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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크로스 퀴즈(난이도 :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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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퀴즈

  1. 교청청에 이어, 갑오개혁을 이끌었던 기구
  2. 중국 후한의 건국자인 유수가 호족들을 대표하여 왕족으로서 왕에 즉위하여 *** 가 되었다.
  3. 아미타불의 왼편에서 교화를 돕는 보살. 사보살의 하나이다. 세상의 소리를 들어 알 수 있는 보살이므로 중생이 고통 가운데 열심히 이 이름을 외면 도움을 받게 된다.
  4. 백제의 무덤중에 편년연대가 기록되어, 왕과 왕비의 무덤임을 알 수 있는 무덤이다. 지석에 매지권이 적혀있어 국왕과 토지신의 거래 내역을 알 수 있다. 부장된 대부분의 유물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5. 기록에 의하면, 단군 가륵 2년, 즉 B.C. 2181년 삼랑 을보륵이 正音정음 38자를 만들었는데, 이를 일러 *** 라고도 하였다. 민족주의 사학자 신채호가 제기한 이래, 고조선에서 사용한 문자가 있었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다.
  6. 고려 공민왕 때의 권신(權臣)(?~1356). 누이동생이 원나라 순제(順帝)의 둘째 황후가 되어 태자를 낳아 덕성 부원군(德成府院君)에 봉해졌는데, 횡포가 심해서 민폐가 많았다. 공민왕이 원나라를 배척하는 정책을 쓰자 반역하였으나 진압되어 죽었다.

세로퀴즈

  1. 926년에 발해의 유민이 압록강 중류 지역에 세운 나라. 거란족과 고려 사이에서 세력을 보존하기 위하여 송나라와 자주 왕래하였으나 986년에 거란에 망하였다.
  2. 전통 유교사상에 따르면, 사람은 예를 지키는 노력에 따라 성인, **, 소인으로 분류된다.
  3. 대한민국의 가면극으로,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궁중의 연희 때 세모에 역귀를 쫒는 의식 뒤에 추던 향악의 춤이다. 기원은, 아내가 역신과 동침하는 것을 보고 향가를 지어 역신을 물리쳤다는 삼국유사의 이야기에서 비롯된다.
  4. 고국양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의 왕이 되었다. 거란, 여진, 몽골 등을 제압하고, 고구려의 영토를 북방으로 넓혔다.
  5. 신석기인들이 사용한 대표적인 토기이다. 마치 비가 내린 것처럼 사선이 그어져 있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6. 중국 삼국지에 나오는 인물. 유비와 의형제이다. 중국에서는 액귀를 쫒는 전통신으로 추앙되는가 하면, 성인으로 모시는 사당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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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편>

16화. 고구려의 불교 이야기

1. 불교가 원시 신앙을 대신하다.

자, 이번 회부터의 불교 이야기는 우리 역사 속의 불교 이야기이다. 그럼 시작해볼까?

한반도의 불교 이야기는 인도나 중국 이야기처럼 재미있는 일화로 구성하기가 힘들다. 특히, 고대 불교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해동고승전 등 일부 자료와 중국측 기록 외에는 남아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가 불교 이야기를 적더라도 거기서 거기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감안해야 한다.

일단, 삼국유사에 따르면 불교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에 전진왕 부견이 승려 순도를 통해 불상과 불경을 전파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2년 뒤 아도화상이라는 스님이 다시 건너오자 성문사에 순도를, 이불란사에 아도를 머물게 하여 불법을 전수받았다고 말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첫 번째 이야기는, 고구려에 전해진 불교가 372년이라는 점에서 추론할 수 있다. 372년은 전진왕 부견이 불도징을 초빙하여 불교가 뭔지를 간신히 깨닫고 있던 시기였다. 아직 도안, 구마라습 등은 불도징의 초빙조차 받지 못한 시기였다.

참고링크 : 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 6화. 현학, 청담에서 시작된 격의 불교 이야기

따라서, 고구려에 전해진 불교는 불교이론이 확립된 도안이나, 구역경을 번역한 구마라습의 시기가 아니라 초기의 원시적인 불교였다고 볼 수 있다. 즉, 주술로 꽃을 피우거나, 도교의 신선 이야기로 부처의 이론을 설명하는 격의불교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불도징, 도안, 구마라습 이야기는 위 6, 7 화 링크를 참조하기 바란다.)

다음으로 주목해야 할 점은, 이런 수준 낮은 불교를 왜 국가가 도입했느냐는 점이다. 그 이유는 고대 민간 신앙에서 추론해볼 수 있다.

고구려 초기의 민간 신앙은 상당히 다양했다. 특정 부족신을 숭배하는 부족신 신앙, 동물을 숭상하는 토테미즘, 다신교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정령숭배사상(애니미즘), 주술사를 통해 하늘과 지상을 이어준다는 무격 사상(샤머니즘) 등이 여기 저기에 존재했다.

다양한 종교 사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만큼 국가 체계가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증거다. 국가에서는 주몽이나 유화부인을 숭배하는 사상(시조신 숭배)을 강조했지만, 각 지역별로 다양한 민간 신앙이 존재했다. 이러한 민간 신앙들은 종교적 역할 뿐만 아니라 일반민들의 사회생활을 지배했고, 심지어 국가가 아닌 지역 공동체에 대한 충성심마저 유발하는 것이었다.

당시 백제에 의해 고국원왕이 죽고, 중국 북조의 압박으로 정치적 입지가 약해진 고구려의 왕실은 부족 통합을 위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불교는 그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알맞은 것이었다.

2. 전진왕과 소수림왕의 정치적 거래

소수림왕 때 들어온 불교는 사실 제대로 된 석가모니의 참 뜻을 이해하기 힘든 불교였을 것이다. 전진왕 부견도 불교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스님은 전쟁의 수호신이거나, 불법으로 국가를 지켜주는 주술사> 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불교를 왜 고구려가 받아들였을까?

첫 번째 이유는, 불교가 이미 고구려 민간 신앙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국가적으로는 소수림왕 당시 불교가 전파되었지만, 민간에서는 이미 불교 신앙이 전파되어 있었다. 해동고승전(석망명전)에는 이미 청담사상가들이나 격의불교를 이해하고 있는 중국 고승들이 고구려 불교인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왕래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기록은 고구려인들이 신선 사상과 불교 사상을 이미 접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두 번째 이유는, 소수림왕의 왕권 강화를 위한 사회적 구심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소수림왕은 태학 설립, 율령 반포 등을 통해 중앙 집권 국가로 나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국왕이 신성하다는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이전보다 약화되어 있었다. 고조선부터 전해내려온 제천의식은 더 이상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동예의 무천, 부여의 영고와 같이 대부분의 군장국가부터, 고구려 내부의 각 부족까지 모두 제천의식을 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신사상과 다른 새로운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위해 불교의 수용은 필요했다.

마지막 이유는, 소수림왕의 대외 정책 때문이었다. 소수림왕은 국가안정을 위해 전진왕 부견과의 화해가 필수적이였다. 전진왕 부견은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 고구려와 화해가 필요했다. 소수림왕은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기 위해 그동안 적이었던 중국 북방의 전진왕과 손을 잡았다.

이것은 중국 북방과 동아시아 북방이 화해를 함으로서 각각 자신들의 영토를 통일할 기반을 마련하고자 한 획기적인 외교적 전환이었다. 이제, 이들은 치고 받고 싸우지 않는다. 그 결과 소수림왕의 후대에 광개토대왕, 장수왕, 문자왕이 동북아를 평정할 수 있는 외교적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3. 격의 불교와 호국불교

고구려 초장기 민간에서는 불교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천신 신앙이나, 신선 신앙으로 불교를 이해하려고 햇던 듯 싶다.

이제 주술사(샤먼)의 역할은 스님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명칭만 바뀌었을 뿐 스님이 곧 샤먼이었다. 스님이 손으로 마법을 부려 백성들을 치유하거나, 전쟁에서 수호신 역할을 한다는 믿음은 전진왕 부견 시대의 <불도징>이 불법을 전파하기 위해 활용했던 전략이었다.

주술사들의 웅얼거림과 마법적인 이야기들은 그대로 스님들의 이야기로 전해졌고, 그것이 스님들과 관련된 <향가 이야기>로 전해졌다. 부처와 보살, 미륵을 제대로 구분할 방법이 없었던 고구려에서는 보살을 산신령으로, 미륵을 하늘에서 내려온 지배자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절은 원시신앙에서 제천의식을 행하던 신성한 자리에 건립되었고, 전통적 재래신과 보살은 구분이 애매하였다.

특히 고구려는 산신령이나 도사와 같은 <도가 신앙>이 초기부터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도교 사상으로 불교를 이해하는 격의 불교가 쉽게 전파되었다. 부처의 <색즉시공>은 노자의 <무위자연>으로 이해하였고, 불교의 <해탈, 열반>은 도가의 <신선>으로 이해하였다.

반면 지배층은, 불교를 지배 이데올로기로 활용하는 중국 방식을 철저히 응용하였다. 특히, 불교에서 강조하는 윤회설, 업설 등을 묶어 <인과응보>로 정리하여 지배층의 우월함을 강조하였다.

특히 <업설>은 전생의 행위에 따른 윤회를 강조한 것으로 국왕의 신성함을 극대화 시켰다. 국왕은 전생에 높은 공덕을 쌓았기 때문에 만민의 지배자로 다시 태어났다는 논리를 강조했다. 왕은 곧 부처의 화신이며, 귀족들은 왕을 도와 불국토에서 안락을 누릴 미래의 보살들인 것이다. 노예들은 전생의 악덕함 때문에 현실의 고뇌가 시작된 것이므로 누군가를 탓해서는 안되는 신분이 되었다.

또 하나 왕권 강화를 위해 제시한 것은 <연기설>이다. 연기란, <인연>을 말하는 것으로 불교에서는 모든 만남은 이전의 원인과 결과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내가 누군가와 만난 것은 수십만개의 인연이 돌고 돌아 이루어진 것이다. 즉, 모든 현상은 홀로 이루어진 것이 없으며, 상호 관계 속에서 돌고 돌아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개체는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사실 우주 안에 살아가는 수많은 현상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어떤 원인이 없었으면 지금 너와 나의 만남이란 없다. 따라서 모든 사물은 전체 속에 포함되어 움직이는 것이다.

이것을 왕권에 대입하면? 모든 개인은 국가 속에서 활동하며, 국가의 흥망이 개인의 운명을 좌우한다. 모든 부족들도 왕권이라는 공동 운명체 속에서 인연을 만들어 갈 뿐, 독단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결국, 개인과 부족이라는 개체를 떠나 초부족적인 통합의 법(다르마)이 존재한다. 따라서 국왕의 행동과 국가의 율령은 모든 개체들의 운명을 위해 절대적인 것이 된다.

이것이 고구려의 초기 불교 이념이었던 것이다.

