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편>

15화. 평생을 불교와 싸운 유학의 아버지 - 한유

1. 맹신적인 종교가 국가를 망치는 것이다. 

중국 불교를 마무리 하면서 어떤 상징적인 이야기를 꺼내야 쉽게 이해될까 고민하느라 포스트가 지연되었다. 오늘 이야기는 불교를 배척하면서 평생을 살아간 <한유>의 이야기로 중국 불교편을 정리하고자 한다.

중국 당나라 시기... 불교는 최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국가 권력과 밀착한 화엄종, 천태종 등 교종 종파 뿐 아니라, 백성에게 직접 뛰어들어 불교의 대중화를 이끈 정토종, 선종에 이르기까지 불교천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불교의 힘이 너무 강해질 때마다 중국 황제는 종교에 태클을 걸었다. 그 이유는 정치적 목적 때문이다. 국왕이 불교를 용인하는 것은 불교가 왕권 강화에 도움을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황제에게 불교, 도교, 유학의 구분을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만약 종교가 황제권을 넘어서려 한다면 그 종파를 찍어 눌러야만 했다. 특히 유교, 도교, 불교라는 세 종파가 공존하던 중국 고대 사회에서 황제의 선택권은 넓었다. 황제가 불교에 위협을 느낄 때마다 유교, 도교를 이용하여 불교를 탄압하였고, 그것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몇몇 <폐불사건>으로 알려진 것이다.

링크 : 불교편 9화. 서로 우위를 점하려던 도교와 불교의 한판 승부

특히 유교는 불교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대세는 불교와 도교였고, 특히 불교는 당나라 측천황제(측천무후)의 불교 중흥 노력으로 최강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 하지만, 당나라의 국운이 기울던 당 말기부터 불교의 위세는 꺽이게 되었다.

당나라는 측천황제 이후, 불교가 사회를 지배하였다. 황제는 미륵의 화신으로 생각할 정도였고, 귀족들은 스스로가 보살이라고 여기며 성불을 기원했다. 천태종과 화엄종의 <경전>은 귀족들의 교양지침서였다.

공식적인 당나라의 통일 사상은 유학의 일종인 <훈고학>이었지만, 훈고학은 옛 성인들의 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수준이었다. 백성들은 불교를 믿고, 집집마다 향불이 올라왔다.

2. 유학자들의 반격

유학자들은 불교 세력이 성장하자 불교에 대한 비판을 공론화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황제권 강화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첫째, 불교 사원을 짓는다는 것은 막대한 세금을 낭비하는 것이고, 종교 사원은 세금을 내지 않는 특권을 누린다. 그것은 왕권을 강화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둘째, 죽은 뒤 내세가 기다리며, 내세는 현생의 죄업과 연결되어 있다는 <인과응보>에 대해 국가적 차원으로 비판하였다. 유학에서는 현실 사회에 대한 모순을 파악하고, 현실 개혁과 사회 안정에 대한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죽은 뒤 영혼이 어쩌구.. 하는 이야기는 현실성이 전혀 없으며, 백성들을 현혹하는 이야기일 뿐이다. 국왕으로서 당연히 막아야 되지 않겠는가?

셋째, 불교가 왕권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당나라 이전의 불교는 왕권 강화에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불교의 교리가 심화되어 강력한 <종파>가 생겨나자 문제가 발생했다. 불교가 석가모니의 참 뜻을 내세워 중국 전통 사회의 윤리에 도전한 것이다. 유학에서는 충성, 효도를 강조하지만, 불가에서는 출가릃 하여 부모와 국왕을 떠나는 것마저 허용하고 있다. 세금을 내야할 백성들이 줄어들고, 전통 윤리에서 멀어지는 것을 국가가 보고만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넷째, 불교 교단의 승려들이 <국사>가 되어 정치적 힘을 갖게 되었다. 왕권이 약해지는 시점에서는 이것도 골치아픈 것이었다. 백만대군보다 무서운 것이 종교적 힘을 가진 백만 민중 아니겠는가?

결국 당말기 폐불사건은 남북조시대 이후 계속 되어온 왕권과 불법의 대립이 극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남북조와 수나라를 거치면서 여러 차례 폐불을 당해본 불교였지만, 당말기에 대놓고 진행된 폐불에서는 큰 타격을 입었다.

특히, 경전으로 중심으로 귀족층과 밀접했던 <교종>은 교단이 박살날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다. 반면, 간략한 선법 수행과 <믿음>을 강조했던 <선종>은 그 피바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당나라 말기에 살아남은 불교 교파는 <선종>이었고, 결국 선종이 후대 중국 불교를 이끌어가게 된다. 그러나, 불교 자체가 위축된 만큼 불교의 힘은 떨어졌다. 당나라를 이은 송나라는 신유학인 <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삼았고, <교종> 교파는 송대 이후 아무런 힘도 가질 수 없었다.

3. 불교도 싫어, 귀족도 싫어...  NO 만을 외치던 <한유>

당송팔대가의 으뜸이라 불린 한유는, 중국 사회의 문제점을 <불교>에서 찾았다.

백성들이 죽은 뒤 <윤회>를 생각하면서 현실을 암흑으로만 생각하고 있다는 것과, 귀족들이 불상앞에 재산을 기부하면서 사회적 역할을 못한다는 것을 모두 <불교>탓으로 여긴 것이다.

특정 종교에 매달려 모든 것을 버리는 행위가 생긴다면 예나 지금이나 사회적 문제로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종교가 <종파>적 철학까지 잃고 지배층이 맹신하는 상황까지 발생한다면 국가 존립 자체가 위험해진다.

한유는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신유학>을 제시하였다. 노장사상은 허무주의이며, 불교는 현실이 아닌 <내세>의 종교라고 주장하고 다닌 것이다.

한유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나 스스로 제자백가를 독서하고 과거에 합격한 뒤, 특출한 학식으로 승승장구 승진하던 엘리트 관리였다. 하지만, 지배층이 숭배하는 <불교>에 정면 도전하면서 험난한 인생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당나라 덕종에게 지배층의 문란함을 비판하였다가 귀향을 갔었지만, 뛰어난 학식을 인정받아 다시 조정에 들어갔다. 그러나, 또 다시 지배층의 사상을 비판하여 귀향을 가게 되었고, 이것이 그의 일생에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귀향갔다 돌아왔다, 또 귀향갔다 돌아왔다....

특히, 한유가 미움을 받은 것은 당나라 헌종 때 <황제>의 불교 숭배를 비판한 것이 원인이 되었다.

당 헌종이 법문사라는 절에서 석가의 손가락 뼈한마디를 구해 궁궐로 가져온 뒤 제사를 지내고 다시 절로 보낸 일이 있었다. 그것을 본 지배층 인사들과 백성들이 모두 그 뼈한마디를 찾아가 난리를 치는 것이었다. 부자들은 자신의 재산을 그 뼈마디에 기부했고, 백성들을 생업을 포기한채 뼈마디 앞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어찌 인도에서 죽은 석가모니란 인물이 중국 사회 전체를 흔들어놓는단 말인가? 진짜인지 알 수도 없는 석가의 썩어 문드러진 뼈조각이 국가를 망친단 말인가?

한유는 헌종에게 <불교를 신봉한 군주들은 모두 단명했다>는 글을 올리며, 황제를 직접 비판하였다. 그리고 아무 생각없이 살아가는 당나라의 지배층들도 비판하였다. 소위 <귀족>이라고 불리며, 남작, 백작, 자작 등 작위를 받고 살아가는 지배층들은 개념(槪念)이 없다고 비판한 것이다.

그는 지배층들의 문학인 <시문학>까지 정면으로 부정하였다. 사륙변려체 등으로 구절을 맞추어 술자리에서 돌려말하는 싯구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것은 아무 의미없는 유흥일 뿐이다. 문학이란, 현실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있어야 하며, 진정한 <도>를 깨닫기 위한 노력 속에서 나와야 한다.

당나라 지배층이 쓰는 화려하고, 아름답기만 한 문장들은 아무 의미가 없다. 요즘으로 따지면 원더걸스나 빅뱅의 노래가 귀에 착 붙게 반복적인 멜로디로 구성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뜻은 아무 의미없는 것과 같다. NOBODY를 백번 외쳐봐도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한유는 한나라 이전의 고문들을 회복시켜 아무 의미없는 당나라 지배층의 문학을 부정하려고 했던 것이다. 왜 하필 한나라 이전의 고문으로 돌아가자는 고문부흥운동(古文復興運動)을 전개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불교가 한나라 이후에 성행했기 때문이고, 유학이 한나라 때까지 전성기를 누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반지배층 성향을 가진 한유.... 그 결과는? 오랜 시간 귀향살이었다. 그러나, 인생의 절반이 중앙정권에서 배제된 그였기에 백성들과 직접 만날수 있는 기회도 많았고, 많은 친구를 사귈 수도 있었으며, 성리학의 토대가 된 저서들도 적을 수 있었다.

4. 불교를 비판했으나, 유학도 내 버려두지 않은 한유

한유는 불교, 노장사상 등을 비판했고, 그것을 신봉하는 지배층과 무지한 백성들을 동시에 비판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옛 유학을 그대로 옹호하지도 않았다.

한유는 한나라 이전의 유학들도 비판하기 시작한다. 공자와 맹자의 말씀부터 시작된 고대 유학을 당나라에서 <오경정의>로 압축하였다. 당나라에서는 과거시험의 명경과를 보기 위해 <오경>을 공부해서 암기해야 했다.

하지만, 한유는 그것을 비판한다. 왜 공자와 맹자의 사상을 단순히 암기해야만 하는가? 그들의 사상이 절대적이라고 맹신한다면, 불교를 절대적으로 믿는 이들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어떤 사상에 대한 맹신은 결국 교조주의일 뿐이다.

한유는 불교 자체가 나쁜 것이라 말하지는 않은 듯하다. 하지만, 불교의 교조주의적 성향을 비판하기 위해 평생을 불교와 싸우며 살아갔다. 그의 역사관은 이렇다.

중국의 전설시대에는 인간 윤리를 지키며 살아간 태평한 시기(태평성대)가 있었다. 그러고, 중국인의 전통 윤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면서 <유학>이 등장하였다. 하지만, 한나라 이후 불교라는 외래 종교가 유입되어 황제들이 단명하고, 국가의 전성기도 단축되었다. 위진남북조의 긴 혼란기가 불교의 전성기였으며,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황제는 불교를 견제하면서 국력을 낭비하였다.

따라서 고대 유학을 부흥해야 하지만, 시대가 달라진만큼 새로운 유교 철학이 필요하다. 한유는 새로운 유학 철학을 <성선설>에서 찾았다.

맹자의 성선설은 인간의 성을 인, 의, 예, 지, 신 등으로 구분한 뒤 본성이 착한가를 따지는 철학이었다. 반면, 한유는 성선설, 성악설을 모두 보완하면서 인간의 성품은 3가지로 나뉜다고 말한다.

성 상품

  태어나서부터 선한 성품

성 중품

  선과 악 어느쪽으로나 갈 수 있는 성품

성 하품

  태어나서부터 악한 성품

한유의 책 중에서 널리 알려진 책은 <진학해, 원도, 원성>이라는 3권의 책이다. 진학해는 자서전으로 불교비판에 대한 내용이 많이 실려있고, 원도는 유학의 나아갈 길과 불교의 문제점이 실려있다. 원성에서 성삼품설을 적어두었다고 한다.

5. 불교의 시대가 가고 성리철학의 시대가 오다.

당나라 말, 한유의 출현과 더불어 시작된 성리학의 태동은 불교의 입지를 비좁게 만들었다.

한유의 벗인 유종원은 한유의 철학마저 비판하면서 <유물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는 역사 발전의 핵심을 <세력>으로 파악하였다. 공자, 맹자와 같은 성인이 역사를 좌지우지하지 않는다. 그들은 말 그대로 성인이거나 종교인일 뿐이다. 우주나 음양오행이 인간의 삶을 결정하지도 않는다. 우주는 단순한 음과 양이 모인 기(氣)일 뿐이다. 기(氣)는 살아있지도 않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따라서 우주의 기가 인간행위에 벌을 내린다거나, 복을 준다는 말 자체가 미신일 뿐이다. 결국, 인간 세계를 이끌어가는 것은 역사를 이끌어가려는 <힘있는 인간 집단>일 뿐이다.

유종원과 한유의 후학인 이고는 스승 한유의 철학에 선종 종파의 <수련법>까지 더하였다. 선종계열의 불가에서는 인간이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맹자가 인간의 성이 모두 선하다고 말한 것처럼, 부처 역시 누구나 착한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말한 것이다. 따라서 성인이든, 군자든, 평민이든 모두가 선할 뿐이다. 단지, 우주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외부(기 : 氣)의 영향을 받아서 훗날 선과 악으로 갈릴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모두가 선해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처의 수련법인 <선>을 행해야 한다. 선종의 명상법과 수양법, 좌선과 대화는 학문과 종파를 넘어서 모두에게 유용한 수련법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당말기, 새로운 유학 사상가들은 불교를 비판하면서도, 옛 유학의 참뜻을 자기 나름대로 재해석 하려고 노력하였다.

