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5화. 불교의 외침 - 이젠 인도를 떠나고 싶어요 ~

1. 인도에 불교가 없다?

불교의 종주국은 인도이다. 그러나, 기원후 5세기가 지나고 인도에서는 더 이상의 불교 논의가 진행되지 않았다. 오히려 티벳이나 중국, 동남아시아에서 불교의 교리 논쟁이 활발하게 펼쳐진다. 특히, 4세기 이후, 불교가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 지역은 중국과 한반도 등 동아시아이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석가의 가르침이 재정리되어 대승 불교로 정립된 인도의 불교는 아시아 각지로 전파되었다. 그러나, 정작 인도 본토에서는 불교의 힘이 사라졌다. 그 이유는 새로운 정권의 성립 때문이다.

기원전 5세기 마가다 왕국이 불교를 보호한 이래, 기원전 4세기 마우리아 왕조에서는 <왕이 곧 부처의 화신이다>라는 사상으로 불교를 옹호하였다. 대표적인 왕이 스스로 전륜성왕이라고 말하였던 아쇼카 왕이다.

기원후 3세기 까지도 인도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왕조들은 불교를 인정하였다. 기원 전후 인도 남부에 브라만교를 신봉하는 안드라 왕조가 있었으나, 인도 중북부의 대부분 지역은 불교 문화와 간다라 미술을 인정하는 쿠샨 왕조가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 쿠샨 왕조는 쿠샨인(이란인) 계통의 왕조로 다양한 종교를 모두 인정하였다.

<쿠샨 왕조의 불상>

<쿠샨 왕조의 전성기>

쿠샨 왕조의 카니슈카 왕(2c)은 중국-이란-인도를 연결하는 헬레니즘 상권을 장악하면서 상권과 통행세를 받았고, 국경을 넘나드는 불자들을 보호하였다. 특히 동아시아에서 서아시아로 이르는 비단길과 인도를 거치는 바닷길은 불교 전파 경로와도 일치했다. 헬레니즘의 다체로운 문화는 대승 불교의 확대를 촉진하였고, 그 결과 중국, 한반도, 인도에 이르기까지 불교가 널리 전파되었다.

그러나, 4세기 말, 인도의 상황은 급변한다.

브라만 교를 신봉했던 아리아 인들의 강력한 국가가 다시 등장한 것이다. 갠지스 강 유역에서 찬드라 굽타가 건국한 굽타왕조는 쿠샨 왕조를 멸망시키고 북인도 전체를 통일하였다. 그리고, 아리아인 우월주의를 표방하며 이민족들을 추방하기 시작한다.

투르크인, 샤카부족(석가부족), 이란인(쿠샨인)은 아리아인들의 세상에서 설 곳이 없었다. 이제 세상은 고대 브라만의 후손들이 아리아인의 세상이 되었다. 그리고, 아리아인들의 고대 사상의 복구를 꿈꾸며 강력한 인도 민족주의를 주장하기 시작한다.

이민족과 혼혈족, 반브라만 종교는 인도에서 추방되었다.

<4세기 굽타왕조의 영역>

그리고, 고대 브라만의 베다 문학을 재정리 하여 산스크리트 문학이 등장한다. 브라만교에서 유래한 힌두교가 인도 전통 민족 종교가 되었고, 인도인의 율법은 <마누법전>으로 정리되었다. 고대 브라만 민족의 위대함은 <대서사시>로 편집되었다. 그것이 유명한 힌두교 경전인 <마하바라타>, <라마야나>이다.

대서사시는 고대 신인 브라만을 찬양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비슈누, 시바 등 고대적 요소를 갖춘 전통신을 아리아 부족의 현실에 맞게 재편한 것이다. 그리고, 힌두의 신은 인도인을 괴롭혔던 모든 이민족을 물리칠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대세는 <불교>가 아닌 <힌두교>였다.

그럼, 그동안 불교는 뭘하고 있었을까?