4. 광개토대왕과 불법

광개토대왕, 장수왕, 문자왕은 고구려 최전성기의 3대 태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왕들은 모두 불법의 수호자였다.

소수림왕이 불교를 받아들인 후 다음 왕은 드라마 태왕사신기에 나왔던 <고국양왕>이다. 고국양왕은 소수림왕이 불교를 받아들인 참 뜻을 깨닫고, 광개토(담덕)에게 <불교를 받들어서 복을 구해야 한다>는 충언을 하였다.

광개토대왕은 선대 왕들의 유지를 깨닫고 불교를 통한 국가 보호 사업을 추진하였다. 광개토대왕 2년에 평양에 9개의 절을 지었는데, 그 이유는 선대 왕들을 끊임없이 괴롭히던 강력한 백제군을 부처님의 가호로 막겠다는 뜻이었다.

평양은 남방으로 내려가는 길목이자, 백제군과 계속적인 전투를 벌었던 요지이다. 또 고조선의 수도이자, 대동강을 통한 국제 무역의 공식 루트였다. 광개토대왕의 불심으로 미루어 북방에도 많은 절들을 건립했을 것이지만, 기록에 없으므로 생략하기로 한다.

단, 당시 5세기의 불교는 구마라습의 구역경이 번역되어 전파된 시기이기 때문에, 국왕이 곧 부처라는 북조의 <왕즉불>사상이 전파되었음은 예측할 수 있다. 광개토대왕도 불법의 수호자이자, 자신이 곧 전륜성왕이라는 이념을 생각했을 것으므로, 세계 지도자로서의 불법왕을 생각해보았을 것이다.

5. 장수왕과 불교 첩보전

광개토대왕이 북방으로 영토를 넓혔다면, 다음 왕인 장수왕은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기 위해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고 남진정책을 실시한 왕이다. 장수왕 때에는 불교에 관련된 재미있는 고사가 나온다.

장수왕이 백제에 보낼 간자(첩자)를 찾고 있었는데, 승려 도림이 자발적으로 첩자가 되겠다고 했다. 도림은 고구려에 큰 죄를 짓고 망명한 스님으로 위장하여 백제 개로왕에게 접근을 한다. 개로왕이 바둑을 좋아하자 도림은 왕의 바둑 친구가 되어 왕의 신임을 얻는다.

도림은 개로왕에게 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거대한 건축 사업을 제안한다. 궁궐 보수, 왕릉 개축 등을 위해 백성들을 징발하여 화려한 건물을 짓도록 한 것이다. 이 사업으로 백제의 창고는 비게 되고, 백성들은 고된 노동을 하게 되면서 국가를 원망하게 되었다. 도림은 장수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고, 장수왕은 총공격을 실시하여 백제 수도를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죽였다.

즉, 스님이 첩보활동까지 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몇가지 고구려 불교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

먼저, 불교 스님이 불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국왕을 위해 헌신한다면서 간첩질까지 한다는 점이다. 초기 고구려의 불교가 얼마나 국가 권력에 종속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또, 국가를 지키기 위해 백제의 백성들을 궁지에 몰아넣은 것은, 불교 자체가 성숙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중생 구제라는 참 뜻 조차 파악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두 번째로 불교 전파를 신라가 크게 반대한 이유도 설명이 된다. 신라에서 이차돈의 목까지 잘라가며 불교를 믿으라고 절규할 만큼 불교가 전파되지 못한 점 중 하나가 이런 <불교를 이용한 침략작전> 때문일 수도 있다.

물론, 불교를 전파받는 국가의 지배층은 새로운 사상 자체가 기득권을 흔들 수 있기 때문에 반대한다. 그러나, 그 이유로 <불교라는 종교가 기존 사회체제를 흔들기 위한 선진국가의 함점>이라고 항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이야기는 삼국사기에 나온다.)

6. 장수왕 이후 불법의 참뜻을 파악한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까지의 불교가 왕권에 휘둘리던 호국 불교였다면, 그 이후의 고구려 불교는 진정한 불교의 뜻을 파악하기 시작한 <종파 불교>였다.

부처의 진정한 뜻을 탐구하고자 노력한 고구려 스님들의 노력은 장수왕 말기 <승랑>에서 시작된다.

승랑법사는 중국에서 구마라집이 인도불경을 번역하여 불경의 참 뜻을 해석하자 그의 경전을 읽으면서 불법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북위로 건너가 중국 대승불교의 참 뜻을 연구하였다.

춘추전국시대

위진남북조

5대10국

BC770 -

BC221-

BC206 -

265 -

581 -

618-

907 -

960 -

혼란기

통일기

통일기

혼란기

통일기

통일기

혼란기

통일기

제가백가

법가

유가/불교유입

격의 불교

종파형성

종파불교

유교중흥

유학완성

 

그는 특히 반야(지혜)가 무엇인가를 연구하는 <성실종>을 연구하면서 인도 대승불교의 창시자인 용수의 반야사상을 연구하였다. 그가 연구한 학문을 <삼론학>이라고 한다.

삼론종 7대조 : 구마라집 - 승조 - 법도 - 승랑- 승전 - 법랑 - 길장

특히 승랑은 중국의 성실종과 달리, 오로지 순수한 인도의 대승불교만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삼론종의 계보를 잇는 7대 대사로 이름을 날렸다.

삼론학파란?

중론, 백론, 십이문론의 3가지 이론을 내세우는 불교 학파.

이들은 모든 사물은 원래 실체가 없다는 공(空) 사상을 주장하기 때문에 중관학파(공사상 학파)로 분류된다. 아무 것도 없다는 3론은 다음으로 정리해 본다.

1론 :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집착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집착하지 않는 것이 곧 진리이다. 집착은 언어가 만들어낸 허구적 형상이므로, 결국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불법의 최고 단계이다.

2론 : 만물이 실제한다는 것과 실체가 없다는 것도 언어에 의한 말장난일 뿐이므로, 어느 한쪽에 치우침 없이 중도를 걸어야 한다.

3론 :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탄생도, 소멸도, 영원도, 순간도 없다. 하나도 아니며 여럿도 아니다. 오는 것도 아니며 가는 것도 아니다. (팔부중도)

삼론종은 성실종에서 주장했던 <마음으로 인식하여 언어로 표출>한다는 인식론을 아무 것도 없다는 공 사상으로 체계화하여 정리하였다. 이 삼론종은 중국보다는 고구려에서 더 활성화 되었는데, 수나라 때 길장은 삼론종 7대사에 들어가며, 제자인 혜관은 일본 삼론종을 개창하였다. 이 삼론종은 훗날 법성종으로 불리며 명맥을 이어간다.

반면, 공 사상과 별도로 <유식> 사상을 주장한 이들도 있었다. 중국에서 유식학을 공부한 원측은 눈에 보이는 <본질>이 실제 존재한다는 이론을 주장하였다.

모든 것은 실체가 없는 것인가, 눈에 보이는 본질이 존재하는가의 문제는 <공유논쟁>으로 학문적 논쟁을 야기시켰다. 비록 고구려 불교 교단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지만, 불교 자체가 왕권을 벗어나 스스로 발전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7. 승군으로 활약한 고구려의 불교 교단

점차 독립적인 불교 교단으로 발전한 고구려의 불단은 국가 위기 상황에서 큰 힘을 발휘하였다.

불교에서는 불법을 연구하는 교단도 국가의 위기 상황에서는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관례가 되어있다. 신라 원광 법사의 세속오계, 고구려 불법 단체들의 몽골 항쟁, 임진왜란 등에서 보여준 스님 의병들의 모습이 대표적인 예이다.

불교 단체가 <호법>이라는 이름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이유는 2가지이다.

첫 번째 이유는, 이 땅이 국왕의 땅이기 이전에 진리를 연구하는 불국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처의 땅을 지키기 위해 외적은 반드시 물리쳐야 한다는 호법 사상이 있는데, 이것을 정의를 지키는 정법(다르마 : Dharma)라고 한다.

두 번째 이유는, 국가가 불법을 보장하고 지켜주는 한 불법이 펼쳐지고 있는 국가를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 때문이다. 불법의 <연기설>에 의하면 국가가 없으면 불법도 없다. 국가가 불법을 인정한다면 불교 교단은 국가의 위기에서 국가를 지켜야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고구려에서도 국가의 위기 때 직접 전장에 뛰어든 스님들이 있다.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 우리는 살수대첩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 때, 7 승려들이 살수(청천강) 위를 홀연히 걸어갔는데, 수나라 병사들은 스님들의 행동을 보고 물이 얕다고 생각하여 청천강을 건너기 시작했고, 그 결과 수 많은 군사들이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그 이후 7 스님의 동상을 세워서 공적을 칭송한 절이 바로 <칠불사>이다. (동국여지승람)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 고구려 스님 3만명이 당 군대와 치열하게 항쟁하여 물리친 기록도 있다. (고려서 열전 외전)

그러나, 실제 남아있는 기록 및 유물과는 다르게 삼국사기에는 이러한 기록들이 모두 생략되어 있다. 따라서 몇몇 사료와 남아있는 사원 등을 통해 짐작해 볼 수밖에 없다.

8. 번성한 고구려의 불교와 쇠퇴 과정

점차 독립적으로 발전하게 된 고구려의 불교는 일본에 전파되었다.

혜편은 일본 불교 최초로 비구니를 양성하였는데, 선신, 혜선 두 일본여인을 가르쳐 출가시켰다고 한다. 혜자는 고구려의 공식 사절로서 쇼토쿠 태자의 스승으로 활약하다고 귀국하였는데, 지금도 호류사에는 혜자법사 상에 존경의 예를 표하고 있다.

담징은 법정과 함께 불교와 더불어 종이, 먹 등의 기술을 전파하였고, 호류사의 금당 벽화를 그렸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1949년 화재로 벽화가 타 버린 이후 재현된 모사 벽화에는 담징에 대한 일체의 언급을 빼 버렸다.

혜관은 일본 2대 승정이 되었고, 도현은 일본세기를 저술하였으며, 승륭, 운총 등은 일본 사절로 일본을 방문하여 많은 문물을 전파해 주었다.

그러나 5-6세기 전성기를 맞이했던 고구려 불교는 7세기에 급격한 쇠퇴를 맞이하게 된다. 그 이유는 최고 집권자인 연개소문의 불교 탄압 때문이었다.

중국 불교를 이야기하면서 불법이 고유한 철학을 찾아가게 되면 도교나 유가를 이용한 탄압이 뒤따른다는 점을 언급했었다. 우리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시기에 왕권 강화에 이용되었던 호국 불교가 사라져가고, 불교가 독립성을 주장하자 집권자인 연개소문은 중국 당나라에서 유행하는 <호국 도교>를 이용하여 불교를 배척하였다.