새로운 유학은 당나라 귀족층들이 농담따먹기 하듯 적어내는 의미없는 글귀나 고사모음이 아니라 인간과 우주의 본성을 연구하는 <뜻>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그것이 고문부흥운동으로 이어진 것이다. 고문부흥운동은 화려한 문구의 시를 벗어나, 현실생활과 관련된 문제들을 철학적 명제로까지 끌어내려는 노력이었다.

당말의 유학자들은 국가 권력이나 지배층과 밀착된 교종 종단을 철저히 배척하였다. 그러나, 신유학 역시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고 뜻을 찾는다는 점에서, 선종 교단의 수련법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하였다.

6. 불가와 도가의 철학이 성리학의 <태극>으로 합쳐지다.

당나라 다음으로 등장한 송나라에서는 성리철학의 틀이 완성되면서 사회 지배철학으로 자리잡은 시기였다.

그 역사적 철학을 <태극>으로 정리한 이가 바로 <소강절>과 <주렴계>였다.

절에서 거주하면서 불교철학과 유학을 두루 공부한 소강절은 불교, 도교, 유학의 철학을 두루 정리하여 태극(太極)이라는 불변의 원리를 만들어내었다.

태극이란, 절대 불변하는 우주의 진리로서, 성리학에서 말하는 이(理)와 같다. 태극은 불변하지만, 그것을 알아채는 인간의 정신(神)이 사물을 파악하는 것을 기(器 : 물질)리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정신과 기는 돌고 돈다. 세상에는 시작점이 있는데, 이것이 정신으로 표현되며, 또 물질로 표현되며 물질이 소멸되면 다시 정신으로 돌아간다. 이것은 불가에서 말하는 <윤회>의 이론과 비슷하다.

또, 돌고돌아 물질이 자연으로, 정신으로 돌아간다는 점은 도가의 무위자연과 추연의 음양오행설과 유사하다.(실제, 소강절이 불교, 도가의 철학을 의도적으로 인용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지만, 돌고돈다는 법칙 자체는 변하지 않고 불변하는 진리로 남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태극>인 것이다. 태극은 모든 자연과 인간, 우주의 근본 법칙이다.

이 사상을 정리한 이는 동시대를 살았던 친구인 <주렴계>이다. 그는 선종 선승들과 직접적인 교분이 있었고, 선종의 수양법으로 자신을 단련하면서 살았던 인물이다. 주렴계는 모든 현상의 근본 법칙인 태극에게 2가지 속성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움직이는 것을 양(陽)이라 하고, 정적인 것을 음(陰)이라고 하는데, 이 음과 양이 돌고 돌아 우주의 법칙을 회전시킨다는 것이다. 음과 양은 오행(화,수,목,금,토)의 상극을 만든다. 양은 남성, 태양 등을 뜻하며, 음은 여성, 달 등을 뜻한다. 불(火)이 양이라면 나무(木)가 음이 된다.

그리고, 이 양과 음이 상호작용하면 우주가 돌게 된다. 만물의 생성을 주도하는 것이 건(乾)이고, 받아들이는 것이 곤(坤)이다. 하늘과 남자가 건이면, 땅과 여성이 곤이다.

주렴계의 철학은 결국 불교와 도교의 철학에서 파생되었다. 선종에서 말하는 공(空) 사상과 도가에서 말하는 무(無) 사상 등의 철학을 유가 형식에 맞춰 <태극>으로 정리한 것이다.

단, 차이점이 있다면 불교와 도가에서는 존재의 근거가 되는 불변의 진리를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논리적인 정신적 개념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러나, 주렴계는 <태극>이 인간 세계에 존재하는 님자, 여자, 하늘 등의 명칭을 가진 물질이라는 점에서 <유물론>적인 관점의 철학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탐구할 수 있는 태극의 실체를 리(理)라고 말하고 있다. (태극도설)

7. 선종 철학을 벗어나 이기론으로 향하는 성리학...

동시기를 살았던 장제는 좀 더 세밀하게 불교 철학과 성리학의 차이점을 설명한다. 불변의 본질인 태극 자체를 리(理)라고 말하면서, <리>는 단순히 변화의 법칙을 설명하는 원리라고 말하였다. 실제 우주를 구성하는 실체는 기운(기 : 氣) 인데, 이것이 바로 눈에 보이는 존재자라고 말한 것이다.

따라서 장제가 주장한 <주기론>은 불교사 입장에서 보면 아찔한 것이 된다. 불교의 <공>사상이나, 도가의 <무> 사상이 전면 부정되고, 우주에 실제 존재하는 기운(氣)이 명백히 물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장제의 입장에서 <기>란, 우주의 생성부터 현재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이며, 지금 이순간에도 변하고 있는 모든 사물인 것이다. 더 이상 <색즉시공 공즉시색>과 같은 어려운 말은 통하지 않는다. 모든 사물은 우주의 기운(氣)를 받아 생겨나서 살아가다가 사라질 뿐이라고 말하면 끝이기 때문이다. 내세도, 윤회도 이젠 없다. 기운(氣)은 살아있을 때 활동할 뿐이며, 죽은 뒤 사라질 뿐이다.

동시대를 살았던 정이천, 정명도 형제는 장제의 <기> 사상을 우주와 만물의 일치로 끌어올린다. 그들은 모든 만물에 기운이 있고, 그 기운은 우주에서 내려준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만물과 하나가 되는 경지에 이르고, 모든 중화인이 하나의 민족이라는 것을 아는 단계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주의 기운(氣)은 불변하는 원칙인 이치(理)에 의해 움직이므로, 모든 우주의 기운에는 이치가 담겨져 있다고 말한다.(일물일리론 : 一物一理論)

이 이론을 정리하여 성리학을 완성한 이가 바로 성리학의 아버지 <주자>이다. 주자는 이치(理)와 기운(氣)의 상관관계를 정리하고, 그것을 중국민족의 우월성과 정당성으로 규정하면서 새로운 정치철학을 완성했던 것이다.

이 와중에 불교의 교종 철학은 설 자리를 잃었다. 정치철학으로 성리학에 지배권을 빼앗긴 불교는 이미 당나라 지배층이 무너지면서 정치적 실권에서 사라진 것이다. 이제 불교는 민중속으로 파고든 선종과 정토종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송나라를 넘어 명, 청 시대로 이어지면서 서민 불교로 자리잡아간다. 그리고, 송나라 이후 역사적 변환점에 새롭게 자리잡게된 철학은 <유학>이었다.

자, 그럼 이 쯤에서 중국 불교이야기도 끝내고 한반도와 일본의 불교로 넘어가보자.

한반도의 불교는 인도, 중국 불교의 연장선에서 이야기될 것이다. 고조선에서 시작하여 현재의 조계종까지의 불교를 역사와 관련해서 살펴보자. 그리고 일본의 불교는 우리 역사와 비교해서 다루면 좋을 것 같다. 이야기 했듯이 티벳이나 동남아 불교는 동아시아 역사와 큰 관련이 없기 때문에 관련 부분만 조금씩 이야기하려고 한다.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by 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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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편>

14화. 달마 이야기 : 지식은 권력층만의 것이 될 수 없다.

1. 선(禪)이란 본래 수행방법이었다.

선(禪)은 원래 인도 불교의 수행방법으로서 <요가의 명상법>과 비슷한 것이었다. 선은 범어로 드야나(dlhyana)를 번역한 것인데, 원 뜻은 <집중하여 생각한다> 이다.

그런데, 이 수행방법이었던 선이 어떻게 동아시아 불교에서 가장 큰 위상을 차지한 <종파>로 거듭나게 되었을까? 오늘은 선 사상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중국에서의 <선종>은 보리달마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데, 달마가 중국에 건너오기 전의 <선>을 교학선이라고 한다. <교학선>이란, 소승불교에서 개인 수양을 위해 적어놓은 <호흡법> 등과, 대승불교 경전에 기록되어 있는 요가수행법 등을 바탕으로 한 <명상법>을 말한다. 경전을 바탕으로 하는 여러 <교종> 종파들이 책을 읽은 후 수행법으로 익힌 것이다.

따라서 <교학선>은 독자적인 선종 종파로 볼 수 없다. 교종의 진보적인 스님들이 수행법을 받아들인 것이기 때문에, 이 스님들도 선종과 관계없이 그냥 <선사>라고 부를 뿐이다. 원래 <선사>란, 종파와 관계없이 선법을 익힌 모든 스님들을 칭하는 호칭이었다.

그럼 선종(禪宗) 조사는 누구일까? 말은 많지만, 대부분이 <달마>를 조사로 인정하고 있다. 원래 인도에서의 선은, 신비주의적인 <도술>과 같았다. 숨쉬기를 통해 <공중부양>을 한다는 요가법을 현실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중국인들이 종교로 인정하기 어렵지 않겠는가? 그래서 처음 달마가 중국에 선을 소개했을 때, 불교인들은 달마를 인정하지 않았던 듯 싶다.

지금이야 무협지에서 장풍을 쏘고, 축지법을 쓰고 난리도 아니지만... 무협지의 기본 배경이 되는 불교 종파가 바로 달마를 시조로 하는 선법 계열이다.

달마에 대해 남겨진 기록이 너무 적기 때문에 그는 소림사에서 장풍이나 날렸던 <전설적인 인물>이 되어 버렸다. 달마가 지었다는 <이입사행론>이나 그의 철학인 <일심사상>도 후대인들이 지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달마의 저서가 후대작이든 아니든, 중요한 것은 그 책으로 그의 철학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럼 시작해볼까?

2. 달마 : 마음으로 경전을 읽을 수는 없는가?

달마는 극심한 혼란으로 어수선한 남북조 시기의 <남조>에 건너왔다. 당시 중국 남부를 지배하고 있던 양나라의 무제는 <불법의 수호자>를 칭하는 인물이었다. 양조는 달마대사가 오자,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기 시작한다. 평생 절을 짓고, 경전을 번역하고, 승려들을 공경한 자신을 자랑하며, 자신의 공덕이 얼마나 되겠느냐고 물었다.

당시, 남조의 왕은 스스로를 미륵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며, 귀족들은 미륵을 보호하는 보살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공덕을 많이 쌓으면 부처가 될 것이라고 믿고, 열심히 경전을 읽고 있었다. 백성들은 글을 모른다. 사후세계의 주인은 <지식을 독점>하고 있는 귀족들이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달마의 대답은 왕의 기대와는 정반대였다.

<당신은 아무런 공덕이 없습니다. 마치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 대답에서 선종의 선사상이 도가에서 말하는 <무위자연>과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선종은 가진 자들이 <스스로를 위해> 공덕을 베푼다고 말하는 것을 싫어한다. 공덕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인간성>을 먼저 아는 것이며, 본래 내가 누군가를 아는 것이다.

달마의 사상은 <이입사행론>에 자세히 나와있다.

이입사행론(理入四行論)의 핵심은 이입(理入)과 행입(行入)이다.

이(理)는 깨달음(이치)를 말하는 것이고, 행(行)은 실천을 말한다. 즉, 깨달음을 얻고, 실천하라는 것이 이입사행인데, 깨달음의 핵심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불성>을 아는 것이고, 실천의 핵심은 부처가 되기 위한 <수행>을 말한다.

보리달마는, 남조의 왕이 <공덕>에만 욕심을 내고, 깨달음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남조의 지배층은 공덕을 무시하는 달마를 배척하였다. 달마가 쫓겨난 것인지, 수행을 위한 것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그는 숭산 소림사로 들어가 9년간 면벽 수련을 한다.

그런데, 면벽(벽관) 수련이란 어떤 수행법일까? 용어 그대로 벽을 보며 외부의 모든 것을 차단하는 수련을 말한다. 이것은 사방이 차단되어 아무런 번뇌도 나에게 들어올 수 없는 상태를 만들고, 깨달음을 얻는 방법이었다.

3. 경전을 버려야 하는가, 경전에서 참뜻을 구해야 하는가?

중국 불교 초기에 선사상이 <교학선>이라면, 달마와 그 후계자들로 이어지는 선사상을 <여래선>이라고 한다.

여래선은, 부처라는 인격을 절대적으로 보려는 기존 교종 사상과 차별되는 사상이다. 여래선에서는 기존 경전보다 <능가경>에 나오는 <여래선> 사상을 강조한다.

보리달마가 가장 중요시한 <능가경>에는 4가지 선사상이 나온다.

