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매일 역사퀴즈 (2010. 1. .12  화요일)

오늘의 출제 범위는 <한국사 3급 검정 문제> 입니다.

  - 반드시 컴퓨터용 수동 마우스를 사용해 주시고, 제출하기를 꼬옥~ 눌러주세요.
  - 점수와 후기를 댓글로 남겨주시면 다음 회 난이도를 조절할 수 있답니다.

1. 다음 그림을 보고 물음에 답하세요~

 

1. 위 그림과 같은 피난길에서 있었던 사실과 다른 것을 골라보세요.
①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소현세자를 전주로 내려보내고 자신은 강화도로 피난하였다.
② 정묘호란으로 조선과 후금은 형제의 맹약을 맺게 되었다.
③ 병자호란 때 소현세자가 피난한 강화도가 함락되자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화해를 하였다.
④ 청과 사대 관계를 맺은 후 효종은 북벌을 준비하였다.
⑤ 북벌을 위한 군대는 러시아와 함께 청나라를 공격하는 나선 정벌에 이용되었다.

 

2. 다음 그림을 보고 물음에 답하세요~

 

2. 위 지도와 같은 시기에 있었던 사실이 아닌 것은 무엇일까요?
① 조선에 표류했던 하멜은 네덜란드에 돌아가 하멜 표류기를 작성하였다.
② 김육은 서양식 달력인 시헌력 채택을 주장하여 실현시켰다
③ 소현세자는 아담샬을 만나서 천주교 신앙에 관한 책을 국내로 가져왔다
④ 정두원은 천리경과 자명종을 조선에 수입하였다
⑤ 김홍집은 황쭌셴으로 부터 조선책략을 수입하여 17세기 국제정세를 조선에 알렸다.

 

3. 다음 지도를 보고 물음에 답하세요~

 

3. 위와 같은 국제 정세에 대한 설명으로 틀린 것은 무엇일까요?
① 대성 : 백제가 마한땅을 정복하고 서남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한 시기였네
② 승리 : 낙동강에 진출해서 가야의 해상 교역에도 큰 타격을 주었겠군.
③ 탑 : 중국의 요서 지방과 산둥 반도에서 진출했잖아?
④ 태양 : 근초고왕의 고구려 공격으로 고국천왕이 전사했었어
⑤ 지드레곤 : 근초고왕이 왜 왕에게 하사한 칠지도는 백제의 우수한 철기문화를 보여주는 예로 볼 수 있지

 

4. 다음 지도를 보고 물음에 답하세요~

 

4. 위와 같이 세계적으로 제국주의 반대운동이 있던 시기의 조선과 주변 상황에 대한 설명으로 틀린 것을 골라보세요.
① 규리 : 조선에서 3.1 운동이 있던 같은 해에 러시아는 코민테른(제 3 인터내셔널)이 결성되어서 반제국주의 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지.
② 니콜 : 3.1 운동과 같은 해에 중국은 일본의 21개조 요구에 반대하는 5. 4 운동이 있었지, 아마?
③ 하라 : 당시 이집트의 반영운동은 수에즈 운하에 대한 소유권 문제와도 관련이 있었네.
④ 승연 : 당시 인도의 독립운동은 비폭력, 불복종을 지향했었잖아.
⑤ 지영 : 3. 1 운동은 세계 1차대전이 발생하기 전에 시작되었지?

 

5. 다음 표를 보고 물음에 답하세요~

 

5. 위 표에서 설명하고 있는 단체에 대해서 틀린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① 창민 : 이 단체는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를 계승하고, 베이징에 수립하였지.
② 윤호 :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이였고, 행정 기관으로 국무원을 두었잖아.
③ 유천 : 이승만의 외교론과 신채호의 투쟁론이 대립하면서 분열되었고, 창조론이 대두했었지.
④ 창민 : 개헌을 거듭할 수록 힘이 약해져서 결국 김구가 주석을 맡아 이끌어갔잖아.
⑤ 재중 : 우리 나라 최초의 민주 공화제 정부인데, 연통제와 교통국 등의 조직과 애국공채 발행 등을 통해 군자금도 마련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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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포스트 모던과 문화 코드 (5)

왜, 교과서는 무적이 되야 하는 것일까?

1. 교과서의 절대성

오늘은 21세기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포스트모던으로 <교육>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에 대해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많은 교사들이 포스트모던의 철학으로 <역사 교육>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한국 사회의 현실 때문이다. 입시를 위한 역사 교육이 우선시 되어야 하며, 입시에 강한 역사 교사가 우대받는 공교육에서 어떻게 <교과서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교육이 이루어진다는 것인가?

포스트모던의 역사 철학은 공교육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7차 한국사, 세계사 교과서의 첫 시작은 <역사란 무엇인가?>로 출발한다. 역사를 공부하면 삶을 윤택하게 만들 수 있는 다양한 지식을 쌓게 되며, 과거를 바라보는 눈을 갖게 된다. 이 과거를 바라보는 눈을 흔히 <역사적 사고력>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한단원을 지난 후에는 교과서에서 <역사적 사고력>은 변질된다. 단순한 사료들을 나열해놓고, 그 사료들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고 있지만, 해답은 교과서가 원하는 정해진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 틀 안에서 이루어진 정답이 곧 수능에서의 답이 된다.

교과서의 어투는 전혀 <사고력>를 키울 수 없는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교과서는 <A는 B라는 계층이 주도해서 C라는 결과물을 만들어낸 과거의 사건이다>는 식의 <정의>를 내리고 있다. 이미 정해진 문장에 답이 있는데, 더 이상 무슨 해답을 찾아내란 말인가?

한국의 공교육에서 교과서는 절대 불변의 진리이다. 그것은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결과물을 쉬운 표현으로 압축해서 적어놓은 것이며, 학생들은 그것을 비판할 권리를 갖지 못한다. 교사들은 교과서를 더 쉬운 말로 풀어서 설명하고 있으며, 역사의 인과관계를 논리적으로 제시하여 학생들을 <이해>시킨다.