그 결과 많은 스님들이 망명하게 되고, 고구려의 불교가 쇠퇴하게 되었다. 특히, 고구려 말기에는 모든 백성들이 부처가 될 수 있으며, 깨달음은 가까운 곳에 있다는 열반종 사상까지 들어오게 되자 탄압은 더욱 심해졌고, 보덕이 개창한 우리식 열반종은 백제, 신라 등 남방 국가로 이전되어 전파되었다.

반면, 북교 교리가 심화되자 불교 교리를 통합하기 위한 통합 종교들도 유입되었다. 중국에서 사상 통합을 위해 활용되었던 천태종, 화엄종 등의 교리가 고구려에 유입되었고, 특히 천태종은 고구려 말기에 불교 통합 사상으로 등장하였다.

고구려는 연개소문 이후, 급격한 국력쇠퇴와 내분으로 멸망하였고, 고구려의 종파 불교도 그 꽃을 다 피우기 전에 사라졌다. 다음 편에서는 백제, 신라, 가야의 불교 역사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고 넘어가도록 하자.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by 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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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만원, 10만원권 고액 화폐권 2차후보 역사인물 10명

1. 어떤 사람이 후보가 되었을까?

한국은행에서는 2009년부터 발행될 5만원권, 10만원권 지폐의 인물 후보를 10명으로 압축해서 2차로 발표했습니다. 그 인물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김구, 김정희, 신사임당, 안창호, 유관순, 장보고, 장영실, 정약용, 주시경, 한용운

2차로 발표된 인물에 대한 각기 평가가 너무 상이하기도 합니다. 예로, 각종 인터넷 포털사이트 등에서 1위를 차지한 광개토대왕은 아예 평가후보에서 빠졌습니다. 국민들은 광개토대왕을 원한다고 하지만, 중국의 동북공정 등의 정치적 파장을 고려해 아예 처음부터 삭제한 것이지요.

여성사이트에서는 신사임당, 유관순, 허난설헌, 김만덕 등의 역사 속 여성들이 많은 표를 차지했지만 신사임당과 유관순을 제외하고는 모두 10인 후보에는 빠졌습니다.

단재 신채호 등 민족주의자들이나 독립 운동가들이 대거 빠진것도 눈의 띕니다. 신채호의 사상은 무정부주의적인 사상이 많다는 점, 안재홍은 월북한 민족주의자라는 점, 윤동주, 김소월, 방정환 등도 10인 후보에서는 탈락하였습니다. 소위 좌파 사상가라는 것도 미래성에 맞지 않은 듯 합니다.

건국이후 인물들은 모두 제외된 점도 특이합니다. 박정희, 김대중, 이승만 등의 인물은 역사적 평가와 업적이 규명되지 않은 점이 많고, 국민적 논란 및 정치적 파장이 크다는 입장인 듯 합니다. 이들은 아예 후보군에도 없었습니다.

2. 인물 선정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10만원권은 이후 오랜 기간동안 한국 지폐의 최고권으로 나라를 대표할 돈입니다. 지금까지 나라를 대표하는 돈인 만원권은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이었습니다. 세종대왕의 업적이 너무 눈부신 만큼 여기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0만원권 지폐에서 세종대왕만큼의 업적을 가진 인물을 선정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될 듯 합니다. 그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10만원권의 지폐에 들어갈 역사적 인물은 어떤 기준을 가져야 할까요? 한번 정리해 보았습니다.

1. 그 나라의 역사성을 대표하는 인물이어야 한다.

첫 번째, 가장 중요한 기준은 그 나라의 역사성을 대표하는 인물이어야 합니다. 대부분의 나라들이 화폐 인물의 기준을 역사성에 두고 있습니다. 영국의 모든 지폐에는 엘리자베스 2세가 들어갑니다. 인도의 모든 지폐에는 간디가 들어갑니다. 중국의 지폐에는 어김없이 마오쩌둥이 나옵니다. 모든 지폐의 앞면에 이 인물들을 넣고, 뒷 면에서는 다른 분야인 정치, 경제, 사회, 문화면의 인물들을 새겨넣습니다. 같은 인물이 계속 나오는 돈이 식상할지 모르지만, 이 인물들이 그 나라를 대표하는 인물들이기 때문입니다.

영국은 엘리자베스 1세 때 르네상스, 절대왕정, 신항로 개척, 식민지 시대를 열었습니다. 여왕은 영국인들의 자부심을 표현합니다. 영국 왕실은 아직도 여왕을 사랑하며, 국민들은 왕실을 존중합니다. 지금 1952년 즉위한 현재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화폐에 들어감으로서 <웃고 있는 여왕의 모습>이 영국의 모습을 상징하도록 도안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과거 역사 속의 엘리자베스 1세나, 빅토리아 여왕이 아니라 현재 여왕을 화폐에 넣음으로서 국민적 단합을 유도한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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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화폐 50 파운드 - 엘리자베스 2세의 웃는 모습

중국의 화폐의 마오쩌둥은 중국 근현대사를 상징하며, 인도의 간디 역시 인도의 평화사상을 상징하도록 도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 인물들을 보면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어야 진정한 국민 화폐의 역할을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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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화폐 1천루피 - 간디의 자상한 모습

2. 외국인들이 보기에 그 나라의 정체성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화폐를 선정할 때 중요한 점의 하나는 <화폐가 통용되는 곳이 국내뿐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외국화폐를 볼 때 화폐 속 인물들이 누구인지 궁금해하는 것처럼 외국인들도 우리 화폐에서 우리 나라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하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한은의 후보군에서 단군, 광개토대왕, 을지문덕 등은 후보에 없거나, 중요성이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외국인들이 보기에 큰 가치가 없거나, 주변국과의 논란이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건 큰 오산이라고 생각됩니다.

미국 화폐의 조지 워싱턴은 영국과의 독립전쟁을 이끈 장군입니다. 하지만 영국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화폐에서 빼지는 않습니다. 광개토대왕을 중국의 동북공정을 고려해서 후보군에서 제외되거나, 단군이 실존인물인지 알 수 없다는 이유로 후보군에서 제외한다면 우리 역사의 정체성을 우리 스스로 잘라 버리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단군이 우리 국조가 아니고, 광개토대왕이 영토를 넓힌 것이 사실이 아닌지는 생각할 가치도 없을 뿐더러, 외국의 입장을 고려하여 우리 정체성을 폄하하는 입장으로는 제대로 된 화폐를 만들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주변국의 입장을 살펴 우리의 외교자세를 선택한다는 실리주의는 실리주의가 아니라 사대주의로 비칠 수도 있습니다.

중립국인 스위스는 인물 화폐가 아니라 뭔지도 모를 추상화 같은 화폐를 도안하기도 했습니다. 도대체 말도 안되는 그 화폐를 통용한 것은 미래로 나가는 스위스인의 정체성을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추상화같은 화폐는 둘째로 하고라도, 역사 속 인물들을 특정한 이유로 배제하는 행동만큼은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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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래봐도 모르겠습니다. 스위스 화폐
  

화폐를 보는 외국인들이 그 인물을 보는 순간, 이나라의 역사성과 민족적 기상이 살아있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화폐, 또는 그 나라의 역사성을 한 눈에 생각할 수 있는 화폐가 되어야 합니다.

3. 사상적 체계가 살아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화폐를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순신, 이황, 이이, 세종대왕.... 모두 이씨 입니다. 다른 종친회에서 반발할만도 하네요. 이번 화폐에서는 이씨를 빼자는 움직임도 있습니다.

그런데, 기존 화폐의 특징은 이씨라는 것보다 이들이 모두 조선시대 성리학과 연관된 인물이라는 점입니다. 세종대왕이야 성리학적인 애민정치를 하였고, 이황과 이이는 성리학을 완성시키고 조선성리학으로 발전시킨 분들입니다. 이순신 역시 성리학이 자리잡혀가고 붕당정치의 흐름 속에서 살았던 인물이지만, 이순신의 업적은 성리학보다는 장군으로서 위대함이였죠. 기존 화폐의 기준에 사상적인 측면이 들어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실제 화폐에 들어갈 인물이라면 사상적 체계가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의 업적이 어떤 사상에서 나온 것이고, 그 사상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표현되고 있었느냐가 중요합니다. 화폐의 인물은 그 인물의 단순한 업적이 아니라, 그 시대 속의 상황 속에서 그 사람이 행한 합리적 행위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지나치게 조선시대 성리학 인물만으로 화폐가 도안되었습니다. 우리 역사에 조선시대만 있었고, 우리 역사의 황금기가 조선시대였다라는 인식을 할 수밖에 없는 화폐 도안이었습니다.

우리 역사에는 고조선, 철기시대 국가들,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고려 그리고 대한제국까지 많은 영토국가가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이외의 국가에서도 사상적인 체계가 있는 인물들은 참 많습니다. 유교 인물은 많았지만, 정작 조선 이전 역사에 큰 흐름을 좌지우지 했던 불교사상이나, 민족 종교인 천도교, 대종교 등은 포함된 적이 없습니다.

또, 일제시대 민족운동을 한 사람들의 사상은 지금까지 폄하되어 있었습니다. 당대 일제에 대한 저항은 무정부주의, 폭력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계몽주의 등 다양했습니다. 그 사람들의 사상이 공산주의인지, 사회주의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시에는 그 사상이 일본에 저항할 수 있는 하나의 방편이었으니까요. 사회주의를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당시의 상황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채호는 무정부주의자라서 제외한다면, 일본 고관들에게 폭탄을 던진 한인애국단의 리더 김구 선생님도 폭력주의자가 됩니다.

사상적 체계는 당시 상황을 고려하여 계산되어야 합니다. 단지 성리학을 완성시킨 인물들만 지폐가 채워진다면 미래에 대한 지향성이 살아나지 않습니다.

4. 한국 사회의 미래를 엿볼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화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역사성이지만, 그 역사성은 과거의 업적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역사성이여야 타당합니다. 예로, 장영실은 우리나라가 지향할 IT산업과 이공계 산업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10인안에 선정되었고, 장보고는 후기신라시대 해상왕으로서 그 상업적 마인드와 탁월한 외교능력 등이 인정되어 10인안에 선정되었습니다.

단, 미래성만 있는 인물은 국민화폐로서 무게감이 떨어집니다. 역사성과 확실한 사상체계, 우리 조상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인물 중에서 미래성을 볼 수 있는 인물로 선정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3. 정말 고심해서 좋은 인물이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선정된 역사 속의 인물들에 대하여 벌써 말이 많습니다. 이 사람은 안된다. 이 사람이 왜 빠졌는가.... 말이 많죠. 선정된 인물들 모두 역사 속에서는 훌륭한 위인들입니다. 그러나 화폐에 들어갈 인물은 위인의 경중을 따져서 선별해서는 안됩니다. 역사성과 사상성, 인간적 노력, 미래성 까지 갖춘 인물을 가려야 합니다.