불교의 교리는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었지만, 강력한 굽타왕조에 맞설 힘은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특히 인도 북부의 불교 교단들은 이미 큰 싸움으로 지쳐있던 상태였다.

마우리아 왕조에서 쿠샨 왕조까지 이어지는 동안 불교는 북부 지역의 강대국들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반면, 불교 사원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북방 이민족들과 끊임없는 투쟁을 하였다. 특히, 쿠샨 왕조 시기 불교 교단이 주적으로 삼았던 이민족은 <훈족>이었다.

중국의 진시황제가 만리장성을 쌓으면서 중국에서 밀려난 훈족들은 끊임없이 인도 북부 지역을 약탈하였다. 이 훈족들은 동으로는 중국 북부로, 서로는 게르만 사회로, 남으로는 인도로 진출하여 기원후 세계사의 여러 지역에 영향을 준다. 인도의 고대 여러 왕조들이 이 훈족의 침입으로 멸망하였고, 서유럽에서는 서로마의 멸망을 이끌었던 게르만족의 이동까지 훈족의 영향력이 미쳤다.

그나마, 이란인이 세운 쿠샨 왕조가 기원후 4세기 무렵까지 버틴 것은 왕조를 지지했던 불교 교단의 협조 때문이었다. 그러나, 쿠샨 왕조는 망했고, 불교 교단은 훈족과의 투쟁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이제 더 이상 불교는 없었다.

힌두교의 복고주의는 불교 사상을 원시 브라만 주의로 돌려놓았다. 수드라 계급에게 평등은 더 이상 없었다. 바르나 제도의 계급 차별은 확고했고, 모든 직업과 주거, 결혼까지도 계급별로 차등을 두었다. 마누법전은 힌두교를 믿는 아리안 민족만을 위한 법이었다. 하층민에게 <해탈>의 기회는 없었다.

아잔타 석굴 : 인도양식과 이전 양식들이 결합한 인도적인 양식. 동아시아에도 많은 영항을 주었다.

2. 불교는 <밀교>가 되어간다...

아리아 민족 우월주의를 내세운 굽타 왕조는 7세기가 되기 전에 멸망한다. 7세기 무렵, 불교를 옹호하는 바르다나 왕조가 출현하면서 중국 불교와 우호관계를 맺기도 하지만, 대부분 인도의 작은 독립국들은 힌두교를 옹호하였다. 힌두교가 지배층의 종교로서 백성들을 통제하기 편했기 때문이다. 7세기 대부분의 국가에서 불교는 힌두교의 교리에 포섭되어 그 의미를 잃어갔다.

인도에서 대승 불교는 점차 <밀교>가 되었다.

힌두교를 믿는 아리아인의 탄압으로 종교 집회는 비밀스럽게 열렸다. 불교도들은 교리를 찾는게 아니라 종교 자체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 점점 종교의 교리는 희박해지고, 절대자나 유일신을 찾는 신비주의 종교로 변질되었다.

초기 논리적인 불교에서 볼 수 없었던 주술 신앙도 등장한다. 미륵이 바람과 불, 홍수를 몰고와 세상을 정화시킨다는 믿음이 등장한다. 또 민간 신앙과 불교의 구분이 사라지면서 민간에서 믿었던 수많은 신들이 불교 안에 들어오게 된다.

그나마, 이런 변질된 <불교>조차 7세기 이후 사라져간다. 7세기 이후 인도에 마호메트의 이슬람교가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이슬람교의 기본 사상은 <평등>이다. 계급간 <차별>을 강조하는 힌두교와는 상극이었다. 하층민들은 <차별>을 강조하는 힌두교가 싫어서 불교를 선택했지만, 이슬람교가 들어오자 이슬람으로 개종하기 시작한다. 어짜피 똑같은 <평등>을 주장하는 종교라면, 힘있는 <이슬람 정복자>들이 숨어지내는 불교도보다야 훨씬 낫지 않겠는가?

