 아우성치던 식민시와 동맹국의 시민들은 반란을 일으키고, 로마로 쳐들어갔어. 그런데, 로마는 그 전쟁을 오히려 이용하였지. 동맹시와 식민지를 진압해 버린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를 완전히 통일한 거야.

그리고 로마는 <로마 시민권>을 다양하게 만들어서 점령하는 지역에 차별적으로 적용하게 돼. 로마에 거주하는 오리지널~ 백성들은 <로마 시민권>을 주었지. 단, 전쟁에 참여해서 공을 세운 남자와 그 후손들만 말이야...

그리고, 나머지 지역의 백성들은 차별적으로 시민권을 주게 되지. 식민시는 라틴동맹국으로서 <라틴 시민권>을 갖게 되는데, 그건 투표권(참정권)도 없고, 단지 식민시의 <주민증>같은 용도로 쓰였어. 통행이나 직장을 구할 때 용이한 거였지. 로마의 속주(식민시)가 된 지역도, 로마에 저항한 정도에 따라 권리와 의무가 각각 다른 <민증>을 받게 되지.

그런데, 이 <민증> 발급 제도는 로마 황제의 권력이 강해지면서 용도가 변질되어가지. 로마 황제는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면서, 식민시를 로마 제국 안으로 가깝게 끌어들이려고 노력했지. 특히 변방 식민시의 반란은 황제한테, 아주~ 귀찮은 일이었거든.

황제들은 점점 <로마 시민권>을 남발하게 되었고, 점점 많은 이들이 <로마랜드>에서 놀 수 있게 되었어. 로마 후기 <카라칼라> 황제는 아예 로마 제국 인에서 여자와 노예를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다 줘 버리게 되지. 뭐, 로마 안의 모든 지역이 다 평등해 진건 좋은데, 시민권을 다 뿌린 순간, 이제 더 이상 황제가 시민들에게 던져줄 뭔가가 사라진 거지.

더 이상 시민권을 뿌릴 수 없게 되자 눈을 돌린 것이 바로 <청렴하고 검소하며, 믿음심이 강한 크리스찬>이었지. 그들은 <믿음의 자유>만 준다고 해도 좋아 죽었거든~~~

여기서 시민권과 같이 뿌려진 또 하나의 시민 이벤트가 있는데, 그게 바로 <빵과 서커스> 정책이야. 원래 빵과 서커스는 공화정 말기, 카이사르(시저)의 참모 클로디우스에 의해 시작된 정책이지.

시저 : 야... 내가 요즘 여기 저기 정복한 식민시 애들한테 <자치권>을 나눠줬더니, 로마 애들이 좀 말이 많다. 뭐... 천박한 넘들한테 너무 권한을 많이 줘서 로마 애들이 괴롭다나 어쩐다나 하는데... 뭐 좋은 방법 없냐?

클로디우스 : 저기... 좋은 방법이 하나 있는데유. 이천년 뒤에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서 전두환이란 놈이 쓴 방법인데요. 국민들이 군인정치에 짜증을 내면, 군바리들이 좋아하는 원초적인 것들을 제공해서 불만을 잠재우거든요?

시저 : 군바리 길들이기? 그거 내가 잘하잖아. 초쿄파이 던져주기, 야한 사진 붙여놓기, 쉬는 시간에 족구나 축구 시키기... 그런거 말이지?

클로디우스 : 네... 전두환이란 넘이 했던 정책이 바로 3s 정책이란 건데요. 영화(Screen), 스포츠(sport), 섹스(Sex)를 국가적으로 보급하는 겁니다. 뭐... 프로야구.. .아니... 콜로세움 같은 거 지어서 집단 활극 좀 보여주고요.... 거기에 맛난 거 싸가지고 가서 먹게도 하고, 귀족들은 여친이랑 가서 어떤 노예가 안 죽고 버티나 내기도 하고... 이렇게 시민들이 잼나게 놀게 되면 사회에 대한 불만이 없어지잖아요?

시저 : 그래... 좋은데?

클로디우스 : 중요한건 이 3s 정책에 빈민을 핵심으로 포함시켜야 한다는 거죠. <로마 시민권>이 있는 빈민이면 누구나 3s를 무상으로 즐기게 하고, 경기 관람자에게 무상으로 1달에 1번씩 빵도 나눠주는 겁니다. 그럼 누가 감히 독재관(시저)님께 반항하겠습니까?

당시 시저의 정책은 평민을 위한 혁신적인 것이었어. 시저 자체가 귀족보다는 평민을 중시하는 <평민파>의 우두머리였거든. <빵과 서커스> 정책을 추진하면서 빈민에게 <로마시민권>을 팍팍 돌린 시저는 영원히 지배자로 남아달라는 로마 시민의 간절한~ 요청 때문에 <종신독재관>이 되었지.... 물론 <브루터스~ 너 마저도~> 라면서 죽기 전까지 말야.

아까 말한 <라틴시민권>이니, <동맹시 자치권>이니 한것들 있지? 그것도 다 시저가 갈리아 지방을 정복하고 난 뒤, 정복민들을 꼬시기 위해 주었던 것들이야... 시저는 확실히 대중에게 인기몰이하는 법을 잘 알았던 것 같아.

중요한 건, 이렇게 공화정 시기부터 시작된 <빵과 서커스> 정책이 로마 제정 말기까지 이어진다는 거야. 그런데, 로마 제정 말기는 이 정책을 실시할 수가 없었어. 왜? 아까도 말했잖아. 모든 자유민이 다 <로마시민권>을 얻었다구....

사치와 향략이 계속되면 될수록, 무너져가는 로마에게는 치명적인 것이었지. 로마의 황제들은 이제 향락에 빠진 로마인들에게 경종을 울릴 무언가를 찾아야했어. 콘스탄티누스가 찾은 해답은 바로 <크리스찬의 생활양식>이었어. 사치하지 않는 자... 묵묵히 기도하면서 생업에 종사하고, 외적을 스스로 막아내는 자... 믿음으로 제국을 다시 일으킬 자들....

크리스트교 공인은 로마의 오랜 전통과도 관련이 있는 것이었어.

2. 황제의 저항... 율리아누스

크리스트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의 수도를 2개로 만든 뒤 4명의 황제 체제로 국가를 유지한 걸로도 유명하지. 서쪽 로마에 황제, 부황제, 그리고 동쪽 콘스탄티노플에 황제, 부황제... 이렇게 4명의 체제로 국가를 유지해서 다양한 사태에 효율적으로 대비하려고 한거야. 훗날 이 체제로 인해 서로마 제국, 동로마 제국으로 로마가 양분되어 버리지.

근데, 문제가 생겼어. 콘스탄티누스는 <밀라노 칙령>으로 하나님을 믿어도 된다... 라고 말했는데, 또 다른 황제인 막시미누스가 반항을 한거야.

콘스탄티누스 : 이제부터 모든 로마시민권자는 전통종교과 카톨릭 중 원하는 것을 믿어도 되느니라.

막시미누스 : 헐.... 저기 내가 평소에도 콘스탄틴이 하는 거 보고 짜증이 좀 났었는데, 너 너무~ 너무~ 너무하시는거 아니에요? 우리 로마 제국의 전통신은 제우스고, 동로마는 원래 그리스 지역이고... 그리스는 전통신의 본산지인데.... 난, 하나님인지 뭔지 모르니깐 배째!!!

콘스탄티누스 : 어... 그래... 배쨀께~~~

그랬다. 콘스탄티누스는 막시미누스가 배째~라고 하자 진짜로 잡아서 배를 째 버렸단다. 자... 그럼 이제 크리스트교의 승리인가?

아니다. 이후의 황제들도 전통신을 숭배하고, 카톨릭을 이단으로 몰아붙여서 이단 논쟁을 벌인 왕들이 있었다. 그 중 대표적인 황제가 역사에서 <배교자>라고 부르는 율리아누스이다. <배교자>는 종교를 배신했다는 뜻이니깐, 크리스찬의 표현이겠지? 근데 사실, 율리아누스는 첨부터 카톨릭을 무지 미워했었지.

