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만원, 10만원권 고액 화폐권 2차후보 역사인물 10명

1. 어떤 사람이 후보가 되었을까?

한국은행에서는 2009년부터 발행될 5만원권, 10만원권 지폐의 인물 후보를 10명으로 압축해서 2차로 발표했습니다. 그 인물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김구, 김정희, 신사임당, 안창호, 유관순, 장보고, 장영실, 정약용, 주시경, 한용운

2차로 발표된 인물에 대한 각기 평가가 너무 상이하기도 합니다. 예로, 각종 인터넷 포털사이트 등에서 1위를 차지한 광개토대왕은 아예 평가후보에서 빠졌습니다. 국민들은 광개토대왕을 원한다고 하지만, 중국의 동북공정 등의 정치적 파장을 고려해 아예 처음부터 삭제한 것이지요.

여성사이트에서는 신사임당, 유관순, 허난설헌, 김만덕 등의 역사 속 여성들이 많은 표를 차지했지만 신사임당과 유관순을 제외하고는 모두 10인 후보에는 빠졌습니다.

단재 신채호 등 민족주의자들이나 독립 운동가들이 대거 빠진것도 눈의 띕니다. 신채호의 사상은 무정부주의적인 사상이 많다는 점, 안재홍은 월북한 민족주의자라는 점, 윤동주, 김소월, 방정환 등도 10인 후보에서는 탈락하였습니다. 소위 좌파 사상가라는 것도 미래성에 맞지 않은 듯 합니다.

건국이후 인물들은 모두 제외된 점도 특이합니다. 박정희, 김대중, 이승만 등의 인물은 역사적 평가와 업적이 규명되지 않은 점이 많고, 국민적 논란 및 정치적 파장이 크다는 입장인 듯 합니다. 이들은 아예 후보군에도 없었습니다.

2. 인물 선정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10만원권은 이후 오랜 기간동안 한국 지폐의 최고권으로 나라를 대표할 돈입니다. 지금까지 나라를 대표하는 돈인 만원권은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이었습니다. 세종대왕의 업적이 너무 눈부신 만큼 여기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0만원권 지폐에서 세종대왕만큼의 업적을 가진 인물을 선정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될 듯 합니다. 그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10만원권의 지폐에 들어갈 역사적 인물은 어떤 기준을 가져야 할까요? 한번 정리해 보았습니다.

1. 그 나라의 역사성을 대표하는 인물이어야 한다.

첫 번째, 가장 중요한 기준은 그 나라의 역사성을 대표하는 인물이어야 합니다. 대부분의 나라들이 화폐 인물의 기준을 역사성에 두고 있습니다. 영국의 모든 지폐에는 엘리자베스 2세가 들어갑니다. 인도의 모든 지폐에는 간디가 들어갑니다. 중국의 지폐에는 어김없이 마오쩌둥이 나옵니다. 모든 지폐의 앞면에 이 인물들을 넣고, 뒷 면에서는 다른 분야인 정치, 경제, 사회, 문화면의 인물들을 새겨넣습니다. 같은 인물이 계속 나오는 돈이 식상할지 모르지만, 이 인물들이 그 나라를 대표하는 인물들이기 때문입니다.

영국은 엘리자베스 1세 때 르네상스, 절대왕정, 신항로 개척, 식민지 시대를 열었습니다. 여왕은 영국인들의 자부심을 표현합니다. 영국 왕실은 아직도 여왕을 사랑하며, 국민들은 왕실을 존중합니다. 지금 1952년 즉위한 현재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화폐에 들어감으로서 <웃고 있는 여왕의 모습>이 영국의 모습을 상징하도록 도안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과거 역사 속의 엘리자베스 1세나, 빅토리아 여왕이 아니라 현재 여왕을 화폐에 넣음으로서 국민적 단합을 유도한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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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화폐 50 파운드 - 엘리자베스 2세의 웃는 모습

중국의 화폐의 마오쩌둥은 중국 근현대사를 상징하며, 인도의 간디 역시 인도의 평화사상을 상징하도록 도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 인물들을 보면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어야 진정한 국민 화폐의 역할을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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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화폐 1천루피 - 간디의 자상한 모습

2. 외국인들이 보기에 그 나라의 정체성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화폐를 선정할 때 중요한 점의 하나는 <화폐가 통용되는 곳이 국내뿐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외국화폐를 볼 때 화폐 속 인물들이 누구인지 궁금해하는 것처럼 외국인들도 우리 화폐에서 우리 나라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하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한은의 후보군에서 단군, 광개토대왕, 을지문덕 등은 후보에 없거나, 중요성이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외국인들이 보기에 큰 가치가 없거나, 주변국과의 논란이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건 큰 오산이라고 생각됩니다.