10세기 이후 본격적인 이슬람 세계가 된 인도는 또 한번 문화적 격동을 경험한다. 힌두교 사원과 불교 사원은 동시에 파괴되었다. 이래 저래 불상은 정권의 놀림감이 되었다. 16세기 무굴제국이 성립했지만, 무굴 제국은 전통 아리아 종교인 힌두교와, 하층민 종교인 이슬람을 융합시키기에 급급했다. 불교가 설 자리는 없었다.

21세기 현재, 인도에서 불교도의 인구는 전체 인구 비율로 보았을 때 너무나 미미하다. 불교의 종주국은 대승 불교가 정립된 5세기 이후, 한번도 주도권을 잡지 못하고 힌두교와 이슬람교에게 자리를 내어 주었던 것이다.

3. 불교의 최강국으로 자리매김한 중국 불교

5세기 이후, 불교의 종주국 자리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넘어갔다. 중국은 유가, 법가 등 다양한 사상체계가 이미 정비되어 있었고, 굳이 불교가 아니더라도 국가와 사회를 운영하는데 지장이 없는 선진국이었다.

중국과 인도는 전혀 이질적인 문화권이었다. 중국어는 한자(표의문자)이고, 인도어는 범어(표음문자)이다. 중국인들은 유가, 법가 사상등 국가와 인간의 사회적 현상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려는 성향을 가졌다. 반면, 인도의 불교는 인간의 인지구조를 <분석>하려는 특징을 가진 사상이었다. 인도는 수많은 소왕국이 분립하면서 생성과 멸망을 반복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반면, 중국은 춘추전국시대를 제외한다면, 비교적 통일 국가체제를 유지해왔다.

도대체 어떤 과정을 통해서 불교가 중국 사상계를 장악해 버린 황당한 일이 발생한 것일까? 그리고, 중국은 자신과 다른 이 문화와 사상을 어떻게 중국식으로 바꿔 버린 것일까?

인도와 중국이 불교라는 문화를 공유하게 된 최초의 계기는 헬레니즘 문화 때문이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그리스에서 인도에 이르는 광활한 문화권을 만들고 떠난 뒤, 인도는 쿠샨 왕조 카니슈카 왕이 서역 지배권까지 확보하게 되었다. 쿠샨 왕조 자체가 이란계 왕조였던 만큼, 쿠샨 왕조는 동서 교역에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쿠샨 왕조는 동아시아의 중국, 한반도부터 서아시아의 페르시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무역을 전개했는데, 그 과정에서 대승 불교가 아시아 곳곳에 전파된 것이다. 특히, 쿠샨 왕조와 상업을 하던 실크로드 중간 중간의 국가들은 불교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중국의 한 왕조까지 불교가 전파된 것이다. 또, 당시 인도와 중국간 직접 교역로는 바닷길이었기 때문에 <남방 바닷길>을 통해서도 불교 경전이 한 왕조에 전파되었다.

그러나, 불교를 처음 접한 중국의 한족들은 불교를 사상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없었다. 중국의 한나라는 한무제라는 강력한 왕이 <유학>을 국가 사상으로 공포했던 나라였다. 한 왕조에서 출세하기 위해서는 유학을 열심히 공부한 뒤, <구품관인법>이라는 관리 임용에 채용되어야 했다.

한 나라에서 불교는 중국 전통 사상인 도교에도 밀렸다. 한 나라의 지배층은 고품격 품위 유지 사상으로 도교의 <황로사상>을 숭배하였다. 황로사상은 노장사상에서 말하는 <무위자연>의 철학을 지배층의 교양철학으로 받아들인 것을 말한다.

처음 불교를 접한 한나라의 지배층은, 불교를 도교와 같은 교양 철학으로 생각했다. 도교에서 <자연으로 돌아가라, 백성들의 생활을 살펴라>라고 말한 것은 한나라 지배층의 우아한 집권 철학이었다.(물론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고, 말로만 생색내기 위한 교양 철학이었지만....)

