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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미디어 속의 역사

드라마 선덕여왕 : 성골과 진골의 차이를 정리해 봅시다.

1. 뭐가 있어야 말을 해보지요...

드라마 선덕여왕을 보면, <덕만>이가 <성골>이라고 나온다. 그리고 미실이는 자신이 <골족>으로 태어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고 개탄하는 장면이 나온다. 한국인이라면, 신라에 품, 진골, 성골로 구분하는 신분제도가 있었다는 것을 누구나 알 것이다. 그런데, 덕만이가 <성골>이었다는 것은 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한 것일까? 아니, 진골, 성골과 같은 용어 자체를 만든 사람은 누구일까?

당시 신라의 골품제도를 알 수 있는 사료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등 뿐이다. 너무나 적은 자료이지만, 그나마 그 적은 자료에서도 성골이 무엇인지, 진골이 무엇인지 정확히 설명해 놓은 부분은 없다. 신라인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말이라서 적을 필요가 없었던 것 일까? 그러나,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과거의 용어일 뿐이다. 그럼 그 얼마 안되는 자료를 가지고, 성골이니, 진골이니 하는 말들이 무엇인지, 지금까지 나온 <구분법>들을 총정리 해보도록 하자.

2. 신라의 건국과 <신성한 탄생>

자, 그럼 성골, 진골이라는 표현 방식부터 생각해보자. 성골(聖骨)이라는 말은 말 그래로, <성스러운 뼈대>라는 뜻이다. 진골(眞骨)이야 뭐, <진짜 뼈대>라는 뜻이겠지. 일단, 이 단어들은 모두 <뼈대 있는 인간들>을 말하는 <지배층>의 단어인데, 그 시작은 어떻게 될까?

먼저, 신라의 건국 시대로 올라가보자. 화랑세기를 보면, 이민족인 혁거세를 기존의 신라 집단이 받아들여서 왕으로 추대했다고 한다. 그리고, 드라마 선덕여왕에 나오는 미실의 이야기 역시 <화랑세기>의 내용을 근거로 캐릭터를 설정한 것이다.

그런데, 일단 화랑세기의 사료는 조금 조심스럽게 다뤄보려고 한다. 일단 신라시대 김대문이 쓴 화랑세기의 원본이 없고, 일제시대 <박창화>가 필사했다는 화랑세기 필사 원본도 지금 존재하지 않으며, 사본만 남아있는데 그 사본도 지금 위작 논란이 되고 있다. 문제는 <박창화>라는 사람이 일제시대에 음란소설이나 위작도서를 만들면서 생계를 유지했던 아마추어 소설가라는 점이다. 이 부분에서 <박창화>라는 인물의 생애와 글쓰기 능력 자체가 논란이 되어, 화랑세기를 역사적 사료로 다루는 데 상당히 신중한 편이라는 것을 밝히면서 이야기를 다루려고 한다.

일단, 사로국(신라의 초기 명칭)이라는 나라는, 고조선의 건국처럼 절대 강자가 등장해서 세운 나라가 아니다. 신라의 전신인 삼한 시대의 진한에는 <여섯 마을(6촌)>이 있었는데, 여섯 마을의 지배자를 각각 <간>이라고 불렀다. 그 중 고허촌의 촌장을 <도리>라고 부르면서 공동으로 마을의 일을 결정하는 <철기 연맹체 국가>였다.

철기시대에는 철제 무기와 농기구를 사용하면서 사회가 크게 변하고 있었는데, 여섯 마을의 지배자는 이러한 사회변화에 맞게 국가 체제를 개편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래서 여섯 마을이 같이 뭉쳐 세운 연맹체가 <진한6부> 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난 <신성한 사람>이었기에, 공동의 왕으로 추대 했다고 한다. 혁거세가 박처럼 생긴 알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성을 박(朴)이라고 지었다. 그리고 <알영>이라는 우물가에서 용(계룡)이 나타나 여자 아이를 낳으니, 그녀의 이름을 우물의 이름을 따서 <알영>이라고 짓고, 왕비로 삼았다. 왕비가 계룡의 우물(계정)에서 태어나서, 나라 이름을 <계림>이라고 지었고, 사라, 또는 사로라고도 했다고 한다. (화랑세기에는 혁거세가 나정이라는 우물에서 태어난 것으로 나온다.)

이렇게 성스로운 하늘의 기운을 받아 신라의 시조가 태어났기 때문에, 신라에서는 <신성한 인물>이 왕이된다는 관념이 있었고, <신성한 왕, 왕비, 그 직계 혈족>을 성스러운 존재(성골)로 여겼다고 한다. 여기서 추론할 수 있는 부분은 <골>이라는 말 자체가 최상위 지배층을 말하며, 성골이라는 관념은 이후 <계림>에서 후대 왕들이 <신성함>을 강조하고자 하는 의미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3. 진한6부가 <골>의 시대로...

초창기의 진한6부를 다스렸던 세력은, 여섯 마을의 지배자였던 <간>이었다. 삼국사기를 통해, 박혁거세를 <거서간>이라고 부른 것은 <간들 중에 대표적인 왕>이라는 뜻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신라의 초창기에는 <간>들이 돌아가면서 지배층을 이루었다. <박씨, 석씨, 김씨>가 왕위를 계승했다는 사실에서 진한6부가 <연맹체 국가>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국사 교과서를 읽은 사람이라면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거서간-차차웅-이사금 등의 군장, 제사장이라는 칭호를 쓰던 6부의 지배자가 <내물>시대에 <마립간>이라는 용어를 쓰면서 김씨만이 왕위 세습을 했다는 이야기 말이다. <마립간>은 교과서에서는 <대군장>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더 깊게 들어가면, <간들을 지배하는 군장>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때부터, 진한6부는 <국가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고 한다. 기존의 <간>들의 마을을 <행정 구역>으로 개편하면서 국왕의 신하로 복속시키는 작업이 시작되었고, <서라벌>이라는 협소한 지역을 벗어나 주변으로 정복사업을 전개했다고 한다. 그런데, 너무 자료가 적어서 정확한 것을 알 수 없다.

그리고, 신라 시대의 신분제도인 골품제도가 서서히 등장하지만, 정확히 언제부터 골품제가 등장했는지는 기록에 없기 때문에 알 수 없다. 한가지 명확한 것은, 골품이라는 제도가 인도의 <카스트 제도>처럼 정해진 신분제도가 아니라, 시대에 따라, 또는 필요에 따라 계속 변화하는 제도였다는 점이다. 그럼, 일단 신라의 <골품제도>부터 한번 정리해 볼까?

4. 골품 제도의 변화와 <진골> 용어의 등장

골품제도는 말 그대로 <골족>과 <품족>을 나눈 제도이다. <골족>은 일반적인 학설로 본다면, 신라 초창기 지배자들인 화백회의 6부족의 지배자, 즉 <간>이라는 마을의 지배자를 최고지배층인 <골>로 인정하면서 생긴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6부족의 관료층이나 행정실무층들은 그 능력에 따라 <품>으로 규정하고, 1,2,3,4,5 품의 5단계를 기준으로 <품>을 주었다. 그것이 바로 <골품제>이다.

그런데, 골품제는 초창기 진한6부의 지배층만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서라벌>에 거주했던 진한6부의 <간>층과 그 일족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그리고, 신라는 관등을 12등급으로 나누어, 골족과 품족이 오를 수 있는 관등의 한계선을 명확히 만들어 두었다.

이러한, 골품제가 <지증-법흥-진흥>으로 이어지는 변혁기에 많은 부분이 손질된다. 지증왕은 국호를 <신라>로 정한 뒤, <왕>이라는 칭호를 처음으로 사용하면서 새로운 사회 질서를 꿈꾸었다. 법흥왕은 이차돈의 순교를 통해 불교를 공인하면서 골품제를 다시 만든 왕이다. 그리고, 진흥왕은 선왕들의 유지를 받들어 영토를 확장하면서 드라마에 나오는 <불가능한 꿈>을 현실로 하려고 했던 왕이다.

특히, 법흥왕 때의 변화가 주목할 만 하다. 법흥왕은 불교라는 새로운 사상을 통해 기존의 사회질서를 다시 개편하려고 했던 왕이다. 그는 12관등이었던 신라관등제도를 17관등으로 넓히고, 신라의 왕이 곧 <부처의 일족>이라는 성스러운 개념을 신라사회에 도입하였다.

이 때 신라의 <골>족들은 1-17등급으로 분화된 신라 지배 관등 사회에서 상하관계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었다. 또 넓어진 신라 영역을 지배하기 위해 지방으로 내려간 <골>족들이 있었기 때문에 <골>족 사이의 분화가 생겨서 <진골>이라는 차별화된 용어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기존 학설은 진골이라는 용어가 내물왕 때 등장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 1-5두품밖에 없었던 신라에서, 새로운 관등에 적응하고, 새로 등장한 <진골>족들과 유대관계를 맺는 <품>족들이 생기면서 6두품이라는 새로운 <품>이 등장하게 된다. 신라의 6두품은 법흥왕대부터 삼국통일전쟁이 있던 시기에 새로 생긴 <품>이었다.

