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우리는 일제에 의해 빼앗긴 빛을 되찾아왔다. 광복과 독립, 우리 민족이 약 34년 동안 갈망해온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한국사의 역사 구분에 의거하여, 흥선대원군의 섭정부터 일제 강점기까지를 근대사(近代史)로, 8. 15 광복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를 현대사(現代史)로 분류하고 있다. 물론, 그것은 편의를 위한 구별이며, 단순히 딱, 하고 끊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즉, 8.14은 근대이고, 8.15는 현대로, 갑자기 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대사적 특징에 해당하는 민중의식의 성장 등은 이미 근대 후반에 나타나서 발전하고 있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 Tip : 역사는 흐르는 것으로 칼로 무를 자르듯이 딱딱 끊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한 유명한 중국사학자인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 市定는 연대표에 '/' 대신 '~' 으로 연대를 구분했다고 한다.

29. 대표적인 건국 준비 운동의 성향과 건국 구상
  광복 이전부터 여러 독립운동 단체나 임시정부 등은 광복 이후에 만들어질 나라에 대해 구상하고, 실행하기 위하 노력하였다. 이런 대표적인 단체들은 김구가 이끄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김두봉의 조선 독립 동맹, 그리고 국내에서 여운형 등이 결성한 조선 건국 동맹들을 꼽아볼 수 있다.

 1)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임시정부의 위기를 구한 김구가 결성한 1940년에 결성한 한국 독립당으로 대표할 수 있다. 한국 독립당은 조소앙의 삼균주의에 의거한 대한민국 건국 강령을 발표(1941)하고, 이듬해인 1942년 나머지 조선 민족 혁명당의 군대인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에 가담하게 되면서, 바야흐로 군대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앞서 설명하였다.(* Tip : 무장독립투쟁 참고)
  조소앙의 삼균주의에 의거한 대한민국 건국 강령은 보통 선거(정치적 평등), 토지와 대생산 기관의 국유화(경제적 균등), 의무 교육(교육적 균등)을 주장하였다.

 2) 조선 독립 동맹
  중국 국민당의 부당한 처우에 불만을 품고 있던 조선의용대의 일부가 북상하여 화북지방에 있던 사회주의계열의 인사들과 함께 화북 조선 청년 연합회를 결성하였다. 이어서 조선청년연합회를 근본으로 화북에서 조선 독립 동맹을 결성하고, 그의 산하 군대인 조선 의용군(1942)을 조직하였다.
  이들은 보통선거에 의한 민주 정권(공화정)을 수립하고, 일제가 관리했던 재산과 토지를 국가에서 몰수하여 관리하며(국유화), (하루) 8시간 노동제, 의무 ․ 무상 교육을 주장하였다.

 3) 조선 건국 동맹
  조선 건국 동맹은 국내에서 여운형이 결성하였다(1944). 국내에 있었기 때문에 광복 이후 재빠른 활동이 가능하여,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로 확대하여 전국에 지부를 설치하고, 자주적으로 질서를 유지하는데 힘썼다. 또한 그들은 일제의 망령을 타도하고, 민주주의의 원칙에 의거하여, 노동자와 농민을 해방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 참고 : 사회주의라고 해서 무조건 독재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본래 사회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진정한 자유와 해방으로 가는 과도기로 인식한다.)
  이들은 조선 인민 공화국을 선포하고 인민 위원회를 설치하였으나, 이러한 자주적 건국을 위한 노력에 미군정은 콧방귀도 뀌지 않고 무시해버렸다. 또한 지도부가 좌익 중심으로 선출됨에 따라 대다수의 우익인사는 단체를 떠나기도 하였다.

Tip. 건국 준비 주요 단체 주장의 공통점
보통선거에 의한 민주 공화제 정부 수립
주요 생산 수단의 국유화

(사료1) 임시정부의 대한민국 건국 강령
  2. 삼균 제도를 골자로 한 헌법을 실시하여 정치와 경제와 교육의 민주적 시설로 실제상 균형을 도모하여 전국의 토지와 대생산 기관의 국유가 완성되고 전국 학령 아동 전부의 고급 교육의 무료 수학이 완성되고 보통 선거 제도가 구석 없이 완전히 실시되어(이하 생략)
  6. 다음에 열거한 기본 원칙에 의거하여 경제 정책을 집행함.
   가. 대생산 기관의 공구와 수단을 국유로 하고 토지, 광산, 어업, 농림, 수리, 소택과 수상, 육상, 공중의 운수 사업과 은행, 전신, 교통 등과 대규모의 농, 공, 상 기업과 성시(城市), 공업 구역의 공용적 주요 방산(房産)은 국유로 하고 소규모 및 혹 중등 기업은 사영으로 함.

(사료2)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의 선언과 강령
  (전략) 조선 전 민족의 총의를 대표하며 이익을 보호할 만한 완전한 새 정권이 나와야 하며 이러한 새 정권이 확립되기까지의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본 위원회는 조선의 치안을 자주적으로 유지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조선의 완전한 독립 국가 조직을 실현하기 위하여 새 정권을 수립하는 한 개의 잠정적 임무를 다하려는 의도에서 아래와 같이 강령을 내세운다.
 
  강령
   1. 우리는 완전한 독립 국가의 건설을 기함.
   2. 우리는 전 민족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기본 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민족주의 정권의 수립을 기함.
   3. 우리는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국가 질서를 자주적으로 유지하며 대중 생활의 확보를 기함.

30. 광복과 광복 이후 남북한의 정세
 1) 광복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이하기 전부터 많은 열강들이 우리나라의 일제로부터 독립을 여러 차례 협의한 바가 있다.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우리나라의 독립이 최초로 거론되었으며, 2차 대전이 끝난 1945년 포츠담 회담에서 그 의견을 재확인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회담들은 우리나라의 자주적인 독립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자주적인 방법(한국광복군의 국내 진공 작전)을 통하지 않아, 우리나라가 광복에 대하 수동적인 입장이 될 것이라던 김구의 예상이 적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김구의 견해는 후에 미 군정기에도 맞아떨이지고 만다.
  1945년 8월 15일, 무수한 노력 일제로부터 우리나라는 해방되었다. 이후 여운형, 안재홍 등의 조선 건국 동맹은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로 확대되어 자체적으로 질서유지에 나선다. 하지만, 미국이 광복 이후에도 남아있던 일본군의 무장해체를 구실로, 소련과 협의하여 38도선을 경계로 분할을 제안하였고, 소련도 이를 승락하였다. 이는 훗날 분단의 계기가 되었다.

 2) 광복 이후 남북한의 정세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각각 점령하게 된 미국과 소련은 군정(軍政)을 통해 한반도를 통치하였다. 하지만, 미국과 소련의 군정은 판이하게 다른 통치양상을 보였다.
  우선 남한에 군정을 설치한 미국의 경우,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한국인의 노력을 일체 부정하였다. 여운형의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가 선포한 조선 인민 공화국도, 김구의 임시정부도 미국은 정식 정부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중국에 있었던 임시정부계열의 인사들은 정부단체의 자격이 아닌 개인의 자격으로 국내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반면, 미군정은 앞서 한반도를 강제 점령하였던 일본의 총독부 체제를 유지하여, 온갖 친일 인사들이 다시금 등용 되는 상황이 빚어지기도 하였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겪고 있는 불완전한 과거사 청산에 불씨가 되었다. 또한 미군정은 친미파로 변모한 친일 인사들(친일 기업가, 지주 : 송진우, 김성수 등) 등으로 구성된 한국 민주당을 지원하여 친미 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 당시에 남한에는 우익세력 이었던 김구의 한국 독립당과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독립 촉성 중앙 협의회, 중도 좌파였던 여운형의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와 박헌영의 조선 공산당이 있었으나, 미군정은 이들을 무시당하였다. 특히 조선 공산당은 미군정의 탄압으로 인해 위기를 겪기도 하였으나, 남조선 노동당(남로당南勞黨)으로 개편 등의 위기를 모면하고자 했다.
  미군정은 앞서 말한 것처럼 일제의 식민 통치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들을 다시 등용하였고,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도입하려 하였다(고는 하지만, 거의 식민통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의 직속기관인 ‘신한회사’를 만들어, 그동안 일본인에게 소유되었던 재산을 관리하였다.( * 참고 : 일제의 동양척식 주식회사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신한회사는 일본인 지주에게 넘어갔던 토지들을 몰수하여 소작농에게 1/3의 값싼 소작료에 지급하고, 지주가 일방적으로 소작 계약을 깨뜨리지 못하도록 하였다. 농민들은 직접적인 토지 개혁과 소작료의 추가 인하, 그리고 금납제를 요구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고, 갈등은 겪었다.
  미군정은 미곡 자유화 정책 등을 통해 자유 자본주의 시장을 도입하려 하였으나, 상인과 지주들에 의해 매점매석으로 인해 미곡과 물가가 폭등하였다. 후에 1946년 1월 미군정은 미곡 수집령을 발표하여 쌀을 거둬들이려고 하였으나, 춘궁기에 생산비도 안떨어지는 허접한 가격으로 쌀을 사들인다는 그들의 방침은 농민들과의 갈등을 커져만 갔다.
  또한 실업자의 증가 등의 문제로 미군정의 대한 여론이 나빠지자 1946년 9월 미군정에 반대하는 철도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일어났다. 이것이 더욱 발전되어 대구 등 여러 민중 봉기로 이어졌으며, 전국적인 규모로 까지 확대되었다. 이들은 쌀 공출과 식민지 교육의 철폐, 토지 개혁, 미군정 퇴진을 요구하였으나, 경찰과 우익 청년단체에 의해 무력으로 진압되었다.

  북한에 주둔하던 소련군의 군정은 미군정에 비해 한국인의 자치를 허용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완벽한 것은 아니여서, 조만식 등이 있던 평남 건국 준비 위원회를 해체해야만 했다. 대신,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추대한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를 결성(1946)하고, 이 인민 위원회를 통해 부분적으로 자치를 할 수 있었다.
  북한은 소련 군정기에도 많은 개혁을 단행할 수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무상몰수 ․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이었다. 이는 가히 혁신적인 것으로,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개혁에 반대를 하였던 유산가 계층은 남쪽으로 이주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무상분배 된 토지는 개인의 소유였기 때문에, 아직 완벽한 사회주의는 완성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주요 생산 시설을 국유화하였으며, 남녀 평등법을 제정하였다. 또한 북한은 이 무렵 친일 청산을 단행할 수 있었다.

Tip. 정치 양상
좌익 : 박헌영, 김일성
중도 좌익 : 여운형, 김원봉
중도 우익 : 김규식, 안재홍
우익 : 이승만, 송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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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회원
17. 1910년대 국내외 민족 운동 
 1) 국내의 민족 운동(비밀결사) 
  일제의 남한 대토벌(1907)로 인해 국내에선 실질적인 의병활동 및 항일 운동의 전개가 곤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국내에서의 항일 활동은 비밀 결사의 형태로 전개된다. 1912년 임병찬이 고종의 밀지를 받고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던 의병을 규합하여 만든 독립 의군부는 국권 반환을 위해 편지 등을 통하여 국제 사회 및 일본을 향해 요구하였다. 또한 의병 투쟁을 계획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고종의 명령을 받아 결합된 비밀 결사였으므로 주된 목표는 황실의 부활, 즉 복벽적인 것이었다(왕실부활, 복벽주의).
  또한 대한 광복회군대식 조직을 가진 비밀 결사독립운동, 무관학교 설립비 등을 모금하였다. 공화정을 주장하였으며, 그 유명한 김좌진 장군이 속해있었던 단체이기도 하다. 독립운동, 무관학교, 김좌진 등의 키워드에서 읽을 수 있듯이 독립 전쟁을 통한 국권 회복을 주장하였다.
  여성 비밀 결사 조직인 송죽회와 조선 국권 회복단, 자립단 등이 있다.

 2)
해외 독립 운동 기지 건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국내에선 실질적인 항일 운동이 불가능 하였다. 때문에 해외에서의 독립 운동이야 말로 진정한 무장 독립 투쟁의 대안이었다. 해외의 독립 운동 기지는 크게 만주, 연해주, 상하이, 미주, 네 곳으로 나눠볼 수 있다.
  만주 역시 서간도 북간도 북만주로 나눌 수 있는데, 서간도에는 삼학사의 경학사(후에 부민단으로 개칭), 신흥 무관학교, 대한 독립군, 서로 군정서 등이 대표적이다. 북간도에는 중광단(후에 북로 군정서으로 개칭, 김좌진 장군), 서진서숙(후에 명동학교로 개칭) 등이 있었고, 북만주에는 1921년 대한독립군단이 결성하게 되는 한흥동(韓興洞 : 한족이 흥하는 동네)가 있다.
  연해주 지방에서는 성명회, 권업회와 같은 항일 결사를 비롯하여 유인석의 13도 창의군(정미 의병의 이인영의 13도 창의군과 다름, 주의), 대한 광복군 정부(1914, 이상설), 대한 국민 의회(1919, 손병희, 무장독립론) 등이 있었다.
  상하이에는 신한 청년당(1918, 안창호, 외교독립론)이 후에 상하이 임시정부의 모태가 되었으며 미주에는 대한인 국민회(1909, 안창호, 이승만), 하와이에서 박용만이 조직한 군대인 조선 구민군단(1914)이 있다.

18.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1) 3.1 운동
  1차 세계대전 이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1918년 만주 길림에서 발표된 무오독립 선언서, 1919년 도쿄에서 발표된 2.8 독립 선언이 촉매가 되어 이윽고 1919년 3월 1일. 역사에 길이 남을 3.1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본래 민족 대표 33인이 주도하기로 하였으나, 그들이 중국집에서 임의로 선언서를 낭독하고 자수해버리는 바람에 계획된 일정에 차질이 생기기도 하였다. 기다리던 학생들과 종교인 등은 계획되로 진행이 되지 않자, 스스로 기미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시위를 시작하였다. 처음 운동이 시작했을 때는 참가자들은 학생, 종교인, 지식층으로 구성되어 비폭력주의를 표방하고 힘차게 태극기만 휘날렸지만, 점점 3.1운동이 지방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의 영향으로 상인, 노동자, 교사, 학생, 농민 등이 참여하였다. 일제는 무자비한 탄압을 했고, 견디지 못한 사람들은 무력으로 투쟁하기도 하였다.(* 추가사항 : 특히 농민들 같은 경우 전에 실시되었던 토지조사사업 등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그들의 일본에 대한 불만은 높을 수 밖에 없었다.) 운동이 점점 진행함에 따라, 상대적으로 농민 등의 참여가 두드러지게 증가한 다는 것도 알 수 있다.
  3.1운동은 운동은 3.1운동 그 자체보다 3.1운동이 가져온 결과가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일단, 일제의 통치 방식이 무단통치에서 소위 '문화통치'라고 불리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이번 3.1운동을 통해 하나의 통일된 독립운동 관리조직이 필요함을 절감하였고, 이로 인해 임시정부 수립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 국내에선 실력양성운동이, 국외에선 무장독립투쟁이 활성화하게 되었으며, 사회주의의 영향으로 독립 운동이 대중화 되기도 하였다.

 2) 대한민국 임시정부
  3.1운동의 영향으로 몇몇 개의 임시정부가 생겨났다. 무장독립투쟁 노선을 걷고 있던 대한 국민 의회연해주에 있었고,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한성 정부국내에, 안창호가 외교활동을 위해 만든 훗나 임시정부가 되는 신한청년단상하이에 있었다. 이러한 3개의 임시정부를 안창호가 '임시 정부 통합안'을 발표함으로써 이들 임시정부가 합쳐져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상하이에 자리잡게 되었다.