아참, 생각나서 하는 말인데, 지금 말하고 있는 제국, 왕국, 공국, 공화국... 이런 거 구분은 할줄 알겠지? 제국은 말 그대로 <제>자가 들어가잖아... 황제가 다스리는 국가이고, 왕국은 당연히 왕이 다스리는 국가겠지? 공국은 <공작, 백작> 할 때 공을 말하니깐, <귀족이 자치령>으로 다스리는 국가이고, 공화국은 지금 말한 넘들이 다 없고, 국민들이 스스로 다스리는 나라가 공화국이지.

암튼, 지금부터 율리아누스를 통해서 전통신과 크리스트교를 싸움붙여 보자.

율리아누스의 조각상(프랑스 파리시)

율리아누스는 태생부터 불쌍한 넘이야. 크리스트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의 이복동생이 콘스탄티우스인데, 그 넘의 2번 째 부인의 2번째 아들로 태어났지.

근데 말이지. 율리아누스의 부모와 형제는 왕족이라는 이유로 모두 학살당했어. 왜냐면 로마가 황제권 계승 분쟁을 원천 봉쇄하려고, 콘스탄티누스의 직계 아들 외에는 모든 황족을 다 죽여 버렸거든.

어쩌다 살아난 율리아누스는 부모를 잃고 오랜 방랑을 떠나지. 방랑하는 동안, 율리아누스는 그리스의 전통 신과 전통 철학이 너무나 위대하다는 것을 알았어.

율리아누스 :  플라톤의 이데아 철학은 너무나 위대하군요.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이란게 이데아의 허상이란 말입니까? 우리가 진리라고 알고 있는 것은 사실 벽에 비친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군요. 그렇다면 진리는 그림자를 만드는 태양이 아닙니까? 우리가 진정 존경하던 태양신... 미트라(Sun)...

그리스 철학자 : 그렇다네. 가톨릭에서 말하는 신도 결국 눈에 보이지 않는 허상, 즉 <이데아>에 불과하다네. 신의 실제 생김새를 눈으로 본자가 인간 중에는 없지 않는가?

율리아누스는 가톨릭 세례를 받았고, 가톨릭 교육을 받으며 자랐지만, 사실 그건 전통신을 믿는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였어. 가톡릭 교육을 받던 율리아누스는 한가지를 확신하게 되었지.

율리아누스 :  그런데, 왜 로마에 사는 기독교인들도 그리스식 인사를 하고, 로마식 예법을 익히고 살아갈까요?

교회의 주교 : 그것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로마의 지배층이기 때문이야. 로마에 살아가는 이상 그리스와 로마의 예법, 역사, 문화를 익히지 않을 수가 없거든.

율리아누스는 로마의 전통신이 자연스럽게 부활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지.

그러던 어느 날, 율리아누스에게 큰 기회가 찾아왔어. 콘스탄티누스의 친척들이 모두 죽어 버려서 로마의 4황제 중에 <부황제> 자리를 계승할 자가 없게 된 거야. 콘스탄티누스는 율리아누스가 크리스찬을 로마 사회로 이끌어줄 적임자라고 착각한거지.

그런데 왠걸... 율리아누스는 부황제가 되자마자 군대를 조직해서 콘스탄티누스와 전쟁을 벌이려고 했어. 그런데 하늘이 도운 걸까? 전쟁을 하기도 전에 콘스탄티누스가 죽어 버린거야... 그는 자연스럽게 크리스찬 사회를 이끌어갈 로마 황제로 추대되었지.

황제가 된 율리아누스... 그는 약간 찌질하면서도 교묘한 방법으로 크리스트교를 탄압하기 시작하지. 크리스트교의 보호자인 척, 종교를 탄압하는 거야.

율리아누스 : 내가 황제가 된 이상 크리스트교를 보호하기 위해 교회가 하는 일을 좀 알아봐야겠다. 앞으로 교회의 모든 일은 황제에게 보고하고, 황제와 의논하도록 하여라.

로마교황 : 저기... 교회의 일은 교회가 알아서 할 거라서요... 황제 폐하가 신경써주는 건 고마운데, 저도 먹고 살아야죠...

율리아누스 : 거참... 내가 신경좀 써준다니깐... 고마워할줄을 모르네. 이번에 제국내에 교회들 있지. 명단 좀 뽑아봐. 내가 독실한 크리스찬들 뽑아서 <주교>로 다 선출해줄께.

그리하여... 어느 날 부터인가 교회에는 전통신을 믿는 자들이 기도와 찬양을 진행하게 되었다. 교회의 제단에서 제우스신을 위한 피의 의식이 행해졌고, 율리아누스는 하나님이 아닌 태양신의 숭배자가 되었다.

크리스찬에 밀렸던 전통 플라톤주의자들은 다시 그리스 철학을 들고, 교회로 찾아온다. 교회는 신학이 아닌 철학을 이야기하는 곳이 되었다. 율리아누스는 머리가 좋은 천재였지만, 그가 황제로 있던 기간에 했던 일들은 크리스트교 탄압 뿐이었다.

율리아누스 : 야...교회에다가 공개적으로 제우스 신상이랑, 번개창, 독수리  같은 거 가져다 놓은면 쫌 티나니깐, 티 안나게 크리스트교 애들 열받게 만들 방법 없냐?

그리스철학자 : 아... 방법이야 많죠. 예수를 죽인게 유대교 바리세인파잖아요? 예수를 믿는 교회 옆에다가 유대교 성전을 지어 버리죠. 그리고, 로마시민권은 군대 갔다온 사람만 주잖아요? 크리스찬은 군대를 못가게 막아 버리는 겁니다.

율리아누스 : 그 정도는 좀 약한데~. 이왕 하는거 예루살렘에서 순교한 애들 유골있지? 거기 개발구역이라고 말하고 다 부셔. 오다가 안티오크 성당도 부셔 버리고... 이제 대 놓고 크리스찬들 로마에서 추방해.

그리스철학자 : 네... 책도 많이 쓸께요. 크리스트교는 허무맹랑한 뻥이다... 이런 거 홍보하고, 그리스 철학이 합리적이라고 광고하면 되는 거죠? 바로 출판 들어갑니다~~~~

율리아누스 : 그래... 굿~~~ 내가 이래서 그리스 철학을 좋아한다니깐... 한마디 하면 다 알잖아?

그리하여, 율리아누스는 그 천재적인 머리로, 막 로마사회에 뿌리내리려는 크리스찬들을 공개적으로 핍박하였어. 그러나... 하나님의 저주일까?

율리아누스가 크리스찬 추방정책을 내걸고, 페르시아와의 대전투에 들어간 순간... 그는 크게 패했을뿐 더러 안전지역에 있었는데도 어디선가 우연히 날아온 눈먼 무기에 정확히 맞고 죽어 버렸지....

그리고.... 다시 로마는 혼돈에 빠지게 돼. 전통신이냐, 이교도신(크리스트교)인가라는.... 그 최후의 결전은 그리스 철학자들과 로마 제국 5 교구의 수좌대주교 간의 싸움으로 번지게 되지.

그럼 다음 이야기에서 더 자세히 다뤄볼까? 다음 장에서는 그리스 철학자를 대표하는 히파티아의 비극적 죽음과 기독교 신학의 아버지인 성아우구스티누스의 이야기를 동시에 다뤄보려구해. 빨랑 끝내고 처음에 얘기했던 구석기로 돌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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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끄적대는 낙서 세계사 (5)

콘스탄티누스의 예수 꾸미기 프로젝트

1. 크리스트교의 공인

자, 이왕 창조론 얘기를 하면서 기독교 얘기를 꺼내게 되었으니 시작한 김에 기독교의 역사를 다 파해쳐놓고 다시 돌아가자. 뭐.... 앞으로도 이렇게 정신없는 이야기들이 전개될 거니깐, 알아서 이해해... 달리 <낙서 세계사> 겠어?