5. <성골> 용어에 대한 다양한 해석 문제

법흥왕 다음 등장한 <진흥왕> 때에는 새로운 사회 변화에 맞춰 <국왕의 신성함>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이 무렵, 진흥왕이 거칠부를 통해 편찬했던 역사서가 바로 <국사>였다. <국사>에서는 <성골>이라는 용어가 나온다. 거칠부는 모든 신라왕들을 <성골>이라고 규정하고, 성골들에게는 어떤 <신성함>이 있었는지를 서술하였다. 즉, 국왕은 새로 등장한 <진골>이라는 계층보다 우월하며, 신성한 존재라는 점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한가지 사실은, 고대 왕들의 <신성관념>이다. 즉, 왕들은 성스러운 <성골>인데, 이미 성스러운 신분이기 때문에 왕에 등극했다는 것이다. 김춘추 이후의 진골왕들이 알게 모르게 강조한 <왕이기 때문에 신성하다>라는 개념과는 반대의 개념인 것이다. 삼국사기는 성골과 진골의 차이점을 인정하고 있고, 최초의 진골왕인 김춘추를 기준으로 <신라의 시대구분>을 하고 있다.

그럼, 여기까지만 정리하고 <성골>에 대한 많은 학자들의 정의를 하나 하나 살펴보자. 역사학자들은 어떻게 성골과 진골을 구분해 두었을까?

6. 전통적 주장 : 실증주의 사학

가장 전통적인 주장은, 실증주의 사학의 대표자이자, 과거 한국 사학을 이끌어갔던 <이병도>의 주장이다. 이병도는 이렇게 주장했다.

골품에서 성골과 진골의 구분은 왕족의 혈통에서 구분된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성골이면 성골, 한쪽만 성골이면 진골로 골품이 내려간다는 것이다. 지금 20대 후반의 나이라면 모두 이병도 사학의 주장대로 공부했을 것이다. 교과서 자체가 이병도 사학의 주장대로였으니까... 왠만한 백과사전에도 이 주장이 실려있다.

솔직히 말하면, 가장 근거없는 주장이다. 왜냐면, 기본적으로 맞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김춘추의 아버지는 성골인 진지왕의 아들 용수공이고, 어머니는 성골인 천명공주이다. 그럼 김춘추는 성골이여야 한다. 이병도는 진지왕이 패악한 군주였기 때문에 김춘추의 신분이 강등되었다고 말한다. 그렇게 따지면, 진지왕과 혈연관계에 있는 모든 신라 성골이 다 진골이 되어야 한다. 논리가 너무 빈약하고, 맞는 부분이 거의 없지만 한국 사학에서는 이직도 이 분의 파워를 무시하지 못한다.

7. 진흥왕의 직계라는 관점

이 주장은 지증-법흥-진흥왕으로 이어지는 시대의 산물로 <성골>이 등장했다는 주장이다. 특히, 진흥왕이라는 강력한 왕이 등장하면서 진흥왕의 직계 후손과 방계 후손을 구별하기 위해, 진흥왕의 직계 후손을 <성골>이라고 부르면서 신성하게 여겼다는 것이다.

진흥왕의 태자는 동륜이었는데, 동륜의 아들이 진평왕이었고, 동륜의 손녀가 선덕여왕이다. 진흥왕의 적통이었기 때문에 <성골>이라는 것이다. 반면, 진흥왕의 다른 손자로 왕이 된 진지왕은 폐위되었고, 그의 아들인 용수와 진지왕의 손자인 김춘추는 성골에서 밀려나게 된 것이다.

화랑세기에서는 성골과 진골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고, 대원신통, 진골정통이라는 말이 나온다. 대원신통이란 진흥왕의 왕비인 사도왕후 박씨의 계통을, 진골정통이란 진흥왕의 모후인 지소태후 김씨의 계통을 말한다.

여기서 화랑세기에 의하여 또 하나의 직계, 방계 구분이 나온다.

대원신통이란, 어머니가 신을 모시는 신당의 여사제 출신일 경우를 말한다. 진지왕의 어머니인 사도왕후 박씨가 바로 대원신통이며, 드라마에서 주인공 역인 미실이도 대원신통(신녀) 출신이다.

반면, 진골정통이란, 신당의 족속이 아닌 <골>족을 말하는 것 같은데, 정확하지가 않다. 화랑세기와 삼국사기를 합치는 대충 이런 결론이 나온다.

성골은 아버지가 왕족인 왕의 자녀이고, 진골은 어머니가 왕족인 공주출신의 자녀를 말한다. 물론, 성골과 진골은 화랑세기의 구분으로 모두 <진골정통>이다. 보통 왕은 <성골>출신에서 나오고, 왕비는 <진골>출신과 신당의 <대원정통> 출신에서 나온다고 한다.

8. 혼인 규율을 바라보는 관점

이 주장은 왕족 내부 근친혼에 근거한 주장이다. 신라시대에는 혈통을 보호하기 위해 왕족끼리의 혼인이 일반화되어 있었다. 이때 성골은 왕족 내부 집단에서 혼인했을 때 태어난 왕족을 말하며, 진골이란 왕족이 다른 일반 귀족(품족 등)과 결혼해서 태어난 집단이라는 견해이다.

예로, 무열왕은 왕족 내부 근친혼을 어기고, 가야계 김유신의 누이와 혼인을 하였기 때문에 성골에서 밀려 족을 강등당했는데, 왕이 되었기 때문에 진골로 긍정되어 인정받았다는 내용도 들 수 있다.

9. 왕위 계승권 분쟁에 관련된 관점 

이 주장은 성골과 진골의 구분이 정치적 투쟁의 결과라고 보는 주장이다. 즉, 왕족 자체가 근친혼이었으므로,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국왕의 직계 계승자와 왕권에 오를 수 있는 순위권의 친족을 성골이라고 부르고, 그 외에 왕위 계승권이 없거나, 소외된 집단의 귀족들을 진골이라고 불렀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성골은 왕위계승권을 확정해 두어서 이후 분쟁의 소지를 아예 없애 버리기 위한 하나의 장치라는 것이다.

그런데, 진골로 왕이 된 김춘추는 오히려 가장 확고한 전제왕권을 확립했고, 가장 강력한 후기 신라 사회를 이끌어갔으며, 김춘추의 후손인 무열왕계가 왕권을 독점하였다.

이것은 더 이상 <성골>이라는 개념이 필요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성골>은 왕권이 미약할 때 왕위계승분쟁을 없애기 위한 장치이므로, 강력한 왕권을 구축한 김춘추 이후에는 <성골>이라는 개념을 사용할 필요없이 <골>이라는 명칭만으로도 모든 것이 가능한 시기가 되었다는 뜻이다.

결국,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가 성골의 개념을 정확히 정리하지 못한 것은, 성골의 특징을 몰랐기 때문이다. 성골은 사실 중앙집권을 완전히 확립하지 못한 법흥왕, 진흥왕의 과도기 때부터 여왕집권기로서 정권이 흔들렸던 선덕여왕, 진덕여왕 때 잠시 사용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실제, 삼국사기에 성골이라는 말은 그 시대에 사용된 용어이다.

10. 중국과 관련해서 바라보는 관점 

이 주장은 성골과 진골의 차이를 <의미없음>으로 규정하고 있다. 성골과 진골은 사실 큰 차이가 없는데, 중국의 황제 체제의 영향으로 왕을 <성골>로 신성화시켰다는 주장이다.

특히, 성골이라는 관점을 외교적인 측면에서 찾는다. 진흥왕이 영토를 넓히고,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으면서 주변국과의 관계를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신라 왕실의 권위와 위상을 격상시키기 위해 <성골>이라는 신성한 개념을 도입하여 당나라 등 주변국의 <황제> 개념에 맞먹는 개념을 창출했다는 것이다. 예로, 법흥왕과 진흥왕은 신라사회에서 보기 힘든 <연호>를 사용했다는 점도 중요하다고 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무열왕 때에 성골 개념이 생겼다는 주장도 연결된다. 무열왕은 이전 여왕인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의 여왕 통치를 정당화하려는 명분을 찾았는데, 그 결과 그녀들을 <성골>로 추존하면서 왕권이 신성하다는 것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뭔가 더 찾아내려는 역사학자들은 이런 의견도 내놓는다. 선덕여왕, 진덕여왕이라는 여왕통치가 중국 중화사상에 맞지 않았다는 점이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여자 황제를 부인한다. 당나라의 <측천황제>도 <측천무후>로 강등시키고, 여자 황제의 통치기간을 <암흑기>로 만든 것이 중국의 역사이다. 신라의 여왕 통치기를 중국이 조롱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성골> 개념을 만들어 <여왕통치의 정당화>를 주장했다는 것이다.

11. 성골은 유동적인 신분이라는 주장

이 주장은, 최근 많이 인용되는 주장으로서 이종욱이 쓴 <화랑세기로 본 신라인 이야기>에 실려있는 주장이다.

520년, 법흥왕이 율령을 반포하고, 골품제를 다시 정비했다는 점을 위에 적어두었다. 그 때 법흥왕은 불교 전파와 관련하여, 신라의 왕을 <성스러운 석가의 일족>이라고 격상하게 된다. 따라서 성골은 원래 신성하기 때문에 왕이며, 왕은 원래 <성골>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왕과 그 가족, 형제 등의 직계 친족들은 모두 <성골>이 된다. 그리고 거기서 제외된 이들은 진골이 되는 것이다. <성골>로서 새로운 왕이 즉위하게 되면, 새로운 왕의 가족과 형제 등을 포함한 새로운 <성골>이 등장하는 것이며, 그 외의 친족들은 <진골>이 된다는 주장이다. 즉, 성골이란 현재 왕의 직계 후손들이 <성골>인 것이다. 현재 성골이더라도 다음 왕과 혈연관계가 멀어지면 족적 강등을 당하게 되며, 왕위 순위에서 밀리게 된다.

