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매일 역사퀴즈 (2010. 1. 28. 목요일)

오늘의 출제 범위는 <중학교 2,3학년 한국사> 입니다.

  - 제가 바빠서... 많이 밀렸네요.
  - 이번 주 퀴즈를 후다닥 올리겠습니다.

1. 다음 카툰를 잘 읽고 물음에 답하세요~

 

1. 다음 내용을 참조해서 위 빈칸 (1)에 들어갈 조선 후기 화폐의 이름를 정확히 4글자로 적어주세요.

  - 조선 후기 숙종 때부터 근대 화폐가 나오기 전까지 약 200년간 사용했던 금속 화폐입니다. -

 

2. 다음 지도를 보고 물음에 답하세요~

혼인할 때 말로 미리 정하고 여자의 집에서 본채 뒤편에 작은 별채를 짓는데, 그 집을 서옥이라고 부른다. 해가 저물 무렵에 신랑이 신부의 집 문밖에 도착하여 자기의 이름을 밝히고 절하면서 신부와 더불어 잘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한다........

 

2. 위 지문과 관련있는 지역을 지도에서 고르면 어디일까요?
① 가
② 나
③ 다
④ 라
⑤ 마

 

3. 다음 설명을 잘 읽고 물음에 답하세요~

 

3. 위에 제시된 음식과 관련된 시대 배경으로 가장 적절한 것을 골라보세요~
① 비변사의 세력이 약해지고, 환관정치가 실시되었다
② 서인 정권에서도 노론 세력의 힘이 매우 강했다.
③ 특정 가문이 모든 권력을 갖고 가문 독재를 실시하였다
④ 왕실 외척의 힘이 커져서 종실이 신권을 압도하였다
⑤ 국왕은 환국을 통해 신권을 적절히 통제하고 있었다

 

 

4. 다음 사진을 보고 물음에 답하세요~

 

4. 제시된 광고는 경성 방직 주식회사에서 만든 국산품 애용 선전 광고입니다. 이 광고와 관련 있는 경제적 민족 운동으로 가장 가까운 단체는 무엇일까요?
① 물산장려회
② 황국중앙총상회
③ 국채보상기성회
④ 보안회
⑤ 토월회

 

5. 다음은 일제 시대를 살다 간 한 인물의 가상 전기입니다.

(1) 베셀이 사장으로 취임해주었고, 나는 총무로서 활동하였다. 우리는 매일 6페이지 신문을 만들었는데, 4페이지는 베셀이 영어로, 2페이지는 한글 전용으로 만들었다.

1905년, 우리는 국한문판, 한글판, 영문판으로 신문을 만들면서 일제의 정책을 본격적으로 비판하였다. 하지만, 일제는 1907년 베셀을 상하이로 추방했으며, 나를 눈여겨보기 시작하였다.

1908년, 일제는 우리 신문사내의 국채보상지원총합소를 눈에 가시처럼 여겼다. 나에게 국채보상운동 자금을 횡령했다는 누명을 씌워서 재판에 회부했지만, 영국과의 외교분쟁 때문에 무죄를 선고했다.

나는 우리 신문사가 이승용에게 넘어가자, 프랑스인과 새로운 신문을 만들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국권 피탈후, 나는 신민회 활동 때문에 감옥에서 복역하고 있었는데, 일제가 날조한 (2)_____ 암살 미수 사건의 주모자로 연루되어 신민회는 해산되고 장기 복역하게 되었다.

1916년 만주로 탈출했지만, 또다시 체포되어 유배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1920년, 동아일보를 창간하면서 물밑에서 독립운동을 다시 시작했으나, 미국국회의원들에게 독립청원서를 건네다가 발각되어 만주로 피신하였다.

만주에서 통의부를 만든 뒤, 지청천과 함께 만주의 독립운동 단체를 모아 정의부를 창설하고, 고려혁명단을 조직하였다. 이후,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거쳐 1935년 김규식, 조소앙과 함께 민족혁명당을 만들어 대일항쟁을 계속하였다.

 

5. 위와 같은 삶을 살았던 항일독립운동가는 누구일까요?
① 장지연
② 조소앙
③ 김성수
④ 양기탁
⑤ 김수로

 

6. 위 지문의 (1)과 관련된 신문은 무엇일까요?
① 황성신문
② 독립신문
③ 제국신문
④ 대한매일신보
⑤ 조선일보

 

7. 위 지문의 (2)에 들어갈 인물은 제 3대 조선 통감으로서 한일합방을 주도하였고, 그 업적으로 제 1대 조선총독으로 임명된 인물입니다. 조선총독부를 만들어서 <천황지하 일인천하>라는 위세를 보였던 위 인물은 누구일까요?
① 이토 히로부미
② 후쿠자와 유키치
③ 데라우치 마사타게
④ 유키 구라모토
⑤ 마쓰다 류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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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중국 당제국은 중국 왕조인가, 북방 왕조인가?

이번 장에서 다룰 내용은 중국 당나라의 건국에 대한 내용입니다. 지난 포스트에서 중국 수나라를 대운하라는 키워드로 한번 살펴보았죠? 당은 그 수나라의 건국 이념과 제도를 거의 대부분 받아들인 나라입니다. 실제, 수나라와 당나라는 유사성이 참 많습니다. 앞 왕조를 무너뜨린 나라가 앞 왕조와 거의 유사한 체제를 가지고 시작하다니... 이유가 뭘까요?

1. 당이 과연 중국 왕조인가?

사실 5호 16국 시대 말기 북주에서 시작되는 지배집단은 당까지 밀접한 관계를 가진 집단이었습니다. 역사에서는 이들을 <관롱집단>이라고 부릅니다. 지도에서 서위 - 수 - 당으로 연결되는 부분을 자세히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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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롱집단이란, 5호 16국과 남북조 시대를 거치면서 혼란한 중국 사회에서 탄생한 <이단아>입니다. 이들은 전통 중국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북방에서 넘어온 오랑캐도 아닙니다. 이들의 핏줄은 딱히 뭐라 말할 수 없습니다. 관롱집단은 핏줄로 이루어진 집단이 아니라, 북위 말기부터 서위, 북주를 거치는 동안 위수지역을 중심으로 뭉친 의협집단에서 출발했으니까요.

북위를 멸망시키고, 동위, 서위로 중국 북조가 분열되었을 때 서위의 우문태 장군은 서방 중심지로 위수지역의 관중 지방을 선택하였습니다. 우문태 장군은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강력한 군부가 필요했는데, 이 때 관중지방에서 뭉친 협객들이 바로 관롱집단입니다. 보통 <서위 8주국과 그 후손들, 서위 12수호신>이라 불린 장군들이지요. 실제 수나라를 세운 양견도 이 관롱집단출신입니다.

재미있는 점은 이 관중지방이 원래 선비족의 본거지로서 선비족과 연결되는 지역이라는 점입니다. 북위가 처음 나라를 개창하고 북조를 통일하였을 때, 이 관중지방에 많은 선비족들이 이주하였습니다. 그러나 북위가 효문제의 한화정책으로 중국화되어가고, 수도를 낙양으로 옮기자 이 관중지방의 선비족들은 한인들과 어울려 남겨 되었습니다. 이들은 낙양의 선비족처럼 귀족화되지 못하고, 단순히 서방을 지키는 관리나 향리, 또는 장원 소유자가 되어 지방의 실세가 되었죠.

서위 멸망 후 북주의 중심지가 위수지역이 되자, 북주 총관 양견 등 관롱집단의 인사들이 대거 관료군화 되어 기용됩니다. 양견이 수를 세우자 관롱집단은 건국공신으로 세를 떨치기 시작합니다.

이 관롱집단은 결국 귀족이나 호족도 아니고, 화북의 북방민족도 아니고, 순수한 중국인도 아닙니다. 이들은 관중이라는 지역을 매개로 뭉친 의협집단으로서 혈연적 측면은 상당히 약한 집단입니다. 실제, 수나라의 마지막 왕인 양제와 당나라를 건국한 이연은 모두 관롱집단의 협객 또는 무인 집안으로서 이 둘이 <이종사촌>간이었습니다. 즉, 수와 당의 교체는 어마어마한 왕조의 교체라기 보다, 수의 멸망이 필연적임을 안 관롱집단들이 왕조 교체를 통해 지배체제를 계속 유지해 나간 것으로 보는 것이 나을 듯 합니다.

또, 이 관롱집단의 성격상, 수와 당 제국이 과연 순수한 중국인의 제국인가에 대한 의문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위진남북조를 거치며 남조의 한인, 북조의 이민족 사이에서 통일한 수는 북조를 중심으로 통일하였습니다. 이미 이 당시 중국에는 한인, 북방인의 경계가 무너진 상황이었지요. 따라서 수, 당의 중국 왕조 건설은 핏줄상의 중국왕조라기 보다는, 건국 지역 및 건국 이념상의 중국왕조로 보는 것이 좋을 듯 싶네요.

강좌중국사나, 중국사개론, 동양사개론을 보면 이런 식으로 정리해 놓고 있더군요.

<효문제의 한화정책 이후 북위 이래 선비족들은 한인화되어 혼혈이 증가하였다. 관롱집단도 결국 선비족의 피가 흐르는 집단으로서, 장안으로 중심으로 중국식 통일 왕조를 건설하였다.>

2. 당의 건국까지 남북 관계의 변화상

그럼 당 건국까지 중국 남북관계를 간단히 볼까요? 순수한 한인이라는 개념은 중국 주나라에서 비롯됩니다. 보통 중국 은나라는 천명사상을 가진 동이계통의 민족이 세웠다고 하며, 이 은을 물리친 나라는 역성혁명의 사상을 처음으로 보여준 주나라입니다.

주나라에서는 황하를 중심으로 하여 양자강 이북까지를 순수한 중화로 규정하였는데, 그 이유는 양자의 험한 지역을 당시의 석기로 개간할 수 없어서 미개발지로 남았기 때문입니다. 청동기 시대 중국의 중화란, 개간이 가능한 황하 - 위수 동쪽 지역이었습니다.

춘추전국시대 각국의 상호 항쟁이 가열되고 금속기가 등장하면서 양자강 이남이 개발되었습니다. 그리고 서방의 진이 통일하면서 진시황 때의 중화 개념은 서방 관중지방, 남부 양자강 지방까지로 확대됩니다. 진시황은 북방문화권의 패자인 흉노를 인정하지 않고, 무리한 정벌을 감행하였는데, 이는 북방문화권을 중화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철기를 사용하는 농경 문화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실제 우리는 중국 문화권, 인도 문화권을 이야기하면서 문화권의 기준을 농경으로 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계사의 흐름으로 보면 농경문화권 보다 북방 문화권이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역사상 유명한 5호 16국시대, 인더스 문명의 파괴, 징기스칸의 원정, 게르만의 이동 등등 흉노를 비릇한 북방 문화권의 파급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교과서에 이 북방 민족 이야기가 너무 적어 아쉽군요.(날 잡아서 북방 민족 변천사를 한번 정리해봐야 겠네요.)