결국, 학생들은 역사 수업을 통해 <역사란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

교과서를 읽고 나면 이런 결론이 도출된다. 역사란, 과거의 사건들 중에서 역사가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간추려놓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진리>이다. 역사가들은 대중을 위해 헌신적으로 <역사적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교과서는 철저히 중립적으로 기술되어 있기 때문에 그 내용를 적은 이가 누구인지를 전혀 밝히지 않는다. 교과서는 가장 객관적인 말투로만 구성되어 있다. 학생들은 교과서를 비판할 수도 없지만, 비판하고 싶어도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신>이 누구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란 무엇인가?>를 알고, 과거의 중요한 사실들을 알다는 것이 학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인 걸까?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부터 읽히는 공교육 제도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포스트모던으로 역사를 읽는 법이 필요한 것이다. 

2. 지식의 독점

교과서의 절대성에 대한 근거는 너무나 빈약하다. 역사를 기술하는 전문가 집단의 연구 성과를 검증한 것은 그들 스스로의 <학회>일 뿐이며, 그들의 주장 역시 하나의 <가설>에 불과할 따름이다.

7차 국사 교과서를 보자. 신라의 중앙집권은 <마립간>이라는 칭호를 쓴 내물왕때 시작되어, 점차 왕권이 강화되어 간다고 말한다. 고구려의 중앙집권은 태조왕때 시작되었고, 백제는 근초고왕 때 중앙집권이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거의 어느 역사책에 그런 말이 나오는가? <중앙집권>이란 말 자체가 편의상 역사를 규정하는 <연구가>들의 분류일 뿐이다. 각국의 역사는 독특힌 발전과정을 겪었다. 신라의 통일 얼마전 까지도 가야가 존재했지만, 누구도 4국시대라는 말을 쓰지 않고 3국의 통일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발해와 함께 남북국시대를 이루었다고 기술하면서도, 삼국통일이 자주적인 것이었다는 주장을 반복하면서 스스로 모순을 남기기도 한다.

조선시대를 이끌어간 노론 지배층은 교과서에서 상당히 아름답게 기술되어 있다. 이이가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다는 내용이 교과서에 강조되어 있지만, 왕조 실록이나 관찬 사서에 그런 기록은 없다. 송시열이 청나라 정벌을 위해 북벌을 주장했다고 하지만, 송시열은 실제로 내치주의(국내 안정)를 주장했다.

교과서는 실학의 주체로 <서울 근기에 사는 노론 자제>들이라고 서술한다. 그러나, 실학의 주요 인물이라고 교과서에 나오는 인물들은, 서얼을 포함한 정조의 규장각 출신들, 강화학파의 인물들, 성호학파의 인물들이다.  집권 노론파 자제는 어디에 있는가?

조선말 노론의 지배층이었던 역사가들은 일제 시대를 거쳐 한국 사회의 명성있는 교수님들이 되신 분들도 많다. 그 분들이 주장하는 역사적 연구 성과를 우리가 <절대적 진리>로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포스트모던 역사 교육은 <과거의 지식에 대한 독점>을 비판하고 있는데, 이러한 지식의 독점을 비판하는 학문을 지식사회학이라고 한다.

사실, <역사란 무엇인가?>를 아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역사를 만들어 가는 자들이 누구인가?>이다.

역사는 과거의 기록이고, 과거에 대한 진리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따라서 <절대적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과거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최대한 많은 과거의 기록들을 확보한 뒤, 그 과거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합리성>에 바탕을 두고 밝히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 합리적인 것인지는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과거가 만들어놓은 하나의 사건과 현상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개개인의 주관이 들어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10개의 과거를 10명이 학습한다면, 100개의 과거가 창출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과거를 독점한 자>들은 단 1개의 역사만을 진리인 양 포장한 뒤 나머지 과거들은 <근거없는 논리>로 만들어 버린다. 그 결과물이 교과서일 따름이다.

예를 들어보자.

모나리자의 그림이 있다. <다빈치>가 어떤 의도로 모나리자를 그린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모나리자의 미소를 다양한 관점에서 다양하게 해석한다.

그 그림을 자세히 보는 것부터 시작해서 미소의 각도와 색감, 원근법 등을 차례로 감상한다. 10명이 감상했다면, 그들은 각기 다른 감상평을 내 놓고, 그림을 평가할 것이다. 어떻게 모나리자에 단 하나의 감상평만 나올 수 있겠는가?

그러나, 역사는 그렇지 못했다. 어떤 사건에 대한 다양한 사료들을 교과서에 던져 놓고서도, 그 사건에 대한 평가는 첫째, 둘째, 셋째로 규정되어 있다. 삼국통일의 의의는 공부한 사람마다 다르게 느낄 것인데도, 왜 3가지 납득할 수 없는 정의만이 <진리>로 규정되야 하는가?

   삼국통일은 당나라의 도움을 받은 후 당나라를 몰아내었기 때문에 <자주적>인 통일이다 라는 것만이 진리인 양 규정해 놓고, 발해의 건국으로 실제로는 남북국시대였다는 기술은 또 무엇인가?

포스트모던은 역사가의 <상상>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를 따지게 된다. 그 결과, 역사를 규정해 놓은 지배집단에 대한 비판이 <역사가 무엇인지> 아는 것보다 우선시 되는 것이다.

3. 다양성에 대한 <교육>

포스트모던이 추구하는 역사는 <교실 구조>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한다.

교사가 교과서의 내용을 부정하지 않는 이상, 교실은 교사의 귄위에 의해 움직일 수 밖에 없다. 교사는 아이들보다 높은 지적 귄위로 학생들을 압박한다.

