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역사이야기들/한토막역사이야기'와 관련있는 히스토리아의 글 목록72건

  1. 2009.10.02 토정비결의 이지함은 사회복지 혁명가였다. (4)
  2. 2009.10.02 역사 속의 인물 이야기 - <카사노바> : 역사적 변화가 낳은 이단아 (1)
  3. 2009.10.02 역사 속의 고사 이야기 - <홍일점>의 '빨갛다'는 빨갱이를 지칭하는 말이다. (3)
  4. 2009.10.02 쌍화점 속의 고려왕들 - 개혁가인가, 변태들인가? (60)
  5. 2009.10.02 조선 상고사와 신채호 선생 (1) - 어둠의 시기, 역사를 바라보는 틀은 <민족>일 수 밖에 없었다. (3)
  6. 2009.10.02 상투머리가 유행인가요? - 상투머리의 간략한 역사 (2)
  7. 2009.09.13 아우구스티누스(1) : 마니교를 믿었던 기독교의 성자 (4)
  8. 2009.08.23 히파티아 : 불타 버린 그리스 철학자의 시대 (3)
  9. 2009.08.22 <테오도시우스>의 이루지 못한 꿈 (2)
  10. 2009.08.14 배교자 율리아누스 : 전통신 지키기 프로젝트 (7)
  11. 2009.08.13 콘스탄티누스의 예수 꾸미기 프로젝트 (5)
  12. 2009.08.11 인류의 기원 - 진화론 vs 창조론(1장) (4)
  13. 2009.08.07 석기시대와 원시시대.. 그리고 원숭이들 (3)
  14. 2009.08.06 석기시대는 역사책에 왜 적어놓나요? (3)
  15. 2009.08.05 역사를 다 아는 자만 돌을 던져라~ (4)
  16. 2009.01.03 동아시아의 토지 이야기 (2) - 동아시아의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17. 2008.12.27 동아시아의 토지 이야기 (1) - 황하문명이 절대적인 문명이었는가? (4)
  18. 2008.12.21 한토막 역사 6화. 조선 시대의 궁녀들 - 어떻게 살아가야 했을까? (11)
  19. 2008.12.17 (복원) 불교편에서 다른 불교 역사 도표 (3)
  20. 2008.12.07 남한 지폐에 그려져 있는 이황, 북한에서는 질낮은 반동분자로 평가받는다. (8)
  21. 2008.06.24 history 1 - 인류는 언제부터 인류가 되었을까? (3)
  22. 2008.05.31 역사적으로 본 <자유주의>와 <평등주의>의 길고 긴 대립과정 (1) (2)
  23. 2008.05.09 (한토막 역사 14화) 3가지 이야기 : 일본의 구석기 유적지 조작사건, 몽고가 아닌 몽골이다 등 (4)
  24. 2008.05.09 환타스티아 (6장) : 서구의 신화에 대한 깊은 환상 - 드루이드 (1)
  25. 2008.01.09 <한토막역사15화> 동화 피리부는 사나이는 징기스칸과 십자군에 관련된 설화이야기이다. (8)
  26. 2008.01.09 풍운아 윌터 롤리에 대한 이야기 (3)
  27. 2007.12.27 프리메이슨 2부 - 프리메이슨의 기원 템플기사단 : 실제 역사속에서 어떤 기사단이였까? (1)
  28. 2007.12.24 크리스마스와 12월 25일 - 역사속에서 위조된 어두운 이면들... (3)
  29. 2007.12.20 너는 니가 지난 밤에 한 일을 알고 있냐? (1)
  30. 2007.12.13 판타스티아 5 - 이집트인의 신화 오리시스와 그 곳의 신들... (1)

역사 속의 인물 이야기

토정비결을 쓴 이지함은 사회 복지 운동가였다.

1. 자연의 모든 것이 공부였던 천재

이지함 하면 <토정비결>로 유명한 사람이다. 일반인들은 그가 특출한 예언력을 가지고 있다는 정도로 알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토정비결의 이지함이 실존인물이 아니라 가상의 인물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지함은 독특한 자신의 철학을 가지고 조선 시대를 살아간 일종의 <기인>이었다.

일단, 토정비결의 저자 이지함이 <실존 인물이 아니다>라는 오해를 사게 된 원인을 살펴보자. 토정비결이란 책에는 저자가 나와있지 않다. 토정비결이 운수와 풍수 등에 관련된 책이라는 걸 감안해볼 때, 다른 어떤 풍속서에도 이지함의 이름이 나와있지 않은 점이 이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지함(1517-1578)은 당당히 역사 속을 살아간 인물이며, 그의 인생 행적들을 추적해 볼때 토정비결을 그가 저술했음을 알 수 있다. 이 글은 그가 토정비결을 적었는지 안 적었는지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단지, 인간 이지함이 얼마나 조선시대의 이단아였으며, 개혁적 사상을 가진 인물인지를 설명하려는 것이다.

이지함은 고려말 유명한 학자였던 이색의 6대손이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관직에 있었다. 그는 중종 때 충남 보령에서 태어났는데, 14살때 아버지가 16살때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시묘살이를 시작하였다.

이지함은 어렸을 때부터 천재 소리를 들을 만큼 머리도 좋았고, 공부도 열심히 하였다. 밤에도 책에 빠져 있는 걸 본 주변 사람들은 지함의 눈이 나빠질까봐 등불의 기름을 주지 않았다. 책을 읽고 싶은 지함은 장작에 불을 지펴 책을 보았다. 한번 책에 빠지면 끝까지 읽었다. 장작마저 사람들이 치워 버리자, 이번엔 직접 도끼를 들고 나뭇가지들을 모아 불을 피워 공부를 하였다. 연기에 숨이 막히고 컥컥 거리면서도 꼭 책을 읽어야 했던 것이다.

시묘살이를 끝내고 서울에 온 이지함은 왕족인 이성량의 딸과 결혼하였고, 더욱 공부에 매진하였다. 사람들은 지함이 과거를 단번에 패스할 줄 알았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그는 출세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과거 시험에 필요한 사서 삼경이나, 제자백가, 각종 경서 들을 통달했지만, 그는 과거 시험을 보지 않았다.

명문가의 자제이면서도 스승조차 없었다. 책이 그의 스승이었고, 그는 하고 싶은 공부를 자유롭게 하였다. 양반들이 꺼려하는 음악과 산수, 의학, 천문과 지리학 등의 책도 잡으면 손에서 놓질 않았다.

책에서 진리를 구하던 청년 이지함은 직접 자신의 공부를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삿갓을 쓰고 전국을 돌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역사와 문화 유적지를 따라 돌아다녔다. 유적 탐방은 문화와 지리에 대한 많은 깨달음을 준다. 이곳 저곳의 풍속과 사람사는 이야기들을 듣게 되고, 유통되는 물자들과 지리적 여건에 따른 생활 양식들도 보게 된다. 인간과 지리를 접하고, 민중들의 삶을 직접 바라보면서 토정은 자신의 학문이 어떻게 쓰여야 할지 본격적으로 고민했을 것이다. 특히, 전국 곳곳마다 비참하게 살아가는 대다수 백성들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았을까?

2. 기인과 기인의 만남.

지함이 살았던 이 당시 까지의 조선은 유교적 문화와 함께 불교, 도교의 사상도 용인되던 시기였다. 율곡은 지함보다 19살이나 아래였으며, 이황의 성리철학도 막 정리되어가던 시기였다.

지함은 중국의 죽림칠현과 같이 자연을 돌면서 풍류를 즐기는 것을 좋아했고,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만나 대화하는 것을 소중하게 여겼다. 자연 속을 여행하다가 서울에 올 때면, 당대 최고의 명사들과 어울려 같이 풍류를 즐기곤 했다.

당대 이율곡은 지함보다 후학이었기에 토정을 마음 속 깊이 존경하였다. 토정은 딱딱한 학문을 이야기하는 것보다 풍류와 농담, 익살 같은 표현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표현에는 정치적 모순과 사회 비판에 대한 정확한 칼날이 있었다. 당대 최고의 학자인 성혼, 조식, 이항복 등은 토정과 토론하면서 그의 박학함에 놀라곤 하였다.

훗날, 조식은 마포에서 빈민과 생활하는 이지함을 직접 찾아와 이야기하곤 이렇게 말하였다. 

<깨끗한 거울과 같은 마음에 청렴하고 욕심이 적고 그 행실이 바르게 서 있어서 세상에 모범이 될 만한 사람이다.>

실제 이지함은, 고대 청담 사상가들이 꿈꾸어왔던 도사의 수련을 하기도 하였다. 엄동설한에 가벼운 옷 한벌을 걸치고 버티는 수련이라던가, 오랫동안 서서 명상을 한다던가 하는 기이한 일도 하였다. 그에게 있어 학문이란, 유교만을 고집할 것이 못되었다. 자신이 보고 느끼고 생각한 모든 것이 곧 학문이었던 것이다.

여러 사람들과 토론을 하며 학문의 범위를 넓혀가던 지함은, 당시 이름이 높던 <서경덕>을 찾아 개성으로 떠났다. 서경덕은 정치와 담을 쌓고 제자들과 학문을 토론하던 유생이었기에 지함의 스타일과 딱 맞아 떨어졌다.

서경덕과 성혼, 이율곡의 철학은 이황과 달리 주기론 철학이었다. 당시 주기론은 이황의 주리론과 달리, 다른 학문에 포용력이 있었다. 이황은 주자의 철학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였지만, 주기론자들은 주자의 철학을 현실에 맞게 응용하려는 움직임을 가졌다.

훗날, 이율곡이 <임진왜란을 대비해 10만 양병을 해야한다>는 현실적인 방안을 내놓았는데, 이것 역시 이지함이 풍수지리와 천문지리를 토대로 예언한 <큰 전쟁이 있을 것이다>라는 비유교적 철학을 인정한 결과였다.

이지함은 서경덕의 제자로서 더 넓은 공부를 하려고 했다. 서경덕의 이기일원론은 역학, 천문학, 지리학, 수학 등 인접학문을 총정리하여 구성된 것이었기에, 이지함 역시 스승의 영향을 받아 여러 학문에 더욱 능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스승이 정치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그 역시 출세에 관심이 없었다. 과거시험에 백지를 내거나, 쓸데없는 말을 적어 제출하는 등 기인의 행동을 했던 것이다. 그는 왜 과거 시험에 흥미를 잃었을까?

3. 서경덕을 떠났으나 정치에도 관심이 없는....

어느 날, 이지함이 공부를 하고 있는데 그 집 주인의 부인이 지함을 유혹하려고 했다. 지함은 그 부인을 달래다가 지쳐 결국 그 부인에게 인륜을 설명하였다. 집주인은 그 모습을 보고 서경덕에게 사실을 말하자, 서경덕은 지함의 공부는 이미 인륜에 대한 깨달음에 이른 경지라고 생각하였다.

<더 이상 내가 가르칠 것이 없으니, 돌아가서 하고 싶은 공부를 하게.>

서경덕은 스승을 떠나게 되었고, 다시 여행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는 왜 그 높은 학식을 가지고 정치에 입문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정치에 대한 회의 때문일 것이다.

알려진 바로는 친구인 안명세의 죽음 때문이라고 한다. 안명세는 사관으로서 당대 큰 사건인 을사사화를 바탕으로 <시정기>를 저술한 인물이다. 그러나, 당시 집권자들은 그 기록이 불순하다는 이유로 안명세를 죽여 버렸다. 권력이란 게 얼마나 허무한 것이며, 권력을 잡은 자들이 얼마나 비열한 사람들인가?

그는 죽장에 삿갓을 쓰고 자연을 벗삼아 사람들의 세상으로 떠나 버린다. 북쪽의 오지에서 남쪽의 제주도까지 그는 전국 방방 곳곳을 유랑하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하고, 토론하면서 살기 시작했다.

그의 옷차림은 정말 남루하였다. 천민이나 상민들이 쓴 패랭이 갓을 쓰고, 발에는 짚신을 신고, 옷은 누더기처럼 다 떨어진 도포자락을 걸치고 다녔다.

당시에 제주도는 어떻게 갈수 있었을까? 당시 기술로 제주도를 혼자 간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그는 작은 조각배를 만들어 네 귀퉁이에 큰 바가지들을 달아두어 균형과 함께 부력을 이용하였다. 그리고 그 배를 이용하여 제주도를 자주 드나들었다고 한다.

그가 45살이 되었을 때, 국가에서는 지함의 가문을 고려하여 그에게 포천현감 자리를 주었다. 지함을 알고 있던 학자들이 적극적으로 천거한 것이다. 일종의 특별 채용이자, 어찌보면 낙하산일 수 있었지만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출세의 기회였다.

그는 현감이 되어서도 걸인과 같은 생활을 하였다. 향리들의 접대는 모두 거부했고, 평소 식사도 잡곡밥과 소금국을 먹었다. 백성들의 음식과 똑같거나 못해야 그들의 삶을 더 잘 알 수 있다는 것이 지함의 철학이었다.

지함은 고을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낚시대와 그물을 보내달라고 조정에 건의하였다. 물고기를 잡아 경비를 마련하면 백성들의 세금 부담이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조정에서 그 의견을 무시하는 것을 보고 현감 자리 조차 버리고 다시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4. 빈민의 삶을 이해한 방랑자

지함은 오랜 여행을 통해 빈민들의 삶이 얼마나 고단한 것인지를 몸소 체험하였다. 그는 하층민들 역시 자신과 똑같은 인간이라는 기본 전제를 신념으로 삼은 것 같다.

신혼 다음날 추위에 떨고 있는 부랑아를 위해 자신의 옷을 벗어주고 떠난 일화도 있다. 노예의 아이가 책을 읽고 싶어하면 자신이 아끼던 책을 주고 그 아이의 부역을 빼주기도 하였다. 그래서일까? 그의 제자 중에는 상인과 노예들도 꽤 많았다.

지함은 어느 날, 한적한 섬에 들어가 박을 심었다. 그 박을 팔아 곡식을 사니 그 곡식이 가난한 사람들이 마음껏 먹을 만큼 많았다. 지함은 곡식을 마포로 가져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대가로 빈민촌 한가운데 조그만 땅을 얻었다. 빈민들은 그가 빈민촌에 흙으로 쌓은 정자에서 산다고 하여 <토정> 선생이라고 불렀다.

그가 왜 하필, 박을 팔아 곡식을 만들어 빈민을 도왔을까?

그것은 빈민들에게 단순히 곡식을 나눠주는 것 외에 큰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토정은 자신이 터득한 장사방법을 빈민들이 볼 수 있게 하고, 그것을 주민들에게 전수해 주려는 것이었다.

조선 초기 유통경제는 포구를 통해 이루어졌다. 지금처럼 고속도로나 지하철이 있는 것도 아니여서, 강 자체가 물자 운송의 핵심이었다. 배를 통해 지방의 산물과 서울의 시장이 만나는 곳이었으며, 유통을 통한 이익은 빈민들이 구걸해서 얻는 이익보다도 막대한 것이었다. 양반으로 태어나 상업에 손을 댄다는 것은 당시 큰 수치였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꼭 필요한 것이란 사실을 직접 보여준 것이다. 조선 초기에 등장한 양반 계급 출신의 상인이라고 할까?

5. 통상무역론을 주장한 혁신적인 사상가

57살의 늦은 나이, 그는 드디어 정치에 본격적으로 입문하게 된다. 정치를 혐오했던 그가 본격적으로 정치에 들어선 것은, 자신의 꿈을 현실화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서로 죽고 죽이는 사화의 시대가 끝났다. 훈구파와 사림파의 싸움은 선조가 즉위하면서 종말을 맞이했다. 서경덕, 성혼, 이율곡, 조식 계열의 학자들이 사림이라는 이름으로 정계에 진출하였다. 이들은 적극적으로 이지함을 추천하였다.

이지함은 빈민을 위한 복지사업의 가능성을 제시하였고, 국가에 많은 정책을 제시하였다.

그 핵심 사업은 부유층의 재산에서 좀더 많은 세금을 걷자는 것과 부유층의 부동산을 국유지로 설정하여 활용하자는 것이었다. 당시, 선조시기에는 조선 건국 세력인 훈구세력이 어느 정도 척결되었고, 그들의 불법 보유지를 국가가 환수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마련된 상태였다.

이지함이 생각한 것은, 산림자원과 해양자원이었다. 산림과 해양은 지배층의 것이 아니라 국유 재산이 되어야 한다. 성리학의 왕토사상과 고대 정전법의 토지공유사상을 도입하면 쉽게 자원을 확보할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토지와 바다 자체가 아니라 거기서 나오는 생산물이다. 광산의 금, 은과 바다에서 나오는 수산자원은 막대한 부를 축척할 수 있다. 그 자원을 통해 국고가 충당하면 빈민들을 도울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여기서 한걸음 나아가 이지함은 <국제통상>의 가능성을 주장하였다. 금, 은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빈민들의 생활 수준 자체가 나아지지 않는다. 산림자원과 광업자원이 부족한 국가에 비싼 가격으로 자원을 팔아 무역체계를 확립하면 막대한 이익이 생간다는 것을 생각한 것이다.

섬에서 만든 박을 가지고, 섬사람들이 나눠 먹는건 비효율적이다. 넓은 시장에서 다양한 물자와 교역하면서 서로의 이익을 남기는 것이 훨씬 현실적이라는 것이다. 이지함의 이론은 당대 유럽의 <중상주의 정책>과 비교해서 손색이 없는 것이었다.

6. 조선 시대 복지 사업의 선구자

이지함은 죽음을 앞둔 어느 순간, 고향은 충청도로 돌아와 아산 현감 자리를 맡았다. 그는 상인 신분의 친구들, 노예 신분의 제자들과 함께 중앙에서 원할하지 못했던 개혁을 실천에 옮겼다.

그가 생각한 빈민 구제 개혁안은 <걸인청>의 설립이었다. 국왕은 백성들을 하늘처럼 모셔야 한다. 그것이 성리학에서 말한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이다. 그러나, 백성들은 국왕을 생각하지 않는다. 백성들은 굶지 않고, 죽지 않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백성들을 굶기지 않기 위해 쌀 한바가지를 주는 것이 효율적인 것일까? 그것은 복지가 아니라 자선일 뿐이다. 진정한 복지는 백성들 스스로가 굶지 않는 방법을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혁신적인 철학으로 시작된 <걸인청> 사업은 여러 가지 사회 복지 사업과 연결되었다.

걸인들에게 먹고 잘 곳만 계속 제공해주면, 지원이 끊겼을 때 그들은 죽고 만다. 따라서 먹고 잘 곳보다 중요한 것은 일을 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주는 기본 자금이다.

걸인청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장사를 할 수 있는 기본 자금을 대여해주고, 값싼 이자를 거두어 들인다. 그 이자로 다른 이들에게 기술 교육을 시킨다. 기술 교육을 받은 이들은 해당 기관에서 일을 하여 수입을 얻는다.

힘없고 늙은 노인들은 짚신을 만들거나, 작은 나무를 깎도록 한다. 관청에서 그것을 사서 판매한 후, 이들에게 쌀을 대가로 지급한다. 일하지 않고 구걸만 하는 자는 처형하지만, 일을 하겠다는 자에게는 최대한 협조하여 일자리를 마련해준다.

2008년 실업자가 넘쳐나는 이명박 정부에서도 제대로 실시하지 못한 사회 사업이다. 그러나, 이지함은 빈민들을 위한 이 사업을 순조롭게 추진하였고 성과도 얻었다. 문제는, 이지함이 현감으로 부임한지 1년도 되지 못하여 생을 마감했다는 것이다.

그는 마포의 토굴에서 <토정>으로 살아갈 때부터 시작했던, 빈민들을 위한 한 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빈민들이 결혼날짜를 잡아달라던가, 좋은 일이 있을 지 점을 쳐달라고 했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비결>집을 만들었던 것이다.

우리는 토정비결을 단순한 <운수책>, <점보는 책>으로 여기곤 한다. 만약 토정비결을 쓴 사람이 이지함 본인 맞다면, 이 책은 빈민들에게 삶의 위안을 주면서도, 일하지 않고 요행만 바라는 이들에게는 경고하기 위해 쓴 책이 아닐까?

토정비결은 좋은 말들이 많이 있다. 약 70% 정도는 좋은 운수가 적혀있다. 그러나, 30% 확률로 경계해야 할 운수들이 적혀있다. 즉, 희망을 가지고 살다보면 좋은 일들이 있을 것이라는 삶의 제시를 하면서도, 운에 의지하지 말고 노력해야 한다는 지함의 경고가 아닐까?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by 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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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역사 속의 인물 이야기

<카사노바> - 역사적 변화가 낳은 이단아.

1. 베네치아 공화국의 몰락

1천년간 상인의 도시로 전성기를 누렸던 카사노바의 고향, <베네치아 공화국>

베네치아 공화국은 유럽에서 가장 부러운 자치 도시였다. 르네상스의 본거지인 이탈리아 반도에서 문화와 예술을 이끌어간 도시가 바로 베네치아 공화국이었다. <베니스의 상인>은 세계 무역을 주름잡는 이 지역 상인들을 일컫은 자랑스런 단어였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무역 거점이었다. 이 도시는 주변이 석호로 이루어진 까닭에 바다에 떠 있는 해양 도시였다. 그래서, 아시아의 지배자 투르크인들도 감히 베네치아를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베네치아보다 우수한 함선을 더 많이 동원해야 겨우 이 지역을 침공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기 때문이다.



   아무도 침공할 수 없는 난공불락의 해양 요새 베네치아.

천연의 조건을 갖춘 이 해상 도시는 유럽의 모든 물품과 정보가 넘어오는 요충지로서 상업과 첩보 산업이 발전하였다.

그러나 유럽의 해상 중심지 베네치아도 16세기를 넘어가면서 조금씩 기울기 시작한다. 스페인 지역을 중심으로 미국이라는 신대륙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유럽의 해상 중심지는 베네치아에서 마드리드, 런던을 잇는 서부 해안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18세기...

영국, 프랑스 등 서부 지역의 국가들은 비교적 강력한 왕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해양 산업에서 몰락한 베네치아는 가진 것이 없었다. 도시 시민들은 점점 불만을 갖기 시작했고, 도시 지도부는 이 불만을 어떻게든 해소해야만 했다.

베네치아가 택한 것은 <유흥 산업>이었다. 도시 곳곳에서는 합법적인 도박판들이 벌어졌다. 누구나 오락을 즐길 권리가 있었으며, 술을 마실 권리가 있었다. 여자들은 도박판에서 돈을 번 남자라면 누구에게나 윙크를 보냈다. 도시 전체가 하나의 유곽이 되었고, 모든 여성들이 창녀와 구분되지 않았다.

유럽인들은 베네치아를 유럽의 <환락가>로 여겼다. 프랑스의 파리가 <예술과 향락의 중심지>라면, 베네치아는 <퇴폐와 유흥의 중심지>였다.

1725년... 위대한 자치도시의 몰락 속에서 한 남자가 태어났다. 그가 바로 세계 최고의 바람둥이 <카사노바>였다.

2. 누구나 바람피는 사회.

카사노바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얼굴이 반반한 무명 배우들이었다. 어머니는 확실하지만,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알 길이 없다. 당시 베네치아에서는 아버지를 확인하는 일이 불가능할 정도로 난잡한 사회였기 때문이다.

1743년. 성 치프리아누스 신학교에 들어가 성직자로서 성공하려던 카사노바는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모두가 부도덕한 세상을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성직자로서 홀로 고고한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설교를 위해 단상에 올라간 그는 너무 술에 취해 자신의 몸도 가누지 못했다. 그러나, 돈이면 무엇이든 해결되는 베네치아 사회였기 때문에 그는 성직자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성직자가 깨끗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도시 전체가 창녀촌인데, 이곳에서 무슨 설교를 한단 말인가? 그는 보란 듯이 교회를 다니던 여성을 유혹하고, 떳떳하다는 듯이 감추지 않았다. 그래도 교회는 그를 눈감아 주었다. 그러나, 참다 참다 못한 교회는 그를 쫓아낸다.

그리고, 유명한 카사노바의 여정을 시작되었다.

카사노바는 생각했다. 가장 순결한 교회의 여인도 멋진 남자가 하나 하나 신경써주면 넘어올 수밖에 없다. 세상에 정조가 있는 여자란 없다.

카사노바는 잘생긴 외모와 뛰어난 사교 능력, 다방면에 박식하여 남녀를 불문하고 많은 친구가 있었다.

성직자란 직업은 교황이 거주하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휼륭한 직업이었다. 그러나, 카사노바에게 성직이란 여성을 유혹하기 위한 간판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가장 완벽한 직업인 로마 교황청에 들어가 일을 하였다.

그리고 그는 간판을 내세워 수많은 여인들을 유혹하였다. 고위층 집안의 부인과 그녀의 딸, 유부녀와 소녀를 가리지 않은 그의 행동은 수많은 남자들의 질타를 받았다.

그리고 결국 그는 로마에서 쫓겨나게 된다. 명문가의 부인들과 만난 사실이 문제가 되어 로마 지배층들의 공공의 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도망간 곳은 기독교가 존재하지 않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었다.

투르크 제국에서 다시 이탈리아 반도로 돌아온 카사노바는 <프리메이슨>에 가입하고, 비밀 첩보 요원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그는 첩보의 왕국 베네치아 사람이자, 교황청에서 일한 사람이었으므로 교회에 대해 남모르는 무언가를 많이 알고 있었다. 또, 천성이 바람둥이인 그였기에 엄격한 규율을 강조하는 교회 자체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전해진다...)

그는 여성들을 유혹히기 위한 기술로 탁월한 바이올린 연주 능력을 익히고 있었다. 17살에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바이올린 천재... 어느 여자가 넘어오지 않겠는가? 20살의 카사노바는 그 능력을 이용하여 예술의 도시 파리, 음악의 도시 빈을 돌면서 수많은 여성들을 유혹하였다.

3. 카사노바의 쇼생크 탈출

카사노바가 여성들을 유혹하기 위한 자금줄으로 이용했던 것은 <도박>이었다. 그는 도박에도 탁월한 능력이 있었던 듯 하다. 항간에는, 프리메이슨 비밀 활동을 통해 일종의 지원금을 받은 것이 아닐까라고도 한다.

하지만, 카사노바의 가장 든든한 자원줄은 양아버지 <브라가딘>의 지원이었다. 종교 재판관이었던 브라가딘은 갑작스런 발작으로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 이 때, 물불 가리지 않는 성격의 카사노바가 적절한 응급조치를 취해서 그를 살렸던 것이다.

21살의 젊은 카사노바.

브라가딘가의 양자가 된 카사노바는 이제 거칠 것이 없었다. 그의 일상은 여행이었고, 여행중 만난 모든 여인을 그의 침실로 끌어들였다. 카사노바의 여인이 100명이 넘는 것은 과장이라는 설이 있지만, 실제로는 100여명을 휠씬 뛰어넘는 숫자라고 한다. (그의 회고록에는 122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환락의 도시 베네치아는 일상적으로 섹스 파티가 유행하였고, 카사노바는 수녀들까지 파티에 초대하여 환락을 즐겼다고 한다. 그러나, 이 섹스 파티로 인해 카사노바의 인생은 꼬이기 시작한다.

카사노바와 파티를 즐긴 여인들 중에는 성직자의 부인, 종교 재판관의 애인 등 고위층들이 많았다. 이들은 카사노바가 <프리메이슨> 등 이단과 연결되어 있다는 정보를 듣고, 그를 협박하기 시작한다.

1755년. 카사노바는 금지된 이단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라는 죄명으로 종교 재판관에 의해 체포된다. 속내는, 여자를 유혹하는 그의 기술이 악마의 속삭임이란 뜻이다.

이로부터 5년간 카사노바는 피옴비 감옥의 가장 더러운 감방에서 가장 더러운 수감생활을 해야 했다. 지상최대의 바람둥이가 일생의 황금기를 감옥에서 보낸 것이다.

그러나, 카사노바는 누구도 탈옥할 수 없다는 혹독한 감옥. 피온비를 5년만에 탈출하였다. 피온비 감옥의 탈출은 그를 영웅으로 만들어 버렸다.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낸 바람둥이... 완벽한 쇼생크 탈출...

나를 이곳에 가둘 때 나의 동의를 구하지 않았듯이, 나 역시 동의를 구하지 않고 이곳을 떠나노라.

감옥을 탈출한 그는 바로 이탈리아 반도를 떠난다. 그럼 이 바람둥이가 갈 곳은 어디? 베네치아 다음으로 문화와 예술이 발달한 도시, 프랑스의 <파리>였다.

4. 혁명 전야의 프랑스에서 비밀 첩보원으로...

프랑스에 넘어간 카사노바가 할 수 있는 일은? 일단 연주를 할 줄 아니 문화예술계에 진출해도 돠겠고, 도박을 잘하니 타짜로 성공해도 되겠다.

파리에 도착한 카사노바는 옛 친구의 소개로 프랑스 재정 전문가로 활동하게 되었다. (말했듯이 카사노바는 남자들에게도 무척 인기가 많았다.) 재정전문가니 돈은 많이 벌었을 것이고, 30대의 바람둥이는 또 다시 프랑스 여자들과 달콤한 시간을 보내게 된다.

프랑스 정부는 천부적인 사교 능력에, 탈옥능력까지 갖춘 카사노바를 다국적 스파이로 이용하려고 했다. 프랑스에서 많은 경제적 혜택을 받은 그는 이제 <프랑스 비밀 요원>이 된 것이다.

그는 첩보 활동을 하면서도 틈틈이 여자들을 만날 자금이 필요했고, 많은 사람들에게 돈을 빌렸다. 그러나, 빚이 많아지자 그는 프랑스를 떠나 남부지방으로 여행하면서 도피 생활을 시작한다. 이때부터 <생갈의 기사>라는 가명을 쓰면서 살아간다.

남부 지방으로 도망다니던 그는 계몽사상의 아버지 <볼테르>를 만나게 된다. 볼테르는 사회 변혁을 위해 인간의 <이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고 다녔다. 카사노바 역시 <성직>이 따분하던 차에 인간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볼테르와 카사노바는 둘다 계몽 사상에 깊은 관심을 가졌지만,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랐다.

볼테르는 인간의 <생각하는 힘>, 즉 이성이 모든 것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카사노바는 이성보다는 열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머리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시키는 대로 따라가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인생을 살면서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그것을 행하는 것은 내 자유의지에 의해서 이루어질 뿐이다.

카사노바는 마음과 몸이 시키는 대로 행하는 자유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5. 산업 혁명의 고장 영국으로, 그리고 계속된 실패...

1763년. 영국으로 떠난 카사노바는 차가운 대우를 받는다. 카사노바의 잠자리 기술은 18세기 영국에서 전혀 먹히지 않았다. 영국은 산업혁명을 통해 새로운 산업 사회로 나아가던 시기였다. 큰 도박판도 없었고, 그의 능력을 알아보려는 사람도 없었다.

오히려 카사노바는 일생 일대의 수치를 맛보게 된다. 우습게 보았던 영국 창녀에게 속아 가진 돈을 모두 빼앗기고 버림받았던 것이다. 카사노바는 평소에 수많은 여성들을 만난 관계로 숭어알집 등을 이용한 콘돔을 만들어 성병을 예방하곤 했는데, 영국에 다녀온 이후 악성 성병으로 고생하게 된다. 최초의 콘돔 고안자가 스스로도 예방하지 못했다고 할까?

베를린으로 여행을 시작한 카사노바는 계몽사상을 맹신하는 프리드리히 대왕으로부터 관직을 받기도 한다. 여행의 견문을 넓히고자 러시아로 떠난 그는 러시아 여성들과의 만남 때문에 곤욕을 치르게 된다.

러시아 남성의 도전으로 결투까지 치르며 러시아를 쫓겨난 중년의 카사노바. 더 이상 카사노바의 신화는 없었다.

그는 결국 스페인으로 도망치게 되었다. 스페인에서 글을 쓰면서 몸을 추스린 그는, 고향 이탈리아로 돌아온다. 이탈리아에는 자신도 모르게 태어난 그의 딸도 있었고, 자신에게 원한을 품은 남자들도 있었다. 카사노바는 종교 재판소와 화해를 하고 다시 베네치아로 귀환하였다.

50살의 카사노바는 일리아스를 번역하며, 종교 재판소의 비밀 첩보원으로 활약하였다. 경력이 많은 카사노바에게 비밀 첩보원 일을 맡긴 것이 귀환의 조건이었을까? 아무튼 오랜 방황 끝에 탈옥범이 모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6. 회고록의 작성

1779년. 베네치아로 돌아온 카사노바는 <프란체스카>라는 가난한 처녀를 만나 평범한 가정을 꾸리게 된다. 물론 그의 정적들과 빚쟁이들이 카사노바를 괴롭히긴 했지만, 카사노바 일생에서 유일하게 행복한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행복도 5년을 넘기지 못하였다. 카사노바가 쓴 <사랑도 싫고, 여자도 싫다>는 풍자시가 문제가 된 것이었다. 그가 쓴 글에는 유력 귀족들의 비밀이 노출되어 있었다. 결국, 처음으로 진심어린 사랑을 했던 프란체스카와 강제로 헤어져 도망친 그는, 보헤미아로 도망친다.

그곳에서 그는 가난한 사서가 되어 13년간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면서 살아간다. 그가 말년에 적은 회상록은 젊은 날의 여행과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것이다.

그가 죽고 얼마 뒤, 카사노바를 낳은 환락의 자치 도시 베네치아는 멸망한다. 볼테르의 영향을 받은 프랑스 민중들이 혁명을 일으켜 새로운 정부를 세웠고, 정권을 잡은 나폴레옹의 군대가 유럽을 휩쓸며 베네치아 자치 공화국을 지도에서 지워 버렸기 때문이다.

몰락한 지중해의 역사를 보여주는 베네치아, 그 환락가에서 태어난 카사노바.

그리고 프랑스와 영국, 독일, 러시아의 변화를 몸으로 보면서 스파이로 살아간 카사노바.

역사는 이런 절묘한 시기에 절묘한 인물을 낳아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려는 게 아니였을까?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by 히스

 



카사노바의 스페인 기행 상세보기

카사노바의 귀향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아르투르 슈니츨러 (신아출판사,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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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노바의 베네치아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로타 뮐러 (열린책들,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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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유혹(카사노바 자서전)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조반니 자코모 지롤라모 카사노 (휴먼앤북스,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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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인 3(카사노바회고록)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진형준 역 (살림, 19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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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이탈리아
카테고리 아동
지은이 양재홍 (지경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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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이탈리아사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후지사와 미치오 (일빛,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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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노바
감독 라세 할스트롬 (2005 / 미국)
출연 히스 레저, 시에나 밀러, 제레미 아이언스, 올리버 플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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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고사 이야기

<홍일점>이란 말이 과연 아름다운 여성을 지칭하는 말일까?

수많은 꽃 사이에 눈에 띄는 색이 있으니...

우리는 흔히 수많은 남성 가운데 서 있는 아름다운 여성 한 명을 홍일점이라고 한다. 그럼 홍일점이라는 말은 누가 처음 쓴 것일까? 그리고, 그 말은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의미와 같은 것일까?