아무튼 중요한 것은 진한시대 중화라는 개념이 완성되고 만리장성 등 경계가 확실해 지면서, 중화족과 북방족의 항쟁은 천년보다 긴 시간동안 계속됩니다.

한무제 때에는 그동안 수세에 있던 중화족이 흉노정벌을 통해 북방족을 밀어내면서 강력한 중화질서를 구축합니다. 하지만, 한나라 전체를 걸쳐 북방 민족은 서서히 중국 내부에 자리잡기 시작합니다.

후한 이래 중국 내부의 분열이 가속화되면서 북방 민족들을 물밀 듯이 들어옵니다. 위진남북조 시대는 중국 북부를 북방족이 차지하면서 <호한체제>를 시작하였습니다. 호한이란, 오랑캐와 한족이 공존한다는 체제를 말합니다.

이 호한체제를 종식하고 다시 중국을 통일한 자가 수문제입니다. 문제의 아들 양지는 다시 중국의 천자임을 이념적으로 내비치며 북방에 대한 공격과 고구려 공격을 시도합니다. 이 때부터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가 남북조, 유연, 돌궐, 흉노, 고구려 등 다원적 질서에서 중국 왕조의 일원적 질서로 다시 개편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수에서는 마지막 원정인 고구려 원정에 실패하여 체제 전환에 실패하고 말죠.

당나라는 수의 실패를 거울 삼아 확실히 중화족이 우위에 서는 세계질서체제로 국가체제를 개편합니다. 즉, 외부민족에 대한 봉건제도와 조공체제를 실시하게 되는 것이죠.

3. 당 태종 이세민부터 시작된 세계국가의 추구

당나라를 창업한 당고조 이연은 사실 관롱집단 출신입니다. 이연의 조부 이호는 서주 8주국의 8대신으로서 서로 친인척관계로 얽힌 집단의 후손이었습니다. 또 당의 건국자 이연과 수양제도 이종형제입니다.

여기서 서위 8주국의 대신들이란? 서위 8주국은 서위의 창업자인 우문태와 당시 실력자인 당나라 시조부 이호를 중심으로 연결된 집단을 말합니다. 특히 당시 유명한 집안은 독고씨의 독고신은 3명의 딸이 있었는데, 세 딸을 북주의 왕 명제의 왕비, 수문제의 황후, 당시조부 이연의 부인으로 보내어 모든 가문들을 친인척 관계로 얽어 버렸습니다.

당나라 시조 이연은 사촌은 수의 양제의 반란을 진압하라는 명을 받고, 반란 진압도중 당시 상황의 심각성을 알고는 배신을 때려 국가를 창업합니다. 그리고 전국을 통일하기 위한 정책으로는 진시황제가 사용했던 <먼나라와는 일단 친하고, 가까운 지역부터 치고 들어간다>는 <원교근공책>을 사용하였습니다.

이연의 아들인 당의 태종 이세민은 원래 왕이 될 서열이 아니였습니다. 그에게는 형이 있었습니다. 그는 천형 이건성과 아우 이원길을 무참히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 인물입니다. 이 사건을 역사에서는 <현무문의 정변>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 당태종, 조선의 태종 등등 살육을 통해 왕위에 오른 왕들이 국가를 정말 잘 다스렸다는 점은 재미있는 사실 중의 하나입니다. 이세민은 신하들의 직언을 가장 잘 받아들이고, <정관의 치>라고 부를 정도의 태평성대를 구가했다고 하죠. 자신이 죽인 형 이건성의 신하인 위징을 심복으로 등용했다는 일화도 유명합니다.

정사에 적힌 이세민과 관련된 미담 중에 사형수들을 풀어준 미담도 있습니다. 이세민이 390여명의 사형수들을 1년간 집에 갈 수 있도록 허락하였는데 사형수들이 1년 뒤 모두 돌아오자 이세민이 감동을 받아서 이들 사형수들을 모두 방면해 준 것입니다. 이세민이 태평성대를 구가했다는 일화이지요. 그러나 구양수의 <종수론>을 보면, 이세민이 사형수들에게 1년뒤 돌아와야 모두 방면한다는 약속을 모두 한 뒤, 세상을 속여 명성을 얻으려 했던 사건이라고 합니다.

중요한 건 이 이세민 시기의 중국은 그동안의 호한체제를 버리고 중화 중심의 세계주의 체제로 돌아섰다는 점입니다. 이세민은 자신의 심복인 방현령과 자신이 죽인 형의 심복인 위징에게 나라의 경영 방략을 물었습니다.

방현령은 <국가의 창업이 중요하므로 창업기반을 닦는 것이 중요하다>는 창업론을 말하였고, 위징은 <창업도 중요하나, 창업된 나라를 지키는 것은 더욱 어럽다>라는 <수성지난론>을 말합니다. 이세민은 수성지난론에 따라 국가를 경영하였습니다.

이세민은 신하들과 함께 나라를 다스리는 <공치주의>를 실시한 왕으로서 신하들과의 국정 운영의 내용을 책으로 정리하였는데, 이 책이 유명한 <정관정요>입니다. 이 책은 후대 제왕학의 교과서이자, 국주와 신하의 유교윤리, 정치윤리에 대한 지침서가 되었습니다.

태종기의 <정관지치>라는 태평성대의 내용을 볼까요? 그 내용의 핵심은 <호한체제를 넘어서서 중화제국의 세계화 기반>을 닦는 다는 것에 있습니다.

먼저 이세민은 자신이 중국의 황제일 뿐 아니라 모든 유목민의 군장으로서 아시아의 왕이라는 뜻으로 자신을 천가한이라고 부릅니다. <한>이란 징기스칸의 칸, 흉노의 선우와 마찬가지로 북방 민족의 우두머리라는 뜻이죠. 자신 스스로가 <천가한>이 된 이세민은 직접 주변 민족들을 정복한 후 정복지의 왕과 추장을 중국 지방관으로 임명합니다.

이세민은 자신이 살고 있는 경기지역은 <부>라 부르고, 지방의 중요지역은 <도독부>라 불렀으며, 이민족 지역을 정복한 후 <도호부>라 불렀습니다. 삼국시대를 보면, 신라 통일기에 안동도호부, 계림도독부 등등이 당나라에 의해 생기죠? 도호부는 이민족 지방의 정복, 도독부는 당의 직할지 정복을 뜻합니다.

즉, 당태종의 업적은 주변 이민족을 철저히 중국에 끌어들이는 정책입니다. 정복사업을 끊임없이 떠나고, 고구려와는 적대관계를 유지하고, 자신은 스스로 칸으로 추대받는 정책이지요.

특히, 정복한 지역은 중국이 직할지로 편제하지 않고, 도호부로 편제하여 제한적으로 자치를 인정하고, 그 지역 추장보고 다스리라고 합니다. 자치의 대가로 그 지역 추방은 중국을 도와 다른 민족 정벌을 떠나야 하죠. 이렇게 오랑캐에게 자유를 주어 자치를 인정하는 정책을 기미정책이라고 합니다. 또, 오랑캐로 오랑캐를 정벌하겠다는 것을 역사에서는 <이이제이>라고 부르죠.

<기미정책>으로 중국에 협조하게 된 민족들은 중국과 봉건제도의 관계를 맺습니다. 중국이 왕, 오랑캐족은 신하국가가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신하국가는 중국에 매년 조공과 세금을 바쳐야 합니다. 따라서 중국 전통의 대외관계를 <봉건질서에 입각한 조공질서>라고 부릅니다.

이 기미정책과 이이제이에 입각하여 중국은 2나라를 무너뜨립니다. 첫째는 태종 때 있었던 일로서 서돌궐과 동돌궐의 내분을 이용하여 서돌궐을 지원하면서 동돌궐을 무너뜨린 정책입니다. 돌궐의 내분은 북방에서 당나라에 맞설 나라가 백년이상 사라져 버렸음을 뜻합니다.

두 번째는 신라를 이용하여 고구려를 정벌한 것입니다. 고구려의 멸망은 수백년간 동북아시아의 상권을 지배해온 국가를 무너뜨림으로서 대동강부터 북방에 이르는 거대한 무역로를 중국이 장악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당나라가 삼국통일 당시 신라에 요구한 것은 대동강부터 이북을 당에 넘기라는 조항이었고, 신라는 아주 착실히 그 조항을 이행하였죠. 신라의 삼국통일은 거대한 동방무역권이 당나라에 넘어가는 것도 의미합니다. 당에서는 이 무역로를 이용하여 거대한 동방이익을 차지합니다. 이후 한반도에서는 일본, 남해, 중국을 잇는 새로운 해상 무역로를 개통하게 되는데 이 무역로를 통해 거대한 부를 차지한 자가 바로 중국 정사에 등장하는 <장보고>입니다.

3. 고종기의 중화제국의 확장

태종의 아들 고종은 아버지의 화려한 업적을 뒤이어 손쉽게 세계제국 건설의 기반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당 고종기의 업적을 한번 볼까요? 지도에 표시된 도호부들이 당나라의 6도호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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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기 당나라 영토는 보통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당 전성기 영토라고 보면 됩니다. 점령한 지역을 표시해보죠.

동부 : 한반도 북부 점령(백제, 고구려 멸망)

서부 : 중앙아시아 진출, 파미르 고원 동쪽 지배(천산남로의 도시국가 경략)

납부 : 인도차이나 반도 진출

북보 : 시베리아 남부 진출

지금 이 지도를 외우기 위해 제시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만큼의 영토를 당이 차지하면서, 점령한 지역의 주민들이 <기미정책>에 의해 당에 동화되었다는 점이지요. 당은 동화된 민족들에게 자신들의 문화를 의도적으로 전파합니다. 또는 한반도와 같이 이미 문화가 전파된 지역에서는 당의 문화체계가 쉽게 수용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동아시아 문화권>이 성립되게 됩니다. 보통 한나라에서부터 시작되어 전파된 한자, 율령, 불교, 유교 등의 중국 사상이 문화권 전체에 더 크게 파급된 시기가 이 시기지요.

다음 장에서는 당나라 2번째 이야기로 당나라 최고의 여걸 <측천무후>를 한번 다뤄 보로록 하겠습니다. 측천무후와 양귀비 등등 당에서의 여걸 이야기가 되겠네요.

 <http://historia.tistory.com 역사전문블로그 히스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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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에서의 초기 발전 : 5나의 형성

1. 초기 고구려의 5나...

고구려는 압록강 중부에서 거주하던 맥족을 기원으로 하고 있습니다. 고구려의 등장 시기는 위만조선이 철기를 가지고 고조선의 실권을 장악할 무렵부터 소집단의 씨족공동체적 유제를 간직한 집단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은, 선진 사회인 중국, 고조선으로부터 철기를 도입한 듯 싶은데, 이 철기를 사용하면서 사회가 분화되고 점차 정치집단이 확대되는 듯 보입니다.