   세계 최초로 하나님을 믿어도 된다고 공인한 황제는 로마의 콘스탄티누스였지. 근데, 이 양반은 참 독특해. 원래 이교도였던 콘스탄틴이 어느 날 갑자기 기독교의 수호자가 되었으니 말야.

아참.... 로마의 황제들은 특이하게도.. 다 us를 붙여주지? 콘스탄틴은 콘스탄티누스로 부르는 것 처럼, 율리아누스(Julianus) ,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 시베리우스.(Sibelius).... 뭔 -us 호칭이 그렇게 많은지.... 그건 그냥 라틴어의 경칭이야... 우리도 타인의 호칭을 부를 때, -님, -씨... 등을 붙이잖아. 그런데, 로마에서는 아예 태어나면서 경칭을 붙어셔 이름을 부르곤 했지. 오히려 -us를 빼명 애칭이 될 수 있잖아. 콘스탄틴, 율리안, 시베린.... 더 친근한데?

그것 말고도 라틴어에서 남, 녀에 붙이는 호칭은 상당히 많고 다양해. 여자에게는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ila를 붙이기도 하지. 율리아, 빅토리아, 마리아.... 보통 자연에 존재하는 사물을 칭하는 라틴어 접미사를 이름 뒷부분에 많이 붙였다고 하는데, 그런 특권을 가진 이들은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보기도 해. 로마 시민권이 없었던 시기의 게르만족들에게서는 그런 이름들이 잘 안보이거든.

뭐, 그게 중요한게 아니라 콘스탄틴이 기독교를 공인한 과정이 좀 재미있어서 말야. 콘스탄틴이 황제에 오른 시기의 로마는 이미 제국의 전성기가 지난 시기였어. 그에겐 새로운 힘이 필요했지.

황제 : 아 진짜... 요즘 우리 시민들 왜 이러냐? 실컷 시민권 팍팍 돌려서 인기 좀 얻었더니, 너나 없이 시민이라며 놀고 먹으려고만 하잖아? 스타가 되고 싶으면 락해!... 아니 시민이 되고 싶으면 봉사해??? 라고 했더니 개나 소나 시민이네. 놀고 먹는 시민한테 세금 좀 더 걷을 좋은 방법 없어?


쫄1 : 저기... 요즘 예수믿는 애들이 좀 경건하고, 세금도 잘 내는데 그 애들을 좀 구슬린 뒤, 숫자를 불리는 게 어떨까요? 걔네들 예수만 믿게 해주면 목숨걸고 충성할 분위기던데... 예수천국 불신지옥.... ㅋㅋ

황제 : 뭐? 우리 미트라신은 버리고? 그럼, 그리스 철학자들이랑 제우스교 믿는 애들이 좀 삐질텐데? 갑자기 종교를 바꾸면 제우스교 귀족들이 다 삐지잖아. 예수교 애들은 이단이라고 난리칠텐데?

쫄2 : 그럼, 황제 폐하가 직접 예수교 신에게 계시를 받았다고 우기고 전쟁에 나가서 대승을 거두면 되지 않을까요? 황제가 뭐 그랬다는데, 어쩌겠어요?

그리하여, 콘스탄틴은 전쟁에 나간 뒤, 밀비아 전투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조작한다.

황제 : 오... 하늘이 계시를 내린다. 보라... 불타는 십자가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십자가와 함께 전투에 임하신단다. 모든 장병들은 십자가를 방패에 새겨라. 하늘이 황제에게 <이 표적으로 승리를 거둘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병사1 : 저게 뭔 소리여?

병사 2 : 야... 이단신이 우리에게 승리를 주려고 저쪽 애들한테 빽태클을 걸거래. 무지 쎈 신인가봐. 황제가 한 밀이니 틀림 없겠지 뭐...

콘스탄틴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기독교로 개종하였지. 역사에서는 하나님의 계시 때문에 황제가 개종했다고 말하지만, 사실 개종하려고 맘먹은 황제가 직접 계시를 만들고, 위대한 권위를 보임으로서 개종의 정당성을 설명하려고 했다는 게 더 맞을 거 같아.

황제 : 오... 이단신이 로마를 구하였도다. 이제 황제의 왕관에 십자가를 박아둘 것이며, 위대한 왕이 크리스트교를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로마 시민권자들에게 부여하노라. 전통신과 크리스트의 신은 모두 위대한 황제 안에 같이 숨쉬리라....

이것이 역사에서 유명한 <밀라노 칙령>이지. 로마 말기, 크리스찬들은 드디어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된 거야. 그리고 황제는 크리스찬들의 교구제를 인정하였어.

교구제란, 교회의 조직을 로마제국의 행정제도와 일치시키는 교회 제도를 말해.

예로, 시골지역을 포함하는 하나의 로마도시가 있으면, 그곳을 총괄하는 교회가 존재하고, 그 교회를 이끄는 짱을 <주교>라고 부르지. 주교가 있는 곳을 <교구>라고 불러. 그런데, 그런 도시 몇 개를 총괄하는 더 큰 로마행정구역에는 그만큼의 행정구역을 총괄하는 교회의 짱이 존재하는데, 그걸 <대주교>라고 부르고, 그 지역을 <대교구>라고 말하지. 그런데, 대교구중에서  예수의 직계제자들이 교회를 세운 중요한 행정구역이 있어. 수도 로마, 안티오크,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 예루살렘은 아예 수좌-대주교 라고 불러주지.

그중에서도 예수의 애제자인 베드로가 교회를 세운 로마는 황제가 머무는 구역이기도 하고, 교회에서도 차지하는 위치가 크기 때문에 최고의 교회로 손꼽히지. 따라서 훗날 로마 교회의 대주교를 <교황>이라고 부르며, 서구 교회의 지도자로 인정하게 되지.

반대로 훗날 동로마 제국은 황제가 거주했던 콘스탄티노플을 중요한 성지로 여겨서 이곳의 교회를 동방 최고의 교회로 설정하는데, 그곳에서 훗날 <그리스 정교회>가 융성하게 되지.

문제는 교회세력이 로마 행정구역과 일치하게 되면서 생긴 로마 황제의 고민이야.

황제 : 야... 이거 예수교 애들을 공인했더니, 그 숫자가 장난 아니네. 얘들이 이렇게 숫자가 많았어? 로마 행정구역마다 교회가 다 생기잖아?

신하 : 얘네들, 그동안 박해받은게 무지 서러웠나봐요. 돈모아서 교회를 곳곳에 짓는데, 이거 궁전보다 더 화려한데요? 교회 주교들이 우리가 보낸 총독보다 더 신망이 높은 지역도 있다니까요.

황제 : 그럼 아예 도시 안에서 세금을 걷는 비율이나 조세 분쟁 같은 것도 예수교 애들한테 맡겨봐. 뭐... 신에게 충성을 다하는 애들이니깐 삥땅치거나, 황제를 속이지는 않을거아냐?

신하 : 얘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진리를 전파한다면서 자체 재판도 하던데요? 교회가 지방관보다 더 인정받는 지역도 있고, 게르만족들이 쳐들어올 때 교회얘들이 직접 수비하는 지역도 있다고 하네요.

황제 : 음... 예수교 애들 무시하면서 정치할 수는 없겠다. 어짜피 인정한 종교니깐 예수교 교리를 내가 좀 손봐야겠어. 야... 성경책 좀 읽은 애들 다 모이라고 해봐.

2. 니케아 공의회

325년, 콘스탄티누스는 니케아 공의회를 열어서, 종교 지도자들을 모아놓고 토론을 벌이지. 보통 예수에 대한 신학이론을 기독론이라고 하는데, 이 기독론을 정립한 것이 바로 초기 <공의회>야.

원래 공의회란, 기독교 교리에 다양한 의견이 있을 때 교회 지도자들이 모여 하나님의 진정한 말씀이 뭔지 뜻을 모으는 자리였어. 그런데, 여기에 <황제>가 개입함으로서 <공의회>는 황제의 지배를 받는다는 선례가 생긴 것이야.

황제 : 다 모였냐? 내가 니들 종교를 인정하고 같이 믿기로 하긴 했는데, 아직 내가 좀 모르는게 많으니깐 앉아서 이것 저것 얘기해봐.

