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6화. 격의 불교 이야기...

1. 중국 불교는 청담에서 비롯되었다.

자, 이제 본격적인 중국 불교 이야기를 해보자. 중국에 불교가 처음 전파된 것은 후한 시대이다. 지난 장에서 설명했듯이 쿠샨 왕조의 적극적인 확장 정책과 외교정책으로 대승 불교가 각지에 전파되었다.

그러나, 중국 한나라에서의 불교는 <교양> 철학 수준이었다. 중국 <한>나라는 가장 전통적인 중국 왕조이다. 중국 민족은 자신들이 <한족>이라고 믿고 있으며, 중국 전통 문화의 원류는 <한나라>에서 기반이 잡혔다고 생각했다. 가장 전통적인 <유학>도 한나라 시기에 완성되었다. 한무제가 <유교>를 국교화하고, <한자>의 정형틀을 완성시킨 것이다.

불교가 한나라에 전파되었지만, 그것은 외국 철학의 일종일 뿐이었다. 지배층이 교양을 쌓기 위해 읽어보는 수준이었을 뿐, 중국 지식인들은 관리 임용을 위해 <유학>을 익혔다.

그럼, 불교가 주목받기 시작한 시기는 언제부터일까?

후한이 멸망할 무렵부터이다. 중국 후한시대는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고, 원소, 조조 등 호족세력들이 판치는 무법천하였다. 백성들은 길고 긴 전쟁의 시대로 막 들어선 것이다.

위, 촉, 오의 삼국시대부터 남북조 시대의 분열까지 길고 긴 분열의 시대는 시작되었다. 서로 치고받고 싸우는 시기가 되기에 윤리적인 측면이 강한 <유학>은 왕따당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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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진남북조 시대의 중국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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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진남북조 시대의 국가 먹이사슬>

혼란한 시기에 사람들이 찾는 종교는 <내세>라던가 <자연>을 강조하는 종교였다. 사람들은 유학이 아닌, 도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한나라가 망한 뒤, 실권을 잡은 것은 삼국 중 조조의 <위>나라였다. 위 나라는 강력한 법치주의에 의해 국가 통일을 이루려고 했다. 하지만, 정치가가 아닌 일반 학자, 사상가들은 <도교>에서 혼란의 원인을 찾으려고 했다.

당시 도교는 혼란의 원인을 <인간의 욕심>으로 보았다. 서로 정권을 잡으려고 하는 탐욕자들이 싸우고 죽이는 탓에 백성들만 전쟁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지 않는가?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무엇이란 말인가?

위나라의 학자들은 도가사상의 원리인 <자연으로 돌아가자>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하였다. 이렇게 노자, 장자 등의 철학에서 현실의 문제점을 발견해보려고 노력하는 것을 <현학>이라고 한다.

<현학>은 노자와 장자의 철학에서 우주의 근본 원리를 규명하려는 학문이다. 우주의 근본 원리인 <도>를 <현>이라고도 부르기 때문에 현학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현학은 하안(190-249), 왕필(226-249) 등에 의해 전개되었다.

하안과 왕필 등의 사상가들은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문제점이 무언가를 따지려고 했는데, 이런 대화를 <청담>이라고 한다. <청담>이란 말 그대로 <깨끗한 세계의 담론>이란 뜻이다. 위나라에서 시작된 이들의 <대화>를 역사에서는 <정음시대의 현학>이라고 부른다. 하안은 노장사상으로 논어를 해석하였고, 왕필은 노장사상으로 주역을 해석하였다고 한다.

그럼 이들의 대화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간단하다. 도학에 나오는 사상들이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는지 따져보는 것이었다. 도학의 문구들은 너무나 심오하다. 노자의 <도덕경>은 서양 학자들도 인정하는 동양 최고의 학술서이다. 노자는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무위자연>, 국가는 작을수록 좋다라는 <소국과민>, 가장 행복한 삶은 자연에서의 삶이라는 <자연합치> 등을 주장하였다.

노자의 사상에 맞춰서 모든 사상을 재해석하는 것이 <현학>이다. 유교사상은 현실사회의 직접적인 문제와 인간 윤리를 주로 다룬다. 그러나 후한이 망한 뒤의 세상은 무법 천지이다. 인간 윤리는 이제 <전쟁없는 사회>라는 틀에서 다시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청담 사상가들은 현실의 윤리보다는 <전쟁>의 참혹함, 사후세계는 어떤 것일까라는 내세에 대한 상상, 삶과 죽음과 인간관계에 대한 탐구에 더 집중한다.

그런데, 생각하면 할수록 답은 한가지였다. 대화를 나누던 청담 사상가들은 <전쟁>에 골몰하는 국가를 비판하기 시작하였고, 점점 현실과 떨어져 중국 전통 윤리를 비관하기 시작한다. 자, 그럼 청담 사상가들은 암울한 현실을 벗어나 노자의 세계로 가기 위한 방편으로 어떤 철학을 찾았을까?

불교에 그 답이 있었다. 불교는 만민에 대한 구원, 내세에 대한 윤회와 열반 사상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다는 <공> 사상을 강조하여 <허무주의>를 보여주면서도, 스스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 혼란한 시기에 딱 맞다. 얼마나 맞춤형 철학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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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한 위진남북조 시기의 중국인들은 지긋지긋한 전쟁에 질려있었다. 삼국시대, 위의 조조, 서진시대, 5호 16국의 이민족 시대, 남북조의 분열시대.... 길고 긴 전쟁의 역사는 훗날 <수>나라가 통일국가를 세울 무렵에야 끝나는 것이다.

이 불안한 시기에 불교는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인간은 죽은 뒤 자신의 업보에 의해 <윤회>를 하게 된다. 지금 현상에서의 고난은 전생에서의 죄를 씻는 과정이다. 그 업이 끝나고 현생에 덕을 쌓으면 내세에는 행복한 날이 기다리고 있다. (업설) 지금 전쟁을 일으킨 자들은 많은 죄를 지은 것이고 생이 끝나면 죄를 받을 것이다.(인과응보론) 절망에 빠진 백성들에게 얼마나 딱 맞춤인 철학인가?

그렇다고 지배층과 국가가 불교를 탄압한 것도 아니다. 한나라가 망하고, 조조 일가의 시대가 끝난 뒤 중국은 5호 16국이라는 이민족 사회를 경험하게 된다. 이민족의 왕들은 <유학>에 관심조차 없었다. 오히려 중국인들에게는 생소한 <불교>가 이민족 취향에는 딱 맞았다.

이민족 왕들은 불교를 주술적 방편으로 이용하였다. 흉년이 들면 승려가 주술을 펼쳐주었다. 질병과 재난은 불제자들의 노력으로 극복될 수 있다고 믿었다. 큰 전쟁을 앞두고 학식이 높은 승려들에게 전쟁의 승패를 묻기도 하였다. 또, 인도의 아쇼카 왕이 했던 것처럼 왕 자체가 불법을 수호하는 <불교의 수호신>임을 자청하였다. 왕이 곧 불교의 신이라는 이념은 불교를 믿는 백성들을 한 마음으로 묶어줄 수 있었다.

왜 불교가 민간신앙이나 주술신앙, 국가 호국 불교로 전락하게 되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혼란한 이 당시에는 불법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불교는 왕권 강화를 위한 <사상>으로 충분했다. 혼란기의 각국 지배자는 큰 사찰과 어마어마한 불상, 귀따가운 큰 법회를 열어가면서 왕권이 강하다는 것을 과시하였다.

어렵고 험난한 시기에 불교의 원래 뜻이 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해석하든, 종교는 현실에 도움만 주면 되지 않는가?

3. 대충 때려맞춰서 이해한 격의 불교

초기 청담 사상가인 왕필은 유교, 도교, 불교는 결국 같은 것이라고 말하였다.

왕필은 도교의 기준에 맞춰 다른 종교의 특징을 규정하였다. 노자와 장자가 도가 사상을 창시하면서 우주의 근본 원리와 인간의 행동 가짐을 <도>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공자 역시 큰 <도>를 깨우친 사람이고, 석가모니도 보리수 밑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모든 성인들이 결국 <도>를 깨달았으니, 모든 믿음은 하나가 아니겠는가?

왕필이 주장한 <유,불,도교의 3교 일치설>은 지둔(314-366)에 의해 구체화 되었다.

지둔은 불교 스님이다. 왕필이 도교 기준으로 종교를 통합했다면, 지둔은 불교 사상을 중국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였다.

예를 들어보자. 중국 전통 사상은 <리기론>이다. <리>란, 우주의 근본 질서나 계절을 의미하는 불변의 진리를 말한다. 지둔은 이렇게 말한다.

<리>가 절대불변의 원리인 것처럼 불가에서 말하는 반야(지혜>는 영원 불변의 <깨달음>이다. 즉, <리>는 불가의 <절대적 깨달음>을 말한다.

