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편>

16화. 고구려의 불교 이야기

1. 불교가 원시 신앙을 대신하다.

자, 이번 회부터의 불교 이야기는 우리 역사 속의 불교 이야기이다. 그럼 시작해볼까?

한반도의 불교 이야기는 인도나 중국 이야기처럼 재미있는 일화로 구성하기가 힘들다. 특히, 고대 불교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해동고승전 등 일부 자료와 중국측 기록 외에는 남아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가 불교 이야기를 적더라도 거기서 거기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감안해야 한다.

일단, 삼국유사에 따르면 불교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에 전진왕 부견이 승려 순도를 통해 불상과 불경을 전파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2년 뒤 아도화상이라는 스님이 다시 건너오자 성문사에 순도를, 이불란사에 아도를 머물게 하여 불법을 전수받았다고 말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첫 번째 이야기는, 고구려에 전해진 불교가 372년이라는 점에서 추론할 수 있다. 372년은 전진왕 부견이 불도징을 초빙하여 불교가 뭔지를 간신히 깨닫고 있던 시기였다. 아직 도안, 구마라습 등은 불도징의 초빙조차 받지 못한 시기였다.

참고링크 : 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 6화. 현학, 청담에서 시작된 격의 불교 이야기

따라서, 고구려에 전해진 불교는 불교이론이 확립된 도안이나, 구역경을 번역한 구마라습의 시기가 아니라 초기의 원시적인 불교였다고 볼 수 있다. 즉, 주술로 꽃을 피우거나, 도교의 신선 이야기로 부처의 이론을 설명하는 격의불교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불도징, 도안, 구마라습 이야기는 위 6, 7 화 링크를 참조하기 바란다.)

다음으로 주목해야 할 점은, 이런 수준 낮은 불교를 왜 국가가 도입했느냐는 점이다. 그 이유는 고대 민간 신앙에서 추론해볼 수 있다.

고구려 초기의 민간 신앙은 상당히 다양했다. 특정 부족신을 숭배하는 부족신 신앙, 동물을 숭상하는 토테미즘, 다신교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정령숭배사상(애니미즘), 주술사를 통해 하늘과 지상을 이어준다는 무격 사상(샤머니즘) 등이 여기 저기에 존재했다.

다양한 종교 사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만큼 국가 체계가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증거다. 국가에서는 주몽이나 유화부인을 숭배하는 사상(시조신 숭배)을 강조했지만, 각 지역별로 다양한 민간 신앙이 존재했다. 이러한 민간 신앙들은 종교적 역할 뿐만 아니라 일반민들의 사회생활을 지배했고, 심지어 국가가 아닌 지역 공동체에 대한 충성심마저 유발하는 것이었다.

당시 백제에 의해 고국원왕이 죽고, 중국 북조의 압박으로 정치적 입지가 약해진 고구려의 왕실은 부족 통합을 위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불교는 그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알맞은 것이었다.

2. 전진왕과 소수림왕의 정치적 거래

소수림왕 때 들어온 불교는 사실 제대로 된 석가모니의 참 뜻을 이해하기 힘든 불교였을 것이다. 전진왕 부견도 불교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스님은 전쟁의 수호신이거나, 불법으로 국가를 지켜주는 주술사> 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불교를 왜 고구려가 받아들였을까?

첫 번째 이유는, 불교가 이미 고구려 민간 신앙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국가적으로는 소수림왕 당시 불교가 전파되었지만, 민간에서는 이미 불교 신앙이 전파되어 있었다. 해동고승전(석망명전)에는 이미 청담사상가들이나 격의불교를 이해하고 있는 중국 고승들이 고구려 불교인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왕래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기록은 고구려인들이 신선 사상과 불교 사상을 이미 접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두 번째 이유는, 소수림왕의 왕권 강화를 위한 사회적 구심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소수림왕은 태학 설립, 율령 반포 등을 통해 중앙 집권 국가로 나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국왕이 신성하다는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이전보다 약화되어 있었다. 고조선부터 전해내려온 제천의식은 더 이상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동예의 무천, 부여의 영고와 같이 대부분의 군장국가부터, 고구려 내부의 각 부족까지 모두 제천의식을 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신사상과 다른 새로운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위해 불교의 수용은 필요했다.

마지막 이유는, 소수림왕의 대외 정책 때문이었다. 소수림왕은 국가안정을 위해 전진왕 부견과의 화해가 필수적이였다. 전진왕 부견은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 고구려와 화해가 필요했다. 소수림왕은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기 위해 그동안 적이었던 중국 북방의 전진왕과 손을 잡았다.

이것은 중국 북방과 동아시아 북방이 화해를 함으로서 각각 자신들의 영토를 통일할 기반을 마련하고자 한 획기적인 외교적 전환이었다. 이제, 이들은 치고 받고 싸우지 않는다. 그 결과 소수림왕의 후대에 광개토대왕, 장수왕, 문자왕이 동북아를 평정할 수 있는 외교적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3. 격의 불교와 호국불교

고구려 초장기 민간에서는 불교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천신 신앙이나, 신선 신앙으로 불교를 이해하려고 햇던 듯 싶다.

이제 주술사(샤먼)의 역할은 스님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명칭만 바뀌었을 뿐 스님이 곧 샤먼이었다. 스님이 손으로 마법을 부려 백성들을 치유하거나, 전쟁에서 수호신 역할을 한다는 믿음은 전진왕 부견 시대의 <불도징>이 불법을 전파하기 위해 활용했던 전략이었다.

주술사들의 웅얼거림과 마법적인 이야기들은 그대로 스님들의 이야기로 전해졌고, 그것이 스님들과 관련된 <향가 이야기>로 전해졌다. 부처와 보살, 미륵을 제대로 구분할 방법이 없었던 고구려에서는 보살을 산신령으로, 미륵을 하늘에서 내려온 지배자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절은 원시신앙에서 제천의식을 행하던 신성한 자리에 건립되었고, 전통적 재래신과 보살은 구분이 애매하였다.

특히 고구려는 산신령이나 도사와 같은 <도가 신앙>이 초기부터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도교 사상으로 불교를 이해하는 격의 불교가 쉽게 전파되었다. 부처의 <색즉시공>은 노자의 <무위자연>으로 이해하였고, 불교의 <해탈, 열반>은 도가의 <신선>으로 이해하였다.

반면 지배층은, 불교를 지배 이데올로기로 활용하는 중국 방식을 철저히 응용하였다. 특히, 불교에서 강조하는 윤회설, 업설 등을 묶어 <인과응보>로 정리하여 지배층의 우월함을 강조하였다.

특히 <업설>은 전생의 행위에 따른 윤회를 강조한 것으로 국왕의 신성함을 극대화 시켰다. 국왕은 전생에 높은 공덕을 쌓았기 때문에 만민의 지배자로 다시 태어났다는 논리를 강조했다. 왕은 곧 부처의 화신이며, 귀족들은 왕을 도와 불국토에서 안락을 누릴 미래의 보살들인 것이다. 노예들은 전생의 악덕함 때문에 현실의 고뇌가 시작된 것이므로 누군가를 탓해서는 안되는 신분이 되었다.

또 하나 왕권 강화를 위해 제시한 것은 <연기설>이다. 연기란, <인연>을 말하는 것으로 불교에서는 모든 만남은 이전의 원인과 결과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내가 누군가와 만난 것은 수십만개의 인연이 돌고 돌아 이루어진 것이다. 즉, 모든 현상은 홀로 이루어진 것이 없으며, 상호 관계 속에서 돌고 돌아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개체는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사실 우주 안에 살아가는 수많은 현상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어떤 원인이 없었으면 지금 너와 나의 만남이란 없다. 따라서 모든 사물은 전체 속에 포함되어 움직이는 것이다.

이것을 왕권에 대입하면? 모든 개인은 국가 속에서 활동하며, 국가의 흥망이 개인의 운명을 좌우한다. 모든 부족들도 왕권이라는 공동 운명체 속에서 인연을 만들어 갈 뿐, 독단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결국, 개인과 부족이라는 개체를 떠나 초부족적인 통합의 법(다르마)이 존재한다. 따라서 국왕의 행동과 국가의 율령은 모든 개체들의 운명을 위해 절대적인 것이 된다.

이것이 고구려의 초기 불교 이념이었던 것이다.

4. 광개토대왕과 불법

광개토대왕, 장수왕, 문자왕은 고구려 최전성기의 3대 태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왕들은 모두 불법의 수호자였다.

소수림왕이 불교를 받아들인 후 다음 왕은 드라마 태왕사신기에 나왔던 <고국양왕>이다. 고국양왕은 소수림왕이 불교를 받아들인 참 뜻을 깨닫고, 광개토(담덕)에게 <불교를 받들어서 복을 구해야 한다>는 충언을 하였다.

광개토대왕은 선대 왕들의 유지를 깨닫고 불교를 통한 국가 보호 사업을 추진하였다. 광개토대왕 2년에 평양에 9개의 절을 지었는데, 그 이유는 선대 왕들을 끊임없이 괴롭히던 강력한 백제군을 부처님의 가호로 막겠다는 뜻이었다.

평양은 남방으로 내려가는 길목이자, 백제군과 계속적인 전투를 벌었던 요지이다. 또 고조선의 수도이자, 대동강을 통한 국제 무역의 공식 루트였다. 광개토대왕의 불심으로 미루어 북방에도 많은 절들을 건립했을 것이지만, 기록에 없으므로 생략하기로 한다.

단, 당시 5세기의 불교는 구마라습의 구역경이 번역되어 전파된 시기이기 때문에, 국왕이 곧 부처라는 북조의 <왕즉불>사상이 전파되었음은 예측할 수 있다. 광개토대왕도 불법의 수호자이자, 자신이 곧 전륜성왕이라는 이념을 생각했을 것으므로, 세계 지도자로서의 불법왕을 생각해보았을 것이다.

5. 장수왕과 불교 첩보전

광개토대왕이 북방으로 영토를 넓혔다면, 다음 왕인 장수왕은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기 위해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고 남진정책을 실시한 왕이다. 장수왕 때에는 불교에 관련된 재미있는 고사가 나온다.

장수왕이 백제에 보낼 간자(첩자)를 찾고 있었는데, 승려 도림이 자발적으로 첩자가 되겠다고 했다. 도림은 고구려에 큰 죄를 짓고 망명한 스님으로 위장하여 백제 개로왕에게 접근을 한다. 개로왕이 바둑을 좋아하자 도림은 왕의 바둑 친구가 되어 왕의 신임을 얻는다.

도림은 개로왕에게 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거대한 건축 사업을 제안한다. 궁궐 보수, 왕릉 개축 등을 위해 백성들을 징발하여 화려한 건물을 짓도록 한 것이다. 이 사업으로 백제의 창고는 비게 되고, 백성들은 고된 노동을 하게 되면서 국가를 원망하게 되었다. 도림은 장수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고, 장수왕은 총공격을 실시하여 백제 수도를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죽였다.

즉, 스님이 첩보활동까지 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몇가지 고구려 불교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

먼저, 불교 스님이 불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국왕을 위해 헌신한다면서 간첩질까지 한다는 점이다. 초기 고구려의 불교가 얼마나 국가 권력에 종속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또, 국가를 지키기 위해 백제의 백성들을 궁지에 몰아넣은 것은, 불교 자체가 성숙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중생 구제라는 참 뜻 조차 파악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두 번째로 불교 전파를 신라가 크게 반대한 이유도 설명이 된다. 신라에서 이차돈의 목까지 잘라가며 불교를 믿으라고 절규할 만큼 불교가 전파되지 못한 점 중 하나가 이런 <불교를 이용한 침략작전> 때문일 수도 있다.

물론, 불교를 전파받는 국가의 지배층은 새로운 사상 자체가 기득권을 흔들 수 있기 때문에 반대한다. 그러나, 그 이유로 <불교라는 종교가 기존 사회체제를 흔들기 위한 선진국가의 함점>이라고 항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이야기는 삼국사기에 나온다.)

6. 장수왕 이후 불법의 참뜻을 파악한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까지의 불교가 왕권에 휘둘리던 호국 불교였다면, 그 이후의 고구려 불교는 진정한 불교의 뜻을 파악하기 시작한 <종파 불교>였다.

부처의 진정한 뜻을 탐구하고자 노력한 고구려 스님들의 노력은 장수왕 말기 <승랑>에서 시작된다.

승랑법사는 중국에서 구마라집이 인도불경을 번역하여 불경의 참 뜻을 해석하자 그의 경전을 읽으면서 불법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북위로 건너가 중국 대승불교의 참 뜻을 연구하였다.

춘추전국시대

위진남북조

5대10국

BC770 -

BC221-

BC206 -

265 -

581 -

618-

907 -

960 -

혼란기

통일기

통일기

혼란기

통일기

통일기

혼란기

통일기

제가백가

법가

유가/불교유입

격의 불교

종파형성

종파불교

유교중흥

유학완성

 

그는 특히 반야(지혜)가 무엇인가를 연구하는 <성실종>을 연구하면서 인도 대승불교의 창시자인 용수의 반야사상을 연구하였다. 그가 연구한 학문을 <삼론학>이라고 한다.

삼론종 7대조 : 구마라집 - 승조 - 법도 - 승랑- 승전 - 법랑 - 길장

특히 승랑은 중국의 성실종과 달리, 오로지 순수한 인도의 대승불교만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삼론종의 계보를 잇는 7대 대사로 이름을 날렸다.

삼론학파란?

중론, 백론, 십이문론의 3가지 이론을 내세우는 불교 학파.

이들은 모든 사물은 원래 실체가 없다는 공(空) 사상을 주장하기 때문에 중관학파(공사상 학파)로 분류된다. 아무 것도 없다는 3론은 다음으로 정리해 본다.

1론 :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집착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집착하지 않는 것이 곧 진리이다. 집착은 언어가 만들어낸 허구적 형상이므로, 결국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불법의 최고 단계이다.

2론 : 만물이 실제한다는 것과 실체가 없다는 것도 언어에 의한 말장난일 뿐이므로, 어느 한쪽에 치우침 없이 중도를 걸어야 한다.

3론 :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탄생도, 소멸도, 영원도, 순간도 없다. 하나도 아니며 여럿도 아니다. 오는 것도 아니며 가는 것도 아니다. (팔부중도)

삼론종은 성실종에서 주장했던 <마음으로 인식하여 언어로 표출>한다는 인식론을 아무 것도 없다는 공 사상으로 체계화하여 정리하였다. 이 삼론종은 중국보다는 고구려에서 더 활성화 되었는데, 수나라 때 길장은 삼론종 7대사에 들어가며, 제자인 혜관은 일본 삼론종을 개창하였다. 이 삼론종은 훗날 법성종으로 불리며 명맥을 이어간다.

반면, 공 사상과 별도로 <유식> 사상을 주장한 이들도 있었다. 중국에서 유식학을 공부한 원측은 눈에 보이는 <본질>이 실제 존재한다는 이론을 주장하였다.

모든 것은 실체가 없는 것인가, 눈에 보이는 본질이 존재하는가의 문제는 <공유논쟁>으로 학문적 논쟁을 야기시켰다. 비록 고구려 불교 교단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지만, 불교 자체가 왕권을 벗어나 스스로 발전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7. 승군으로 활약한 고구려의 불교 교단

점차 독립적인 불교 교단으로 발전한 고구려의 불단은 국가 위기 상황에서 큰 힘을 발휘하였다.

불교에서는 불법을 연구하는 교단도 국가의 위기 상황에서는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관례가 되어있다. 신라 원광 법사의 세속오계, 고구려 불법 단체들의 몽골 항쟁, 임진왜란 등에서 보여준 스님 의병들의 모습이 대표적인 예이다.

불교 단체가 <호법>이라는 이름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이유는 2가지이다.

첫 번째 이유는, 이 땅이 국왕의 땅이기 이전에 진리를 연구하는 불국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처의 땅을 지키기 위해 외적은 반드시 물리쳐야 한다는 호법 사상이 있는데, 이것을 정의를 지키는 정법(다르마 : Dharma)라고 한다.

두 번째 이유는, 국가가 불법을 보장하고 지켜주는 한 불법이 펼쳐지고 있는 국가를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 때문이다. 불법의 <연기설>에 의하면 국가가 없으면 불법도 없다. 국가가 불법을 인정한다면 불교 교단은 국가의 위기에서 국가를 지켜야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고구려에서도 국가의 위기 때 직접 전장에 뛰어든 스님들이 있다.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 우리는 살수대첩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 때, 7 승려들이 살수(청천강) 위를 홀연히 걸어갔는데, 수나라 병사들은 스님들의 행동을 보고 물이 얕다고 생각하여 청천강을 건너기 시작했고, 그 결과 수 많은 군사들이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그 이후 7 스님의 동상을 세워서 공적을 칭송한 절이 바로 <칠불사>이다. (동국여지승람)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 고구려 스님 3만명이 당 군대와 치열하게 항쟁하여 물리친 기록도 있다. (고려서 열전 외전)

그러나, 실제 남아있는 기록 및 유물과는 다르게 삼국사기에는 이러한 기록들이 모두 생략되어 있다. 따라서 몇몇 사료와 남아있는 사원 등을 통해 짐작해 볼 수밖에 없다.

8. 번성한 고구려의 불교와 쇠퇴 과정

점차 독립적으로 발전하게 된 고구려의 불교는 일본에 전파되었다.

혜편은 일본 불교 최초로 비구니를 양성하였는데, 선신, 혜선 두 일본여인을 가르쳐 출가시켰다고 한다. 혜자는 고구려의 공식 사절로서 쇼토쿠 태자의 스승으로 활약하다고 귀국하였는데, 지금도 호류사에는 혜자법사 상에 존경의 예를 표하고 있다.

담징은 법정과 함께 불교와 더불어 종이, 먹 등의 기술을 전파하였고, 호류사의 금당 벽화를 그렸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1949년 화재로 벽화가 타 버린 이후 재현된 모사 벽화에는 담징에 대한 일체의 언급을 빼 버렸다.

혜관은 일본 2대 승정이 되었고, 도현은 일본세기를 저술하였으며, 승륭, 운총 등은 일본 사절로 일본을 방문하여 많은 문물을 전파해 주었다.

그러나 5-6세기 전성기를 맞이했던 고구려 불교는 7세기에 급격한 쇠퇴를 맞이하게 된다. 그 이유는 최고 집권자인 연개소문의 불교 탄압 때문이었다.

중국 불교를 이야기하면서 불법이 고유한 철학을 찾아가게 되면 도교나 유가를 이용한 탄압이 뒤따른다는 점을 언급했었다. 우리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시기에 왕권 강화에 이용되었던 호국 불교가 사라져가고, 불교가 독립성을 주장하자 집권자인 연개소문은 중국 당나라에서 유행하는 <호국 도교>를 이용하여 불교를 배척하였다.

그 결과 많은 스님들이 망명하게 되고, 고구려의 불교가 쇠퇴하게 되었다. 특히, 고구려 말기에는 모든 백성들이 부처가 될 수 있으며, 깨달음은 가까운 곳에 있다는 열반종 사상까지 들어오게 되자 탄압은 더욱 심해졌고, 보덕이 개창한 우리식 열반종은 백제, 신라 등 남방 국가로 이전되어 전파되었다.

반면, 북교 교리가 심화되자 불교 교리를 통합하기 위한 통합 종교들도 유입되었다. 중국에서 사상 통합을 위해 활용되었던 천태종, 화엄종 등의 교리가 고구려에 유입되었고, 특히 천태종은 고구려 말기에 불교 통합 사상으로 등장하였다.

고구려는 연개소문 이후, 급격한 국력쇠퇴와 내분으로 멸망하였고, 고구려의 종파 불교도 그 꽃을 다 피우기 전에 사라졌다. 다음 편에서는 백제, 신라, 가야의 불교 역사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고 넘어가도록 하자.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by 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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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13화. 정토종 : 정통 미륵에서 벗어난 아미타 부처

1. 복잡한 인도 철학을 벗어나 민중의 신앙으로...

자, 지금까지 우리는 중국으로 전파된 대승불교 철학을 살펴보았다. 위진시대의 불교 수준은 노자 사상으로 부처를 이해하는 <격의 불교> 수준이었다. 그러나, 인도 대승 불교의 핵심사상이었던 <공>, <반야>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면서 불교와 도교는 선후 논쟁을 벌였고, 그 결과 수, 당의 통일국가에서는 여러 종파 불교가 등장하였다. 그리고, 당나라에서는 많은 종파의 이념을 하나로 묶으려는 화엄종이 성행하였다.

하지만, 이 과정은 모두 <공> 사상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즉, 인도 불교의 참뜻을 알기 위해 철학적으로 불교를 접근한 것이다. 이렇게 <공>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철학적으로 접근한 종파들을 묶어 <교종>이라고 한다.

<교종>은 민중들에게 다가가기 어려웠다. 인도 불교의 참 뜻을 알았지만, 그 복잡한 <공> 사상을 민중들보고 어떻게 이해하라는 것인가? 책 한권 읽을 돈도 없고, 농사짓기 바빠서 경전에 관심을 둘 시간도 없는 이들에게 <교종>의 심오한 철학은 먼 나라 불교였다.

반면에 쉬운 교리와 민간 신앙을 융합하여 백성들에게 쉽게 다가서려고 노력한 종파들이 있었다. 오늘부터 이야기 할 정토종과 선종이 그것이다. 이 종교들은 어떻게 생겨나 민중속으로 파고 들었는지 볼까나?

2. 정토종에서 만날 수 있는 부처 - 아미타

원래 <정토, 선> 등의 용어는 대승불교의 수행방법일 뿐이었다. <선>이란 말 자체가 <깨달음을 얻기 위한 참선>을 뜻한다. <정토>란 <서방극락세계>를 뜻하는 말로 <정토>에 이르기 위한 수행을 강조한 용어였다.

<교종>이란, 정통 교리인 <공> 사상을 체계적으로 접근한 종파를 말한다. 반면 <선종>은 체계적인 <수양방법>을 우선시한 종파를 말한다.

정토종은 넓은 의미에서는 선종이지만, 실제 다른 선종과 수양체계가 완전히 다른 독자적인 <정토사상>을 가진 종파이다. 오늘은 정토종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정토종은 정토삼부경이라 불리는 3권의 경전에서 출발한다.