이번에 10인의 후보를 보면 역사성, 사상성 보다는 한국사회의 미래지향적인 면을 많이 고려한 듯 보입니다. 역사적인 위대한 인물들은 더 많을 지 모르지만, 그 인물들 가운데 미래 한국사회의 이상향으로 적합한 인물을 후보로 고른 듯 싶네요.

민족정체성만으로 선별한다면, 시조인 단군과 광개토대왕을 뽑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후보군에 없습니다. 감강찬, 을지문덕, 서희 등 역사속 무관들은 없습니다. 한국 사회가 지향하는 바와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미래의 한국사회가 여성을 중시하는 사회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신사임당과 유관순 같은 여성인물들이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과학사회를 주도하는 미래의 한국을 본다면 장영실을 뽑을 수 있겠죠.

실학자로서 기존의 사상체계와는 다른 변화된 사상을 제시하여 조선사회의 변화를 꿈꾼 정약용도 후보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조선후기 실학자로서는 정약용과 김정희 두 분이 들어가 있습니다. 국가 속에 포함되지 않은 인물이지만, 해상왕 장보고의 상업적 마인드와 미래 지향적 태도도 높게 평가되었습니다.

일제시대 이후의 인물로서 독립에 앞장선 김구, 안창호, 한용운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실제 일본의 침략에 의해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라는 기틀을 잡게 된 중요한 시점의 인물들이 화폐 도안에 없다는 점에서 김구 선생님도 유력한 후보중의 한 분이십니다.

이제 10인 가운데 2분이 5만원권, 10만원군의 지폐에 들어갈 인물이 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여러 사회단체들의 입장 속에서 추려낸 후보군이라, 역사성을 가진 인물보다는 미래성을 가진 인물들을 많이 택하였다는 점이 아쉽긴 합니다. 하지만, 이 인물들 중에서 어떤 인물이 한국을 대표할 지폐에 들어가게 될지 기대가 많이 됩니다.

인터넷에서 블로거들이 합성한 10만원권 인물......(재미로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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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가 장금이까지 지폐 후보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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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토막 역사 2화. 3개의 짧은 이야기...

1. 황제나 지배자를 뜻하는 <카이저, 차르>의 어원은 무엇일까?

우리는 흔히 러시아의 지배자를 뜻하는 뜻인 <차르>라는 말을 종종 듣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 말은 어디에서 유래된 것일까요? 러시아의 지배자인 차르, 독일에서 황제라는 말은 카이저는 모두 로마 공화정 말기의 지배자였던 카이사르(시저)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카이사르는 로마 공화정 말기 민중파적인 성향을 가진 인물로 묘사되며 <빵과 서커스 정치>로 백성들에게 인기가 많았습니다. 그의 인생과 양아들 부르투스에게 암살당하는 장면은 훗날 연극 등에서 주요 소재 거리가 되었는데, 유럽의 각국은 그의 이름과 황제라는 말을 연결시켜 칭호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 로마의 황제란, 카이사르가 죽은 뒤 그의 양아들인 아우구스투스 때부터 시작됩니다. 정작 카이사르는 황제의 자리에 오른 적이 없습니다.

동양 중국에서 유래된 황제란 말은 전설적인 3황 5제 시대의 마지막 지배자였던 <황제>의 명칭에서 시작됩니다. 서유럽에서 말하는 지배자 슐탄-칼리프은 황제(슐탄)이자 종교지배자(칼리프)를 모두 어우른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통 우리가 황제의 개념을 이야기할 때, 왕보다 높은 지배자를 통칭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중국의 황제는 중국 주나라 이후 주변의 제후국들을 왕으로 칭하면서 <그들의 우두머리>성격을 가진 자들을 통칭하는 말로서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 시황제에서부터 사용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유럽식 언어와 연결시켜 황제의 개념을 설명하곤 하죠. 예로, 서양에서 각국의 수장을 왕이라고 하지만, 나폴레옹은 유럽 각국을 정복하여 유럽 자체를 나폴레옹 왕가로 만들어 친인척을 왕으로 임명하면서 황제의 칭호를 얻습니다.

그러나, 사실 황제의 칭호는 관념적인 것으로 어떤 특정한 기준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그 정치적 상황과 세력을 고려하여 칭한다고 보는 것이 맞다는 입장도 있습니다. 고려시대 묘청도 황제를 칭하여 금국을 정벌하자고 하였고, 조선 후기 고종도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고치면서 황제의 칭호를 사용합니다. 황제의 역사적 개념은 <넓은 영토를 다스리며 분봉된 왕들의 수장>으로 절대권력을 가진 자이지만, 실제 관념적인 개념은 <자신의 세력을 대외에 알리기 위한> 정치적 목적인 것도 있었습니다.

2. 흥선대원군도 증기선을 만든 적이 있다!

영국과 각국의 산업혁명이 언제인지 아시죠? 영국의 산업혁명은 18세기, 유럽과 미국, 독일, 일본의 산업혁명은 19세기 초반부터 후반부까지입니다. 그럼 우리나라는? 산업혁명이 없었다구요? 보통 우리나라는 광복후 급격한 산업화를 이루었다고들 말합니다. 그러나, 산업혁명을 상징하는 <증기기관과 증기선>을 만들려는 시도가 우리나라에도 있었답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등 서양세력을 막아낸 흥선대원군 아시죠? 흥선대원군은 프랑스가 침입한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사용한 배가 <증기선>이라는 것을 듣고 호기심이 발동하였습니다. 대원군은 앞으로 계속 침략할 서양에 맞서기 위해서는 서양보다 우수한 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죠. 흥선대원군은 전국 곳곳에 글을 올려 서양의 증기선을 물리칠 방법을 찾기 시작합니다.

그 때 채택된 방법이 바로 <학우선>이라는 기발한 방법의 배를 만드는 방법이었습니다. 학우선이란 학의 깃털로 배를 만들면 그 탄력성 때문에 서양의 포탄을 맞아도 배에 구멍이 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만든 배입니다. 흥선대원군은 실제 그 배를 만들어보겠다고 생각하여 전국에서 학을 잡아 바치라고 하였습니다. 현상금을 받고 싶었던 사냥꾼들은 학을 잡아 그 깃털을 모으고, 국가에 깃털을 보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깃털에 아교로 붙여 만든 배를 보고 만족하여, 그 배를 포구(마포)에서 시험해보았습니다. 그러나, 배의 진수식을 하자마자 배는 물이 새어 곧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흥선대원군은 다른 방법을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조선에서는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대동강에서 격파한 적이 있었는데, 대원군은 그 배의 증기기관을 가져와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이번에는 제너럴 셔먼호의 증기기관을 이용하여 철갑선을 만들고 다시 마포에서 진수식을 열어보았습니다. 그러나, 증기기관의 엔진에 사용해야 하는 것을 석탄이었지만, 석탄이 아닌 석탄의 대체재인 숯을 연료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배는 몇 미터 나가다가 멈추어 버렸다고 합니다.

흥선대원군은 이렇게 국방력을 강화시키기 위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 당시 집권당이 하나 하나 연구하였던 성과물들은 민씨정권으로 바뀌면서 모두 역사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민씨정권은 서양에서 직접 무기기술과 최신 무기를 가져와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3. 마젤란과 라프라프는 서로에게 영웅과 역적이 되었다!

최초로 세계일주를 한 마젤란은 유럽역사의 한 획을 장식한 위대한 영웅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마젤란은 실제 세계일주를 하지 못하고 필리핀에서 죽었으며 그의 부하들이 세계일주를 완료하였다고 합니다.

1521년 마젤란은 세계 일주 도중 필리핀을 발견하였습니다. 마젤란은 세계일주가 엄청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고, 식수와 음식을 구하기 위해 필리핀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마젤란이 필리핀에서 크리스트교를 강요한 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필리핀의 주변 섬들은 마젤란의 입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고, 이교도가 필리핀에서 포교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강경한 신자인 마젤란과 필리핀 주변 섬에 큰 영향을 미치던 마크탄의 왕이었던 라프라프는 결국 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이 싸움을 하느님의 가호로 쉽게 이기리라던 마젤란의 예상은 크게 빗나갔고, 필리핀인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마젤란은 죽게 되었습니다. 전투가 얼마나 치열하고 다급했던지 마젤란의 부하들은 함장의 시체도 찾지 못하고 섬에서 다급히 나와야 했다고 합니다.

이 싸움 후 크게 좌절한 마젤란의 일행들은 여행 도중의 섬들에서 제대로 된 식수를 공급받는 일이 드물게 되었고, 그들이 에스파냐로 돌아올 때에는 식수부족, 영양실조 등으로 정상적인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마젤란의 함대 중 한 척인 빅토리아 호만 요한 세바스찬 엘카노의 지휘아래 모국에 돌아옴으로서 세계일주가 완성되었습니다.

유럽인들은 이것을 역사적인 여행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파냐의 왕 펠리페 2세 아시죠? 무적함대로 전 유럽을 호령하였던 위대한 에스파냐의 왕입니다. 펠리페 2세는 마젤란의 죽음을 애석하게 생각하여 마젤란이 죽은 섬을 국왕가인 <펠리페>의 이름을 따서 <필리핀>이라고 이름지었답니다.

그러나 과연 필리핀인들의 입장에서도 마젤란의 항해가 위대한 업적으로만 생각할 수 있을까요? 지금 필리핀의 역사 박물관에는 <마젤란 비석>과 <라프라프의 비석>이 동등하게 세워져 있습니다. 마젤란의 비석에는 <애석하게도 라프라프에게 죽고만 여행가>라는 입장에서 내용이 적혀있습니다. 그러나, 라프라프의 비석에는 <침략자인 에스파냐인들을 무찌른 필리핀 최초의 국왕>으로서 라프라프의 이름이 적혀져 있습니다. 역사는 관점에 따라 승자와 패자가 바뀌나 봅니다.

우리나라에서 영웅으로 여겨지는 광개토대왕은 여진족 입장에서는 잔인한 학살자였습니다. 일본에서는 점진론을 주장하고 조선 초대 통감으로서 한국 정벌에 앞장선 영웅 이토 히로부미지만, 한국에서는 역적 이토 히로부미로서 안중근 의사에게 죽고만 일본인으로 묘사되죠. 역사를 뒤집어 보면 승자와 패자가 꼭 보편적이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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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경제 무역권이 우리 민족국가의 운명을 좌우하였다.

   <뒤집어 읽어보는 역사>는 역사적 사실일 수는 있지만, 정설로 인정된 내용은 아닙니다. 일부 사료의 파편으로 구성한 내용이거나, 아직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은 역사적 내용들을 가지고 구성한 페이지입니다. 정설이 아니니, 글에 대한 비판보다는 이런 내용도 있을 수 있구나 하는 측면에서 만든 카테고리라는 점을 이해하고 읽어주세요.


1. 고대의 전쟁을 왜 공성전으로만 보는가?

