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조약'와 관련있는 히스토리아의 글 목록18건

  1. 2010.01.01 매일매일 역사퀴즈 2010. 1. 5 (화요일) - 출제범위 : 한국근현대사
  2. 2009.12.28 한국 근현대사 낙서 노트 (1) - 근대를 구분하는 기준점과 세계사 (15)
  3. 2008.11.16 수능 근현대사 정리 2 : 개화파와 위정척사파 (3)
  4. 2008.11.16 수능 근현대사 정리 1 : 흥선대원군과 척화비, 그리고 개항 (10)
  5. 2008.05.09 개화기 ~ 일제시대 여성들의 패션은 어떠했을까요? (1편 - 서구식 옷의 유입) (4)
  6. 2008.04.22 1882년. 임오군란이 조선에 미친 영향에 대한 글 (10)
  7. 2007.12.22 (일본사 이야기 23장) 일본의 개항 과정과 미일수호통상조약의 내용 (10)
  8. 2007.12.08 <일본사 이야기 22> 일본의 근대화 1 - 에도막부의 중농주의와 계급분화 (3)
  9. 2007.07.28 (근현대사 10장) 청과 일본이 조선의 경제권을 놓고 다양한 조약을 맺다. (7)
  10. 2007.06.04 1880년 : 조선책략과 조선의 개화정책 (11)
  11. 2007.06.03 플래시 자료 - 강화도 조약
  12. 2007.05.24 1876년 조일수호조규(강화도 조약)은 어떤 조약인가? (11)
  13. 2007.05.20 개화기 기획 자료 : 흥선대원군의 정책과 역사적 평가 (17)
  14. 2007.05.20 한국 근대의 시작인 개화기에 대한 개관 (2)
  15. 2007.01.13 조일수호조규 속약(강화도 조약의 추가 조문) (1)
  16. 2007.01.13 강화도 조약 때 일본의 추가 요구 사항 (1)
  17. 2007.01.13 강화도 조약 전 일본의 강화도 침략 (1)
  18. 2007.01.13 강화도 조약(조일 수호 조규) (2)

매일매일 역사퀴즈 (2010. 1. .5  화요일)

오늘의 출제 범위는 <한국 근현대사> 입니다.

  - 반드시 컴퓨터용 수동 마우스를 사용해 주시고, 제출하기를 꼬옥~ 눌러주세요.
  - 점수와 후기를 댓글로 남겨주시면 다음 회 난이도를 조절할 수 있답니다.

1. 다음 노래를 잘 듣고 물음에 답하세요~

 

1. 위 노래와 관련된 가문에 대한 설명으로 바르지 못한 것을 골라보세요.
① 위 인물의 가문은 서인 중에서도 노론 집권가문에 속하는 유력 세도가문이였다.
② 위 가문이 일당 독재체제를 구축한 것은 1800년 정조가 사망하면서 나이 어린 왕들이 등극한 것과 관련있다.
③ 순조기에 효명세자는 위 가문의 독재를 막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었다.
④ 위 가문은 삼점의 문란을 시정하기 위해 정적들을 제거하고 백성들의 세금을 감면해주었다.
⑤ 위 가문의 집권기에 평안도, 함경도 등 중앙과 멀어진 지방의 한미한 가문들은 상대적인 차별을 받았다.

 

2. 다음은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과 맺은 후속 조치들입니다. 지문을 잘 읽고 물음에 답해주세요~

*** 조일수호 규칙(1차 통상장정)

    - 조선국 항구에 머무르는 동안 일본인은 쌀과 잡곡을 수출할 수 있다.

    - 일본국 소속의 선박은 항세를 내지 않으며, 수출입 상품에도 관세를 부과하지 않는다.

*** 조일 수호 조규 부록

    - 일본화폐를 사용하여 한반도에서 무역을 할 수 있다.

    - 양국의 무역에 장해가 발견될 때 조약의 개정을 1년내에 제기해야 하며, 기한이 지날 경우 조약은 더 이상 개정될 수 없다.

*** 조일 수호 조규 속약

   - 부산, 원산, 인천항 밖으로의 이동 거리(강행이정)을 사방 50리로 하고, 2년 후를 기해 다시 각 100리로 한다. 1년 뒤에 양화진을 개시한다.

   - 일본 공사 영사와 수행원이 조선 내지에서 자유롭게 유력(여행)을 허가한다. 여행지방을 지정함은 예조에서 하되, 증서를 발급하고 지방관은 증서를 검사하고 여행자를 호송한다.

*** 1883년 조일통상조약(조일통상 잠정협약, 개정 통상장정)

  - 천재지변과 변란 등으로 식량부족 문제가 발생할 경우 조선은 방곡령을 실시할 수 있다

  - (일본 화폐가 아닌) 조선화폐에 의한 관세 및 벌금 납입이 가능하다.

  - 일본 상인에 대한 최혜국 대우를 해야 한다.

 

2. 위 내용에 따라 강화도 조약을 평가할 때, 지문을 잘못 해석한 사람을 골라보세요...
① 구하라 : 일본은 개항장에서 일본인의 통행거리를 설정하는 데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네.
② 임윤아 : 일본 화폐를 사용하느냐, 조선화폐를 사용하느냐하는 문제가 양국에서 첨예하게 대립하였군
③ 나르샤 : 개항장에서 양곡의 수출입을 허용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도 양국의 입장에서는 중요했던거 같아
④ 현   아 : 개정통상조약의 내용으로 미루어보아 결국 우리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관셰안이 개정된거 같아.
⑤ 씨   엘 : 일본인들은 개항장 밖으로 일본인들의 활동범위를 넓히려고 끊임없이 조약을 개정하려고 했었네

 

3. 다음은 1920년대 이후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했던 단체에 대한 내용입니다. 잘 읽고 물음에 답해주세요.

- 1923 : 갑오개혁 이후, 양반, 상민, 노비와 같은 신분 차별이 사라졌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직도 <백정>이라는 직업을 노비와 같이 취급하고 있다. 일제에 저항하는 우리에게 어찌 양반, 노비와 같은 차별을 강요하는가? 우리의 형평운동은 차별에 대한 항거이자, 형평을 통한 정당한 대우를 요구하는 것이다. 조선형평사는 단지 같은 민족으로서 정당한 요구를 할 뿐이다.

- 1924년, 형평사는 조선노농총동맹과 연대하여, 사회운동, 노동운동을 전개한다. 일제는 식민지의 모든 노동자, 농민에게 부당함을 안겨주었다. 20년대 이후, 공산주의의 국내 유입으로 제국주의 반대운동에도 참여하게 된다. 이 활동은 3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3. 위 지문의 사료와 내용이 말하려는 근본적인 취지가 무엇인지 골라보세요.
① 일제시대에도 양반, 노비와 같은 신분차별이 심했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독립운동을 제대로 전개할 수 없었다.
② 형평운동은 초기에는 사회 차별에 반대하는 운동으로 전개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일제에 반대하는 민족운동으로 전개되었다.
③ 형평운동은 신분차별을 강조함으로서 우리의 독립운동에 장애물이 되었다.
④ 형평운동이 노동운동과 결합하면서 원래의 순수함을 잃고, 좌파들에 의해 변질되었다.
⑤ 형평운동은 최하층 계급의 신분 투쟁이였으므로, 민족 독립운동과 연관시켜서는 안된다.

 

4. 다음은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했던 역사가에 대한 내용입니다.

- 기자 조선에 대한 내용은 허구이다. 우리가 알고 있었던 <대한>이라는 것은, 일본의 임나일본부를 수용한 것에 불과하다. 우리 고대사는 한반도 안에 가두어진 <삼한>에 대한 조작된 내용이 아니라, 만주에서 비롯된 위대한 부여족의 이야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 만약 묘청이 김부식을 물리치고, 금나라에 대한 사대 외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면 민족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묘청의 난은 조선 1천년래 대사건이다.

- 역사는 我와 非我의 투쟁이다.... 제국주의가 보여준 사회진화론은 결국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잡아먹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 아와 비아의 투쟁을 극복하면서 민족과 민중이 자기 모순을 극복하는 것이 역사의 발전과정이다.....  독립 운동은 그들보다 강해지기 위함이 아니다.  그들의 정부를 부정하고, 식민지 지배 자체를 부정하는 것 자체가 독립 운동인 것이다. 외부적으로 강하고, 강하지 않음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4. 위 지문에서 설명하고 있는 독립운동가이자, 역사가인 분의 저서가 아닌 것은 무엇일까요?
① 독사신론
② 조선상고문화사
③ 조선사연구초
④ 조선상고사
⑤ 한국통사

 

5. 다음은 해방 후, 우리 민족국가를 설립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건국준비위원회의 강령입니다.

- 우리는 완전한 독립 국가의 건설에 기할 것이다.

- 우리는 전민족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기본 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민주주의 정권의 수립을 기할 것이다.

- 우리는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국내 질서를 자주적으로 유지하여 대중 생활의 확보를 기할 것이다.

 

5. 이 강령과 관련있는 <건국준비위원회>의 핵심 인물은 누구일까요?
① 김  구
② 김규식
③ 여운형
④ 이승만
⑤ 박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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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한국 근현대사 낙서 노트 (1)

근대를 구분하는 기준점과 세계사

1. 시대구분은 누가하는 거야?

한국 근현대사 낙서장 첫 이야기이다. 근데 말이지, 이야기를 하려다 보니 용어부터 맘에 걸리네. <근현대사>라니... 그럼 근대, 현대라는 건 뭐고, 누가 기준을 정한거야? 먼저 근현대가 뭔지 모르고 이야기를 할 수 없으니 간략하게 끄적거려보자.

뭐 역사책을 보면 흔히 고대, 중세, 근대, 현대... 뭐 이런 말들이 나온다. 근데 그건 누가 정한 거지?

사실 말이지. 시대구분이라는 것은 스스로 <근대인>이라고 생각했던 서양인들이 만들어 낸 <발명품>이야. <르네상스>라는 말은 다 알지? 미켈란젤로니, 라파엘로니, 레오 선생이니 하는 분들 나오는 서양 15-16세기 말야.

서양의 근대인들은, 15세기를 무지 자랑스러워 했어. 솔직히 중세 시대에 기사도가 어쩌구, 십자군 원정이 어쩌구, 교황이 어쩌구 말은 많이 했어도 그 시기는 <우물 안 개구리> 시대였거든. 아시아인들은 각각 무역권을 만들고, 문명간 교류도 활발히 하고 하던 시기에 유럽인들은 좁은 땅덩어리에서 지들끼리 죽자 살자 치고 받고 싸웠잖아.

그런데, 르네상스니, 종교개혁이니, 신항로 개척이니 하면서 밖으로 눈을 돌려보니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너무나 많았다 이거야. 그러다 보니, 지금까지 믿었던 가치관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하는 거였지.

교황 : 야... 니들 라틴어 읽을 줄 모르잖아. 내가 성경책 읽어 줄테니 잘 들어. 하나님께서는 <면죄부>라는 티켓을 사는 사람에게 천국을 예약하셨단다. 자, 줄서... 티켓사세요.. 티켓... 교황한테 돈 바치면 천국가요... 교황믿음 만세천국 교황불신 바루지옥.....

로렌쪼 발라 : 놀구있네. 내가 조사해 봤더니, 교황이랑 황제랑 밀약맺고 둘이 해 쳐먹은 거 많던데, 이게 야~ 대체, 교황이 교지구 투기업자랑 뭐가달라? 교황이랑 랑크 제랑 따먹고, 치자금 주고 이런 거래 다메? 료 다 았다. 지금부터는 성경책 내가 직접 읽을란다. 니가 읽어주는 거 안 믿어.

루터 : 라틴어? 되었구... 지금부터는 모국어로 성경책 번역해줄테니 그거 읽으면 되겠다. 성경 직접 읽고 스스로 믿음을 가지세요... 우리 힘으로 종교를 바꿔 보자구요. 일단, 교황을 좀 죽여놓아야 우리 귀족분들이 힘좀 쓰실거에요. 교황불신 귀족만세~~

갈릴레이 : 근데, 교황이 한 말을 반박해도 될까? 내가 망원경 만들어서 보니깐 지구가 돌던데.... 근데,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은 내가 안했는데... 어떤 넘이 책 팔아 먹으려고 그런 말을 써 놓았어?

콜롬버스 : 그래? 그럼 난 그 말 믿고 지구 반대편으로 돌아서 인도 가봐도 돼? 진짜 간다.. 진짜루.... 지구 반대로 갔다가 낭떠러지 만나서 죽는 거 아니지? 확실... 하지? 후덜덜...

뭐, 점차 이런 분위기가 되가는 거다. 세상이 바뀌고 세계가 넓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제 <세계화> 시대에 걸맞게 아시아 애들 노는데도 좀 놀아달라고 애원해보고, 무역도 같이 해보고 싶었겠지. 유럽애들도 점차 <스팩>이 되잖아~ 그래서 서양인들은 지금까지의 시간과 공간을 구분하는 기준점을 만들어 본 거야.

과거 찬란했던 그리스와 로마 제국의 시대를 <고대>라고 기준점을 잡고, 로마 제국의 문화유산이 박살난 시대를 <중세>로, 그리고 르네상스를 겪은 자신들의 시대를 <근대>로 파악한거지. 이 시대 구분법이 여러 서양의 역사 학자들을 거치면서 <현대>라는 살까지 더해서 4단계 시대구분법이 나왔어.

그런데, 이 시대구분법은 문제가 있었지. 뭐 19세기 이후에 서구 애들이 세계사의 주도권을 잡았기 때문에 이 시대구분법을 널리 애용하긴 했지만, 아시아 문화권에서는 이게 너무나 안 맞는다는 거야.

영국의 스펜서 : 뭐야... 중국, 일본, 한국, 뭐 인도, 오스만 제국... 이것들은 나름대로 세계 4대문명의 발상지라면서 19세기까지 쭈욱~ 중세 봉건시대 수준이네. 그니깐 니들이 우리 서양한테 정복이나 당하지 ㅋㅋ

일본 : 되었네 이 사람아.. 아시아는 아시아 나름대로 발전과정이 있었고, 니네 발전이랑 조금 다른 면이 많거든? 우리도 <메이지 유신>으로 나름 발전했는데, 몰랐어? 니네 시대 구분이 좀 우리랑 안 맞는다. 우린 근대랑 현대 사이에 독특한 발전 과정이 있거든? 오.. 그걸 <근세>라고 부르면 되겠다...

그리하여 4단계 시대 구분법이 <근세>를 포함한 5단계 시대 구분법으로 정착된거야. 뭐, 암튼 중요한 것은 이 시대 구분이라는 것이 서구적인 것에서 출발했다는 점이지. 따라서 우리식으로 고대니, 중세니, 근대니 때려 맞추려고는 하는데 너무나 안 맞는다는 거야.

일단, 한국사 교과서부터 봐봐.... 뭐 고대 사회로의 발전, 근세로의 전환... 이런 거창한 제목들은 많이 나오는데, 왜 고대고, 왜 근세고... 이런 설명들은 살짝 생략되어 있거든. ㅋㅋ

그래도 나름대로 역사 학자 님들께서 고민해서 만들어놓은 시대구분이 많으니, 그걸 참조로 근현대사가 어디서 부터인지 파해쳐보자.

2. 한국 근대와 현대의 기준점

자, 그럼 한국사에서 근대사회가 언제부터인지 밝혀보자.

사실 한국사에서 근대는 서양인들이 구분하는 기준과는 완전 달라. 서양애들의 근대 기준은 자본주의가 시작되고, 민족이라는 개념이 잡히기 시작하는 시기야. 뭐, 칼뱅이라는 종교개혁가가 기독교인들은, <돈 잘 벌어도 천국가유~>라고 자본주의의 단서가 되는 말을 했다나 뭐래나... 또 로마제국의 울타리에서, 교황의 울타리에서 살던 유럽인들이 <근대민족국가>라는 개념을 잡고 절대왕정이라는 걸 만든 것도 바로 이 <르네상스> 이후야.

아시아의 <근대 기준>은 사실 유럽인들이 말하는 <자본주의>가 언제 생겼냐는 거야. 근데, 아시아는 대부분 유럽인들에 의해서 식민지가 되었거나, 강제로 개항했잖아.

따라서 아시아의 <근대화>란, 거의 대부분 유럽인들이 협박~해서 강제로 <자본주의>가 들어온 시기가 바로 근대란 거지.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강제적인 개방이었기 때문에 <국가>를 지켜야한다는 확고한 의지가 생겨서 <민족의 생존>을 생각하게 된 시기를 근대로 볼 수 있어.

뭐, 유럽과 좀 다른 점이라면, 걔네들은, 다른 나라를 점령해서 민족의 영광을 널리 알리려는 거고, 아시아인들은 꼴보기 싫은 유럽민족들이 식민지를 넓히자, <니들 짱난다~>면서 저항했던 민족주의라는 거 정도지.

자, 그럼 한국사에서 말하는 근대의 기준이 감잡히지? 정치적으로는 <근대민족국가의 수립>,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국가의 수립>이 바로 근대화의 기준인 거지.

그럼, 민족국가, 자본주의 국가가 대체 언제야? 이걸 가지고 많은 학자분들께서 싸웠는데, 뭐 대충 정리하자면 이런거야.

18세기 주장파 : 일본이 안 쳐들어왔어도 우린 스스로 민족국가를 만들 수 있었거든? 특히 박지원, 박제가 등 실학파들 중에 <북학파> 있었잖아. 우리 민족이 강해지기 위해서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배우자는 사람들. 특히, 조선후기에 영조, 정조 시기를 봐봐. 거의 서양의 루이 14세 안 부러울 도로 대군주잖아. 그 때 자본주의가 발달할 딱... 찬스였는데. 박지원의 양반전 보면 양반이 장사하는 방법도 나오구...

흥선대원군기 주장파 : 흥선대원군이 프랑스 격파, 미국 격파하고 침략전쟁을 다 막았잖아요... 일본, 청나라 간섭도 다 막아 버리고... 그것만큼 민족적인게 어디있어요? 그리고 대원군기에 국가 재정이 튼튼해지면서 서울 등 근기지방부터 자본주의가 발전하잖아요?

강화도 조약 주장파 : 그래도 확실한 것은 일본이랑 맺은 <강화도 조약>이거든? 그 조약으로 우리가 비로소 세계사에 눈뜨고, 자본주의가 먼지 경험하게 된 거잖아. 비록, 일본이 나쁜 의도를 가진 것은 맞지만, 조선이 개항하고 자본주의를 배운 건 1876년이야. 또, 일본 덕분에 외세에 저항하려는 <민족주의>가 비로소 시작되었고...

갑오개혁 주장파 : 강화도 조약은 그냥 문서일 뿐이구요. 실제로, 양반, 싱민, 노비같은 신분제도가 없어지고, 모든 사람이 평등해진 건 1894년 갑오개혁 아닌가요? 모두가 평등해야 비로소 하나의 민족이죠. 솔직히 조선시대에 노비가 <우리는 같은 민족, 평등한 백성이다>라고 생각했겠냐구요. 신분제 폐지, 과거제 폐지, 정치, 사회 개혁이 선행되야 근대화든 뭐든 하죠. 그리고 갑오개혁 때 조세 개혁이 시작되면서 자본주의 발전을 공식적으로 승인하는 국가권력이 성립된 거 아닌가요?

음... 다 조금씩 맞는 말인거 같다. 하지만, 현재 교과서나 일반 서적에서는 <강화도 조약>을 가장 많이 언급하는 것 같다. 뭐... 강화도 조약을 챙기려면 서양과 일본 세력의 침략도 언급해야 하고, 그러려면 당대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도 언급해야 하고.... 그러다 보면 어짜피 19세기 중반으로 넘어가게 되지.

그럼 현대의 기준은 어디지?

그건, 만장일치야.... 일본이 핵무기 꽝~ 하고 맞아서 망하고, 아시아 전체가 이 날만 되면 모두 모두 기념하고 행사를 치루는 1945년 8월 15일.... 즉 광복절 날이지.

현대가 되려면 식민지 상태에서 <민족국가의 발달>이나, <독점적 자본주의>의 발달이 이루어질 수는 절대~ 없는 거잖아. 뭐... 친일파의 국가라면 모를까.... 혹... 요즘 친일을 애국으로 바꿔주시는 뉴라이트 분들이라면 새로운 시대 구분이 가능하기도 하겠지만... ㅋㅋ

자, 그럼 재미없는 시대 구분 이야기를 여기서 끝내고 본격적인 근현대사 낙서에 돌입해보자. 그럼 19세기 서양 열강의 침입과 독자적 발전을 이루려 했던 조선의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http://historia.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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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6. 개화 세력의 대두와 개화 정책의 추진 
 개화파의 뿌리는 박지원, 박제가를 축으로 하는 북학파로부터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이후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와 청을 왕래했던 오경석과 같은 역관 출신의 중인들로부터 신 문물이 전파되면서 중인들도 통상개화론의 주연들로 등장하게 된다. 통상개화론자들 이후로 개화파는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양무 운동(洋武運動)를 모델로 개화하고자 하는 온건 개화파문명 개화론에 입각하여 변법적(變法的)인 개화를 모색하는 급진 개화파가 그것이다.
 온건 개화파 같은 경우 의 북양대신 이홍장이 주장했던 것처럼 중체서용(中體西用)을 중심으로 깔아둔 양무 운동을 근본으로 삼고 있다. 때문에 청나라와 친하고 상대적으로 일본과는 감정이 좋지 않았다. 동도 서기(東道西器). 즉, 동쪽 나라의 도리와 서양의 기술이라 함은, 우리 나라는 성리학적 윤리로 도(道)는 완성에 이르렀으나 아직 기술 문물이 발전하지 못했음으로 서양의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부국 강병을 추구한다는 내용이었다. 주로 개항 이후 1880년대의 주된 개화 운동(통리기무아문, 박문국, 기기창, 우정국, 별기군 등)와 대한 제국의 광무 개혁(기술, 농업, 학교 설립 등)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문명 개화론에 의한 개혁을 추구했던 급진 개화파는 서양 제국주의 열강을 개화된 문명이라 여기면서 그 중간자인 일본을 반 개화된 상태로 보고 미개화 상태인(그들 생각에) 우리 나라를 개화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일본과 깊은 관계를 갖고, 청을 무시하였다. 동도 서기론자들과 달리, 그들은 서양의 발전된 문물들과 함께 그들의 제도를 받아들이고자 하였다. 당시 메이지유신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한 후쿠자와 유키치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제도 개혁에 힘썼다. 예를 들어보자면, 이들이 시행했던 갑신 정변과 독립협회는 입헌 군주제적인 제도를 지지하고 제도적 변화를 모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7. 위정 척사 운동
  위정 척사(爲正斥邪)라는 말은 '바른 것(성리학)을 위하고 사악한 것(서학 : 기독교)을 배척한다는 것'이다. 당시 선비들이 성리학적 입장에서 본다면 그들이 제사를 모시지 않고 조상신을 귀신으로 모는 등 유교 윤리에 정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처럼 여기어졌다. 굳이 말해본다면 역사를 움직이는 주체를 개화, 보수의 두 축으로 보수쪽이라 할 수 있다. 크게 10년 주기로 나누어 설명하도록 하겠다.
  1860년대 병인양요를 배경으로 쓰여진 이항로의 척화주전론은 강력하게 통상 반대를 주장하였다. 물론 척화주전론은 당시 집권하고 있던 흥선대원군의 통상 거부정책과 맞아떨어져 큰 호응을 얻었다.(유일하게 정부정책과 위정척사론이 일치한 경우이다.)
  "(전략) 사학(서학)의 무리를 잡아 베게 하시고, 밖으로는 장병으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오는 적을 정벌케 하소서." 

- 이항로, 「척화주전론」


  1870년대
최익현1876년 강화도 조약을 반대하면서 통상 개화가 불가능한 다섯가지 이유를 들어가면서 5불가론(소)으로 반대하였다.

"우리들의 물화는 대부분이 땅에서나는 것으로 유한한 것이고 저들의 물화는 모두 지나치게 야비하고 음란한(?♡_♡?) 노리개로, 손으로 만든 것이므로 그 양이 무궁무진합니다. (중략) 저들이 비록 왜인(倭人)이라고 하나 실은 양적(洋敵)입니다." 

- 최익현, 「왜양일체론」


  1880년대
2차 수신사였던 김홍집이 "일본에서" 황쭌센으로부터 받은 「조선책략」을 가져오면서 청의 말도 안되는 외교정책에 이용당하는 설움을 영남에 있는 만명의 선비의 (상)소를 통해(지금으로 보면 서명운동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반대하였다.

"수신사로 일본에 갔다온 김홍집이 가져온 황쭌센의 「조선책략」을 보건데 온몸에 털이서고, 눈앞이 흐려집니다.(중략) 원교(遠交 : 여기서는 미국과의 통상을 뜻한다.) 핑계로 근린(近隣 : 러시아)를 배척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저들은 모두 같은 오랑캐입니다. 누구는 후하게 대하고 누구는 박하게 대할 수 없는 일입니다."

- 이만손 외. 「영남만인소」

   
  1890년대 을미개혁으로 인해 단발령이 내려지고 을미사변(명성황후가 일본의 낭인들로부터 시해당한 사건)을 계기로 양반 유생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전략)... 국모의 원수 ... (후략)" 
 
  위정 척사의 의의는 통상 수교 정책처럼 반외세, 반침략에 대해 국권과 문화적 주체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었다는 것이다. 단점 또한 통상 수교 정책과 같아서, 우리 나라의 근대화를 지연시켰다는 단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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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회원

0. 다시 한 번 시작하며ㅡ
  올해도 수능이 끝났습니다. 수능이 끝났음에도 수능대비용으로 정리하는 것처럼 덧없고 부질없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저는 군입대를 앞둔 대학생이며, 현재 활동하시는 분들께도 공부가 미치지 못합니다. 더욱이, 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역사란 일부를 추려내고 몇몇 사항을 정리하고 그 인과관계를 정리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 제가 서술한 내용과 히스토리아의 다른 필자분께서 집필하신 내용이 다르다면, 다른 필자분의 의견을 좇으시길 바랍니다. 제가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고등학교, 특히 수능에서만 통용되는 '시험대비용'에 불과하며 다른분들이 공부해서 작성한 것과는 그 질에서 비할바가 못됩니다. 이 점을 유의하시고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1. 흥선대원군의 개혁과 통상 수교 거부 정책
  어린 나이에 왕에 즉위한 고종 대신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하기 시작했다. 흥선대원군의 정치는 그 당시 상황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데, 국내적으로는 세도정치로 인한 왕권 약화와 그에 따른 조세 제도의 문란(삼정의 문란)으로 농민 봉기가 일어나고 있었고 국외적으로는 이앙선이 출몰하여 민심은 동요케 하고, 천주교가 확산되어 성리학적 세계관이 흔들리는 등, 혼란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에 흥선대원군은 왕권을 강화하고 민심을 수습하고자 하였다. 먼저 그는 폭넓은 인재 등용과 세도 정치의 중심이었던 비변사를 축소하게 되면서 세도 정치를 혁파하였고, 재상 회의기구였던 의정부를 부활시켰다. 그리고 법전을 편찬(대전 회통)하고 경복궁을 중건함으로써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좀더 쉽게 이해를 하기 위해, 세도 정치를 혁파하고 왕권을 확장시킨 것을 정리한 것을 대전회통이라고 생각하는게 좋다.) 당시 무차별적으로 농민들의 땅을 합병하고, 세금도 내지 않았던 서원을 철폐하고, 각종 삼정의 문란을 개혁하면서 민생 안정을 꾀하였다.


 Tip. 삼정 개혁 : 전(田)정, 군(軍)정, 환곡(環穀) 개혁

 전정 : 양전, 양안 사업(토지 조사), 토지 겸병을 통한 개혁

 군정 : 호포법(號~, 집집마다 군포를 내도록 하는 법)을 통해 양반에게도 군역 부여

 환곡 : 환곡제를 폐지하고 양심있는 양반의 개인 창고(사창)에서 곡식을 꾸도록

 
왕권 강화와 민생 안정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았다. 경복궁을 중건하기 위해 원납전(願納錢 : 양반들이 경복궁 중건을 위해 원해서 내는 돈)을 강제적으로 징수하고 당백전의 무리한 발행으로 인프레이션을 유발하였다. '경복궁 타령'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노동력의 징발 또한 가혹하여, 농민들의 반발을 샀다. 
 