미국 화폐의 조지 워싱턴은 영국과의 독립전쟁을 이끈 장군입니다. 하지만 영국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화폐에서 빼지는 않습니다. 광개토대왕을 중국의 동북공정을 고려해서 후보군에서 제외되거나, 단군이 실존인물인지 알 수 없다는 이유로 후보군에서 제외한다면 우리 역사의 정체성을 우리 스스로 잘라 버리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단군이 우리 국조가 아니고, 광개토대왕이 영토를 넓힌 것이 사실이 아닌지는 생각할 가치도 없을 뿐더러, 외국의 입장을 고려하여 우리 정체성을 폄하하는 입장으로는 제대로 된 화폐를 만들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주변국의 입장을 살펴 우리의 외교자세를 선택한다는 실리주의는 실리주의가 아니라 사대주의로 비칠 수도 있습니다.

중립국인 스위스는 인물 화폐가 아니라 뭔지도 모를 추상화 같은 화폐를 도안하기도 했습니다. 도대체 말도 안되는 그 화폐를 통용한 것은 미래로 나가는 스위스인의 정체성을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추상화같은 화폐는 둘째로 하고라도, 역사 속 인물들을 특정한 이유로 배제하는 행동만큼은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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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래봐도 모르겠습니다. 스위스 화폐
  

화폐를 보는 외국인들이 그 인물을 보는 순간, 이나라의 역사성과 민족적 기상이 살아있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화폐, 또는 그 나라의 역사성을 한 눈에 생각할 수 있는 화폐가 되어야 합니다.

3. 사상적 체계가 살아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화폐를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순신, 이황, 이이, 세종대왕.... 모두 이씨 입니다. 다른 종친회에서 반발할만도 하네요. 이번 화폐에서는 이씨를 빼자는 움직임도 있습니다.

그런데, 기존 화폐의 특징은 이씨라는 것보다 이들이 모두 조선시대 성리학과 연관된 인물이라는 점입니다. 세종대왕이야 성리학적인 애민정치를 하였고, 이황과 이이는 성리학을 완성시키고 조선성리학으로 발전시킨 분들입니다. 이순신 역시 성리학이 자리잡혀가고 붕당정치의 흐름 속에서 살았던 인물이지만, 이순신의 업적은 성리학보다는 장군으로서 위대함이였죠. 기존 화폐의 기준에 사상적인 측면이 들어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실제 화폐에 들어갈 인물이라면 사상적 체계가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의 업적이 어떤 사상에서 나온 것이고, 그 사상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표현되고 있었느냐가 중요합니다. 화폐의 인물은 그 인물의 단순한 업적이 아니라, 그 시대 속의 상황 속에서 그 사람이 행한 합리적 행위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지나치게 조선시대 성리학 인물만으로 화폐가 도안되었습니다. 우리 역사에 조선시대만 있었고, 우리 역사의 황금기가 조선시대였다라는 인식을 할 수밖에 없는 화폐 도안이었습니다.

우리 역사에는 고조선, 철기시대 국가들,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고려 그리고 대한제국까지 많은 영토국가가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이외의 국가에서도 사상적인 체계가 있는 인물들은 참 많습니다. 유교 인물은 많았지만, 정작 조선 이전 역사에 큰 흐름을 좌지우지 했던 불교사상이나, 민족 종교인 천도교, 대종교 등은 포함된 적이 없습니다.