우리는 고대의 전쟁하면 동이족과 중국족의 싸움.... 고조선, 고구려 등 북방의 패자들과 중국 춘추시대와 수당으로 이어지는 중국 국가들간의 세력 다툼으로 이해하곤 합니다. 그리고 동북아 국가와 중원국가의 싸움에서 주목하는 것은 부여성 - 요동성 - 평양성 등으로 이어지는 공성전을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꼭 고대의 전쟁이 공성전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바다를 통한 전쟁 역시 항상 같이 전개되었으니까요. 그리고, 당시 중국과 우리 민족의 영역 사이에 바다라는 것이 역사에 씌여진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보고자 합니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일단 고조선과 고구려가 중국 민족과 항쟁을 벌인 경로를 보면 <교과서가 고대사에 대하여 상당히 부실하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교과서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교과서는 중고등학생을 위한 지침용 3차 사료이기 때문에, 이 부분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요구하는 만큼의 자세한 내용과 중요한 사료를 다룰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그럼 교과서에 빠졌거나, 1단어만 기술되어 빠져 버린 바다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일단, 우리나라의 서쪽 바다는 동해와는 달리, 서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서쪽 바다의 국제적인 공식 명칭은 <황해>입니다. 아니 왜, 동쪽 바다는 일본해도, 청해도 아닌 <우리 영토로서의 동해>이면서 서쪽 바다는 <황해>라고 해야되나요? 이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여기서는 역사적인 이유만 말해보도록 하죠. 동해는 고대부터 근대까지 우리가 지배권을 가지고 영향력을 행사하던 바다입니다. 일본이 동해바다에 대한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이후 에도 막부가 들어서면서 조선과의 관계가 대등한 관계라고 인식한 이후부터이고, 메이지 유신 이후 자국의 경제력이 성장한 이후부터입니다. 즉, 근대 이전까지 이미 역사적으로 <동해>는 우리 영역으로 자리잡았죠.

그러나 <황해>는 다릅니다. 이 바다는 중국민족과 우리 민족이 고대부터 주도권을 놓고 치열하게 다투던 바다였고, 이 바다의 주도권을 누가 잡는가에 따라 고대 천하관이 바뀌곤 하였습니다. 따라서 역사적으로도 이 바다는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주도권을 잡고 자국의 <영해>로 편입하기에는 껄끄러운 면이 있었던 바다였죠.

실제 고조선, 고구려와 대중국 항쟁은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것처럼 육로에서의 전쟁만이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중국의 한무제가 고조선을 공격할 때, 서해바다를 이용했고, 수, 당나라의 고구려 침공도 항상 바다를 경유하였습니다. 그리고, 황해바다라는 것은 실제 한, 수, 당이 우리 국가를 침공하였던 원인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럼 나라별로 차근히 보도록 하죠.

2. 한무제는 왜 고조선을 1년간이나 공격해야만 했는가?

중국과 고조선의 치열한 항쟁이 시작된 것은 중국 한무제 때부터입니다. 진시황제도, 한고조 유방도 고조선과 직접적인 대립을 하지 않았습니다. 진나라 이후 통일된 중국은 끊임없이 흉노 등 북방민족과 영역 싸움을 하였지만, 고조선과의 직접적인 큰 대립은 없었습니다.

중국과 고조선이 직접적으로 대결구도에 들어간 것은 위만조선 때부터입니다. 교과서에서는 위만조선이 들어서면서 고조선에 철기 기술이 도입되었고, 중계무역이 성행하였다고 나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이 바로 <중개무역>입니다. 위만 조선이 시작한 중개무역이란, 한반도 남부의 진국과 중국 한나라 사이에서 무역을 하여 그 차액으로 큰 이득을 보는 것을 말합니다.(중개무역이란 A국과 C국사이에서 B국이 물품을 운송해주고 중간에서 차액을 챙기는 것을 말합니다. 중계무역이란, A국의 물건을 B국이 자국에 가져와 가공하거나, 물품 표지를 한 다음에 C국에 넘기는 것으로 보다 적극적인 무역을 말합니다. 역사에서는 이 2가지를 구분할 필요가 없으므로, 그냥 합쳐서 중간무역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위만이 남방국가들의 물품을 중국에 교역하기 시작하면서 이용한 루트는 바로 <대동강>이라는 고대 상업 해상망이었습니다. 특히 위만조선 때 철기를 이용하여 정복사업을 많이 하였다는 기사도 대부분 이 대동강 유역의 루트를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리고, 대동강 루트를 통한 중개 무역은 위만조선이 곧 중국의 골치거리인 흉노와도 무역을 할 것이라는 예상도 가능하게 하는 했습니다. 보통 중국이 위만조선을 공격하여 멸망시킨 것을 <고조선과 흉노와의 차단>이라고 말하는데, 그 속사정에는 이런 경제적 문제가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중국 한나라는 고조선을 공격할 때, 단순히 요동성을 중심으로 육로로 쳐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육로에서는 좌장군이 침입하였고, 바닷길을 통해서는 누선장군이 대동강 뱃길을 통해 평양으로 직접 쳐들어오는 양동작전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리고, 고조선은 1년여간의 항쟁끝에 무너집니다.

3. 대동강 루트와 서해 북부를 일시 중국이 장악하다.

중국은 고조선을 멸망시킨 이후, 한사군을 설치하고 고조선의 영역을 한의 영역으로 끌어당겼습니다. 이 한사군은 현토군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고조선 멸망이후 나타난 조선유민들의 저항으로 거의 사라져 갑니다. 하지만, 끝까지 남아있었던 지역이 있었으니, 그곳이 대동강 연안의 <낙랑군과 대방군>이었습니다.

낙랑군이 중요하게 부각된 이유는 이곳이 바로 고대 황해안 루트를 이어주는 상업권의 맥으로서 그 중심지가 <대동강>이었기 때문입니다. 실제, 교과서와 개론서들을 보면 변한에 철이 많이 생산되는데, 그 철은 바닷길을 통해 낙랑군으로 수출된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금관가야가 대가야에게 주도권을 넘겨주게 된 이유중 하나가 바로 낙랑군이 고구려, 백제의 협공에 망하게 되면서 <중개무역 루트>를 잃었기 때문이라고 적혀 있지요. 즉, 금관 가야는 일본 - 가야 - 낙랑군을 이어지는 고대 상업 루트를 통해 발전한 나라였지만, 낙랑군이 망하게 되면서 그 교역 대상국을 일본 - 가야 - 백제로 바꾸게 됩니다. 이것은 고구려를 자극하게 되어 광개토 대왕이 일본, 가야, 백제를 동시에 격파하고 신라를 구원하게 되는 원인으로도 작용합니다. 이 정도면 이 당시 대동강 무역로가 역사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 알 것 같지요?

4. 백제와 고구려의 초기 싸움은 강과 강을 두고 무역권을 쟁탈하려 하였다.

이제 대동강을 일시 점령했던 낙랑군은 사라졌습니다. 이제 황해안 무역권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사라진 것이지요. 낙랑군이 멸망한 것은 백제, 고구려 군의 협공 때문이었고, 이들의 협공은 곧 영역 확보와 중국 민족 축출이라는 관점도 있지만, 고대 무역권 확보라는 관점도 있습니다. 낙랑이 사라져 서로 국경을 마주보게 된 백제, 고구려는 강을 사이에 끼고 큰 한판 전쟁을 시작합니다. 이들의 초기 전쟁은 한강 - 예성강, 재령강 - 대동강 이라는 황해안 루트를 두고 전쟁을 하였습니다.

먼저 주도권을 잡은 것은 백제였습니다. 4세기 백제 근초고왕은 고구려의 대동강 연안의 평양성까지 진격하여 고국원왕을 죽이고, 고구려의 해상 무역로를 장악해 버렸습니다. 보통 삼국시대의 4세기 하면, 근초고왕의 전성기로 왜 - 황해안 - 중국 남조, 북조 - 요서 점령 등으로 이어지는 고대 상업권 확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 상업권의 확보는 결국 당시 가장 중요한 고대 무역로인 대동강 연안과 황해안을 확보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5. 5세기 이후 황해안 무역권은 대동강이 아닌 한강을 두고 벌어졌다.

5세기 이후, 백제와 고구려의 공방전은 이제 한강을 두고 벌어집니다. 광개토대왕은 북방 영토를 확장하면서, 한강 이북까지 진출하였습니다. 백제는 수도인 한강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국운을 걸고 사투를 벌여 사수합니다. 대동강은 고조선의 중심지로서 정치, 경제, 문화의 선진지역이고, 평양평야와 바닷길을 이용할 수 있는 천연의 자원이었습니다. 반면, 한강 역시 백제의 중심지로서 김포평야의 농업중심지이자 정치적 중심지로서 그 가치가 말로 할 수 없었죠. 실제 황해안 유역의 금강 - 한강 - 대동강으로 이어지는 무역로는 모두 정치, 사회적 중심지였습니다. 사실 황해안 루츠를 이용할 수 없어서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지 못한 신라는 6세기 이전까지는 삼국간 항쟁에 끼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삼국 중 2- 3세기 가장 체제 정비가 빨랐던 나라가 백제인 이유도 활발한 중국과의 대외교역으로 경제적 성장과 함께 중국 정치제도를 빨리 인식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한강을 고구려의 장수왕이 차지하면서 삼국의 주도권은 순식간에 고구려로 넘어갑니다. 그리고 고구려와 백제의 경계는 이제 금강이 되어버립니다. 장수왕이 평양성으로 천도하면서 국가 기반은 고조선의 문화유산과 풍부한 물산이 집약된 대동강 연안으로 집중되었습니다. 그리고 한강은 남진정책의 전초기지가 되었는데, 그 가장 선봉지역이 남한강 하류의 충주지역입니다. 즉, 남한강 하류를 장수왕이 경영하면서 한강의 자원을 확보함과 동시에 백제를 견제하는 전초기지로 이용한 것이지요. 이것을 보통 개론서들에서는 <장수왕의 충주경영설>이라고 합니다.

6. 고구려의 무역권 독점과 반고구려 체제의 형성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장수왕의 영토 확장으로 대동강 무역권, 한강 무역권으로 이어지는 서해안 무역권을 장악하였습니다. 또, 북방으로 넓힌 영토를 통하여 말갈, 거란, 돌궐 등에 대한 무역로도 확보하였습니다. 이러한 고구려의 패권주의는 다른 국가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고구려에 우호적이었던 신라는 백제와 동맹을 맺었고, 그 동맹의 핵심 내용은 한강 무역권의 탈환이었습니다.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와 당나라는 고구려에 대한 적대감을 표출하였는데, 그 핵심적인 적대 이유는 흉노 이래 중국이 지배해오던 조공경제 무역 질서를 고구려가 빼았아갔다는 것에 있었습니다. 광개토 대왕 이후 고구려는 거란, 말갈, 돌궐 등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동북아시아 상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장수왕 이후 고구려는 확보한 광대한 상권을 지키지 못하고, 그 부산물을 차기 하기 위한 내분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신라에게 한강을 빼앗기게 되었고, 수나라에게 끊임없는 위협을 당하기 시작합니다.