그럼 한번 따져보자...

그 말이 처음 등장한 문헌을 따져 올라가면 중국 송나라의 변법가 왕안석임을 알 수 있다.

왕안석이 살던 중국 송나라는 역대 중국 왕조 중에서 가장 허약한 왕조였다. 전쟁과 반란의 역사를 끊어 버리고자 송나라 태조가 실시한 <문치주의> 때문에, 송의 국방력은 너무도 허약했다. 송의 국방력이 허약한 것과 비례하여 주변국들은 송나라를 업신여기고 국력을 키워나갔다.

송나라는 역대 중국 왕조가 겪은 치욕중에서 가장 큰 치욕인 정강의 변을 겪게 된다. 중국 황제가 이민족에 의해 끌려가고, 주변 민족에게 세금을 바치면서 겨우 왕조를 유지해나간 것이다. 김용의 원작소설로 알려진 사조영웅전도 바로 이 정강의 치욕에서 스토리가 시작되었다. 거란의 요나라, 탕구트족의 서하, 여진족의 금나라, 훗날 몽골족의 원나라까지.... 송나라는 주변국에 의해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하였다.

그러나, 송나라의 보수세력들은 하나같이 일신의 안위를 챙기기에 급급하였다. 주변국에 내야 할 세금은 백성들의 고혈이었지만, 백성들을 위한 획기적인 부국강병책은 없었다.

송의 황제 휘종과 흠종이 이민족의 군대에 의해 잡혀가고 송나라(북송)는 곧 망한다. 그러나, 정강의 변보다 앞서 신종 치세 때 등장한 왕안석은 약해빠진 송나라를 부유하게 만들고,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였다.

  왕안석은 국가를 바로 세우기 위한 법을 바꾸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가려고 했다. 그는 전통적 유학사상에 얽매여서는 국가의 발전이 없다고 생각했다. 굳이 공자 사상에만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필요에 따라서는 요순시대의 초기 태평사상과 춘추전국시대의 법가사상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왕안석은 뜻을 같이하는 이들과 함께 개혁을 추진해 나가려고 했다. 그의 진보적인 정당을 역사에서는 <신법당>이라고 부른다. 지금으로부터 천년전에도 과감한 진보적 신당이 존재했던 것이다. 
   
   신법당은 기존 사회질서를 유지하려는 <구법당>과 대립하면서 왕안석은 백성들을 위한 과감한 대책들을 쏟아내었다. 송나라의 시기는 중국 역사상 가장 허약한 시기이면서도, 가장 활발하게 붕당정치가 이루어진 시기였다. 신법당은 끊임없이 개혁안을 던져놓았고, 구법당은 신법당의 개혁이 부당하다는 것을 조목 조목 반박하였다. 이 두 당의 공존 시기에는 각자의 입장을 밝히기 위해 등장한 수많은 학자와 문예가들이 있었고, 제법 유명한 시인과 소설가들도 구법당에 들어가 왕안석과 논쟁을 하곤 하였다.

신법당은 국가 인력 확충을 위해 과거제도를 개방적으로 확대하고, 신분보다는 태학의 유학생 등 지식을 우선으로 하는 인재 등용을 논의하였다. 또 가난한 농민과 상인들에게 싼 이자로 농기구와 물자를 대여해주는 획기적인 방안을 제시하였다. 일반 농가에 군용말을 키우게 하여 국방을 강화시키는 대신 농민들에게 물자를 제공하자고 하였으며, 농촌 사회를 군 행정구역과 일치시켜 국방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당대 유명한 지식인이자 학자들인 사마광, 구양수, 소식 등은 왕안석의 획기적인 방법을 비판하였다. 기존의 사회 질서를 벗어난 개혁은 무리가 따른다는 것이었다.

왕안석은 좌절하였다. 보수적인 유학자들이 자신의 본문을 다하지도 못하면서 현실에 안주하려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보수의 가치는 <도덕성>이다. 기존 질서를 유지하려는 자들이 인정받기 위해서는 도덕적으로 청렴하다는 인식이 있어야 일반 민중들이 수긍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라가 부패하고 망해가는데 도덕성도 없는 보수에게 무엇을 믿고 맡긴다는 것인가?

그렇게 망가진 보수주의자들이 왕안석을 서슴없이 비판한다.

  - 모나게 튀어나온 못이 누군가를 찌른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무엇을 바꾼다는 말인가? -

왕안석은 자신의 개혁 사상이 결국 좌절될 것임을 알고 비통해했다. 국왕의 신임이 얻고 있는 동안에야 개혁이 가능하겠지만, 왕이 바뀌고 자신이 죽고 난다면 누가 또 굳이 힘들게 기존의 질서를 바꾸려고 하겠는가?

왕안석은 자신의 시 <석류>에 <홍일점>이라는 말을 남긴다.

수없이 푸르고 푸른 것들 중에서

홍일점이 있구나.

사람을 움직이는 아름다운 색은

생각해보면 많은 것이 아니구나.

수많은 꽃 사이에 눈에 띄는 붉은 점이 있으니 눈에 띄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눈에 띄는 색은 그리 많지가 않다. 붉은 점이 많았다면, 흔했다면 관심을 받지도 않았을 것이다. 왕안석이 생각한 홍일점은 수많은 꽃 중에 눈에 띄는 하나의 꽃이 아니라, 하나밖에 없어서 질투를 받아야 하고, 홀로 걸아야 하며, 그 색이 바래지면 더 이상 주목받지 못하는 그런 하나를 말한 것이 아닐까?

왕안석이 사라지면, 더 이상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 붉은 색들이 많았다면, 붉은 색들이 푸른 색들을 압도한다면... 세상을 바뀌지 않을까?

갑작스럽게 색깔론이 생각난다. 우리 사회에서는 모두가 푸른 색이여야만 한다. 하나라도 붉은 색이 있어서 튄다면, 빨갱이란 소리를 듣는다. 국회에 가보면 아직도 색깔론이 판친다. 빨갛다는 것은 하나라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푸른 것과는 별개의 것이라서 탄압받는다.

왕안석 역시 자신만이 붉기 때문에 슬퍼했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파란 식물 속에 빨간 꽃을 홍일점이라고 말한다. 홀로 고고하니 아름다울 것이라고 말한다. 남성들 사이에 유독 아름다운 여성이 있다면 홍일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 왕안석이 말한 홍일점도 그런 것이었을까?

결국 송나라는 왕안석이 죽은 이후 얼마 못가 금나라에게 국토의 절반을 강탈당하고, 몽골제국에게 멸망하게 된다. 그 북방민족들은 왕안석이 그토록 가지고자 했던 강력한 기마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결과를 생각해본 왕안석이 시에서 남긴 <홍일점>은 아름다운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소연할 곳 하나 없이 외로운 자신의 개혁사상에 대한 비통함을 적은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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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인물 이야기...

쌍화점 속의 고려왕들 - 개혁가인가, 변태들인가?

1. 영화 쌍화점?

유하 감독이 만든 쌍화점이 극장가에서 화제라고 한다. 19세 이상 볼 수 있는 작품인데, 동성애를 본격적으로 다룬 작품이란다. 개인적으로는 유하 감독의 작품은 머리 아파서 잘 보지 않는다. 예전에 전직 대통령과 한국 정치 상황을 <무림>이라는 코드로 때려맞춰 만든, <바람부는 날에는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라는 시집을 읽은 기억이 난다. 아이디어는 기발했지만, 그 이상은 없었다. 박정희가 무림최고수, 무림인들이 먹는 금단의 술 <에이주 AIZu>, 5.18을 풍자한 듯한 무림의 난?.... 뭐 그 정도 껴 맞추기 수준?

압구정동이나 말죽거리 잔혹사같은 영화에서 뭔가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의도보다는 이슈가 앞선 감독이었다. 쌍화점에서도 동성애 코드에 뭔가 의미를 부여한다고 하는데, 일단 보고 와서 칭찬을 하든, 비판을 하든 해야 하니 볼 수 밖에 없다. 결국 다 보게 되는 건가?

영화 쌍화점이 히트 상품이라니까, 쌍화점에 대한 이야기를 짧게 적어보야겠다. 고려의 왕들이 과연 동성애자인가?

2. 무신보다는 몽골쪽을 택했던 원종

영화 쌍화점은 어느 왕의 이야기인지 밝히지 않고, 그냥 그랬다라는 여운을 남기는 포스트모던 코드를 지향한다. 왜냐면, 역사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성애 코드와 멋들어지게 만들어진 스토리를 꾸미기 위한 배경으로 역사를 차용한 것 뿐이니까...

그럼 실제 역사에서의 쌍화점은 어떤 분위기에서 만들어졌을까?

<쌍화점>이라는 고려 가요가 역사에 등장한 시기는 최초로 <충>자 항렬을 사용한 <충렬왕>부터이다. 고려 25대 충렬왕은 몽골에 저항하던 최후의 세력인 삼별초가 완전 타도된 직후, 왕이 되었다.

충렬왕의 아버지 원종은 몽골에 항전한 <무신정권>을 뿌리뽑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몽골>쪽에 협조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였다. 1264년 몽골에 가서 몽골왕의 신임을 얻음으로서 고려가 망하는 것만큼은 방지하려고 했는데, 사실 국내 무신들들 제거하여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숨어있었다. 

무신 임연을 시켜 실세인 무신정권의 김준을 죽여 버렸고, 다시 임연을 죽이려다가 왕에서 쫒겨났다가 돌아온 일도 있었다. 몽골의 원조를 위해 원종은 동녕부(서경을 비롯한 서북부 영토)를 몽골에 바치기도 하였다.

몽골과 마지막으로 항전을 준비한 임연과 무신들은 결국 원종과 몽골(원)의 연합부대에 밀려, 결사항전을 시도했는데, 이것이 역사에서 유명한 <삼별초의 최후 항쟁>이다.

   삼별초가 탐라(제주도)에서 모두 제거당하자, 몽골은 무리한 요구를 하기 시작한다.
일본 원정을 위한 비용을 고려에 전가하기 위해 정동행성이란 임시기구를 만들고, 고려의 부녀자들을 몽골에 보내기 위해 결혼도감을 만든 것이다. 고려의 풍속은 문란해졌고, 부모들은 딸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어린 딸들을 일찍 시집보내기 시작한다. 

   원종이 삼별초를 제거한 직후 죽자, 그 아들이 왕이 되었는데, 아예 몽골에 충성한다는 뜻에서 <충>자를 붙여 <충렬왕>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3.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충>자 돌림의 왕들...

왕이 된 충렬왕은 할 수 있는 것이 딱히 없었다. 왕비는 몽골 쿠빌라이칸의 딸인 <제국대장공주>였다. 신하들 역시 친원파들이 대세였다.

그나마 고려가 망하지 않은 것은 아버지인 <원종> 덕분이었다. 몽골은 1대 징기스칸 - 2대 오고타이에 이어 다시 칸을 뽑아야 했는데, 고려 원종은 후계구도에서 멀었던 비주류 왕족 쿠빌라이를 적극 밀어주었고, 쿠빌라이는 고려의 도움을 받아 <원 제국>의 창시자가 되었다.

원종의 도박이 성공한 것이다. 덕분에 고려는 망하지 않았지만, 충렬왕은 몽골 공주를 아내로 맞이해야 했다. <종>을 붙이던 왕호는 <충>자가 붙은 <왕>으로 격하되었다.

황제국의 예법은 부마국(사위국)인 고려에 적용되었다. 태자는 몽골이, 세자는 고려가 사용하였다. 왕을 칭하는 <짐>은 몽골이, <고>는 고려가 사용했다. <폐하>는 몽골이, <전하>는 고려가 사용하게 되었다.

그나마 충렬왕은 원종이 실시했던 <전민변정도감> 사업 등 토지개혁을 하면서 친원파에게 소극적으로 대항하려고 했지만, 그 조그만 반항만으로도 친원파들에게 크게 찍히고 말았다. 충렬왕의 유일한 보호막인 몽골 부인이 죽자 마자, 충렬왕은 바로 폐위당한다.

충렬왕 24년.... 쿠빌라이칸의 외손자이자, 충렬왕의 아들이 <살아있는 아버지>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이 되니, 이 사람이 유명한 <충선왕>이다.

그런데, 충선왕은 충렬왕보다 더 친원파들을 미워했다. 충선왕의 부인은 쿠빌라이의 황태자인 친킴 가문의 공주였다. 충선왕은 대놓고 몽골 공주를 구박하였다.

여기서 쌍화점의 줄거리로 알려진 <바람피우는> 이야기들이 실제 역사 속에서 시작된다. 충선왕은 부인을 구박하기 위해 보란 듯이 바람을 피워 5명의 첩과 비를 두었다. 특히, 몽골의 천한 여자인 <의비> 등과 바람을 피워 몽골 공주를 자극하였다.

실제로, 27대 충숙왕은 몽골 공주가 아닌 의비가 낳은 아들이다. 거기에 친원파들이 아닌 신진 유학 세력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개혁조서>를 발표해 버린다. 그 개혁조서는 친원파들의 불법점유 토지를 원주인에게 되돌린다는 내용이었다.

이 때 아버지 충렬왕은 다시 왕위를 되찾기 위해 아들에게 여자를 붙여주거나, 바람 피는 것을 묵인하였고, 심지어 며느리인 몽골 공주에게 이혼과 재가까지 권유하였다. 몽골 공주는 충선왕에 맞서 계속 맞바람을 피웠고, 국정을 파탄으로 몰고갔다.

결국, 원나라 왕실은, 충선왕을 단 4개월만에 다시 짜르고, 충렬왕을 왕으로 재즉위 시켰다. 그러나, 아들과 며느리마저도 적으로 돌린 충렬왕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4. 아들의 개혁정치를 뒤로 하고...

충렬왕 본인도 개혁정치에 뜻을 두고 있었다. 충렬왕도 초기에는 능력있는 인재를 선발하고, 친원파를 숙청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원나라에게 패한 치욕을 갚기 위해 영토 수복도 원하였다. 그러나, 아들의 개혁정치를 무산시키고 다시 왕이 된 이후, 점점 힘이 빠지고 있었다.

충렬왕은 불교도였던 제국대장공주가 살아있을 때에는 눈치보며 바람을 피웠지만, 이젠 눈치볼 사람이 없어졌다. <쌍화점>이라는 속요가 원래 민간 속요였는지는 모르지만, 늙고 할 일 없는 국왕이 즐기기에는 딱 좋은 뮤직컬이었다.

쌍화잠이 처음 궁중에 들어온 것은 충렬왕 5년부터였고, 충렬왕은 이 공연 뿐만 아니라 다양한 공연을 궁궐내에서 즐겼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더 자극적인 공연을 찾았고, 왕위를 빼앗겼다가 되찾은 후에는 거의 공연에 미쳐산 듯 하다.

일설에는 충렬왕의 신하인 <오잠>이 왕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쌍화점을 뮤직컬로 개편하여 공연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오잠이 누구일까?

대표적인 <친원파>였다. 그는 고려라는 나라를 원나라에 바치자고 말한 <입성운동파>였다. 입성운동이란, 몽고의 행정단위인 <성>으로 편입하자는 것이었다. 요즘으로 따지면, 미국의 51번째 주로 편입하자는 것과 같다.

이 입성운동은 공민왕 직전까지 집요하게 진행된 운동이었다. 친원파 입장에서는 까질한 고려왕에게 아부하는 것보다는, 몽골 부족에 편입되는 것이 더 빠른 출세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입성책동운동은 <원나라>가 거부하였다. 우리가 나라를 미국에게 넘기자는데, 부시가 거부했다고나 할까? 이유는, 명분과 실리 때문이었다.

고려를 원왕조로 편입한다면, 삼별초의 40년 항쟁을 책임져야 했고, 끔찍한 내란이 일어날 경우 뒷감당도 해야 했다. 또, 고려를 자주국으로 둔다는 것은 고려에 은혜를 입은 쿠빌라이칸의 유언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원 입장에서는 고려를 편입해서 제국화하려는 시기가 아니라, 점령한 중국인들에게 신경써야할 시기였다. 이 입성운동을 행했던 일파는 훗날 공민왕이 시시비비를 따져 척살해 버린다.

아무튼, 친원파 오잠은 쌍화점을 국립 뮤직컬로 만들어 버리곤, 왕의 총애를 받으려 노력하였다.

5. 쌍화점은 변태적인 궁정 공연일까?

쌍화점에 쌍화병을 사러 갔더니 / 회회아비(몽고인, 혹은 아랍인)가 내 손목을 잡더이다.

만약에 이 소문이 이 가게 밖에 번지면(소문나면) / 조그만 어린 광대(심부름하는 아이) 네 탓이라 하리라.

그 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 그 잔 곳같이 난잡한 데가 없다.

삼장사에 불을 켜러 갔더니 / 그 절 사주가 내 손목을 잡더이다.

만약 이 소문이 이 절 밖에 번지면 / 조그만 어린 상좌 네 탓이라 하리라.

그 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 그 잔 곳같이 난잡한 데가 없다.

두레박 우물에 물을 길러 갔더니 / 우물의 용이 내 손목을 잡더이다.

만약 이 소문이 이 우물 밖에 번지면 / 조그만 두레박아 네 탓이라 하리라.

그 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 그 잔 곳같이 난잡한 곳이 없다.

술 파는 집에 술 사러 갔더니 / 그 집의 아비가 내 손목을 잡더이다.

만약 이 소문이 이 집 밖에 번지면 / 조그만 바가지야 네 탓이라 하리라.

그 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 그 잔 곳같이 난잡한 곳이 없다.

쌍화점은 궁중악 대본이었고, 실제 공연은 기생들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여자배우들이 노래, 춤, 미모 등을 뽑내며 남장을 하고 나와 춤을 추었는데, 이것으로 단순히 <동성애 코드>가 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왜냐면, 유목국가인 몽골에서 바지를 입는 것은 단순한 문화적 차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고려풍이 몽골에 유행했듯이, 몽골 양식이 고려에 유행하였다.

   남장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지만, 그것이 곧 변태적 취미라고 몰아붙이기에도 이상하고, 일상적인 동성애 코드라고 보기에도 좀 그렇다. 몽골인들도, 그들과 다른 고려의 사냥술 등을 새로운 문화인 양 받아갔기 때문이다.

쌍화점은 궁중악으로 연출되기 위해 대화식으로 구성되었다. 한명이 <만두 사러 갔더니 내 손목 잡더라>라고 말하면, 다른 한 명이 <나도 가고 싶어..> 하는 식으로 되받고, 후렴구를 같이 노래하는 형식이다.

원래 이 노래가 민중 속요에서 비릇된다고 볼 때는, 왕궁은 우물, 왕은 용 등으로 풍자해서 혼란한 시대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의미짓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 원나라의 지배 속에서 충렬왕 때만 혼란한 시기였을까? 충자 돌림의 모든 왕들은 개혁정치와 자주정치, 그리고 친원파 사이에서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25대 충렬왕은 무능력한 자신을 탓하며 개혁을 실패한 자신을 자책하면서 살았고, 26대 충선왕도 아버지가 죽은 뒤 개혁정치를 하기 위해 <사림원>을 만들었지만, 결국 친원파들이 제공(?)한 미녀들 속을 허우적거리며 고뇌했다. 심지어 유학자 이제현은 충선왕이 사랑한 여자가 다른 곳에서는 창녀와 다를바 없이 즐기고 산다는 거짓말까지 하면서 하면서 왕의 여자들을 떼어놓으려고 노력하였다.

27대 충숙왕은 자신이 사랑한 여자를 버리고 몽골 공주와 살아야 하는 것이 싫어서, 이유없이 몽골 공주를 때리고 구타했다고 한다. 몽골 공주가 골병들어 죽자 17살의 어린 몽골 공주를 데려와 아이를 낳게 했는데, 그 공주도 어린 나이에 출산하다가 죽고 만다. 결국 충숙왕은 몽골 여인들을 학대한 죄로 왕에서 쫒겨나게 된다.

28대 충혜왕은 몽골 공주가 아닌, 고려 여인이 어머니였다. 그러나, 몽골의 정권이 바뀌자 빽없는 충혜왕은 쫒겨났고, 아버지 충숙왕이 다시 왕이 되는 헤프닝이 벌어진다. 충혜왕은 여기에 앙심을 품고, 훗날 다시 왕이 되어 아버지의 부인이었던 왕비를 공개적으로 성폭행하고, 외숙모, 황태후도 욕보인다. 결국 충혜왕은 엽기적인 행각으로 나라 망신을 시킨 죄로 원에 압송당하였는데, 가는 길에 쓸쓸히 죽어 버린다.

충혜왕이 죽고서, 고려의 왕은 친원파가 선출하는 분위기였다. 충목왕, 충정왕은 나이 어린 꼬마였고, 어린 나이에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원에서는 친원파 기철의 누이가 <기황후>가 되어 영향력을 행사했다. 고려는 친원파 세상이었다.

이 때 등장한 공민왕은 왕위계승과 거리가 멀었지만, 원의 노국대장공주와 원의 수도에서 정략결혼을 함으로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공민왕은 이전의 왕돌과 다르게 바람을 피우지도 않았고, 몽골 공주를 적대시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몽골 공주가 죽자 식음을 전폐하고 슬퍼할 정도였다고 한다.

왕호에 <충>자를 사용하는 저주가 없었기 때문일까? 공민왕은 드디어 <충>자 왕들을 따라다녔던 <몽골 여자의 저주>에서 벗어났다. 몽골 공주 외에는 몽골 여인이 없었으며, 유력 신하들과 신돈의 딸만을 귀비로 받아들였을 뿐이다.

혼란한 시기가 서서히 끝나면서, <충>자 돌림 왕돌의 엽기적인 행각도 끝이 났다. 그리고, 조선이 건국되면서 이들 <충>자 돌림 왕들의 행적은 <남녀상열지사>로 기록되어 나쁜 왕의 선례로 거론되었다.

  쌍화점은 단지, 충렬왕 때의 엽기적인 행각만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충>자 돌림의 왕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주었던 좌절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그들은 그토록 몽골 여인이 싫었을까? 몽골 공주들은 부인이 아니라 원의 황제가 보낸 감시인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실제 고려의 역사를 살펴보면 <충>자 돌림의 왕들처럼, 왕권 확보를 위해 치열하게 투쟁한 왕들도 찾아보기 힘들다. 이들은 어떻게든 원나라를 벗어나기 위해 각종 개혁안을 발표했다. 친원파를 대신할 세력을 찾기 위해 유학을 공부하고, 유학자들과 끊임없는 교류를 하기도 하였다. 원나라만 물러가면 만주와 요동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면서 어두운 시기를 참고 견뎌내었다.

  고려 전시기를 통털어 각종 제도 개혁을 가장 많이 발표했던 시기도 이 시기이고, 조선왕조를 건국한 유학 세력이 태동한 시기도 이시기이다. 그러나, 그들의 다양한 개혁은 모두 원나라와 친원파에 의해 실패했으며, 그들은 좌절감에 묻혀 살았다. 몽골 공주에게나 한풀이하면서 살았던 그들의 행적은 <엽기>로 기록되었다. 조선시대에 남겨진 <고려사> 등의 기록은 그들을 방탕한 왕으로 기록하였다.

  언젠가는 공민왕이나 신돈 뿐 아니라, 그 이전 시기의 <충>자 왕들에 대한 평가도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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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이야기가 있는 우리역사 1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박한용 외 (동녘, 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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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한국사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김경훈 (오늘의책,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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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왕조사 4 (충렬왕-충정왕)(주문판매)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유재하 (학문사,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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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에 시집온 칭기즈칸의 딸들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이한수 (김영사,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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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화점
감독 유하 (2008 / 한국)
출연 조인성, 주진모, 송지효, 심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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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상고사와 신채호 선생 (1)

어둠의 시기, 역사를 바라보는 틀은 <민족>일 수 밖에 없었다.

1. 1910년 이전의 신채호....

오늘 소개할 역사책은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 상고사>이다. 먼저, 책의 내용을 소개하기 전에 신채호 선생이 살았던 시기를 간략히 짚어보자.

신채호 선생이 태어난 1880년은 민씨 정권에 의해 본격적인 <개화>가 시작되던 시기였다. 흥선대원군을 대신하여 <일본>으로부터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개화 정책으로 인해, 조선 사회는 술렁이고 있었다.

개화가 사회의 큰 화두가 되었던 그 시기, 동학농민들이 개혁을 외치다 총탄을 맞고 쓰러진 그 시기, 구체제의 모든 것을 버리고 서구식 새 옷을 마련한 1894년의 갑오개혁이 일어난 바로 그 때의 조선... 

그 변화의 한가운데에서 신채호는 19세의 나이로 성균관에 입학하여 유학을 공부하였다.

약관의 나이로 독립협회에서 활동한 그는, 훗날 삼균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조소앙과 함께 <항일 성토문>을 발표하여, 친일파를 규탄하는 운동을 시작했으며, 산동학원을 만들어 교육자로서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1905년에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자진 사퇴하고, 장지연의 황성신문사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그는 객원논설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계몽사상을 전파하려고 했으나, 장지연이 을사조약 반대를 표명한 <시일야 방성대곡>을 발표하면서 신문사 자체가 일본에 의해 탄압받게 되었다. 이후, 황성신문은 무기한 정간당하였고,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1906년, 양기탁과 베델이 이끌어가던 대한매일신보에 들어가 주필로 활약하면서 일본의 침략에 대한 부당함을 다양한 글로 적어 내었다. 초창기 그의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역사논문

   독사신론(讀史新論)

신문논설

   일본의 삼대충노     한일합병론자에게 고함    역사와 애국심과의 관계
   한일합방의 부당       대한의 희망   등...

연재시론

   천희당시화

영웅전기

   을지문덕전    이순신전     이태리 건국 삼걸전

다양한 영웅전기는 그가 <민족주의>를 선호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역사 속의 <민족>이란, 생명체와 같은 것으로 나라는 주체(아我)는 다른 모든 것(비아非我)과 구별되는 실체이다. 우리 역사 속에 살아숨쉬는 영웅들은, 민족이라는 <생명체>를 숨쉬게 한 매개체와 같은 것이다. 영웅이 제시해줌으로서 민족을 계몽하려던 신채호의 초기 계몽사상은, 일제 강점기에 <좌절감>을 느끼던 대중들에게 반항의 힘을 주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반대로 <독사신론>은 위대한 민족의 역사를 부정하면서, 일본에 의지하려는 편협한 개화주의자들을 비판하기도 한다. 개화와 매국은 뭐가 다른 것인가? 일본에 의지해서 선진문물을 받아들이자는 이들이, 일본과의 조약에 서명하고 나라를 일본에 넘기는 것까지 선진문물과 개화로 연결시킨다. 이것은 로마제국에서 노예로 살면서 로마를 찬양한 이들과 무엇이 다른 것인가?

독사신론은, 단군에서 출발한 우리 민족은 <부여>, <고구려>로 이어지는 위대한 시기를 구가했었다고 주장한다. 일본보다 위대한 역사를 가진 민족이 노예근성으로 타락해서는 안된다고 역설한다.

하지만, 1908년 무렵 대한매일 신보에 연재된 이 글들은, 신채호가 민족의 위대함만을 강조하기 위해 적은 글이 아니다. 일본에 의지하여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노예근성이 망국으로 이어졌다는 현재의 상황을 직시하고자, 고대사 이야기를 계속 꺼내고 있는 것이다. <독사신론>의 이야기는 그 이후,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사연구초, 조선상고사 등에서 계속 반복되고 있다.

신채호는 한일합방이 이루어진 1910년까지, 국내에서 다양한 독립운동단체에 가입하거나, 직접 주도하여 친일파들과 항전하였다.

1905년 장지연의 <황성신문>, 1906년 양기탁의 <대한매일신보>에서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는 논설을 지속적으로 실었고, 1906년 대한자강회에서 활동하면서 조선인의 교육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또 국채보상운동을 장려하기 위해 직접 활동에 참가하였으며, 윤치호, 안창호와 같이 결성한 청년학우회의 창립취지문을 작성하기도 했다.

링크 : 신채호가 대한협회 원보에 올린 글(1906) http://historia.tistory.com/189

그러나, 1907년 일본에 저항하기 위해 만든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가 한일합방 무렵부터 일본에 의해 탄압받으면서, 일제강점기 시기 내내 망명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중국으로 망명하면서도 안정복의 친필이 담긴 <동사강목>을 품에 꼭 안고 있었다고 한다.

링크 : 신민회의 설립 취지문 http://historia.tistory.com/188

2. 1910년 이후의 신채호

1910년, 31살의 신채호. 그의 30대는 너무나 암울하고 어두운 시기였다. 독립을 위해 발버둥칠수록 더욱 암담한 현실의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고나 할까?

1910년 안창호와 같이 산둥지방으로 도망간 신채호는 독립운동가들의 모임인 <청도회의>에 참여한 뒤, 독립운동자금을 모아 무관학교를 세우고 <무장독립투쟁>을 할 것을 결의한다.

링크 : 청도회의 <daum 신지식인 검색>

1911년 이동휘와 함께 광복회를 조직하여 부회장을 역임하면서, 청구신문 등 민족신문에 끊임없이 글을 기고하였다. 1913년에는 상하이에 <동제사>를 건립하여 신규식, 조소앙, 박인식, 정인보 등 민족주의 학자들과 함께 조선 독립운동을 알리는 역할을 하고 다녔다. 30대의 신채호가 독립운동과 계몽활동을 위해 노력한 흔적들은 다음과 같다.

1910년

  대동공보 주필, 청구신문 발행

1911년

  광복회 부회장으로 활동

1912년

  권업신문 주필로 국외 조선인 계몽활동

1913년

  동제사 활동 - 박은식, 조소앙, 정인보, 문일평 등과 민족주의 저술활동

1914년

  대종교 동창학교 교사 활동, 조선사 집필 착수, 광개토왕릉비 현지 답사

1915년

  신한혁명단 조직 후 무장독립운동 활동 시작(일본에 의해 실패)

1916년

  소설 <꿈하늘> 집필, 도제사언문 집필(나철 추모)

1918년

  <조선사> 집필, 무오독립선언 33인에 참가

1919년

  3.1운동 국외 참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원 활동, 신대한 주필 활동

1920년

  만주 독립군 단체를 통합한 군사통일촉진회 발기

  1910년대 신채호는, 망명 생활을 하면서도 틈틈이 글을 지었고, 독립운동과 계몽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적어나갔다. 특히 1915년에는 무장독립활동이 독립에 필요하다는 전제하여, <신한혁명당>을 조직하여 1차 무장독립운동을 시도하였으나, 일본의 철저한 감시로 실패하였다.

일찍이 민족 영웅을 통한 애국심 고취에 관심이 많았던 신채호는 직접 광개토대왕릉비를 답사하여, 비석을 일본이 위조했다는 것을 밝혀내고, 그 비석이 가진 의미를 재발견하기도 하였다. 신채호의 노력으로 광개토대왕릉비를 위조한 일본의 만행을 논리적으로 지적할 수 있게 되었다.

링크 : 광개토대왕릉비 비문 조작설(출처 : 조선상고사) http://historia.tistory.com/323

 

 

다음 장에서는 3.1운동이 신채호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으며, 신채호의 사상이 3.1운동 전후로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이야기 해본 뒤, 당시 민족주의자들이 생각한 3.1 운동과 독립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하자. 신채호의 일대기를 정리한 뒤, 3-4편부터는 대표작인 조선상고사에 나오는 신채호 사상을 정리해보면서 마치도록 하겠다. (블로그에 적는 주관적인 글이기에 일부 다른 견해가 있어도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p.s : 요즘 백범 김구선생의 기념관을 짓는 것, 김구선생을 모델로 한 10만원권을 발행하는 것 등이 전면 중지되었다. 신채호는 무정부주의자이고, 김구는 건국을 반대한 빨갱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홍경래, 전봉준은 내란을 일으킨 좌파 빨갱이이고, 안중근, 윤봉길은 테러리스트에 불과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황당함과 짜증을 넘어 색다른 이론을 창조적으로 만드는 그 분들에게 경의까지 표한다.

단, 근현대사 교과서는 만든 사람끼리만 읽어주세요.. 제발..

링크 : 그 분들이 수험을 출제한다면 이런 문제가???

 

역사 이야기 <히스토리아 > http://historia.tistory.com    by 히스

 

 

자세한 내용은 이 책을 참조하세요 ...

조선상고사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신채호 (비봉출판사,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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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푸른 역사가 신채호
카테고리 아동
지은이 김남일 (창비,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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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그생애와 사상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임중빈 (명지사, 19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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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문화사(외)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신채호 (비봉출판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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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의 역사사상 연구
카테고리 역사/풍속/신화
지은이 신일철 (고려대학교출판부,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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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 평전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김삼웅 (시대의창,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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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문집(사르비아문고 29)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신채호 (범우사,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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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투머리가 유행인가요?

상투머리의 간략한 역사

1. 상투머리의 재발견?

최근 연예인들의 머리 모양을 보면 특이한 상투 모양을 하고 있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웬 상투 머리가 유행??? 하지만 주변머리를 쑥~ 올려서 깔끔하게 단장한 이 머리 모양은 간편하기도 하지만, 잘못 묶으면 뭔가 어색하기도 하고...

특히 여자연예인들, 그것도 아이돌이라고 불리는 연예인들은 이 머리를 통해 귀여움을 강조하는 듯 싶다. 특히 일본에서 간단히 머리를 말아올린 스타일이 우리나라에서는 상투머리라 불리면서 더욱 다양한 스타일로 진화하고 있다. 한국, 일본 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한류의 영향으로 이 머리 스타일을 쉽게 받아들인다고 한다.

일본의 아요이 유우라는 배우로 상징되는 일본식 머리가 한국에 들어와 남성들의 머리 패션으로 자리잡았다.
한국에서 유행하던 서인영식의 바가지 머리와 정반대의 이 패션은 새로움을 추구한다는 맥락 때문인지, 
뒤늦게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원래 인류의 역사에서 머리모양은 기본적인 신체적, 생리적 역할 외에도 미적 기능과 사회적 기능을 함께 하였다. 인류가 의복생활을 시작한 시기부터 머리 모양에 대한 관심은 지속되었으며, 머리 모양은 그 사람의 외관을 표현함과 동시에 그 사람의 신분이 무엇인지까지 가늠할 수 있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인류가 도구를 사용한 이후, 몇만년전의 인류들도 손을 이용하여 머리를 손질할 수 있었으니, 다양한 석기구 중에는 머리를 짜르기 위한 도구도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뼈바늘이 옷을 입기 위한 도구였다면, 갸름한 반달돌칼은 충분히 이발도구로도 이용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청동기 시대에는 동물 뼈로 만든 비녀가 등장하였다.