1단계 : 우부소행선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을 시작하는 단계

2단계 : 관찰의상선

모든 것이 무(無)라는 것을 알고 사물을 바로 알아가는 단계

3단계 : 반연진여선

진여(사물의 실제)를 알기 위해 경전의 진리(반야)에 집착히지 않는 단계

4단계 : 여래청정선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 중생을 위해 실천하며 살며, 마음이 지배하는 단계

능가경은, 수행과 깨달음을 위한 선을 4단계로 분류한 뒤, 여래선이 최고의 선이라고 규정하였다. 달마 이후 선종 조사들은 스스로의 선을 여래선이라 불렀는데, 그 핵심은 <마음>이었다.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 것은 <마음>에 달린 것이다. 죽고 사는 것도 <마음>이 느끼는 것이며,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도 <마음>이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일반인들의 마음은 인간이었던 부처와 다를 바가 없다. 마음은 모두 같은 것이기에, 부처의 모든 것을 절대적으로 여길 필요가 없는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에서 <마음>에 해당하는 부분이 다른 부분보다 우선인 것이다.

손을 하나로 모으는 <합장>은 악수와 다르게, 내 스스로의 마음이 하나라는 것을 증명하는 수화이다. 사실 우리의 모든 것은 마음이 시키는 것이다.

<밥 먹을 땐 밥을 먹고, 이야기힐 때는 말하고, 차를 마실 때는 차를 마신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 마음이 시키는 하나의 행동이란 것을 중생들이 모를 뿐이다. - 보조국사 지눌 - >

여래선에서 말하는 마음은 크게 2가지이다. 진리가 무엇인가를 깨닫는 마음을 <진여문>이라고 하고, 죽음이 덧없음을 아는 마음을 <생멸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진리가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것은 모두 <마음>에 달렸으니, 부처가 되어 <성불>하는 것은 마음에 달린 것이다. 따라서 능가경에서 주장하는 것은 부처의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마음>으로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교종에서는 <경전의 말씀>만 강조한다. 그러나, 경전으로 깨닫는 것은 <지식의 독점>일 뿐이다. 책을 읽을 시간도 없고, 심오한 철학을 접할 시간도 없는 일반민에게 성불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회마저 박탈하는 것이다.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마음>이 있다면, 부처가 될 수 있어야 한다.

달마의 사상은 획기적이면서도, 지배층에게 배척당할 수 밖에 없는 사상이었다. 그리고, 달마의 후계자들 중에 <마음>을 강하게 강조하는 이들일수록 탄압받게 되었다. 그러나, 최후의 승리자는 <달마의 직계 계승자>들이었다. 그 이야기를 계속 해보려고 한다.

4. 이심전심(以心傳心) : 선종의 시조 마하가섭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보자. 선종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화는 마하가섭의 이야기이다.

석가가 인도에서 전도할 때, 어느 날 아무 말 없이 꽃 한송이를 여러 사람에게 보였다. 모두가 무슨 일인가 어리둥절 할 때, 마하가섭이라는 제자가 씩~ 웃으며, 나는 석가모니의 뜻을 알 것 같은데요... 하는 표정으로 석가를 쳐다보았다.

"내 마음 속에 있는 정법과 원리가 이미 가섭에게 전달되었구나"

이렇게 마음으로 마음을 깨닫는 경지를 이심전심이라고 한다. 그 후로, 눈빛만으로 그 뜻을 깨닫는 이 일화를 <염화시중의 미소>라고 말한다. 이렇게 이심전심의 깨달음으로 창시된 종교가 선종이고, 마하가섭을 인도 선법의 시조라고 부르게 되었다.

선종의 역사를 정리한 <능가사자기>는 마하가섭을 시조로 달마를 중국선조(2대조)로 기록하고 있다.

달마는, 이렇게 마음으로 모든 것을 깨달을 수 있는 <이심전심>을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그 실천사상이 담겨있는 <능가경>을 핵심경전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시조 달마 이후 2조 선사부터 5대 선사까지의 시대를 능가경에 의지한다고 해서, <능가종>이라고 부른다.

1대 달마는, 기존 교종처럼 지식의 유무를 테스트하여 2조를 선택하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을 이해한 사람에게 의발을 전하여 후계자를 뽑은 것이다. 의발이란, 중들이 입는 옷(가사)와 지팡이를 말하는데, 이 두가지를 전수받은 제자가 종파 조사가 되는 것이다.

달마에게는 <혜가>라는 제자가 있었다. 혜가는 면벽수련을 하는 달마에게 법을 구했으나, 제자가 되지 못하였다. 정성을 다하여 달마를 모시고, 성실하게 생활하였으나 제자가 될 수 없었다.

혜가는 입실 허락을 기다리다가 다시 달마에게 제자가 되기를 청하였다. 달마는 혜가를 바라보았는데, 눈빛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불안한 너의 마음이 무엇인지 가져오너라.>

혜가는 스승의 눈빛을 이해한 뒤, 칼을 뽑아 왼팔을 끊어 달마 앞에 보여주면서, 불안한 마음을 안정시켜 달라고 하였다. 달마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래, 네 그 마음을 이리 가져오너라. 내가 널 편안하게 해 주어야겠구나.>

그리하여, 마음에서 마음으로 조사를 넘겨주는 선종의 전통이 생긴 것이다. 시조 달마에서 5대조 흥인까지는 이렇게 이심전심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능가경>을 경전으로 선사상을 실천해 나갔다. 그러나, 6대조 혜능에 이르러 <능가경>조차 버리게 되는 새로운 변화를 맞게 된다. 그럼 선종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혜능>의 이야기를 한번 해볼까?

5. 혜능과 신수 : 남종선과 북종선으로....

선문의 5대조는 흥인이다. 흥인은 양자강 쌍봉산에서 <선>을 실천하고 있었다. 아직 선종이라는 종파가 확립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의 모임을 <동산법문>이라는 문파로 부르고 있었다. 이 종파는, 달마의 면벽수련과 정토종식 염불을 동시에 하고 있었다.

흥인 역시, 부처와 인간의 심성은 동일하며 누구나 부처가 되어 성불할 수 있다는 입장을 가지고, 인간의 본성에 접근하였다. 그리고, 당시에는 중국의 오랜 분열시기가 끝나고, 수나라에 의해 중국이 통일된 시기였다. 그 때문인지, 흥인은 안정적으로 불법을 설교할 수 있었고, 훌륭한 제자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흥인의 제자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신수, 혜능, 법지였다. 신수는 가장 뛰어난 제자로 흥인의 후계자로 지목받았던 인물이다.

반면, 혜능은 남조에서 가난하게 태어나 흥인을 만나고자 일부러 찾아온 인물이었고, 절에서 방앗간 허드렛일이나 하는 자로 글을 읽을 줄도 모르는 인물이었다.

어느 날, 신수는 평소 자신의 사상을 5언률의 게어로 지어 스승이 지나가는 길목에 자랑스레 붙여놓았다. 모든 이들이 신수의 학식에 감탄했으며, 스승 또한 선사상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라며 칭찬하였다.

몸은 곧 보리수이고 마음은 맑은 거울과 같다. 때때로 힘쓰고 털어내어서 번뇌가 다가오도록 해서는 안되겠구나.

그러나, 혜능은 신수의 게어가 이해되지 않았다. <선>이란, 아무 것도 없다는 무를 깨닫고, 결국에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깨닫는 것이다. 보리수와 거울의 비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혜능은 글을 모르기에, 다른 사랑에게 부탁하여 글을 적었고, 자신의 게어를 신수의 게어 옆에 붙여두었다.

보리라는 나무도 본래 없는 것이고, 맑은 거울이란 것도 그 본질이 없는 것이다. 본래 아무 것도 없는 사물일 뿐인데, 어느 곳에 먼지가 쌓인단 말인가?

혜능의 게어를 본 흥인은, 진정한 선이 무엇인지 <마음>으로 깨달은 혜능에게 옷과 지팡이를 전해주고, 선문 6대조로 인정해주었다. 그리고, 신수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혜능을 남쪽으로 피신시켰다.

30살을 갓 넘긴, 혜능은 남쪽으로 내려가 16년 동안 평민들과 어울려 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인종법사가 열반경을 강의하는 것을 보고 난 후, 그의 토론하여 그를 <마음>으로 제압하였다. 그리고 정식으로 출가하여 <남종선>을 개창하였다.

혜능의 선사상은 달마의 수행법인 좌선수행을 벗어난 것이었다. 혜능이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선문답>이었다. 혜능의 6대조부터 선종은 <여래선>을 벗어나 <조사선>이라 불리게 되었고, 동아시아 선종은 바로 이 <조사선> 계통이 된 것이다.

글자도 모르는 무식(?)한 혜능이 6대조가 되어 <남종선>을 연 동안, 정통 제자로 여겨졌던 신수는 무엇을 했을까? 신수와 그를 지지하는 제자들은 <북종선>을 개창하였다. 훗날, 북종선이라 불린 신수의 선종 문파는 경전의 중요성을 무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승불교의 여러 교단을 선종의 이론으로 통합하려고 노력하였다.

원래 유교와 도교의 이론에도 정통하였던 신수는, 당나라 무측천(측천무후)의 신임을 얻어 대통선이라는 지위에 올랐다. 국가가 인정하는 최고의 선종 고승이 된 그는, 대승불교를 <마음>의 관점에서 통합하려 했지만, 그가 죽은 뒤 교단 자체가 힘을 잃게 된다. 당나라의 지배층 입장에서는 <마음> 따위를 강조하면서 <불교>를 평민들과 <공유>하려고 한 그들을 인정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또한, 혜능의 진보적인 교단이 남부지방을 석권하면서 신수 일파의 북종선이 일방적으로 비판당했기 때문이다.

신수, 혜능과 같이 흥인의 제자였던 법지는 아예 독립적인 교단을 차려 나갔는데, 그가 주장했던 것은 염불을 통해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의 종파를 <우두종>이라고 하지만, 염불을 강조한다는 교단 성격이 정토종과 비슷하기 때문에 곧 잊혀지게 되었다.

6. <직지인심>을 계승한 선종

일자무식이라 여겨진 혜능이 선종을 <종파>로 만들어 버린 것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혜능부터 <조서선>이라 불린 선종은 이론적으로 현재의 선종과 유사해졌다.

불립문자

문자에 의지하지 않음

교외별전

경전을 절대적으로 여기지 않음

이심전심

마음을 통해 마음으로 전함

직지인심

사람의 마음(본성)을 한번에 깨달음

견성성불

인간은 누구나 부처가 될 마음을 타고 났으므로, 부처가 될 수 있음

선종의 가장 큰 특징은 <마음>인데, <마음>은 결코 경전으로 알 수 없다. 일상속에서 깨달을 수도 있으며, 수행을 통해 깨달을 수도 있다.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으므로, 문자에 의지할 필요도 없으며 서로의 마음을 공유한다면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혜능은 이러한 것들을 체계적으로 주장하였다. 그는, 오랜 시간의 면벽(좌선, 참선)보다도 선문답을 통한다면 더 빠른 깨달음이 가능하다고 말하였고, 어느 순간 단번에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다고 말하였다.(돈오견성)

또, 혜능은 수행을 통한 번뇌 해소보다 깨달음을 통해 바른 성품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원래 번뇌와 지혜는 하나이다. 참과 거짓도 수행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에서 중요한 것은 선문답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어느 순간 내가 누구인지 깨닫게 되는 것을 <돈오>라고 하자. 깨닫기 위해 문제를 파악하고 스스로 생각해보는 것을 <화두>라고 한다. 그리고, 큰 <화두>를 풀기 위해 고민하는 것을 <공부>라고 한다.

우리는 흔히 말한다. 요즘 이슈가 되는 <화두>는 이거야... 대학갈려면 <공부> 안할래?... 이렇게 단어들은 모두 선종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불가에서 일상적으로 쓰는 말들이다.

혜능이 말한 <조사선>은 자신이 알아야 할 <화두>를 열심히 <공부>해서 어느 순간 깨달음을 얻는 <돈오>에 경지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런데 깨달음이 어려운 이유는? 그것은 기존 <지식>에 얽매여있기 때문이다. 기존 교종의 입장은 <경전>을 공부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간성 자체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화두>가 그것인데, 왜 <공부>만 시키려 드는가?

내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고 있는데, 달은 안보고 왜 손가락만 보는가?

선종에서 말하는 비유는 위 문장과 같다. 석가가 달을 가리키고 있는데, 교종은 석가의 손가락만 보면서 찬양하고 있다. 석가의 <마음>은 이미 달로 향했는데, 교종은 마음이 아닌 석가의 <손가락>을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첫 번째 할 일은 석가의 손가락을 떠나 석가의 눈을 보면서 그가 향하고 있는 <마음>을 같이 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심전심이다.

7. 선종 문파의 창궐...