고구려와 수의 전쟁은 요동성 등 공성전과 함께 대동강을 통한 바닷길 싸움도 동시에 이루어졌습니다. 수는 평양성을 직접 공격하려다가 을지문덕 장군에게 청천강에서 크게 대패하고 맙니다.(살수대첩) 이후 수는 지속적으로 고구려를 공격하였는데, 대군은 육로였지만, 실제 큰 격전지는 압록강, 대동강, 청천강 등 강 하류에서였습니다.

고구려에 대한 지나친 전쟁도 하나의 원인이 되어 수가 망해 버리자, 당나라는 고구려보다는 고구려와 무역을 통해 교류를 하고 있는 주변국들을 먼저 점령하였습니다. 서역의 경제권을 가지고 있던 돌궐 고창국을 멸망시키고, 거란과 말갈족의 주요 상업 중심지를 당이 장악하면서, 당은 다시 중국식 조공 경제 무역을 회복하였습니다. 고구려는 이러한 경제적 압력으로 인하여 친리장성을 축조하고, 연개소문이 대당강경책을 구사하기 시작합니다. 당은 고구려의 동북아 상권과 황해안 상권마저 빼앗고, 고구려를 멸망시키고자 하였지만, 안시성 싸움의 패배등으로 한걸음 물러섭니다.

7. 신라가 지키려고 했던 대동강 까지의 확보

당은 이후 나당동맹을 통하여 신라와 손을 잡고,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켰습니다. 나당동맹에서 신라가 요구한 것은 <대동강 유역까지의 영토 인정>이었습니다. 그것은 신라 진흥왕이 한강을 차지한 이후, 대동강까지 진출하여 황해안에 대한 전면적인 권리를 행사하겠다는 의도가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당은 고구려 멸망 이후 신라에게 대동강은 절대 줄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고, 이것은 결국 신라 전체를 복속하려는 당의 야심으로 <나당 전쟁>을 유발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신라는 끝까지 사수하여 대동안 연안을 확보하였지만, 당은 이후 150년 이상 <대동강이 신라의 영토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대동강 연안의 황해를 자국의 근거지로 생각합니다. 실제, 대동강 연안에서 중국의 동부지역까지는 많은 신라인들이 활동하고 있었고, 동부아시아의 가장 활성화된 무역로로서 많은 물자가 오가고 있었습니다.

대동강을 신라의 영토로 당이 인정한 것은 신라 성덕왕 때로, 당이 신라에게 대동강 무역권을 인정한 이유는 발해 때문이었습니다. 발해가 북방 상권을 장악하고 고구려의 뒤를 잇는 국가로 성장하자 당은 신라를 회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8. 해상왕 장보고의 상권 확보

그러나 8세기 이후 안사의 난 당으로 당의 국력이 쇠약해지고, 동북아의 상권과 황해안의 상권은 점차 깊은 혼란 속으로 빠져들어 갑니다. 이 때 중국 - 신라 - 일본과의 해상 루트를 장악하고 거대한 상권 루트를 재건한 인물이 바로 장보고입니다. 장보고는 청해진을 바탕으로 일본 - 신라 - 중국 동부의 상권을 움켜쥐었습니다. 신라원, 신라방, 신라소 등의 명칭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미 신라인들은 중국 동부 해안가에 무역로를 개척해두고 있었고, 장보고가 중국, 신라, 발해의 약세를 틈타 그 무역로를 완전 장악하여 <국가보다 더 큰 권력>을 확보한 것입니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장보고는 신라 왕실의 왕위 다툼 속에서 암살당하고 맙니다.

장보고가 죽은 시점은 곧 고대가 중세로 넘어가는 시기였습니다. 중국은 송으로 넘어가 중세가 시작되고, 한반도에서는 고려가 건국되어 중세가 시작되는 과도기였습니다. 일본 역시 전후 중세시대로 넘어갔으며, 고대의 영광을 재현한 발해도 이 무렵 거란에 망하게 됩니다.

이렇게 고대 상업권에 대하여 쭈욱 한번 적어보았습니다. 상업이라는 한쪽 시각에서만 적은 글이라 편협하긴 하지만 그냥 이런 관점도 있구나라는 점을 알리기 위한 글이었으니, 그런가 보다 하고 읽어주세요.

<뒤집어 읽어보는 역사>는 기존 관점과 다른 부분들이 있거나, 숨어있는 한줄의 문장이 눈에 띄면 정리해서 글로 만들어 보겠습니다.


- 이 글을 위해 참고한 역사도서 모음

1. 한국사특강, 서울대학교 출반부, 1991
  2. 한국사통론, 변태섭 저(4개정판), 1997
  3. 7차 교육과정 근현대사 교과서(대한교과서)
  4. 이야기 한국사, 교양국사연구회, 청아출판사, 1988
  5. 한국통사, 박은식 지음, 김승일 옮김, 범우사, 2006
  6. 누드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이투스, 2007
  7. 뿌리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 1권, 서의식, 강봉룡 지음, 2003, 솔출판사
  8. 한국고대사 산책,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분과 지음, 1992
  9. 한국역사입문 제 1권, 한국역사연구회 엮음, 도서출판 풀빛, 1979
  10. 한권으로 읽는 중국의 사상, 권순우 편역
  11. 동양사개론, 신채식, 삼영사(1993)
  12. 삼국사기(김부식), 삼국유사(일연), 7차 교육과정 국사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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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 대왕릉비에 대한 문제점 논의(종합자료)

1. 광개토 대왕릉비에 관한 이 사이트 내 검색 자료(히스토리아)

비문 전문  해석 : http://historia.tistory.com/236    
   비문 해석(한문포함) :
http://historia.tistory.com/909
   고구려의 영토 확장 :
http://historia.tistory.com/314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일부 : http://historia.tistory.com/323
   비문 위치와 내용 : http://historia.tistory.com/328

2. 광개토 대왕릉비는?

광개토대왕은 보통 우리가 영토를 넓힌 왕(광,개,토)이라는 뜻에서 그렇게 부릅니다. 그러나 실제 이름은 담덕이었고, 묘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라는 엄청난 묘호를 쓰고 있죠. 생전에 연호는 영락으로서 보통 영락대왕이라고 합니다.

비문은 보통 3개의 단계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위 참조 자료들에도 각각 자세한 설명을 달았지만, 1부는 고구려의 건국 내역, 2부는 대외 정복과정, 3부는 수묘인 연호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위 비문 위치와 내용 글 참조)

3. 비문의 발견과 위조

광개토대왕릉비는 1880년경 중국 만주지역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점은 이 당시 만주가 가장 강성했던 국가인 청나라의 근거지라는 점입니다. 이 비석을 발견한 청은 이 비석의 내용이 자국의 수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비석의 내용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채로 시대가 지나갔습니다. 청일전쟁 이후 청의 근거지인 요동-만주 지역을 차지한 일본은 이 비석을 위조했습니다.(청이 먼저 위조를 했을 수도 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일본의 위조 이유는 임나일본부설의 침략자료로 활용하여, 일본서기의 신공황후기를 정설로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일본과 중국은 비문의 중요 부분들을 쪼아내어 비문을 훼손하고 석회를 발라 없는 글자를 만들어 넣었습니다. 일본인 사까와는 이 위조된 비문으로 탁본을 만들었고, 이 탁본 또한 탁본을 만들때마다 약간씩 글자가 달라지고나, 먹물 농도가 달라져서 탁본 1장 1장의 내용이 다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일본군 참모본부가 의도적으로 비문을 위조했다는 점입니다.

4, 신묘년조의 문제점

광개토대왕릉비의 최대 논점은 바로 신묘년조입니다. 신묘년조를 위조한 목적은 일본 참모부가 일본서기(니혼쇼키)에 적혀있는 내용을 정당화하기 위함입니다. 즉, <신공황후가 한반도 남부를 점령하여 약 200년간 경영하였다>라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광개토대왕릉비의 내용과 일치시키기 위한 작업으로 시작된 것이죠.

문제가 되는 부분을 볼까요?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羅, 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伐*殘國. 軍至과*南,

조공을 바쳐왔다. 그러나 신묘년 이래로 왜가 바다를 건너 백잔과 신라를 쳐 신민으로 삼았다. 때문에 6년 병신에 왕은 몸소 수군을 인솔하여 백잔국을 토벌했다. 군사가 백잔 소굴의 남쪽에 이르러

바로 이 부분입니다. 일본은 이 부분을 위조했습니다. 일본측의 위조는 일본이 백잔, 신라, 고구려를 공격하였다는 것으로 바꾼 것입니다. 여기서 쟁점이 되는 것은 來渡海입니다. 즉, 건너와서 쳐부순 주체가 누구냐는 것인데, 그 뒤의 글자들이 지워져 있으므로 알수가 없게 된 것이지요. 실제, 당시 상황에서는 광개토대왕릉비이므로 고구려가 주어가 되어야 맞습니다. 즉,

고구려가 바다를 건녀 신묘년에 왜를 쳐부셨다. 가 맞죠.

그러나 이 문제는 아직도 양국의 첨예한 대립으로 남아있는 역사상 중요한 논쟁입니다.

나머지 부분들은 위 참조 포스트들에 각각 기술되어 있습니다. 혹시 광개토대왕릉비에 대한 글을 읽다가 중요한 것이 눈에 띄면 바로 올릴께요.

이 글에 대한 참조사항

1. 이 글에 대한 관련 사료는 이 사이트 검색창에서 자유롭게 검색가능합니다.(관련 검색어로 검색하세요)
   2. 이 글에 내용은 사이트 내의 관련 사료들을 참조해서 적었으므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은 원 사료를 검색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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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릉비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퉁거우[通溝]에 있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의 능비(陵碑)

비신(碑身) 높이 5.34m. 각 면 너비 1.5m. 호태왕비(好太王碑)라고도 한다.

414년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운 것으로, 한국에서 가장 큰 비석이다. 제1면 11행, 제2면 10행, 제3면 14행, 제4면 9행이고, 각 행이 41자(제1면만 39자)로 총 1,802자인 이 비문은 상고사(上古史), 특히 삼국의 정세와 일본과의 관계를 알려 주는 금석문이다.

내용은 크게, ① 서언(序言)격으로 고구려의 건국 내력을, ②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뒤의 대외 정복사업의 구체적 사실을 연대순으로 담았으며, ③ 수묘인연호(守墓人烟戶)를 서술하여 묘의 관리 문제를 적었다.

한·일 고대사학계의 최대 쟁점이 되어 온 구절은 "신묘년 왜가 바다를 건너 와서 백제와 신라를 파해 신민으로 삼았다(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以爲臣)"로서, 여기에서 문맥과 전혀 관계없이 왜(倭)가 나온다.