▷ 한성 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
 -> 한성 정부의 조직과 인선을 계승한다는 것은 한성 정부가 한성에 있었다는 것을 특별히 인정한다는 것이다. 이승만이 임시정부의 대통령이 된 것도 이 때문이다.(물론 노인네라서, 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위치는 상하이로 한다.
  -> 외교독립론(외교 > 무장) / cf. 만주, 연해주는 무장 투쟁론

 
임시정부는 비밀 행정 조직이었던 연통제와 통신을 담당했던 교통국을 통해 활동하였다(행정). 만주에 이륭 양행, 부산에 백산 상회 등과 함께 애국 공채 발행으로 군자금을 조달하였으며, 군대조직으로는 육군 주만(住滿 ; 만주에 있는) 참의부와 훗날 만들어지는 광복군 사령부, 광복군 종영, 한국 광복군이 있다(군사). 파리 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였고, 미주엔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구미 위원부를 설치하여 외교 분야에서도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독립 신문(독립 협회의 독립 신문과 이름만 같지 내용은 다르다)과 사료 편찬소 등을 설립하는 등 문화적인 면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일제의 탄압은 계속되었으며 연통제와 교통국이 일제에게 파괴되기에 이른다. 또한 실리 없는 독립운동이라며 외교독립론이 비판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험학한 분위기 가운데, 우리의 이승만은 또라이짓을 잊지 않았다. 이승만이 국제연맹과 미국에 위임 통치 청원을 한 사실이 독립운동가 사이에 알려지자, 독립운동가들은 국민 대표 회의를 긴급소집하고 과연 독립운동은 이대로 괜찮은가, 라는 명제로 머리를 맞댄다. 이에 임시정부를 개편하자는 외교독립론, 실력양성론자들(개조파)과 아예 새로 뜯어 고쳐야 된다는 무장독립투쟁론자(창조파)들이 대립하기에 이른다. 끝내 창초파는 임시정부를 탈퇴하게 되고 이승만 역시 대통령 자리에서 탄핵되었다. 임시정부는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지도 체제를 개편하고, 김구가 사(私)조직인 한인 애국단을 조직(1926)하였다. 하지만 오히려 이러한 노력은 임시정부의 내부분열이 얼마나 심했는지, 임시정부의 상황이 얼마나 안좋았는지 새삼 깨닫게 하는 바이다.


 Tip. 독립 운동론

  1. 무장 투쟁론 : 일제와의 독립 전쟁을 통해 독립을 얻어내자는 노선

   -> 신채호, 이동휘, 손병희 등

  2. 실력 양성론(준비론) : 힘을 길러 독립 전쟁을 준비하자는 노선

   -> 안창호

  3. 자치론 : 일제 지배하에서 자치를 얻자는 노선 -> (삐꾸) 이광수, (찐따) 최린

  4. 외교독립론 : 국제 연맹이나 미국 등 강대국의 도움으로 독립을 얻자는 노선

   -> (또라이) 이승만

  5. 계급 투쟁론 : 계급 투쟁을 통한 일제의 지배 계급 타도(사회주의계) -> 박헌영

 19. 의열 투쟁
 1) 의열단 
  3.1운동 이후 무장투쟁의 필요성이 대두되자, 김원봉과 윤세주 등이 만주 길림에서 비밀 결사인 테러조직을 조직하게 된다(1909).
  신채호의 「조선 혁명 선언(외교론, 자치론, 준비론 등을 비판하며 민중의 직접 혁명을 촉구)」을 행동 지침으로 삼아 김익상(총독부에 폭탄 투척), 김상옥(종로 경찰서에 폭탄 투척), 나석주(동척에 폭탄 투척) 등이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하지만 비밀 결사의 한계를 인식하고 독립 운동에 중추적인 역할을 할 정당(政黨)과 군사조직으로 거듭나기 위해 의열단원 전체가 중국의 황포 군관학교에 입학하여 훈련을 받았으며 조선 혁명 간부 학교를 설립(1932)하기도 하였다. 후에 김원봉은 조선 민족 혁명단을 결성(1935)하고, 조선 의용대를 창설(1937)하여 항일 운동의 최전방에 나섰다.

 2) 한인 애국단
  국민 대표회의 이후로 침체된 임시정부의 재활을 꿈꾸며 김구가 조직한 사조직이다. 이봉창(일왕의 마차에 폭탄 투척), 윤봉길(훈커우 공원에서 폭탄 투척) 등이 대표적이며, 특히 윤봉길의 의거는 중국인들의 의식을 바꾸는 기폭제 역할을 하여 중국 국민당는 그들의 영토 내에서 무장 독립 투쟁을 하도록 허락해 주었다. 또한 국민당은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도 적극적으로 하게 되었다.


Tip. 의열단과 한인 애국단의 비교

 의열단 : 국내에서 활동

 한인 애국단 : 외국에서 활동

 20. 무장독립투쟁의 전개
  순서, 장소, 전투를 승리로 이끈 대장, 혹은 대표자 등은 꼭 알아두자. 요즘 많이 나오는 추세다(거의 2문제 정도).
  1920년, 포수 출신의 의병장이었던 홍범도대한 독립군이 일본군을 북간도 지방의 봉오동에서 대파하였다. 분노한 일본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은 간도 훈춘에 있던 군벌에게 자국 공사관에 불을 지르고 난리를 부리도록 자작극을 의탁하였다. 이것을 '훈춘 사건'이라 하는데 이로 인해 일본은 간도로 대규모의 병력을 옮길 수 있는 구실을 얻게 되었다.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는 일본의 이러한 움직임을 간파하고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과 연계하여 청산리에서 큰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이번에도 참패를 겪게된 일본은 간도참변을 일으켜 보복(1920)하였고, 간도에서의 독립운동은 좌절되어 독립군들은 북만주에 있는 한흥동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대한 독립군단을 조직하게 된다.
  대한 독립군단을 조직한 독립군은 소련령으로 들어가 독립전쟁을 전개하고자 하였으나 소련의 내란에 휘말려 변을 당하게 된다(자유시 참변, 1921). 수많은 독립군이 죽어갔으며, 살아남은 독립군들은 다시 만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만주에 돌아온 독립운동가들은 참의부(대한민국 임시정부 직속부대, 1923), 정의부(1924), 신민부(1925), 소위 3부를 성립하게 되며 민정(民政)과 군정(軍政)을 아우르는 자치 정부가 생겨나게 되었다.
  일제는 이것 마저 만주 군벌과의 미쓰야 협정(1927)을 통해 독립군에게 현상금을 걸고 만주 군벌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하였다. 이에 독립군들은 3부를 지역중심으로 통합하여 남만주에는 국민부북만주에는 혁신의회를 세웠다. 후에 국민부혁신의회는 각각 조선 혁명당과, 한국 독립당으로 발전하여 휘하에 양세봉 장군이 이끄는 조선 혁명군지청천 장군의 한국 독립군을 두었다. 단체의 이름으로 봐선 다분히 사상을 중심으로 통합한 듯 하나, 실은 사상과 관련없이 지역 중심으로 통합되었다는 걸 간과해선 안된다. 그렇기 때문에 3부의 통합은 민족 유일당 운동의 하나로 손꼽는다.
  1931년 일제가 드디어 대륙 침략의 야욕을 노골화하여 만주를 침략하고 괴례국인 만주국을 세웠다(만주사변). 만보산 사건(한중 물꼬 싸움) 이후로 민족 감정이 좋지 않았던 중국과 한국인 사이가 만주 사변 이후 상호 협력적인 형태로 바뀌어가며 윤봉길 의사의 서거 또한 한 몫하여 한중 연합작전을 가능하게 하였다. 한중 연합작전에선 앞에서 만들어진 조선 혁명군과 한국 독립군의 활약을 하게 되는데, 조선 혁명군은 중국 의용군과 연합하여 영릉가, 흥경성 등에서, 한국 독립군은 중국 호로군과 연합하여 쌍성보, 대전자령 등에서 연합하여 일제에 대항하였다.

  1935년 의열 투쟁의 한계를 절실하게 느끼고 있던
김원봉의열단, 한국 독립당, 조선 혁명당 등을 통합하여 조선 민족 혁명당을 조직하였다(1935). 이후 조선 민족 혁명당의 산하 부대인 조선 의용대를 창설(1937)하여 활발한 항일 활동을 보인다. 하지만, 중국 국민당 의 하수인 노릇(찌라시 뿌리기, 항복 권고 등의 잡일)만 하게 되자, 분노한 대다수의 조선 의용대는 화북지방으로 월북하여 중국 국민당 등지고 중국 공산당과 손을 잡게 된다. 자세한 이야기는 뒤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한편, 동북 지방에 중국 사회주의자들과 조선인 사회주의자들로 구성된 동북 항일 연군(東北抗日連軍, 동북쪽에서 일본에게 대항하는 군대)은 국내의 민족 유일당 조직 중 하나였던 조국 광복회의 도움을 받아 보천보 전투를 성공적으로 끝냈다. 후에 동북항일연군에 있던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은 소련군에 편입되어 해방후에 국내에 들어오게 되는데, 이들을 '갑산파(김일성 포함)'라 한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국민당의 처우에 불만을 품은
조선 의용대의 몇몇 사람들은 공산당이 있는 화북지방으로 이동하여 중국 공산당과 연안 지방에서 손을 잡게 된다. 조선 의용대는 화북 지방에 있는 사회주의 단체인 조선 청년 연합회와 연계하여 조선 독립 동맹을 결성하고 조선 의용군을 창설하여 활동하였다. 해방후에도 중국의 공산혁명에 참가하여 맨 마지막으로 해방된 조국에 들어온 독립운동가들이기도 하다. 그들은 '연안파'라 불리며 해방 북한의 주력부대가 되었다.
  1940년 임시 정부의 단결을 강화하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국 독립당(3부가 통합된 한국 독립당과 다름, 주의.)을 중추로하여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였다. 창시될 당시만 하여도 30명 남짓의 소규모 조직이었지만, 1942년 김원봉을 비롯한 남아 있는 조선 민족 혁명당이 힘을 보탬으로써 조직다운 면을 갖추게 되었다. 그들은 대독,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연합군의 일원으로 인도, 미얀마 작전에 참가하여 한 나라의 국군(國軍)적인 면모를 보였다. 처음에는 국민당 산하에서 독자적인 지휘권 없이 활동하였으나, 후에 독자적인 지휘권을 얻게 되어 미국의 도움으로 국내 진공 작전을 계획하였으나 일본이 1945년 8월 15일 항복하면서 무산되고 말았다.


Tip. 무장 독립투쟁 전개도

1920년 봉오동 전투(홍범도), (훈춘사건), 청산리 전투(김좌진) - 승리

        간도참변(경신참변) - 시련

        대한독립군단 - 극복 의지

1921년 자유시 참변 - 시련

1923~1925년 3부 성립 - 극복 의지

1927년 미쓰야 협정 - 시련

1928년 3부 통합 - 극복 의지, 민족 유일당

1931년 만주 사변 - 시련

1930년대 한중 연합 작전 - 극복 의지

1935년 조선 민족 혁명당 결성 - 극복 의지, 민족 유일당

1936년 동북 항일 연군 조직 - 극복 의지

1937년 중일전쟁 발발 - 시련

        동북 항일 연군 + 조국광복회 -> 보천보 전투 - 민족 유일당, 극복 의지

        조선 의용대 창설(조선 의용대의 이동 경로 주의) - 민족 유일당, 극복 의지

1940년 한국 광복군 창설 - 극복 의지

1942년 한국 광복군 + 조선 의용대 - 민족 유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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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회원

새로운 역사와 문화 코드 (2)

만약에... 라는 단어 하나로 세계사를 바꿀 수 있는 포스트 모던 역사학

1. 기존의 <진리>는 모두 버려라~

자, 그럼 여기서 포스트모더니즘이 가지고 있는 기본 입장을 정리해보자.

포스트 모더니즘의 <핵심>은 지금까지의 역사가 가지고 있는 일체의 <사실성>을 부정한다. 무슨 말이냐고?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누군가가 남긴 <기록>에 의존한다. 삼국시대에 대한 기록은 고려시대 김부식 등이 공동편찬한 <삼국사기>를 바탕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믿을 수 있는가?

당대 김부식은 서경천도운동을 주도했던 묘청 등과 대립하였다. 묘청이 고구려 중심 사관이라면, 김부식은 신라중심 사관을 가지고 있었다. 신채호는 이것을 이유로, 묘청이 김부식에 패한 것이 <민족 1천년래 최고의 사건>이라고 한탄하였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를 편찬하면서 고조선이 신조선, 불조선, 말조선의 3조선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고, 발해와 고려로 이어지는 민족적 정통을 이어갔다고 말했다. 그런데, 신채호가 살던 시기는 일제강점기로 민족주의가 유독 강조되는 시기였다. 그럼 <조선상고사>는 전적으로 믿을 수 있는가? 신채호의 감정이 들어가지 않았는가?

포스트모던 역사가 제기하는 것은 바로 이런 <모순성>들이다. 어떤 역사속의 문서나 자료들도 <객관적> 일 수 없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조한 이유가 말 안듣는 신하들을 교육시키기 위해서라면? 이순신이 임진왜란 전 여진족 토벌에서 무참히 패배한 것 등을 들어 이순신의 기용이 낙하산이라고 주장한다면?

<교과서에 없는 걸 말하지 말란 말야... 죽을래?> 라고 협박하고 끝낼 것인가?

실제 우리가 알고 있는 자료는 누군가가 생각을 갖고 적어놓은 것이다.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주관적인 입장>에서 적었다는 뜻이다. 기록 자체에 의도성이 있는데, 무슨 객관성을 따진다는 것인가?

사실 우리가 <역사>라고 공부하는 것이 <과거>의 진실은 아니다. 전통적인 역사학에서는 <역사>란 실제 그 일이 있었다는 것을 가정하고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러나 포스트 모던은 그 일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할 자료는 <그렇다고 우기는 과거의 자료> 뿐이라고 말한다.

흑사병으로 서유럽 인구의 1/3이 죽었다고 한다. 그 정도면 서유럽 사회는 망가졌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역사 자료는 상식을 뛰어넘는다. 그 정도 인구가 죽었기 때문에 노동력 부족으로 농민들의 권위 신장이 이루어졌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과연 그 정통적인 주장들로 흑사병을 정리하면 끝날까? 어떤 이들은 반대로 주장한다. 그 정도 죽었으니깐 아프리카에서 노예들을 수입하기 시작한 것이 아니냐고.... 의혹은 더욱 증폭된다. 흑사병으로 죽은 사람을 기록한 통계 자체가 흑사병의 가혹함을 알리기 위해 조작된 것은 아닐까?

이 쯤 되면 포스트모던 역사가들이 <탐정>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것이 정의인지를 놓고 끝없이 추격전을 벌이는 <홈즈와 뤼팡>의 견해차라고나 할까?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이란 없다. 그 시대를 살아보았는가? 시대의 아픔을 눈으로 느껴보았는가?

시대를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사건>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따라서 역사가란, 역사를 보는 눈을 제공해주는 도우미에 불과하다. 100이 존재하면, 100가지 역사 이해가 존재한다.

누구나 그 시대를 상상할 수 있고, 누구나 그 시대를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역사적 사건의 <원인>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

세종대왕이 왜 한글을 만들었을까?

훈민정음에 적어두길, <나랏말씀이 중국과 달라... 어리석은 백성이 고생하기 때문에...> 라고 했다. 그건 당연히 적야야할 말을 적었을 뿐이다. MKMF에서 대상을 탄 동방신기도 <아버지, 어머니, 이수만 사장님 감사해요>라는 말은 먼저 달고, 그 다음에 할 말을 하지 않는가?

그 다음 말이 어떤 말일지는 100명이 있으면, 100명 모두 각자의 입장에서 상상을 해볼 것이다. 동방신기 스스로 뭐가 잘나서 상을 탔다고 생각할까? 춤을 잘춰서, 노래가 좋아서? 기획사 빽으로? 맴버 잘만나서?..... 그 원인은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역사에서 원인은 하나일 수 없다. 한글을 만든 이유는 반드시 <어리석은 백성> 탓만은 아닐 것이다. 조선 건국후 독자적 기반을 닦기 위해서? 우연히 부려먹을 똑똑한 신하들이 많아서? 유교주의가 성숙해서? 어느 날 문득 한문 공부가 짜증나서?....