불교 역시 같은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대승 불교의 <공> 사상을 접한 한나라의 지배층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공이란, 아무 것도 없는 허무함이겠구나. 아무 것도 없는 상태는 노자가 말한 자연으로 복귀한 상태이다. 공이란 곧, <없다>는 것이 아닌가? 공이란 것이 태초의 허무함이라면, 곧 자연 상태가 아니겠는가? 석가의 가르침은 노자의 가르침과 같은 것이구나....

결국 한나라 지배층이 생각한 불교는 도교와 같은 것이었다. 현실 상태에서 필요한 것은 유학이었고, 교양이나 취미로 알아야 할 것이 도교나 불교 따위였던 것이다. 교양이나 취미는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다. 따라서 도교와 불교는 하나의 패키지 세트로 묶여서 교양철학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심심할 때 생각해보는 교양 철학이 어떻게 유가 사상과 맞먹는 거대한 사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일까? 거기에는 수많은 철학자들의 노력이 있었다. 자, 그럼 그 철학자들 이야기를 한번 시작해볼까?

 

   - 참고할 만한 책들

인도사
카테고리 대학교재
지은이 조길태 (민음사, 2000년)
상세보기

대월지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오다니 나카오 (아이필드, 2008년)
상세보기

불교사의 전개(만다라총서 3)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도변조광 (불교시대사, 1992년)
상세보기

단숨에 읽는 세계사
카테고리 청소년
지은이 역사연구모임 (베이직북스, 2007년)
상세보기

청소년을 위한 동양미술사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지은이 이석원 (두리미디어, 2005년)
상세보기

근본불교와 대승불교의 회통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한갑진 (한진출판사, 2007년)
상세보기

인도사 108 장면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박금표 (민족사, 2007년)
상세보기

이야기 인도사(개정판)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김형준 (청아출판사, 2006년)
상세보기

인도사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정병조 (대한교과서주식회사, 2005년)
상세보기

고대 인도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마릴리아 알바네스 (생각의나무, 2003년)
상세보기

인더스 문명과 인도사 ( 역사만화 18)
카테고리 아동
지은이 허순봉 (효리원, 2002년)
상세보기

유네스코 세계유산(아시아.오세아니아편)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편집부 (중앙M&B, 2000년)
상세보기

중국불교철학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팡리티엔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출판부, 2006년)
상세보기

중관불교와 유식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일지 (세계사, 2005년)
상세보기

논쟁으로 보는 불교철학(연구총서 14)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이효걸 외 (예문서원, 1998년)
상세보기

중국 그 거대한 행보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레이 황 (경당, 2002년)
상세보기

중국철학사상사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김백현 (차이나하우스, 2006년)
상세보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남북조의 귀족 2 - 귀족사회로의 전환되다

1. 한대 호족은 <청의>를 원칙으로 하였다

원래 호족은 지방에서 대토지와 무력을 가진 세력을 뜻한다는 것을 지난 포스트에서 설명하였습니다. 이 호족들은 전한시대에는 <공동체적인 향리조직> 속에서 대두되는 향촌 세력으로서 객, 문생, 고리, 부곡 등과 연결되었고, 노비를 통해 생산력을 확보한 계층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아직 중앙관계에 진출하기에는 부족했습니다. 전한 시대 외척과 환관의 싸움이 치열하였고, 이들은 지방에서 묵묵히 세력을 키우고 있었죠.

이들은 후한 광무제 정권 이후에 크게 대두합니다. 후한 정권 자체가 호족연합정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이제 <공동체적 향리조직>을 붕괴시키고, 향촌 사회의 지배자로 나서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향거리선제를 통하여 호족의 추천으로 지방 사회를 장악해 나갑니다. 보통 호족끼리 추천하여 그들끼리 지방을 해먹는다고 해서 <호족호천>이라고도 합니다. <호족은 향리를 지배한다>는 것이 후한 시대의 전반적 사회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호족세력이 중앙에 진출하기에는 아직도 한계가 많았습니다. 중앙의 환관, 외척 세력 때문이었죠. 따라서 호족들은 부패한 중앙의 환관세력에 대하여 지방에서 호족 상호간의 유대관계를 통하여 뭉치기 시작합니다. 중앙의 환관들은 이러한 호족의 움직임을 <당파를 만들어 왕실에 대항하려는 반역의 움직임>이라고 규정합니다. 절대 호족들은 붕당을 만들수 없다는 <당인>의 논리가 여기서 나옵니다.