서기 1900년경, 메소포타미아의 헤브라이족은 범죄를 저지른 이들의 머리를 삭발한 뒤, 죄를 뉘우칠 때까지 머리가 자라는 것을 지켜봐 주었다고 한다. 이 때 이용사들은 재판관이자 죄를 정화시켜추는 신관이었다. 고대인들은 전쟁 등으로 부상을 당한 사람이 있을 때, 머리에 기를 불어넣어주는 것이 치료법이라고 믿었고, 머리 카락은 우주의 기가 주입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실제로, 그러한 관점에서 머리모양을 다듬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 나라의 머리 역사를 보면 머리카락을 아무 이유없이 다루지는 않았던 것 같다.

2. 고구려의 상투틀기

사마천의 사기에 보면, 위만이 상투를 하고 조선에 들어왔다고 말한다. 위만이 상투를 튼 것은 조선인임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이 전통이 고구려에 연결되어 초기 고구려인들도 상투를 하였다.

고구려 안악 고분 벽화 사진들(위)을 보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외상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좌) 고구려 고관들 (중) 수박싸움을 하는 병사들 (우) 안악고분의 문지기 모습

고구려의 상투는 일반적으로 외상투가 많았고, 간혹 쌍상투가 보이기도 한다.(중국 집안현 5호 벽화의 문지기 사진) 쌍상투는 생머리를 2갈래로 땋은 뒤, 말아올려 뒷통수의 머리 위까지 올린 상투를 말한다.

(좌) 상투를 튼 석상 (중) 고구려 각저총에 나타난 상투 (우) 신라인의 상투를 보여주는 작품

벽화의 시기를 보면, 오래된 것일수록 상투가 높고, 시기가 지나가면서 상투가 낮아진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정치적 변화 때문이다. 4-5세기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전성기 때 중국 한나라와 다양한 교류를 하였고, 6세기 이후에는 중국 남북조 및 돌궐, 유연 등의 민족과 교류하면서 이질적인 헤어스타일이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점차 가벼운 단발을 하거나 북방식 변발을 하는 모습이 나타나게 된다.

중국 벽화에 나타난 고구려의 상투튼 병사들의 훈련장면(좌)과 복원도(우)

남쪽의 삼한에서는 괴두라고 하여 동글동글하게 말아올린 상투를 틀었는데, 이것이 백제 남성의 머리 모양으로 이어진 듯 하다. 신라는 정수리를 뽀족하게 만든 상투를 볼 수 있으나, 점차 삼한 시대의 머리 모양을 벗어나 독자적인 형태를 이어간 듯 하다. 특히 삼국을 통일 한 이후 지배층은 중국 당나라의 영향으로 화려한 머리 모양을 한 듯 하다. 발해는 <머리를 땋아 길레 늘어뜨렸다>는 기록이 나온다.

3. 조선 시대의 상투틀기

상투를 쓸 때 쓰던 망건

원래 상투는 여진족과 강족, 인도인, 막부시대의 일본 무사, 심지어는 아메리카 인디언에게서도 볼 수 있는 풍습이다. 그러나, 고대 사회의 기록과 벽화를 볼 때 우리 민족 고유의 상투 트는 풍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지역의 상투와 우리의 상투 모습이 확연히 다르기도 하지만, 우리의 상투 풍습이 이들과 관련있음이 입증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말기, 몽골의 침입으로 변발이 성행하였다. 몽골인들은 머리의 앞부분 반을 모두 밀어 버렸는데, 고려인들은 이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따라서, 상투를 트는 풍습은 중지되었지만, 그렇다고 몽골식으로 앞머리를 모두 밀지도 않았다.

조선시대에 이 변형된 변발 풍습이 소위 말하는 <백호치기>로 연결된다. 상투를 틀때 정수리 부분의 중앙 머리(소갈머리)를 깍아 버린다. 가운데 머리가 뻥~~ 하니 사라지면, 주변머리를 가운데로 말아올려 상투를 트는 것이다.

소갈머리를 없애는 것은, 상투 머리의 부풀어오르는 문제점 때문이기도 하지만, 상투를 감싸주는 망건과 동곳이 잘 고정되게 하는 효과도 있기 때문이다. 또, 결정적으로는 머리를 안깍을 경우 여름철에 너무 덥다는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원래 상투는 결혼을 하거나 성인식을 거쳤을 때 올리기 때문에 상투를 올리지 못했다는 것은 성인대접을 받지 못하거나, 양반이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양반이지만 결혼을 못한 이들은 대놓고 상투를 하고 다니기도 했는데, 이것을 <건상투>라고 한다.

<소갈머리 없다>나 <주변머리가 부족하다>는 말도 여기서 유래되었다. 소갈머리는 상투를 틀어야만 생긱는 것이기 때문에, 아이들과 양반이 아닌 계층은 소갈머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문이 미비한 중인들이 능력으로 높은 자리에 앉아있다면 신분 파악을 못하는 놈이기 때문에 <소갈머리 없는 놈>이 되는 것이다.

<주변머리가 없다>는 것은, 상투를 틀지 못한 아이들이 머리를 땋아서 말아올린 쌍상투를 튼 것에서 이야기 된다. 아이들은 주변머리가 아닌 생머리를 땋아서 <새앙머리>를 만들어 다니는데, 만약 주제 파악을 못하고 양반집 자제와 같은 머리를 하는 평민이 있다면 눈치, 코치도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4. 단발령

상투가 사라진 것은 1895년 고종황제의 단발령에 의해서이다. 이 때, 유생들은 <부모님이 주신 머리를 베는 것은 오랑캐의 풍속>이라고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따라서 단발령은 국내 여론을 고려해 일부만 실시되었고, 성년식을 거친 유생들이 몰래 상투를 하는 것까지 제재하지 않았다. 실제로 상투가 사라진 것은 1910년 한일합방 때였다.

반면, 상투가 사라진 조선 사회에서 유생들은 짧은 머리를 부끄러워 해서 모자를 쓰고 다나기 시작했다. 신여성들이 다양한 악세사리로 첨단 패션을 보여주고, 개화파들이 멋진 양복과 구두를 뽐낼 때 이들의 유일한 악세사리는 머리를 가리는 모자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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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대는 낙서 세계사 (9)

아우구스티누스(1) : 마니교를 믿었던 기독교의 성자

1. 한 교부의 투쟁 : 고백록

354년. 11월 13일.

성 아우구스티누스

기독교  교부 가운데 최고의 사상가가 아프리카에서 태어났어. 그의 이름은 <아우구스티누스>. 교부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사람이지. 오늘은 너무나 유명한 이 사람을 주물럭 거리면서 고대라 불리던 서양 사회가 <기독교 사회>라고 불리는 시기로 넘어가는 이야기를 전개할거야.

사실, 그는 앞장에 이야기했던 <테오>만큼 종교가 절박하게 필요한 사람은 아니였어. 그렇다고, <갈라>처럼 기독교를 수호해야할 의무가 있는 사람도 아니였고, <히파티아>처럼 학문적 신념이 견고한 사람도 아니였지. 그런 그가 왜 기독교 철학을 집대성한 최고의 성인이 되었을까?

그의 인생과 사상을 알기 위해서는 그가 스스로 인생을 돌아보면서 적은 <고백록>을 보면서 이야기를 전개할 수밖에 없어.

성 아우구스티누스 교회

<고백록>은 그의 기억에 의존해서 적은 것이기 때문에 정확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그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거든.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5세기 이후 기독교 사회가 그의 <논리적인 사상> 뿐 아니라, <허무맹랑한 주장>까지도 다 수용했기 때문에, 더욱 더 그의 마음을 자세히 읽을 수밖에 없지.

그런데 말야. 그를 보통 <교부> 철학의 아버지라고 부르잖아? 그럼 먼저 <교부>가 뭔지부터 알아야겠지? <교부>는 <테오시대>를 살면서 국교화된 기독교 사회를 수호하기 위해 이교도와 싸운 사람들을 말해. 근데, 교부들이 주장하는 <이교도>란 <주신>이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만을 지칭하는 게 아냐. <테오>가 종교를 통해서 로마 사회를 통일하려고 했고, 이민족을 융합하려고 했잖아?

교부들은, 테오가 주장한 것과 그 이후 로마 황제들이 주장했던 <정통적인 기독교> 교리를 만든 사람들이야. 따라서, 자신들과 다른 기독교 교리를 주장하는 자들을 배척하고, 이단으로 만들었던 자들이지. <테오>시대에 수많은 기독교 수호자들이 있었고, 그들은 나름대로 하나님을, 예수님을 정의내리려고 했어. 교부들은 그 수많은 기독교 수호자들과의 논쟁을 승리하면서 이후 기독교 철학을 정립한 사람들이야. 교부들과의 논쟁에서 져 버린 기독교 주교들은 이단으로 분류되어 유럽사회에서 떠나야만 했지.

자, 그럼 기독교 최고의 교부 이야기를 통해, 로마 사회에서 게르만 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한번 살펴보도록 할까?

2. 신학적 사고보다 철학적 사고를 중시했던 아이.

354년의 아프리카.  로마보다도 더 오랜 역사를 가진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

이집트 문명을 접하면서, 지중해의 상권을 장악했던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는 로마라는 나라가 제국으로 발전하면서 로마의 속주가 되었어. 한니발 장군 이야기 알지? 코끼리떼를 몰고 알프스 산맥을 삥 돌아 로마를 공격했던 카르타고의 명장 말야. 카르타고는 로마 제국과 3차에 걸친 포에니 전쟁을 치룬 끝에 로마의 속주가 되었지.

속주란, 로마의 직할 지배 지역이 아닌 식민지를 말해. 로마의 속주 중 유럽을 벗어난 지역엔 아주 큰 속주가 2개 있었지. 로마는 지중해 남쪽 카르타고를 무찌르면서 <아프리카>라는 이름의 속주를 만들었고, 페르시아를 무찌르면서 <아시아>라는 이름의 속주를 만들었지.

4세기... 로마의 속주인 북아프리카의 알제리 지방. 당시에는 그곳을 <누미다아>라고 불렀지. 그곳에 <히포레기우스>라는 항구가 있었어.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근처의 <타가스테>라는 곳에서 태어났지.

<아우구스>의 아버지 <파트리키우스>는 로마제국을 위해 봉사하는 세금징수관이었어. 당시 아프리카에서는 로마제국의 명령에 따라 <크리스트교>를 보급하려는 자들과, <이단교>를 믿는 자들이 있었는데, <아우구스>의 아버지는 <마니교>를 신봉하고 있었지. 반면, <아우구스>의 어머니 <모니카>는 너무나 열정적이고 경건한 <크리스트교 신자>였어. 훗날, 기독교에서 <삼현모>라고 부를 정도의 독실한 분이었지.

그런데 말야. 4세기의 카르타고는 분위기가 참 애매한 곳이었어. 로마의 속주였으니 기독교 사상이 들어왔을테고, 아프리카 특유의 전통 사상과 이교사상도 혼합되어 있었지. 지중해의 해상국가이니 무역에 눈을 뜬 현실적인 상인도 있었고, 로마를 위해 충성하는 관료들도 존재했지. 카르타고는 로마로 가는 교통의 요지이자 아프리카의 토속 물질문명, 상업적인 오락시설들이 섞여있는 문명의 집합소같은 곳이었지.

<아우구스>의 아버지는 아들을 <공무원>으로 만들고 싶어했어. 세금징수관보다 높은 <법관>을 만들면 물질적으로 풍요로울 것이라고 생각했지. <아우구스>는 6살 때 문법학교에 입학해서 초등 교육을 받았어.

그런데, 이 아이가 의외로 똑똑한 거야. 맨날 장난질만 하고, 노는 것만 좋아하는 아이같은데도, 암기를 잘하고 웅변술도 뛰어났던거지. 어머니는 아이를 기독교 신앙에 따라 엄격하게 가르치려고 했지만, 아버지 생각은 좀 달랐어. 아이를 더 공부시켜야겠다고 생각한거야. 그래서 365년. <아우구스>는 중등학교 수준의 공부를 하기 위해 <마다우라>로 갔고, <아플레아우스>라는 이름있는 철학자 밑에서 공부하게 되었지.

하지만, 16살때 학비 문제로 공부를 중단한 채 고향으로 돌아오게 돼. 이 때를 <아우구스>는 방탕한 생활이 시작되었다고 말하였지. 친구들과 모여서 남의 집 정원에서 배를 훔쳐먹기도 하고, 불량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기도 했고, 여자 아이들을 괴롭히기도 했지.

열받은 아버지는 아들을 빨리 결혼시켜 버리려고 했는데, 어머니가 반대했어. 아들이 <죄>가 무엇인지를 알면 하느님의 곁으로 돌아오리라는 믿음 때문이었지. <아우구스>의 부모는 여기 저기에서 학비를 구해서 아들을 다시 대도시 <카르타고>로 유학보내었어.

뭐... 지금도 <조기 유학>같은 거 보내면 결말이 어떤건지 잘 알잖아? 문제아가 부모 곁을 떠나서 혼자 대도시에서 살면 무슨 짓을 하고 놀겠어? 19살에 카르타고 학생이 된 <아우구스>는 신학이나 법학에는 큰 관심이 없었어. 오히려 인간이 뭔지, 고독이 뭔지를 설명한 키케로의 글 같은 걸 좋아했지. 그가 좋아했던 철학 서적은 <호르텐시우스>였어.

그 외의 시간에 그가 한 일은 <연애 사업>이었지. 피끓는 젊은 유학생들이 해야 할 일은 오직 그것이라고 생각했나봐. 그가 생각한 인간이란,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할 정도로 나약한 존재에 불과해. <육체에 대한 욕망>은 인간이 제어할 수 없다고 생각한 시절이었어. 만약, 육체에 대한 욕망을 제어할 수 있는 학문이 있다면 그것은 철학 뿐이었지.

그렇다고 그가 큰 철학적 포부를 가진 것도 아니였어.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철학을 공부하는 게 아니라, 어렸을 때 배운 <신학>같은 학문이 너무 비이성적이고, 논리에 안 맞아서 반발심에 철학책을 읽은 것이었거든.

20살. 그가 소중히 여겼던 것은 여자 앞에서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논리적인 웅변술, 인간 육체가 지니는 한계에 대한 철학적 고민 같은 것 뿐이었어.

3. 마니교 : 육체와 이상 사이의 갈등

19살 때, 그는 노예 출신의 천한 여자와 동거를 시작했고, 얼마 후 아들까지 낳게 되지.

그는 고민했어. 자신이 생각하는 철학적인 이상은, 항상 육체적인 유혹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진다는 것을... 그리고 젊은 시절부터 생의 마지막까지 그를 따라다닌 인생의 고민은 인간 육체의 나약함을 극복하는 것이었고, 그 핵심이 바로 성(sex)과 관련된 것이었지.

<아우구스>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택한 종교가 바로 <마니교>였어.

크리스트교는 신앙에 대한 <귄위>만으로 신도들을 설득하려 했기 때문에 비이성적이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마니교는 우주의 원리를 <이성적인 사고방식>으로 설명해주려고 했어.

마니교의 핵심 교리는 <금욕주의>였지. 마니교의 고위 성직자들은 모두 선택된 자들로서 <금욕>을 실천에 옮긴 자들이었고, 모두가 <독신>이었거든. 육체적인 욕망을 참지 못하는 <아우구스>에게 마니교는 너무나 대단한 종교였어.

자, 그럼 <아우구스>가 젊은 시절 내내 믿었던 마니교가 뭔지 한 번 살펴볼까?

마니교는 3세기 페르시아에서 예언자 <마니>가 만든 종교야. 3세기 페르시아는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서아시아 최강의 통일국가였지. 마니교는 한마디로 말하면, 모든 종교사상의 융합체야.

로마 제국의 예수 중심의 크리스트교 사상, 페르시아의 국교였던 조로아스터교, 인도의 불교까지 합쳐진 고대 종교의 종합 선물세트였지.

쉽게 말하면, 태초의 <신>이 있었는데, 그 신이 구원을 약속했어. 구원의 약속을 아담이 들었고, 아브라함이 신에게 구원을 약속 받았지. 그 구원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예언자들이 지상에 내려오게 되지. 그 예언자들이 예수, 부처, 조로아스터 등이야. 그런데, 구원의 약속을 마지막으로 전한 최후의 예언자가 바로 <마니>야.

그럼 마니가 남긴 최후의 예언은 뭐냐... 그건 유럽의 그노시스파나 조로아스터교에 나오는 <빛신과 어둠의 신의 대결>이야. 조로아스터교의 예언자인 조로아스터가 말하길, 세상에는 빛의 신인 <아후라 마즈다>와 악의 신인 <아리만>이 투쟁한다 - 라고 했거든. 그런데 최후의 성전에서 빛의 신이 이기면, 인류는 구원을 받는 거야. 그게 바로, 신이 남긴 구원의 약속인거지. 따라서 <마니>는 빛의 사도, 또는 빛을 비추는 예언자라고 불러.

   그리고, 마니는 그 구원이 유대인만의 구원이 아니라, 부처와 조로아스터까지도 포함한 보편적 구원이라고 설명하였지. 유대인민의 종교를 예수가 전 세계의 종교로 만든 것처럼, 마니 역시 모든 이들을 위한 <보편적인 종교>가 있다는 것을 주장한거야.

그런데, 이런 큰 흐름을 가진 방대한 종교는 시간이 지나면 그 교리가 이상해 질 수 있잖아? 후대에 잘못 전달될 수도 있고... 그래서 마니는 자신이 생각한 교리와 계시받은 내용을 책으로 만들어 두었어. 그것이 바로 마니교의 성경인, <생명의 서>, <신비의 서>, <거인의 서>, <샤브라칸> 등이지.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믿는 페르시아는 <마니교>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어. 조로아스터교랑 비슷한거 같으면서도, 핵심 교리는 <기독교와 불교>에서 따왔고.... 결국 페르시아는 <마니교>가 국교를 해치는 사악한 종교라고 판단을 내린거야. 결국 마니는 박해를 받고 죽게 되지. 

   마니교는 아까 말한대로 <보편적인> 종교였어. 모든 종교의 좋은 점만 쏘옥~ 합쳐놓았는데, 그것도 앞뒤가 딱맞는 논리적인 내용이니 얼마나 환상적이겠어? 우주에 존재하는 빛과 어둠이라는 물질적인 개념에, 신과 구원이라는 초월적인 개념, 불교의 이론까지 두루 포함한 종교였던거지.

이 종교는 영지주의 이념이 강했던 4세기 이집트 등 북아프리카에서 크게 유행하였고, 서로마, 동로마에서도 많은 신자가 생겼어. 하지만, 교부들이 이단이라고 선고를 내려서 유럽에서 추방하였지.

반대로 동쪽으로 전파된 마니교는, 조로아스터교의 박해를 피해 동으로 동으로 전파되었어. 특히 비단길, 사막길 등 동서교역로를 따라 쭈욱~ 이동해서 중국, 인도까지 전파되었고, 하나의 종교로 인정받기도 했지. 유목국가인 위구르에서는 <국교>로 선포되기도 했어.

하지만, 중국에서 성리학 사상이 본격화될 무렵, 인도에서 이슬람교가 전파될 무렵, 그리고 중앙아시아에서 징기스칸의 유목민족이 서아시아까지 진출할 무렵부터 마니교는 탄압을 받게 되지. 그리고 14세기 무렵엔, 인류의 역사에서 <지나간 종교>의 발자취만 남기고 사라졌어.

바로 이 종교가 가장 융성했던 때가 4세기 아프리카와 로마 제국이었어. <아우구스>는 이 종교를 9년간 믿었고, 또 훗날 이 종교를 이단으로 탄압하게 되지.

<아우구스>가 이 종교에 심취했던 이유는, 이 종교가 가진 <영지주의> 사상 때문이었어.

영지주의란, 타락한 인간의 육체를 <지혜>가 해방시켜 준다고 믿는 사상이야. 마니교는 빛의 세계와 어둠의 세계가 투쟁하고 있는데, 인간의 영혼은 원래 빛의 세계에서 나왔다고 믿거든.

그런데, 살아가면서 인간의 영혼은 점점 때가 묻어서 더려워질 수밖에 없지. 인간이 태어나기 전에는 빛과 어둠이 분리되어 있었는데,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은 빛과 어둠이 같이 존재하잖아. 그래서 빛과 영혼은 타락할 수밖에 없지. 만약, 빛의 속성인 영혼을 잘 지키는 사람이 있다면 죽어서 천국에 갈꺼야. 하지만, 육체적인 것에 푹 빠져있고, 본성이 더러운 것인 성(sex)에만 집착한다면 천국에 갈 수 없어. (마니교는 간음 뿐만 아니라 출산 자체도 육체적인 것으로 분류하고 있었어.)

  
천국에 못가면 어떻게 되지? 그 땐 브라만교와 불교의 윤회설을 적용하면 되지. 더러운 육체로 천국에 갈 수 없으니, 다시 더러운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 태어나겠지. 그런 인간은 또 다시 성(sex)에 집착하게 되고, 영원한 환생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는 거야.

결론적으로 말하면, 악이란 자기의 내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규칙대로 진행되면서 생긴 <악의 원리>에서 나온다는 거야. 선과 악은 외부에 이미 존재하는 것이고, 인간은 그 악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영혼을 닦아야 한다는 것이지.

<아우구스>는 마니교회가 참된 <기독교 교회>라고 믿었어. 육체적 욕망을 고민하던 그에게 마니교의 완벽한 철학적, 논리적 이론은 너무나 감동적인 것이었지.

하지만, 그는 9년이 지난 뒤.... 이 종교를 떠나게 돼. <아우구스>의 지적 수준과 철학적 소양은 한참 높아졌는데, 마니교 성직자들은 <아우구스>의 철학적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했거든. 단지, 육체를 멀리하고, 금욕적인 생활만을 하라는데.... 무조건 그러라는 건 결국 귄위적인 기독교 교회와 같은 것이잖아.

그리고, 또 하나... 그는 마니교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면서도, 생활은 그렇지 못했어. 카르타고라는 도시의 향락적인 생활과 도시적 분위기는 너무 멋진 것이었거든. 28살에 마니교를 빠져나온 <아우구스>....

이제 그는 어디로 향하게 될까?

아이러니 하게도, <아우구스>는 남은 인생동안 자신이 겪었던 마니교, 영지주의, 윤회설 등을 모두 부정하였고,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기독교의 이론을 만들게 되지.

그럼, 다음 이야기에서 계속 진행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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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대는 낙서 세계사 (8)

히파티아 : 불타 버린 그리스 철학자의 시대

1. 로마 vs 알렉산드리아

오늘 설명할 여성 철학자는 시대를 잘못 태어난 죄로 비참하게 죽은 인물이야. 지난 장에서 설명했던 <테오>보다 20년 늦게 태어났고, 기독교 교부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이지.

오늘 하려는 이야기는 <그리스의 전통 유산>을 가진 인물이 <테오>의 시대를 살아가다가 <갈라>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역사의 먼 뒤안길로 사라진 이야기이지. 이 인물은 역사적으로 크게 알려져 있지 않았는데, 최근에야 로마의 역사책 한 귀퉁이에 등장하기 시작했어.

370년... 히파티아가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어. 그녀의 아버지는 테온인데, 알렉산드리아 대학의 수학 교수였지.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학문의 중심지였어. 로마 제국의 동부 교통로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만큼, 동양과 서양의 철학, 종교, 사상, 자연과학이 뒤섞인 문명의 땅이었지.

그런데, 히파티아가 유년을 살았던 시기의 로마는 엄청난 위기를 맞아하고 있었어. 지난 장에서 이야기했지? 동로마의 발렌스 황제가 게르만족들에게 대패해서 죽고, <테오>가 황제가 되어서 게르만을 로마백성으로 통합하려고 했다고... 그리고, 그 통합 정책은 크리스트교를 통한 민족 대통합이 핵심이었다고...

로마 제국은 크리스트교를 국교화 시킨 자들과, 전통신을 믿는 자들의 전장으로 바뀌고 있었어. 황제가 국가 통합을 위해 내세운 크리스트교는 점차 체계적인 교리를 잡아가면서 <전통신과 전통 철학>을 위협하고 있었지.

로마에서 철학이란, 점차 신학을 지칭하는 말이 되가고 있었어. 어느 날부터인가 진리는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 되어 버렸고, 민중을 계몽하는 일은 교회가 도맡아 하게 된 것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리아는 <전통 학문>의 중심지로서 꿋꿋하게 갈 길을 가고 있었어. 하지만, 동서 학문의 중심지이자, 그리스 철학의 보루였던 그곳에도 <크리스트교 국교화>의 바람이 불면서 한 여성 철학자를 비극적인 죽음으로 끌고가게 되지. 그녀의 시대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2. 알렉산드리아의 여성 철학자

그리스의 저명한 철학자인 플라톤이 이렇게 말했다고 해.

사람은 동굴 속에 갇혀있는 것과 같다. 동굴 밖에서 누군가 지나간다면 벽을 보고 있는 우리는 누군가의 그림자를 보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그 그림자를 실체라고 생각하지만, 결국 실체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지나가 버린 어떤 것이다. 우리는 본질인 <이데아의 세계>를 보지 못하고, 눈으로 본 것만을 생각한다.

라고...

알렉산드리아 대학에서 히파티아가 배우고 자란 것은 그런 것들이였어. 문명은 수많은 지식을 남겨주지만, 그 지식을 형성하고, 받아들이면서 절대적인 <이데아>가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은 사람의 몫이라는 걸...

그녀가 생각한 <신>이라는 것, <종교>라는 건 <실재에 대한 근원>이 무엇인지, <이데아>가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는 것이었지. 그녀는 이런 방법을 알기 위해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과 <비밀 단체>를 만들어서 공부를 했다고도 해. 진리의 궁극적인 발견은 <영혼>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영혼이란 것은 우리의 마음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야.

이렇게 세상에 대한 실제 근원인 <이데아>가 존재하기 때문에, 절대적 진리가 무엇인지, 진리를 이루는 <이데아>의 규칙이 무엇인지 찾아내는 철학이 바로 <신플라톤 철학>이야. 사실, 그녀가 합리적인 수학자, 과학자, 철학자라고 생각하는 건 지금 기준은 아니야. 그녀 시대의 수학은 하늘의 규칙성을 찾아내는 천문학이나 점성술과 연관되어 있었고, 철학 역시 우주의 진리와 <이데아>를 찾는 것이였거든.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자연현상은 만물의 근원을 찾아가는 탈레스식 자연과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철학은 소피스트의 현실 정치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어. 물론, 그 완성은 <이데아>의 세계를 통해 우주와 인간세계의 모든 규칙을 정리한 플라톤에서 이루어지지만....

  내가 하려는 말은, 당시 과학이라는 것 역시 종교적인 것, <이데아>적인 것, 영혼에 관한 것 들이 혼재되어 있는 일종의  신앙이라는 점이야. 그래서 당시 과학은 이중적인 면을 가질 수 밖에 없지. 기독교라는 종교처점 종교성을 가지고, 다른 종교들 속에서 께 살아남던가.... 기독교와 같은 종교에 의해 미신이라는 오명을 쓰고 사라지던가...

  지금 나는 2가지 이야기를 하려고 해. 하나는 기독교에 의해 처참하게 불태워진 신플라톤 철학 이야기를 히파티아를 통해 해보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독교 교리를 완성하는데 이용된 아우구스티누스의 교부 철학을 이야기하려고 해.

그녀의 어린 시절.... 그녀의 선생은 바로 아버지이자 대학교수였던 <테온>이었어. 아버지의 교육으로 그녀는 알렉산드리아가 자랑하는 모든 철학적, 과학적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지.

그녀는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이 사용했던 웅변술과 수사법도 배웠어. 여성답게 미소지으면서 상대방의 기분에 맞추어 목소리 톤을 조정하는 법, 열정적인 톤으로 사람을 감동시키는 법, 소크라테스와 같이 문답을 통해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는 법 등등... 그리고,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인 이라면 배워야 할 승마, 체조, 등산 등으로 아름다운 육체를 가꾸었고, 주변 지역으로 여행을 떠나는 등 다양한 교육을 받았지. 사람들은 그녀를 학문의 여신인 <뮤즈>라고 칭송하기도 했어.

가장 효과적인 교육 덕분일까? 그녀의 지성과 미모는 널리 알려졌고, 알렉산드리아의 수학, 철학 교수가 되었지. 서양 역사상 최초의 수학자라고 봐도 될 것 같아. 과거 그리스의 민주주의도 여성에게는 참정권 조차 주지 않았잖아.

그녀는 수많은 제자들을 거느렸고, 뭇 남성들에게 수많은 구애를 받기도 했어. 하지만, 그녀는 <진리와 결혼했다>면서 결혼하지 않았다고 해. 하지만, 그녀의 시대는 <그리스 철학>이 크리스트교 철학에게 자리를 양보해야만 하는 <교부의 시대>였어.

(위) 아테네 학당 (라파엘로작) / (아래) 학당에서 유일한 여성으로 묘사된 히파티아 부분

3. 종교 전쟁의 시대에서...

390년.... 로마에서는 이미 크리스트교를 국교화 하였고, 제우스교를 믿는 수많은 군인들이 <테오>에 의해 박해를 당하던 시기였어. 문제는 <그리스 철학> 역시 크리스트교와 융합하기 힘들었다는 점이지.

크리스트교가 그리스, 로마의 전통 종교, 전통철학과 싸우는 동안, 이 둘은 합의점을 찾지 못하였어. 교회에서는 <그리스 수학>을 이교신앙으로 보기도 했거든.

고대의 수학이라는 것은 사실, 종교적인 부분이 많았지. 수학자들은 하늘의 별의 위치를 연구하는 천문학이나 점성술을 수학이라고 생각했거든. 우리가 <수학의 아버지>라고 알고 있는 <피타고라스>있지? 사실 그 양반도 원래는 <오르픽교>를 믿는 종교인이었어. 오르픽교는 영생의 신 디오게네스를 믿는 종교인데, 불멸과 부활이라는 것을 믿는 종교라는 점에서 후대 기독교의 교리체계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고 말하는 종교이지.

중요한 것은, 크리스트교의 입장에서 그리스 철학과 수학, 과학을 인정할 여유가 없었다는 점이야. 395년, <테오>가 죽은 뒤, 전통 종교주의자들과 크리스찬 사이에는 크고 작은 분쟁들이 계속 발생했고, 거기에 유대인들까지 종교문제로 뒤섞여서 문명의 도시 알렉산드리아도 <종교 폭동>이 종종 일어나곤 했지.

기독교라는 종교가 전통주의자들을 억누르려는 사회에서 인기있는 <얼짱 여성 철학자>의 존재... 교회가 보기에 얼마나 눈에 가시였을까?

그녀의 집에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힘좀 쓴다는 부자들과 정치인들이 찾아들었어. 그녀의 철학은 논리정연하고, 과학적이었어. 복잡한 수학적 1,2차 방정식도 그녀의 손에서 쉽게 해결되었지.(그녀의 천문학적 계산법과 원추곡선에 대한 이론은 17세기 뉴턴 시기까지 더 이상의 발전이 없었다고 해.)

5세기, 이제 크리스트교의 시대가 왔어...  사람들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교회를 찾아가야만 하는 시기가 왔어. 철학자가 인생을 상담하고 사회를 이끌어가는 시기는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 살았던 옛날의 일이여야 해. 인생의 기쁨과 슬픔은 모두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해.

그런데, 이렇게 변해가는 시기에, 대중의 사랑을 받는 <철학자>는 존재해서는 안돼. 그것도, 여성이라는 비천한 존재가 대중의 사랑을 받는 다는 것은, 당시 기독교의 입장에서 용서가 되는 일이 아니였지.

4. 그녀의 죽음.

그녀는 알렉산드리아의 총독 오레스테스와 가깝게 지내고 있었어. 유명한 대학교수인 그녀가 총독과 아는 사이라는 것이 큰 문제가 될 것은 없었지.

그런데 문제는 이 총독이 <교회>와 대립하고 있다는 것이였어. 총독 오레스테스는 알렉산드라아 내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을 보호하면서, 도시의 행정적인 문제들을 히파티아에게 물어보곤 했지.

<테오>가 죽은 뒤, 로마 제국 곳곳에서는 크리스찬과 전통주의자들의 충돌이 곳곳에서 발생했는데, 알렉산드리아에서는 <히파티아>가 희생양이 된거야.

총독에게 불만이 많았던 과격한 크리스찬들은 비난의 화살을 <히파티아>에게 돌렸지. 사실, 당시 전통주의 철학자와 기독교 교부 중에서도 철학적 교류를 하는 경우도 많았고, 히파티아는 기독교 지도자들과도 친분이 있었어.

하지만, 412년.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 온 <키릴루스>는 이러한 분위기를 인정할 수가 없었지. 격동의 시대에 교회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전통 철학자가 지도자가 되는 것>을 막아야만 했을 거야.

키릴루스는 히파티아가 마차를 타고 시내를 도는 것을 즐긴다는 것을 알고, 그녀를 납치했어. 마차에서 내린 그녀는 무자비한 폭행을 당한 채 교회로 끌려갔지. 히파티아는 교회 안에서 옷이 모두 벗겨진 채로 살을 찢기는 고문을 당했어. 그리고 죽기 전에 화형에 처해졌지.

히파티아의 최후(1885년작)

5. 네스토리우스파의 먼 여행....

415년... 그녀는 어이없게도 불에 타 죽고 말았어.

그리고, 그녀와 같이 전통 철학, 과학을 신봉했던 이들은 이단이라는 딱지가 붙게 되지. 이 당시, 알렉산드리아처럼 과학과 역사, 철학이 발전했던 지역의 크리스찬들은 과학의 힘을 부정하지 않았어.

특히, 예수를 철학적으로 생각하고 연구한 이들은 예수가 과연 신성만 가지고 있었을까? 그 역시 생물학적인 육체를 가지고 지상에 내려왔기 때문에 <인간으로서의 예수>의 모습도 당연히 존재하지 않을까?.. 라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지.

이렇게 과학적 사고를 가지고, 예수의 존재를 생각했던 이들을 <네스토리우스파>라고 해.

네스토리우스는 예수의 인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기존 교리와 팽팽하게 맞섰지. 하지만, 네스토리우스는 에페수스 공의회에서 이단이라고 판정받아. 그런데, 네스토리우스가 이단이라고 끝까지 주장하면서 그들을 몰아낸 자가 바로 히파티아를 죽인 <키릴루스>였어.

결국, 히파티아의 죽음은 단순히 지성과 미소를 갖춘 여성 철학자를 죽였다는 것에서 끝나지 않아. 철학과 과학의 이념이 존재하는 한, 전통주의자들과 끝없이 싸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은 교회의 극단적 분위기를 보여주는 거야.

히파티아가 죽고, 네스토리우스가 탄압당한뒤 반세기... 450년경.

수많은 과학자들과 지식인들은 전통 교리의 탄압에 못이겨 동쪽으로... 동쪽으로 이동하게 되지. 시리아와 요리단 등 서아시아에 정착한 네스토리우스파 교인들은 <경교>라고 불리면서 아시아 크리스트교 일파가 되었어. 경교는 중앙아시아를 거쳐, 훗날 중국 당나라까지 전파되었고, 만주와 신라에서도 성모마리아상이나 십자가상이 나왔다고 해. (경주 기독교 박물관을 만드신 분의 말에 의하면....)