 Tip. 인민들의 반대
  
양반이 반대한 것 : 서원 철폐, 호포제, 원납전

농민이 반대한 것 : 당백전, 노동 징발


2. 통상수교 거부 정책과 양요 
  순서, 인과 관계, 관련국(중요), 지리적 위치를 확인하는 것이 포인트이다. 
 
 1) 병인박해(1866) 
  러시아의 강력한 남하 정책으로 위기를 느낀 흥선대원군이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 선교사를 통해 프랑스에게 러브콜을 신청하였으나, 이를 프랑스 선교사들이 무시를 했다. 러브콜의 성공 여부와는 상관없이 흥선대원군은 이로 인해 기존 세력으로부터 비난을 받았으며, 비난을 잠재우기 위해 천주교를 박해함으로써 프랑스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밝히고자 했다.(참고로 말하자면 흥선대원군의 부인도 절실한 천주교 신자였다고 한다. - 수정사항)

 2) 제너럴 셔면호 사건(1866)
 
  미국 상선(商船)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따라 평양으로 들어왔다. 물이나 식량을 구걸하는 등의 연극을 통해 평양에 들어왔지만, 시내를 향해 공격하자 이에 박규수가 제너럴 셔먼호를 불질러 버렸다.

 3) 병인 양요(1866)
  대동여지도를 통해 서울로 곧바로로 가는 길을 알게된 프랑스는 강화도를 통해들어왔다. 문수, 정족 산성 등에서 정말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내쫓는데 성공하였다. 그들은 강화도를 통해 들어와 강화도에 있던 외규장각 장서들을 쌥쳐가서 현재까지 외교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4) 오페르트 도굴 사건(1868)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충남 덕산(예산)에 위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사건이다. 
 
 5) 신미양요(1871)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뒤늦게 알고서는 미국이 제너럴 셔먼호의 보복을 한 사건이다.  그들 역시 대동여지도를 통해 강화도로 들어왔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당시 미국과 조선은 압도적인 화력차이가 났고 미국은 대포 몇 번 쏘다가 반응이 없어서 그대로 돌아갔다는 말이 있을정도이다.

 
6) 척화비
  이래저래 서양에 대한 안좋은 이미지를 갖게하는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자 흥선대원군은 통상수교 거부(소위 쇄국정책)라는 극단적인 처방을 하게 된다. 우리 민족의 전통문화를 수호하고 주체성을 지켰다는 것은 높이 평가되어 지지만, 그만큼 근대화와 세계화를 지연시키기도 하였다.


3. 강화도 조약(1876)
  최익현의 도끼 상서로 실각하게된 흥선대원군의 바톤을 민비가 이어받아 민씨 정권을 수립하였다. 통상수교 거부 정책 및에서 억눌려왔던 개화론이 박규수 등을 필두로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한편 위로부터 원샷 개혁(메이지 유신) 성공한 일본이 예의를 지키지 않는 투로 외교문서를 보내자 조선 정부는 이를 거부하고, 이에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는 정한론(征韓論 : 한반도를 정복하자는 이론) 내세우기 시작한다.(원래는 신생 일본의 발전 발판으로써 한반도를 정복하려고 하였다.) 곧 일본이 운요호 사건(1875)을 꼬투리 잡아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조 일 수호 조규, 1876)가 맺어지게 된다.

 주요 조항 분석

1관 조선은 자주국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

  => 침략을 쉽게 하기 위해 청의 종주권을 부정

5관 조선은 부산 외에 2개 항구를 개항하고 일본인이 왕래 통상함을 허락한다.

  => 본래 부산(동래)는 왜와 통상하던 항구였으므로 경제적 항구였던 부산러시아의 
        
남하 견제를 위해 군사적 목적을 띈 원산의 개항, 서울로 들어오는 길목인 인천항을 개항하므로써
       
서울에 직접적인 정치적 간섭을 할 수 있게 되었다.

7관 조선은 일본의 항해자가 자유로이 해안을 측량하도록 허가한다.

   => 연안의 자원, 항로 확보와 유사시 효율적인 작전을 전개하기 위함이다.

9관 양국 관리는 약국 인민의 자유로운 무역 활동에 일체 간섭하지 않는다.

  => 더 많은 물량을 가진 일본 상인에게 유리

10관 일본 인민이 조선이 지정한 각 항구에서 죄를 범한 경우 일본 관원이 심판한다.

   => 치외법권(영사 재판권)을 인정하였다. 대표적인 불평등 조항

 * 주의 : 강화도 조약에는 최혜국 조항이 없다


부속 조약

1) 조일 수호 조규 부록

 4관 개항장에서 일본인의 간행이정을 10리로 제한한다 => 거류지 제한

 7관 일본 국민은 본국에서 사용되는 화폐로 조선 국민이 보유하고 있는 물자와 마음대로

 교환할 수 있다 => 일본의 화폐 유통 허용하여 경제적 침략을 받게 된다.


2) 조일 통상 장정

 제 6조 조선 항구에 머무르는 일본인은 쌀과 잡곡을 수출할 수 있다.

  => 양곡의 무제한 유출을 허용하게 된다(훗날 방공령으로 방어)

 제 7조 일본 선박은 선세를 납부하지 않으며, 수출입 상품에도 관세를 부과하지 않는다.

  => 자국 산업을 보호 불가(마치 현재 FTA라고 보면 됨.) 


4. 다른 나라와의 수교

 1) 조미 수호 통상 조약 
  제 2차 수신사로 다녀온 김홍집 전한 황쭌센의 「조선책략」에 의해 맺어진 조약이다. 청은 자신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종주권)을 과시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주선하였다. 사실 청의 본 뜻은 청 - 조선 - 미국의 한 축을 구성함으로써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고, 확대되어가는 일본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에 대한 견제라 할 수 있다.


 주요 조항 분석

 제 4조 (전략) 미 합중국 국민이 조선에서 조선 인민을 때리거나 재산을 훼손하면

        (중략) 미 합중국 법률에 따라 체포하고 처벌한다 => 치외법권

 제 14조 (전략) 본 조약에 부여되지 않은 어떠한 권리나 특혜를 다른 나라에 허락할

        때에는 자동적으로 미국 관민에게도 똑같이 주어진다.

         => 최혜국 대우, 아관 파천 이후 이권침탈에 악용되었다.

 

  그 외

  거중 조정 조항 : 위험할 때 서로서로 도와준다.

  => 형식적인 조항이다. 이후 일본과 미국 사이에 맺어진 가쓰라-테프트 밀약에서
     
정면적으로 위반된 조항이기도 하다.

 2) 한러 통상조약(1884)
  조선 정부는 국내에서 청, 일의 간섭이 점점 더 심해지자 이러한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였다. 때마침 러시아는 외교 고문인 베베르를 파견하여 친러 세력을 확장하고 이윽고 러시아와 독자적으로 수교를 맺게 된다. 그 결과 러시아는 함경도 경흥에 조차지를 확보하였다.


5. 외교 사절
  민씨정권은 개화한 이후 개화정책을 실시하기 위해 주변국에 외교 사절을 파견하여 신 문물과 신 제도를 수용하였다. 에는 영선사를, 미국에는 보빙사를, 일본에는 수신사를 파견하였다. 이들은 공식적인 외교사절로 각각 귀국 후 보고서를 작성하여 올렸다. 하지만 형식적인 보고서에 실망한 고종은, 밀서를 내려 비밀리 조사 시찰단(신사 유람단)을 파견하여 일본 근대화에 대한 다향한 의견을 수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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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 I S T O R I A > 개화기 ~ 일제시대 여성들의 패션은 어떠했을까요?

(1) 서구식 옷을 입겠다고 했지만, 법은 남성들에게만 적용되었다.

서양 복식이 처음 들어온 그 때는?

우리나라에 서양식 옷이 처음으로 등장했다는 기록은 1881년의 기록입니다. 1881년 일본으로 조사시찰단 여행을 한 관원들은 서양식 양복을 입었습니다. 1867년 메이지 유신으로 서구식 문물을 조금 일찍 받아들인 일본으로 갈 때 서양식 옷을 입은 것은 그 당시 파격적인 선택이자 필수적인 선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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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양반집 규슈의 한복 - 15세기에는 풍만함을 강조... 16세기 이후 한복의 어깨가 조금씩 좁아지고, 선의 윤곽이 뚜렸해지고 있다. 점차 곡선미의 아름다움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고위 관리가 아닌 일반 군인들도 1881년부터 서구식 옷을 입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도 일본식 군대인 <별기군>을 양성하면서부터입니다. 1881년 창설한 별기군은 신식 무기를 갖추고 근대식 훈련을 하는 것을 기본 방침으로 정했기 때문에 복식도 서양식으로 하였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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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 지식인들이 입었던 초기 양복과 별기군의 서양식 군복

따라서 우리나라에 들어온 초기 서구식 복장은 서양식 복장을 흉내낸 일본식 복장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패션을 주도한 사람은 <김옥균>과 같은 개화기 지식인이었죠. 김옥균은 갑신개혁을 주도하면서, 서양식 옷을 입어도 된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준 패션 리더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서양식 옷을 입어도 된다는 최초의 법령는 1884년 갑신의제개혁 입니다. 1884년 갑신의제개혁부터 시작된 <의제개혁>은 1984년 갑오개혁 때의 갑오의제개혁, 1895년의 을미의제개혁 등으로 이어지는데 그 내용은 <거추장스런 한복을 간편한 옷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이 의제 개혁으로 서구식 옷을 입게 된 사람들은 국가 관리들이었습니다. 관리들의 관복과 군인들의 군복이 가장 먼저 서구식 옷으로 바뀌게 되고, 1900년대가 되면서부터는 일반인들도 양복을 입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양복을 입는 것 자체가 일본식이라고 생각한 민중들은 양복에 거부감을 가지기도 했답니다. 특히, 가부장적인 조선 사회에서 여자들이 서구식 복장을 하고 머리를 깍고 다니는 것을 <양반규수집> 처녀가 한다는 것에 뼈대있는 집안 사람들은 싫어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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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인들이 1900년대에 찍은 조선 여성의 사진에는 젖가슴을 내놓고 찍은 사진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사진들은 대부분의 19세기 여성들의 모습과는 약간의 거리가 있다. 서구인들은 이 특이한 광경에 대한 기록을 이슈로 생각하여 생각보다 많이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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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중산층 양반 집안의 가족 복장 사진

여성들의 개량 한복 논의는 강화도 조약 이후부터...

1876년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면서 조선사회에서는 <한복 개량> 논의가 본격적으로 터져나오기 시작했답니다. 우리의 전통 한복은 디자인은 비슷한 것 같지만, 그 재봉방법이나 재질, 푸세, 다듬이질 등의 방법에 따라 그 용도가 많이 달랐습니다. 특히, 서구식 복장을 보게 된 이들은 한복에 서양식 편리함을 더해 개량하였습니다. 특히 1882년 조미수호조약으로 미국과 조약을 맺으면서 한복을 개량한다던가, 양복을 입는 것이 법적으로 인정되었죠. 이렇게 서양식 양복을 입는 것을 주장한 사람은 미국과 조약을 체결한 <홍영식, 서광범> 등이었습니다.

1884년 개화당의 거두 김옥균은 고종에게 건의하여 양장을 입자는 갑신의제개혁안을 발표합니다. 그 내용은 말 그래로 옷을 간편하게 입자는 것이니 서양것이라 하여 태클걸지 말라는 것이네요...

관복은 흑단령으로 하는 것이 조제이니, 모든 조정의 관원들은 흑단령을 입되, 대소의 조의에 진헌할 때와 궁내외의 공고가 있을 때에는 흉배를 달아서 문무와 계급을 구별하게 하여라. 관령의 제도를 반령착수하라. 그러나 전에 입던 반령은 그대로 착수하게 하고, 소매는 좁게 줄여서 입고, 홍단령은 검게 물들여라. 새로 관복을 만들 때에는 새로운 방법을 따르게 하여라.

보복, 상복, 예복 같은 예복은 옛 성인의 유제로서 변경할 수 없다. 사복은 그 때 제량에 따라 편리하게 할. 사복으로서 도포, 직령, 창의와 같은 것은 모두 소매가 넓어서 불편하니, 착수의, 전복, 사대를 착용하여, 간편하게 하는 것을 법으로 삼도록 명하라.

- 갑오개혁 의제 -

의제 변통은 진실로 번거로운 것을 버리고, 간단하게 하려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수년 이래 국운이 다난하여, 서로 바라보고 있어서 평소에 무사한 것이라고 할 수 없으므로, 융사에 입는 것은 번거로운 것을 줄이고, 간편하게 하자는 것에서 나의 뜻이 담겨있는 것이다.

- 흑단령 반대 상소에 대한 고종의 입장 -

이로서 서구식 옷을 입자는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관직이나 군직에 있는 남성들 위주의 논의였고, 여성에게 서구식 옷을 입히자는 논의는 아니였네요. 하지만, 서구화가 진행되면서 여성들도 차츰 개량식 한복과 서구식 양징에 눈을 띄기 시작합니다.

1895년 갑오을미개혁 때 조선 정부는 흑단령(서구 양복 색인 흑색 복장)을 관리와 양민 모두에게 일률적으로 입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갑오개혁 때 신분제가 폐지되었기 때문에 모두가 평등하게 같은 색의 옷을 입는 다는 뜻이 담겨 있던 것이죠. 하지만, <여성도>라는 말은 없습니다. 양복은 남성이 입는 것이니까요. 여성의 양장은 관련 법이 없기 때문에 서구식 멋쟁이가 되고 싶은 여성들은 알아서 옷을 입고 다녀야 했습니다. 1895년에 머리를 깍으라는 단발령이 내려졌지만, 그것은 남성들에게 주로 해당되는 것이었지 여성들의 머리를 깍으러 다니지는 않았습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당시 여성들은 시대의 흐름에서 소외되어 있었던 가부장제 사회였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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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옷으로

얼굴을

가리는

개량한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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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학당

신여성들의

개량 한복의 모습

당시 남성들은 단발한 여인을 모단걸(毛斷傑)이라면서 조롱했습니다. 모단걸은 모던 걸(modern girl)을 비꼬는 말이었는데, 더 심하게는 <못된 것>이라고 부르기도 했다는군요.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못된 걸>들은 늘어만 갑니다. 자 그럼 소개 글은 이 정도로 하고, 1880년대부터 일제시대까지 <못된 걸>들의 활약상과 그들만의 패션, 남성 사회에 반항하는 그들의 소신을 하나 하나 볼까요? 그리고 덧붙여 개화기와 일제시대 때 활약했던 연예인들도 <소녀시대>나 <원더걸스>처럼 인기스타였는지 한번 보도록 하죠. 다음 장으로 고고~~

2장에서는 개화기 여성들의 양장과 악세사리 같은 부분들의 자료들을 포스팅해보겠습니다.


    참고 문헌 및 더 자세한 내용이 나오는 책들....

한국문화사:사료로 본(조선후기편) 상세보기
한우근 외편 지음 | 일지사 펴냄

신여성(매체로 본 근대 여성 풍속사) 상세보기
연구공간수유+너머근대매체연구 지음 | 한겨레신문사 펴냄
잡지 <신여성>을 통해 근대 여성의 풍속사를 살펴보는 책. 수유연구실에서 활동하고 있는 9명의 소장학자들의 2년 여에 걸쳐 완성한 이 책은, 단순한 근대 사료 연구를 뛰어넘어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근대잡지 <신여성>을 비판적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신여성>의 기사를 통해 당시의 연애관, 결혼관, 육아, 사회진출 등에 관한 근대 여성의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또한 <신여성>의 탄생
근대 여성 제국을 거쳐 조선으로 회유하다 상세보기
박선미 지음 | 창비 펴냄
조선의 여성들은 왜 일본으로 갔을까? <근대 여성, 제국을 거쳐 조선으로 회유하다>는 일제하 조선인 여학생들의 일본유학 실상을 총체적으로 연구한 책이다. 일제하 조선에서 일본으로 유학한 여학생들의 의식과 귀국 후의 삶, 그들이 조선사회에 끼친 영향 등을 밝히고 있다. 단편적인 여자유학생 연구를 넘어서, 당시 유학생들의 구술 등의 자료를 바탕으로 과거를 생생하게 복원해낸다. 식민지지배로 조선인은 근대
여성의 근대 근대의 여성 상세보기
김경일 지음 | 푸른역사 펴냄
20세기 전반기 식민지 조선 사회에 나타난 '신여성'과 이를 둘러싼 담론 및 사회 현상을 '근대성'에 입각하여 연구한 책. 여성에 대한 개념 정의와 변천부터 민족주의와 페미니즘을 둘러싼 신여성의 자기정체성 문제까지를 날카롭게 분석하고 있다. 저자는 성과 사랑, 신체와 단발, 스포츠, 소비와 유행, 지식과 교육, 일과 직업 등 여러 영역에 걸친 신여성 담론의 계보를 정리한다. 또한 여성에 관한 상당수의 연구들이 범하고
한국의 식민지 근대와 여성공간 상세보기
태혜숙 외 지음 | 여이연 펴냄
우리 사회의 식민성을 '탈'해 보려는 이론적 노력이 근자에 활발하다. 이러한 탈식민성을 향한 지향의 핵심에 여성을 갖다 놓고자 하는 것이 이 책의 기본 입장이자 목적이다. 이 책은 식민지 근대공간의 핵심이면서도 계속 무시되고 비가시화되어 온 여성들의 일상과 삶과 이야기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우리의 식민지 근대성을 새롭게 조명하고자 한다. 그동안 식민지 근대를 조명해온 주도적인 담론은 제국주의, 민족, 식민성을
모던의 유혹 모던의 눈물 상세보기
노형석 지음 | 생각의나무 펴냄
근대 자료수집가 이종학 선생이 평생 발굴 수집한 290장의 희귀 사진과 도판을 통해 좀처럼 볼 수 없었던 한국 근대의 역사적 풍경과 그 현재 진행형의 의미를 실펴보는 책. 일제침략사와 관련된 사료들을 바탕으로 근대사의 숨겨진 이면들을 재성찰하는 이 책은 식민지 시대의 세상과 일상에 대한 가치관들을 새롭게 보여주며 기억 속에 묻혔던 근대성의 생채기들을 되돌아보게 한다. 1920년대 서울 시내를 한눈에 보여주는 '경성
뜻밖의 한국사 상세보기
김경훈 지음 | 오늘의책 펴냄
역사하면 떠오르는 게 뭐지? 피를 보는 정쟁? 이 책은 '역사'라는 너무 거창한 이름에 짓눌려서 스스로 숨어버린 우리네 생활 속의 자부심을 찾아낸 이야기다. 우리가 잘 몰랐던 역사 속 뜻밖의 이야기들.『뜻밖의 한국사』는 역사 속에 묻혀 있던 옛날 사람들의 성, 먹거리문화, 풍속, 정치, 경제 등 주변에서 쉽게 다룰 수 있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몇백년 전에도 전승되어왔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삶들이야말로 진짜 살아
신여성 상세보기
문옥표 외 지음 | 청년사 펴냄
일제식민지시대에 출현한 새로운 행동양식의 여성들. 구시대의 젠더질서와 사상을 거부하고 남녀평등을 희구하였던 선구자들. '여성'으로서의 해방과 '민족'으로서의 해방에 고뇌하고, 좌절하였던 그 궤적을 한 ·일 공동연구를 통해 현재의 시점에서 재조명했다.
계집은 어떻게 여성이 되었나(서해역사문고 1) 상세보기
이임하 지음 | 서해문집 펴냄
부녀, 현모양처, 신여성, 모던걸, 공순이, 양공주, 기생, 미스 김...... 여성들의 또 다른 이름이었던 이 명칭들에는 좌절과 도전으로 채워진 근현대사 속 여성의 역사가 살아 있다. 이 책은 지난 100년 동안 이 땅에 살면서, 사회의 편견과 권력에 맞서 제 이름을 찾기 위해 싸워 온 여성들의 이야기다.
조선의 뒷골목 풍경 상세보기
강명관 지음 | 푸른역사 펴냄
조선의 옛 풍경을 상상해보자. 먼저 떠오르는 것이 뭘까? 추상적으로 커다란 궁궐과 왕족들의 우아한 풍채만을 떠올린다면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유흥계 호령한 무뢰배들, 투전 노름에 골몰한 도박꾼, 술과 풍악으로 일생을 보낸 탕자들, 반양반의 기치를 높이 든 비밀 폭력조직... 옛 조선의 뒷골목을 채웠던 이들의 모습은 우리의 역사가 미처 기록하지 못했던 또 하나의 역사이다. 이 책은 잊혀진 그들의 생기발랄한 삶의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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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1882년. 임오군란이 조선에 미친 영향에 대한 글

1. 1882년이 나타내는 시대적 상징은 무엇인가?

이번 장에서는 임오군란에 대하여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임오군란 하면 보통 <임오년에 일어난 구식 군대의 난>이라고 알고 있고, 또 교과서에서도 그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시시콜콜 다 아는 이야기, 교과서에 써 있는 이야기를 굳이 또 적을 필요가 있을까... 고민끝에 이번 포스트에서는 임오군란을 1882년이 가지는 상징성을 가지고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도록 하겠습니다. 임오군란이 과연 군란인가? 이런 주제로요. 일단 지난 장까지 설명했던 <개화, 위정척사, 조선책략>이라는 부분을 복습해 놓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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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임오군란 때의 격전지 모습

임오군란이 일어난 1882년의 조선은 국론이 분열되고, 국가 체제가 동요하는 시기였습니다. 그 이유는 1880년 조선 책략이 유입되고 민씨정권이 적극적인 개화정책을 실시하면서부터 <조선책략 거부운동>이 본격화되었기 때문이죠. 외국과 통상을 하겠다는 개화파와 민씨정권에 대하여 기존의 성리학 유생들은 <위정척사운동>을 <정권타도 운동>으로 발전시켜 가면서 국가 위기 상황이 발생하였습니다.

거기에 세도정치이래 계속된 정치의 혼란은 백성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제시해주지 못하였죠. 백성들 입장에서 생각해보세요. 정치는 혼란하지, 세금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올라갔지, 부농과 소작농의 격차는 더욱 벌어졌지.... 1882년의 농민들은 산업혁명기의 영국과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농민들은 몰락하여 개화된 도시로 몰려가서 도시 빈민을 형성하였고, 도시에서는 소수 자본가 집단이 성장하려는 중이었습니다.

실제 1882년의 상황을 가지고 이후의 상황을 추론할 수도 있다고 생각이 되네요. 동학운동은 변화하는 사회체제 속에서 농민들이 살 길을 찾았던 운동이고, 갑신정변은 소수 자본가 집단의 영향력을 밀어주면서 우리나라에서 부르조아지 근대화를 시도하려던 개혁이었습니다. 갑오개혁은 전근대적인 문제점들을 조금이나마 시정하면서 신분제, 조세제를 개혁혀였죠.

1882년에는 <조선책략>의 유입 이후, 개화, 척사라는 거대한 시대 흐름이 정면 충돌하는 한 해였습니다. 개화파들은 1882년 <조미수호조약>을 맺고 조선책략의 내용대로 미국을 통상국으로 인정합니다. 그러나 백성들과 보수파들은 그것을 환영하였을까요? 아니죠. 백성들은 일본과 서양 열강이 조선의 상권, 농업권에 침투하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민씨세력의 개화정책에 회의를 느낀 보수파들과, 세도정치 이래 문란한 정치에 질린 민중들은 강력한 리더쉽을 가진 흥선대원군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이야 말로, 강력한 쇄국정책으로 일본세력 등 외세의 침투에 대항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점을 다시 생각한 것이죠.

2. 1882년... 민중들은 반란거리가 필요했다.

1882년의 상황은 홍경래의 난, 진주 농민 봉기 등의 농민 반란이 계속 일어나던 세도 정치 이후, 1863 - 1873년까지 농민봉기가 없었던 <농민운동의 침체기>입니다. 그 이유는 10년간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면서 강력한 리더쉽으로 농민들의 요구 사항이었던 <삼정의 문란>을 해결하면서, 조세 제도를 일부 개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876년 민씨정권이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면서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민중들은 한없이 추락해가는 자신들의 지위에 불만을 가질 수 밖에 없었고, 개화정책의 과도기적 분위기 속에서 농민들의 몰락으로 도시 빈민이 한없이 늘어만 갔습니다. 즉, 임오군란 때 군인들의 봉기가 아니였어도 이미 농민들은 반란을 일으킬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몇몇 구식군대의 봉기인 임오군란이 조선 역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정도로 크게 번진 이유는 임오군란 직후 <도시 빈민들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연구가 더 이루어져서 역사가 다시 평가한다면 <임오 시민혁명>까지는 아니더라도, <민란적 성격을 가진 군인봉기>까지는 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임오군란과 같은 시민봉기가 있지 않았다면, 불만이 쌓일대로 쌓인 농민들의 <동학농민전쟁>은 10년이 앞당겨졌을지도 모릅니다.

실제 1882년은 외세로 인하여 민중이 시련을 겪기 시작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강화도 조약 이후, 정부의 세금 말고도 일본이 무역을 빙자하여 가져가는 쌀이 어마어마하였습니다. 조선 전역에서는 쌀값이 폭동하여 안그래도 힘든 빈민들의 생활을 더욱 어렵게 하였죠. 임오군란의 원인이 구식군인들의 월급이 1년 6개월 이상 밀렸다는 것에서 보았을 때도, 이 당시 쌀이 얼마나 귀한 것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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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임오군란 당시의 빈민의 모습

3. 구식 군인들의 불만은 <개화와 일본에 대한> 불만이었다.

임오군란의 직접적인 원인은 <구식군인에 대한 차별>입니다. 실제 민씨정권은 적극적인 개화정책을 추진하면서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양성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신식군대가 나라를 지키기 위한 군대라기 보다는 <지배층을 위한 군대>라는 편이 더 어울렸습니다. 예로, 조선 후기 서인 특정 가문이 집권을 하면서부터 조선의 군대는 국가의 군대라기 보다는 <서인>의 군대 역할을 하였습니다. 조선 전기 <5위>가 조선 후기 <5군영>으로 바뀌면서 부터였죠. 세도정치기에 특히 심했던 이 <지배층을 위한 군대 역할>이 흥선대원군기에 <국가를 위한 강력한 군대>로 재편되었지만, 민씨정권에서는 다시 <지배층을 위한 군대>로 전락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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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임오군란 당시 구식군인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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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임오군란 당시 신식군대의 모습

흥선대원군 때 강력하게 재편한 <5군영>을 민씨정권은 <2영>으로 줄여버립니다. 그러고 남는 돈을 신식군대에 투자한 것이지요. 신식군대를 정말 확실한 <국가 군대>로 육성했다면 좋았겠지만, 신식군대의 주요 구성원은 양반집 자제들이었습니다. 대우는 무지 좋았고, 돈먹는 귀신들이었지만 전투력은 글쎄요.... 거기에 그들을 가르치는 신식 장교가 군사 선진국이었던 일본 장교라는 점은 구식군대와 국민들을 아주 열받게 만드는 일이었죠. 또 신식군대의 제복을 마련한다는 이유 등으로 구식군대에게 1년이상 월급을 안주었다는 점도 임오군란의 원인이 되었씁니다. 결국, 임오군란을 일으킨 구식군인들의 불만은 헛돈쓰는 개화정책과 일본이 우리 내정과 군사권에 간섭하는 분위기가 싫다는 것이었죠.

4. 시민들이여, 일어나라!