<무량수경>    <아미타경>    <관무량수경>

이 3권의 경전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사상은 <아미타> 사상이다. 무량수경은 아미타 부처가 되기 전 인간이었던 법장 스님이 아미타불이 되는 과정을 쓴 <드라마>이다. <아미타경>은 아미타불의 세계인 서방극락세계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설명하고, 민중들이 아미타 세계로 가는 방법을 설명한 책이다. <관무수경>은 부처도 아미타 세계인 <정토>을 알고 있었으며, 비구니들에게 수행방법을 가르쳐주었다는 내용의 책이다.

그럼 이 경전에서 공통적으로 말하는 <아미타>는 누구인가? 아미타는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을 하고 있던 인도의 보살승 <법장>을 말한다. 법장은 부처가 되기 위해 서원을 세우고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한 선행을 시작하였다. 부처가 되기 위해 세우는 서원을 <본원>이라 한다.

법장은 많은 중생들에게 착한 일을 해야 부처가 될 수 있었으므로, 48살때까지 48개의 서원을 세웠다. 그 서원들이 곧 서방극락정토의 설계도가 되어 훗날, 아미타 세계의 10만억 국토가 된 것이다. 이 <서방극락세계>는 고통도 번뇌도 없다. 오로지 즐거움과 진리만 있을 뿐이다. 누구든 이 곳에 초대 받으면 끝없는 기쁨 속에서 살 수 있다. 기독교로 따지면 <영원한 구원>을 받은 것이랄까?

<아미타>란 부처의 이름도 <영원한 구원>을 뜻한다. 아미타(阿彌陀)는 원래 아미타바(Amitabha)라는 인도어의 발음으로 <무한>이란 뜻이다. 발음으로는 아미타로 번역하지만, 의미로 해석하면 무량수불(無量壽佛), 무량광불(無量光佛)이 된다. 무량수불이란, <무한 대의 수명을 가진 자>, 무한광불은 <무한 대의 밝음을 가진 자>라는 뜻이다.

자, 법장스님이 깨달음을 얻어 <아미타불>이 되었다. 그가 세운 낙원이 바로 <극락정토>이다. 그 극락정토는 서쪽으로 수천만의 불국토들을 넘어야 겨우 보이기 때문에 서방극락정토라고도 한다. 그런데, 극락정토는 하늘에 있는 도솔천과 달리 지상에 있다.

석가모니가 보살일 때 수양을 했고, 지금은 미륵부처가 설법을 하고 있다는 <도솔천>은 어디일까? 불교에서는 우주의 중심을 <수미산>으로 보고 있다. 그 수미산에서 하늘로 12km 정도를 가면 도솔천이 있다. 그러나, 아미타불의 <극락정토>는 법장스님이 48개의 서원을 세운 그 곳에 있기 때문에 서쪽으로 십만억불의 세울을 지나가면 보이는 것이다. 어짜피 살아 생전에 갈 수 없는 것은 똑같다.

그러나 죽은 뒤 극락에 가는 방법은 <도솔천>에 가는 방법보다 훨씬 쉽다. <도솔천>은 <고급 보살>들이 깨달음을 완성하기 위해 가는 곳이다. 즉, <공>이 무엇인지 알고, 선행을 많이 한 선택된 자들이 간다는 뜻이다. 도솔천은 확실히 <교종>적이다. 그러나, <정토>는 누구나 쉬운 방법으로 갈 수 있는 곳이다. 인간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기본 인성이 있기에 마음 속으로 부처님을 생각한다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극락에 가는 것을 <왕생>한다고 말하는데, 왕생(往生)이란, <가서 태어난다>는 뜻이다. 즉, 가고 싶은 의지만 있다면 누구든 죽은 뒤 그곳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곳에 가장 쉽게 가는 방법은 부처님을 생각하면서 염불하는 것이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이렇게 10번을 외치는 것이다.

3. 말법의 시대를 예고한 정토종의 종말 사상

정토종이 처음 등장한 것은 혼란기인 남북조 시대였다. 남북조 시기는 <공> 사상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어 종파 교단이 성립되어 가던 시기였다. 반면, 백성들은 오랜 전쟁으로 지쳐 쉽고 빠르게 <천국>가는 방법은 없을까 고민하던 시기였다.

혼란기에 민중들이 <천국>가는 방법으로 숭배했던 것은 <도가>였다. 도교는 민중들 사이에 뿌리가 깊었다. 후한말 <황건적의 난>은 도교의 신선술을 숭배했던 <오두미교>의 민중 신앙에서 시작되었다. 전쟁에 지쳐 속세를 떠나고자 했던 청담 사상가들이 나누었던 이야기도 <도가> 이야기였다. 신비한 <도사> 이야기는 민중들의 시름을 달래주며, 새로운 세상의 희망을 주었다.

그 중 가장 흥미로웠던 이야기는 도사들이 천살까지 수명을 누리며, 세상을 유유자적하며 산다는 이야기였다. 천살까지 수양을 마친 도사는 하늘로 올라가 구름과 학을 벗삼아 자유를 누린다. 얼마나 멋진 이야기인가?

남북조 시기, 또 하나 유행했던 사상은 <종말사상>이었다. 중국의 전통 종말사상엔 추연의 <음양오행가> 사상이 들어있다. 세상은 화,목,금,수,토의 오행이 돌고 돈다. 그런데, 이들은 서로 상극이 있다. 화(불)은 수(물)에 의해 제압당한다. 그러나, 수(물)은 토(흙)에 의해 제압당한다. 서로가 돌고 돌면서 상극을 이룬다.

그것을 정치에 도입하면? 앞 왕조에 상극인 새로운 사상의 왕조가 탄생한다. 그러나 왕조의 종말이 되면 또 다시 상극인 새로운 왕조가 탄생한다. 세상은 돌고 돌며 <종말>은 반드시 온다.

그러나, 음양오행에 의한 종말 사상은 한계가 있다. 우주가 계속 돌고 돈다는 원리를 지향히기 때문에, 영원한 종말과 평화는 오지 않는 것이다. 이 한계점을 메운 것이 도교와 불교이다. 도교에서는 왕조가 몰락하고 민중의 세상이 오면 도법이 세상을 지배할 것이라고 말한다.

남북조의 혼란기, 불교는 종말 사상을 <말법사상>으로 체계화시킨다. 말법사상은 불가의 역사를 3단계로 나눠 인간의 종말이 있다는 것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불법이 체계적으로 잡혀가는 시기를 <정법의 시기>, 불법이 유지되는 시기를 <상법의 시기>, 불법이 사라지는 시기를 <말법의 시기>로 분류한다. 원래 3법의 시기를 나눈 것은 철학을 논의하던 <교종>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정토종은 이 말법 사상을 확대하여 <불교식 종말 사상>으로 바꿔 버린다.

자 그럼 정토종의 종말사상을 한 번 볼까?

말법시대는 불법이 사리지고 무법천지가 되는 세상을 말한다. 무법천지의 세상에 무슨 경전이니, 말씀을 논의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필요한 것은 <믿음> 뿐이다. 믿음의 대상은 <인간>이다. 인간의 마음에 부처가 있고, 인간이 부처가 되겠다는 믿음만 있다면, 불법이 있고 없고는 아무 의미가 없다. <믿음>이 있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며, 믿음이 없는 자는 불법이 사라지면서 고통을 받을 것이다.

그럼 누구에 대한 믿음을 보여야 할 것인가? 바로 <아미타>인 것이다. 인간으로서 태어나, 인간을 위해 살다가, 인간을 위해 지상 세계에 천국을 만든 이가 아미타이다. 멀리 있는 천국, 어려운 경전을 공부해야 갈 수 있는 천국이 아니라 모든 <인간 부처>들을 위해 10억만 국토를 준비한 아늑한 천국이 지상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극락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은 간단하다. 어려운 사상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아미타불의 명호를 계속 되새기면서 극락을 꿈꾸는 것이다. 아미타의 후배가 관세음이기 때문에, 아미타 신앙과 아미타를 도와 지상에 온 관세음도 믿음의 대상이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이것이 민중들을 끌어모은 정토종의 가볍고도 명쾌한 불교 진리인 것이다.

4. 미륵과 미타는 뭐가 다를까?

불가에서는 미륵이 인도의 4세기 경에 실존한 인물이라고 말한다(그러나 증거는 없다.) 미륵은 모든 것은 <마음>에 달린 것이라는 유식철학의 시조이다. 전통 대승 철학에서는 공사상과, 반야(지혜) 사상을 가장 중요시 했다. 다른 말로 하면 철학을 <공부>하라는 것이다.

미륵은 그 철학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 지상과 하늘 사이에 있는 도솔천에서 보살로서 수행을 계속하고 있는 미래의 부처이다. 미륵의 제자인 무착은 삼매경에 빠져들어 미륵을 만났고, 그 때 미륵보살은 훗날 민중을 위해 내려올 것이란 믿음을 말하였다.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미륵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내려올 것이다.

원래 세상에 내려와 정의(정법)을 실현하고 민중을 구원할 패왕은 전륜성왕이다. 그 때 미륵은 성왕의 오른팔로서 어려운 세상의 민중을 구원한다는 것이다. 즉, 미륵은 <구원자>인 것이다. 기독교로 따지면, 예수와 같은 존재랄까?

미륵 신앙은 백성들에게 하늘에 있는 <절대자>를 떠올리게 했다. 백성들은 스스로 부처가 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거나 포기했다.

미륵 신앙은 왕과 귀족들이 자기 합리화를 하는데 이용되기도 하였다. 국왕이 전륜 성왕이라면, 신하인 귀족들은 미륵이다. 왕은 곧 부처요. 왕에 대한 충성이 곧 <구원>이라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특히 위진남북조의 혼란기에는 수많은 국가에 국왕이 있었고, 불교의 미륵 신앙은 왕권 강화에 이용되기도 했다. 불교가 본 뜻을 주장하면서 반론을 제기하면 국왕은 불교를 금지시키는 <폐불>을 일삼았다. 불교, 도교, 유교라는 종교의 세력 균형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불교의 심오한 참뜻이 이해되면서 미륵신앙의 정치적 이용도 줄어들었다. 대신에 지배층이 직접 하늘로 올라간다는 새로운 미륵 신앙이 생겨나기도 한다.

위진남북조 시기에 미륵이 구원하러 내려온다는 사상을 <하생 미륵신앙>이라고 해보자. 통일국가인 수, 당 시기에 미륵이 되서 올라간다는 사상을 <상생 미륵신앙>이라고 하면 되겠다.

<상생 미륵신앙>은 불교의 참 뜻을 이해하면서 생긴 기이한 현상이다. 지배층은 스스로가 미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현생의 보살>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마음을 닦고 수양을 하면 훗날 미륵이 되어 <도솔천>에 올라간다고 생각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지배층>이 올라간다는 점이다. 일반 불신도들은 귀족들이 <보살 출신>이라고 믿어야 했다. 어찌되었던 <교종>의 철학은 지배층의 철학이었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민중들이 직접 부처가 될 수 있으며, 부처가 될 방법까지 상세히 알려준 것이 바로 <미타신앙>이었다.

귀족들처럼 경전을 읽을 시간도 없고, 심오한 불교 철학이 뭔지도 모른다. 그냥 <마음> 자체로 부처가 될 수 있으니 <나미아미타불>을 외치면 되는 것이다. 무량수경에는 <아미타불을 10번 외우라>는 구절이 있다. 이 10번의 정성스런 외침이 반복되면 <극락정토>의 문이 열린다. 아미타는 10억단위의 극락을 준비해놓고 모든 민중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다. 요즘으로 따지면, <우리 행복하게 잘 살께요>만 외치면 모든 국민에게 아파트 무료 분양을 해주는 것과 같다.

마음을 염(念)이라고 한다. 마음으로 부처를 생각하는 것을 염불(念佛)이라 하며, 염불을 몇 번이나 되뇌었는지를 세는 도구를 염주(念珠)라고 한다.

<교종>의 핵심이 경전이라면, 정토종 미타신앙의 핵심은 염불과 염주이다.

염불을 대중화한 사람은 정토종을 종파로 일으킨 수나라의 도작이다. 도작은 <아미타불>을 얼마나 말했는지 콩을 세면서 잊지 않도록 했다. 나중에는 염주를 만들어 염불의 횟수를 세면서 마음을 가다듬도록 했다. 원래, 염주는 초기 불교에서는 쓰이지 않았던 도구이다. 초기 대승불교에서도 마음의 번뇌를 잊는 수양법으로 염주알을 세도록 했으나, 본격적으로 염주를 중요시 한 것은 정토종부터이다.

5. 정토종을 이끌어 간 사람들.

중국에서 미타신앙을 이끌어간 사람들을 알아보자.

본격적으로 미륵, 미타 신앙이 알려진 것은 위진시대 <도안>부터이다. 도안 이야기는 8장에서 다루었다. 도안은 노자와 부처를 구별조차 하지 못하는 불교 수준을 한심하게 여기며, <미륵 신앙>을 강조하였다.

중국인들은 미륵신앙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도안은 <노장사상>에 있는 <제천사상>을 <제석천>과 결부시켜 미륵 신앙을 강조하였다. 격의불교와 종파불교의 중간쯤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도안의 제자인 혜원은 미타신앙으로 돌아선다. 미륵이 머무는 근거지인 <도솔천>보다 <서방극락정토>가 더 현실적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백련사라는 염불 결사 단체를 만들어 아미타불 앞에서 염불을 외웠다.

그러나 혜원의 백련사는 그들만의 염불이었다. 아미타 신앙의 사상적 체계는 남북조 북위의 <담란>에서 시작된다. 정토종의 시조인 담란은 염불의 중요성을 특히 강조했다. 스스로 노력해서 번뇌가 없는 무아 상태에 이르고, 그 상태에서 아미타불을 외치면 훗날 극락정토에 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나라 초기 도작은 <스스로의 노력만으로> 정토에 가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생각했다. 혼란한 사회에서 백성들을 이끌어주는 누군가가 필요하기 때문에 <종파>가 적극적으로 활동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도작의 생각을 정리한 사람이 제자인 선도이다. 선도는 염불을 외우고 수행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만들었다. 극락정토에 가기 위해 미타불에게 공손한 마음가짐과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 때부터 정토종의 간략한 수행방법과 예배 의식이 만들어졌다.

이 수행 방법에서 한가지 더해진 것이 바로 대승불교의 철학인 <나눔>이다. 염불을 외워서 자기 혼자만 극락에 가면 소승불교랑 다를 바가 없다. 대승불교의 철학은 만민의 구제이다. 따라서 선도는 수행은 혼자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하는 것이며, 수행에는 서로간의 예절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또, 서로의 수행 상태와 성취감을 서로 공유하고, 그 아름다운 공덕을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로서 정토종은 민중적 불교 사상으로 토대를 잡았다. 하지만 여기서 다시 한가지 논쟁이 발생한다. 아미타불만 외치면 민중들도 극락에 간다는 정토종 사상과, 누구나 <즉시 깨달음>이 가능하다는 선종의 사상은 그 본 뜻이 같은 것인가? 아니면 전혀 다른 이질적인 사상인가?

정토종 사상이 확립된 당나라 이후, 정토종은 선종과 최고 <선> 자리를 놓고 논쟁에 들어가게 된다. 그것은 수양방법상의 논쟁이었다. 아미타불에게 수양하는 것과, 좌선과 명상으로 수양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같은 것일까, 다른 것일까?

자, 그럼 다음 장에서 선종 이야기를 해보자. 선종의 역사적 배경과 철학을 이야기하면서 정토사상과 선 사상이 같은 것일지 다른 것일지 이야기해 보자.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필자 : 히스)

 

 

   - 불교사에 대한 이해 : 참고할 만한 책들

아미타경 사경 및 해설(상)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정여 (혜성출판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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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을 꿈꾸다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지은이 김정희 (보림,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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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 모든 것을 이루는 힘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원영 굉오 (불광출판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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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정토에 왕생하는길)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이태원 (운주사,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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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히로 사치야 (황금가지,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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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명료한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스티브 하겐 (우리출판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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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고 뜻깊은 불교 이야기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김달진 (문학동네,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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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12화. 여황제 측천과 법장의 뜻이 딱 맞아 떨어진 이유는?

1. 모든 철학을 녹여 버리는 화엄의 철학

자 지금까지 우리는 <불교의 참뜻>을 알기위해 동분서주한 중국 불교의 혼란한 역사를 보았다. 위진남북조의 혼란기를 겪으며 성숙해진 불교는, 현장법사의 구법여행을 통해 <유식> 사상까지 포괄한 진정한 불교 교리를 모두 알게 되었다.

그럼 이제, 그 많은 불교 교리들을 통일해야 할 때가 왔다. 통일된 당나라에서, 통일된 종교 교리를 내세우는 종파가 있었으니, 바로 <화엄종>이다. 자, 그럼 화엄종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화엄종은 <화엄경>을 최상위 경전으로 규정한 뒤, 불법을 이야기하는 종파이다. 그럼 화엉경은 무엇인가?

화염경이란, <대방광불화엄경>의 약자로, <대>는 크다, <광>은 넓다는 뜻이다. <불>은 부처겠지? 한마디로 크고 넓은 부처들의 이야기이다.

화엄경은 보살 수행을 거쳐 부처가 된 <비로자나불>이라는 분이 <말씀하시는> 경전 이다. 그가 말하는 핵심은 간단하다.

   하나의 티클에 모든 세계가 들어있으니, 모든 세계는 즉 하나이고, 하나는 곧 전체인 것이다.

                                                                                      일즉다다즉일(一卽多多卽一)

무슨 말일까? 심오한 교리이지만, 역사적 배경 정도로 설명해보자.

혹시 양쪽에서 서로를 비추는 거울을 본 적이 있는가? 없으면 해 보시라. 거울을 일정거리에 두고 서로를 비추면, (ㄱ)의 거울에 (ㄴ) 거울이 비친다. 그런데, (ㄴ) 거울도 (ㄱ) 거울을 비추고 있으므로, (ㄱ)의 거울안에는 (ㄴ) 거울이 비추고, 또 그 안에 (ㄱ) 거울이 비치며, 또 (ㄴ) 거울이 비친다.

결국 (ㄱ) 거울 안에 (ㄴ) 거울, 그안에 다시 (ㄱ) 거울.... 이런 식으로 점점 작아지는 거울이 끝없이 비춰진다. 그러나, (ㄱ)의 맞은 편에 있는 (ㄴ) 거울을 치우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ㄱ) 거울은 다시 평온해진다.

우주가 그런 것이다. 거울이 거울을 비추듯, 우주란 어떤 사물의 상호 관계에 의해 이어져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ㄱ)이라는 거울 안에 존재하는 아주 작은 거울 안에 또 다른 거울이다. 그러나, 사실 그 본질은 (ㄴ) 거울인 것이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은 가장 방대한 근원에서 출발하며, 그 카다란 근원이라는 것도 거울 안에서는 너무나 작은 존재일 뿐이다.

한마디로 하나(개체)는 전체(본질)의 모습을 비추고 있는 <상>인 것이다. 이렇게 거울 속에 거울이 끊임없이 이어져 있는 것을 <인드라망>이라고 한다. 뭐 그 당시는 거울이 아닌 구슬 속에 구슬이라고 했지만...

이 거울이 비추는 세계는 4가지 세계이다. 먼저 거울이 비춘 현상세계(사법계), 거울 본체의 세계(이법계), 현상과 거울의 관계를 아는 세계(이사무애법계), 현상 세계에서 비춰진 각각의 사물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세계(사사무애법계) 이다.

우리는 거울 본체가 아니라 거울 안의 현상 세계에서 보이는 것이 진리라 믿고 살기 때문에 <사사무애법계>를 가장 먼저 알아야 한다.

현상의 세계는 인연(연기)로 이루어진다. 육체는 태어나고 소멸된다. 흙은 땅이 되고, 비는 물이 되며, 흙과 물이 곡식이 된다. 곡식은 인간의 식량이 되고, 인간이 먹은 식량으로 새 생명이 탄생한다. 결국 모든 것은 하나이고, 하나는 모든 원리가 된다. 그리고 그 모든 현상을 비추는 것은 거울이라는 본체이다.

예로, <인간의 모습>을 들어보자. 눈은 눈이고, 코는 코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절대 분리될 수 없다. 떼어놓으면 아무 의미가 없는 기관들이다. 각각의 기관이 뭉쳐야 인간이 되는 것이고, 하나 하나가 스스로를 고집한다면 인간이라는 본체는 아무 의미 없다. 눈, 코, 입 등은 모두 각각의 것들이지만, 인간이라는 존재 앞에서는 하나일 뿐이다.

이대로 대입해보자. 수없이 많은 사물들은 각각이지만, 그것을 비추는 큰 거울 앞에서는 하나와 같다. 결국 모든 것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본질을 알면 모든 것이 결국 <본질>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먼지(티클)가 거울이요, 거울이 티클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사물을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 진리를 찾는 것, 깨달음을 찾는 것, 수행을 하는 것, 말씀을 찾는 것, 노력하는 것.... 모든 것은 결국 하나의 <거울>이 비추는 다른 모습일 뿐이다. 모든 것을 하나로 통일한다는 화엄의 사상을 <원융사상>이라고 한다.

이 화엄의 철학이 수, 당 나라의 통일국가에서 체계화 된 것은 한 두사람이 어쩌어찌 정리하다 보니 탄생한 우연이 아니다. 화엄의 철학은 가장 통일 국가의 철학에 걸맞는 사상적 이념을 제공해 준 것이다. 한반도와 왜에서도 화엄종은 통일 국가 시기에 융성하였다.

왜 화엄은 통일 철학일까?

간단하다. 모든 것은 결국 하나의 근원으로 통한다는 것은, 모든 분열된 국가가 <통일된 왕조>로 귀속된다는 정치 이념과도 딱 맞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가 전체이고, 전체가 하나이다.> 이 말을 정치적으로 해석해보자.

<하나>란, 국왕을 뜻한다. <전체>란 백성을 뜻한다. 그렇다면, 국왕은 곧 국가이고, 국가는 곧 백성들의 모임이다. 백성은 곧 국왕으로 귀속되고, 국왕은 백성의 평안을 위해 노력한다. 불가의 화엄 사상이 유교의 <덕치주의> 사상과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가? 만약 북한 김일성 일가가 불교도였다면, 제일 먼저 화엄 철학부터 북한 주체사상에 집어넣었을지도 모른다.

또, 통일된 국가에서는 통일된 종교 사상을 원한다. 위진남북조의 혼란기처럼 수많은 종파가 난립할 경우, 국가로서는 골치 아프다. 국가 철학을 지지해 줄 핵심 사상이 정해져 있는 것이 편하다.