포스트 모던은 주장한다. 역사를 딱 하나의 원인과 결과로 설명하는 것은 그 외에 존재하는 수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프랑스 혁명이 <국왕의 폭정으로 바스티유 감옥 습격이 발생했다>로 설명하면 끝나는가? 아니다. 수백년간 고통받았던 농민 하나하나가 가진 이유는 누가 설명해 줄 것인가?

그래서 포스트 모던은 주장한다. 역사에 진리는 없다. <교과서> 같은 책은 누군가가 자신의 입장을 대변한 <자료집>일 뿐이다. 김구가 영웅인 교과서가 있을 수 있고, 이승만이 영웅인 교과서도 있을 수 있다. 요즘 뉴라이트가 이상한 짓을 하듯이 <지 꼴리는 대로 해석하면> 역사의 한 쪽 입장을 설명할 수 있다.

2. 모든 것은 역사가 될 수 있다.

포스트 모던 역사학(이하 포스트 역사학)의 핵심은 <탐정놀이>이다. 누군가의 역사적 발견을 끊임없이 추적해서 재비판하고, 또 다시 재비판받는다.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댓글놀이와 비슷하다. (그래서 더욱 친근한 것인지도 모른다.)

포스트 역사학이 비판하는 것은, 거대한 주류 사회이다.

원래 포스트 모더니즘 이라는 철학 자체가 서구 사회의 거대한 주류 문명을 비판하면서 등장하였다. 왜 미국과 서유럽의 문학, 사회, 과학 등이 절대적 진리가 되었는가? 왜 남성이 여성을 지배한다는 인식이 당연시 되었는가? 과학의 발전이 왜 환경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는가? 백인은 왜 흑인보다 우월한가?

이 모든 것을 비판하면서 포스트 모더니즘은 <주류보다 소외된 것들>에서 의미를 찾았다. 그것이 역사학에 반영된 것이다.

왜 역사를 큰 구조 속에서 바라봐야 하는가? 역사 속에는 왕조와 위인들만 존재하는가? 우리가 소외시킨 작은 진리들을 우리 스스로 생각할 수는 없는가?

그 결과 역사는 <일상사>가 되었다.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의 친구 사귀기, 흑사병에 걸린 소녀의 마지막 하루, 내시 김처선의 유년 시절의 사랑이야기 등이 역사가 된 것이고, 그것을 우리 상상으로 재구성해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들은 끊임없이 재구성되고 재비판 받는다. 누군가가 주몽의 하루를 이야기하면, 또 누군가는 그것이 주관적이라고 비판하며 다른 이야기를 한다. 또 누군가는 비판을 하면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이것은 우리가 익숙하게 접근할 수 있는 인터넷 환경과도 유사하다. 사극을 한 편 보면, 수백개의 비판글과 옹호글이 올라온다. 역사 갤러리에 의견 하나가 올라오면 반박 의견으로 수십개의 댓글이 올라와 혈투를 벌인다.

그들이 벌이고 있는 싸움은, 거대한 정치담론이 아니다. 신윤복이 과연 여자인가, 남자인가와 같은 <인물>을 던져놓고 벌이는 <재미 문화>인 것이다.

그러나, 포스트 역사학은 정통 역사연구법으로 환영받지 못한다. 너무나 허무하다는 편견 때문이다. 특히, 포스트 모던으로 접근했을 때 <역사적 정체성>이 흔들린다는 이유로 포스트 역사학을 불매(?)하는 사람들이 많다.

예로, <독도와 만주가 우리땅인가>라는 주제를 놓고 역사적 객관성이 무엇인가를 따지는 거대담론이 있다. 포스트 모던적으로 접근해서 <안용복이 진짜 일본에 갔어?>라는 의심으로 문제의 실마리를 잡기 시작하면, 일본과의 싸움에서 승산조차 없다.

<김구가 혹시 빨갱이 아닐까?>라는 가설을 놓고 역사를 접근했을 때, 뉴라이트가 주장하는 <우익 역사만들기 프로젝트>에 휩쓸려 버린다. 뉴라이트 교과서를 보라. 말같잖은 소리를 교과서에 떡~ 제시해 놓아도 <이런 관점도 있잖아~>라는 입장에서 비판하기 쉽지 않다.

그럼, 포스트 역사학은, 문학과 별반 차이없는 허무한 이론에 불과한 것일까? 상상력으로 구성된 창작물에 불과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포스트 모던이 시도하려는 <다양성>은 <독재적인 역사학>의 틀을 비판하고, 역사에는 다양성이 있다는 것을 밝히려는 것이다. 뉴라이트의 역사 교과서는 다른 교과서의 다양성을 무시한 채 <또 다른 일방적 관점>을 주입하려는 꼴통짓에 불과하다.

포스트 역사학은 문학이나 창작 소설이 아니라 지난 역사가 가진 <절대성>을 부정하려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 그 철학은 <역사를 바라보는 다양한 눈>을 뜻한다.

그럼 여기서 또 하나의 의문이 떠오른다. <장길산>이나 <태백산맥> 같은 역사 소설, <이방인> 같은 실존주의 소설도 역사적 배경에 대한 깊은 고민이 있으니 <역사물>인가?

포스트 모던 역사에서는 과감히 말할 수 있다. 그 작품들은 역사적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역사 연구를 위한 소재는 아니다. 그러나, 보는 사람들이 그것을 역사물로 여긴다면 그것은 역사물이 될 수 있다.

포스트 모던의 주체는 필자가 아니라 <독자>이다. 쓰는 사람은 관점을 가지고 글을 쓰지만, 읽는 사람은 쓰는 사람의 관점과 상관없는 해석을 할 수 있다. 원래 언어나 영상은 그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읽고, 보는 사람이 나름대로 해석할 때 의미가 생기는 것이다.

포스트 모던 입장에서는 모든 것이 역사가 될 수 있다. 사극도, 대하소설도, 심지어 연애편지도 역사의 한 장면이 될 수 있다.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며 만든 사람의 작품만이 역사가 아니라, 보면서 역사적 느낌을 받은 사람의 모든 것들이 역사가 되는 것이다.

3. 역사학이 과거를 창조해도 되는 것일까?

어느 책에서 본 내용인데, 책 제목이 생각나지 않는다.(이 책 제목 아시는 분은 댓글을 주시면 감사^^)

책 내용은 간단하다. <만약에> 흑사병으로 유럽인들이 모두 죽어 버렸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백인은 지구상에 없다. 당대 최강의 세력인 중국 명나라는 정화의 원정으로 유럽의 빈자리에 중국의 깃발을 박아둔다. 아메리카 식민지는 아시아인이 발견하였다. 인디언들은 황인종의 지배를 받는다. 동아시아에서는 산업혁명 비슷한 문화혁명이 일어닌다. 중국의 제국주의에 반발하여 아메리카 식민시의 황인종들은 독립선언을 한다. 중국의 중화주의는 전세계에 강력한 <패권주의>라는 인식을 심어놓는다. 이에 반발한 다른 국가들이 도전하여 세계대전이 일어난다....

만약에 라는 테마 하나로 역사는 이렇게 변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 일어난 역사가 아니라 가상의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 왜 일까?

가상의 현실을 통해 실제 현실과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의 제국주의 잔혹함을 중국 제국주의의 잔혹함으로 패러디했지만, 그것은 제국주의 국가였다면 가능했을 법한 일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중국이 세계의 패권을 잡았다면 유럽과는 상이한 과정을 밟았을 수도 있다. 누군가 다른 길을 가는 중국 이야기를 다시 그려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 <역사를 바라보는 눈>이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포스트 역사학이 남기려는 것은, 역사의 진리를 찾고자 하는 시도가 아니다. 역사를 통해서 다양한 진리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역사는 반드시 하나의 원인과 결과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원인이 존재할 수도 있고,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해보는 것이다.

그렇게 해봐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지금까지의 <역사>의 틀이 너무 한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왜 역사는 삼국유사,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된 자료들만을 간추려 이야기되고, 그것이 진리로 인정해야 하는가?

조선시기 타짜나 바람둥이에 대한 이야기는 이순신에 대한 이야기보다 비중이 떨어지는 것일까?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역사의 기준이 다르다면, 중요한 역사적 사건과 소재도 달라지는 것이 아닐까? 나의 해석이 곧 역사적 해석이 되는 것이다.

자, 지금까지 포스트 역사학에 대해 간략히 정리해봤다. 여기서 한가지 오해할 부분을 짚고 넘어가겠다. 앞으로 쓸 이야기들이 포스트 역사학을 옹호하면서 전개하지 않을 것이다. 단지, 각종 매체나 문학 속에서의 역사를 바라보는데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이 도움이 될 수 있기에 그 개념을 설명한 것이다.

포스트 역사학은 <딱딱한 자료실>을 벗어나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본다는 사실이 매력적이다. 반면, 모든 역사에 진리가 없다는 입장을 가짐으로서 <허무주의>를 초래할 가능성이 너무나 크다.

앞으로 전개할 이야기들에서 이 다양성과 허무주의는 상극을 이루며 이야기를 전개할 것이다. 어떤 이야기에서는 포스트 역사학을 적극 활용할 것이며, 어떤 이야기에서는 허무주의를 강력하게 비판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문화적 코드이든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은 역사물로 간주할 수 있다는 <포스트모던의 정신>이다. 그럼 시작해 볼자.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by 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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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우리 역사 최악의 인물 - 이승만 편 -

1. 이승만은 땅 속에 묻어두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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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에 대한 연구는 학계에서 대부분 부정적입니다. 이유는 한국 근현대사의 중요한 시기에서 재뿌리기, 초치기, 배신과 분열.... 등등의 장면에 이승만이 항상 있었기 때문이죠. 역사학자들은 이승만이 역사에 미친 영향을 상당히 부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위 조중동(?)이라 일컫는 한국 사회의 보수적 신문들은 이승만 기념 사업회를 연다던가, 이승만에 대한 기사를 미화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글이 나온다 하더라도 사실 별 관심조차 끌지 못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에 대한 신문 기사라는 것이 역사적 사실보다는 감정적인 측면에서 기술된 것들이 많았거든요.

자, 그럼 제가 왜 이승만을 역사상 최악의 인물편에서 다루려고 하는지 한번 볼까요?(원래 오늘 이완용편을 해보려다가 너무 열받는 사료들 몇편을 보고는 때려쳤습니다. 쓰다 심장마비 걸릴까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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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왕가의 핏줄이기에 무시할 수 없었던 인물...

이승만은 전주 이씨 양녕대군파 15대손입니다. 그러나, 이미 양녕대군 8대손부터 종친에서 멀어졌고, 12대손 때부터는 종친 대우를 못받았습니다. 또한 과거 급제자도 오랫동안 없던 관계로 양반대우 받기도 힘든 가문이었죠.

그러나, 이승만이 20살이 되기 전, 갑오개혁이 실시되어 과거라는 것이 없어지고 능력사회로 전환되어 버렸습니다. 20살의 이승만은 과거 시험 대신 외국인 선교사가 세운 배제학당에 들어가 신식 교육을 받았습니다.

당시, 전국민이 일본의 강요로 머리를 깍아야 하는 <단발령>이 내려지자, 이승만은 단발령에 찬성하였다고 합니다. 이승만은 신교육을 받은 자신을 자랑스러워 했고, <부모가 주신 머리를 자르는 것>보다는 <깨끗한 두발>이 더 현실적이라고 생각했나봅니다.

1896년 아관파천이 발생하고, 대한제국의 정권이 친미적 성격을 가진 서재필 등의 정동구락부가 주도하자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배제학당은 상당히 대우받는 학교가 되었습니다. 이승만은 이 학교에서 협성회라는 단체에서 활동하였고, 이후 한국 최초의 신문인 <매일신문>의 회장이 되었습니다.

이승만은 신문에 글을 쓰면서 그 자신의 입장은 <동양평화론>의 관점에서 기술했다고 합니다. 동양평화론이란, 일본인들이 조선인에게 행패를 부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일본, 청, 대한제국은 사로 친하게 지내야 할 동양의 친구들이므로 일본과 직접 맞서 싸우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라는 관점이었습니다. 문제가 있으면 일본 관리들과 이야기하면 들어줄 것이라는 <일본을 분석하지 못한> 관점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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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898년~ : 독립협회에서 활동과 <독립정신>

이승만은 자신의 본격적인 정치 입지를 다지고, 존경하는 친미적 경향의 서재필을 본받아 독립협회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러시아가 절영도를 조차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등의 글을 쓰고, 서재필의 미국추방을 반대하는 운동을 하는 등 독립협회의 일에 열성적이었고, 만민공동회 활동도 하였습니다.

특히, 독립협회가 어용단체인 황국협회에 의해 해산될 때, 이승만이 앞장서서 몸으로 독립협회의 해산을 막고 열성적인 모습을 보여서 이승만이라는 이름을 국민들에게 멋있게 각인시켰습니다.

그러나, 이승만은 독립협회의 거두 박영효의 쿠테타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습니다. 24살때부터 6년간이었죠. 재미있는 사실은 감옥에 갖힌 이승만은 친미파로서 죄수로서 최상의 대우를 받았다는 점입니다. 그는 감욱에서 여러 가지 공부를 하였습니다. 또한 조선이 어려울 때는 미국과 같은 기독교 문명국이 조선을 구원할 것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기독교>로 개종하기도 하였습니다.

제국주의의 침략적 모습을 보지 못하고, 미국을 좋은 친구로 생각하는 그의 사상이 감옥에서 완성된 것이죠. 이후 이승만의 사상은 다른 민족주의자들과는 반대되는 사상인 <외교독립론>이었습니다. 친한 친구(외국)을 많이 사귀면, 그들의 도움으로 독립할 수 있다는 주장이죠.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독립정신>이라는 책을 저술하였습니다. 책 제목은 멋있어 보이죠? 그러나 내용은 형편없는 책이었습니다. 백성들이 힘든 이유인 세금이나 사회 모순, 지주제도 등의 이야기는 없고, 단지 백성들이 현실을 깨우쳐야 한다, 외국과 친구로서 만나야한다 등의 공상적인 사상으로 일관되어 있죠.

그런데, 이승만이 생각한 가장 좋은 친구란? <미국>이었습니다. 이승만은 일본을 좋은 친구로 생각하는 자들은 친일파로서 좋지 않게 생각하면서도, 자신은 좋은 친구인 미국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수호자라고 여긴 것입니다. 따라서 이승만은 <친미 기독교주의>로서 자신의 역사관을 고수해 가기 시작합니다.

이승만의 이 역사관이 일제시대 우리 독립운동사에 하나의 비극으로 남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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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904년~ : 미국으로 건너가다.

이승만은 감옥에서 출소한 뒤 미국으로 건너갑니다. 조지 워싱턴 대학에 입학했죠. 당시는 1905년을 전후하여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우리나라의 국권이 일본에 넘어가던 시기였습니다. 많은 민족운동가들은 이승만이 미국에서 열혈적인 독립운동을 해줄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많은 선교사들을 만나 독립운동을 했는데,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독립운동과는 좀 달랐습니다. 이승만은 독립운동보다는 선교운동을 많이 하였습니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세례를 받고 교인이 되어 활동하였습니다.