역사가들은 스스로의 이론을 정당화 시키기 위해 수많은 학회 토론을 통해 <논리적인 헛점>을 최대한 줄인 내용들을 교과서에 적어 두었다. 그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언어들을 교사가 설명할 때, 아이들은 교사의 설명 내용이 좀 이상하긴 해도, 반박하기는 쉽지 않다.

교사가 아이들의 사고력을 끌어낸다면서 아이들에게 질문을 한다고 해도, 결국 교사가 원하는 것은 <교과서>와 입시에 합당한 정답을 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이들의 사고력에는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

교사는 역사를 만든 지배집단의 충실한 대변인이 된다. 역사가들의 이론을 가장 쉽고 논리적으로 풀어내는 기능인이 역사 교사일 수 밖에 없다.

역사교사는 교과서의 역사 구조에 종속되어 있다.

고대, 중세, 근대, 현대라고 규정한 서양의 시대 구분법이 아직도 교과서의 시대 구분으로 활용되고 있지만, 한국의 교사는 다른 대안으로 시대구분을 할 수가 없다. 그리스 신화는 청소년 필독도서이지만, 단군 신화를 다르게 해석한 책들은 있는지도 모른다.

학생들은 상호 토론이 가능한 웹 2.0 공간에서는 저마다의 가치관과 역사관을 마음 껏 써내려가지만, 교실에 들어서기만 하면 입시에 필요한 역사적 지식만을 강제로 주입받는다. 웹 공간에서의 주장이 교실에서의 질문으로 전혀 이어지지 않는다. 하나의 사극을 보면서 수백개씩 글을 쓰고, 댓글을 달면서 토론하던 그 학생들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렇게 경직된 교실에서 <포스트모던으로 교육한다는 것>은 어떻게 해야 가능할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 교육의 목적 안에 <역사의 다양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학생들에게 인식시켜주면서 교사 자체가 권위를 버리고, 학생들의 다양한 사고를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역사는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과거를 연구한 누군가가 가장 합리적인 방법으로 <규정>해놓은 것이며, 새로운 발견이 있거나, 새롭게 사고할 수 있다면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해야 한다.

우리는 흔히 15세기 서유럽의 <대항해시대>를 몇몇 원인으로 규정한다. 이베리아 반도 국가들의 고립감, 왕자들의 모험심, 향료 무역을 통한 차액 증가, 나침반의 유입 등등...

   그러나 우리 교과서와 달리 서양의 학자들은 이런 의견을 내놓기도 한다. 당시 흑사병 이후 유럽의 경제난이 심각했으며, 서양 사람들에게 꼭 필요했던 대구, 참치, 고래 등 먹거리를 찾아 좀더 먼 바다로 나가다 보니 항해술이 발달한 것 뿐이라고.... 물고기들의 대륙간 이동경로가 항해 경로와 일치한 것이라고...

우리는 나폴레옹이 키가 작았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나폴레옹의 주적이었던 영국의 길이 단위는 프랑스와 달랐고, 영국이 의도적으로 자국의 단위를 활용하여 나폴레옹을 키작은 못난이로 만든 거라고...

역사적 사건이 존재한다고 했을 때, 그 사건의 원인과 결과는 단순히 하나일 수 없다. 수많은 원인 중에 중요한 원인과 덜 중요한 원인이 있을 것이고, 그 중요도를 판단하는 것은 그 텍스트를 보게 된 개개인의 몫이다. 교과서가 하나의 원인으로 규정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에서 <다양성>을 인정하는 교육 방침은 자유교육을 실시하는 외국의 여러 학교들에서 실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의 공교육에서는 감히 이러한 교육을 실시할 엄두도 못내고 있는 현실이다.

4. 교과서를 전면 부정할 수 있는가?

포스트모던으로 역사 교육을 할 때,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은 <교과서>를 부정한다고 했을 때, 어떤 역사적 사실을 가르칠 것인가이다. 사실 한국의 공교육에서는 <역사적 진리>를 부정한 채 교육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던으로 역사교육을 한다고 해서 <교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학생들에게 <진리란 상대적>인 것이며, 과거에 대한 <절대적 사실>은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절대적 사실을 진리로 적어놓은 교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실 교과서는 가장 좋은 <역사 교재>가 될 수 있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역사를 의도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역사에 있어 권력집단의 속성이나, 역사 해석의 다양성을 <교과서>를 통해 이야기해 줄 수 있다.

<교과서>에는 이렇게 씌여있지만, 이것과 다른 견해와 해석이 있다는 점을 주지시켜준다면, 교과서의 내용으로 교육을 전개하면서도 <역사적 다양성>을 끊임없이 학생들에게 설명해줄 수 있을 것이다. (공교육에서 이런 행동을 하면 좌파라는 소리를 듣게 되겠지만...)

입시교육에서 자유로운 대안적 교육을 추구하는 학교라면, 외국에서와 같은 포스트모던적 역사 교육이 가능할 수도 있다.

수업의 첫 단추는 <역사는 누구나 만들어 갈 수 있는 다양성을 내포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고대사 부분에서 여러 사료 등을 통해 다양한 해석을 추구하면서 <역사를 사고>하는 교육이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고대사에서 신화나 설화는 상상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소재이다.

우리는 선덕여왕을 보면서 사극이 아니라 <판타지>라고 생각하면서 보게 된다. 극적 긴장감이나 탄탄한 스토리 전개를 위해 역사적 상황과는 전혀 무관하게 작가의 의도대로 줄거리를 전개한다.

그러나, 포스트모던의 관점이라면 실제 역사에서도 그런 것들이 가능하다. 고대사에 남겨진 단편적인 기록으로 스스로 역사를 만들어 전개하거나, 있을 법한 (개연성 있는) 재연을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다른 역사적 사건을 바라볼 때, 비판적 읽기나 사료를 재구성할 수 있는 힘을 키울 수도 있다. (물론 선덕여왕의 미실궁주처럼 현대어를 쓰고, 21세기 인물의 성격으로 묘사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포스트모던적 교육이 기존의 모든 역사적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기록에 남겨진 역사적 사실들을 참고하여 그 시대상과 당시 인물들의 모습을 재창조하는 것이지, 모든 기록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단지, 포스트모던적으로 역사를 본다는 것은 그 과거 기록조차도 누군가의 의도 또는 목적으로 구성된 것이기 때문에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재해석해야할 대상으로 본다는 점이 다를 것이다.