호족들은 이에 대하여 중앙의 환관들이 곧 부패한 <탁류>이고, 자신들의 유대는 유교적 풍속에 의한 아름다운 <청의>라고 주장합니다.

<청의>란, 독자적인 절의를 지켜나가면서 인물평가와 미풍양속을 통하여 정치를 해야 한다는 호족들의 지방 이념을 말합니다. 이 논의에 따라, 향거리선제로 추천받는 사람은 효렴, 청렴한 인물이었습니다. 물론, 그 대상은 호족이었지요.

후한 말기에 가면, 이제 <향촌 공동체적 향리조직>은 원소, 동탁, 유비, 조조 등의 청의파 호족들에 의하여 완전히 소멸됩니다. 호족들은 자신의 군대와 영지를 가지고 독자적으로 삼국시대를 열어갔습니다.

2. 구품중정법이 실시되면서 <청의>가 공론화되다

구품중정법은 삼국시대를 통일한 위나라의 건국자 <조비>가 실시한 제도입니다. 이 제도의 특징은 <청의>를 바탕으로 <호족>을 추천으로 선발하는 제도입니다. 조비는 새로운 국가에 걸맞는 인재 등용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조비는 중앙집권을 위하여 이런 제도를 마련했지만, 실제 운영에 있어서는 <호족>들이 중앙관리로 천거되어 <호족의 귀족화> 현상을 초래합니다.

구품중정법의 내용을 한번 볼까요?

이 제도는 일단 지방 현지사정에 밝은 지방 출신 고관을 <중정관>으로 임명합니다. 이 중정관이 향론(지방 여론)을 살펴서 지방의 청년을 9품으로 분류하여 향품을 매깁니다. 향품은 상, 중, 하 3단계로 나눈 뒤, 각각 상상, 상중, 상하, 중상, 중중, 중하, 하상, 하중, 하하의 9품으로 세분화하였습니다. (그냥 1-9품으로 나누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마의가 실권을 잡은 이후, 서진 시대에는 중앙의 사도가 직접 9품을 매기게 되어, 중앙정부가 9품관인법을 통제하는 시기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 제도의 특징은 호족이 지방의 향리조직 대신 <향론>을 좌우하는 만큼, <호족 자제가 선발되어 고위관직의 독점>이 이루어졌다는 것에 특징이 있습니다.

이 제도로 인하여 이제 위진남북조의 사회는 <가문>을 중시하는 사회로 변질됩니다. 왜냐면, 구품중정법에 의해 관리가 되려면 <추천>이라는 것이 필수가 되어야 하는데, 이러한 추천은 <호족사회의 종족> 추천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즉, 가문을 바탕으로 출세하는 것이므로, 개인보다 가문이 중시되었습니다. 국가는 호족이 추천한 1-9 품의 향품에 대하여 그 관품을 <추천>하는 역할 정도만 하게 됩니다. (보통 3-4품을 낮추어 승인하였다고 합니다. 지방에서 3품으로 추천받은 자는 중앙에서 7-8품 정도로 관품을 주는 식입니다.)

이 제도로 인하여 가문이나 종족이 국가와 일가(또는 개인) 사이에서 매개자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가문 중심으로 변화되어 호족이 중앙에 진출하게 된 변형된 호족를 중국 역사에서 <귀족>이라고 부릅니다.