아리우스 : 저희 알렉산드리아 교구는 예수님의 존재를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대리자거든요? 구약 성경을 보면요, 하나님이 구원자(메시아)를 보낸다고 했는데, 그 메시아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이라고 했어요.

황제 : 그럼 메시아는 하나님과 다른거냐?

아리우스 : 그렇죠. 예수님은 하나님과 다른 인격이고, 그냥 하나님의 말씀(logos)를 지상에 전파하다가, 옛날에 돌아가셨죠. 그니깐, 예수님은 하나님과 연결은 되어 있지만, 하나님은 아니라는 거죠.

황제 :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하는군. 대충 알겠다. 내가 황제인데, 내가 동네 촌구석까지는 다 다스릴수 없잖아. 그니깐, 내가 쫄따구들을 시켜서 내 명령을 전달하지? 그거잖아. 쫄다구가 내 말을 전달하지만, 쫄다구와 내가 일치하는 존재가 아니라는거... 오키...

아타나시우스 :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요. 저기, 하나님이라는게 원래 사랑(선)이 본질이거든요. 근데, 사랑은 형체가 없잖아요. 하나님은 사랑을 말씀으로 전달하셨구요. 그니깐 그 말씀을 전한 예수도 사랑이라는 그 본질 자체이니깐, 하나님과 말씀, 사랑, 예수는 모두 같은 거죠.

황제 : 뭔 소리냐? 뭔 소리인지는 몰라도, 예수가 곧 하나님이라는 거지?

아타나시우스 : 네네네... 하나님을 섬기면 예수의 진리도 동시에 아는 것이고, 말씀이 곧 사람이 되신거죠.

황제 : 그니깐... 예수가 하나님이니깐 예수가 신성하다닌 거잖아? 대부분이 예수가 심부름꾼이라는데, 넌 예수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거지? 그거 좋네. 예수가 신성해야 예수의 후원자이고, 공인자인 나도 좀 폼이 나잖아. 좋아. 예수는 인간이 아니라 신이다. 예수가 인간이면 황제가 평범한 인간보다 못한 존재가 되잖아. 야... 예수가 인간이라는 기록은 다 지워라...

그리하여.... 예수가 인간성을 지녔다는 다수파는 이단으로 규정되고 말았지. 신과 예수, 성령은 곧 하나라는 삼위일체설이 정설이 된 순간이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가 삭제한 다수파의 기록은 아직까지 논란이 되고 있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성경이 있다는 이야기나, 프리메이슨이 고대 예수의 인간성에 대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는 등의 이야기는 역사에서 주목하는 신비로운 이야기들이지. 영화 <다빈치 코드>에서도 이단의 이야기를 말하고 있잖아?

3. 예수 만들기 프로젝트

자... 일단 예수의 신성을 결론내린 황제... 이번엔 예수의 생일을 정하려 했어.

황제 : 일단... 예수 생일 미사를 지내고 예수를 좀 홍보해봐.

니케아 공의회 직후, 황제는 크리스찬의 미사(Christes-Masses)를 시작하는데, 원래 크리스마스는 공의회가 끝난뒤 축하파티를 하는 것을 말하지. 일명 뒷풀이라고 할까?

그런데, 황제는 이 미사를 예수의 탄생 미사로 진행하려고 했어. 크리스를 고대어로 X라고 표현하면 X-mas라고도 하는데, 훗날 불어로는 <노엘>이라고도 불러.

문제는 예수 생일이 성경에 안나온다는 점이야. 그럼, 콘스탄티누스는 예수의 생일을 어떻게 정했을까?

황제 : 예수 홍보 하라니깐, 니들 지금 뭐 하냐?

신하 : 저기... 예수님 생일이 성경에 안나오는데요? 그리고요... 기독교인들은 예수 생일보다는 부활일에 더 관심이 있는데요. 예수가 전지전능해진게 부활한거 때문이잖아요? 부활절 홍보를 하는게....

황제 : 야... 니들 개념을 천년뒤 신대륙으로 미리 보내놨냐? 부활은 현세의 일이 아니라, 내세에 대한 약속이잖아? 내가 왜 예수교애들 죽은 뒤를 챙겨주는데? 예수가 필요한 이유는 지상에서 황제가 예수를 공인했다는 것이고, 그걸 알아줄 행사는 예수의 <탄생일> 이거든? 부활절 얘기 꺼내면 다 죽는다....

신하 : 저기 우리 로마에서 가장 큰 축제는 추수감사제잖아요. 농경신인 <세턴>에게 감사지내는 축제가 12월 17일부터 24일까지 하는데, 예수님 생일을 거기에 맞출까요?

황제 : 거참.. 이것들이... 어짜피 쉬는 날을 생일로 하면 무슨 의미가 있냐? 이젠 개념이 천 년 더 지나 21세기 대한민국 이명박 정부 수준으로 넘어가는구나.

신하 : 저기... 그러면 폐하도 믿었던 페르시아 미트라신 생일은 어때요? 미트라신은 태양과 광명의 신으로 축복을 상징하면서 생일도 12월 25일이니깐, 추수감사제 끝나고 또 쉬는 거잖아요? 일종의 연휴 시너지... 짱이죠?

황제 : 그럼 유대교에서도 연말에 쉬니깐 거기까지 맞춰서 12월 25일로 하면 되겠군. 유대인들도 토요일날 쉬지? 로마의 농경신 <새턴>이 토요일이란 뜻이고, 태양신 미트라의 태양이 일요일(sun)을 지칭하니깐, 딱 맞아 떨어지네. 아.. 로마신, 페르시아신, 유대신 등등을 모두 존중하면서 만든 예수의 생일... 내가 생각해도 기막히네...

신하 : 폐하의 정적인 막센티우스, 그 넘이 제우스 교를 믿잖아요? 제우스 빼고 모든 종교를 통합해서 생일을 만들었으니, 그 넘이 배좀 아프겠네요. 폐하의 종교는 모든 종교를 다 통합한 위대한 종교이십니다요.

황제 : 그래... 이제부터 예수교를 보편적인 종교라는 뜻에서 <가톨릭>이라고 부르면 되겠구나. 그리고, 토요일날을 안식일로 하면 유대교를 배낀 티가 나니깐, 이제부터는 <일요일>이 안식일이다. 달력의 빨간날을 일요일로 바꾸도록 해라.

콘스탄티우스가 아타나시우스파를 인정하면서 황제 맘대로 종교를 만들었지만, 그가 죽자 로마에서는 또 큰 난리가 벌어져. 먼저 황제를 싫어했던 군부 세력들은 제우스 신과 그리스 전통 철학의 위대함을 다시 주장하게 되고, 크리스트인들도 좀더 합리적인 <아리우스파> 크리스트교를 주장하는 사람이 등장하지.

그리하여, 그리스의 전통 철학과 전통신, 합리적인 크리스트교인들은, 아타나시우스파와 계속 대결을 벌이게 되지. 그 와중에 신학이냐, 합리주의적 사고방식이냐의 싸움이 로마 말기부터 다음 시대까지 이어지게 돼.

자... 그럼 지금부터 가속도를 붙여서 팍팍 이야기를 전개해보자.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크리스트교 사회를 살았던 많은 인간들의 이야기야... 콘스탄티누스와 같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들을 통해 기독교의 역사를 몽땅 파해치고, 원래 목표로 했던 창조론과 진화론으로 돌아가보려구해. 처음 의도였던 구석기로도 돌아가 봐야겠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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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끄적대는 낙서 세계사 (4)

인류의 기원 : 진화론 vs 창조론 - 제 1장

1. 근원을 밝히고자 한 인간의 시도들

구석기 시대부터 시작되는 고고학을 바탕으로 한국사를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오늘 또 딴 이야기로 새 버릴 것 같다. 왜냐면, 교과서에서 <진리>라고 적어놓은 인류의 진화과정을 부정하는 사람들도 꽤 있거든.

