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의 위력 : 역사를 바꾼 한 표들

 

한 표가 뒤바꾼 역사

 

우리 나라는 '투표합시다' 하는 날은 놀러가는 날, 쉬는 날, 또는 직장이 바빠서 나랑 상관없는 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최근 얼마전 대통령 선거를 제외하고는 투표율이 60%를 넘기는 경우가 많지 않거든요.

 

그러나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제도를 완성하기 위해 피눈물나는 투쟁을 했거나, 1표의 차이로 역사가 바뀐 전례가 있다면, 투표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고 있겠죠? 선거 제도를 처음 도입한 선진국들은 1표의 소중함을 역사 속에서 배웠답니다.  물론 지금은 국민직선제이지만 백년전만 해도 대부분이 간접 선거 방식이거나, 여성 또는 노동자를 제외한 투표이기는 했지만 말이죠.

 

그럼 지금부터 역사를 바꾼 투표들, 특히 1표를 살펴볼까요?

 

 

먼저, 민중들이 한 표를 행사하기 위해 처절하게 투쟁했던 프랑스!!! 대혁명의 국가이죠.

 

프랑스 대혁명 때 국왕 루이 16세와 왕비 앙투와네트는 오빠가 황제로 있는 오스트리아에게 군사파견의 밀서를 보냈습니다. 프랑스 혁명군은 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열세를 보였는데, 그 이유는 왕비가 적군에게 프랑스 전력을 알려주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혁명기 과격파인 자코뱅파는 국왕 일가를 모두 사형시키자는 안건을 투표에 부쳤습니다. 그러나 내통의 결정적 증거가 없어서 투표 전날까지 국왕이 사형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우세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 문서가 투표 전날 발견되었죠. 721명이 참여한 투표에서 334대 387로 사형 선고가 내려졌습니다. 당시 자코뱅파와 지롱드파의 숫자가 비슷한 것으로 미루어 하루 차이가 프랑스 역사를 바꾼 것이죠.

 

최초로 사형을 당한 루이 16세는 민중이 아버지인 '국왕'을 사형시키는 비윤리적인 만행을 허용한 투표제도가 프랑스를 망칠 것이라고 했지만, 프랑스의 투표 사례는 전세계 민주주의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이후, 프랑스는 왕국을 계속할 것이냐, 공화국을 할 것이냐를 놓고 1875년, 투표가 시행되었습니다. 이 선거는 프랑스의 국가형태를 결정하는 중요한 투표였습니다. 당시 왕당파와 공화파의 국회의원은 똑같이 353명이었답니다. 투표 결과는 알 수 없겠죠?

 

그러나 막상 당일.... 왕당파 의원 한명이 급성 복통으로 투표에 불참하게 되면서 1표 차이로 공화파가 이겼답니다. 제국주의 시대부터 1, 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프랑스를 이끌었던 제 3 공화국은 이렇게 탄생했답니다. 반면, 1940년에 3 공화국이 몰락한 것도 1표 차이었습니다. 공화당 의원 중 한명이 점점 우월의식에 빠진 공화당에 반기를 들면서 1표 차이로 공화당이 몰락했거든요.

 

 

이제 영국의 경우를 볼까요?

 

투표제도를 전세계에 확산시킨 영국... 영국 역사 역시 1표 차이로 운명이 바뀐 경우가 많았답니다.

 

1645년. 영국은 청교도인이었던 크롬웰이 독재관이 되어 정권을 잡았습니다. 대대로 왕정이었던 영국에서 의회대표가 독재권력을 잡은 일은 충격적이었지요. 크롬웰은 이후 항해조례와 같은 법령으로 북유럽에 자신의 업적과 이름을 남기게 됩니다. 또, 크롬웰의 독재를 참지 못한 개신교도들이 신대륙으로 이주해 미국 동부연안 등을 개척하게 되면서 북미의 서부개척시대도 시작된답니다.

 

이렇게 역사에 이름을 남긴 크롬웰의 등장은 극적이었습니다. 성공회와 카톨릭, 청교도, 개신교 등 종교가 다양했던 영국 의회는 크롬웰을 영국 총사령관으로 임명할 지 치열한 논의끝에 투표를 시작했습니다. 투표결과는 91대 90... 한표 차이로 크롬웰이 임명되었고, 영국과 유럽, 미국의 역사가 바뀐 것이지요.