그러나,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이승만에게 많은 독립 외교 활동을 부탁하였습니다. 특히,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에게 한국의 독립을 강화회의에서 상정해달라는 요구하는 문서를 제출하기도 하였습니다. 좋은 친구인 미국이 도와줄 것이라 믿은 것이죠. 그러나, 루즈벨트는 당시 친일적 성향을 가진 인물이었고 이 요구는 묵살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승만이 한국인들을 위해 미국 대통령에게 청원했다는 사실로 인해 이승만에 대한 기대치와 평가는 더욱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이승만이 실제 해낸 일은 없지만, 친미파인 이승만이기에 시도라도 할 수 있는 일들을 계속 부탁하면서 이승만은 독립운동에 거두가 되어 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승만이 정녕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했을까요? 그렇지 않은 부분도 많았습니다. 예로, 1907년 헤이그 특사로 이승만이 가기를 독립운동가들이 원했을 때, 그는 <미국 명문대학 학위를 받아야 국내 활동이 편해지기 때문에> 거부하였습니다. 또, 장인환 등이 친일적인 미국인 스티븐슨을 죽인 것 등에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이승만이 원한 건 미국인들이 원하는 기독교적인 외교 활동이었고, 그 외의 것들은 자신에게 불필요할 경우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죠.

이것은,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기본적 태도가 부족한 것이었습니다. 공부해야 하기 때문에 독립운동을 미룬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려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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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910년~ : 대학교수가 되기 위해 귀국하다.

1910년 공부를 마친 이승만은, 경신학교 교수가 되기 위해 귀국하였습니다. 그러나, 경신학교의 창립자 언더우드와의 계획이 순조롭지 못해 그는 기독교 관련단체인 YMCA의 기독교 교육운동가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예수의 십자가>를 조선인에게 전달하겠다는 선교가의 마음자세였지, 독립운동가의 자세가 아니였습니다. 실제, 그는 반일운동이나 혁명을 하고 싶은 의사가 없는데, 일본 총독부가 오해하면 어쩌나하는 것을 우려했다고 합니다.

이승만은 한국에 돌아와서 성경연구반을 만들고, 반일운동을 하는 학생들에게는 미국 유학과 기독교 정신이 꿈을 이뤄줄 것이라고 설교하였습니다. 그러나, 1911년 신민회의 105인 사건이 터지면서 민족운동가들을 잡아들이는 조치가 있자, 그 역시 민족운동가로 분류되어 체포될 뻔 했습니다. 하지만, 미국 선교사들의 강력한 협조를 얻어 그는 다시 미국으로 망명을 했습니다. 망명 갈 때의 신분은 세계감리교 대회 조선 대표였죠.

다시 미국에 건너간 그는 학생복음회를 조직하고, 한국교회의 독립을 주장하였습니다. 조선 독립이 아니라, 교회 독립이었죠. 이렇게 다시 떠난 그는 30년 넘게 해외에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가들과 연줄을 맺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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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921년~ :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말아먹다.

이렇게 1910년대의 이승만은 실제 이승만이 독립을 위해 한 일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첫 번째로, 그가 친미파로서 당시 세계를 이끌어가는 국가 중 하나인 미국의 협조를 얻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인물이었다는것입니다.

둘째로는 그가 조선 왕조의 왕족에 속하는 인물이었다는 점입니다.

세 번째는 국민들의 관심을 끄는 역사적 현장속에 <그가 이상하리 만큼 꼭 있었다>는 점입니다. 독립협회의 해산 때 그는 열혈 영웅이었고, 파리 강화회의를 앞두고는 미국 대통령에게 독립을 청원했던 영웅이었습니다.

이승만을 좋아하던 싫어하던 그는 <슈퍼스타>로서 독립운동 단체들이 필요로 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이승만은, 3.1운동 직후 여러 가지 타이틀을 확보합니다. 연해주의 독립운동단체인 대한독립회의의 의장이자, 국내의 독립운동단체인 한성정부의 대통령이었죠. 당시,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각종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하려고 했는데, 그 단체들마다 이승만이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각종 독립운동 단체는 이승만의 한성정부를 계승하여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정하고, 이름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을 따르기로 합의하죠.

그러나,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자마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풍지박살이 나고 분열이 됩니다. 당시 신채호, 안창호 등 대부분 민족주의자들은 일본과의 결사항쟁 및 독립군 육성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승만은 미국과의 협조와 기독교 정신의 확장을 통한 <외교독립론>을 주장합니다.

임시정부 대통령인 이승만의 이 외교독립론 주장으로 임시정부는 분열되고 맙니다. 임시정부를 다시 만들자는 창조론과 이승만을 버리고 다시 임시정부를 구성하자는 개조논의 까지 나왔고, 거기에 이승만의 몇 가지 비리가 더해져 이승만은 쫒겨나게 됩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결국 사분오열 되면서, 임시정부의 성격을 잃었고 이 망가진 임시정부를 죽기살기로 수습하여 다시 일으킨 사람은 <김구> 선생이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김구 선생님이 이끌어간 임시정부로, 대통령제가 아닌 주석제 또는 국무령제(장관제도)의 임시정부입니다.

이후 이승만은 계속적으로 외교독립론만을 주장하면서, 미국에서 활동하였습니다. 그는 우리가 광복하는 날까지 구미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미국의 실세들과 많은 친분을 맺어두었습니다. 특히, 기독교가 중요한 미국에서 기독교 실세들과의 친분은 아주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할 수 있었죠. 이러한 영향력을 우리 나라의 대대수 독립운동 노선과 연결시켰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펠레의 예언 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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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1945년~ : 맥아더 장군, 하지 장군 VS 이승만

1945년 광복과 더불어 이승만은 미전략사무국 문관 대령으로 귀국하였습니다. 이 때 맥아더와 하지는 이승만의 귀국을 돕고 그를 협조하였는데, 그 이유는 해방된 한국사회에서 좌파를 억누르고 친미파의 과도정부를 만들기 위한 책략이었습니다.

특히 임시정부의 요직에 있었던 이승만은 맥아더와 하지에 의해 그 명성이 실제보다 훨씬 더 크게 부풀려 졌습니다. 국민들은 이승만이야말로 불세출의 영웅이었다고 생각하게 되었지요.

이승만은 귀국하자마자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결성하고 통합적인 정치행보에 들어갑니다. 그는 극우적인 성향으로 공산주의자를 싫어했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 초기에는 <공산주의 경제정책도 채용할 점이 많다>고 말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밑으로 모인 단체는 친일파의 잔제세력과 극우파인 한민당 세력 뿐이었습니다. 중도좌파와 극좌파는 친미적인 이승만을 경계하였기 때문이지요.

여기서, 이승만의 또하나 아쉬운 점이 드러납니다. 자신의 지지기반이 <한민당>이기에 그는 친일파와 민족반역자 처벌을 은근히 반대한 것입니다. 이 점은 민족사에서 두고두고 후회할 일이 되고 맙니다.

또, 이승만은 당시 김구 등 중도파들과 함께 미국, 소련의 신탁통치를 결사 반대하였는데, 이것은 국민들에게 이승만이 민족주의자라는 인식을 가져오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승만은 여운형등이 세운 <조선인민주의 민주공화국>이라는 국호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전통을 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민족주의자들을 분열시키기 시작합니다. 사실, 그 이유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전통대로 국가가 세워져야 자신이 주도적 위치를 점할 수 있었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 재미있는 점은 초기에 공산주의와 연대할 수 있다던 이승만이 그 말을 한지 얼마 안되어 공산당을 <소련의 사주를 받는 자>들로 매도하고 공존할 수 없다고 선언해 버린 것입니다. 그 시점이 공산주의자들이 친일파 처벌과 반민족주의자 처벌을 강도있게 원했고, 여운형 등의 국민대표가 세운 <조선 인민주의 민주공화국>을 옹호한 시점과 일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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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1947년~ : 김구 VS 이승만의 구도

1947년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가 당시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김구와 연합하여 우파의 범 신탁통치 반대세력이 결성되었습니다. 그러나, 김구와 연합한 이승만은 하지 등 미국세력을 등에 업고 김구를 넘어서게 됩니다. 반탁운동을 주도했던 세력 중 미국은 이승만을 의장에 선임하고, 김규식과 김구는 부의장과 총리에 임명하였습니다.

김규식과 김구는 이 결정에 의의를 가지지 않고, 남북 통일 노선을 추구하는데 노력을 다하였습니다. 김규식과 김구는 남북한이 하나로서 투표하고, 남북한이 통일된 상태에서만 정부를 구성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만약 남북한이 이 상태로 분열된다면 되돌릴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한다고 생각하였죠. 민족주의자들은 대부분 이 생각에 동의하였습니다.

그러나, 미군정은 남한만이라도 정국이 안정되기를 원했습니다. 거기에 이승만이 <정읍발언>이라는 유명한 사건을 일으켜 풍파를 일으킵니다.

이승만은 평소, <남한만이라도 빨리 정부를 수립해야 하므로, 38선 철폐와 자율적 정부 수립이 필요하다>라고 말한 것이죠.

그런데, 이승만이 말한 자율적 정부 수립이란, 만약 38선이 철폐되지 않으면 남조선에서 단독정부 수립을 미국이 주장해도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말합니다. 특히, 전북 정읍에서 이승만은 남한만이라도 임시정부를 세우자고 주장해버립니다.

난리가 났죠. 김구는 <38선을 베고 쓰러져 죽는다고 해도 통일이 아니면 안된다>고 주장합니다. 또 김규식은 이승만과 같은 극우파를 제외해 버린채, 우파와 좌파가 연합하여 남북한 통일을 추진하자는 좌우합작운동을 시도합니다. 이로서 이승만은 왕따를 당하게 되죠.

그러나, 당시 미국은 소련을 적대시하는 봉쇄정책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김구, 김규식 보다는 이승만을지지하였습니다. 특히, 김구는 유엔감시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치르자는 통일정부 입장을 내세우는데, 이승만은 남한의 반절정부라도 세우자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갈등은 큰 것이었습니다.

결국, 1948년 치루어진 대한민국 최초의 총선에 김구와 다수 민족주의자들이 불참하였습니다. 그리고 제헌국회의 투표결과 이승만 의장, 신익희, 김동원 부의장이 선출되었습니다. 이후 헌법제정 후 이승만과 이시영이 대통령과 부통령이 된 것입니다.

대통령은 이승만이 되었지만, 이승만이 김구를 배척하면서 주장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주장>은 우리 역사에서 지금까지 지울 수 없는 분단의 원인을 제공한 잘못된 선택이 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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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대통령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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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건립에 지대한 공을 세운 개국공신인 점도 맞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승만을 이렇게 최악의 인물로 질타하는 이유는?

그 이유는 하나 하나의 행적이 역사를 바꾸는 기로에 있는 대단한 인물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좀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돌릴 수 있었음에도, 하나같이 역사의 흐름을 백성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대통령 이승만 하면 생각하는 것은 <자유당과 독재>입니다.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으로서 인상깊게 남은 정책이 <북진통일>밖에 없습니다. 계속 대통령직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부정을 저지르고, 반대파는 <정치깡패>를 동원하여 무자비하게 진압하였습니다. 친일파 청산 등의 특별법은 만드는 족족 폐기시키거나, 협박으로 사장시켜 버렸습니다. 토지 개혁은 철저하지 못하여 자원의 평등분배가 이루어지지 못하였습니다.

일제시대부터 선교 중심의 외교독립론을 주장했던 기독교인이 대통령이 된 후에는, <평화통일론>을 주장한다는 이유로 떠오르는 야당 대표 조봉암을 죽여 버리기도 했습니다. 북한 사주를 받은 자라고 하여 사형선고를 내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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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승만은 부정부패가 누적되어 3.15 부정선거 등의 이유로 국민들의 심판을 받고 하와이로 망명을 떠납니다. 4.19 혁명이 일어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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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 몇가지를 적어보았습니다. 물론 우리나라 건국 의장이자, 초대 대통령으로서 남긴 업적도 많습니다. 하지만, 일부 업적이 그의 잘못된 행적들을 덮어둘 수가 없을 정도로 한국 근현대사에 큰 상처를 남긴 인물이 되었습니다. 오늘 최악의 인물로 이승만을 다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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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 앞부분 1-5장 기술을 위해 인용한 논문
                - 청년기 이승만의 언론, 정치활동, 해외활동, 주진오, 역사비평 1996년 여름본(계간 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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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글 :
2007/10/16 - [한국사사료모음/13.일제시대사료] - 대한민국 건국강령(대한민국 임시정부, 1941 / 조소앙)
2007/06/02 - [한국사사료모음/14.현대사사료]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성명서(1946)
2007/05/18 - [한국사사료모음/14.현대사사료] - 이승만 정권의 평화선 선언
2007/05/18 - [한국사사료모음/14.현대사사료] - 이승만 정권의 자유당 창당 선언문 (1951년)
2007/05/18 - [한국사사료모음/14.현대사사료] -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한 이승만의 정읍발언 (1946년)
2007/04/25 - [한국사사료모음/13.일제시대사료] -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 탄핵서
2007/04/25 - [한국사사료모음/13.일제시대사료] - 대한민국 임시헌장 선포문
2007/04/25 - [한국사사료모음/13.일제시대사료] - 조소앙의 <대한독립선언서> 전문
2007/03/17 - [한국사사료모음/14.현대사사료] - 4. 19 기자 체험기
2007/03/17 - [한국사사료모음/14.현대사사료] - 4. 19 에 대한 해외 신문의 반응
2007/03/17 - [한국사사료모음/14.현대사사료] - 이승만의 정읍 발언
2007/03/17 - [한국사사료모음/14.현대사사료] - 4. 19 혁명 자료 - 이승만 대통령의 사임 의사
2007/01/13 - [왕조별왕계표/대한민국] - 대한민국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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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사료> 1946. 12. 2 - 이승만의 도미외교 지침서

1. 1946년. 12월의 지침서

1946년 6월 이승만은 통일된 정부에서 살수 없다면 남한만이라도 단독 정부를 수립하자는 일명 <정읍 발언>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민족통일총본부를 설치하여 모든 세력이 자신에게 협조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좌파에서는 <민족분열총본부>를 만든다며 비난하였고, 김구의 한국독립당은 공식으로 이승만에게 거부 의사를 밝혔습니다.

1246년 12월 이승만은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에 도미 외교의 지침서인 6개항을 작성하였습니다. 이것은 미국의 원조를 받기 위한 과도 정부안으로서 그 실제 속 뜻은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지침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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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무성에 제출할 6개항의 기본방침(1946.12.2 - 이승만)

1. 양단된 한국이 통일되어 총선거가 실시될 때까지 남한에 과도정부를 수립할 것.

2. 한국에 관한 미, 소 양국의 협상에 관계없이 과도정부는 유엔의 승인을 받아야 하며, 한국의 점령 및 기타 문제에 관하여 미, 소 양국과 직접 협상하도록 할 것

3. 한국의 경제복구를 원조하기 위하여 일본에 대한 한국의 배상 주장이 조속히 검토될 것.

4. 특정 국가에 편중되지 않고 여러 나라와 평등하게 거래할 수 있는 완전한 통상권이 부여될 것

5. 국제교환제도가 마련되고 통화를 안정시킬 것

6. 미, 소 양군이 동시에 철수할 때까지 미군이 남한에 주둔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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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내용의  핵심 주장은 결국 미국 내부의 공산주의 온건파와 남한에 주둔하는 좌파세력을 척결해야 한다는 것을 은연중에 강조하는 내용이면서, 단독정부 수립과 미군정을 옹호하는 당시 이승만의 입장을 보여줍니다.

출처 : 임병직, <임정에서 인도까지>, 여원사, 1964

2. 이승만 귀국 보고 연설(1947. 4. 21)

아래의 자료는 이승만이 미국에 다녀온 후 귀국하면서 보고연설한 내용의 일부입니다. 남한의 발전을 위해 남한 단독의 총선거가 필요하다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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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에서는 총선거가 지연되고 미군정이 실패한 것은 하지 중장이 공산파와의 합작을 고집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는 미국 정책이 공산주의와의 합작을 단념하였으므로 캄캄하던 우리의 길은 열리었다. 우리 동포는 한데 뭉치어 임시입법원으로 하여금 총선거법안을 급속히 제정하도록 하여 남북통일을 위한 남조선과도정권을 수립해야 한다.