히파티아가 죽은 415년. 고대 철학은 이제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혀지게 되. 알렉산드리아는 로마가 망한 뒤 서유럽의 교인들에게 잊혀지게 되지. 그리고, 히파티아가 죽을 무렵 기독교 철학을 완성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을 적어서 기독교 전통 교리를 완성하게 돼...

신국론은 <인류의 역사는 곧 하나님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역사를 쓰고 있지.

이제 플라톤의 철학도 교회의 철학으로 흡수당했어.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 철학은 이슬람 지역으로 넘어가서 몇백년 동안 유럽인들의 머릿속에서 사라지게 돼. 이슬람과의 십자군 전쟁이 벌어진 먼 훗날이 오기 전까지는....

그럼... 다음 편에서는 다른 인물을 다뤄보자. 이번엔 기독교를 전통신과 그리스철학에서 분리해서, 독자적인 체계로 만든 <교부 철학의 아버지>, 아우구스티누스의 이중적인 인생에 대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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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대는 낙서 세계사 (7)

<테오도시우스>의 이루지 못한 제국의 꿈

1. 게르만의 이동과 몰락하는 로마

오늘 이야기는 테오도시우스에 관한 이야기야. 우린 이 인물에 통해 크리스트교가 로마의 상징인 <독수리>를 제압하게 되는 이야기를 하게 될 거야. 독수리는 전통신인 제우스의 상징이기도 했던거 알지?

이 이야기는 로마 제국의 전성기였던 기원후 2세기부터 시작하지.

역사에서는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4세기 무렵>이라고들 이야기하지. 그런데, 그건 대이동을 말하는 것이고, 실제로 게르만 족의 일파가 로마 사회에 진출하려고 했던 건 2-3세기 부터야.

아참, 게르만의 이동은 알고 있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게르만족의 이동은 멀리 아시아에서 시작되었다고 하지. 중국에서 가장 위대한 황제 중 한명으로 여겨지는 한나라의 <한무제>는 동아시아 전역을 중국의 지배권에 두려고 했어. 동으로는 고조선을 멸망시켜서 한사군을 설치했고, 남으로는 한서사군을 설치하는 등 지배 영역을 넓히고 있었지.

그런데, 한무제도 해결하지 못한 골치거리가 바로 북방의 <흉노>야. 흉노는 중국식 표현이고, 사실은 <훈>족이라고 부르는 민족이지. 원래 중국애들이 주변 민족을 낮춰 부르고, 자기네만 높여 부르는 <중화 사상>인지 뭔지가 강하잖아. 중국 역사서에 나오는 동이, 서융, 남만, 북적... 이런 말들이 다 오랑캐를 지칭하는 말이듯, 흉노(匈奴)는 한자 그대로 흉약한 노예같은 넘들이라고 중화인들이 지칭한 말이지.

뭐 그게 중요한게 아니라... 한무제가 결국 훈족을 토벌했다는 사실이 중요해. 한나라에서 밀린 훈족은 중앙아시아로 진출해서 월지국을 공격했는데, 그 결과 인도에 생긴 왕조가 쿠샨 왕조야... 위 표의 빈칸 (1)에 쿠샨 왕조가 들어가면 되겠지?

남하하지 않고 서부로 계속 진출한 일부 훈족들은 동유럽과 북유럽에서 놀고 있던 게르만 민족들을 공격하게 돼. 훈족에 밀린 게르만 애들은 로마로 넘어와서 용병 생활을 하게 되지. 하지만, 훗날 게르만 족들이 로마 곳곳에 게르만 국가를 세워 버리면서 서쪽 로마는 결국 멸망의 길을 걷게 되고, 거기에 훈족의 왕까지 서로마를 협박하게 되지...

여기까지가 교과서적인 설명이야.

그런데, 사실 4세기 이전에도 게르만의 이동은 있었어. 중국 진나라의 유명한 <진시황제> 알지? 그 양반도 골치아픈 흉노족이랑 열심히 싸우다가 만리장성까지 만들잖아.

그리고 게르만 애들도 뭐 꼭 훈족에게 밀려서 로마로 갈 필요는 없었겠지... 조금씩이지만 이미 로마 영내에 게르만 용병들이 존재했거든. 실제로, 게르만 족의 무서움을 로마가 뼈져리게 느낀 건 378년 동로마와 게르만족의 일파인 서고트 족의 대 전투부터야.

378년... 게르만족의 일파인 서고트족은 서쪽으로 밀고 들어오는 훈족의 기마부대에 밀리다 밀리다 로마 제국의 국경까지 도망쳤어. 서고트인들은 울면서 로마 황제에게 애원을 했지.

게르만인 : 제발 도나우강을 건너게 통나무라도 던져주세요. 물에 뜨는 것들을 던져주세요.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학살당할 겁니다.

로마황제 : 내가 너희를 어떻게 믿냐? 모두 무기를 버리고, 아이들을 로마에 맡겨라. 그럼 국경을 건널 수 있게 해주마.

게르만인 : 정말이죠? 약속하신 겁니다. 모두 무장을 해제하고 도나우강을 건너자.

그런데, 서고트인들은 속은거야. 겨우겨우 로마 국경을 넘은 서고트인들을 로마는 학살해 버렸지. 늙은이는 죽이고, 젊은이는 노예로 만들었지. 어린 소녀들은 로마 귀족에게 팔려가고 말았어.

로마의 이민족 탄압은 로마 제국 내에 용병으로 있던 게르만족들을 자극하고 말았지. 서고트족의 난민들과 로마 제국내의 게르만 용병들, 또 노예로 팔려간 게르만인들까지 반로마 운동에 가담하면서 엄청난 전쟁으로 번진거야.

378년... 동로마 황제 발렌스의 로마부대와 게르만족의 부대는 엄청난 대 전투를 벌이게 되지. 그런데 말야. 이미 로마의 국경을 게르만 용병들에게 맡기며, 탱자탱자~ 놀면서 향락에 빠져있던 로마인들이 게르만 투사들을 이길 수가 없었어. 로마를 지탱하던 제국의 부대는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고, 황제마저 죽어 버린 거야.

4세기... 바야흐로 게르만 용병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지. 이 때 죽은 황제를 대신해서 동로마 황제로 등극한 것이 바로 <테오도시우스>, 이 사람이야. 379년의 일이지.

2. 군인 황제의 탁월한 군인 정치

349년... 스페인에서 <테오도시우스>가 태어났지. 그의 아버지 <플라비우스>는 로마의 뛰어난 장군이었어. 일단 이름이 기니깐 대충 <테오>라고 부르자.

테오는 아버지를 따라 수많은 전장을 누비고 다녔어. 특히 374년 사르마티아족을 무찌를 때는 선두에 서기도 했지. 문제는, 아버지가 너무 뛰어난 장군이라는 점이야. 테오의 아버지는 로마의 귀족들의 질투와 시기 때문에 죄를 뒤집어쓰고 사형을 당했지. 이 사건으로 테오는 싸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치적 처세술>이라는 점을 배웠을거야.

서고트족에게 동로마 황제가 죽자, 서로마의 <그라티아누스> 황제가 테오를 동로마 황제로 임명했어. 게르만 부대를 제압하려면 테오같이 전장에서 뼈가 굵은 장군이 필요했던 거지.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이민족들을 다스리기 위한 <처세술>이 그라티아누스보다 뛰어났다는 점이야.

그라티아누스 : 지금, 게르만족들 때문에 로마는 위기에 빠졌네. 자네를 동쪽 황제로 임명한다면, 나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겠는가?

테오 : 사치와 향략에 빠진 로마의 군대로서는 게르만족을 막을 수 없습니다. 로마군대와 튜튼족, 게르만족을 모두 군에 포함시키고 그들을 로마의 시민으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라티아누스 : 로마인들은 게르만인들을 야만인이라고 하여 무시하네. 수많은 이민족들이 어떻게 로마인으로 융합될 수 있겠는가?

테오 : 일단, 게르만인을 <변방의 야만족>이라고 차별하는 로마인의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그들은 뛰어난 군인들입니다. 싸움보다는 협상을, 차별보다는 화해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로마 시민이 되었을 때, 그들을 로마로 흡수할 수 있는 공통된 사상이 필요합니다.

그라티아누스 : 그것은 무엇인가?

테오 : 바로, 콘스탄티누스가 제국 통합을 위해 제시했던 <크리스트교>입니다.

바로 그거야. 군인 황제는 테오는 로마인과 튜튼족, 게르만인을 모두 동등한 군인으로 대우하면서, 그들에게 크리스트교를 통한 <로마시민 사상>을 강조하려고 한거야.

379년... 왕이 된 바로 그 해. 테오는 크리스찬들과의 관계를 해결하려고 했어. 하지만, 제우스교를 믿는 로마 군인들도 문제였고, 아리우스파, 아타나시우스파 등 다양한 크리스트교 교파 문제도 복잡했지.

380년. 테오도시우스는 아주 심한 병을 앓더니, 신의 도움으로 살아났다고 말하곤 <세례>를 받았어. 그리곤 <로마의 모든 백성은 크리스트교로 통합해야 한다>는 칙령을 발표해 버리지. 이것이 역사에서 유명한 <크리스트교의 국교화>야.

사실, 크리스트의 국교화와 가톨릭이란 말은 <콘스탄티누스>가 먼저일 수도 있어. 그러나 콘스탄티누스는 <종교 공인>이라는 애매한 표현을 사용했고, 가톨릭이란 표현을 당대에 사용하지는 않았어. 후대인들이 <콘스탄티누스>가 가톨릭이란 말을 사용했다고 후대 문서에 남긴 것 뿐이지. 그래서 최초의 <국교화>, 최초의 <가톨릭>은 테오라고 말하곤 해.

381년. 테오는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소집해서, 문서로 만들었던 <국교화>를 공식으로 선포해 버리지. 그리고, 로마 교황 다음으로, 콘스탄티노플의 동로마 주교가 가톨릭 세계의 2인자라고 결정했어. 이제 서로마 동쪽의 교회는 모두 콘스탄티노플에서 해결하도록 조치를 취한 거야.

3. 크리스트교 수호 작전

383년. 제우스교를 숭배하는 막시무스가 서로마, 동로마 황제를 부정하면서 <정통 로마 군인> 시대로 돌아갈 것을 선언했어. 로마의 전통신인 제우스와 독수리를 상징으로 하는 반란군은, 로마 주변을 잠식하더니 서로마에 쳐들어갔지.

서로마의 어린 황제 발렌티니아누스는 동로마로 피신해서 테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 그러나, 테오는 서로마를 도울 수가 없었어. 로마군, 게르만군, 튜튼군 등을 통합해야 했기 때문에 대규모 전쟁에 나갈 시기가 아니였다고 판단한거야.

기독교 이념을 보급하고, 군을 하나의 사상으로 통일한 뒤, 388년.... 테오는 막시무스와 싸우기 위해 서로마로 향했어. 그리고 대승을 거두었지.

390년... 겨우 기독교 이념을 보급했다고 생각했는데, 또 하나의 큰 사건이 생겨. 그것은 역사에서 <테살로니카 폭동>이라고 불리는 사건이었지. 지난 번에 <빵과 서커스> 정책을 설명한 적이 있지? 그것 때문에 발생한 사건인데, 사건의 전말은 이런 거야.

게르만족들이 로마의 국경을 지키는 동안, 시민권을 얻어서 군대를 안 가게 된 로마인들은, 투기장에서 노예들의 싸움이나, 연극 등을 즐기고 놀았어. 저번에 이야기 했지? 3s 정책 말야.... 스포츠, 스크린, 섹스를 3대 산업으로 하는 거...

로마인1 : 야... 오늘 김나지움 밑에서 야한 연극이랑 스트립 쇼를 한데. 같이 보러 갈까?

로마인2 : 그것보다는 검투장에서 노예 경기를 보러가자. 요즘 스태리우스가 15명을 다 죽이고, 16연승에 도전하잖아. 진짜 멋지더라. 요즘 최고 스타는 그 넘이야.

로마인3 : 야... 소식 들었어? 요새 마차 운전으로 스타된 애 있잖아. 무지 멋있는 넘. 그넘이 범죄 용의자로 끌려갔대. 아니, 왜 영웅을 끌고간거야?

로마인1 : 뭐? 그럼 우리 이번주에 경기 못보는 거야? 무슨 낙으로 살라구? 이런 미친...

마차 경주의 기수가 끌려갔다는 소식에 대중들은 그를 석방하라고 폭동을 일으키고, 난리를 피웠어. 그런데, 이민족 출신인 총독이 단호하게 거부한거야. 하찮은 이민족 출신 따위가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들의 요구를 거부하자, 로마인들은 이민족 관료들을 잡아다가 찢어죽였어.

테오는 이 소식을 듣고 <충격>을 먹었지. 테오가 원한건 이민족과 로마인이 같이 화합해서 살아가는 건강한 로마 제국이었거든. 인종 차별은 테오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었구.... 테오는 크게 분노했어. 이민족 군대를 이끌고, 폭도들을 찾아간 테오는, 무차별 학살 명령을 내렸지. 로마인 1만 5천명이 끔찍한 학살을 당했어.

문제는 로마인을 학살한 테오를 교회가 비판한 거야.

주교 암브로시우스 : 어떻게, 로마인들을 끔찍하게 학살할 수가 있습니까? 폐하가 죄를 참회하기 전까지는 성당에 발도 들일 수 없습니다. 공의회는 폐화의 행동을 탄핵하고, 참회를 요구할 것입니다.

테오 : 그것은 모든 로마인들이 평등하기를 바란 내 소망의 표현이었네. 그것은 다 교회를 위한 일이었고. 그 참사로 억울하게 죽은 크리스찬이 있다면 내 사과하겠네.

주교 암브로시우스 : 아닙니다. 교회는 폐하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반성하세요. 또 반성하세요. 그리고 이런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칙령을 내리세요.

테오는 몇 달동안 계속 교회에 죄를 빌었어. 교회의 용서를 받아야만 로마인과 이민족이 같이 살수 있다는 이상을 실현할 수 있고, 크리스트교를 통해 제국을 재건한다는 꿈도 이룰 수 있었거든.

테오는 교회에게 반성문을 쓰고, 교회가 원하는 칙령까지 써 주었어. 교회는 황제를 이겼다는 기쁨에 <데 라우다무스>라는 찬미가까지 만들었지. 그래도 황제는 참고, 또 참았어. 참는 것만이 로마 제국을 유지하는 길이라고 믿었거든. 이 사건은 크리스트교 공인 후, 교회와 황제권과의 최초의 싸움이었어. 황제가 참고 참으면서 교회를 얼르고 달랬거든...

392년. 테오는 아예 이교신 숭배를 전면 금지시켜 버렸지. 이제, 로마의 전통신들은 모두 역사에서 사라져야 했고, 소크라테스부터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진 그리스 철학은 신학에 밀려 사라지게 된 거야. 하지만, 전통신을 믿는 장군들의 도전은 끊임없었지.

393년. 제우스신을 동경하는 전통주의자 아르보가스트가 반란을 일으키고, 서로마 황제를 죽여 버린 사건이 발생했지. 아르보가스트의 참모 유게니우스와 장군 니코마쿠스는 강력한 전통 군대를 이끌고 테오에게 도전했어.

아르보가스트는 번개창을 들고, 독수리를 날리는 제우스신의 동상을 전장에 늘어놓았지. 테오는 기독교의 순교자 성 요한네스의 계시를 받았다면서 전쟁에 참여했어. 아르보가스트가 이교세력을 주축으로 한 군대라면, 테오의 군대는 서고트족과 반달족으로 이루어진 군대였어.

이 역사적인 전투에서 테오의 군대가 대승을 거두었지. 하지만, 이 큰 전투로 테오 역시 건강이 약화되어 죽고말았어.

테오는 모든 이민족들을 기독교로 통합해서 강대한 로마를 재건할 꿈을 꾸었어. 하지만, 그 꿈을 채 이루기 전에 죽은거야. 그는 죽어가면서도 훗날 로마가 이민족에 의해 분열될 생각을 하면서 슬퍼했을지도 몰라. 그렇다면 그 후손들은 테오의 꿈을 이해하고, 테오와 같이 노력했을까?

4. 이민족간의 전투

테오가 죽은 뒤 테오를 모시던 이민족들도 분열되었어. 반달족의 장군 스틸리코는 테오의 뜻을 받들어 모두가 힘을 합친 로마를 만들려고 했지. 스틸리코는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로마 집정관이 되었고, 테오의 꿈을 이루려고 했어. 반면, 서고트족의 장군 알라리크는 로마인들을 절대 믿지 못한다면서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어. 테오의 무덤에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남긴 채...

로마의 귀족들은 <이민족>을 경멸했지. 감히, 반달족의 스틸리코가 집정관을 하다니... 반달족이 훗날 로마를 공격할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돌았어. 그런데, 그 유언비어를 퍼뜨린 장본인은 테오의 아들로서 황제가 된 <호노리우스>였지. 결국 이민족 출신의 충신 스틸리코는 로마의 반역자라는 오명을 쓰고, 황제군에 의해서 참수 당했지.

스틸리코의 화합정책은 실패로 돌아갔고, 게르만 출신의 장군들은 갖은 죄명을 뒤집어쓰고 학살당했지. 반달족들은 로마에 협조한 죄로, 로마를 다민족국가로 만들려고 했다는 죄로 몰살당했지. 수만명의 게르만 용병들은 로마에서 탈출했고, 결국 로마의 적이 되어 버린 거야. 테오의 아들 <호노리우스>는 아버지의 꿈을 짓밟아 버렸어.

스틸리코가 죽은 뒤, 테오의 충신 중 한명이었던 알라리크 장군이 게르만족들을 모아 로마 제국에 쳐들어가지. 알라리크 역시 모든 민족을 융합해서 강력한 제국을 이루고자 했던 테오의 이상을 알고 있었어. 하지만, 지금의 로마는 썩어빠진 귀족들밖에 없었기에 멸망시킬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거야.

알라리크는 황제 호노리우스가 있는 곳을 제외한 모든 도시들을 박살내 버렸지. 하지만, 테오에 대한 충성심에서 <기독교> 지역만은 절대 건드리지 않고, 동맹으로 삼았어. 반면, 황제 호노리우스는 기독교가 나라를 망친 원흉이라고 생각해서 기독교인들을 죽이고, 전통 로마신을 섬긴다고 자랑하고 다녔지.

알라리크는 테오를 생각해서 로마에게 협상을 요청했어. 전쟁으로 테오의 제국을 모두 불태워 버리기는 싫었는지, 로마의 황제에게 최대한 기회를 주었지. 그러나 황제 호노리우스는 이민족을 무시하는 발언만을 계속 보내왔어. 결국 서고트의 병사들은 로마를 박살내고, 시민들을 학살하였지. 유일하게 불타지 않은 지역은 기독교의 보호를 받는 지역 뿐....

로마제국은 바로 망할 것 같았어. 그러나, 로마를 최후까지 지킨 여제가 있었으니... 그녀가 바로 테오의 딸 갈라 플라타키아였지. 갈라는 알라리크 장군의 동생인 아타울푸스와 결혼을 한 뒤, 로마와 게르만의 다민족 국가를 만들 이상을 같이 나누었어. 하지만, 아타울푸스는 갈라의 꿈을 이루어주기 위해 전장에 나갔다가 죽고 말았지. 갈라는 테오의 이상을 잇기 위해 호노리우스가 죽은 뒤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돼.

그리고, 테오와 갈라의 꿈을 알았던 서고트족은 전대의 인연을 생각해서 갈라 플라타키아가 여제로 있던 서로마를 건들이지 않았어.

갈라 플라타키아는 로마 최후의 현명한 여제였지. 서로마 주변에서 이민족들이 수없이 전쟁을 하는 동안에도, 갈라의 서로마는 전쟁 대신 재건 사업이 이루어졌어. 하지만, 이미 망해가는 로마에서 갈라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어. 단지, 살아있는 동안 로마제국을 유지하고 주변국과 평화협정을 맺는 것 뿐이었지.

그녀는 테오가 남긴 최후의 사업을 추진하게 되지. 바로, 기독교를 보호해야 한다는 테오의 유언을 실천에 옮기는 거야. 에페소스 공의회, 칼케돈 공의회 등 역사적으로 유명한 공의회를 열고, 기독교의 공의회를 보호하는 데 전력을 다했어.

그리고, 기독교의 정신을 후대에 보급할 수 있는 <교부>들을 키워냈지. 갈라가 여제로 있는 동안, 네스토리우스파 등 다양한 계파들이 정통파로 분류되거나, 또는 이단으로 분류되었고, 콘스탄티누스와 테오도시우스가 확립한 정통 교리가 갈라 시대에 완성되지. 이 시대를 역사에서 <초기 교부>의 시대라고 해.

그녀가 죽은 뒤 얼마 안되서 서로마는 망했어. 그러나 그녀는 테오의 이상을 지키기 위해 기독교를 수호했고, 게르만과 로마인이 함께 공존하는 이상 제국을 위해 헌신한 마지막 황제였지.

자, 그럼 다음 장에서는 그녀의 기독교 보호 정책에서 언급된 <교부>가 누구인지,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인물을 통해 이야기해보자. 그리고, 교부와 동시대에 살았던 그리스의 철학자 히파티아의 불행한 최후를 통해 그리스 철학과 교부철학의 갈등관계를 짚어보려구 해.

오늘의 글은 기독교에 우호적으로 적었지만, 다음 글은 반대편 입장에서 쓸 수도 있을 거야. 비교해서 보는 게 더 재미있거든. 그럼 계속 달려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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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끄적대는 낙서 세계사 (6)

배교자 율리아누스 : 전통신 지키기 프로젝트

1. 크리스찬을 꼬시기 이전의 정책들 - 시민권과 빵, 그리고 서커스

오늘 전개할 이야기는 크리스트교가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로마 제정 말기에 대한 이야기야.

우리는 흔히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수많은 순교자들이 희생을 해서 크리스트교가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 그런데 말야...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크리스트교를 인정한 것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정치적 입김도 작용한 것이었어.

로마의 전성기인 제정 초기에는 황제권이 워낙 막강했기 때문에, 굳이 크리스트교가 필요없었지. 오히려 하나님 숭배니 뭐니 하는 종교적 믿음은 황제권을 위협하는 것이었기에 탄압의 대상이었어.

하지만, 황제권이 약해질대로 약해지던 로마 제정 말기의 상황은 달랐지. 크리스트교를 인정하지 않고는 더 이상 황제권을 유지할 수 조차 없었거든. 시민권을 남발해서 인기를 끄는 것도 한계가 있었고, 빵과 서커스 정책으로 로마 시민의 탱자탱자~ 놀자는 욕구를 채우기도 어려웠거든.

여기서 잠깐~~~ 제정 시기, 황제권 강화에 이용되었던 로마 시민권과 빵과 서커스....그건 뭐였을까? 잠시 로마 초기로 돌아가볼까?

로마 정관 : 아... 좀만 싸우면 이탈리아 반도를 몽땅 일하겠구나.  쌈박질 열심히 해준 우리 군바리들이 너무 고맙구나. 농사짓다가 땅준다니깐 열심히 싸워 군바리 농민들아... 뭐 필요한거 없냐?

군바리1 : 저기... 우리 원래 농민이거든요... 땅 주세용.. 땅땅....

로마 집정관 ; 오케이.... 땅도 주고 전리품도 줄테니 앞으로도 제국을 위해 열심히 봉사해라. 전쟁에 직접 참여한 니들은 특별히 <로마 시민권>을 주마. <로마 시민권>은 서울랜드 자유이용권보다 더 좋거든? 앞으로 로마가 관리하는 모든 영토 안에서 투표도 할 수 있고, 농사도 지을 수 있고... 바이킹 먼저 탈 수 있고... 귀신의 집 들어가는 것도 무제한 리필 가능하고.. 어쩌구 저쩌구... 여~기~는~  꿈과 희망으로 가득찬 곳... <로.마.랜.드>~~~

동맹국 백성 : 저기... 우리도 로마를 사랑하는 로마 동맹국인데요. 우리는 뭐... 이용권 같은거 없나요?

로마 정관 : 니들은 동맹국 백성이지 우리 백성이 아니잖아? 음... 그럼 <로마인증 자치권>을 주마. 뭐.. <로마 시민권> 처럼 각종 투표 참여, 각종 토지 이용권, 로마시 행사 참여... 그런건 없거든? 대신 니들 동맹국 마을에서는 니들 맘대로 행사를 만들어서 하든, 서울랜드를 만들든... 알아서 할 수 있는 권리를 줄께.

동맹국 백성 : 뭐... <로마랜드>는 못가겠지만, 일단 뭐 <자치권>으로 만족하죠.. 뭐.. 쩝..

식민시 백성 : 저기... 우리도 정복당하긴 했지만, 암튼 로마 백성으로 편입된거 잖아요. 우리도 로마랜드가는 <자유이용권> 주시면 안될까요?

로마 정관 : 시꺼... 니들은 점령당한 백성들이랑 같이 살잖아. 동맹국처럼 다는 못주고... 하는 것 봐서 단계별로 <이용권> 한 장씩 줄께... 일단 투표권 같은 건 없구.. 음... 좋다. 뭐 돈 많은 애들까지는 <로마 통행증> 발급해줄께.. 그럴로 되었지?

식민시 백성 : 아나... 우리도 로마 시민인데, 전쟁한다고 여기 끌려와서 여기 산거잖아? 로마에 사는 저 자식들, 목 위에 달린 건 방울토마토인가? 생각하는게 왜 저래?

기원전 91년.... <로마랜드> 이용권을 달라며 아우성치던 식민시와 동맹국의 시민들은 반란을 일으키고, 로마로 쳐들어갔어. 그런데, 로마는 그 전쟁을 오히려 이용하였지. 동맹시와 식민지를 진압해 버린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를 완전히 통일한 거야.

그리고 로마는 <로마 시민권>을 다양하게 만들어서 점령하는 지역에 차별적으로 적용하게 돼. 로마에 거주하는 오리지널~ 백성들은 <로마 시민권>을 주었지. 단, 전쟁에 참여해서 공을 세운 남자와 그 후손들만 말이야...

그리고, 나머지 지역의 백성들은 차별적으로 시민권을 주게 되지. 식민시는 라틴동맹국으로서 <라틴 시민권>을 갖게 되는데, 그건 투표권(참정권)도 없고, 단지 식민시의 <주민증>같은 용도로 쓰였어. 통행이나 직장을 구할 때 용이한 거였지. 로마의 속주(식민시)가 된 지역도, 로마에 저항한 정도에 따라 권리와 의무가 각각 다른 <민증>을 받게 되지.

그런데, 이 <민증> 발급 제도는 로마 황제의 권력이 강해지면서 용도가 변질되어가지. 로마 황제는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면서, 식민시를 로마 제국 안으로 가깝게 끌어들이려고 노력했지. 특히 변방 식민시의 반란은 황제한테, 아주~ 귀찮은 일이었거든.

황제들은 점점 <로마 시민권>을 남발하게 되었고, 점점 많은 이들이 <로마랜드>에서 놀 수 있게 되었어. 로마 후기 <카라칼라> 황제는 아예 로마 제국 인에서 여자와 노예를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다 줘 버리게 되지. 뭐, 로마 안의 모든 지역이 다 평등해 진건 좋은데, 시민권을 다 뿌린 순간, 이제 더 이상 황제가 시민들에게 던져줄 뭔가가 사라진 거지.

더 이상 시민권을 뿌릴 수 없게 되자 눈을 돌린 것이 바로 <청렴하고 검소하며, 믿음심이 강한 크리스찬>이었지. 그들은 <믿음의 자유>만 준다고 해도 좋아 죽었거든~~~

여기서 시민권과 같이 뿌려진 또 하나의 시민 이벤트가 있는데, 그게 바로 <빵과 서커스> 정책이야. 원래 빵과 서커스는 공화정 말기, 카이사르(시저)의 참모 클로디우스에 의해 시작된 정책이지.

시저 : 야... 내가 요즘 여기 저기 정복한 식민시 애들한테 <자치권>을 나눠줬더니, 로마 애들이 좀 말이 많다. 뭐... 천박한 넘들한테 너무 권한을 많이 줘서 로마 애들이 괴롭다나 어쩐다나 하는데... 뭐 좋은 방법 없냐?

클로디우스 : 저기... 좋은 방법이 하나 있는데유. 이천년 뒤에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서 전두환이란 놈이 쓴 방법인데요. 국민들이 군인정치에 짜증을 내면, 군바리들이 좋아하는 원초적인 것들을 제공해서 불만을 잠재우거든요?

시저 : 군바리 길들이기? 그거 내가 잘하잖아. 초쿄파이 던져주기, 야한 사진 붙여놓기, 쉬는 시간에 족구나 축구 시키기... 그런거 말이지?

클로디우스 : 네... 전두환이란 넘이 했던 정책이 바로 3s 정책이란 건데요. 영화(Screen), 스포츠(sport), 섹스(Sex)를 국가적으로 보급하는 겁니다. 뭐... 프로야구.. .아니... 콜로세움 같은 거 지어서 집단 활극 좀 보여주고요.... 거기에 맛난 거 싸가지고 가서 먹게도 하고, 귀족들은 여친이랑 가서 어떤 노예가 안 죽고 버티나 내기도 하고... 이렇게 시민들이 잼나게 놀게 되면 사회에 대한 불만이 없어지잖아요?

시저 : 그래... 좋은데?

클로디우스 : 중요한건 이 3s 정책에 빈민을 핵심으로 포함시켜야 한다는 거죠. <로마 시민권>이 있는 빈민이면 누구나 3s를 무상으로 즐기게 하고, 경기 관람자에게 무상으로 1달에 1번씩 빵도 나눠주는 겁니다. 그럼 누가 감히 독재관(시저)님께 반항하겠습니까?

당시 시저의 정책은 평민을 위한 혁신적인 것이었어. 시저 자체가 귀족보다는 평민을 중시하는 <평민파>의 우두머리였거든. <빵과 서커스> 정책을 추진하면서 빈민에게 <로마시민권>을 팍팍 돌린 시저는 영원히 지배자로 남아달라는 로마 시민의 간절한~ 요청 때문에 <종신독재관>이 되었지.... 물론 <브루터스~ 너 마저도~> 라면서 죽기 전까지 말야.

아까 말한 <라틴시민권>이니, <동맹시 자치권>이니 한것들 있지? 그것도 다 시저가 갈리아 지방을 정복하고 난 뒤, 정복민들을 꼬시기 위해 주었던 것들이야... 시저는 확실히 대중에게 인기몰이하는 법을 잘 알았던 것 같아.

중요한 건, 이렇게 공화정 시기부터 시작된 <빵과 서커스> 정책이 로마 제정 말기까지 이어진다는 거야. 그런데, 로마 제정 말기는 이 정책을 실시할 수가 없었어. 왜? 아까도 말했잖아. 모든 자유민이 다 <로마시민권>을 얻었다구....

사치와 향략이 계속되면 될수록, 무너져가는 로마에게는 치명적인 것이었지. 로마의 황제들은 이제 향락에 빠진 로마인들에게 경종을 울릴 무언가를 찾아야했어. 콘스탄티누스가 찾은 해답은 바로 <크리스찬의 생활양식>이었어. 사치하지 않는 자... 묵묵히 기도하면서 생업에 종사하고, 외적을 스스로 막아내는 자... 믿음으로 제국을 다시 일으킬 자들....

크리스트교 공인은 로마의 오랜 전통과도 관련이 있는 것이었어.

2. 황제의 저항... 율리아누스

크리스트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의 수도를 2개로 만든 뒤 4명의 황제 체제로 국가를 유지한 걸로도 유명하지. 서쪽 로마에 황제, 부황제, 그리고 동쪽 콘스탄티노플에 황제, 부황제... 이렇게 4명의 체제로 국가를 유지해서 다양한 사태에 효율적으로 대비하려고 한거야. 훗날 이 체제로 인해 서로마 제국, 동로마 제국으로 로마가 양분되어 버리지.

근데, 문제가 생겼어. 콘스탄티누스는 <밀라노 칙령>으로 하나님을 믿어도 된다... 라고 말했는데, 또 다른 황제인 막시미누스가 반항을 한거야.

콘스탄티누스 : 이제부터 모든 로마시민권자는 전통종교과 카톨릭 중 원하는 것을 믿어도 되느니라.

막시미누스 : 헐.... 저기 내가 평소에도 콘스탄틴이 하는 거 보고 짜증이 좀 났었는데, 너 너무~ 너무~ 너무하시는거 아니에요? 우리 로마 제국의 전통신은 제우스고, 동로마는 원래 그리스 지역이고... 그리스는 전통신의 본산지인데.... 난, 하나님인지 뭔지 모르니깐 배째!!!

콘스탄티누스 : 어... 그래... 배쨀께~~~

그랬다. 콘스탄티누스는 막시미누스가 배째~라고 하자 진짜로 잡아서 배를 째 버렸단다. 자... 그럼 이제 크리스트교의 승리인가?

아니다. 이후의 황제들도 전통신을 숭배하고, 카톨릭을 이단으로 몰아붙여서 이단 논쟁을 벌인 왕들이 있었다. 그 중 대표적인 황제가 역사에서 <배교자>라고 부르는 율리아누스이다. <배교자>는 종교를 배신했다는 뜻이니깐, 크리스찬의 표현이겠지? 근데 사실, 율리아누스는 첨부터 카톨릭을 무지 미워했었지.

아참, 생각나서 하는 말인데, 지금 말하고 있는 제국, 왕국, 공국, 공화국... 이런 거 구분은 할줄 알겠지? 제국은 말 그대로 <제>자가 들어가잖아... 황제가 다스리는 국가이고, 왕국은 당연히 왕이 다스리는 국가겠지? 공국은 <공작, 백작> 할 때 공을 말하니깐, <귀족이 자치령>으로 다스리는 국가이고, 공화국은 지금 말한 넘들이 다 없고, 국민들이 스스로 다스리는 나라가 공화국이지.

암튼, 지금부터 율리아누스를 통해서 전통신과 크리스트교를 싸움붙여 보자.

율리아누스의 조각상(프랑스 파리시)

율리아누스는 태생부터 불쌍한 넘이야. 크리스트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의 이복동생이 콘스탄티우스인데, 그 넘의 2번 째 부인의 2번째 아들로 태어났지.

근데 말이지. 율리아누스의 부모와 형제는 왕족이라는 이유로 모두 학살당했어. 왜냐면 로마가 황제권 계승 분쟁을 원천 봉쇄하려고, 콘스탄티누스의 직계 아들 외에는 모든 황족을 다 죽여 버렸거든.

어쩌다 살아난 율리아누스는 부모를 잃고 오랜 방랑을 떠나지. 방랑하는 동안, 율리아누스는 그리스의 전통 신과 전통 철학이 너무나 위대하다는 것을 알았어.

율리아누스 :  플라톤의 이데아 철학은 너무나 위대하군요.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이란게 이데아의 허상이란 말입니까? 우리가 진리라고 알고 있는 것은 사실 벽에 비친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군요. 그렇다면 진리는 그림자를 만드는 태양이 아닙니까? 우리가 진정 존경하던 태양신... 미트라(Sun)...