고구려는 고조선이 멸망하고, 동북아시아에 공백기가 찾아오면서 발전합니다. 고구려 집단이 발전하게 된 시기는 대락 기원후부터 2세기 말 경인데, 그 특징은 동북아시아의 공백기를 대체하려던 <한군현>세력을 몰아내면서 시작됩니다. 가장 먼저 고구려 집단이 등장하게 된 것은 <현토군>을 축출하면서부터입니다. 압록강 졸본 지역에서 씨족공동체적 생활을 하던 초기 고구려 집단은 현토군의 축출과정 속에서 상호 연대함녀서 <연맹체>를 구성하여 연맹국가로 발전할 계기를 마련합니다.

이 때 연맹체의 주도권을 가진 씨족집단은 소루부였는데, 이 소루부는 연맹체의 주도권만을 행사했을 뿐 다른 씨족집단의 내부적인 공동체적 생활에는 관여하지 못하였습니다. 즉, 연맹체를 구성하여 집단적인 초기 <소국>을 형성하였으면서도 연맹체 각국의 내부에서는 독자적인 생활을 하는 구조였죠. 따라서, 각 씨족집단은 자신들만의 씨족적 관습으로 사회를 이끌어 갔고, 공통관심인 외부의 침입 등에 대해서만 공동 행동을 하였습니다.

2. 5나의 주도권이 바뀌다

초기의 씨족 공동체 집단은 환나, 계루, 소루, 절노, 관노 등의 <나>집단이었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전술한 대로 <씨족적 풍습>을 가진 독립적 집단이었지요. 하지만, 부여에서 내려온 것으로 사료에 나오는 <주몽집단>이 내려오면서 주도권은 <계루부>로 넘어간 듯 보입니다. 여러 사료들이 내용이 달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초기 주도권을 가진 소노부(소루)집단은 송양의 비류국쪽으로 보기도 합니다.

외부세력인 부여집단과 연합한 계루부가 5나의 정권을 쉽게 장악한 것은 당시 더 큰 문제인 <한군현의 축출>이라는 과제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군현은 고조선 멸망 이후 동북아시아 집단들에게 공통의 적이었고, 이들을 축출하면서 각 집단이 강화되었습니다.

3. 5나가 5부가 되면서 국가의 기틀을 잡다.

초기부터 고구려는 존재했지만, 고구려를 씨족집단에서 국가적 집단으로 바꾼 것은 계루부 정권의 <주몽 : 동명성왕> 때부터입니다. 동명성왕을 고구려에서는 시조라고 칭합니다. 하지만, 문제점은 이 동명성왕의 고구려는 단지 5부족이 연합한 <연맹왕국>이었지, 강력한 힘을 가진 중앙집권국가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고구려에서 실제 중앙집권이 이루어지고, 5부족을 통합하여 <구려>라는 큰 집단(고-구려는 큰-마을 이라는 어원이 있다고도 합니다만, 언어학자들의 추측일 뿐 증거가 있지는 않습니다.)을 형성한 것은 유리왕 ~ 태조왕 대입니다.

4. 5부 사회가 강력한 중앙집권사회로 바뀌다

5부사회가 강력한 중앙집권 사회로 바뀌는 과정은 <태조왕>때 부터입니다. 태조왕은 계루부 중 <고씨집단>만이 왕권을 잡을 수 있게 하여 타세력의 강력한 힘을 견제하고, 옥저, 동예를 정벌하면서 함흥평야를 확보하였습니다. 또 본격적으로 요동으로도 진출하는 시기입니다. 따라서 고구려의 중앙집권은 사료상 140년 이상을 재위했다고 알려진 이 태조왕 때부터로 보입니다. 실제 고구려의 중앙집권적 건국은 왕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 <태조왕>의 시기입니다. 하지만, 삼국사기의 태조왕의 재위기간이 140년이 넘는 관계로, 이 시기의 중앙집권은 사실 여러왕대를 거처가면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이후 <고국천왕>기는 고구려 사회의 초기 5부족을 완전히 해체하는 단계입니다. 일단 씨족혈연마을로 구성되었던 5부족을 행정단위인 5부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이 5부 중에서 계루부 왕의 <직계후손>만이 왕을 할 수 있도록 규정합니다. 쉬운 말로 부자상속이라고 하죠. 그리고, 씨족사회의 유습이었던 형사취수제를 소멸합니다.

형사취수제의 소멸은 곧 씨족사회의 구습이 사라짐을 의미합니다. 고구려에서는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책임져야 했는데, 이것은 씨족 사회의 재산권을 물려받는다는 의미와 함께, 같은 혈연부족이라는 직조관념의 표출이었고, 씨족간의 연대책임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5. 이러한 과정을 통한 고구려의 사회 변화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고구려가 얻은 것은 <사회분화를 통한 친족공동체 사회의 해체>였습니다.

즉, 부자상속을 통하여 친족개념이 약화되었고, 형사취수제를 폐지함으로서 씨족 연대개념을 없애 버렸으며, 5부족을 5부로 개편함으로서 씨족사회를 국가관료사회로 전환하려 한것입니다. 그 결과 친족공동체 사회는 상당히 분해되어 버렸고, 이제 <단혼가족>이 생산과 소비의 주체가 되어 새로운 사회로 진전하게 됩니다. 더욱이 이러한 새로운 사회의 지배 이념으로서 충, 효라는 초기 유교윤리적 가치관이 등장하기도 하며, 소수림왕의 <불교>수용으로 종교를 통한 왕권강화도 시도하게 됩니다.

6. 관련 사료 해석

- 운영자가 임의로 사료를 해석하기 때문에 일부 잘못된 해석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

부자상속과 형사취수제의 소멸 부분

산상왕은 휘가 연휘이다. 고국천왕의 동생이다.

위서에서 말하기를, 주몽의 손자가 궁이었는데, 그는 태어날 때부터 능히 눈을 열고 태어났다고 한다. 이 사람이 곧 태조왕이다. 지금 왕(고국천왕) 역시 태조의 증손인데, 역시 신인으로 태어났으니, 증조인 궁과 같다. 고구려에서는 서로 같은 것은 위라고 하므로, 위궁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고국천왕은 자손이 없었고, 따라서 연휘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연휘가 왕이 되기 전에) 초기에 고국천왕이 죽자, 왕후인 우씨가 몰래 왕의 상을 발하지 않고, 밤에 왕의 동생인 발기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리고 말하기를, 자식이 마땅이 왕위를 물려받아야 되는데 왕이 후사가 없다고 말하였다. 발기는 왕이 죽은 지를 모르고 말하기를 대꾸하였다. 천지에는 순리가 있는데, 돌아가야 할 것이 있다. 형수는 밤에 돌아다니고 있으니 어찌하여 예라 할 것인가?

부자상속과 형사취수제의 관련 사료는 고구려가 점점 씨족제의 유제를 벗어던지고, 중앙집권적 사회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창조리가 말한 초보적인 고구려 유학 부분

창조리는 고구려 사람이다. 봉사왕 때 국상이였다. 그 때는 모용외가 변방의 화근이었다.

왕이 군신들에게 물었다. <모용씨가 병사가 강병하니, 계속하여 나의 영토를 침범하고 있구나.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그러자, 창조리가 대답하였다. <북부대형 고조자는  현명하고 용맹합니다. 대왕이 만약 변방을 억제하고 백성을 편하게 하시려면 고노자 외에는 대안이 없습니다.> 왕은 이에 신성태수로서 임명하니 모용외가 다시는 오지 못하였다.

9년 가을 8월, 왕이 국내 정남 15세 이상을 모집하여 궁실을 수리하였다. 백성들은 먹는 것이 궁핍해지고, 역이 고대었다. 이로 인하여 유망하는 자가 많아졌다.

창조리가 말하기를,

<군주가 백성들을 보살피지 않으면 인이 아니요, 신하된 자로서 간언하지 않으면 충이 아닙니다. 신은 이미 승상이 되어 있으니 어찌 감히 말하지 않고, 어찌 감히 간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은 웃으며 말하기를, <국상은 백성들을 위해 죽고자 하는 모양이구나. 다시는 논하지도 말라.>고 하였다.

창조리는 왕이 의견을 바꾸지 않을 것을 알고는 물러나와 여러 군신들과 왕을 폐하기로 모의하였다. 왕은 이것을 알고 스스로 목을 메어 죽었다.

창조리의 글은 고구려 사회가 초기 씨족제를 벗어 버린 여러 가지를 보여줍니다.

1. 고구려 초기에는 모용씨 등 북방세력에게 고구려가 대적하기 힘들었다.
   2. 북부대형 고노자 등의 행정과 관등이 있었다. (북부 : 행정관직, 방위개념 / 대형 : 관등, 형계열의 형제적 관등)
   3. 국가적 차원의 부세제도와 징발제도가 정비되어 있었다.
   4. 왕에게 간언해야 충신이다 - 초보적인 유교사상이 엿보입니다.(국가운영이념이 선민사상을 탈피함)
   5. 군신과 회의하여 왕을 폐하려 하다 - 초기 고구려의 회의체가 힘이 왕권을 능가함을 보여줍니다.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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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추의 정치젹 위기와 성급한 외교

선덕여왕 11년 7월에 백제 의자왕이 군사를 크게 일으켜 나라 서쪽의 성 40여개를 탈취하였다. 8월에 또 고구려와 공모하여 당항성을 취하여 당나라로 통하는 길을 끊으려 하였다. 이에 왕이 사신을 보내어 당태종에게 급한 사정을 고하였다.

이달에 백제 장군 윤충이 군사ㅡㄹ 거느리고 와서 대야성을 공격해 빼앗아가니 도독 아찬 품석과 사지 죽죽, 용석 등이 전사하였다. 겨울에 왕이 백제를 쳐서 대야의 일을 보복하려 하여, 이찬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 군사를 청하였다.

처음 대야에서 패할 때 도독 품석의 처도 죽었는데 춘추의 딸이었다. 춘추가 듣고 기둥에 기대어 서서 종일토록 눈을 깜짝이지 않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지 못하더니 얼마 뒤에 말하기를,

[슬프다. 대장부가 어찌 백제를 멸하지 못하랴!] 하고는 곧 왕에게 나아가 말하되, [신이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 군사를 청하여 백제에 대한 원수를 갚고 싶습니다]고 한즉 왕이 허럭하였다.

고구려왕 고장(보장왕)이 본래 춘추의 이름을 들은지라 군사의 호위를엄중히 한 뒤에 그를 보았다. 춘추가 나아가 말하기를,

[백제가 무도하여 장사봉시(뱀과 돼치처럼 탐욕스럽다는 뜻)가 되어 우리 땅을 침범합니다. 우리 임금이 대국의 병마를 얻어 그 치욕을 씻기 위해 하신으로 하여금 하집사(연장자)에게 귀의함입니다] 라고 하였다.