그리고 미정책의 전환에 따라 우리가 미군정과 합저해서 우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제 우리는 대한입정의 법통을 고집할 플요가 없으며 이 문제는 보류해두어야 헐 것이다. 그리고 김규식 박사도 이제는 합작을 단념하고 나와 같이 보조를 취할 것을 결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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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미국의 정책이 소련을 견제하는 봉쇄정책으로 전환되어가고 있으며, 공산주의와 연대할 필요가 없게되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하던 자신의 입장마저도 버리고, 통일을 위한 좌우합작의 원칙도 버려야 할 것을 강조합니다. 이 주장을 발표한 이승만은 이후 승승장구하였지만, 좌우합작과 남북통일을 전제로 한 남북한 총선거를 주장하였던 김구, 김규식 선생이나, 중도좌파인 여운형 선생은 입지가 좁아지고 점점 밀려나게 됩니다.

출처 : 동아일보, 1947. 4. 29


이 글과 관련된 이승만 기사 더 보기  :
2007/10/22 - [초중고방/역사인물이야기] - 우리 역사 최악의 인물 - 이승만 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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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 나의 소원

네 소원(所願)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大韓獨立)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 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 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自主獨立)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동포(同胞) 여러분! 나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는 없다. 내 과거의 칠십 평생을 이 소원을 위하여 살아왔고, 현재에도 이 소원 때문에 살고 있고, 미래에도 나는 이 소원을 달(達)하려고 살 것이다.

독립이 없는 백성으로 칠십 평생에 설움과 부끄러움과 애탐을 받은 나에게는, 세상에 가장 좋은 것이, 완전하게 자주 독립한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 보다가 죽는 일이다. 나는 일찍이 우리 독립 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하였거니와, 그것은 우리 나라가 독립국만 되면, 나는 그 나라의 가장 미천(微賤)한 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다. 왜 그런고 하면, 독립한 제 나라의 빈천(貧賤)이, 남의 밑에 사는 부귀(富貴)보다 기쁘고 영광스럽고 희망이 많기 때문이다. 옛날 일본에 갔던 박제상(朴堤上)이,

내 차라리 계림(鷄林)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왕의 신하로 부귀를 누리지 않겠다

한 것이 그의 진정이었던 것을 나는 안다. 제상은 왜왕이 높은 벼슬과 많은 재물을 준다는 것을 물리치고 달게 죽음을 받았으니, 그것은

차라리 내 나라의 귀신이 되리라.

함이었다.

근래에 우리 동포 중에는 우리 나라를 어느 큰 이웃 나라의 연방(聯邦)에 편입(編入)하기를 소원하는 자가 있다 하니, 나는 그 말을 차마 믿으려 아니 하거니와, 만일 진실로 그러한 자가 있다 하면, 그는 제 정신을 잃은 미친 놈이라고밖에 볼 길이 없다.

나는 공자(孔子), 석가(釋迦), 예수의 도(道)를 배웠고, 그들을 성인(聖人)으로 숭배(崇拜)하거니와, 그들이 합하여서 세운 천당(天堂), 극락(極樂)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가 아닐진댄, 우리 민족을 그 나라로 끌고 들어가지 아니할 것이다. 왜 그런고 하면, 피와 역사(歷史)를 같이하는 민족이란 완연히 있는 것이어서, 내 몸이 남의 몸이 못 됨과 같이 이 민족이 저 민족이 될 수는 없는 것이, 마치 형제도 한 집에서 살기 어려움과 같은 것이다. 둘 이상이 합하여서 하나가 되자면, 하나는 높고 하나는 낮아서, 하나는 위에 있어 명령(命令)하고, 하나는 밑에 있어서 복종(服從)하는 것이 근본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일부 소위 좌익(左翼)의 무리는, 혈통(血統)의 조국(祖國)을 부인(否認)하고 소위 사상(思想)의 조국을 운운(云云)하며,혈족의 동포를 무시하고 소위 사상의 동무와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國際的) 계급(階級)을 주장하여, 민족주의(民族主義)라면 마치 이미 진리권(眞理圈) 외에 떨어진 생각인 것같이 말하고 있다. 심히 어리석은 생각이다. 철학(哲學)도 변하고 정치(政治), 경제(經濟)의 학설(學說)도 일시적이거니와 민족의 혈통은 영구적이다. 일찍이 어느 민족 내에서나 혹은 종교로, 혹은 학설로, 혹은 경제적․정치적 이해의 충돌로 하여 두 파, 세 파로 갈려서 피로써 싸운 일이 없는 민족이 없거니와 지내 놓고 보면 그것은 바람과 같이 지나가는 일시적인 것이요, 민족은 필경 바람 잔 뒤에 초목 모양으로 뿌리와 가지를 서로 걸고 한 수풀을 이루어 살고 있다. 오늘날 소위 좌우익(左右翼)이란 것도 결국 영원한 혈통의 바다에 일어나는 일시적인 풍파(風波)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이 모양으로 모든 사상도 가고 신앙(信仰)도 변한다. 그러나 혈통적인 민족만은 영원히 흥망성쇠(興亡盛衰)의 공동 운명의 인연에 얽힌 한 몸으로 이 땅 위에 사는[生] 것이다. 세계 인류가 네오 내오 없이 한 집이 되어 사는 것은 좋은 일이요, 인류의 최고요 최후인 희망(希望)이요 이상(理想)이다. 그러나 이것은 멀고 먼 장래에 바랄 것이요, 현실의 일은 아니다. 사해 동포(四海同胞)의 크고 아름다운 목표를 향하여 인류가 향상하고 전진하는 노력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요 마땅히 할 일이나, 이것도 현실을 떠나서는 안 되는 일이니, 현실의 진리는 민족마다 최선(最善)의 국가(國家)를 이루고 최선의 문화(文化)를 낳아 길러서, 다른 민족과 서로 바꾸고 서로 돕는 일이다. 이것이 내가 믿고 있는 민주주의(民主主義)요, 이것이 인류의 현 단계에서는 가장 확실한 진리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으로서 하여야 할 최고의 임무(任務)는, 첫째로, 남의 절제(節制)도 아니 받고 남에게 의뢰(依賴)도 아니 하는, 완전한 자주 독립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 민족의 생활을 보장할 수 없을뿐더러, 우리 민족의 정신력(精神力)을 자유로 발휘(發揮)하여 빛나는 문화를 세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완전한 자주 독립의 나라를 세운 뒤에는, 둘째로 이 지구상의 인류가 진정한 평화(平和)와 복락(福樂)을 누릴 수 있는 사상을 낳아, 그것을 먼저 우리 나라에 실현하는 것이다.

나는 오늘날의 인류의 문화가 불완전함을 안다. 나라마다 안으로는 정치상, 경제상, 사회상으로 불평등, 불합리가 있고, 밖으로 국제적으로는 나라와 나라의, 민족과 민족의 시기(猜忌), 알력(軋轢), 침략(侵略), 그리고 그 침략에 대한 보복(報復)으로 작고 큰 전쟁이 끊일 사이가 없어서 많은 생명과 재물을 희생하고도, 좋은 일이 오는 것이 아니라 인심(人心)의 불안(不安)과 도덕(道德)의 타락(墮落)은 갈수록 더하니, 이래 가지고는 전쟁이 끊일 날이 없어, 인류는 마침내 멸망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 세계에는 새로운 생활 원리(生活原理)의 발견(發見)과 실천(實踐)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담당한 천직(天職)이라고 믿는다.

이러하므로, 우리 민족의 독립이란 결코 삼천 리 삼천만만의 일이 아니라, 진실로 세계의 전체의 운명에 관한 일이요, 그러므로 우리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곧 인류를 위하여 일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의 오늘날 형편이 초라한 것을 보고 자굴지심(自屈之心)을 발하여, 우리가 세우는 나라가 그처럼 위대한 일을 할 것을 의심한다 하면, 그것은 스스로 모욕(侮辱)하는 일이다. 우리 민족의 지나간 역사가 빛나지 아니함이 아니나, 그것은 아직 서곡(序曲)이었다. 우리가 주연 배우(主演俳優)로 세계 역사의 무대(舞臺)에 나서는 것은 오늘 이후다. 삼천만의 우리 민족이 옛날의 그리스 민족이나 로마 민족이 한 일을 못 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武力)으로 정복(征服)하거나 경제력(經濟力)으로 지배(支配)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것이다. 어느 민족도 일찍이 그러한 일을 한 이가 없으니 그것은 공상(空想)이라고 하지 마라. 일찍이 아무도 한 자가 없기에 우리가 하자는 것이다. 이 큰 일은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남겨 놓으신 것임을 깨달을 때에 우리 민족은 비로소 제 길을 찾고 제 일을 알아본 것이다. 나는 우리 나라의 청년 남녀(靑年男女)가 모두 과거의 조그맣고 좁다란 생각을 버리고, 우리 민족의 큰 사명(使命)에 눈을 떠서, 제 마음을 닦고 제 힘을 기르기로 낙(樂)을 삼기를 바란다. 젊은 사람들이 모두 이 정신을 가지고 이 방향으로 힘을 쓸진댄, 30년이 못 하여 우리 민족은 괄목상대(刮目相對)하게 될 것을 나는 확신(確信)하는 바이다.

- 이 글을 위해 참고한 역사도서 모음

백범일지 - 백범 김구 자서전, 아이템북스, 김주영 어역, 2006
                            <백범일지 하권, 나의 소원, 민족국가 부분 중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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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삼천만 동포에게 경고함

친애하는 동포 여러분!

내가 입국한 지도 벌써 14개월이 지났다. 재덕이 부족한 나는 이 긴 동안에 있어 여러분의 열렬한 애호와 다정한 격려를 추호도 보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동안에 기구한 객관적 정세의 발전은 외로 국제관계에 별 호전이 없고, 내로 인민이 도탄에서 신음하고 있게 되었다. 가슴을 부둥켜안고 통곡을 한들 시원할 것이 무엇이랴마는 노안에서 뜨거운 눈물이 떨어짐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눈물만이 우리를 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직 과거를 엄정하게 비판하여서 전민족이 일심일덕으로 정확한 전로를 개척하기에 공동 분투함에서만 우리의 생존 발전은 있을 것이다. 나도 자기의 과거를 검토하여 뉘우치는 바가 하도 많다. 그러나 지폭관계로 일일이 제기하여 여러분에게 드리지 못함은 유감이다. 이 점에 대하여는 여러분의 관용과 용서를 청하는 바이다.

나는 앞으로 분골쇄신을 할지라도 잔명을 조국에 바치어 장공속죄를 하기로 결심하고, 우선 다섯 가지를 들어 여러분께 협력을 간구한다. 공명함이 계시거든 간단없이 현명한 고견과 담백한 책려를 주시는 동시에 공동 노력하심을 아끼지 아니하시기를 절망한다.

1. 독립진영의 재편성

이 문제에 대하여는 일전에 비상국민회의, 독촉국민회, 민통 및 각정당 단체의 제위 동지에게 고하는 그에서 이미 진술한 바가 있거니와 재작년 8월 15일 이후의 우리 독립운동은 성취보다 실패가 더 많았다. 공심보다 사심의 표현이 더 컸고, 이지보다 기분의 충동이 더 강하였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도 이 현상을 계속하면 결국 민중과 격리될 위험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위기에 임하여서도 실패를 실패로 인정하지 못하고 독립 진영을 재편하지 아니하면 즉각에 우리는 수습할 수 없는 국면에 봉착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급히 수십 년래의 독립운동의 법통을 계승한 비상국민회의에 독촉국민회와 민통을 합류하게 하여서 독립진영 최고 기구로 삼는 동시에, 각 정당과 단체의 권위있는 대표를 참가하게 하여 그 기구를 확대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극 기구는 명칭을 무엇이라고 하든지 독립운동의 최고 방략를 정하며, 그것을 운영하기 위하여 독립운동을 위한 각 정당과 부문 단체들을 지휘, 명령할 수 있는 권력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신기구 산하에 움직이고 있는 각 집단은 그 명령에 의하여 신속히 민중 속으로 깊이 들어가, 그들에게 선전하고 그들을 훈련하고 그들을 조직하여서 독립진영을 민중의 기초 위에 확립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2.합작위원회

우리는 전민족 통일을 수요하는 것이다. 전민족 통일을 수요함으로써 좌우 합작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우리가 자립하는 데 내부 통일이 절대 필요하지만, 정치이념이 부동한 양개국에게 분담 점령을 당한 금일이 있어서 우리 독립과 자유를 쟁취하는데는 더욱 그러한 것이다. 좌만도 독립을 완성하기는 곤란한 것이다. 그러므로 현시에 있어서 민주 의원에서 합작위원을 소환한 진의는 결단코 좌우 합작을 불필요로 인한다든가 혹은 단념하는 까닭이 아니다. 다만 합작위원회가 그 임무 수행 중에 있어서 도연히 좌익의 배반을 입어 그 목적을 달성할 희망이 없게 되었고, 또 이 회에서 발표한 7원칙 중에 반탁에 관한 조항이 최근에 문제되고 있는 하지 중장의 작년 12월 24일 서한의 내용과 이 달 5일 성명에 의하여 수포가 되고 만 까닭이다.

그러나 이 회를 취소한다 하여서 합작 공작을 위하여 진심으로 노력한 몇 분에 대한 우리의 경의는 감할 바가 아니거늘, 일시 감정상 충동으로써 그들에게 매욕을 가하려 하는 것은 천만부당한 것이다. 더구나 이 회를 영도하는 김규식 박사는 독립운동을 위하여 일생을 희생하였고 탁치 반대자로는 누구보다 철저한 터인데, 그를 찬탁자로 몰아넣으려는 것은 일종의 공심을 떠난 모략으로밖에 인정할 수 없다.

우리는 각별히 이런 점에 주의하여야 할 것이다. 또 한 가지 부언할 것은, 근일에 세간에서 운위하는 바 중간 노선은 정치 이상으로 있을 수 있는 것이며, 이것을 이상으로 하는 중간당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좌우 합작의 사명을 가지고 노력하던 합작위원들이 좌도 버리고 우도 버리고 중간만을 취한다면, 그것은 당파를 하나 더 만들어 내는 것밖에 아무것도 아니거니와, 이것은 결국 자기의 사명을 저버리는 분파 행동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현존한 합위는 해체하고 좌우 합작의 도경을 별개로 강구하지 않으면 아니될 것이다.

3.신탁

우리에게 독립을 약속하고 신탁을 실시하려는 것은 마치 병주고 약주는 셈이다. 본래 우리나라에 신탁을 적용하려는 것은 금차 대전의 목적에도 위반되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우리에게 모욕되는 구실을 만들어 견강부회하려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신탁을 적용할 임무를 가지고 제일선에 선 미, 소 양국도 그 불합리한 것을 잘 요해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므로 그들의 해설도 불일갈피를 잡을 수 없다.