다른 것도 대입해볼까?

불가의 <공>사상은 <만물은 돌고 돌아 그 형체를 알수 없다>는 뜻이다. 보이는 것은 곧 사라지고, 사라진 것은 다시 생겨난다.(색즉시공 공즉시색) 이 심오한 원리를 이해하기 쉽게 도교의 <무>로 설명한다. 사라진 것이니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부처가 <열반>한다는 것은 도교의 <무위>로 해석한다.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하는 보살들을 도교의 <도>로 해석한다. 불가의 <진리>는 도교의 <근본>으로 해석해 버린다.

전쟁에 지친 사람들에게 얼마나 간편한 해석법인가?

이러한 불교 이해 방식을 격의 불교 방식이라고 한다. 격의란, 불교의 난해한 개념들을 중국 전통 사상에 이미 존재하는 비슷한 개념들을 인용하여 설명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쉽게 이해된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불교의 원래 뜻을 왜곡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 방법을 중국 곳곳에 알리고 다닌 이는 축법아였다. 그러나, 4세기 이후 불교의 승려들은 축법아의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한다.

격의 불교는 불교의 참 뜻을 알 수 없기에, 지배층들이 마음대로 해석하여 불교를 정권의 하수인으로 만든다. 또, 일반 백성들은 토착신앙과 신비주의를 불교와 구분하지도 못하고 멋대로 불교를 이해한다. 이것이 과연 정상적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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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세기 남북조 시대의 대립상황>

4. 불도징을 초빙하다.

불도징은 위진남북조의 혼란이 시작된 초기 인물이었다. 그는 서북인도와 관련된 구자국이라는 곳의 은거하는 불학자였다. 그가 70여살이 되었을 때, 중국의 백성들이 <위진시대>의 혼란기에서 희망없이 산다는 말을 듣고, 제자들과 중국으로 건너왔다. 드디어 불교가 뭔지 제대로 알고 있는 정통 <인도산 스님>이 중국을 방문한 것이다.

그런데, 불도징은 <불교의 참뜻>을 전파하지 못하였다. 당시는 혼란중에 혼란기인 5호 16국 시대였다. 5개의 이민족이 16개 국가를 세워 중국 대륙은 어딜 가나 전쟁 뿐이었다. 불도징은 후조 왕국의 석륵, 석호 부자에게 불법을 설파하였는데, 석륵은 불교를 아주 우습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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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세기 : 5호 16국 시대의 후조 왕국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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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 국가들의 민족 분포와 국가 창업자>

불도징은 불교 교리에 대한 철학 강의를 했지만, 석륵은 시큰둥했다. 결국 불도징은 교리로서 불법을 보여주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겼다. 불도징은 주문을 외워서 항아리에서 연꽃이 나오게 하는 등 신비로운 주술로 석륵을 감동시켰다. 결국 이 당시 불교 수준은, 뭔가 위대한 부처의 힘을 보여줘야 비로소 믿을까 말까 한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불도징은 큰 뜻을 품고 중국 대륙에 왔지만, 단 한권의 책도 쓰지 못하였다. 이민족의 왕들이 원하는 건 신비로운 주술과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지에 대한 궁금증 뿐이었다. 스님과 주술가, 점쟁이를 구분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나마 석륵의 아들, 석호는 이 신비로운 스님을 존경하였다. 불도징은 석호에게 <국왕>이 해야 할 일을 설교하면서 중국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였다.

1. 살행을 금지하고 죄없는 사람을 살해하지 말 것
   2. 포학한 행동을 피하고 자비심을 가지고 보시할 것
   3. 부처를 섬기는 데 있어 깨끗한 마음과 자긍심을 가지고 해야 할 것

불도징은, 인도에서 건너온 선구자라는 것 외에 크게 남긴 것이 없다. 중국 대륙에 자리잡은 이민족들은 불법이 뭔지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중국 불교사를 바꿀 만한 거목들을 제자로 키웠다. 그들의 이름은 도안, 혜원 이였다.

중국 대륙에서는 부처의 참뜻이 제대로 전해질 수 있을까?

다음장에서는 도안부터 시작되는 <불교 알리기> 프로젝트에 대해 이야기 해 보겠다. 중국 스님들이 제대로 된 불교를 알리고자 했던 노력은 수백년 동안 계속된다.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필자 : 히스)

 

   - 참고할 만한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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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 이야기 18 - 전국시대 : 다이묘들이 하극상을 일으키다~

1. 전국시대로 넘어가는 역사의 키워드

일본의 전국시대는 단순한 무사들의 봉기 같은 것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일본에서 전국시대가 시작된 근본적인 계기는 이전에 다루었던 남북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남북조 시대의 혼란기에 창업을 하고자 했던 무로마치 막부의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혼란의 수습을 위한 해결책으로 슈고에게 토지에 대한 많은 권리를 부여했습니다.

원래 일본의 봉건제도에서 <슈고>는 지방 행정을 책임지는 행정관입니다. 토지에 대한 권리를 위임받고 토지 경작에 관여했던 직책은 <지토>였죠. 그러나 막부 최고 지도자인 쇼군이 막부의 울타리를 튼튼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슈고>에게 토지에서 절반의 세금을 걷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어려운 말로 병작반수라고 하죠.

슈고가 토지에 대한 권한을 행사하면서 영주(다이묘)와 같은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면서 <슈고 다이묘>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남북조 시대 이후, 무로마치 막부에서는 이 슈고다이묘들이 점차 쇼군을 넘어서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가지기도 하였죠.

그 결과 1467년 발생한 슈고들의 반란을 기점으로 무로마치 막부는 무너집니다. 이 난을 <오닌의 난>이라고 하는데, 실력자들과 토지를 가진 세력들이 하극상을 일으켜 각각 자신의 지역을 독립국으로 만들어 버린 원인을 제공한 사건이죠.

오닌의 난으로 무력을 가진 자들은 약한 자들의 토지를 빼앗아 새롭게 다이묘가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새 시대의 다이묘들을 <신흥 다이묘>라고 부릅니다.

이 신흥 다이묘들과 군사력을 가진 자들, 그리고 스스로 영토를 지키려는 자치 마을 등 일본 내 많은 세력들이 세력균형을 이루며 대치하는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이 시대가 전국시대입니다.

2. 새 시대를 위한 새로운 체제가 등장하다.

전국시대를 이끌어 간 각 지방의 대표세력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넓히고 주변국을 통합하여 통일을 이루기 위해 여러 가지 부국강병책을 실시하거나,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입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수많은 부국강병책과 제가백가들이 등장하죠? 신라말 고려초에 골품제와는 다른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계급이 등장하죠? 그리고 지도자들이 그 새로운 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었죠?

마찬가지의 개념입니다. 전국시대 일본의 지방 세력들은 분열된 시대를 이끌어가기 위한 주역으로 살아남기 위해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이고 개혁을 실시합니다.

전국시대의 각각 영주(다이묘)들은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세력들을 억압하고, 가신단을 통제하며 영지에 대한 확실한 경제적 권리를 행사하기 위한 법을 만드는 데 이 법을 <분국법>이라고 합니다. 쉬운 말로, 내 땅에서는 내 법으로 통치할테니 누구도 간섭하지 말라는 의미있는 법이지요.

또 다이묘들이 국가를 경영하는 방략으로 중국에서 왕권강화에 기여한 이념인 <성리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입니다. 훗날 퇴계 이황 선생님이 일본 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것도 일본 스스로 유학의 장점을 찾아 국가 권력과 군신관계 이념을 정립하려는 의도가 있었지요.

일본 전국시대는 혼란기 같지만, 유학이 널리 보급되고 학교가 대대적으로 증가하게 된 획기적인 시기이기도 합니다.

3. 유럽의 신항로 개척과 일본의 요구가 맞아떨어지다.

이러한 일본의 적극적 문물 수입에 불을 지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16세기에 절정에 이른 서유럽 국가들의 <신항로 개척>이었죠. 보통 유럽말로 <대항해 시대>라고 부르는 이 시기에 멀고 먼 유럽인들이 일본에 넘어오기 시작합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서아시아의 최강국 오스만 제국에 가로막혀 동방무역이 원할하지 못했던 상황이었습니다. 유럽은 인도의 문물과 특산물을 유럽에 가져오기 위해 아프리카를 뺑돌아 항로를 개척하였죠. 아메리카도 발견했구요.