고구려왕이 이르되, [죽령은 우리 땅이었으니 네가 만일 죽령 서북의 땅을 돌려보내면 원병을 보내겠다]고 하였다. 춘추 대답화되, [신은 임금의 명을 받들어 군사를 청하는 것인데, 대왕께서는 환난을 구원하여 이웃과 친선하려는 데는 뜻이 없으시고 단지 사신으로 온 사람을 위협하시니, 신은 죽을지언정 다른 것은 알지 못합니다.]고 하였다.

왕이 그 말에 노하여 별관에 가두었다.

삼국사기 권 22, 고구려본기 10 보장왕 하, 보장왕 2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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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해석 : 당시 신라에서 입지를 굳혀가던 김춘추는 정치적 기반인 사위 김품석이 죽자 큰 타격을 받습니다. 그는 고구려와의 외교를 성사시킴으로서 정치적인 입지를 다시 다지려 하였는데, 너무 정직한 외교를 하는 바람에 고구려에 억류되어 버립니다. 이것은 신라 초기 수준 낮은 외교를 보여주는 단면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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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생과 고구려의 멸망

연개소문이 죽자 맏아들 남생이 막리지가 되어 처음 국정을 맡으면서 여러 성을 순행하기 위해, 아우 남건과 남산에게 남아서 뒷일을 맡게 하였다. 어떤 사람이 두 아우에게 말하기를,

[낭생이 두 아우가 핍박하는 것을 싫어하여 제거하려고 마음먹었으니 먼저 계략을 세우는 것이 낫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두 아우는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또 어떤 사람이 남생에게 고하기를,

[두 아우는 형이 권력을 도로 빼앗을까 두려워, 형에게 거역하여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고 합니다.] 고 하였다.

남생은 친한 사람을 몰래 평양으로 보내 아우들을 살피게 하였는데, 두 아우가 덮쳐 붙잡았다. 이리하여 왕명으로 남생을 불러들였으나, 남생은 감히 돌아오지 못하였다. 남건이 혼자 힘으로 막리지가 되어 군사를 내어 남생을 토벌하니, 남생은 달아나 국내성에 웅거하면서 아들 현성을 시켜 당나라에 가서 애걸하였다.

6월에 당고종이 좌효위대장군 글필하력에게 명령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그에 응하여 맞이하게 하니, 남생이 몸을 빼어 당나라로 달아났다.

삼국사기 권 22, 고구려본기 10 보장왕 하, 보장왕 2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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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해석 : 고구려의 멸망과정이 연개소문 사후 내분이었음을 보여주는 사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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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백제의 바림직하지 않은 대립

위덕왕 45년(598) 9월, 왕은 장사 왕변나로 하여금 수나라에 들어가 조공하게 하였다.

왕은 수나라가 요동에서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을 듣고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려 군의 길잡이가 되기를 청하였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말하였다.

{왕년에 고구려가 공물을 바치지 않고 산하로서 예가 없어 장수에게 명하여 죄를 꾸짖게 한 것이다. 그러나 고원(영영왕)의 군신들이 두려워하고 복종하여 죄를 청하기에 짐이 이미 용서하였으니 정벌할 수가 없다}

수나라는 사신을 후히 대접하여 돌려보냈다. 고구려가 이 사실을 알고 군사로써 국경에 쳐들어와 약탈하였다.

삼국사기 권 27, 백제본기, 위덕왕 4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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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해석 : 이 사료는 6세기에서 7기로 넘어가는 역사적 변환기에 고구려와 백제가 서로 연합을 해서 신라, 당나라를 견제해도 모자라는 시기임에도 서로 다투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료입니다. 이것은 시대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기 보다는 두 나라가 과거 얼머나 원한이 깊은 상태였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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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통일의 과정

1. 6c 신라의 성장과 백제의 부흥 노력

6세기에 신라가 성장한 배경은 551년 신라의 한강 점령입니다. 신라는 나제 동맹을 통해 공동으로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유역을 탈환했음에도 불구하고, 진흥왕이 백제 성왕을 배신하여 한강을 독차지했습니다. 본래 한강의 남쪽을 보장받기로 했던 성왕은 격분한 나머지 3만의 군사를 이끌고 진흥왕을 공격하다가 관산성에서 왕이 전사하는 위기를 맞습니다. 이후 백제는 왕권이 약화되고, 연, 백, 사씨 등 8대성이 정치를 이끌어나가는 귀족체제가 됩니다.

신라는 한강유역을 차지하여 당항진에 당항성이라는 요새를 건축합니다. 이것은 곧 중국과의 직접 교통로를 확보함을 의미합니다. 신라의 한강유역 차지는 고구려, 백제로 하여금 여제동맹을 맺게 하는 결정적 원인을 제공했습니다. 그러나, 장수왕 시기 고구려에 크게 당한 백제는 고구려에 대한 원한이 너무 깊어 이 당시 백제와 고구려는 상당히 적대적이었고, 결국 3국이 서로 국경에서 항쟁하는 전면전이 시작됩니다.

백제는 무왕이 즉위하면서 일대 변혁기를 맞이합니다. 무왕은 왕권을 강화하면서 신라의 여러성을 공격하여 영토를 확장하였으나, 한강 유역을 확보하지 못하여 남북으로 영토가 분리되었습니다. 이것은 황해지방에서 고구려와도 항쟁이 심해지는 것을 뜻합니다. 무왕은 8대 귀족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익산 미륵사를 창건하고 천도계획까지 세웠지만 실현하지는 못했습니다.

2. 고구려는 힘들게 버텨나가다.

고구려는 이 당시 신라의 외교적 전략에 의해 중국 수, 당을 상대해야 하는 버거운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특히 당이 건국된 후 연개소문은 대당 강경책을 시행하여 천리장성을 축조하는 등 적극적인 대당 정책을 펼쳐나갑니다. 고구려는 대당항쟁을 위해 신라와의 남쪽 국경이 안정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전부터 함흠평야에 대한 신라 영유권을 인정하여 신라의 침입을 일시 무마했던 고구려는, 대당 항쟁을 위해 백제를 간접지원하는 정책을 실시합니다.

즉, 신라가 고구려 견제 수단으로 당을 끌어들이는 정책을 실시했다면, 고구려는 신라에 대한 견제 수단으로 백제를 적극 활용한 것이지요. 당시 백제의 의자왕은 고구려와의 동맹을 통해 북방을 안정시키고 신라 공격에 최선을 다합니다. 의자왕의 공격으로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이 지키는 대야성이 함락되고, 김품석이 죽는 사건까지 발생합니다. 신라의 김춘추는 자신의 정치적지지 기반인 사위가 죽음으로서 정치적 입지에 큰 타격을 입고, 보다 적극적인 방법으로 중국과의 친밀한 외교를 유지하려 노력합니다.

또 고구려, 백제 양군은 연합하여 신라의 당항성을 공격하였고, 대당 교통로이자 삼국항쟁의 중심지인 당항성을 지키려던 신라 선덕여왕은 당에 적극적인 구원요청을 합니다. 그러나, 당은 여왕이 왕이라서 일어난 문제라는 식으로 신라에 딴지를 걸었고, 신라 왕을 당 왕족으로 바꿀 것을 요청합니다. 결국 신라 귀족층은 이러한 사태에 동요하였고 비담과 염종의 난으로 선덕여왕은 추방되었습니다. 그러나 김춘추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굳히고 타 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성골>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선덕의 사촌 진덕여왕이라는 여왕을 또 추대합니다.

이러는 동안 중국과 고구려는 끊임없는 전쟁을 치루고 있었으나, 안시성 싸움 이후 당과 고구려의 전쟁은 끝없는 소모전으로 결론이 나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결국 당나라는 고구려보다 후방에서 고구려를 지원하고 신라를 괴롭히는 백제부터 치는 방향으로 전략을 선회합니다.

3. 백제와 고구려는 사라지다.

당시 백제의 의자왕은 여제동맹, 일본과의 협조을 얻고 끊임없이 신라를 압박하였습니다. 당나라는 신라 무열왕과 함께 백제를 협공하였고, 백제는 결국 계백의 황산벌 결사 전투를 마지막으로 멸망하고 맙니다. 당은 백제의 옛 땅에 5도독부를 설치하고 이것을 후에 웅진도독부와 7주로 개편합니다. 신라는 삼국통일이라는 과제를 앞두고 당의 이러한 도발적 행동을 묵인하였습니다.

고구려는 백제 멸망후에도 계속적으로 중국과 항쟁하며 버텨나갔습니다. 그러나 연개소문의 독재로 민심은 점차 어지러워지고,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이 막리지에 오른 뒤에는 동생 남건, 남산의 반란 등으로 내분이 일어나 결국 멸망하게 됩니다. 당은 고구려의 영토에 안동 도호부를 설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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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사회의 지배층 - 가, 호민, 하호, 간

1. 가란 무엇인가?

고대 사회에서 지배층을 논할 때 우선 알아야 할 단어는 <가>입니다. 가란, 북방 유목민 사회에서 전파되어 온 개념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고대 유목민 사회에서는 지배자(족장)를 가한이라고 불렀습니다. 가한이란 큰 추장이란 뜻이라고 하네요. 흉노에서는 지배자를 <선우>라고 부르는데, 이 선우도 그 원 뜻은 <가한>이라고 한답니다. 중국에서 유목왕조와의 투쟁에서 승리한 당나라도 이 <가한>이라는 용어를 쓰면서 이민족을 지배하는 지배자라고 자처하기도 했답니다.

이 <가>라는 말은 남방에 내려와서 삼한 사회에서 <간, 한>이라는 용어와 같이 쓰였습니다.

우선 가가 들어간 말들은 고추가, 대가, 소가, 제가 등 북방계통의 국가가 많이 사용했습니다. 고구려, 부여에서 많이 나오는 용오들이죠. 신라에서는 마립간, 이사금, 거서간 등의 파생어가 있는데, 여기서의 간 역시 <가>에서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즉, 이들 용어는 공통적으로 추장, 족장, 군장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용어는 <왕>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소국의 군장을 뜻하는 용어로서의 <가>이기 때문에 이 용어가 사용된 시기는 연맹왕국 단계의 초기 철기 시대가 주류를 이루는 듯 싶습니다. 제가 역시 이 <가>라는 용어에서 파생된 작은 영역의 지배자로 해석하면 무난할 듯 싶네요.

그러나 초기 철기시대를 넘어 삼국시대로 넘어가게 되면 <가> 계급은 중앙세력에 편입되어 관등제도 속으로 포함됩니다. 예로, 고구려의 초기 나(노)집단은 주변 씨족 사회를 통합하여 연노, 절노, 순노, 관노 등의 <가> 사회로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계루부 중심의 부로 통합되었고, 씨족적 부는 고국천왕대에 행정적 부로 재편됩니다. 그리고, 가들은 중앙관위 속에 편제되어 고추가 - 대가 - 소가라는 3중적인 서열로 재편됩니다. 즉, 가들은 읍락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하고, 왕권에 신속한 신하가 되는 것이지요. 이들은 왕권 밑에서 읍락과 하호를 통제하는 행정관 성격으로 바뀌게 됩니다. 즉, 부체제적인 <중층적인 이중 구조>의 사회가 중앙집권적인 <일원적 구조>로 바뀜을 말합니다.