그리스 철학자 : 그렇다네. 가톨릭에서 말하는 신도 결국 눈에 보이지 않는 허상, 즉 <이데아>에 불과하다네. 신의 실제 생김새를 눈으로 본자가 인간 중에는 없지 않는가?

율리아누스는 가톨릭 세례를 받았고, 가톨릭 교육을 받으며 자랐지만, 사실 그건 전통신을 믿는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였어. 가톡릭 교육을 받던 율리아누스는 한가지를 확신하게 되었지.

율리아누스 :  그런데, 왜 로마에 사는 기독교인들도 그리스식 인사를 하고, 로마식 예법을 익히고 살아갈까요?

교회의 주교 : 그것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로마의 지배층이기 때문이야. 로마에 살아가는 이상 그리스와 로마의 예법, 역사, 문화를 익히지 않을 수가 없거든.

율리아누스는 로마의 전통신이 자연스럽게 부활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지.

그러던 어느 날, 율리아누스에게 큰 기회가 찾아왔어. 콘스탄티누스의 친척들이 모두 죽어 버려서 로마의 4황제 중에 <부황제> 자리를 계승할 자가 없게 된 거야. 콘스탄티누스는 율리아누스가 크리스찬을 로마 사회로 이끌어줄 적임자라고 착각한거지.

그런데 왠걸... 율리아누스는 부황제가 되자마자 군대를 조직해서 콘스탄티누스와 전쟁을 벌이려고 했어. 그런데 하늘이 도운 걸까? 전쟁을 하기도 전에 콘스탄티누스가 죽어 버린거야... 그는 자연스럽게 크리스찬 사회를 이끌어갈 로마 황제로 추대되었지.

황제가 된 율리아누스... 그는 약간 찌질하면서도 교묘한 방법으로 크리스트교를 탄압하기 시작하지. 크리스트교의 보호자인 척, 종교를 탄압하는 거야.

율리아누스 : 내가 황제가 된 이상 크리스트교를 보호하기 위해 교회가 하는 일을 좀 알아봐야겠다. 앞으로 교회의 모든 일은 황제에게 보고하고, 황제와 의논하도록 하여라.

로마교황 : 저기... 교회의 일은 교회가 알아서 할 거라서요... 황제 폐하가 신경써주는 건 고마운데, 저도 먹고 살아야죠...

율리아누스 : 거참... 내가 신경좀 써준다니깐... 고마워할줄을 모르네. 이번에 제국내에 교회들 있지. 명단 좀 뽑아봐. 내가 독실한 크리스찬들 뽑아서 <주교>로 다 선출해줄께.

그리하여... 어느 날 부터인가 교회에는 전통신을 믿는 자들이 기도와 찬양을 진행하게 되었다. 교회의 제단에서 제우스신을 위한 피의 의식이 행해졌고, 율리아누스는 하나님이 아닌 태양신의 숭배자가 되었다.

크리스찬에 밀렸던 전통 플라톤주의자들은 다시 그리스 철학을 들고, 교회로 찾아온다. 교회는 신학이 아닌 철학을 이야기하는 곳이 되었다. 율리아누스는 머리가 좋은 천재였지만, 그가 황제로 있던 기간에 했던 일들은 크리스트교 탄압 뿐이었다.

율리아누스 : 야...교회에다가 공개적으로 제우스 신상이랑, 번개창, 독수리  같은 거 가져다 놓은면 쫌 티나니깐, 티 안나게 크리스트교 애들 열받게 만들 방법 없냐?

그리스철학자 : 아... 방법이야 많죠. 예수를 죽인게 유대교 바리세인파잖아요? 예수를 믿는 교회 옆에다가 유대교 성전을 지어 버리죠. 그리고, 로마시민권은 군대 갔다온 사람만 주잖아요? 크리스찬은 군대를 못가게 막아 버리는 겁니다.

율리아누스 : 그 정도는 좀 약한데~. 이왕 하는거 예루살렘에서 순교한 애들 유골있지? 거기 개발구역이라고 말하고 다 부셔. 오다가 안티오크 성당도 부셔 버리고... 이제 대 놓고 크리스찬들 로마에서 추방해.

그리스철학자 : 네... 책도 많이 쓸께요. 크리스트교는 허무맹랑한 뻥이다... 이런 거 홍보하고, 그리스 철학이 합리적이라고 광고하면 되는 거죠? 바로 출판 들어갑니다~~~~

율리아누스 : 그래... 굿~~~ 내가 이래서 그리스 철학을 좋아한다니깐... 한마디 하면 다 알잖아?

그리하여, 율리아누스는 그 천재적인 머리로, 막 로마사회에 뿌리내리려는 크리스찬들을 공개적으로 핍박하였어. 그러나... 하나님의 저주일까?

율리아누스가 크리스찬 추방정책을 내걸고, 페르시아와의 대전투에 들어간 순간... 그는 크게 패했을뿐 더러 안전지역에 있었는데도 어디선가 우연히 날아온 눈먼 무기에 정확히 맞고 죽어 버렸지....

그리고.... 다시 로마는 혼돈에 빠지게 돼. 전통신이냐, 이교도신(크리스트교)인가라는.... 그 최후의 결전은 그리스 철학자들과 로마 제국 5 교구의 수좌대주교 간의 싸움으로 번지게 되지.

그럼 다음 이야기에서 더 자세히 다뤄볼까? 다음 장에서는 그리스 철학자를 대표하는 히파티아의 비극적 죽음과 기독교 신학의 아버지인 성아우구스티누스의 이야기를 동시에 다뤄보려구해. 빨랑 끝내고 처음에 얘기했던 구석기로 돌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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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끄적대는 낙서 세계사 (5)

콘스탄티누스의 예수 꾸미기 프로젝트

1. 크리스트교의 공인

자, 이왕 창조론 얘기를 하면서 기독교 얘기를 꺼내게 되었으니 시작한 김에 기독교의 역사를 다 파해쳐놓고 다시 돌아가자. 뭐.... 앞으로도 이렇게 정신없는 이야기들이 전개될 거니깐, 알아서 이해해... 달리 <낙서 세계사> 겠어?

   세계 최초로 하나님을 믿어도 된다고 공인한 황제는 로마의 콘스탄티누스였지. 근데, 이 양반은 참 독특해. 원래 이교도였던 콘스탄틴이 어느 날 갑자기 기독교의 수호자가 되었으니 말야.

아참.... 로마의 황제들은 특이하게도.. 다 us를 붙여주지? 콘스탄틴은 콘스탄티누스로 부르는 것 처럼, 율리아누스(Julianus) ,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 시베리우스.(Sibelius).... 뭔 -us 호칭이 그렇게 많은지.... 그건 그냥 라틴어의 경칭이야... 우리도 타인의 호칭을 부를 때, -님, -씨... 등을 붙이잖아. 그런데, 로마에서는 아예 태어나면서 경칭을 붙어셔 이름을 부르곤 했지. 오히려 -us를 빼명 애칭이 될 수 있잖아. 콘스탄틴, 율리안, 시베린.... 더 친근한데?

그것 말고도 라틴어에서 남, 녀에 붙이는 호칭은 상당히 많고 다양해. 여자에게는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ila를 붙이기도 하지. 율리아, 빅토리아, 마리아.... 보통 자연에 존재하는 사물을 칭하는 라틴어 접미사를 이름 뒷부분에 많이 붙였다고 하는데, 그런 특권을 가진 이들은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보기도 해. 로마 시민권이 없었던 시기의 게르만족들에게서는 그런 이름들이 잘 안보이거든.

뭐, 그게 중요한게 아니라 콘스탄틴이 기독교를 공인한 과정이 좀 재미있어서 말야. 콘스탄틴이 황제에 오른 시기의 로마는 이미 제국의 전성기가 지난 시기였어. 그에겐 새로운 힘이 필요했지.

황제 : 아 진짜... 요즘 우리 시민들 왜 이러냐? 실컷 시민권 팍팍 돌려서 인기 좀 얻었더니, 너나 없이 시민이라며 놀고 먹으려고만 하잖아? 스타가 되고 싶으면 락해!... 아니 시민이 되고 싶으면 봉사해??? 라고 했더니 개나 소나 시민이네. 놀고 먹는 시민한테 세금 좀 더 걷을 좋은 방법 없어?


쫄1 : 저기... 요즘 예수믿는 애들이 좀 경건하고, 세금도 잘 내는데 그 애들을 좀 구슬린 뒤, 숫자를 불리는 게 어떨까요? 걔네들 예수만 믿게 해주면 목숨걸고 충성할 분위기던데... 예수천국 불신지옥.... ㅋㅋ

황제 : 뭐? 우리 미트라신은 버리고? 그럼, 그리스 철학자들이랑 제우스교 믿는 애들이 좀 삐질텐데? 갑자기 종교를 바꾸면 제우스교 귀족들이 다 삐지잖아. 예수교 애들은 이단이라고 난리칠텐데?

쫄2 : 그럼, 황제 폐하가 직접 예수교 신에게 계시를 받았다고 우기고 전쟁에 나가서 대승을 거두면 되지 않을까요? 황제가 뭐 그랬다는데, 어쩌겠어요?

그리하여, 콘스탄틴은 전쟁에 나간 뒤, 밀비아 전투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조작한다.

황제 : 오... 하늘이 계시를 내린다. 보라... 불타는 십자가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십자가와 함께 전투에 임하신단다. 모든 장병들은 십자가를 방패에 새겨라. 하늘이 황제에게 <이 표적으로 승리를 거둘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병사1 : 저게 뭔 소리여?

병사 2 : 야... 이단신이 우리에게 승리를 주려고 저쪽 애들한테 빽태클을 걸거래. 무지 쎈 신인가봐. 황제가 한 밀이니 틀림 없겠지 뭐...

콘스탄틴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기독교로 개종하였지. 역사에서는 하나님의 계시 때문에 황제가 개종했다고 말하지만, 사실 개종하려고 맘먹은 황제가 직접 계시를 만들고, 위대한 권위를 보임으로서 개종의 정당성을 설명하려고 했다는 게 더 맞을 거 같아.

황제 : 오... 이단신이 로마를 구하였도다. 이제 황제의 왕관에 십자가를 박아둘 것이며, 위대한 왕이 크리스트교를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로마 시민권자들에게 부여하노라. 전통신과 크리스트의 신은 모두 위대한 황제 안에 같이 숨쉬리라....

이것이 역사에서 유명한 <밀라노 칙령>이지. 로마 말기, 크리스찬들은 드디어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된 거야. 그리고 황제는 크리스찬들의 교구제를 인정하였어.

교구제란, 교회의 조직을 로마제국의 행정제도와 일치시키는 교회 제도를 말해.

예로, 시골지역을 포함하는 하나의 로마도시가 있으면, 그곳을 총괄하는 교회가 존재하고, 그 교회를 이끄는 짱을 <주교>라고 부르지. 주교가 있는 곳을 <교구>라고 불러. 그런데, 그런 도시 몇 개를 총괄하는 더 큰 로마행정구역에는 그만큼의 행정구역을 총괄하는 교회의 짱이 존재하는데, 그걸 <대주교>라고 부르고, 그 지역을 <대교구>라고 말하지. 그런데, 대교구중에서  예수의 직계제자들이 교회를 세운 중요한 행정구역이 있어. 수도 로마, 안티오크,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 예루살렘은 아예 수좌-대주교 라고 불러주지.

그중에서도 예수의 애제자인 베드로가 교회를 세운 로마는 황제가 머무는 구역이기도 하고, 교회에서도 차지하는 위치가 크기 때문에 최고의 교회로 손꼽히지. 따라서 훗날 로마 교회의 대주교를 <교황>이라고 부르며, 서구 교회의 지도자로 인정하게 되지.

반대로 훗날 동로마 제국은 황제가 거주했던 콘스탄티노플을 중요한 성지로 여겨서 이곳의 교회를 동방 최고의 교회로 설정하는데, 그곳에서 훗날 <그리스 정교회>가 융성하게 되지.

문제는 교회세력이 로마 행정구역과 일치하게 되면서 생긴 로마 황제의 고민이야.

황제 : 야... 이거 예수교 애들을 공인했더니, 그 숫자가 장난 아니네. 얘들이 이렇게 숫자가 많았어? 로마 행정구역마다 교회가 다 생기잖아?

신하 : 얘네들, 그동안 박해받은게 무지 서러웠나봐요. 돈모아서 교회를 곳곳에 짓는데, 이거 궁전보다 더 화려한데요? 교회 주교들이 우리가 보낸 총독보다 더 신망이 높은 지역도 있다니까요.

황제 : 그럼 아예 도시 안에서 세금을 걷는 비율이나 조세 분쟁 같은 것도 예수교 애들한테 맡겨봐. 뭐... 신에게 충성을 다하는 애들이니깐 삥땅치거나, 황제를 속이지는 않을거아냐?

신하 : 얘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진리를 전파한다면서 자체 재판도 하던데요? 교회가 지방관보다 더 인정받는 지역도 있고, 게르만족들이 쳐들어올 때 교회얘들이 직접 수비하는 지역도 있다고 하네요.

황제 : 음... 예수교 애들 무시하면서 정치할 수는 없겠다. 어짜피 인정한 종교니깐 예수교 교리를 내가 좀 손봐야겠어. 야... 성경책 좀 읽은 애들 다 모이라고 해봐.

2. 니케아 공의회

325년, 콘스탄티누스는 니케아 공의회를 열어서, 종교 지도자들을 모아놓고 토론을 벌이지. 보통 예수에 대한 신학이론을 기독론이라고 하는데, 이 기독론을 정립한 것이 바로 초기 <공의회>야.

원래 공의회란, 기독교 교리에 다양한 의견이 있을 때 교회 지도자들이 모여 하나님의 진정한 말씀이 뭔지 뜻을 모으는 자리였어. 그런데, 여기에 <황제>가 개입함으로서 <공의회>는 황제의 지배를 받는다는 선례가 생긴 것이야.

황제 : 다 모였냐? 내가 니들 종교를 인정하고 같이 믿기로 하긴 했는데, 아직 내가 좀 모르는게 많으니깐 앉아서 이것 저것 얘기해봐.

아리우스 : 저희 알렉산드리아 교구는 예수님의 존재를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대리자거든요? 구약 성경을 보면요, 하나님이 구원자(메시아)를 보낸다고 했는데, 그 메시아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이라고 했어요.

황제 : 그럼 메시아는 하나님과 다른거냐?

아리우스 : 그렇죠. 예수님은 하나님과 다른 인격이고, 그냥 하나님의 말씀(logos)를 지상에 전파하다가, 옛날에 돌아가셨죠. 그니깐, 예수님은 하나님과 연결은 되어 있지만, 하나님은 아니라는 거죠.

황제 :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하는군. 대충 알겠다. 내가 황제인데, 내가 동네 촌구석까지는 다 다스릴수 없잖아. 그니깐, 내가 쫄따구들을 시켜서 내 명령을 전달하지? 그거잖아. 쫄다구가 내 말을 전달하지만, 쫄다구와 내가 일치하는 존재가 아니라는거... 오키...

아타나시우스 :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요. 저기, 하나님이라는게 원래 사랑(선)이 본질이거든요. 근데, 사랑은 형체가 없잖아요. 하나님은 사랑을 말씀으로 전달하셨구요. 그니깐 그 말씀을 전한 예수도 사랑이라는 그 본질 자체이니깐, 하나님과 말씀, 사랑, 예수는 모두 같은 거죠.

황제 : 뭔 소리냐? 뭔 소리인지는 몰라도, 예수가 곧 하나님이라는 거지?

아타나시우스 : 네네네... 하나님을 섬기면 예수의 진리도 동시에 아는 것이고, 말씀이 곧 사람이 되신거죠.

황제 : 그니깐... 예수가 하나님이니깐 예수가 신성하다닌 거잖아? 대부분이 예수가 심부름꾼이라는데, 넌 예수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거지? 그거 좋네. 예수가 신성해야 예수의 후원자이고, 공인자인 나도 좀 폼이 나잖아. 좋아. 예수는 인간이 아니라 신이다. 예수가 인간이면 황제가 평범한 인간보다 못한 존재가 되잖아. 야... 예수가 인간이라는 기록은 다 지워라...

그리하여.... 예수가 인간성을 지녔다는 다수파는 이단으로 규정되고 말았지. 신과 예수, 성령은 곧 하나라는 삼위일체설이 정설이 된 순간이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가 삭제한 다수파의 기록은 아직까지 논란이 되고 있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성경이 있다는 이야기나, 프리메이슨이 고대 예수의 인간성에 대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는 등의 이야기는 역사에서 주목하는 신비로운 이야기들이지. 영화 <다빈치 코드>에서도 이단의 이야기를 말하고 있잖아?

3. 예수 만들기 프로젝트

자... 일단 예수의 신성을 결론내린 황제... 이번엔 예수의 생일을 정하려 했어.

황제 : 일단... 예수 생일 미사를 지내고 예수를 좀 홍보해봐.

니케아 공의회 직후, 황제는 크리스찬의 미사(Christes-Masses)를 시작하는데, 원래 크리스마스는 공의회가 끝난뒤 축하파티를 하는 것을 말하지. 일명 뒷풀이라고 할까?

그런데, 황제는 이 미사를 예수의 탄생 미사로 진행하려고 했어. 크리스를 고대어로 X라고 표현하면 X-mas라고도 하는데, 훗날 불어로는 <노엘>이라고도 불러.

문제는 예수 생일이 성경에 안나온다는 점이야. 그럼, 콘스탄티누스는 예수의 생일을 어떻게 정했을까?

황제 : 예수 홍보 하라니깐, 니들 지금 뭐 하냐?

신하 : 저기... 예수님 생일이 성경에 안나오는데요? 그리고요... 기독교인들은 예수 생일보다는 부활일에 더 관심이 있는데요. 예수가 전지전능해진게 부활한거 때문이잖아요? 부활절 홍보를 하는게....

황제 : 야... 니들 개념을 천년뒤 신대륙으로 미리 보내놨냐? 부활은 현세의 일이 아니라, 내세에 대한 약속이잖아? 내가 왜 예수교애들 죽은 뒤를 챙겨주는데? 예수가 필요한 이유는 지상에서 황제가 예수를 공인했다는 것이고, 그걸 알아줄 행사는 예수의 <탄생일> 이거든? 부활절 얘기 꺼내면 다 죽는다....

신하 : 저기 우리 로마에서 가장 큰 축제는 추수감사제잖아요. 농경신인 <세턴>에게 감사지내는 축제가 12월 17일부터 24일까지 하는데, 예수님 생일을 거기에 맞출까요?

황제 : 거참.. 이것들이... 어짜피 쉬는 날을 생일로 하면 무슨 의미가 있냐? 이젠 개념이 천 년 더 지나 21세기 대한민국 이명박 정부 수준으로 넘어가는구나.

신하 : 저기... 그러면 폐하도 믿었던 페르시아 미트라신 생일은 어때요? 미트라신은 태양과 광명의 신으로 축복을 상징하면서 생일도 12월 25일이니깐, 추수감사제 끝나고 또 쉬는 거잖아요? 일종의 연휴 시너지... 짱이죠?

황제 : 그럼 유대교에서도 연말에 쉬니깐 거기까지 맞춰서 12월 25일로 하면 되겠군. 유대인들도 토요일날 쉬지? 로마의 농경신 <새턴>이 토요일이란 뜻이고, 태양신 미트라의 태양이 일요일(sun)을 지칭하니깐, 딱 맞아 떨어지네. 아.. 로마신, 페르시아신, 유대신 등등을 모두 존중하면서 만든 예수의 생일... 내가 생각해도 기막히네...

신하 : 폐하의 정적인 막센티우스, 그 넘이 제우스 교를 믿잖아요? 제우스 빼고 모든 종교를 통합해서 생일을 만들었으니, 그 넘이 배좀 아프겠네요. 폐하의 종교는 모든 종교를 다 통합한 위대한 종교이십니다요.

황제 : 그래... 이제부터 예수교를 보편적인 종교라는 뜻에서 <가톨릭>이라고 부르면 되겠구나. 그리고, 토요일날을 안식일로 하면 유대교를 배낀 티가 나니깐, 이제부터는 <일요일>이 안식일이다. 달력의 빨간날을 일요일로 바꾸도록 해라.

콘스탄티우스가 아타나시우스파를 인정하면서 황제 맘대로 종교를 만들었지만, 그가 죽자 로마에서는 또 큰 난리가 벌어져. 먼저 황제를 싫어했던 군부 세력들은 제우스 신과 그리스 전통 철학의 위대함을 다시 주장하게 되고, 크리스트인들도 좀더 합리적인 <아리우스파> 크리스트교를 주장하는 사람이 등장하지.

그리하여, 그리스의 전통 철학과 전통신, 합리적인 크리스트교인들은, 아타나시우스파와 계속 대결을 벌이게 되지. 그 와중에 신학이냐, 합리주의적 사고방식이냐의 싸움이 로마 말기부터 다음 시대까지 이어지게 돼.

자... 그럼 지금부터 가속도를 붙여서 팍팍 이야기를 전개해보자.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크리스트교 사회를 살았던 많은 인간들의 이야기야... 콘스탄티누스와 같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들을 통해 기독교의 역사를 몽땅 파해치고, 원래 목표로 했던 창조론과 진화론으로 돌아가보려구해. 처음 의도였던 구석기로도 돌아가 봐야겠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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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대는 낙서 세계사 (4)

인류의 기원 : 진화론 vs 창조론 - 제 1장

1. 근원을 밝히고자 한 인간의 시도들

구석기 시대부터 시작되는 고고학을 바탕으로 한국사를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오늘 또 딴 이야기로 새 버릴 것 같다. 왜냐면, 교과서에서 <진리>라고 적어놓은 인류의 진화과정을 부정하는 사람들도 꽤 있거든.

그것은 크리스찬 사회라고 부를 수 있는 서구와 북미의 국가들 사이에서 제기한 <인류 기원>에 관한 논쟁들 때문이지.

서구 역사에서 종교, 즉 크리스트교는 과학과 아슬아슬한 관계를 유지해왔지. 흔히 중세라는 사회에 과학은, 그것의 옳고 그름을 떠나 항상 교회라는 세력에 의해 신학적 검열을 받아야 했거든. 친 교회세력이었던 갈릴레이조차도 지구가 돈다고 말했다가 재판을 받았잖아....

C(교황) : 야... 갈릴레이. 지구가 돈다며? 지구가 돈다는 증거를 가져와봐. 그럼 내가 읽고보고 인정해줄께.

G(갈릴레이) : 저기 제가 책에다 적어두었으니깐 한번 읽어보세요... 제가 또 교황청 사람들하고 친하잖아요.

C : 어? 뭐야... 지구가 돈다는 건 알겠는데, 니가 쓴 <천문 대화> 이 책 왜 이래? 뭔 대화가 천동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악당처럼 적어놔? 그럼 우리 교회의 주장이 욕먹을 주장이었단 거나? 왕 짜증이네... 너, 가서 재판 좀 받구 와라.

릴레이에 대한 재판은 일반 마녀사냥과 달랐어. 이단 재판장이면, 보통 각종 고문과 체벌을 생각하지만, 갈릴레이는 바티칸 궁전에서 하인까지 두고 편안하게 재판을 받았지. 이단재판소는 갈릴레이에게 <성경>이나 읽으면서 회개하다 가라고 말했거든. 뭐... 학연, 지연... 아니 종교연...연줄의 중요성을 실감하는 장면이지. 더 깊게 말하면 종교인들이 과학자를 그리 적대시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되구.

근데 잠깐, 그러고 떠난 갈릴레이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말했다구? 갈릴레이가 그 말을 했어도 화장실에 숨어서 혼자 했겠지, 그걸 누가 들었겠어? 이순신 장군이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라고 말했는데, 들은 사람이 없다는 거랑 똑같네... 역사 학자들은 과거로 돌아가서 과거 인물을 도청한 뒤, 녹음에서 현세에 남겨두나??? 알고보면 역사학자들도 꽤 순수한 오버쟁이들이거든...

암튼... 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과학과 신학은 양립하는 것일까? 가톨릭 사회는 과학을 신에 대한 도전이라고만 생각했을까?

보통 서구 철학과 신학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 유대 등을 돌고 돌아 로마에서 집약되었다고 말하곤 하지. 그런데, 그 로마에서 신학과 과학은 어떤 관계였을까? 과학과 신학은 양면의 동전과 같았어. 과학이 신학의 권위에 도전할 경우, 심하게 탄압받기도 했지만, 보통은 과학, 논리학, 철학 등이 신학에 포함되어 균형을 이룬 경우가 더 많았거든.

2. 신학 이야기의 성립과정.

내가 하는 이야기들이 다 뜬금없이 진행되곤 하지만, 오늘 이야기는 엄청 무개념으로 진행될거야. 한국의 구석기를 설명하는 자리에서 왠 신학논쟁인지.... (말이 한국사지, 뭘 적다보면 세계사에서 종교, 철학, 미술, 과학까지 무개념으로 마구 적는 게 이 시리즈의 특징이랄까?)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이런 거야. 일단 인류의 기원을 설명하기에 앞서, 인류가 고고학적으로 진화되었는지, 누군가에 의해 창조되었는지의 철학적 문제를 걍 심심해서 다뤄보고 싶은 거고, 이렇게 신학적인 이야기를 하려다보니 유럽의 먼 옛날부터 현재까지 신학과 과학이 어떤 관계를 가지고 발달했는지를 보고 싶은 거야.

음.... 비키니를 보려고 수영장에 갔다가 문득 비키니의 기원이 생각난 김에, 태평양에 가서 비키니 섬에도 들려보고 프랑스도 들러서 패션의 기원을 찾아보려는 쌩뚱맞은 시도와 같다고나 할까? 심심하면, 주말 저녁에 혜수랑, 지아 패션도 한번 휘리릭~~~ 감상해보구...

자... 그럼 하느님과 과학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구약 성경이 말하는 하느님이란, 헤브라이 민족의 하느님을 말해. 헤브라이 애들은 원래 인도, 이슬람 애들이랑 같은 계파인 샘족이었는데,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지. 노예생활이 왕 짜증~나서 불만이 많았던 이들은, 자신들의 신인 여호와가 언젠가 짜증나는 강대국 쒸레기들을 싸그리 밀어 버리고, 자신들을 구원해줄거라고 믿었어.

그러던 어느 날, 철기를 쓰는 히타이트 민족들이 아시아를 쉽쓸고 다니자, 모세라는 폼나는 지도자가 헤브라이 민족을 이끌고, 홍해 바다를 쫘악~ 가른 뒤 탈출을 시도했지. 그리고, 하나님의 시험이라며 방랑 생활을 시작했어. 근데, 방랑 기간 동안에는 기강이 헤이해지니깐 군기를 바짝 잡아야 되잖아. 그래서 모세는 아브라함이 하느님과 약속했던 <율법>을 무지무지 강조하면서 부족들을 다스렸지.

하느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고, 아브라함에게 율법을 전해준 뒤 모세를 거쳐, 다윗, 솔로몬같은 율법의 실천자들이 약속을 지키는 과정들을 적어놓은 것이 옛 약속, 즉 구약이야. 그런데, 율법의 실천자인 솔로몬이 죽은 뒤, 율법에 대한 이해차이와 실천방식 등의 문제로 헤브라이 민족들을 싸움을 했고, 그 결과 이스라엘과 유대의 분열이 생긴 후 강력한 아시아의 철기 국가들에게 망하지.

즉, 결론적으로 말하면 구약은 헤브라이 민족의 약속에 대한 이야기야. 하느님이 천지를 만들고, 고난의 시험을 하신 뒤, 약속한 평화와 땅을 주실 것이니 믿음을 잃지 말라는 줄거리를, 긴긴 시간에 걸쳐 적은 <민족 부흥 지침서>였지.

그 <민족 부흥 지침서>가 수많은 강대국들의 신을 제치고, 로마 시대까지 살아남았던 것은 <고난에 대한 보상>이 있을 거라는 한치의 의심이 없는 <율법> 때문이었어.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약속은 <기브 앤 테이크>였거든. 오로지 아브라함의 자손에게만 약속된 유일신의 은혜는, 그 후손들이 하나님이 말한 <율법>을 지킬 경우에만 <계약이 성립>되는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유대인들은 나라가 없어도 버틸 수가 있었지.

팔레스타인인 : 유대 떨거지들아... 우리 다곤신은 번개도 부르고, 비도 내리게 한다. 니들 신은 뭐하냐? 니들 노예생활이 쫌 길다... 큭큭큭..

페르시아인 : 우리 미트라신은 인류에게 불도 주시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비옥한 토지도 주셨지롱...

유대인 : 바보들... 우리 여호와는 니들이 말하는 거 다 창조하셨거든. 니들은 동네신이지? 우리 신은 창조와 종말을 주관하는 신이신데, 오직 우리에게만 하늘나라를 약속하셨거든?

시리아인 : 웃기네. 우리 야스르신도, 천국을 약속하셨거든?

유대인 : 우리는 약서 성했거든? 느들 신은 인류가 언제 태어나서, 언제까지 번영하다가, 언제 구원받을 지 계약서 적은 거 있어? 계약서도 없는 것들이... 니들은 노예계약이야... 대충 믿었다가는 동방신기 꼴난다. 우린,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담판짓고 2천년짜리 구두 계약까지 직접 했거든?

그래, 그거다. 유대인들이 어려운 시절을 견디는 동안, 하느님과의 약속과 그 이후의 일들을 계속 적어놓아서, 민족의 희망을 유지하려던 <약속>... 그것이 구약인 것이다. 그것이 기원후 1세기, 로마시대까지 이어져서 예수시대에 꽃을 피우게 된 것이야.

그리고, 그 구약이 지금 21세기, 신학과 과학 논쟁의 핵심으로 자리잡게 되었지.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 인류 진화론과, 복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인류 창조론.... 구약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까지 들먹이면서 진행되는 대립관계는 바로 그 이야기의 시작을 이야기한 거야. 근데 말이지.... 진화론이 등장한 것은 다윈이 <종의 기원>을 발표할 무렵이었으니깐, 그 이전 천년이 넘는 기간동안, 신학과 과학은 어떤 사이었을까?

그냥 심심한 김에 더 팍팍 파해쳐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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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 세계사 (3)

석기시대와 원시시대.. 그리고 원숭이들

1. 석기시대가 원시시대일까?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게 있어. 그건 석기시대와 같이 혼돈해서 쓰는 잘못된 용어들이지.

지금 다루는 석기시대란.... 말 그대로 石器... 돌을 도구로 쓴 시대란 뜻이야. 보통 우리가 stone-age 라고 알고 있는 시기이지만, 실제로는 stone implement 라고 쓰고 있지.

석기 시대 - 신석기 시대 - 청동기 시대 - 철기 시대

후진 돌... 새 돌.... 반짝거리는 청동.... 무지 강한 철.... 즉...생활 도구를 돌(石器)을 사용했느냐 금속을 사용했느냐로 나누는 기준이지. 이건 순전히 고고학에서 인류 발전 단계를 나타낼때 쓰는 용어야.

석기시대를 이야기할 때, 선사시대라는 말도 같이 쓰지만 석기와 선사는 달라. <선사시대>란 역사시대의 반대말이지. 先史란 말이 역사보다 이른 시대란 뜻이잖아. 따라서 선사시대는 문자 기록이 존재하는 역사시대 이전의 모든 시기가 선사시대야.

우리 민족의 가장 오래된 기록은 단군 신화고... 단군의 고조선은 보통 청동기 때 세워졌다고 하니깐, 청동기 이전은 모두 역사 기록이 없는 선사시대야....

한국사에서.... 구석기 + 신석기 + 이른 청동기 = 선사시대

또... 원시인들이 살았던 옛 시대를 원시시대라고 대충 부르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도 석기시대랑은 다른 개념이지. 원시시대란, 국가가 성립하기 이전을 말하는 개념이야.

원시시대는 사회주의자였던 마르크스가 제시한 개념인데, 마르크스는 제대로 된 정치력을 가진 국가가 생기기 전의 시대를 원시 시대로 불렀어. 마르크스는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이상 국가를 <공산주의 국가>라고 생각했지.

공산주의란, 말 그대로 공산(共産).... 공동으로 생산해서 재산을 공동으로 나누는 이상적 사회를 말해. 인류는 원래 <원시사회>라는 시기에 모두가 평등한 공산주의 사회였는데, 국가가 생기고, 사유 재산이 생기면서 평등이 깨졌다고 생각한거지. 즉, 원시시대는 <소유권>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평등사회를 지칭하는 말이야.

원시사회(원시 공산사회, 부족공동체 사회) - 고대 국가 - 중세 국가 - 근대 자본주의 - 공산주의

위에 적은 사회 발전 단계를 보니깐 대충 알겠지? 돌을 사용한 석기시대와, 평등을 핵심으로 하는 원시사회도 완전히 같은 개념은 아니지. 원시사회지만, 돌을 안 쓴 사람들도 있을 수 있고, 석기 사회에서 고대 국가가 생긴 사회도 있을 수 있지.

아메리카의 고대 잉카 문명 같은 경우에는 석기 시대때 이미 찬란한 문명 사회를 이루었고, 아마존 부족들은 원시사회였지만 금속을 사용할 줄 알았다잖아.

자, 그럼 <석기시대>라는 용어를 확실히 알았으니깐, 석기시대로 출발해볼까? 끄적끄적...

2. 구석기의 인류란?

보통 역사책에서 말하는 최초의 인류 - <오스트랄로 피테쿠스>는 그냥 상징적인 개념일 뿐야. 오스트랄로가 오스트레일리아 할 때, 그 남쪽이란 뜻이고, 피테쿠스는 <원숭이>란 뜻이지. 한마디로, 걍 원숭이란 뜻이야.

근데, 305만년전이라는 까마득한 시절의 원숭이가 역사책에서 인류의 시조로 등장한 이유는?

그건 그냥 두 발로 걸어다닐 줄 알았고, 손에 돌을 들고 뭔가를 부실 줄 알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손에 돌을 들고 먹고 살려고 아둥바둥 살았으니 이 때 부터가 이미 <석기> 시대겠지?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인류의 조상을 정하면, 여의봉을 들고 킥킥거리며 하늘은 나는 털보원숭이 손오공도 인류의 조상이 될 수 있겠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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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오스트랄로 피테쿠스 - 아프리카누스(약 215만년전 유인원 : 미세스 플레스)의 두개골로 재현한 고인류.
당시 인류는 인간보다는 원숭이에 가까웠지만, 직립보행과 도구의 사용을 근거로 인류의 시조로서 대우를 받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상징적인 의미일 뿐, 현생 인류의 조상이라고 보기엔 미흡한 점이 너무나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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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사진은 직립 보행의 근거인 골반 구조이다. 침팬지와 인간을 놓고 보았을 때, 가운데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인간쪽에 훨씬 가깝다. 손과 발의 구조도 인간쪽에 가깝다. 그러나, 인간에게 필요한 문자를 가지지 못하였고, 빙하기를 거치는 수십만년 동안 큰 진화를 보여주지 못하였다.

