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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2.28 수능 근현대사 정리 12 : 일제의 식민지 교육 문화 정책과 국학 운동 (2)

28. 일제의 식민지 교육, 문화 정책
 1) 식민지 교육 정책과 민족 교육 운동
  일제는 기본적으로 천황과 식민 통치에 순응하는 충실한 황국 신민을 육성하기 위한 교육 정책을 시행하였다. 우리가 일제 강점기를 3단계로 나누는 것처럼 일제의 교육정책도 크게 3차례의 개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우선 1910년대 무단통치기의 교육은 제1차 조선교육령(1911)에 근거를 두어 차별과 우민화 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일제는 사립학교의 축소, 보통학교의 수업 연한 축소, 중등 교육의 기회를 제한, 대학 교육을 금지함으로써 조선인에 대한 교육 기회에 차별을 두었으며, 학교에선 아주 기초적인 산수 정도의 최소한의 교육만이 행해졌으며 대부분은 실업, 기술 교육이 위주였다. 이러한 교육 실태는 식민지 공업화에 필요한 노동력을 양성하는데 중점을 둔 일제의 교육정책을 잘 대변해준다고 할 수 있겠다.

사료. 제1차 조선교육령(1911)
 제1조 조선에 있는 조선인의 교육은 본령에 따른다.
 제2조 교육은 충량(忠良 : 충성스럽고 선량한 ㅡ 작성자 주) 국민을 육성하는 것을 본의 로 한다.
 제5조 보통교육은 보통의 지식, 기능을 부여하고, 특히 국민된 성격을 함양하여 국어(일본어)를
        보급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6조 실업 교육은 농업, 상업, 공업 등에 관한 지식과 기능을 가르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제7조 전문 교육은 고등 학술과 기예를 가르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조선 총독부 관보, 1911

  일제의 우민화 교육도 우리 민족의 높은 교육열을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사립학교와 개량 서당은 일제의 우민화 교육에 맞서 근대적 민족 교육을 시행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 역시 일제의 탄압을 통해 사정이 어려워졌다. 일제는 사립학교와 개량 서당을 각각 사립학교의 축소와 서당규칙(1918)을 시행하면서 압박하였으며, 민족 교육의 주역은 점차 사립학교와 개량서당에서 야학이나 강습소로 넘어가게 되었다.

사료. 서당 규칙(1918)
 1. 서당을 개설하려고 할 때에는 도지사의 인가를 받아야 한다.
 2. 서당에서의 교과서는 조선 총독부 편찬의 교과서를 사용하여야 한다.
 3. 조선 총독부가 적격자로 인정하지 않는 자는 서당의 개설자 또는 운영자가 될 수 없다.
 4. 도 장관은 서당의 폐쇄 또는 교사의 변경, 기타 필요한 조치를 명령할 수 있다.
 * 추가사항 : 주요 사료가 아니므로 눈으로만 봐두자

  1920년대는 3.1운동의 영향으로 일제는 문화통치를 표방하게 되었다. 이는 교육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어 일제는 교육에 대한 차별을 누그러뜨린 유화 정책을 폈다. 일제는 제2차 조선교육령(1922)을 발표하고 이에 맞춰 우리나라의 학제를 일본식의 학제로 변경하고 일본식 교육을 강화하였다. 국민교육이 4 ~ 6년이 된 것도, 대학의 설립이 가능해진 것도 이 때였다. 또한 일제는 유화정책의 일환으로 보통 교육의 수업기간을 6년으로 연장하였으며, 1면 1교 정책으로 전체적인 보통학교의 숫자를 늘렸다. 조선어와 조선사를 필수 과목으로 지정하기도 하였다. 문화통치기의 일제의 교육정책은 언뜻 보기에 큰 선심을 쓴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과 조선을 동화하려는 의도가 짙게 깔려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설립된 경성제국대학은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견제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며, 1면 1교 정책으로 학교가 세워진 곳은 마을의 정신적, 문화적 근간이었던 곳을 허물거나 파괴, 개조하여 만든 것이었다.
  1920년대 민족 교육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야학이나 강습소로 계승되었다. 야학이나 강습소에선 기본적으로 역사, 조선어, 지리, 창가 등의 애국사상을 고취하는 내용이 많았으며 그 외에도 일반 지식을 확충하기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농민독본』,『경제학』,『노동산술』등의 실용 교과도 가르쳤다. 그러나 결국 1931년 만주사변을 계기로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자, 야학 역시 점차 쇠퇴해갔다. 민립대학 설립운동(1922), 6.10만세운동(1926), 광주학생운동(1929), 문맹 퇴치 운동(1920년대 ~ 1935)등도 1920년대 있었던 민족 교육을 위한 운동들로 이 때 역시 일제가 여전히 차별교육을 행했음을 알 수 있겠다. 결국 유화정책이라는 것도 허울만 좋은 것이었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안창남의 비행에 깊은 감명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과학교육에도 힘썼다.