그리고 유럽인들은 이슬람을 믿는 강국들을 물리치기 위해 지구 반대편의 <하나님 나라>를 찾고 있었습니다. 유럽에서는 고대 하나님의 나라로서 찬란한 문명을 이끌었던 전설의 나라 <아틸란티스>를 찾는다던가, 이슬람을 물리칠 구원자인 <존 왕>이 사는 지구 반대편 기독교 국가를 찾기를 원했죠. 그래서 유럽인들이 일본에 왔을 때 새로운 문명을 가진 동쪽 끝의 국가(해가 뜨는 국가)라는 뜻으로 <지팡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를 보면, 1부는 아주 큰 거인들이 사는 나라, 2부는 아주 작은 소인들이 사는 나라가 나오고 3부는 백마를 타고 하늘을 나는 사람들의 나라가 나옵니다. 이 걸리버 여행기의 3부에 나오는 나라로 걸리버의 마지막 여행지가 바로 <지팡구>였고, 일본이었습니다. 따라서 걸리버 여행기 3부의 지도를 보면 한반도와 일본의 지도가 나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걸리버 여행기가 일본에 관한 이야기를 쓴 책임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한반도 사이의 바다를 일본해가 아닌 <동해>로 표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16세기 동해바다를 일본과 서양이 어떻게 인식했는지 알 만하죠?

유럽 국가들 중에서 신항로 개척에 앞장섰던 에스파냐, 포르투갈이 일본과 적극적으로 무역을 시도하였습니다. 특히 포르투갈 상인들은 중국 화약과 화포술을 바탕으로 만든 대포를 일본에 전래하였죠. 당시 중국 대포의 제조법은 국가 기밀이었습니다. 조선에서도 최무선이 염초(화약원료)만드는 기술 하나를 배우기 위해 생난리를 치다가 기술을 배워 일본 왜구를 크게 소탕하였죠. 일본은 대포와 총포의 주력 화술을 유럽에서 역수입한 것입니다.

신항로 개척기 카톨릭 국가인 에스파냐, 포르투갈은 영국, 네덜란드 같은 신교(개신교) 국가들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동방 선교에 주력하였고, 전국시대의 명장들은 크리스트교와 카톨릭의 문물을 적극 도입하여 부국강병의 원천으로 삼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give and take였던 것이죠.

4. 오다 노부나가와 히데요시, 이에야스

일본의 전국시대 하면 중국의 삼국지 만큼 유명한 인물 3명이 등장하죠. 오다 노부나가, 토요토미 히데요시,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죠. 다른 인물들도 유명한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 역사가 아닌 만큼 이 3명만 간단히 이야기해보죠. 우에스기 겐신이나 다케다 신겐 등의 이야기는 나중에 시간나면 정리해 보죠.

이 중 전국시대를 주름잡은 최고의 사나이는 오다 노부나가였습니다. 오다 노부나가하면 <천하포무 : 천하통일>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됩니다. 작은 영지를 가진 오와리의 노부나가는 동맹을 맺을 상대와 공격할 상대를 잘 찾아 행동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초기에 주변국인 미노와 친선을 하면서 세력을 키우고, 그 이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동맹을 맺고 미노를 공략하는 등 상황 판단이 빠른 인물이었죠.

노부나가의 가장 큰 장점은 시류를 잘 볼줄 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서양식 총포를 도입하여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였던 철포 부대를 만들었습니다. 일본식 소규모 전투가 아닌 화포를 이용한 전술은 노부나가의 든든한 성공 전략이었죠.

또 새로운 종교인 카톨릭을 적극적으로 일본에 도입합니다. 카톨릭의 도입은 포르투갈 등 서구 국가의 지원을 받을 수 있으면서, 일본 고유의 기득권층인 불교세력을 철저하게 억압하는 효과를 가져왔죠.

노부나가는 서양식 화포로 토지 영주였던 승려 세력을 억압하였고, 혼란기를 틈타 농민봉기를 일으키는 세력들을 모두 진압하였습니다. 그리고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실력있는 자들을 등용하는 <용병제도>를 도입하였죠. 노부나가의 전략은 통일을 위한 가장 완벽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가신인 미츠히데의 배신으로 갑자기 죽게 됩니다.

오다 노부나가의 죽음은 전국시대 통일을 앞둔 것이여서 그 파장이 큰 것이었습니다. 이 때 노부나가의 심복이었던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미츠히데를 죽이고, 노부나가의 원수를 갚는다는 대의를 앞세워 노부나가의 세력을 모두 끌어안았습니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정식 계승자로서 전국시대의 <통일>을 마무리 짓습니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집권은 많은 골수 노부나가 추종자들의 반발을 가져오기도 하였습니다. 히데요시는 이러한 반발을 억제하기 위해 노부나가의 정책이었던 카톨릭 보호 정책을 폐기하고 카톨릭과 연관된 세력들을 탄압한다는 구실로 반대파를 제거하였습니다. 또 국내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방편으로 조선을 공격하는 <임진왜란>을 일으켜 전쟁을 통하여 막부 세력의 결속을 단단히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중 사망하자, 새로운 권력을 놓고 많은 사람들 가운데 암투가 벌어졌습니다. 이 때 <세키가하라 전투>라는 유명한 전투의 승리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식 쇼군이 되어 도쿠가와 가문의 에도 막부를 개창합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정권을 잡기 위해 정말 오랜 시간을 인내한 자였습니다. 그가 노부나가와 히데요시 밑에서 오랫동안 살아남아 막부를 세웠을 때 이미 그의 나이는 60을 훨씬 넘긴 후였으니까요. 중요한 것은 최후의 승자는 이에야스였다는 것입니다.

도쿠가와 가문의 막부는 이전과 달리 수도명을 막부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전의 막부들은 자신의 근거지를 중심으로 쇼군의 자격으로 정치를 하였던 것에 비교해, 에도 막부는 수도에서 직접 중앙집권정치를 실시하였기 때문입니다. 막부 자체가 수도에서 전국을 통괄하는 체제로 이전에 비해 훨씬 강해지고 안정적인 막부를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에도막부는 일본 막부사상 가장 긴 시기를 지속한 막부입니다.

그럼 다음장에서는 에도 막부가 어떻게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를 유지했는지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다음 장의 키워드는 <에도막부의 중앙집권과 사회통제정책>이 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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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 이야기 16 - 남북조 시대와 무로마치 막부의 전성기

1. 14세기 남북조 시대가 있었다. (1336-1392)

지난 장에서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한 원인 중 하나로 천황가를 중심으로 한 막부 타도 운동이 있었음을 이야기했습니다. 가마쿠라 막부를 타도한 천황가가 다시 천황중심의 강력한 독재 체제를 마련한 것이 겐무 신정이었죠.

그러나, 천황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 정책은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가를 도왔던 무사들의 반발을 사게 됩니다. 특히 대장군이었던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천황이 무사들을 무시하면서 천황권만 강화하려고 하자 반란을 일으켰고, 그가 곧 <무로마치 막부>를 연 아시카가 가문의 선구자였습니다.

그러나 아시카가가 살았던 시기에 가마쿠라 막부 타도의 벗이자, 최대의 라이벌 닛타 요시사다와 같은 명장이 같이 존재하였습니다. 아시카가는 요시사다와 천하를 놓고 한판 승부를 벌여야 했죠. 또 아시카가를 피해 남으로 내려간 고다이고 천황은 남쪽으세 아시카가에게 저항을 하였습니다.

이로부터 약 50년간 아시카가의 북쪽 왕조와 전통적 천황가문의 남쪽 왕조가 대립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일본사에서 <남북조 시대>라고 합니다.

남북조 시대에 큰 전쟁은 없었지만, 계속된 긴장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한반도에 전쟁이 없지만 휴전선 너머로 서로 대치하고 있는 국면과 같은 상황이 이어진 것이죠. 북조는 강력한 군사력에도 불구하고 남조를 완전히 정복하지 못하였습니다.

2. 슈고 다이묘가 등장하다.

남북조 시대는 역사상 큰 특징적인 측면은 없습니다. 이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가마쿠라 막부에서 시작된 일본식 봉건질서가 약간 변화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됩니다. 즉 초기 가마쿠라 막부의 봉건제와 후기 에도 막부기의 봉건제의 과도기적 단계가 나타나는 것이죠.

원래 가마쿠라 막부의 봉건제는 쇼군, 슈고, 지토라는 개념이 확고하였습니다.

일단 쇼군은 수도가 아닌 거점, 즉 출신지나 군사주둔지에서 전국의 무사를 지배하는 식의 통치 질서를 유지하였습니다. 그러나 남북조 시대의 혼란기에는 쇼군이라는 직함이 이전보다 강력하지 못하였습니다. 즉, 각 지방의 영주들이 각각 세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 지방 영주들이 쇼군 밑에서 어느 정도 권력을 가진 정치 형태였죠. 우리식으로 말하면 호족 연합 정권 정도의 성격이랄까요?