혜능 이후, <남종선>은 중국을 대표하는 <선종>이 되었으며, 동아시아 각지에 전파될 정도로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선종은 그 영향력 만큼이나 종파가 너무 다양해서 이름만 듣고서는 너무 생소할 정도이다. 그러나, 한반도와 일본에 유입된 선종 종파들의 이름이기 때문에 간략히 언급만 하고 넘어가보자.

혜능의 문하에서 배출된 큰 종파는 마조도일의 <홍주종>과 석두희천의 <석두종>이다. 특히 혜능의 사상이 선종문파로 활성화 된 것은 <홍주종>의 영향이 크다. 홍주종에서는 마음으로 깨닫기 위해서는 <평상심>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마조도일의 제자인 백장회혜는 선종의 계율을 만들었는데, 함께 수행하고 선문답하며 자급자족의 생활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규율이 불가에서 중요시하는 <백장청규>이며, 이 때 부터 선종이라는 종파가 독립적으로 사원을 짓고, 규율에 맞춰 생활하게 되었다.

선종은 <경전>과 <문자>를 중요하게 다루지 않고 <마음>을 중요하기 생각하기 때문에, <규율>이 강한 편이다. 또, 경전을 대신해서 선조 조사들의 <어록>을 경전과 같이 소중히 다룬다. 신약 성경이 예수의 말을 모아둔 제자들의 이야기라면, 선종의 <어록>은 선종 조사들의 이야기를 모아둔 <성경>이다.

선종에서는 석가모니의 제자였던 마하가습부터 달마, 혜능 등으로 이어지는 법통을 부처의 <직계 사상 계승>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석가모니부터 현재까지의 조사들의 말씀은 곧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된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후, 마조도일의 홍주종에서 위앙종, 임제종이 나왔다. 석두희천의 석두종에서는 조동종, 운문종, 법안종이 나왔는데, 이들 5개의 종파를 선종5가라고 말한다. 또, 송나라 때 임제종에서 황룡파, 양기파가 나와 이 때는 선종7종이라고 부른다.



위앙종

  무위무사 : 마조도일의 평정심 강조, 마음을 평안히 하면 번뇌가 사라짐

임제종

  임제의현의 개창, 황룡파와 양기파 배출, 즉시 깨달음을 강조, 간화선 강조



조동종

  설법과 언행이 중요함을 강조함, 묵조선 강조

운문종

  운문어록에 적힌 적은 글자 수의 질문과 답변을 통해 간결한 깨달음 강조

법안종

  화엄의 일심사상을 바탕으로 선을 받아들여 선종과 교종의 통합을 강조

선종은 고려 이후 한반도에서도 주류 불교종파로 명맥을 이어나갔다. 이 중 법안종은 고려시대 초기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불교 통합을 시도하는 이론으로 받아들여졌고, 임제종은 불교가 침체되고 성리학이 유행했던 조선시대에도 명맥을 이어나갔다.

특히, 선종 5가 중에서 임제종과 조동종은 중국 송나라 시기 라이벌 관계였다. 그것은 간화선 사상과 묵조선 사상의 차이 때문이었다.

<간화선看話善>이란, 선종 조사들이 남긴 <어록>들을 공식 문서로 만들어 참고 자료로 활용한 다는 뜻이다. 만들어서 보고(看), 선조들과 대화하여(話) 자신의 본질을 알고, 바로 깨닫는 것이다. 간화의 <화>란 앞서 말한 <화두>의 약자이다.

<묵조선黙照禪>이란, 묵묵히(黙) 자신을 찾는(照) 수양법이다. 즉, 고요한 곳에서 수행하면서 깨달음을 얻고, 서로간의 토론을 통해 자신을 찾는 방법이다. 묵조의 <조>란 자신을 안다는 지(知) 자의 다른 표현이다.

   간화선이든, 묵조선이든 후대 선종 종파들은 한가지 같은 고민을 안고 있었으며, 그 고민을 풀기 위해 각각 자신의 종파 이론이 달마의 뜻과 같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이 안고 있던 고민은 조사 달마에 관한 것이였다. 

                                     달마가 동쪽으로 온 까닭은?

도대체, 달마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온 까닭은 무엇인가? 그가 중국에 남기려고 한 선법은 석가모니의 인도 선법과 무엇이 다른 것인가? 그러나, 달마에 대한 기록이 없으니, 그 정답은 누구도 알지 못하였다. 달마에 대해 남긴 기록들은 후대의 제자들이 남긴 이야기일 뿐 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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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복잡하고도 어려운 선종에 대해 간략히 정리해 보았다. 그리고, 중국 불교에 대해서도 거의 정리된 듯 싶다. 중국 불교는 이제 끝이 났다. 왜냐면, 중국 송대 이후에는 성리학이라는 신유교가 사회 전반을 자리잡게 되면서 불교 이야기가 역사 속에서 큰 위치를 차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음 장에서는 중국 불교가 유학에 밀리는 과정을 간략히 설명하고, 한국 불교로 넘어가려고 한다. 한국 불교 이야기는 딱딱한 불교 교리 설명이 거의 없을 듯 싶다. 중국 불교에서 다 짚고 넘어간 듯 싶으니까...

한국에서 불교가 유입된 배경과 불교와 관련된 정치, 경제, 문화적인 논리들, 몇몇 새롭게 등장한 독자적인 종파들을 설명하면서 한국과 일본의 불교 이야기로 넘어가보도록 하자. 처음 시작할 때 이야기 햇듯이 티벳과 인도 불교는 우리와 상관이 없기 때문에, 필요할 때만 가끔 언급하도록 하자.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by 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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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13화. 정토종 : 정통 미륵에서 벗어난 아미타 부처

1. 복잡한 인도 철학을 벗어나 민중의 신앙으로...

자, 지금까지 우리는 중국으로 전파된 대승불교 철학을 살펴보았다. 위진시대의 불교 수준은 노자 사상으로 부처를 이해하는 <격의 불교> 수준이었다. 그러나, 인도 대승 불교의 핵심사상이었던 <공>, <반야>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면서 불교와 도교는 선후 논쟁을 벌였고, 그 결과 수, 당의 통일국가에서는 여러 종파 불교가 등장하였다. 그리고, 당나라에서는 많은 종파의 이념을 하나로 묶으려는 화엄종이 성행하였다.

하지만, 이 과정은 모두 <공> 사상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즉, 인도 불교의 참뜻을 알기 위해 철학적으로 불교를 접근한 것이다. 이렇게 <공>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철학적으로 접근한 종파들을 묶어 <교종>이라고 한다.

<교종>은 민중들에게 다가가기 어려웠다. 인도 불교의 참 뜻을 알았지만, 그 복잡한 <공> 사상을 민중들보고 어떻게 이해하라는 것인가? 책 한권 읽을 돈도 없고, 농사짓기 바빠서 경전에 관심을 둘 시간도 없는 이들에게 <교종>의 심오한 철학은 먼 나라 불교였다.

반면에 쉬운 교리와 민간 신앙을 융합하여 백성들에게 쉽게 다가서려고 노력한 종파들이 있었다. 오늘부터 이야기 할 정토종과 선종이 그것이다. 이 종교들은 어떻게 생겨나 민중속으로 파고 들었는지 볼까나?

2. 정토종에서 만날 수 있는 부처 - 아미타

원래 <정토, 선> 등의 용어는 대승불교의 수행방법일 뿐이었다. <선>이란 말 자체가 <깨달음을 얻기 위한 참선>을 뜻한다. <정토>란 <서방극락세계>를 뜻하는 말로 <정토>에 이르기 위한 수행을 강조한 용어였다.

<교종>이란, 정통 교리인 <공> 사상을 체계적으로 접근한 종파를 말한다. 반면 <선종>은 체계적인 <수양방법>을 우선시한 종파를 말한다.

정토종은 넓은 의미에서는 선종이지만, 실제 다른 선종과 수양체계가 완전히 다른 독자적인 <정토사상>을 가진 종파이다. 오늘은 정토종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정토종은 정토삼부경이라 불리는 3권의 경전에서 출발한다.

<무량수경>    <아미타경>    <관무량수경>

이 3권의 경전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사상은 <아미타> 사상이다. 무량수경은 아미타 부처가 되기 전 인간이었던 법장 스님이 아미타불이 되는 과정을 쓴 <드라마>이다. <아미타경>은 아미타불의 세계인 서방극락세계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설명하고, 민중들이 아미타 세계로 가는 방법을 설명한 책이다. <관무수경>은 부처도 아미타 세계인 <정토>을 알고 있었으며, 비구니들에게 수행방법을 가르쳐주었다는 내용의 책이다.

그럼 이 경전에서 공통적으로 말하는 <아미타>는 누구인가? 아미타는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을 하고 있던 인도의 보살승 <법장>을 말한다. 법장은 부처가 되기 위해 서원을 세우고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한 선행을 시작하였다. 부처가 되기 위해 세우는 서원을 <본원>이라 한다.

법장은 많은 중생들에게 착한 일을 해야 부처가 될 수 있었으므로, 48살때까지 48개의 서원을 세웠다. 그 서원들이 곧 서방극락정토의 설계도가 되어 훗날, 아미타 세계의 10만억 국토가 된 것이다. 이 <서방극락세계>는 고통도 번뇌도 없다. 오로지 즐거움과 진리만 있을 뿐이다. 누구든 이 곳에 초대 받으면 끝없는 기쁨 속에서 살 수 있다. 기독교로 따지면 <영원한 구원>을 받은 것이랄까?

<아미타>란 부처의 이름도 <영원한 구원>을 뜻한다. 아미타(阿彌陀)는 원래 아미타바(Amitabha)라는 인도어의 발음으로 <무한>이란 뜻이다. 발음으로는 아미타로 번역하지만, 의미로 해석하면 무량수불(無量壽佛), 무량광불(無量光佛)이 된다. 무량수불이란, <무한 대의 수명을 가진 자>, 무한광불은 <무한 대의 밝음을 가진 자>라는 뜻이다.

자, 법장스님이 깨달음을 얻어 <아미타불>이 되었다. 그가 세운 낙원이 바로 <극락정토>이다. 그 극락정토는 서쪽으로 수천만의 불국토들을 넘어야 겨우 보이기 때문에 서방극락정토라고도 한다. 그런데, 극락정토는 하늘에 있는 도솔천과 달리 지상에 있다.

석가모니가 보살일 때 수양을 했고, 지금은 미륵부처가 설법을 하고 있다는 <도솔천>은 어디일까? 불교에서는 우주의 중심을 <수미산>으로 보고 있다. 그 수미산에서 하늘로 12km 정도를 가면 도솔천이 있다. 그러나, 아미타불의 <극락정토>는 법장스님이 48개의 서원을 세운 그 곳에 있기 때문에 서쪽으로 십만억불의 세울을 지나가면 보이는 것이다. 어짜피 살아 생전에 갈 수 없는 것은 똑같다.

그러나 죽은 뒤 극락에 가는 방법은 <도솔천>에 가는 방법보다 훨씬 쉽다. <도솔천>은 <고급 보살>들이 깨달음을 완성하기 위해 가는 곳이다. 즉, <공>이 무엇인지 알고, 선행을 많이 한 선택된 자들이 간다는 뜻이다. 도솔천은 확실히 <교종>적이다. 그러나, <정토>는 누구나 쉬운 방법으로 갈 수 있는 곳이다. 인간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기본 인성이 있기에 마음 속으로 부처님을 생각한다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극락에 가는 것을 <왕생>한다고 말하는데, 왕생(往生)이란, <가서 태어난다>는 뜻이다. 즉, 가고 싶은 의지만 있다면 누구든 죽은 뒤 그곳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곳에 가장 쉽게 가는 방법은 부처님을 생각하면서 염불하는 것이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이렇게 10번을 외치는 것이다.

3. 말법의 시대를 예고한 정토종의 종말 사상

정토종이 처음 등장한 것은 혼란기인 남북조 시대였다. 남북조 시기는 <공> 사상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어 종파 교단이 성립되어 가던 시기였다. 반면, 백성들은 오랜 전쟁으로 지쳐 쉽고 빠르게 <천국>가는 방법은 없을까 고민하던 시기였다.

혼란기에 민중들이 <천국>가는 방법으로 숭배했던 것은 <도가>였다. 도교는 민중들 사이에 뿌리가 깊었다. 후한말 <황건적의 난>은 도교의 신선술을 숭배했던 <오두미교>의 민중 신앙에서 시작되었다. 전쟁에 지쳐 속세를 떠나고자 했던 청담 사상가들이 나누었던 이야기도 <도가> 이야기였다. 신비한 <도사> 이야기는 민중들의 시름을 달래주며, 새로운 세상의 희망을 주었다.