그것은 크리스찬 사회라고 부를 수 있는 서구와 북미의 국가들 사이에서 제기한 <인류 기원>에 관한 논쟁들 때문이지.

서구 역사에서 종교, 즉 크리스트교는 과학과 아슬아슬한 관계를 유지해왔지. 흔히 중세라는 사회에 과학은, 그것의 옳고 그름을 떠나 항상 교회라는 세력에 의해 신학적 검열을 받아야 했거든. 친 교회세력이었던 갈릴레이조차도 지구가 돈다고 말했다가 재판을 받았잖아....

C(교황) : 야... 갈릴레이. 지구가 돈다며? 지구가 돈다는 증거를 가져와봐. 그럼 내가 읽고보고 인정해줄께.

G(갈릴레이) : 저기 제가 책에다 적어두었으니깐 한번 읽어보세요... 제가 또 교황청 사람들하고 친하잖아요.

C : 어? 뭐야... 지구가 돈다는 건 알겠는데, 니가 쓴 <천문 대화> 이 책 왜 이래? 뭔 대화가 천동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악당처럼 적어놔? 그럼 우리 교회의 주장이 욕먹을 주장이었단 거나? 왕 짜증이네... 너, 가서 재판 좀 받구 와라.

릴레이에 대한 재판은 일반 마녀사냥과 달랐어. 이단 재판장이면, 보통 각종 고문과 체벌을 생각하지만, 갈릴레이는 바티칸 궁전에서 하인까지 두고 편안하게 재판을 받았지. 이단재판소는 갈릴레이에게 <성경>이나 읽으면서 회개하다 가라고 말했거든. 뭐... 학연, 지연... 아니 종교연...연줄의 중요성을 실감하는 장면이지. 더 깊게 말하면 종교인들이 과학자를 그리 적대시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되구.

근데 잠깐, 그러고 떠난 갈릴레이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말했다구? 갈릴레이가 그 말을 했어도 화장실에 숨어서 혼자 했겠지, 그걸 누가 들었겠어? 이순신 장군이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라고 말했는데, 들은 사람이 없다는 거랑 똑같네... 역사 학자들은 과거로 돌아가서 과거 인물을 도청한 뒤, 녹음에서 현세에 남겨두나??? 알고보면 역사학자들도 꽤 순수한 오버쟁이들이거든...

암튼... 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과학과 신학은 양립하는 것일까? 가톨릭 사회는 과학을 신에 대한 도전이라고만 생각했을까?

보통 서구 철학과 신학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 유대 등을 돌고 돌아 로마에서 집약되었다고 말하곤 하지. 그런데, 그 로마에서 신학과 과학은 어떤 관계였을까? 과학과 신학은 양면의 동전과 같았어. 과학이 신학의 권위에 도전할 경우, 심하게 탄압받기도 했지만, 보통은 과학, 논리학, 철학 등이 신학에 포함되어 균형을 이룬 경우가 더 많았거든.

2. 신학 이야기의 성립과정.

내가 하는 이야기들이 다 뜬금없이 진행되곤 하지만, 오늘 이야기는 엄청 무개념으로 진행될거야. 한국의 구석기를 설명하는 자리에서 왠 신학논쟁인지.... (말이 한국사지, 뭘 적다보면 세계사에서 종교, 철학, 미술, 과학까지 무개념으로 마구 적는 게 이 시리즈의 특징이랄까?)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이런 거야. 일단 인류의 기원을 설명하기에 앞서, 인류가 고고학적으로 진화되었는지, 누군가에 의해 창조되었는지의 철학적 문제를 걍 심심해서 다뤄보고 싶은 거고, 이렇게 신학적인 이야기를 하려다보니 유럽의 먼 옛날부터 현재까지 신학과 과학이 어떤 관계를 가지고 발달했는지를 보고 싶은 거야.

음.... 비키니를 보려고 수영장에 갔다가 문득 비키니의 기원이 생각난 김에, 태평양에 가서 비키니 섬에도 들려보고 프랑스도 들러서 패션의 기원을 찾아보려는 쌩뚱맞은 시도와 같다고나 할까? 심심하면, 주말 저녁에 혜수랑, 지아 패션도 한번 휘리릭~~~ 감상해보구...

자... 그럼 하느님과 과학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구약 성경이 말하는 하느님이란, 헤브라이 민족의 하느님을 말해. 헤브라이 애들은 원래 인도, 이슬람 애들이랑 같은 계파인 샘족이었는데,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지. 노예생활이 왕 짜증~나서 불만이 많았던 이들은, 자신들의 신인 여호와가 언젠가 짜증나는 강대국 쒸레기들을 싸그리 밀어 버리고, 자신들을 구원해줄거라고 믿었어.

그러던 어느 날, 철기를 쓰는 히타이트 민족들이 아시아를 쉽쓸고 다니자, 모세라는 폼나는 지도자가 헤브라이 민족을 이끌고, 홍해 바다를 쫘악~ 가른 뒤 탈출을 시도했지. 그리고, 하나님의 시험이라며 방랑 생활을 시작했어. 근데, 방랑 기간 동안에는 기강이 헤이해지니깐 군기를 바짝 잡아야 되잖아. 그래서 모세는 아브라함이 하느님과 약속했던 <율법>을 무지무지 강조하면서 부족들을 다스렸지.

하느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고, 아브라함에게 율법을 전해준 뒤 모세를 거쳐, 다윗, 솔로몬같은 율법의 실천자들이 약속을 지키는 과정들을 적어놓은 것이 옛 약속, 즉 구약이야. 그런데, 율법의 실천자인 솔로몬이 죽은 뒤, 율법에 대한 이해차이와 실천방식 등의 문제로 헤브라이 민족들을 싸움을 했고, 그 결과 이스라엘과 유대의 분열이 생긴 후 강력한 아시아의 철기 국가들에게 망하지.

즉, 결론적으로 말하면 구약은 헤브라이 민족의 약속에 대한 이야기야. 하느님이 천지를 만들고, 고난의 시험을 하신 뒤, 약속한 평화와 땅을 주실 것이니 믿음을 잃지 말라는 줄거리를, 긴긴 시간에 걸쳐 적은 <민족 부흥 지침서>였지.

그 <민족 부흥 지침서>가 수많은 강대국들의 신을 제치고, 로마 시대까지 살아남았던 것은 <고난에 대한 보상>이 있을 거라는 한치의 의심이 없는 <율법> 때문이었어.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약속은 <기브 앤 테이크>였거든. 오로지 아브라함의 자손에게만 약속된 유일신의 은혜는, 그 후손들이 하나님이 말한 <율법>을 지킬 경우에만 <계약이 성립>되는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유대인들은 나라가 없어도 버틸 수가 있었지.

팔레스타인인 : 유대 떨거지들아... 우리 다곤신은 번개도 부르고, 비도 내리게 한다. 니들 신은 뭐하냐? 니들 노예생활이 쫌 길다... 큭큭큭..

페르시아인 : 우리 미트라신은 인류에게 불도 주시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비옥한 토지도 주셨지롱...

유대인 : 바보들... 우리 여호와는 니들이 말하는 거 다 창조하셨거든. 니들은 동네신이지? 우리 신은 창조와 종말을 주관하는 신이신데, 오직 우리에게만 하늘나라를 약속하셨거든?

시리아인 : 웃기네. 우리 야스르신도, 천국을 약속하셨거든?

유대인 : 우리는 약서 성했거든? 느들 신은 인류가 언제 태어나서, 언제까지 번영하다가, 언제 구원받을 지 계약서 적은 거 있어? 계약서도 없는 것들이... 니들은 노예계약이야... 대충 믿었다가는 동방신기 꼴난다. 우린,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담판짓고 2천년짜리 구두 계약까지 직접 했거든?

그래, 그거다. 유대인들이 어려운 시절을 견디는 동안, 하느님과의 약속과 그 이후의 일들을 계속 적어놓아서, 민족의 희망을 유지하려던 <약속>... 그것이 구약인 것이다. 그것이 기원후 1세기, 로마시대까지 이어져서 예수시대에 꽃을 피우게 된 것이야.