1882년, 드디어 구식군인들이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사실, 신식군대에 비해 무기나 인력에서 부족한 구식군대의 폭동이 손쉽게 성공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 못하였습니다. 민씨정권도 구식군대를 우습게 보았거든요. 그러나, 문제는 이 폭동에 도시 빈민들과 일반 백성들이 적극 참여하여 <시민 폭동>적인 성격의 운동으로 발전하였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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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임오군란 때 구식 군인들의 폭동 경로

도시 빈민들은 군인들과 합세하여, 민씨일족들의 집을 불태우고 정부고관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일본 공사관으로 향합니다. 우리를 간섭하는 외세를 물리치자는 것이었죠. 그들은 일본인 교관을 죽이고, 일본 공사관에 불을 지릅니다. 성난 군중들은 궁궐에 침입하여 왕비인 민씨까지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구식군인들과 빈민들이 왕비의 얼굴을 알 수가 없었다는 점이지요. 민씨는 시녀 복장을 하고 궁밖으로 도망가 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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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임오군란 당시 나가사키로 도망간 일본 공사관 직원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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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임오군란을 피해 도망다니던 중의 명성황후 일기가 최근 발견되었다.

이렇게 국가 위기 상황이 발생하자 고종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에게 다시 정권을 넘기게 됩니다. 흥선대원군은 시민들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잘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개화정책을 다시 강력한 쇄국정책으로 되돌리기 시작합니다. 2영체제를 다시 5군영으로 돌려 구식군대를 강력한 상비군으로 정비하고, 개화기구인 통리기무아문을 폐지하였죠.

5. 민씨 정권의 반격으로 조선의 주도권은 <청>에게 넘어가다.

도망간 왕비 민씨는 다급함에 청에 도움을 요청합니다. 청군은 국모인 민씨의 부름이라는 근거를 들어 당당히 서울로 쳐들어와 흥선대원군을 납치하고, 민씨를 다시 궁궐로 돌려보냅니다. 임오군란은 결국 외세에 의해 실패하고, 시민들의 봉기는 무참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외교적 전환점이 마련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청나라의 전면적인 내정 간섭>이 시작되었다는 점입니다. 흥선대원군을 납치하고, 임오군란을 진압하면서 민씨를 도운 청나라는 아예 정치고문과 외교고문을 우리나라에 보내어 우리 나라에 종주권을 행사하려고 하였습니다. 호랑이를 잡으려다가 공룡을 불러온 셈이죠.(민씨정권은 위기때마다 일본, 청, 러시아 등 외세에 의존하였는데, 이것이 우리 개화기 근대사를 엉망으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럼 청나라가 우리의 내정을 적극적으로 간섭하려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성장하는 일본 때문이었습니다. 청은 일본이 조선에 간섭하는 것을 보면서 동아시아 전체에서 일본을 막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일본은 청, 러시아 등 대륙 세력을 막고 동남아시아를 포함한 해양 전체를 일본의 상품시장으로 개척할 야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강화도 조약을 맺을 때에도 일본이 요구한 첫째 내용이 바로 <조선은 자주국가이다>라는 조약이었습니다. 조선이 자주국이어야 청 등이 조선에 대해 종주권을 행사할 수 없을 테니까요.

청 역시 이러한 일본의 야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청이 임오군란 이후 우리 내정에 적극 간섭한 이유는 조선시대 이래 <형식적인 조공무역>을 통해 속국 관계로 생각하던 조선을 <실제적인 식민지>로 만듦으로서 일본이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이 당시 청의 실권을 잡고 있던 사람은 그 유명한 <위안스카이>였습니다. 위안스카이의 목적은 조선에 친청 정권을 수립하여 <조선은 청의 꼭두각시이다>는 것을 확실히 하려는 것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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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스카이

따라서 청은 민씨정권의 개혁기구인 통리기무아문을 개편하여, 통리교섭통상아문(외교부), 통리군국사무아문(행정부)를 신설합니다. 또 5군영도 청나라 식으로 개편하는데, 위안스카이의 직속군영인 <친군영>을 세우고, 그 밑에 4개의 군영을 두어 모든 조선의 군권을 위안스카이가 장악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조선을 감시하기 위해 군사고문인 마젠창, 외교고문인 뮐렌도르프를 파견하여 모든 정치 상황을 감시하였습니다.

6. 조청 상민 무역 장정을 체결하다.

1882년은 우리나라의 경제면에서도 획기적인 해입니다. 임오군란 이후, 청은 우리 나라에서 자유로이 무역을 하면서 경제적으로 일본을 누르기 위해 <조청수륙 무역장정>을 발표하였기 때문입니다.

전문(前文) : 조선이 속방임과 청상의 특혜규정
 “오직 이번에 체결하는 장정은 중국이 속방을 우대하는 후의에서 나온 것인 만큼 다른 각국과 일체 균점하는 예와 다르다”

 제 1조 청국 상무(商務)위원의 파견 및 이들의 처우, 북양대신과 조선국왕이 대등한 위치임을 규정.
 제 2조 조선내에서의 청 상무위원의 치외법권을 인정
 제 3조 조난구호 및 평안.황해도와 산동.봉천 연안지방에서의 어채 허용(청국인의 조선연안 어업권을 인정). 관세규정
 제 4조 북경과 한성.양화진에서의 개잔(開棧)무역을 허용하되 양국상민의 내지채판(內地采辦) 금지. 단 내지채판 및 유력(遊歷)이 필요할 경우 지방관의 집조(執照)를 받을 것.(개항장이 아닌 서울 양화진(楊花津)에 청국인이 점포를 개설할 수 있는 권리와 도성에서의 상행위 허용. 호조(護照:일종의 여행증명)를 가진 자에게는 개항장 밖의 내륙통상권과 연안무역권까지 인정) 관세규정.
 제 5조 세칙규정. 책문.의주, 훈춘.회령에서의 개시
 제 6조 홍삼무역과 세칙규정(국경무역에서 홍삼을 제외한 5 % 관세)
 제 7조 초상국윤선(招商局輪船) 운항 및 청 병선의 조선연해 왕래.정박
 제 8조 장정의 수정은 북양대신과 조선국왕의 자문으로 결정.

조청상민수륙 무역장정은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우리에게 경제적으로 치명적인 무역약관이었습니다. 위에 파란 줄 보이시죠? 그것 때문입니다. 이 조약의 핵심은 <조선에서 청상인이 자유롭게 거주하고, 여행하고, 영업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규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조약으로 청나라는 이제 <항구에서의 거류지 무역>뿐만 아니라, 내륙에서의 자유로운 무역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전에 배웠던 <최혜국 대우>... 기억나시나요? 최혜국 대우란, 어느 한 나라에게 맺은 정치, 경제적 조약을 조약 당사자인 국가에게도 똑같이 적용한다는 불평등 조약의 내용을 말합니다. 이 청과 맺은 <내륙 무역 허가>는 최혜국 대우에 의해 일본, 미국, 영국 등등 다른 모든 국가에게도 적용됩니다. 그 결과 우리 경제는 이 때부터 파탄나기 시작하고, 우리 전통 중계무역상인으로 볼 수 있는 객주, 여각 등은 몰락하게 되죠.

또, 이 장정의 승인으로 일본도 조일수호조규 속약과 조일 통상장정을 개정할 것을 요구하게 되고, 결국 1880년대 중반부터 청과 일본은 조선의 경제권을 놓고 치열한 두뇌싸움을 벌이게 됩니다. 그 결과는 1889년 방곡령과 1894년 청일전쟁의 일본 승리로 인해 일본이 경제적 주도권을 가져가게 되죠.

7. 일본도 얻을 것은 다 얻는다 - 제물포 조약의 체결

임오군란은 청의 전면적 간섭을 초래하였지만, 일본에 단숨에 물러설 수는 없었습니다. 일본은 일본 공사관이 불타고, 일본인들이 죽었다는 이유로 우리 정부에 강력한 손해 배상을 요구합니다. 또, 일본 공사관이 다시는 피해보지 않도록 일본 공사관에 경비병을 주둔시킨다는 명목으로 우리 나라에 <군대>를 파견합니다. 이것이 제물포 조약입니다. 제물포 조약의 내용을 줄이면, 청에 의해 입지가 약해진 일본이 조선에 <군대 주둔>을 하면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계속 유지해 나간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 조약은 결국 조선에서 청의 군대와 일본의 군대가 동시에 거주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훗날, 갑신정변 때 맺은 톄진 조약으로 청과 일본군대는 <동시파병 공동철수>를 결의하게 되자만, 그 조약은 동학운동 때 청일전쟁을 야기하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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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8) 풍자화 - 제물포 조약 체결을 위한 일본의 진격

8. 급진개화파가 등장하다.

임오군란의 실패로 인해 청이 조선에 대한 전면적인 내정간섭을 하였습니다. 이 것은 민씨정권이 스스로 개화를 할 수 없게 됨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온건개화파들의 입지는 약해졌고, 반대로 <일본의 힘을 빌려서라도 청을 타도해야 한다>는 급진개화파의 이론이 힘을 얻게 됩니다. 특히, 급진개화파는 청의 경제 구문인 묄렌도르프와 대립하면서 청의 보수적 정책에 반발하였고, 고종을 사이에 두고 친청세력과 급진개화세력이 대립하였습니다. 이 부분은 갑신정변에서 다루도록 하죠.

오늘은 임오군란과 그 결과에 대하여 글을 적어보았습니다. 하루종일 일하고, 밤에 술을 먹고... 새벽에 글을 쓰려니깐 글이 횡설수설이네요. 내일은 말짱한 정신으로 아자아자....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은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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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9)임오군란에 대한 풍자화


- 이 글을 위해 참고한 역사도서 모음 : 자세한 내용은 이 책에.....

찬란한 여명 4:임오군란 상세보기
신봉승 지음 | 갑인출판사 펴냄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상세보기
김용구 지음 | 원(이보란) 펴냄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에 대하여 19세기 세계정세와 관련하여 설명한 연구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같이 한국사와 세계사의 충돌에서 나오는 격동적인 사건들에 우리가 어떻게 대처했고 그런 대응 태도가 남긴 정신적 유산이 오늘날 국제정치 구조에서 살아가는 데에 치유할 것이 있는지 해부한다.
한국 근현대사(숨마쿰라우데) 상세보기
박준규 지음 | 이룸이앤비 펴냄
최상위권을 지향하는 수험생들을 위한 숨마쿰라우데 시리즈 『한국 근ㆍ현대사』. 숨마쿰라우데의 본문은 전체의 난이도에 따라 2중 체제(CUM LAUDE 단계와 SUMMA CUM LAUDE 단계)로 구성하였다. 즉, 교과 학습 내용에 대한 본문 설명 2단계와 해당 단원의 문제 부분 2단계로 짜여져 있어 심화 학습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학습 개념을 확실히 잡으면 내신, 수능, 심층 면접 등 어떤 시험도 두렵지 않게 될 것이다.
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상세보기
김인기외 지음 | 두리미디어 펴냄
교과서에서 소홀히 해 왔던 한국 근현대사의 논쟁점을 다양하게 소개하는 <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외세 침략의 시발점이 된 강화도조약의 배경에서부터 현 참여정부의 탄핵 정국까지, 청소년들이 쉽고 흥미롭게 읽을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질곡의 우리 근현대사를 올바르게 조명하고 현재와 미래에 대해 발전적이고 건강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최근의 논쟁점들까지 투명하게 정리하였다. 이 책은 근현대 역사 교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상세보기
김육훈 지음 | 휴머니스트 펴냄
미래의 눈으로 한국 근현대사를 읽는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는 우리나라 청소년을 위한 살아있는 역사 교과서이다.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야말로 오랜 세월의 분투를 통해 달성한, 그래서 돌이킬 수 없는 우리 모두의 현재임을 분명히 하면서 우리가 실현한 민주주의, 우리가 지향해야 할 민주주의란 관점에서 한국 근현대사를 살펴본다. 대안적인 특징점을 바탕으로 21세기 근현대사 인식과 역사교육, 그리고
함께 보는 한국근현대사(서해역사책방 5) 상세보기
역사학연구소 지음 | 서해문집 펴냄
이 책은 역사 사실을 바탕으로 서술하되 새로운 연구성과를 받아들이고 이를 종합 정리했다. 근현대사를 통사로 서술하는 한편 각 장은 각 시기의 특정 주제를 중심으로 서술했으며, 사진과 자료를 직접 수록해 객관성을 높였다. 또 각 강의 끝부분에 기존의 중요 연구 성과와 최근의 성과를 실어 참고할 수 있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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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가족이 함께 읽는 <중국 역사 이야기> 제14권. 중국의 전체 역사를 시대별, 왕조별로 나누어 그 시대의 중요한 역사적 사실과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를 엮은 책이다. 중국 역사에 쉽게 접근하고 싶어하는 초등학생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이 책은 주왕조시대부터 청나라까지 약 3천년에 이르는 중국 역사 대부분의 중요한 사건과 인물들을 총망라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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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우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펴냄
대학의 교양 한국사 교재. 크게 2개 부로 나눠 제1부에서는 한국사의 각 시대별 특징을 14주제로 압축하여 정리하고, 2부에서는 문화사와 사회경제사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10개의 주제를 따로 설정하여 분류사 형식으로 서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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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전달하고 구체적 사실들의 시대적ㆍ사회적 연결관계를 찾아 이를 체계화한 한국 역사서. 한국사의 새로운 이해, 원시공동체의 사회,성읍국가와 연맹왕국,문벌귀족의 사회, 민족국가의 태동과제국주의의 침략, 민주주의의 성장 등 17개 장으로 구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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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역사교사모임 지음 | 휴머니스트 펴냄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2 20세기를 넘어 새로운미래로> 20세기의 지난 역사를 되돌아 보고 21세기 새로운 미래를 어떤 모습으로 가꿀 것인지를 생각해 보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또한 본문으로 들어가는 창에는 단원마다 역사 사진에 청소년 캐릭터를 넣어 역사 체험을 좀더 재미있고 생생하게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여성과 역사에서는 세상의 절반이면서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여성들의 삶을 진지하게 들여다보았고 '청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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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일본사 이야기 23장) 일본의 개항 과정과 미일수호통상조약의 내용

오늘 이야기할 부분은 일본사에서 우리가 가장 관심있는 부분 중의 하나인 일본의 개항과정입니다. 일본 근대사의 핵심인 메이지 유신을 다루기 위해 그 배경을 살펴보는 시간이죠... 그럼 시작해 볼까요?

1. 다양한 서양선박들이 나타나다...

일본의 근대화기인 19세기 전반에 수많은 서양의 배들이 일본에게 장사를 요구합니다. 이 때 서양 선박들은 일본만 간 것은 아니였죠. 세도정치기인 조선과 기울고 있던 대륙의 청나라에도 서양배들은 끊임없이 장사를 요구하는 시기였거든요. 당시 인도라던가, 동남아시아 등 대부분의 아시아 지역들이 서양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압력을 받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서양이 아시아에 통상(장사) 요구를 하게 된 것은, 서양의 산업혁명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영국에서 시작된 유럽의 산업혁명은 사람의 노동 대신, 기계를 이용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면서 엄청난 생산량 증가를 가져왔습니다.

특히, 산업혁명의 출발지인 영국은 <양모산업>이 발달한 나라였습니다. 19세기 영국에서 진행된 인클로저 운동 기억하시나요? 인클로저(En_closer)란, 말 그대로 양을 기르기 위해 안에다가(in), 울타리를 치는(close) 사업이었죠. 원래 인클로저는 17세기쯤에 시작되었는데, 19세기 인클로저는 양 뿐만 아니라 각종 공장 기계 시설을 확보하기 위해 토지에 소유권을 주장하고, 원주민과 농업 노동자들을 추방하는 형태로 까지 전개됩니다.

결국, 산업혁명을 통해 공장에서 찍어낸 가장 큰 수출품이 바로 면직물로 대표되는 <옷>이었죠. 그러나, 각종 산업 규모가 커지면서 서양은 자체 수요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단계에 이릅니다. 원료은 옷감을 가져올 식민지가 필요했고, 더불어 제품을 팔아먹을 시장도 필요하게 되었죠. 19세기 유럽의 각 국가들은 산업혁명의 단계에 따라 시차를 두고 아시아에 각각 진출하게 됩니다.

조선과 에도막부에 가장 먼저 접근한 세력은 에제 에카테리나 2세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러시아였습니다. 지리적으로 러시아가 가장 가까운 국가였으니까요. 그러나, 러시아는 영국보다 훨씬 산업혁명 단계가 늦었던 관계로, 동북아시아에서 제대로 된 무역을 하지 못한 채 영토 확장만 추구하였습니다. 특히, 유럽에 피바람을 불러온 나폴레옹 전쟁 때, 대륙봉쇄령을 어기면서까지 전쟁에 직접 관여했기 때문에 일본에 진출하지 못하였죠.

실제로 일본에 통상을 요구한 국가는 오랫동안 일본과 교류하던 네덜란드였습니다. 이미 일본은 네덜란드의 <난학>을 받아들이는 등 네덜란드와는 친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죠. 여기에 도전장을 낸 국가가 산업혁명의 선두주자 영국이었습니다. 영국은 에도막부에게 상업협정을 맺을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세계와의 교류를 단절해 온 에도막부는 밀려오는 외국 선박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도 모르고 우왕좌왕하였습니다. 기껏 처리한다고 내놓은 법이 <무휼령>이란 법이었죠.

무휼령이란, 외국세력이 어떤 의도이고, 어느 정도 힘인지 모르기 때문에, 외국 선박이 오면 조용히 사바사바~(?)해서 돌려보낸다는 정책입니다. 외국에게 납작 업드려 배에 연료도 넣어주고, 물도 주고, 먹을 것도 준 다음에 바아바이~~ 환영해주고 보내는 정책이죠.

그러나, 이 무휼령이 영국에게는 먹히지 않았습니다. 영국은 먹을 것 얻으러 먼 아시아까지 온 것이 아니였거든요. 그들이 원한 건 <통상조약>이었습니다. 특히, 영국 페리 대령의 페튼호는 강경하였습니다. 영국 선박은 라이벌인 프랑스가 일본에 진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 네덜란드인을 인질로 잡기 까지 하면서 일본을 압박하였습니다.

결국 일본은 <무휼령>을 버리고, 서양 선박을 직접 공격하는 방법을 택하게 됩니다. 이것을 강압적이고 폭압적인 외세는 힘으로 제압하다고 하여 <타불령>이라고 합니다. 일본은 첫 진출한 영국을 몰아냈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였습니다. 당시 영국은 중국 청과의 아편전쟁을 통해 대륙부터 장악하느라 더 이상 일본에 신경쓰지 못하였거든요.

영국이 대륙에 신경쓰는 동안, 일본에 진출한 국가는 태평양을 건너 온 미국이었습니다. 미국은 이제 막 산업혁명을 진행하고 있던 국가였죠. 일본은 그 강력한 제국주의 국가 중 하나인 미국에게 더 이상 반항하지 못하였습니다. 에도 막부는 2-3차례 미국과의 통상요구를 거부하다가 결국 1854년 미일화친조약을 맺고, 세계사의 일원으로 편입됩니다.

2. 미일 수호 통상 조약의 내용들....

이제 일본은 미국이란 나라와 조약(수교)을 맺습니다. 아시아의 근대화에서 각국이 서양과 맺은 조약들은 공통적인 속성을 갖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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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교를 주장한 서양의 국가가 원한 것은 무역을 위한 <항구개항>입니다. 항구를 개항해서 자신들의 물품을 아시아에 팔고, 필요한 원료를 자국에 가져가려는 것이죠. 그리고, 개항한 항구를 지키기 위해 항구 근처에 독립적인 영역을 확보하고, 원활한 장사를 위해 각종 법과 관세률을 적용하는 것이죠.

수교를 허락한 아시아 국가는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평등한 관계에서 서양식 근대화 체계를 갖추는 것을 원하지만 실제 그렇게 된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서양 세력이 1차적으로 원한 것은 산업혁명으로 마련된 잉여자본을 투자할 대상국을 찾는 것이었으니까요.

일본의 첫 수교 역시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1854년 미국과 최초로 맺은 조약은 <미일화친조약>의 핵심 내용은 <항구개항>입니다. 일본은 에도 막부 내내 네덜란드만을 무역 대상국으로 지정했습니다. 나가사키 항구 1군데에서만 무역을 해왔죠. 나가사키는 일본 서북쪽 끝으로 일본 수도와는 동떨어진 곳이어진 항구도시였습니다.

미국은 조약을 맺으면서 <하코다테와 시모다> 2개의 항구 개항을 요구합니다. 일본이 항구를 개항하면서 미국의 물품이 일본에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미국은 1858년 추가 조약(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 제국주의 국가가 식민지국가에 강요하는 대부분의 내용들을 조약에 추가시켰습니다. 그 내용은, 치외법권(영사재판권), 관세권, 최혜국 대우 등이 포함된 불평등 조약이었죠. 한국사할 때, 하나 하나를 자세히 다루었지만, 다시 한 번 이 내용들을 이야기해 볼께요.

치외법권은 불평등 조약을 거론할 때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 내용입니다. 그 내용은, 제국주의 국가들이 무역의 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해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내용을 담은 것이지요. 만약 미국인이 일본에서 범죄를 저지를 경우, 일본은 그 외국인을 재판할 수 없습니다. 그 죄가 살인이라고 해도 말이죠. 미국인은 미국에 송환되어 재판을 받게 됩니다. 치외법권은 한 국가의 자주성마저 침해하는 조항입니다.

관세권은 무역에 대한 일방적인 독점 조약입니다. 미국이 일본에 물품을 판매한다고 했을 때, 일본은 미국물건에 대해서 자유롭게 관세(세금)을 부여할 수 없습니다. 세금 장벽이 낮아질수록 미국은 자유롭게 물품을 팔 수 있고, 일본으로서는 외국 물품을 막을 수 없을뿐더러 국가 재정에도 타격을 입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최혜국 대우는 조약 당사자인 <미국>이 일본에서 누릴 수 있는 대우를 다른 국가 이상으로 설정한다는 내용입니다. 만약 영국이나 프랑스가 더 좋은 조건에서 일본과 통상 조약을 맺는 다면, 미국은 그들 국가만큼의 대우를 자동으로 받는 다는 내용이죠. 따라서 다른 국가와의 불평등한 조약 내용이 이전에 맺은 미국과의 조약에도 영향을 준다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훗날 일본이 조선과 <강화도 조약> 및 다른 각종 조약을 맺을 때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고스란히 써 먹은 내용이기도 합니다.

근현대사에서 아시아 국가가 서양과 조약을 맺을 때, 첫 조약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왜냐면, 언급한 <최혜국 대우>라는 것을 모든 서양국가가 요구하기 때문에 하나의 국가와 맺은 조약의 내용은 다른 국가들과 조약을 맺을 때 거의 자동으로 포함되기 때문이죠. 영국, 네덜란드, 러시아 등 서양의 국가들은 일본과 조약을 맺으면서 미국과 맺은 조약의 내용 거의 전부를 똑같이 요구하고, 몇 가지를 더 추가 요구하게 됩니다.

당시, 서양 제국주의 세력들은 서로 간의 충돌을 피하기 위한 논리로 <균점의 논리>라는 이론을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균점의 원리란, 영국보다 늦게 식민지 시장에 뛰어든 미국이 주장한 것입니다. 그 내용은, 강한 나라들은 거대한 식민지 시장이 눈앞에 있을 경우에 서로 전쟁을 통해 영역을 넓히는 것이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각종 조약을 균등하게 맺음으로서 시장을 나눠먹는다는 원리입니다.

이 균점의 원리는 아직 어떤 나라도 주도권을 잡지 못한 중국, 조선, 일본 등 동북 아시아에서 적용되었습니다. 서양 각국은 이곳에서 철도든 항만이든, 광산이든 하나의 권리라도 더 갖기 위해 하나라도 더 많은 조약을 청, 조선, 에도막부와 체결하려고 난리였죠.

결국 일본은 미국부터 시작해 서양 각국과 조약을 맺는 동안 서양 각국이 원하는 항구를 모두 개방하게 됩니다. 이 때 서양과 무역을 하기 위해 개방한 대표적인 무역항은 <요코하마>였습니다. 미국과의 무역 중심지였죠. 그러나 미국과 무역에서 5개 항구를 개항한 것을 시작으로 점차 일본 대부분의 항구들이 개방됩니다.

자, 그럼 개항이 일본 에도막부와 서민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고, 또 어떤 현상이 일어났기에 <메이지 유신>이라는 거대한 개혁이 시작되었을까요? 다음 장에서는 통상 조약 이후에 벌어진 에도 막부 타도 운동에 대해 이야기 해보죠.... 막부 타도로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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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일본사 이야기 22> 일본의 근대화 1 - 에도막부의 중농주의와 계급분화

1. 에도막부가 흔들리기 시작하다.

오늘부터는 일본 근현대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일본 근대사하면 생각나는 것은? 당연히 <메이지 유신>이겠죠? 그럼, 오늘부터는 <메이지 유신>을 키워드로 삼아, 메이지 유신이 일어난 배경과 내용, 그리고 메이지 유신이 일본 역사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를 살펴보아야겠네요. 그럼 한번 출발해 봅시다...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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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장까지 에도 막부에 대해서 이야기했었죠. 그런데, 에도 막부를 다룰 때 아주 중요한 키워드를 <막부의 경제정책>에서 찾아보았습니다. 일본과 동아시아의 17-18세기는 <상품화폐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시기였습니다.

중국과 조선, 일본에서는 새로운 농법이 계속 개발되면서 상업역시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었죠. 당시 동아시아 각 국가에는 부유한 농민, 부유한 상인, 상품경제 발달과 화폐유통의 증가라는 수식어가 공통적으로 따라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아시아 3국은 전통적으로 농업경제를 우선시하였고, 당시 3국은 공통적으로 <성리학이 관학화>된 사회였습니다. 성리학에서는 농업을 제 1의 근본산업으로, 상업은 농업을 보조하는 보조산업으로 인식하였죠. 성리학에서는 토지를 바탕으로 한 신분제도와 차별적인 윤리의식을 강조했으니까요.

일본 역시 그랬습니다. 에도 막부는 쇄국정책으로 서양과의 교역을 막는 입장이었고, 성장하는 상업자본은 농촌 자본으로 돌리던가, 막부의 재정으로 돌리려는 극단적인 방책을 사용하여 <사회제도와 신분제도>를 유지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상품 화폐 경제의 발전은 시대의 흐름이었습니다. 막부는 이 상품 화폐 경제로 인한 이득을 <세금>으로 환원하는 정책을 사용하였습니다. 상업자본은 성장하면서도, 그 이윤의 전부를 재투자할 수 없었고, 자본이 없으면서 세금이 늘어난 하층 무사들은 빈곤함으로 힘겨워하였습니다.

일본은 18세기가 지나가면서 사회분화가 심해져갑니다. 부자농민들(호농, 부농)은 상품작물을 재배하면서 막부가 원하는 세금을 낼 수 있었고, 남은 자본으로 수공업에 뛰어들어 대기업을 이루게 됩니다. 상업자본으로 성장한 부유상인들은 전국적인 상업망을 이용하여 장시를 활성화하였고, 도시 중심의 상업문화(죠닌문화)를 만들어 갔습니다.

그러나, 자본이 없는 자들은 한없이 추락하게 됩니다. 막부가 원하는 세금을 낼 수 없는 가난한 농민들은 소작농이 되거나, 공장 노동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조선의 18세기 몰락한 양반들이 상민들에게 천대받는 시기가 있었던 것처럼, 일본의 몰락한 무사들은 부유한 상민보다 못한 처지가 됩니다. 하층 무사들과 가난한 농민들은 점차 에도 막부에 질리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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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막부에 대한 불만 세력이 늘어날수록 막부는 더욱 더 많은 세금을 걷어내면서 막부를 유지해나가는 상책도, 중책도 아닌 최하책으로 국가 경제를 이끌어가고 있었습니다.

막부의 세금은 토지에 집중되었습니다. 18세기 당시 청, 조선, 일본은 모두 세금을 <토지>로 집중시켜가고 있었습니다. 청은 <일조편법과 지정은제>, 조선의 <도결제와 삼정의 문란> 등은 세금을 가장 걷기 편한 <토지>에 때려 버린 제도였죠. 일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본의 세금은 영지세(연공)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세금이 증가할수록 시중의 물가는 뛰었고 백성들의 삶은 더욱 고달펐죠. 물가가 오르면 새로 성장하는 도시상인이나, 부유한 농민들은 시세차를 이용해 더욱 재산을 불렸고, 능력없는 하층민들은 더욱 빈곤해집니다.