 

크롬웰은 1표 차이의 신임을 토대로 국왕인 찰스 1세를 처형하고, 영국을 공화정으로 바꿔 버립니다. 또 영국이 해외진출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죠. 단지 청교도를 너무 좋아해서 영국 전역을 수도원처럼 만들었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술도, 담배도, 자유연애도 엄격히 금지하는 그의 성향 때문에 영국인들은 감옥같은 세월을 보냈으니 말이죠.

 

 

결국, 영국의회는 크롬웰을 추방했습니다. 그리고 급히 독일에서 왕실의 후손인 하누버를 데려와 영국의 왕으로 삼고 영국 왕가를 다시 살리려고 했답니다. 그러나, 아무리 왕실재건이 급해도 독일핏줄이 섞인 영국인을 왕으로 삼기는 무리겠죠? 영국의회는 독일인 등 타지역 사람들도 영국에서 살 수 있다는 '주거법'을 급히 만들어 투표를 실시하였습니다. 대부분 영국인들은 반대했지만, 주거지가 다른 웨일즈, 스코틀랜드 등 다른 지역 의원들은 주거법을 좋아했지요.

 

이 투표는 영국본토 국회의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타지역 출신 국회의원들의 전폭적인 지지 때문에 1표 차이로 통과되었습니다. 그래서 18세기 영국 하노버 왕조가 탄생하면서 영국 왕실의 전통이 이어진 것이지요.

 

1표 차이로 만들어진 이 주거법은 영국 왕실 뿐 아니라 영국 본토(잉글랜드) 외의 타주민들이 영국인들과의 지역 차별을 없애는 1등 공신이 되었답니다. 뭐, 왕도 수입하는데 노동자 이주 쯤이야 문제도 안되는 일이 된거죠.

 

이제.... 민주주의의 지킴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미국의 경우를 한번 볼까요?

 

미국의 초기 역사는 극적인 한표로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초창기, 미국 대통령을 뽑는 하원의원 선거에 토머스 제퍼슨이 후보로 나왔습니다. 제퍼슨은 미국 독립선언서 초안을 잡고, 미국의 행정 제도를 구상한  유명한 대통령이죠? 그는 강력한 후보인 아론 버르 후보를 단 1표차이로 이겼답니다.

 

미국 역시 초창기에는 상원, 하원 국회의원들이 간접투표로 중요안건이 결정되었습니다. 아직 국민투표도 없었고, 여성이나 노동자, 흑인은 지역대표를 뽑는 일조차 참여할 수 없었답니다. 따라서 100~300명이 투표했던 미국의 간접선거에서는 유독 1표차이의 결과가 많답니다.

 

잭슨 대톨령, 루서포드 대통령, 루즈벨트 대통령, 코픈비 대통령 등 많은 대통령들이 한표차이로 대통령이 되거나, 동점 상황에서 캐스팅보트를 쥔 국회의장의 결정으로 대통령이 되었답니다.

 

대통령 뿐 아니라 미국의 50개 주도 1표 차이로 운명이 갈렸습니다.

 

1843년. 미국인들은 서부개척으로 얻은 워싱턴, 오리건, 아이다호를 미국의 주로 편입시킬 것이냐, 독자적인 지역으로 분류할 것이냐를 놓고 치열하게 공방전을 벌였습니다. 사유재산을 주장하는 이들은 개척으로 얻은 땅은 독립적인 지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반면, 미국을 하나의 연방으로 세울 것을 주장하면서 올-아메리카로 편입해야 한다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관련 국회의원들이 참여한 투표는 51:51로 팽팽했고, 미국의 운명을 가를 시간을 계속 지나고 있었습니다. 끝없는 토론 끝에 결국 상원의원 마티유가 찬성표로 돌아서면서 워싱턴은 미국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남부의 텍사스도 마찬가지랍니다. 당시 텍사스 국회의원들은 26:26으로 텍사스의 미국 편입 찬반이 팽팽했습니다. 끝없는 토론이 계속되면서 미국 남부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랐답니다. 결국 헤네가라는 상원의원이 편입 찬성으로 돌아서면서 텍사스도 1표차로 미국 영토가 되었습니다.

 

 

자, 이제 미국 뿐 아니라 전세계의 운명을 바꾼 1표를 알아볼까요?