그런데, 화엄경은 모든 불교 사상을 화엄 철학으로 녹여 버릴 수 있다. 열반경에서 말하는 <모든 인간은 불성이 있다>는 것도 화엄은 인정한다. 우주가 비추는 거울 안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결국 <거울>이라는 본질이 비추어진 것이므로, 당연히 모든 인간은 불성이 있는 것이다. 단, 불성은 인간만 있는 것이기에 무생물에는 없다고 말하여 차별을 둔다.

법상종에서 말하는 <마음> 역시 화엄경은 받아들인다. <마음>도 <거울> 속에 비치는 것이 아닌가? 단, 화엄종에서의 <마음>은 인간의 번뇌와 고통이 아니라, 거울이 비춰주는 <깨끗한 마음>이다. 화엄종은 인간의 본질이 우주와 같이 때문에 인간은 본래 선하다는 <성선설>쪽을 좀더 비중있게 말하는 것 같다.

수나라의 통일 철학인 천태종은 지식(교)과 깨달음(선)은 같은 것이라는 교선일치를 말한다. 화엄종은 이것 역시 받아들인다. 단, (교)와 (선) 중 어느 것이 먼저냐는 선후논쟁은 계속 전개한다.

모든 철학을 받아들여 녹일 수 있는 화엄의 <원융사상>은 통일된 왕조에서 통일된 철학으로 받아들이기 좋았다. 그럼 구체적인 화엄 철학을 한 번 볼까나?

2. 화엄의 교판 논쟁과 성기품설

혼란기인 남북조 시대, 화엄종도 초기에는 <도사>들과 싸우는 학단에 불과했다. <화엄경>에서 말하는 <모든 것은 하나요, 하나란 모든 것이다>라는 이론을 도사들이 트집잡았던 것이다.

장자가 말하기를, <내가 꿈에서 나비가 된 것인가, 나비인 내가 꿈에서 인간이 된 것인가> 라고 하였다.

이 말에서 느낄 수 있는 장자의 철학은 이 것이다. 만물은 결국 나와 내가 아닌 것을 구별하지 못하게 하니, 자연 속에서 하나가 된 내가 진짜 나이지 않을까? 결국 내가 만물 속의 하나이기에, 만물은 나이고, 나를 포함한 만물은 모두가 평등한 것이다. 진정한 평등은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내가 만물이고, 만물이 곧 나인 것이다.>

도사들은 장자사상과 화염 사상은 결국 같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격의 불교>시기엔 화엄종도 도교 이론으로 해석되었던 것이다.

화엄학파는 <도사>들의 도전을 물리치기 위해 다양한 이론을 받아들였다. 가장 먼저 열반종의 <불성>을 받아들인다. 만물 속에 인간이 있고, 인간은 결국 우주의 본질이다. 따라서 어떤 인간이든 우주의 본질인 <불성>이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인간의 본성을 <품>이라고 한다. 따라서, 누구든 수양을 하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인간의 본성 자체를 <성기품>이라고 하며, 그 수행 방법을 10가지로 나눠 놓은 단계를 <십지품>이라고 한다.

그와 동시에 <화엄경> 격상 작업이 시작된다. <화엄 철학>은 도교 사상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모든 종교보다 화엄경이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그래서 5개의 종교와 열 개의 종파를 모두 순위를 매긴 후 <화염경>이 최고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화엄종은 산과 같고 바다와 같다. 산에 수많은 동물들(각 종파)가 산다면 화엄종은 산 그 자체이다. 바다에 수많은 생물(각 종파)가 산다면 화엄종은 그 모든 생물들을 끌어안고 생명을 주는 바다 자체이다. 그리하여, 흩어진 모든 종파는 화엄이라는 이름으로 통일되는 것이다.

3. 법장과 측천무후

초기 화엄경은 두순(557-640)에서 시작한다. 두순은 도교의 도사들이 <화엄경>을 <노장사상>으로 해석하는 것에 반발하였다. 그래서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기에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열반종 사상을 화엄종에 포함시켰다. 그가 화엄종의 시조이다.

2대조 지엄은 화엄경의 주석서인 수현기를 저술하면서, <유식사상>을 화엄종에 포함시켰다. 전통 <공> 사상과 다르게 <마음>을 강조하면서, <모든 것은 마음이다>라는 사상도 화엄철학과 같다는 것이다. 지엄에게는 2명의 특출난 제자가 있었다. 한명은 한반도 화엄종의 시조인 <의상대사>이었고, 또 한명은 화엄학을 완성시킨 <법장대사>였다.

의상은 우리나라 사람이니, 우리 이야기에서 다루고 지금은 <법장>이야기를 해보자.

법장이 살았던 시기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중국 여황제였던 <무측천>의 시대였다. (유교사학자들은 보통 측천무후라고 부르며, 황제로 인정하지 않는다.)

당 고조 - 당 태종 - 당 고종 - 당 중종 - 당 예종 - 측천무후 - 당 중종 (복위) - 당 예종 (복위) - 당 현종 - 당 숙종 - 당 대종 - 당 덕종 - 당 순종 - 당 헌종 - 당 목종 - 당 경종 - 당 문종 - 당 무종 - 당 선종 - 당 의종 - 당 희종 - 당 소종 - 당 애종

(표) 측천무후는 당 태종기부터 활동하여 당 현종기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역사가들이 흔히 말하는 <여자의 난> 시기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영향력이 큰데, 당나라 전성기를 모두 포괄하고 있으며, 당나라 역사의 1/4을 차지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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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무후의 젊은 시절, 고령의 시절 사진화>

무측천의 시기는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특이한 시기였다. 무측천은 당 태종의 후궁으로 <무미랑>이라고 불린 여자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거대한 자금을 가진 개국공신으로서 산둥지방의 상인이었다. 그러나, 당 태종은 그녀의 집안 사정 문제로 무미랑을 멀리했다. 무미랑은 당시 황태자였던 <고종>을 사랑한다. 한 여자가 아버지와 아들을 동시에 사랑한다는 것은 유교주의 입장에서는 상상 자체가 안되는 일이었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고종의 왕비인 왕황후가 이쁜 첩들을 모함하기 위해 <무미랑>을 일부러 고종에게 붙여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알까? <무미랑>은 훗날 고종의 총애를 얻어 왕황후를 비참하게 죽여 버린다.

그러나 고종은 당나라 최전성기의 왕이었다. 그녀는 고종이 늙었을 때, 자신의 정치적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자신의 아들과 남동생인 중종, 예종을 왕으로 두었다가 어느 순간 자신이 직접 여왕이 된 것이다. 그러나, 유교사회였던 중국에서 여자만의 힘으로 여황제가 될 수 있었을까?

그녀는 창업공신과 남북조 시대 구귀족들의 대립을 이용하였다. 당나라 창업공신은 <관롱집단>이라 부르는 세력으로 북위 이래 이민족 집단에서 비롯된 인물들이었다. 무측천은 낙양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 <산둥귀족>들을 끌어들임으로서 창업공신 집단을 말살하고 새로운 나라인 <주>를 세웠던 것이다.

황제가 된 무측천은, 기존의 모든 사상과 종교를 새롭게 제시하였다. 창업공신의 특혜를 무시하고, <과거제도>라는 시험제도를 통해 인재를 선발하였다. 장안 대신 낙양을 새 근거지로 하였고, 토지제도와 세금 제도를 고대 <주>나라의 제도로 복원시키려고 하였다.

그리고, 종교계에서도 새바람이 불었다.

당나라가 건국되고 국교는 <도교>였다. 남북조 시대 북위에서 구겸지가 <도교>를 창립한 이후, 도교는 국가의 보호를 받아왔다. 불교 역시 철학체계와 교단, 종파를 두어 도교의 라이벌이 되었지만, 당을 건국한 이연은 도교에 좀 더 힘을 실어주었다. 

여황제가 즉위하자 국교인 도교와 달리 정권에 충실한 통일 종교 철학이 필요하였다. 이 때 법장이 등장한 것이다. 그동안 쌓인 중국 불교 이론을 집대성하여 <화엄학>을 완성하고, 그것이 얼마나 체계적인지 여황제에게 직접 설명하였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일화가 바로 <금사자의 비유>였다.

비우컨대 이 금사자의 본체는 금이라고 하는 질료이고 사자의 모습은 현상에 불과합니다. 금사자의 형상은 허무하여 실제가 없고 변동합니다. 진실로 존재하는 것은 한 무더기의 금 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똑같은 한 무더기의 금으로 고양이나 개, 호랑이의 형상도 만들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것은 바로 오늘의 홍안이 내일의 백발로 되어 버림을 우리가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지, 수, 화, 풍 등 네 개의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현상으로서의 사건은 비록 변할지라도 볼질로서의 그 원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사자의 모습이 늙어갈지라도 그 본질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물의 본질이란 결국은 그 현상을 통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마치 금사자의 형상이 없다면 그 존재마저도 알 수 없음과 같지요. 마찬가지로 육체라고 하는 껍데기가 없다면 인간의 본질이라 할 정신도 발휘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과 그 원리는 상호 의존하고 보완되어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무측천은 이 말을 제대로 알아들었을까? 물론, 법장이 알아들을 때까지 설명했을 것이다. 이 말 뜻은 이렇다.

금사자를 볼 때, 우리는 당연히 <금사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금사자가 본질일까? 아니다. 녹여서 다른 동물로 만들어 버리면 바뀐다. 금고양이, 금호랑이도 될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 만들든 그 본질은 <금>이다.

결국 사물의 본질은 있지만, 우리가 그것을 못 보는 것 뿐이다. 그럼 사물의 본질을 보는 방법은 무엇일까?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눈으로 보는 것은 형식일 뿐, 그 실체는 <마음>으로 알아야 한다.

그럼 마음은 무엇인가? 진리를 바라보는 <거울>이다. (ㄱ)이라는 거울이 (ㄴ)이라는 거울을 비치면, (ㄱ)이라는 거울에는 수많은 (ㄱ) (ㄴ) 거울들이 점점 작아지면서 무한으로 서로를 보여준다.

거울과 거울은 서로 의존하고 있으며, 그 안에 비친 모든 사물들도 서로 의존하고 보완되어 있다. 사물의 본질이 그런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결국 거울이라는 본질이기 때문에 결국 <하나>이다.

무측천은 생각했다. 여자들을 무시하는 유교는 필요없다. 개국공신들과 밀착된 도교도 필요없다. 모든 것은 <하나>로 귀결된다는 화엄종이야 말로 시대가 원하는 철학이 아닌가?

무측천은 여황제의 귄위 강화를 위하여, 법장은 불교의 힘으로 도교를 누르기 위해여 서로 힘을 모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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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무후의 건릉 사진 : 입구>

다음 장에서 다룰 내용은 지금까지 불교와는 사뭇 다른 철학과 역사를 가진 종파 불교이다. 중국 정토종, 선종의 이야기를 한 번 다뤄볼까?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필자 : 히스)

 

 

   - 불교사에 대한 이해 : 참고할 만한 책들

초기화엄사상사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오다 겐유 (불교시대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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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를 손에 넣고 중국을 치마폭에 담다
카테고리 자기계발
지은이 장석만 (부표,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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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이야기
카테고리 아동
지은이 초등역사교사모임 (늘푸른아이들,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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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세계 안에서의 나눔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안형관 (이문출판사,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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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히로 사치야 (황금가지,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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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명료한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스티브 하겐 (우리출판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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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초보 불교 박사 되다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석지현 (민족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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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선의 사기꾼들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전윤 (신아출판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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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고 뜻깊은 불교 이야기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김달진 (문학동네,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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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11화. 삼장법사의 구법여행과 훗날 등장한 손오공 이야기

1. 진정한 종파불교로 거듭난 불교

오늘 이야기는 중국 불교의 전성기인 <당나라> 시기의 이야기이다. 이 시기는 중국 종파 불교가 완성되어 다양한 불교사상이 넘쳐나던 시기였다. 일단 간략하게 중국 역사를 살펴볼까?

춘추전국시대

위진남북조

5대10국

BC770 -

BC221-

BC206 -

265 -

581 -

618-

907 -

960 -

혼란기

통일기

통일기

혼란기

통일기

통일기

혼란기

통일기

제가백가

법가

유가/불교유입

격의 불교

종파형성

종파불교

유교중흥

유학완성

불교의 전파와 관련된 중국 역사는 <한>나라부터이다. 그러나, 유학이 국교로 지정된 한나라 시기에 불교는 도가와 마찬가지로 <교양 철학> 수준이었다. 중국, 한반도, 왜 등에 불교가 본격적으로 성장한 것은 도무 <혼란기>였다. 혼란한 시기에는 새로운 국가 철학이 필요했고 불교가 유교를 대신하여 그 역할을 훌륭히 소화해 낸 것이다.

그러나, 초기 불교의 문제점은 불교와 국가 권력이 너무 밀착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위진남북조의 불교는 불교의 참 뜻보다는 <호국불교>의 성격이 강했다. 구마라집 이후 끊임없이 시도된 <불교의 참뜻 찾기 프로젝트>는 국가 불교에서 벗어나려는 불교의 노력이었다. 그러나, 위진남북조의 혼란기 속에서 불교의 독자성을 유지하기란 어려웠다. 불교가 진정한 <종파 불교>로 탄생한 것은 통일 국가인 <수, 당> 나라 시기였다.

<수>나라의 <천태종> 이야기를 지난 시간에 했었다. 그러나, 수나라는 통일후 성급한 <통일 정책>으로 망하였다. 결국 수 왕조는 이종 사촌인 이연이 건국한 <당나라>로 넘어가게 된다. 이 시기가 진정한 중국의 종파불교 시대이다. 오늘부터 이야기 할 주제는 동아시아 전체에 큰 영향을 주었던 <당>나라 시기의 종파 불교 이야기이다.

2. 각 종교간에 어떤 관계가 있었을까?

불교의 역사와 종파관계는 너무나 복잡하고, 그 이론이 심오하다. 그렇다고, 역사를 통해 간략히 보는 종교인데 심오한 철학 하나 하나를 다룰 수도 없다. 그걸 다루기 시작하면 <불교 방송>이야기가 될 것이고, 그 정도 지식을 가지고 있지도 못하다.

당나라까지 불교의 전파과정을 간략히 정리하면서 복습해보자.



지금까지 전개한 중국 불교사의 이야기는 이렇다.

인도에서 <보살>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는 <대승불교>가 간다라 미술 전파와 함께 동아시아로 넘어왔다. 그런데, 보살이란 부처가 되기 위한 <수행승>을 말하며, 그들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고민해야 할 철학이 반야(지혜)였다. 그 반야 사상의 핵심이 바로 <공> 사상이다.

혼란기의 중국인들은 <공> 사상이 뭔지 몰랐기 때문에 도가의 <노장사상>을 활용하여 부처의 사상을 이해했다. 도가 사상으로 불교철학을 이해하는 것을 <격의 불교>라고 한다.

그러나 구마라집이 인도 대승 경전을 번역하면서 도가를 벗어나 독자적인 중국 불교 철학이 시작된다. 그 중에서 반야사상을 강조한 학파는 삼론종으로, 깨달음과 열반을 강조한 학파는 열반종으로, 아미타불 같이 보살에 대한 믿음을 강조한 학파는 정토종으로 발전해갔다.

수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면서 반야과 깨달음을 동시에 감싸안으려는 학파가 등장했으니, 그들이 바로 천태종과 화엄종이다.

반면, <이러한 지식들이 과연 부처가 처음 말한 진리와 같은 것일까? 너무 한쪽 측면에만 치우친 것은 아닐까?> 는 고민을 안고, 다시 인도에 불법을 찾아 떠난 이가 있으니, 이 사람이 바로 <삼장법사>로 알려진 현장이다. 현장은 <공> 사상에만 치우친 중국 불교에 <공> 사상도 결국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유심> 사상을 상기시켰다.

초기 격의 불교 시대에 번역된 불경을 고역경, 구마라집이 번역한 불경을 구역경이라 한다면, 현장이 번역한 불경을 신역경이라고 한다. 성경에 구약, 신약의 시대가 있듯이, 불법의 시대도 새로운 경지에 도달했다고 해야 할까?

3. 현장(602-664)의 구법 여행이 시작되다!

중국 당나라는 세계 불교사를 통털어 가장 활발한 불법 종파가 활동하던 시기였다. 위진남북조를 거치면서 이론을 쌓아온 불교의 각 학파들은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종파>를 만들었다.

그러나, 종파가 많아질수록 더 큰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도대체 석가의 참 뜻은 무엇일까? 각 종파들은 자신들이 석가의 참 뜻을 알고 있다고 말하지만, 석가의 가르침이 이렇게 다양할 수가 있을까?

수문제 때 태어난 현장은 20살 때 출가하였다. 하지만, 어느 한 종파의 이론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여기 저기 학파들을 돌아다니던 현장은 점점 실망하였다. 사상적인 체계도 서로 다르고, 같은 불경을 놓고도 종파의 입맛에 따라 해석이 달랐다. 왜 일까? 왜 석가의 마음이 이렇게 나눠진 것일까?

현장이 생각한 종파들은 <장님이 코끼리 만지면서 코끼리를 설명하는 것과 같았다.> 코끼리의 코를 만진 사람은 그것이 코끼리라 말하고, 다리를 만진 사람은 그것이 코끼리의 본체라고 말한다. 작은 인간이 커다란 코끼리의 본체를 볼 수가 없는 것이다.

현장은 석가의 참 뜻이 담겨있는 인도 원전들을 직접 보고, 자신이 다시 해석하기로 결심한다. 쉽게 말하자면, 국내에서 영어를 백날 해보았자 발음도 안되고 무슨 뜻으로 생긴 말인지도 모르니, 영어 원조 국가에 가서 직접 배우자는 것이다. <국내파>로는 안되니 <유학파>가 되어야 한다는 비장한 결심이랄까? 그리하여 그 유명한 삼장법사의 서역 이야기가 629년에 시작된 것이다.

<서유기>에서는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이라는 동물들이 현장법사를 따라 서역으로 떠난 것이라고 나온다. 물론 소설이니까... 그러나, 실제 현장의 구법 여행은 서유기의 이야기처럼 괴수들을 무찌르며 진격한 그런 여행이 아니였다.

일단 인도로 가는 길부터가 너무나 험했다. 산넘고, 물건너 가야 하는 길은 여행자가 아닌 스님이 하기엔 너무 힘든 일이었다. 그냥 가라고 해도 어려운 길인데, 현장법사의 출국을 막는 중국 수비대가 있었다.

당시 당나라는 국제적인 국가로 성장하고 있었다. 동으로는 한반도와 왜, 서로는 이슬람 국가들, 남으로는 인도까지 영역을 넓히고 있었다. 따라서 너무나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당나라에 스며들기 시작했고, 당나라 정부는 모든 입출국자를 국가차원에서 통제하려고 하였다. 특히 당의 토지세법은 조용조 제도였는데, 이 제도의 핵심은 토지세와 인두세였다. 즉, 자신의 토지에서 떠난다는 것은 국가에 대한 세금을 내지 않는 반역과 같은 것이었다. 현장은 국외로 빠져나가면서 국경수비대와 자주 마찰을 일으키고, 도망다녀야 했다.

요즘으로 따지면, 북한을 연구하는 연구소 직원이 정부 몰래 북한에 가서 현장조사를 하고온 것과 같은 것이다. 당나라 처럼 말로만 세계화를 외치는 이명박 정권에서 이런 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바로 징역형이다.

현장법사는 외친다. <내가 지옥에 가지 않으면 누가 지옥에 가랴?> 멋진 말씀이시다. 그 유명한 <대당서역기>는 불법을 찾기위해 국가가 만든 보안법을 위반한 한 승려로부터 출발한다.

현장법사는 죽을 고비를 몇차례 넘기고 겨우 중국 국경을 빠져나왔다. 그렇다고 안심할 일인가?

인도로 가는 동안 그는 천국과 지옥을 수 없이 경험해야 했다. 불교를 이해하지 못한 지역에서는 그의 여행을 반길리가 없었다. 불교를 숭상하는 지역에서는 그를 최고의 고승으로 추앙해주었다. 그는 결국 인도로 도착하여 석가가 수련했다는 보리수 밑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생각했다. <앞서간 사람들을 볼수 없듯이 뒤따라 올 사람을 만날 수도 없구나>

석가에 참 뜻을 구하고자 인도에 왔어도 석가는 그곳에 없다. 그의 흔적들만 남아있을 뿐이다. 훗날 이곳을 다시 찾아올 구법 여행자들도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그는 석가에 대한 기록을 찾아 실제 뜻을 연구한 후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는 난타사에서 1만명의 수도승 중 최고 대우를 받으며 5년간 불법을 연구하고, 강론하였다. 인도에서는 그를 최고 고승으로 생각하며 존경하였고, 불법에 대한 열정은 주변국까지 알려졌다. 당시, 인도의 구마라왕은 그를 자신의 국가에 데려오기 위해 큰 전쟁을 할 정도였다. 그는 16년간의 파란만장한 인도생활을 마치고 중국 장안으로 돌아와 <대당서역기>를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인도에서 가져온 수많은 범어 경전을 해석하여 1335권을 번역하였다. 그 숫자상으로도 놀라운 일이지만, 한권 한권 정확한 석가의 뜻을 전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은 더 놀랍다고 한다. 16년간을 인도의 수많은 학자들과 같이 밥을 먹으며 석가의 참 뜻을 토론했으니,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4. 현장(602-664)의 이론체계를 완성한 <법상종>

 
현장이 16년간 공부하고 토론하여 얻은 결론은 무엇일까? 그것은 대승불교의 <공> 사상과 쌍벽을 이루는 <식> 사상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중국의 대승불교는 대부분 구마라집의 해석어거나, 그의 제자들로 시작된 불경 번역이었다. 너무 한편으로 치우친 감이 없지 않다. 구마라집의 핵심 사상은 대승불교의 <공> 사상이었다.

그 핵심은, 만물은 돌고 돌기 때문에 있는 것이 없는 것이요, 없는 것은 곧 있는 것이라는 <색즉시공 공즉시색>과 같은 것이었다. 이것은 현상계의 자연현상을 놓고 <공>을 다루는 것이었다. 돌고 도는 것은 우주의 법칙이자, 자연의 법칙이다. 대승불교의 <용수>가 주장했던 것도 이런 입장의 <공>이었다.

