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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

궁예를 통한 교훈 궁예를 통한 교훈 궁예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우리는 흔히 패주 혹은 혹세무민의 무능한 군주 혹은 광기의 왕, 미친 종교 지도자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대부분 궁예에 대한 기록은 삼국 유사와 삼국사기의 기록을 인용하기 때문이다. 그 외 다른 기록은 없기에 궁예에 대한 우리의 선입관은 고정 되어있는 것이다. 이것이 진실일까? 역사가라면 언제나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에 대한 문제제기를 해 왔다. 필자 역시 궁예의 실권에 대한 이유를 다른 시각에서 보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기록에 대한 의심으로부터 접근하려고 한다. 그러다보니 먼저 제시되는 문제가 위 두 저서의 신뢰성이다. 새 나라가 세워지면 역사편찬 작업을 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매우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리고 그 편찬에 있어 패.. 더보기
삼국사기 열전 궁예편 고려사 학습 사료 모음 삼국사기 열전 궁예편 ◈ 列傳 궁예 弓裔 新羅人 姓金氏 考第四十七憲安王誼靖 母憲安王嬪御 失其姓名 或云 “四十八景文王膺廉之子” 以五月五日 生於外家 其時屋上有素光 若長虹 上屬天 日官奏曰 “此兒以重午日生 生而有齒 且光焰異常 恐將來不利於國家 宜勿養之” 王勅中使 抵其家殺之 使者取於襁褓中 投之樓下 乳婢竊捧之 誤以手觸 其一目 抱而逃竄 勞養育 年十餘歲 遊戱不止 其婢告之曰 “子之生也 見棄於國 予不忍竊養 以至今日 而子之狂如此 必爲人所知 則予與子俱不免 爲之奈何” 弓裔泣曰 “若然則吾逝矣 無爲母憂” 便去世達寺 今之興敎寺是也 祝髮爲僧 自號善宗 及壯不拘檢僧律 軒有膽氣 嘗赴齋行次 有烏鳥銜物 落所持鉢中 視之 牙籤書王字 則而不言 頗自負 見新羅衰季 政荒民散 王畿外州縣 叛附相半 遠近盜 蜂起蟻聚 善宗謂乘亂聚衆 可以得志.. 더보기
원종과 애노의 반란 - 한국사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농민 반란 원종과 애노의 난 "한국사에서 볼 수 있는 기록상으로는 가장 오래된 최초의 농민 반란.... 민중이 새로운 세상을 추구하다." 통일신라 말기에 집권적인 지배체제가 서서히 무너지면서 중앙정부의 지배층 내부에서는 권력쟁탈전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중앙에서는 전골왕족의 왕위계승법칙이 붕괴되어 실력위주의 왕위 계승이 시도되었습니다. 거기에 폐쇄적 골품제와 고대적 수취제도의 모순으로 진골을 제외한 대부분의 계층이 불만이었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골품제 자체의 모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중앙귀족들은 단지 골품제도의 운영상의 문제로 생각하였다는 점입니다. 실제 신라말은 농업생산력이 발전한 시대였습니다. 북방의 간척사업, 예성강 유역 개발, 중국 선승들의 선진농법 수용 등 많은 사회적 변화가 있었지만, 골품제는 이것을 수용..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