2. 호민이란 무엇인가?

호민은 원래 가에 속한 가층의 지배자를 뜻하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회가 분화되고, 정복사업이 많아졌으며, 철기시대가 진전되면서 이 호민층은 가층에서 갈라져 나온 중간 계급의 성격을 갖습니다. 원래 호민은 소국의 지배층이었습니다. 예로 옥저, 동예, 삼한 등에서는 뚜렷한 지배자가 없이 다수의 읍군, 삼로, 장수, 후 등이 존재했는데, 이들이 더 큰 대국에 점령당하면서 대국에 편입된 호민층으로 자리잡았다고 합니다.

호민은 초기부터 자신의 지배영역을 가지고 있던 소국 족장으로서, 대국에 통합된 이후에도 읍락의 점유권 등을 바탕으로 일정한 세력을 유지하던 지방 지배층이라고 보시면 무난할 듯 싶습니다. 역사에서 흔히 말하는 <호족>세력과도 비교가 되네요.

3. 경, 대부는 무엇일까?

경과 대부는 중국 서주시대사에서 아주 상세히 다루었습니다.(필요하신 분들은 검색해보세요. 서주시대로..) 대부은 원래 제후 밑에서 봉토를 부여받고 군사와 공납을 담당하던 <국>의 지배층이었습니다. 경은 제후 옆에서 직접 업무를 담당하는 실권자인 대부를 말합니다.

우리 역사에서는 기자조선 시대에 경, 대부가 나타납니다. 여기서의 경은 한 지역의 국사를 맡던 관직으로 <조선상 역계경> 등에서 보여지듯이 독자성을 가진 이름입니다. 대부란, 일정 가문을 가지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배층 귀족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됩니다. 이들 경, 대부들은 각각 정치력을 가지고 있었고, 상위 지배집단이 동요할 때에는 스스로 <가, 간>을 칭하면서 독자적인 세력으로 성장하고는 했습니다. 삼한 70여개국이 정확한 명칭을 알 수도 없고, 그 영역도 잡거 형태이며, 생몰을 파악할 수 없었던 이유는 이것에서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은 경, 대부에게 일정한 관직을 주고, 영역를 인정하여 지역을 통치할 수 있는 자율권을 부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국왕에 신속하면서 중앙정치에 참여한다던가 지역통치에도 관여했을 것입니다. <조선상 역계경>을 예로 보면, <상>은 국가에 신속한 관리를, <경>은 독자적인 지방 세력임을 의미하는 단어로 이 두가지가 동시에 명칭으로 사용됨을 볼 수 있네요. 이러한 경, 대부라는 직책은 위만 조선에서 보입니다.

4. 제가란 무엇일까?

제가란 용어는 부여에서 나옵니다. 제가란, 한자로 보아 <가>들을 두루 다스리는 큰 가란 뜻일 겁니다. 제가는 왕과 직접 교통할 수 있는 큰 족장 세력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읍락에서 수백, 수천가를 다스리며, 좌식자(앉아서 먹고 노는 계급)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하호를 착취하여 막대한 조세를 걷었죠.

부여는 <제가평의>를 통해 행정에 참여하였는데, 이미 1책 12법 등이 존재한 것으로 보아 제가평의는 법의 제한을 어느 정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들은 그들의 특권이 존재하는 만큼 어느 정도 법의 제한에서는 벗어나 자신들의 권리를 스스로 지킬 수 있는 힘이 있었습니다.

제가는 하호를 지배하는 실제적인 영역의 왕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영역에서 마음대로 관료를 임명하고, 임명한 관료의 명단만을 왕에게 통보하는 형식으로 영역을 다스렸습니다. 예로, 고구려의 대가들은 사자, 조의, 선인 등을 스스로 임명할 수 있었습니다. 또, 부여의 제가들은 흉년이 들었을 때, 왕을 죽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제가들은 독자적인 군사력도 막강하여 왕위계승분쟁이 있을 경우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였고, 전쟁시에는 전쟁의 승패를 좌지우지할만큼의 자제적 군사력과 전술을 갖추었다고 합니다.

이것으로 볼 때, 부여나 초기 고구려 등의 5부족 연맹왕국은 2중적인 지배구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국왕이 제가를 통솔하나, 제가 역시 독자적인 세력으로서 관료조직을 가지고 읍락을 지배한 것입니다. 이것은 흔히 부체제에서 말하는 <중층적 구조>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5. 하호는 무엇을 하였나?

하호에 관련된 유명한 사료는 <제가에게 고기, 소금>을 날라다 준다라는 구절입니다. 이것은 마치 가혹한 수취로 하호들을 다루었으며, 하호가 노예적 성격을 가진 것이라는 것을 증명해줍니다. 부여의 순장, 인두세 등은 노예제 사회임을 강력하게 증명해줍니다. 그러나, 실제 하호가 노예인가, 농노인가, 씨족사회 일원인가에 대한 논의는 아직도 학자들간에 진행중이라고 합니다.

6. 지배체제에 대해 정리해보자.

결국 초기 철기시대의 지배계급은 가, 한, 간 등의 족장 세력을 중심으로 이루어짐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 본래 독자적인 소국의 왕을 칭하던 가, 한, 간 등은 소국이 대국에 굴복함으로서 대국에 귀속된 계층으로 전환됩니다. 고구려의 가(고추가, 대가, 소가), 백제의 한(가한), 신라의 간(거서간, 마립간 등)의 질서를 볼까요?

고구려는 보통 형제적인 질서를 보입니다. 태대형, 대형 등 <형>의 계열이 상당히 많은 것으로 보아, 초기 고구려 지배층은 소국과의 관계가 같은 예맥족에서 출발함을 암시하는 듯 싶습니다. 대형은 큰 세력, 소형은 작은 세력을 말하는 듯 합니다.

신라는 지방 간층의 지배세력을 신지, 험측, 범예, 살해, 읍차라 부르며 등급화하였습니다. 이것은 중앙지배세력으로 포섭된 이후에도 이간, 파진간 등 <간>의 칭호를 달리하여 세력을 등급화하였습니다. 초기에는 12등급, 법흥왕 이후에는 17등급으로 정비하면서 이것이 곧 골품제와 연결되는 <간군관등>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관등이란 것은 원래 국가 업무에 참여하는 자들을 <등>이라고 하여 주었던 것인데, 후대에는 지배층의 높낮이를 구별하는 용어로 쓰입니다. 국왕 밑에 신속한 관리는 <대등>, 그들의 우두머리는 <상대등>, 간층 귀족들이 차지하는 관등은 <간군관등> 등으로 쓰이죠.

7. 이 지배체제는 <부체제>로 정리될 수 있다.

결국 초기 철기시대의 국가들의 특징은 각 소국의 지배자(가, 간, 한)들에게 영역을 인정해주고, 백성 지배를 인정해 준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리고 소국의 지배자인 족장, 군장들은 각각 자국의 지배층들과 국가 중대사를 의논하여 결정하였는데, 이것을 <귀족 회의>라고 합니다. 국가 중대사는 거의 이 회의체가 결정하였습니다. 국왕도 이 회의의 결정을 때를 수밖에 없었으므로, 왕권이 전제화되지는 못한 듯 합니다. 고구려의 제가회의, 백제의 정사암회의, 신라의 화백회의 등은 이런 역할을 수행한 면이 있습니다.

삼국시대 초기의 지배층은 왕의 도읍에 거주지를 마련한 후 정치집단을 형성하였습니다. 고구려의 5부, 백제의 5부, 신라의 6부 등은 이런 정치집단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이들 지배층 중에 가장 강력한 집단이 왕이 되었고, 그 다음은 왕비족이 되었습니다. 고구려의 계루부 정권에서 절노부가 왕비족으로 군림한 것이 그 예입니다. 그러나, 나머지 집단도 일정 세력을 가진 자치권이 있었습니다. 예로, 고구려 소노부는 계루부에게 정권을 넘겨준 부였지만, 자체 종묘사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왕 밑에서 각 부들이 자치권을 가지고 있는 형태의 구조를 <부체제>라고 합니다. 부체제에서의 부들은 상호 후원자적 성격으로서 각 부는 자신의 이익을 지킴과 동시에 외적에 대해서는 공동방어를 추구했습니다.

모든 부는 왕 이하 평등관 관계로 이루어졌습니다. 실제 신라 진흥왕기 이전의 삼국을 보면, 왕이 하교를 내릴 때, 왕도 왕의 명칭 앞에 소속부를 붙었으며, 그 하교가 왕과 여러 부의 공동하교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왕은 군사권, 인사권, 재정권, 세습권을 가지고 있지만, 각 부는 자치권, 제사권, 방아권을 가지고 있음으로서 상호 평등한 관계를 유지함을 알 수 있네요.

그리고 각 부에서는 귀족 대표를 스스로 뽑습니다. 고구려는 삼세일역이라고 하여, 삼년에 한번 신하들 가운데 실력자를 대대로로 선임하였으며, 백제는 서너명의 재상 후보들이 다투면 왕이 마지막에 선택하였고, 신라의 상대등은 6부 귀족들이 만장일치로 합의하여 선발했다고 합니다. 부체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따로 <부체제>라는 파트를 만들어 설명하겠습니다. 무지 길거든요.

8. 부체제는 중앙집권체제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부체제는 국왕권이 강화되면서 점차 각 부의 독자적 영역과 세력이 약해집니다. 부는 행정구역으로 변하게 되고, 각 부의 <간>층은 관등에 속한 관료계급으로 전환됩니다. 이 때, 부가 국가의 행정구역으로 변하면서 <간>층은 유력한 혈연 귀족으로 변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혈연을 뜻하는 단어인 <골>입니다. 특히, 내물왕 이후 골들은 자신들의 유대관계를 확고히 하기 위해 진정한 골(진골)이라 부르게 됩니다. 그리고, 왕위 후계자가 될 진골들은 하늘에서 부여받은 혈통이락 하여 성스런 골(성골)로 규정하기도 하죠. 이 부분은 다음장에서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영일냉수리비와 울진봉평비를 보면, 신라 초기에는 공동하교를 내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냉수리비에서 지증왕(지도로갈문왕)은 아직까지도 여러 부의 왕들과 함께 교를 내리고 있습니다. 울진봉평비에서 법흥왕은 노인법이라는 것을 말함으로서 <간>층이 임의로 지배했던 피지배층(노인)을 국가체제로 흡수하는 과정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들 왕은 아직도 <부>를 장악하지 못하였고, 각 지방에서는 <부>를 다스리는 <간>들이 존재하였습니다. 이러한 부를 확실하게 누르고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중앙집권화와 영토확장을 과감하게 실시한 왕이 바로 <진흥왕>입니다. 진흥왕의 단양적성비에는 모든 부를 제외하고 왕 혼자서 명령을 내리는 <단독하교>가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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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북방 국가들의 성장

1. 부여의 등장

부여는 중국 춘추전국시대 이전에 등장한 것으로 기록에 나온다고 합니다. 즉, 기자조선과 위만조선 시대에 존재했던 국가로서 중국에 알려졌을 것입니다. 부여왕이 후한 광무제에게 서신을 보냈다는 기록으로보아 국제적인 독립국가였을 것입니다.