더 문제점은, 그나마 성장하는 새로운 농민, 상인들마저 국가가 활용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이들에게 세금만을 걷어 막부체제를 유지하려고 하였지 이들을 이용하여 <근대화된 일본>을 만들겠다는 의지가 막부에게는 없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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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본의 근대화는 <메이지 유신>인가, <죠닌 문화>인가의 논쟁

동아시아 3국의 근대화 논쟁은 각국에서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동아시아 3국의 근대화가 자생적이지 못하고 외세에 의해 강요된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로, 중국에서는 영국과의 아편전쟁으로 인해서 근대화가 되었는가라는 논쟁이 있습니다. 아편전쟁이 중국의 근대화라면 중국의 근현대사는 유럽에 의해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에 중국 학자들은 명, 청대의 사회경제적 발전에서 근대화의 가능성을 찾으려고 합니다.

조선에서 근대화의 시작은 <일본과의 강화도 조약>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학자들간에는 치열한 논쟁이 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흥선대원군기에 이미 경제적으로 자본주의, 정치적으로 민주주의 운동이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어떤 학자들은 실학자들로부터 근대화의 싹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실제 근대화의 법령이 반포된 갑오개혁기라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학자들은 개화파의 등장이나 갑신정변이 근대화의 계기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개혁군주인 정조 때부터 근대화가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죠.

중요한 것은, 근대화라는 개념이 성립되는 조건이 무엇인가라는 점입니다. 근대화라는 것은 최소한 3가지를 인식할 수 있는 시기를 말합니다. 일단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가 도입된 시기를 말합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 사상>이 도입된 시기를 근대화의 기점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두 사상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근대화라고 부를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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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의 근대화 논쟁은 크게 두 시기를 놓고 벌어지는 논쟁입니다. 두 시기란, 에도 막부 후기와 메이지 유신기를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일본의 근대화는 메이지 유신에서 찾곤 합니다.(일본 교과서 견해)

일본이 서구 열강들의 자본주의, 민주주의 사상을 직접 받아들여 실천한 시기가 메이지 유신기였고, 그것을 법으로 반포한 것도 메이지 유신기입니다. 그리고 메이지 유신은 일본의 전통적 가치관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잘못된 관습을 타파하고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일본 근대화의 공신은 메이지 유신기의 뛰어난 <몇몇 인물>들의 업적에서 찾곤 합니다.

그리고 메이지 유신이 성공한 것은 1854년 미일화친 조약으로 <미국과 정식 수교>를 맺었기 때문에 가능했으므로, 1854년이 일본 근대화의 기점으로 볼 수 있다는 견해이죠.

그러나, 일본의 일부 학자들은 <에도막부기 지본주의>를 내세우면서 일본 근대화의 흐름을 설명합니다.

이 논리는, 일본의 근대화가 하나의 흐름이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조선에서도 정조 때부터 이어진 연암 박지원 - 박제가 - 박규수- 김옥균(갑신정변) - 갑오개혁기 개화파 등의 인맥을 따라가면, 근대화의 인맥적, 사상적 발원지를 우리 내부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죠?

일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일본에서는 에도 막부기에 자본주의 사상을 가진 이들이 있었고, 민주주의적 정신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18세기 상품 화폐 발달과 상인층이 성장하면서 <죠닌 문화>를 이끌어간 중신층들이 그들이라는 것이지요.

이들은 동업조합과 도시문화를 이끌어 가면서 학교를 세웠고, 사상과 인맥을 계속 유지해 나갔습니다. 대상인들은 서구식 독점 자본주의와 비슷한 상행위를 하였고, 미쓰이 등 재벌이라는 구조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또, 쇄국정책 속에서도 네덜란드 등과 교류하여 학문(난학)을 유입하였고, 이 학문을 일본 주체적으로 수용하여 근대화의 길을 열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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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메이지 유신을 근대화로 보는 이들은 이 주장의 문제점을 몇가지 지적합니다.

첫째, 상인들이 돈을 벌었지만 에도막부는 과도한 세금을 걷어가 상업자본이 균등하게 성장하지 못하였다는 점.

둘째, 당시 상인들이나 부유한 농민에게 법적으로 사유재산권이 인정된 적도 없고, 그 권리를 유지할 방안도 없었다는 점.(막부가 무력으로 재산을 강탈하면 빼앗기는 시대에 자본주의라 말하기 어렵다는 거죠...)

셋째, 에도 막부의 국가 정책이 상업을 억압하고, 농업을 중시하는 성리학 이념의 중농주의였다는 점 등입니다.

어떤 관점이 맞는 지는 일본 학자들이 알아서 싸우고 결론내리겠죠. 그럼 다음장에서는 본격적으로 일본의 근대화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해보죠. 다음 장의 이야기는 일본의 <통상조약 체결 과정>과 <막부타도운동의 전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ㄱ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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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청과 일본이 조선의 경제권을 놓고 다양한 조약을 맺다.

1. 정치적 침략 못지 않게 경제적인 침략이 중요하였다.

1880년대 조선에서는 청과 일본이 조선의 주도권을 놓고 정치적으로 대립하던 시기였습니다. 초기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까지만 해도 청이 조선에서 전통적인 주도권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그 대립은 1894년 동학운동 당시 청일전쟁 기점으로 일본에게 정치적 주도권이 넘어갑니다. 청과의 정치적 대립에서 승리한 일본은 이후 조선이 러시아를 통해 일본을 견재하려고 하자 을미사변 등을 일으켜 조선의 주도권을 유지하였고, 1904년 러일 전쟁을 계기로 조선에서 일본의 주도권을 확실하게 인정받습니다. 러일전쟁 직후, 을사조약이 체결되었고, 1910년 한일합방이 이루어진 것이지요. 이렇게 일본은 조선의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주변 열강과 끊임없는 암투를 벌여 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1880년대는 조선에서 청과 일본이 경제적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경제적 대립이 극에 달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특히 메이지 유신 등을 통하여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 일본은, 자국의 산업혁명을 위해 조선을 철저하게 이용하려고 하였습니다. 특히 일본이 산업혁명을 위해 모델로 삼았던 나라가 <영국>이었고, 일본은 영국의 산업혁명 모델 뿐만 아니라, 러시아를 공동으로 막기 위한 연대전선까지 형성하게 됩니다.

일본은 영국산 면직물을 조선에 내다 팔고, 이 차익으로 조선의 쌀을 일본으로 가져오려고 하였습니다. 즉, 농업기반의 사회를 공업기반의 사회로 급격히 전환하는 시기에 모라자는 식량 자원을 조선에서 가져오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강화도 조약에서는 정치적인 내용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일본의 산업화를 위한 추가 조약>이 꼭 필요하였습니다.

사실 강화도 조약으로 일본이 조선에 진출한 것은, 일본의 자본주의가 확립되어 조선을 강탈할 만큼의 여유가 생겨서가 아닙니다. 일본은 조선에 진출하여 제국주의적인 무역망을 구축할 필요가 있었고, 그 무역망을 통한 치익을 통해 서양과 같은 자본주의를 단기간에 이루려고 한 것입니다. 즉, 서양이 자본주의를 확립하기 위해 식민지를 확보하려는 제국주의와 같은 움직임을 일본이 한 것입니다. 가장 전형적인 제국주의 국가인 영국을 모델로 하면서 그런 것이죠. 영국이 인도를 점령하면서 원료 공급지 확보와 제품수출을 위한 기지로 활용한 것을 일본은 그대로 조선에 적용하려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은 영국과 같이 국가 경제가 견고한 나라가 아니였습니다. 일본은 미국에게 강제로 개항당하여 근대화에 막 발을 들여놓은 나라였을 뿐이죠. 따라서 영국이 조선에 팔고자 했던 것은 자국산 공업물품이 아니라 영국산 면직물 등 수입품이었습니다. 수입품을 팔아서 차익을 남기려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일본의 경제적 침탈은 조선과 전통적으로 무역국이었던 청을 자극하게 됩니다.

2. 조일수호 조규부록과 조일무역규칙(1876년)

일본이 1876년 조선과 맺은 강화도 조약은 구체적인 경제적인 내용이 없습니다. 단지 3개 항구를 개항하고, 개항장에서 일본인의 치외법권을 인정한다는 정도였지요. 이러한 내용들은 강화도 조약 편에서 자세히 다루었죠? 잠시 강화도 조약의 내용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보신 분은 그냥 패스!!

강화도 조약(조일수호조규)

대일본국과 대조선국은 원래부터 우의를 두터이 하여온 지가 여러 해 되었으나 지금 두 나라의 우의가 미흡한 것을 고려하여 다시 옛날의 좋은 관계를 회복하여 친목을 공고히 한다. 이는 일본국 정부가 선발한 특명 전권 변리 대신인 육군 중장 겸 참의 개척 장관 흑전청륭(구로다 기요타카)과 특명 부전권 변리 대신인 의관 정상형(이노우에 가오루)이 조선국 강화부에 와서 조선국 정부가 선발한 판중추부사 신헌과 부총관 윤자승과 함께 각기 지시를 받들고 조항을 토의 결정한 것으로써 아래에 열거한다.

제1조.
조선국은 자주 국가로써 일본국과 동등한 권리를 보유한다. 이제부터 양국은 화친한 사실을 표시하려면 모름지기 서로 동등한 예의로 대우하여야 하고 조금이라도 상대방의 권리를 침범하거나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우선 이전부터 사귀어온 정의를 손상시킬 우려가 있는 여러 가지 규례들을 일체 없애고 되도록 너그러우며 융통성있는 규정을 만들어서 영구히 서로 편안하도록 한다.

제2조.
일본국 정부는 지금부터 15개월 뒤에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조선국 경성에 가서 직접 예조판서를 만나 교제 사무를 토의하며 해당 사신이 주재하는 기간은 다 그때의 형편에 맞게 정한다. 조선국 정부도 또한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일본국 동경에 가서 직접 외무경을 만나 교제 사무를 토의하며 해당 조선국 사신이 주재하는 기간도 역시 그 때의 형편에 맞게 정한다.

제3조.
이제부터 두 나라 사이에 오고가는 공문은 일본은 자기 나라 글을 쓰되 지금부터 10년 동안은 따로 한문으로 번역한 것 한 본을 첨부하며 조선은 한문을 쓴다.

제4조.
조선국 부산 초량항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일본 공관이 세워져있어 양국 백성들의 통상 지구로 되어왔다. 지금은 응당 종전의 관례와 세견선 등의 일은 없애버리고 새로 만든 조약에 준하여 무역 사무를 처리한다. 조선국 정부는 제5조에 실린 두 곳의 항구를 개항하여 일본국 백성들이 오가면서 통상하게 하며 해당 지방에서 세를 내고 이용하는 땅에 집을 짓거나 혹은 임시로 거주하는 사람들의 집을 짓는 것은 각기 편리대로 하게 한다.

제5조.
경기, 충청, 전라, 경상, 함경 5도 중에서 연해의 통상하기 편리한 항구 두 곳을 골라서 지명을 지정한다. 개항 기간은 일본 역서로는 명치 9년 2월, 조선 역서로서는 병자년 2월부터 계산하여 모두 20개월 안으로 한다.

제6조.
이제부터 일본국의 배가 조선국 연해에서 혹 큰 바람을 만나거나 혹 땔 나무와 식량이 떨어져서 지정된 항구까지 갈 수 없을 때에는 즉시 가닿은 곳의 연안 항구에 들어가서 위험을 피하고 부족되는 것을 보충할 수 있으며 배의 기구를 수리하고 땔나무를 사는 일 등은 그 지방에서 공급하며 그에 대한 비용은 반드시 선주가 배상해야 한다. 이러한 일들에 대해서 지방의 관리와 백성들은 특별히 진심으로 돌보아서 구원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데가 없도록 하며 보충해 주는 데서 아낌이 없어야 한다. 혹시 양국의 배가 바다에서 파괴되어 배에 탔던 사람들이 표류되어 와닿았을 경우에는 그들이 가닿은 곳의 지방 사람들이 즉시 구원하여 생명을 건져주고 지방관에 보고하며 해당 관청에서는 본국으로 호송하거나 가까이에 주재하는 본국 관리에게 넘겨준다.

제7조.
조선국 연해의 섬과 암초를 이전에 자세히 조사한 것이 없어 극히 위험하므로 일본국 항해자들이 수시로 해안을 측량하여 위치와 깊이를 재고 도면을 만들어서 양국의 배와 사람들이 위험한 곳을 피하고 안전한 데로 다닐 수 있도록 한다.

제8조.
이제부터 일본국의 정부는 조선에서 지정한 각 항구에 일본 상인을 관리하는 관청을 수시로 설치하고 양국에 관계되는 안건이 제기되면 소재지의 지방 장관과 만나서 토의처리한다.

제9조.
양국이 우호관계를 맺은 이상 피차 백성들은 각기 마음대로 무역하며 양국관리들은 조금도 간섭할 수 없고 또 제한하거나 금지할 수도 없다. 만일 양국 상인들이 값을 속여서 팔거나 대차료를 물지 않는 등의 일이 있으면 양국 관리들이 빚진 상인들을 엄히 잡아서 빚을 갚게 한다. 단 양국 정부가 대신 갚아줄 수는 없다.

제10조.
일본국 사람들이 조선국의 지정한 항구에서 죄를 저질렀을 경우 만일 조선과 관계되면 모두 일본국에 돌려보내어 조사 판결하게 하며 조선 사람이 죄를 저질렀을 경우 일본과 관계되면 모두 조선 관청에 넘겨서 조사 판결하게 하되 각기 자기 나라의 법조문에 근거하며 조금이라도 감싸주거나 비호함이 없이 되도록 공평하고 정당하게 처리한다.

제11조.
양국이 우호관계를 맺은 이상 따로 통상 규정을 작성하여 양국 상인들의 편리를 도모한다. 그리고 지금 토의하여 작성한 각 조항 중에서 다시 보충해야 할 세칙은 조목에 따라 지금부터 1개월 안에 양국에서 따로 위원을 파견하여 조선국의 경성이나 혹은 강화부에서 만나 토의결정한다.

제12조.
이상의 11개 조항을 조약으로 토의 결정한 이날부터 양국은 성실히 준수시행하며 양국 정부는 다시 조항을 고칠 수 없으며 영구히 성실하게 준수함으로써 우의를 두텁게 할 것이다. 이를 위하여 조약 2본을 작성하여 양국에서 위임된 대신들이 각기 날인하고 서로 교환하여 증거로 삼는다.

대조선국 개국 485년 병자년 2월 2일
대관 판중추부사 신헌
부관 도총부 부총관 윤자승
대일본 기원 2536년 명치 9년 2월 6일
대일본국 특명 전권 변리 대신 육군 중장 겸 참의 개척 장관 흑전청륭(구로다 기요타카)
대일본국 특명 부전권 변리 대신 의관 정상형(이노우에 가오루)


- 국회도서관 입법조사국, 구한말조약휘찬 상 -

자, 위의 강화도 조약(조일수호조규)을 보면 경제적인 내용이 많이 빠져있고, 중요한 경제적 합의 사항은 추후에 다시 정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강화도 조약을 맺은 직후, 같은 해 8월 일본은 <강화도 조약의 부록(조일수호조규부록)>과 조일무역규칙을 작성하여 경제적인 침투에 대한 법률적 근거를 마련해 둡니다.

조일수호조규의 부록(통상토지조약)

일본국 정부는 전에 특명전권변리대신육군중장겸참의개척장관 흑전청륙 특명부전 권변리대신의관 정상성으로 하여금 조선국 강화부에 파유하고 조선국 정부는 대관 판 중임부사 신헌 부관도총관 윤자승에게 위임하여 일본역 명치 9년 2월 26일 조 선역병지년 2월 초 2일 쌍방이 서로 조인하고 수호조규 제 11조의 취지에 따라 일 본국 정부는 이사관 외무대승 궁본소일에게 위임하여 조선국 경성에 파유하고 조선국 정부는 강수관의 정부당상 조인희에게 위임하여 상호 회동하여 의정한 조약 을 좌에 개례한다.

제 1관

  차후 각 항구에 주류하는 일본국 인민, 관리관은 조선국 연해지방에서 일본국 제선이 조난하여 위급을 요할 때는 지방관에게 고하고 해지에 갈수 있는 도로를 경과할 수 있 다.


제 2관

  차후 사신 급 관리관이 발하는 문리서신을 수송하게 되면 비용을 사후변상하고 또는 조선국 인민을 고용하여 전차할수도 있으니 각종기편할 것이다.


제 3관

  의정한 조선국 통상각항에 있어서 일본국 인민이 지기를 조차하여 주거함은 각지기주와 상의하여 그 가격을 정한다. 조선국정부에 속하는 지는 조선국인민으로부터 관에 납조함과 동일한 조액을 납부하고 거주 한다. 부산초양항공사관에는 종전에 동국정부로부터 수문·설문을 설정하였으나 금후 이를 징발하고 신정의 정한에 의하여 표식을 경계 상에 설정하되 타의 이항도 역시 비례에 준한다.


제 4관

  금후 부산항에 있어서는 일본국인민이 통행할 수 있는 도로의 이정은 방파제로부터 기산하여 동서남북 각 직경 10리(조선법에 의한다.)로 정한다. 동래부중에 있어서는 이 정외라 할지라도 특별히 왕래할 수 있다. 이 이정내에 있어서 일본국인민은 자유로 통 행하고 기타의 산물 및 일본국산물을 매매할 수 있다.


제 5관

  의정한 조선국 각항에 있어서 일본국인민은 조선국인민을 채악할 수 있으며 조선국인 민은 그 정부의 허가를 받으면 일본국에 왕래함도 무방하다.


제 6관

  의정한 조선국 각항에 있어서 일본국인민이 만약 사망할 때는 적선의 지처를 선발하 여 이장할 수 있다. 단 타의 이항의 이장치는 부산이장지의 원근의 예에 의한다.


제 7관

  일본국인민은 일본국의 제화폐로서 조선국인민의 소유물과 교환할 수 있고 조선국 인민은 그 교환한 일본국의 제화폐로서 일본국소산의 제화물을 매득할 수 있으니 이시로 조선국의 지정한 개항에 있어서는 인민상호간에 통용할 수 있다. 일본국인민은 조선국 의 동화폐를 사용운수할수 있다. 양국 인민으로 감히 전화를 사주하는 자가 있다면 각 그 국가의 제법률에 비추어 처단한다.


제 8관

  조선국민은 일본국민으로부터 매득한 화물 혹은 증여를 받은 제물품을 자유로 사용하 여도 무방하다.


제 9관

  수호조규 제 7조에 기재된 취지에 따라 일본국의 측량선이 소선을 내어 조선국 연해 를 측량하다가 풍우에 봉착하거나 혹은 간조로서 본선에 귀환할수 없을 시는 해처 이 정으로부터 그 근방의 인간에 안착시키고 만약 수용의 물품이 있으면 관청으로부터 변 납하고 후일 그 비용을 청산한다.


제 10관

  조선국은 아직 해외제국과 통신을 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일본국은 수호 경년하여 체 맹한 제국과 우의를 보유하고 있는 관계상 금후 제국의 선박이 풍파로 곤경에 빠져 연 변지방에 포착하게 된다면 조선국인민은 모름지기 이를 수휼 않을 리가 없는지라 해표 민이 그 본국에 송환되기를 원망할 때에는 조선국정부로부터 각 항구 주류의 일본관리 관 거치하여 본국으로 송환한다. 해관원은 이를 응낙하여야 한다.


제 11관

  위 10관의 장정급 이에 첨부한 통상규칙은 모두 수호조규와 동일한 권리를 가진다. 양 국정부는 존행하여 위반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차 각 조중에 만약 양국인민이 교제 무역을 실천함에 있어 장해가 있다고 인정되어 불가불 개혁 하게 될 경우에는 양국정 부는 그 의안을 속히 작성하여 일개년 전에 통지하여 협의결정하여야 한다.

1876년의 조약들 중에서 경제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조일수호조규부록>입니다. 이것은 일본인이 경제적으로 조선의 거류지 무역을 공식으로 허락받는 것으로, 조선은 더 이상 일본의 경제적 침투를 막을 합법적인 방법이 사라짐을 의미합니다. 같은 시기에 경제적 침투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 맺은 추기 규칙도 한번 볼까요?

조일 무역 규칙(1876)

1칙 일본국 상선이 입항하였을 때는 선주는 일본국 인민무역관리관이 교부하는 증서를 한국 관청에 제출하여야 한다.

2칙

일본상선이 하물(荷物)을 양륙(揚陸)하고자 할 때에는 하물의 내용과 수량등을 상기(詳記)하여 한국관청에 제출하고 하선면허를 받아야 한다.

3칙

양륙하는 하물을 한국정부관리가 검사하고자 할 때에는 이에 응해야 한다.

4칙

출하하물에 대해서도 하주(荷主)가 그 하물의 내용과 수량 등을 상세히 한국관청에 보고하고 출항하물면허를 받아야 하며 하물의 검사에 응해야 한다.

5칙

일본상선이 출항 할 때에는 전일 정오까지 이를 한국관청에 보고하고 출항면허를 받아야 한다.

6칙

금후 한국 제항구에서 양미(糧米) 및 잡곡을 수출입 할 수 있다.

7칙

항구로 들어오는 상선은 항세를 납입해야 한다. 단 일본정부소속 선박은 항세를 납부하지 않는다.

8칙

한국정부 또는 인민이 제물품을 부개항장의 해안에 수송코자 할 때에는 일본국 상선을 고용할 수 있다.

9칙

일본국 선박이 허가없이 조선국의 항구에 내항하여 물화를 매매해서는 안되며 이를 어길 때에는 그 물화를 한국관청이 몰수한다.

10칙

아편의 판매를 엄금한다.

11칙

이 조약은 조인과 더불어 효력이 발생되고, 각 임원(任員)의 상의(商議)로 개정증가(改正增加)할 수 있다.

이러한 조약들로 인하여 우리는 개항장에서의 모든 일본인의 권리를 인정하게 됩니다. 즉, 개항장에서 일본인에 대한 권리를 인정해주고, 일본의 화폐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조약들 속에 <무관세를 보장>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는 점입니다. 이 무관세 보장에 의하여 일본이 파는 <영국산 면제품>을 막을 방법이 없게 되었으며, 일본인이 조선의 쌀을 유출하는 것도 막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또, 수호부록 11조에 적혀있는 <양국의 무역을 다시 조정할 때에는 1개월 전에 통지한다>는 원칙도 문제가 됩니다. 훗날 <방곡령>이 일본에 의해 저지되는 것도 이 1개월 통지 약관에 따른 것이니까요.

일본은 우리 항구인 부산 부산, 인천, 원산 등을 차례로 개항하고 조계를 설치함으로서 점차 조선에서의 경제 침투를 가속화합니다.

3. 조선의 무역 구조 - 3종류의 무역으로 전개되다.

강화도 조약과 추가 경제 조약들은 <조선의 전통 경제 구조>를 크게 흔들어 놓았습니다. 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에서 일본 상인들이 활동하면서 1876년부터 1882년까지의 대 조선 무역은 일본이 주도해 나갑니다.

이 당시 무역은 3종류의 무역으로 전개되어 갑니다. 첫 번째 무역은 일본과의 조약을 통하여 <거류지 무역>이 활성화 된 것을 뽑을 수 있습니다. 거류지 무역이란, 조약을 통해 개방한 항구와 조약으로 규정된 항구의 일정 거리 이내에서의 장사를 말합니다. 즉, 초기 조약이 항구를 개방하고 항구에서 10리까지의 무역권을 일본에 허락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이 항구 10리안의 주요 포구를 거점으로 활발하게 무역을 전개합니다.

두 번째 활성화된 무역은 <조선인의 중개무역>입니다. 당시 일본은 조선의 개항장에 와서 10리 안에서 장사를 하였습니다. 주로 조선에 판 것은 영국산 면제품이며, 조선에서 무관세로 가져가는 것은 쌀, 콩, 소가죽 등이었습니다. 하지만, 10리 안에서 무역을 하겠다는 원칙 때문에 항구와 내륙을 연결하는 조선 전통의 상인들이 성장하게 됩니다. 따라서 바로, 객주, 여각으로 대표되는 전통 상인들의 성장을 가져오게 되죠. 특히, 항구와 먼 내륙지를 이동하면서 물건을 파는 부보상들(교과서에서는 보부상으로 표기)들은 많은 돈을 벌게 되죠. 그러나, 이후 항구에서의 무역거리가 100리 이상으로 확대되고, 조청무역장정으로 외국인의 내륙무역이 허가되면서 전통 상인들은 외국 상인에 의해 몰락하게 됩니다.

세 번째 무역은, 일본의 약탈 무역입니다. 일본은 자신들의 물건을 반 강제로 팔기도 하였습니다.

4. 청나라의 대응 - 조청상민수륙 무역장정(1882년)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이 조선 무역을 독점하면서 청나라는 긴장하게 됩니다. 특히, 일본이 조선과 맺은 영사재판권, 화폐사용권, 치외법권, 무관세 규정 등은 조선에서의 청의 입지를 한없이 좁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따라서 1880년대 청나라는 조선의 어떤 사건만 있으면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여 <청이 조선의 정치, 경제적 지배국가>라는 것을 확인하려 합니다. 또, 조선시대 이래 실제적 조공관계로 규정되던 청과 조선의 관계를 실제적 속국관계로 전환하기 위한 작업을 시작합니다. 그 시작이 바로 임오군란 때의 청의 개입입니다. 청은 임오군란을 계기로 출병하여 조선의 내정을 완전 장악하고, <위안스카이의 고문정치>를 시작합니다. 또, 갑신정변 때 김옥균이 일본군의 지원을 받으며 내정을 장악하려 하자, 청불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무리할 정도로 많은 군대를 조선에 파병하여 개화파를 완전 진압합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는 <조청상민수륙 무역장정>을 체결하여 경제적으로 일본과 동등한 내용의 조약을 체결한 뒤, 더 많은 경제적 이권을 약속받게 됩니다. 그럼 장정의 내용을 볼까요?

조청상민수륙 무역장정(1883)

전문(前文) : 조선이 속방임과 청상의 특혜규정
 “오직 이번에 체결하는 장정은 중국이 속방을 우대하는 후의에서 나온 것인 만큼 다른 각국과 일체 균점하는 예와 다르다”

 제 1조 청국 상무(商務)위원의 파견 및 이들의 처우, 북양대신과 조선국왕이 대등한 위치임을 규정.
 제 2조 조선내에서의 청 상무위원의 치외법권을 인정
 제 3조 조난구호 및 평안.황해도와 산동.봉천 연안지방에서의 어채 허용(청국인의 조선연안 어업권을 인정). 관세규정
 제 4조 북경과 한성.양화진에서의 개잔(開棧)무역을 허용하되 양국상민의 내지채판(內地采辦) 금지. 단 내지채판 및 유력(遊歷)이 필요할 경우 지방관의 집조(執照)를 받을 것.(개항장이 아닌 서울 양화진(楊花津)에 청국인이 점포를 개설할 수 있는 권리와 도성에서의 상행위 허용. 호조(護照:일종의 여행증명)를 가진 자에게는 개항장 밖의 내륙통상권과 연안무역권까지 인정) 관세규정.
 제 5조 세칙규정. 책문.의주, 훈춘.회령에서의 개시
 제 6조 홍삼무역과 세칙규정(국경무역에서 홍삼을 제외한 5 % 관세)
 제 7조 초상국윤선(招商局輪船) 운항 및 청 병선의 조선연해 왕래.정박
 제 8조 장정의 수정은 북양대신과 조선국왕의 자문으로 결정.

이 문서를 보면, 일본과 맺은 <조약>과는 달리 <무역장정>이라고 표기하였습니다. 장정은 대등한 양국의 협정문이 아니라 중국이 속방과 맺는 협정문입니다. 임오군란으로 조선의 정치적 주도권을 잡은 청나라가 <경제마저 일본을 누르기> 위한 조치로 맺은 장정입니다.