세상은 돌고 돌기 때문에 실체가 없다. 나란 존재는 죽으면 흙이 되고, 물이 되며, 그 흙과 물은 곡식이 되고, 곡식을 먹은 남자와 여자에 의해 다시 생명으로 태어난다. 즉, 나란 내가 아니며, 내가 아닌 흙과 물이 곧 나인  것이다. 결국 눈에 보이는 사물의 본질이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현장은 우주나 자연보다는 인간의 마음에서 <공>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도 대승불교의 대표 철학인 <유식>을 받아들인 것이다. 물론, 중국 내부에서도 성실종, 지론종 등의 학파가 <인간의 마음>을 강조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주류 학파는 아니였다.

그러나 현장의 <유식> 사상은 본질이 없다는 <공> 사상이 아니라 실체가 있다고 말하는 <공> 사상이였다.

내가 보고 있는 것들은 모두 머릿 속에서 나온 것이다. 밧줄을 보고 뱀이라 생각하여 놀라는 것은 마음이 그렇게 느끼기 때문이다. 진정한 실체는 존재한다. 그러나, 머릿속에 편견과 욕망이 많을수록 진정한 실체를 보지 못한다. 밧줄을 밧줄이라고 보았을 때 실체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진정한 실체를 발견했을 때 우리는 부처가 될 수 있다.

결국, 현장이 생각한 <공>이란,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실체가 있지만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주의 모든 현상은 결국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철학을 <만법유식>이라고 한다.

이렇게, <마음>을 강조하는 현장의 철학을 이어받은 제자 기(자은법사)는 스승의 철학을 <법상종>이라는 종파철학으로 발전시킨다.

법상종의 철학도 결국 <마음>에서 시작된다. 법상종의 기존 유식철학은 <마음>에 따라 불교 교리의 발전을 3단계로 나눈다.

1단계는 나란 존재가 눈에 보이는 실재라는 것을 버리는 초기의 <공> 사상이다. (석가철학의 아함경)

2단계는 모든 존재가 눈에 보이는 실재라는 것을 버리는 <반야>의 진리를 깨닫는 단계이다.(반야경)

3단계는 결국 모든 것은 <마음>에 달린 것이므로, 실제하는 것은 <없는 것> 같지만, 실제하는 본질은 마음으로 볼 수 있는 것을 아는 것이다. (화엄경)

결국 법상종은 기존의 <공> 사상을 인정하면서도, 모든 것은 <마음>에 따라 달라지는 진다는 본질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동시대에, 사상을 받아들인 학파가 있다. 그것은 바로 열반종, 천태종, 밥상종의 교리를 한데 모아 큰 통합을 이루려는 <화엄종>이었다. 화엄사상은 바다와 같다. 각 종파가 바다에 사는 물고기들이라면, 화엄은 그 모두가 뛰어놀고 있는 그 바다 자체를 지향하는 통일 종교였으니...

현장의 유식 이론은 법상종으로 이어졌으나, 그 끝은 결국 화엄종으로 귀결되었다. 지금까지 이야기했던 다른 종파들이 결국 화엄의 철학으로 녹아내렸듯이 법상종의 철학도 결국 모든 것은 하나라는 화엄의 <원융사상>으로 녹아내리게 된다.

당이라는 역사상 유례없이 번성한 통일왕조에서 필요했던 불교는, 모든 혼란기의 사상과 당대 사상까지 통합한 화엄종이 아니였을까? 다음 장에서는 화엄종에 대해 이야기 해보도록 하자.

5. 대당서역기가 서유기로....

서유기는 명나라시대 오승은이 쓴 것으로 알려져있다. 오승은은 현장의 구법여행을 토대로 이 소설을 적었다.

총 100부작인 서유기는 총 3부의 내용으로 구성되는데, 첫 번째가 손오공의 탄생 이야기, 두 번째가 현장의에게 구법의 의무가 주어지는 이야기, 세 번째가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이 함께 여행하는 이야기이다. 

 첫 번째 이야기는 제천대성 손오공에 대한 이야기이다. 손오공의 탄생 설화와 하늘에서의 난동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이 이야기가 중국 명나라 때 만들어진 것이라 현장 시대의 이야기 외에도 많은 민간 설화와 민간 종파의 이야기가 숨어 있으며, 불교의 많은 부분들을 현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로, 손오공이 보살들에게 대들 때, 보살들의 손에서 큰 <인장>이 나온다. 인장은 도장을 말한다. 원래 <인>은 다양한 손모양을 토대로 보살들의 언어를 표현하는 것이다.

예로, <항마촉지인>을 들어볼까?

위의 손 모양이 항마촉지인이다. 이것은 검지를 뻗어 손을 아래로 내리는 일종의 <수화>이다. 석가모니가 보살일 때, 마왕이 석가모니를 시험에 들게 하였다. 마왕이 말하기를,

<당신이 엄청난 공덕을 쌓은 것을 증명해 보이시오.> 라고 협박을 하였다.

석가모니는 오른손을 땅에 대어 <이 대지가 증명할 것이다>라고 말하였고, 그 순간 땅에서 <땅의 신>이 튀어나와 부처님의 은혜로운 삶을 증명해주었다. 마왕은 항복하였고 이 때부터 <항마촉지인>은 보살이 적을 무찌르는 손 모양이 되었다.

<선정인>은 부처가 깊은 선정에 빠져 있다는 뜻이다. <전륜법인>은 부처가 맨 처음 설법하던 장면을 표현한 것이다. 지권인은 왼손으로 부처님 세계를 오른손으로 중생 세계를 표현하여 두 세계가 하나라는 것을 보여주는 수화이다.

   

   

또 하나 재미있는 설정은 손오공을 <불법>과 대비되는 도사의 이미지로 형상화시킨 것이다. 지금까지 중국의 불교이야기를 하면서 핵심주제의 하나로 <불법과 도가>의 폐불사건들을 다루었었다.

그런데, 초기 망나니같은 손오공은 <도사>의 신비술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머털도사처럼 머리카락을 뽑아 숫자를 늘린다는 기술은 초기 도가인 <오두미교>에서나 볼 수 있는 신비술이다. 구름인 <근두운>을 타고 하늘을 날아다닌다는 설정은 손오공이 학과 구름을 벗삼아 사는 신선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그 <도사> 세력을 쳐 부수고, 불법의 <인장>이 승리한다. 즉, 보살이 도사를 이긴다는 설정이다. 그러나, 손오공은 도사이므로 죽지 않는다. 그 손오공이 삼장법사를 도와 불법을 찾는 다는 내용은, 초기 도가 사상을 받아들인 불교가 도가를 발 아래 두고 불법의 진리를 찾는다는 역사적 상황과 맥락이 같다. 손오공의 이름 자체가 <공손하라>는 의미인 것은 이와 관련된 것이 아닐까?

손오공의 머리에는 금제가 있다. 불법을 벗어날 때 마다 고통이 찾아온다. 자비로운 삼장은 진정한 불법을 찾으면 금제를 풀어준다고 말한다. 도가에서 벗어나 진정한 불법을 찾고자 한 현장은 <독자적인 불법>을 찾은 뒤, 손오공을 풀어준다. 그러나, 손오공은 이미 불법에 빠져 버렸다.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이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이야기는 현장법사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당시 중국에 진정한 불법이 없었다는 것을 이야기해 준다. 진정한 부처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삼장법사>는 서역에 가서 불법을 전해받아야 한다. 그런데, 악의 무리들이 그 과정을 방해한다. 그 악의 무리들은 여러 갈래이다.

같은 불교이면서도 불법의 참 뜻을 모르는 무리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삼장의 참 뜻을 모른다. 반대로 우마왕같은 존재는 인도 바리문의 <소 숭배>를 생각나게 하면서도 반대로 농경사회인 중국의 전통을 상징하기도 한다. 처음에 우마왕과 싸우던 손오공이 우마왕과 형제가 되는 설정은 특이하지 않는가?  또, 신선술을 부리며 각종 동물이나 괴물로 변하는 도가의 술법을 쓰는 자들도 있다.

저팔계’는 저속한 마음의 욕심을 이겨내려면 여덞 가지 계율, 즉 ‘팔정도를 이루라는 뜻이고, 사오정은 맑은 마음을 가져야 깨우칠 수 있다는 불교 교리를 상징하고 있다.

사실 서유기는 불교식으로만 해석할 수 없는 측면이 많다.

  이 작품이 명나라 때 쓰여진 관계로, 당나라 당대 불교의 교파들 보다는 훗날 밀교화된 불교 상황을 많이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아미타불>과 같은 정토종 성향이 상당한 강하다. 백성들이 읽는 고전 작품이기 때문에 심오한 교리보다는 <아미타> 신앙과 같은 깨달음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손오공이 알게 된 불교는 심오한 교리가 아니라 실천을 통해 알게된 <깨달음>이지 않는가?

또, 이 작품은 명나라 당시 부패한 사회상과 나쁜 관료들을 우회적으로 풍자하고 있다. 그 풍자의 방식으로 불교적인 사상이 덧붙여진 것이다. 암울한 현실을 직접 비판하기 힘든 상황에서는, 신비하고 가벼운 모험 스토리로 풍자하는 것이 일반인들 읽기에 편하지 않겠는가?

서유기는 보살이 나오는 이야기 같으면서도, 유교, 불교, 도교의 모든 사상이 집약되어 있다. 하지만, 현장법사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괴물들을 물리치는 과정과 방법은 도교식이지만, 그 원리는 불교식이다. 현장은 모든 괴물들도 사실 불성을 가지고 있기에 용서가 가능하다는 <열반종>의 불성론적 사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악>은 악일 뿐이기에 퇴치해야 한다는 논리를 보여주고 있다. 현장은 모든 것이 마음에 달린 것이라고 말하며, 법상종과 화엄종의 핵심 교리인 <일체유심조>를 주장한다.

실제 대당서역기와 서유기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불교의 진리가 무엇인지 찾으려하는 현장의 마음 만큼은 서유기에서도 표현하려 한 것이 아닐까?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필자 : 히스)

 

   - 불교사에 대한 이해 : 참고할 만한 책들

대당서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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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현장 (서해문집,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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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의 치: 위대한 정치의 시대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멍셴스 (에버리치홀딩스,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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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정요 3: 치세편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나채훈 (씽크뱅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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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으로 만나는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계환 (정우서적,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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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기 (논술프로그램세계명작 5)
카테고리 아동
지은이 오승은 (예림당,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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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들은 서천으로 갔다(서유기 다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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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홍상훈 (솔,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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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불교
카테고리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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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명료한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스티브 하겐 (우리출판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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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고 뜻깊은 불교 이야기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김달진 (문학동네,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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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으로 만나는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계환 (정우서적,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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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관불교와 유식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일지 (세계사,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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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10화. 천태종과 화엄종의 라이벌 1라운드

1. <교> 사상에 치우친 삼론종 이야기

위진남북조의 길고 긴 혼란기가 끝났다. 남북조를 통일한 수나라는 모든 국가 체제를 <통일>하려고 하였다. 이민족과 한족을 하나로 통일하였고, 도량형과 문자도 통일하려고 했다. 대운하를 건설하여 강남의 경제권을 북방으로 끌어오려고 하였다. 사상 역시 통일되고 있었고, 불교의 수많은 학파들도 하나의 진리로 통일되고 있었다. 수나라의 통일된 불교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천태종>이었다.

천태종은 불교 각각의 종파 특징을 하나로 아울려 통일하려고 하였다.  <교>와 <관>을 통일한다는 것이다. <교>란 가르침, 즉 지식을 말한다. <관>이란 깨달음과 실천을 말한다. <지식>을 강조하는 종파와 <깨달음>을 강조하는 종파는 같은 불교라 해도 성격이 다를 수밖에 없다. 천태종은 <교관일치>를 주장하여 각 종파를 하나로 끌어안으려 했다.

먼저, <교>를 강조하는 종파를 한번 볼까?

혼란기 중국의 불교 학파는 어느 학파를 막론하고 구마라집의 영향을 받았다.(8-9화 참조) 최고의 고승이라 불리는 구마라집이 다양한 불경을 해석하여 다양한 학파가 탄생한 것이다.

구마라집의 제자들 중 <공> 사상을 <존재론>으로 접근하려고 했던 파가 <성실학파>이었다. 그러나, 구마라집의 정통 제자인 승조는 <공> 사상은 심오한 사상이기 때문에 <존재를 분석>해서 이해할 수 없는 사상이라고 말했다. 중국에서 <성실학파>는 구마라집이 아끼던 제자 승조에게 비판받게 된다.

승조는 <공> 사상 자체의 심오한 뜻을 인도철학인 <반야> 자체로 파악하려고 하였다. <삼론학파>는 <삼론종>으로 발전하였고, 주변국에 전파된다. 고구려의 <승랑>은 삼론종에 정통하였고, 안식국의 <길장>은 삼론종의 시조가 되었다.

원래 <삼론>이란 <중론, 백론, 십이문론>이라는 3가지를 지킨다는 뜻이다. 삼론종의 핵심 사상은 <공이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라는 인도의 <공 사상 체계>를 인정하는 것이다.

아무 것도 없다는 <공>이 무엇이지 파악하려는 것은 무의미하다. 왜 언어에 집착하는가? 말이란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을 표현하려는 것인가가 중요하다. 언어에 대한 집착을 버려라. 언어에 대한 집착을 버리면, 사물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고, 집착이 사라지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 편안한 상태가 <공>인 것이다. <공>은 언어를 통해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언어와 논리가 없기 때문에,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허무한 것이다.

사물의 본질은 하나이되, 하나가 아니다. 실체가 있다고 믿는 것과 실체가 없는 것은 다른 듯 하면서도 같은 것이다. 있는 것은 어느 순간 없는 것이 되며, 생성된 것은 어느 순간 죽는다. 결국 만물은 이것도 아니며, 저것도 아닌 것이다. 이렇게 어느 하나를 집착하지 않고, 언어로 표현하는 것 조차 버리는 것이 바로 <중도>이다. 하나만을 강조하는 것은 <극단 : 탁자의 모서리>인 것이다.

결국 삼론종은 인도 대승불교의 <공> 사상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다. 따라서 <공>을 <인간의 지식>으로 판단하려고 한 <성실종>을 논리적으로 때려부순 것이다.

그러나, 삼론종은 큰 약점이 있었다. 첫째, 인도 불교 사상을 이해했으나, 중국적인 사상으로 발전하지 못한 것이다. 철저한 인도 불교의 <공> 사상을 이해한 것은 좋았으나, 그것이 중국인에게 무슨 도움이 된다는 것인가? 그 고민이 부족하였다.

둘째, 너무 학문적이다. 지식체계는 훌륭하다. 그래서??? 그 다음이 없다. 지식은 곧 실천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자기들까리 지식을 공유했다고 해서 훌륭한 불교 종파가 될 수 있겠는가?

셋째, 국가에 도움이 안된다. 있는 듯 없고, 없는 듯 있다는 교리가 통일한 수나라의 전제왕권에 무슨 도움이 될까?

성실종과의 지식 논쟁에서 훌륭하게 이긴 삼론종이 허무하게도 천태종에게 흡수당한 것은 당시 통일된 사회에 대응할 수 있는 <실천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훗날, 삼론종은 부활하게 된다. 그러나 수나라 시기엔 삼론종의 이론이 먹히지 않았다.

2. <선> 사상에 치우친 열반종 이야기

열반종은 지난 장에서 이야기(8화)한 도생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구마라집의 수제자였던 도생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불성론>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중국 불교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럼 도둑놈도 죽기 전에 깨달음만 얻으면 부처가 되는 것인가? 도생의 이론은 범죄자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기존 <불가론자>들에게 탄압받았다.

그러나, 법현 스님(7화)이 죽을 고비를 넘기고 14년간 서역을 유랑하며 구해온 <대열반경>에는 어떤 사람이나 부처가 될 <인간성>이 있다고 적혀있었다. 도생은 자신의 불성론으로 <열반학파>를 창시하였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열반종의 <불성 이론>은 천태종의 기본 이론으로 정착된다. 천태종은 누구나 마음을 갈고 닦으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열반종은 개달음과 지식의 두 가지를 동시에 공유한 천태종에게 흡수당하게 된다.

3. <지의>의 교, 선 일치

천태교의 시조는 지의이다. <지의>는 법명이고, 천태산에서 수양을 하여 <천태대사>라고 부른다. 수양제가 시호로 <지자대사>를 내렸기 때문에 다양하게 불린다.

지의는 남북조시기 양나라에서 태어나서 7살때 불가에 입문하였다. 남북조의 전쟁시기에 그가 했던 일은 <구걸>이었다. 구걸하고 걸식하면서 도를 닦는 스님을 <탁발승>이라고 한다.

그는 23살 때 <법화경>을 공부하다가 석가의 세계에 들어가 버렸다. 꿈을 꾸는 듯한 상태에 빠졌으나 꿈은 아니며, 천년 전의 세계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그는 석가모니가 법회를 여는 장면을 체험하게 되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진리를 체험하는 것을 <삼매경>에 빠졌다고 말한다. 법화경에 빠져 과거에 들어갔기 때문에 <법화삼매>를 체험한 것이다.

법화삼매는 꿈이 아니다. 꿈과 비슷하지만, 실체 과거 속에 들어간 것이다. 이것은 심령현상을 이용하여 신통력을 발휘하는 최고의 경지인 것이다.

그 이후 유명해진 그는 천태산에서 제자들과 집을 지어 <수선사>라고 부르며 수행에 정진하였는데, 이 천태산에서 그가 완성한 사상적 체계를 <천태종>이라고 부른다.

천태종은 지의가 공부한 <법화경>을 근본으로 하고 있다.

법화경의 핵심 사상은 <일승론>이다. 초기 대승불교는 글을 읽는다는 <성문승>, 깨달음을 얻는다는 <연각승>,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한다는 <보살승>으로 나눠 이것을 <3승>이라고 했다.

법화경에는 이 3승의 구분이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결국 글을 읽던(지), 깨닫던(관) 간에 결론은 부처가 되려는 것 아닌가? 결국 3승은 모두 <수행승>인 것이다. 수행을 하는 자들이 <보살>이므로, 모든 스님은 <수행승> 또는 <보살승>으로 통일하여 1승이 된다는 것이다. 즉, 지식과 깨달음은 하나이기에, 어느 하나만 강조하는 것은 <잘못된 종파>인 것이다.

지의 불교의 특징은 지와 관 양지를 모두 강조하는 양자적 합일점을 찾은 교파라는 데 있다. 지라는 것은 순수한 학문적 불교만을 고집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고, 관이라는 것은 수련을 통하여 불교의 참 뜻을 찾는 것을 말한다. 지의는 학문만으로 불교를 찾는 것은 불교의 참 뜻인 중생구원을 등한시 하는 것이라며 싫어했으며, 수련으로만 불교를 찾는 것은 이론적 바탕이 없는 무지의 소산이라고 생각한다. 즉 이 2가지가 다 중요하다는 것이 지의의 이론인데, 이것이 천태종의 핵심이다. 천태종은 경전을 중요시하는 교종의 입장도 반영하면서, 수련을 중요시하는 선종의 입장 역시 무시하지 않는 종파인 것이다.

이 지의의 불교는 지, 관을 모두 중요시 함으로서 당시 수없이 나눠진 종파들을 통합하는데 크게 기여한다. 모든 불교의 진리들은 그것이 지(지식)이던, 관(깨달음)이던간에 원리 석가의 가슴속에서 나온 것이므로, 모두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그 진리는 모두가 원래 석가의 뜻 하나였으므로 석가의 본 뜻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 석가의 본뜻이 모두 지, 관을 통합하였다는 것을 <삼제원융>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석가의 본 뜻을 일반인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난해하고 복잡하기 때문에 그는 석가의 말씀을 5단계로 나누어 설명한다. 이 석가의 말씀 5단계가 불교에서 중요시하는 각종 경전들인데, 그중 가장 중요한 석가 말씀이 바로 <법화경>이라고 주장한다.

4. 화엄인가, 천태인가?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불교에서는 어떤 대승불교 경전이 가장 부처의 말씀과 일치하는 가를 놓고 순위싸움을 하였다. 이것을 <교상판석>이라고 한다. 이건 각 불경을 중요시하는 종파간 자존심 문제이기도 하다.

당시 위세를 자랑하던 종교는 천태종, 화엄종, 열반종, 성실종, 삼론종이었다. 그러나, 아까 말했던 성실종, 삼론종은 천태종에 흡수당했으니 제외하자.

일단, 인도에서 전래된 <공>사상의 핵심인 <반야경>은 무조건 1등이다. 부처의 진리 자체가 들어있는 경전인데 어디 순위를 매기는가?

그럼 2등이 무엇인가가 싸움의 핵심이다. 천태종의 <법화경>, 화엄종의 <화엄경>, 열반종의 <열반경>이 순위 다툼에 들어갔다. 그런데, 열반종도 천태종에 통합될 정도로 세력이 약하니 4등으로 내려주자.

남은 것은 천태종과 화엄종의 싸움이다. 그런데 이 싸움은 쉽지가 않다. 이 두 종교는 모두 통일 종교로서 강력한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통일된 수나라에서 종교 통합을 이룬 천태종과, 수나라 이후 당나라까지 전성기를 맞이한 화엄종은 모두 <지식과 깨달음>을 동시에 강조한 학파이다.

두 종교는 모두 지관일치, 즉 지식과 깨달음을 동시에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지식과 깨달음을 얻는 <대상>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첫째는 <불성논쟁>이었다. 화엄종과 천태종은 둘다 <모든 인간>에게 불성이 있다는 <도생>의 열반 철학을 인정하였다. 화엄종은 딱 <인간>까지 불성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천태종은 거기서 더 나간다. 만물은 돌고 돈다. 모든 사물은 훗날 어떤 형태가 될지 모른다. 따라서 풀과 나무, 동물들에게도 <불성>이 있다는 것이다. <개미>에게도 불성이 있으므로 함부로 죽여서는 안되고, <돌맹이> 조차 불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화엄종에서는 <인간>만이 불성이 있다고 말한다. <불성>은 부처가 되겠다는 마음의 문제이므로, 마음을 가진 <인간>이 아니라면 불성은 없다는 것이다.

둘째는 <돈오점오>의 문제였다. 화엄종의 <화엄경>은 <돈>를 강조한다. <돈>이란 깨달음을 뜻한다. 문득 깨닫음을 얻은 뒤 진리를 알았다는 기쁨을 강조하는 것이 화엄경이었다. 반대로, 법화경은 <점>을 강조한다. <점>이란 <점진적>이란 뜻이다. 즉, 깨달음을 얻는 과정 속에서 부처를 만나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럼, 깨달음의 과정과 깨달음을 안 기쁨 중 어떤 것이 우선인가? 이 문제가 해결되야 두 종교의 우위가 결정되는 것이었다.