그러나 이후 무로마치 막부와 에도 막부로 넘어가면서 쇼군의 지방 통제가 전환됩니다. 즉, 쇼군은 지방이 아닌 수도에 거주하면서 전국의 무사들을 통솔하고, 말을 듣지 않는 무사들은 그 식솔들을 인질로 잡아두게 되었죠. 이러한 정책의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에도막부기의 <산킨고타이 제도>입니다. 한자로 해석해서 <참근교대제도>라고도 하죠. 이 제도는 고려의 기인제도와 비슷합니다.

이러한 제도가 등장하고, 쇼군이 수도를 중심으로 전국을 통치하는 체제로 바뀐다는 점은 막부의 국가 장악력이 후반으로 갈수록 강해진다는 것을 의미하죠.

그러나, 이 남북조 시대는 쇼군이 강해진 후대와는 정 반대의 상황이었습니다. 남북조 시대의 슈고는 그 권한이 너무 막강했습니다. 쇼군(막부최고 통치자)은 지방 행정관으로 보낸 슈고를 통제할 수 없었고, 슈고에게 군사권, 경찰권을 넘어 소작세와 연공의 절반을 걷어갈 수 있는 권리마저 주었습니다.

남조에서 먼저 슈고를 다스리기 위해 슈고에게 많은 권한을 부여했고, 북조도 차츰 이에 따라 슈고에게 많은 권한을 부여했습니다. 슈고는 이제 가마쿠라 막부시기의 슈고가 아니였습니다. 단순히 막부를 위해 세금을 걷고, 감찰하는 관리가 아니라 슈고 자체가 거대한 영지를 가진 영주가 된 것입니다. 슈고는 행정권을 넘어 지토가 가진 토지경제권마저 장악할 수 있었죠.

이렇게 슈고이면서 엄청난 토지마저 소유할 수 있게되어 지방 영주(다이묘)가 된 그들을 <슈고 다이묘>라고 부릅니다.

슈고 다이묘의 개념은 남북조 시대 뿐 아니라, 무로마치 막부 전반에 걸쳐 중요한 개념입니다. 막부의 전성기를 이끈 자들도 이들이고, 무로마치 막부의 멸망과 관련된 자들도 이들이기 때문이죠. 이들이 지방의 실세가 되면서 무로마치 막부기 슈고들은 지방 <호족>처럼 되어 갑니다.

실제 남북조 시대는 슈고 다이묘들의 연합정권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슈고들의 영향력이 지대하였습니다.

3. 무로마치 막부의 성립과 전성기 : 14세기

남북조 시대가 지속되던 시기, 남조와 북조는 오랜 대립을 끝내고 통일을 합의하게 됩니다. 노무현과 김정일이 한반도 비핵화와 종전선언을 하자고 만난 것처럼, 남북조의 대립은 전쟁 위협속에서 합의로 끝났습니다.

일단 천황의 자리는 무로마치 막부가 있는 북조에게 양보한 뒤, 남조의 천황가의 후예를 황태자로 삼아 평화적으로 정권을 이어가자는 것이었죠. 따라서 천황가는 계속 명백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고, 무로마치 막부는 전국을 통일한 막부로서 실권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전국정권은 무로마치 막부가 탄생하였습니다.

무로마치 막부의 초기에는 지방 세력이었던 슈고 다이묘들에 대한 통제를 강력하게 실시하려 했습니다. 특히 3대 쇼군인 아시카가 가문의 요시미츠는 동양사에서도 이름이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요시미츠는 무로마치 막부의 성립 시기에 동아시아 상황이 급변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으로 몰아넣었던 원인을 제공한 원나라(몽골)이 망해가면서 새로 명나라가 등장하고 있었고, 고려 역시 공민왕 이후 고려가 급격히 쇠퇴하면서 조선왕조로의 변화를 겪고 있었죠.

이렇게 동아시아의 질서가 어지럽자, 일본 해안의 해적들이 중국대륙과 한반도에 넘어들어가 재물을 약탈하는 일이 빈번하였습니다. 동양사에서는 이들을 <왜구>라고 부르죠. 왜구는 명, 조선에게는 너무나 골치아픈 일이었지만, 무로마치 막부는 이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였습니다.

일단 조선과의 관계는 <교린정책>으로 정리됩니다. 조선은 일본 막부와는 적대하지 않되, 왜구는 철저히 토벌하였죠. 따라서 무로마치 막부는 조선과 공식적으로 공무역을 한다는 입장이었고, 조선의 문물을 적극 수용하였습니다. 그러나, 막부와 별도로 지방 권력을 가진 다이묘들과 해안 난민들은 왜구짓을 계속하였고, 조선에서는 삼포개항과 쇄국책을 적절히 써가며 이들을 막아야 했죠. 혹은 조선과의 무역에 불만이 있을 경우, 막부가 왜구의 약탈을 방치하기도 하였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삼포왜란>과 같은 왜구의 약탈 사건이었죠.

요시미츠는 명과의 관계를 <감합 무역>으로 정리하였습니다. 명나라 역시 왜구 문제가 골치거리였기 때문에, 막부가 명과의 공식 무역을 하는 대신, 왜구를 근절하겠다는 약속을 한 것이지요. 따라서 무로마치 막부는 왜구를 적절히 통제하면서 공식적으로 <막부가 일본 무역을 대표하는> 형태의 무역을 활발하게 진행하였습니다. 명나라는 무로마치 막부에 <무역허가증>을 주고 왜구의 약탈이 아닌 공무역을 보호하였습니다.

전성기 때의 무로마치 막부는 중국, 조선 뿐 아니라 남쪽의 오키나와 해상 세력, 당시 독립국가인 류쿠 왕국까지 무역을 전개하였고, 더 나아가 동남아시아와도 무역을 재개하였습니다.

이 활발한 무역정책은 지방 슈고다이묘에 의해 약화된 막부의 재정을 튼튼하게 하여 막부 창건이후 수십년간 무로마치 막부를 지탱하였습니다.

여기까지 하고, 다음 장에서는 무로마치 막부의 사회상과 붕괴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적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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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 이야기 15 - 가마쿠라 막부를 타도하라!

1. 가마쿠라 막부의 쇠퇴

이번 장에서 다룰 내용은 가마쿠라 막부의 붕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가마쿠라 막부가 무너진 교과서적인 이야기는 지난 장까지 대부분 이야기 했네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가문이 막부를 세웠지만, 요리토모가 갑자기 죽으면서 그 실권은 가장 유력한 호족 가문인 호죠씨에게 넘어갔고, 호죠씨가 막부를 대신하여 가마쿠라 막부를 이끌어 갔습니다. 실제 가마쿠라 막부의 중요한 알짜배기 시절은 모두 호죠씨의 시대였죠. 차라지 호죠 정권이라고 불러도 될만큼 호죠 가문은 막강했습니다.

가마쿠라 막부의 권력 구조는 이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형식적인 최고 권력자 천황 - 실제 권력을 가진 쇼군(미나모토노 막부) - 쇼군을 좌지우지하는 고케닌 가문인 호죠씨 - 호죠씨와 함께 연합정권을 구성했던 유력 가문들....

그러나, 호죠씨의 독재 시절은 천황의 입장에서 무척 불쾌한 것이었습니다. 막부가 실세도 아니고 막부 뒤에서 일개 신하 가문이 권력을 좌지우지 했으니까요. 거기에 몽골(원나라)의 1,2차 침입으로 민심이 흉흉하고, 몽골 전쟁에 참여한 유력 가문들이 제대로 보상조차 하지 않는 호죠씨에게 불만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자, 이렇게 호죠씨가 독재하는 가마쿠라 막부... 호죠씨와 막부에 대한 불만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죠. 한번 볼까요?

2. 13세기의 막부타도 운동 - 1221년 죠쿠 전쟁

첫 번째 막부 타도 운동은 <1221년 죠쿠의 반란>입니다. 이 반란은 미나모토노 쇼군이 약해지고 호죠씨가 실권을 장악하자, 대의명분이 없다는 이유로 천왕의 아버지(상왕)이 주도하여 난을 일으킨 것입니다.

원정 정치 기억하시나요? 일본에서는 천왕의 나이가 어리면 아버지가 대신 섭정하는 정치 형태가 있습니다. 조선에서는 고종이 나이가 어리자 흥선대원군이 1863년부터 10년간 정치했던 적이 있죠? 이런 정치 형태를 일본사에서는 <원정>이라고 하고, 상왕이 정치하는 고문기관을 <원청>이라고 합니다.

원정 상왕은 막부를 타도하고, 왕실과 공가의 권위를 회복해야 한다고 유력 신하들(고케닌)들을 설득하면서 난을 일으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최초의 막부 타도 운동은 오히려 막부의 결속력만 다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유명한 철의 여인으로 일본 사극에 자주 나오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부인 호죠 마사코는 호죠 가문이 막부에 도움이 되었으며, 막부 타도가 얼마나 큰 실수인지를 연설하면서 눈물로 막부 타도를 외치는 무사들을 달래어 돌려보냅니다.