이를 근거로 일제의 학자는, 4세기에 한반도 남단에 일본의 식민지를 건설하였고,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오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가 그것이라는 논리를 전개하였다. 이런 해석은 1884년 일본군 대위 사코 가게노부[酒勾景信]가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을 가지고 귀국한 뒤, 일본육군참모본부가 비밀리에 해독작업을 진행하여 1889년 《회여록(會餘錄)》 5집에 요코이 다다나오[橫井忠直]의 〈고구려고비고(高句麗古碑考)〉 등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이에 대해 정인보(鄭寅普)는 해석상의 모순을 지적하였고, 1972년 재일(在日) 사학자 이진희(李進熙)는, 비문이 일제에 의해 파괴되고 3차의 석회도부(石灰塗付) 작업이 있었다는 사실 등을 들어, 문제의 비문 중 왜(倭) 이하 도(渡)·해(海)·파(破) 등 4자를 믿을 수 없다고 하였다. 또한 1972년 사에키 유세이[佐伯有淸]도 참모본부가 비밀리에 이 문제에 개입한 전말을 폭로하기도 하였다.

이어 1981년 이 비문을 연구해 온 이형구(李亨求)는 비문 자형(字型)의 짜임새[結構], 좌우행과의 비교에서 나오는 자체(字體)의 불균형 등을 들어, '倭'는 '後'를, '來渡海破'는 '不貢因破'를 일본인이 위작(僞作)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럴 경우 그 신묘년 기사는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국으로 조공을 바쳐 왔는데, 그뒤 신묘년(331)부터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백제·왜구·신라를 파해 신민으로 삼았다'는 것으로 되어, 이 주장이 공인을 받으면, 일본 사학계의 '고대남조선경영론'이 근거를 잃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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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비문 조작설

내가 일직이 태왕의 비를 구경하기 위해 집안현에 이르러 여관에서 만주인 영자평이란 소년을 만나 필담을 나누었는데, 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하였다.

<비가 오랬동안 초래 중에 묻혀 있다가 최근에 이 지방 영희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비문 가운데 고구려가 중국 토지를 침탈하였다는 자구들이 들어 있었으므로 중국인들이 그것을 도부로 쪼개었습니다. 그 다음 일본인들이 이 비석을 차지하였습니다. 일본인들은 영업적으로 탁본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인들은 닳아 없어지거나 이지러진 부분을 석회로 떼어 발랐는데 이 때문에 그동안 인식할 수 없었던 자구가 도리어 생겨나 참된 사실은 삭제되고 위조된 사실만 첨가된 것 같습니다.

- 조선상고사, 신채호 -

사료해석 : 광개토대왕릉비는 중국 청시대의 만주족 성지인 만주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영희가 발견하였다는 것은 사실이 아닌 것 같습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1880년경 한 농민이 발견하였고, 영희는 그것을 탁본뜬 사람이라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비석이 왜곡되어진 과정입니다. 일본인들이 자국에 유리한 쪽으로 비석을 탁본뜨고, 잘못된 부분을 위조하면서 임나일본부설의 논쟁이 더 복잡해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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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영토 확장

동명성왕 2년 6월에 송양이 나라를 들어 항복해오니 그  땅을 다물도로 삼고 송양을 그 곳의 주로 봉하였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

부여왕 사촌 동생이 만여명을 데리고 투항해 오니 대무신왕이 왕으로 봉하고 연나부에 안치시켰다. 9년 10월에 왕이 친히 개마국을 정벌하여 왕을 죽이고 백성을 위로하여 노략질을 못하게 하고 군현으로 삼았다. 12월에 구다국왕이 개마가 멸망했다는 말을 듣고 나라를 들어 항복하였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

태조대왕 11년 8월에 갈사왕 손도두가 나라를 들어 항복해오니 도두를 우태로 삼았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 -

9월, 왕이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현도군에 침입하여 8천 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겼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미천왕  -

6월, 왕이 군사 4천 명을 내어 마침내 요동과 현도를 함락시키고 남녀 l만명을 사로잡아왔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국양왕  -

8월, 왕이 백제와 패수에서 싸워 크게 이기고 포로 8천 명을 사로잡았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광개토왕   -

9월, 왕이 병사 3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침입해서 수도인 한성을 함락시키고, 백제왕 부여경(개로왕)을 죽였으며 포로로 남녀 8천 명을 사로잡았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장수왕 -

자료 참조 : 고구려의 영토 확장에 대한 현재 교과서 내용의 증거 사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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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비문                               해석참조 : http://myhome.naver.com/sial/sss.htm

제 1부.

오직 옛날 시조는 추모왕이시니 창업의 기초를 닦으셨느니라.. 출생하여 스스로 북부여 천제의 아들이라 하였다. 어머니는 하백녀이다. 랑부란(사내부족 아이)이 내려와 세상에 태어나니 성스러움이 있었다. 0000 이름을 駕(가)라 하였다. 순행하여 돌아다니다 남쪽 아래의 길에서 부여 엄리에서 큰 물(홍수)로 말미암아 왕으로 임하였다. 나루에서 말씀하여 가로되 “나는 바로 임금이니 하늘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하백녀이고 郞 부족의 추모왕이라 한다. 나를 건너가게 이어 주시오.”

거북이 떠올라 소리를 쳐 응하는 즉 허락하였음이다. 쭈욱 이어서 건널 수 있도록 거북은 떠 있었다. 그리하여 뒷날 비류곡을 건널 수 있게 만들었다. 홀본을 근본으로 하니 서성산 위쪽이었다. 그리하여 도읍을 세우니 어찌 아니 즐거우랴! 세상의 位는 황룡이 보내는 것으로 인하는 것이다. 황룡이 와 아래에서 왕을 맞이하였다. 왕이 홀본의 동쪽 산등성이를 밟으니 황룡의 머리였다. 황룡을 타고 하늘로 올랐다. 하늘을 고려하여 세자에 명하니 유류왕(유리왕)이다.  이로써 道를 일으켜 다스리니 크고 넒었다. 주류왕이 터의 사업을 계승하였다. 뒤섞여 0000 이르다가 17세 손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에 이르렀다. 18세에 천자의 자리에 오르니, 영락대왕(永樂大王)이라고 불리셨다. 그 은혜로움이 황천(皇天 - 가장 높은하늘)과 같고, 무예와 위엄은 사해(四海 - 온세상)에 떨치었다. 그리하여 백성들이 평안히 그 생업(직업)에 종사할 수가 있었다.  나라는 부유하고, 백성은 번성하여, 오곡(여러 양식)이 풍성하였다. 삼십구세에 승하하시니, 갑인년 9월 29일에 안장하고 비석을 세워 그 공훈과 업적을 기록하여 새겨서, 후세에 보이는 것이다.

제 2부.

영락 5년 해에 있었으니 을미다. 왕이 이로써 피(잡초)가 곱지 못하니 000 돌아와 0000 사람을 몸소 거느리고 토벌하러 갔다. 부산을 지나 00산을 짊어지고 이르니 염수 위였다. 터를 격파하니 언덕 부락 육칠백으로서 소와 말을 키우는 무리였다. 양은 헤아려 세기 어려웠다. 이를 바로하고 돌아오면서 지나는 곳을 부드럽고 평평히 길을 내며 동쪽으로 왔다. 000성에 힘을 기울이니 성 북쪽이 풍요로웠다. 다섯 (왕)이 해산물을 준비하고는 (사냥)을 하면서 놀다 가시라 하였다. 나라 국경의 밭에서 사냥을 하면서 살피다가 돌아왔다.

백잔과 신라는 옛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었다. 옛부터 조공을 바쳐왔다.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0000는) 백잔과 신라를 깨부수고 신민으로 하려 하였다. 이리하여 6년인 병신에 왕이 몸소 군을 거느리고 토벌하여 멸하려 하였다.  ‘잔국군’을 토벌하여 치니 과000에 이르렀다. 우선 남쪽을 공격하여 8성을 취하고 모로성을 허물었다. 각각 모로성, 간저리000, 000성, 관각미성, 모로성, 미사성, 사조성, 아단성, 고리성, 이성, 잡진성, 오리성, 구모성, 고수야라성, 막(수)0(추)0(성), 000성, 00이야라0성, 전성, 0어0이성,농0매0성, 두노성, 비0성, 0차0이성, 미추성, 야리성, 대산한성, 소가성, 돈0발성, 00성, 루매성, 산야성, 야단성, 세성, 모루성, 0우루성, 소회염성, 연루성, 석지리성, 암문0잠성, 임성, 000, 000, 0이성, 취추성, 0발성, 고모루성, 윤노성, 삼양  성, 회0발0성, 종0고0로성, 구천성, 00, 000이다.

그리하여 가까이 다가가니 나라 성의 ‘잔’이 불복함이 의롭다며 감히 나와  싸웠다. 왕은 위엄을 빛내며 노도같이 언덕을 통하는 물 아리수를 건넜다. 이리하여 찌르며 핍박하니 가로누운 잔(병이  000이었다. 쉽게 성을 0하니 ‘잔주’는 다급하여 000 남쪽과 여자를 바치고 살려달라고 말하였다. 일천 인과 모시 천 필을 00 하였다.

왕에게 궤000 스스로 맹세하여 따르니 금일 이후 영원히 종으로서 몸을 의탁하는 손으로서 ‘노객’이 되겠다 하였다. 태왕은 은혜로 용서하고 “먼저는 미혹되어 잘못된 것이로다.“ 하고 그러한 것(맹세)을 쓰게 한 후에 ”순응하여 정성을 다하라.“ 하였다.

이리하여 얻으니 58성에 촌이 700이었다. 장군과 잔주의 아우와 아울러 대신 10인을 스승과 돌아가도록 하였다. 도읍으로 돌아오니 8년 무술이다. 가르침(교지)을 스승 편에 보내어 살피도록 하였다. ‘토곡’은 비단을 삼가도록 하니 쉽게 노략질하여 얻으려 하는 까닭이다. 없애고 (이를?) 라성에 더하여 ‘태라곡’이라 하였다. 토곡의 남녀 삼백여 인이 스스로 와서 조공을 하고 이로써 일을 논의하였다. 9년 기해에 백잔이 왜와 화합하여 통하고 더불어 함께하자 맹세하였다. 왕은이 아래 평양을 순행하니 신라에서 사신 백을 보냈다.

왕에게 말하기를  “왜인이 나라국경에 가득하고 성의 연못이 무너져 파괴되었습니다. 이러하여 종으로서 몸을 의탁하고 백성을 위하고자 합니다.”왕에게 귀복하고자 청하니 태왕은 자비로운 은혜로 불쌍히 여겨 “그렇다면 충성을 다 하시오.” 하고 명하였다. 특별히사신을 보내 알리고 돌아오도록 하였다. 이로써 치밀한 계책을 10년 경자에 가르쳐 보내니 보병과 기병으로 5만이다.