이 때 성골들은 황궁에 거주하면서 그 신분을 유지하고, 후대 왕을 선출하는 등 강력한 왕권을 뒷받침하게 된다. 즉, 신라의 중앙집권화를 추진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반대로, 진골은 황궁이 아닌 수도에 거주하면서 차별화 된다. 또한, 가야계(김유신계)라던가, 타국의 왕족이 흡수되었을 경우, 신라에서는 진골 신분으로 대접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진평왕을 마지막으로 성골 출신 왕자가 태어나지 못하였다. 삼국사기는 이 시기를 <성골남진>이라고 표현한다. 따라서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때에는 더 이상 성골집단을 만들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김춘추를 예로 들자. 김춘추는 진지왕의 손자이었으므로, 진지왕이 계속 왕이였다면 성골이다. 그러나 진평왕이 즉위할 때는 그의 직계 진척이 아니므로 진골로 격하된 것이다. 신라는 예외없이 선왕의 후손인 <성골>이 다음 왕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김춘추는 성골이 아닌 상태에서 즉위했으므로, 진골이 되었다는 것이다.

12. 신라의 불교 공인과 성골의 연관성

이 주장은 성골이라는 관념이 불교전파와 관련되었다는 주장이다. 거칠부의 국사를 보면 모든 신라왕들이 <성골>이라고 씌여져 있으나, 그 주장은 진흥왕이 의도적으로 국사를 편찬했기 때문일 뿐이며, 사실 성골은 법흥앙-진흥왕대의 창조물이라는 것이다. 즉,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하면서 신라 왕의 신성함을 <미륵부처의 신성함>과 동일시 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 이전 신라 시대를 지배했던 <신권>보다 강력한 힘을 불교에서 찾게 된다. 이 관념이 <성스러운 부처 일족>이라는 불교 설화와 맞물려 <성골>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원래, <골>은 모두 <진골>이었다. 그런데, 진골 중 일부가 <우리는 석가를 믿는 족속>이라고 주장하면서 <성골>이 등장했다. 즉, 불교의 융성과 <성골> 개념의 등장은 같은 맥락이라는 것이다.

법흥왕이 불교를 전파한 이후,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 진덕여왕은 모두 진골의 진(眞)자를 이름에 두고 있는데, 이것은 불교의 진정한 석가모니 족속(진종설 : 眞種說)이라는 것과 일치한다. 진흥왕은 스스로를 불법왕인 전륜성왕이라고 생각했고, 신라를 석가의 불국토에 비유하기도 한다.

선덕여왕 드라마에서 진평왕의 어린 시절 이름이 <백정>이고, 그의 부인이 <마야부인>인데, 이것은 모두 석가의 부모 이름이며, 신라 왕실의 성골들은 석가의 친척이름을 차용하였다. 즉, 다른 왕족과 다른 신성한 석가 일족이라는 의미에서 성스러운 족속(성골) 개념이 창출되었다는 것이다.

13. 결국 성골이란 무엇인가?

위의 내용들을 정리해서 성골이라는 족속을 정리해보자. 위의 주장들의 공통점을 찾아보면, 결국 성골이란 <왕이 될 수 있는 왕위 계승권>과 관련있는 자를 말한다. 어떻게 보면 <성골>은 하나의 신분이라기 보다는 <왕위 계승권>이 있는 자인가를 허가하는 <허가증>같은 것일 수도 있다.

신라에는 <갈문왕> 제도라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왕위 계승>에 대비한 <보험>같은 것이었다.

왕은 다음 왕으로 자신의 아들을 <태자>로 책봉한다. 그런데, 왕이 자식이 없을 경우엔? 왕의 동생에게 왕위가 돌아갈 것이다. 따라서 왕의 동생도 <성골>신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왕의 동생마저 죽어서 동생의 아들만 있다면? 어쩔 수 없이 동생의 아들이 왕이 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럴 경우를 대비해서 왕의 동생도 미리 성골로서 인정하고 <왕>으로 책봉을 해 놓아야 <왕의 동생의 아들>이 훗날 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왕의 동생을 책봉한 것이 <갈문왕>이라는 제도이다. 즉, 갈문왕 제도는 성골이 <왕의계승권자>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신라의 제도이다.

성골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길이 없다. 새로운 역사책이 발견되던가, 성골과 관련된 신라왕의 무덤이나 비석이 나오지 않는 한, 성골의 실체는 영원한 상상의 세계에서 머물 뿐이다.

최근 학설을 정리하면서 마치도록 하자.

최근 학설은, <골>이라는 것을 김씨 왕권이 세습되기 시작한 내물마립간 시대에서 찾는다. 내물왕의 후손들은 <김씨>로서 박씨, 석씨와 다른 자신들만의 우월함을 찾기 시작했다. 따라서 다른 진한6부의 <간>층, 즉 <골>들과 다른 진짜 뼈대있는 가문이라는 것을 주장하고 싶어했고, 그래서 <진골>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것이 지증왕-법흥왕-진흥왕대에 와서 왕권에 충돌하기 시작했다. 왕권을 강화하고, 불교를 공인했으며,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던 시기의 왕들은 <왕위계승권>자인 왕의 직계들과 다른 <진골>들을 구분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결과 국왕의 권위를 위해 불교의 <석가모니 족속>이라는 이데올로기, 국왕은 원래 성스럽고 신성하다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서 왕권 세습을 정당화하고, 왕권이 신성함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삼국통일을 이룰 무렵 진흥왕이 생각했던 <불가능한 꿈>을 이루낸 무열왕 김춘추의 후손들은 <성골>이라는 타이틀이 없이도, 삼국통일을 이루고, 강력한 왕권을 구축해서 백년간 신라의 전성기를 만들어냈다.

묻혀있던 새로운 역사서들이 나타나서 더 정확하고, 확실한 <성골>의 개념을 알려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남기고 오늘 글을 정리한다.

http://historia.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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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편>

15화. 평생을 불교와 싸운 유학의 아버지 - 한유

1. 맹신적인 종교가 국가를 망치는 것이다. 

중국 불교를 마무리 하면서 어떤 상징적인 이야기를 꺼내야 쉽게 이해될까 고민하느라 포스트가 지연되었다. 오늘 이야기는 불교를 배척하면서 평생을 살아간 <한유>의 이야기로 중국 불교편을 정리하고자 한다.

중국 당나라 시기... 불교는 최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국가 권력과 밀착한 화엄종, 천태종 등 교종 종파 뿐 아니라, 백성에게 직접 뛰어들어 불교의 대중화를 이끈 정토종, 선종에 이르기까지 불교천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불교의 힘이 너무 강해질 때마다 중국 황제는 종교에 태클을 걸었다. 그 이유는 정치적 목적 때문이다. 국왕이 불교를 용인하는 것은 불교가 왕권 강화에 도움을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황제에게 불교, 도교, 유학의 구분을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만약 종교가 황제권을 넘어서려 한다면 그 종파를 찍어 눌러야만 했다. 특히 유교, 도교, 불교라는 세 종파가 공존하던 중국 고대 사회에서 황제의 선택권은 넓었다. 황제가 불교에 위협을 느낄 때마다 유교, 도교를 이용하여 불교를 탄압하였고, 그것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몇몇 <폐불사건>으로 알려진 것이다.

링크 : 불교편 9화. 서로 우위를 점하려던 도교와 불교의 한판 승부

특히 유교는 불교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대세는 불교와 도교였고, 특히 불교는 당나라 측천황제(측천무후)의 불교 중흥 노력으로 최강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 하지만, 당나라의 국운이 기울던 당 말기부터 불교의 위세는 꺽이게 되었다.

당나라는 측천황제 이후, 불교가 사회를 지배하였다. 황제는 미륵의 화신으로 생각할 정도였고, 귀족들은 스스로가 보살이라고 여기며 성불을 기원했다. 천태종과 화엄종의 <경전>은 귀족들의 교양지침서였다.

공식적인 당나라의 통일 사상은 유학의 일종인 <훈고학>이었지만, 훈고학은 옛 성인들의 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수준이었다. 백성들은 불교를 믿고, 집집마다 향불이 올라왔다.

2. 유학자들의 반격

유학자들은 불교 세력이 성장하자 불교에 대한 비판을 공론화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황제권 강화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첫째, 불교 사원을 짓는다는 것은 막대한 세금을 낭비하는 것이고, 종교 사원은 세금을 내지 않는 특권을 누린다. 그것은 왕권을 강화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둘째, 죽은 뒤 내세가 기다리며, 내세는 현생의 죄업과 연결되어 있다는 <인과응보>에 대해 국가적 차원으로 비판하였다. 유학에서는 현실 사회에 대한 모순을 파악하고, 현실 개혁과 사회 안정에 대한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죽은 뒤 영혼이 어쩌구.. 하는 이야기는 현실성이 전혀 없으며, 백성들을 현혹하는 이야기일 뿐이다. 국왕으로서 당연히 막아야 되지 않겠는가?