셋째 두 종교의 차이는 <부처>의 품성 문제였다.

흔히 두 종교는 모두 <바다>에 비유된다. 다른 종파들이 물고기, 게, 미역 등 바다에 살아가는 종파라면, 화엄이나 천태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바다> 자체이다. 다른 종파가 지식, 깨달음, 수행법, 율법 등 하나를 강조한다면 화엄과 천태는 모든 것을 강조하는 통일 국가의 통일 사상인 것이다.

그런데, 그 바다를 구성하는 물이 문제이다. 화엄은 모든 것은 형태가 변하지만 결국 그 <본질>은 같다고 말한다. 바다의 물이 있다. 물은 물방울도 되고, 파도도 된다. 그러나 그 <본질>은 물이다. 따라서 어떻게 변해도 결국 물인 것이다.

반대로 천태에서는 물의 <본질>은 여러 형태로 구현된다고 말한다. 물이 화가 나면 파도가 되고, 물이 갈라지면 물방울이 된다. 본질과 별도로 물의 성격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부처>의 품성 논쟁으로 전개된다. 화엄에서는 <물>의 본질은 결국 깨끗한 물이므로 <부처>는 선한 품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반대로, 천태에서는 <물>도 성난 파도가 될 수 있으므로, <부처>도 태어날 때 가진 악한 품성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악을 누르고 선을 실현했기 때문에 더 위대한 부처가 되는 것이다.

화엄종의 논리는 부처은 이미 성불했기 때문에 더 이상 악한 존재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천태는 성불한 부처도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악한 마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두 종교는 이론논쟁을 계속하였다. 수나라 시기에는 <천태종>이 우세한 듯 보였다. 그러나, 당나라 시기로 넘어가면서 천태종의 힘은 약해진다. 강력한 국왕이 다스리는 현실 정치에서 필요한 것은 <돌맹이에 불성이 있다>가 아니라 <부처의 본성은 선하다>라는 것이었다.

중국에서의 천태종은 짧은 전성기를 끝내고 역사에서 서서히 사라졌다. 그러나, 한반도에서의 천태종은 맹렬한 기세로 불교계를 이끌어갔다.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시대까지 천태종과 화엄종은 라이벌로서 2라운드를 전개한다.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필자 : 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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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9화. 서로 우위를 점하려던 불교와 도교의 한판 승부...

1. 이민족 왕조에 뿌리내린 도교

자, 이제 불교의 수준은 <도교>를 벗어나고 있었다. 구마라집이 불경을 번역한 이후, 불교는 진정한 불법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더 이상 도교의 이론을 빌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불교 이론의 다양한 연구는 다양한 학파가 형성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각, 학파들은 도교 이론을 부정하고, 대승 불교 고유의 <공> 사상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그동안 도교는 뭘하고 있었을까? 도교 역시 혼란기를 이용하여 확실한 <도가 이론>을 확립하여, 위진남북조의 혼란기를 이끌어갈 사상으로 성장했다.

<도교의 시존 - 노자>

<도교의 선구자 - 갈홍>

원래 도교는 춘추전국시대 <노장사상>에서 기원한다. 당시에는 여러 제가 백가 중에 하나로서 <무위자연>을 주장하는 <학파>였기 때문에 <도학>, <도가> 등으로 말할 수 있겠다. <도학>은 노자의 <도덕경> 사상을 바탕으로 장자의 현실 철학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럼 도가가 도교로 변한 것은 언제일까? 불교의 <학파>가 성립되는 위진남북조 시대와 일치한다.

동진시대 갈홍이 <도교>의 선구자이다. 갈홍은 <포박자>를 저술하여 도교 발전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했다. 원래 학문적 성격이 강한 <도가>에 신선술과 민간 종교를 모두 종합하여 <도교>를 성립시킨 것이다.

일단, 노자의 사상을 이해하고 자연 속에서 영생을 누리는 <신선>이라는 존재를 종교 안에 포함시켰다. 신선은 노장 사상을 이해하여 속세를 해탈한 귀인으로 표현된다. 또, 신선은 죽지 않고 천수(1000살)를 누린다는 <불로장생> 사상을 포함시켰다. 이렇게 대충 이론이 정립된 것이다.

그러나, 실제 현실에서는 <조직>이 필요하다. 도교는 부적이나 신비술이 가능하다는 <신선술>을 강조함으로서 혼란기 현실에서 고뇌하는 백성들을 포섭하였다. 후한부터 시작된 중국의 혼란기에 많은 민란이 있었다. 대표적인 민란인 한나라 오두미교는 <도교> 조직의 모델이었다.

가난한 백성들도 곡식 5두를 내면 가입이 가능한 <오두미교>는 후한 시기 장각의 태평도로 발전하였다. 이 오두미교를 <천사도>라고 불렀는데, 북위 시대 구겸지가 이것을 <신천사도>로 개편하여 혼란기 중국 북부지방의 조직단체로 개편한 것이다.

남북조 시대 북조를 통일했던 북위는 도교를 국교로 숭배하였다. 위진남북조 시대에 등장한 여러 이민족 왕조들이 중국 고유의 사상인 <유교>를 배척하기 위해 도교를 활용하는 정책을 사용하면서 도교의 교단이 강화된 것이다.

도교를 국가 종교로 만든 사람은 북위의 구겸지였다. 불교가 혼란한 시대를 이용하여 <내세에서의 행복한 윤회>, <해탈>, <인과응보> 등을 강조하면서 사람들을 모은 것처럼 도교 역시 혼란한 시대를 이용하였다.

혼란한 시대를 피해 숨어 버린 한족들도 도교에서 주장하는 <무위자연>을 받아들였다. 특히, 죽림칠현 등 당대 사상가들은 유교의 형식주의가 무질서한 혼란을 가져왔다고 생각했다. 혼란한 난세에 인간의 인격은 존중되지 않는다. 이민족들의 세상에 현실은 너무 암담하다. 역사 속을 살아가는 나는 누구인가?

현실을 탈피하고 싶은 이들은 시간을 뛰어넘어 자연속에서 살아가는 신선을 동경하게 된다. 신비로운 자연에서 살아가는 고고한 존재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백성들 역시 현실을 탈피한 이상적 존재를 그리워하게 된다. 부처이든 노자이든, 이 암울한 세계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누구라도 상관 없지 않는가?

<신선의 뜻을 품은 도가인들 - 풍속화>

이민족의 왕들도 도교를 장려하였다. 북위의 구겸지는 유학과 다른 원리로 <도교>원리를 제시하였다. 중국의 황제가 <천명>을 받들어 즉위하는 것은 유교 방식이다. 고럼, 이민족인 북위의 왕은 <천명>이 없는가?

천명은 <도교>에서 찾으면 된다. 황제가 즉위할 때 하늘에 계신 지고지순한 신선인 <노자>가 축복해준다. 천상노군(노자)는 중국인의 아버지로서 중국의 천하를 이민족이 다스려도 된다는 것을 인정해준다. 이민족들을 <오랑캐>로 여기는 전통 유교 원리와 다르게, 도교는 중국을 다스리는 원리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남북조 시대 북조에서는 유교가 도교에 밀려 버렸다. 그럼 남은 것은 불교 뿐이다. 한참 교세를 확장하고 있던 두 종교는 이제 종교 천하통일을 놓고 한판 싸움을 시작해야 했다.

<도교 사원의 천존상>

2. 패자의 자리를 내준 유가

한나라 시기 국학으로 인정되던 유가는 혼란기에 힘을 잃었다. 전쟁이 지속된 어느 순간부터 모든 학문분야에서 유학은 제왕의 위치를 잃어간다.

삼국시대 초기 위나라의 조조는 유학을 벗어난 문학작품을 쓰기 시작한다. 어느 순간 진수의 <삼국지> 같은 작품이 등장하면서 역사학이 유학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불교가 들어오면서 간다라 미술의 영향을 받은 불상들이 조각되고, 미술과 회화 분야도 유학의 입지가 사라졌다. 천문분야는 도교로 넘어갔으며, 자연과학분야은 수학과 의학 등에게 밀리게 되었다.

모든 학문분야를 총괄하던 유학은 노장사상, 문학, 역사학과 대등한 위치로 전락하였다. 이 4가지를 위진남북조 4학이라고 하며, 불교학을 포함하면 5학이라고도 한다.

정치 원리에서 밀린 유학은 도교 세력에게 참패를 당했다. 특히, 북조에서 도교를 국교화하면서 유교적 통치원리까지 무너진 것이다. 유학은 도교를 미신이라고 몰아세웠지만 이미 힘이 없었다.

유학은 불교도 끊임없이 비판한다. 특히 승려가 출가하는 것은 충, 효를 강조하는 유학과 상극이다. 어찌 국왕과 부모를 버리고 속세를 떠난다는 것인가? 유학자가 보기에 불교는 인륜을 무너뜨린 오랑캐의 종교였다. 그러나, 그 비판도 힘이 없었다. 불교 자체가 국왕을 보호한다는 <호국>의 이념을 가진 시기이기에 유학자들의 비판은 공허한 것이었다.

또, 죽으면 내세로 향한다는 원리도 유교의 현실주의와 상극이었다. 현실 정치와 현실에서의 충효를 중요하게 여기며, 내세를 논의조차 하지 않는 유교 입장에서는 불교가 눈에 가시였다. 내세를 위해, 해탈같은 비현실적인 작업을 위해 어마어마한 불교 사원을 짓는 것은 얼마나 돈과 시간의 낭비인가? 유교주의자들 눈으로 볼 때, 불교 사원을 짓고 부처가 나라를 지켜준다는 믿음은 <덕치주의, 민본주의>와 상관없는 미친 왕의 행동인 것이다. 고대 하, 은 나라가 망할 때 얼마나 큰 사치가 있었고, 백성들의 고통이 있었는가?

내세문제는 불교와 유학의 <정신불멸론> 논쟁으로 격화되었다. 유교에서는 정신과 육체는 하나이고, 육체가 죽으면 정신도 죽기 때문에 내세란 없다고 말한다. 육체가 칼이라면 정신은 칼이 날카로운지, 무딘지를 표현하는 매개체이다. 칼이 부러지면, 칼이 날카로운지는 의미가 없어지며, 칼은 사라지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육체와 정신은 죽은 뒤 분리된다고 말한다. 정신은 육체와 다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이유는 육체가 있어서가 아니라 정신을 가지고 있어서이다. 정신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윤회를 통한 내세, 해탈은 현생을 사는 궁극적 이유가 된다.

그러나, 남북조 시대의 유학은 비판 이상의 현실적 조치가 없었다. 이미 불교세력에게 큰 소리를 칠 힘조차 없었던 것이다. 유학이 불교를 누르기 위해서는 수백년이란 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남북조 시대의 라이벌은 도교와 불교 뿐이었던 것이다. <정신불멸론> 논쟁에서 유학이 승리하기 위한 기다림은 남북조와 수, 당 나라를 넘어 송나라에 이르는 긴 시간이었다. 국가는 철학으로서 유학의 힘을 아직 인정했지만, 지배층들은 이미 불교나 도교를 신봉하고 있었다.

3. 1라운드 - 도교와 유교의 연합작전(1차 폐불사건, 466)

이제 본격적으로 도교와 불교의 쌈박질 라운드에 돌입해보자. 이 두 종교가 마찰을 빚기 시작한 것은, 격의 불교를 뛰어넘어 불교가 도교에서 분리되던 4세기 부터이다. 그 핵심은 부처와 노자 중 누가 우위에 있으냐는 지극히 원시적인 논쟁이었다.

먼저 도교의 도사들이 문제를 제기하였다. 초기 청담사상가들은 유교, 도교, 불교의 성인들은 모두 <도>를 체득한 사람이므로 근본적으로 같다고 말하였다. 여기서 시작한 논쟁은 <노자가 곧 부처다>라는 이론으로 발전하였다. 노자는 <도덕경>을 쓰고 <신선>이 되었다. 그런데, 노자는 신선이 되기 전에 인도가 가서 큰 깨달음을 얻었고, 부처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중국인>이 인도인을 교화한 것이며, <불교>의 근원은 <노자>라는 것이다. 노자와 부처 중 누가 먼저이냐를 <선후논쟁>이라고 말해두자.

불교와 도교라는 2가지 종교를 동시에 인정하여, <유학>을 대신하여 활용하려고 했던 이민족의 <북위> 왕조는 남북조 시기 내내 이 논쟁에 휘말리게 된다. 문제는 북위의 왕들이 불교와 도교라는 종교적 입장을 배려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어느 종교가 왕권 강화에 도움이 되는가, 또 정권을 잡은 귀족들이 어느 종교를 신봉하는가가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남북조 시대 - 북위와 남조의 송>

그 첫 번째 대결은 북위 <태무제> 때였다.

당시 남북조 시대는 이민족 왕조인 <북위>가 중국 대륙의 북부를 차지하고 있었고, 중국 왕조들이 정권을 바꿔가면서 대륙 남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북위 태무제 때의 재상 최호는 <중국인>이었다. 북위는 <선비족>들이 세운 왕조였지만, 전통 한족들을 어느 정도 우대하면서 마찰없이 정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한족 관리들은 <유학>을 신봉하였다. 그가 원한 것은 선비족들도 전통 사상인 <유학>을 받아들여 <유교적 덕치주의>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최호는 도교의 창시자 구겸지와 결탁하여 불교를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유교와 도교가 연합하여 불교세력을 제거하려고 한 것이다. 전혀 성격이 다른 유교와 도교는 불교라는 적 때문에 동맹을 맺은 것이다. 결국 북위 태무제 때 국가에서 불교를 막아 버리는 폐불사건(불교금지령)이 발생한 것이다.

1차 폐불사건으로 불교는 위축되었지만, 큰 타격을 받지 않았다. 유학자인 최호가 <국사필화사건>으로 처형되었기 때문이다.

최호 등 한족들이 편찬한 <국사>는 북위의 창업과정부터 모든 내용들을 적어두었는데, 그것은 모든 사실을 객관적으로 적어두는 <훈고학적 유교사관>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국사에는 북위 지배층들의 잘못과 치부까지 그대로 적혀있었다. 이것은 북위라는 선비족 국가에서 한족과 선비족 중 누가 우월한가라는 논쟁을 불러왔다. 이 대립은 최호 등 한족 관리들이 주살되어 끝나게 된다. 즉, 한족 귀족들보다 선비족과 선비족의 왕이 더 우월함을 보여준 것이다.

구겸지의 도교 창시로 도교가 <국교화>되고 불교는 위기를 맞았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불교는 다시 살아난 것이다.

4. 2라운드 - 도교와 불교의 선후논쟁(520)

1차 폐불 이후, 불교는 다시 도교의 라이벌이 되었다. 북위에서 한화정책으로 유명한 <효문제> 당시를 보면 더 뚜렷해진다. 효문제 스스로가 중국인들의 왕이라 칭하면서 중국식으로 모든 제도를 고치고, 선비족의 개혁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국왕은 유학의 이론을 공부하면서도 도교와 불교 문화를 더 장려하였다.

도교의 제단이 곳곳에 생겼다. 국왕이 불교문화를 장려하여 용문의 석굴사원이 건설되었다. 두 종교는 치열하게 교세 확장과 함께 이론적 논쟁을 다시 시작했다.

520년 두 종교는 또 다시 <선후문제>로 국왕 앞에서 직접 논쟁을 벌였다. 종교간의 논쟁이 아닌 국왕 앞에서의 논쟁은 큰 파장을 불러왔다. 국왕이 손 들어 주는 쪽이 우월한 종교로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도교 도사인 강빈은 노자가 부처를 제자로 삼아 교화했다고 주장했다. 승려인 담무외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두 명이 모두 자신의 주장을 위해 자료를 위조했다는 점이다. 강빈과 담무외는 각각 노자와 부처의 기록을 위조해 효명제 앞에 자신들이 정당함을 주장했다. 효명제는 강빈의 자료가 위조되었다는 것에 분노홰 강빈을 유배보내 버렸다.

이 논쟁으로 불교가 도교보다 우위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이 문제가 논리적으로 해결되지 않고 국왕의 판단으로 해결되었기 때문에 도사들은 기회만 닿으면 불교에 흠집을 내려고 했다.

5. 3라운드 - 도교의 반발(2차 폐불사건, 574)

568년, 북주 무제기에 다시 <선후논쟁>이 불붙는다. 그러나, 이 때의 국왕은 단순히 불교 편을 들지 않았다. 유교와 도교가 침체되자 승려의 숫자가 증가했고, 이것은 국가적으로 낭비였다. 승려는 일하지 않는 자, 세금을 내지 않는 자였다. 또, 사원이 많아지는 것도 국가 운영비에 타격을 주었다. 종종 승려들이 세력화하여 횡포를 부린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도사들은 다시 <부처는 노자의 제자>라고 주장한다. 도사인 위원숭과 장빈은 종교의 순위를 정하였다. 한족의 지침인 유학이 1위, 도교는 2위, 노자의 제자인 부처가 3위가 된 것이다.

당시 종교계에서 큰 세력을 가지고 있던 불교는 반발하였고, 황제에게 부당함을 건의하였다. 사회적으로 세력화한 불교를 규제하려고 한 무제는 도사들의 말을 받아들여 불교를 폐불시켰다. 그러나, 도사들도 제 발을 밟았다고 해야 할까? 도교 역시 사회적으로 무시 못할 종교 세력으로 왕권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었다.  무제는 불교를 폐지시킨 후, 도교마저 폐지시킨다.

불교와 도교를 막론하고, 종교인들을 일하지 않고 논쟁을 하는 자들로 규정하였던 것이다. 오로지 철학으로서 유학만을 남긴 것이다. 그러나, 당시 뿌리를 깊게 내린 종교를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무제가 죽은 뒤 불교는 더욱 발전하게 된다.

6. 위진남북조 시대의 불교가 걸어간 길...

위진남북조 시대의 불교를 정의하자면, <전파된 불교에서 독자적 불교로 나아간 길>이라고 볼 수 있겠다.

처음에는 불법의 뜻도 몰라서 노장사상의 이론에서 불법의 뜻을 해석하곤 했다. 그러나, 구마라집 등이 인도 불경을 해석하고, 도안과 혜원 등이 불교의 참뜻을 전파하기 시작했으며, 법현이 인도에 구법여행을 떠나는 등 승려들의 노력으로 불교의 참뜻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양한 학파들이 생겨나 불교 이론이 논쟁으로 발전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 불교는 <호국불교>였다. 위진남북조라는 유례없는 혼란기에 <불교>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왕권>과의 결탁이 필요했다. 국왕의 보호로 불교는 성장하였다. 그러나, <호국불교>는 양면의 칼이었다. 국왕이 불교를 버릴 때, 불교는 대책없이 탄압당했다. 또한, 왕권에서 자유롭지 못한 불교는 불교의 참뜻을 전파하기에 부족하였다.

여러차례의 폐불을 겪은 불교가 택한 선택은 무엇일까? 점차, 정치에서 독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북위> 정권과 밀착했던 북조 불교는 그런 점을 뼈져리게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 국가 정권의 영향력을 적게 받았던 한족 정권의 <남조 불교>는 큰 탄압이 없었다. 불교가 귀족의 보호를 받았지만, 국가 이념에 정면으로 대항한 적도 없었다. 될 수 있으면 독립적인 종파를 만들어 <이론>을 발전시키려고 한 것이다.

더 중요한 점은 <남조 불교>는 북쪽과 달리 <도교> 영향력이 적었다는 것이다. 구겸지가 창안한 <도교>는 북위 왕조에서 시작되었다. 도교와 피터지는 싸움을 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남북조 시대를 거치면서 불교는 점점 <거대한 사회세력>으로 성장한다. 정토종, 삼론종, 천태종, 율종, 선종은 5대 종파로 성장하였고, 담란의 정토종은 민중 사회로 스며들었다.

민중 사회에서는 읍사가 생겼다. 원래 읍은 북조, 사는 남조의 용어로 <불교를 믿는 마을 단체>를 말한다. 후대에는 합쳐서 읍사로 표현한다. 마을 단위로 불교 단체가 생기고 불상을 만들었으며, 스님들이 거주하였다.

그러나, 불교는 크리스트교와 같은 교구제로 운영하지 않았다. 행정구역과 종교구역을 일원화하지 못했던 것이다. 국가의 행정구역과 실제 마을민들이 느끼는 공동체 단위가 일치하지 않았고, 오랜 전쟁으로 임의로 구성된 공동체가 많았던 점도 있다. 또, 불교단체가 거대한 장원을 운영한다고 해도 그것과 행정구역은 별도였다. 불교 사원 자체가 수양과 깨달음을 위해 마을과 약간 떨어진 곳에 세워진 것도 교구제가 성립할 수 없었던 원인이었다.

길었던 분열의 시대는 끝이 났다. 수나라에 의해 중국 대륙이 통일된 것이다. 이제 통일된 시기의 불교는 어떤 길을 걷게 될까? 수, 당 시대에도 불교와 도교의 싸움은 계속될 것이며, 불교는 독자적인 발전을 계속할 것이다. 이 이야기를 몇몇 인물들로 파악해 보도록 하자.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필자 : 히스)

 

   - 불교사에 대한 이해 : 참고할 만한 책들

처음 만나는 불경 이야기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김장호 (심포지움,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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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으로 읽는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우더신 (산책자,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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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불교사 2:수용기의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카마타 시게오 (장승, 19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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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히로 사치야 (황금가지,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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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사전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용하 (불천,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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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교양으로 읽다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화령 (민족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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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양입문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박영옥 (경덕출판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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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좋다(개정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가와이 하야오 (동아시아,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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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8화. 인도식 불교가 중국식 불교로 바뀌다.

1. 구마라집(구마라습 : KUMARAJIVA, 344-413) : 중국 중관사상의 아버지

도안과 혜원이 격의 불교 수준의 중국 불교에 새 바람을 넣으려 했다면, 구마라집은 대승불교의 <공>사상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정리한 사람이다. 구마라집에 의해 중국 불교는 인도에서 전래받는 수준을 뛰어넘어 중국 고유의 토착 불교로 자리잡게 된다.