Tip. 유화 정책과 동화 정책
 유화 정책 : 보통 교육 수업 연장, 대학 설립 가능
 동화 정책 : 서당 설립 허가제, 민립 대학 설립 운동 탄압

  만주사변(1931)과 태평양전쟁(1938)으로 전선(戰線)을 지나치게 확장시킨 일본은 조선을 하루빨리 일본의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고 조선에서 징병, 징용하기를 원했다.( * 참고 : 본래 식민지의 주민들은 도주나 반란의 우려 때문에 전쟁에 내보내지 않는다. 조선에서의 징병, 징용은 당시 일본의 상황이 얼마나 급박한 것인지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배경아래 발표된 제3차 조선 교육령(1938)은 조선의 국민들을 모두 황국 신민화를 시도(* 참고로 국민학교는 '황국신민학교'의 줄임말이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1990년대에 이르러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이름을 바꿨다.)하였다. 주된 내용으로는 조선어 사용의 금지, 조선어, 조선사 교육 금지와 중일전쟁 이후 대대적으로 실시된 군사 훈련, 그리고 강력한 민족 교육의 탄압 등이 대표적이다. 일제의 강압이 극도에 달해 민족 교육은 상당히 힘든 처지에 처해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2) 식민지 문화 정책과 국학 운동
  일제는 우리 민족의 자주성과 독창성을 부정하고 식민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조선사 편찬 위원회(1925년 이후 조선사편수회로 개편)의 『조선사』, 청구학회의 『총규학총』 등을 통해 식민사관을 만들어내었다. 일제는 타율성론, 정체성론, 당파성론, 일선동조론 등으로 우리 민족의 역사를 규정하여 폄하하였다. 이외에도 일제는 예술, 종교, 문학 분야에서 친일 인사를 육성하고자 노력하였으며, 청소년들에게 일본문화를 강제로 이식하고 복종하도록 강요하였다.

 Tip. 일제의 역사왜곡
  타율성론 : 조선은 외세의 간섭 없이 독자적인 발전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설
  정체성론 : 중세 부재론. 개항 당시 조선은 아직도 고대 수준 밖에 이르지 못했다는 설
  당파성론 : 조선시대의 붕당정치를 폄하하는 이론.
  일선동조론 : 일본과 조선의 조상이 같다는 이론. 단군이 일본 초대 천황의 동생이라고 주장.

  국학 연구는 크게 한글연구와 식민사관에 대항하기 위한 국사연구로 나뉜다.
  조선어 연구회는 1921년 이윤재, 최현배 등의 주도로 만들어졌다. 잡지 『한글』을 발간하고 지금의 한글날인 가갸날을 제정하여 한글 대중화에 앞장섰으며, 훗날 조선어학회의 뿌리가 되었다. 조선어 연구회는 조선어학회로 개편되면서 한글 연구에 더더욱 박차를 가한다. 조선어학회는 한글의 상용화를 위해 한글 맞춤법 통일안과 표준어를 제정하였다. 우리말 『큰사전』의 편찬을 시도하였으나 아쉽게도 실패하였다. 1942년 일제는 조선어학회를 독립운동단체로 규정하여 이윤재, 최현배 등을 강제로 투옥시킨 다음 조선어학회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를 ‘조선어학회 사건’이라고 한다.
  서양의 인문과학에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 역사학계도 많은 변화를 하게 되었다. 일제의 왜곡된 식민 사관을 타파하고 새로운 방법으로 새로운 전통을 만들고자하는 여러 시도가 나타나게 된다. 우선 신채호, 박은식 등으로 대표되는 민족주의 사학은 일제의 식민사관에 맞서 우리 민족성을 고취하고 주체적 발전을 강조하였다. 민족주의 사학1920년대 신채호, 박은식에 의해 그 기틀이 마련되었으며 민족의 고유의 정신을 강조하는 정신 사학으로,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연구가 진행되었다. 신채호는 우리 민족의 고유한 문화와 정신을 강조하였는데, ‘낭가사상’라는 고대 무인의 기상을 널리 강조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조선사 연구초』와 『조선상고사』가 대표적인데, 그는 『조선상고사』에서 ‘나(我)와 내가 아닌 것(非我)의 투쟁’을 통해 역사가 이루어진다고 여겼다. 박은식‘나라는 형(形 : 형태, 껍데기)이고 역사는 혼(魂 : 본질)’이라고 여겨 ‘혼’을 강조하였다. 그는 신채호와는 다르게 그가 살아가는 시대에 관심을 두었으며 그러한 관심은 『한국통사』,『한국 독립운동지혈사』등을 통해 나타났다. 정인보『조선사 연구』에서 ‘얼’을 강조하였고, 문일평은 『호암전집』에서 ‘심(心 : 마음)’을 강조하여 1930년대 민족주의 사학의 계보를 이었다.