부여는 송하강 유역의 평야지대에서 5곡의 수학이 풍성하고 금택지이며, 동물자원이 많다고 나옵니다. 반농반목의 농경국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중국측 기록에도 고구려는 나쁘게 써 놓은 것에 비해, 부여는 사람이 후덕하고 예의가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여는 보통 예맥족이 일으킨 예족의 나라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는 이 예족에서 갈라져 나온 예족 계통의 맥족 국가라고 합니다.

2. 고구려의 등장

고구려의 건국은 삼국사기의 기원전 37년설을 보통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건국 이전부터 이미 계루부 계통의 5부족 연맹왕국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상당한 기간 동안 소국으로 머물렀던 국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고구려의 초기에는 연노부(소노부) 집단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 소노부 집단은 아마도 송양왕이 다스리는 비류국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비류국을 누루고 주몽집단이 부여에서 내려옴으로서 계루부 집단이 국가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는데, 이 주몽이 동명성왕으로 즉위하는 것을 건국기점으로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구려는 이미 건군 전인 기원전 75년 현토군을 축출하였고, 끊임없이 한나라와 맞서 싸우면서 성장하였습니다. 그들은 책구루를 쌓고 주변 소국들을 통제하는 등 철저하게 한군현과의 개별 접촉을 금기시하면서 독자적인 세력으로 성장해갑니다.

3. 동예와 옥저의 등장

역사적으로 예족이 등장한 최초의 기록은 예군남여가 한의 요동군에 항복했다는 기사부터입니다. 한은 예족의 땅에 창해군을 설치하여 위만조선과 대립시키려 하였는데, 예족들은 오히려 한에게 반항하여 창해군은 3년만에 사라지게 됩니다. 즉, 예족은 조선시대부터 동해안, 압록강, 요하-흑룡강에 이르기까지 넓게 분포한 정치세력이었습니다.

그들이 동해안에서는 <임둔>이라는 정치집단으로 성장하였고, 압록강과 그 북부일대에서는 맥족과 섞여 고구려의 건국 기반 세력이 되기도 합니다. 또 송하강 유역에서는 부여를 건국했는데, 이 부여가 전형적인 예족 국가입니다. 부여국의 창고에는 예왕지인이라는 도장이 있다고 합니다.

이중 임둔은 기원전 2세기 위만조선이 망하면서 한나라의 <임둔군>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족의 끊임없는 반항으로 기원전 82년 일부만 현토군으로 합쳐지면서 소멸됩니다. 그리고 고구려의 예, 맥족들은 끊임없이 현토군을 위협하여 기원전 75년 현토군을 몰아냅니다. 현토군은 이동하여 서부에서 제 2 현토군으로 존속합니다. 동부에서는 7현이 존재했었는데, 이중 낙랑군에 동부도위를 두어 한의 세력을 유지하려고 했으나, 이중 부조현을 제외한 6현이 동예의 중심세력으로 성장하여 곧 동부 7현도 사라집니다. 이 동부의 동예 세력은 고구려 태조왕기에 고구려로 편입되어 역사에서 사라집니다.

그러나 동부 7현중 부조현은 예족 세력들이 옥저를 만들어 사회를 유지하였습니다. 특히 옥저는 남북으로 길어서 남옥저, 북옥저로 구분하였는데, 이들 옥저의 중심지를 <치구루>라고 불렀습니다. 또 부여국이 선비 모용외와 모용황의 침입을 받는 시기에 부여의 주세력이 북옥저로 이동하면서 북옥저에는 부여인들이 자리잡게 되는데, 이들 부여인들이 북옥저의 동부에 동옥저를 건국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옥저의 각 세력들은 고구려 태조왕기에 고구려로 편입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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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국가의 사회분화

1. 맥족의 발전 - 고구려

고구려는 고조선의 멸망 이후 심각한 사회분화를 겪는 대표적인 국가입니다. 고구려는 원래 어원이 큰 고을을 구려라고 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만, 가설 수준인 것 같습니다. 고구려는 졸본에서 건국했지만, 초기에는 평야의 부족으로 농업 생산량이 부족했습니다. 따라서 주변 예족을 복속해가면서 결핍분을 전쟁으로 메웠습니다. 특히 옥저, 동예 등의 예족은 고구려의 약탈 경제로 인하여 발전이 느릴 수밖에 없었죠.

고구려는 강력한 철기문화를 기반으로 등장한 제지 족장 세력을 끌어모으는 과정에서 더 분화되고 강화된 계급현상을 초래합니다. 특히 한군현과의 항쟁 속에서 주변 민족들을 복속하면서 발전하게 됩니다. 고구려는 농업사회의 공동체 기반을 완전히 해체한 새로운 집단인 <나집단>들을 중심으로 군사화되어 한군현에 저항하였습니다. 그리고 중앙권력은 이러한 나집단들을 국가 체제로 흡수하면서 발전해 갑니다. 즉, 초기의 고구려는 중앙권력이 니집단의 개별적 대외무역권과 외교권을 인정하면서 그들의 힘을 흡수하려고 하는 <중층적인 국가 사회 구조> 속에서 발전해 나갑니다. 나집단은 차츰 국가적 이해관계 속에서 중앙권력에 의해 재편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중앙권력은 나집단을 구역별로 묶에 방위 개념인 부로 편성합니다. 이것이 바로 계루부, 절노부, 소노부, 관노부, 환나부의 5부족 연맹체입니다. 5부족 연맹이 생성된 것은 태조왕기이며, 이 5부족을 행정적 5부로 재 개편한 왕이 고국천왕입니다. 즉, 고구려의 정치체제는 초기부터 점차 중앙집권적인 형태로 진전되고 있엇음을 알 수 있죠.

고구려가 중앙집권화 되는 과정에서 가장 큰 마찰은 한군현이었습니다. 한군현은 조복, 의책을 각 소집단(나집단 등)에게 내려 한군현에 신속하게 하고, 한군현과 무역을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분열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고구려는 휘하의 나집단이 한나라에 끌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조복, 의책을 한나라로부터 받는 수장층 명부를 스스로 주관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한군현들을 축출하는 사업을 벌입니다. 한의 현토군은 어쩔 수 없이 책구루라는 것을 쌓고 조복과 의책을 가져가라고 하지만, 고구려는 오히려 훗날 한의 현토군마저 축출합니다.

2. 한족의 발전 - 삼한

보통 우리 민족의 기원을 예, 맥, 한 족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예족이란, 고조선기부터 존재한 초기 예족으로 동예, 옥저 등을 거쳐 부여인의 기반을 말합니다. 맥족은 고구려의 기반이 되는 족속을 말하며, 한족이란 삼한으로 대표되는 남방의 족속들을 말합니다. 물론 최근에는 여기에 대한 이견도 많습니다.

한반도 남방의 한족들은 후한말기와 삼국시대의 혼란을 이용하여 2세기말 한군현에서 벗어납니다. 그러나 조조와 조비 부자의 위나라가 화북을 통일하여 중국이 다시 안정기에 접어들자, 낙랑, 대방군을 이용하여 다시 한족을 압박합니다. 특히 한족, 예족의 군장들은 중국이 하사하는 왕, 후, 읍군 등의 관호, 조복과 의책 등을 받기 위해 서로 대립하였고, 이러한 한군현의 분열정책이 남방에서는 성공합니다. 그 이유는 진국이 해체된 후 삼한의 소국들은 철기문화에 대한 격차를 중국 군현의 선진기술로 메우려 하였기 때문에 중국문화의 전래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럼 다음장에서는 각각의 국가들이 한군현을 벗어나, 자체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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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 이야기는 설화인가, 허구인가?

1. 단군이야기의 기록

단군이야기는 고려시대 일연의 삼국유사, 이승휴의 제왕운기 등에 최초의 기록이 나타납니다. 이 이야기는 하늘에서 내려온 하늘의 자손이라는 선민사상, 곰 부족이라는 토템 등이 나타나는 대표적인 고대 설화입니다. 우리는 보통 단군의 이야기를 신화라고 많이 부르는데, 신화는 실제 역사 이야기와는 별도로, 신비롭고 초자연적인 현상을 신이라는 존재를 통해 이야기하는 것이므로 허구적인 부분이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단군 이야기는 허구적인 이야기보다는 당시 역사상을 사회발전단계에 맞추어 설명하는 이야기이므로 신화보다는 설화가 맞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단군이야기를 허무맹랑한 신화로 보아 단군의 정통성을 부정하려는 논의는 일제시대 식민사관을 주장하는 일반학자들에 의해 조작된 부분이 많습니다. 그럼 일단, 일제시대 식민사관을 주장하는 일본인 학자들의 주요 주장을 적어볼까요?

2. 단군이야기는 허무맹랑한 신화일 뿐이다.

식민사관을 주장하는 일본의 논리는 일본의 한반도 지배가 역사적으로 당연하다는 하나의 논리를 위해 그 <논리> 선상에 모든 한국사를 끼워맞추는 식의 주장입니다. 그 논리는 타율성론, 정체성론, 일선동조론, 만선사관 등 끝도없이 만들어졌지만, 여기서는 단군 관련 논의만 보겠습니다.

단군 시기에 대한 일본측의 가장 큰 주장은 한반도에는 청동기 시대가 없다는 주장입니다. 한반도에는 단군이라는 인물이 없었으며, 이것은 한국인들이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만든 창작물이라는 거죠. 실제 한반도는 위만조선과 한사군 등 중국의 식민지 정권에서부터 출발하므로, 한반도는 애초에 식민지 국가였다는 논리입니다. 이 것에 대한 일본인의 주장을 적어볼까요?

- 조선은 석기시대 없이 위만이라는 중국인이 건너와 중국 한사군에게 멸망하였고, 금속문명이 최초의 문명으로서 고대 조선은 식민지 상태에서 출발한다고 일본인 학자들은 주장한다. -    (한국사특강, 서울대학교 출판부) -

또 일본인들은 단군신화가 만들어진 배경을 대몽항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설정합나다. 몽골침략기에 고려인들이 외세와 싸우면서 국난극복에 도움이 되는 통일 사상이 필요했는데, 여기에 부응하기 위해 단군신화라는 근거없는 신화를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상식적으로만 생각해보아도 일본측의 주장은 이상합니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일본의 신화에는 태양신부터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상한 신까지 더 황당하거든요. 일본건국신화는 더욱 역사적 근거없이 천황가의 신성성을 과시하기 위한 부분이 더 큽니다. 뭐 묻은 자들에게는 뭐 묻은 것만 보인다고, 스스로의 역사가 그런 요소를 가지고 있으니 남의 역사도 그렇게 보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하지만, 역사적인 부분은 역사적으로 반박해야 하므로 단군 설화가 단지 허구가 아님을 밝혀야 되겠죠?