<구라마집 상>

구마라집은 중앙아시아 쿠챠국의 왕족이었다. 공주였던 어머니는 어린 라집을 불교에 입문시켰고, 최고의 불문 법사들 라집을 지도하였다. 라집은 박학다식한 불교 이론을 접하였다. 불교 뿐만 아니라 베다의 천문술, 수학, 음양오행, 힌두이즘 등 다양한 학문을 익혔다.

당시 5호 16국 시대에 북방을 주름잡던 전진왕 부견은 라집을 모셔오라고 했다. <도안>과 함께 <라집>까지 있다면, 불교의 참뜻을 알 수 있을 뿐 이나라, 불법의 신이 전진의 호국신이 될 거라는 믿음도 있었기 때문이다. 도안 역시 라집을 만나 진정한 불교의 참 뜻을 이야기 하고 싶었다.

그러나, 하늘의 뜻은 이들의 만남을 거부하였다. 라집은 전진의 수도 장안으로 오는 과정에서 양주에 갖히게 된다. 불교를 싫어하는 이들이 그를 가둔 것이다. 17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도안과 부견은 모두 사망하였다. 결국 라집은 전진을 계승한 후진의 왕 요흥이 전쟁까지 불사하는 의지를 보이고서야, 장안에 겨우 오게 되었다.

구마라집이 중국 불교사에 중요한 인물이 된 이유는 긔의 <불경 번역> 때문이다. 라집은 방대한 지식을 총동원하여 중국인들에게 대승 불교의 핵심인 <공> 사상과 <반야>가 무엇인지를 이해시켰다.

중국에서는 구마라집을 기준으로 불경 번역의 단계를 나눈다. 성경이 예수를 기준으로 구약과 신약을 나누듯, 라집의 불경 번역이 중국 불교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큰 것이다.

중국사에서 구마라집 이전에 번역된 불경들을 <고역경>이라고 한다. 그리고, 구마라집이 번역한 불경은 <구역경>이라고 한다. 구마라집 이후에 당나라 현장법사가 번역한 불경을 <신역경>이라고 한다.

구마라집은 격의 불교 수준의 중국 불교를 탈피하여, 중국 불교 수준을 인도 대승불교 수준으로 업그레이드 시킨 인물이다. 대표적인 그의 번역서는 <대승론>, <반야경> 등으로 이것은 인도 전통 대승불교를 확립한 <용수> 등의 중관 사상을 중국에 그대로 이식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는 6바라밀의 핵심사상은 <반야>가 어떤 지혜를 갖는지, <공>이라는 것이 <연기설, 업설>과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명확하게 설명하였다.(2-3화의 인도 불교 이론 참조)

이렇게 해서 중국에서도 대승불교의 중관학파가 탄생하게 된다. 이후, <공>사상을 바탕으로 진정한 불교이론을 갖춘 <삼론종>이 등장한 것이다.

구마라집의 불경 번역은 중국 불교 사상에 수많은 철학이 탄생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구마라집이 대승 불교의 원전을 번역했기 때문에 대승 불교 교단이 난립하게 된 것이다. 중국의 혼란기인 남북조 시대가 되면, 삼론학파을 필두로 열반학파, 성실학파, 섭론학파, 지론학파 등이 등장하게 되고, 수,당시기에는 삼론종, 사론종, 성실종, 천태종 등 종파까지 등장하게 된다.

2. 승조로부터 시작된 <삼론종>

구마라집에게는 구름과 같이 많은 제자들이 있었다. 그 제자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승조와 도생이다.

승조와 도생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승조는 책을 베껴적는 필사 일을 하면서 근근히 생계를 이었는데, 책을 필사할수록 그는 해박한 지식을 갖게 되었다. 승조는 <노자와 묵자>의 사상을 가장 좋아하였다. 특히 민중적이라는 점은 노자와 묵자의 공통점이었다. 그런데, 더욱 민중적인 종교가 있었으니 <불교>였다. 그는 구역경 중의 하나인 <유마힐경>을 읽은 뒤 감동을 받아 불교에 입문하였다. 

라집의 제자로서 격의 불교의 잘못된 점을 비판하고, <공>사상의 참뜻이 무엇인지를 밝히던 그는 라집의 사상체계를 중국인들에게 전파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서구로 따지면, 예수의 철학을 알리려는 사도 바울과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는 구마라집의 제자로서 수많은 불경해석을 하였다. 구마라집은 <공>에 대한 이해가 가장 확실한 제자라고 그를 극찬하였다. 불교철학사에서 그가 지은 <반야무지론, 부진공론, 물불천론> 등은 이후 중국 대승 불교사에 큰 영향을 준 책이었는데, 그 중 <부진공론>은 삼론종의 이론적 근원이었다.

승조는 인도의 중관학파의 <공> 사상에 구마라집의 <해설>까지 더하여 중국 특유의 대승불교 학파을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삼론학파>라는 연구 단체였다. 훗날, 삼론학파의 철학이 수, 당 나라 시기 정착되어 <삼론종>으로 발전하게 된다. 삼론학파는 대승불교의 핵심인 <공> 사상과 <반야> 사상을 구마라집의 해설에 기초하여 연구하는 학파였다.

3. 도생로부터 시작된 불성논쟁과 <열반종>

반면, 구마라집의 제자로서 특출하게 <자신만의 철학>을 완성시킨 이가 있으니, 그가 곧 도생이다.

도생은 난징에서 축법태에게 학문을 배운뒤, 7년간 혜원과 함께 지내면서 불법을 공부하였다. 그는 진리를 알고 싶어했다. 혜원을 떠나 구마라집에게 온 뒤, 그의 박학다식은 모두에게 인정받았고, 구마라집의 수제자가 되기도 하였다.

명성을 얻은 그는 북쪽을 떠나 남조로 내려왔다. 그는 당시 불교 이론에서 상상하지 못하였던 혁신적인 발언을 한다.

도대체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부처도 처음엔 깨달음이 없었다. 부처의 제자들 중에는 가난하고 글을 모르는 이들도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바보로 태어난 자는 어떻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가? 인간은 누구나 같은데,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는가?

이런 내용을 강연하던 그는 깨달음은 지위고하와 지식의 유무를 떠나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이다라는 말을 하게 된다. 이제 막 불교 교리가 정리되던 마당에 그의 발언은 큰 파장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세속적 쾌락만을 추구하고 불교를 비방하는 자가 있다. 하지만 그런 자도 인간으로 태어났다. 불교를 비판하는 자는 깨달음을 전혀 얻을 수 없는가?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기본적인 <불성>이 있다.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어떤 사람도 갑작스럽게 깨닫는다면 <성불>할 수 있다. 살면서 수없이 이루어지는 행동들과 노력을 일일이 기록하여 깨달음에 영향을 준다고 하면, 누가 성불하겠는가?

기독교로 따지면, <죄 없는 자는 돌을 던져라>와 같은 맥락이다. 삶은 수없이 이루어지는 인과관계의 연속이므로, 결과가 그 과정을 설명해준다. 결과는 곧 그 과정들이 선택한 지금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순간에 회개하고 천국의 문을 두드린다는 것은, 살아온 날들의 과정이 마지막 순간에 집약된 것과 같다. 인생의 어느 순간이든 인간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불성>을 깨닫게 된다면, 악인이라도 마지막 순간에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인생의 과정 자체가 업보를 남기는 것이 아니다. 불교의 이치를 몰라도 인간은 기본적으로 <부처의 보편적 정신>을 가지고 있다. 내 몸 안에 부처가 살고 있기에 누구든지 <갑작스러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도생은 자신의 이론을 <돈오성불>이라고 말한다. <돈오>란 자신이 부처임을 갑자기 깨닫는 것이다. <성불>이란 깨달았기 때문에 부처가 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자신이 부처임을 한번에 깨닫는다>는 것인데, 이것은 훗날 깨달음을 중시하는 <선종>사상에 영향을 준다.

도생의 이론은 <불성논쟁>이라는 새로운 논쟁을 가져왔다. 도생 이전의 불교 기본 이론은 <점수>였다. <점수>란, 한단계 한단계 수양을 하여 성불한다는 것이다.

그가 주장한 <깨달음>의 철학은 <점수론>을 옹호하는 기존의 승려들로부터 배척을 받게 된다. 보수적인 승려들은 그를 추방해 버렸다. 어떻게 부처의 세계와 <공>사상, <반야>의 핵심을 이해하지 못한 자가 <부처의 본성>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도둑놈도 깨달으면 성불을 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 것인가?

도생은 <노장사상>의 허무주의로 세상을 현혹한다고 하여 교문에서도 추방된다.

하지만, 도생의 이론이 인도 본토의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공> 사상이나 <반야> 사상과 반대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았다. 도생이 추방된 후 3년 뒤 인도에서 <대열반경>이 전래되었다. 대승불교의 심오한 뜻을 담은 이 경전에는 천제(세속적 쾌락을 추구하는 자, 불교를 비방하는 자, 무식한 자를 묶어서 다루는 말)도 사람이기에 성불할 수 있다라고 씌여진 것이다.

도생이 주장한 것은, 인도 본토에서 석가의 뜻을 해석한 것과 일치하는 것이다. 결국 도생은 최고의 고승 반열에 올라 대승 불교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되었다.

이것은 중국인들의 기존 가치관을 바꾸는 혁명이었다. <공자>와 같은 성인은 특출하다고 생각했는데,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으니 일반인과 성인의 차이점이 좁혀진 것 아닌가? 누구가 부처가 될 수 있기에 인간의 능력은 무한한 것으로 확장된 것이다.

도생은 자신의 이론으로 <열반학파>를 창시하였다. <열반학파>는 <모든 사람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열반학파의 사상은 수나라 시대의 <천태종>으로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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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불교의 성장으로 발생한 폐불 사건

구마라집에 의해 시작된 중국의 불교 이론 정리는 수많은 불교 연구 학파를 탄생시켰다. 승조의 <삼론학파>, 도생의 <열반학파> 외에도 구마라집의 제자들은 다양한 연구 학파를 만들어냈다.

구마라집의 제자들 중 <공> 사상을 <분석>하려는 시도를 가진 일파가 있었다. 인도의 4세기 하리바르만이 지은 <성실론>이라는 책에 의거하여, 변화하는 것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논리가 성립되지 않다라고 말한 것이다. 즉, <공>이라는 것을 존재나 깨달음의 차원이 아닌 <존재에 대한 분석>으로 접근하려고 한 것이다. 이 학파를 <성실학파>라고 한다. 그러나, 승조의 <삼론학파>는 이 학파의 이론이 불교를 <존재와 논리>로만 접근한다고 생각했다. 성실학파는 대승불교가 아닌 소승불교로 분류되었고, 삼론학파에 흡수되어 삼론종의 일파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훗날 고구려, 백제, 일본 등에 <성실종>이란 종파로 이론이 전파된다.

구마라집의 제자 중에서는 인도의 유식학파 세친의 <화염경>을 연구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을 지론학파라고 한다. 이 지론학파는 훗날 <화엄종> 성립에 큰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또 남조의 진제가 번역한 <섭대승론>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섭론학파>를 만들고, 유식학파 세친의 <화엄경>을 연구하기도 힜다. 이들은 훗날 중국 유식학파의 대표종파인 <법상종>의 선구자들이 된다.

이렇게 불교는 <학파>와 <종파>를 만들어가면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한다. 불교가 성장함에 따라 유교와 도교 세력은 긴장하게 된다. 혼란의 절정기인 남북조 시기가 되면, 불교와 도교는 피터지는 혈투를 벌이게 된다.

자, 그럼 다음 장에서는 이 피터지는 역사에 대해 한번 다뤄 보도록 하겠다. 불교와 도교의 싸움... 최후의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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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필자 : 히스)

 

   - 불교사에 대한 이해 : 참고할 만한 책들

처음 만나는 불경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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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김장호 (심포지움,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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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선삼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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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구마라집 (불광출판사,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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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으로 읽는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우더신 (산책자,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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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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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이기영 (한국불교연구원,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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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불교사 2:수용기의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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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카마타 시게오 (장승, 19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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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철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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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펑유란 (형설,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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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불교 철학사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심재룡 (한국학술정보,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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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이야기(재미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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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임원용 (여래, 19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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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관불교와 유식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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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일지 (세계사,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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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혜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장대년 외 (청계,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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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6화. 격의 불교 이야기...

1. 중국 불교는 청담에서 비롯되었다.

자, 이제 본격적인 중국 불교 이야기를 해보자. 중국에 불교가 처음 전파된 것은 후한 시대이다. 지난 장에서 설명했듯이 쿠샨 왕조의 적극적인 확장 정책과 외교정책으로 대승 불교가 각지에 전파되었다.

그러나, 중국 한나라에서의 불교는 <교양> 철학 수준이었다. 중국 <한>나라는 가장 전통적인 중국 왕조이다. 중국 민족은 자신들이 <한족>이라고 믿고 있으며, 중국 전통 문화의 원류는 <한나라>에서 기반이 잡혔다고 생각했다. 가장 전통적인 <유학>도 한나라 시기에 완성되었다. 한무제가 <유교>를 국교화하고, <한자>의 정형틀을 완성시킨 것이다.

불교가 한나라에 전파되었지만, 그것은 외국 철학의 일종일 뿐이었다. 지배층이 교양을 쌓기 위해 읽어보는 수준이었을 뿐, 중국 지식인들은 관리 임용을 위해 <유학>을 익혔다.

그럼, 불교가 주목받기 시작한 시기는 언제부터일까?

후한이 멸망할 무렵부터이다. 중국 후한시대는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고, 원소, 조조 등 호족세력들이 판치는 무법천하였다. 백성들은 길고 긴 전쟁의 시대로 막 들어선 것이다.

위, 촉, 오의 삼국시대부터 남북조 시대의 분열까지 길고 긴 분열의 시대는 시작되었다. 서로 치고받고 싸우는 시기가 되기에 윤리적인 측면이 강한 <유학>은 왕따당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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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진남북조 시대의 중국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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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진남북조 시대의 국가 먹이사슬>

혼란한 시기에 사람들이 찾는 종교는 <내세>라던가 <자연>을 강조하는 종교였다. 사람들은 유학이 아닌, 도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한나라가 망한 뒤, 실권을 잡은 것은 삼국 중 조조의 <위>나라였다. 위 나라는 강력한 법치주의에 의해 국가 통일을 이루려고 했다. 하지만, 정치가가 아닌 일반 학자, 사상가들은 <도교>에서 혼란의 원인을 찾으려고 했다.

당시 도교는 혼란의 원인을 <인간의 욕심>으로 보았다. 서로 정권을 잡으려고 하는 탐욕자들이 싸우고 죽이는 탓에 백성들만 전쟁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지 않는가?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무엇이란 말인가?

위나라의 학자들은 도가사상의 원리인 <자연으로 돌아가자>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하였다. 이렇게 노자, 장자 등의 철학에서 현실의 문제점을 발견해보려고 노력하는 것을 <현학>이라고 한다.

<현학>은 노자와 장자의 철학에서 우주의 근본 원리를 규명하려는 학문이다. 우주의 근본 원리인 <도>를 <현>이라고도 부르기 때문에 현학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현학은 하안(190-249), 왕필(226-249) 등에 의해 전개되었다.

하안과 왕필 등의 사상가들은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문제점이 무언가를 따지려고 했는데, 이런 대화를 <청담>이라고 한다. <청담>이란 말 그대로 <깨끗한 세계의 담론>이란 뜻이다. 위나라에서 시작된 이들의 <대화>를 역사에서는 <정음시대의 현학>이라고 부른다. 하안은 노장사상으로 논어를 해석하였고, 왕필은 노장사상으로 주역을 해석하였다고 한다.

그럼 이들의 대화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간단하다. 도학에 나오는 사상들이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는지 따져보는 것이었다. 도학의 문구들은 너무나 심오하다. 노자의 <도덕경>은 서양 학자들도 인정하는 동양 최고의 학술서이다. 노자는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무위자연>, 국가는 작을수록 좋다라는 <소국과민>, 가장 행복한 삶은 자연에서의 삶이라는 <자연합치> 등을 주장하였다.

노자의 사상에 맞춰서 모든 사상을 재해석하는 것이 <현학>이다. 유교사상은 현실사회의 직접적인 문제와 인간 윤리를 주로 다룬다. 그러나 후한이 망한 뒤의 세상은 무법 천지이다. 인간 윤리는 이제 <전쟁없는 사회>라는 틀에서 다시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청담 사상가들은 현실의 윤리보다는 <전쟁>의 참혹함, 사후세계는 어떤 것일까라는 내세에 대한 상상, 삶과 죽음과 인간관계에 대한 탐구에 더 집중한다.

그런데, 생각하면 할수록 답은 한가지였다. 대화를 나누던 청담 사상가들은 <전쟁>에 골몰하는 국가를 비판하기 시작하였고, 점점 현실과 떨어져 중국 전통 윤리를 비관하기 시작한다. 자, 그럼 청담 사상가들은 암울한 현실을 벗어나 노자의 세계로 가기 위한 방편으로 어떤 철학을 찾았을까?

불교에 그 답이 있었다. 불교는 만민에 대한 구원, 내세에 대한 윤회와 열반 사상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다는 <공> 사상을 강조하여 <허무주의>를 보여주면서도, 스스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 혼란한 시기에 딱 맞다. 얼마나 맞춤형 철학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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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한 위진남북조 시기의 중국인들은 지긋지긋한 전쟁에 질려있었다. 삼국시대, 위의 조조, 서진시대, 5호 16국의 이민족 시대, 남북조의 분열시대.... 길고 긴 전쟁의 역사는 훗날 <수>나라가 통일국가를 세울 무렵에야 끝나는 것이다.

이 불안한 시기에 불교는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인간은 죽은 뒤 자신의 업보에 의해 <윤회>를 하게 된다. 지금 현상에서의 고난은 전생에서의 죄를 씻는 과정이다. 그 업이 끝나고 현생에 덕을 쌓으면 내세에는 행복한 날이 기다리고 있다. (업설) 지금 전쟁을 일으킨 자들은 많은 죄를 지은 것이고 생이 끝나면 죄를 받을 것이다.(인과응보론) 절망에 빠진 백성들에게 얼마나 딱 맞춤인 철학인가?

그렇다고 지배층과 국가가 불교를 탄압한 것도 아니다. 한나라가 망하고, 조조 일가의 시대가 끝난 뒤 중국은 5호 16국이라는 이민족 사회를 경험하게 된다. 이민족의 왕들은 <유학>에 관심조차 없었다. 오히려 중국인들에게는 생소한 <불교>가 이민족 취향에는 딱 맞았다.

이민족 왕들은 불교를 주술적 방편으로 이용하였다. 흉년이 들면 승려가 주술을 펼쳐주었다. 질병과 재난은 불제자들의 노력으로 극복될 수 있다고 믿었다. 큰 전쟁을 앞두고 학식이 높은 승려들에게 전쟁의 승패를 묻기도 하였다. 또, 인도의 아쇼카 왕이 했던 것처럼 왕 자체가 불법을 수호하는 <불교의 수호신>임을 자청하였다. 왕이 곧 불교의 신이라는 이념은 불교를 믿는 백성들을 한 마음으로 묶어줄 수 있었다.

왜 불교가 민간신앙이나 주술신앙, 국가 호국 불교로 전락하게 되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혼란한 이 당시에는 불법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불교는 왕권 강화를 위한 <사상>으로 충분했다. 혼란기의 각국 지배자는 큰 사찰과 어마어마한 불상, 귀따가운 큰 법회를 열어가면서 왕권이 강하다는 것을 과시하였다.

어렵고 험난한 시기에 불교의 원래 뜻이 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해석하든, 종교는 현실에 도움만 주면 되지 않는가?

3. 대충 때려맞춰서 이해한 격의 불교

초기 청담 사상가인 왕필은 유교, 도교, 불교는 결국 같은 것이라고 말하였다.

왕필은 도교의 기준에 맞춰 다른 종교의 특징을 규정하였다. 노자와 장자가 도가 사상을 창시하면서 우주의 근본 원리와 인간의 행동 가짐을 <도>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공자 역시 큰 <도>를 깨우친 사람이고, 석가모니도 보리수 밑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모든 성인들이 결국 <도>를 깨달았으니, 모든 믿음은 하나가 아니겠는가?

왕필이 주장한 <유,불,도교의 3교 일치설>은 지둔(314-366)에 의해 구체화 되었다.

지둔은 불교 스님이다. 왕필이 도교 기준으로 종교를 통합했다면, 지둔은 불교 사상을 중국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였다.

예를 들어보자. 중국 전통 사상은 <리기론>이다. <리>란, 우주의 근본 질서나 계절을 의미하는 불변의 진리를 말한다. 지둔은 이렇게 말한다.

<리>가 절대불변의 원리인 것처럼 불가에서 말하는 반야(지혜>는 영원 불변의 <깨달음>이다. 즉, <리>는 불가의 <절대적 깨달음>을 말한다.

다른 것도 대입해볼까?

불가의 <공>사상은 <만물은 돌고 돌아 그 형체를 알수 없다>는 뜻이다. 보이는 것은 곧 사라지고, 사라진 것은 다시 생겨난다.(색즉시공 공즉시색) 이 심오한 원리를 이해하기 쉽게 도교의 <무>로 설명한다. 사라진 것이니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부처가 <열반>한다는 것은 도교의 <무위>로 해석한다.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하는 보살들을 도교의 <도>로 해석한다. 불가의 <진리>는 도교의 <근본>으로 해석해 버린다.

전쟁에 지친 사람들에게 얼마나 간편한 해석법인가?

이러한 불교 이해 방식을 격의 불교 방식이라고 한다. 격의란, 불교의 난해한 개념들을 중국 전통 사상에 이미 존재하는 비슷한 개념들을 인용하여 설명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쉽게 이해된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불교의 원래 뜻을 왜곡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 방법을 중국 곳곳에 알리고 다닌 이는 축법아였다. 그러나, 4세기 이후 불교의 승려들은 축법아의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한다.

격의 불교는 불교의 참 뜻을 알 수 없기에, 지배층들이 마음대로 해석하여 불교를 정권의 하수인으로 만든다. 또, 일반 백성들은 토착신앙과 신비주의를 불교와 구분하지도 못하고 멋대로 불교를 이해한다. 이것이 과연 정상적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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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세기 남북조 시대의 대립상황>

4. 불도징을 초빙하다.