 

1939년, 세계 2차대전이 발발하면서 미국은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 군국주의 국가와의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필요한 병력을 의무적으로 징병해서 군인으로 활용할 수 있는 '징병제도법'을 만들었답니다. 그러나, 징병법은 임시법이었습니다. 본토가 공격당한 것도 아니고, 원한다면 미국은 전쟁에서 빠지면 되거든요. 세계평화를 위한다는 목적으로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끝없이 내몰 수는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세계 2차대전은 끝날 기미가 없었습니다. 1941년 8월. 미국은 징병제도법을 연장할 것이냐, 끝낼 것이냐를 놓고 전체 연방 의원들과 각 주의 대표들이 모여 투표를 했습니다. 전쟁과 관련이 없었던 주에서는 징병을 반대했고, 미국 참전의 필요성을 인식한 주에서는 징병법 연장에 찬성했습니다.

 

그 결과 단 1표 차이로 징병법의 18개월 연장이 통과되었답니다. 그런데 이 법안이 통과된지 4개월만에 일본이 미국령인 진주만을 폭격하면서 미국은 세계대전의 중심국가가 되었습니다. 미국은 징병법으로 마련된 군수물자와 병력으로 대항하였습니다. 일본은 자살특공대인 가미가제까지 동원하면서 미국의 군수자원과 병력을 감당하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답니다. 만약, 징병법이 부결된 채로 미국이 일본에 전쟁을 했다면 좀더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전쟁이 되지 않았을까요?

 

 

전국민이 투표에 참여하는 21세기에는 1표로 운명이 바뀌는 일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아니, 투표인단이 3000만명이 이르기 때문에 1표차의 역전이란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3000만명 중에 '나하나 쯤이야'라고 생각하고 빠지는 사람이 0.3%인 10만명만 되어도 국가의 운명은 바뀔 수 있습니다.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단 몇천표 차이로 역전되는 지역이 많고, 대통령 선거에서도 몇십만표 차이정도로 운명이 바뀌니까요.

 

역사를 통해 1표의 무서움을 알고 있는 국민들은 투표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투표가 미래를 바꾸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한답니다. 대한민국에서 대표를 뽑는 선거는 대부분 표를 행사하는 투표로 이루어집니다. 지금까지 투표가 귀찮다, 혹은 하기싫다고 생각한 40%의 국민들이 투표에 참여한다면 0.3%의 차이로 결정되는 나라의 운명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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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 이야기 15 - 가마쿠라 막부를 타도하라!

1. 가마쿠라 막부의 쇠퇴

이번 장에서 다룰 내용은 가마쿠라 막부의 붕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가마쿠라 막부가 무너진 교과서적인 이야기는 지난 장까지 대부분 이야기 했네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가문이 막부를 세웠지만, 요리토모가 갑자기 죽으면서 그 실권은 가장 유력한 호족 가문인 호죠씨에게 넘어갔고, 호죠씨가 막부를 대신하여 가마쿠라 막부를 이끌어 갔습니다. 실제 가마쿠라 막부의 중요한 알짜배기 시절은 모두 호죠씨의 시대였죠. 차라지 호죠 정권이라고 불러도 될만큼 호죠 가문은 막강했습니다.

가마쿠라 막부의 권력 구조는 이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형식적인 최고 권력자 천황 - 실제 권력을 가진 쇼군(미나모토노 막부) - 쇼군을 좌지우지하는 고케닌 가문인 호죠씨 - 호죠씨와 함께 연합정권을 구성했던 유력 가문들....

그러나, 호죠씨의 독재 시절은 천황의 입장에서 무척 불쾌한 것이었습니다. 막부가 실세도 아니고 막부 뒤에서 일개 신하 가문이 권력을 좌지우지 했으니까요. 거기에 몽골(원나라)의 1,2차 침입으로 민심이 흉흉하고, 몽골 전쟁에 참여한 유력 가문들이 제대로 보상조차 하지 않는 호죠씨에게 불만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자, 이렇게 호죠씨가 독재하는 가마쿠라 막부... 호죠씨와 막부에 대한 불만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죠. 한번 볼까요?

2. 13세기의 막부타도 운동 - 1221년 죠쿠 전쟁

첫 번째 막부 타도 운동은 <1221년 죠쿠의 반란>입니다. 이 반란은 미나모토노 쇼군이 약해지고 호죠씨가 실권을 장악하자, 대의명분이 없다는 이유로 천왕의 아버지(상왕)이 주도하여 난을 일으킨 것입니다.