사회변화

향거리선제

구품증정제

기    반

가를 중심으로 하는 향촌사회

가문, 문벌 중심의 종족사회

관리진출

가에서 국가 관리로 진출

종족의 추천을 얻어야 국가의 관리로 진출

향촌구조

개인의 능력을 바탕으로 하는 향촌사회구조

능력보다 가문, 문벌 등 종족의 배경을 바탕으로 한 호족사회체제

국가역할

국가가 관직을 하사

국가는 호족이 정한 향품에 따라 추천된 호족자제의 관품을 승인

3. 남조정권의 귀족사회

남조에서는 귀족사회가 성립될 때, 북방귀족과 낭방귀족을 차별하였습니다.

동진 정권은 북방에서 내려온 전통 귀족들을 우대하였는데, 특히 먼저 내려온 귀족(조도귀족)이 먼저 특권을 선점하여, 후에 내려온 귀족(만도귀족)보다 우위를 점하였습니다. 북방에서 내려온 귀족들은 중원에서 해왔던 방식으로 대토지 소유, 사병 보유, 종족과 영호, 노비 관계의 확립을 통해 확실하게 남조 지방사회를 장악하였습니다.

따라서 남조의 귀족사회는 먼저 남부지방을 선점한 북래귀족들을 최상으로 하여 위계질서가 잡힌 상하관계가 형성된 사회입니다. 강남 토착귀족들은 이민족 지배에 대한 반항으로, 북방에서 내려온 중화 귀족들을 받아들였지만, 점차 북방귀족들과 사회적, 경제적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북방 귀족들은 중앙에서는 대대로 고관을 배출하였고, 지방에서는 대토지와 종족을 보유한 유력 가문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이러한 영향력 있는 귀족들을 보통 <세족>이라고 합니다.

북방에서 내려온 귀족들은 말 그대로 <귀족적>인 생활을 지향하였습니다. 그들은 가문이 미미한 자들과는 통혼하지 않았습니다. 또 고관에 진출해도 정사를 돌보기 보다는 <북조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실권을 준 무장세력>들을 감시하는 역할 정도만 했습니다. 그들은 고관이라는 허명만 과시할 뿐, 정사는 하급관리에게 맡기고, 대토지와 종족 보존 및 노비 사역에 노력하였습니다. 따라서 남조의 사회에서는 귀족드이 시문, 예술 등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들은 예술을 천하게 여기지 않고, 귀족적인 것으로 여기였으며 풍류를 즐기는 것이 귀족적인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4. 북조 정권의 귀족사회

북조는 5호 16국 이래 이민족들의 무대였습니다. 따라서 북조 치하에서 중국인 귀족들은 남쪽으로 남하하거나, 관직에 참여하려고 하지 않는 부류들이 많았습니다. 한인 귀족들은 중국인들까리 뭉쳐 전통적 화이사상 체계를 유지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같은 성을 <골육>이라고 부르면서, 대가족을 유지하고 문벌을 유지하려고 노력합니다.

선비족의 북위 정권은 한화정택을 쓰기 위해 한인 관료들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래서 최대한 회유하여 한인호족들을 북위정권의 후원자로 활용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만약 한인 귀족들이 북조 왕조를 무시하는 경우에는 가차없는 처벌을 하기도 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국사필화사건>입니다. 국사필화사건은 북위에서 자세히 다루었으므로 여기서는 넘어가겠습니다.

5. 귀족 사회가 몰락하기 시작하다.

남북조의 귀족사회가 몰락하게 되는 배경은 남조 시대를 포스팅할 때 자세히 다루었던 <후경의 난>입니다. 하지만, 귀족사회의 몰락은 귀족들 자체 내부의 모순에 기인하는 원인도 있습니다.

후한 대의 <청의>를 바탕으로 한 호족사회의 순결함은 호족들이 대토지를 가지고 중앙에 진출하여 귀족화됨으로서 무너지고 맙니다. 호족들이 귀족화되면서 특유의 효렴, 청렴, 유교적 기풍, 미풍양속이 사라졌으며, 이것은 호족의 지방 기반이 무너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호족의 지방 여론을 주도하는 객, 문생, 고리 등의 영호세력과 지방 향리 세력의 여론을 <향당>이라고 하는데, 호족은 참신함을 잃어가면서 이 <향당>을 잃게 됩니다.