불도징은 위진남북조의 혼란이 시작된 초기 인물이었다. 그는 서북인도와 관련된 구자국이라는 곳의 은거하는 불학자였다. 그가 70여살이 되었을 때, 중국의 백성들이 <위진시대>의 혼란기에서 희망없이 산다는 말을 듣고, 제자들과 중국으로 건너왔다. 드디어 불교가 뭔지 제대로 알고 있는 정통 <인도산 스님>이 중국을 방문한 것이다.

그런데, 불도징은 <불교의 참뜻>을 전파하지 못하였다. 당시는 혼란중에 혼란기인 5호 16국 시대였다. 5개의 이민족이 16개 국가를 세워 중국 대륙은 어딜 가나 전쟁 뿐이었다. 불도징은 후조 왕국의 석륵, 석호 부자에게 불법을 설파하였는데, 석륵은 불교를 아주 우습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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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세기 : 5호 16국 시대의 후조 왕국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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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 국가들의 민족 분포와 국가 창업자>

불도징은 불교 교리에 대한 철학 강의를 했지만, 석륵은 시큰둥했다. 결국 불도징은 교리로서 불법을 보여주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겼다. 불도징은 주문을 외워서 항아리에서 연꽃이 나오게 하는 등 신비로운 주술로 석륵을 감동시켰다. 결국 이 당시 불교 수준은, 뭔가 위대한 부처의 힘을 보여줘야 비로소 믿을까 말까 한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불도징은 큰 뜻을 품고 중국 대륙에 왔지만, 단 한권의 책도 쓰지 못하였다. 이민족의 왕들이 원하는 건 신비로운 주술과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지에 대한 궁금증 뿐이었다. 스님과 주술가, 점쟁이를 구분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나마 석륵의 아들, 석호는 이 신비로운 스님을 존경하였다. 불도징은 석호에게 <국왕>이 해야 할 일을 설교하면서 중국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였다.

1. 살행을 금지하고 죄없는 사람을 살해하지 말 것
   2. 포학한 행동을 피하고 자비심을 가지고 보시할 것
   3. 부처를 섬기는 데 있어 깨끗한 마음과 자긍심을 가지고 해야 할 것

불도징은, 인도에서 건너온 선구자라는 것 외에 크게 남긴 것이 없다. 중국 대륙에 자리잡은 이민족들은 불법이 뭔지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중국 불교사를 바꿀 만한 거목들을 제자로 키웠다. 그들의 이름은 도안, 혜원 이였다.

중국 대륙에서는 부처의 참뜻이 제대로 전해질 수 있을까?

다음장에서는 도안부터 시작되는 <불교 알리기> 프로젝트에 대해 이야기 해 보겠다. 중국 스님들이 제대로 된 불교를 알리고자 했던 노력은 수백년 동안 계속된다.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필자 : 히스)

 

   - 참고할 만한 책들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중국여행지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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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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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불교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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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팡리티엔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출판부,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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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종교와 사상(보충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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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에 읽는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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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침없이 빠져드는 역사 이야기: 불교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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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0년 간의 고독과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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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자유:성철스님법어집1집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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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5화. 불교의 외침 - 이젠 인도를 떠나고 싶어요 ~

1. 인도에 불교가 없다?

불교의 종주국은 인도이다. 그러나, 기원후 5세기가 지나고 인도에서는 더 이상의 불교 논의가 진행되지 않았다. 오히려 티벳이나 중국, 동남아시아에서 불교의 교리 논쟁이 활발하게 펼쳐진다. 특히, 4세기 이후, 불교가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 지역은 중국과 한반도 등 동아시아이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석가의 가르침이 재정리되어 대승 불교로 정립된 인도의 불교는 아시아 각지로 전파되었다. 그러나, 정작 인도 본토에서는 불교의 힘이 사라졌다. 그 이유는 새로운 정권의 성립 때문이다.

기원전 5세기 마가다 왕국이 불교를 보호한 이래, 기원전 4세기 마우리아 왕조에서는 <왕이 곧 부처의 화신이다>라는 사상으로 불교를 옹호하였다. 대표적인 왕이 스스로 전륜성왕이라고 말하였던 아쇼카 왕이다.

기원후 3세기 까지도 인도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왕조들은 불교를 인정하였다. 기원 전후 인도 남부에 브라만교를 신봉하는 안드라 왕조가 있었으나, 인도 중북부의 대부분 지역은 불교 문화와 간다라 미술을 인정하는 쿠샨 왕조가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 쿠샨 왕조는 쿠샨인(이란인) 계통의 왕조로 다양한 종교를 모두 인정하였다.

<쿠샨 왕조의 불상>

<쿠샨 왕조의 전성기>

쿠샨 왕조의 카니슈카 왕(2c)은 중국-이란-인도를 연결하는 헬레니즘 상권을 장악하면서 상권과 통행세를 받았고, 국경을 넘나드는 불자들을 보호하였다. 특히 동아시아에서 서아시아로 이르는 비단길과 인도를 거치는 바닷길은 불교 전파 경로와도 일치했다. 헬레니즘의 다체로운 문화는 대승 불교의 확대를 촉진하였고, 그 결과 중국, 한반도, 인도에 이르기까지 불교가 널리 전파되었다.

그러나, 4세기 말, 인도의 상황은 급변한다.

브라만 교를 신봉했던 아리아 인들의 강력한 국가가 다시 등장한 것이다. 갠지스 강 유역에서 찬드라 굽타가 건국한 굽타왕조는 쿠샨 왕조를 멸망시키고 북인도 전체를 통일하였다. 그리고, 아리아인 우월주의를 표방하며 이민족들을 추방하기 시작한다.

투르크인, 샤카부족(석가부족), 이란인(쿠샨인)은 아리아인들의 세상에서 설 곳이 없었다. 이제 세상은 고대 브라만의 후손들이 아리아인의 세상이 되었다. 그리고, 아리아인들의 고대 사상의 복구를 꿈꾸며 강력한 인도 민족주의를 주장하기 시작한다.

이민족과 혼혈족, 반브라만 종교는 인도에서 추방되었다.

<4세기 굽타왕조의 영역>

그리고, 고대 브라만의 베다 문학을 재정리 하여 산스크리트 문학이 등장한다. 브라만교에서 유래한 힌두교가 인도 전통 민족 종교가 되었고, 인도인의 율법은 <마누법전>으로 정리되었다. 고대 브라만 민족의 위대함은 <대서사시>로 편집되었다. 그것이 유명한 힌두교 경전인 <마하바라타>, <라마야나>이다.

대서사시는 고대 신인 브라만을 찬양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비슈누, 시바 등 고대적 요소를 갖춘 전통신을 아리아 부족의 현실에 맞게 재편한 것이다. 그리고, 힌두의 신은 인도인을 괴롭혔던 모든 이민족을 물리칠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대세는 <불교>가 아닌 <힌두교>였다.

그럼, 그동안 불교는 뭘하고 있었을까?

불교의 교리는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었지만, 강력한 굽타왕조에 맞설 힘은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특히 인도 북부의 불교 교단들은 이미 큰 싸움으로 지쳐있던 상태였다.

마우리아 왕조에서 쿠샨 왕조까지 이어지는 동안 불교는 북부 지역의 강대국들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반면, 불교 사원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북방 이민족들과 끊임없는 투쟁을 하였다. 특히, 쿠샨 왕조 시기 불교 교단이 주적으로 삼았던 이민족은 <훈족>이었다.

중국의 진시황제가 만리장성을 쌓으면서 중국에서 밀려난 훈족들은 끊임없이 인도 북부 지역을 약탈하였다. 이 훈족들은 동으로는 중국 북부로, 서로는 게르만 사회로, 남으로는 인도로 진출하여 기원후 세계사의 여러 지역에 영향을 준다. 인도의 고대 여러 왕조들이 이 훈족의 침입으로 멸망하였고, 서유럽에서는 서로마의 멸망을 이끌었던 게르만족의 이동까지 훈족의 영향력이 미쳤다.

그나마, 이란인이 세운 쿠샨 왕조가 기원후 4세기 무렵까지 버틴 것은 왕조를 지지했던 불교 교단의 협조 때문이었다. 그러나, 쿠샨 왕조는 망했고, 불교 교단은 훈족과의 투쟁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이제 더 이상 불교는 없었다.

힌두교의 복고주의는 불교 사상을 원시 브라만 주의로 돌려놓았다. 수드라 계급에게 평등은 더 이상 없었다. 바르나 제도의 계급 차별은 확고했고, 모든 직업과 주거, 결혼까지도 계급별로 차등을 두었다. 마누법전은 힌두교를 믿는 아리안 민족만을 위한 법이었다. 하층민에게 <해탈>의 기회는 없었다.

아잔타 석굴 : 인도양식과 이전 양식들이 결합한 인도적인 양식. 동아시아에도 많은 영항을 주었다.

2. 불교는 <밀교>가 되어간다...

아리아 민족 우월주의를 내세운 굽타 왕조는 7세기가 되기 전에 멸망한다. 7세기 무렵, 불교를 옹호하는 바르다나 왕조가 출현하면서 중국 불교와 우호관계를 맺기도 하지만, 대부분 인도의 작은 독립국들은 힌두교를 옹호하였다. 힌두교가 지배층의 종교로서 백성들을 통제하기 편했기 때문이다. 7세기 대부분의 국가에서 불교는 힌두교의 교리에 포섭되어 그 의미를 잃어갔다.

인도에서 대승 불교는 점차 <밀교>가 되었다.

힌두교를 믿는 아리아인의 탄압으로 종교 집회는 비밀스럽게 열렸다. 불교도들은 교리를 찾는게 아니라 종교 자체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 점점 종교의 교리는 희박해지고, 절대자나 유일신을 찾는 신비주의 종교로 변질되었다.

초기 논리적인 불교에서 볼 수 없었던 주술 신앙도 등장한다. 미륵이 바람과 불, 홍수를 몰고와 세상을 정화시킨다는 믿음이 등장한다. 또 민간 신앙과 불교의 구분이 사라지면서 민간에서 믿었던 수많은 신들이 불교 안에 들어오게 된다.

그나마, 이런 변질된 <불교>조차 7세기 이후 사라져간다. 7세기 이후 인도에 마호메트의 이슬람교가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이슬람교의 기본 사상은 <평등>이다. 계급간 <차별>을 강조하는 힌두교와는 상극이었다. 하층민들은 <차별>을 강조하는 힌두교가 싫어서 불교를 선택했지만, 이슬람교가 들어오자 이슬람으로 개종하기 시작한다. 어짜피 똑같은 <평등>을 주장하는 종교라면, 힘있는 <이슬람 정복자>들이 숨어지내는 불교도보다야 훨씬 낫지 않겠는가?

10세기 이후 본격적인 이슬람 세계가 된 인도는 또 한번 문화적 격동을 경험한다. 힌두교 사원과 불교 사원은 동시에 파괴되었다. 이래 저래 불상은 정권의 놀림감이 되었다. 16세기 무굴제국이 성립했지만, 무굴 제국은 전통 아리아 종교인 힌두교와, 하층민 종교인 이슬람을 융합시키기에 급급했다. 불교가 설 자리는 없었다.

21세기 현재, 인도에서 불교도의 인구는 전체 인구 비율로 보았을 때 너무나 미미하다. 불교의 종주국은 대승 불교가 정립된 5세기 이후, 한번도 주도권을 잡지 못하고 힌두교와 이슬람교에게 자리를 내어 주었던 것이다.

3. 불교의 최강국으로 자리매김한 중국 불교

5세기 이후, 불교의 종주국 자리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넘어갔다. 중국은 유가, 법가 등 다양한 사상체계가 이미 정비되어 있었고, 굳이 불교가 아니더라도 국가와 사회를 운영하는데 지장이 없는 선진국이었다.

중국과 인도는 전혀 이질적인 문화권이었다. 중국어는 한자(표의문자)이고, 인도어는 범어(표음문자)이다. 중국인들은 유가, 법가 사상등 국가와 인간의 사회적 현상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려는 성향을 가졌다. 반면, 인도의 불교는 인간의 인지구조를 <분석>하려는 특징을 가진 사상이었다. 인도는 수많은 소왕국이 분립하면서 생성과 멸망을 반복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반면, 중국은 춘추전국시대를 제외한다면, 비교적 통일 국가체제를 유지해왔다.

도대체 어떤 과정을 통해서 불교가 중국 사상계를 장악해 버린 황당한 일이 발생한 것일까? 그리고, 중국은 자신과 다른 이 문화와 사상을 어떻게 중국식으로 바꿔 버린 것일까?

인도와 중국이 불교라는 문화를 공유하게 된 최초의 계기는 헬레니즘 문화 때문이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그리스에서 인도에 이르는 광활한 문화권을 만들고 떠난 뒤, 인도는 쿠샨 왕조 카니슈카 왕이 서역 지배권까지 확보하게 되었다. 쿠샨 왕조 자체가 이란계 왕조였던 만큼, 쿠샨 왕조는 동서 교역에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쿠샨 왕조는 동아시아의 중국, 한반도부터 서아시아의 페르시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무역을 전개했는데, 그 과정에서 대승 불교가 아시아 곳곳에 전파된 것이다. 특히, 쿠샨 왕조와 상업을 하던 실크로드 중간 중간의 국가들은 불교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중국의 한 왕조까지 불교가 전파된 것이다. 또, 당시 인도와 중국간 직접 교역로는 바닷길이었기 때문에 <남방 바닷길>을 통해서도 불교 경전이 한 왕조에 전파되었다.

그러나, 불교를 처음 접한 중국의 한족들은 불교를 사상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없었다. 중국의 한나라는 한무제라는 강력한 왕이 <유학>을 국가 사상으로 공포했던 나라였다. 한 왕조에서 출세하기 위해서는 유학을 열심히 공부한 뒤, <구품관인법>이라는 관리 임용에 채용되어야 했다.

한 나라에서 불교는 중국 전통 사상인 도교에도 밀렸다. 한 나라의 지배층은 고품격 품위 유지 사상으로 도교의 <황로사상>을 숭배하였다. 황로사상은 노장사상에서 말하는 <무위자연>의 철학을 지배층의 교양철학으로 받아들인 것을 말한다.

처음 불교를 접한 한나라의 지배층은, 불교를 도교와 같은 교양 철학으로 생각했다. 도교에서 <자연으로 돌아가라, 백성들의 생활을 살펴라>라고 말한 것은 한나라 지배층의 우아한 집권 철학이었다.(물론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고, 말로만 생색내기 위한 교양 철학이었지만....)

불교 역시 같은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대승 불교의 <공> 사상을 접한 한나라의 지배층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공이란, 아무 것도 없는 허무함이겠구나. 아무 것도 없는 상태는 노자가 말한 자연으로 복귀한 상태이다. 공이란 곧, <없다>는 것이 아닌가? 공이란 것이 태초의 허무함이라면, 곧 자연 상태가 아니겠는가? 석가의 가르침은 노자의 가르침과 같은 것이구나....

결국 한나라 지배층이 생각한 불교는 도교와 같은 것이었다. 현실 상태에서 필요한 것은 유학이었고, 교양이나 취미로 알아야 할 것이 도교나 불교 따위였던 것이다. 교양이나 취미는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다. 따라서 도교와 불교는 하나의 패키지 세트로 묶여서 교양철학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심심할 때 생각해보는 교양 철학이 어떻게 유가 사상과 맞먹는 거대한 사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일까? 거기에는 수많은 철학자들의 노력이 있었다. 자, 그럼 그 철학자들 이야기를 한번 시작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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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동아시아 불교 전파사 - 8장. 당나라 종파불교의 발전

지금까지 전개한 위진남북조와 수대의 불교사는 인도의 불교를 중국이 가져와서 그 참 뜻이 무엇인가를 밝히기도 전에 왕법에 의해 불법이 위축되었던 시기의 불교를 포스팅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당나라 시기의 불교는 다릅니다. 당이라는 나라 자체가 국제적이고 귀족적인 문화를 가진 개방성을 큰 특징으로 하는 만큼, 불교에 대한 입장도 이전과 많이 달라졌습니다. 불교는 이제 왕법에 의해 탄압받기만 하는 호국불교를 뛰어넘어 불법의 참 뜻 자체를 연구하고, 불법에 따라 석가의 모든 사상을 이해하고 중국식으로 완성해가는 단계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 포문을 연 사람이 바로 현장법사(삼장법사)입니다.

또 당나라 이전 불법에 대한 대탄압인 <폐불사건>을 여러번 거치면서 불교계는 이전 단계보다 많이 성숙해져 있었습니다. 불교계는 호국적인 성격으로 왕권에 봉사하는 자신들을 반성하면서, 불법의 독립성과 불교계 혁신운동이 중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불법의 본 뜻인 석가의 참 뜻이 무엇인가를 놓고 체계적인 불법을 만들어가는데, 이러한 불법 완성 속에서 여러 교단 종파가 탄생하게 됩니다.

1.수많은 종파가 과연 진정한 석가의 참 뜻을 아는가?

중국에서 성립된 종파불교는 사실 모두 석가의 참뜻이 무엇인가를 놓고 우물안에서 싸우던 개구리들아였습니다. 우물에서 바라본 하늘이 어떤 하늘이고, 어떤 크기인지 알 수 없듯이 중국 내부에서 바라보는 석가의 삶과 불법의 참뜻을 아는 자는 없었습니다. 7장에서 자세히 다룬 지의의 천태종은 수많은 불교종파를 통합하여 하나로 융합하려 노력하였고, 그 결과 법화경을 중심으로 하는 남방 불교로 발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천태종 역시 대립하는 불법을 융합하려는 시도의 종파였지, 불법의 참 의미를 찾던 종파는 아니였습니다.

실제, 당 초기까지 어떤 종파도 석가모니의 참 뜻을 이해했다고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면, 석가의 참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도에서 가져온 석가의 경전을 번역하여 읽는 것만으로는 그 심요한 원리를 알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석가의 참 뜻을 알기 위해서는 직접 서역이나 인도로 가서 불법을 공부해야만 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선진국에 유학가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죠. 서울에서 아무리 혼자 영문법책을 읽어도 영어발음이 좋아지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석가의 참 뜻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채 경전만을 읽고 석가를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많았던 것이죠.

따라서 당대에는 서역의 불경을 번역하는 작업보다는, 직접 서역에 가서 불법을 공부하고, 불법의 원리를 깨닫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이 사명을 다한 것이 소설 서유기에 나오는 삼장법사(현장법사)입니다.

2. 현장의 구법 여행이 시작되다!

중국 당나라에서 불교의 전성기가 시작되면서 천태종, 화엄종, 정토종, 선종 등 수많은 종파가 생겼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종파들은 각각 자신들이 말하는 경전을 석가의 참 뜻이라고 주장할 뿐, 석가의 참 뜻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밝혀내지 못합니다.

수문제 때 태어난 현장은 어느 한 종파에 만족하지 못하고, 수많은 문파를 오가며 불법을 공부했습니다. 그는 중국의 불경이 너무나 부족하고, 사상적인 체계도 완벽하지 못하며 불경의 해석도 제 각각인 것에 실망하였습니다. 현장은 <장님이 코끼리 만지면서 코끼리를 설명하는> 중국 불교를 믿을 수가 없어서, 인도에 가기로 결심합니다.

당시 인도에 가는 것은 너무도 험하고 어려운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정부에서 국외로 출관하는 중국인을 처벌하였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장은 <내가 지옥에 가지 않으면 누가 지옥에 가랴?>라고 말하며, 인도로 향합니다. 그 유명한 <대당서역기>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며, 그에 대한 소설인 <서유기>의 시작도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그는 인도로 가는 동안 수많은 나라를 거치며 죽을 위기를 겪기도 하고, 고승으로서 환대를 받기도 합니다. 그는 결국 인도로 도착하여 석가가 수련했다는 보리수 밑에 이르게 됩니다. 그는 <앞서간 사람들을 볼수 없듯이 뒤따라 올 사람을 만날 수도 없구나>라고 말하며 불법을 생각하다가, 인도 난타사에 머물었다고 합니다.

그는 난타사에서 1만의 수도승 중 최고 대우를 받으며 5년간 불법을 연구하고, 강론하였습니다. 인도에서는 그를 최고 고승으로 생각하여 구마라왕이 그를 데려오기 위해 전쟁을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는 16년간의 인도생활을 마치고 중국 장안으로 돌아와 <대당서역기>를 저술하였습니다.

또한 인도에서 가져온 수많은 범어 경전을 해석하여 1335권을 번역하였다고 합니다. 중국에서는 구라마습과 현장의 불경 번역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여, 구라마습 이전의 경전을 고역경, 구라마습이 번역한 경전을 구역경, 현장이 번역한 경전을 신역경이라고 말합니다.

현장이 완성한 불법의 요체는 <나의 본체와 불법의 본체는 모두 머릿속에서 비롯된 것에 불과하며 그 실체가 진실한 존재가 아니다. 실체는 실제 존재하나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따름이다. 우리는 머릿속에 그린 아집과 법집을 깨뜨리고, 진정한 실체를 발견해야만 성불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이러한 견해를 불교에서는 <유식론>이라고 합니다.

유식론의 특징은 실체는 아무것도 없다는 <공사상>과 대립하는 <유식사상>으로, 부처의 진정한 말씀은 <아무것도 없다는 공사상이 아니라, 실체가 존재한다는 유사상이었음>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현장의 교리는 <법상종>이라는 종파로 체계화되고, 현장은 법상종의 시조가 됩니다. 이 법상종은 오랜 기간동안 종래 <공사상>에 기반을 둔 다른 종파들과 치열하게 논쟁을 벌이게 되는데, 이것을 훗날 <공유논쟁>이라고 합니다.

현장은 일대 유학생이라고 보기에는 인도, 중국에 미친 영향이 너무 큽니다. 인도에서도 수백년에 나올까말까한 고승으로 추앙받았고, 중국에서는 진정한 불법을 전파한 종파 불교의 아버지격이었으니까요. 명나라 오승은인 이러한 현장의 유학 생활을 소설로 발전시켜 <서유기>를 저술하였습니다.

3. 선종이 등장하다.

(이미 전에 선종을 설명했지만, 당대 혜능을 설명하기 위해 다시 한번 포스팅 합니다.)

선종은 원래 석가의 <염화시중의 미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석가가 인도에서 전도할 때, 어느 날 아무 말 없이 꽃 한송이를 여러 사람에게 보였습니다. 모두가 무슨 일인가 어리둥절 할 때, 마하가섭이라는 제자가 석가에게 웃음으로 그 뜻을 이해했음을 알렸습니다. 이것을 보고 석가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내 마음 속에 있는 정법과 원리가 이미 가섭에게 전달되었구나"

이렇게 이심전심으로 파악할 수 있으며, 눈빛만으로 그 뜻을 깨닫는 설법이 <염화시중의 미소>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심전심의 깨달음으로 창시된 종교가 선종이고, 마하가섭이 바로 인도 선종의 창시자가 되었습니다.