또, 일제시대 민족운동을 한 사람들의 사상은 지금까지 폄하되어 있었습니다. 당대 일제에 대한 저항은 무정부주의, 폭력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계몽주의 등 다양했습니다. 그 사람들의 사상이 공산주의인지, 사회주의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시에는 그 사상이 일본에 저항할 수 있는 하나의 방편이었으니까요. 사회주의를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당시의 상황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채호는 무정부주의자라서 제외한다면, 일본 고관들에게 폭탄을 던진 한인애국단의 리더 김구 선생님도 폭력주의자가 됩니다.

사상적 체계는 당시 상황을 고려하여 계산되어야 합니다. 단지 성리학을 완성시킨 인물들만 지폐가 채워진다면 미래에 대한 지향성이 살아나지 않습니다.

4. 한국 사회의 미래를 엿볼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화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역사성이지만, 그 역사성은 과거의 업적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역사성이여야 타당합니다. 예로, 장영실은 우리나라가 지향할 IT산업과 이공계 산업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10인안에 선정되었고, 장보고는 후기신라시대 해상왕으로서 그 상업적 마인드와 탁월한 외교능력 등이 인정되어 10인안에 선정되었습니다.

단, 미래성만 있는 인물은 국민화폐로서 무게감이 떨어집니다. 역사성과 확실한 사상체계, 우리 조상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인물 중에서 미래성을 볼 수 있는 인물로 선정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3. 정말 고심해서 좋은 인물이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선정된 역사 속의 인물들에 대하여 벌써 말이 많습니다. 이 사람은 안된다. 이 사람이 왜 빠졌는가.... 말이 많죠. 선정된 인물들 모두 역사 속에서는 훌륭한 위인들입니다. 그러나 화폐에 들어갈 인물은 위인의 경중을 따져서 선별해서는 안됩니다. 역사성과 사상성, 인간적 노력, 미래성 까지 갖춘 인물을 가려야 합니다.

이번에 10인의 후보를 보면 역사성, 사상성 보다는 한국사회의 미래지향적인 면을 많이 고려한 듯 보입니다. 역사적인 위대한 인물들은 더 많을 지 모르지만, 그 인물들 가운데 미래 한국사회의 이상향으로 적합한 인물을 후보로 고른 듯 싶네요.

민족정체성만으로 선별한다면, 시조인 단군과 광개토대왕을 뽑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후보군에 없습니다. 감강찬, 을지문덕, 서희 등 역사속 무관들은 없습니다. 한국 사회가 지향하는 바와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미래의 한국사회가 여성을 중시하는 사회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신사임당과 유관순 같은 여성인물들이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과학사회를 주도하는 미래의 한국을 본다면 장영실을 뽑을 수 있겠죠.

실학자로서 기존의 사상체계와는 다른 변화된 사상을 제시하여 조선사회의 변화를 꿈꾼 정약용도 후보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조선후기 실학자로서는 정약용과 김정희 두 분이 들어가 있습니다. 국가 속에 포함되지 않은 인물이지만, 해상왕 장보고의 상업적 마인드와 미래 지향적 태도도 높게 평가되었습니다.

일제시대 이후의 인물로서 독립에 앞장선 김구, 안창호, 한용운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실제 일본의 침략에 의해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라는 기틀을 잡게 된 중요한 시점의 인물들이 화폐 도안에 없다는 점에서 김구 선생님도 유력한 후보중의 한 분이십니다.

이제 10인 가운데 2분이 5만원권, 10만원군의 지폐에 들어갈 인물이 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여러 사회단체들의 입장 속에서 추려낸 후보군이라, 역사성을 가진 인물보다는 미래성을 가진 인물들을 많이 택하였다는 점이 아쉽긴 합니다. 하지만, 이 인물들 중에서 어떤 인물이 한국을 대표할 지폐에 들어가게 될지 기대가 많이 됩니다.

인터넷에서 블로거들이 합성한 10만원권 인물......(재미로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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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가 장금이까지 지폐 후보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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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고조선과 단군을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인식하였을까? (삼국 ~ 일제시대)

1. 삼국시대에는 고조선에 대한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삼국시대의 고구려, 백제, 신라의 지배층들은 <고조선>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었습니다. 삼국 시대 기록들을 살펴보면, 거의 자신들의 계통을 철기 시대 국가들로부터 찾고 있습니다. 삼국은 모두 독자적 건국신화를 가지고 있고, 자신들의 뿌리는 북방에서 왔지만, 독자적인 영역국가임을 주장합니다.