사실 이 기준으로 하면 그보다 훨씬 이전의 원숭이들도 다 인류의 시조가 될 수 있어. 400-500만전의 원숭이들 중에서도 <라마피테쿠스>처럼 걸어다닐 수 있는 원숭이들이 있었거든... 그 이후로 호모 에렉투스니, 호모 사피엔스니... 기타 등등 원숭이들이 많이 발견되었다나봐. 뭐, 우리랑 상관없으니 그런가보다 하구...

암튼, 세계 곳곳에서 원숭이들이 등장했다는데... 우리 나라에서도 원숭이들이 발견되었겠지? 그럼 고고학의 시대로 들어가서 우리와 관련된 원숭이들의 생활 양식을 간략히 정리해 볼까? (에휴... 원숭이 얘기만 계속하다가 역사 이야기는 언제 시작하지???)

 

딴 나라 원숭이 얘기는 하기도 귀찮다... 그냥 400만년전 이야기는 영상으로 때워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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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대는 낙서 세계사 (2)

석기시대는 역사책에 왜 적어놓나요?

- 구석기는 역사 시대일까?

자.. 그럼 역사교과서와 똑같은 순서로 역사를 한번 적어보려구 한다. 근데 말이지... 역사책을 딱 피자마자 우리는 알송달송한 시대에 직면하게 된다.

T : 자... 그럼 인류의 조상이 살았던 구석기 시대부터 공부해볼까?

S : 저기요... 전 창조론 믿는 크리스찬인데요. 꼭 이거 공부해야 되요?

T : 시꺼... 현실과 이론은 다른거야. 지금은 진화론 믿고 교회가서 아담의 상복부 2차 갈비뼈가 하나 비었다는 그 얘기 공부해... 지금 성경책 읽냐?

S :  저기 근데, 인류의 조상이 원숭이라면서 원숭이의 삶을 배우는 게 역사랑 무슨 상관인데요?

T : 이것들이 머릿속 바탕화면에 빨갱이 로고가 떠다니나... 역사에도 뭔가 시작이 있을거잖어?

S : 그니까요... 구석기는 선사시대라면서요? 역사시대가 아닌데 왜 배우냐구요?

그렇다. 솔직히 구석기니 신석기니 하는 것들을 역사에서 배워야 하는 근거는 전혀 없다. 역사 기록이 없는 먼먼 옛 지구의 이야기를 우리는 선사 시대로 통칭해 부른다. 역사 시대란, 역사적 기록이 존재하는 시기를 말한다. 단군 신화처럼 삼국 유사같은 책에 옛 일이 기록된 시기가 역사시대란 말이다. 안드로메다로 가는 광년수보다 더 멀리 연대기가 뛰어 버리는 70만년전의 시대를 왜 역사책에 적어놓는 것일까?

그 옛날 이야기를 역사에서 다루고 시작하자니, 종교 논쟁부터 해결해야할 판이다. 진화론을 믿자니 원숭이들의 역사를 배우는 것일 뿐이고.... 창조론을 믿자니 뭐 구석기는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기 전 낮잠자던 시기에 활동한 초사이언인들의 이야기로나 취급해야 할 것 같고...

사실 문자가 기록되기 이전의 옛날의 원숭이들을 연구하는 학문은 <고고학>이지 역사학이 아니다.

그런데, <고고학>은 인간의 삶과 사고방식을 이해하는 학문이 아니다. 인간을 이해하는 학문은 <역사학>이고, 인간의 삶을 알 수 없었던 시기의 인간 또는 유인원의 생물학적 모습과 생존을 위한 생활방식을 연구하는 학문이 <고고학>이다.

즉, 고고학은 인간의 삶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현생 인류의 조상이 누구이며, 그들이 현생인류와 얼마나 닮았는지를 연구하는 <과학>이다. 인간의 삶을 이해하는 <역사학>은 <인문학>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역사교과서는 꿋꿋하게도 이 고고학의 영역을 역사교과서에 떡 하니 적어둔다. 그것은 관행이 되어 모든 역사의 시작을 설명하는 기준이 되었다.

흔히 한국사라고 하면, 한반도와 주변 지역에 사는 민족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되어야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그 이유는, 우리 민족 국가라고 생각되어지는 고조선 등의 국가가 최소한 청동기 시대 또는 그 이전에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고고학을 역사학에 끌어온 이유는 뜬금없이 시작된 역사시대의 쌩뚱맞은 시작을 보충하기 위해서이다. 사실 고고학이 다루는 수많은 과거 사실들 중에서 역사가 애타게 원하는 것은 <역사시대를 살아간 인류에게도 조상이 있을터인데, 그 놈이 누구인가?> 정도이다.

우리는 서구에서 역사를 서술하는 기준을 생각해서, 아프리카의 <오스트랄로 피테쿠스> 등을 기준으로 인류의 조상을 말한다. 그리고, 서구식 기준에 맞추어 구석기, 신석기 등으로 합리적인 시대 구분을 한다. 그 결과, 우리 민족의 첫 시작인 고조선을 설명하기 위해서 아주 긴고 긴 석기 시대를 따로 이야기 하는 것이다.

(사진) 오스트랄로 피테쿠스의 두개골 형상) 좌-아프리카누스, 우-에티오피쿠스

결국, 우리는 민족의 기원을 설명할 때 2가지 방법을 동시에 사용해야 한다.

하나는,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를 거치면서 인류가 어떤 방식으로 사회적 진화를 했는가를 따지는 과학적 방식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환인과 환웅, 단군으로 이어지는 신화적 요소들을 간추려보고, 당시 사회상을 살펴보는 방식이다. 교과서에서는 이 두가지 방식을 따로따로... 두루두루 섞어서 사용한다.

일단... 고고학 이야기를 따로 떼어서 이야기하려구 한다. 역사학과 별도로 고고학을 떼어서 다룬 뒤 버리고... 역사에 관련된 <민족>이야기를 역사 시대로 설정해서 다뤄보려구 한다.

결국, 처음의 질문은 이런 식으로 마무리된다.

S : 그니까요... 구석기는 선사시대라면서요? 역사시대가 아닌데 왜 배우냐구요?

T : 맞다.. 맞다... 그거 역사 시대도 아니고, 역사 이야기도 아니지. 그냥 단군부터 시작하는 역사이야기만 해도 돼. 사실 고고학 이야기는 알아도 되고 몰라도 되는 이야기지. 있으면 걍 참고사항이고, 없어도 뭐 사는데 지장은 없는 이야기인데, 걍 허전해서리....

자...  지금부터 하는 고고학 이야기들은 다 참고사항이다. 걍 흥미있는 이야기만 쭉쭉~ 빨아먹고 버려도 되는 이야기들.... 읽기 귀찮으면 패스하시라~~~ 그럼 시작해 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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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 세계사 (1)

역사를 다 아는 자만 돌을 던져라~

1. 아... 교과서같은 역사여~~~

지금부터 일기를 쓰듯이 풀어서 역사를 조잘조잘 써보려고 한다. 그런데 말이지, 책이나 뭔가 보면 그럴듯한 서문들을 앞에 적어 놓잖아. 나도 뭐 그럴 듯한 뭔가를 적어보려고 하는데 말이야. 뭐 폼나는 거 없을까?

생각해보니깐 인터넷으로 역사에 관한 글을 적는다는 건 너무나 자유로운 일이다. 누구도 간섭하지 않고, 누구나 기분나쁘면 반박할 수 있는 공간인데, 난 그동안 너무 딱딱하게 샌님처럼 글을 적은 것 같아.

고등학교 때가 생각나는군. 누구나 한번쯤 겪은 일이라 특별할 것도 없는 <아침 화장실의 똥>같은 이야기인데, 아마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T(샘) : 자... 공부했으니 확인해야지? 삼국통일의 의의가 뭐지?

S(우리) : 저기 선생님... 얼마전에 가야도 배웠으니까 사국통일 아닐까요?

T : 그니까... 내가 물어보는 건 말야.. 신라가 통일한 시기를 말하는 거잖아. 삼국통일의 의의가 뭐지?

S : 저기 당나라 도움을 받았다면서요. 그런데 왜 삼국통일이 자주성이 있다고 적혀있어요?

T : 그래서 대학 안갈래? 꼭 너같은 애들 땜에 진도도 안나가고 수업이 안드로메다... 아니 당나라로 날아가잖아. 당나라를 물리쳤으니깐 자주적인 통일이고, 대동강 이남만 통일했으니깐 한계가 있는 통일이죠?

S : 저기요... 진흥왕 때 세운 마운령비, 황초령비가 훨씬 위쪽인데.... 통일하면서 영토가 더 아래로 내려와요?

T : 그래서??? 고구려, 백제가 안 망했니?

S : 저기 발해가 건국되서 남북국이라면서요... 근데 왜 통일이에요? 발해는 남의 나라인가요?

T : 너.... <교과서> 공부는 안하고 뭔 생각만 계속 하는거냐???

그래... 생각해보면 결국 교과서에 적혀있기 때문에 모든 것은 진리가 되는 역사가 있었다. 선생님들은 아이들의 창의력을 넓혀주려고 열심히 질문을 던지는데, 그 질문이 원하는 건 교과서에 적힌 한줄의 딱딱한 문구 뿐이다.

그래놓고도 교과서는 뻔뻔하다. 고등학교 교과서 첫장을 보면, 역사적으로 생각하는 <역사적 사고력>을 키우기 위해 한국사를 배운다고 적혀있다. 하지만, 교과서에 있는 것만 수능에 나온다는데, 교과서를 벗어난 사고력이 대한민국 어디에 존재하는지....

아... 문득 갑자기 영화 올드보이가 생각난다. 감옥에 갇혀 15년간 만두만 먹은 그 수염긴 파이터.... 우린 그넘과 다를 바가 없는 듯 싶다. 초, 중, 고, 대학.... 15년간 똑같은 내용의 역사책만 배운 우리... 갑자기 따스한 햇살이 그립다.

난 대한민국의 역사선생님들이 잘못했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분들 역시 참교육을 위해 무진장 애를 쓰고 계신다. 그러나, 공교육이든, 사교육이든 입시제도 아래 존재하시는 모든 분들은 <교과서>를 벗어난 역사를 말할 수도 없고, 수능에 안나오는 변두리 역사를 말할수록 유능함에서 멀어지며, 교과서보다 더 깊고 심도있는 역사를 이야기하면 왕따를 당하는 현실이 무섭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2. 역사를 다 아는 자만 내게 돌을 던져라....

역사를 이야기할 때, 교과서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다. 그것은 교과서를 만든 그 분들과, 역사가 무엇인가를 써 내려가는 그 분들이다. 교과서를 공부하다보면, 이런 의문이 생긴다.

T : 일제시대 우리 조상들의 현명함을 볼까요? 의병항쟁은 총, 칼을 들고 무력으로 일본에게서 벗어나려고 했던 반면,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계몽운동을 통해 일본에게 벗어나려고 했던 운동이죠. 안창호, 이승훈 선생님등이 이끈 신민회를 배워볼까요?

S : 저기 의병항쟁은 나쁜거고, 애국계몽운동은 좋은 거에요?

T : 왜???? 왜 그런 생각을 하지?

S : 저기... 의병항쟁은 애국의병항쟁이 아니라 그냥 의병항쟁이구... 계몽운동만 애국계몽운동이잖아요.... 그럼 의병들이 칼들고 일본이랑 싸운건 무식한 짓이고, 교육으로 일본에 저항한 것만 애국인가요?

T : 잉... 그런가?

교과서의 곳곳에는 이런 함정들이 숨어있다. 의병항쟁은 단순히 일본에 저항했던 사건들과 전투들을 나열한 뒤 그 의의만을 적어두지만, 계몽운동은 그 단체들부터 사업에 이르기까지 아주 꼼꼼하게 적어두었으며, 그 명칭을 달리한다. 학생들은 교사조차 생각하지 못했던 지식을 주입받게 된다.

그래.. 역사를 적는 이들은 이미 제목에서부터 우리에게 뭔가를 강요하고 있으며, 역사는 이런 것이라는 규정을 미리 만들어 과거를 <칼질>하고 있는 것이다.

에휴... 생각해본다. 역사를 공부할 때 <역사란 무엇인가?>부터 생각하라고 한다. 하지만, <역사란 무엇인가?>를 미리 생각해놓고 책을 적어놓은 사람들은 기존의 역사가들이다. 그 책을 읽으면 누굴 따라가게 되는 것일까?

사실 역사를 공부할 때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역사를 누가 먼저 만들어 놓았는가?>이다.

역사는 과거에 일이고 과거의 일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역사 전문가라는 분들이 역사를 연구해서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일이 중요한 일인지를 폼나게 글로 남겨 주신다.

하지만, 그것은 역사 연구가들이 할 일이시다. 우리는 그냥.... 필요한 관심있는 역사를 골라 있고 그 분들이 만들어놓은 것을 비판하기도 하고, 옹호하기도 하고, 똥을 싸질러놓기도 하고, 반짝반짝 닦아서 아우라를 펼쳐내기도 하고.... 그냥 걍 읽는 사람 맘이다. 그리고 그 짓저리를 편하게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인터넷 공간이다.

역사는 백명이 책을 읽을 때 백개의 역사가 머릿속에서 탄생하고, 한명이 글을 적을 때마다 한 개의 역사가 새롭게 탄생한다. 역사를, 역사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다양성이란 것을 인정하면 좋겠다는 뜻이다.

역사 연구가들보다 지식이 부족한 이들이 맘대로 역사를 적을 때, 누군가 뭐라 한다면 이렇게 당당헤게 외치면서 글을 적어야겠다.

너희들 중, 죄없는 자 돌을 던져라.... 가 아니라 <저기요.. 과거 사실을 다 아시는 분만, 다 안다고 생각하시는 분만 분필을 던져주세요...> 라구... 공손하게..... ㅋㅋ

3. 역사는 안드로메다로 가도... 진리라고 말하면 진리가 된다.

예전 사극을 보면, 교과서 한단원보다 더 깊은 공부를 하게 되어있다.

왕 : 아니... 사태가 이런데 경들은 진정 생각이 없는 것이요?

신하 1 : 폐하.... 그래도 아니될 일이옵니다. 한나라의... 어쩌구 저쩌구...

신하 2 : 신 영의정 따발총 아뢰옵니다. 이 사태의 핵심은 ...... 이고.... 이니.... 해서.....

신하 3 : 신 좌의정 반대파 아뢰옵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우리는 ..... 하니..... 하옵고.... 그게....

예전 사극의 제작비는 작가가 다 가져갔을 듯 싶다. 걍 왕이 한마디 지껄이면, 신하들이 돌림노래를 부르며 상황 설명을 다 해준다. 시대 배경부터, 사건의 핵심 개요와 대처 방법, 이후에 해야할 일을 대본 3천자로 요약해서 알기 쉽게 정리해준다. 작가님들 파이팅~~~~

그런데 말이지.... 대장금과 주몽이라는 사극이 나오면서 국민들은, 교과서처럼 요약해서 목소리 톤 높은 남자 성우가 나레이션으로 때우는 사극을 더 이상 보지 않는다. 성우.... 재까짓게 아무리 목소리 짱이라고 해도, 얼짱인 송일국이나, 여신 이영애를 어찌해보겠어?

국민들은 대사 길이가 3분 분량만 넘어가도 채널을 돌리는 시대가 왔다. 일단 칼부림 몇 번 해서 채널 안돌아가게 만든 뒤, 주인공이 직접 몸으로 다 때워서 작가의 대본량을 팍팍 줄여준다. 주인공은 레벨 1짜리 겁쟁이 주몽으로 출발해서 해모수의 기를 좀 받고, 모팔모에게 철제 아이템을 좀 받은 뒤, 소금산이나 주변국 등 스테이지 1,2,3를 모두 클리어 해야 한다. 고대 설화에서 주인공이 위기를 극복하면서 성장하듯, 온라인 게임의 레벨업을 마친 주몽은 만랩 파이터 대소와 자웅을 겨룬다. 이것이 현대 역사물이다.

어느 날부터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밝히는 작업보다도, 자신이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과 비교하면서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역사를 비판하는 작업을 더 즐거워한다. 자료가 없는 고대사는 누군가가 갑자기 <미친소와 노사분규, 청년실업과 사교육이 없는 쁘레땅 뿌르국>이 진짜 있었다....라고 해도 쉽게 비판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교과서에 없는 역사라던가.... 교과서보다 자 자세한 역사를 선호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인터넷이라는 매체는 그 작업을 격식없고, 자연스럽게... 때로는 너무 거칠게도 표현해 낼 수 있으며, 인터넷에 올라온 주관적인 모든 글들을 비판하면서 댓글놀이를 할 수 있는 자유를 갖는다.

지금부터 적는 글들은 때로는 너무나 유치해서, 때로는 너무나 황당해서, 때로는 너무나 전문적이여서 비판하기도 힘든 그런 내용들이 적힐 수도 있다. 누군가는 아니라고 비판하고, 누군가는 너무 쉽다고 비판하고, 누군가는 이건 너무 어렵고 쓸모 없는 내용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주관적인 글이기에 판단은 읽는 사람들이 알아서 할 몫이다.

내가 무슨 역사 전 영역을 통달한 전문가도 아니구... 그냥 일기처럼 쓰고 싶은 내용을 적을 뿐이다. 일단 개념은 안드로메다에 보내고.... 나름 적어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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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토지 이야기 (2)

동아시아의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신석기 시대가 도래하다....

인류가 땅을 이용하여 생상력을 확보한 시기는 약 1만년 전부터이다. 1만년전을 훌쩍 뛰어넘어 70만년전에 이르는 <구석기 시대>는 토지에 관련된 이야기를 전개하기가 어렵다.

그 이유는 수십만년 동안 지속된 빙하기와 간빙기 때문이다. 그 오랜 기간 인류의 시조인 <원숭이>들은 생존을 위한 사투를 벌여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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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오스트랄로 피테쿠스 - 아프리카누스(약 215만년전 유인원 : 미세스 플레스)의 두개골로 재현한 고인류. 당시 인류는 인간보다는 원숭이에 가까웠지만, 직립보행과 도구의 사용을 근거로 인류의 시조로서 대우를 받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상징적인 의미일 뿐, 현생 인류의 조상이라고 보기엔 미흡한 점이 너무나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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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사진은 직립 보행의 근거인 골반 구조이다. 침팬지와 인간을 놓고 보았을 때, 가운데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인간쪽에 훨씬 가깝다. 손과 발의 구조도 인간쪽에 가깝다. 그러나, 인간에게 필요한 문자를 가지지 못하였고, 빙하기를 거치는 수십만년 동안 큰 진화를 보여주지 못하였다.

 

지구상에 마지막 빙하기가 끝난 1만년 전쯤부터 본격적인 <토지 이용>이 시작되었다. 고고학 연대로 보면 이 시기가 <신석기 시대>에 해당한다. 물론, 채집과 수렵 생활은 계속 되었지만, 토지를 이용한 생활도 병행되었다.

이제, 토지를 이용하여 도토리, 수수 등의 작물을 재배하는 초보적인 농경이 이루어졌고, 토기와 같이 작물을 보관하는 기구도 등장하였다. 그러나 최초의 농경은 그 생산력이 너무나 낮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제약이 있었다. 물고기를 잡을 수 있고, 농사도 지을 수 있는 <물>이 필요했다.

그리고 인류는 초보적인 <종교>를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자연물과 동식물에 대한 경배가 시작되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숭배 대상은 <하늘과 태양>이었다. 특히 태양신은 농경이 이루어진 주요 문명 지역에서 빠지지 않는 신이었다.

그럼 동아시아의 사람들은 <신석기 시대>에 어떻게 살았을까?

2. 신석기 시대와 토지 이용

중국의 신석기 시대는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전설의 시대>이다. 사기에는 3황 5제의 전설이 나오는데, 이 3황 5제가 바로 농경의 시작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3황은 단군신화에 나오는 천, 지, 인과 같은 개념이다. 사기의 3황은 천황(天皇)·지황(地皇)·태황(泰皇)이라고 나오는데, 후대 역사가들이 복희, 신농, 여와, 수인 등 다양한 개념을 가져다 붙였다. 중요한 것은 3황이 하늘, 땅, 사람을 뜻하는 것으로서 그 중 <땅의 신>이 농경을 전해주었다는 것이다. 3황 이후 등장한 5제는 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황제, 전욱, 제곡(帝嚳),·당요(唐堯),·우순(虞舜) 이다.

삼황의 기록

내용

사기의 진시황본기

천황(天皇),·지황(地皇),·태황(泰皇)

사기의 보삼황본기

천황(天皇), 지황(地皇), 인황(人皇)

풍속통의의 황패편

복희(伏羲), 여와(女臥), 신농(神農)

통감외기

복희(伏羲), 신농(神農), 공공(共工)

예위의 함문가

수인(燧人), 복희(伏羲), 신농(神農)

백호통

복희(伏羲), 신농(神農), 축융(祝融)

십팔사략의 제왕세기

복희(伏羲), 신농(神農), 황제(黃帝)

3황이 하늘, 땅, 사람을 뜻하면서 농경의 전파를 전설로 설명하고 있다면, 5제는 음양오행의 돌고도는 5행을 기반으로 설명할 수 있다. 원래 5제는 중국 최초 왕조은 <하> 왕조의 전설을 뒷받침하기 위해 탄생했다고 보여졌지만, 한나라 때 동중서가 <추연의 음양오행설>을 받아들여 정리한 것이다.

오제의 기록

내용

사기 오제본기

황제(黃帝), 전욱(颛顼), 제곡(帝喾), 당요(唐堯), 우순(虞舜)

황왕대기

복희(伏羲), 신농(神農), 황제(黃帝), 당요(唐堯), 우순(虞舜)

예기 월령

태고(太皋: 복희), 염제(炎帝), 황제(黃帝), 소고(少皋), 전욱(颛顼)

도장의 동신부

황제(黃帝), 소고(少皋), 제곡(帝喾), 제지(帝摯), 제요(帝堯)

십팔사략

소호(少昊), 전욱(颛顼), 고신(高辛), 당요(唐堯), 우순(虞舜)

한반도와 요동지방의 신석기 시대도,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이 등장하기 이전의 시기이다. 그러나, 남겨진 기록이 없기 때문에 어떤 방식의 토지 이용을 했을지는 알 방법이 없다.

일단 빗살무늬 토기와 탄화된 좁쌀 등의 유적으로 미루어 초보적인 농경이 부락단위로 이루어졌다는 정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특히, 만주지방의 칠무늬 토기(채도)는 한반도와 유사하다. 많은 학자들이 요령 지방의 홍산 문화와 같은 신석기 문화가 중국보다는 한반도 계통과 비슷하다고 말하고 있다.

링크 : 한반도와 홍산문화는 같은 문화권이다.

한반도의 신석기 농경을 <토기>의 형태로 비교하는 경우가 많은데, 신석기 초기의 토기는 시베리아 계통의 토기와 비슷하며, 신석기 후기로 갈수록 중국식 토기와 비슷한 유물이 많다고 한다.

링크 : 시베리아와 한반도의 유물 비교

반면, 일본의 신석기는 조몬 시대(縄文時代) 후기를 말한다. 일본인의 인종은 고몽골족으로, 1만년전 경부터 한반도 등에서 이동한 이들이 농경 등을 전파하면서 토지 이용을 시작하였다. (일본 국립유전학 연구소에 따르면 약 65% 정도가 한반도에서 건너온 사람들이라고 한다.)

링크 : 일본 유전학 연구

   

신석기 때의 토기 : 한반도의 빗살무늬토기(좌), 일본의 조몬토기(우)

동아시아의 신석기인들이 농사를 지으며 먹었던 주식은 도토리와 밤 정도였다. 당시 농사 기술로는 계절에 따라 다른 음식을 먹어야만 했는데, 봄에는 나물류를 채집하고, 여름에는 강이나 바닷가 근처에서 어류를 많이 먹었을 것이다. 가을에는 도토리와 밤 등의 수확물을 먹을 수 있었고, 겨울에는 버섯류와 칡, 마, 겨울 생선 등을 먹을 수 있었다.

즉, 신석기 때 토지 이용이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가을 정도에 수확되는 일부 견과류 정도였고, 사냥과 채집이 여전히 큰 비율을 차지할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 된다.

이렇게 초보적인 농경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에, 당시 촌락은 지도자를 중심으로 식량을 구하는 씨족 단위 체제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다수견해이다. 씨족들은 한 해를 무사히 넘기기 위해 부족의 수호신에게 기원을 했을 것이다.

또, 당시 사회가 모계제인가, 부계제인가도 논란이 되고 있다. 중국인들의 전통 견해에 따르면, 신석기 시대의 생산력은 극히 낮았고, 채집과 수렵 등 여성들의 생산력이 중요시되던 시기였다. 또, 결혼제도가 정착되지 않아 일부다처제를 시행했다고 가정하면, 아이를 직접 낳은 여자측의 발언권이 강했다는 주장이다. 3황5제의 모계사회가 현재의 부계사회로 넘어온 것은 중국 최초의 왕조인 <하왕조>가 성립되면서부터라고 말한다.

그러나, 최근 한국과 일본의 일부 학자들은 그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신석기 시대에도 일부일처제의 기본적인 가족관계가 성립되었고, 동아시아 사회에 모계 사회는 성립된 것이 없다는 생각이다. 신석기 시대에도 남성이 힘든 일을 하면서 경제권을 조금 더 가지고 있었다는 생각이다.

누가 경제권을 가지고 있었던지는 열심히 싸우라고 냅두고 토지이야기를 해보자.

신석기라는 1만년전후의 오랜 시간은 토지 사용의 주체가 누구인지에 대한 의문을 던져준다. 누가 토지의 주인일까?

신석기 시대의 토지 이용을 놓고, <원시 공산제 사회>라는 학설을 제기한 사람들이 있다. 먼저 사회주의자인 <마르크스>부터 사회학자인 <베버>, <뒤르껨>... 지금의 대부분 역사학자들까지 그렇게들 주장한다.

신석기 시대의 생산력이 극히 낮고, 당시 사람들은 절대 빈곤에 처해 있었다. 농경은 초보적이었다. 사람들은 수천년간에 걸쳐 서서히 나아지고 있는 농사기술의 발전보다는 <자연신>에게 좋은 날씨를 부탁하고 있었다.

아마도 토지 소유권을 놓고 일어난 분쟁은 극히 적었을 것이다. 설령 있었다고 해도 지금까지 밝혀진 바가 없다. 또, 공동체 전체의 생존을 위해서는 토지 소유가 아닌 <점유> 형태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당시 사회가 부족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 사회였기 때문에, 토지는 부족민 전체가 <점유>하는 것이었다. 토지를 <점유>하다는 개념이 토지를 <소유>한다는 개념으로 바뀐 것은 정복전쟁이 활발해지는 <철기 시대>쯤에 등장한다.

3. 청동기와 토지 이용

동아시아에서 금속 문명이 등장하고, 농경기술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3000년 경이다. 이 시기는 석기 문명과 청동 문명이 공존하던 시기로, 황하 문명을 비롯한 다양한 동아시아 문명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이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5000년경 양자강 근처에서 벼농사가 시작되었고, 기원전 2000년경에 공동체를 장악한 종교 제사장이 등장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권력을 가진 자가 성장하여 기원전 1600년경 최초의 왕조인 상 왕조(은)를 건설했다고 한다.

만주에서는 기원전 1600년 경에 북방 유목 계통인 스키타이인들에 의해 청동기가 전파되었고, 한반도에도 기원전 15세기 전후에 청동기가 보급되었다. 일본에는 기원전 1000년경 야오이 시기에 청동기가 전파되었다.

청동기가 전파된 것과 비슷한 시기에 각 지역에 벼농사가 급속히 증가하였다. 그러나, 청동기와 벼농사의 직접적인 관련성을 찾기가 힘들다고 한다.

청동기는 요즘으로 따지면 <보석>과 같이 귀한 것이었다. 구리와 주석, 아연 등을 합금해야 제조가 가능한 청동은, 희소성 때문에 지배층의 무기나 제사용품으로 주로 사용되었다. 여전히 농기구는 돌이었다.

청동기를 만드는 기술이 전파되면서 농사를 짓는 기술도 같이 전해져 들어왔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특히 벼농사의 전파경로는 청동기 전파 경로와 유사하다. 만주 계통에서 한반도로, 그리고 일본으로 전래된 경로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럼 창동기와 함께 보급된 농사 기술은 어떤 것이었을까?

동아시아 사람들이 처음 시도한 농사는 견과류 등을 수확하는 것이었다. 밤을 많이 수확하였고, 깨, 도토리, 박 등이었다.

조금 시기가 지나면서 사람들은 비옥한 땅과 비료를 사용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화경농법>이다. 화경은 말 그대로 그 자리를 불태워서 비옥한 땅과 비료를 만든 후에 농사짓는 초보적인 방식이었다. 화전 농법으로 보리, 수수, 조, 팥 등을 재배할 수 있었다.

신석기 후기가 되면서 농사 기술은 더욱 발전되었다. 각 지역의 화경 농법이 발달하였고, 중국 강남지방에서 시도되었던 <수경농법>과, 만주지방의 <화경농법>이 유행하였다.  

특히 <수경농법>은 물을 이용한 농법으로 한층 진화된 농사법이었다. 물을 이용함으로서 <벼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벼가 동아시아인들의 주식으로 자리잡게 된다.

처음 중국식 수경농법은 강가와 저습지를 이용한 농사였으나, 철기시대로 접어들면서 한반도, 일본 등에서 개량을 거치게 된다. 저습지를 찾아다닐 필요없이 직접 <관개시설>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동아시아 각지에 관개 시설이 등장하고, 농사기술은 한층 발전하게 된다.

농사기술을 발전으로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생산물과 관개시설을 놓고 다툼이 시작되었다. 청동기와 철기 시대는 서로 많은 생산력과 생산물을 차지하려는 전쟁이 활발히 진행된 것이다.

즉, 당시의 농업기술 수준으로 볼 때, 당시 생산력을 높이는 주요 수단은 직접적인 생산력보다도, 생산력을 획득하려는 싸움이었다는 점이다. 일정 지역을 확보한 지배자의 출현은 생산 영역을 놓고 벌이는 전쟁에서 시작되었다.

다음 장에서는 금속기 시대의 생활 단위인 <읍>과 중국인들이 생각한 이상적인 토지제도 <정전제도>에 대해 간략히 짚고 넘어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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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토지 이야기 (1)

황하문명이 절대적인 문명이었는가?

1. 토지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인류가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가장 애착을 갖게 된 사유 재산은 무엇일까? 그것은 토지일 것이다.

농경이 시작된 이후, 토지와 그 토지를 경작할 생산력에 관련된 문제는 농경을 주로 하는 동아시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생산력의 발전이 곧, 그 사회 경제력의 척도였기 때문에 국가가 얼마나 효율적으로 운영되는가는 <토지를 어떻게 장악하는가>에 달려있었다.

지금부터 1년 동안 연재될 이야기는 동아시아의 토지제도와 세금제도, 그리고 토지와 관련된 국가와 지배층 간의 알력싸움, 지배층과 민중의 끊임없는 투쟁이야기이다.

기본적으로는 중국대륙과 한반도, 일본의 토지제도를 설명하겠지만, 농경과 관련된 부분이 있다면 유목민족의 토지 소유 방식도 조금은 다뤄보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종교이야기, 포스트모던이야기와 더불어 2009년에 계속될 핵심 연재물이 될 것 같다.

자, 그럼 오늘은 간략한 소개글만 한번 적어보도록 할까?

2. 황하문명이라고? 누구 맘대로?

자, 토지제도를 이야기하기 앞서 <토지제도>라는 전근대 생산소유양식을 가능하도록 만든 <농경생활과 문명>에 대하여 간략히 이야기해보자.

인류의 기원과 관련하여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유럽-아리안 계통>과 끊임없이 싸워왔단다. 그 이유는 유럽인들이 <유럽-아리안> 계통의 석기 문명이 동아시아보다 우월했다고 주장해왔기 때문이다.

  그림 : 세계4대문명, 앤더슨은 메소포타미아의 서쪽 문명에서 황하문명으로 채도가 넘어왔다는 것을 주장하였고, 이것은 아리아 계통의 문명이 우월하다는 서구 제국주의 역사관을 증명하는 듯 보였다. 채도란 채문(彩紋)을 한 도자기를 말하는데, 채문이란 붉은빛 등의 색상으로 무늬를 입힌 것을 말한다. 그러나, 농경사회에서는 그림을 그리거나 무늬를 새기는 일이 일상적이었을 것이다. 비슷한 문화가 존재한다고 해서 서쪽에서 건너왔다고 말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채도>라는 말 대신 가지무늬 토기, 혹은 칠무늬 토기라고도 부른다.

최초의 문명 탄생지역인 세계 4대 문명에서 동아시아의 문명은 <황하 문명>이다. 그러나, 유럽인들은 황하문명의 기원이 서아시아에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특히, 서아시아 지역에서 주로 발견된 검고 붉은 채도형 토기들이 서아시아 양식이라는 점을 들고 있다. 또, 신석기인들이 사용한 찍개, 찌르개 등의 도구 역시 서아시아의 도구가 동아시아의 도구보다 우월하다는 점도 강조되고 있다.

하지만, 동아시아 학자들의 연구 결과, 중국문명은 단순한 황하 문명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공통 문명>이라는 것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이전에는 <황하 지역>을 중심으로 한 문명이 동아시아 문명의 기원이라는 설이 정설이었다. 그 이유는 황하의 황토 지역이 석기로 개간이 가능할 만큼 물렁했기 때문이다. 농사에 편리한 물도 많고, 물고기 잡이나 사냥, 열매 채집 등이 동시에 가능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이 지역을 집중적으로 파고 들어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설이 뒤집히고 있다. 중국에는 요하강도 있고, 양자강도 있다. 관개농업이 가능한 곳이라면 어디서든 문명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연구가 계속될수록, 남쪽의 양자강과 북쪽의 요하강에서도 같은 시기에 농경이 이루어졌으며, 문명이 발생했다는 증거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중국인들은 양자강 일대가 동아시아 벼농사의 기원지가 아닐까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거기다가, 내몽골 지방과 요녕지방에서도 농경 유물들이 다수 나오기 시작했고, 심지어 한반도와 일본의 농경 연대도 계속 올라가고 있다.

링크 - 한겨레 기사 : 한반도 토기가 시베리아에 영향을 준 것일수도...

결국, 동아시아에서의 <황하 문명>이란, 동아시아 최초의 기원이 되는 문명이 아니라 다양한 동아시아 문명들 중에서 하나일 뿐이다. 그런데, 과거 중국인들이 다양한 문명을 대표하기 위해 내세운 황하 문명을, <동아시아 전통 문명>으로 규정해 버린 것이다.

동아시아 고대 문명은 <황하 문명>만 있었던 것이 절대 아니다. 황하강, 양자강, 요하강에 걸친 다양한 지역에서 동시대에 여러 문명이 존재하였으며, 그것을 대표하는 문명이 황하문명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동아시아 최초의 문명을 황하 문명으로만 인식하게 된 것일까? 그것은 후대 역사 자료에 근거한다.