문제는 이 조약에 내륙통행권이 들어있다는 점입니다. 청은 일본보다 한술 더 떠서 아예 내륙지 무역까지 하겠다고 일방적인 협정을 체결한 것이지요. 조선의 경제는 이 협정에 의해 치명타를 입게 됩니다. 그러나, 이 협정은 비단 청나라에게만 적용되는 협정이 아니였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그동안 거류지 무역 및 개항장 무역 만을 하던 일본 등 외국들은 이 조약을 계기로 앞다투어 최혜국 대우를 요구하면서 내륙무역을 요구하게 됩니다. 최혜국 대우는 예전에 여러번 이야기 했었죠? 최혜국이란, 어느 한 나라가 조약을 맺을 때 그 조약의 내용이 제 3국과 체결한 조약의 내용과 불리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청과 맺은 조약의 좋은 내용들은 일본 등 다른 나라와의 조약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일본 역시 이러한 논리를 내세워 다시 <조일통상장정>을 다시 체결하도록 강요하였고, 이 일본과의 <장정>으로 일본과 거류지 무역권을 확보하고 조선 경제에 더욱 침투하게 됩니다. 덕분에 조선의 객주, 여각, 보부상 등 항구 100리 밖에서 중개무역을 하던 전통상인들이 크게 몰락하게 되었지요.

따라서 이 조약으로 가장 타격을 받은 것은 외국과 조선간의 중계무역을 하던 여각, 객주 등 조선 상인들입니다. 조선 상인들이 몰락하면서 조선의 경제권은 점차 외국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청과 일의 이 경제적 침투를 보시면,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왜 청과 일본이 치열하게 조선의 주도권을 놓고 전쟁을 해야 했는지 경제적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5. 청과 일본은 조폭 수준으로 조선의 경제를 흔들어 놓았다.

조선과 각각 무역장정을 맺은 청과 일본은 이제 조약의 내용대로 조선 경제를 침투해 나갑니다. 요즘 뜨고 있는 무이자! 무이자! 외치는 대출광고처럼 한번 무역을 하기 시작하면 그 조약의 내용 때문에 빠져나올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지요.

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의 경제는 일본의 독무대였으나, 청의 반격으로 조선은 두 나라 사이에서 심한 경제적 압력에 시달려야 했고, 내륙무역이 허가되면서 조선 전역에 그 여파가 미치게 됩니다.

청나라는 그나마 조선과 비슷한 경제단계였기 때문에 침탈적인 경제활동보다는 <우세한 자본과 대규모 인력>을 활용하는 중개무역을 주로 하였습니다. 청은 조선의 물건을 가져가기 보다는 자국의 물건을 판매하는 쪽으로 무역의 기준을 잡았죠.

그러나 산업혁명이 끝나지 않아 <근대화와 자본주의의 균형>이 이루어지지 않은 일본은 조선의 쌀, 콩을 최대한 쥐어짜서 일본에 가져가려 했고, 그 비용은 영국산 면직물을 대량 판매하는 것으로 충당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이러한 경제적 침탈은 뜻대로 되지 못합니다. 그것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청의 대조선 영향력>이 매우 급상승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일본은 청에 대한 불만이 아주 많았죠. 청일전쟁의 경제적 배경은 여기에서부터 비롯됩니다.

문제는 이러한 청일 양국이 더욱 많은 것을 얻어내기 위해 거의 깡패수준으로 우리 포구에서 행패를 부렸다는 점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두모포 사건을 볼까요?

두모포 사건은 1878년 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정부의 관세방침과 일본의 무관세 규제가 충돌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조선정부는 포구의 대외무역이 활발해지자, 막대한 상업세를 받을 수 있다는 것에 주목하였습니다. 조선은 두모포 등의 포구에 포구세를 걷기로 하였는데, 일본은 이것이 무관세 규정에 어긋난다면서 반대입장을 분명히 합니다. 조선정부는 두모포와 같은 개항장 밖에서의 관세는 규정과 상관없는 <조선의 내정>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말로 이길 수 없자 군대를 동원하여 시위하였습니다. 즉, 일본 상인과 부산 주둔 일본 해병대가 해관을 습격하여 점령해 버린 것이죠.

결국 조선은 일본의 압력으로 개항장 밖에서의 관세마저도 받지 못하게 됩니다. 이후 일본은 개항장 밖에서 이루어지는 장시에 대한 관세도 폐지하라고 정부를 협박하였고, 정부는 일본에 굴복하였습니다. 결국 우리 정부는 상품에 대한 직접 과세를 받지 못하자, 자릿세나 영업세 등의 부가적인 일부 세금만 징수하게 됩니다.

청과도 이러한 마찰이 있었습니다. 1886년 청나라는 모든 경제적 면에서 일본보다 우월한 지위를 요구하면서 인천 해관을 습격하기도 합니다. 우리 정부는 역시 속수무책이었지요.

이러한 청, 일본의 경제적 협박은 조선 전반에 큰 피해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전통상인들은 객주, 여각 등은 강화도 조약이후의 중개무역으로 어느 정도 자본이 축척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청, 일본 상인들과 맞서 조직을 만들고 상권을 지켜나가기 위한 투쟁을 시작합니다.

조청수호조규의 속약(제물포 조약의 추가 협약)

제 1조. 부산, 원산, 인천항의 강행이정을 사방 50리로 하고, 1년 뒤에 양화진을 개시한다.

제 2조. 일본 공사 영사와 수행원이 조선 내지에서 자유롭게 여행을 한다.

- 고종실록 권 19, 고종 19년 7월 17일 -

위 조약은 갑신정변의 결과로 맺은 제물포 조약 때 일본이 청과 대등한 경제적 위치를 점하기 위해 맺은 속약입니다. 위 내용을 보면 일본 역시 청의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 자유로운 무역이 점차 가능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6. 청일전쟁 이후 무역의 주도권은 일본에게 넘어가다.

청과 일본의 대조선 무역 쟁탈전의 승자는 일본이었습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면서 조선의 무역은 또 한차례 크게 흔들립니다.

먼저 <영국산 면제품 - 조선의 쌀, 콩>으로 이어지던 대일 무역이 더욱 강화되면서 미면교환체제가 일본의 대조선 무역형태로 확고하게 자리잡습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청에게 넘어갔던 대조선 무역이 일본의 독점으로 넘어간 것이지요.

특히, 청일전쟁을 겪을 무렵 1차적으로 산업화를 완성한 일본은 영국산 면제품이 아닌 일본산 면제품을 조선에 내다 팔면서 더 많은 이익을 얻게 됩니다. 일본이 더 많은 이익을 얻게 되면서 조선의 쌀은 더 많이 일본에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조선에서는 쌀을 생업으로 하는 많은 소작농들이 몰락하게 됩니다. 그러나, 쌀을 상업적으로 수출할 수 있게 된 지주층들은 일본과 협력하여 많은 이익을 남기게 됩니다. 즉, 일본의 대조선 무역이 농민층의 몰락과 지주층의 성장을 돕게 된 것이지요.

일본이 쌀을 많이 사갈수록 쌀값이 폭등하면서 농민이 망해갔습니다. 쌀을 상품으로 내댜판 지주들은 그 이익금을 토지에 재투자하여 농민들의 토지를 헐값에 사들입니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식민지 지주제도>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즉, 일제시대를 구분하는 사회구분법으로 흔히 <식민지 반봉건제도>를 말하곤 하는데, 이것은 조선을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자들은 <제국주의 일본세력>이지만, 조선을 경제적으로 지배하는 자들은 <식민지에서 토지를 가지고 돈을 번 지주층>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조선은 1889년 이러한 문제점을 시정하기 위해 쌀이 부족한 북부지역 지방관들이 <방곡령>을 반포하고 일본에 쌀 수출을 금지하도록 조치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방곡령은 <조약 개정시 1개월 전에 통보한다>는 일본과의 조약에 어긋나는 것이라 하여 오히려 일본에 벌금만 내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이후, 농민들은 더욱 더 분노하였고, 이것은 동학농민운동의 경제적 배경이 됩니다.

7. 청이 사라진 자리를 러시아가 메꾸려 하다.

청일전쟁이후 1894년에서 1896년은 일본이 조선의 경제를 장악합니다. 그러나, 청일전쟁 직후 삼국간섭에 의해 일본이 요동반도를 다시 청에 할양하게 되면서 조선에도 새로운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삼국간섭을 주도한 러시아와 친해짐으로서 일본을 견재하자는 것이지요. 그러나, 일본이 그 의도를 알고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킴으로서,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아관파천)하게 됩니다.

아관파천으로 조선의 정치권은 러시아의 영향아래 들어갔고, 철도, 산림, 광산 등의 큰 이권들은 외국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일본은 10년뒤인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켜 러시아마저 조선에서 물러나게 하고, 모든 경제권을 손에 쥐게 됩니다.

8. 러일전쟁 후 합일합방 이전까지의 경제정책

러일전쟁 후 일본은 을사조약(1905)를 맺고, 조선을 자국의 영토로 편입하기 위한 준비작업을 합니다. 그 목적을 위해 실시한 것이 바로 <차관제공> 정책입니다. 이것은 조선의 화폐를 정리한다는 명복으로 재정적으로 조선을 예속화하는 정책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화폐로 바꿈으로서 전통적 화폐를 사용한 조선 상인들을 몰락시키고, 일본 상인들이 조선에 터를 잡게 하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화폐정책> 포스트에서 다룰께요.

화폐정리사업으로 조선의 전통적 상인들이 몰락하자, 다음으로 토지약탈을 합법화 하기 위한 다양한 법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본의 의도를 알고 범국민적으로 일본에게 저항하기 시작합니다.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면서 <자주국권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였는데, 이것은 주로 언론활동을 통하여 열강의 약탈성을 알리고 열강의 이권침탈을 막으려는 것이었습니다. 독립협회는 러시아 절영도 조차 요구를 거절하는 입장을 보였지요.

이 독립협회와 연계되어 상권수호운동을 벌인 단체가 황국중앙총상회였습니다. 이들은 시전상인을 중심으로 상업자본육성운동을 벌이면서, 각종 회사를 설립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들이 생각한 경제적 자주권이란, 민족자본을 육성하여 일본과 대등히 맞설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반대로 좌절되었지요.

또, 일본이 빌린 차관을 갚아 버리자는 국채보상운동도 전개됩니다. 대구에서 서상돈의 제안으로 시작된 이 운동은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제국신문 등의 신무사들의 호응을 얻어 애국계몽운동(왜 명칭이 애국인지 모르지만, 교과서에서 그렇게 부릅니다.)과 연계되어 대대적으로 일어납니다. 양기탁이 국채보상기성회를 설립하였고, 국민들이 돈을 모아 일본의 차관을 갚아 버리려고 하였지만, 결국 일본의 집요한 방해로 실패하고 말죠.

오늘 포스트는 원래 청과 일본의 경제적 침투만을 다루고, 몇가지 사료를 보는 선에서 쓰려고 했는데, 이야기가 길어져서 일제시대 직전까지 전개되어 버렸네요. 뒷부분에 간략하게 다룬 이야기들은 해당 시대에서 다시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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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1880년 : 조선책략과 조선의 개화정책

이번 장에서 다룰 내용은 흥선대원군이 물러난 후 조선이 본격적으로 개화정책을 실시하게 된 계기와 그 내용입니다. 개화정책은 민씨정권(명성황후)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죠. 그럼 조선의 개화정책에 대해서 간단히 다뤄볼까요?

1. 수신사를 파견하기 시작하다.

수신사란,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우리나라에서 일본에 파견한 사절단을 말합니다. 강화도조약 저번에 다루었죠? 강화도 조약 2조에 보면 <일본정부가 15개월 뒤 사신을 파견한다>는 항목이 있었고, 11관에 보면 6개월 이내 양국이 다시 통상장정, 조일수호조약 조규부록을 체결한다는 조항이 있었습니다.

일본은 이러한 조약들에 의거하여 조선도 일본에 협상 사절단을 파견할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우리 정부에서는 일본의 개화수준을 시찰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1차 수신사로 김기수 등 98명를 파견합니다. 1차 수신사인 김기수는 <수신사 일기>에서 <일본이 부강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개화의 필요성을 역설합니다. 이래 글을 볼까요? 양반 유생으로서 성리학을 공부한 정통 조선 관료가 일본에 가서 느낀 점을 역설한 글입니다.

기교(技巧)가 이럴 수가 있겠는가! 한 개의 화륜(火輪)으로써 천하의 모든 것을 다 만든다. 기교가 이럴 수가 있겠는가!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지 않은 바이니, 나는 이것을 보고 싶지 않다. 지난번에 나의 유람을 막은 사람이 옳았고, 나에게 유람하도록 권고한 사람은 옳지 못했는데, 나는 그 옳은 말을 쫒지 못했으니 그렇다면 내가 유람한 것은 옳지 못한 일이었는가? 기기음교(奇技淫巧)도 말로는 이것으로 이용후생(利用厚生)한다고 하니, 이용후생이라면 이를 배워야만 하는 것인데, 하물며 이를 보는 것쯤이랴.

-김기수, 일동기유 -

일본은 1차 수신사가 다녀간 이후, 조선에 조규부록과 통상장정 체결을 요구합니다. 이 때 협상으로 부산, 원산은 개항되었지만, 실제로 중요한 관세문제, 미곡문제 등을 해결되지 못하였습니다.

청나라의 양무운동을 추진중이었던 이홍장은 수신사를 파견하는 조선에게 일본이 침략 의도가 있다며 경계하라고 합니다. 우리 정부는 과연 그런지 확인하려고 2차 수신사로 김홍집 등 58명을 파견하였습니다.

2차 수신사의 목적은

1번째, 인천을 개항하라는 일본의 요구에 대해 개항하지 않는 쪽으로 협상할 것

2번째, 일본인에 의해 쌀이 유출되는 문제를 강력히 항의할 것,    이였습니다.

중요한 점은 이 목적 자체가 아니라 2차 수신사가 파견됨으로서 수많은 국제 정세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국제 정세에 대한 처방전같은 책인 <조선책략>을 얻었다는 점입니다.

2. 조선책략이 유입되다.

2차 수신사들에 의해 유입된 조선책략은 중국인 황준헌이 쓴 외교방략서입니다. 그 내용을 한번 볼까요? 바쁘신 분들은 밑줄 부분만 읽어보세요.

지구의 위에는 막대한 나라가 있는데, 아라사(러시아)라고 한다. 그 너비가 광대해서 3대륙에 걸쳐 있다. 육군 정예병이 백여만이고, 해군 거함이 이백여척이다. 다만, 나라를 북쪽에 세워서 하늘은 차고 땅은 척박하였다. 고로 빠르게 그 영토를 넓혀서 사직을 이롭게 하려는 생각을 가졌다.

선세로부터 표트르대제 이래 새로 강토를 개척하여 이미 이전보다 10배가 넘었다. 지금의 왕에 이르러서는 다시 4해를 관할하고 팔방을 병합하려는 마음으로 중아세아에 있는 위구르의 모든 부족을 잠식하여 거의 다하였다

천하가 모두 그 뜻이 작지 아니함을 알고 왕왕 합종하여서 서로 항거하였다. 투르크 한 나라를 러시아가 오랫동안 병합하고자 하였으나 영국과 프랑스가 협력하여 유지해 나감으로 러시아가 끝까지 굳세게 그 뜻을 얻을 수가 없었다. 바야흐로 서양의 여러 대국들, 독일·오스트리아·영국·이탈리아·프랑스 같은 나라들이 모두 호시탐탐 결단코 한 척, 한 촌의 땅이라도 남에게 주려고 하지 않았다.

러시아가 서양 공략을 이미 할 수 없게 되자, 이에 번연히 계획을 바꾸어 그 동쪽의 땅을 마음대로 하고자 하였다. 십여년 이래로 화태주(사할린)를 일본에게서 얻고, 중국에게서 흑룡강 동쪽을 얻었으며, 또한 토문강 입구에 주둔하여 지켜서 높은 집에서 물병을 거꾸로 세워 놓은 듯한 형세이고, 그 경영하여 여력을 남기지 않는 것은 아시아에서 뜻을 얻고자 함이다

조선의 땅은 실로 아세아의 요충에 자리잡고 있어, 형세가 반드시 싸우는 바가 되니 조선이 위태로우면 즉 중동의 형세가 날로 급해질 것이다. 러시아가 땅을 공략하고자 하면 반드시 조선으로부터가 시작일 것이다.

아! 러시아가 이리 같은 진나라처럼 정벌에 힘을 쓴 지 3백여년, 그 처음이 구라파에 있었고, 다음에는 중아시아였고, 오늘에 이르러서는 다시 동아시아에 있어서 조선이 그 피해를 입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즉, 오늘날 조선의 책략은 러시아를 막는 일보다 더 급한 것이 없을 것이다. 러시아를 막는 책략은 무엇과 같은가? 중국과 친하고 일본과 맺고, 미국과 연결함으로써 자강을 도모할 따름이다.

중국과 친한다는 것은 무엇을 일컬음인가? 동·서·북이 러시아를 등지고 경계를 잇고 있는 것은 오직 중국뿐이다. 중국은 땅이 크고 물자가 풍부하며, 형세가 아시아주에 거하고 있다. 그런 까닭으로 천하는 러시아를 제어할 나라로는 중국만한 나라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중국이 사랑하는 나라로는 또한 조선만한 나라가 없다. 조선이 우리 번속이 된지 이미 천년이 지났으되 중국은 덕으로써 편안히 지내게 하고 은혜로써 품어 줄 뿐, 한번도 그 토지와 인민을 탐내는 마음을 가진 적이 없었음은 천하가 함께 믿는 바이다. 하물며 우리의 대청은 동쪽 땅에서 제국을 일으켜, 먼저 조선을 평정하고 후에 명을 정벌해서 2백여년 동안 덕으로 소국을 사랑하고 조선은 예로써 대국을 섬겨왔다.

강희·건륭조를 당하여서는 무슨 일이든지 상문하지 않은 것이 없이 내지의 군현과 다름이 없었다. 이는 문자가 같고, 정교가 같고 정의가 친목할 뿐만 아니라, 또한 형세가 연접하여 신경(북경)을 껴안아 호위함이 마치 왼팔과 같다. 서로 휴척을 같이하고, 서로 환란을 함께 하였으나, 저 월남(베트남)의 소원과 면전(버마)의 편벽과는 본디 서로 떨어짐이 오래됨이다.

지난번 조선에서 일이 있을 때에는 중국은 어김없이 천하의 양식을 소비하고 천하의 힘을 다하여서 싸웠다. 서양의 통례에 따르면 양국이 전쟁할 때면 국외의 나라는 그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고 한편을 도와주지 않는다고 한다. 오직 속국은 곧 이 예가 아니다. 오늘날 조선은 중국 섬기기를 마땅히 예전보다 더욱 힘써서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조선과 우리는 한 집안 같음을 알도록 해야 할 것이다. 대의가 밝혀지고 성원이 스스로 성해지면 러시아 사람은 그 형세가 외롭지 않음을 알고, 조금은 돌아보고 꺼림이 있을 것이다. 일본 사람은 그 힘이 대적할 수 없음을 헤아리고 가히 더불어 연결하여 화친하고자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기필코 외국의 혼란은 슬며시 없어지고 나라의 근본은 더욱 견고해질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중국과 친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과 맺어야 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중국 이외에 가장 가까운 나라는 일본이다. 옛날 선왕이 사신을 보내어 통교한 나라는 맹부에 실려 있고, 그들은 대대로 맡은 일에 충실하였다. 근일에 이르러서는 즉 북으로 이리와 호랑이가 어깨와 등을 걸쳐 타고 있어 만일 일본이 혹 땅을 잃으면 조선 팔도가 능히 스스로 보전할 수가 없을 것이다. 조선은 한번 변고가 생기면 구주·사국이 또한 일본의 차지하는 바가 되지 못할 것이다. 고로 일본과 조선은 실로 보거상의의 형세에 놓여있다.

한·조·위가 합종하자 진이 감히 동쪽으로 내려오지 못하고, 오·촉이 서로 결합하자 위가 감히 남쪽으로 침략해 오지 못하였다. 저들이 강대한 이웃 나라의 핍박으로 순치의 교분을 맺고자 하니, 조선으로서는 작은 거리낌을 버리고, 큰 계획을 도모하여야 할 것이다. 구교를 닦고 외원과 결합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훗날 양국의 윤선과 철선이 일본의 바다 위에 종횡으로 누비게 되면 외해는 절로 들어올 길이 없어질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일본과 맺어야 하는 것이다.

미국과 연결해야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일컬음인가? 조선을 동해로부터 가면 아메리카가 있는데 즉 합중국이 도읍한 곳이다. 그 근본은 영국에 속해 있었는데 백년 전에 화성돈(워싱턴)이란 자가 유럽사람의 학정을 받기를 원치 않고 발분 자립하여 한 나라를 독립시켰다. 이 뒤로부터 선왕의 유훈을 지켜서 예의로써 나라를 세우고 토지를 탐내지 않고, 남의 인민을 탐내지 않고, 굳이 남의 정사에 간여하지 않았다. 그와 중국과는 조약을 맺은 지 십여년이 되었는데, 그동안 조그마한 분쟁도 없는 나라이다. 일본과의 왕례에 있어서는 통상을 권유하고 연병을 권유하고, 약속을 고칠 것을 도와주니, 이는 천하만국이 모두 알고 있는 것이다.

대개 민주국이란 공화로써 정치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을 이롭게 여기지 않는다. 미국이 나라를 세운 시초는 영국의 혹독한 학정으로 말미암아 발분하여 일어났으므로 고로 항상 아시아와 친하고 유럽과는 항상 소원하였다. 그 인종은 실은 유럽과 동종이다. 그 나라의 강성함은 유럽의 여러 대지와 더불어 동·서양 둘 사이에 끼여 있기 때문에 항상 약소한 자를 부조하고 공의를 유지하여, 유럽사람으로 하여금 그 악을 함부로 행할 수 없게 하였다. 그 국세는 대동양에 두루 미치고 그 상무는 호로 대동양에서 성하였다. 또한 동양이 각기 제 나라를 보전하여 편안히 거하고 무사하기를 원하였던 까닭에 그 사절을 보내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으로서는 마땅히 항상 만리 대양에 사절을 보내서 그들과 더불어 수호해야 할 것이다. 하물며 그들이 연달아 사신을 보내어 조선과의 연결을 유지하려는 뜻이 있음에랴! 우방의 나라로 끌어들이면 가히 구원을 얻고, 가히 화를 풀 수 있다. 이것이 미국에 연결해야 하는 까닭이다.

무릇, 중국과 친하는 것은 조선의 믿는 바이요, 일본과 맺는 것은 조선이 장차 믿고, 장자 의심할 것이다. 미국과 연결하는 것은 즉 조선이 심히 의심할 것이다.

                                                                                         - 황준헌, 조선책략  -

자 밑줄친 부분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 글의 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조선책략의 내용은

1번째, 개화를 통해서 부국강병을 해야 하니 서양과 통상하고 유학생을 파견하라

2번째, 러시아의 남하에 방어해야 하니 조선은 개화를 하되, 친중국, 결일본, 연미국하여 외국과 만나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숨은 뜻이 하나 더 있네요. 바로 이 책을 만든 청나라의 의도입니다. 청나라는 당시 러시아와 시베리아 및 중앙아시아, 연해주 등지에서 계속 충돌하고 있었습니다. 청은 러시아와 일본을 견재하면서도 <조선의 종주국은 청나라>라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한 포석으로 이 책을 적은 것입니다. 미국과 연합하라는 제의는 곧 미국의 힘을 끌어들어 동아시아 구도를 바꿔보겠다는 청의 의지입니다.

이 책이 중요한 이유는 이 책이 들어옴으로서 흥선대원군 시기 억눌려 있던 개화파의 목소리가 봇물터지듯 나오기 시작하였고, 고종과 명성황후까지 개화의 필요성을 절감했다는 점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조선책략의 유입을 필두로, 80년대 조선 정부는 개화라는 파도에 휩싸입니다. 개화파 신료들은 고종에게 정부가 앞장서서 개화해야 한다고 역설하였고, 조선책략에 쓰여진대로 미국과 연합하여 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조미수호조약, 1882)

해국도지, 영환지략과 같은 세계 역사와 지리에 관련된 책들이 들어와 우리의 눈이 넓어졌고, 만국공법 등 서양의 보편법이 유입되어 합리적인 법질서가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지요.

3. 미국과 수교를 맺다.

조선책략으로 맺은 첫 번째 결실은 미국과의 수교입니다. 미국과의 수교는 <조선책략>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지만, 그 내면을 보면 조선책략을 유포한 청나라의 의도이기도 했습니다. 미국과 조선이 조약을 맺는 중간자로서 청이 역할을 했기 때문에, 청은 미국으로부터 조선의 종주권을 암암리에 묵인받게 되고, 청과 러시아의 영토분쟁에서 미국의 원조를 얻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지요.

<한미수호통상조약>은 우리가 일본과 맺은 강화도 조약의 내용이 대부분 들어가 있습니다. 먼저, 치외법권을 인정하였고, 조차지 설정을 승인한데다가, <최혜국 조관>이 들어가서 일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는 불평등 조약을 맺은 것입니다. 용어들이 어렵죠? 강화도 조약에서 했지만, 다시 한 번 용어를 정리해 볼까요? 이번엔 표로 정리해볼께요.

<불평등 조약의 일반적 내용들>

협정

내용

영사재판권

다른 나라가 무슨 짓을 해도 우리는 타국의 사람들을 처벌할 수 없습니다. 외국인은 외국인이 재판한다는 것이지요. 예로, 우리 젊은 여중생들을 미국 탱크가 밀어 죽였어도 미국병사들은 미국가서 재판받고, 국내보다 가벼운 처벌을 받잖아요? 그것과 유사합니다.

관세협정권

관세는 해외에서 물건이 들어올 때 세금을 메기는 것입니다. 관세가 높을 수록 세금이 많이 책정되므로 물건값이 비싸지고 잘 안팔리지요. 관세협정권이란, 관세를 낮게 책정하거나, 아예 관세없이 자유무역을 하여 자국의 물건이 잘 팔리게 하는 조약을 말합니다. 우리나라도 미국과 FTA를 해서 자유무역을 하려고 하고 있죠? 바로 이것입니다.

개항장

설치권

개항장은 외국과 무역을 할 수 있는 첫 입구인 항구근처를 말합니다. 개항장은 외국이 자유무역을 할 수 있도록 자신들의 거주 세력 범위를 정하는데, 이것을 <조계>라고 합니다. 특히 조계는 외국들이 자신들의 독립된 영토로서 <조차지>를 설장하기 때문에, 그 지역이 외국의 땅으로 넘어가버리는 <반식민지 지역>이 됩니다. 일본과 미국은 이 개항장은 10리, 50리, 100리로 넓혀갑니다. 조차지가 넓어지고, 개항장이 넓어질수록 해상무역은 점차 육지 무역까지 침투하게 되는 것이지요.

화폐통용권

화폐통용권은 개항장에서 외국의 화폐가 통용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외국이 자국의 돈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이 생김으로서 우리 경제를 침투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됩니다.

최혜국

대우권

최혜국 대우권은 통상, 항해, 관세 등 모든 부분에 있어서 조약을 맺는 국가가 다른 3국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로, 일본이 우리에게 원산을 개항했다면, 미국은 조약을 맺을 때 최혜국으로서 일단 원산은 자동 개항하고 나머지 부분의 개항을 추가 합의하게 됩니다. 즉, 어느 한 나라와 맺은 조약이 이후 조약 또는 이전 조약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나라에서는 청과 맺은 조청상민무역장정에서 <내륙지 무역을 허가한다>라는 조약이 있습니다. 이 조약은 최혜국 약관에 의해 모든 나라가 우리 내륙에서 무역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따라서 이 조약이 체결된 1880년 중반에서 청, 일본, 미국, 러시아 등 모든 나라가 우리 나라에서 경제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 치고 받고를 시작하죠.

3. 민씨정권은 적극적으로 개화정책을 시도하다.