그 중 가장 흥미로웠던 이야기는 도사들이 천살까지 수명을 누리며, 세상을 유유자적하며 산다는 이야기였다. 천살까지 수양을 마친 도사는 하늘로 올라가 구름과 학을 벗삼아 자유를 누린다. 얼마나 멋진 이야기인가?

남북조 시기, 또 하나 유행했던 사상은 <종말사상>이었다. 중국의 전통 종말사상엔 추연의 <음양오행가> 사상이 들어있다. 세상은 화,목,금,수,토의 오행이 돌고 돈다. 그런데, 이들은 서로 상극이 있다. 화(불)은 수(물)에 의해 제압당한다. 그러나, 수(물)은 토(흙)에 의해 제압당한다. 서로가 돌고 돌면서 상극을 이룬다.

그것을 정치에 도입하면? 앞 왕조에 상극인 새로운 사상의 왕조가 탄생한다. 그러나 왕조의 종말이 되면 또 다시 상극인 새로운 왕조가 탄생한다. 세상은 돌고 돌며 <종말>은 반드시 온다.

그러나, 음양오행에 의한 종말 사상은 한계가 있다. 우주가 계속 돌고 돈다는 원리를 지향히기 때문에, 영원한 종말과 평화는 오지 않는 것이다. 이 한계점을 메운 것이 도교와 불교이다. 도교에서는 왕조가 몰락하고 민중의 세상이 오면 도법이 세상을 지배할 것이라고 말한다.

남북조의 혼란기, 불교는 종말 사상을 <말법사상>으로 체계화시킨다. 말법사상은 불가의 역사를 3단계로 나눠 인간의 종말이 있다는 것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불법이 체계적으로 잡혀가는 시기를 <정법의 시기>, 불법이 유지되는 시기를 <상법의 시기>, 불법이 사라지는 시기를 <말법의 시기>로 분류한다. 원래 3법의 시기를 나눈 것은 철학을 논의하던 <교종>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정토종은 이 말법 사상을 확대하여 <불교식 종말 사상>으로 바꿔 버린다.

자 그럼 정토종의 종말사상을 한 번 볼까?

말법시대는 불법이 사리지고 무법천지가 되는 세상을 말한다. 무법천지의 세상에 무슨 경전이니, 말씀을 논의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필요한 것은 <믿음> 뿐이다. 믿음의 대상은 <인간>이다. 인간의 마음에 부처가 있고, 인간이 부처가 되겠다는 믿음만 있다면, 불법이 있고 없고는 아무 의미가 없다. <믿음>이 있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며, 믿음이 없는 자는 불법이 사라지면서 고통을 받을 것이다.

그럼 누구에 대한 믿음을 보여야 할 것인가? 바로 <아미타>인 것이다. 인간으로서 태어나, 인간을 위해 살다가, 인간을 위해 지상 세계에 천국을 만든 이가 아미타이다. 멀리 있는 천국, 어려운 경전을 공부해야 갈 수 있는 천국이 아니라 모든 <인간 부처>들을 위해 10억만 국토를 준비한 아늑한 천국이 지상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극락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은 간단하다. 어려운 사상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아미타불의 명호를 계속 되새기면서 극락을 꿈꾸는 것이다. 아미타의 후배가 관세음이기 때문에, 아미타 신앙과 아미타를 도와 지상에 온 관세음도 믿음의 대상이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이것이 민중들을 끌어모은 정토종의 가볍고도 명쾌한 불교 진리인 것이다.

4. 미륵과 미타는 뭐가 다를까?

불가에서는 미륵이 인도의 4세기 경에 실존한 인물이라고 말한다(그러나 증거는 없다.) 미륵은 모든 것은 <마음>에 달린 것이라는 유식철학의 시조이다. 전통 대승 철학에서는 공사상과, 반야(지혜) 사상을 가장 중요시 했다. 다른 말로 하면 철학을 <공부>하라는 것이다.

미륵은 그 철학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 지상과 하늘 사이에 있는 도솔천에서 보살로서 수행을 계속하고 있는 미래의 부처이다. 미륵의 제자인 무착은 삼매경에 빠져들어 미륵을 만났고, 그 때 미륵보살은 훗날 민중을 위해 내려올 것이란 믿음을 말하였다.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미륵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내려올 것이다.

원래 세상에 내려와 정의(정법)을 실현하고 민중을 구원할 패왕은 전륜성왕이다. 그 때 미륵은 성왕의 오른팔로서 어려운 세상의 민중을 구원한다는 것이다. 즉, 미륵은 <구원자>인 것이다. 기독교로 따지면, 예수와 같은 존재랄까?

미륵 신앙은 백성들에게 하늘에 있는 <절대자>를 떠올리게 했다. 백성들은 스스로 부처가 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거나 포기했다.

미륵 신앙은 왕과 귀족들이 자기 합리화를 하는데 이용되기도 하였다. 국왕이 전륜 성왕이라면, 신하인 귀족들은 미륵이다. 왕은 곧 부처요. 왕에 대한 충성이 곧 <구원>이라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특히 위진남북조의 혼란기에는 수많은 국가에 국왕이 있었고, 불교의 미륵 신앙은 왕권 강화에 이용되기도 했다. 불교가 본 뜻을 주장하면서 반론을 제기하면 국왕은 불교를 금지시키는 <폐불>을 일삼았다. 불교, 도교, 유교라는 종교의 세력 균형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불교의 심오한 참뜻이 이해되면서 미륵신앙의 정치적 이용도 줄어들었다. 대신에 지배층이 직접 하늘로 올라간다는 새로운 미륵 신앙이 생겨나기도 한다.

위진남북조 시기에 미륵이 구원하러 내려온다는 사상을 <하생 미륵신앙>이라고 해보자. 통일국가인 수, 당 시기에 미륵이 되서 올라간다는 사상을 <상생 미륵신앙>이라고 하면 되겠다.

<상생 미륵신앙>은 불교의 참 뜻을 이해하면서 생긴 기이한 현상이다. 지배층은 스스로가 미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현생의 보살>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마음을 닦고 수양을 하면 훗날 미륵이 되어 <도솔천>에 올라간다고 생각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지배층>이 올라간다는 점이다. 일반 불신도들은 귀족들이 <보살 출신>이라고 믿어야 했다. 어찌되었던 <교종>의 철학은 지배층의 철학이었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민중들이 직접 부처가 될 수 있으며, 부처가 될 방법까지 상세히 알려준 것이 바로 <미타신앙>이었다.

귀족들처럼 경전을 읽을 시간도 없고, 심오한 불교 철학이 뭔지도 모른다. 그냥 <마음> 자체로 부처가 될 수 있으니 <나미아미타불>을 외치면 되는 것이다. 무량수경에는 <아미타불을 10번 외우라>는 구절이 있다. 이 10번의 정성스런 외침이 반복되면 <극락정토>의 문이 열린다. 아미타는 10억단위의 극락을 준비해놓고 모든 민중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다. 요즘으로 따지면, <우리 행복하게 잘 살께요>만 외치면 모든 국민에게 아파트 무료 분양을 해주는 것과 같다.

마음을 염(念)이라고 한다. 마음으로 부처를 생각하는 것을 염불(念佛)이라 하며, 염불을 몇 번이나 되뇌었는지를 세는 도구를 염주(念珠)라고 한다.

<교종>의 핵심이 경전이라면, 정토종 미타신앙의 핵심은 염불과 염주이다.

염불을 대중화한 사람은 정토종을 종파로 일으킨 수나라의 도작이다. 도작은 <아미타불>을 얼마나 말했는지 콩을 세면서 잊지 않도록 했다. 나중에는 염주를 만들어 염불의 횟수를 세면서 마음을 가다듬도록 했다. 원래, 염주는 초기 불교에서는 쓰이지 않았던 도구이다. 초기 대승불교에서도 마음의 번뇌를 잊는 수양법으로 염주알을 세도록 했으나, 본격적으로 염주를 중요시 한 것은 정토종부터이다.

5. 정토종을 이끌어 간 사람들.

중국에서 미타신앙을 이끌어간 사람들을 알아보자.

본격적으로 미륵, 미타 신앙이 알려진 것은 위진시대 <도안>부터이다. 도안 이야기는 8장에서 다루었다. 도안은 노자와 부처를 구별조차 하지 못하는 불교 수준을 한심하게 여기며, <미륵 신앙>을 강조하였다.

중국인들은 미륵신앙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도안은 <노장사상>에 있는 <제천사상>을 <제석천>과 결부시켜 미륵 신앙을 강조하였다. 격의불교와 종파불교의 중간쯤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도안의 제자인 혜원은 미타신앙으로 돌아선다. 미륵이 머무는 근거지인 <도솔천>보다 <서방극락정토>가 더 현실적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백련사라는 염불 결사 단체를 만들어 아미타불 앞에서 염불을 외웠다.

그러나 혜원의 백련사는 그들만의 염불이었다. 아미타 신앙의 사상적 체계는 남북조 북위의 <담란>에서 시작된다. 정토종의 시조인 담란은 염불의 중요성을 특히 강조했다. 스스로 노력해서 번뇌가 없는 무아 상태에 이르고, 그 상태에서 아미타불을 외치면 훗날 극락정토에 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나라 초기 도작은 <스스로의 노력만으로> 정토에 가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생각했다. 혼란한 사회에서 백성들을 이끌어주는 누군가가 필요하기 때문에 <종파>가 적극적으로 활동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도작의 생각을 정리한 사람이 제자인 선도이다. 선도는 염불을 외우고 수행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만들었다. 극락정토에 가기 위해 미타불에게 공손한 마음가짐과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 때부터 정토종의 간략한 수행방법과 예배 의식이 만들어졌다.

이 수행 방법에서 한가지 더해진 것이 바로 대승불교의 철학인 <나눔>이다. 염불을 외워서 자기 혼자만 극락에 가면 소승불교랑 다를 바가 없다. 대승불교의 철학은 만민의 구제이다. 따라서 선도는 수행은 혼자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하는 것이며, 수행에는 서로간의 예절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또, 서로의 수행 상태와 성취감을 서로 공유하고, 그 아름다운 공덕을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로서 정토종은 민중적 불교 사상으로 토대를 잡았다. 하지만 여기서 다시 한가지 논쟁이 발생한다. 아미타불만 외치면 민중들도 극락에 간다는 정토종 사상과, 누구나 <즉시 깨달음>이 가능하다는 선종의 사상은 그 본 뜻이 같은 것인가? 아니면 전혀 다른 이질적인 사상인가?

정토종 사상이 확립된 당나라 이후, 정토종은 선종과 최고 <선> 자리를 놓고 논쟁에 들어가게 된다. 그것은 수양방법상의 논쟁이었다. 아미타불에게 수양하는 것과, 좌선과 명상으로 수양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같은 것일까, 다른 것일까?

자, 그럼 다음 장에서 선종 이야기를 해보자. 선종의 역사적 배경과 철학을 이야기하면서 정토사상과 선 사상이 같은 것일지 다른 것일지 이야기해 보자.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필자 : 히스)

 

 

   - 불교사에 대한 이해 : 참고할 만한 책들

아미타경 사경 및 해설(상)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정여 (혜성출판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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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을 꿈꾸다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지은이 김정희 (보림,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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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 모든 것을 이루는 힘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원영 굉오 (불광출판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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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정토에 왕생하는길)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이태원 (운주사,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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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히로 사치야 (황금가지,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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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명료한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스티브 하겐 (우리출판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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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고 뜻깊은 불교 이야기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김달진 (문학동네,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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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불교 전파사 - 7장. 수나라에서 중국식 불교의 기반이 시작되다

이제 불교전파사에 대한 <중국부분>의 막바지에 왔습니다. 왜냐면 지금까지 전개한 인도에서의 불교 - 위진남북조에 전파된 불교가 당나라에서 전성기를 맞이하여 완성된 후, 송대 이후에는 성리학에 밀려 포스팅할 내용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당, 송기의 중국 불교가 완성되고, 이것이 한반도, 일본에 전파되었다는 것을 설명한 뒤 이제 한반도, 일본으로 불교 이야기를 넘겨보려고 합니다. 자, 그럼 당대 불교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포스팅을 시작해 볼까요?

1. 위진남북조에 꽃 피기 시작한 중국식 불교

지금까지 인도 불교를 거쳐 위진남북조의 불교를 자세히 알아보았습니다. 위진남북조의 불교를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인도의 불교사상의 본뜻을 제대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은 채 왕권의 신성함을 강조하기 위해 이용한 불교, 또는 노장사상을 통해 이해한 격의 불교, 또는 귀족계급 등 지배층을 위하여 활용한 불교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이러한 초기 중국 불교는 전술했던 수많은 불승들이 불교의 참 뜻을 중국에 전하려고 노력하였고, 중국 내부에서도 이것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많은 불도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분열된 중국 사회 내부에서는 이러한 불승들의 노력을 받아들일만큼 사회가 성숙하지 못하였습니다. 위진남북조 자체가 분열과 혼란 그 자체였으니까요. 따라서 불교는 위진남북조 전 시기를 통해 불법의 참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게 됩니다. 만약 불교가 왕권의 요구에 따르지 않고, 독자적 불법을 내세운다면 왕권에 의해 불교가 폐교당하는 <폐불사건>을 경험하게 될 것이니까요.