특히, 일제시대 이래 현대사는 특정 역사관과 사관을 가진 이들이 사학계를 주름잡고 있다. 정치적 목적을 가진 이들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과시하기 위해 나름대로 합리성이 있는 <역사적 진리>을 만들어 왔고, 일제시대부터 특정 이념으로 살아온 이들은 그 이념에 맞게 <역사적 진리>을 구성해왔다.

현대사에서 포스트모던의 역사 교육은, 역사를 지배하고 기술한 이들의 목적과 방법, 내용까지를 비판하면서, 역사적 대상이 된 과거인의 입장과 역사를 서술하는 현대인의 입장을 고려해서 역사를 비판해야 한다.

그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공교육에서도 현대사 부분은 조심스럽게 간략히 원론적인 부분만 다루고 있으면서도, 이해관계 당사자들의 첨예하게 대립된 입장을 고려하고 있다. 포스트모던으로 비판하는 역사 교육은 그런 부분들에 과감히 뛰어들어야 하기 때문에 공교육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만약, 포스트모던적 역사 교육이 다른 외부적인 요인을 받지 않고 이루어진다면, 가장 좋은 교육 방안은 <교과서 창조>일 것이다.

먼저, 포스트모던적 이념을 가진 교사가 <진리의 상대성>을 인정하는 입장에서 하나의 <교재>를 만들고, 다양한 역사적 내용들을 통해 학생들에게 비판할 수 있는 자료들을 제공해준다.

학생들은 간단한 사료, 토론, 현장학습, 비디오 시청, 독서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교재의 내용을 이해한 뒤 자신이 생각하는 역사를 직접 작성해고, 서로 토론한 뒤 그 내용으로 <교과서>를 만들어보는 것이다. <교과서>를 만들어보는 과정으로 역사적 지식의 생성과정을 알고, 스스로 역사적 지식과 흐름을 창조하는 것이다.

단, 이러한 포스트모던적 수업은 고대사부터 현대사를 일관적인 논리 구조로 풀어 설명하는 통사 수업에는 미흡할 수 있다. 따라서 각 시대별, 주제별로 책정된 수업들을 전체적인 흐름으로 연결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오늘의 글은 가설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교육이 가능한 학교가 있다면 한번쯤 해보고 싶은 교육 방침이기도 하다. 물론 이론과 같지도 않을 것이도, 실패하고 고치고 할 부분도 많겠지만 기회가 된다면 한번쯤 시도해 볼 만한 일이 아닐까?

오늘 글은 포스트모던에 관련된 글들 중에서 가장 난잡한 글이었다. 다음 글에서는 문학 작품 속에서 볼 수 있는 포스트모던의 역사 코드에 대해 적어볼까 한다.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by 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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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경제 무역권이 우리 민족국가의 운명을 좌우하였다.

   <뒤집어 읽어보는 역사>는 역사적 사실일 수는 있지만, 정설로 인정된 내용은 아닙니다. 일부 사료의 파편으로 구성한 내용이거나, 아직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은 역사적 내용들을 가지고 구성한 페이지입니다. 정설이 아니니, 글에 대한 비판보다는 이런 내용도 있을 수 있구나 하는 측면에서 만든 카테고리라는 점을 이해하고 읽어주세요.


1. 고대의 전쟁을 왜 공성전으로만 보는가?

우리는 고대의 전쟁하면 동이족과 중국족의 싸움.... 고조선, 고구려 등 북방의 패자들과 중국 춘추시대와 수당으로 이어지는 중국 국가들간의 세력 다툼으로 이해하곤 합니다. 그리고 동북아 국가와 중원국가의 싸움에서 주목하는 것은 부여성 - 요동성 - 평양성 등으로 이어지는 공성전을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꼭 고대의 전쟁이 공성전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바다를 통한 전쟁 역시 항상 같이 전개되었으니까요. 그리고, 당시 중국과 우리 민족의 영역 사이에 바다라는 것이 역사에 씌여진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보고자 합니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일단 고조선과 고구려가 중국 민족과 항쟁을 벌인 경로를 보면 <교과서가 고대사에 대하여 상당히 부실하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교과서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교과서는 중고등학생을 위한 지침용 3차 사료이기 때문에, 이 부분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요구하는 만큼의 자세한 내용과 중요한 사료를 다룰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그럼 교과서에 빠졌거나, 1단어만 기술되어 빠져 버린 바다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일단, 우리나라의 서쪽 바다는 동해와는 달리, 서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서쪽 바다의 국제적인 공식 명칭은 <황해>입니다. 아니 왜, 동쪽 바다는 일본해도, 청해도 아닌 <우리 영토로서의 동해>이면서 서쪽 바다는 <황해>라고 해야되나요? 이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여기서는 역사적인 이유만 말해보도록 하죠. 동해는 고대부터 근대까지 우리가 지배권을 가지고 영향력을 행사하던 바다입니다. 일본이 동해바다에 대한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이후 에도 막부가 들어서면서 조선과의 관계가 대등한 관계라고 인식한 이후부터이고, 메이지 유신 이후 자국의 경제력이 성장한 이후부터입니다. 즉, 근대 이전까지 이미 역사적으로 <동해>는 우리 영역으로 자리잡았죠.

그러나 <황해>는 다릅니다. 이 바다는 중국민족과 우리 민족이 고대부터 주도권을 놓고 치열하게 다투던 바다였고, 이 바다의 주도권을 누가 잡는가에 따라 고대 천하관이 바뀌곤 하였습니다. 따라서 역사적으로도 이 바다는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주도권을 잡고 자국의 <영해>로 편입하기에는 껄끄러운 면이 있었던 바다였죠.