사실 삼국사기라는 우리 역사서의 편찬 태도 자체가 고대 고조선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다는 것을 볼 때, 고조선에 대한 삼국시대 지배층들의 인식은 지금 우리가 삼국사기를 통해 읽어서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삼국시대의 지배층들이 고조선에 대한 인식을 하였다는 근거는 삼국사기 외의 다른 저서들에서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것을 분립적 역사의식, 삼국유민적 역사의식, 독립적 역사의식이라고 합니다. 삼국시대의 삼국이란 실제로 <대립>하는 경쟁 국가였으며, 그들 사이에 동족의식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단, 북방의 고조선- 남한의 삼한 사회라는 전통적인 씨족공동체 성격이 잔존하여 언어의 유사성과 복식, 풍습의 유사성이 있었기 때문에 어떤 계기만 있다면 동족의식을 느끼기에는 충분했을 것이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삼국시대의 역사서들은 모두 자국의 왕실계보와 중앙집권강화를 위해 작성되었을 뿐, 자국의 기원을 고조선에서 찾지는 않았습니다. 고구려와 백제는 부여계통임을 인정하는 선에서 더 이상의 연원을 찾지 못하였고, 신라는 독자적인 건국신화를 가지고 성장하였습니다. 따라서 삼국시대 자체에 고조선 인식이나 민족의식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단, 고구려 - 백제가 같은 계통이었고, 고구려, 백제가 각각 요동, 요서 경영을 하였다는 중국 기사로 미루어보아, 이들 국가 사이에는 은나라 집단에서 파생된 동이족이라는 관념은 존재했을지도 모릅니다.

2. 통일된 신라는 국가의식은 있었으나, 고조선 인식은 없었다.

통일신라 시대에도 역시 고조선에 대한 인식은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신라의 통일 자체가 대동강 이남에 한정된 불완전한 것이었고, 당과의 관계 개선이 국가 기원보다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단,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삼국의 백성은 모두 하나의 민족이라는 <삼한일통의식>이 보입니다. 예로, 신라 9주를 고구려, 백제를 고려하여 편제한다던가, 신라 중앙군인 9서당에 백제, 고구려, 말갈인 등을 편제한다던가 하는 것들이 그 예이죠.

또, 발해를 북국이라고 부르면서, 같은 계통의 국가라는 의식을 보이기도 합니다. 발해와는 국경을 접하는 대립국가이면서도, 때로는 서로 협력하면서 우호적인 교류관계를 지속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삼한일통의식>은 신라 말기로 갈수록 <신라 중심의식>만 남게 됩니다. 그 이유는 신라 사회를 지배한 <골품제> 때문입니다. 골품제라는 제도에서 고구려, 백제의 유민이나, 품족들이 신분 상승의 기회를 얻기가 힘들었고, 신라 하대 골족의 상호 항쟁도 치열했습니다. 이렇게 신분제의 모순으로 삐걱거리는 사회에서 <민족의식을 찾아봐라!>라는 주문은 무리입니다.

결국 후삼국의 성립으로 <삼한일통의식>은 산산조각이 납니다. 후백제, 후고구려의 건국 자체가 다시 백제, 고구려 등 분립적인 기원을 주장하면서 신라와는 다른 계통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니까요. 즉, 신라사회의 골품제적 한계가 같은 <기원>을 찾아야하는 당위성을 억눌렀던 것입니다.

3. 고려 전기에도 고조선을 찾는 자가 없었다.