조선책략의 유입으로 민씨정권은 개화정책의 공공연한 명분을 얻게 되고, 개화파는 이제 양지에서 활동하게 됩니다. 따라서 1880년대의 개화정책의 특징은? 이라고 물어보면 답은 <정부주도의 개화정책과 온건개화파의 득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때의 개화정책이란, 서양의 모든 문물을 다 받아들이는 정책이 아닙니다. 조선 정부는 개화의 성공 사례는 일본을 본받으려 했지만, 개화의 원칙에 았어서는 청나라, 특히 양무운동의 이홍장에게 많은 자문을 얻게 됩니다. 양무운동은 중국의 개화정책 사상으로 <서양의 기술을 받되, 중국의 정신을 유지한다>는 중체서용의 정신을 바탕으로 합니다. 우리나라 개화도 이 중국의 중체서용, 일본의 화혼양재의 성격을 본받아 <동양의 도를 존중하면서, 서양의 기술만을 배운다>는 <동도서기>의 개화였습니다.

군신, 부자, 부부, 장유, 붕유의 윤리는 하늘로부터 얻어서 본성에 부여된 것인데, 천지에 통하고 만고에 뻗치도록 변하지 않는 이치로 위에서 도(道)가 되었습니다. 수레, 배, 군사, 농업, 기계는 백성에게 편하고 나라에 이로운 것으로 밖에 드러나 기(器)가 되니, 제가 바꾸고자 하는 것이 기인 것이지, 도가 아닙니다.

- 승정원일기, 고종 19년 12월 22일, 윤선학의 상소 -

위 글은 윤선학이 주장한 동도서기론입니다. 즉, 이홍장의 양무운동 내용과 거의 일치합니다.

민씨정권은 <동도시기>를 바탕으로 새로운 서양식 기구와 시설을 만들었습니다. 우선 효율적인 문물 수용을 위해 청에는 김윤식 등 영선사를 계속 파견하고, 일본에는 수신사 대신 조사시찰단을 파견합니다. 조사시찰단은 정부 관료 중심이 아니라 젊은 관료와 기술자, 개화파를 중심으로 구성하여 진보적으로 서구문물을 수용하려는 목적에서 일본에 파견되었고, 숫자도 상당히 많이 늘렸습니다.

이러한 외국 문물의 조사를 통해 통리기무아문과 12사라는 행정기구를 신설합니다. 통리기무아문은 지금으로 따지면 행정부, 12사는 각 부와 차관급이 되겠네요. 또 <국>을 신설하여 국가 기술력 향상을 추구하는데, 대표적인 곳이 박문국으로서 이곳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를 발행합니다. 또 중국 양무운동기의 기기국을 모방하여 기기창이라는 무기 제조부를 만들고, 신식 군대도 양성합니다.

신식군대는 왜별기라고 하여 양반자제로 구성하였습니다. 원래 흥선대원군 시기에 신미양요, 병인양요를 극복하면서 무위영, 장어영의 2영체제가 확립되고 군권을 국왕이 장악하였는데, 민씨정권에 들어서면서 이 구식군대를 활용하는 일이 거의 없어졌습니다. 대원군기 구식군대는 그대로 놔둔 상태에서 신식군대를 육성함으로서 이것이 훗날 임오군란의 원인 중 하나가 됩니다.

4. 조선책략은 룩론을 분열시켰다.

조선책략의 유입으로 정부가 개화정책을 실시하자, 외세를 몰아내고, 우리 것을 지키자는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납니다. 이것을 흔히 정을 수호하고, 사를 몰아낸다는 <위정척사운동>인데, 80년대 위정척사운동의 내용은 <민씨정권에 대한 개화 반대운동>이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조선책략에 대해 조목조목 비판한 이만손의 영남만인소 일부를 한 번 볼까요?

일본이 이미 우리의 수륙 요충 지대를 점거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만약  그들이 우리의 허술함을 알고 충돌을 자행할 경우 이를 제지할 길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은 우리가 본래 모르던 나라입니다. 갑자기 황 쭌셴의 종용을 받고 우리 스스로가 끌어 들인다면, 그들이 풍랑을 헤치고 험한 바닷길을 건너와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의 재산을 약탈 하거나, 저들이 우리의 약점을 잡아 어려운 청을 강요한다면 이를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러시아는 본래 우리와는 혐의(嫌疑)가 없는 나라입니다. 공연히 남의 이간을 듣고 우리의 위신을 손상시키거나 원교를 핑계로 근린을 배척하다가 만의 하나 환란이 일어나면 장차 이를 어찌하겠습니까?

사학에 종사하여 재화를 이루고 농, 공을 일으킨다고 하지만, 원래 우리에게도 옛부터 재용과 농공에 대한 훌륭한 법규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서학에 종사해야만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야소교 전래가 해롭지 않다고 하는 것은 사교를 조선에 유포시키려는 간계이니, 주공, 공자, 정자, 주자의 가르침을 더욱 밝혀서 그 사람 귀류들을 물리쳐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글에서는 일본, 미국과 연합해고, 러시아를 물리쳐야 한다는 조선책략의 내용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생들은 아무 근거없이 개화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다 나름의 명분과 이유가 있긴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조선책략이라는 책이 조선의 개화를 상징하는 것이 되어 버렸고, 유생들은 조선책략을 보이는대로 불태우는 운동을 하면서 개화에 대하여 저항했다는 점입니다.

자, 그럼 다음 장에서는 우리나라의 위정척사운동을 대원군기부터 명성황후기까지 시기별로 모아서 정리해보겠습니다.

 <http://historia.tistory.com 역사전문블로그 히스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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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조약

이 자료는 각 교육청 기관 중고등부 학습 자료실에서 만든 자료입니다.
   따라서 이 자료는 학습 목적 외에는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이 자료들은 사이트내에서 중고등부 한국사 모의시험 출제를 위해 수집하고 있습니다.

플래시 출처 : 에듀넷 중앙학습자료실(경남교육청 자료실)

 <http://historia.tistory.com 역사전문블로그 히스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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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조일수호조규(강화도 조약)은 어떤 조약인가?

이번 장에서는 우리나라가 드디어 개항을 이룬 강화도 조약(조일수호조규)의 내용과 그 의미를 한 번 포스트 해보겠습니다. 강화도 조약... 모두 알 것 같으면서도 사실 잘 모르고 있었던 내용이 많은 부분입니다.

1. 조약을 맺게 된 배경 중 국내적인 배경을 살펴보자.

조일수호조규를 맺게 된 배경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한마디로는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조선 내부의 상황과 일본 내부의 상황이 복잡하게 얽히고 꼬여있기 때문이지요. 그래도 뭔가 핵심적인 <키워드>는 있을텐데... 키워드를 찾아봅시다.

먼저, 조약을 맺은 조선 내부적인 키워드는 <통상개화론>입니다. 보통 이 <통상개화론>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강화도 조약이 꼭 일본의 강요라고 보기에는 문제가 있으며, 조선이 스스로 개화하려는 의지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곤 합니다.

통상개화론이란, 흥선대원군의 10년간 장기집권(1863-1873)을 겪으면서 쇄국정책을 우려했던 개화파들이 흥선대원군이 물러난 이후 목소리를 높였기 때문에 대두한 이론입니다. 실제, 조선 후기의 박지원, 박제가 계통으로 이어지는 상공업 중심의 실학자들의 계보가 흥선대원군 시기 박규수 등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들은 양반뿐 아니라 기술학에 능통한 중인들도 다수 포함된 신진 개화주의자들이었고, 이들이 개화라는 단어를 알게 된 것은 조선 후기 <북학파> 등의 상공업 중심 실학자들의 노력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통상개화론자들은 개항과 개화라는 것을, 인맥상 또는 학맥상 조선 후기 실학과 연계하려는 시도가 많습니다. 그러나, 1863년 이후 대원군의 집권기에는 감히 개화라는 말을 꺼내지도 못합니다. 대원군의 철저한 쇄국정책 앞에 개화나 개항이라는 말을 꺼내어 들었다가는 바로 <서양 양놈과 마찬가지인 역적> 취급을 당하기 때문이죠.

따라서 통상개화론자들은 대원군이 물러난 1873년 이후 개항, 개화라는 말을 꺼내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특히 청나라의 양무운동 등의 개화운동을 보면서 조선사회도 문호 개방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물론, 당시 조선이 개방의 준비는 전혀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개화론자들은 중국과의 교류를 통하여 개화가 무엇인지를 점차 알게 됩니다. 개화라는 말의 정의를 내린 다음 글을 한 번 볼까요?

객이 나에게 물었다. <개화는 무엇이며, 어떠한 일을 말하는 것인가?>

내가 답하였다. <만물의 뜻을 깨달아 천하의 일을 이루는 것이며(개물성무 : 開物成務), 백성을 교화하여 풍속을 바로잡는 것(화민성속 : 化民成俗)이 바로 개화이다.>

- 황성신문 논설, 광무 2년(1898) 9월 23일 -

무릇 개화란 인간의 온갖 만물이 가장 아름다운 경지에 이르는 것을 일컫는데, 개화에는 인륜 개화, 학술 개화, 정치 개화, 법률 개화, 기계 개화, 물품 개화가 있다. 인륜 개화는 천하만국을 통하여 그 동일한 규모가 천만년을 지나도 장구함이 변하지 않는 것이다. 정치 이하의 여러 개화란 시대에 따라서 변개하기도 하고 지방에 따라 다르기도 하다. 그러므로 옛날에는 맞았지만 지금은 맞지 않으며, 저쪽에는 좋지만 이쪽에는 좋지 않은 것도 있어, 곧 고금의 형세를 살피고 피차 사정을 비교하여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버리는 것이 곧 개화의 큰 도인 것이다.

- 서유견문 제 14편, 개화의 등급 -

여기서 우리는 개화란 단어를 개항기 사람들이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당시에 말한 개화란, 서양을 단지 보고 베낀다는 것이 아니라 <만물을 알고, 백성을 교화하는 것>이라고 정의된 것입니다. 또, 개화란 서양의 것을 무분별하게 베끼는 것이 아니라, 정신, 물질, 사상 등 여러 개화가 있으며, 그 중 서양과 비교하여 장점만을 취하는 것이 진정한 개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선조들이 생각한 개화란, 서양의 양무운동 등의 개화운동을 보고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선별해서 얻는 것>을 개화로 여겼다는 것을 알수 있네요. 당시 개화론자들은 서양처럼 공화제를 한다던가, 혁명이 필요하다던가 하는 것은 대부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최소한 김옥균의 감신정변 이전의 개화란, 문호개방을 통한 부국자강을 추구한 것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결국 여기서 다룬 단 1가지의 내용은 강화도 조약에서 우리가 스스로 <개항, 개화>하려는 의지가 있었다는 것이군요. 우리는 개화사상에 있어 내제적이고, 주체적인 발전 과정 속에서 스스로 개항하려는 분위기가 있었다는 점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2. 조약을 맺게 된 배경 중 일본과의 문제점들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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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조약에서 가장 핵심적인 배경이 되는 것은 누가 뭐래도 일본과의 <서계>문제입니다. 일본과의 서계문제는 <흥선대원군>을 다룬 지난 장에서 아주 상세히 다루었습니다.

간단히 복습할까요? 1860년대 후반, 우리 나라는 강력한 쇄국정책으로 프랑스, 미국 등을 물리쳤습니다. 반면, 일본은 미국에게 굴복하여 미일수호조약을 맺고 개항한 뒤 <메이지 유신>으로 국가체제를 황제 일원적인 중앙집권체제로 개편합니다. 즉, 우리는 흥선대원군의 강력한 중앙집권체제, 일본은 강력한 황제집권체제가 성립된 것이지요. 이 두가지 체제는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데, 이 두 국가의 충돌에서 기분이 나쁜 건 흥선대원군이었습니다.

일본은 조선에 보내는 편지(서계)에다가 <일본 천황, 일본 황실, 일본제국> 등의 언어를 늘어놓습니다. 300년간 통신사를 파견하여 일본 문화를 돕고 있다고 생각한 조선 입장에서는 미칠 노릇이었습니다. 흥선대원군 정권은 서계가 불손하다며 일본과의 통교를 거부하면서, 일본도 미국과 협상한 오랑캐 놈들이라고 말합니다. 일본과 서양은 같다는 것을 흔히 <왜양일체론>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 통상개화론자들은 일본의 서계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 이유는, 일본이 서계를 일부러 버릇없게 쓰는 이유는 침략의 구실을 노리는 것이므로 우리는 서계는 받되 일본에 강경하게 나가야 한다는 논리였지요.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일본과의 국교를 완전 단절하려고 합니다.

일본에서는 이 서계 문제를 두고 몇 년간 조선과 교섭을 했으나 결렬되자 <정한론>이 대두합니다. 정한론이란, 조선을 바로 정복하자는 논의입니다. 특히,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막부가 무너지고 무사계급이 빈곤해졌는데, 이러한 무사계급의 불만을 대외로 돌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가 쳐들어온 이유중 하나가 국내세력의 불만을 국외로 돌리려는 것이었잖아요? 그것과 같습니다. 일본은 국민들에게 공공연하게 침략의 정당성을 광고하면서 조선 침략을 하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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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침략의 정당성이란, <대동단결의 아시아>라는 광고였습니다. 일본이 서양의 침략에 맞서 아시아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데, 서양과의 싸움에서 이기려면 서양처럼 식민지가 필요하고, 그 식민지는 조선이 가장 적합하다는 광고입니다. 이것은 사이고 다카모리가 주장하면서 일본 전역에 퍼졌습니다.

그러나 이 <정한론>은 광고효과로만 활용될 뿐 실제 일본 정부 내에서는 공식화되지 못합니다. 일본 지배층에서는 정한론보다는 이토 히로부미의 <점진론>이 더 효과가 있었습니다. 점진론이란, 당장 조선을 치기보다는 일본의 조금씩 힘을 키워나가면서, 조선을 조금씩 잠식해들어가자는 논의입니다. 실제, 임진왜란의 실패를 경험한 일본으로서는 위험부담이 큰 정한론보다는 점진론이 더 효율적이었던 듯 싶습니다. 점진론을 주장한 이토 히로부미는 이후 조선을 정복한 이후 최고의 <조선 총독부 통감>이 되어 조선 최고의 실세가 됩니다. 물론, 안중근 의사한테 죽게 되지만요. (이토는 우리에게는 역적, 일본으로서는 영웅이라고 할 인물이네요.)

3. 운요호 사건이 터지다.

운요호 사건은 점진론이 대세를 이루던 1875년 경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1875년은 대원군이 물러나고, 명성황후(민씨정권) 집단이 개화정책을 실시하려고 준비하던 시기입니다. 당시 일본의 목적은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었고, 우리의 목적은 개화를 통해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하필 우리의 개화 상대가 일본이었고, 일본은 우리에게 개화의 이득을 주는 나라가 아니라, 침략을 통한 우리의 이권침탈을 목적으로 했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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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운요호>

1875년의 운요호는 3척의 군함을 끌고 옵니다. 이 운요호는 식량과 먹을 것이 떨어져서 조선에 잠시 왔다간다는 구실로, 불을 지르고 사람을 죽이며 약탈을 자행합니다. 이 운요호가 남의 나라에 와서 미친 짓을 한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미친 짓을 하고 있으니, 너희는 빨랑 와서 우리랑 협상을 하던지, 더 미치는 꼴을 보고 있던지 하라는 것이지요. 마침 개화에 관심이 있었던 우리 민씨정권은 일본과의 협상을 시작합니다. 그럼 아래 사료 내용을 한번 볼까요?

일본의 강화도 침략

(1) 식량이나 음료수 양은 항해 계획과 기항지를 생각해서 전문적인경리 장교가 미리 준비해 두지 않을 수 없다. 식수를 구하려고 강화도에 접근했다는 것은 구실에 불과할 것이다.

- 山邊健太郞 <日本の韓國倂合>, 태평출판사, 1966 -

(2) 구로다 기요다카에게 내린 일본 정부의 비밀 훈령

조선이 그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거나 거짓을 꾸며 도저히 일본 요구에 응하지 않을 때에는, 가령 헌저하게 난폭한 행동이나 능멸하는 따위는 없더라도, 사절은 두 나라의 화호를 단념하고 우리 정부에서 모종의 별도 조치가 있을 것임을 전하고 교섭을 중단하는 문서를 던지고 조속히 귀국하여 다시 명령을 기다려 사절의 체통을 잃지 말 것이다.

- 일본외교문서 8권 -

(3) 우리나라와 일본은 300년 동안 통신사를 교환하고 왜관을 설치하여 무역하여왔다. 비록 수년 이래 서계를 가지고 서로 버티어 왔으나 우호 관계를 존속하려는 처지에서 통상을 굳이 거절할 필요가 없으므로 통상 조약 등의 절차를 잘 협상하여 양국의 편의에 맞춰 조치하라.

- 승정원일기, 고종 13년 1월 24일 -

문서를 보면 양국의 입장이 너무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은 만약 협상이 결렬되면 바로 돌아가서 전쟁 준비를 할 태세였습니다. 우리는 일본의 속셈도 모른 채 단순히 <개화정책>을 실시할 생각으로 나갔던 거죠. 일본은 이미 여러 나라와 불평등 조약을 맺어보았습니다. 우리는 개방 조약이 뭔지도 모르면서 남의 것을 흉내내서 하려고 했습니다. 그것도 일부 개화세력만이 주도해서 협상을 하려고 했던 것이지요.

4. 조일수호조규의 전문 내용

강화도 조약(조일 수호 조규)

대일본국과 대조선국은 원래부터 우의를 두터이 하여온 지가 여러 해 되었으나 지금 두 나라의 우의가 미흡한 것을 고려하여 다시 옛날의 좋은 관계를 회복하여 친목을 공고히 한다. 이는 일본국 정부가 선발한 특명 전권 변리 대신인 육군 중장 겸 참의 개척 장관 흑전청륭(구로다 기요타카)과 특명 부전권 변리 대신인 의관 정상형(이노우에 가오루)이 조선국 강화부에 와서 조선국 정부가 선발한 판중추부사 신헌과 부총관 윤자승과 함께 각기 지시를 받들고 조항을 토의 결정한 것으로써 아래에 열거한다.

제1조.

조선국은 자주 국가로써 일본국과 동등한 권리를 보유한다. 이제부터 양국은 화친한 사실을 표시하려면 모름지기 서로 동등한 예의로 대우하여야 하고 조금이라도 상대방의 권리를 침범하거나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우선 이전부터 사귀어온 정의를 손상시킬 우려가 있는 여러 가지 규례들을 일체 없애고 되도록 너그러우며 융통성있는 규정을 만들어서 영구히 서로 편안하도록 한다.

제2조.

일본국 정부는 지금부터 15개월 뒤에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조선국 경성에 가서 직접 예조판서를 만나 교제 사무를 토의하며 해당 사신이 주재하는 기간은 다 그때의 형편에 맞게 정한다. 조선국 정부도 또한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일본국 동경에 가서 직접 외무경을 만나 교제 사무를 토의하며 해당 조선국 사신이 주재하는 기간도 역시 그 때의 형편에 맞게 정한다.

제3조.

이제부터 두 나라 사이에 오고가는 공문은 일본은 자기 나라 글을 쓰되 지금부터 10년 동안은 따로 한문으로 번역한 것 한 본을 첨부하며 조선은 한문을 쓴다.

제4조.

조선국 부산 초량항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일본 공관이 세워져있어 양국 백성들의 통상 지구로 되어왔다. 지금은 응당 종전의 관례와 세견선 등의 일은 없애버리고 새로 만든 조약에 준하여 무역 사무를 처리한다. 조선국 정부는 제5조에 실린 두 곳의 항구를 개항하여 일본국 백성들이 오가면서 통상하게 하며 해당 지방에서 세를 내고 이용하는 땅에 집을 짓거나 혹은 임시로 거주하는 사람들의 집을 짓는 것은 각기 편리대로 하게 한다.

제5조.

경기, 충청, 전라, 경상, 함경 5도 중에서 연해의 통상하기 편리한 항구 두 곳을 골라서 지명을 지정한다. 개항 기간은 일본 역서로는 명치 9년 2월, 조선 역서로서는 병자년 2월부터 계산하여 모두 20개월 안으로 한다.

제6조.

이제부터 일본국의 배가 조선국 연해에서 혹 큰 바람을 만나거나 혹 땔 나무와 식량이 떨어져서 지정된 항구까지 갈 수 없을 때에는 즉시 가닿은 곳의 연안 항구에 들어가서 위험을 피하고 부족되는 것을 보충할 수 있으며 배의 기구를 수리하고 땔나무를 사는 일 등은 그 지방에서 공급하며 그에 대한 비용은 반드시 선주가 배상해야 한다. 이러한 일들에 대해서 지방의 관리와 백성들은 특별히 진심으로 돌보아서 구원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데가 없도록 하며 보충해 주는 데서 아낌이 없어야 한다. 혹시 양국의 배가 바다에서 파괴되어 배에 탔던 사람들이 표류되어 와닿았을 경우에는 그들이 가닿은 곳의 지방 사람들이 즉시 구원하여 생명을 건져주고 지방관에 보고하며 해당 관청에서는 본국으로 호송하거나 가까이에 주재하는 본국 관리에게 넘겨준다.

제7조.

조선국 연해의 섬과 암초를 이전에 자세히 조사한 것이 없어 극히 위험하므로 일본국 항해자들이 수시로 해안을 측량하여 위치와 깊이를 재고 도면을 만들어서 양국의 배와 사람들이 위험한 곳을 피하고 안전한 데로 다닐 수 있도록 한다.

제8조.

이제부터 일본국의 정부는 조선에서 지정한 각 항구에 일본 상인을 관리하는 관청을 수시로 설치하고 양국에 관계되는 안건이 제기되면 소재지의 지방 장관과 만나서 토의처리한다.

제9조.

양국이 우호관계를 맺은 이상 피차 백성들은 각기 마음대로 무역하며 양국관리들은 조금도 간섭할 수 없고 또 제한하거나 금지할 수도 없다. 만일 양국 상인들이 값을 속여서 팔거나 대차료를 물지 않는 등의 일이 있으면 양국 관리들이 빚진 상인들을 엄히 잡아서 빚을 갚게 한다. 단 양국 정부가 대신 갚아줄 수는 없다.

제10조.

일본국 사람들이 조선국의 지정한 항구에서 죄를 저질렀을 경우 만일 조선과 관계되면 모두 일본국에 돌려보내어 조사 판결하게 하며 조선 사람이 죄를 저질렀을 경우 일본과 관계되면 모두 조선 관청에 넘겨서 조사 판결하게 하되 각기 자기 나라의 법조문에 근거하며 조금이라도 감싸주거나 비호함이 없이 되도록 공평하고 정당하게 처리한다.

제11조.

양국이 우호관계를 맺은 이상 따로 통상 규정을 작성하여 양국 상인들의 편리를 도모한다. 그리고 지금 토의하여 작성한 각 조항 중에서 다시 보충해야 할 세칙은 조목에 따라 지금부터 1개월 안에 양국에서 따로 위원을 파견하여 조선국의 경성이나 혹은 강화부에서 만나 토의결정한다.

제12조.

이상의 11개 조항을 조약으로 토의 결정한 이날부터 양국은 성실히 준수시행하며 양국 정부는 다시 조항을 고칠 수 없으며 영구히 성실하게 준수함으로써 우의를 두텁게 할 것이다. 이를 위하여 조약 2본을 작성하여 양국에서 위임된 대신들이 각기 날인하고 서로 교환하여 증거로 삼는다.

대조선국 개국 485년 병자년 2월 2일

대관 판중추부사 신헌

부관 도총부 부총관 윤자승

대일본 기원 2536년 명치 9년 2월 6일

대일본국 특명 전권 변리 대신 육군 중장 겸 참의 개척 장관 흑전청륭(구로다 기요타카)

대일본국 특명 부전권 변리 대신 의관 정상형(이노우에 가오루)

- 국회도서관 입법조사국, 구한말조약휘찬 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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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조약을 체결할 때 사진>

   5. 이 조약... 뭔가 너무 허전하다.

이 조약 12개의 전문을 보면, 우리가 너무 순진해서 양의 탈을 쓴 늑대에게 간식거리로 몸을 바치려고 한 조약임을 알 수 있습니다.

1조의 <조선은 자주국이다>라는 말... 너무 좋은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꽝! 도장 찍습니다. 그런데 이건 무슨 뜻? 사실 이것은 조선이 자주국이니 중국 <청나라>는 조선에 간섭하지 말고 가라는 뜻입니다. 일본이 조선을 차지하겠다는 속셈을 우리에게 들키지 않고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지요.

2조의 수신사 파견은 조선시대 통신사만을 우리가 파견했던 것에 비하면 전세 역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4조의 조차지 설정과 개항부분은 우리의 항구부터 일본이 잠식하겠다는 점진론의 내용을 보여줍니다. 7조에서는 아예 일본이 우리 영해를 측량하면서 영해권을 침범하고 있으며, 10조에서는 불평등 조약의 대표적 사례인 <치외법권>이 나옵니다.

치외법권이란, 일본인이 조선에서 범죄를 저질러도 일본인에게 재판을 받는 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일본에게 우리의 권리가 심하게 훼손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사실 지금도 한미상호방위조약상 미국군인이 우리 여중생을 죽이면 미국에서 재판받는 불합리한 주권침해는 계속되고 있죠...)

결과적으로 이 조약.... 완전 불평등 조약입니다. 일본은 불평등 조약에 몇 번 당해보고 개항한 나라라 이러한 조약에 대해 잘 알고 있지만, 우리는 너무 순진하게 첫 도장을 어이없게 찍어준 것입니다. 이 조약으로 일본 <점진론>은 크게 힘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뒤늦게 깨닫고 조약에 대한 일부 내용을 수정하려고 하지만 거부당합니다. 거부당한 조약 재조정 내용을 잠깐 볼까요?

수호 조규 체결시 조선의 추가 요구 사항

1. (개항장 체류 일본인) 상평전 사용을 금지할 것.

2. 미곡 교역을 금지할 것

3. 교육연 물물교환만 하고 외상선매(후불)와 산채취식(이자놀이)을 금지할 것

4. 조선은 일본과 수교할 뿐이니 타국인이 섞여 오는 것을 금지할 것

5. 아편과 서교(천주교)는 국법으로 엄금하니, 아편과 서교 관련 서적 수입을 금지할 것

6. 양국의 망명자를 은닉하거나 표류를 가장하여 잠입하는 자는 반드시 적발하여 송환할 것

- 왜사일기, 고종 13년 1월 26일 -

위 내용, 일본이 당연히 승인하지 않습니다. 기껏 속여서 도장 찍었는데, 다시 조약을 재조정할 이유가 없죠. 우리는 이 조약을 시작으로 세계 각국과 아주 불평등한 내용의 조약을 비슷하게 체결합니다. 이유는 대부분의 나라와 조약을 맺을 때 <최혜국 대우>라는 부분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최혜국 대우란, 조약을 맺는 국가가 다른 국가보다 우선시 되는 내용으로 대우받는다는 조항입니다. 만약, 미국이랑 조약을 맺을 때 <최혜국 대우>라는 말이 들어가면, 일본과 맺었던 조약 중 미국에게 유리한 부분의 조약은 자동 추가되는 것이지요. 미국이 조선의 <최혜국>, 즉 가장 혜택을 받도록 상호 조약을 맺는 국가로 조약을 체결하는 것이니까요.

이 조약은 우리에게 근대 서양문물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하지만, 제국주의 국가에게 우리가 침탈당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조약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세계 자본주의에 편입되었습니다. 그러나, 제국주의 국가에게 침탈당한 국가인 일본에게 다시 침탈당하는 국가가 되면서 엄청난 시련이 시작됩니다. 이유는 다른 제국주의 국가와는 달리 일본은 산업혁명도 늦고, 산업기반도 약하며, 다른 제국주의 국가와의 최혜국 조약을 맺은 국가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수탈은 차후 다른 어떤 국가보다도 심한 침탈로 이어집니다. 일본과의 강화도 조약을 서양이 중국과 맺은 난징조약과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 합니다. 중국사할 때 한번 시도해 봐야겠네요.

6. 조일수호조규부록(강화도 조약의 속약) - 일본은 더욱 더 침탈하다.

조일 수호 조규 속약

제 1조. 부산, 원산, 인천항의 강행이정을 사방 50리로 하고, 1년 뒤에 양화진을 개시한다.