3. 단군이야기는 사회상을 담고 있다.

푸코라는 철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신화는 신들의 이야기이지만, 사람들이 원하는 이상적인 신의 모습이 담겨져 있어서 당시 사람들의 생각과 생활을 읽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설화는 인간들의 이야기이므로 그 속에는 인간들의 바람뿐만 아니라 실제 인간들의 삶이 살아 숨쉬고 있다고 말합니다. 단군설화는 신화를 넘어선 설화이고, 설화를 넘어서면 역사적 요소가 보입니다. 단군의 건국 이야기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인용하면, 위나라의 <위서>에서 가져온 이야기라고 합니다. 이 위서가 현재 전해지지 않기에, 우리 주장이 좀더 설득력을 잃어가지만, 단군의 조선 건국은 역사적 배경을 지녔다는 사실은 알 수 있습니다.

일단, 일본이 주장하는 한반도에는 청동기가 없었다는 것은 현재 잘못된 주장임이 밝혀졌습니다. 한반도에는 청동기 시대와 고조선의 유물 뿐만 아니라 신석기, 구석기 유물도 다수 나오고 있으니까요. 또 관자, 산해경, 위략 등의 중국 사서에 고조선과 중국이 접촉한 사실들이 많이 보입니다. 단군이 허구라면 중국 정사들도 다 허구가 되는 것이지요.

일본은 환인이라는 표현이 고조선 당시에는 없던 용어를 고려인들이 만들었기 때문에 이것 자체가 허구이며, 신화 구조 자체가 허구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환인이라는 표현은 고려 당시 <하늘님>을 표현할 때, 종종 쓰는 보통명사이므로, 하늘에 계신 신을 지칭하는 일반 용어일 뿐입니다. 환인은 불교식 용어로 <제석천>이라는 신을 뜻하는 용어인데, 단군신화에서는 단지 하늘에 계신 신을 부르는 용어로 사용 했을 뿐, 허구적으로 만든 말이 아닙니다. 일본의 신 <아마테라스>는 일본 고대사람들이 첨부터 그렇게 불렀을까요? 아마, 아주 고대인들은 다른 용어로 불렀을 것입니다.

또 일본인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자손, 사람과 곰의 결혼 등의 역사성을 부정합니다만, 일본 신화를 보면 일본이 과연 이것을 부정할 수 있을까 생각됩니다. 일본의 신들은 남매끼리 결혼하여 계속 신을 낳고, 임신하고, 또 가족끼리 결혼하기를 반복합니다. 사실, 동아시아에는 곰이 나오는 신화와 하늘에서 신이 지상으로 내려오는 소위 <친신강림(일본 천황가가 주로 쓰는 말입니다.)>은 보편적 이야기입니다. 왜냐면, 당시 동아시아 고대 사회에서는 선민사상을 가진 부족 위주로 정복사업을 벌였고, 곰 등 토템을 가진 타부족과의 항쟁과 연합이 계속되는 역사가 있었으니까요.

단군신화에 나오는 <천강신화>는 하늘에서 신이 내려왔다는 고대 보편적 관념을 따른 것입니다. <인수교혼>이라고 하는 사람과 동물의 혼인은 당시 전쟁과 연합이 계속되는 사회상을 상징하는 것 뿐입니다. 푸코는 이러한 설화의 역사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합니다.

또 단군신화에는 한인, 황웅, 풍백, 우사, 운사 등 유교, 불교, 도교 사상이 들어있다고 일본측이 주장하면서, 허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고대적 사상을 고려인들이 나름대로의 방식대로 풀어 쓴 것일 뿐입니다. 실제, 삼국유사의 단군이야기는 고기, 위서, 본기 등 이전 사서들을 인용하면서, 그 용어를 스님인 일연이 사는 고려시대에 맞게 수정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신화는 시대적 이데올로기를 반영하는 것으로 신화구조 자체로 판단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상식을 일본학자들이 부정하고 있습니다. 단군설화는 <천강신화> - <인수교혼> - <단군의 탄생>이라는 3개의 에피소드 구조로 형성된 하나의 스토리입니다. 이것은 설화 구조 속에서 그 당시 사회상을 파악하고, 이야기를 읽어가면서 민족적 기원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지침서일 뿐입니다. 이것을 액면 그대로 곰과 호랑이가 쑥을 먹었다라고 이해해 버리면, 설화 속에 숨어있는 역사적 맥락은 전혀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4. 단군이야기는 역사적인 증거가 부족하다.

단군이야기의 가장 큰 문제점은 현재, 그 역사성의 고증 문제입니다. 단군의 건국은 기원전 2333년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실학자인 이익 등이 <단군의 연대는, 중국 고대 태평성대 시기의 요, 순 전설시대와 맞먹는 것이다>라는 주장에 부합하기 위해 내세운 연대인데요. 실제, 중국에서는 전설 시대인 황제, 곡, 요, 순, 하나라 시대를 자신의 역사라고 주장하지만, 하나라 정도까지만 역사적으로 밝혀졌습니다. 우리 역시 단군의 역사성이 아직 확연히 드러나지 못하였음은 중국가 마찬가지네요.

학교 교과서에서 우리는 청동기 시대의 상한선을 기원전 10세기라고 배웁니다. 어떤 역사학자도 청동기를 기원전 2333년까지 보진 않습니다. 그 정도 상한선의 유물은 발굴된 적이 없으니까요. 즉, 우리 민족과 관련된 청동기는 아무리 올려잡아도 고조선 건국기까지 나오지 않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삼국 정립기에야 겨우 고대 시기가 정착되었다고 말하며, 고조선은 고대 국가가 아니라 석기를 쓰는 원시국가였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결국, 우리가 단군신화에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것은 발굴되지 못한 청동기 유물의 부족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고고학적 기술은 아직도 수준이 낮고, 지금까지 발굴된 것도 풍납토성 등 아주 초보적인 유물만 발굴되었습니다. 더 깊이 말하자면, 우리는 확실한 역사적 근거로 우리 역사를 복원해야 하는데, 현재 수준이 그렇지 못한 관계로 알 수 없는 역사는 비워두고 있는 실정입니다. 비어있는 부분의 역사가 많다보니 고대사에 대한 각종 루머들이 너무 많습니다. 단군시대의 족보가 나돌기도 하고, 단군시대 한반도 남부에는 전설의 고대 국가가 있었다고 까지 주장하기도 합니다. 실제, 한국사에서는 단군의 고조선 시기 남쪽 진국이라는 국가에 대해서는 교과서에 설명조차 없습니다. 그 때 남쪽 진국은 고조선과 무역을 했다면, 뭔가 수준있는 국가였을텐데요. 우리는 단군조선이 중국 요임금기에 건설했다는 사실을 부정해서도, 긍정해서도 안된다고 봅니다. 중국에서도 증명되지 않은 전설시대인만큼, 우리 역시 차분히 다 연구하고 조사해서 진실이 숨겨져 있는 역사적 자료들을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단군왕검을 보통 해석할 때, 단군은 제사장으로, 왕검은 정치적 수장으로 이해하여 제정일치의 군장 칭호라고 보통은 여기죠. 그러나 우리 고대사가 거의 가설 수준이듯 이것도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한국고대사는 역사적 사실을 확실한 근거를 제시하여 이야기 하기에는 너무 자료가 빈약합니다. 사람들이 고대사를 놓고 소설을 쓰는 이유가 이 증거의 부족때문이죠.

5. 단군이야기의 기록들과 주요 내용들

단군설화는 삼국유사에 나오지만, 삼국유사 역시 단군 설화를 고대 사서에서 인용하였습니다. 고기, 본기, 위서 등에서 인용하였음을 제시하면서 이야기가 전개되죠. 중국 사서인 위서가 단군의 존재를 주장한다면 사실일 가능성이 무척 높습니다. 그러나 위서는 지금 중국에 남아있지 않고, 안타깝게도 소실되었습니다.

제왕운기의 본기에서 단군설화는 삼국유사랑 조금 다릅니다. 삼국유사의 단군이야기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그 이야기이고, 제왕운기는 단군설화를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 차이점만 보죠.(일연은 스님이교, 이승휴는 유교영향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상기하면 그 차이점이 이해됩니다.)

제왕운기에서는 환웅과 웅녀가 아니라, 단웅천왕의 손녀와 단수시이 결합하였다고 말합니다. 환웅은 단군과 연결시켜 단웅이라 적었습니다. 유학자들은 중세 유교적이고 합리적인 역사관을 추구하였던 사람들이다보니, 사람이 곰에서 태어났다는 말을 그대로 적지 않고, 좀더 현실적으로 각색한 것입니다.

이러한 단군이야기는 그 시기나 저자에 따라 조금씩은 달라집니다. 조선시대 응제시주, 세종실록 지리지, 동국여지승람의 단군신화가 각각 조금씩 명칭이 다릅니다. 그러나, 단군이야기의 존재나 사실성을 부인하는 내용은 없습니다.

중국 산둥성의 무씨 사당은 단군신화가 중국내에서도 존재하였다는 것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유적입니다. 그 벽화에는 삼부인이 등장하며, 풍백, 운사, 우사가 보이고, 곰과 호랑이가 등장합니다. 이 무씨사당은 기원후 2세기에 제작된 것이니, 이 무렵 단군설화의 골격이 되는 이야기는 이미 고대부터 존재하였고, 이런 기원의 설화를 가진 민족들이 시베리아 남부, 중국 대륙 일부, 한반도에 널리 분포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치우설화에서도 단군과의 연계성이 잘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 내용은 다음 책을 참조하여 서술해보겠습니다. (뿌리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 1권, 솔출판사 참조)

치우는 중국 3황 5제 중 맏형격 되는 황제가 신농씨를 정벌할 때 살았던 인물입니다. 용어하도와 산해경을 보면, 치우의 근거지는 난하유역이라고 하는데, 이 지역은 훗날 고구려인인 맥족 세력의 근거지입니다. 참고로 제시한 책을 보면, 치우 형제가 81인이라는 기록은 치우 세력이 형제적 질서를 가졌음을 보여주는데, 후대 고구려의 간등이 형, 대형 등 형계열의 조직과 유사합니다. 또, 고구려 말로 무신을 주류라고 하는데, 이것이 치우라는 어원이 되었다고도 주장하네요.(좀 신방성 없어보이긴 합니다. 대한민국 최고 교수님들이 이런 상상력으로 주장을 전개하시다니...)