먼저 소련측은 신탁을 후견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국제연맹 규약에 의하면 위임 통치와 후견은 동이라다고 규정되어 있다. 하지 중장은 신탁이 무엇인지는 자기도 모르나 신탁이 원조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기왕 원조할 바에는 자기도 모르고 우리도 원하지 아니하는 신탁으로만 원조할 필요는 없는 것이 아니냐? 말이 이에 이르면 삼척동자라도 그중에 명랑치 못한 무엇이 잠재한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최근 소지에 논한 바 "미국이 태평양 도시를 신탁 관리한다는 것은 합병과 같다."고 한 단안에 의하면 한국에 대한 4국 신탁관리는 4국 공동합병이라는 결론에 이르고 말 것이다. 그러면 신탁을 반대하는 자가 의인이며 애국자가 될지언정 독립 방해자나 반동분자가 될 이유가 어디 있으랴. 이것이야말로 신일지회를 산출할 가능을 가진 우험한 논법이다. 그러므로 신탁설을 전해 온 최초의 방향은 우리 전국, 전민족이 총궐기하여 생명을 걸고 일치하게 반대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소수 인사가 북쪽으로부터 오는 괴류에 휩싸여 3일 만에 돌연히 표변하여 반탁을 반대한 것뿐이다. 기실 신탁이 좋다고 감히 정면으로 찬성한 자는 하나도 없었다. 이 정황을 목도한 아놀드 소장은 귀국하는 즉시로 워싱턴에서 "한국 인민은 절대 다수가 탁치를 반대한다"고 언명하였다. 그런뒤 몇 달이 못되어 윌리암 씨가"한국 인민 중에는 탁치를 좋은 것으로 이해하는 자기 일증한다."고 한 것은 한인을 격분시킬 뿐 아니라, 세계를 현혹케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 동포 중 일부 인사가 실망적 상태에서 신탁정부라도 성립되었으면 민생 문제가 다소 해결되리라는 막연한 관념을 가지는 경향도 아주 없지는 아니한 듯. 그러나 이것은 갈증을 풀기 위하여 독약이라도 마시려는 위험한 착각이다. 우리 생존은 자주 독립에서만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워싱턴 선생도 "자유가 아니면 죽음이다'고 고함 친 것이다. 그러므로 필리핀도 미얀마도 월남도 인도네시아도 인도도 모두 독립을 위하여 투쟁하고 있나니, 어찌 한국만이 예외가 될 수가 있으랴.

자주 독립을 위하여 영국과도 감히 전쟁을 한 미국은 누구보다도 우리를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 또 일부 인사 중에는 본심으로는 신탁을 반대하면서도, 그것이 국제적으로 규정된 기정 사실이므로 약한 우리로서는 반대한다 하여도 도리어 역효과밖에 내지 못하리라는 착오 인식을 가지고, 오직 복종으로써 그들이 호의를 획득하여 약속한 5년 후에나 틀림없이 독립을 주기를 애걸하자는 주장하는 듯하다.

그러나 다른 약소국들은 자기의 손으로 조인해놓은 국제 조약도 억울한 것이면 불평등 조약 취소를 세계에 호소하여서 필경 목적을 관찰하거든, 우리만이 위의 사정을 세계에 호소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으랴. 사형선고를 받은 조인도 상고할 자유가 있거늘, 우리를 원조하는 맹우들이 우리의 독립을 위하여 정하였다는 방법이 우리의 원하는바가 아닐진대, 그들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호소도 하며 반대도 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랴. 하물며 당사자인 우리는 알지도 못하게 자기네끼리 정한 것이니, 그들도 양심상으로는 우리에게 동정할 것이다. "구한는 자에게 복이 오고 두드리는 자에게 문은 열리나니, 우리는 가장 냉정하고 평화로운 수단으로써 정의와 진리에 호소하여 신탁을 반대하자."

흑노 해방이라는 정의를 위하여는 동족전쟁까지 일으킨 미국의 자녀와, 10월혁명 이래 연합군의 시베리아 출병을 반대하며 그외에 누차의 외국간섭을 피하기 위하여 투쟁하던 쓰라린 경험을 가지고 있는 소련의 자녀들이 우리의 정당한 요구를 거절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양개 우방의 인민이 우리에 대한 이해와 동정이 일증월가하면 양국의 정책도 자연 호전될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미, 소 공위가 그 사명을 있는 이행치 못함으로 인하여 3상회의 결정까지도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이상, 우리가 우리 문제를 UN또는 3월 10일 모스크바에서 개최될 4상회의에 호소하여서 정당한 해결을 구하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그 회의에 참가할 영, 불은 미,소 양국과 같은 우리의 우방이며, 도 4상회의 후 조만간 중국이 참가하는 4상 혹은 5상회의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중국이 우리에게 동정할 것은 언급할 필요도 없거니와, 현시에 미얀마와 인도에 독립을 허하려는 영국도 반드시 우리에게 동정할 것이다. 그리고 불란서도 중,영에 못지 아니하게 동정할 것이다. 불란서는 3.1운동 이후 우리 독립운동에 특별 동정하여 우리 임시정부가 10여년간 상해 프랑스 조계에서 안전히 활동하도록 보호하여 주었으며 또 1945년 1월에는 불란서정부가 우리 임시정부와 사실상 외교관계를 건립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설령 국제관계가 오열하더라도 우리의 독립운동은 잠시를 정지할 수 없거늘, 이와 같이 절호한 기회를 앞에 놓고 어찌 노력하지 아니하랴. 전도의 희망이 뚜렷하니 오직 우리는 일치단결하여 신탁을 끝까지 반대하자. 우리의 생존은 독립에서 오는 것이요. 우리의 독립은 반탁에서 오는 것이다.

4. 38선

대전이 종료된 지도 벌써 18개월, 세계는 영구한 평화의 수립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는 이때, 우리나라에는 우리의 적을 적으로 하던 양개 우방의군대가 분단 점령을 하고 있다. 이 얼마나 모순되는 일이냐? 더구나 워싱턴 방면에서 오는 외전에 의하면, 권위있는 문무관원들이 언명하기를 아국과 일, 독에 군대를 주둔하는 것은 세계 평화 유지에 필요하다고 하였다. 일, 독에 군대 주둔이 필요하다는 것은 해석을 요하는 바이다.

한국 자신이 일, 독과 같이 평화에 위협을 준다는 것은 누구나 믿을 수 없는 것인즉,문제는 우리 본신에 있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군대 주둔 자체가 도리어 평화에 위협을 줄 것밖에 없다. 만일 이것을 부정하고 군대를 계속 주둔시킨다면 이로 인하여 생기는 후과로 말미암아 한국에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불행이 올 가능성이 있는 것이니, 이것은 우리에게 독립을 약속한 우방도 원하는 바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미,소 양군의 철퇴를 주장하는 것은 한국의 독립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요 실로 세계 평화 건설을 위해서도 큰 공헌이 있는 것이다.

일부 인사가 무슨 형식의 정부든지 한국에서 성립되는 즉시 38선이 철폐되리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는 듯하나, 이것은 일종의 희망뿐이다. 38선을 즉시 철폐시키는 유일한 길도 자주 독립 정부를 수립하는 데만 있을 것이니,우리는 남북 통일과 자주 독립을 위하여 미,소 양군의 철퇴로써 남북 통일과 자주 독립을 완성하기에 일치 노력하여야 하겠다.

5.국제관계

한반도 국제의 일환인 만큼 국제관계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며, 국제도 이 환절을 무시하고는 평화를 유지할 수 없는 것이다. 과거의 유명한 정치가는 말하기를,"국제간에는 영원한 우인도 없고 영원한 적인도 없다. "하였지만, 우리가 앞으로 영구한 평화를 수립하려면 피차간에 영원한 우인이 됨에서만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시에 있어서도 위는 모든 우방에 대하여 똑같이 친선을 도모할 것뿐이다.

그런데 호상 우인이 되는 요결은 힘의 강약, 물의 빈부 또는 색의 여하에 구애됨이 없이 절대 평등한 지위에서 호상 동정, 양해, 협조 함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국제간의 내왕과 유무상통을 환영하며, 또 우방에서 우리를 협조하기 위하여 각 방면에 있어서 기술을 제공하며 고문이 되어 주는 것을 요구도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불평등하게 대우하는 것을 절대로 거절할 것이다. 우리는 국제적 평등을 얻을 때까지 투쟁을 계속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완전히 절망하지 아니할 때까지는 우리의 투쟁은 평화적이며, 이지적이며, 거족적이어야 할 것이다. 평화적임에서 동정을 획득할 수 있으며, 이지적임에서 치밀한 계획을 가질 수 있으며, 거족적임에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요컨대 전민족이 일치 단결하여 유리한 국제관계는 차에 순응 하여서 완전 파악할 것이며, 불리한 국제관계는 진리로써 투쟁하며 화기롭게 유도하여서 호전시켜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 29년(1947) 2월 10일

김      구

김구 선생님은 남북한이 좌우합작을 통하여 대화와 타협으로 통일되기 전에는 절대 남한 단독정부를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모든 독립 진영이 단결하여 좌우합작 위원회에 적극 참여하고, 신탁통치에 반대하여 절대 독립을 주장하는 것이 민족의 분단을 막는 길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이 글은 1947년 김구 선생님이 당시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으며, 급변하는 한반도의 정세는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는 자료입니다.

김구 관련 사료 모음 :
2007/10/16 - [한국사사료모음/13.일제시대사료] - 대한민국 건국강령(대한민국 임시정부, 1941 / 조소앙)
2007/09/25 - [초중고방/요청자료실] - 김구의 나의 소원
2007/09/07 - [한국사정리/한국 근현대사 이야기] - (근현대사 20) 독립협회 이야기 - 본문
2007/08/08 - [초중고방/역사를 뒤집어 생각해보기] - 5만원, 10만원권 고액 화폐권 2차후보 역사인물 10명
2007/07/03 - [한국사사료모음/13.일제시대사료] - (한국사 사료) 김구의 백범일지 하권, 나의 소원 중 <민족국가> - 3가지 소원
2007/06/02 - [한국사사료모음/14.현대사사료]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성명서(1946)
2007/05/15 - [한국사사료모음/13.일제시대사료] - 대한민국 건국강령(1941, 김구와 조소앙의 삼균주의)
2007/05/15 - [한국사사료모음/13.일제시대사료] - 한국광복군 선언(1940, 김구와 조소앙)
2007/04/25 - [한국사사료모음/13.일제시대사료] - 한인애국단 선언문
2007/04/25 - [한국사사료모음/13.일제시대사료] - 도왜실기 원서(김구 약술, 엄창섭 편저)
2007/04/25 - [한국사사료모음/13.일제시대사료] - 대한민국 임시헌장 선포문
2007/03/17 - [한국사사료모음/13.일제시대사료] - 한국 광복군 서약문
2007/03/17 - [한국사사료모음/13.일제시대사료] - 한국 광복군의 강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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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건국강령(대한민국 임시정부, 1941 / 조소앙)

대한민국 건국강령

제1장 강령  

1. 우리 나라는 우리 민족이 반만년 이래로 공통한 말과 글과 국토와 주권과 경제와 문화를 가지고 공통한 민족정기를 길러온 우리끼리로서 형성하고 단결한 고정적 집단의 최고조직임.  

2. 우리 나라의 건국정신은 삼균제도에 역사적 근거를 두었으니, 선민의 명명한 바 수미균평위하면 흥방보태평이라 하였다. 이는 사회각층의 지력과 권력과 부력의 가짐을 고르게 하여 국가를 진흥하며 태평을 보전, 유지하려 함이니 홍익인간과 이화세계하자는 우리 민족의 지킬 바 최고의 공리임.  

3. 우리 나라의 토지제도는 국유의 유법을 두었으니 선현의 통론한바 준성조지공분수지법하여 혁후인사유겸병지폐라 하였으니 이는 문란한 사유제도를 국유로 환원하라는 토지혁명이다. 우리 민족은 옛 규칙과 새 법을 참작하여 토지제도를 국유로 확정한 것임.  

4. 우리 나라의 대외주권이 상실되었을 때에 순국한 선열은 우리 민족에게 동심복국할 것을 유촉하였으니, 이른바 '바라건대 우리동포는 국치를 잊지 말고 굳게 참고 노력하여 마음을 한가지로 하고 다 같이 덕을 닦아서 외국의 모멸을 두들겨부숨으로써 우리 독립을 회복하라'고 하였다. 이는 전후 순국한 수십만 선열의 전형적 유지로서 현재와 장래의 민족정기를 두들겨 일으킴이니 우리 민족의 남녀노소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임.  

5. 우리 나라의 독립선언은 우리 민족의 혁혁한 혁명을 일으킨 원인이며 신천지의 개벽이니 이른바 '우리 조국의 독립국임과 우리  민족의 자유민임을 선언하노라. 이로써 세계만방에 고하여 인류평등의 대의를 밝히며 이로써 자손만대에 경계하여 민족자존의 정권을 영유케 하노라' 하였다.

이는 우리 민족이 3-1헌전을 발동한 원기이며 동년 4월 11일에 13도 대표로 조직된 임시의정원은 대한민국을 세우고 임시정부와 임시헌장 10조를 만들어 반포하였으니 이는 우리 민족의 힘으로써  이족전제를 전복하고 5천년 군주정치의 허울을  파괴하고 새로운 민주제도를 건립하여 사회의 계급을 없애는 제일보의 착수였다. 우리는 대중이 핏방울로 창조한 국가형성의 초석인 대한민국을 절대로 옹호하며 확립함에 같이 싸울 것임.  

6. 임시정부는 13년 4월에 대외선언을 발표하고 삼균제도의 건국원칙을 천명하였으니, 이른바 '보통선거 제도를 실시하여 정권을 균히 하고 국유제도를 채용하여  이권을 균등하게 하고 공비교육으로써 학권을 균히 하며, 국내외에 대하여  민족자결의 권리를 보장하여서 민족과 국가의 불평등을 고쳐버릴 것이니ㅡ 이로써 국내에 실현하면 특권계급이 곧 없어지고 소수민족의 침몰을 면하고, 정치와 경제와 교육권리를 군히 하여  고저를 없이하고 동족과 이족에 대하여 또한 이렇게 한다'고 하였다.  이는 삼균제도의 제1차 선언이니 이  제도를 발양, 확대할 것임.  

7. 임시정부는 이상에 근거하여 혁명적 삼균제도로써 복국하고, 건국을 통하여 일관한 최고공리인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과 독립, 민주, 균치의 3종방식을 동시에 실시할 것임.

제2장 복국

1. 독립을 선포하고 국호를 일정히하여 행사하고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을 세워서 임시약법과 기타 법규를 반포하고 인민의 납세와 병역의 의무를 행하며 군력과 외교와 당무와 인심이 서로 배합하여 적에 대한 혈전을 정부로써 지속하는 과정으로 복국의 제1기라 할 것임.  

2. 일부 국토를 회복하고 당.정.군의 기구가 국내로 옮기어  국제적 지위를 본질적으로 취득함에 충족한 조건이 성숙할 때를 복국 제2기라 할 것임.  

3. 적의 세력에 포위된 국토와 포로된 인민과 침점된 정치. 경제와 말살될 교육과 문화 등을 완전히 탈환하고 평등지위와 자유의지로써 각국 정부와 조약을 체결할 때는 복국의 완성기라 할 것임.  

4. 복국기에서 임시 약헌과 기타 반포한 법구에 의하여 임시의정원의 선거로 조직된 국무위원회로서 복국의 공무를 집행할 것임.  

5. 복국의 국가주권은 광복운동자 전체가 대표할 것임.  

6. 삼균제도로서 민족의 혁명의식을 환기하며, 해외의 민족역량을 집중하여 광복운동의 총동원을 실시하여 장교와 무장대오를 통일훈련하여 상당한 병력의 광복군을 곳곳마다 편성하여 혈전을 강화할 것임.  

7. 적의 침탈세력을 박멸함에 일체  수단을 다하되 대중적 반항과  무장적 투쟁과 국제적 외교와 선전 등의 독립운동을 확대, 강화할 것임.  

8. 우리 독립운동을 동정하고 원조하는 민족과 국가와  연결하여 광복운동의 역할을 확대할 것이며 적 일본과 항전하는 우방과 절실히 연락하여 항일동맹군의 구체적 행동을 취할 것임.  

제3장 건국  

1. 적의 일체 통치기구를 국내에서 완전히 박멸하고  국도를 정하고 중앙정부와 중앙의회의 정식활동으로 주권을 행사하여 선거와 입법과 임관과 군사, 외교, 경제 등에 관한 국가정령이 자유로 행사되어 삼균제도의 강령과 정책을 추행하되 시작하는 과정을 건국의 제1기라함.  