한반도의 구석기, 신석기와 청동기 문명, 심지어 철기 문명까지의 모든 기록은 남아있는 것이 없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중국인들이 기록해 놓은 우리 초기 국가들의 몇몇 이야기일 뿐이다. 그것도 <동이전>의 형태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의 문명 형태가 아닌 <동쪽 오랑캐>의 기록으로만 남아있다.

그것은 한반도와 만주, 요동지방만 그런 것이 아니다. 몽골지방의 문명은 아예 기록 자체도 없으며, 양자강 이남의 역사도 사마천의 사기 이전까지는 <남쪽 오랑캐 지역>으로 분류되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였다.

황하문명은 훗날 <한> 왕조로 통일되면서 <중원>이라는 개념을 정립한 이들이 기록한 절대적 문명이었다. 춘추시대 오, 월, 한 등의 남방국가는 <중원>을 위협할 정도로 강력했으나, 오랑캐 문명으로 인식되었고, <치우>의 이야기는 단순한 전설이라고 기록해 놓았다.

기록은 <황하>의 승리를 말하고 있지만, 유물과 유적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각 지역에서 다수 출토되는 농경 유물과 유적지의 수준은 <황하>와 다른 지역간의 차이가 거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19세기 제국주의 국가들은 세계 역사를 단순히 서구역사의 우월함을 증명하기 위해, <문명>은 서쪽에서 시작되어 동쪽으로 이동했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였다. 서쪽의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시작된 최초의 문명이 동아시아 황하 문명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물론, 동아시아의 토지제도와 조세제도는 가장 강대국이었던 중국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것이 맞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문명 자체가 <황하>에서 비롯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황하>가 다양한 문명을 상징하는 <대표자>라는 것과, <황하>에서 모든 문명이 시작되었다는 입장은 완전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오늘은 이 점을 이야기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다음 장부터는 동아시아의 토지제도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중국의 토지제도를 이야기하려고 한다. 중국의 토지제도를 통해 동아시아 토지 제도에 등장하는 기본 용어들을 정리하고, 우리 조상들의 토지제도와 조세 방식을 집중적으로 다룬 뒤, 일본의 토지 제도를 우리와 비교하는 방식으로 정리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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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의 숨겨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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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대장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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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의 궁녀들 - 어떻게 살아가야 했을까?

1. <일평생을 혼자 사는 궁녀>로 만들기 위한 눈물겨운 부모의 선택

조선시대의 궁녀는 왕의 선택을 받지 못하면, 결혼을 하지 못합니다. 조선 시대 궁궐에 사는 모든 여자는 왕의 여자로서 살아야 하니까요. 그렇다면 조선시대의 궁녀들 중에서 왕의 선택을 받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요?

10분의 1, 혹은 100분의 1일까요? 아닙니다. 조선시대 궁녀의 수는 적을 때에는 300 정도, 많을 때는 700이상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많은 궁녀 중에서 왕의 눈에 들어서 왕의 잠자리 수청을 들었던 궁녀는 10명도 채 안된다고 합니다. 왕이 몇백명의 궁녀를 모두 책임질 수는 없으니까요.

그리고 궁녀의 일이 편하지도 않았습니다. 온갖 허드렛일을 하면서도 왕실의 예법에 규제된 생활만을 해야 했고, 평생을 질시와 투기가 만연하는 궁전안에서 살아야 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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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조선시대의 일반 백성출신인 부모들은 자신의 딸이 왕궁에 들어가기를 희망했습니다. 궁녀는 국가에서 강제로 모집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들의 의사를 물어서 입궁시킵니다. 그럼 왜 자신의 딸들을 궁녀로 보내려고 했을까요?

이유는 보릿고개조차 넘기기 힘든 가난 때문입니다. 가난한 백성은 자신의 딸을 궁으로 보내어 얼마안되는 국록이라도 받고, 딸이 입에 풀칠이라도 하길 바라기 때문이었죠. 궁녀들은 어릴 때는 5-6살, 보통은 10살 정도에 궁에 들어오게 됩니다.

처음 궁에 들어온 궁녀들은 견습생 신분입니다. 이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왕실의 예법과 서법, 다도 등을 배우게 되는데, 이러한 견습 나인들을 <생각시>이라고 합니다.

견습 나인이 지나면, 성년식을 거쳐 정식 궁녀가 되는데, 정식 궁녀를 <나인>이라고 합니다. 나인이 되면 스스로 자신의 삶을 책임져야 합니다. 견습나인들이 나인을 부르는 명칭은 <항아님>이라는 칭호인데, 대장금 등 사극에서 이 칭호를 사용하는 것을 종종 보셨을 거에요. <나인>은 자신의 독립된 방을 가질 수 있고, 하녀도 둘 수 있습니다. 나인의 하녀를 <방아이>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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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왕에게 선택받아야만 산다.

궁녀들은 봉록을 받지만, 그 봉록은 보통 쓸데가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순종 때 기록을 보면 궁녀의 봉록이 190원 정도라고 하는데, 현재 화폐가치로 약 150-200만원 정도라고 합니다. 실제 왕에게 눈도장 받은 궁녀들이 아주 극소수인 것으로 보아 궁녀들은 왕의 여자라기보다는 궁전 안의 사무를 맡아보는 여성 전문직이라고 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양반집 규수들은 나인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명문가의 딸이 궁전에서 독수공방하면서 살 필요는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궁에서 혹시라도 집안의 딸을 데려갈까봐 조혼을 시키는 풍속이 생기면서 폐단이 많았답니다. 18세기 영조는 이러한 폐단을 생각해서 조혼 금지령을 내림과 동시에 양가집 규수를 생각시로 모집하지 않기로 했습니다.이후 동학농민운동과 갑오개혁 때 조혼 금지가 법제화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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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가 되기 위한 조건은 상상 외로 까다로웠답니다. 궁녀는 일단 선조에 죄인이 없고, 집안에 병에 걸린 사람이 없어야 합니다. 또 첩의 자식은 절대 안되며, 집안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 있어도 무조건 궁녀 선택에서 탈락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궁녀 선발 때 처녀성을 확인하는 절차였습니다. 왕의 여자가 부정하면 안되기 때문이지요. 이 테스트는 최소 12살 이상의 성숙한 여자에게 실시하는 테스트였는데, 앵무새의 피 한방울을 팔에 떨어뜨려 피가 묻지 않으면 처녀가 아니라고 해서 탈락시키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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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어렵게 궁녀가 되었는데, 이 중에서도 왕의 눈에 드는 궁녀는 몇백에 하나라는 점은 비극이네요. 궁녀들은 성년식을 치를 때, 결혼식도 함께 합니다. 무슨 말이냐구요?

궁녀의 성년식은 왕의 여자가 성년이 되었다는 것을 축하하는 것으로 이것은 혼례를 의미합니다. 물론 신랑인 왕은 없이 혼자 하는 결혼입니다. 궁녀의 전각에서는 궁녀들에게 사은품을 보내고, 궁녀의 부모들은 살림살이를 보내줍니다. 이 성년식, 즉 결혼은 모두의 축복을 받는 행사이지만, 평생 혼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서글픈 일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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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궁녀는 어디까지 출세가 가능할까?

궁녀도 왕실의 예법을 받고 그 위계질서가 뚜렷합니다. 보통 생각시로 출발한 10살의 궁녀가 최고 궁녀자리인 상궁까지 오르려면 최소한 40이 넘어야 합니다. 자 그럼 궁녀의 품계표를 한번 볼까요?

궁녀의 품계

궁녀의 명칭

정 5품

상궁, 상의

종 5품

상복, 상식

정 6품

상침, 상공

종 6품

상정, 상기

정 7품

전빈, 전의, 전선

종 7품

전설, 전제, 전언

정 8품

전찬, 전식, 전약

종 8품

전등, 전채, 전정

정 9품

주궁, 주상, 주각

종 9품

주섭징, 주징, 주우, 주섭궁

궁녀의 삶으로서 가장 높이 올라갈 수 있는 것은 정 5품의 상궁입니다. 특히 상궁 중에서 가장 높은 상궁은 제조상궁인데, 제조상궁은 모든 궁녀를 총괄하는 최고 상궁을 말합니다. 제조상궁은 모든 내전의 재산을 관리하고, 왕의 측근에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두 번 째 높은 상궁은 부재조 상궁인데, 부제조 상궁은 왕의 개인 재산을 관리하고, 내전의 창고를 관리하였습니다.

또 왕의 심부름을 담당하는 지밀상궁(대령상궁)도 파위가 있는 상궁입니다. 이 지밀상궁은 왕의 최측근이기 때문에 엄격한 심사를 거쳐서 4살 이전에 뽑아 교육시키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왕의 자식에게는 교육을 위해 보모상궁을 뽑았고, 궁녀들을 감시하기 위한 감찰상궁, 왕실 가이드 역할을 하는 시녀상궁도 있었습니다.

4. 궁녀들이 각각 맡은 임무는 무엇일까?

궁녀의
임무

품  계

해야할 업무는?

상궁

정 5품

궁중의 최상위직이다.

상의

정 5품

예의와 기거에 관한 일의 총책임자이다.

상복

종 5품

복용, 채장의 수요와 공급을 맡는다.

상식

종 5품

반찬을 만드는 품종을 찾추어 공급하는 책임자이다.

상침

정 6품

일의 순서를 정하고, 행사를 담당한다.

상공

정 6품

여공과 정과를 담당한다.

상정

종 6품

계율, 죄, 벌을 담당한다.

상기

종 6품

군내 문부의 츨입을 관장한다.

전빈

정 7품

빈객, 조견, 연회를 담당한다.

전의

정 7품

의복, 수여의 일을 담당한다.

전선

정 7품

제팽전화(과리)의 일을 맡는다.

전설

종 7품

장식, 청소 등의 일을 맡는다.

전제

종 7품

의복과 재봉의 일을 맡는다.

전언

종 7품

선전, 계품을 맏는다.

전찬

정 8품

빈객의 조견, 연식을 돕는다.

전식

정 8품

고목건즐을 맡는다.

전약

정 8품

의약 처방과 시약을 맡는다.

전등

종 8품

등촉을 맡는다.

전채

종 8품

겸백사시를 맡는다.

전정

종 8품

상정(궁정)의 일을 맡는다.

주궁

정 9품

주궁, 주상, 주각은 궁상각치우의 5계이다. 내명부 궁품의 질서를 상정하기 위한 첨설직이다.

주상

주각

주섭징

종 9품

궁상각치우의 5음계 위에 변징, 변궁의 2음계를 더하여 7음계로 구성한 것이다. 내명부 위계를 위해 첨설한 첨설직이다.

주징

주우

주섭궁

5. 궁녀는 궁중문학을 이끌어간 선도자였다.

궁녀가 궁에 들어가면 먼저 한글로 궁체 쓰기를 익힙니다. 어렸을 때부터 하는 것으로 필수사항이지요. 따라서 궁녀들은 전문적인 서예 교육을 받은 전문가들입니다. 궁녀들의 문체는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남성 문장가들의 문체와는 다르게 우아하면서도 부드러운 필체와 내용이 특징이라고 합니다. 인목대비의 궁중비사를 다룬 계축일기,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갈등을 다룬 인현왕후기는 궁정 문학의 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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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궁녀들의 복색은?

견습나인인 생각시의 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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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인의 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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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궁의 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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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말년이 쓸쓸한 궁녀들...

궁녀가 가장 출세하는 길은 왕의 성은을 입어 출세하는 것이지만, 이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대부분의 궁녀는 40정도에 상궁이 되어 위세를 떨치는 것이 소원이었지만, 이것도 일부의 궁녀들만 가능했습니다. 상궁의 자리는 한정되어 있기에 대부분의 궁녀들은 그냥 늙어가는 것이었죠.

국가에서는 국가에 가뭄이 오거나 문제가 발생하면 그것을 궁녀의 한으로 돌리곤 했습니다. 유교주의 사회이고, 남존여비의 사회인데다가 농업중심의 국가이기 때문에, 자연의 재앙을 음양의 조화가 깨진 것으로 해석하여 여자들에게 죄를 전가하는 것이지요.

가뭄이 들거나 국가 재정이 빈약해지면 쫒겨나는 것은 가장 힘없는 나인들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궁밖으로 나온 궁녀가 결혼이 가능했을까요? 궁녀들은 이미 왕과 결혼한 몸입니다. 말했지만, 성인식 자체가 결혼식이었으니까요. 조선사회에서 <여성의 재혼을 금지한다>는 사회 윤리상 궁 밖의 궁녀는 평생을 수절해야 합니다. 만약 궁녀가 남자와 불륜(?)의 관계였고 현장에서 적발되었다면 이것은 재판없이 참수가 가능했다고 합니다.


  - 이 글을 위해 참고한 역사도서 모음

1. 이 포스트는 <김용숙, 조선조 궁중풍속연구, 일지사, 1987>의 내용을 참조하였습니다.
  2. 포스트의 그림과 일부 내용은
http://cafe.naver.com/nouas.cafe을 참조하였습니다.
  3. 포스트 내에 정리된 표와 일부 내용은 <테마로 읽은 우리 역사, 김경수, 이영화, 동방미디어, 2007>을 참조하였습니다.
  4. <조선의 뒷골목 풍경, 강명관 지음, 푸른역사, 2003>의 내용을 참조하였습니다.


포스트 내용 중 액박 된 사진들과 깨진 부분들이 있어서 다시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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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사 - 중국 부분을 할 때 만들었던 불교 흐름 도표입니다.
액박이 났는데 복구가 안되는거 같다고 말씀하셔서 따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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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폐에 그려져 있는 이황, 북한에서는 반동분자로 평가받는다.

1. 성리학에 대한 북한 주체 사상식의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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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공산주의 국가이고, 주체사상의 이념도 <마르크스 사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럼 철저하게 북한식 공신주의 사관으로 모든 역사를 바라보는 북한 역사학자들은 남한에서 1000원, 5000원권으로 쓰이는 유명한 성리학자인 이황과 이이를 어떻게 평가할까요?

우리가 역사와 윤리시간에 배워서 알고 있는 이황, 이이에 대한 평가와 북한의 평가는 상당히 다릅니다. 오히려 북한과 우리의 견해가 상당히 다른 반면, 남한과 일본의 견해가 더 비슷할 정도입니다. 그럼 한번 볼까요?

북한의 역사인식은 소위 말하는 <유물론적 사관>입니다. 유물론적 사관을 간략히 말하면, 모든 현상은 눈에 보이는 물질로 이루어졌다는 마르크스의 견해입니다. 사회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마르크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모두 인간의 마음이 만드어 낸 허구라고 말했습니다.

예로, 신의 존재는 증명된 적이 없지만 인간들은 신을 믿죠? 특히 서구사람들은 하느님의 존재를 믿습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신이란 인간이 자신의 불완전함과 우주에 대한 무지를 감추기 위해 만들어낸 허상이라고 말합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삶의 어처구니 없는 불완전함을 인간식으로 해석하기에는 한계를 느껴 신이란 존재를 창조했다는 것이지요.

마르크스는 인간의 역사는 눈에 보이는 물질, 즉 사회경제적 물질의 소유관계에 따라 발전한다고 말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토지, 자본 등 눈에 보이는 경제 물질을 놓고, 가진자와 가지지 못한자가 투쟁하면서 역사가 이루어진다고 말했죠.

따라서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역사란, 눈에 보이는 물질(유물론)과 눈에 보이지 않는 신과 같은 존재(관념론)가 투쟁하는 역사이자, 물질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가 투쟁하는 역사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투쟁 속에서 결국 완성되는 사회는 모든 물질을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소유하는 <공산주의 사회>인 것이죠. 따라서 공산주의 사회의 철학 이념은 물질과 경제 기반에 대한 <유물론적 시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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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황은 유물론자가 아니라.

이러한 유물론 중심의 북한 철학은 역사의 주도층을 2가지로 분석합니다.

첫 번째는 관념론의 이념을 가진 자들로, 신이나 우주 법칙 등을 생각하는 비생산적인 계급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기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잔머리를 굴려 지배층의 이데올로기를 만들고 구질서를 유지하려는 인물들입니다.

두 번째는 유물론의 이념을 가진 자들로, 현실을 직시하고 경제 문제의 해결과 실제 삶에서의 평등한 가치를 찾으려는 자들이 있씁니다. 이들은 피지배계급인 백성을 생각하고 좀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생산력을 높이는 일에 주력하는 자들입니다. 인간이 생산의 주체이자 사회 변화의 주체라고 생각하는 주체 사상을 가진 이들로 볼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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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조선 성리학자들을 이 공식으로 이해합니다.

북한은 조선 시대 관념론을 이끌어 간 대표적인 학자는 이황이라고 규정합니다. 이황은 관념적인 주자성리학을 이끌어간 자로 규정합니다. 특히 이황은 아무런 사회적 개선책도 내 놓지 않고 윤리나 지배집단의 도덕정치만을 주장한 지배집단의 보수주의자라고 생각합니다.

북한에서는 이황의 주리론적인 성리학을 관념론으로, 이후 조금 개방적인 주기론적 성리학은 조금 유물론에 근접한 학문으로 분류합니다. 이황에서 좀더 유물론적이고 현실론적으로 생각한 자가 바로 이이 등으로 이어지는 현실주의파들이었다고 말하죠.

이러한 관점은 철학을 관념론, 유물론으로 나누어 무리하게 분석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입니다. 이황의 업적이 어떤 것이든, 유물론의 입장에서는 이황의 철학이 물질세계와는 관계없는 나태하고 보수주의적인 철학이라고 보기 때문이죠.

북한이 주체사상을 정리하면서 이황의 사상을 가장 반동적인 철학사상으로 규정하여 매도한 것은 북한 정권이 추구하는 핵심 사상이 <유물론>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특히 이황이 주장한 사상 중에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가진 천성이 정해져있다는 <인성론>은 두고 두고 계급차별적 발언으로 매도하였습니다. 사실, 이황이 대표적인 표적이었기 때문에 비판받은 것이지, 북한에서는 성리학 자체를 고운 시선으로 보지 않습니다.

성리학의 왕도정치, 국왕과 신하의 공치주의 같은 이념은 백성들의 혁명과 무장봉기로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공산주의 혁명 사상과는 맞지 않았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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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 역시 북한에서 좋은 취급을 받는 학자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이의 십만양병설이나 현실개혁 주장 등은 유물론적인 성향이 어느 정도 있기 때문에 이황정도로 처절하게 규탄받지는 않습니다.

조선시대 성리학을 완성하였고, 일본에서는 성리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이황.... 북한에서는 이 성리학자를 가장 반동분자로 생각한다니.... 좀 의외이지 않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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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글 모음 :
2007/08/08 - [한국사사료모음/14.현대사사료] - (현대사 사료) 김일성 사망 북한방송 보도문(1994)
2007/06/02 - [한국사사료모음/14.현대사사료] -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 대장 차스차코프의 포고문(1945)
2007/03/17 - [한국사사료모음/14.현대사사료] - 6. 25 휴전 협정 조약
2007/03/17 - [한국사사료모음/14.현대사사료] - 한국사 참고 사료 - 해방직후 북한의 토지 개혁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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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 I S T O R I A > KOREAN HISTORY 1

인류는 언제부터 인류가 되었을까?

1. 역사는 왜 역사와 상관없는 선사에서 시작하는 것일까?

한국사 이야기를 시작해보도록 하자. 그런데, 한국사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일단 <민족>이라는 개념을 알아야 하고, 민족이 언제부터 이루어졌는가도 알아야 하며, 민족을 이루는 우리 <인간>들이 언제부터 지구에 나타나서 안죽고 후손들을 낳아가며 살았는지부터 알아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심각한 오류가 1가지 있는 듯 싶다. 역사라는 학문의 폭이 어느 정도 이길래 <인간의 기원>까지 따져야 하는 것일까? 분명, 우리나라 국사 교과서나 세계사 교과서를 펴보면 가장 먼저 나오는 부분이 인류의 기원이거나, 구석기인들의 생활 모습이다. 그런데, 구석기인들이 과연 역사에서 다루어야 할 소재거리일까? 뭐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님에도 우선 그 부분부터 따지고 들어가도록 한다. 이 연재글은 말 그대로 <개념없는 한국사>이기 때문에 뭔가 의문점만 있으면 <개념>부터 따지고 들어가려고 한다. 한번 시작해 볼까나?

우리가 보통 <역사>라고 말할 때, <歷史>란 글자를 꼼꼼히 따져보자. <歷>이란 단어는, 지나가다, 자나가 버린 순간, 발자취라는 뜻을 가진 한자이다. <史>는 보통 <역사>라고 말해도 되지만 원래 뜻은 기록된 문서, 문서를 기록하는 사람이란 뜻을 가진 한자였다. 한자의 어원을 해석해놓은 <설해문자>를 보면, 역사를 이렇게 설명한다. 역사란 기록이고, 사관이란 기록을 적어두는 사람이다. 원래 사관이란, 높은 분이 화살을 쏘았을 때 그 화살이 어찌되었는가를 정확히 기록해두는 사람이었다. 그것을 기록하는 것은 객관적이고 공정해야만 했다. 그 <史>를 모아두어 정확한 지난 날의 일들(歷)을 알게 하는 것이 바로 <歷史>이다.

이렇게 볼 때, 역사란 곧 <기록>을 가지고 과거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우리가 지난 과거를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지난 날의 기록이라던가 민속 자료, 도구 등 과거의 파편들을 통해서이다. 따라서 역사시대란,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있는 시기를 말한다.

그런데, 우리가 기록으로 알지 못하는 시기가 있다. 다른 말로 <기록>이 남겨질 수 있는 문자가 없는 시기를 말한다. 아직 <문자>가 없어서 남겨진 기록이 없기 때문에 단순히 그 당시 사람들의 도구 등 유물, 유적으로만 파악할 수 있는 시기를 말한다. 이것을 <역사>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선사>라고 말한다.

<先史>란 용어는 아주 간단하다. <역사> 이전의 시기, 즉 역사를 앞서간(先) 시기를 말한다. 한국사에서는 구석기, 신석기 등 <문자>가 없었던 시기를 선사라고 말한다. 그런데, 선사시대와 석기시대가 같은 개념일까? 라는 의문도 생기게 된다. 보통 한국사에서는 글자가 없는 선사시대가 곧 석기시대이지만, 세계사적으로 일치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마야문명 같은 경우, 이미 신석기 시대에 고도의 물질문명과 문자 문명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따라서 선사시대가 곧 석기시대는 아니다. 또 시대구분상 고대-중세 시대보다 선(先) 시대라고 말하는 <원시시대>도 선사시대라고 말할 수 없다. 방금 말했듯 마야문명은 고대보다 앞선 원시시대였지만 문자가 있었으니까....

그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역사시대는 문자가 있는 시대를 말한다. 즉, 다른 말로 하면 <선사시대>는 문자 기록을 통해 과거를 조사할 수 없다. 선사시대는 구석기인들이 쓰던 주먹도끼나 신석기인들이 사용하던 빗살무늬 토기를 통해 당시 사회상을 파악한다고 말하곤 한다. 도구나 주거지, 벽화 등을 통해 과거의 사실을 파악하는 학문은 정확히 말해 역사학이 아니다. 그건, 지리학, 지질학, 고고학의 영역이다. 선사시대인이 어떻게 살았는지 관심을 가지는 학문은 선사 인류학이다. 선사시대의 기후와 풍토는 자연과학의 영역이자 동식물학의 영역이다.

그럼 역사학에서 역사가 아닌 선사시대를 자신의 학문인 것처럼 기술하는 이유는 뭘까? 그건 간단하다. 인간의 이야기를 다루는 학문이 인간의 기원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 정작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흐름이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고 해서 내 부모님 이야기는 다 빼 버리고 이야기를 시작하면 흐름도 이상할 뿐더러 <나의 기원>을 정확히 알 수가 없으니까... 그럼, 지금부터 역사라기 보다 <인류학과 고고학>의 이야기인 <인류의 기원> 문제를 시작해본다.

2. 인간, 넌 어느 종에서 왔니?

인류의 기원을 논할 때, 종교적인 이야기와 신화적인 이야기로 같이 풀어나가려고 하면 졸지에 역사는 <소설>이 되고 만다. 예로, 인간은 <하느님>이 창조하셨어요... 첫째날 태양을 만드셨구요... 마지막 날은 쉬라고 하셨다나요...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에서 나왔습니다.... 로 마무리하면 간단하지만, 역사적으로는 설명이 안된다. 왜냐면 역사에서 다루는 기본은 <인간>이다. <인간의 본 모습>과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 구조>, <인간 개개인의 행동양식>, <인간에 대한 기본 인식> 등 인간에 대한 폭 넓은 영역을 다룬다. 또, <단군> 할아버지가 인간을 만드셨어요... 로 시작하면 좋겠지만, 이런 신화적 기원은 역사의 본 모습을 설명해주지 못한다. <신화> 역시 인간 자체를 출발점으로 하지 못한다. <신화>의 첫 출발은 신의 이야기이다. 유럽인의 기원을 <제우스 내지 그 이전의 티탄족, 또는 늑대들>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

그럼 인간 자체의 기원을 따지기 위해서는 어디서 출발해야 할까? 그것은 어쩔 수 없이 그것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것은 <과학>의 영역이지만, 역사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 어떤 학문도 유연하게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역사>는 홀로 고고하기 위해 등장한 학문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모든 사람의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인간>에 대한 학문이니까...

최초의 인류가 누구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몇백만년전의 <원숭이> 두개골을 놓고서 이게 인간일까, 원숭이일까... 이 인종이 어떤 방식으로 살았을까라는 고민은 전혀 답이 안나온다. 더군다나 어떤 인종을 놓고 그가 최초의 인류라고 우긴다고 해도, 과학이 발전하면 또 다른 유골이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원을 궁금해 한다. 지금까지 발견된 최초의 인류는 약 450만년 전 정도라고 알려진 <라마피테쿠스>이다. 라마피테쿠스는 G.E 루이스라는 학자가 1932년 발견한 유인원의 턱과 이빨뼈 화석에서 처음 등장하였다. 이후, 다양한 지역에서 이빨뼈가 나왔는데, 이 유인원의 이빨뼈가 원숭이보다 인간에 가깝다는 것이 최초의 인류라는 주장이었다. 또한 이 유인원이 직립보행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주장도 최초의 인류라는 설을 더욱 믿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유인원은 공식적으로 최초의 인류로 대접받지 못한다. 먼저, 인간으로 볼 수 있는 전신의 유골이 조합되어 나오지 못하였고, 이빨뼈의 유사함만으로 최초의 인류라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거기에 직립보행의 증거가 미약하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최초의 인류는 <루시>라고 불리는 여성 화석으로 <오스트랄로 피테쿠스>이다. 이 인류는 호모 사피엔스 계열의 후대 유인원과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으며, 직립 보행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최초의 인류로 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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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랄로 피테쿠스 - 아프리카누스(약 215만년전 유인원 : 미세스 플레스)의 두개골로 재현한 고인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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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직립 보행의 근거인 골반 구조이다.
침팬지와 인간을 놓고 보았을 때, 가운데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인간쪽에 훨씬 가깝다.
손과 발의 구조도 인간쪽에 가깝다.


영국 BBC 방송의 인류의 기원 4부작 중 1부의 앞부분 일부 <오스트랄로 피테쿠스>

   인류와 동물의 경계선에는 <직립 보행>이 자리잡고 있다. 직립 보행을 한다는 것은 4발이 아닌 2발로 다니게 됨을 의미하고, 2개의 손이 자유롭게 됨으로서 <도구>라는 것을 만들 수 있는 기본적인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반면, 기독교계가 우세한 미국 등 <창조론>을 일부 인정하는 사회에서는 직립보행이 인류의 기원이 될 수 없으며, 결국 원숭이는 원숭이로 진화했다는 증거를 내놓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논점은 <인류의 기원 문제>가 아니다. <인류의 기원>은 인류학과 종교학이 싸울 문제일 뿐 역사적인 관심이 아니다. 역사에서 관심을 갖는 것은 과연, 이러한 인류의 기원이 된 인종들이 <현재 우리의 조상>인가 하는 문제이다. 그런데, 인류학에서 내놓은 답은 간단하다. 현생인류가 아니라는 것.... 그럼 답은 나왔다. 오스트랄로가 인간이든, 원숭이이든 그가 지금 인류의 직접 조상이 아닌 이상 원숭이 이야기는 그만 하도록 하자.

3. 아시아 인종은 무엇으로 구분할 수 있을까?

자, 구석기인들이 우리 인류의 직계 조상이 아니라고 하니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 라고 하려고 했는데, 한국 역사학자들 중에서 구석기인이 우리 조상이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계신다. 연세대 교수님인 손보기 교수는 공주 석장리 유적을 발굴하여 한국사에서도 구석기가 있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증명하신 분이시다. 손보기 교수는 공주 석장리 유적에서 발굴된 황인종들이 몽골리안 계통의 황인으로서, 뼈와 이의 구조가 현재 한국인과 비슷하고, 머리카락 역시 황인종의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하여 구석기인이 우리의 직접 조상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였다. 그 이후, 구석기와 신석기를 연결하는 중석기 유적이 발굴되기 시작하면서 현재 구석기 시대 인종이 지금 인종과 비슷할 것이라는 설이 있지만, 아직 가설에 불과하다.

여기서 구석기인 타령은 그만두고, 그럼 아시아 인종은 어떻게 구별하는지 살펴보자. 일단, 구석기와 신석기 인들을 놓고 아시아인들을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구? 구석기인 자체가 현생 인류가 아닌데, 지금 지금 기준으로 인종 구분을 어떻게 하겠는가? 따라서 아시아 인종을 구분하는 것은 <문자>가 등장한 시기 이후로 보는 것이 타당한데, 그 기준은 <언어학적 기준>에 따르는 것이 정설이라고 한다. 비슷한 언어군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같은 문화를 공유했거나, 서로 문화를 주고 받는 관계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단, 서구 유럽의 인종 분류 기준은 <백인 우월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인종을 백인종, 황인종, 흑인종 등으로 단순 분류하고, 피부색과 머리카락 모양 등을 기준으로 인종을 구분하려고 한다. 특히 과거 미국같은 국가에서는 이것을 단순한 생물학적 기준을 넘어서서 <사회학적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였다. 특히, 백인 중 순수한 혈통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우월주의>는 타 인종의 구분을 일괄적으로 단순하게 평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시아의 인종은 너무나 다양하다. 같은 황인종도 우리가 보기에 카자흐스탄의 약간 흰 얼굴과 필리핀의 약간 검은 얼굴은 많은 차이가 난다. 그럼 한번 볼까?

우선, 아시아 인종 중 <중국 어족군>이 한 무리를 이룬다. 초기 사회에서 중국과 같은 언어계통을 가진 어족을 <차이나 어족>이라고 하는데, 이 어족은 중국을 중심으로 한다. 중국, 티베트, 미얀마, 타이, 베트남 등이 중국 어족군에 들어간다.

다음으로 우리가 속한 어족군은 <몽골 어족>이다. 보통 <우랄-알타이어계>라고 불리는 어족인데, 한국, 터키, 몽골 등이 이 어족권이 들어간다. 특히 초기 문화권에서는 고구려, 돌궐, 몽골 등 유목민족이나 기마 민족들이 이 어족권에 들어가며 상호 활발한 문화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마지막으로, 남부 섬 어족군이 있다. 보통 <오스트로네시아> 어족이라고 하는 이 어족군은 남방 섬의 어족군을 말한다. 필리핀과 대만,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이 여기에 속한다.

그러나, 언어학적으로 어족을 따져서 인종을 찾아내는 것은, 같은 인종이라는 증거가 아니라 초기 사회에서 상호 문화전파가 활발했다는 증거로 보아야 할 듯 싶다. 삼국시대 이후로는 오히려 중국 문화가 전반적으로 동아시아 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고, 각각 국가단위의 고유한 문화가 수립된 이후에는 인종이라는 것이 큰 의미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자, 그럼 쓸데없는 사족은 그만두고 실제 우리 역사로 들어가보자. 우리 역사 하면 일단 <단군>부터 시작해야겠다. 그런데, <단군>에 대한 개념은 어떻게 내려야할까? 실제 존재했을까? 상징적 의미일까? 아니면, 실제 역사와는 일치하지 않는 인물일까?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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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의 원류를 찾아 상세보기
최무장 지음 | 백산자료원 펴냄
우리문화의 원류를 다양한 측면에서 고찰한 책. 여러 신문과 학회지에 소개한 저자의 글들을 모아 엮었다. 고고학에 있어서 고토양의 중요성과 장래 연구방향, 1979년 전곡리 발굴 시작과 그 과정, 한국의 구석기시대와 문화 등 한국고고학의 제문제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풀어내고 있다. 1991년의 시베리아 여행기를 함께 수록하였다.
조선의구석기.신석기.청동기시대 상세보기
최택선 외 지음 | 민족문화 펴냄
한국사 2: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상세보기
편집부 편 지음 | 국사편찬위원회 펴냄
한국의 구석기문화 상세보기
최무장 지음 | 예문출판사 펴냄
한국사 2: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상세보기
편집부 편 지음 | 국사편찬위원회 펴냄
한국신석기문화 상세보기
임효재 지음 | 집문당 펴냄
세계에 통용되는 신석기 문화의 개념과는 달리 한국 신석기 문화의 개념이 어떻게 정의되어 사용되는가에서 출발해 고고학이 생기기까지의 과정을 살핀 연구서. 신석기문화의 각 지역별 특성과 각 지역간의 시기적 상호비교를 통한 한국 신석기문화의 특징을 고찰했다.
한국의 구석기 상세보기
연세대학교박물관 편 지음 | 연세대학교출판부 펴냄
한국의 구석기를 수록한 사진첩. 한강유역의 구석기유적과 유물을 비롯하여 금강유역, 영산강유역, 섬진강과 보성강 유역, 낙동강과 남강 유역, 마지막으로 동해안 지역의 구석기유적과 유물의 화보를 수록했다.
구석기 시대 흥수 아이(역사스페셜 작가들이 쓴 이야기 한국사) 상세보기
권기경 지음 | 한솔수북(한솔교육) 펴냄
선사 시대부터 대한제국에 이르는 우리 역사 대장정! 『역사스페셜 작가들이 쓴 이야기 한국사』시리즈 제1권《한반도의 첫 사람 - 구석기 시대 흥수 아이》. 본 시리즈는 KBS-1TV <역사 스페셜>의 작가들이 집필한 어린이용 역사서입니다. 권당 약 60 페이지로, 각 시대에 알아야 할 정보를 알차게 담아냈습니다. 1권에서 주인공 욱이는 친구들과 발견한 동물로 들어갔다가, 구석기 시대로 떨어집니다. 그 곳에서 흥수
화석환경학과 한국 구석기시대의 동물화석 상세보기
조태섭 지음 | 혜안 펴냄
화석환경학과 한국 구석기시대의 동물화석을 연구한 책. 제1부에서는 1980년대부터 일기 시작한 화석환경학의 역사적 배경과 정의를 살펴보았다. 제2부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출토되는 구석기시대 동물화석을 분석 연구하였다. 제3부에서는 지금까지 이루어진 구석기시대 동물화석의 연구 현황을 살펴보고 앞으로의 전망을 간단하게 정리하였다.