실제 고조선, 고구려와 대중국 항쟁은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것처럼 육로에서의 전쟁만이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중국의 한무제가 고조선을 공격할 때, 서해바다를 이용했고, 수, 당나라의 고구려 침공도 항상 바다를 경유하였습니다. 그리고, 황해바다라는 것은 실제 한, 수, 당이 우리 국가를 침공하였던 원인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럼 나라별로 차근히 보도록 하죠.

2. 한무제는 왜 고조선을 1년간이나 공격해야만 했는가?

중국과 고조선의 치열한 항쟁이 시작된 것은 중국 한무제 때부터입니다. 진시황제도, 한고조 유방도 고조선과 직접적인 대립을 하지 않았습니다. 진나라 이후 통일된 중국은 끊임없이 흉노 등 북방민족과 영역 싸움을 하였지만, 고조선과의 직접적인 큰 대립은 없었습니다.

중국과 고조선이 직접적으로 대결구도에 들어간 것은 위만조선 때부터입니다. 교과서에서는 위만조선이 들어서면서 고조선에 철기 기술이 도입되었고, 중계무역이 성행하였다고 나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이 바로 <중개무역>입니다. 위만 조선이 시작한 중개무역이란, 한반도 남부의 진국과 중국 한나라 사이에서 무역을 하여 그 차액으로 큰 이득을 보는 것을 말합니다.(중개무역이란 A국과 C국사이에서 B국이 물품을 운송해주고 중간에서 차액을 챙기는 것을 말합니다. 중계무역이란, A국의 물건을 B국이 자국에 가져와 가공하거나, 물품 표지를 한 다음에 C국에 넘기는 것으로 보다 적극적인 무역을 말합니다. 역사에서는 이 2가지를 구분할 필요가 없으므로, 그냥 합쳐서 중간무역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위만이 남방국가들의 물품을 중국에 교역하기 시작하면서 이용한 루트는 바로 <대동강>이라는 고대 상업 해상망이었습니다. 특히 위만조선 때 철기를 이용하여 정복사업을 많이 하였다는 기사도 대부분 이 대동강 유역의 루트를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리고, 대동강 루트를 통한 중개 무역은 위만조선이 곧 중국의 골치거리인 흉노와도 무역을 할 것이라는 예상도 가능하게 하는 했습니다. 보통 중국이 위만조선을 공격하여 멸망시킨 것을 <고조선과 흉노와의 차단>이라고 말하는데, 그 속사정에는 이런 경제적 문제가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중국 한나라는 고조선을 공격할 때, 단순히 요동성을 중심으로 육로로 쳐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육로에서는 좌장군이 침입하였고, 바닷길을 통해서는 누선장군이 대동강 뱃길을 통해 평양으로 직접 쳐들어오는 양동작전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리고, 고조선은 1년여간의 항쟁끝에 무너집니다.

3. 대동강 루트와 서해 북부를 일시 중국이 장악하다.

중국은 고조선을 멸망시킨 이후, 한사군을 설치하고 고조선의 영역을 한의 영역으로 끌어당겼습니다. 이 한사군은 현토군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고조선 멸망이후 나타난 조선유민들의 저항으로 거의 사라져 갑니다. 하지만, 끝까지 남아있었던 지역이 있었으니, 그곳이 대동강 연안의 <낙랑군과 대방군>이었습니다.

낙랑군이 중요하게 부각된 이유는 이곳이 바로 고대 황해안 루트를 이어주는 상업권의 맥으로서 그 중심지가 <대동강>이었기 때문입니다. 실제, 교과서와 개론서들을 보면 변한에 철이 많이 생산되는데, 그 철은 바닷길을 통해 낙랑군으로 수출된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금관가야가 대가야에게 주도권을 넘겨주게 된 이유중 하나가 바로 낙랑군이 고구려, 백제의 협공에 망하게 되면서 <중개무역 루트>를 잃었기 때문이라고 적혀 있지요. 즉, 금관 가야는 일본 - 가야 - 낙랑군을 이어지는 고대 상업 루트를 통해 발전한 나라였지만, 낙랑군이 망하게 되면서 그 교역 대상국을 일본 - 가야 - 백제로 바꾸게 됩니다. 이것은 고구려를 자극하게 되어 광개토 대왕이 일본, 가야, 백제를 동시에 격파하고 신라를 구원하게 되는 원인으로도 작용합니다. 이 정도면 이 당시 대동강 무역로가 역사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 알 것 같지요?

4. 백제와 고구려의 초기 싸움은 강과 강을 두고 무역권을 쟁탈하려 하였다.

이제 대동강을 일시 점령했던 낙랑군은 사라졌습니다. 이제 황해안 무역권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사라진 것이지요. 낙랑군이 멸망한 것은 백제, 고구려 군의 협공 때문이었고, 이들의 협공은 곧 영역 확보와 중국 민족 축출이라는 관점도 있지만, 고대 무역권 확보라는 관점도 있습니다. 낙랑이 사라져 서로 국경을 마주보게 된 백제, 고구려는 강을 사이에 끼고 큰 한판 전쟁을 시작합니다. 이들의 초기 전쟁은 한강 - 예성강, 재령강 - 대동강 이라는 황해안 루트를 두고 전쟁을 하였습니다.

먼저 주도권을 잡은 것은 백제였습니다. 4세기 백제 근초고왕은 고구려의 대동강 연안의 평양성까지 진격하여 고국원왕을 죽이고, 고구려의 해상 무역로를 장악해 버렸습니다. 보통 삼국시대의 4세기 하면, 근초고왕의 전성기로 왜 - 황해안 - 중국 남조, 북조 - 요서 점령 등으로 이어지는 고대 상업권 확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 상업권의 확보는 결국 당시 가장 중요한 고대 무역로인 대동강 연안과 황해안을 확보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5. 5세기 이후 황해안 무역권은 대동강이 아닌 한강을 두고 벌어졌다.