2. 삼균제도를 골자로 한 헌법을 시행하여 정치, 경제, 교육이 민주적 시설로 실제상 균형을 도모하며 전국의 토지와 대생산기관의 국유화가 완성되고 전국 학령아동의 전수가 고등교육의 면비수학이 완성되고 보통선거 제도가 구속  없이 완전히 실시되어 전국 각 동,  리, 촌과 면, 읍과 도, 군, 부와 도의 자치조직과  행정조직과 민중단체와 조직이 완비되어 삼균제가 배합, 실시되고 경향 각층의 극빈계급에 물질과 정신상 생활정도와 문화수준을 높이어 보장되는 과정을 건국의 제2기라 함.

3. 건국기의 헌법상 국민의 기본권리와 의무는 다음 원칙에 의거하고 법률로 따로 정하여 시행함.

4. 건국시기의 헌법상 중앙과 지방의 정치기구는 다음 원칙에 의거함.

5. 건국시기의 헌법상 경제체계는 국민 각개의 균등생활을 확보함과 민족 전체의 발전 및 국가를 건립, 보위함과 민족 전체의 발전 및 연환관계를 가지게 하되 다음에 열거한 기본원칙에 의거하여 경제정책을 추진, 실행함.  

1) 대산업기관의 공구와 시설을 국유로  하고, 토지, 광산, 어업,  수리, 임업, 소택과 수상, 공증의 운수사업과 은행, 전신, 교통 등과 대규모이 농 ,공, 상, 기업과 성시,  공업구역의 공용적 주요산업은 국유로 하고, 소규모 혹 중소기업은 사영으로 함.  

2) 적의 침략, 침점 혹은 시설한 관공, 사유 토지와 어업, 광산,  농림, 은행, 회사, 공장, 철도, 학교, 교회, 사찰, 병원, 공원 등의 산업과 기타 토지 및 경제, 정치, 군사, 문화, 교육, 종교, 위생에 관한 일체 사유자본과 부적자의 일체 소유자본과 부동산을 몰수하여 국유로 함.

3) 몰수한 재산은 빈공, 빈농 및 일체 무산자의 이익을  위하여 국영 혹 공영의 집단 생산기관에 충당함을 원칙으로 함.  

4) 토지의 상속, 매매, 저압, 전양,  유증, 전조차의 금지와 고리대금업과사인의 고용농업의 금지를 원칙으로 하고 농장생산 소비와 무역의 기구를 조직 확대하여 농공대중의 물질과 정신상 생활정도와 문화수준을 높임.

5) 국제무역, 전기, 수도, 대규모의 인쇄소, 출판, 영화극장 등을 국유, 국영으로 함.

6) 노공, 유공, 여인의 야간노동과 연령, 지대, 시간의 불합리한 노동을 금지함.  

7) 농공인의 면비의료를 보급, 실시하여 질병소멸과 건강을 보장함.  

8) 토지는 자력자경인에게 나누어줌을 원칙으로 하되, 원래의 고용농, 자작농, 소지주농, 중지주농 등 농인지위를 보아 저급으로부터 우선권을 줌.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22년 이승만의 미국 신탁 위임론으로 분열된 이후, 백범 김구 선생님이 주석제도와 국무령 제도를 도입하며 광복기까지 항일 투쟁을 계속하였던 대표적인 정부입니다. 1941년의 이 법령은 일본으로부터의 자주독립을 원칙으로 하여 인류, 민족, 국가의 평등을 원칙으로 하여 그 안에서 정치, 경제, 교육을 균등히 하는 삼균주의를 표방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토지와 기업은 국가로 귀속한 이후, 다시 백성들에게 평등히 나눠주고 모든 사회 시설에 있어 신분과 재산 유무를 떠나 민족의 평등함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모든 재산의 국유화 이후, 특히 토지의 균등 분배를 통해 농민들의 생활을 보장하는 것을 개혁의 주로 정하고 있습니다.

그 전단계로 민족의 독립을 위한 조건으로 일본과의 타협이 없는 절대 독립 노선을 추구하면서, 광복을 위한 스스로의 노력을 위한 군비 마련 등의 기초를 잡고 있습니다. 이후의 법령에는 광복과 절대독립, 광복군 통합 등의 논의가 계속됩니다.

관련글 모음 :
2007/05/15 - [한국사사료모음/13.일제시대사료] - 대한민국 건국강령(1941, 김구와 조소앙의 삼균주의)
2007/05/15 - [한국사사료모음/13.일제시대사료] - 한국광복군 선언(1940, 김구와 조소앙)
2007/05/15 - [한국사사료모음/13.일제시대사료] - 한국광복군 전당대표대회 선언문(1941, 조소앙)
2007/04/27 - [한국사사료모음/14.현대사사료] - 한국 민주당 선언
2007/04/26 - [한국사사료모음/13.일제시대사료] -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국강령(1941)
2007/04/25 - [한국사사료모음/13.일제시대사료] - 대한민국 임시헌장 선포문
2007/03/17 - [한국사사료모음/13.일제시대사료] - 대한 민국 임시 헌장
2007/03/17 - [한국사사료모음/13.일제시대사료] - 한국 광복군 서약문
2007/03/17 - [한국사사료모음/13.일제시대사료] - 한국 광복군 선언문
2007/03/17 - [한국사사료모음/13.일제시대사료] - 한국 광복군의 강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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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5만원, 10만원권 고액 화폐권 2차후보 역사인물 10명

1. 어떤 사람이 후보가 되었을까?

한국은행에서는 2009년부터 발행될 5만원권, 10만원권 지폐의 인물 후보를 10명으로 압축해서 2차로 발표했습니다. 그 인물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김구, 김정희, 신사임당, 안창호, 유관순, 장보고, 장영실, 정약용, 주시경, 한용운

2차로 발표된 인물에 대한 각기 평가가 너무 상이하기도 합니다. 예로, 각종 인터넷 포털사이트 등에서 1위를 차지한 광개토대왕은 아예 평가후보에서 빠졌습니다. 국민들은 광개토대왕을 원한다고 하지만, 중국의 동북공정 등의 정치적 파장을 고려해 아예 처음부터 삭제한 것이지요.

여성사이트에서는 신사임당, 유관순, 허난설헌, 김만덕 등의 역사 속 여성들이 많은 표를 차지했지만 신사임당과 유관순을 제외하고는 모두 10인 후보에는 빠졌습니다.

단재 신채호 등 민족주의자들이나 독립 운동가들이 대거 빠진것도 눈의 띕니다. 신채호의 사상은 무정부주의적인 사상이 많다는 점, 안재홍은 월북한 민족주의자라는 점, 윤동주, 김소월, 방정환 등도 10인 후보에서는 탈락하였습니다. 소위 좌파 사상가라는 것도 미래성에 맞지 않은 듯 합니다.

건국이후 인물들은 모두 제외된 점도 특이합니다. 박정희, 김대중, 이승만 등의 인물은 역사적 평가와 업적이 규명되지 않은 점이 많고, 국민적 논란 및 정치적 파장이 크다는 입장인 듯 합니다. 이들은 아예 후보군에도 없었습니다.

2. 인물 선정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10만원권은 이후 오랜 기간동안 한국 지폐의 최고권으로 나라를 대표할 돈입니다. 지금까지 나라를 대표하는 돈인 만원권은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이었습니다. 세종대왕의 업적이 너무 눈부신 만큼 여기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0만원권 지폐에서 세종대왕만큼의 업적을 가진 인물을 선정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될 듯 합니다. 그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10만원권의 지폐에 들어갈 역사적 인물은 어떤 기준을 가져야 할까요? 한번 정리해 보았습니다.

1. 그 나라의 역사성을 대표하는 인물이어야 한다.

첫 번째, 가장 중요한 기준은 그 나라의 역사성을 대표하는 인물이어야 합니다. 대부분의 나라들이 화폐 인물의 기준을 역사성에 두고 있습니다. 영국의 모든 지폐에는 엘리자베스 2세가 들어갑니다. 인도의 모든 지폐에는 간디가 들어갑니다. 중국의 지폐에는 어김없이 마오쩌둥이 나옵니다. 모든 지폐의 앞면에 이 인물들을 넣고, 뒷 면에서는 다른 분야인 정치, 경제, 사회, 문화면의 인물들을 새겨넣습니다. 같은 인물이 계속 나오는 돈이 식상할지 모르지만, 이 인물들이 그 나라를 대표하는 인물들이기 때문입니다.

영국은 엘리자베스 1세 때 르네상스, 절대왕정, 신항로 개척, 식민지 시대를 열었습니다. 여왕은 영국인들의 자부심을 표현합니다. 영국 왕실은 아직도 여왕을 사랑하며, 국민들은 왕실을 존중합니다. 지금 1952년 즉위한 현재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화폐에 들어감으로서 <웃고 있는 여왕의 모습>이 영국의 모습을 상징하도록 도안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과거 역사 속의 엘리자베스 1세나, 빅토리아 여왕이 아니라 현재 여왕을 화폐에 넣음으로서 국민적 단합을 유도한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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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화폐 50 파운드 - 엘리자베스 2세의 웃는 모습

중국의 화폐의 마오쩌둥은 중국 근현대사를 상징하며, 인도의 간디 역시 인도의 평화사상을 상징하도록 도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 인물들을 보면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어야 진정한 국민 화폐의 역할을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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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화폐 1천루피 - 간디의 자상한 모습

2. 외국인들이 보기에 그 나라의 정체성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화폐를 선정할 때 중요한 점의 하나는 <화폐가 통용되는 곳이 국내뿐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외국화폐를 볼 때 화폐 속 인물들이 누구인지 궁금해하는 것처럼 외국인들도 우리 화폐에서 우리 나라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하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한은의 후보군에서 단군, 광개토대왕, 을지문덕 등은 후보에 없거나, 중요성이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외국인들이 보기에 큰 가치가 없거나, 주변국과의 논란이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건 큰 오산이라고 생각됩니다.

미국 화폐의 조지 워싱턴은 영국과의 독립전쟁을 이끈 장군입니다. 하지만 영국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화폐에서 빼지는 않습니다. 광개토대왕을 중국의 동북공정을 고려해서 후보군에서 제외되거나, 단군이 실존인물인지 알 수 없다는 이유로 후보군에서 제외한다면 우리 역사의 정체성을 우리 스스로 잘라 버리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단군이 우리 국조가 아니고, 광개토대왕이 영토를 넓힌 것이 사실이 아닌지는 생각할 가치도 없을 뿐더러, 외국의 입장을 고려하여 우리 정체성을 폄하하는 입장으로는 제대로 된 화폐를 만들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주변국의 입장을 살펴 우리의 외교자세를 선택한다는 실리주의는 실리주의가 아니라 사대주의로 비칠 수도 있습니다.

중립국인 스위스는 인물 화폐가 아니라 뭔지도 모를 추상화 같은 화폐를 도안하기도 했습니다. 도대체 말도 안되는 그 화폐를 통용한 것은 미래로 나가는 스위스인의 정체성을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추상화같은 화폐는 둘째로 하고라도, 역사 속 인물들을 특정한 이유로 배제하는 행동만큼은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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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래봐도 모르겠습니다. 스위스 화폐
  

화폐를 보는 외국인들이 그 인물을 보는 순간, 이나라의 역사성과 민족적 기상이 살아있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화폐, 또는 그 나라의 역사성을 한 눈에 생각할 수 있는 화폐가 되어야 합니다.

3. 사상적 체계가 살아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화폐를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순신, 이황, 이이, 세종대왕.... 모두 이씨 입니다. 다른 종친회에서 반발할만도 하네요. 이번 화폐에서는 이씨를 빼자는 움직임도 있습니다.

그런데, 기존 화폐의 특징은 이씨라는 것보다 이들이 모두 조선시대 성리학과 연관된 인물이라는 점입니다. 세종대왕이야 성리학적인 애민정치를 하였고, 이황과 이이는 성리학을 완성시키고 조선성리학으로 발전시킨 분들입니다. 이순신 역시 성리학이 자리잡혀가고 붕당정치의 흐름 속에서 살았던 인물이지만, 이순신의 업적은 성리학보다는 장군으로서 위대함이였죠. 기존 화폐의 기준에 사상적인 측면이 들어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실제 화폐에 들어갈 인물이라면 사상적 체계가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의 업적이 어떤 사상에서 나온 것이고, 그 사상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표현되고 있었느냐가 중요합니다. 화폐의 인물은 그 인물의 단순한 업적이 아니라, 그 시대 속의 상황 속에서 그 사람이 행한 합리적 행위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지나치게 조선시대 성리학 인물만으로 화폐가 도안되었습니다. 우리 역사에 조선시대만 있었고, 우리 역사의 황금기가 조선시대였다라는 인식을 할 수밖에 없는 화폐 도안이었습니다.

우리 역사에는 고조선, 철기시대 국가들,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고려 그리고 대한제국까지 많은 영토국가가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이외의 국가에서도 사상적인 체계가 있는 인물들은 참 많습니다. 유교 인물은 많았지만, 정작 조선 이전 역사에 큰 흐름을 좌지우지 했던 불교사상이나, 민족 종교인 천도교, 대종교 등은 포함된 적이 없습니다.

또, 일제시대 민족운동을 한 사람들의 사상은 지금까지 폄하되어 있었습니다. 당대 일제에 대한 저항은 무정부주의, 폭력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계몽주의 등 다양했습니다. 그 사람들의 사상이 공산주의인지, 사회주의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시에는 그 사상이 일본에 저항할 수 있는 하나의 방편이었으니까요. 사회주의를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당시의 상황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채호는 무정부주의자라서 제외한다면, 일본 고관들에게 폭탄을 던진 한인애국단의 리더 김구 선생님도 폭력주의자가 됩니다.

사상적 체계는 당시 상황을 고려하여 계산되어야 합니다. 단지 성리학을 완성시킨 인물들만 지폐가 채워진다면 미래에 대한 지향성이 살아나지 않습니다.

4. 한국 사회의 미래를 엿볼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화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역사성이지만, 그 역사성은 과거의 업적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역사성이여야 타당합니다. 예로, 장영실은 우리나라가 지향할 IT산업과 이공계 산업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10인안에 선정되었고, 장보고는 후기신라시대 해상왕으로서 그 상업적 마인드와 탁월한 외교능력 등이 인정되어 10인안에 선정되었습니다.

단, 미래성만 있는 인물은 국민화폐로서 무게감이 떨어집니다. 역사성과 확실한 사상체계, 우리 조상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인물 중에서 미래성을 볼 수 있는 인물로 선정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3. 정말 고심해서 좋은 인물이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선정된 역사 속의 인물들에 대하여 벌써 말이 많습니다. 이 사람은 안된다. 이 사람이 왜 빠졌는가.... 말이 많죠. 선정된 인물들 모두 역사 속에서는 훌륭한 위인들입니다. 그러나 화폐에 들어갈 인물은 위인의 경중을 따져서 선별해서는 안됩니다. 역사성과 사상성, 인간적 노력, 미래성 까지 갖춘 인물을 가려야 합니다.

이번에 10인의 후보를 보면 역사성, 사상성 보다는 한국사회의 미래지향적인 면을 많이 고려한 듯 보입니다. 역사적인 위대한 인물들은 더 많을 지 모르지만, 그 인물들 가운데 미래 한국사회의 이상향으로 적합한 인물을 후보로 고른 듯 싶네요.

민족정체성만으로 선별한다면, 시조인 단군과 광개토대왕을 뽑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후보군에 없습니다. 감강찬, 을지문덕, 서희 등 역사속 무관들은 없습니다. 한국 사회가 지향하는 바와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미래의 한국사회가 여성을 중시하는 사회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신사임당과 유관순 같은 여성인물들이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과학사회를 주도하는 미래의 한국을 본다면 장영실을 뽑을 수 있겠죠.

실학자로서 기존의 사상체계와는 다른 변화된 사상을 제시하여 조선사회의 변화를 꿈꾼 정약용도 후보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조선후기 실학자로서는 정약용과 김정희 두 분이 들어가 있습니다. 국가 속에 포함되지 않은 인물이지만, 해상왕 장보고의 상업적 마인드와 미래 지향적 태도도 높게 평가되었습니다.