그러나, 이러한 위진남북조의 불교는 북위가 화북을 통일하고, 북주, 북제를 거쳐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게 되는 중앙집권의 과정을 겪으면서 점차 불교 본 뜻을 전파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됩니다. 위진남북조 후기와 수의 통일 과정 사이에는 성실종, 정토종, 율종, 선종, 천태종, 삼론종 등 종파적 성격을 가진 불교 교단들이 성립하기 시작합니다.

이들 교단은 특히 민중적인 선종, 정토종을 중심으로 백성 사회에 침투하여 불교의 대중화 운동이 시작됩니다. 불교단체들은 각 마을을 단위로 불교단체를 형성하여 하나의 작은 <교구>를 이루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구 설립 운동은 서양 중세의 <크리스트교>처럼 교황부터 대주교, 주교, 사제 등을 국가 행정 조직체계에 맞춘 것은 아닙니다. 왜냐면, 중국 등 아시아의 향촌사회는 원래부터 그 독자적인 공동체성이 무척이나 강한 농경 조직이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불교단체들은 <마을>을 종교체계에 흡수시키려고 한 것이 아니라, 종교체계가 <마을의 공동체 조직>으로 흡수되어 민중 속에서 불교를 전파하려고 하였습니다.

위진남북조 초기에는 교단이 성립되지 못하였으므로, 승려 개개인이 지방에서 교리를 전파하려고 하였으나, 교단이 성립되면서 대대적인 불교 단체가 마을마다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들 교단은 불상을 제작하고, 불경을 강독하면서 공동체 조직원들을 교화하고 계도하였습니다. 또 대규모의 법회를 열면서 주술적인 부분들을 백성들에게 보여줌으로서 <신비한 부처>라는 일종의 기적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종파 불교가 완성되어 가면서 사찰의 폐단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불교 교단이 커지고, 통일기의 제국가 불교가 연계되면서 승려는 세금을 면제받고, 교단은 거대한 장원을 운영하였기 때문에 승려의 수가 증가할수록 국가재정은 부담이 되고 사회적인 문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수, 당나라 때에도 불교세력이 왕권에 위협을 줄 정도로 성장하면 <폐불사건>을 일으켜 불교를 탄압하기도 하였지만, 불교는 전체 시기를 통털어 보았을 때 도교와 함께 중국 사상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2. 수나라 : 본격적인 교단 융합 불교인 천태종이 시작되다.

위진남북조에서 교단불교로 등장한 선종과 정토종은 자세히 이야기했었습니다. 여기서는 수나라 시기에 교단 불교로 자리잡은 천태종을 한번 다루어 보겠습니다.

중국 불교에서 가장 이론적으로 발전하면서 서로 보완관계에 있었던 종파가 수나라의 천태종과 당나라기의 화엄종입니다. 이 중 천태종은 남북조 시대 양나라 출생인 지의에 의해 탄생하였습니다. 지의는 7살 때 불가에 입문했다가 남북조의 혼란기를 패해 탁발승이 되었습니아. 탁발승이란 걸식하고 구걸하면서 도를 닦는 스님을 말합니다.

그는 어느날 문득 꿈을 꾸는 것과 같은 상태에 빠져 천년전의 석가 법회를 체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보통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체험하는 것을 <법화삼매>라고 합니다. 이것은 꿈과 비슷하지만 그것과는 더 높은 차원인 <심령현상을 이용한 신통력>이었습니다.

그 이후 유명해진 그는 천태산에서 제자들과 집을 지어 <수선사>라고 부르며 수행에 정진하였는데, 이 천태산에서 그가 완성한 사상적 체계를 <천태종>이라고 부릅니다.

지의 불교의 특징은 지와 관 양지를 모두 강조하는 양자적 합일점을 찾은 교파라는 데 있습니다. 지라는 것은 순수한 학문적 불교만을 고집하는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관이라는 것은 수련을 통하여 불교의 참 뜻을 찾는 것을 말합니다. 지의는 학문만으로 불교를 찾는 것은 불교의 참 뜻인 중생구원을 등한시 하는 것이라며 싫어했으며, 수련으로만 불교를 찾는 것은 이론적 바탕이 없는 무지의 소산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즉 이 2가지가 다 중요하다는 것이 지의의 이론인데, 이것이 천태종의 개요입니다. 천태종은 경전을 중요시하는 교종의 입장도 반영하면서, 수련을 중요시하는 선종의 입장 역시 무시하지 않는 종파입니다.

이 지의의 불교는 지, 관을 모두 중요시 함으로서 당시 수없이 나눠진 종파들을 통합하는데 크게 기여합니다. 그는 모든 불교의 진리들은 그것이 지이던, 관이던간에 원리 석가의 가슴속에서 나온 것이므로, 모두 중요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진리는 모두가 원래 석가의 뜻 하나였으므로 석가의 본 뜻을 아는 것이 중욯하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석가의 본뜻이 모두 지, 관을 통합하였다는 것을 <일념삼천, 삼제원융>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석가의 본 뜻을 일반인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난해하고 복잡하기 때문에 그는 석가의 말씀을 5단계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이 석가의 말씀 5단계가 불교에서 중요시하는 각종 경전들인데, 그중 가장 중요한 5단계의 석가 말씀이 바로 <법화경>입니다. 따라서 그는 법화경을 가장 중요시하였고, 법화경은 화엄경과 함께 동아시아의 가장 보편적인 경전이 되었습니다. 이 천태종은 고구려, 백제를 거쳐 일본까지 전파된 대규모의 불교종파입니다.

석가의 본 뜻이 하나다라는 천태종의 교리는 당시 불교계에 큰 영향을 주어 수없이 대립된 불교 교파가 대립이나 갈등 없이 중국식 불교로 정착되는 것에 크게 기여합니다.

3. 이제 불교는 동아시아 문화권 전체에 전파되기 시작하다.

위진남북조 시대 이후 중국에 정착된 불교는 점차 동아시아에 전파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 불교의 전파는 동아시아 문화권의 기본 요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계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전파된 시기가 동아시아 문화권이 완성되고, 불교 교리가 확립된 당나라 불교기가 아니라, 인도의 불교사상을 중국이 아직 다 깨닫지 못한 남북조와 수나라 시기라는 점입니다.

전진왕 부견 때 순도가 고구려 소수림왕에게 불교를 전파하였습니다. 이것은 남북조의 초기단계인 전진시대로 이 때 불교는 격의불교 수준이었습니다. 따라서 고구려가 중국에서 가져온 불교는 도교사상을 불교사상으로 착각하고 이해하는 격의불교 수준이었으며, 몇 번의 착오 끝에 수나라에게 천토종을 가져왔지만 이것도 완전한 불교교리 이해가 아니였습니다.

백제는 동진의 마라난타의 입교로 침류왕 대 불교가 전파되었지만, 역시 완전한 불교가 아닌 인도 불교를 이해하지 못한 초기 불교였습니다. 이러한 초기 불교의 유입은 이 당시 한반도가 불교 교리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중국에 유입된 불교가 가지는 호국성에 강한 관심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문제점은 한반도의 불교가 중국과는 또 다른 <호국성>을 갖는 다는 것입니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불교가 전파될 때에는 불교의 본 뜻을 전파한다는 인도인의 취지를 중국 왕권이 저지하는 투쟁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폐불사건> 등으로 이어졌으며, 중국은 불법과 왕법이 투쟁하는 과정 끝에 왕법이 불법을 눌렀습니다.

그러나 한반도 불교는 그것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왕법이 승리해 버린 중국식의 격의불교를 유입한만큼, 불교는 왕권강화의 수단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따라서 한반도 불교는 초기부터 왕법이 불법을 눌러 버렸고, 불법을 전파할 만한 사회적 기반이 없었습니다.

4세기 고구려, 백제의 불교 전파보다 훨씬 느린 6세기 법흥왕대의 신라 불교 전파는 더욱 가관입니다. 귀족들이 왕법에 이용되는 불교를 견제하고자 불교를 인정하지 않았고, 불교보다는 귀족적인 토착신앙을 더욱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왕권은 이들 귀족권을 누르기 위해 이차돈의 순교라는 극단적인 방법까지 동원해서 결국 불교를 도입하였습니다. 신라의 법흥왕 때 왕명 자체가 불교식이었고, 진흥왕기 교단을 불교식으로 정비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삼국의 불교는 철저한 호국적 성격이었습니다. 이것은 중국의 호국불교보다 더욱 강력한 왕권 강화 이데올로기로 작용합니다.

그런데, 묵호자, 마라난타 등은 모두 이름 자체가 서역식이고, 그들을 호승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 인도-아리안 계통의 승려이거나, 서역계통의 승려로 보기도 합니다. 이 불교의 전파는 한반도의 종교적 문제를 넘어서서 동아시아 문화교류나 동아시아 문화권의 확립이라는 거시적인 차원에서도 중요합니다.

일본에 불교가 전파된 것은 6세기 백제 성왕 기 노리사치계가 일본에 건너가면서 부터입니다. 일본에 대한 불교 포스팅은 중국, 한반도가 끝난 뒤 자세히 하겠습니다.

수나라기의 불교는 천태종 외에는 별로 다룰 것이 없어서 여기서 그만 넘어가겠습니다. 다음 포스팅은 중국 불교의 완성기인 당나라 불교, 침체기인 송나라 시기 불교로 넘어갑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한국의 불교에 대하여 포스팅하겠습니다. 그럼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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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의 불교 사상

이번 장에서는 통일신라에 대한 불교사상을 호국불교의 이념과 대중불교의 이념으로 나누어 간략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중간에 다룬 원광, 자장 대안, 혜숙, 원효와 의상은 이야기는 각 인물 각론에서 상세히 다루기로 하고, 통일 신라 불교의 개념만 다뤄 보도록 합니다.

1. 초기의 불교 : 호국 불교의 이념

신라의 불교는 호국 불교의 성격이 상당히 강합니다. 법흥왕 때 불교를 공인하면서 불교식 왕명을 사용한 신라에서는, 진흥왕 대에 불교 교단을 정비하면서, 불교 교단을 국가 행정 구역과 일원화 시켰습니다. 마치 로마 제국이 기독교 교구를 로마 행정 구역과 일원화 하여 크리스트교를 공인하고 세계종교로 전파한 것과 비슷한 개념입니다.

그러나 동양에서의 종교와 행정구역 일원화는 서구와 같이 <교회>와 교황 세력의 확장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왕권 강화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진흥왕은 일원화된 불교 행정 구역을 장악하고, 스스로 인도 아쇼카왕이 주장한 전륜성왕의 이념을 자신에게 적용합니다. 즉, 자신은 불교를 지상에 전파하고, 백성들을 보호하는 호법왕임을 자처한 것이지요. 여기에서 신라의 왕즉불 사상, 즉 왕이 곧 부처이고, 호법이란 곧 호국과 같은 것이라는 관념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진흥왕은 불교 행정 구역 일원화와 함께 백좌강회와 팔관회라는 것을 역사상 처음으로 성대하게 엽니다. 백좌강화란 백고좌회라고도 합니다. 이것은 인왕반야경을 읽으면서 국가안녕을 기원하는 법회로 국왕이 시주가 되어 성대하게 개최한 법회입니다. 이것은 외적을 막기위한 호국 법회이자, 국왕의 위대함을 알리는 신성법회의 의미를 갖습니다.

이러한 호국 법회를 위해 신라에서 만든 절이 <황룡사>입니다. 원래 황룡사는 진흥왕이 왕터로 만들려고 했는데, 황룡이 나타나 그 터가 신라 초기 소도가 있던 <7가람의 하나>라고 계시하면서 절을 지은 곳입니다. 이 절이 곧 신라 호국 불교의 원산지입니다. 이 절은 고려 시대 이후로도 계속 국가 호국 행사로 이용되었는데, 훗날 몽골 침입기에 몽골은 이 절의 호국적 성격을 지상에서 지워 버리기 위해 불태워 버렸습니다. 임진왜란기 일본도 불국사 등 주요 호국 법회가 열리는 절이나 터를 불태우려고 했다는군요.

2. 신라 중기 : 대중 불교 운동이 시작되다.

신라 초기의 불교가 왕즉불 사상에 근거하여 왕권을 신성화하였다면, 신라 중기 이후의 불교는 이제 대중에게 파고드는 보편적 불교가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원래 불교라는 사상의 근원이 바르나 제도를 부정하면서 만민평등과 해탈사상을 강조하는 종교였던 만큼, 골품적 한계에 직면했던 신라사회에서도 골품적 모순을 극복하면서 만민을 구제할 대안으로 불교가 중요시된 것입니다.