5세기 이후, 백제와 고구려의 공방전은 이제 한강을 두고 벌어집니다. 광개토대왕은 북방 영토를 확장하면서, 한강 이북까지 진출하였습니다. 백제는 수도인 한강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국운을 걸고 사투를 벌여 사수합니다. 대동강은 고조선의 중심지로서 정치, 경제, 문화의 선진지역이고, 평양평야와 바닷길을 이용할 수 있는 천연의 자원이었습니다. 반면, 한강 역시 백제의 중심지로서 김포평야의 농업중심지이자 정치적 중심지로서 그 가치가 말로 할 수 없었죠. 실제 황해안 유역의 금강 - 한강 - 대동강으로 이어지는 무역로는 모두 정치, 사회적 중심지였습니다. 사실 황해안 루츠를 이용할 수 없어서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지 못한 신라는 6세기 이전까지는 삼국간 항쟁에 끼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삼국 중 2- 3세기 가장 체제 정비가 빨랐던 나라가 백제인 이유도 활발한 중국과의 대외교역으로 경제적 성장과 함께 중국 정치제도를 빨리 인식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한강을 고구려의 장수왕이 차지하면서 삼국의 주도권은 순식간에 고구려로 넘어갑니다. 그리고 고구려와 백제의 경계는 이제 금강이 되어버립니다. 장수왕이 평양성으로 천도하면서 국가 기반은 고조선의 문화유산과 풍부한 물산이 집약된 대동강 연안으로 집중되었습니다. 그리고 한강은 남진정책의 전초기지가 되었는데, 그 가장 선봉지역이 남한강 하류의 충주지역입니다. 즉, 남한강 하류를 장수왕이 경영하면서 한강의 자원을 확보함과 동시에 백제를 견제하는 전초기지로 이용한 것이지요. 이것을 보통 개론서들에서는 <장수왕의 충주경영설>이라고 합니다.

6. 고구려의 무역권 독점과 반고구려 체제의 형성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장수왕의 영토 확장으로 대동강 무역권, 한강 무역권으로 이어지는 서해안 무역권을 장악하였습니다. 또, 북방으로 넓힌 영토를 통하여 말갈, 거란, 돌궐 등에 대한 무역로도 확보하였습니다. 이러한 고구려의 패권주의는 다른 국가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고구려에 우호적이었던 신라는 백제와 동맹을 맺었고, 그 동맹의 핵심 내용은 한강 무역권의 탈환이었습니다.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와 당나라는 고구려에 대한 적대감을 표출하였는데, 그 핵심적인 적대 이유는 흉노 이래 중국이 지배해오던 조공경제 무역 질서를 고구려가 빼았아갔다는 것에 있었습니다. 광개토 대왕 이후 고구려는 거란, 말갈, 돌궐 등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동북아시아 상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장수왕 이후 고구려는 확보한 광대한 상권을 지키지 못하고, 그 부산물을 차기 하기 위한 내분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신라에게 한강을 빼앗기게 되었고, 수나라에게 끊임없는 위협을 당하기 시작합니다.

고구려와 수의 전쟁은 요동성 등 공성전과 함께 대동강을 통한 바닷길 싸움도 동시에 이루어졌습니다. 수는 평양성을 직접 공격하려다가 을지문덕 장군에게 청천강에서 크게 대패하고 맙니다.(살수대첩) 이후 수는 지속적으로 고구려를 공격하였는데, 대군은 육로였지만, 실제 큰 격전지는 압록강, 대동강, 청천강 등 강 하류에서였습니다.

고구려에 대한 지나친 전쟁도 하나의 원인이 되어 수가 망해 버리자, 당나라는 고구려보다는 고구려와 무역을 통해 교류를 하고 있는 주변국들을 먼저 점령하였습니다. 서역의 경제권을 가지고 있던 돌궐 고창국을 멸망시키고, 거란과 말갈족의 주요 상업 중심지를 당이 장악하면서, 당은 다시 중국식 조공 경제 무역을 회복하였습니다. 고구려는 이러한 경제적 압력으로 인하여 친리장성을 축조하고, 연개소문이 대당강경책을 구사하기 시작합니다. 당은 고구려의 동북아 상권과 황해안 상권마저 빼앗고, 고구려를 멸망시키고자 하였지만, 안시성 싸움의 패배등으로 한걸음 물러섭니다.

7. 신라가 지키려고 했던 대동강 까지의 확보

당은 이후 나당동맹을 통하여 신라와 손을 잡고,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켰습니다. 나당동맹에서 신라가 요구한 것은 <대동강 유역까지의 영토 인정>이었습니다. 그것은 신라 진흥왕이 한강을 차지한 이후, 대동강까지 진출하여 황해안에 대한 전면적인 권리를 행사하겠다는 의도가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당은 고구려 멸망 이후 신라에게 대동강은 절대 줄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고, 이것은 결국 신라 전체를 복속하려는 당의 야심으로 <나당 전쟁>을 유발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신라는 끝까지 사수하여 대동안 연안을 확보하였지만, 당은 이후 150년 이상 <대동강이 신라의 영토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대동강 연안의 황해를 자국의 근거지로 생각합니다. 실제, 대동강 연안에서 중국의 동부지역까지는 많은 신라인들이 활동하고 있었고, 동부아시아의 가장 활성화된 무역로로서 많은 물자가 오가고 있었습니다.