셋째, 불교가 왕권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당나라 이전의 불교는 왕권 강화에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불교의 교리가 심화되어 강력한 <종파>가 생겨나자 문제가 발생했다. 불교가 석가모니의 참 뜻을 내세워 중국 전통 사회의 윤리에 도전한 것이다. 유학에서는 충성, 효도를 강조하지만, 불가에서는 출가릃 하여 부모와 국왕을 떠나는 것마저 허용하고 있다. 세금을 내야할 백성들이 줄어들고, 전통 윤리에서 멀어지는 것을 국가가 보고만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넷째, 불교 교단의 승려들이 <국사>가 되어 정치적 힘을 갖게 되었다. 왕권이 약해지는 시점에서는 이것도 골치아픈 것이었다. 백만대군보다 무서운 것이 종교적 힘을 가진 백만 민중 아니겠는가?

결국 당말기 폐불사건은 남북조시대 이후 계속 되어온 왕권과 불법의 대립이 극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남북조와 수나라를 거치면서 여러 차례 폐불을 당해본 불교였지만, 당말기에 대놓고 진행된 폐불에서는 큰 타격을 입었다.

특히, 경전으로 중심으로 귀족층과 밀접했던 <교종>은 교단이 박살날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다. 반면, 간략한 선법 수행과 <믿음>을 강조했던 <선종>은 그 피바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당나라 말기에 살아남은 불교 교파는 <선종>이었고, 결국 선종이 후대 중국 불교를 이끌어가게 된다. 그러나, 불교 자체가 위축된 만큼 불교의 힘은 떨어졌다. 당나라를 이은 송나라는 신유학인 <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삼았고, <교종> 교파는 송대 이후 아무런 힘도 가질 수 없었다.

3. 불교도 싫어, 귀족도 싫어...  NO 만을 외치던 <한유>

당송팔대가의 으뜸이라 불린 한유는, 중국 사회의 문제점을 <불교>에서 찾았다.

백성들이 죽은 뒤 <윤회>를 생각하면서 현실을 암흑으로만 생각하고 있다는 것과, 귀족들이 불상앞에 재산을 기부하면서 사회적 역할을 못한다는 것을 모두 <불교>탓으로 여긴 것이다.

특정 종교에 매달려 모든 것을 버리는 행위가 생긴다면 예나 지금이나 사회적 문제로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종교가 <종파>적 철학까지 잃고 지배층이 맹신하는 상황까지 발생한다면 국가 존립 자체가 위험해진다.

한유는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신유학>을 제시하였다. 노장사상은 허무주의이며, 불교는 현실이 아닌 <내세>의 종교라고 주장하고 다닌 것이다.

한유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나 스스로 제자백가를 독서하고 과거에 합격한 뒤, 특출한 학식으로 승승장구 승진하던 엘리트 관리였다. 하지만, 지배층이 숭배하는 <불교>에 정면 도전하면서 험난한 인생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당나라 덕종에게 지배층의 문란함을 비판하였다가 귀향을 갔었지만, 뛰어난 학식을 인정받아 다시 조정에 들어갔다. 그러나, 또 다시 지배층의 사상을 비판하여 귀향을 가게 되었고, 이것이 그의 일생에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귀향갔다 돌아왔다, 또 귀향갔다 돌아왔다....

특히, 한유가 미움을 받은 것은 당나라 헌종 때 <황제>의 불교 숭배를 비판한 것이 원인이 되었다.

당 헌종이 법문사라는 절에서 석가의 손가락 뼈한마디를 구해 궁궐로 가져온 뒤 제사를 지내고 다시 절로 보낸 일이 있었다. 그것을 본 지배층 인사들과 백성들이 모두 그 뼈한마디를 찾아가 난리를 치는 것이었다. 부자들은 자신의 재산을 그 뼈마디에 기부했고, 백성들을 생업을 포기한채 뼈마디 앞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어찌 인도에서 죽은 석가모니란 인물이 중국 사회 전체를 흔들어놓는단 말인가? 진짜인지 알 수도 없는 석가의 썩어 문드러진 뼈조각이 국가를 망친단 말인가?

한유는 헌종에게 <불교를 신봉한 군주들은 모두 단명했다>는 글을 올리며, 황제를 직접 비판하였다. 그리고 아무 생각없이 살아가는 당나라의 지배층들도 비판하였다. 소위 <귀족>이라고 불리며, 남작, 백작, 자작 등 작위를 받고 살아가는 지배층들은 개념(槪念)이 없다고 비판한 것이다.

그는 지배층들의 문학인 <시문학>까지 정면으로 부정하였다. 사륙변려체 등으로 구절을 맞추어 술자리에서 돌려말하는 싯구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것은 아무 의미없는 유흥일 뿐이다. 문학이란, 현실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있어야 하며, 진정한 <도>를 깨닫기 위한 노력 속에서 나와야 한다.

당나라 지배층이 쓰는 화려하고, 아름답기만 한 문장들은 아무 의미가 없다. 요즘으로 따지면 원더걸스나 빅뱅의 노래가 귀에 착 붙게 반복적인 멜로디로 구성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뜻은 아무 의미없는 것과 같다. NOBODY를 백번 외쳐봐도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한유는 한나라 이전의 고문들을 회복시켜 아무 의미없는 당나라 지배층의 문학을 부정하려고 했던 것이다. 왜 하필 한나라 이전의 고문으로 돌아가자는 고문부흥운동(古文復興運動)을 전개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불교가 한나라 이후에 성행했기 때문이고, 유학이 한나라 때까지 전성기를 누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반지배층 성향을 가진 한유.... 그 결과는? 오랜 시간 귀향살이었다. 그러나, 인생의 절반이 중앙정권에서 배제된 그였기에 백성들과 직접 만날수 있는 기회도 많았고, 많은 친구를 사귈 수도 있었으며, 성리학의 토대가 된 저서들도 적을 수 있었다.

4. 불교를 비판했으나, 유학도 내 버려두지 않은 한유

한유는 불교, 노장사상 등을 비판했고, 그것을 신봉하는 지배층과 무지한 백성들을 동시에 비판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옛 유학을 그대로 옹호하지도 않았다.

한유는 한나라 이전의 유학들도 비판하기 시작한다. 공자와 맹자의 말씀부터 시작된 고대 유학을 당나라에서 <오경정의>로 압축하였다. 당나라에서는 과거시험의 명경과를 보기 위해 <오경>을 공부해서 암기해야 했다.

하지만, 한유는 그것을 비판한다. 왜 공자와 맹자의 사상을 단순히 암기해야만 하는가? 그들의 사상이 절대적이라고 맹신한다면, 불교를 절대적으로 믿는 이들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어떤 사상에 대한 맹신은 결국 교조주의일 뿐이다.

한유는 불교 자체가 나쁜 것이라 말하지는 않은 듯하다. 하지만, 불교의 교조주의적 성향을 비판하기 위해 평생을 불교와 싸우며 살아갔다. 그의 역사관은 이렇다.

중국의 전설시대에는 인간 윤리를 지키며 살아간 태평한 시기(태평성대)가 있었다. 그러고, 중국인의 전통 윤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면서 <유학>이 등장하였다. 하지만, 한나라 이후 불교라는 외래 종교가 유입되어 황제들이 단명하고, 국가의 전성기도 단축되었다. 위진남북조의 긴 혼란기가 불교의 전성기였으며,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황제는 불교를 견제하면서 국력을 낭비하였다.

따라서 고대 유학을 부흥해야 하지만, 시대가 달라진만큼 새로운 유교 철학이 필요하다. 한유는 새로운 유학 철학을 <성선설>에서 찾았다.

맹자의 성선설은 인간의 성을 인, 의, 예, 지, 신 등으로 구분한 뒤 본성이 착한가를 따지는 철학이었다. 반면, 한유는 성선설, 성악설을 모두 보완하면서 인간의 성품은 3가지로 나뉜다고 말한다.

성 상품

  태어나서부터 선한 성품

성 중품

  선과 악 어느쪽으로나 갈 수 있는 성품

성 하품

  태어나서부터 악한 성품

한유의 책 중에서 널리 알려진 책은 <진학해, 원도, 원성>이라는 3권의 책이다. 진학해는 자서전으로 불교비판에 대한 내용이 많이 실려있고, 원도는 유학의 나아갈 길과 불교의 문제점이 실려있다. 원성에서 성삼품설을 적어두었다고 한다.

5. 불교의 시대가 가고 성리철학의 시대가 오다.

당나라 말, 한유의 출현과 더불어 시작된 성리학의 태동은 불교의 입지를 비좁게 만들었다.

한유의 벗인 유종원은 한유의 철학마저 비판하면서 <유물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는 역사 발전의 핵심을 <세력>으로 파악하였다. 공자, 맹자와 같은 성인이 역사를 좌지우지하지 않는다. 그들은 말 그대로 성인이거나 종교인일 뿐이다. 우주나 음양오행이 인간의 삶을 결정하지도 않는다. 우주는 단순한 음과 양이 모인 기(氣)일 뿐이다. 기(氣)는 살아있지도 않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따라서 우주의 기가 인간행위에 벌을 내린다거나, 복을 준다는 말 자체가 미신일 뿐이다. 결국, 인간 세계를 이끌어가는 것은 역사를 이끌어가려는 <힘있는 인간 집단>일 뿐이다.

유종원과 한유의 후학인 이고는 스승 한유의 철학에 선종 종파의 <수련법>까지 더하였다. 선종계열의 불가에서는 인간이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맹자가 인간의 성이 모두 선하다고 말한 것처럼, 부처 역시 누구나 착한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말한 것이다. 따라서 성인이든, 군자든, 평민이든 모두가 선할 뿐이다. 단지, 우주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외부(기 : 氣)의 영향을 받아서 훗날 선과 악으로 갈릴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모두가 선해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처의 수련법인 <선>을 행해야 한다. 선종의 명상법과 수양법, 좌선과 대화는 학문과 종파를 넘어서 모두에게 유용한 수련법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당말기, 새로운 유학 사상가들은 불교를 비판하면서도, 옛 유학의 참뜻을 자기 나름대로 재해석 하려고 노력하였다.