실제 진흥왕 이후 통일 이전 승려계급은 거의 진골이었습니다. 토착 신앙을 등에 업고 불법에 있어서 왕권에 저항하던 지방의 <부> 세력을 왕이 누르기 위해 국왕은 불교적 이념을 가진 진골들을 적극 중용하였습니다. 중국에 유학을 갈 수 있는 것도 진골이었고, 전륜성왕의 화신인 왕을 돕는 미륵의 화신들도 진골이었습니다. 따라서 불교교단정비가 이루어지는 시대가 신라에서 진골이라는 계층이 새로 성립된 것도 하나의 필연적 사건이었고, 진흥왕기 이후 진골 귀족이 왕권 옹호세력이 된 것도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이 초기의 진골성향의 승려들이 바로 원광, 안함, 자장, 의상 등으로 대표되는 호국 불교 세력들입니다.

그러나,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였고, 문무왕, 신문왕기에 김흠돌의 난 등을 계기로 진골세력들마저 정권에서 몰아내고 왕의 전제정권이 확립되면서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국왕권은 이제 자신들의 정치 이념에 부합되는 진골 외에는 국정에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5,6두품 등 두품 세력을 곁에 두어 국왕의 자문으로 활용하려 했지요.

귀족사회에서 소외되었던 5,6품들은이제 국왕의 옆에서 자문정치를 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유교적인 성품이 강했습니다. 반면, 신라사회에서 그동안 진골귀족들의 세력아래에서 진정한 불교의 보편적 정신을 전파하지 못했던 불교 두품 세력들은 거리로 나가 불교의 진정한 도를 백성들과 나누기 시작합니다. 그 대표적인 대중 불교 세력들이 흔히 4-6두품이라고 알려진 혜숙, 혜공, 대안, 원효 등의 승려등입니다.

혜공은 부개사를 세워 대중들에게 불교의 진리를 알리려고 했고, 대안은 '대안, 대안~!'이라고 외치면서 불교를 거리에서 전파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최고 신분층인 진골층을 풍자하면서 서민과 함께 불교를 나눕니다. 이들은 불교가 국왕을 위한 종교가 아니라 만민평등의 자비를 갖춘 보편적 종교임을 강조합니다.

특히, 원효는 어떤 백성이라도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만 외치면서 마음으로 부처를 받들면 정토와 극락에 이를 수 있다는 정토사상을 이야기했습니다. 원효는 불교에서 세, 속의 경계는 필요없다는 대중불교의 이념을 갖고 현실에 뛰어들었으며, 스스로 무열왕의 딸 요석공주와 잠자리를 하여 스스로 파계당합니다. 그러나 무열왕도 원효를 인정하여 사위로 인정하기도 합니다.

3. 원효 사상의 기본 - 일심론<모든 것은 한마음이다> : 정토종

원효의 사상은 원효 파트에서 자세히 다루겠습니다만, 일단 기본 사상만 여기서 파악해 봅시다. 그의 사상은 화쟁사상에 입각한 <일심론>이 가장 핵심 사상입니다. 그는 모든 인간은 한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이 한마음이란 신분과 상관없는 것이라 모든 인간, 심지어 여자와 노비들도 성불이 가능하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일심론은 현실(예토), 마음(정토)는 한마음(일심)이라는 것이 핵심으로 마음에 따라 현실이 악몽이 될 수도 있고, 정토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니, 모든 것은 마음에 달린 것이라는 주장이죠. 즉, 대중불교의 기본이념이 바로 일심론입니다.

일심론은 마음에 따라 성인도, 악인도, 여자도, 노비도 모두 성불할 수 있음을 주장합니다. 원래 불교에서는 극락에 여자라는 존재가 없기 때문에 여자가 성불할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원효는 여자가 성불하면서 바로 여자의 몸에서 벗어나 남자로 해탈하므로 여자 역시 성불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즉, 원래 불교가 성인이 되겠다는 목표를 가진 성인 사상이라면, 원효의 불교는 인간평등의 만민사상입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이 극락에 왕생한다는 사상은 미륵불이 내려와 인간을 구원한다는 <미륵신앙>과 다른 사상입니다. 이것을 보통 미타사상이라고 하며, 원효의 <정토사상>이라고 합니다. 원효의 정토설은 귀족 위주의 현실적 불교를 죽은 뒤 극락에 가기 위한 <내세적 불교>로 바꿔 버립니다. 그리고 이 사상은 의상 등 다른 불교 사상에 큰 영향을 줍니다. 실제, 의상이 만든 부석사는 화엄종 성격보다는 원효의 정토적 성격이 강합니다. 무량수전, 아미타불 등이 부석사에 있음으로 해서 부석사는 마치 의상이 만든 절이라기 보다 원효의 <정토사상>을 보여주는 절처럼 느껴집니다.

원효의 일심론이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모든 다양한 불교 학파를 통일한 화쟁사상에 입각하여 <공유논쟁>이라는 불교 최고의 논쟁을 원효가 정리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부처가 죽은 뒤 인도와 불교가 전파된 중국에서는 공, 유의 개념을 가지고 치열하게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이것은 부처의 가르침의 핵심이 모든 것은 허상이다라는 <공>이었는가, 모든 것은 인식에 달려있다는 <유, 식>이었는가를 놓고 다툰 논쟁입니다. 중국은 물론 인도에서도 이것에 대한 결론이 나질 않았습니다.

원효는 이것을 <일심론>으로 정리합니다. 즉, 부처가 주장한 세계는 공, 유의 나눔이 아니라 본질은 한마음이라는 일심이라는 것이죠.

원래 한마음이란 본질(공 : 진여문), 현상(유 : 생멸문)가 서로 대립하는데, 이것은 하나이면서도 둘이요, 둘이면서도 하나로서 원래는 마음이라는 것에서 모두 비롯되는 하나인 것이다 - 라는 정리가 원효의 정리입니다.

이 원효의 사상은 공을 중시한 중관학파, 유를 중시한 유식학파 모두에게 영향을 주어 당나라 화엄학 성립에 큰 영향을 줍니다. 그리고 동아시아 불교가 인도 불교를 벗어나 독자적 불교로 발전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 원효 사상 이전의 귀족적 미륵신앙(상생적 미륵신앙, 하생적 미륵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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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생적 미륵신앙 : 부처일족이 미륵이 되어 내려와 인간을 구원한다는 국왕권 옹호 신앙(국왕 = 만민을 구원할 미륵)    상생적 미륵신앙 : 귀족들이 도솔천에 올라가 미륵(부처일족)이 된 뒤 언젠가 내려와 인간을 구원할 것이라는 믿음
   원효의 정토신앙 : 누구나 깨달음이 있으면 극락에 갈 수 있다는 만민 평등의 믿음

4. 의상의 대중불교  - 모든 것은 원융이다. : 화엄종

의상의 불교도 각론에서 다루니, 여기서는 기본만 봅시다. 의상의 불교는 통불교적인 원융사상으로 이해할 수 있겠네요. 의상은 원효와 같이 당에 유학을 갔었죠. 그런데, 5두품 출신인 원효는 해골에 고인 물을 먹고 신라로 돌아와서 의상만 당에 갔다는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의상은 당에 유학이 자유로운 진골출신입니다.

의상은 진골이지만, 불교에서의 교리의 평등성을 인정하여 불교의 보편성을 주장했습니다. 그의 제자들 중에는 노비, 평민, 극빈층 등이 많다고 합니다. 즉, 신분을 초월한 불교의 보편성을 추구한 것이지요. 그는 원효가 백성들 사이에 직접 뛰어들어 불교를 전파하는 것과 달리 자신의 신분과 재력을 이용하여 <교단불교>를 이끌어 갑니다. 특히 유명한 부석사를 지었는데, 이 부석사는 원효가 신라 화엄종을 개창했음에도, 전술햇듯이 원효성격의 대중불교적 냄새가 많이 납니다.

의상은 중국에서 화엄종 2대 시조 지엄에게 화엄학을 전수받았는데, 중국의 고승들이 원효의 사상에 감탄하고 존경했다고 합니다. 그의 불법은 <화엄일승법계도>에 자세히 나와있습니다. 그 내용을 한 번 볼까요?

<하나 안에 일체가 있으며, 많음 안에 하나가 있다. 하나가 곧 일체요, 많음이 곧 하나이다. 한 작은 티끌 속에 시방을 머금고, 일체의 티끌 또한 이와 같다. 한량없는 먼 겁이 곧 한 찰나요. 한 찰나가 곧 그 한량없는 겁니다.>

<한국불교전서 중 발췌>

이 말은 곧 모든 것이 하나요, 하나는 모든 것이다로 요약됩니다. 이것이 화엄종의 요체인데, 신라 왕실에서는 모든 것이 하나라는 말을 <백성은 왕에게 귀속된다>로, 하나는 모든 것이다를 <왕실은 백성에게 베푼다>로 해석하여 이 사상을 전제왕권에 이용한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의상이 부석사를 세운 목적이나 그의 행적으로 볼 때 의상 스스로가 전제왕권을 옹호한 것은 아닌 듯 싶습니다. 아마도, 그가 죽은 뒤 후세의 불교에서 그의 사상을 왕권에 연결시켜 이용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원융>이라는 개념입니다. 원융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에도 불립된 각종 종파불교를 묶기 위한 의상의 노력을 집대성한 사상입니다. <원융>이란, 모든 것을 하나로 둥글게 감싸서 포괄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여타 다른 교단의 불학들이 불법이 무엇이고, 부처의 가르침의 핵심은 무엇이다라는 것으로 의견이 분분할 때, <원융사상>은 그것을 모두 포함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공>의 진리가 있는데, 이 보이지 않는 <원융>이라는 진리에 모든 것은 포함된다고 주장합니다.

예로, 다른 교파의 모든 사상들이 바다 위에 떠있는 섬과 물고기와 영양분들이라면 <화엄종의 원융>은 그 모든 것을 포괄하는 <바다>자체를 말한다는 것입니다. 실제, 의상은 다른 통불교적 사상들을 원효의 이론을 바탕으로 하면서 통합하려고 하였고, 이것이 종파 불교들의 대립을 완화하는데 상당히 기여했다고 합니다.

5. 원측의 유식 불교 - 법상종

법상종의 성립 배경은 원측이 당나라에서 유식론을 배울 때로 올라갑니다. 원측은 그 유명한 현장법사 아래에서 당나라 섭론종(구유식 사상)을 배웠습니다. 유식파란, 부처의 가르침은 인식에 달려있는 것으로 실제이다라는 이론입니다. 이것은 부처의 가르침은 모두 허상인 <공>을 깨닫는 것에 있다는 <중관학파>와 대립되는 사상이었죠.

그런데, 원측은 유식학파의 <유>라는 실체 역시, <공>이라는 이념을 일부 수용해야 조화롭다고 주장하면서, 중국 본토의 스님들로부터 배척받습니다. 원측의 학파를 서명학파라고 하는데, 원측의 이론을 이단이라고 하면서 오로지 <유식>만이 진리라고 한 중국승 규기 일파를 <자은학파>라고 합니다. 이 논쟁은 일본까지 참여함으로서 국제적 논쟁이 되었는데, 이것은 곧 공유논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전술했듯이 공유논쟁은 원효가 일심론으로 해결합니다.

아무튼, 원측은 이단파가 되어 본국인 신라에 전해졌고, 이것이 제자 도증, 태현에게 전수되어 신라 법상종으로 자리잡습니다. 법상종은 유식파의 성격이 강하므로 경전을 읽거나 경전 해석을 중요시하는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하였고, 신라 귀족들은 법상종, 계율종을 상당히 옹호하면서 다른 사상들과 차별화하였습니다. 법상종을 실제 일으킨 인물은 진표인데, 그는 미래 부처인 미륵불이 이상사회를 건설하러 내려온다는 <상생적 미륵신앙>을 주장하였습니다. 이 신앙은 현재 귀족들이 죽어서 미륵이 머무는 도솔천에 머물게 되므로, 룻날 내려오는 미륵은 귀족과 연관성이 있음을 내포합니다.

신라에는 통일 후 5교가 있었는데, 이들은 화엄종, 법상종 외에 열반종, 계울종, 법성종이었습니다. 5교를 개관적으로 볼까요?(세부적인 것은 각 불교 각론에서 다루겠습니다.)