원정 정치 기억하시나요? 일본에서는 천왕의 나이가 어리면 아버지가 대신 섭정하는 정치 형태가 있습니다. 조선에서는 고종이 나이가 어리자 흥선대원군이 1863년부터 10년간 정치했던 적이 있죠? 이런 정치 형태를 일본사에서는 <원정>이라고 하고, 상왕이 정치하는 고문기관을 <원청>이라고 합니다.

원정 상왕은 막부를 타도하고, 왕실과 공가의 권위를 회복해야 한다고 유력 신하들(고케닌)들을 설득하면서 난을 일으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최초의 막부 타도 운동은 오히려 막부의 결속력만 다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유명한 철의 여인으로 일본 사극에 자주 나오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부인 호죠 마사코는 호죠 가문이 막부에 도움이 되었으며, 막부 타도가 얼마나 큰 실수인지를 연설하면서 눈물로 막부 타도를 외치는 무사들을 달래어 돌려보냅니다.

이 사건으로 천황가는 막부 타도에 실패하고, 천황가가 몰락해버립니다. 덕분에 아직 미약했던 초기 막부는 전국적인 세력을 규합하게 되었고, 막부정권은 그 기반이 튼튼해졌습니다. 또 무가의 기본 성문 법전인 <조에시키모쿠>가 제정되어 무가 정권은 법치를 바탕으로 하는 명실상부한 전국 정권으로 도약합니다.

막부 타도운동이 막부의 기반을 다지게 된 사건이라니, 아이러니 하죠?

3. 14세기의 막부타도 운동 - 1324년 악당이 등장하다.

14세기 가마쿠라 막부에 큰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전에 설명했던 막부 붕괴의 직접적인 원인인 <몽골 침입>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죠. 교과서에서는 가마쿠라 막부의 붕괴를 <원과 고려 연합군의 침략>에 의한 무사층의 동요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마쿠라 막부 멸망의 근본 원인은 <무사층의 동요>였지만, 자세히 보면 여기에도 막부 타도 운동이라는 키워드가 숨겨져 있습니다. 몽골(원구)의 침입으로 유력 신하(고케닌)들은 막부에 불만이 많아졌습니다. 그 이유는 수비전이었던 몽골전을 막은 대가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죠.

침략전쟁이라면 뭔가 노획물이라도 있을 텐데, 몽골 침입을 막은 수비전에서는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었고, 민심의 불안만 찾아왔던 것입니다. 가마쿠라 막부의 호죠 가문은 불만이 가득찬 무사들과 신하집단에게 무엇도 보상해줄 수 없었습니다.

천황가는 이 때를 막부타도의 기회로 생각했습니다. 고다이고 천황은 전국적인 막부 타도를 외치며, 천황을 위해 목숨 바칠 자들을 모았습니다. 호죠씨는 이 고다이고 천황의 막부 타도 운동을 사전에 적발하여 천황을 유배 보냅니다. 천황은 탈출해서 또 막부 타도운동을 하고.... 막부는 또 천황을 유배보내고... 숨바꼭질 전이 계속되지요.

천황을 죽이면 되지 않냐구요? 절대 안됩니다. 고대사 편에서 다루었지만, 일본 천황은 천손강림 이라는 형태로 정당성을 확보한 하늘의 자손입니다. 천황을 죽일 거였으면 막부를 세운 자들이 이미 죽였겠지요. 천황은 죽일 수 없는 존재니, 막부 타도 운동을 주도하고... 막부는 천황을 계속 유배보내고... ㅋㅋ

고다이고 천황의 막부타도운동은 계속 실패하는 듯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천황의 뜻에 동참하는 자들이 점점 불어났죠. 이 당시 사회불만세력으로 등장한 신흥무사집단을 악당이라고 하는데, 이 악당들이 막부 타도운동에 적극 동참하여 결국 가마쿠라 막부가 무너지게 됩니다.

악당은 나쁜 넘들 아니냐구요? 아닙니다. 만화방에 가보면 일본 만화중에 <악당>이라는 만화가 있어요. 정의를 위해 싸우는 좀 특이한 무사들의 이야기지요. 악당은 중국으로 보면 수호전의 영웅들, 한국으로 보면 홍길동 + 일지매 정도의 인물로 보면 됩니다. 대의를 품고 우국충정(?)에 들뜬 무사들을 말하죠. 당시대 개념으로는 사무라이와 좀 구분되는 개념 같습니다.