새로운 유학은 당나라 귀족층들이 농담따먹기 하듯 적어내는 의미없는 글귀나 고사모음이 아니라 인간과 우주의 본성을 연구하는 <뜻>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그것이 고문부흥운동으로 이어진 것이다. 고문부흥운동은 화려한 문구의 시를 벗어나, 현실생활과 관련된 문제들을 철학적 명제로까지 끌어내려는 노력이었다.

당말의 유학자들은 국가 권력이나 지배층과 밀착된 교종 종단을 철저히 배척하였다. 그러나, 신유학 역시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고 뜻을 찾는다는 점에서, 선종 교단의 수련법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하였다.

6. 불가와 도가의 철학이 성리학의 <태극>으로 합쳐지다.

당나라 다음으로 등장한 송나라에서는 성리철학의 틀이 완성되면서 사회 지배철학으로 자리잡은 시기였다.

그 역사적 철학을 <태극>으로 정리한 이가 바로 <소강절>과 <주렴계>였다.

절에서 거주하면서 불교철학과 유학을 두루 공부한 소강절은 불교, 도교, 유학의 철학을 두루 정리하여 태극(太極)이라는 불변의 원리를 만들어내었다.

태극이란, 절대 불변하는 우주의 진리로서, 성리학에서 말하는 이(理)와 같다. 태극은 불변하지만, 그것을 알아채는 인간의 정신(神)이 사물을 파악하는 것을 기(器 : 물질)리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정신과 기는 돌고 돈다. 세상에는 시작점이 있는데, 이것이 정신으로 표현되며, 또 물질로 표현되며 물질이 소멸되면 다시 정신으로 돌아간다. 이것은 불가에서 말하는 <윤회>의 이론과 비슷하다.

또, 돌고돌아 물질이 자연으로, 정신으로 돌아간다는 점은 도가의 무위자연과 추연의 음양오행설과 유사하다.(실제, 소강절이 불교, 도가의 철학을 의도적으로 인용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지만, 돌고돈다는 법칙 자체는 변하지 않고 불변하는 진리로 남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태극>인 것이다. 태극은 모든 자연과 인간, 우주의 근본 법칙이다.

이 사상을 정리한 이는 동시대를 살았던 친구인 <주렴계>이다. 그는 선종 선승들과 직접적인 교분이 있었고, 선종의 수양법으로 자신을 단련하면서 살았던 인물이다. 주렴계는 모든 현상의 근본 법칙인 태극에게 2가지 속성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움직이는 것을 양(陽)이라 하고, 정적인 것을 음(陰)이라고 하는데, 이 음과 양이 돌고 돌아 우주의 법칙을 회전시킨다는 것이다. 음과 양은 오행(화,수,목,금,토)의 상극을 만든다. 양은 남성, 태양 등을 뜻하며, 음은 여성, 달 등을 뜻한다. 불(火)이 양이라면 나무(木)가 음이 된다.

그리고, 이 양과 음이 상호작용하면 우주가 돌게 된다. 만물의 생성을 주도하는 것이 건(乾)이고, 받아들이는 것이 곤(坤)이다. 하늘과 남자가 건이면, 땅과 여성이 곤이다.

주렴계의 철학은 결국 불교와 도교의 철학에서 파생되었다. 선종에서 말하는 공(空) 사상과 도가에서 말하는 무(無) 사상 등의 철학을 유가 형식에 맞춰 <태극>으로 정리한 것이다.

단, 차이점이 있다면 불교와 도가에서는 존재의 근거가 되는 불변의 진리를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논리적인 정신적 개념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러나, 주렴계는 <태극>이 인간 세계에 존재하는 님자, 여자, 하늘 등의 명칭을 가진 물질이라는 점에서 <유물론>적인 관점의 철학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탐구할 수 있는 태극의 실체를 리(理)라고 말하고 있다. (태극도설)

7. 선종 철학을 벗어나 이기론으로 향하는 성리학...

동시기를 살았던 장제는 좀 더 세밀하게 불교 철학과 성리학의 차이점을 설명한다. 불변의 본질인 태극 자체를 리(理)라고 말하면서, <리>는 단순히 변화의 법칙을 설명하는 원리라고 말하였다. 실제 우주를 구성하는 실체는 기운(기 : 氣) 인데, 이것이 바로 눈에 보이는 존재자라고 말한 것이다.

따라서 장제가 주장한 <주기론>은 불교사 입장에서 보면 아찔한 것이 된다. 불교의 <공>사상이나, 도가의 <무> 사상이 전면 부정되고, 우주에 실제 존재하는 기운(氣)이 명백히 물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장제의 입장에서 <기>란, 우주의 생성부터 현재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이며, 지금 이순간에도 변하고 있는 모든 사물인 것이다. 더 이상 <색즉시공 공즉시색>과 같은 어려운 말은 통하지 않는다. 모든 사물은 우주의 기운(氣)를 받아 생겨나서 살아가다가 사라질 뿐이라고 말하면 끝이기 때문이다. 내세도, 윤회도 이젠 없다. 기운(氣)은 살아있을 때 활동할 뿐이며, 죽은 뒤 사라질 뿐이다.

동시대를 살았던 정이천, 정명도 형제는 장제의 <기> 사상을 우주와 만물의 일치로 끌어올린다. 그들은 모든 만물에 기운이 있고, 그 기운은 우주에서 내려준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만물과 하나가 되는 경지에 이르고, 모든 중화인이 하나의 민족이라는 것을 아는 단계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주의 기운(氣)은 불변하는 원칙인 이치(理)에 의해 움직이므로, 모든 우주의 기운에는 이치가 담겨져 있다고 말한다.(일물일리론 : 一物一理論)

이 이론을 정리하여 성리학을 완성한 이가 바로 성리학의 아버지 <주자>이다. 주자는 이치(理)와 기운(氣)의 상관관계를 정리하고, 그것을 중국민족의 우월성과 정당성으로 규정하면서 새로운 정치철학을 완성했던 것이다.

이 와중에 불교의 교종 철학은 설 자리를 잃었다. 정치철학으로 성리학에 지배권을 빼앗긴 불교는 이미 당나라 지배층이 무너지면서 정치적 실권에서 사라진 것이다. 이제 불교는 민중속으로 파고든 선종과 정토종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송나라를 넘어 명, 청 시대로 이어지면서 서민 불교로 자리잡아간다. 그리고, 송나라 이후 역사적 변환점에 새롭게 자리잡게된 철학은 <유학>이었다.

자, 그럼 이 쯤에서 중국 불교이야기도 끝내고 한반도와 일본의 불교로 넘어가보자.

한반도의 불교는 인도, 중국 불교의 연장선에서 이야기될 것이다. 고조선에서 시작하여 현재의 조계종까지의 불교를 역사와 관련해서 살펴보자. 그리고 일본의 불교는 우리 역사와 비교해서 다루면 좋을 것 같다. 이야기 했듯이 티벳이나 동남아 불교는 동아시아 역사와 큰 관련이 없기 때문에 관련 부분만 조금씩 이야기하려고 한다.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by 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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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중세 역사학의 발달 과정

1. 삼국시대 : 역사학이 성립되다

삼국시대 이전에는 제대로 된 역사학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의거할 때, 한국에서 제대로 된 역사서를 편찬한 시기는 삼국시대로부터 비롯됩니다.

삼국시대의 역사편찬은 왕권의 이데올로기 강화를 목적으로 합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역사서를 편찬한 시기가 대체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는 시기였습니다. 고구려의 유기는 5c 고구려의 강성기에, 백제의 서기는 근초고왕의 전성기에, 신라의 국사는 신라 6세기 진흥왕기에 각각 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역사학이라는 학문을 객관적으로 인식한 것이 아니라 역사학을 <왕의 업적>을 홍보하여 왕권에 대한 정당성을 확립하는 수단으로 본 것입니다. 당시의 역사서들은 남아있는 것들이 없기 때문에 내용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대부분 왕실의 족보와 신성함, 왕계를 거슬러올라갔을 때의 신화, 선민의식 등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즉, 왕실과 지배집단의 중앙집권적 통치가 정당함을 보여주기 위한 저서들이었다고 볼 수 있겠네요.

고구려에서는 유기를 편찬하였고, 이후 신집 5권으로 이것을 요약하였다고 합니다. 백제는 서기, 백제기, 백제본기 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산리는 국사, 가야는 개황력 등이 존재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역사서들은 일단, 중국의 역사 서술 방식을 도입하였습니다. 단, 사마천의 기전체 중에서 거의 대부분 <본기> 위주로 역사를 서술했을 것입니다. 왜냐면, 역사서의 편찬 목적이 국왕가의 신성함을 강조하는 것이었으니까요. 이들 책의 내용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인용되어 나오는 것으로 추론할 수 있습니다.