이 사건으로 천황가는 막부 타도에 실패하고, 천황가가 몰락해버립니다. 덕분에 아직 미약했던 초기 막부는 전국적인 세력을 규합하게 되었고, 막부정권은 그 기반이 튼튼해졌습니다. 또 무가의 기본 성문 법전인 <조에시키모쿠>가 제정되어 무가 정권은 법치를 바탕으로 하는 명실상부한 전국 정권으로 도약합니다.

막부 타도운동이 막부의 기반을 다지게 된 사건이라니, 아이러니 하죠?

3. 14세기의 막부타도 운동 - 1324년 악당이 등장하다.

14세기 가마쿠라 막부에 큰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전에 설명했던 막부 붕괴의 직접적인 원인인 <몽골 침입>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죠. 교과서에서는 가마쿠라 막부의 붕괴를 <원과 고려 연합군의 침략>에 의한 무사층의 동요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마쿠라 막부 멸망의 근본 원인은 <무사층의 동요>였지만, 자세히 보면 여기에도 막부 타도 운동이라는 키워드가 숨겨져 있습니다. 몽골(원구)의 침입으로 유력 신하(고케닌)들은 막부에 불만이 많아졌습니다. 그 이유는 수비전이었던 몽골전을 막은 대가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죠.

침략전쟁이라면 뭔가 노획물이라도 있을 텐데, 몽골 침입을 막은 수비전에서는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었고, 민심의 불안만 찾아왔던 것입니다. 가마쿠라 막부의 호죠 가문은 불만이 가득찬 무사들과 신하집단에게 무엇도 보상해줄 수 없었습니다.

천황가는 이 때를 막부타도의 기회로 생각했습니다. 고다이고 천황은 전국적인 막부 타도를 외치며, 천황을 위해 목숨 바칠 자들을 모았습니다. 호죠씨는 이 고다이고 천황의 막부 타도 운동을 사전에 적발하여 천황을 유배 보냅니다. 천황은 탈출해서 또 막부 타도운동을 하고.... 막부는 또 천황을 유배보내고... 숨바꼭질 전이 계속되지요.

천황을 죽이면 되지 않냐구요? 절대 안됩니다. 고대사 편에서 다루었지만, 일본 천황은 천손강림 이라는 형태로 정당성을 확보한 하늘의 자손입니다. 천황을 죽일 거였으면 막부를 세운 자들이 이미 죽였겠지요. 천황은 죽일 수 없는 존재니, 막부 타도 운동을 주도하고... 막부는 천황을 계속 유배보내고... ㅋㅋ

고다이고 천황의 막부타도운동은 계속 실패하는 듯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천황의 뜻에 동참하는 자들이 점점 불어났죠. 이 당시 사회불만세력으로 등장한 신흥무사집단을 악당이라고 하는데, 이 악당들이 막부 타도운동에 적극 동참하여 결국 가마쿠라 막부가 무너지게 됩니다.

악당은 나쁜 넘들 아니냐구요? 아닙니다. 만화방에 가보면 일본 만화중에 <악당>이라는 만화가 있어요. 정의를 위해 싸우는 좀 특이한 무사들의 이야기지요. 악당은 중국으로 보면 수호전의 영웅들, 한국으로 보면 홍길동 + 일지매 정도의 인물로 보면 됩니다. 대의를 품고 우국충정(?)에 들뜬 무사들을 말하죠. 당시대 개념으로는 사무라이와 좀 구분되는 개념 같습니다.

자 이렇게 해서 일본 최초의 막부인 가마쿠라 막부는 무너지고, 다시 천황가가 권위를 회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권력은 너무나 짧은 기간뿐이여서 역사에서는 이 시기를 무시하고 넘어가기도 합니다.

4. 1333-1334 겐무 신정기

가마쿠라 막부를 타도한 고다이고 천황은 1333년 강력한 천황중심의 독재적 개혁 정치를 실시하려고 합니다. 우리식으로 본다면 대한제국의 광무개혁 쯤 되는 보수적이면서도 나름대로는 대의가 있는 개혁정치라고 할까요?

그러나 이 개혁정치는 2년뿐이었습니다. 천황가와 공가는 아주 짧은 시간에 무너지고 말죠. 그 이유는 천황의 생각이 악당들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천황은 천황중심의 세상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가마쿠라 막부를 박살내는데 일조한 무사집단인 아시카가 다카우지, 닛타 요시사다 등의 명장들은 천황이라도 자신들을 대우해야 한다고 생각했었죠. 실제 이들 명장들은 가마쿠라 막부의 명장이기도 했지만, 새로운 세상을 위해 천황파에 가담했던 인물들이었습니다.

토사구팽 아시죠? 토끼사냥이 끝났으면 사냥개를 삶아먹는다는 중국 고사죠. 한고조 유방이 중국을 통일한 뒤 개국공신이자 명장인 한신을 죽였던 일화죠. 천황파 무사들은 위기를 느끼고, 천황과 등지게 됩니다.

천황의 신정치는 핵심 무사인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반란으로 무너지게 됩니다. 또 다시 주인만 바뀐 막부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 아시카가 가문의 막부가 바로 <무로마치 막부>입니다.

그러나, 무로마치 막부는 <일본에서는 하늘의 후예인 천황을 모신다>는 이념을 버릴 수가 없는 막부였습니다. 일본 모든 막부가 형식적으로는 천황을 모실 수밖에 없었죠. 막부 실력자가 천황가가 아니라면 정당성 확보를 위해 천황이 필요했고, 막부 실력자가 천황가의 친척이라면 자신의 권위를 위해 천황가를 소흘히 할 수 없었으니까요.

이 때문에 무로마치 막부는 바로 성립되지 못하고, 북쪽에서만 권위를 유지합니다. 고다이고 천황은 남쪽에서 무로마치 막부를 인정하지 않고 저항하였죠. 이 시기를 일본사에서 <남북조 시대>라고 합니다.

남북조 시대는 1336년부터 1392년까지 몇십년간이었죠. 그럼 다음장에서는 남북조 시대의 간단한 특징을 본 후 무로마치 막부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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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 이야기 14 - 봉건제도의 등장과 선종의 유행

1. 사무라이의 등장과 봉건제도

일본에서 봉건제도가 등장한 것은 중세 이전의 헤이안 시대부터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서양사에서도 중세 봉건제도의 기원을 고대 로마의 콜로누스 제도와 로마식 주종관계에서 찾듯이 말이죠. 일본인들 역시 일본식 봉건제도의 기원을 일본 고대 말기의 역사적 상황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일본의 봉건제도는 고대 말기 부유층의 장원 개발에서 비롯된다고 합니다. 일본 고대 말기에 천황가의 알력 다툼 속에서 부유한 토지 소유자들이 등장합니다. 동양사에서는 이러한 계급을 공통적으로 호족이라고 표현합니다만, 일본 고대 말기의 토지 소유자들은 호족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중국사에서 비롯된 개념인 호족은 일정한 무력과 일정한 토지 소유, 그리고 자신들의 지위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가문개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 말기의 부유층은 빈농에서부터 출발하여 무사집단간의 전쟁 등을 통하여 등장한 계층도 많습니다.

어떻게 보면, 서양 고대사인 그리스, 로마 등에서 보듯 정복 사업으로 평민층이 성장하여 자신들의 지위향상을 했던 쪽과 더 유사한 면이 있는 것 같네요.

그러나, 로마에서도 노빌리스나 에퀴테스 등의 신귀족 계급이 보수화 되었듯, 일본 고대의 평민들도 무사집단에서 출발하였지만, 그들의 지도자는 결국 국왕가의 후손이었습니다. 고대 후기 천황가의 알력 다툼 속에서 천황 후보가 될 수 있는 천왕가의 후예들이 평민들을 체제 속으로 흡수하여 무사단을 조직하고 주도적인 지위를 얻으려 했던 것이지요.

예로, 무사를 뜻하는 <사무라이>라는 단어는 <스스로 무력을 소유한 자>라는 뜻이 아니라 <대기하는 자>라는 뜻의 일본어 어원을 가진 단어입니다. 그리고, 고대를 부수고 중세를 연 막부의 지도자들은 모두 하층민 사무라이가 아니라 천황가와 일정한 관련을 가진 천황가의 후손이었고, 그들이 이끈 무사단이 막부 시대를 연 것이지요. 일본사에서도 평민계급에 의한 정권수립은 없었습니다.