일제시대 이후의 인물로서 독립에 앞장선 김구, 안창호, 한용운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실제 일본의 침략에 의해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라는 기틀을 잡게 된 중요한 시점의 인물들이 화폐 도안에 없다는 점에서 김구 선생님도 유력한 후보중의 한 분이십니다.

이제 10인 가운데 2분이 5만원권, 10만원군의 지폐에 들어갈 인물이 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여러 사회단체들의 입장 속에서 추려낸 후보군이라, 역사성을 가진 인물보다는 미래성을 가진 인물들을 많이 택하였다는 점이 아쉽긴 합니다. 하지만, 이 인물들 중에서 어떤 인물이 한국을 대표할 지폐에 들어가게 될지 기대가 많이 됩니다.

인터넷에서 블로거들이 합성한 10만원권 인물......(재미로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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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가 장금이까지 지폐 후보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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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민족전선의 좌우합작 5원칙 (1946년)

  1.조선의 민주 독립을 보장하는 3상회의 결정을  전면적으로 지지함으로써 미소공의 속개촉진 운동을 전개하여 남북통일의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에 매진하여 북조선 민주주의민족전선과 직접 회담하여 전국적 행동통일을 기함. 

  2.토지개혁(무상몰수.무상분여), 중요 산업 국유화, 민주주의 노동법령  및 정치적 자유를 위시한 민주주의 기본과업에 매진할 것. 

  3.친일파 민족반역자 친파쇼 반동 거두들을 완전히 배제하고  테러를 철저히 박멸하며 검거.투옥된 민주주의 애국지사의 즉시석방을 실현하여 민주주의적 정치운동을 활발히 전개할 것. 

  4.남조선에 있어서도 정권을 군정으로부터 인민의 자주기관인  인민위원회에 즉시 이양할 것. 

  5.군정 고문기관 혹은 입법기관 창설에 반대할 것. 

<http://historia.tistory.com 티스토리 역사블로그 - 히스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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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건국강령(1941, 김구와 조소앙의 삼균주의)

제 1장 강령 

1. 우리 나라는 우리 민족이 반만년 이래로 공통한 말과 글과 국토와 주권과 경제와 문화를 가지고 공통한 민족정기를 길러온 우리끼리로서 형성하고 단결한 고정적 집단의  최고조직임. 

2. 우리 나라의 건국정신은 삼균제도에 역사적 근거를 두었으니, 선민의 명명한 바 수미균평위하면 흥방보태평이라 하였다. 이는 사회각층의 지력과 권력과 부력의 가짐을 고르게 하여 국가를 진흥하며 태평을 보전, 유지하려 함이니 홍익인간과 이화세계하자는 우리 민족의 지킬 바 최고의 공리임. 

3. 우리 나라의 토지제도는 국유의 유법을 두었으니 선현의 통론한바 준성조지공분수지법하여 혁후인사유겸병지폐라 하였으니 이는 문란한 사유제도를 국유로 환원하라는  토지혁명이다. 우리 민족은 옛 규칙과 새 법을 참작하여 토지제도를 국유로 확정한 것임. 

4. 우리 나라의 대외주권이 상실되었을 때에 순국한 선열은 우리 민족에게 동심복국할 것을 유촉하였으니, 이른바 '바라건대 우리동포는 국치를 잊지 말고 굳게 참고 노력하여 마음을 한가지로 하고 다 같이 덕을 닦아서 외국의 모멸을 두들겨부숨으로써 우리 독립을 회복하라'고 하였다. 이는 전후 순국한 수십만 선열의 전형적 유지로서 현재와 장래의 민족정기를 두들겨 일으킴이니 우리 민족의 남녀노소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임. 

5. 우리 나라의 독립선언은 우리 민족의 혁혁한 혁명을 일으킨 원인이며 신천지의 개벽이니 이른바 '우리 조국의 독립국임과 우리  민족의 자유민임을 선언하노라. 이로써 세계만방에 고하여 인류평등의 대의를 밝히며 이로써 자손만대에 경계하여 민족자존의 정권을  영유케 하노라' 하였다. 이는 우리 민족이 3-1헌전을 발동한 원기이며 동년 4월 11일에 13도 대표로 조직된 임시의정원은 대한민국을 세우고 임시정부와 임시헌장 10조를 만들어 반포하였으니 이는 우리 민족의 힘으로써  이족전제를 전복하고 5천년 군주정치의 허울을  파괴하고 새로운 민주제도를 건립하여 사회의 계급을 없애는 제일보의 착수였다. 우리는 대중이 핏방울로 창조한 국가형성의 초석인 대한민국을 절대로 옹호하며 확립함에 같이 싸울 것임. 

6. 임시정부는 13년 4월에 대외선언을 발표하고 삼균제도의 건국원칙을 천명하였으니, 이른바 '보통선거 제도를 실시하여 정권을 균히 하고 국유제도를 채용하여  이권을 균히 하고 공비교육으로써 학권을 균히 하며, 국내외에 대하여  민족자결의 권리를 보장하여서 민족과 국가의 불평등을 고쳐버릴 것이니ㅡ 이로써 국내에 실현하면 특권계급이 곧 없어지고 소수민족의 침몰을 면하고, 정치와 경제와 교육권리를 군히 하여  고저를 없이하고 동족과 이족에 대하여 또한 이렇게 한다'고 하였다.  이는 삼균제도의 제1차 선언이니 이  제도를 발양, 확대할 것임. 

7. 임시정부는 이상에 근거하여 혁명적 삼균제도로써 복국하고, 건국을 통하여 일관한 최고공리인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과 독립, 민주, 균치의 3종방식을 동시에 실시할 것임.

제 2장 복국 

1. 독립을 선포하고 국호를 일정히하여 행사하고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을 세워서 임시약법과 기타 법규를 반포하고 인민의 납세와 병역의 의무를 행하며 군력과 외교와 당무와 인심이 서로 배합하여 적에 대한 혈전을 정부로써 지속하는 과정으로 복국의 제1기라 할  것임. 

2. 일부 국토를 회복하고 당.정.군의 기구가 국내로 옮기어  국제적 지위를 본질적으로 취득함에 충족한 조건이 성숙할 때를 복국 제2기라 할 것임. 

3. 적의 세력에 포위된 국토와 포로된 인민과 침점된 정치. 경제와 말살될 교육과 문화 등을 완전히 탈환하고 평등지위와 자유의지로써 각국 정부와 조약을 체결할 때는 복국의 완성기라 할 것임. 

4. 복국기에서 임시 약헌과 기타 반포한 법구에 의하여 임시의정원의 선거로 조직된 국무위원회로서 복국의 공무를 집행할 것임. 

5. 복국의 국가주권은 광복운동자 전체가 대표할 것임. 

6. 삼균제도로서 민족의 혁명의식을 환기하며, 해외의 민족역량을 집중하여 광복운동의 총동원을 실시하여 장교와 무장대오를 통일훈련하여 상당한 병력의 광복군을 곳곳마다 편성하여 혈전을 강화할 것임. 

7. 적의 침탈세력을 박멸함에 일체  수단을 다하되 대중적 반항과  무장적 투쟁과 국제적 외교와 선전 등의 독립운동을 확대, 강화할 것임. 

8. 우리 독립운동을 동정하고 원조하는 민족과 국가와  연결하여 광복운동의 역할을 확대할 것이며 적 일본과 항전하는 우방과  절실히 연락하여 항일동맹군의 구체적 행동을  취할 것임. 

제 3장 건국 

1. 적의 일체 통치기구를 국내에서 완전히 박멸하고  국도를 정하고 중앙정부와 중앙의회의 정식활동으로 주권을 행사하여 선거와 입법과 임관과 군사, 외교, 경제 등에 관한 국가정령이 자유로 행사되어 삼균제도의 강령과 정책을 추행하되 시작하는 과정을 건국의 제1기라함. 

2. 삼균제도를 골자로 한 헌법을 시행하여 정치, 경제, 교육이 민주적 시설로 실제상 균형을 도모하며 전국의 토지와 대생산기관의 국유화가 완성되고 전국 학령아동의 전수가 고등교육의 면비수학이 완성되고 보통선거 제도가 구속  없이 완전히 실시되어 전국 각 동,  리, 촌과 면, 읍과 도, 군, 부와 도의 자치조직과  행정조직과 민중단체와 조직이 완비되어 삼균제가 배합, 실시되고 경향 각층의 극빈계급에 물질과 정신상 생활정도와 문화수준을 높이어 보장되는 과정을 건국의 제2기라 함.

3. 건국기의 헌법상 국민의 기본권리와 의무는 다음 원칙에 의거하고 법률로 따로 정하여 시행함.

4. 건국시기의 헌법상 중앙과 지방의 정치기구는 다음 원칙에 의거함.

5. 건국시기의 헌법상 경제체계는 국민 각개의 균등생활을 확보함과 민족 전체의 발전 및 국가를 건립, 보위함과 민족 전체의 발전 및 연환관계를 가지게 하되 다음에 열거한 기본원칙에 의거하여 경제정책을 추진, 실행함. 

  1) 대산업기관의 공구와 시설을 국유로  하고, 토지, 광산, 어업,  수리, 임업, 소택과 수상, 공증의 운수사업과 은행, 전신, 교통 등과 대규모이 농 ,공, 상, 기업과 성시,  공업구역의 공용적 주요산업은 국유로 하고, 소규모 혹 중소기업은 사영으로 함. 

  2)적의 침략, 침점 혹은 시설한 관공, 사유 토지와 어업, 광산,  농림, 은행, 회사, 공장, 철도, 학교, 교회, 사찰, 병원, 공원 등의 산업과 기타 토지 및 경제, 정치, 군사, 문화, 교육, 종교, 위생에 관한 일체 사유자본과 부적자의 일체 소유자본과 부동산을 몰수하여 국유로 함.

  3)몰수한 재산은 빈공, 빈농 및 일체 무산자의 이익을  위하여 국영 혹 공영의 집단 생산기관에 충당함을 원칙으로 함. 

  4)토지의 상속, 매매, 저압, 전양,  유증, 전조차의 금지와 고리대금업과사인의 고용농업의 금지를 원칙으로 하고 농장생산 소비와 무역의 기구를 조직 확대하여 농공대중의 물질과 정신상 생활정도와 문화수준을 높임. 

  5)국제무역, 전기, 수도, 대규모의 인쇄소, 출판, 영화극장 등을 국유, 국영으로 함.

  6)노공, 유공, 여인의 야간노동과 연령, 지대, 시간의 불합리한 노동을 금지함. 

  7)농공인의 면비의료를 보급, 실시하여 질병소멸과 건강을 보장함. 

  8)토지는 자력자경인에게 나누어줌을 원칙으로 하되, 원래의 고용농, 자작농, 소지주농, 중지주농 등 농인지위를 보아 저급으로부터 우선권을 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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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복군 선언(1940, 김구와 조소앙)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원년(1919) 정부가 공포한  군사조직법에 의거하여 중화민국 총통 장개석 원수의 특별 허락으로 중화민국 영토내에 광복군을 조직하고 대한민국 22년(1940) 9월 17일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함을 자에 선언한다. 

한국광복군은 중화민국 국민과 합작하여 우리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타도하기 위하여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을 계속한다.  과거 30여 년간 일본이 우리 조국을 병합 통치하는 동안 우리 민족의 확고한 독립정신은 불명예스러운 노예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무자비한 압박자에 대한 영웅적 항쟁을 계속하여왔다. 

영광스러운 중화민족의 항전이 4개년에 도달한 이때 우리는 큰 희망을 갖고 우리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우리의 전투력을 강화할 시기가 왔다고 확신한다.  우리는 중화민국 최고영수 장개석 원수의 한국민족에 대한 원대한 정책을 채택함을 기뻐하며 감사와 찬사를 보내는 바이다. 우리 국가의 해빙운동과 특히 우리들의 압박자 왜적에 대한 무장항전의 준비는 그의 도의적 지원으로 크게 고무되는 바이다. 

우리들은 한,중 연합전선에서 우리 스스로의 계속 부단한 투쟁을  감행하여 극동 및 아시아 인민 중에서 자유, 평등을 쟁취할 것을 약속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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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왜실기 원서(김구 약술, 엄항섭 편저)

  본단(한인애국단)은 이에 제1차의 건투사를 세상에 공개하노니 이는  결코 과장의 의미에서 나온 것도 아니요, 또한 이것을 선전의 재료로 삼자는 바도 아니다. 다만 오인의 일편 정성을 피력하여 한국 3천만 인민이 모든 굴욕을 받으며 분투해온 간난신고를 읍소하여 세산의 인도주의자의 공론을 구하려 하며, 아울러 이것으로써 박빙을 밟는 것 같은 위경에 있는 중화 민족에게 다소나마 참고와 도움이 된다면 더욱 행인가 할 뿐이다.

  아! 난폭한 일본이 중화를 유린함에 그 과정이 우리 한국과  상동하니 중화정부의 저항방법과 인민의 구국운동도 또한 20년 전의 우리 한국과 흡사한  바 있다. 중국이 이 존망절속지추에 임하여 급히 일어나 신명을 도하여 횡포한 일본과  싸우지 않는다면, 일을 그르쳐놓은 다음에야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대저 옛날의 망국은 그 임금만 망하였으나 지금의 망론은  그 종족까지 멸망하며, 옛날의 복국은 쉬웠으나 지금의 복국은 어렵고, 망국의 참혹하고 독랄함이 옛날의 몇 배 더한 것이니, 멸망하기 전에 무엇보다도 스스로 경구격겨하여 우리 한국의  복철을 밟지 않도록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인도는 나라가 크나 망하였고 네팔은 작으면서도 존재해 있으니 실로 국토의 대소가 존망과 흥쇠를 좌우하는 것이 아니며, 이는 전혀 이 국토에  삶을 받은 사람들의 분투정신의 여하에 있을 뿐이고, 이미 위망지세가 명료함에도 불구하고 관은 민에게 죄를 돌리고, 민은 관에게 죄를 돌린다는 것은 똑같이 무익한 일이다.  

  이제 중화는 동북을 잃었으나 4억의 대중이 죽음을 결하고 적을 대항한다면 약함도 변해서 강해질 수 있고, 급속히 뜻한 바를 실현할 수 있는  건전한 진전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하물며 우리 한국 3천만 우군이 몸과 마음을 바쳐 적의 뒤를 쫓고자 함에 있어서랴!  

  오호! 과거 명조때에 있어서  일본은 한국에 길을 얻어  명나라를 침범하려 했고, 한국은 이것을 거절한 까닭으로 참화를 받았으나 명조의 구원의 힘으로 마침내 공동의 적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니 한국과 중국이 순치의 관계를 가지고 있음은 석일로부터 명백한 것이다.  

  지금 한국이 망하고 중화가 동북을 잃어버렸으니 동북을 잃고는 한국의 광복이 더욱 어렵다는 것도 명백히 증명되는 바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혈육을 가지고 우리의 정성을  가지고 분용히 앞으로 매진하면 무엇이 또 두려울 것이 있으랴!  

  오호! 대세는 분명하다. 불행히도 중화는 일본의  압제를 받게 되었으니 참혹한 간난신고는 과거의 만, 청의 그것보다도 몇 배 더 심한 것이며, 그 부흥의 곤란함도 신해지역(신해혁명-편주)에 비해도 몇  배 더 어려울 것이니 중국이 멸망한다면 우리 한국은 영원히 광복할 수 없는 아픔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한국은 한국을 위하여 광복을 꾀하려 해도 반드시 먼저 중국을 구해야 하고,  중국을 위하여 광복을 꾀함에도 한국은 또한 중국을 구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입이 닳도록 애원하며 우리 한, 중 양국 동지에게 다  같이 각성해 새 전장에 목숨을 함께 바치자는 소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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