그리고, 그 구약이 지금 21세기, 신학과 과학 논쟁의 핵심으로 자리잡게 되었지.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 인류 진화론과, 복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인류 창조론.... 구약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까지 들먹이면서 진행되는 대립관계는 바로 그 이야기의 시작을 이야기한 거야. 근데 말이지.... 진화론이 등장한 것은 다윈이 <종의 기원>을 발표할 무렵이었으니깐, 그 이전 천년이 넘는 기간동안, 신학과 과학은 어떤 사이었을까?

그냥 심심한 김에 더 팍팍 파해쳐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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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 세계사 (3)

석기시대와 원시시대.. 그리고 원숭이들

1. 석기시대가 원시시대일까?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게 있어. 그건 석기시대와 같이 혼돈해서 쓰는 잘못된 용어들이지.

지금 다루는 석기시대란.... 말 그대로 石器... 돌을 도구로 쓴 시대란 뜻이야. 보통 우리가 stone-age 라고 알고 있는 시기이지만, 실제로는 stone implement 라고 쓰고 있지.

석기 시대 - 신석기 시대 - 청동기 시대 - 철기 시대

후진 돌... 새 돌.... 반짝거리는 청동.... 무지 강한 철.... 즉...생활 도구를 돌(石器)을 사용했느냐 금속을 사용했느냐로 나누는 기준이지. 이건 순전히 고고학에서 인류 발전 단계를 나타낼때 쓰는 용어야.

석기시대를 이야기할 때, 선사시대라는 말도 같이 쓰지만 석기와 선사는 달라. <선사시대>란 역사시대의 반대말이지. 先史란 말이 역사보다 이른 시대란 뜻이잖아. 따라서 선사시대는 문자 기록이 존재하는 역사시대 이전의 모든 시기가 선사시대야.

우리 민족의 가장 오래된 기록은 단군 신화고... 단군의 고조선은 보통 청동기 때 세워졌다고 하니깐, 청동기 이전은 모두 역사 기록이 없는 선사시대야....

한국사에서.... 구석기 + 신석기 + 이른 청동기 = 선사시대

또... 원시인들이 살았던 옛 시대를 원시시대라고 대충 부르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도 석기시대랑은 다른 개념이지. 원시시대란, 국가가 성립하기 이전을 말하는 개념이야.

원시시대는 사회주의자였던 마르크스가 제시한 개념인데, 마르크스는 제대로 된 정치력을 가진 국가가 생기기 전의 시대를 원시 시대로 불렀어. 마르크스는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이상 국가를 <공산주의 국가>라고 생각했지.

공산주의란, 말 그대로 공산(共産).... 공동으로 생산해서 재산을 공동으로 나누는 이상적 사회를 말해. 인류는 원래 <원시사회>라는 시기에 모두가 평등한 공산주의 사회였는데, 국가가 생기고, 사유 재산이 생기면서 평등이 깨졌다고 생각한거지. 즉, 원시시대는 <소유권>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평등사회를 지칭하는 말이야.

원시사회(원시 공산사회, 부족공동체 사회) - 고대 국가 - 중세 국가 - 근대 자본주의 - 공산주의

위에 적은 사회 발전 단계를 보니깐 대충 알겠지? 돌을 사용한 석기시대와, 평등을 핵심으로 하는 원시사회도 완전히 같은 개념은 아니지. 원시사회지만, 돌을 안 쓴 사람들도 있을 수 있고, 석기 사회에서 고대 국가가 생긴 사회도 있을 수 있지.

아메리카의 고대 잉카 문명 같은 경우에는 석기 시대때 이미 찬란한 문명 사회를 이루었고, 아마존 부족들은 원시사회였지만 금속을 사용할 줄 알았다잖아.

자, 그럼 <석기시대>라는 용어를 확실히 알았으니깐, 석기시대로 출발해볼까? 끄적끄적...

2. 구석기의 인류란?

보통 역사책에서 말하는 최초의 인류 - <오스트랄로 피테쿠스>는 그냥 상징적인 개념일 뿐야. 오스트랄로가 오스트레일리아 할 때, 그 남쪽이란 뜻이고, 피테쿠스는 <원숭이>란 뜻이지. 한마디로, 걍 원숭이란 뜻이야.

근데, 305만년전이라는 까마득한 시절의 원숭이가 역사책에서 인류의 시조로 등장한 이유는?

그건 그냥 두 발로 걸어다닐 줄 알았고, 손에 돌을 들고 뭔가를 부실 줄 알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손에 돌을 들고 먹고 살려고 아둥바둥 살았으니 이 때 부터가 이미 <석기> 시대겠지?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인류의 조상을 정하면, 여의봉을 들고 킥킥거리며 하늘은 나는 털보원숭이 손오공도 인류의 조상이 될 수 있겠다. ㅋ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진 : 오스트랄로 피테쿠스 - 아프리카누스(약 215만년전 유인원 : 미세스 플레스)의 두개골로 재현한 고인류.
당시 인류는 인간보다는 원숭이에 가까웠지만, 직립보행과 도구의 사용을 근거로 인류의 시조로서 대우를 받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상징적인 의미일 뿐, 현생 인류의 조상이라고 보기엔 미흡한 점이 너무나 많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진 : 사진은 직립 보행의 근거인 골반 구조이다. 침팬지와 인간을 놓고 보았을 때, 가운데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인간쪽에 훨씬 가깝다. 손과 발의 구조도 인간쪽에 가깝다. 그러나, 인간에게 필요한 문자를 가지지 못하였고, 빙하기를 거치는 수십만년 동안 큰 진화를 보여주지 못하였다.

사실 이 기준으로 하면 그보다 훨씬 이전의 원숭이들도 다 인류의 시조가 될 수 있어. 400-500만전의 원숭이들 중에서도 <라마피테쿠스>처럼 걸어다닐 수 있는 원숭이들이 있었거든... 그 이후로 호모 에렉투스니, 호모 사피엔스니... 기타 등등 원숭이들이 많이 발견되었다나봐. 뭐, 우리랑 상관없으니 그런가보다 하구...

암튼, 세계 곳곳에서 원숭이들이 등장했다는데... 우리 나라에서도 원숭이들이 발견되었겠지? 그럼 고고학의 시대로 들어가서 우리와 관련된 원숭이들의 생활 양식을 간략히 정리해 볼까? (에휴... 원숭이 얘기만 계속하다가 역사 이야기는 언제 시작하지???)

 

딴 나라 원숭이 얘기는 하기도 귀찮다... 그냥 400만년전 이야기는 영상으로 때워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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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대는 낙서 세계사 (2)

석기시대는 역사책에 왜 적어놓나요?

- 구석기는 역사 시대일까?

자.. 그럼 역사교과서와 똑같은 순서로 역사를 한번 적어보려구 한다. 근데 말이지... 역사책을 딱 피자마자 우리는 알송달송한 시대에 직면하게 된다.

T : 자... 그럼 인류의 조상이 살았던 구석기 시대부터 공부해볼까?

S : 저기요... 전 창조론 믿는 크리스찬인데요. 꼭 이거 공부해야 되요?

T : 시꺼... 현실과 이론은 다른거야. 지금은 진화론 믿고 교회가서 아담의 상복부 2차 갈비뼈가 하나 비었다는 그 얘기 공부해... 지금 성경책 읽냐?

S :  저기 근데, 인류의 조상이 원숭이라면서 원숭이의 삶을 배우는 게 역사랑 무슨 상관인데요?

T : 이것들이 머릿속 바탕화면에 빨갱이 로고가 떠다니나... 역사에도 뭔가 시작이 있을거잖어?

S : 그니까요... 구석기는 선사시대라면서요? 역사시대가 아닌데 왜 배우냐구요?

그렇다. 솔직히 구석기니 신석기니 하는 것들을 역사에서 배워야 하는 근거는 전혀 없다. 역사 기록이 없는 먼먼 옛 지구의 이야기를 우리는 선사 시대로 통칭해 부른다. 역사 시대란, 역사적 기록이 존재하는 시기를 말한다. 단군 신화처럼 삼국 유사같은 책에 옛 일이 기록된 시기가 역사시대란 말이다. 안드로메다로 가는 광년수보다 더 멀리 연대기가 뛰어 버리는 70만년전의 시대를 왜 역사책에 적어놓는 것일까?