신라를 구하러 가니 남자들이 좇아와서 성에 거하였다. 신라성에 이르니 왜구가 터에 가득하였다. 가운데 관군 쪽으로 왜적이 이르니 물리쳤다.  000000000000000 스스로 왔다. 배후를 급히 추격하여 ‘임라’에 이르렀다. ‘임라’를 맡고 성을 빼내어 신라를 따르도록 하여 더하였다. 성에 즉시 귀복하여 돌아오니 ‘안라인 술병’이다. 이들을 신라성으로 뽑았다. 염00성에 왜구가 가득하였으나 왜구는 크게 무너졌다. 00000000000000000000  다하여 고치고 막으니 왜구가 왔다. 안라인 술병이 신라성에 가득 하였다. 000 터 00000 말하였다.  000000000000000000000000000 백잔과 왜구는 무너졌다.  

00이로써 00을 따랐다. 안라인 술병은 옛날처럼 신라에서 잠을 잤다. 비단을 몸에 아니 걸쳤다. 와서 논의하여 일을 0000

(광)개토경호태왕은 “000 비단금침은 종복으로 하리라.” 하고 글귀를 써 놓았다. 0000 청하여 조공하였다. 14년 갑진에 왜구가 불쾌하게도 대방에 침입하였다. 잔병과 화합하여 통하니 00000  석성에 배를 연결하여 0000 하였다. 0000왕은 몸소 거느리고 토벌하니 수숫대 치듯 하였다. 0000 서로 만나 칼끝을 겨누었다. 왕은 깃발을 겨누어 끊었다. 찌르니 왜구는 패하여 무너졌다. 베어 죽이니 수를 셀 수가 없었다.

17년 정미에 가르쳐서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냈다. 00000000왕은 스승과 사방 합하여 싸웠다. 베어 죽여 쓸어버리니 터에서 없어졌다. 베어 버리고 수확한 기와 갑옷이 일만여나 되었다. 영군의 재물, 그릇, 기계가 헤아릴 수가 없었다. 깨뜨리고 돌아오니 사구성, 루성, 우전성, 00000, 나00성이었다.

20년 경술이 되었다. 동부여는 옛날 추모왕에 속한 백성이었다. 그 중에 배반하여 불공하는 자가 있으니 왕이 몸소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였다. 군대가 도착하여 려성에 들이닥치니 려성국은 놀라 소란이 일었다. 굴복하고 나와 헌납 하였다.

000왕의 은혜가 널리 전도되었다. 이리하여 바로잡고 되돌리고 돌아오니 또 그들은 사모하여 관을 따르는 것이었다. 관을 따라 온 자는 미구루 압로, 비사마 압로, 서사루 압로, 숙사사 압로, 압로였다. 다 공격하여 파한 성이 64였고 촌이 1400이었다.

제 3부.

묘지기로 두어 굴을 파고 연기를 피워 내통하게 하였다. 그렇게 하여 자신의 백성으로 하고, 고구려를 배반한 나머지 백성의 나라에는 연기 둘을 피우도록 하고 이마에 손을 얹고 관찰하며 살펴보도록 하였다. 이를 ‘간연’이라 하였다. 동해의 배반한 나라는 연기 셋을 피우도록 하였다. 연기 셋으로 살피도록 하니 오돈성은 백성 네 집이 함께 연기 간연을 돌보도록 하였다. 간성은 한 집이 연기를 돌보도록 하고, 비리성은 두 집으로 하여 나라의 연기를 피우도록 하였다. 평양성은 백성의 나라이니 연기 하나로 돌보도록 하고, 연기 열을 잇닿게 이루고 두 집씩 하여 연기를 돌보도록 하였다. 드문드문한 사람의 나라는 연기 하나로써 돌보고, 연기 셋이니 고을이다.

곡은 두 집을 하여 연기를 돌보도록 하고 양성은 두 집을 하여 연기를 돌보게 하니 사내가 편안하였다. 연달아 스물 두 집을 하여 연기를 돌보도록 고쳤다 개량한 고을은 세 집을 하여 연기를 돌보니 새로 생긴 신성으로 세집을 하여 연기를 돌보도록 하였다. 남소성은 한 집으로 하여 나라의 연기를 하였다. 새로 한과 예를 오게 하여 사수성에 나라의 연기 하나를 돌보게 하였다. 잇대어 하나는 모루성에 두 집을 하여 연기를 돌보게 하였다.   구모는 손님 중에 머리다. 두 집을 하여 연기를 돌보도록 하니 저 아래의 한에서 한 집을 구하여 연기를 돌보게 하였다.

사조성은 한과 예로서 나라의 연기 국연 셋과 간연 스물 하나를 돌보게 하였다. 옛날의 법식을 어찌 존중치 아니하겠는가? 라성은 한 집을 하여 연기를 돌보도록 하니 빛나는 옛날의 성이다. 나라의 연기 국연 하나를 하여 돌보도록 하였다. 셋이 몸을 의탁하여 손님이니 한(韓) 한 집을 하여 연기 간연을 돌보도록 하였다. 아단성은 잡석과 보배가 뒤섞인 성이다. 열 집을 합하여 연기 간연을 돌보도록 하였다. 파노성은 한(韓) 아홉 집으로 연기 간연을 돌보게 하였다. 허물어진 모려(로) 성은 네 집을 하여 연기 간연을 돌보게 하니 모로성 각각은 두 집씩 하여 연기를 돌보았다. 모수성은 세 집을 하여 연기를 돌보고, 간저리성은 나라의 연기 국연 하나를 돌보도록 하였다. 세 미추성은 나라의 연기 국연 하나를 돌보도록 하였다.

0000000  일곱이니 야리성은 세 집을 하여 연기 간연을 돌보게 하였다. 두노성은 나라의 연기 국연 하나와 간연 둘을 돌보도록 하였다. 안으로 통하는 성인 오리성은 나라의 연기 국연 둘과 간연 여덟을 돌보도록 하였다. 수추성은 모름지기 추나라(주몽이 탄생한 나라)의 성이니 나라의 연기 국연 둘과 간연 오백을 하여 돌보도록 하였다.

잔은 남쪽에 거하니 韓國에 살았다. 韓으로 하여금 나라의 연기 국연 하나와 간연 다섯을 돌보도록 하였다. 다섯 큰 산과 한성韓城은 여섯 집을 하여 연기 간연을 돌보도록 하였다. 농매성은 나라의 연기 국연 하나와 간연 일곱을 돌보도록 하였다. 윤노성은 나라의 연기 국연 둘과 간연 스물 둘을 달아매어 돌보도록 하였다. 고모루성은 나라의 연기 국연 둘과 간연 여덟을 돌보도록 하고, 전성은 나라의 연기 국연 하나와 간연 여덟을 돌보도록 하였다. 미성은 여섯 집을 하여 간연을 돌보도록 하고, 취자성은 다섯 집을 하여 간연을 돌보도록 하였다. (삼?)양성은 스물 네 집을 연기 간연을 돌보도록 하였다.

박살난 '나성(임라의 성)'은 한 집을 하여 나라의 연기 국연을 올리도록 하였다. 나단성(임라의 단성)은 한 집을 하여 간연을 돌보게 하고, 구모성은 한 집을 하여 간연을 돌보게 하였다. 어리성은 여덟 집을 하여 간연을 돌보게 하고, 비리성은 세 집을 하여 간연을 돌보게 하였다. 세성은 세 집을 하여 간연을 돌보도록 하였다.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이 계실 때에 가르쳐 말씀하셨다.

“시조왕과 선왕께서는 오로지 가르침으로서 멀고 가까운 옛 백성을 취하셨다. 옛 백성을 취하여 묘를 지키고 쓸어 청소하도록 하여 (쇄?) 하라. 나는 옛 백성이 전전하며 굴러다님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똑같이 여겨 약함을 영한다면 내가 만년이 지난 후에도 편안할 것이다. 묘지기는 오로지 내가 몸소 다니며 경륜한 곳에서 취하라. 한과 예에 영을 내려 와서 예비하도록 하고 쓸어 청소하게 하라.“ 말씀하시어 이와 같이 가르침을 주시니 후에 이로써 가르침을 주신대로 한과 예에서 취하니 220 집이었다.

그리하여 보니 법을 알지 못하는 즉 옛 백성 110 집을 취하여 돌아왔다. 먼저와 지금의 묘지기가 합쳐 굴을 파고 나라의 연기 국연 삼십과 간연 300을 돌보았다. 도읍에는 합 삼백 삼십) 집이다. 자신의 윗 시조와 선왕을 이로써 묘 위로 하였다.

불안한 돌기둥을 돌려 바치고 묘지기로 하여금 연기를 올려 어긋나 섞이도록 하였다. 어긋난 백성이 섞이도록 함이니 오로지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이 모두를 위하고자하였음이다. 조상과 선왕의 묘는 위이니 벼슬을 돌기둥에 새기도록 하였다. 그 터에는 연기를 피워 올리지 말라고 영을 하였다. 어긋난 것을 섞이게 하시고 또 묘지기를 통제하시어 몸소 영을 내렸다. 이로써 훗날 고쳐서 (묘지기를) 서로 전매하여 팔고 사 얻지 못하도록 하였다.

“영을 고쳐 서로 전매하여 팔고 산다면 비록 있는 부자라도 발(종놈)로 하라. 놈들이 그래도 멋대로 산다면 영을 통하여 팔은 자도 형벌에 처하라. 팔은 자는 영을 제정하여 묘지기로 하라.”

                                                                                         - 광개토대왕 비문  -

사료해석 : 광개토대왕비는 가장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사료 중 하나입니다. 이유는 일본의 임나일본부설과 직접 연계된 사료이기 때문이지요. 일단 이 비석은 1부는 건국과정과 건국설화, 2부는 정복사업, 3부는 수묘인(묘지기, 노인)에 대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비석의 논점은 첫째, 3부의 수묘인이 과연 고대 사회에서 말하는 <노인>이라는 계급인가? 그리고 노인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라는 문제와 맞닫고 있습니다. 그 부분은 <한국고대사>방을 참조하세요.

두 번째 논점은 일본이 왜라는 글자를 필요한 부분에 위작하여 배치한 것이 아닌가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일본이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활용하기 위함이었죠. 이 논점이 되는 부분이 비석의 이 부분입니다.

   而還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而___以辛卯年________破百殘 ________羅以爲臣民
   신라와 백잔은 예로부터 속국이었고, 조공을 바쳐왔는데  ___가 신묘년에 ______ 하여 _______를 신민으로 삼았다.

이 부분을 일본이 왜곡하여 왜가 쳐들어와 백제와 신라를 정벌하였다라고 주장하는 부분이죠. 이 부분에 대하여 우리 학자들은 과연 지워져 있는 비석의 사실이 무엇인가를 밝히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한국고대사>방에 자세히 논의해 놓았습니다.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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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