제 2조. 일본 공사 영사와 수행원이 조선 내지에서 자유롭게 여행을 한다.

- 고종실록 권 19, 고종 19년 7월 17일 -

일본과 맺은 강화도 조약이 상징적으로 우리 개항과 제국주의 침탈을 상징한다면, 다시 일본과 맺은 이 조일수호조규(강화도 조약)의 속약은 실제 우리 경제에 미친 파급효과가 큽니다. 이 조일 수호 조규 속약과 조일통상장정이라는 2건의 문건은 강화도 조약 이후 6년뒤 체결되는데, 이 조약은 일본 점진론의 제 2단계라고 보시면 됩니다.

먼제, 강화도 조약 때 단순히 항구에서 무역하던 것을 개항장 이내로 확장합니다. 즉, 개항장에서의 일본인 통행거리를 설정하고 10-100리 정도의 거리에서 일본인들이 장사를 시작합니다. 이로서 우리 전통의 상인인 객주, 여각 등은 몰락하기 시작합니다.

또 개항정에서 양곡의 수출입을 허용하고, 일본화폐를 사용하는 것도 허락하며, 일본 물품에 대하여 관세를 매기지 않는다는 것도 추가됩니다. 이로서 우리 경제는 차츰 일본 경제에 잡아먹히게 되면서 1880년대 중반, 일본의 경제침투가 심화됩니다. 1880년대 중반에 일본은 조선시대 이래 조선 무역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청나라에게 도전하는 형세로 발전하게 되고, 조선에서 청과 일본은 경제문제를 두고 심각한 대립을 연출합니다. 이 떄부터 이미 청일전쟁의 분위기는 돌기 시작한 것이죠.

자 이제 조선은 개화를 해 버렸습니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음 장에서는 민씨 정권의 개화 정책의 방향과 <조선책략>의 활용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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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 시대, 격동의 한국사 속에서 어떻게 봐야할까?

이번장에서는 흥선대원군이 실시한 정책에 대하여 논의해보려고 합니다. 흥선대원군은 1863년부터 1873년까지 약 10년간 정치를 이끌며 한국 근현대사의 주된 흐름을 이끌어간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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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화와 척사가 난립하고 있었다.

흥선대원군이 집권하기 직전의 한국사회는 개화, 척사라는 두 흐름이 정치 전반에 긴장감을 주던 시기였습니다. 1860년대, 서양에서는 이양선을 보내 아시아 각국에 통상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또 중국은 서양에 의해 베이징을 점령당했고,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러시아는 연해주를 차지하여 우리와 두만강을 경계로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죠.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세계사적 흐름을 차츰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1860년대 초부터 이항로 등의 유학자들은 외국과의 통상이 국내 경제에 미칠 영향이 어떤 것인가를 분석하면서 <통상반대운동>이 이루어지던 시기였습니다.

반대로 양반인 박규수, 중인출신인 오경석과 유홍기 등은 외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야만 이후 조선 사회가 살아남을 수 있음을 주장하면서 개화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을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오경석은 해국도지, 영환지략 등의 도서를 국내에 소개하였고, 이것은 훗날 조선책략, 만국공법과 함께 개화정책의 지침서가 됩니다.

또 순조 때의 효명태자와 같은 집권층 사람들은 세도정치 하에서 강력한 <국왕권>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개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도정치 하에서는 이러한 개화, 척사의 논의보다는 안동김씨 일문을 비롯한 정치가문의 정치적 논리가 우선이었으므로, 이러한 개화, 척사의 논의가 본격화되지 못하였습니다.

2. 대원군이 등장하다.

흥선대원군은 고종의 아버지로서 고종의 어린 시절 <강력한 국왕권 확보>를 위해 개혁정치를 실시한 사람입니다. 그는 순조, 헌종, 철종으로 이어지는 안동김씨 등 일문독재의 세도정치의 문제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상가집 개라고 불릴 정도로 미친척을 하여 안동김씨 세력을 안심시키면서, 자신의 아들을 안동김씨집안에서 이의없이 왕위에 올릴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고종이 왕이 된 후 흥선대원군은 <대원군>으로서 정치를 독점하고, 안동김씨 일문을 축출하여 세도정치가 마감됩니다.

그의 정치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재정확보와 민생안정을 통한 <강력한 왕권 확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흔히들, 흥선대원군의 정치가 민생을 안정시키고, 소농과 상인층을 보호하면서 세도정치 가문의 병폐를 근절시켰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대원군의 목적은 <농민보호>가 이니였습니다. 농민보호와 상인보호는 <왕권강화>를 위한 조세원 확보책의 일환이었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 같네요. 그럼 하나 하나 대원군의 정책을 짚어볼까요?

3. 왕권 강화를 시도하다.

흥선대원군은 집권후 가장 큰 목적인 <왕권강화>를 위해 세도정치와 관련된 인물들을 비롯하여 신권을 축소시키는 개혁을 시도합니다.

먼저, 조선 후기에 강해진 비변사를 축소합니다. 원래 조선 최고의 기구는 의정부였는데, 임란과 호란 이후 임시 군사기구였던 비변사에 신하들이 모여 붕당정치를 실시하면서 <비변사>가 조선 최고의 기구가 되는 변태정치가 실시되어 왔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약해진 왕권 강화를 위해 신권 기구인 비변사의 기능을 줄이고, 의정부 기능을 복원함으로서 <국왕권>이 주도하는 중앙정치로 환원시킨 것입니다.

다음으로 대원군은 경복궁을 중건합니다. 경복궁은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궁전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백성들을 버리고 선조가 북으로 피난가자 백성들이 울분을 참지 못하여 경복궁에 불을 질렀습니다.경복궁을 중건한다는 것은 곧, 떨어진 왕실 권위를 회복한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었죠. 그러나, 경복궁 중건에는 어마어마한 돈이 필요하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은 경복궁 중건에 드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원납전>을 징수합니다. 원납전이란, 원래 <원하는 사람이 납부하는 돈>이란 뜻이었는데, 점차 국가는 이 원납전을 강제로 징수하여 경복궁 중건에 투입합니다. 백성들은 반강제적인 원납전을 <원망하면서 내는 돈>으로 바꿔불렀다고 합니다. 또 동대문부터 북대문까지 4대문과 4대문 사이에 있는 소4문을 통행하는 사람들에게 <문세>를 받아 자금으로 활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요역을 늘려서 백성들을 무상으로 일을 시키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대원군은 경복궁 중건비가 부족해지면 <당백전>이라는 돈을 찍어서 발행하기도 했는데, 이 당백전 발행으로 시중에 돈이 너무 많아져서 인플레이션 현상이 심화되었고, 백성들의 삶이 더욱 힘들어졌다고 합니다. 흥선대원군은 강력한 리더쉽으로 백성들의 경제생활을 보장하여 많은 지지를 받았지만, 경복궁 중건으로 백성들은 흥선대원군으로부터 다시 멀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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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흥선대원군, 경복궁 근정전, 당백전>

대왕대비가 경복궁 중건을 명하고 다음 날 3일 시원임 대신을 회정당에 불러 중건 대사를 대원군에 위임하였다. 경복궁 영건 때의 비용과 백성의 역에 대한 절차를 의논하였는데, 백성의 노역 문제는 신중을 기하고, 안으로 재상 이하 밖으로는 지방 수령 이하가 역량에 따라 보조하며, 선비, 서민층은 서울과 지방을 막론하고 자진 납부하는 자는 상을 주기로 하고 이 뜻을 8도에 전달하도록 하였다. 이미 서울의 원납전이 20만량이 되었다.

- 승정원일기, 고종 2년 4월 2일, 5일 -

또 대원군은 자금 확보를 이유로 전국의 서원을 47개만 남기고 정리해버립니다. 흥선대원군은 <백성을 괴롭히는 자들은 공자가 살아돌아오더라도 용서하지 않겠다>라는 명분을 강조하면서 서원을 철폐합니다. 서원 철폐는 양반계급이 대원군을 적대시하게 되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흥선대원군은 서원철폐를 계기로 지방 양반들과 적대적인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대원군의 서원 정리

사족이 있는 곳마다 평민을 못살게 굴지만 가장 심한 곳이 서원이었다. 먹도장을 찍은 다음 편지 한통을 고을에 보내서 서원 제수전을 바치도록 명령하였다. 사족이나 평민을 물론하고 그 편지를 받으면 반드시 주머니를 쏟아야 하였다. 그렇게 하지 않는 자는 서원에 잡혀가 혹독한 형벌로 위협을 받았고 화양동 서원 같은 곳은 그 권위가 더구나 강대하여 그곳에서 보내는 편지를 화양동 묵패지라 하였다.

백성들은 탐학한 아전들에게 시달렸는데 여기에 또 서원 유생에게 침탈을 당하니 모두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원망을 하고 이를 갈아도 하늘만 쳐다볼 뿐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대원군이 영을 내려 나라 안 서원을 죄다 허물고 서원 유생들을 쫒아 버리도록 하였다. 감히 항거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 하니, 사족이 크게 놀라서 온 나라 안이 물 끓듯 하였고 대궐 문간에 나아가 울부짖는 자도 수십만이나 되었다. 조정에서는 어떤 변이라도 있을까 하여 대원군에서 이렇게 간언하였다.

<선현의 제사를 받드는 것은 선비의 기풍을 기르는 것이므로 이 명령만은 거두기를 청합니다.>

대원군은 크게 노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진실로 백성에게 해가 되는 것이 있으면 비록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나는 용서하지 않겠다. 하물며 서원은 우리나라 선유를 제사하는 곳인데 지금에는 도둑의 소굴로 됨에 있어서라.>

드디어 형조와 한성부 나졸들을 풀어서, 대궐 문 앞에서 호소하려는 선비를 강 건너로 몰아내 버렸다. 여러 고을에서 모두 두려워하여 감히 영을 거행하지 못했는데, 대원군이 먼저 한 고을 원을 파면시키고 무거운 벌을 시행하니, 이에 여러 도에서는 두려워하였다. 그리하여 일시에 서원을 철폐시킬 수 있었다.

다시 8도에다 암행어사를 보내니, 사족으로서 평민을 침해한 자가 있으면, 그 몸에 죄를 주고 재산을 몰수하니 떵떵거리는 집안들도 숨을 죽이고 감히 나쁜 짓을 못하였다. 이 때문에 백성들이 춤추고 칭송하는 소리가 천지에 진동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왕권강화>를 위해 체제 정비도 시도하였습니다. 먼저 수령에 대한 조목을 수정하여, 조세징수를 부당하게 하는 수령들을 적발하여 처벌하였습니다. 또 오래된 붕당정치와 일문독재정치를 해결하기 위하여 당파와 관계없이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는 <탕평책>을 계승한 정책도 실시합니다. 실제 대원군의 국정 운영을 잘 살펴보면, 정조기 <탕평책>으로 활용했던 정책들이 상당수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대원군이 집권한 뒤 어느 공회 석상에서 음성을 높여 여러 대신을 향해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천리를 끌어다 지척을 삼겠으며 태산을 깎아 내려 평지를 만들고 또한 남대문을 3층으로 높이려 하는데 여러 공들은 어떠시요?>

대저 천리지척이라는 말은 종친을 높인다는 뜻이요, 남대문 3층이라는 말은 남인을 천거하겠다는 뜻이요, 태산을 평지로 만들겠다는 것은 노론을 억압하겠다는 의사이다.

- 매천야록, 갑오이전 -

또 이러한 체제 정비를 체계화 하기 위하여 <대전회통>, <육전조례> 등을 편찬하였습니다. 조선의 법전은 경국대전으로 완비된 이래, 새로운 사회변화에 따라 법전을 일부 개편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영조의 속대전, 정조의 대전통편은 이러한 사회변화를 반영한 대표적인 법인데, 대원군이 대전회통을 발표함으로서 보다 왕권위주의 사회개혁을 표방하는 체제정비가 이루어졌습니다.

4. 삼정의 문란을 해결하다.

삼정이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세금은 전정(전세 : 토지세), 군정(군포세 : 군역세), 환곡(이자세)를 말합니다. 원래 조선의 세금은 토지에 부과하는 전세를 바탕으로 하되, 백성들이 국가에서 몸으로 때우는 역을 추가로 설정합니다. 역이란, 실제 일을 하는 요역과 군에서 일하는 군역이 있는데, 군적수포제 이후 군역은 세금항목화 되었습니다.(조선시대 군역편을 참조하세요) 환곡은 원래 국가가 농민에게 춘궁기에 쌀이나 종자를 빌려주고, 수확기에 돌려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운반 등에서의 손실분을 메우기 위해 일분모회록을 작성하여, 약간의 이자를 받았는데, 이후 국가가 가난해지면서 이 이자를 세금처럼 늘려 받게 됩니다. (환곡편을 참조하세요)

이러한 삼정이 세도정치기에 무척이나 문란해집니다. 전정은 토지세를 엄청나게 늘려받았습니다. 토지 측량에서 관리들의 부정이 많아지고, 토지를 재는 <척>도 제각각이 됩니다.

군정은 균역법이후 군포 2필을 1필로 감해주어, 이 1필만 내면 군을 면제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탐관오리들은 군적을 속여 군포를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어린아이를 16세 이상이라고 속여서 군적에 올리거나, 여자를 남자로 속여 군적에 올리는 행위(황구첨정), 죽은 사람을 죽지 않았다고 하면서 군적에 올리는 행위(백골징포), 도망간 자의 이웃이나 친척에게 군포를 받는 행위(족징, 인정) 등이 대표적인 군적 문란의 예입니다.

환곡은 더욱 심하여, 백성들에게는 가장 큰 고통이었습니다. 빌려준 후 이자를 계속 배로 받아 원곡보다 이자가 몇 배 증가하는 경우, 강제로 대출해준 다음 고리대처럼 이자를 받는 경우, 겨가 섞인 불량쌀을 빌려준 후 받을 때는 품질좋은 쌀로만 받는 경우 등등 경우도 다양했습니다.

대원군은 이러한 삼정의 문란을 시정하기 위해 전정, 군정, 환곡을 대수술합니다.

먼저 전정에서는 불법으로 토지를 겸병하는 것을 막습니다. 또 국가 몰래 숨겨 경작하던 땅들을 모두 찾아내었고, 만약 숨겨진 땅이 있으면 수령이나 향리를 처벌하는 등 엄하게 토지관련 법규를 정비합니다.

다음으로 군정에서는 유명한 <호포법>을 실시합니다. 호포법은 양반들에게도 군포를 부과하는 것으로서 양반들의 심한 반발을 사게 되었습니다. 대원군은 양반들이 자존심 때문에 호포를 내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따라서 양반들이 군포를 낼 때에는 하인들의 이름으로 납부하게 하여 양반 위신을 세워주었고, 또 매포당 2냥씩으로 균등한 괴세를 매겨 평등한 세금 부과를 강조합니다.

마지막으로 환곡제는 완전 폐지합니다. 흥선대원군은 관에서 운영하는 환곡이 관리의 부정부패로 인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따라서 환곡을 폐지한 뒤 지방자치조직인 <사>에다가 곡식 대여의 임무를 맡깁니다. 이것은 관리의 부정을 방지하면서도, 왕실의 재정과 민생 안정을 동시에 추구하기 위한 대책이었습니다. 원래 고려 시대 이후 지방에서는 <사창>이라고 하여, 국가가 운영하지 않은 비인가 대여기구가 있었습니다.(고려에서는 국가기구였지만, 조선에서는 의창이 국가기구입니다.) 의창이 공식기구라면 사창은 조선시대의 비공식 백성 구휼기구였던 것이죠. 흥선대원군기에 사창은 국가에 공식 인정되어 국가 환곡을 담당하는 <의창>을 대신하게 됩니다

삼정의 문란이 시정되면서 흥선대원군은 원하였던 재정확보와 왕권강화를 추구하면서도, 농민층의 지지를 받게됩니다. 이후 명성황후의 집권기에 국가조세제도가 다시 문란해지면서 근대화기 우리나라는 대원권의 강력한 정책을 그리워하는 농민층이 많아졌고, 대원군의 이후 복권에도 이러한 정책에 대한 지지가 많은 뒷받침을 했었습니다.

대원군의 삼정의 문란 극복 정책

전정의 수정 : 은결색출

대저 임금이 있으면 나라가 있는데, 금일의 형세는 나라가 있으나 믿을 것이 없다고 합니다. 나라라는 것은 민이 모인 것이고 민을 모으는 것은 재물입니다. 안으로는 왕실과 정부가 모두 텅 비고 밖으로는 창고가 모두 고갈되었으니, 녹봉을 계속 지급하기 어렵고 진휼곡은 내주기도 어려우며 생민이 날로 초췌해지고 온 팔도에 소요가 일어나니 흰수건을 둘러쓰고 몽둥이를 든 자가 걸핏하면 1만명이 넘고 관가를 약탈하고 관원을 살해하고 재변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지난 역사에 없던 일들로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전하의 나라에 백성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 승정원일기, 고정 1년 정월 27일 -

영의정 조두순이 아뢰기를

<수령이 경작 토지를 찾아내어 중앙에 보고하는 양이 많고 적음으로서 징벌과 권면의 기준으로 삼기를 청하겠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대왕대비는 여기에 따라 시행하되 회기 내에 실효가 있도록 하라고 답변하였다.

- 일성록, 고종 1년 11월 20일 -

군정의 수정 : 호포제

갑자년 초에 대원군은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려고 그 전의 형태를 바꾸어 모든 양반, 천민에게 1정에 대해서 일률적으로 세납전 2량씩 고루 바치게 하였으니 이를 동포전이라고 한다.

- 매천야록, 갑오이전 -

환곡의 폐지 : 사창절목

본 창에는 관장할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되니 반드시 본면 중 부지런한 자를 택하고 일면회에서 천거하여 관에 보고한 뒤에 뽑니다. 또한 관에서 감히 강제로 정하지 말고 그를 일러 사수라고 하고 환곡을 분급, 수납하는 것을 맡아 검사한다. 또한 각 동에서 근검한 사람을 가려 뽑아 당장으로 삼아 일청 사수가 지휘하고 본동이 받고 내주어 그로 하여금 바로잡게 하며 창고지기 1명도 사수로 하여금 지역에 뿌리박은 자를 잘 선택하여 그로 하여금 맡아서 지키고, 출납하고, 용량을 재서 일체 환곡을 분급받은 백성에게 부칠 일이다.

환곡을 분급하는 규칙은 해당 면에서 각 동 대소 빈부로써 차등으로 삼으며 양반과 상민을 가리지 않고 동네에 분급된 양을 헤아려 지나치게 맣거나 지나치게 적을 우려를 없게 하며, 만약 유망하여 받아내지 못한 곳이 있으면 해당 동에서 골고루 배분하여 채워낼 것이로되 사수와 해당 동장은 모두 경계하고 삼가지 못한 죄로써 심문할 일이다.

- 일성록, 고종 4년 6월 11일 -

5. 쇄국정책을 실시하다

대원군이 국내에서는 강력한 <왕권보호>정책을 실시하였다면, 대외적인 정책은 철저한 <쇄국정책>이었습니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통상수교거부정책>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강력한 정책이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집권초기에 천주교에 관대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정조기 이래 반세도정치 세력들 중에 개화주의자들이 많았고, 대원군 역시 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압한다는 고래 <이이제이 정책>을 생각해두었기 때문입니다. 대원군은 프랑스 선교사들이 천주교를 전파하는 것을 이용하여,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저지하려고 하였죠. 그러나, 프랑스 선교사들은 정치 불간섭 및 철저한 인도주의적 선교원칙을 주장하면서 흥선대원군의 의도대로 따라주지 않았습니다. 프랑스와의 정치적 교섭은 실패하였고, 흥선대원군은 프랑스인 선교사 9명을 처형하고 천주교를 박해하기 시작합니다.(병인박해)

또 당시 대동강 하류에 정박하면서 우리와의 통상을 주장하였던 미국의 제너럴 셔먼호가 통상을 거부당하자, 평양근처의 민가를 불지르고 약탈을 자행한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평양군민들은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워 버리게 되었는데, 이것이 <제너럴 셔먼호 사건>입니다. 이 프랑스, 미국과 연계된 사건은 우리 정부의 정책이 급격하게 반외세로 돌아서는데 기여합니다.

1866년 프랑스는 강화도에 쳐들어옵니다. 이것이 병인양요입니다. 강화도는 수도인 한양으로 들어오는 인천물길의 입구로서 통상을 위해서 한양으로 오기 위한 입구입니다. 따라서 정부에서는 대외정책상 강화도를 철저히 방비하고, 대포와 함선을 비축해두고 있던 곳입니다. 또 문서를 보관하는 외규장각이 있던 섬이기도 하지요. 프랑스의 침입은 양헌수의 부대를 비롯한 관군이 정족산성 등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면서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외규장각의 수많은 문서들이 프랑스에 의해 약탈되었는데, 그 많은 문화재들을 아직도 찾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느낌표의 74434인가에서 대대적으로 방영해주기도 하더군요.

조선 국왕이 프랑스 주교 2인과 선교사 9인 그리고 조선인 신도 다수를 살해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잔폭은 패망을 자초하는것이다. 조선은 중국에 납공하는 나라이므로, 본국이 장차 군대를 일으켜 유죄를 정토하러 떠나기 전에 조선 원정을 알리는 것이 도리에 합당한 줄 안다. 조선 국왕이 프랑스 신부를 살해하는 날은 곧 조선국 최후 멸망의 날이 될 것이다. 수일 내로 조선 정복을 위해 출정할 것이다. 조선을 정복하여 국왕을 책립하는 문제는 프랑스 황제의 명령에 따라 시행할 것이다. 전에 수차 귀 아문을 방문하고 프랑스 석교사에게 호조(여권) 발급을 요청하였으나, 귀 아문은 모두 거절하였다. 그 이유는 조선이 비록 중국의 조공국이지만, 모든 국사를 자주로 처리한다는 것이다. 호조 발급은 천진조약에도 기재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 이에 본관은 조선 문제에 간섭하지 않는다고 믿고, 이후부터 본국과 조선이 전쟁을 벌이더라도 간섭하지 않기를 선언한다.

- 청계중일한관계사료 제 2권 -

제너럴 사건이후, 시간이 꽤 흘러서 미국도 제너널 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1872년 침입합니다. 이것이 신미양요입니다. 어재연의 광성보 전투와 평양군민들의 저항으로 미국이 물러나기는 했지만, 이후 미국은 계속적인 통상수교를 요청하곤 합니다.

이후 독일인 오페르트의 상선이 무역을 요청하였지만, 흥선대원군은 서양과의 통상을 거부합니다. 오페르트는 조선과의 통상에 대한 정치적인 목적에서 의도적으로 대원군의 아버지 <남원군>의 묘를 도굴하려 하다가 실패하였습니다. 흥선대원군과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이 도굴사건에 분개하였고, 이 사건은 대원군의 <통상수교 거부정책>을 유생층이 지지하도록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또한 개화파들도 당시에 개화정책을 입에 담을 수 없도록 하는 효과도 있었죠.

그들의 유골을 잠깐이나마 점유한다는 것은 그것을 가진 자에게 절대적 권한을 부여할 것이며, 서울을 점령하는 것과 다름없는 의의를 가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대원군은 그것을 돌려받기 위해서 누구에게든 두말할 것 없이 어떤 일에도 찬성할 것이다. 그러면 그를 강요하여 제안된 조건을 수락하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중략) 대원군을 강요하여 이 요구를 수락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지금으로서는 이것뿐이라는 것이다.

- 오페르트, {금단의 나라, 조선 기행}  -

사료분석 : 1868년(고종 5) 오페르트(E. J. Oppert:1832~?)가 충청도 덕산에 있는 남연군(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사건에 관한 사건입니다.  오페르트는 중국 상하이를 근거로 활동하던 유태계 독일상인으로 1866년 2번에 걸쳐 통상요구를 하다가 거절당하였죠. 그러자 그해에 미국인 젱킨스의 지원을 받아 통상조약 체결을 명분으로 상하이에서 조선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이때 통역으로 프랑스 선교사 1명과 한국인 천주교도 약간 명을 대동하였는데, 이들은 통상요구는 하지 않고 4월 18일 밤에 충청도 홍성군 구만포에 몰래 상륙해 바로 덕산으로 이동했으며, 덕산군청을 습격한 후 남연군의 무덤을 파헤쳤답니다.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이들은 조선인이 시신을 소중히 여긴다는 사실을 알고 관을 미끼로 조약을 체결하려 했던 것 같네요. 하지만 중도에 날이 밝아 도굴은 실패하였습니다. 21일에 이들은 영종진에 상륙하여 통상을 요구하며 수비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사상자를 내고 달아났습니다. 이 사건은 국외에도 널리 알려져 젱킨스가 기소되는 등(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남) 많은 파문을 일으켰으며, 대원군이 천주교탄압령을 내리고 대외강경책을 더욱 고수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페르트는 이 사건 이후 〈조선기행 A Forbidden Land:Voyage to the Corea〉이라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예전에는 단순한 도굴사건이 통한 쇄국정책에 영향을 주었다는 책들이 많았는데, 요즘 서적들은 오페르트는 하나의 통상방법으로서 이 수단을 선택하였으며, 치밀한 계획과 조선에 대한 여러가지 상황을 감안하여 실시된 계획적인 사건이라는 설이 점차 많아지고 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병인, 신미양요를 겪으면서 강력한 척양정책을 고수하였고, 이 정책에 유생들이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대원군의 권력기반을 확고히 하는 효과를 얻었습니다. 특히 이항로, 최익현 등의 개항반대운동은 대원군 정권의 정통성을 공고히 해주게 됩니다. 또 서양은 조선의 강력한 저항을 보면서, 조선을 독자적인 자주국가로 인정하게 되고, 다른 방향에서의 접근을 모색하게 됩니다. 실제, 유럽 열강들은 당시 자국의 국제적인 관계상 조선까지 쳐들어올 적극적인 이유를 찾지 못하였고, 이후 대조선 정책에 있어서 적극적인 관심을 보인 나라는 러시아와 일본으로 변합니다. 흥선대원군은 이후 척화비를 전국에 세워 반외세 정책을 확고히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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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신미양요와 병인양요 때의 강화도 격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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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어재연, 척화비, 대원군의 묘>

대원군기 통상수교 거부정책 : 이항로가 올린 글

또 하나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양이의 화가 금일에 이르러서는 비록 홍수나 맹수의 해일지라도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부지런히 힘쓰시고 경계하시어 안으로는 관리들로 하여금 사학의 무리를 잡아 베시고, 밖으로는 장병들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오는 적을 정벌하도록 하옵소서.

사람 노릇을 하느냐, 짐승이 되느냐 하는 고비와, 존속하느냐 멸먕하느냐 하는 기틀이 잠깐 사이에 결정되오니 정말 조금이라도 지체해서는 아니 되옵니다. 그러나 한갓 지엽만 다스리고 근본을 제거하지 않거나, 한갓 흐름만 멈추게 하고 원천을 막지 아니한다면 근본의 싹과 원천의 샘솟음을 누구도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양이의 재앙을 일소하는 근본은 전하의 한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 전하를 위한 계책은 마음을 맑게 닦아 외물에 견제당하거나 흔들리지 않는 도리밖에 없습니다. 이른바 외물이란 것은 종류가 극히 많아서 일일이 열거할 수 없지만 그 중에서도 양품이 가장 심하옵니다.

몸을 닦아 집안이 다스려지고 나라가 잡힌다면 양품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며, 기이함과 교묘함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저들이 기필코 할 일이 없어져 오지 않을 것입니다. 신은 평생 양직물을 입지 아니하고 집안에서 양품을 사용하지 아니하여 그것으로 집안의 법도를 이루었습니다. 이는 잡아죽이고 정벌하는 일과 본말이 되어 서로 돕고 의지하게 되오니 꼭 마음에 두셔야 합니다.

- 화서집 권 3 -

올해 여름과 가을 이래로 외국 선박이 경상, 전라, 황해, 강원, 함경 5도에 몰래 출몰하매 혹 널리 퍼져서 추적할 수가 없었다. 그중에는 상륙하여 물을 길어가기도 하고 때로 고래를 잡아 양식으로 삼기도 하는데, 그 선박의 수는 헤아릴 수가 없다.