카툰국사 (상)(선사시대)(미리 끝내는 중학교 만화 교과서) 상세보기
편집부 지음 | 어진출판 펴냄
미리 끝내는 중학교 만화 교과서『카툰국사 (상)(선사시대)』. 이 책은 7차 중등 교과 전 과정을 쉬운 그림으로 설명한 만화 교과서이다. 중요한 단어, 어려운 단어는 첨삭식으로 해설하여 설명을 도왔으며, 다양한 자료를 통해 쉽게 정리,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선사시대에는 어떻게 살았을까(나나의 첫 지식여행 6) 상세보기
로랑 사바티에 지음 | 큰북작은북 펴냄
나나와 함께 지식여행을 떠나 보세요~! 『나나의 첫 지식여행』시리즈 제6권《선사시대에는 어떻게 살았을까?》. 본 시리즈는 생활 이야기와 과학적인 정보가 함께 담겨 있는 정보 그림책으로, 다양한 사진과 그림을 어린이가 보기 좋게 편집했다. 6권 <선사시대에는 어떻게 살았을까?>에서 나나네 가족은 선사시대 박물관에 놀러 간다. 그 곳에서 유적을 발굴하고 있는 고고학자를 만나, 선사시대의 사람들이 어떻게 생
선사시대의 연구동향 상세보기
백산학회 지음 | 백산자료원 펴냄
백산학회의 논문집 <선사시대의 연구동향>. '선사시대의 연구동향'을 담은 백산학회 회원들의 논문을 수록하였다.
알리의 한국사 대탐험. 1: 원시 사회와 고조선 상세보기
우리역사연구회 지음 | 철인북스 펴냄
『알리의 한국사 대탐험』시리즈 제1권《원시 사회와 고조선》. 본 시리즈는 우리 나라 역사를 재미나게 소개하는 학습 만화입니다. 각 권은 초ㆍ중ㆍ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내용을 바탕으로, 흥미롭게 읽을 수 있도록 구성했습니다. 마법의 리모컨 알리와 함께 신나는 역사 여행을 떠나 보세요~!
잊혀진 조상의 그림자: 인류의 본질과 기원에 대하여(사이언스 클래식13) 상세보기
칼 세이건 지음 | 사이언스북스 펴냄
광대한 우주 속의 천애 고아 인류,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사이언스 클래식』13권《잊혀진 조상의 그림자》. 이 책은 세계적인 천문학자 칼 세이건과 그의 아내이자 과학 다큐멘터리 제작자인 앤 드루얀이 함께 쓴 것으로 인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내용을 담았다. 《잊혀진 조상의 그림자》는 오랫동안 종교와 과학적으로 고민한 인간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를 과학적 버전으로 답하여 정리한 것으로 우주론
위대한 주제(타임라이프 신화와 인류 시리즈 1)(양장본) 상세보기
타임라이프 편집부 지음 | 이레 펴냄
인간 삶의 정신적 토대를 제공하는 신화 인류의 문화적 원형인 신화를 본격적으로 재조명한 신화 탐구서『타임라이프 신화와 인류 시리즈』. 총 10권으로 기획된 시리즈로, 타임라이프 사의 권위 있는 집필진이 인류의 지혜가 담겨 있는 세계 여러 나라의 신화를 온전한 모습으로 소개한다. 다채롭고 풍부한 사진 자료를 함께 수록하여 생생함을 더했다. 이 시리즈는 각 문명의 핵심에 자리하고 있는 기이한 설화와 신비로운
인류의 조상을 찾아서(양장본) 상세보기
스펜서 웰스 지음 | 말글빛냄 펴냄
제노그래픽 프로젝트, 인류 탄생의 베일을 벗기다 문화적 대규모 멸종을 겪고 있는 지금, 인류의 이동 경로 추적을 위한 제노그래픽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2005년 출범한 이 프로젝트는 2010년까지 세계 각지에 살고 있는 현대인 10만 명의 유전자 샘플을 분석해 인류의 기원을 찾는 것이 목표이며, 초기 인류의 이동 경로를 밝히는 것을 주요 과제로 삼았다. 제노그래픽 프로젝트는 과학적 탐구, 즉 한 종으로서 인류가 공유
인류의 기원:화석 인류를 찾아서(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44) 상세보기
에르베르 토마 지음 | 시공사 펴냄
시공디스커버리 총서 44. 최초의 인류는 어디에서 생 성된 것일까, 아직까지도 과학사의 미제로 남아있는 인류의 시초를 탐구한 책. 태초의 인간, 우리 조상의 조상, 호모 에렉투스의 기나긴 여정, 네르데르탈에서 라스코까지를 원색의 사진, 삽화와 함께 설명했다.
인류의 기원과 진화 상세보기
박선주 지음 | 충북대학교출판부 펴냄
고인류학에 대한 용어설명을 시작으로 인류는 어디에 서 어떻게 출발했으며 어떤 진화과정을 거쳤는가를 설명한 전공서. 영장류,인류의 진화,고인류의 문화와 삶등 6개 장으로 나눠 삽화와 함께 설명했다.
인류의 기원(사이언스 마스터스 4) 상세보기
리처드 리키 지음 | 사이언스북스 펴냄
전세계 26개국에서 번역, 출간되고 있는 세계적인 과학 교양서 시리즈 '사이언스 마스터스' 1차분. 사이언스 마스터스 시리즈는 대우주를 다루는 천문학에서 인간이라는 소우주의 핵심으로 파고드는 뇌과학에 이르기까지 과학계에서 뜨거운 논쟁을 일으키는 주제들과 기초 과학의 핵심 지식을 알기 쉽게 소개하고 있으며 유명 과학 관련 저자들이 직접 저술에 참여했다. <인류의 기원>에서는 '투르카나 소년'이라고 이름 붙
인류의 조상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상세보기
안느마리 바콩 외 지음 | 물구나무 펴냄
인류의 조상을 찾아서(양장본) 상세보기
스펜서 웰스 지음 | 말글빛냄 펴냄
제노그래픽 프로젝트, 인류 탄생의 베일을 벗기다 문화적 대규모 멸종을 겪고 있는 지금, 인류의 이동 경로 추적을 위한 제노그래픽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2005년 출범한 이 프로젝트는 2010년까지 세계 각지에 살고 있는 현대인 10만 명의 유전자 샘플을 분석해 인류의 기원을 찾는 것이 목표이며, 초기 인류의 이동 경로를 밝히는 것을 주요 과제로 삼았다. 제노그래픽 프로젝트는 과학적 탐구, 즉 한 종으로서 인류가 공유
네 발에서 두 발로 인류의 조상(어린이 디스커버리 4) 상세보기
마거릿 하인스 지음 | 시공주니어 펴냄
먼 옛날 우리 조상들의 삶에 대해 알아 볼 수 있는 입문서. 최초의 사람은 누구였고, 어디에서 살았으며 왜 네안데르탈 인은 모두 죽고 말았는지, 또 최초의 도시와 문자는 어디서 생겨났는지 등에 대한 답을 그림과 글로 설명했다. 지구의 생성과 인류의 기원에서부터 생물, 우주 개척까지 아우르는 폭넓은 지식의 세계를 담고 있는 지식책『어린이 디스커버리』시리즈의 제4권.
한국구석기학 연구의 길잡이 상세보기
손보기 지음 | 연세대학교출판부 펴냄
석장리 선사유적 상세보기
손보기 지음 | 동아출판사 펴냄
우리나라 구석기에서 중석기까지의 역사를 보여주는 충남 공주군 금강유역 석장리 유적을 사진 중심으로 면밀히 검토한 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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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 H I S T O R I A > 
역사적으로 본... <자유주의>와 <평등주의>의 길고 긴 대립과정

이 이야기에 나온 역사적인 이야기들과 법, 제도, 인물 등은  모두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글은 자유주의와 평등주의라는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해당되는 입장의 내용들만으로 씌여진 것이라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프랑스 혁명 : 자유부터인가, 평등부터인가...

서구 역사가들은 근대 민주주의의 기원을 프랑스 혁명에서부터 찾곤 한다. 우리는 프랑스 혁명하면 <자유와 평등>을 떠올린다. 그런데, 프랑스 혁명에서 한가지 알아두어야 할 사실이 있다. 실제, 근대 유럽의 자유와 평등은 전혀 같은 말이 아니였다.

프랑스 혁명을 처음 일으킨 것은 <귀족>세력에 반발한 <부르조아> 계급이었다. 그들은 국민의회를 구성하고, 인권선언을 발표하여 자본가들의 <재산권>을 인정받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철저한 <자유주의>를 표방한 첫 번째 혁명은 실패하고 말았다. 국민의회의 자본가들은 1791년 샤플리에법을 만들어 <노동자>들의 파업을 억누르려 했고, 재산이 있는 자만이 투표할 수 있다는 헌법을 만들었다. 자본가들을 믿고 <자유주의 물결>에 동참한 대중들은 분노하기 시작한다.

1년 뒤, 민중들은 8월 봉기를 일으킨다. 민중들은 <자본가>들의 세상을 다시 부수고, 프랑스 제 1공화정(국민공회) 시대를 열었다. 자본가들을 위주로 하는 지롱드파를 몰아내고, 민중적이고 급진적인 자코뱅파가 정권을 잡았으며, 국왕인 루이 16세마저 사형에 처한다. 93년 헌법에서 지도자 로베스피에르는 재산권 위주의 헌법을 폐기하고 <생존권과 노동권>을 기준으로 하는 혁명적인 헌법을 다시 만든다. 또, 모든 사람이 직접 선거할 수 있는 <보통선거>제도를 만들었다.

그러나, <경제적 자유>를 주장하는 자본가들은 끊임없이 <평등파>와 대결하려 하였다. 로베스피에르는 <방토즈>법을 만들어 <재산가>들의 재산을 <혁명군과 애국시민>에게 분배하는 조치를 취한다. 서구의 근대사 최초로 <자유>가 <평등>에 의해 억압당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자본가들은 이 상황을 그대로 지켜보고 있지 않았다. <자유주의자>들에 의한 <테르미도르의 반동>이 일어난 것이다.  <자유파 의원>들은 반혁명을 일으켜 다시 <자유>의 가치를 높이려 하였다. 공포정치로 자유를 탄압한 평등주의자 로베스피에르는 죽었고, 부르조아지들은 다시 <재산권>을 최고의 기치로 삼게 되었다. 결국 프랑스 혁명은 <자유와 평등>이 대립했지만, 최후의 승자는 <자유주의>였다.

평등주의자들은 이 자유주의에 대한 반항을 계속하긴 하였다. 예로 1796년 혁명을 통하여 모두가 <평등>한 <공산주의적> 사회를 추구한 이도 있었다. 그가 바로 유명한 사회주의의 아버지 <바베프>이다. 그는 재산권 자체를 부정하고, <자유>는 <평등>의 적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총재정부를 타도하려는 그의 시도는 실패하였고, 자유주의자들은 그를 곧 바로 <사형> 시킨다. 그 이후 자유주의는 <절대적> 이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 자유주의는 <나폴레옹>이라는 독재자에 의해 완성되었다. 나폴레옹은 <몰락한 프랑스 경제의 부활>과 <혁명적 자유>를 인정한다는 발표로 <황제>에 오를 수 있었다. 나폴레옹이 현재 프랑스 국민들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심어준 가장 큰 이유는 이 것  때문이다. 그는 <위대한 영웅>이었지만, 오로지 혁명의 성과를 <자유>로만 규정한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자유주의 이념을 평등주의를 탄압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독재 이데올로기>로서의 <자유주의>말이다.

나폴레옹은 혁명의 성과인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부르조아지와 대토지 소유자>들의 권한을 인정하고, 그들을 프랑스의 위대한 국민이라고 광고하였다. 그리고 유럽 정복을 통하여 <재산권과 자유권>을 유럽 대부분에 전파하였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국민 대다수가 원하는 <평등주의>에는 관심이 없었다. 평등을 주장하는 언론은 바로 군부에 의한 <탄압>에 들어갔다. <나폴레옹 법전>은 위대한 법전으로서 법적인 평등과 신앙, 재산, 직업의 자유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그 법전의 모든 조항은 개인을 위한 자유보다는 <국가 시민으로서의 자유, 재산권을 가진 시민으로서의 자유>를 기본 바탕으로 하고 있다. 즉, 나폴레옹 시대의 이념은 <자유이념>이 모든 이념을 포괄하여 유럽에 전파된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초기 <자유주의 이념>이었고, 이 자유주의 이념은 유럽의 진보와 발전을 위한 최초의 이념이었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근원이 된 혁명에서부터 <자유>가 <평등>을 누르고 세상의 빛을 보았으며, 이 후 산업혁명과 근대화를 겪으면서 서구의 <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민주주의의 절대적 이념으로 부각되어 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때부터 <자유주의> 이념에 반기를 들고 노동자 계급의 <평등>이념을 부각하려는 시도는 수없이 시도되었다. 그러나, 그 연약한 시도들은 대부분 <자유라는 인간의 절대 기본권>에 반한다는 이유로 모두 좌절되었다. 또한, <자유주의>이념은 <자유주의적 고전 경제학>과 맞물려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절대적 지원사격을 받았다. 그 이후, 극단적인 <마르크스적 사회주의>에 이르는 <반자유투쟁>이 계속되었으나, 역사는 이러한 투쟁을 모두 실패로 기록하고 만다.

봉건귀족 세력의 역사적 역할 : 자유주의 이념에 반하는 <악마세력>들....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한 뒤, 유럽사회에서 <자유주의>는 금기어가 되었다. 유럽의 봉건 왕조들은 빈회의를 통해 혁명 이념인 <자유와 평등>을 철저하게 탄압하고, 전 유럽을 <보수화>하려고 하였다. 유럽의 왕실이 특히 주목한 것은 평등보다는 <자유>이념이었다. 왕실과 귀족세력은 산업혁명 등을 통해 성장하고 있던 <자본가> 계급을 가장 큰 적으로 보았으며, <자유주의>는 이들 자본가 계급의 무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로서 유럽의 <정통 왕실>과 성장하는 <자본가>들은 서로 적으로서 대립하는 구도를 만들게 되었다.

그럼 이 때 <지식인과 민중>은 누구 편을 들어야 했을까? 당시의 지식인들은 <평등주의>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독일, 프랑스, 영국의 대학생들은 <보수적 과거 세력>들인 왕실과 귀족에 대한 대대적인 규탄시위에 들어간다. 독일 대학생들은 부르센샤프트 운동을 벌였고, 나폴리에서는 카르보나리라는 비밀결사가 등장하였다.

그리고, 중세적 왕실 질서는 또 다시 프랑스에서 대대적으로 규탄에 들어간다. 나폴레옹 사후의 프랑스에서는 <자유주의>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시민계급과 자본가들이 크게 성장하고 있었으나, 정부는 의회를 해산해 버리는 등 자유주의를 탄압하였다. 티에르 등 <자유주의자>들은 <민중>과 연합하여 1830년 7월. 다시 혁명을 일으켰다. 그리고 성공하였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은 다시 <평등주의자>들을 버린다. 민중이 원한 평등선거는 없었고, 국민이 주인이 되는 공화정부도 없었다. 단지, 자본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에게 선거권을 조금 더 주었을 뿐이었다. 특히 노동자들은 <샤플리에법>에 의해 정치적 발언을 할 수조차 없었다.

결국, 자유주의자와 평등주의자들이 모두 적으로 여긴 봉건귀족은 이 둘의 연합으로 몰락하였다. 그러나, 자유주의는 평등주의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자유>의 가치가 <평등>의 가치보다 우선한다는 것이 당시의 생각이었다.

프랑스 공화정 : 계속된 자유주의와 평등주의의 대립

이 이야기는 유럽의 대표적인 혁명을 이끈 프랑스 혁명에 대한 이야기를 예로 들고 있다. 그러나, 당시 이러한 혁명은 프랑스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당시 유럽 각지에서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내걸고 일어난 혁명들은 무수히 많았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자유주의 혁명을 이끈 선구적인 혁명이 프랑스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예로 든 것이다.

7월 혁명으로 프랑스 민중은 또 다시 <평등>의 기치를 잃어 버렸다. 이 때부터 프랑스 민중들은 <민중이 참여할 수 있는 보통선거>를 요구하게 된다. <자유>가 어느 정도 정착되자 <평등>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유를 주장했던 학생들은 이제 농민의 편이 되어서 평등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리고 1948년 2월. 프랑스에서는 또 한 차례 혁명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혁명은 국왕 루이 필립을 폐위시키고, 민중이 주인이 되는 <공화정>을 다시 수립하게 만들었다. 로베스피에르의 프랑스 혁명 공화정에 이은 <제 2 공화정>이었다.

그러나, <제 2 공화정>은 <자유주의>와 극심한 마찰을 피할 수 없었다. 특히 <급진 평등파>들은 <자유주의>의 기본 이념인 <재산권>을 제한하려 하였고, 이것은 기득권을 가진 기존 <온건한 공화파>들 조차 놀라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러한 대립은 다시 극단의 혁명을 몰고왔다.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자들은 6월 봉기를 일으키고, <평등주의>의 완전한 실현을 주장하였다. 제 2 공화정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폭동은 불법이라면서 강하게 진압하였다. 그리고, 자유주의와 평등주의의 타협을 시도하기 시작한다. 공화정은 <단원제 의회와 대통령제도>를 실시하여 국민투표를 도입하였다.

그리고 <자유주의>에 대한 보완책으로 <민족주의>를 이용하기 시작한다. 자유주의자들은 노동자와 사회주의자들을 체제안으로 포섭해야 했다. 특히 <평등>을 주장하면서 <계급>적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국내 상황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그 결과 프랑스 혁명의 이념인 <자유, 평등, 우애>의 개념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민중과 민족>이라는 개념을 국민에게 제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민족>은 계급을 떠나 하나이다. 모든 계급의 통일체가 민족이고, 민족의 정부가 국민의 정부이다.

이 민족이라는 개념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이 바로 <나폴레옹 3세>이다. 그는 이 <민족>개념으로 국민들의 <냄비같은 마음>을 한번에 사로잡았다. 물론 노동자들은 계속적으로 평등을 요구했고, 게드의 프랑스 노동당이 창립되기도 하지만 나폴레옹의 강력한 리더쉽 앞에 <평등주의>는 <민족주의>라는 이념에 묻혀 버렸다.

영국 : 자유주의가 제국주의 이념으로 전환되다

프랑스와 함께 19세기 제국주의 시대를 이끌어갔던 영국의 <자유주의>는 무시할 수가 없다. 영국과 프랑스가 19세기 세계사적으로 미친 영향은 우리나라에까지 엄청난 파급력을 가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개화기부터 진행된 우리의 <자유주의, 제국주의, 민족주의> 이념은 프랑스, 영국, 러시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물론, 이들 나라의 문물을 먼저 수입한 청과 일본에 의한 것지만 말이다. 이건 다음 회에서 다루면 좋을 것 같다.

영국은 프랑스와 달리 철저한 <자유주의>를 표방하였다. 프랑스에서 일어난 수많은 혁명을 목격한 <조용한 섬나라>는 이미 의회를 장악하고 있던 젠트리들에게 수많은 권리를 주었다. 피 한방울 흘리지 않았다던 명예혁명 이후, 영국은 혁명이 아니라 조용한 타협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해나갔다.

영국은 산업혁명이 일어난 국가이다. 그만큼 자본가들에게 상대적으로 관대한 나라였다. 무론 의회 내에서 귀족과 자본가의 대립이 있었지만, 자본가 위주의 휘그당은 <자유당>으로 명칭까지 개편하면서 <자유주의 체제>를 구축해 나갔다. 귀족들은 <보수당>에 집결하여 정당정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19세기 영국은 곡물법을 폐기한다던가, 항해조례를 폐기하면서 자본가들이 해외무역을 마음껏 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물론 영국의 노동자들도,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관철시키려는 노력이 있었다. 19세기 차티스트 운동은 노동자들의 권익을 주장한 운동이었다. 그러나 <자유>의 이념은 <평등>이념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영국 노동자들이 산업자본가와 같은 권리를 차츰 인정받게 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이다. 또 하나, 유럽 어느 나라이든 19세기 <여성의 평등>을 거론한 나라는 없다. 여성에게 똑같은 보통선거를 준 것은 선진적인 영국도 <20세기> 들어와서이다.

이러한 영국의 자유주의적 발전은 <자유주의 만능 이념>을 발전시키게 된다. 특히 자본가들의 <자유>를 철저하게 인정했던 분야가 바로 애덤스미스로 대표되는 <경제학> 분야이다. 애덤스미스는 국가가 국민의 자유에 절대 간섭하면 안된다는 이론을 주장하면서, 모든 것은 <가격>이 알아서 결정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멜더스는 인구론에서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데,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이론을 내 놓는다. 그런데, 그 해결책은 간단하다. <자유>는 주되, <평등>은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자의 빈곤은 노동자 책임이므로 모두가 똑같은 권리를 누릴 수는 없다. 빈민촌에는 소독도 해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자유주의자>들의 이론이었다.

이것을 이데올로기로 정립한 사람은 <스펜서>이다. 스펜서는 이 모든 이론을 <사회진화론>으로 정립시켰고, 유럽인들은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다. <사회진화론>이란, 다윈의 진화론을 사회학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사자가 양을 잡아먹는 것은 먹이사슬에 의한 정당한 행위이다. 사자는 강하고, 양은 약하다. 사자는 육식동물이고 양은 초식동물이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이다. 이것을 사회 법칙에 대응하면?

노동자는 가난한데 그것은 유전자가 불량하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빈곤할 수밖에 없다. 멘델의 유전의 법칙에 의하면 열성은 도태되어야 한다.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가 가난할 수밖에 없는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경제학자 리카도는 한가지 증명까지 시도하였다. 그것이 유명한 <임금의 철칙>이라는 고전 경제학의 성경이다. 경제는 지대, 이윤, 임금의 3가지로 유지되는데 지대가 커지면 임금이 줄어든다. 노동력이 늘어나면 임금은 그만큼 준다. 노동력이 없다는 것은 수요가 없다는 것이므로 노동자의 임금이 늘어날 수 없다. 결국 노동자는 항상 굶어죽지 않을 만큼의 임금을 받을 수밖에 없다. 결국.... 가난은 극복할 수 없는 사회적 운명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 진화론을 국가간에 대입하면 이렇게 된다. 약한 나라는 강한 나라에 점령당할 수밖에 없다. 강한 나라는 먹이감을 구하고, 자국의 문제를 해결한 탈출구로 해외 시장을 개척하거나 식민지를 만둘 수밖에 없다. 강한 나라가 나빠서가 아니라 자연의 법칙과 같은 <사회적 법칙>일 뿐이다. 따라서 제국주의 사상은 윤리나 도덕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상이 아니라 <사회적 당위성>으로 설명해야할 사상이다. 약한 나라는 강한나라를 원망할 것이 아니라 힘을 키워서 사자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약자의 변명은 사회 속에서 통하지 않는다.

이로서 참신한 혁명 이념이었던 <자유주의>는 타락과 협상을 거쳐 다양한 사상과 연결된 결과, <제국주의>의 호수까지 흘러들어가 버린 것이다. 우리는 이 제국주의를 부정했을까? 그렇지 않았다. 개화기에는 <근대 사상과 근대 문물>을 받아들인다는 생각으로 <자유주의>를 수용하였고, 그 결과 개화기 지식인들은 <제국주의>도 수용하였다. 김옥균이 갑신정변을 일으킨 이유는 <자유주의>를 받아들여 우리 역시 강력한 <제국주의>국가로 거듭나서 <제국주의로 제국주의를 물리친다>는 이이제이의 원칙을 실현하고자 했던 것이었다. 민족주의자인 신채호 선생도 초기에는 제국주의가 필요하다고 말하였고, 실제로도 일제시대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초기에는 <제국주의적인 군사실력 양성>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자유에 대한 <평등주의>의 반격...

사회진화론까지 나아간 <극단적 자유주의>에 대하여 <평등주의>자들은 수많은 반격을 하고, 저항을 하였다. 프랑스 혁명의 자코뱅 이념을 계승한 이들은 중산계급의 하층민을 <중산층>으로 끌어올리면 어느 정도 평등을 이룰 수 있다는 <평등주의적 급진주의>를 주장하였다. 생시몽과 같은 이들은 폭력혁명이 아닌 대화와 설득으로 자본가와 협력하여 타협을 이끌어내자는 <공상적 사회주의>를 주장하였다.

푸리에는 한발 나아가 현존 제도를 모두 버리고, 심지어 결혼조차 부정하면서 성적인 자유까지 주장하였다. 여기서 더 나아간 사람들은 <무정부주의>라는 새로운 이상향을 생각하게 된다. 무정부주의는 <자유>를 지키기 위한 국가 권력은 모두 <평등>을 억압한다고 본다. 경찰, 군대, 학교, 법원 등은 <자유주의>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이들 도구는 <평등>을 옹호하지 않는다. 결국 이들의 결론은 <국가의 완전 소멸>이 평등을 준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무정부주의자 프루동은 국가를 없애고 노동자들이 개별적으로 생산수단을 가진 뒤 자본가로부터 착취당하는 일이 없는 평등한 노동의 세상을 말하였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직접 코뮌(자치집단)을 만드는 것이 <평등>사회의 첫걸음이라고 말한다. 더 나가 러시아의 바쿠닌은 아예 폭력 혁명으로 모든 것을 부수자고 말하기도 한다. 크로포티긴은 바쿠닌의 사상을 계승하여 모든 것의 파괴는 새로운 창조를 가져온다고 말하고, 그 새로운 세상은 <평등>에 입각한 공산주의 사회가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 크로포트긴의 사상을 계승하여 일본 제국주의를 부수고 민족의 평등을 이루자고 주장한 사람이 바로 <신채호> 선생이다.

독일의 비스마르크 자유주의와 마르크스 주의의 대립

독일의 자유주의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비스마르크이다. 비스마르크는 철저한 <민족주의>를 내세워 국가 통일과 자본가 계층의 자본주의를 옹호하였지만, <평등주의>에 대해서는 철저한 반대입장이었다. 비스마르크는 <반사회주의법>을 발표하여 평등주의자들의 모든 활동을 전면 금지시켰다. 그 이유는 독일의 현실 때문이다. 독일은 비스마르크에 의해 통일 된 이후 동독일의 토지귀족(융커)들과 서독일의 산업자본가에 의해 운영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더 철저한 단결을 주장하게 된다. 마르크스 주의자들의 <평등 개념>은 이렇다.

세상은 불평등하다. 누군가 평등함을 추구하면, 누군가는 그것을 또 깨드린다. 헤겔은 정-반-합이라는 변증법을 제시했는데, 이것은 현 사회의 모습과 일치한다. 단, 이 변증법은 철학적 개념이 아닌 실제 노동자들의 삶과 관련되어야 한다. 따라서 현재의 부조리한 세상을 <평등>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계급투쟁>이 필요하다.

그런데 계급투쟁을 하려면 대상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경제적 생산력>을 기준으로 한다. 사회발전의 원동력인 하부구조는 경제력인데, 상부구조인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는 그것을 독식한다. 역사는 그러한 모순(정)에 대한 투쟁(반)이었으며, 그 투쟁은 항상 새로운 결과(합)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역사는 발전하였지만, 아직도 평등하지 않다. 진정한 평등은 자유주의(자본주의 : 정)에 대한 평등주의(반)의 투쟁으로 새로운 세상(공산주의 : 합)을 만드는 것이다.

마르크스 주의자들은 혁명의 주체인 빈민층(프롤레타리아)의 단결을 위해 제 1, 2 인터네셔널을 만들었고 이 국제 평등기구에는 독일계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들은 바로 각국에서 혁명을 일으키는 것보다 <의회>에 진출하여 <자본주의>가 붕괴될 대를 기다리자는 이념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세계적 기구로 단결하여 훗날 세계 공산주의자들에게 지침을 내리는 기구로 탈바꿈하게 된다. 1차 대전 후 러시아에 공산주의 국가가 성립됨으로서 이들은 해산하였다.

프랑스.... 왕정과 공화정의 반복 : 자유주의와 평등주의의 대립

프랑스는 제 2공화정이 몰락하면서 나폴레옹 3세가 다시 <자유주의적 가치>를 들고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내세운 것은 진정한 <자유주의>가 아니다. 노동자들의 <평등>요구로 기득권과 자본가들이 <재산권>을 빼앗긴다는 우려를 했기 때문에 <자유주의>에 대한 열망이 높았고, 나폴레옹은 그것을 이용한 것이다. 나폴레옹은 신헌법을 만들었는데, 그 내용은 독재권을 용인한다는 것이었다. 노동자를 탄압하고, 학교에서 정치교육을 할 수 있다는 것이 헌법의 큰 줄기였다. 나폴레옹 3세는 기득권을 위한 <쇼>를 많이한다. <자유주의>의 옹호자라는 말을 듣기 위해 은행설립, 철도 건설, 중공업 산업 육성 계획을 세워 자본주의 국가라는 타이틀을 획득하였다. 특히 파리시를 아름다운 도시로 만들기 위한 정책을 내놓기도 하였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불만은 많았다. 나폴레옹이 실시한 노동자를 위한 <평등> 정책은 실업자 구제책이었다. 실업자가 늘면 사회 불만 세력이 되고, 그들은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설지 모른다. 따라서 나폴레옹은 평등이란 말 대신 <민족의 영광>이란 말로 모든 국민이 단결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반 민중들은 점차 불만이 많아졌다. <민족>을 주장하면서도 결국 <부르조아>를 위한 정책이 쏟아져나왔기 때문이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한 나폴레옹의 정책은 간단하였다. 나폴레옹을 소개하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자유주의적 발전 정책에 불만을 품은 <민중>을 달래는 가장 확실한 방법... 그것은 전쟁이었다. 지금이야 월드컵과 같은 스포츠, 영화, 연예인 등으로 국민들의 관심을 돌릴 수 있지만, 이 당시의 확실한 방법은 바로 전쟁이다.

나폴레옹 3세가 국민들에게 전쟁의 이유를 설명한 것을 보면 명확해진다. 바로 <국민적 영광>을 위해 전쟁을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크림전쟁, 이탈리아 통일 전쟁(샤르데냐 전쟁), 멕시코 원정, 오스트리아 전쟁 등 도대체 왜 하고 있는지도 불명확한 전쟁을 수많은 이유를 들어 시도하였다. 그러나, 독일 통일 전쟁(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비스마르크의 농간으로 패함으로서 <국민적 영광>은 상처로 돌아왔고, 국민들은 그를 더 이상 지지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역사적인 <파리 자치정부>가 추진된다. 급진적인 자코뱅주의자, 프루동의 무정부주의자, 블랑키 주의자들은 <평등주의>의 이념을 내세우면서 연합하였고, 파리에 <노동자 정부>를 수립하였다고 선언한다.  그들이 진정 원한 건 혁명 자체가 아니였다. 그들은 자유주의에서 <평등주의>로 국가정책을 전환해 줄 것을 요구하면서 정부를 설립한 것이다. 그러나 국가는 그들을 탄압하기 시작한다. 이것을 <피의 일요일 전투>라고 역사는 부른다. 자치정부군은 목숨을 걸고 처절하게 항쟁하였다. 국가는 그들을 잡아 바로 바로 총살시켰고, 시위는 계속되었다. 정부는 죽이지 못한 이들을 파리 시내에 가뒤 굶겨 죽였다. 쥐를 잡아먹으며 항쟁했던 <자치정부>의 모든 이들은 엄청난 박해로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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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2부에서 다룰 이야기 : 사회주의의 성장 드레퓌스 사건, 카톨릭 세력과 자유주의의 관계, 미국노예해방은 자유주의인가 평등주의인가, 러시아의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자유주의를 버린 제국주의, 세계대전 중 평등사상, 히틀러와 자유주의, 냉전시대와 평등주의, 신자유주의 사상의 등장배경과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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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간략한 역사(양장본) 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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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의 역사를 살펴보는 책. 신자유주의는 강력한 사적 소유권, 자유 시장, 자유무역의 특징을 갖는 제도적 틀 내에서 개인의 자유 및 기능을 해방시킴으로써 인간 복지가 가장 잘 개선될 수 있으며, 국가의 역할은 이러한 실행에 적합한 제도적 틀을 창출하고 보호하는 데 있다고 제안하는 정치적ㆍ경제적 실행에 관한 이론이다. 이 책은 세계적 담론과 정책을 주도하는 핵심 용어가 된 신자유주의의 의미를 알아본다.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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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전 항소이유서에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를 인용해 사회적 반향을 일으킨 저자의 정치문화 에세이. '이 땅에서 자유주의자로 산다는 것은', '나는 국론통일이 싫다', '한국적 자유주의의 비극' 등 45여 편을 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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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동진 지음 | 동명사 펴냄
정치의 본질을 다룬 정치철학서. 정치철학의 정의부터 분배의 정의와 평등, 국제사회 정의에 관한 모색 방안 및 자유주의와 한국정치에 관한 내용까지 담았다. 지난 10년간 학술지 및 학회나 학술회의에서 발표했던 논문을 중심으로 자유주의 정치철학에 대한 이해와 일부 현대정치 이론가들의 이론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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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식 지음 | 철학과현실사 펴냄
'자유주의는 진화하고 있는가'란 물음에 깊이 있게 고찰해 본『자유주의는 진화하는가』. 자유민주 이념에 바탕을 둔 교육을 받아 왔고 철학공부를 한 저자는 롤즈의『정의론』을 접하게 되면서 잠재의식적 자유정신을 의식화하고 자유주의를 향한 사회경제적 인프라를 각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책에 자신이 나름대로 구상해 온 자유주의적 입장에 대해 총 5부로 나누어 마음껏 이야기한다. 1부에서는 자유주의와 그 적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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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과 베르트랑 바래르 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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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 민주시대의 새로운 장을 연 프랑스 대혁명을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혁명의 추진자 겸 관찰자 역 할을 했던 베르트랑 바래르의 활동과 증언을 통해 살 핀 책. 혁명 이전 새로운 사상의 흐름과 베르트랑, 자코뱅 시대, 테르미도르 사건 등 6개 장으로 설명했다.

자유주의적 평등(한길그레이트북스 73) 상세보기
로널드 드워킨 지음 | 한길사 펴냄
로널드 드워킨의『Sovereign Virtue』를 번역한 책. 미국의 롤스 이후 대표적인 자유주의 정치철학자로 인정받고 있는 드워킨은 이 책을 통해, 자유주의 평등에 적대적이라고 생각하는 통념과는 달리 오히려 평등권이 가장 기본적인 권리라고 주장한다. 구좌파가 지나친 평등을 추구했다는 기존의 비판과는 달리, 오히려 구좌파가 추구하였던 평등은 진정한 평등이 아니라는 점을 비판하고 있다. 저자는 지금까지 현대 정치철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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