통일신라 시대에는 선사, 한산기, 제왕연대력, 화랑세기 등의 역사 저서들이 나오는 데, 이러한 책들인 국가가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만들었던 삼국시대 책들과는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일단 불교관련 저서나, 화랑의 역사 등 역사 서술의 폭이 넓어졌습니다. 즉, 국왕에게 치중했던 역사 서술이 이제는 좀더 넓은 지배집단 및 일부 피지배층으로 확대된 것이지요. 이것은 이제 국왕만의 역사 편찬인 <본기> 위주의 서술을 넘어 <열전, 지, 표> 등으로 역사 서술이 넓어진 것을 뜻합니다. 사마천의 사기 형식을 제대로 파악하고 적기 시작한 것이지요.

2. 중세시대 : 최초의 역사서 삼국사기의 등장

중세시대의 역사서술은 이제 <송>나라의 유학체제를 받아들이면서, 유교적 관점에서 다양한 역사서들이 출현였다는 것에 특징이 있습니다. 아직도 역사서술에 있어서 <바이블>은 사마천의 사기였습니다. 고려 후기 <원>에서 성리학이 유입되기 전까지는 사기의 기전체 방식이 역사서술의 대세였지요. 하지만, 성리학이 유입된 여말, 조선 시대에는 <성리학>을 통한 유교서술이 대세가 됩니다.

우선 고려 시대 사서들을 아주 간략히 다루어 볼까요?(각 사서들에 대한 구체적 포스팅들은 따로 하겠습니다.)

고려 시대 최초의 유교적 사서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입니다. 당시 사회는 문벌귀족 사회의 폐단으로 사회적인 불안감이 조성되었고, 여진족의 금이 강성하여 국가적 위협이 되던 시기였습니다. 고려 국왕은 김부식을 책임자로 하여 당시 훈고학 계열의 유학자 12인에게 에게 삼국사기를 편찬하게 함으로서 <유교적 통치질서와 전통> 확보를 통해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문벌귀족 사회는 묘청의 난을 겪고, 금나라와 사대외교를 하는 등 국가적 팽창력이 약회된 시기였습니다. 삼국사기는 문벌귀족들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신라 중심으로 고대사 체계를 정립하게 됩니다.

이후 무신 집권기에는 사회의 혼란함을 고대 위대한 유산에서 찾으려는 시도가 나타납니다. 이것은 이규보의 동명왕편에서 잘 보여집니다. 이후 몽고간섭기에는 고구려의 유산을 넘어서서 민족의 기원을 단군에서 찾으려는 시도가 보입니다. 이것이 일연의 삼국유사, 이승휴의 제왕운기 단계의 역사서술이었습니다.

3. 고려시대 : 삼국사기에서 보이는 유교적 합리관

고려 중기 이후 유교주의적 역사서술의 특징은 상당히 합리적인 성향을 보인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 대표적인 서술 방식을 보통 <무징불신의 태도>라고 합니다.

무징불신이란, 합리적인 역사서술을 위하여 문헌적인 증거가 없으면 믿지도 쓰지도 않는다는 역사 서술 태도를 말합니다. 즉, 고대적인 신화주의는 배격하고, 있는 그대로의 서술을 존중합니다. 이러한 무징불신의 태도가 가장 잘 반영된 역사서가 바로 삼국사기입니다. 또, 문헌적인 증거가 있다고 해도 귀신의 이야기는 합리적이지 않으므로 쓰지 않는다는 <괴력난신>, 문헌적 증거가 확실해도 합리적이지 않은 사건은 삭제해 버린다는 <필삭주의> 원칙은 중세 사서의 큰 특징입니다.

이러한 무징불신의 태도를 통해 역사서를 편찬하려고 했던 목적은 역사에서 합리적인 <교훈>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즉, 역사는 지난 날을 되돌아봐서 오늘날에 필요한 교훈을 얻는 것이라는 것이 역사 서술의 목적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실을 기록할 대는 사실 자체의 서술과, 그 사실에 대한 평가는 따로 구분해야 하며, 평가도 논,찬의 형식으로 따로 적습니다.

그리고 역사를 서술할 때 <기전체>가 중심이 되어야 하지만, 때로는 역사 서술의 교훈적 목적에 맞추어 다양한 서술체제가 확립되는 것도 이 시기 역사서들의 특징입니다. 실제 기전체 양식은 사마천의 사기 형식으로 고려시대에 유행했지만, 원나라에서 송학이 들어온 이후 고려 후기 역사서들은 다양한 역사서술체제를 선보입니다. 중국 송에서도 자치통감의 편년체, 자치통감강목의 강목체 등이 선보였듯이 다양한 서술체제로 역사에서 교훈을 찾으려고 한 것이지요.

또, 역사에서 교훈을 찾는 다는 것은 다른 말로, 역사를 역사 자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경학의 일부로 본다는 것과도 상통합니다. 역사는 유교적인 정치이념과 윤리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일종의 <거울>로서, 역사학의 목적인 현재 통치이념에 부합되는 <유교적 정당성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니까요.

4. 15-16세기 조선시대 : 유교적 합리관에서 성리학적 유교관으로...

여말,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유교적인 합리관은 여말 들어온 <성리학>에 의해 성리학적 사관으로 전환됩니다. 여말의 성리학은 원대 허영의 학파에서 들어온 사관으로서 <수기치인> 중에서 <치인>을 강조하는 실용적이고, 부국강병 성향의 성리학이었습니다.

특히 조선왕조가 개창하면서 새왕조는 통치이데올로기를 정비하기 위해 수많은 사서들을 편찬합니다. 일단, 고조선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바탕으로 민족의 근원을 정리한 뒤, 성리학적 인식에 맞추어 삼국사와 고려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합니다. 그 결과 삼국사략, 삼국사절요, 동국통감,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의 삼국사, 고려사 저서들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 시기 역사서들은 고려 멸망과 조선 건국에 대한 정당성을 확립하고, 왕조초기 성리학적 가치기준에 맞춘 부국강병과 왕도정치 실현을 목표로 하였기 때문에 상당히 진보적인 부분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고대사에서 단군기원을 확립하고, 민족단일의식을 강조한 것이 이 시대 역사학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16세기 성종 이후 사림들이 중앙정계에 진출하면서 이제는 부국강병적인 성리학이 아니라, 도덕지향적인 송대 주자학이 조선 시대 역사학의 대세를 이룹니다. 이 시기의 역사서들은 부국강병보다는 사람들의 향촌자치를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였습니다. 역사의 영역도 정도전이 주장했던 만주와 요동수복이라는 관점보다는, 한반도 내의 조선사를 좀더 강조하게 됩니다.

주자학적 역사관과 고려 합리주의적 역사관을 비교하면 가장 큰 차이점은 명분론과 합리론이라는 것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고려의 역사학은 <무징불신>으로 대변되는 합리사관입니다. 그러나 16세기 주자학에서의 사관은 <전통과 명분>으로 대표되는 사관입니다.

예로, 중국 삼국지에서 조조의 위와 유비의 촉 중에서 어느 쪽이 정통이냐고 물었을 경우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중세 합리적 사관을 지향하는 역사학에서는, 당시 정세와 상황으로 미루어보아 선양으로 왕위에 오른 조비의 <위>를 전통으로 볼 것입니다. 그러나, 명분을 따지는 주자학의 사관에서는 한나라 왕실의 후손인 유씨의 유비의 <촉>이 삼국시대의 전통국가라고 볼 것입니다. 이런 차이가 있을 수 있죠.

4. 양난이후 조선시대 : 새로운 전통과 실학의 발견

16세기 중반 이후 역사서술은 아주 큰 변화를 겪습니다. 실제 16세기 중반 이후에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을 겪으면서 조선 사회가 동요하고, 조선왕조의 체제가 급속히 붕괴됩니다. 따라서 조선의 지배층들은 무너져가는 왕조를 되살리기 위한 필사의 노력을 합니다. 정치적으로는 붕당정치의 서인, 남인의 공조체제 형성, 비변사 체제의 형성, 대동법과 균역법 등 체제 변화 등으로 노력하면서, 사상적으로는 조선 왕조의 정당성을 확립할 수 있는 수많은 사서들을 만들어 냅니다.

이제 16-17세기의 정치가들은 명이 멸망한 후 <중화>의 전통이라는 것을 새롭게 정립해야 했습니다. 명은 망했고, 청이 대세인 시기에 명만이 전통이라는 <명분>만으로 사회를 이끌수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실제 명분으로 추구했던 북벌운동도 실패도 끝났습니다. 이제는 청나라를 인정하는 <북학운동>을 통해 새로운 사상을 배워야 했고, 청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이제는 명분보다는 부국강병이 필요한 시기였던 것이죠.

따라서 이 당시 역사학은 명청 교체로 인하여 중화의 전통이 조선으로 넘어왔다는 <도통동전>을 강조합니다. 이제 우리 역사를 중국 역사의 부속물이 아니라 순수한 <정통설>로 확립하려는 시도가 많아졌고, 스스로 국가를 지켜야 한다는 차원에서 <북벌수호운동>, <도서방위체제확립>, <양역변통> 등의 논의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 때 사상적으로 우리 역사의 체계를 잡으려 했던 사람들이 실학자들입니다. 이들은 단군, 기자, 고구려, 삼한 등을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를 가지고 고민하였으며, 우리 역사를 체계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다른 포스트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이익, 정약용, 안정복 등의 고대사 시각은 이 당시 성리학 사회로서는 상당히 진보적인 것이었습니다.

다음 파트에서는 1900년 대 이후 역사인식에 대하여 간략히 다루고, 이후 한국사학에 큰 영향을 주었던 사료들에 대하여 개론적으로 다루겠습니다. 중세 삼국사기부터 근대 노무현기의 사학까지를 포스팅 할 건데, 아주 가끔 다루다보니 시간은 무지 오래걸릴 것 같습니다.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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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고대 역사서 - 고사기, 일본서기를 어떻게 볼 것인가?