- 현종실록 15권, 현종 14년 12월 -

대원군의 양이보국책 유시

   (대원군이 1866년 병인양요 때 철저한 항전의 뜻을 정부 관료에게 내린 유시)

1. 괴로움을 참지 못하고 화친을 허락한다면 이는 나라를 파는 것이다.

2. 해독을 이겨내지 못하고 교역을 허락한다면 이는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이다.

3. 적이 경성에 다다를 때 도성을 버리고 간다면 이는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다.

4. 만약 잡술이나 육정육갑(둔갑술 등에 이용되는 신) 따위로, 또는 귀신을 불러 신기하게 침략자를 물리치고자 하면 이후에 생겨나는 폐단은 사학(천주교)보다도 더 심할 것이다.

- 용호한록 권 18, 병인년 9월 4일 -

6. 대원군 정권과 메이지 정권의 마찰이 시작되다.

흥선대원군이 강력한 쇄국정책으로 외세에 저항했다면, 당시 일본은 미국에 의해 메이지 유신으로 개혁을 하고, 서양문물을 받아들였습니다.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조선과의 새로운 관계설정을 위해 사신을 보냈고, 1868-1876년까지 조선과 일본에서는 이 새로운 관계를 놓고 대립하게 됩니다.

특히 문제가 되었던 것은, <서계문제>입니다. 서계란, 일본측에서 조선측에 보낸 문서를 말하는데, 이 문서의 형식과 내용이 기존 관례와 너무 어긋나서 대원군의 반발을 사게 됩니다. 기존 일본은 조선에서 통신사를 받아 문물을 전수받으며 조선에 대한 예의를 지켜왔고 문서 역시 예의있는 표현이 담겨있었습니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 메이지 황제는 대원군에게 예의없는 문서, 즉 <대일본제국 천황이 고종의 아버지 흥선이에게 보내는 말투>의 문건을 보내고 새로운 관계설정을 요구한 것입니다. 이 서계를 보낸다, 못받겠다의 논쟁은 68-70년까지 계속되면서 양국의 첨예한 외교문제로 대두합니다. 이것은 메이지 체제의 일본과 조선의 큰 대립이었고, 흥선대원군은 일본과 외교를 단절해버립니다. 흥선대원군은 <왜양일체론>을 말하면서,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 역시 서양과 다를 바 없는 <서양 오랑캐>라고 말합니다.

일본은 흥선대원군과의 서계문제를 놓고 당장 조선을 침략할 것인가, 아니면 일단 일본의 내수산업을 일으킨 이후에 점진적으로 침략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합니다. 당장 침입하자는 것을 정안론, 천천히 침략하자는 것을 점진론이라고 하는데, 이토 히로부미의 점진론이 받아들여져서 훗날 민씨정권과 강화도 조약을 맺은 후, 부분 산업별로 조금씩 조선에 침투하기 시작합니다. 점진론의 1단계는 경제적 침략이었다고 하네요.

삼가 조선국예조판서 공 각하에게 글을 올리나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근래 정세가 일변하여 정권이 황실로 돌아갔습니다. 가까운 장래에 별사를 보내 자세한 사정을 설명하겠으므로 여기서는 긴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재주 없는 이 몸이 직을 받들어 귀국을 찾았는데 우리 조정에서는 특히 옛 공로를 어여삐 여겨 작을 올리고 벼슬을 좌근위소장으로 진급시켰고, 다시 교린직을 맡도록 명하셨으니, 오랜 전통이 사라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 별사가 가지고 가는 도서(인장)는 새로운 도장을 찍게 하여 우리 조정의 성의를 표하겠사오니 귀국 또한 잘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옛적에 귀국에서 받아온 도서는 원래 전적으로 후의에서 나왔기에 쉽게 이를 고쳐 바꿈이 옳지 않은 줄 아옵니다. 비록 그러하나, 이는 우리 조정의 특명에 따른 것이니 어찌 사사로이 공적인 일을 해칠 수 있겠습니까. 불초 이 몸의 정황이 여차하오니 귀국이 양찰하길 깊이 소망하는 바입니다.

- 메이지 원년 11월 -

의정부에서 아뢰었다.

<대마도주가 보낸 서계 중에 자신을 좌근위소장으로 써온 것은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해도, 조선이라는 두 글자는 기왕의 격례에 크게 어긋납니다. 역관으로 하여금 이를 엄중하게 알리도록 하고, 대마도주에게 서계를 고쳐 올리게 하십시오. 직명이 전과 다른 것은 항식과 항례가 아니거니와, 300년이나 된 약조의 본의가 어찌 이와 같겠습니까. 그들에게 서계를 고쳐 올리도록 분부하심이 옳을 것입니다.>

이 말에 임금이 윤허하였다.

- 승정원일기, 고종 6년, 12월 13일 -

7. 대원군 정권에 대한 반발

대원군 정권의 정책은 필요한 정책이 많았고, 국가 계층의 고른 지지를 받았습니다. 삼정문란의 극복으로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고, 쇄국정책으로 양반유생들의 지지를 얻어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원군에 대한 긍정적인 면들은 대원군의 극단적인 정책에 의해 모두 가려져 버립니다. 서원철폐와 호포법의 실시는 양반층의 심한 반발을 사게 되었습니다. 최익현은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지지하면서도 서원정리에는 크게 반발하여 고종의 친정이 필요하다는 상소를 올리기도 합니다.

대원군 정책에 대한 츼역현의 반발

호조참판 최익헌이 상소하였다.

<지난 나랏일을 보면 폐단이 없는 곳이 없어 명분이 바르지 못하고 일이 순하지 않아 짧은 시간 안에 다 미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다만 그 가운데 더욱 드러난 심한 것을 보면 만동묘(명 의종을 제사하는 사당) 철거로 임금과 신하의 윤리가 썩어졌고, 서원 철폐로 스승과 제자의 의리가 끊어졌고, 귀신의 후사로 나가는 일로 아비와 자식의 친함이 문란해졌고, 호존(청나라 돈)을 씀으로서 중화와 오랑캐의 분별도 어려워졌습니다.

이 몇가지 조목들이 곧 한 조각이 되어 천리와 인륜이 이미 탕진되어 다시 남아 있는 것이 없습니다. 게다가 원납전 같은 것이 표라가 되어 백성과 나라에 재앙을 끼치는 도구가 된 지 거의 몇 년이나 되었으니, 이것이 선왕의 옛 전장을 변화시키고 천하의 떳떳한 윤리를 썩게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에 신의 생각으로는 전하를 위하여 오늘날의 급선무를 말하자면, 만동묘를 다시 설치하고, 서울과 지방 서원을 흥기시키고 귀신의 후사로 나가는 일을 금하고 원통한 일을 풀고 부끄러운 일을 씻어 버린 국적에게 추율(죽은 역적을 다시 법을 집행함)을 적용하고 호전 사용을 혁파해야 할 것이며, 토목 공사 원납전도 한 시각이라도 그대로 두어서는 안됩니다.>

대원군의 정치는 <왕권강화>를 위해 백성을 이용하면서, 시대 흐름을 읽지 못한다고 낙인찍혀 개화주의자들이 크게 반발하였고, 백성들도 신분제 개혁과 지주제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대원군의 정책을 100% 지지할 수 없었습니다.

8. 대원군은 긍정적인 인물이었다는 평가

대원군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의 중요한 기준은 <전통사회의 폐단을 개혁>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대원군은 삼정의 문란을 극복하고, 기존 세도정치의 잘못된 점을 시정하였으며, 백성들을 위한 여러 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특히 대원군의 정책은 정조에서 시작되는 <탕평론>적인 개혁정책이 지속되었다는 것에서도 의의가 있습니다. 정조는 조선왕조에서도 드물 정도의 <유교적 계몽군주> 성격이 강합니다. 서양으로 따지면 <태양왕 루이 14세> 정도의 절대군주라고 할까요?

정조는 상당히 개혁적인 군주였습니다. 그는 탕평책을 실시하여 당파분열을 수습하고 서얼까지 등용하여 능력위주의 관료제를 마련합니다. 그 핵심이 규장각이었죠. 또 장용영을 마련하여 스스로의 상비군을 갖추려 했었고, 상공업 육성을 위해 사도세자의 묘가 마련된 화성을 건축합니다. 또 자유상업을 위해 신해통공으로 금난정권을 폐지하였습니다. 또 대전통편 등 법전을 정비하고, 북학사상을 가진 실학자들을 등용하여 중상주의적 국가체제를 마련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정조 때의 관료군은 모두 몰락하고, 일문독재가 시작됩니다. 물론 정조의 이념은 효명태자 등에 의해 지속되지만, 안동김씨의 입김으로 효명태자는 요절하였죠.

대원군은 이러한 정조의 이념을 부활시키고, 세도정치를 불식시킨 왕입니다. 그는 강력한 상비군을 바탕으로 국가의 자주성을 확립하고 외세를 몰아내었습니다. 이것은 근대 민족국가를 추구하려던 정조의 이상과 일치합니다. 또 삼정의 문란 극복과 법전정비, 능력위주의 관료 등용 등으로 근대사회로 나아갈 계기를 마련한 왕입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흥선대원군에 대한 긍정적 평가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전통사회의 폐단을 개혁하여 근대사회로 나갈 기틀을 마련했다는 것이지요.

9. 대원군에 대한 부정적 평가

대원군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크게 2가지로 나뉩니다. 첫 번째는 그의 개혁 목표가 단순한 <왕권강화>였다는 점입니다. 대원군은 민생안정을 추구했지만, 그것은 왕권강화를 위한 수단이었을 뿐입니다. 즉, 조선 전통의 조세질서를 회복하여 백성들에게 세금을 걷고, 전제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실제 서원정리도 서원의 특권 폐지를 통한 조세확보였고, 호포제도 양반 등 특권계급에게 조세를 부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경복궁 중건을 위한 각종 세금은 민생 안정이라기보다 백성들에게 부담을 가중시키는 것이었죠.

따라서 흥선대원군의 왕권강화란 전통사회질서를 정조시대 이전으로 정상화하여 회복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신분제도를 인정하였습니다. 지주제도 인정하였습니다. 전제군주제도 인정하였습니다. 이 3가지는 실제 프랑스 혁명에서 말하는 구제도의 모순과 일치합니다. 흥선대원군은 이러한 구제도를 바탕으로 전통적 봉건질서를 부활하려는 인물이었습니다.

대원군에 대한 2번째 부정적 평가는 <통상수교 거부정책>의 문제점입니다. 대원군이 취한 통상수교 거부는 이유없는 반외세로서 근대 사회 발전에 역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대원군의 반외세 정책은 성리학적 이념을 가진 유생층의 지지를 통한 반외세로서 백성들의 생활과는 상관없는 반외세입니다. 따라서 개화주의자들은 시대착오적인 유교이념에 따른 반외세적 보수주의를 적극적으로 공격하였지만, 대원군은 이들의 의견을 무시하곤 하였습니다. 대원군 이전 등장한 박규수, 오경석 등의 개화주의자들의 이론은 대원군 집권기에 힘을 잃고, 조선의 개화사상은 10여년의 세월동안 잠복기를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민씨정권에서 개화주의자들이 활개치기 시작하지만, 이 때의 개화사상은 이미 민씨정권에 야합한 개화사상으로 변질될 수 밖에 없었죠.

대원군의 정치는 결국 반근대적인 전제군주제, 봉건적 신분질서, 지주제적인 중세 토지제도를 강화하는 보수적인 정책이었습니다. 교과서에서는 이 점을 강조하여 대원군을 근대사회에 역행하는 인물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대원군에 대한 긍정론, 부정론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는 역사적 난재입니다. 보는 사람의 입장과 각도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죠.

다음 장에서 다룰 주제는 <강화도 조약>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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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의 시작인 개화기에 대한 개관

오늘부터 다룰 부분은 한국 근현대사입니다. 그 중 맨 처음으로 개화기의 중요한 역사적 흐름과 사건을 주제별로 묶어서 포스팅 하보도록 하죠. 오늘은 그 첫 번째로, 1860~1900년대까지 개화기의 전반적 흐름을 개관하는 포스트를 작성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1. 1870~80년대 한국사의 주된 흐름

1880년대의 한국사를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는 키워드는 <조선책략의 유입>과 함께 시작된 <정부주도의 개화정책>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조선의 개화정책과 관련된 조선책략>

한국사회에서 1850년대는 세도정치의 여파로 각종 농민봉기가 일어나고, 사회모순이 극에 달해있던 시기였습니다. 또 밖으로는 서양의 이양선이 출몰하여 통상을 요구하는 한편, 중국, 일본, 러시아와의 관계가 서구의 아시아 진출로 인하여 또 다시 재정립되는 시기였습니다. 1862년에는 세도정치에 대한 대대적인 항거인 임술농민봉기가 일어났고,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의식은 전국적으로 퍼지기 시작하였죠.

이러한 상황에서 1863년부터 딱 10년간 정권을 잡은 사람이 <흥선대원군>입니다. 흥선대원군은 강력한 왕권강화정책으로 삼정의 문란과 신분제 사회의 모순을 재정립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도가문과 양반벌족들은 흥선대원군의 정책에 반발하였고, 흥선대원군은 집권 10년만은 1873년에 축출되고 맙니다.

대원군을 몰아낸 명성왕후 세력은 1895년까지 조선 사회를 <개화>라는 맥락에서 이끌어갑니다. 결국 이러한 정책으로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이 개항하게 되었고, 1880년 조선책략의 유입으로 개화정책이 정부주도로 체계화되기 시작합니다.

1880년대의 조선 사회는 이 <조선책략에 의한 개화정책>으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정부는 조선책략을 수용하여 1882년 미국과 수교를 맺고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 조선책략을 통한 대미수교에 대하여 양반유생들을 비릇한 전통 성리학자들은 반대운동을 펼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대대적인 위정척사운동으로 연결되고, 1882년 임오군란에서도 이러한 반대논리가 표출됩니다.

조선책략에 의한 개화정책이 절정에 맞이하면서 반개화세력과 마찰을 빚은 가장 큰 사건은 1884년의 갑신정변입니다. 갑신정변은 급전적 개화파가 일본세력을 등에 업고, 조선세력을 개화하려는 의지를 보인 사건이었으나 보수파와 청의 개입으로 3일만에 실패로 끝납니다.

일본을 등에 업은 갑신정변의 실패로 조선에서는 <청>의 정치적 세력이 강해졌고, <일본>역시 경제적인 침투를 통해 조선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결국 1880년대 중반부터는 청과 일본이 우리나라를 놓고 경제적인 측면에서 각축을 벌이는 형세가 나타납니다. 이러한 외세의 경제적 침략은 1889년 방곡령을 계기로 노골화되고, 보다 적극적인 측면에서 청, 일본이 대립하게 됩니다.

2. 1890년대 한국사의 주된 흐름

1890년대 한국사의 키워드를 말하라고 하면 <일본이 청, 러시아를 제치고 한반도의 주도권을 잡는 시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890년이 되면서 한반도에서는 일본, 청이 각각 조선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정치, 경제적으로 대립하는 형세였습니다. 또, 방곡령 등을 계기로 반외세의 기운이 높아지고, 국내 정치의 문란으로 인한 모순이 심화되어 농민층의 불만은 <임술농민봉기>가 30년이나 지난 시점에 다시 불붙고 있었습니다.

결국 1894년 농민들은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내걸고 동학농민운동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외세인 청, 일본에 의해 진압되었고, 청과 일본은 조선의 주도권을 놓고 <청일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이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서 일본이 한반도의 주도권을 차지하기 시작합니다. 청일전쟁직후, 갑오개혁을 통하여 조선은 일본의 입맞에 맞는 개화정책을 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일본은 1990년 중반을 기점으로 조선에서 정치, 군사적 실권을 잡게 됩니다. 비록, 삼국간섭에 의해 청나라에서의 주도권은 잃었지만, 조선에서의 주도권을 확실히 잡아갑니다. 1895년에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을미개혁> 등을 통해 조선을 강제적으로 개혁하기 시작합니다.

고종은 1896년 일본을 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들어가버립니다.(아관파천) 이 사건으로 우리 나라는 국가의 무능력함을 대외에 크게 알리게 되었고, 결국 이 사건이 우리나라의 각종 철도, 광산 등의 이권이 외국에 넘어가는 계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국민들은 1896년 독립협회를 결성하여 이권수호운동 및 고종이 다시 궁으로 돌아올 것을 주장합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의병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이 시작됩니다. 고종은 독립협회의 요구 이후, 환궁하였으며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친 후 황제가 되어 <광무개혁>을 실시합니다.

여기까지가 개화기 1860-1990년대까지의 대략적인 역사 줄거리입니다. 당시의 역사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만, <사회모순과 외세에 대한 농민의 저항과 정부의 개화정책 실패>라는 큰 흐름으로 정리할 수 있겠네요.

그럼 하나하나 개화기의 역사를 시대순으로, 그리고 중요 사건순으로 묶어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개화기, 그 격동의 한국사로 갑니다.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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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일 수호 조규 속약

제 1조. 부산, 원산, 인천항의 강행이정을 사방 50리로 하고, 1년 뒤에 양화진을 개시한다.

제 2조. 일본 공사 영사와 수행원이 조선 내지에서 자유롭게 여행을 한다.

- 고종실록 권 19, 고종 19년 7월 17일 -

참고글 :  제물포 조약과 같은 날 맺어진 속약인데, 일본인들이 조선 내륙에서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다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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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조약시 조선 요구사항

수호 조규 체결시 조선의 추가 요구 사항

1. (개항장 체류 일본인) 상평전 사용을 금지할 것.

2. 미곡 교역을 금지할 것

3. 교육연 물물교환만 하고 외상선매(후불)와 산채취식(이자놀이)을 금지할 것

4. 조선은 일본과 수교할 뿐이니 타국인이 섞여 오는 것을 금지할 것

5. 아편과 서교(천주교)는 국법으로 엄금하니, 아편과 서교 관련 서적 수입을 금지할 것

6. 양국의 망명자를 은닉하거나 표류를 가장하여 잠입하는 자는 반드시 적발하여 송환할 것

- 왜사일기, 고종 13년 1월 26일 -

참고글 : 국제 조약이란 것에 미숙하였던 조선은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면서, 일본과 국교를 수립하고 통상을 하는 것이 서로를 존중하는 자세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위와 같은 요구 사항을 내걸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는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강화도 조약에서 이러한 내용의 대부분이 빠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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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강화도 침략

(1) 식량이나 음료수 양은 항해 계획과 기항지를 생각해서 전문적인경리 장교가 미리 준비해 두지 않을 수 없다. 식수를 구하려고 강화도에 접근했다는 것은 구실에 불과할 것이다.

山邊健太郞 <日本の韓國倂合>, 태평출판사, 1966 -

(2) 구로다 기요다카에게 내린 일본 정부의 비밀 훈령

조선이 그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거나 거짓을 꾸며 도저히 일본 요구에 응하지 않을 때에는, 가령 헌저하게 난폭한 행동이나 능멸하는 따위는 없더라도, 사절은 두 나라의 화호를 단념하고 우리 정부에서 모종의 별도 조치가 있을 것임을 전하고 교섭을 중단하는 문서를 던지고 조속히 귀국하여 다시 명령을 기다려 사절의 체통을 잃지 말 것이다.

- 일본외교문서 8권 -

(3) 우리나라와 일본은 300년 동안 통신사를 교환하고 왜관을 설치하여 무역하여왔다. 비록 수년 이래 서계를 가지고 서로 버티어 왔으나 우호 관계를 존속하려는 처지에서 통상을 굳이 거절할 필요가 없으므로 통상 조약 등의 절차를 잘 협상하여 양국의 편의에 맞춰 조치하라.

- 승정원일기, 고종 13년 1월 24일 -

참고글 : 강화도 조약을 맺기 위해 일본이 쳐들어 온 상황적 배경에 대한 사료입니다. (1)번 사료의 내용은 일본의 운양호 사건인데, 일본 운양호는 식수를 구하러 강화도에 와서 약탈과 살인을 저질렀다고 말했다는 내용입니다.

조선에서는 운양호 사건에 주목하여 일본에 항의하였습니다. 일본은 (2)번 자료에서 보듯이 교섭을 하되, 잘 안되면 교섭을 중단하고 무력을 사용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조선은 전통적인 교린체계를 바탕으로 일본을 대하려 하였습니다. 박규수 등 친일 개화파와 청나라의 권고 등으로 일본과 협상을 하였고, 그 결과 조선은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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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조약(조일 수호 조규)

대일본국과 대조선국은 원래부터 우의를 두터이 하여온 지가 여러 해 되었으나 지금 두 나라의 우의가 미흡한 것을 고려하여 다시 옛날의 좋은 관계를 회복하여 친목을 공고히 한다. 이는 일본국 정부가 선발한 특명 전권 변리 대신인 육군 중장 겸 참의 개척 장관 흑전청륭(구로다 기요타카)과 특명 부전권 변리 대신인 의관 정상형(이노우에 가오루)이 조선국 강화부에 와서 조선국 정부가 선발한 판중추부사 신헌과 부총관 윤자승과 함께 각기 지시를 받들고 조항을 토의 결정한 것으로써 아래에 열거한다.

제1조.
조선국은 자주 국가로써 일본국과 동등한 권리를 보유한다. 이제부터 양국은 화친한 사실을 표시하려면 모름지기 서로 동등한 예의로 대우하여야 하고 조금이라도 상대방의 권리를 침범하거나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우선 이전부터 사귀어온 정의를 손상시킬 우려가 있는 여러 가지 규례들을 일체 없애고 되도록 너그러우며 융통성있는 규정을 만들어서 영구히 서로 편안하도록 한다.

제2조.
일본국 정부는 지금부터 15개월 뒤에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조선국 경성에 가서 직접 예조판서를 만나 교제 사무를 토의하며 해당 사신이 주재하는 기간은 다 그때의 형편에 맞게 정한다. 조선국 정부도 또한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일본국 동경에 가서 직접 외무경을 만나 교제 사무를 토의하며 해당 조선국 사신이 주재하는 기간도 역시 그 때의 형편에 맞게 정한다.

제3조.
이제부터 두 나라 사이에 오고가는 공문은 일본은 자기 나라 글을 쓰되 지금부터 10년 동안은 따로 한문으로 번역한 것 한 본을 첨부하며 조선은 한문을 쓴다.

제4조.
조선국 부산 초량항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일본 공관이 세워져있어 양국 백성들의 통상 지구로 되어왔다. 지금은 응당 종전의 관례와 세견선 등의 일은 없애버리고 새로 만든 조약에 준하여 무역 사무를 처리한다. 조선국 정부는 제5조에 실린
두 곳의 항구를 개항하여 일본국 백성들이 오가면서 통상하게 하며 해당 지방에서 세를 내고 이용하는 땅에 집을 짓거나 혹은 임시로 거주하는 사람들의 집을 짓는 것은 각기 편리대로 하게 한다.

제5조.
경기, 충청, 전라, 경상, 함경 5도 중에서 연해의 통상하기 편리한 항구 두 곳을 골라서 지명을 지정한다. 개항 기간은 일본 역서로는 명치 9년 2월, 조선 역서로서는 병자년 2월부터 계산하여 모두 20개월 안으로 한다.

제6조.
이제부터 일본국의 배가 조선국 연해에서 혹 큰 바람을 만나거나 혹 땔 나무와 식량이 떨어져서 지정된 항구까지 갈 수 없을 때에는 즉시 가닿은 곳의 연안 항구에 들어가서 위험을 피하고 부족되는 것을 보충할 수 있으며 배의 기구를 수리하고 땔나무를 사는 일 등은 그 지방에서 공급하며 그에 대한 비용은 반드시 선주가 배상해야 한다. 이러한 일들에 대해서 지방의 관리와 백성들은 특별히 진심으로 돌보아서 구원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데가 없도록 하며 보충해 주는 데서 아낌이 없어야 한다. 혹시 양국의 배가 바다에서 파괴되어 배에 탔던 사람들이 표류되어 와닿았을 경우에는 그들이 가닿은 곳의 지방 사람들이 즉시 구원하여 생명을 건져주고 지방관에 보고하며 해당 관청에서는 본국으로 호송하거나 가까이에 주재하는 본국 관리에게 넘겨준다.

제7조.
조선국 연해의 섬과 암초를 이전에 자세히 조사한 것이 없어 극히 위험하므로
일본국 항해자들이 수시로 해안을 측량하여 위치와 깊이를 재고 도면을 만들어서 양국의 배와 사람들이 위험한 곳을 피하고 안전한 데로 다닐 수 있도록 한다.

제8조.
이제부터 일본국의 정부는 조선에서 지정한
각 항구에 일본 상인을 관리하는 관청을 수시로 설치하고 양국에 관계되는 안건이 제기되면 소재지의 지방 장관과 만나서 토의처리한다.

제9조.
양국이 우호관계를 맺은 이상
피차 백성들은 각기 마음대로 무역하며 양국관리들은 조금도 간섭할 수 없고 또 제한하거나 금지할 수도 없다. 만일 양국 상인들이 값을 속여서 팔거나 대차료를 물지 않는 등의 일이 있으면 양국 관리들이 빚진 상인들을 엄히 잡아서 빚을 갚게 한다. 단 양국 정부가 대신 갚아줄 수는 없다.

제10조.
일본국 사람들이 조선국의 지정한 항구에서 죄를 저질렀을 경우 만일 조선과 관계되면 모두 일본국에 돌려보내어 조사 판결하게 하며 조선 사람이 죄를 저질렀을 경우 일본과 관계되면 모두 조선 관청에 넘겨서 조사 판결하게 하되 각기 자기 나라의 법조문에 근거하며 조금이라도 감싸주거나 비호함이 없이 되도록 공평하고 정당하게 처리한다.

제11조.
양국이 우호관계를 맺은 이상
따로 통상 규정을 작성하여 양국 상인들의 편리를 도모한다. 그리고 지금 토의하여 작성한 각 조항 중에서 다시 보충해야 할 세칙은 조목에 따라 지금부터 1개월 안에 양국에서 따로 위원을 파견하여 조선국의 경성이나 혹은 강화부에서 만나 토의결정한다.

제12조.
이상의 11개 조항을 조약으로 토의 결정한 이날부터 양국은 성실히 준수시행하며 양국 정부는 다시 조항을 고칠 수 없으며 영구히 성실하게 준수함으로써 우의를 두텁게 할 것이다. 이를 위하여 조약 2본을 작성하여 양국에서 위임된 대신들이 각기 날인하고 서로 교환하여 증거로 삼는다.

대조선국 개국 485년 병자년 2월 2일
대관 판중추부사 신헌
부관 도총부 부총관 윤자승
대일본 기원 2536년 명치 9년 2월 6일
대일본국 특명 전권 변리 대신 육군 중장 겸 참의 개척 장관 흑전청륭(구로다 기요타카)
대일본국 특명 부전권 변리 대신 의관 정상형(이노우에 가오루)


- 국회도서관 입법조사국, 구한말조약휘찬 상 -

참고글 : 강화도 조약은 일본의 경제적 침탈의 계기를 마련한 조약이자, 우리가 체결한 최초의 불평등 조약이며, 세계 자본주의 질서에 편입되는 계기가 된 사건입니다.

강화도 조약은 통상개화론을 내세우면 자율적 요소가 있다고 보기도 합니다. 즉, 개화사상의 흐름을 이어받은 내재적, 주체적인 개방의식이 있었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운요호 사건을 비롯하여 타율적인 측면이 더 많이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조약은 일본의 정치적, 경제적 제국주의가 표출된 사료이며, 서계문제 등으로 정립되지 못하였던 일본과 우리가 새로운 국제관계를 정립하는 계기가 된 조약입니다. 일본은 이 조약 이후 후속 경제 침투를 위하여 조일수호조규부록, 통상장정 등을 체결하였는데, 그 주요 내용은 이렇습니다.

1. 개항장에서의 일본인의 통행거리를 10(나중에는 100리)리 등으로 설정한다.

2. 개항장에서 양곡의 수출입을 허용하게 한다.

3. 일본화폐를 사용하게 한다.

4. 관세의 규제를 철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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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