Tip.
 신채호
  ~ 1910년 : 계몽사학의 선구자로 외국흥망사, 구국 영웅전기로 유명,
                비평인 「독사실론」을 통해 역사의 주체성을 주장
  1910년 ~ : 의열단의 『조선혁명선언』을 작성
                낭가사상 강조, 「조선사」의 고대부분을 엮어 『조선상고사』 발간
 박은식
  ~ 1910년 : 조선광문회에서 고전연구, 유교구신론을 발표하여 실천유학인 양명학을 독려
  1910년 ~ : 민족 ‘혼’을 강조, 『한국통사』,『한국독립운동지혈사』 저술

* 참고로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여기서 소개된 역사서를 읽지 않길 간곡히 바란다. 중요한 구절을 알아두는 것은 상관이 없지만, 특히 수능을 앞둔 수험생들에겐 별로 권하고 싶지 않다. 특히 국사를 하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고등학교의 국사교과서와 『조선상고사』에서 신채호의 서술은 사뭇 다른 정도가 아니라 완전 다르다.(예를 들자면 신채호는 고조선이 망한 뒤에 고조선의 유민이 세갈래로 나뉘어 남한에 정착한 것이 삼한이라고 한다.) 자칫 혼동할 수 있으므로 주의.

  사회경제사학사회주의의 사적 유물론(唯物論)에 입각하여 우리 민족의 역사가 세계사 발전의 보편성에 발맞추고 있음을 증명하고자 노력하였다. 백남운의 『조선 사회 경제사』등이 대표적이며 이러한 사회경제사학자들은 일제의 식민사관인 정체성론을 전면적으로 부정함과 동시에 실질적이지 못한 민족주의 사학을 비난하기도 하였다.

 Tip. 사적 유물론적 역사 발전 5단계설
 고대 노예제(귀족 - 노예) / 중세 봉건제(영주 - 농노) / 근대 자본주의(자본가 - 노동자) / 사회주의

  실증 사학랑케의 실증주의의 영향을 받아 실증을 통해 한국사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이병도, 이상백, 손진태 등의 실증주의 사학자들은 1934년 진단학회를 만들어 활동하면서 『진단학보』를 편찬하였으며 청구학회와 대립하였다.
   * 참고 : 훗날 진단학회는 일제와 타협하고 친일노선을 걷게 된다.(진단학회 회원 대다수가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마친 유학파였다.) 6.25가 끝난 이후 이들의 학풍이 우리나라의 학계를 지배하였으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진단학보』는 아직까지 출간되고 있다.

  문학 활동1910년대 계몽적 성격을 지닌 신소설이 등장하였다. 『혈의 누』,『금수회의록』과 최초의 현대소설로 불리는 이광수의 『무정』, 새로운 형식의 시인 최남선의 신체시 등이 있다. 1920년대는 낭만주의적이고 예술성만을 추구하는 『창조』, 『폐허』등의 동인지가 나오기도 하였으며 한편에는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아 신경향파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사회주의에 영향을 받은 문학가들은 카프(KAPE)를 결성하여 사회주의를 선전하였다. 이외에도 일제에 저항하여 시를 쓴 한용훈, 김훈, 이상화, 김소월 등이 있었다. 1930년대에는 일제의 광범위한 탄압으로 오로지 순수문학과 친일 문학만이 살아남을 수 있어서, 대부분의 문학가들이 붓을 꺾어나 변절하였다. 그 와중에도 이육사, 윤동주만이 주옥같은 저항 문학을 남겼다.
  예술분야는 영화, 연극, 음악, 미술 분야로 나눌 수 있다. 영화는 1910년대 신파극을 시작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여 1920년대는 나운규가 『아리랑』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이 역시 결국 1940년대 일제가 조선영화령으로 탄압하자 영화 사업은 시들해질 수밖에 없었다. 연극분야에선 토월회, 극예술 연구회 등이 활동하면서 연극에 대한 연구가 이뤄졌으나 중일전쟁 이후로 일제가 연극을 탄압하였다. 음악에는 홍난파, 현제명, 안익태 등이, 미술에선 안중식, 이중섭 등이 유명하였다.

Posted by 비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