1.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편찬 목적은?

고사기는 최초로 일본 역사를 체계적으로 편찬한 책입니다. 고사기는 712년, 그리고 얼마후에 720년경에 일본서기가 편찬되었지요. 이 2권은 모두 덴무 천황의 명으로 제작됩니다. 덴무천황이 누구인지는 일본사이야기 7번에서 얘기했죠? 가장 유약한 왕이면서도 가장 강력한 무력을 획득하여 일본 천황가를 중앙집권화 시킨 그 인물입니다.

보통 중앙집권화가 완성되면 그 강력한 왕권에 걸맞는 역사서가 나오기 마련입니다. 가까이 우리 나라만 한번 찾아볼까요? 신라에서 편찬된 국사는 진흥왕이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할 때 신라 왕실의 권위를 알리고, 진골귀족의 계보를 정리하기 위해 만들었습니다. 고구려의 유기와 신집도 고구려의 기상을 알리기 위한 목적이었고, 백제의 서기도 백제가 동아시아 상권을 주름잡고, 중국 2군에 영향력을 펼칠 때, 왕실계보를 정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고사기와 일본서기도 덴무천황이라는 가장 강력한 천황권 밑에서 편찬됩니다.(시작은 덴무찬황 때이지만, 워낙 방대한 사업이라 끝나는 것은 후대의 천황대일입니다.) 덴무천황은 황실의 계보를 남기기 위해 전승자를 찾아서 황실계보를 암기시킵니다. 이 황실 계보를 <제기>라고 합니다. 또 <구사>라고 불리는 신화와 설화도 전승자에게 암기시킵니다. 그러나 이렇게 암기시킨 내용이 이후 유실될 것을 염려하여 암기한 내용을 책으로 적으로 명하였는데, 이것이 <고사기>라는 일본 최초의 역사서입니다.

2. 고사기의 내용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

고사기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일본 덴무천황기부터 편찬하기 시작한 일본 천황가의 역사라고 보면 됩니다. 이 이야기는 3권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상, 중, 하의 권은 각각 중심 줄거리가 있습니다. 상권은 전설속의 신들의 이야기입니다.(이 신화이야기는 일본사 이야기 2번에서 다루었습니다.) 중권과 하권은 그 신이 천손강림을 하여 지상의 천황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천황가의 계보와 황태자들을 중심으로 엮은 이야기입니다. 단군신화와 비슷한 맥락으로 구성된 이야기이지요. 그러나 단군신화와 다른 점은 당시 천손의 후예라는 천황가에서 직접 자신들의 이야기를 약간 객관적 근거가 없이 적었다는 점이 좀 다릅니다.

일본에서는 초기에는 고사기를 사서로 다루었지만, 지금은 스스로도 상, 중, 하 전체를 한데 묶어 일본 신화이야기로 보는 관점이 더 많아졌습니다. 이 고사기의 편찬 목적은 진신의 난(일본사 이야기 7편 참조)을 넘긴 덴무천황이 지방 호족들의 도전을 사전에 차단하고, 천황의 신성함을 대외에 과시할 목적으로 만들었죠. 따라서 이 책은 정사라기 보다는 천황가의 개인적 소장물로 만든 책이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당시 일본이 천황권의 전성기이자, 불교문화의 전성기라는 점입니다. 특히, 한반도에서 불교를 전래한 이래로 한반도 불교에서 전래된 설화들이 일본에 많이 유입되었는데, 이러한 측면들이 고사기에는 많이 유입되어 있습니다. 또 이 고사기에 나오는 일본 신화는 각종 세계 신화적인 내용들이 많이 유입되어 있다고 일본측이 주장합니다. 즉, 중국, 한반도, 태평양, 그리스 신화의 내용과 비슷한 내용도 많다고 주장하는데, 일본이 주장하는 그리스 신화까지의 지역확대는 좀 무리인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한반도 설화가 재일 많다고 보는게 타당하죠.

3. 고사기의 실제 내용

상권의 내용 요약 - 일본의 신화 이야기

천지가 처음 태어날 때 시작인 어둠이었고, 무질서였다. 이 어둠과 무질서 속에서 양과 음이 생겼다. 이 양과 음은 각각 하늘과 땅을 만들었다. 하늘에서는 천상계가 있어 세 명의 신이 출현하였는데, 이 신들은 이자나기와 이자나미라는 남매 신을 낳았다.

이 남매 신은 결혼하여 새로운 섬들을 많이 만들었다. 이들이 결혼하면서 낳은 섬들이 바로 지금의 일본 열도가 되었다. 이들은 일본 열도를 만든 뒤 태양의 신(아마테라스), 달과 역법의 신(츠쿠요미), 전투의 신(스사노)를 낳았다. 이자나미는 불의 신도 낳으려 했지만, 그 뜨거운 불의 열기 때문에 호히려 죽고 말았다.

이자나기는 아자나미가 죽자 실의에 빠져 그녀를 만나러 지옥으로 간다. 그러나 지옥에서 무서운 모습으로 변해있는 이자나미를 보고는 놀라서 도망가 버린다. 이자나기는 실의에 빠져 천상계를 아마테라스에게 넘긴다.

아마테라스는 천상계를 잘 다스렸지만, 스사노가 악행을 저지르며 형의 말을 듣지 않자 분노하여 숨어 버렸다. 그래서 태양의 신이 사라진 지상에서는 밤이 계속된다. 신들은 당황해서 아마테라스에게 돌아오라고 사정하였고, 아마테라스는 신들이 주선한 잔치에 감동받아 돌아오게된다. 그리고 아마테라스는 말을 듣지 않고 반항하던 동생 스사노를 천상계에서 추방하였다.

스사노는 일본열도로 내려왔다. 그는 사람들을 괴롭하던 야마타노오로치를 퇴치하고 영웅이 되었고, 지상은 스사노의 후손인 오쿠니누시가 지배하게 되었다. 오쿠니누시는 지상국가 건설에 힘쓰며 백성들을 잘 다스렸지만, 천상계의 아마테라스는 그 자손인 히노호니니기에게 명하여 지상을 다스리라고 하였다. 히노호니니기는 지상으로 내려와 오쿠니누시의 국가를 물려받고 지상을 다스리게 되었다.

히노호니니기가 천상계의 명령을 받고 내려온 것을 천손강림이라고 한다. 천손강림 이후 일본열도는 하늘의 아들이 지배한다는 선민사상을 가지고 국가를 다스리기 시작했으며, 그들의 후예가 바로 천황이다. 천황가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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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권의 내용을 우리 나라 사람들 중에서는 한국 신화를 가져다 베낀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시조신 아마테리스는 해모수로, 천상계 이야기는 환인이야기로 파악하는 것이 그것인데, 이렇게 까지 비약하는 것은 좀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동아시아 신화는 다 비슷비슷하거든요. 일본신화가 우리나라 신화를 베낀 것이라고 너무 강하게 주장하면, 우리 신화는 중국이나 러시아 신화를 베낀 것이 됩니다. 사실 시기를 막론하고 동아시아 설화는 다 공통적으로 천손의 강림, 인수교혼(동물과 사람이 결혼하는 것), 곰이 등장하는 설화가 대부분 다 나옵니다. 당시 사회 분위기가 그런 설화를 유도했다고 보는 편이 좋지요. 또는 북방에서 설화가 차츰 남방으로 전승되었다는 견해도 있구요.

중권의 내용 요약 - 진무천황과 신공황후(4대 천황 ~ 15대)

중권의 내용은 천손강림 이후 4대 진무천황이 신의 후손으로서 일본열도에 실력을 행사하였고, 일본 열도의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은 이후 천황가가 발전해 나간다는 내용입니다. 진무천황 이후 후손들 얘기는 그저 그렇고, 중요한 것은 야먀타이국의 히미코(신공황후)의 이야기입니다. 고사기에서는 진구우라는 여자로 나옵니다만, 몇 년뒤 편천된 일본서기에서 신공황후로 격상시킵니다. 신공황후는 일본에서의 강력한 세력을 구가한 이후, 중국에 사신을 보내 일본이라는 나라를 동아시아에 각인시켰고, 한반도 남부를 점령해 200년 동안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여기서 고사기의 허황된 면을 발견합니다. 일본 천황가 이야기야 허구이든 진실이든 무시하면 되지만, 한반도 자체를 일본이 점령했다는 이야기는 우리로서는 이 책이 뭐하는 책인가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충분한 소재거리가 됩니다. (일본사 이야기 2편의 야마타이국을 참조하세요)

하권의 내용 요약 - 16대 천황 ~ 33대 천황

하권의 내용은 16대 천황에서 33대 천황까지의 내용입니다. 여기서 관심가는 부분은 이 하권의 주요 줄거리가 야마토 정권에서의 천황가 이야기라는 점인데, 야마토 정권은 일본의 소국들이 뭉쳐서 만든 지방 호족들의 연합국가였다는 점입니다. 천황은 그 연합정권의 수장 성격이었지요. 따라서 천황가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지방 세력과의 끊임없는 사투를 벌였고, 또 지방 유력 호족의 가문에서 천황이 나오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즉, 당시 호족가문과 천황가는 권력구도에 따라 상호 결혼을 하였고, 당시 남매간에 결혼까지 있었을 정도였기 때문에 유력호족가문에서 천황과 이어지는 핏줄만 있으면 그 기문소속의 천황을 배출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가장 유력한 가문으로 천황가를 휘어잡고, 불교를 수용하여 강력한 유력가문이자 천황가를 겸했던 가문이 바로 소가씨였습니다. (일본사 이야기 6 - 소가씨 이야기 참조) 특히 소가씨의 33대 천황인 스이코(소가노 아마코) 천황은 쇼토쿠 태자(소가노 쇼토쿠)와 함께 아스카 문화를 주도하면서 일본 문화의 전성기를 누립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이후 소가논 집단의 멸망 부분은 나오지 않고 끝납니다. 다이카 개신 이전까지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지요.