즉, 선종이란 내적 관찰과 자기 성찰로 등장한 불교 종파입니다.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을 내세우며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을 주장합니다. 선종에서는 언어나 문자를 거치지 않고도 바로 부처의 마음이 중생의 마음으로 와 닿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불심종(佛心宗)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선종에서는 인간이 본래 지닌 성품이 부처의 성품이라는 것만 알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대중적인 희망을 던지는 종교였습니다.

선종에서는 복잡한 문자도 필요없으며, 단지 깨달음만으로 모든 선을 강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선종은 묵가식의 노동을 중시하고, 유교식의 수양을 강조하며, 도교식의 민중화를 추구하는 다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섭 이후의 선종은 그 후계자 전법에 있어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단순한 몇 마디 말로 불법을 전하였는데, 이 몇 마디 말을 <게어>라고 합니다. 게어란, 어떤 경전으로 정해진 말이 아니라 마음으로 뜻을 전하기 위해 짧막하게 적은 <작은 심어>를 말합니다. 이것은 <모든 것은 무이고, 공이다>와 같이 짧은 언어 속에 많은 뜻을 함축하므로, 사람마다 알아듣는 이해도가 각각 다릅니다.

선종에서는 게어를 이해한 사람에게 의발을 전함으로서 후계자를 뽑습니다. 의발이란, 중들이 입는 가사와 바릿대로 달마가 제자에게 이 두가지 물건을 전했다는 것에서 유래된 말로서 선종의 후계자의 징표를 상징합니다.

선종은 28대 조사인 보리달마에 의해 중국에 전해졌습니다. 보리달마는 소림사에서 9년간 면벽수련을 하고, 혜가라는 제자에게 의발을 준 뒤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에 대해서는 남아있는 기록이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도 인도에서처럼 말로 전법을 전하였기 때문에 초기 선종의 기록이 남아있는 것은 없다고 합니다. 오히려 달마에 대한 이야기는 무협지에 많이 나오는 듯 싶죠. 몇십년을 수련한 강호의 고수들이 동경하는 대상이 바로 달마대사로 나오니까요.

4. 혜능에 와서 북종선, 남종선이 완성되다

선종의 5대조인 흥인선사기에 제자를 뽑기 위해 제자들에게 <게어>를 적으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 가장 총명한 제자인 신수가 <몸은 보리수요, 마음은 명경대와 같구나. 때때로 부지런히 마음을 갈고 닦아 티끌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자꾸나>라는 게어를 남겼습니다.

그러나, 방앗간에서 일하는 소공인 혜능이란 자가 이것을 보고는

<보리는 원래 나무가 아니다. 명경 또한 집이 아니다. 본래부터 아무것도 없는 것인데 어디서 티클이 생간단 말인가?> 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혜능은 글을 모르는 무식한 소공인 관계로 글을 아는 자가 이 말을 옮겨적어 게어로 만들었습니다.

홍인선사는 혜능의 말에 감동받아 그에게 선종 6대조의 의발을 물려주었습니다. 선종이 비록 이심전심과 불립문자를 통해 이루어진 <마음 수양만을 강조하는 종파>라고는 하지만, 글을 모르는 소공이 선종 조사가 된 일은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이 후 선종은 가장 총명한 후계자였던 신수의 북종선과, 글을 모르는 소공출신인 혜능의 남종선으로 갈리게 됩니다. 북종선은 선종교파 중에 비교적 지식을 강조하는 종파였고, 남종선은 오로지 <마음 외에는 없다>라는 심성수양을 강조하는 파였습니다. 북종선은 이후 당나라 측천무후 정권에 협력하면서 성장하였고, 남종선은 글을 모르는 대중속으로 파고들어 대중적인 기반을 마련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선종 중 대중적인 남종선은 우리 나라 선종에 큰 영향을 줍니다. 나말 여초의 호족세력과 6두품, 그리고 반신라 지식인들의 종교가 선종이었고, 고려 불교의 큰 흐름도 왕권의 교종과 민중적인 성향의 선종이 대립하며 주도해 나갑니다. 이 혜능의 남종선은 훗날 <심성수양>을 강조하는 성리학에도 영향을 주며, 시문 등 감정이 필요한 문학에도 큰 영향을 줍니다. 남종선은 마음으로 믿는 다는 실천도덕이 지배층에도 환영받았으며 행사규칙인 백장청규를 마련하여 대중적 토대를 확실하게 합니다.

5. 법장의 화엄종 : 모든 것은 하나의 진리 세계로 통한다.

법장은 당나라 최고의 여걸 여황제 측천무후기에 활동하면서 <화엄종>이라는 교단을 완성한 고승입니다. 화엄종은 법장이 주장한 <진심>이라는 단어를 모든 것의 근원으로 보는 종파입니다. 이러한 진심을 정리한 경전이 바로 <화엄경>입니다.

법장은 현장의 <유식론>에 대하여 심한 불만을 가졌습니다. 도대체, <석가의 참 뜻이 존재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실체는 다르고, 실체는 있으나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실체가 아닐 수 있다>라는 말이 무엇인가?

법장은 모든 것을 규정하는 하나의 <진심>이 있다고 말합니다.

비우컨대 이 금사자의 본체는 금이라고 하는 질료이고 사자의 모습은 현상에 불과합니다. 금사자의 형상은 허무하여 실제가 없고 변동합니다. 진실로 존재하는 것은 한 무더기의 금 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똑같은 한 무더기의 금으로 고양이나 개, 호랑이의 형상도 만들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것은 바로 오늘의 홍안이 내일의 백발로 되어 버림을 우리가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지, 수, 화, 풍 등 네 개의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현상으로서의 사건은 비록 변할지라도 볼질로서의 그 원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사자의 모습이 늙어갈지라도 그 본질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물의 본질이란 결국은 그 현상을 통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마치 금사자의 형상이 없다면 그 존재마저도 알 수 없음과 같지요. 마찬가지로 육체라고 하는 껍데기가 없다면 인간의 본질이라 할 정신도 발휘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과 그 원리는 상호 의존하고 보완되어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위 말은 법장이 화엄의 원리를 측천무후에게 설명한 글입니다. 즉, 금사자의 눈도, 코도, 입도 금사자라고 부를 수 있고 금사자 전체를 금사자라 부를 수 있지만, 그것은 사실 금덩어리라는 본질로 이루어진 실체이며, 녹으면 본질인 금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금이라는 <진심>은 영원합니다. 인간의 육체는 살덩어리이지만, 그 본질인 영혼은 바뀌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하나의 원리 속에 흘러갑니다.

예로 산이 있으면, 그 산에 나무가 있고, 토끼가 있고, 돌맹이가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봅니다. 나무를 본 사람은 나무가 진실이고, 토끼를 본 사람은 토끼가 진실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본 것을 토대로 불법을 설명하면서 종파를 만듭니다. 그러나, 산 전체를 보고 산이 어떻게 시간에 따라 흘러가고, 산이 어떤 모습으로 바뀌며, 그 변화에 따라 나무와 토끼는 어떻게 될 지를 포괄적으로 보는 종파가 바로 화엄종입니다. 화엄이란, 모든 것을 하나의 둥근 원 속에서 파악한다는 <원융 사상>의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당대 이러한 종파 불교의 성립이 중국사 전체에 가지는 역사적 의의와 이후 불교가 동아시아에 전파되는 과정, 그리고 이러한 불교가 중국에서 단절되듯 침체되고, 한반도에서 융성하게 되는 과정을 포스팅하겠습니다. 이제 한국 불교사로 넘어갈 때가 된 듯 싶네요.

<http://historia.tistory.com 역사전문블로그 히스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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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위진남북조의 난세 속에서 등장한 현학과 청담의 달인들

이번 장에서는 위진남북조의 문화를 다루겠습니다. 그 첫 번째로 청담사상에 대한 포스트를 해볼까 합니다.

1. 귀족문화 시대가 도래하다!

위진남북조 시대의 지배층은 <귀족>입니다. 이 귀족들은 한대의 호족계층이 점차 성장하면서 이루어진 계급입니다. 한나라 이후, 지속적으로 대토지와 사병을 양성하면서 성장한 호족들은 혼란한 시대를 맞이하면서, 중앙 관료로 급속히 진출하게 되었고, 이들이 귀족사회를 형성하게 됩니다.

이들 귀족들은 이제 단순히 <토지와 사병>을 가진 지방의 실력자가 아니라 <다양한 학문과 교양>을 가지고 존경받는 계급으로 성장합니다. 지배계급인 귀족이 우월감을 과시하기 위해 몰두한 <교양과 취미> 생활은 곧 위진남북조 시대의 문화로 정착되었습니다.

중국의 문화 특징은 서양과는 달리 전문가 집단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중국에서는 지배층이 곧 학자이고, 지배층이 전문가이며, 지배층이 곧 관료인 사회입니다. 따라서 지배층의 수준에 따라 당대 문화가 결정되는데, 위진남북조의 문화는 수당대까지 이어지는 가장 귀족적이고 화려하며, 국제적이면서도, 이민족의 색채까지 가미된 문화였습니다. 당대 지배집단이 <북방 이민족 왕조>와 <남방 한족 귀족 왕조>였으니까요.

위진남북조의 문화의 특징을 말하자면, 이민족 침입에 의하여 서방 문화가 급속히 전래된 가운데, 아주 다양한 문화가 각지에서 꽃핀 시기입니다. 호한체제가 구축되면서 북방문화는 중국문화에 융합되었고, 이것은 전통의 <중화사상> 속에 다양함이 융합된 새로운 문화를 양산하게 됩니다. 외래 종교인 <불교>와 다양한 종교가 유행하였고, 불안한 시대 속에서 염세주의적인 사상이 크게 융성합니다.

특히, 심한 격동기의 중국은 인생에 대하여 노장사상, 불교사상 등을 통하여 혼란의 원인을 찾으려 하였습니다. 유교는 이러한 혼란기에 제 역할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귀족문화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인간중심적인 문화였고, 유교의 전체주의적 윤리나 왕권강화윤리와는 반대되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북조왕조가 이민족 중심의 왕조로서 서역문화와 한문화가 섞인 문화라면, 남조왕조는 한족이 중심이 되어 <화려하고 우아한> 남조 귀족만의 독특한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남조문화는 북조문화보다 훨씬 더 귀족적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귀족문화는 결코 서민적이지는 못하였습니다. 이들 문화가 개성적이었다면, 그것은 귀족만의 독특한 특권에 의한 것이었고, 이들 문화가 국제적이었다면 이민족 왕조의 등장에 의한 특수한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 문화가 다양하다는 것은 귀족적 취미와 교양이 다양하다는 것이지 결코 대중적인 다양성을 확보한 것이 아니였습니다. 귀족문화는 그들만의 문화에 머물렀습니다.

실제, 서민문화가 출현하는 것은 귀족계급이 몰락하고, 사대부 계급이 성장하는 <송대 이후>입니다. 송, 원, 명, 청의 문화는 각각 문화적 특색을 달리하지만, 모두 <서민적 문화>를 존중하였다는 특색이 있습니다. 그러나 <위진남북조에서 수, 당>의 귀족문화에는 이러한 서민문화에 대한 배려가 없습니다. 이것으로 고대와 중세를 구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2. 현학 사상이 발전하다

현학사상이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유가사상이 쇠퇴하고 호족들이 대두하기 시작한 <삼국시대>부터입니다. 위나라 시대 이래 위진남북조의 혼란기에 사람들은 현실사회의 직접적인 문제와 인간 윤리보다는, 사후세계와 생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유가의 충효 원리>보다는 <노장사상과 불교>의 공사상, 무사상 등에 더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입니다.

위나라에서는 <정시의 음> 시대라고 하여 하안, 왕필 등이 <정음시대의 현학>을 논하였습니다. 현학이란, 도가사상의 철학인 노자, 장자, 주역 등을 논하면서 우주의 근본 원리인 <현 : 도>가 무엇인가를 논하는 사상을 말합니다. 이것의 핵심은 노장사상으로 주역이나 논어같은 심오한 사상을 연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도가에 나오는 무위자연, 소국과민, 자연합치 등을 이용하여 <유교, 음양오행> 등을 도가식으로 해석하는 것이죠.

하안은 노장사상으로 논어를 해석하였고, 왕필은 노장사상으로 주역을 해석하였다고 합니다.

3. 개인주의와 은둔주의 사상이 대두하다.

위진시대의 혼란한 사회상은 은둔주의 사상이 대두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특히 지방의 호족들과 아슬아슬한 시대에 태어난 2세대 관료군들은 중앙집권시대와는 다른 새로운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전제군주나 관료제도에 의한 재배체제를 벗어나서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하였습니다.

그들은 죽림칠현과 같이 은둔하려고 하였고, 어떤 경우에는 장자의 <무정부주의> 사상을 가지기 까지 하였습니다.

특히, 죽림칠현은 유교의 예교적 형식주의에 반발하여 유교를 적극 비판하고, 개인주의적인 사상을 강조하였습니다. 죽림칠현은 난세의 인간이 무엇인가를 연구하면서 고독한 인간존재를 철학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은 인간의 존재를 현상계를 초월한 <시공을 초월한 존재>로 여기는 <신선사상>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신선사상은 곧 노장사상에서 말하는 <자연합치>사상과 연계되어 세속을 탈피한 생활이 가장 안정된 삶이라는 이론으로 전개됩니다.

4. 완적의 자연주의 사상

죽림칠현이란 진나라 시대 대나무 숲에서 청담으로 세월을 보내던 7명의 노장사상가들을 말합니다. 이들의 이름은 완적, 혜강, 왕융, 향수, 완함, 유형, 산도 등 7명입니다.

이중 완적은 귀족가문의 유력자로 많은 사람들에게 관직을 권유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관직에 나가는 것이 곧 생명을 단축하는 미친 짓이라고 말하곤 하였습니다. 진나라에서 조비의 충신 <장제>가 관직을 권하였어도 완적을 거부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마의>의 정변으로 조씨 일가가 몰락하고 <사마씨>의 세상이 오자 세상 사람들은 모두 완적에게 선견지명이 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사마소가 완적을 사위삼으려고 하자 완적은 미친 듯이 술을 마셔 인사불성이 되어 사마소의 청탁을 거부한 적도 있었답니다. 사마소가 강제로 그를 관직이 앉게 하자 그는 곧바로 관직을 이용하여 말을 타고 유람을 떠나 버렸다고 합니다.

완적은 형식과 예법을 완전 거부하였습니다. 그래서 예법에 얽매인 사람이 완적을 찾아오면 눈동자의 <흰자위>를 드러내어 무섭게하고, 거문고나 술로 맞이하는 사람에게는 호의적으로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완적의 태도에서 <백안시> <청안시>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남을 업신여겨 냉정히 째려보는 것은 백안시, 남을 호의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청안시라고 합니다.

그는 상중에도 술과 고기를 맘껏먹고, 유교 예법을 거슬르는 행동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당시 집권자인 사마씨들과 대립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완적의 사상은 만물은 천지에서 나오고, 천지는 자연(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에서 나온다는 자연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연을 본받아 도가 변화하므로 군주가 도를 지키면 만물은 저절로 변화하여 조화로울 것이라 말하였습니다.

그는 자연과 봉건적 신분질서를 결합하여 <윗사람이 되어서 아랫사람을 능멸하지 않고 비천한 신분에 처하여도 귀한 이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5. 혜강과 광릉산의 악보 이야기

죽림칠현인 혜강의 아버지는 조조군대의 모사였고, 그의 아내는 조조의 친척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귀족이었지만, 항상 음악에 심취하여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날 혜강이 스스로 자부하는 거문고를 타고 있는데, 어느 노인이 그 거문고에는 <감정>이 없다고 말하면서 <광릉산>이라는 곡을 연주해주었습니다. 혜강은 광릉산 곡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흘리며, 항상 거문고를 탔다고 합니다.

광릉산 - 전국시대 진나라가 통일을 하기 위해 한을 공격하려고 하자 한의 대신 협루가 진과 내통하여 돈과 관직을 받고 한을 팔아넘기려 하였다. 이 때 대신 엄중자가 이에 분개하여 제나라로 망명하였는데, 이 때 백정출신인 섭정을 만났다. 섭정은 엄중자의 간청을 받아 한나라로 가서 협루를 죽인 뒤 자신의 얼굴을 못알아보게 하려고 자신의 얼굴과 신체를 으깬 뒤 죽었다. 한나라는 그 시체를 길에 버리고 누구인지 밝히려고 하였다. 이 때 섭정의 누이는 목숨을 걸고 시체옆에서 울어서 그 시체가 자신의 동생 시체임을 알리고, 동생이 <대의>를 행하였음을 알린뒤 자결하였다.

죽림 칠현은 나중에 사마씨의 회유책에 의해 해산되었으나 혜강은 같은 고집쟁이는 의연히 사마씨의 세력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혜강은 그 정신적 고통을 달래기 위해 시작과 회화에 몰두하고 그래도 울분이 풀리지 않으면 거문고를 탔습니다. 그리고, 대장장이가 되어 쇠를 두들기면서 울분을 풀곤 하였답니다.

 어느 날 혜강은 불에 군 쇠붙이를 두들기고 그의 친구 향수는 대장간의 풀무를 손으로 움직이고 있을 때 사마씨의 심복인 종회가 발문해 왔습니다.  종회는 혜강의 학식과 명성을 사모하여 그와 교제하기 위하여 방문했던 것이지만, 혜강은 종회가 온 뜻을 훤히 알고 있으면서도 짐짓 모르는 척 방약무인한 태도로 탁탁 쇠붙이만 두들기고 있었습니다. 종회도 또한 혜강의 뜻을 훤히 알고 있으면서도 쉽게 그 곳을 떠나려 하지 않았고, 서먹한 분위기가 오래 계속되자 참다못한 종회가 부아를 내면서 일어서 나갔습니다.

 혜강은 그제서야 비로소  입을 열었습니다.  "무슨 소문을 듣고 왔다가 무엇을 보고 가는 거요?"

 종회가 홱 돌아서며서 응수하였죠.  "들을만한 소문을 듣고 왔다가 볼 만한 것을 보고 가오."

 당시 조정의 권력을 제멋대로 휘두르던 사마씨는 완적과 혜강을 자파의 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갖가지 회유책을 썼습니다. 완적은 술과 익살스런 말로 그때 그때의 위기를 무난히 모면하였으나 혜강은 끝까지 사마씨 일파와 직설적으로 대결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희생되고 말았습니다. 사마씨 일파들은 혜강의 죄를 나조하여 그를 형장으로 끌고 갔답니다.

 혜강은 형장에서 한나라의 간신을 척살한 섭정의 행동에 깊은 감동을 느끼면서도 간신을 제거하지 못하고 도리어 그들의 술책에 빠져든 자신의 무력함에 회한과 통한의 분노를 삼켰습니다. 혜강은 그 자리에서 거문고를 빌어 '광릉산' 한 곡조를 탄주하였습니다. 자신의 온 생애를 바쳐 갈고 닦아온 그 곡조를 거문고에 실어 이승과의 마지막 작별을 고하는 그의 비장한 멜로디가 흡사 장송곡처럼 온 형장 안에 울려 퍼지자 주위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혜강은 거문고를 손에서 내려놓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였습니다.

"내가 죽는 것은 하나도 억울하지 않다. 그러나 '광릉산'아 , 너는 이후부터 세상에서 사라지게 되었으니 그것이 원통할 뿐이로다!"

그러나 서른 아홉에 혜강은 죽었지만, 광릉산은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 사실 제가 읽은 김용의 소설중에서 가장 감명깊었던 작품중의 하나가 <소오강호>였는데, 거기에서 유정풍과 곡양장로가 광릉산 악보를 발견하여 둘이 음악으로 맺어진 친구로 나오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가장 감명깊었던 장면중에 하나이고, 눈물나는 장면중에 하나였죠. 그 장면에 감동받아서 김용작품의 시리즈를 군대에서 반년 만에 모두 완독했던 적이 있습니다. 월나라 월녀검법에서 청나라 녹정기까지 모두요....

6. 청담이란 무엇인가?

청담사상은 중국 위진남북조 시대에 귀족사회에서 유행하던 탈속적인 논담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청, 담은 말 그대로 세속을 떠난 깨끗한 이야기를 말하지요.

이것은 역과 노장사상, 인물비평등을 토론형식을 빌어서 논하는 것이었는데, 초기 이러한 노장사상적인 논쟁을 <현학>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점차 현학적인 기풍은 비현실적인 공론으로 기울어졌고, 나중에는 죽림칠현과 같은 무정부적이고, 자연주의적인 논쟁으로 기울게 됩니다.

이들은 세속적 가치를 초월한 철학적인 논쟁을 좋아했고, 예술적인 가치를 중시하였습니다. 완적의 철학사상과 혜강의 광릉산은 그 대표적인 예로서 제시한 것입니다. 이들은 인간 현실에 대한 비관적 현실을 떠나 우주론적인 최고 원리의 경지가 무엇인가를 토론하였습니다.

이 청담 사상은 초기에는 노장사상과 탈세속적인 사상, 정부 비판 사상이었지만,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뷸교>사상 쪽의 청담 이야기로 변환됩니다. 위진의 노장사상 - 남북조의 도교사상 - 수, 당에서의 불교 사상으로 이야기의 논의가 변화되면서, 점차 불교사상을 이해하는데 주력하게 됩니다.

실제 중국 초기 불교는 불교사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노장사상을 도용합니다. 불교의 <공> 사상은 도교의 <무위>사상으로 이해하였고, 불교의 <열반>의 개념을 도교의 <신선>개념으로 이해하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은 청담이 진행된 과정을 보여주는 일례이자, 초기 불교 수준이 너무 낮아 노장사상이나 현학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노장사상은 청담사상과 함께 발전하였지만, 점차 불교적 색체를 띄게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노장, 청담, 불교사상의 유행은 전통 유학자들에게는 비판의 대상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상에 대한 반발로 <숭유론>이 유행하고, 유교부활을 말하는 자들도 많았지만, 그들의 견해는 대부분 묵살되었다고 합니다. 위진남북조의 혼란기는 유교적 도덕원리가 통하기에는 너무 어수선한 사회였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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