화엄종과 법상종은 전술했듯이, 부처가 말한 진리는 <공>이냐, <유>이냐의 논쟁으로 유명한 교단입니다. 화엄학은 의상을, 법상학은 원측, 또는 진표를 각각 조사로 합니다. 열반종, 계율종, 법성종은 불법의 요체 논쟁을 했다고 하는데, 열반종은 열반, 법성종은 불성, 계율종은 계율이 불법의 요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5교의 난립한 이념을 <십문화쟁론>으로 정리하고, <대승기신론소>에서 주를 달면서 하나로 통일(화쟁사상)한 사람이 바로 원효입니다.

6. 신라 말기의 불교 - 선종

신라 말기에는 어려운 사회상 속에서 중국에서 전래된 선종이 유행합니다. 새로운 종교인 선종은 이전의 5개 교파 불교를 모두 교종이라 부르면서, 그 불교들의 폐단을 지적합니다. 선종은 불교의 핵심은 경전을 읽거나, 사상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부처를 믿어야 한다는 원효의 <정토종> 사상을 일부 인정합니다.

따라서 선종에서는 심성을 맑게 하고 깨달음을 얻는 것은 경전과 상관없다(불립문자)는 것을 말합니다. 또 인간의 타고난 본성 자체가 불성임을 알면 불교의 모든 도리는 깨닫는 다는 것(견성성불)을 말합니다. 선종 경전의 암기보다 좌선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을 중시하므로, 귀족적이기 보다는 민중적인 불교였습니다.

원래 선종은 5호 16국 시대 북위에서 <달마>가 소림사에서 개창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선종은 경전보다는 심신을 단련하기 위한 무예,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양, 자신의 본체와 내면적 기질을 알기 위한 좌선을 중시합니다.

이 선종에서는 경전을 암기한 자에게 교파의 전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이심전심이라는 방법을 활용하여, 깨달음을 얻은 자에게 의발과 바리때를 전수함으로서 다음 조사를 법조를 선발합니다.

5대 흥인 때에는 <신수>라는 아주 유명한 제자가 있었습니다. 흥인이 제자 중 한명을 다음 선사를 뽑아 전해주려고 하면서 모든 제자에게 깨달은 것을 게어(시문)로 적어 보라고 했습니다. 이 때 신수는 선사의 방 앞에다 다음 게어를 적어놓았죠.

<몸은 보리수요, 마음은 명경대와 같도다. 때때로 부지런히 마음을 갈고 닦아 티끌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자꾸나>

흥인대사는 이 게어를 보고 흡족하여 제자들에게 이 게어를 종종 암기하라고 까지 하였답니다. 하지만, 흥인대사는 이 게어가 선종의 모든 경지를 설명해주지는 못한다면서 한탄하였습니다.

어느날 방앗간 소공인 혜능이 이 게어를 보더니, 글을 쓸줄 아는 친구에게 부탁하여 또 하나의 게어를 신수의 게어 옆에 붙었답니다.

<보리는 본래 나무가 아니고 명경 또한 집이 아니며, 본래부터 아무것도 없으니 어디서 티끌이 생긴다는 것인가요?>

흥인대사는 이 게어를 보고 감동하여 혜능을 만나 이야기 하였는데, 이 방앗간 소공은 비록 글을 몰랐으나, 너무나 도에 대한 깨달음이 깊었습니다. 흥인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는 혜능의 글을 무시하면서도, 실제로는 혜능에게 선종 6대조 자리를 물려주며, 그가 다른 제자들에게 맞아죽지 않게 도피시켰다고 합니다.

이 혜능이 개창한 선종이 바로 <남종선>입니다. 남종선은 혜능의 유지를 받아 갑작스런 깨달음(돈오)을 중시하고, 왕실과 타협을 거부하는 민중 불교가 되었습니다.

반대로, 처음 게어를 걸었던 <신수>와 직계제자들은 <북종선>을 개창했는데, 이 북종선은 측천무후의 비호로 귀족불교가 되었습니다. 이 북종선은 오랜 시간 제자들과 함께 점진적인 수행을 해야 함을 주장하는데 이것이 곧 <점수>라는 것입니다. 고려 시대에 지눌 스님은 이 북종선과 남종선의 이론을 합쳐 <돈오점수>를 병행해야 함을 주장하면서 선종이론이 점차 통합되기도 하죠.

신라에서는 <남종선>을 받아들였는데, 이 것이 전국적으로 퍼진 것은 신라 말 사회 혼란 속에서 <교종 종파 5교>가 문란해진 상황에서였습니다. 선종은 각각 나말 호족들과 연합하여 <9산>이라는 유명한 절들을 세우고 호족들과 연계했습니다. 또 선종의 9산이라는 각 파는 대부분 유력 호족들의 지원을 받거나 그 자신이 호족인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신라 진골 위주의 교종세력에 대한 반발이자, 선종이라는 종교가 혜능기부터 이어온 혁신적이고 지방분권적이며, 기존체제에 대한 반발적인 효과가 크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이 정도로 정리하고 나중에 불교 각론을 세부적으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이것만으로도 힘드네요...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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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쿠라 막부의 시대

1. 가마쿠라 막부에 대한 개관(12-14c)

일본 막부시기 700년들 통털어볼 때, 가라쿠라 막부는 12-14세기에 걸쳐 존재한 최초의 막부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이 가마쿠라 막부를 잘 보면, 이 당시가 중국에서는 송나라가 북방민족의 외침을 많이 받던 시기이고, 한반도에서는 고려가 거란, 여진, 몽골 등에게 시달리던 시대였습니다. 가마쿠라 막부는 상대적으로 이러한 혼란기와 상관없는 일본열도였지만, 이 막부가 성장하게 되는 경제적 이유 중 하나가 이러한 혼란기를 이용한 무역의 호황이 있었다는 점도 중요하고, 나중에 망하게 되는 것도 북방에서 내려온 원나라의 침입때문이니 국제 정세와 무관한 막부는 아닙니다.

이들은 무신들이 장악한 최초의 사회입니다. 우리나라 고려와 약간 비교되기에, 한번 이 막부체제를 우리 고려사회랑 비교해보았습니다.(어떤 책에도 나와있지 않지만, 제 나름대로 이러한 비교가 도움이 될 것 같기에 시도해봅니다.)

비교학습

가마쿠라 막부

고려의 무신정권

배경

귀족중심의 율령체제의 동요에 따른 호족의 성장

무신차별과 귀족체제 동요에 따른 무신들의 사회불만

무신관계

의리에 기반을 둔 봉건적 질서

무신간 귄력다툼을 통한 최충헌 독재체제의 등장

특징

쇼군은 수도가 아닌 거점에서 전국의 무사들을 지배하는 형식

수도(개경)에서 사병을 거느리고 독자적 관료기구를 만들어 권력 장악

표를 보면 이해가 가시겠지만, 일반 이들 무신이 비슷한 시기에 출현한 것은, 모두 당시 귀족사회의 지배체제의 동요와 관계가 깊습니다. 일본에서는 천황가와 귀족가의 권력다툼이 심해지면서 무사세력이 성장하였고, 고려에서는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등 당시 문벌귀족들이 동요하면서 무신정권이 성립됩니다.

그러나, 일본의 봉건제도가 쇼군과 지토를 중심으로 하는 의리 중심의 봉건질서를 확립하면서 700여년을 이끌어간다면, 고려의 무신정권은 무신간의 다툼 속에서 최충헌 정권의 독재로 이어지고 이 독재는 약 60여년 동안 그 사회를 지배하였습니다. 물론, 고려의 무신정권도 세계제국인 몽골과의 처절한 항쟁이 아니였다면 오래갔을지도 모릅니다. 동시에 출연한 두 세력을 비교하는 것도 나름대로 재미있네요.

가마쿠라 막부의 가장 큰 특징은 봉건제도의 확립입니다.

봉건제도는 앞 장에 자세히 설명했으니, 요점만 짚어봅시다. 봉건제도에서 국왕(천황가)은 존속합니다. 그러나 실권이 없고, 실권은 막부가 가지고 있습니다. 천황은 단지 신성한 하늘의 자손이라는 형식적 신성성만 가진 존재로 전락하지요. 즉, 실권은 쇼군(주군)이 가지고, 무사계급과 주종관계를 형성하는 봉건제도를 확립합니다. 일본식 봉건제도의 특징은 자세히 설명했었죠? 다시 한번 요약하자면,

치안유지와 장원 관리를 위해 쇼군이 부하 무사들을 지방에 파견하는 제도입니다. 쇼군은 슈고와 지토에게 지방에서 누릴 수 있는 많은 권리와 토지를 분배하고, 이들은 쇼군에게 충성과 봉사를 하는 의리 중심의 봉건제도입니다.

가마쿠라 막부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는데, 이것은 호죠씨로 대표되는 <싯켄>이 실제 권력 행사를 하는 시기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미나모토씨의 막부는 쇼군이 3대로 끝나면서, 실제 쇼군의 역할이 초기 요모토모 시기에 비해 현저히 약해졌습니다. 따라서 3대 이후 막부의 실권은 쇼군 아래에서 정치를 담당하였던 <싯켄>이 장악하였고, 이 싯켄 정치는 호죠씨 집단이 계속 세습하면서 영원할 것만 같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가마쿠라 막부는 원나라의 침입을 막는 과정에서 무사생활이 빈곤해지고, 막부의 재정이 바닥나서 몰락하고, 다시 귀족가문(공가)가 정권을 잡는 시기로 돌아섭니다.

2. 가마쿠라 막부 시기의 가마쿠라 6불교

가마쿠라 시기의 종교적 특징을 찾으라면 <서민적 종교>의 출현입니다. 원래 고대에서의 불교는 귀족적인 불교이거나, 천황의 신성성을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의 성격이 강한 불교였습니다. 서민들을 위한 구원의 불교가 유행하지 않아서, 불교는 본래의 의미보다 지배집단의 정당성을 보장하는 성격이 강하였지요. 보통 우리 신라에서 말하는 호국불교, 왕주교종 등이 일본고대 종교에서도 통하는 용어입니다.

그러나 중세로 넘어오고 귀족사회가 몰락하자 불교는 서민들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서민적 불교를 가마쿠라 6불교라고 합니다. 이 시대 불교의 특징은 귀족적 특징을 가진 교종 불교가 아니라, 서민적 특징을 가진 선종불교라는 특징을 가집니다.

교종불교는 귀족적 성격으로서 심오한 불교교리를 이해하거나, 강론, 강회 등에 참석함으로서 깨달음을 얻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책을 살 돈도, 공부할 시간도 없는 서민들에게는 적합하지 못하였습니다. 반면, 선종불교는 아주 간결한 깨달음으로 선이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불교종파들을 말합니다. 예로 불교 경전을 몰라도 <나무아미타불>을 되새기며 마음으로 진리를 깨달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신라시대 원효스님의 말씀도 선종적인 입장에서 말씀하신 것이지요.

일본 막부시대의 불교도 이러한 선종적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정토종, 정토진종, 시종이라는 막부시대 불교 종파는 <나무아미타불>염불만으로 극락에 갈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서민들에게 쉽고 간단한 불교진리를 전파하기 시작합니다. 또 임제종, 조동종이라는 선종 종파는 좌선(앉아서 계속 생각하면서 깨달음)만으로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불교가 융성한 이유는 2가지 정도입니다.

첫 번째는 일본사회가 귀족사회가 몰락함으로서 새로운 계층의 새로운 종교가 필요했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당시 국제적으로 중국 송나라에서 성리학, 선종불교가 유행하였고, 고려의 무신정권기에도 선종이 유행했다는 점입니다. 특히, 고려 무신정권과 비슷한 상황의 일본 막부는 이들 선종을 정치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탄압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일본식 선종은 막부 시대 내내 유행하였고, 특히 도쿠가와 이에야시의 에도 막부 시대에 서민 불교로서 융성하게 됩니다.

3. 가마쿠라 막부의 법

원래 무사들은 율령격식 같은 율령을 지키지 않습니다. 무사들은 법보다는 자기들만의 양심이나 <도리>, <선례>에 따라 재산을 합니다.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것이 법이며, 그들이 옳은 일을 행한다고 생각하는 무사의 실천이 곧 <정의>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가마쿠라 막부는 이러한 중구난방의 <정의>를 정리하여 성문법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 법이 곧 <고세바이시키모쿠>라는 법이며, 이 법이 무가시대의 근본 법전이 되었습니다.

이 법전은 전국시대에 다시 수정되게 됩니다. 전국시대의 다이묘들은 자신의 영토에서 가신단을 통제하기 위한 법률을 새로 제정하는데 이것이 <분국법>입니다. 이 법은 고세바이시키모쿠를 반영하면서도, 가신 통제라는 중요한 목적을 반영하는 법입니다.

나머지 세세한 법, 제도, 문화, 예술 등은 별로 알아야 할 필요성이 없어서 다 생략하겠습니다. 그럼 이 쯤하고 가마쿠라 막부의 피냄새 진한 정치얘기를 한번 해보도록 하죠.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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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