그 옛날 이야기를 역사에서 다루고 시작하자니, 종교 논쟁부터 해결해야할 판이다. 진화론을 믿자니 원숭이들의 역사를 배우는 것일 뿐이고.... 창조론을 믿자니 뭐 구석기는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기 전 낮잠자던 시기에 활동한 초사이언인들의 이야기로나 취급해야 할 것 같고...

사실 문자가 기록되기 이전의 옛날의 원숭이들을 연구하는 학문은 <고고학>이지 역사학이 아니다.

그런데, <고고학>은 인간의 삶과 사고방식을 이해하는 학문이 아니다. 인간을 이해하는 학문은 <역사학>이고, 인간의 삶을 알 수 없었던 시기의 인간 또는 유인원의 생물학적 모습과 생존을 위한 생활방식을 연구하는 학문이 <고고학>이다.

즉, 고고학은 인간의 삶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현생 인류의 조상이 누구이며, 그들이 현생인류와 얼마나 닮았는지를 연구하는 <과학>이다. 인간의 삶을 이해하는 <역사학>은 <인문학>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역사교과서는 꿋꿋하게도 이 고고학의 영역을 역사교과서에 떡 하니 적어둔다. 그것은 관행이 되어 모든 역사의 시작을 설명하는 기준이 되었다.

흔히 한국사라고 하면, 한반도와 주변 지역에 사는 민족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되어야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그 이유는, 우리 민족 국가라고 생각되어지는 고조선 등의 국가가 최소한 청동기 시대 또는 그 이전에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고고학을 역사학에 끌어온 이유는 뜬금없이 시작된 역사시대의 쌩뚱맞은 시작을 보충하기 위해서이다. 사실 고고학이 다루는 수많은 과거 사실들 중에서 역사가 애타게 원하는 것은 <역사시대를 살아간 인류에게도 조상이 있을터인데, 그 놈이 누구인가?> 정도이다.

우리는 서구에서 역사를 서술하는 기준을 생각해서, 아프리카의 <오스트랄로 피테쿠스> 등을 기준으로 인류의 조상을 말한다. 그리고, 서구식 기준에 맞추어 구석기, 신석기 등으로 합리적인 시대 구분을 한다. 그 결과, 우리 민족의 첫 시작인 고조선을 설명하기 위해서 아주 긴고 긴 석기 시대를 따로 이야기 하는 것이다.

(사진) 오스트랄로 피테쿠스의 두개골 형상) 좌-아프리카누스, 우-에티오피쿠스

결국, 우리는 민족의 기원을 설명할 때 2가지 방법을 동시에 사용해야 한다.

하나는,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를 거치면서 인류가 어떤 방식으로 사회적 진화를 했는가를 따지는 과학적 방식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환인과 환웅, 단군으로 이어지는 신화적 요소들을 간추려보고, 당시 사회상을 살펴보는 방식이다. 교과서에서는 이 두가지 방식을 따로따로... 두루두루 섞어서 사용한다.

일단... 고고학 이야기를 따로 떼어서 이야기하려구 한다. 역사학과 별도로 고고학을 떼어서 다룬 뒤 버리고... 역사에 관련된 <민족>이야기를 역사 시대로 설정해서 다뤄보려구 한다.

결국, 처음의 질문은 이런 식으로 마무리된다.

S : 그니까요... 구석기는 선사시대라면서요? 역사시대가 아닌데 왜 배우냐구요?

T : 맞다.. 맞다... 그거 역사 시대도 아니고, 역사 이야기도 아니지. 그냥 단군부터 시작하는 역사이야기만 해도 돼. 사실 고고학 이야기는 알아도 되고 몰라도 되는 이야기지. 있으면 걍 참고사항이고, 없어도 뭐 사는데 지장은 없는 이야기인데, 걍 허전해서리....

자...  지금부터 하는 고고학 이야기들은 다 참고사항이다. 걍 흥미있는 이야기만 쭉쭉~ 빨아먹고 버려도 되는 이야기들.... 읽기 귀찮으면 패스하시라~~~ 그럼 시작해 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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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 세계사 (1)

역사를 다 아는 자만 돌을 던져라~

1. 아... 교과서같은 역사여~~~

지금부터 일기를 쓰듯이 풀어서 역사를 조잘조잘 써보려고 한다. 그런데 말이지, 책이나 뭔가 보면 그럴듯한 서문들을 앞에 적어 놓잖아. 나도 뭐 그럴 듯한 뭔가를 적어보려고 하는데 말이야. 뭐 폼나는 거 없을까?

생각해보니깐 인터넷으로 역사에 관한 글을 적는다는 건 너무나 자유로운 일이다. 누구도 간섭하지 않고, 누구나 기분나쁘면 반박할 수 있는 공간인데, 난 그동안 너무 딱딱하게 샌님처럼 글을 적은 것 같아.

고등학교 때가 생각나는군. 누구나 한번쯤 겪은 일이라 특별할 것도 없는 <아침 화장실의 똥>같은 이야기인데, 아마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T(샘) : 자... 공부했으니 확인해야지? 삼국통일의 의의가 뭐지?

S(우리) : 저기 선생님... 얼마전에 가야도 배웠으니까 사국통일 아닐까요?

T : 그니까... 내가 물어보는 건 말야.. 신라가 통일한 시기를 말하는 거잖아. 삼국통일의 의의가 뭐지?

S : 저기 당나라 도움을 받았다면서요. 그런데 왜 삼국통일이 자주성이 있다고 적혀있어요?

T : 그래서 대학 안갈래? 꼭 너같은 애들 땜에 진도도 안나가고 수업이 안드로메다... 아니 당나라로 날아가잖아. 당나라를 물리쳤으니깐 자주적인 통일이고, 대동강 이남만 통일했으니깐 한계가 있는 통일이죠?

S : 저기요... 진흥왕 때 세운 마운령비, 황초령비가 훨씬 위쪽인데.... 통일하면서 영토가 더 아래로 내려와요?

T : 그래서??? 고구려, 백제가 안 망했니?

S : 저기 발해가 건국되서 남북국이라면서요... 근데 왜 통일이에요? 발해는 남의 나라인가요?

T : 너.... <교과서> 공부는 안하고 뭔 생각만 계속 하는거냐???

그래... 생각해보면 결국 교과서에 적혀있기 때문에 모든 것은 진리가 되는 역사가 있었다. 선생님들은 아이들의 창의력을 넓혀주려고 열심히 질문을 던지는데, 그 질문이 원하는 건 교과서에 적힌 한줄의 딱딱한 문구 뿐이다.

그래놓고도 교과서는 뻔뻔하다. 고등학교 교과서 첫장을 보면, 역사적으로 생각하는 <역사적 사고력>을 키우기 위해 한국사를 배운다고 적혀있다. 하지만, 교과서에 있는 것만 수능에 나온다는데, 교과서를 벗어난 사고력이 대한민국 어디에 존재하는지....

아... 문득 갑자기 영화 올드보이가 생각난다. 감옥에 갇혀 15년간 만두만 먹은 그 수염긴 파이터.... 우린 그넘과 다를 바가 없는 듯 싶다. 초, 중, 고, 대학.... 15년간 똑같은 내용의 역사책만 배운 우리... 갑자기 따스한 햇살이 그립다.

난 대한민국의 역사선생님들이 잘못했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분들 역시 참교육을 위해 무진장 애를 쓰고 계신다. 그러나, 공교육이든, 사교육이든 입시제도 아래 존재하시는 모든 분들은 <교과서>를 벗어난 역사를 말할 수도 없고, 수능에 안나오는 변두리 역사를 말할수록 유능함에서 멀어지며, 교과서보다 더 깊고 심도있는 역사를 이야기하면 왕따를 당하는 현실이 무섭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2. 역사를 다 아는 자만 내게 돌을 던져라....