4. 그럼 일본 서기는 왜 편찬한 거야?

고사기가 편찬된 시기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일본서기가 편찬됩니다. 이 두 책의 공통점은 고대 신화부터 서술하여 고대 신화가 천황가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으로 서술 방향을 잡아 천황가에 신성성을 부여해 지방호족가문보다 우월함을 과시하고, 국민을 지배함에 있어 통치의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역사책의 차이점은 정사인가, 개인적 장서인가의 차이입니다. 고사기는 천황가가 개인적으로 보존할 개인적 장서이므로, 그 후속편이 없고, 이야기도 고대신과 천황가의 족보 연결차원에서 끝납니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당시 중국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하는 분위기에서 중국식 정사와 같이 공식적으로 편찬한 책입니다. 따라서 일본서기 이후에는 속일본기, 일본후기 등등이 계속 편찬되었고, 이러한 일본의 정사들을 한번에 묶어 <육국사>라고 부릅니다. 이 책은 중국사서와 마찬가지로 편년체입니다. 일본이 중세로 넘어가면서 이러한 육국사는 <신의 책>으로 여겨지면서, 심지어 역사가들까지도 이 책을 숭상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일본에서는 세계 2차대전 이전까지는 이 육국사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없이 그저 신성한 책으로서 이 일본서기를 바라보게 된 것이지요. 그 이유는 일본의 천황가의 영향력이 너무 거대하고, 신성화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문제는 그냥 신화수준인 고사기는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수 있지만, 정사인 일본서기는 우리 한반도의 역사서술 부분에서 우리나라 및 중국측의 기록과 너무 달라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일본서기가 우리 역사서 및 중국사서를 참조하면서 천황가에 불리한 부분은 삭제하거나 왜곡한 부분이 눈에 많이 띄는데, 일본측에서는 그 부분에 대하여 우리 역사서에 오류가 있다는 점을 주장합니다.

5. 그럼 일본 서기에 기록된 한반도 관련 역사의 논쟁점들...

신공황후기 설화 이야기도 연대 차이가 심하다.

고대 일본 천황가의 기록들은 기원후 150년 이전의 기록들이 우리 사서나 중국사서에 비해 그 연도차가 너무 큽니다.  

삼국유사의 연오랑, 세오녀 설화가 일본 서기에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삼국유사의 이야기에 나오는 세오녀는 잔잔한 사랑이야기 인데, 일본서기에서는 영웅의 면모를 가진 여걸로 나오죠. 그리고, 그들이 살았던 시기의 왕들이 서로 맞지 않습니다. 거의 50년 이상의 차이가 납니다. 우리 설화에 나오는 망부석 이야기도 삼국유사와 일본서기의 기록이 200년 이상 차이나고, 신라와 일본이 전쟁을 했다는 기록들을 살펴보면 맞는 연대가 거의 없습니다. 수많은 기록들이 거의 다 연대가 안 맞습니다. 대체 이 일본서기는 무슨 책을 근거로 연대를 상정한 것일까요?

신공황후의 신라 정복설

일본 서기 신공황후기에는 일본이 신라, 백제를 평정하고 고구려가 일본에 조공을 바쳤다고 합니다. 당시 상황으로 거의 말이 안되는 해석인데요. 또, 일본은 이 기록을 신빙성 있게 하기 위하여 광개토대왕릉비문을 위조하기도 했습니다.(이 이야기는 고구려사 편에 아주아주 자세히 기록할 것이구요, 또 광개토대왕릉비 전문을 한국사 사료방에 전문 다 옮겨 놓았습니다.)

즉, 광개토대왕이 백제와 일본을 공격했다는 비석 내용을 글자 몇글자 바꾸어서, 일본이 바다를 건너 신라를 정벌했다는 이야기로 완전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것을 통해 일본은 그들이 고대 한반도 남부를 200년간 경영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삼습니다. 미칠 노릇이지요.

칠지도 문제

칠지도 문제는 고대 한국과 일본사에서 큰 논점이 되는 문제중 하나입니다. 칠지도(일곱가지가 난 칼)라는 칼을 백제 부흥기 때 성왕이 일본에 전해주었는데, 이 전해주었다는 부분의 용어가 과연 <하사하였다>인가 <바쳤다>인가라는 해석을 둘러싼 논쟁입니다. 한자로 <공공>이라는 글자는 주었다라는 뜻인데, 이것은 해석하기 따라서 하사도 되고, 바친 것도 되거든요.

우리는 당연히 당시 역사적 상황으로 보아 백제가 일본에 하사한 것이라고 해석하지만, 일본에서는 이것을 당시 중앙집권화 하던 일본에 바친 것이라고 해석힙니다.

-----------------------------------

이러한 논점들을 살펴보면 고대 일본서기에서 최소한 신공황후기 이전의 기록은 믿을 것이 못된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일본 학자들도 일본서기를 볼 때, 신공황후기 이전의 기록은 잘 인용안하는 것이 최근의 추세라고 하는군요. 일본에서는 국가가 편찬한 정사에서 조차 고대 신화와 실제 역사가 섞여 있으니, 역사가들은 일본 사서를 읽을 때 그 내용을 잘 판단하고, 인용해야 할 듯 싶습니다.

이 글에서는 일본의 역사왜곡이나, 일본 사서의 문제점을 심도있게 따지지 않고, 그냥 객관적 시선에서 적었습니다. 그러나, 한국 고대사편에서 다룰 때는 조목조목 학술적인 근거를 들어 아주 신~~랄하게 비판할 예정입니다. 그렇다고 환단고기와 같이 신화적 성격으로 비판하지는 않을 것이며, 역사적 근거와 자료를 가지고 잘못된 점들을 구체적으로 따져보겠습니다. 이만 적고 공부하러 가야겠네요... 오늘은 휴가라 직장을 쉽니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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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교육제도

박사(博士)·조교(助敎)와 대사(大舍) 2인을 진덕왕 5년에 두었다.

- 삼국사기 38권, 잡지 7, 직관 상 국학 -

이찬 이사부가 아뢰기를 <국사란 군신의 선악을 기록하여 포폄(호평과 악평)을 만대에 보이는 것이니 역사를 꾸미어 두지 아니하면 후세에 무엇을 보고 알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그렇다 여겨 대아찬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널리 문사를 모아 국사를 꾸미게 하였다.

- 삼국사기 권 4, 신라본기 4, 진흥왕 6년 7월 -

참고글 :  신라의 교육제도와 사서편찬에 대한 근거가 되는 사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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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국사 편찬 - 거칠부

이찬(伊瑗) 이사부(異斯夫)가 아뢰기를, "국사(國史)란 군신(君臣)의 선악(善惡)을 기록하여 포폄(褒貶)을 만대(萬代)에 보이는 것이니 역사를 꾸미어 두지 아니하면 후세에 무엇을 보고 알겠습니까"라 하니, 왕이 그러이 여기어 대아찬(大阿瑗) 거칠부(居柒夫) 등에게 명하여 널리 문사(文士)를 모아 국사를 꾸미게 하였다.

- 삼국사기 -

사료해석 :  삼국시대의 역사 서술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천신의 후예라는 선민사상을 바탕으로 한 역사 서술입니다. 따라서 신화를 상당히 강조하여 기술하였습니다.

2. 왕실족보를 강조함으로서 귀족계급의 통치 이데올로기로서 역사를 활용하려고 하였습니다.

3. 자국의 전통을 이해하면서, 백성들의 충성심을 유도하기 위한 목적이 보입니다.

4. 초보적이며 부분적인 유학적 개념을 정치에 도입하여 원시유학과 한대유학을 한학(한문)으로 정리하여 인용합니다.

5. 사기의 형식을 도입하되, 군왕과 관련된 <본기> 위주의 역사를 서술하였습니다.

6. 중국사관과는 다른 명칭을 사용하였고, 고대 국가 정비 후 국가 팽창의 단계에서 저술되었습니다.

7. 샤머니즘적인 세계관이 내포되어 있으며, 역사세계는 하늘의 뜻을 받는 신성왕권을 세계관으로 저술하였습니다.

8. 삼국간의 관계를 고려하기 보다는 자국의 주체적 역사를 강조하는 유아독존적 역사의식으로 서술되었습니다.

고구려의 사서로는 유기가 있는데, 설화가 많고 미천왕 이전의 내용을 포함하여 삼국사기에 많이 인용되는 자료입니다. 이것을 영양왕 대 축소하여 이문진이 신집 5권으로 정리하였는데, 이는 수나라와 대립되는 상황에서 전통문화를 정리하려는 의지로 볼 수 있습니다.

신라의 국사는 거칠부가 편찬하였는데, 군왕의 잘잘못을 따지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고 율령정치의 정당성을 역설하는 내용도 들어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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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