치우설화에서는 풍백, 우사 등이 보이는데, 풍백은 공기, 우사는 물과 관련된 농경사회의 개념이라고 합니다. 특히 운사는 번개, 벼락 등의 개념으로 치우설화에서 빠진 것을 단군설화에 넣은 것이라고 하는데, 이 운사는 벼락의 개념을 통해 당시 사회가 공식적으로 형벌을 부과할 수 있는 국가 사회로 나아감을 상징한다고 합니다.(이것도, 좀 이해가 안가기는 합니다만.... 최고 교수님들이 쓴 것이니... 그런가보다하고 이해합시다.)

여기까지 제가 정리할 수 있는 단군이야기를 쭉 한번 적어보았습니다. 이제 단군신화는 그만 넘어가고, 실제 역사로 잠입해보죠... 고조선 역사로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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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기시대로 이행 - 간단히 핵심 요약

1. 철기사용과 그 시대적 특징 - 간단히 다루기...

철기시대의 특징은 철기는 청동기와는 다르게 구하기 쉬웠고, 두루 쓰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 철기를 이용하여 농업생산력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고, 논농사가 전국적으로 실시됩니다. 또, 철제무기를 통한 전쟁이 증가하고, 이것은 사회 분화를 촉진시켰다는 점도 중요하죠.

철기시대에는 해상활동세력, 대장장이(철기제조 기술을 가진 자), 상업세력 등이 각자 지역을 기반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이렇게 지역별로 이루어진 국가들이 철기 시대 초기에는 아주 많았죠. 삼한 70여국이라는 말에서만 보아도 이 당시 국가 숫자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수많은 국가들은 서로 정복전쟁을 통하여 집단간 계급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전쟁에 진 자들은 노예가 되어 사회 내부적인 계급이 상당히 분화됩니다. 즉, 제가, 호민, 하호 등 계급이 나뉘고, 정치와 제사를 지내는 군장 및 종교 세력등이 성장하는 등 중층적 질서가 보다 견고해지는 것이지요.

한반도에서 철기가 도입된 것은 위만조선시대라고 보통 말합니다. 위만은 본래 조선을 다스리던 준왕을 한반도로 몰아내고, 새로운 기술인 철기제조술을 이용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성립하려고 하였습니다. 원래 고조선에는 <경>이라 불리는 관리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독자적 봉건세력을 뜻합니다. 그러나 위만은 봉건세력들을 통합하기 위해 새로 <상>이라는 칭호를 내려줍니다. 상은 지방 봉건세력을 중앙 관료로 흡수한다는 뜻의 관직명입니다. 그러나 봉건세력들은 <경>이라는 칭호 앞에 <상>이라는 칭호를 붙여 씀으로서 그들이 관료이지만 독자세력임을 과시합니다. <조선상 역계경>이라는 사료의 호칭은 가장 유명하죠. 조선상 역계경이 왕과의 마찰로 자신의 세력 2000호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가 버린 사실은 유명한 사료입니다.

고조선이 멸망한 후 철기 국가들은 구심점을 잃고, <간>, <가> 등을 칭하면 독자적인 국가를 세웁니다. <간>, <가> 등은 왕을 뜻하는 우리말입니다. 후에 이 명칭은 더 큰 나라에 복속된 소국의 군장세력을 뜻하는 말로 의미가 바뀌게 되죠. 북방의 이러한 독자적인 작은 소국들은 개마국, 구다국, 비류국, 옥저국, 동예국 등 수가 엄청 많았는데, 대부분 고구려에게 흡수됩니다. 훗날,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은 이러한 소국들의 간, 가 들을 자국의 세력으로 끌어들어 강대한 국가연합을 이루면서 대립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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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인의 복식

그들은 공식 모임에서 모두 비단에 수를 놓은 의복을 입고 금과 은으로 장식한다. 대가와 주부는 머리에 책을 쓰는데 중국 책과 비슷하지만 뒤로 늘어뜨리는 부분이 없다. 소가 절풍을 쓰는데 모양이 고깔과 같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구려 -

사람들은 모두 가죽으로 만든 관을 쓰는데, 사인은 새 깃을 꽂으며 귀인은 관을 붉은 비단으로 만들어 금은으로 장식한다. 옷은 소매가 큰 적삼과 통이 넓은 바지를 입으며, 흰 가족띠에 노란 가죽신을 신는다. 부인은 치마와 저고리에 선을 두른다.

- 수서 동이열전, 고려 -

왕은 5채로 된 옷을 입고 흰색 나관을 쓰며, 가죽띠에는 모두 금테를 두른다. 대신은 푸른색 나관을 쓰고 다음은 진홍색 나관을 쓴다. 나관에는 새깃을 둘 꽂으며 금테와 은테를 섞어 두른다. 저고리는 통소매이고 바지는 통이 넓으며 휜 가족띠에 노란 가죽신을 신는다. 서인은 거친 털로 만든 털옷을 입고 고깔변을 쓰며, 여자는 머릿수건을 쓴다.

- 신당서 동이열전, 고구려-

풍속은 깨끗한 것을 좋아하고 몸가짐을 소중히 여겨 (어른 앞에서는) 종종걸음을 해야 공경한다고 여긴다. 절을 할 때는 다리 하나를 펴서 끌었으며 서 있을 때는 대개 반공을 한다. 걸어다닐 때는 꼭 소매에 손을 넣고 다닌다.

- 북사 열전, 고려 -

사료해석 : 고구려인의 생활은 사료보다는 벽화를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역사사진방이나, 검색사이트에서 고구려 복색 사진을 더 보시면 확실하실 겁니다.

인물과 풍속을 그린 고분 벽화에서 고구려인의 생활상을 더 자세히 엿볼 수 있습니다. 고구려 벽화에는 특히 씨름, 사냥 전투 등의 그림이 많은데, 고구려인의 호전성과 진취성을 볼 수 있다고 교과서에 나와있죠. 또 귀족들은 주변에 다양한 종자를 두고 화려한 생활을 하였으며, 잘 꾸민 실내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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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식읍

왕이 군사를 삼도로 나누어 급히 치니 위군이 요란하여 진을 이루지 못하고 낙랑에서 물러갔다. 왕이 나라를 회복하고 공을 논할 때 밀우와 유유를 제일로 삼아 밀우에게는 거곡, 청목곡 등을 사여하고 유옥구에게는 압록, 두눌하원을 사여하여 식읍으로 삼게 하였으며, 유유에게는 벼슬을 더 주어 구사자로 삼고 아들 다우는 대사자로 삼았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 -

모용외가 쳐들어오자 왕은 신성으로 가서 적을 피하고자 하여 나아가 곡림에 이르렀다. 그 때 신성재인 북부 소형 고노자가 500기를 거르리고 왕을 맞아 적을 세차게 치니 모용외가 지고 말았다. 왕은 기뻐하면서 고노자에게 대형의 벼슬을 더하고 곡림을 하사하여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봉상왕 -

선비는 앞뒤로 적을 맞게 되어 계책과 힘이 다하니 투항하여 속국기 되었다. 왕은 부분노의 공을 생각하여 식읍을 내려 상주려 하니 부분노가 사양하였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명왕 -

명림답부가 천여 기병으로 추격하여 좌원에서 한군을 물리치니 한 마라의 말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여 답부에게 좌원과 질산을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신대왕 -

사료해석 : 식읍과 녹읍에 대한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7차 교과서는 식읍, 녹읍 모두 지역단위로 토지를 지급한 것으로서 그 영내의 인신적 지배가 가능하였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최근 논의에서 소장학자들은 식읍은 지역적 지배가 맞으나, 녹읍은 면적단위의 수조권적 지배라는 입장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즉, 사료를 보면 공신에게 압록, 거곡 등 지역단위로 토지를 하사하고 있습니다. 공신의 대부분은 전쟁 공신이 많구요. 고대사 자료방에 들어가서 식읍, 녹읍에 대한 논쟁을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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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와 부체제

건안(建安) 연간에 공손강(公孫康)이 군대를 보내어 고구려를 공격하여 격파하고 읍락을 불태웠다. 발기(拔奇)는 형이면서도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연노부(涓奴部)의 가(加)와 함께 각기 하호 3만 여명을 이끌고 강(康)에게 투항하였다가 돌아와서 비류수(沸流水) 유역에 옮겨 살았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구려 -


자료 참조 : 고구려의 대가에 대한 사료입니다. 발기는 스스로 하호를 가지고 있었고, 스스로 영역을 옮겨 살았습니다. 초기 고구려 사회가 중앙집권이 되기 전에 부체제 상태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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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국가들의 생활

고구려에는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고 평원과 연못이 없어서 계곡을 따라 살며 골짜기 물을 식수로 마셨다. 좋은 밭이 없어서 힘들여 일구어도 배를 채우기는 부족하였다. 사람들의 성품은 흉악하고 급해서 노략질하기를 좋아하였다. 동이의 옛말로 부여의 별종이라고 한다. 그 국가의 대가는 힘써 일하지 않으며, 앉아서 일하지 않는자가 만여구나 된다. 하호는 멀리서 곡식과 소금과 물고기를 그들에게 공급한다.

부여에는 구릉과 넓은 못이 많아서 동이 지역 가운데 가장 넓고 평탄한 곳이다. 토질은 오곡을 가꾸기에는 알맞지만 과일은 생산되지 않는다. 사람들 체격이 매우 크고 성품이 강직 용맹하며 근엄하고 후덕하여 다른 나라를 노략질하지 않는다.

옥저는 군왕이 없이 계속 읍락이었는데, 그 이름이 장수 등의 명칭이 있었다. 그 토지는 비옥하고 배산항해(산을 등지고 바다가 있어)하여 당연히 과일이 나곤 한다.

동예는 산천을 중시하는 풍습이 있어 신천을 경계로 각각을 구분하며, 함부로 들어가지 않는다. 부득이 들어갈 경우에는  소나 말로 배상하여야 한다. 동성끼리는 결혼하지 않았다.

모든 국가는 각각 별도의 읍이 있었는데, 이 명칭을 소도라 하였다. 큰 나무를 세우고 북을 두들이며 귀신의 일을 보았는데, 설사 죄인이 이곳으로 도망치더라도 모두 잡아올수 없었다.

                                                                                         - 위지 동이전  -

사료해석 : 같은 초기국가라고 하여도 고구려와 부여를 보는 관점이 다른건 중국 시각에서 우리 국가를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 사료는 우리 입장에서 다시 해석해야할 여지가 많죠. 정말 고구려인들은 흉악범이고, 부여인들은 천사같았을까요?

고대사는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사료를 해석할 때, 역사적 상상력을 많이 동원해야 하고 사람들마다의 해석도 많이 다릅니다. 제 해석도 제 관점에서의 해석이지 다른 사람들은 다른 해석이 나오겠지요. 너무 익히 알려진 사료들이라 해석은 생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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