자 이렇게 해서 일본 최초의 막부인 가마쿠라 막부는 무너지고, 다시 천황가가 권위를 회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권력은 너무나 짧은 기간뿐이여서 역사에서는 이 시기를 무시하고 넘어가기도 합니다.

4. 1333-1334 겐무 신정기

가마쿠라 막부를 타도한 고다이고 천황은 1333년 강력한 천황중심의 독재적 개혁 정치를 실시하려고 합니다. 우리식으로 본다면 대한제국의 광무개혁 쯤 되는 보수적이면서도 나름대로는 대의가 있는 개혁정치라고 할까요?

그러나 이 개혁정치는 2년뿐이었습니다. 천황가와 공가는 아주 짧은 시간에 무너지고 말죠. 그 이유는 천황의 생각이 악당들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천황은 천황중심의 세상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가마쿠라 막부를 박살내는데 일조한 무사집단인 아시카가 다카우지, 닛타 요시사다 등의 명장들은 천황이라도 자신들을 대우해야 한다고 생각했었죠. 실제 이들 명장들은 가마쿠라 막부의 명장이기도 했지만, 새로운 세상을 위해 천황파에 가담했던 인물들이었습니다.

토사구팽 아시죠? 토끼사냥이 끝났으면 사냥개를 삶아먹는다는 중국 고사죠. 한고조 유방이 중국을 통일한 뒤 개국공신이자 명장인 한신을 죽였던 일화죠. 천황파 무사들은 위기를 느끼고, 천황과 등지게 됩니다.

천황의 신정치는 핵심 무사인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반란으로 무너지게 됩니다. 또 다시 주인만 바뀐 막부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 아시카가 가문의 막부가 바로 <무로마치 막부>입니다.

그러나, 무로마치 막부는 <일본에서는 하늘의 후예인 천황을 모신다>는 이념을 버릴 수가 없는 막부였습니다. 일본 모든 막부가 형식적으로는 천황을 모실 수밖에 없었죠. 막부 실력자가 천황가가 아니라면 정당성 확보를 위해 천황이 필요했고, 막부 실력자가 천황가의 친척이라면 자신의 권위를 위해 천황가를 소흘히 할 수 없었으니까요.

이 때문에 무로마치 막부는 바로 성립되지 못하고, 북쪽에서만 권위를 유지합니다. 고다이고 천황은 남쪽에서 무로마치 막부를 인정하지 않고 저항하였죠. 이 시기를 일본사에서 <남북조 시대>라고 합니다.

남북조 시대는 1336년부터 1392년까지 몇십년간이었죠. 그럼 다음장에서는 남북조 시대의 간단한 특징을 본 후 무로마치 막부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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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쿠라 막부 시대의 정치사

1. 가마쿠라 막부의 창립 -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가마쿠라 막부의 창립에는 이견이 많습니다. 이 막부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천황으로부터 <정이대장군>이라는 최고 직위에 임명되면서 시작되었다고 보통 전해집니다만, 과연 장군에 임명된 것으로 막부 창립이라고 볼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있었죠. 최근에는 요리토모가 천황으로부터 슈고, 지토의 임면권을 얻어 봉건제도가 시작된 시기를 가마쿠라 막부의 시작으로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일본에서 막부(바쿠후)란 말은 원래 전쟁중인 대장의 근거지를 뜻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가마쿠라 막부라는 일반명사로 사용할 때 막부는 군사정권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가마쿠라 막부를 세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자신의 신하인 <고케닌>들에게 차례로 은혜를 배풀어 지방 관리로 선임합니다. 이 지방관리를 슈고, 지토라 칭하는데, 슈고는 보통 지방 소국의 군사, 경찰권을 위임받은 관리를 칭하며, 지토는 장원에서 토리관리, 치안유지, 세금징수 등을 하는 관리를 말합니다. 이렇게 땅을 받은 <고케닌>들은 요리토모에게 군사, 경제적 원조를 하는 <give and take> 관계를 갖게 됩니다. 이것이 일본의 봉건제도이죠.