대동강을 신라의 영토로 당이 인정한 것은 신라 성덕왕 때로, 당이 신라에게 대동강 무역권을 인정한 이유는 발해 때문이었습니다. 발해가 북방 상권을 장악하고 고구려의 뒤를 잇는 국가로 성장하자 당은 신라를 회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8. 해상왕 장보고의 상권 확보

그러나 8세기 이후 안사의 난 당으로 당의 국력이 쇠약해지고, 동북아의 상권과 황해안의 상권은 점차 깊은 혼란 속으로 빠져들어 갑니다. 이 때 중국 - 신라 - 일본과의 해상 루트를 장악하고 거대한 상권 루트를 재건한 인물이 바로 장보고입니다. 장보고는 청해진을 바탕으로 일본 - 신라 - 중국 동부의 상권을 움켜쥐었습니다. 신라원, 신라방, 신라소 등의 명칭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미 신라인들은 중국 동부 해안가에 무역로를 개척해두고 있었고, 장보고가 중국, 신라, 발해의 약세를 틈타 그 무역로를 완전 장악하여 <국가보다 더 큰 권력>을 확보한 것입니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장보고는 신라 왕실의 왕위 다툼 속에서 암살당하고 맙니다.

장보고가 죽은 시점은 곧 고대가 중세로 넘어가는 시기였습니다. 중국은 송으로 넘어가 중세가 시작되고, 한반도에서는 고려가 건국되어 중세가 시작되는 과도기였습니다. 일본 역시 전후 중세시대로 넘어갔으며, 고대의 영광을 재현한 발해도 이 무렵 거란에 망하게 됩니다.

이렇게 고대 상업권에 대하여 쭈욱 한번 적어보았습니다. 상업이라는 한쪽 시각에서만 적은 글이라 편협하긴 하지만 그냥 이런 관점도 있구나라는 점을 알리기 위한 글이었으니, 그런가 보다 하고 읽어주세요.

<뒤집어 읽어보는 역사>는 기존 관점과 다른 부분들이 있거나, 숨어있는 한줄의 문장이 눈에 띄면 정리해서 글로 만들어 보겠습니다.


- 이 글을 위해 참고한 역사도서 모음

1. 한국사특강, 서울대학교 출반부, 1991
  2. 한국사통론, 변태섭 저(4개정판), 1997
  3. 7차 교육과정 근현대사 교과서(대한교과서)
  4. 이야기 한국사, 교양국사연구회, 청아출판사, 1988
  5. 한국통사, 박은식 지음, 김승일 옮김, 범우사, 2006
  6. 누드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이투스, 2007
  7. 뿌리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 1권, 서의식, 강봉룡 지음, 2003, 솔출판사
  8. 한국고대사 산책,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분과 지음, 1992
  9. 한국역사입문 제 1권, 한국역사연구회 엮음, 도서출판 풀빛, 1979
  10. 한권으로 읽는 중국의 사상, 권순우 편역
  11. 동양사개론, 신채식, 삼영사(1993)
  12. 삼국사기(김부식), 삼국유사(일연), 7차 교육과정 국사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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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초기의 정복전쟁

온조왕 13년(기원전 6년) 8월에 마한에 사신을 파견하여 천도를 알리고 영토를 명확히 정하였는데, 북으로 패하에 이르고 남으로 웅천에 이르렀으며 서로 큰 바다에 닿고 동으로 주양에 이르렀다. 24년 7월에 왕이 웅천책을 만드니 마한왕이 사신을 보내 꾸짖어 말하기를,

<왕이 처음 강을 건너와서 살 만한 곳이 없어 내가 동북쪽 백리 땅을 떼어 주어 살게 하였으니 왕을 대우함이 두터웠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나라가 온전해지고 인민들이 모이니 나와 적대할 자 없다고 말하며 성지를 크게 설치하여 내 영토를 침범하고 있다. 이것이 어찌 의로운 일인가?> 라 하니, 왕은 부끄러이 여겨 그 책을 헐었다.

26년 10월에 왕이 군사를 내어 겉으로는 사냥한다 하고 몰래 마한을 습격하여 마침내 국읍을 병합하였는데, 다만 원산과 금현 두 성을 고수하여 함락하지 못하였다. 27년 4월에 두 성이 투항하여 그 인민들을 한산의 북으로 옮기니 마한은 마침내 망하였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1 -

근초고왕 26년(371)에 고구려가 군사를 일으켜 오니, 왕이 듣고 패하 강변에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오는 것을 기다려 갑자기 쳐서 고구려군을 패배시켰다. 겨울에 왕이 태자와 함께 정예병 3만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입하여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고구려왕 사유가 힘껏 싸워 막다가 화살에 맞아 죽으니 왕이 군사를 이끌고 왔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2 -

근구수왕 2년(377) 정월에 고구려에서 사신을 보내오니 왕은 고구려가 강성한 까닭으로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을 보내어 볼모로 삼았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2 -

사료해석 : 백제 초기 영토 확장에 대한 사료입니다. 백제 초기에는 미추홀 연맹 집단에서 점차 위례집단이 주도권을 잡으며 발전하였는데, 동예나 낙랑, 마한 내부의 투쟁을 통하여 발전하게 됩니다. 초기 세력은 토착세력고 고구려계 유이민 세력이 결합한 것으로 보이는데, 우수한 철기의 유이민이 지배층을 이룬 것으로 파악됩니다. 특히 한군현과의 투쟁 속에서 발전하였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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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의 아내 설화

도미는 백제 사람이다. 비록 소민이었지만 의리는 알고 있었다. 그의 아내가 매우 아름답고도 절행(節行)이 있어 사람들이 칭찬했다. 개루왕(백제 4대왕)이 이를 듣고 도미를 불러 이르되,  "대개 부인의 덕이 정결하다 하나 만약 으슥한 곳에서 잘 유혹하기만 하면 마음이 변하는 경우가 많다."

도미가 이르되, "사람 의 마음은 헤일 수 없사오나, 신의 아내는 죽을망정 딴 뜻은 없습니다."