2. 고대 말기부터 등장한 봉건적 토지 질서

아무튼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일본 고대 말기부터 이미 중세적인 특징을 가진 토지제도가 존재하였다는 점입니다. 일본의 봉건제적 토지질서는 고대 <반전수수법>부터 기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일본 고대 천황은 중국 당나라의 율령을 받아들이면서 <아시아적인 토지 공유제>를 주장합니다. 즉, 중국식 정전제를 모방한 균전제를 일본에 도입하여 모든 토지를 국가가 관리하려고 한 것이지요. 그러나, 각 지방의 독자적 힘이 강하였던 일본의 호족정권들은 천황가의 이 제도를 반발하였고, 일본 고대의 토지제도는 <반전수수법>에 대한 반발로 점차 토지 사유화가 진행됩니다.

천황은 각 세력들의 반발로 결국 토지 공유제를 완전 포기하고 맙니다. 따라서 일본 고대 말기에는 귀족, 부농층, 불교세력 등이 각자 토지를 가지고 백성들을 부역하면서 장원을 소유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토지사유자 중 부농층의 토지 운영 방식입니다. 귀족과 사원세력 외에 부농층들은 경제권은 있으나, 정치적 실권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보다 하층민인 빈농층과 농노(?)층을 이용하여 토지를 경영하면서 실세인 귀족들에게 세금을 내야만 했습니다.

즉, 부농층들은 자신의 장원이 약탈당할 것을 우려하여 <유력 귀족>에게 토지를 형식적으로 바쳐버립니다. 유력 귀족은 부농층이 토지를 바치면, 그 대가로 세금을 걷어가고 부농층의 토지를 무력으로 지켜줍니다. 그리고 <유력 귀족>은 더욱 높은 귀족이나 천황가에 세금을 일부 바치고, 부농층의 권리를 국가권력으로부터 지킬 수 있도록 해줍니다. 즉, 토지경작자와 토지를 받은 소유자, 그들보다도 높은 권력자라는 연줄이 생기게 되죠. 이것이 바로 일본식 봉건제도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일본식 봉건제도는 서양식으로 계약에 의해 맺어진다기 보다는 토지소유자와 귀족간 대대로 맺어진 끈끈한 인연에 의해 맺어집니다. 소위말하는 의리라는 것으로 맺어진 관계이지요.

부농층은 귀족들에게 토지와 세금을 바치는 대신 안정된 경작권을 얻음으로서 스스로 무장하고 힘을 갖추게 됩니다. 이 부농층이 재산을 모아 무사단을 만들고, 돈으로 자신을 지킬 자(대기하는 자 : 사무라이)를 마련하면 불합리한 세금이나 억압에 대해 항거도 할 수 있게 됩니다.

이들 새로운 부농 계급과 무사집단이 성장하면서 일본 고대는 몰락하였고, 거대 장원을 가진 자들로 이루어진 일본 중세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들 부농층, 유력귀족, 중앙의 실력자와 황족은 중세시대 무사, 슈고, 지토 등의 개념과 연결됩니다.

3. 미나모토노 가문의 봉건질서

일본 봉건제도는 최초의 막부인 미나모토노 가문에서 기틀이 잡힙니다. 미노모토노가 정이대장군에 임명되면서 슈고, 지토의 임명권을 갖게 되면서 시작된 12세기의 가마쿠라 막부는 일본 봉건제도의 여러 용어들이 구체적으로 나오는 시기입니다.

일단 슈고의 개념부터 볼까요? 슈고란 지방(고쿠 : 국)의 군사권과 경찰권을 위임받은 직책으로 쉽게 말하면 지방 행정관입니다. 이들은 미나모토노 가문에 의해 지방으로 보내져 지방 장관들에게 보수를 받아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지토란? 쉽게 말하면 토지관리관입니다. 중세시대 각지마다 거대한 장원이 있어서 이들 장원에서의 세금은 곧 막부의 운영 자금과 연결되었습니다. 막부는 각 지방의 장원을 관리하면서 세금을 걷고, 장원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시급했죠. 지토는 이 장원을 감시하는 자로서 경제와 치안업무의 핵심이었습니다.

슈고와 지토들은 막부 최고 지도자인 쇼군에 의해 임명되어 안정된 생활을 누리는 대신, 쇼군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수도인 교토와 막부 가문을 교대로 지키는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쇼군이 전쟁을 할 때는 당연히 나가야 했습니다. 즉, 권리와 의무가 있었던 것이지요. 단, 서양식 계약관계가 아닌 쇼군에 대한 의리에 따라 이루어지는 봉사관계였습니다.

그럼 누가 슈고, 지토로 임명될까요? 당연히 중앙의 유력 신하 가문에서 임명됩니다. 이들 유력 가문을 일본사에서는 <고케닌>이라고 합니다. 중요한 단어입니다. 일본사 책을 보면 계속 나오는 단어죠. 고케닌들이 슈고, 지토로 임명되면 군역과 조세를 거두어 중앙에 납부하는 형식으로 은혜에 보답하게 됩니다.

4. 막부시대의 문화적 특징하면? - 선종 불교가 키워드

자 그럼 이번에는 막부시대(중세시대)의 문화 키워드로 불교를 한번 간략히 다뤄보겠습니다.

일본 중세시대는 에도막부 후반 성리학이 유행하기 전까지 불교가 성행하였는데, 그 불교는 교종 계열이 아닌 <선종계열>이었습니다. 한국사에서도 나말여초기나 고려시대의 무신정권기 등 무가정권의 영향력이 센 시기에 선종이 유행하죠? 같은 원리입니다.

무사들이 득세하는 시기에는 항상 서민들이 염원하는 게 있죠. 현세의 안정과 복을 비는 것.... 즉, 서민불교가 유행하게 된다는 사실이죠. 무사들 역시 딱딱한 교리나 원칙을 따지는 교종보다는 쉽고 간결한 구결을 표방하는 선종이 입맞에 딱 맞을 수밖에 없죠.

가마쿠라 시대의 불교는 가마쿠라 6불교라고 하는 6개의 종파불교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6종교는 모두 공통적으로 엄격한 수행보다는 <나무아미타불>을 외치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선종적인 불교입니다.

일본 중세가 되면서 일본 역시 종교 본연의 모습의 찾는 종파불교가 성립하게 됩니다. 그러나, 중국이나 한국의 종파불교가 <불법의 논리와 이론적 완성>을 추구하는 교종적인 성격의 종파불교를 주로 한다면, 일본의 종파불교는 어려운 불법은 따지지 않는 선종적인 종파불교입니다. 일본의 종파불교는 정토종, 선종의 2가지로 요약됩니다.

정토종은 통일신라기 원효가 주장한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염불을 외우면 무식한 서민들도 모두 성불할 수 있다는 경문사상의 종교입니다. 일본 정토종은 정토종, 정토진종, 시종이라는 3개의 파가 있지만, 우리가 다 알 필요는 없고 그 핵심이 <나무아미타불>을 외운다는 것으로 정리하면 될 듯 합니다.

정토종의 특징이 염불을 통한 구원이라면 선종은 좌선(참선)을 통한 깨달음을 핵심으로 하는 종파입니다. 일본의 선종은 일련종, 조동종, 임제종의 3파가 있는데 이들 모두 참선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고, 깨달음이 곧 해탈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종파입니다. 한국사로 보면 지눌의 <간화경절문>에 해당하는 깨달음이라고 할까요?

정토종이든 선종이든 일본 막부시대의 불교는 대체로 경전보다는 순간적인 깨달음과 구원에 대한 갈망이 중요시되는 종교였습니다. 일본 선종계열의 종교는 가마쿠라 6불교에서 발전하기 시작하여 도쿠가와 에도 막부기에 서민불교로 정착되었습니다. 그리고 일본 전통적인 <토속신 신앙>과 융합하여 독창적인 일본 불교로 나아갑니다.

가마쿠라 시대의 불교 양식은 일본 중세 문화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가마쿠라 양식이라 불리는 초기 막부시대의 문화 양식은 중국 송나라 및 한반도의 고려 양식과 융합한 일본 양식을 말합니다. 중요한 점은 일본 고대의 문화 양식이 천황과 호족 중심이었다면 중세부터는 문화의 주체가 바뀐다는 점입니다.

일단 막부 출현으로 무가적인 양식이 출현하였는데, 이 양식은 불교의 선종계열의 특징과 부합하여 무가적인 선종 불교 양식이 출현합니다. 즉, 좀더 서민적이고, 대중불교적인 양식을 말하죠. 특히 왕즉불 사상을 기반으로하는 고대 천황가의 양식과는 다르게 불사 조각이나 세밀한 목탑 등이 등장합니다. 중국은 전탑, 한국하면 석탑, 일본하면 목탑.... 아시죠?

다음장에서는 가마쿠라 막부의 마지막 장으로 막부 멸망과 남북조 시대 이야기를 다루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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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 16국 시대의 개막 - 5호가 내려와 진을 몰아내다

이번 장에서는 5호 16국 시대가 시작된 배경은 5호의 중국 진출에 대한 내용을 포스팅 해보겠습니다. 5호란 흉노, 선비, 저, 갈, 강족을 말합니다.