역사를 이야기할 때, 교과서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다. 그것은 교과서를 만든 그 분들과, 역사가 무엇인가를 써 내려가는 그 분들이다. 교과서를 공부하다보면, 이런 의문이 생긴다.

T : 일제시대 우리 조상들의 현명함을 볼까요? 의병항쟁은 총, 칼을 들고 무력으로 일본에게서 벗어나려고 했던 반면,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계몽운동을 통해 일본에게 벗어나려고 했던 운동이죠. 안창호, 이승훈 선생님등이 이끈 신민회를 배워볼까요?

S : 저기 의병항쟁은 나쁜거고, 애국계몽운동은 좋은 거에요?

T : 왜???? 왜 그런 생각을 하지?

S : 저기... 의병항쟁은 애국의병항쟁이 아니라 그냥 의병항쟁이구... 계몽운동만 애국계몽운동이잖아요.... 그럼 의병들이 칼들고 일본이랑 싸운건 무식한 짓이고, 교육으로 일본에 저항한 것만 애국인가요?

T : 잉... 그런가?

교과서의 곳곳에는 이런 함정들이 숨어있다. 의병항쟁은 단순히 일본에 저항했던 사건들과 전투들을 나열한 뒤 그 의의만을 적어두지만, 계몽운동은 그 단체들부터 사업에 이르기까지 아주 꼼꼼하게 적어두었으며, 그 명칭을 달리한다. 학생들은 교사조차 생각하지 못했던 지식을 주입받게 된다.

그래.. 역사를 적는 이들은 이미 제목에서부터 우리에게 뭔가를 강요하고 있으며, 역사는 이런 것이라는 규정을 미리 만들어 과거를 <칼질>하고 있는 것이다.

에휴... 생각해본다. 역사를 공부할 때 <역사란 무엇인가?>부터 생각하라고 한다. 하지만, <역사란 무엇인가?>를 미리 생각해놓고 책을 적어놓은 사람들은 기존의 역사가들이다. 그 책을 읽으면 누굴 따라가게 되는 것일까?

사실 역사를 공부할 때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역사를 누가 먼저 만들어 놓았는가?>이다.

역사는 과거에 일이고 과거의 일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역사 전문가라는 분들이 역사를 연구해서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일이 중요한 일인지를 폼나게 글로 남겨 주신다.

하지만, 그것은 역사 연구가들이 할 일이시다. 우리는 그냥.... 필요한 관심있는 역사를 골라 있고 그 분들이 만들어놓은 것을 비판하기도 하고, 옹호하기도 하고, 똥을 싸질러놓기도 하고, 반짝반짝 닦아서 아우라를 펼쳐내기도 하고.... 그냥 걍 읽는 사람 맘이다. 그리고 그 짓저리를 편하게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인터넷 공간이다.

역사는 백명이 책을 읽을 때 백개의 역사가 머릿속에서 탄생하고, 한명이 글을 적을 때마다 한 개의 역사가 새롭게 탄생한다. 역사를, 역사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다양성이란 것을 인정하면 좋겠다는 뜻이다.

역사 연구가들보다 지식이 부족한 이들이 맘대로 역사를 적을 때, 누군가 뭐라 한다면 이렇게 당당헤게 외치면서 글을 적어야겠다.

너희들 중, 죄없는 자 돌을 던져라.... 가 아니라 <저기요.. 과거 사실을 다 아시는 분만, 다 안다고 생각하시는 분만 분필을 던져주세요...> 라구... 공손하게..... ㅋㅋ

3. 역사는 안드로메다로 가도... 진리라고 말하면 진리가 된다.

예전 사극을 보면, 교과서 한단원보다 더 깊은 공부를 하게 되어있다.

왕 : 아니... 사태가 이런데 경들은 진정 생각이 없는 것이요?

신하 1 : 폐하.... 그래도 아니될 일이옵니다. 한나라의... 어쩌구 저쩌구...

신하 2 : 신 영의정 따발총 아뢰옵니다. 이 사태의 핵심은 ...... 이고.... 이니.... 해서.....

신하 3 : 신 좌의정 반대파 아뢰옵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우리는 ..... 하니..... 하옵고.... 그게....

예전 사극의 제작비는 작가가 다 가져갔을 듯 싶다. 걍 왕이 한마디 지껄이면, 신하들이 돌림노래를 부르며 상황 설명을 다 해준다. 시대 배경부터, 사건의 핵심 개요와 대처 방법, 이후에 해야할 일을 대본 3천자로 요약해서 알기 쉽게 정리해준다. 작가님들 파이팅~~~~

그런데 말이지.... 대장금과 주몽이라는 사극이 나오면서 국민들은, 교과서처럼 요약해서 목소리 톤 높은 남자 성우가 나레이션으로 때우는 사극을 더 이상 보지 않는다. 성우.... 재까짓게 아무리 목소리 짱이라고 해도, 얼짱인 송일국이나, 여신 이영애를 어찌해보겠어?

국민들은 대사 길이가 3분 분량만 넘어가도 채널을 돌리는 시대가 왔다. 일단 칼부림 몇 번 해서 채널 안돌아가게 만든 뒤, 주인공이 직접 몸으로 다 때워서 작가의 대본량을 팍팍 줄여준다. 주인공은 레벨 1짜리 겁쟁이 주몽으로 출발해서 해모수의 기를 좀 받고, 모팔모에게 철제 아이템을 좀 받은 뒤, 소금산이나 주변국 등 스테이지 1,2,3를 모두 클리어 해야 한다. 고대 설화에서 주인공이 위기를 극복하면서 성장하듯, 온라인 게임의 레벨업을 마친 주몽은 만랩 파이터 대소와 자웅을 겨룬다. 이것이 현대 역사물이다.

어느 날부터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밝히는 작업보다도, 자신이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과 비교하면서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역사를 비판하는 작업을 더 즐거워한다. 자료가 없는 고대사는 누군가가 갑자기 <미친소와 노사분규, 청년실업과 사교육이 없는 쁘레땅 뿌르국>이 진짜 있었다....라고 해도 쉽게 비판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교과서에 없는 역사라던가.... 교과서보다 자 자세한 역사를 선호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인터넷이라는 매체는 그 작업을 격식없고, 자연스럽게... 때로는 너무 거칠게도 표현해 낼 수 있으며, 인터넷에 올라온 주관적인 모든 글들을 비판하면서 댓글놀이를 할 수 있는 자유를 갖는다.

지금부터 적는 글들은 때로는 너무나 유치해서, 때로는 너무나 황당해서, 때로는 너무나 전문적이여서 비판하기도 힘든 그런 내용들이 적힐 수도 있다. 누군가는 아니라고 비판하고, 누군가는 너무 쉽다고 비판하고, 누군가는 이건 너무 어렵고 쓸모 없는 내용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주관적인 글이기에 판단은 읽는 사람들이 알아서 할 몫이다.

내가 무슨 역사 전 영역을 통달한 전문가도 아니구... 그냥 일기처럼 쓰고 싶은 내용을 적을 뿐이다. 일단 개념은 안드로메다에 보내고.... 나름 적어볼까나....


http://historia.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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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동아시아의 토지 이야기 (2)

동아시아의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신석기 시대가 도래하다....

인류가 땅을 이용하여 생상력을 확보한 시기는 약 1만년 전부터이다. 1만년전을 훌쩍 뛰어넘어 70만년전에 이르는 <구석기 시대>는 토지에 관련된 이야기를 전개하기가 어렵다.

그 이유는 수십만년 동안 지속된 빙하기와 간빙기 때문이다. 그 오랜 기간 인류의 시조인 <원숭이>들은 생존을 위한 사투를 벌여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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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오스트랄로 피테쿠스 - 아프리카누스(약 215만년전 유인원 : 미세스 플레스)의 두개골로 재현한 고인류. 당시 인류는 인간보다는 원숭이에 가까웠지만, 직립보행과 도구의 사용을 근거로 인류의 시조로서 대우를 받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상징적인 의미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