왕이 이에 시험하고자 하여 도미를 잡아두고, 한 신하로하여금 왕의 의복을 입히고 말을 태워 그 집에 이르러 그 집 사람에게 먼저 왕이 왔다고 전하고, 그 아내에게 이르되, "내 오랫 동안 네가 예쁘다는 말을 듣고 도미와 더불어 내기를 하고 왔노라. 내일은 너를 들여 궁인으로 삼아 이후로는 나의 소유가 되리라."하고 드디어 어지러이 하려 한대,

그 아내가 이르되, "왕의 말씀을 내 어찌 어기리까. 대왕께서는 먼저 방으로 드소서. 나는 옷을 갈아 입고 오리라."

그리고 한 계집종을 단장시켜 들이었다. 왕이 그 뒤 속은 줄을 알고 크게 노하여 도미의 두 눈을 빼어 내 보내어 배에 태워 강에 띄웠다. 그리고 그 아내를 붙들고 놀려 할 때 도미의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내 이제 남편을 잃고 다만 한 몸으로서 누구를 의지하리까. 더구나 대왕에게 어찌 어기리까. 마침 몸이 더러우니 다음에 목욕을 하고 오리이다."

왕이 이를 믿고 말았다. 그 아내는 문득 밤에 도망하여 강에 이르러 통곡하였다. 별안간 배 하나가 이르렀는데, 이를 타고 천성도라는 섬에 가서 그 남편을 만나 고구려로 가 살았다.

- 삼국사기 열전 -

자료참조 : 이 이야기는  한갖 음탕한 임금이 여성에 대한 불신(不信)을 품고 미모의 유부녀를 겁탈하려다가 실패한 이야기이다.

음탕한 임금 개루왕은 천한 인생관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도미처의 재치, 도미처의 눈 뽐힘, 도미 부부의 기적적인 만남 등 극적인 사건의 연속이다. 따라서 [도미의 처]는 상당히 극적인 구성을 가진 단단한 이야기이다. 주제는 물론 '정절'이요, '열(烈)'이다.  이 이야기의 사실 여부를 떠나서 이 글에는 지배층의 횡포에 대한 하층민의 저항 의지가 드러나 있다고 하겠다. 이 설화는 후대 열녀(烈女) 이야기의 근원이 되었다. 열녀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아니한다(열녀불사이군)'는  도미의 아내의 정절은 후대 여러 문헌에 실리게 되는 각종 열녀 설화의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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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중국 정복

백제국은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천여리에 있었다. 그 후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하니 백제는 요서, 진평 2군을 차지하고 통치하였다.

                                                                                         - 송서 권 97, 이만열전, 백제국  -

그 나라는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에 있었다. 진대에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차지하니 백제 역시 요서, 진평 두 군의 땅을 차지하여 스스로 백제군을 두었다.

                       - 양서 권54, 동이열전, 백제 ; 남사 권79, 이맥열전(하) 백제 -

올해에(백제 동성왕 12년에) 위나라(북위 : 효문제 태화 14년) 오랑캐가 또 기병 수십만을 동원하여 복재를 공격하였다. 국경(요서의 백제영토)을 넘어서 침략하니, 모대(동성왕)는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 등 장군을 (요동으로) 보내어 무리를 이끌고 오랑캐의 군대를 습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 남제서 권 58, 동남이열전, 백제 -

고구려와 백제 전성기에는 백만 대군을 이루어 남으로는 오, 월을 쳐들어갔으며, 북으로는 연, 제, 노를 위협하여 중국의 큰 두통거리가 되었다.

- 삼국사기 권 46, 최치원열전 -

사료해석 : 이 사료들이 사실이라면 백제의 전성기 때 백제 역시 중국을 지배한 것이 됩니다. 특히 이 사료들의 가치는 중국 사료라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료는 중국에 의해 많은 반박을 받습니다. 그 내용은 이 사료를 적은 <송, 양> 등의 국가가 중국 남북조 시대의 남조로서 당시 북조와 대립한 상황이었다는 역사적 사실 때문입니다. 즉, 중국의 입장은 남조가 적대적인 북조를 멸시하기 위해 오랑캐인 백제가 북조 영역을 정복하였다는 허구적 사실을 사서에 적었다는 입장입니다.

반대로 신채호 등 우리 민족사학자들은 이것은 사실이지만, 중국 북조가 수치심에 적지 않아 남조의 기록에만 남았다고 주장합니다. 역사적 진실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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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노비

고구려왕 사유(고국원왕)가 보병과 기병 2만을 거느리고 와서 치양(황해도 백주)에 주둔하고 군사를 나누어 민가를 약탈하였다. 왕(근초고왕)이 태자에게 군사를 주니 곧장 치양으로 가서 고구려군을 급히 깨뜨리고 오천명을 사로잡았다. 그 포로를 장사에게 나누어 주었다.

                                                                                         - 삼국사기 -

가야가 배반하니 왕(진흥왕)이 이사부에게 토벌하도록 명령하고, 사다함에게 이를 돕게 하였다. 사다함이 기병 오천명을 거느리고 들이닥치니 일시에 모두 항복하였다. 공을 논하였는데 사다함이 으뜸이었다. 왕이 좋은 농토와 포로 이백명을 상으로 주었다. 사다함은 세 번 사양하였으나 왕이 굳이 주자 받은 사람은 놓아주어 영민으로 만들고, 농토는 병사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를 보고 나라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하였다.

                                                                                         - 삼국사기 -

사료해석 : 위의 지문은 삼국 시대 노비와 관련된 자료입니다. 7차 교과서 지문이지요. 전쟁이 빈번하던 삼국 시대에는 전쟁 노비가 많았으나 통일 신라 이후로 정복 전쟁이 사라짐에 따라 전쟁 노비도 소멸되어 갔습니다. 특수 지역에 예속된 사람들도 점차 양국화하여 일부는 양민이 되고, 일부는 노비로 전락하였습니다. 한편 노비 신분은 절대적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사다함의 예와 같이 노비에서 해방되어 양인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즉, 인도와 같은 엄격한 카스트적 신분질서가 아니였다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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