특히 남조사회에서는 북방 민족과의 대결을 위해 미천한 무장 출신을 <황제로 옹립>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황제들은 귀족권을 누르기 위하여 여러 정책을 시도합니다. 그 결과 황제권과 귀족권의 다툼이 귀족사회를 붕괴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북위에서는 효문제의 성족분정령 등으로 귀족문벌 등급을 황제가 정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또, 중국식 율령제도의 도입으로 문벌귀족들을 국가 관료로 편입시키려는 노력도 많았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남북조 말기에는 귀족체제가 힘을 잃어가면서 서서히 중앙집권적 황제지배가 자리잡게 됩니다. 북주의 화북통일, 수의 중국 전테 통일은 귀족제가 몰락하는 가운데 황제권이 극강화된 면이 있습니다.

6.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귀족사회인가?

중국사에서 귀족제설은 큰 논란거리 중 하나입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귀족사회인가? 이 문제를 두고 일어난 논쟁이죠.

세계사적인 보편성에 입각한 학자들은 위진남북조에서 당나라 말까지를 귀족정치라고 봅니다. 실제 위진남북조는 사회실권이 귀족에게 있었고, 이러한 귀족적 사회구조가 당나라까지 갔다가 송대 이후 황제권 강화로 귀족사회가 사대부 사회로 넘어간다는 입장입니다. 이것은 정치주체와 정치형태로만 귀족사회를 바라보는 입장입니다.

다른 입장은 귀족정치를 특수한 <위진남북조 사회>만의 현상으로 보는 입장입니다. 이 입장은 위진남북조 사회를 전반적으로 보았을 때, 귀족적인 형태가 가장 극명하다는 점에 착안한 것입니다. 귀족정치는 고대 씨족사회와도 다르며, 호족사회와도 다르며, 봉건정치와도 다른, 독특한 시대상을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이 입장은 세계사적 보편성은 무시하고, 아시아적인 특수상황만을 고려하여 <귀족사회>라는 것이 존재했음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7. 어디서부터가 봉건사회인가?

위진남북조의 귀족사회를 생각했을 때 어디서부터가 중국의 봉건사회인지에 대한 견해도 논쟁거리입니다.

기본적으로는 송대 이후를 중세사회라고 봅니다. 이것은 송대 형세호와 사대부들에 의해서 보편적 장원이 형성되었다는 입장에서 출발합니다. 호족과 귀족사회에서는 영호, 노비가 존재하였고, 노비의 사역이 중요하였으므로 고대사회로 봅니다. 송대 장원은 장원에서 반자유민이 경작을 하므로 유럽 중세 농노제와 비슷한 생산양식이 시작되었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죠.

위진남북조가 중세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 견해는 중세란 사회가 <지방분권적> 성향이 강화되는 사회라는 것에 착안한 것입니다. 위진남북조는 철저한 신분제 속에서 지방에서 대토지를 소유한 호족들이 중앙귀족화한 사회입니다. 이것에 착안하면 위진남북조를 유럽과 같은 중세사회로 볼 수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어디가 중세고, 어디가 근세인지를 따지는 것 자체가 좀 무리수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식으로 시대구분을 가져다 붙이면, 주나라에서도 <봉건제도>가 있었고, 춘추전국시대도 <지방분권사회>였으니, 기원전 중국도 봉건사회가 될 수도 있겠네요. 굳이 중국사, 한국사에서 유럽 중세를 따져서 시대구분을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아시아는 그냥 아시아 나름대로의 발전양식이 있으니, 아시아 공통의 체제를 따져서 새로운 시대구분을 만드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1. 이 글에 대한 관련 사료는 이 사이트 검색창에서 자유롭게 검색가능합니다.(관련 검색어로 검색하세요)
   2. 이 글을 가져가실 때는 반드시 댓글을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3. 관련 글 모음
방 : http://historia.tistory.com/category/동양사이야기/중국사이야기

<http://historia.tistory.com 역사전문블로그 히스토리아>

신고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