1. 만리장성을 사이에 두고 끊임없이 다투다

5호는 고대 사회 이래 중국이 선진 문물을 수용하지 못한 미개민족으로 분류한 <오랑캐>를 말합니다. 주나라 시대 <중화사상>의 기틀이 마련된 이후 <황하문명>에 소속되지 못한 비문명 지역을 <오랑캐>로 규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춘추시대 이후 양자강 유역의 개발이 시작되면서, 양자강 유역의 오, 월, 초 등이 중화문명에 소속되었고, 서방의 진이 중국을 통일하면서 중화 문명권은 서방의 진 ~ 남방의 양자강 ~ 북부 황하유역을 경계로 삼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문명권을 벗어난 지역은 모두 <오랑캐>의 지역이라고 규정하였고, 진시황, 한무제 등은 오랑캐 문화권인 북방 흉노족과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습니다. 때로는 이 흉노 원정이 국가 멸망을 단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진의 만리장성 축조, 한무제의 무리한 흉노 정벌 등은 당시 통일된 중화 제국에 분열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떠한 강력한 중국의 통일왕조도 이들 유목문화권을 완전히 정벌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즉, 만리장성을 두고 북방문화권의 유목민족과 중화문화권의 중국왕조는 끊임없이 대립하였습니다. 그리고, 중화문화권에 강력한 왕조가 있던 시기에는 두 문화권이 충돌하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하지만, 후한의 멸망 이후 서진 시대의 혼란한 중화민족의 사회상은 이 두 문화권의 주도권이 완전히 북방으로 넘어가게 되는 계기를 마련합니다.

북방 문화권의 유목민족들은 중국의 혼란을 틈타서 따뜻한 농경사회로 침투하기 시작합니다. 이미 유비, 조조 등의 이민족 이용 정책으로 중화지역에 진출한 유목민들은 용병으로서 활약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서진 시기에는 이제 대놓고 만리장성을 넘어 중화지역에 터전을 잡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이민족의 중화진출에 신호탄을 쏜 민족은 가장 치열하게 중화민족과 대립하였던 <흉노>민족이었습니다.

2. 후한기에 이미 장성을 넘은 이민족들이 많았다.

5호의 진출이 후한 멸망 이후에 본격화 되었지만, 실제로는 후한기에 이미 5호가 중국 내부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전한의 멸망과 신의 건국 및 멸망으로 지방분권적 호족사회로 나아가고 있었던 한 제국은 후한기에 접어들면서 이민족의 중화 거주에 대하여 확실하게 통제하지 못하였습니다. 특히, 남흉노가 중국에 복속하면서 만리장성 이내에는 오랑캐 민족이 거주하는 특이한 현상이 발생하였습니다.

특히 삼국시대의 호족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넓히기 위해 적극적으로 이민족들을 활용하기 시작합니다. 끊임없이 남방을 괴롭혔던 강족은 회유책으로 중국내 거주를 인정받았고, 저족도 중국내지로 이동하였습니다. 이 저족과 강족이 중국 서북방의 중요 거점인 관중일대에 정착하면서 이민족은 쉴세없이 밀려들기 시작합니다.

물론 강통과 같은 지식인들은 이민족을 만리장성 밖으로 몰아내어 훗날의 화근을 막아야 한다며 선견지명이 있는 주장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을 보통 <사융론>이라고 하지만, 당시 혼란했던 시대상황 속에서 이민족을 이용해야 했던 국가세력은 이러한 주장을 묵살하였습니다. 즉, 이민족은 5호 민족이 중국내에 거주하면서 한민족과 이민족이 섞여 이민족 중심의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게 됨으로서 새로운 시대가 개막됩니다.

역사에서는 이것을 <호한체제 : 오랑캐와 한족의 공존체제>라고 부릅니다. 실제 이후 중국사에서는 당, 송, 명과 같은 중국 전통 왕조와 요, 금, 원, 청과 같은 이민족 왕조들이 서로 주도권을 잡으면서 중원을 장악하는 형국으로 흘러갑니다. 실제 중국사에서 절반은 이민족 왕조가 주도권을 잡고 있었습니다. 현재 중국 정부는 이러한 이민족 왕조를 자국사로 편입하여 <중국사 내의 소수민족 시대>라고 규정하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이것도 동북공정, 서북공정, 티벳정복 등의 중국 역사 왜곡과 맞물려 <중화 중심 세계주의>를 구성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고 있네요.

3. 5호는 국가를 세우다

5호란, 중국문명권이 약해진 틈을 이용하여 중국 북방을 점령한 이민족을 일컫는 말입니다. 5호는 <흉노, 저, 갈, 강, 선비> 등 유목민족을 말합니다. 이 5호의 국가들이 중국 북방을 점령하고 각각 16국을 건국하는데, 이 시기를 북방 5호 16국 시기라고 합니다.

5호 16국 시기의 시작은 316년 서진이 망하여 동진 정권으로 이동한 것을 기점으로 합니다. 중국 왕조인 서진은 흉노 추장의 반란(영가의 난)으로 멸망하게 되는데, 이 때부터 이민족들이 북방의 정권을 잡아 각각 다양한 왕조를 건설하였으며, 439년 북위가 북방을 완전 통일할 때 까지의 시기가 5호 16국 시기입니다.

먼저 5호 중 주도권을 잡은 것은 흉노의 한족입니다. 흉노는 중국 영토에 선이주한 흉노 지배층과 결탁하여 <한화된 흉노>를 바탕으로 <한>이라는 나라를 건설합니다. <한>의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철저한 한화정책을 실시하여 중국 한나라의 민족을 규합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서진의 멸망으로 선비, 저족 등이 중국에 물밀 듯이 들어오게 됩니다. 서진이 망한 뒤 사마예는 사마씨의 2번째 정권인 동진 정권을 양자강 유역에 건설하여, 중화 민족은 남부에서 다시 세력을 규합하기 시작합니다.

<한>이 내분으로 망한 뒤 다시 정권을 잡은 것은 갈족의 <전조>였습니다. 전조는 북중국을 통일하고 중국 남조를 토벌하여 중국을 통일하려고 했지만, 내분으로 멸망합니다. 이후 저족의 <전진>이 화북을 통일하였고, 이 전진의 위세는 남부 중화 국가를 바로 토벌하고 중국을 통일할 듯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전진의 유명한 황제 부견은 어이없게도 <비수의 전투>라는 역사상 유명한 전투에서 패하고 맙니다.

부견은 유리한 위치에서 기습, 야습, 매복 등으로 쉽게 이길 수 있었음에도, <싸움은 정당해야 하므로, 평지에서 정당하게 군사력으로 싸워야 한다>라는 이론을 내세우다가 패한 것이지요. 결국 부견은 전쟁에 지고 이후 살해됩니다. 부견의 <전진>이 망한 다음 북방 이민족 국가는 북위, 후연, 후진 등이 각축을 벌이다가 선비족의 <북위>가 통일하여 5호 16국 시대가 끝나게 됩니다.

이 5호 16국 시대가 북방에서 지속되는 동안 남방의 중화국가들은 동진 - 송 - 제 - 양 - 진으로 이어지는 남조 국가 시대를 열어갑니다. 그럼 다음 포스트에서는 동진 정권부터 시작해서 5호 16국 시대의 남방 정권들을 살펴보도록 하죠. 북위가 북방을 통일한 이후에는 5호 16국이 끝났으므로, 북위 vs 남방정권의 <남북조>시대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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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39 - 후한의 건국과 멸망에 대한 이야기

이번 장에서는 후한시대의 건국의 의미와 멸망까지의 역사를 한번 다루어보겠습니다. 후한은 기원 후 25년에서 220년까지의 왕조입니다.

1. 호족연합정권의 성립

왕망의 신이 지나친 국가통제적 정책을 실시하면서, 사회 전반의 모든 세력들이 불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호족들은 토지에 대한 규제 정책이 싫었고, 대상인들은 상공업 규제정책에 불만을 가졌으며, 농민들은 새로운 제도가 오히려 사회 불안을 부추기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왕망이 죽을 무렵 시작된 전국 각지에서의 농민 봉기는 수습이 안될 지경이었습니다. 특히 반왕복한(왕망을 죽이고 한을 부활하자)는 구호를 위친 적미의 난(붉은 눈썹의 난)은 중국 각지에 번지고 있었습니다. 이전까지 계속 이야기 했지만, 중국의 농민반란이나 왕조 교체는 음양오행설에 입각하여 황의 왕조 다음에는 적의 왕조, 이후 청의 왕조 이런 식으로 오행의 순환을 반란 이론으로 대입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여기에 도가사상과 맹자사상의 혁명론이 가미된 것이 중국 전통의 농민반란 성격이었죠. 적미의 난과 함께 녹림의 난도 사회 혼란을 가중시켰습니다.