2. 싯켄 정치의 시작

그러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낙마(?, 암살설도 있음) 사고로 사망하게 되면서, 가마쿠라 막부의 실권은 순식간에 최고 고케닌 가문인 <호죠씨>에게 넘어갑니다. 요리토모의 아들은 즉위 3개월만에 그 정치실권을 잃었고, 실권은 유력 고케닌 가문의 13인 합의제 정치가 되었습니다. 이 유력 신하가문(고케닌)의 유력자가 호죠씨 가문이였죠. 호죠씨 가문은 약 130년간 가마쿠라 막부의 실권자로 존재합니다. 호조씨는 장관직과 시소직(총리직)을 겸하면서 정치를 하였는데, 이러한 겸직된 지위를 <싯켄>이라고 부릅니다. 이들 싯켄은 보좌역까지 두면서 유력 신하가문(고케닌)을 모아 합의 정치를 하였고, 이것을 역사에서는 <싯켄정치>라고 부릅니다. 즉, 천황은 이미 무사들에 의해 실력을 잃었고, 무사집단으로 막부를 세운 가마쿠라 막부의 미나모토씨는 쇼군으로서 실권이 없습니다.

13세기를 넘어가면서 막부의 중요관직과 지방관리 대부분을 호죠씨가 독점하였습니다. 이것은 호죠씨 독재체제에 대한 다른 유력 가문(고케닌)의 반발을 불러와 막부에 대한 지지도가 하락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천황가는 막부 타도 운동을 시작합니다. 1219년 미나모토씨 쇼군이 암살되어 3대에서 쇼군이 단절되자, 천황가는 쇼군과 호죠씨를 말살하기 위해 군을 모집하고 죠큐의 난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막부군에게 토벌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전쟁의 결과 오히려 천황가와 귀족가문이 몰락하고 더욱 무가정권과 호쇼씨가 득세하는 결과를 낳게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무가정권의 독재는 더욱 더 다른 유력 가문(고케닌)의 반발을 사게 되어 몰락을 가속화시키는 결과를 낳습니다.

3. 호죠씨의 독재와 천황의 반격

가마쿠라 막부가 약해진 결정적인 원인은 몽골(일본말로는 원구)의 침입입니다. 호죠씨는 몽골의 모든 요구를 거부하며 몽골과의 항쟁에 들어갔는데, 하늘이 일본을 돕기 시작합니다. 몽골의 1차 침입 대 몽골 함선은 야간 해상 공격을 감행하려다가 폭풍우가 몰아서 전멸하고 맙니다. 몽골의 2차 침입 때에는 몽골 쿠빌라이의 14만 대군이 또 다시 해상의 태풍에 의해 모두 전멸하게 되어 몽골군이 물러갑니다. 일본은 일본특유의 날씨로 인하여 몽골군을 물리쳤고, 이 사건으로 일본은 자신들의 나라가 신의 나라(神國)이라 여기게 됩니다.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신풍(神風, 가미가제)이 불어 일본을 구원해준다고 믿어 <가미가제 불패신앙>이라는 것이 생기게 됩니다. 이 신앙은 일본이 훗날 미국이랑 세계대전을 벌일 때, 승리할 것이라는 이론적 근거로도 작용한다네요.

문제는 이러한 몽골과의 전쟁은 수비전이였기 때문에 일본 영토가 황폐해졌다는 점입니다. 또, 전쟁에 참여한 고케닌 들에게 호죠씨는 충분한 보상을 해줄 수 없었습니다. 수비전에서는 전리품이 없으니까요. 이것은 막부에 대한 고케닌의 불만을 초래하여 이들이 막부 타도운동을 벌이는 천황가쪽으로 돌아서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고다이고 천황이 막부 타도운동을 본격적으로 벌입니다. 그는 이 운동이 여러번 실패하여 유배, 또 유배를 당하면서도 계속적으로 막부타도운동을 합니다.(천황은 신의 아들이기에 죽이지는 않습니다.)

이 때 마침 악당(막부를 반대하는 신흥무사를 악당이라고 부릅니다.)인 구스노기 마사시게가 막부를 괴롭히는 운동을 벌였고, 그 틈에 천황은 유배지를 탈출하여 막부를 붕괴시킵니다. 이 때 천황을 도와 막부 타도 운동을 벌였던 자들은 막부의 핵심 무사였던 다카우지와 요시다다입니다. 이들은 호죠씨를 타도하고 천황을 도와 가마쿠라 막부를 타도하지만, 그들의 본심은 새로운 막부를 세워 천하를 다시 얻는 것이였습니다.

가마쿠라 막부는 이렇게 몽골과의 항쟁을 기점으로 망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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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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