이러한 적미의 난에 호족과 지주들은 적극 가세하여 <신>의 멸망을 지원하였습니다. 특히 남양과 하북지방의 호족 세력을은 한의 유씨 혈통인 유수를 중심으로 뭉쳐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후한>왕조입니다.

후한 왕조는 그 탄생부터 <호족>들의 지원으로 탄생한 호족연합정권이었습니다. 그들은 전한의 유방이 천민적 성격의 유협집단과 함께 호족적 성격인 항우를 물리치고 집권한 것과는 정반대의 집단입니다. 후한은 건국주체 자체가 대토지 사유화에 적극 찬성하는 세력으로 경제적 기반이 탄탄한 호족이 주체가 된 정권입니다.

이것은 전한과 후한을 나누는 큰 기준이 됩니다. 전한이 한무제로 대표되는 개별인신적 황제지배체제의 국가라면, 후한은 호족들이 주체가 되어 이끌어나가는 호족연합적 전제지배체제의 사회입니다.

2. 광무제의 중앙에서의 중앙 집권 정책

후한을 창시한 유수(광무제)는 천도하자마자 수도를 장안에서 낙양으로 옮기고, 낙양을 중심으로 한 하북정권을 성립합니다. 이것은 광무제와 그 건국주체가 하북의 기반을 이러받은 대토지 소유자라는 것을 반증하고 있습니다.

광무제는 즉위 후 고민한 것이 호족연합으로 탄생한 정권인만큼, 호족들과 떨어져서 독자적으로 왕권을 행사할 수 있는가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방에서 호족의 권한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중앙에서 만큼은 독자적인 세력을 확보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실시한 정책이 중앙의 외조인 3공의 권한을 약화시켜 버린 것입니다. 후한 대의 상공은 거의 명예직이었고, 실제 정무는 황제가 상서를 통해 하는 한무제기의 상서 정치에 가깝게 실시하였습니다. 즉, 상서대를 만들어 그 하부조직으로 상서령(장관), 상서복야(차관), 6조(행정실무)의 부서를 두었는데, 이로서 상서대 등 대각(내각 : 내조)가 완전히 실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또 황제를 보필할 수 있는 측근 세력으로 <환관부>를 설치하여 환관들을 황제 측근으로 활용하였는데, 이것은 후한 대 환관이 발호하는 계기가 되어 후한 멸망을 가져오게 됩니다.

3. 광무제의 지방에서의 호족 연합 정책

광무제는 중앙에서는 왕권을 강화했지만, 지방에서는 호족들의 기득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후한의 성립 근거 자체가 호족 연합적 정권으로서 <국가통제>를 실시하는 신을 멸망시켰기 때문입니다. 광무제는 국가가 나서서 통제할 수 있는 <국가통제체제>의 명문이 없었습니다.

그는 단지 지방 통제를 위해 전한기에 실시했던 13주 자사제를 계승하여 지방을 감찰하는 정도로 지방을 통제하였습니다. 또 사례교위를 신설하여 수도 및 가까운 지방의 정무를 순찰하려고 했지만, 이것도 황제의 녹을 먹는 중앙 신하들의 감찰 정도에 머물렀습니다.

실제 지방에서의 정책은 <호족적인 성향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갑니다.

광무제는 대토지 소유자에 대하여 전혀 손을 쓰지도 못하였고, 노비 해방령을 내리긴 했지만, 노비매매와 같은 민감한 문제는 손도 대지 못합니다. 후한에서의 지방관리나 태수는 호족의 자제로 선발하였습니다.

이 때 관리 선발은 군내 인재를 유교적 교양에 의거하여 중앙에 추천하면, <여론>에 의하여 관리를 선발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유교적 교양은 명분뿐이었고 실제 선발은 유력한 호족의 자제가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또 유력한 호족 가문에서 태수를 하고 있는 관계로, 지방의 실제 운영은 <호족>세력에 의한 것이었고, 관리를 선발하는 것은, 기존 호족이 새로운 호족을 천거하는 의미를 갖게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호족 성향의 지방 관료가 새로운 호족 관료를 선발함으로서 호족간의 유대는 깊어지고, 태수는 봉건영주와 같은 권세를 누리게 됩니다. 태수 아래의 하급관료들은 태수를 위하여 충성하는 <군신관계>적인 성향을 보였고, 후한의 지방 세력은 곧, 유력한 호족과 그 하위 호족들의 상하관계에 의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호족들이 중앙정계에 많이 진출함으로서 후한의 호족은 단순한 토지 소유 호족이 아니라, 문무를 겸비한 관료적 호족이 많았고, 이러한 호족들이 낙양을 중심으로 호족적 문화를 이끌어 갔던 것입니다.

4. 유학은 계속 퍼져나가다.

후한시대에도 유교는 계속 되었습니다. 광무제 역시 전한의 이념을 본받아 태학, 오경박사 등을 설치하여 운영하였고, 한무제 이래 유교 관학화의 이념을 계승하려 노력하였습니다. 적극적인 숭유정책으로 백성들을 교화하였고, 덕치주의 이념에 따른 정치를 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특히 명제, 장제의 전성기 시대에는 공평한 조세 부과와 무리한 징병제도의 폐지, 사학의 융성 등을 통해서 유교적 애민정치의 토대를 닦았고, 미신적이던 전한 시대 동중서의 참위론을 몰아내고 <공자>의 참뜻을 읽기 위한 고문 연구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합니다.

5. 중앙 세력은 부패하고 호족세력은 중앙에 도전하다.

후한시대가 호족연합정권인 만큼,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호족세력들이 대토지를 사유화하고 빈부격차를 심화시켜 나갔습니다. 호족들은 지방을 근거지로 중앙과 지방 정계에 진출하고, 독자적인 봉건영주처럼 군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호족들은 중앙 관직에 올라가면, 외척이나 환관 세력과 결탁하여 중앙 정치의 파벌 싸움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습니다. 특히 후한기에도 어린 황제의 즉위가 많았던 관계로, 외척의 발호, 환관의 외척견제, 호족의 중앙진출이라는 세 가지 맥락이 후한의 정치질서를 이끌어 갔습니다.

중앙에서의 혼란은 곧 지방에 큰 파급을 미치게 됩니다. 태수를 임명할 때의 부정부패와 청탁 정치, 파벌 싸움은 곧 사회문제로까지 번집니다. 황제권이 약하면, 외척들이 황제를 가지고 놀려고 하고, 황제권이 강하면 황제가 환관을 이용하여 외척을 제거하려 했기 때문에 중앙 파벌싸움은 끝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유교적 소양을 가지고 충성과 명예, 도덕, 중용 등을 숭상하는 관료지식인들과 재야 호족들은 중앙의 더러운 파벌 세력을 비판하게 됩니다. 특히 이들이 비판한 세력은 황제를 등에 업고 설치는 <환관> 세력이었습니다. 이렇게 재야에서 태학 등을 중심으로 환관을 비판하는 깨끗한 세력을 <청류>라고 하며, 기존 환관에 기대에 정치를 하는 더러운 세력을 <탁류>라고 합니다. 청류가 탁류를 비판하면서 맑은 정치를 하자고 주장하는 운동을 <청의 운동>이라고 합니다.

당시 이응과 태학생들은 붕당을 결성하여 <환관>세력들의 부패함을 알리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환관파에 의해 주살당하고 맙니다. 이 사건을 제 1차 당고의 금이라고 하죠.

1차 당고의 금 이후, 호족 출신의 대장군 두무, 진번 등은 환관을 주살하고 청류파 세력이 정권을 잡으려 정변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이것도 사전에 정보가 누출되어 청의파들은 모두 주살당하였습니다. 이것을 제 2차 당고의 금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재야 세력들은 부패한 중앙세력에 끊임없이 도전했지만, 그 결과는 처참하였습니다. 그러나 환관파의 부패한 정치는 극을 달려나갔고, 이것에 반발하는 청의운동은 더 확산되었습니다. 실제, 한의 멸망 후 위진시대와 남북조 시대의 귀족들은 이 청의 운동을 주도했던 호족들이 귀족화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당시의 호족들은 아직 환관세력을 누를 정도로 중앙 정치에 깊숙히 개입되지 못한 지방세력들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탁류파의 승리로 후한은 이제 재기불능의 부패한 사회로 타락해갑니다. 이렇게 되자, 이젠 나라의 밑바탕인 농민들이 들고 일어납니다. 이번에는 황색의 신앙으로 무장한 황건군들이 농민봉기를 일으켰습니다. 이 농민봉기를 국가가 수습하지 못하고, 지방 호족 세력들에게 진압을 떠 넘김으로서 후한은 스스로의 힘을 유지하지 못하고 멸망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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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