고려는 통일 후 다시 <삼한일통의식>을 주장합나다. 마한-진한-변한 등의 삼한의 계보와 통일신라로 넘어선 통일 계보는 모두 같은 뿌리에서 기원된 것임을 말한 것이죠. 단, 이 때의 <일통> 주체는 초기에는 <고구려>를 계승한 의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국호가 고려(고구려)였고, 초기에는 활발한 북진정책을 실시하였으니까요. 그러나 문벌귀족사회가 보수화된 12세기 이후에는 다시 <신라중심>의 일통의식으로 전환됩니다. 이자겸의 난,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금의 세력확대 등의 사회적 혼란을 겪으면서 고려사회는 철저한 보수주의로 돌아섭니다. 이러한 보수적 유교사관에 입각하여 저술된 책이 김부식의 삼국사기였고, 삼국사기 역시 신라중심의 사관이 많이 보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고려 전기에는 아직도 각 민족의 기원을 고구려, 백제, 신라 등에서 독립적으로 찾으려고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고조선으로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는 경우는 역사 문헌에서 찾아보기 힘듭니다. 백성들의 민란은 고구려, 백제 계승을 표방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은 고구려를 계승한 북벌론에 기반하였고, 김부식의 묘청진압은 신라 계승의식을 표방하고 있었습니다.

4. 고려 후기 : 드디어 단군을 발견하다.

고려 후기에는 드디어 고조선과 단군에 대한 기사가 실린 역사서들이 출간됩니다. 민족의 기원을 단군에서 찾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 이유는 무신정변을 통한 극심한 사회의 혼란을 겪었고, 몽골과의 40년간에 걸친 항쟁으로 민족의 정체성이 흔들렸기 때문입니다. 이제 지배층은 민중들에게 국가와 지배층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민족적 기원을 제시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일단, 민족의 기원을 고구려로 거슬러 올라가 주몽의 위대함을 민족적 차원에서 표출한 작품이 이규보의 <동명왕편>입니다. 동명왕편은 무신집권기의 사회혼란상에서 지어진 저서입니다.

이어, 몽골침략기에는 드디어 단군까지 민족기원을 거슬러 올라간 책이 집필되었습니다. 이 책이 바로 일연의 <삼국유사>, 이승휴의 <제왕운기>입니다. 이 책들에 대한 세부적인 설명은 <저서 해석> 포스트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특히, 제왕운기는 단군을 기원으로 하는 <삼조선설>을 주장하여, 민족의 기원을 <단군>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체계화하였습니다. 제왕운기에서는 단군을 민족적 시조로 하여 <전조선>, 기자를 문명화의 상징으로 하여 <후조선>으로 이분화하여 고조선을 증명하였습니다. 단, 제왕운기에서는 준왕을 몰아내고 고조선을 찬탈한 <위만조선>은 철저히 부정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이 전, 후 고조선은 이후 준왕이 남으로 내려오면서 <삼한>에 전통에 계승되었고, 그 이후 <삼국>에 전통이 계승되면서 고려까지 민족적 힘이 내려왔다는 내용입니다.

고려 후기에는 유교사관에 입각하여 <단군기년설>도 등장합니다. 유교에서는 600년을 가장 좋은 수로 여기고, 600이 들어가는 숫자는 번영을 상징하였습니다. 그런데, 단기 3600년이 되는 고려 시대는 600 * 6이라는 엄청나게 좋은 운수를 가진 해이므로, 길하다는 것이 바로 단군기년설입니다. 즉, 단군을 민족시조로 하여 연도를 계산하고, 이 단군기년을 유교적 원리와 결합하여 민족 기원의 정당성과 다복함을 논리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이 논리로 인해 정착된 단군의 기원은 조선건국에도 반영되었고, 조선시대 단군기년의 기원으로 작용합니다.

5. 조선시대에는 단군을 민족 시조로 확정하다

조선 전기에는 이제 단군을 민족 시조로 확정합니다. 이성계가 건국후 국호를 배정받기 위해 중국에 건의한 국명 중에 <조선>이 있었으며, 이 <조선>이 곧 국호가 됩니다. 즉, 국호 자체가 <조선>이었고, 단군을 시조로 하는 국가가 탄생한 것이지요. 따라서 조선 초기의 저서들에는 단군신화에 대한 언급이 상당히 많습니다. 세종실록지리지,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응제시주 등에는 모두 단군 관련 기사가 적혀있으며, 조선 초기 태조기에는 요동정벌을, 세종 기에는 4군 6진 개척 등을 실시하면서 상당히 북진적인 국가성향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16세기 사림파가 정권을 잡고, 붕당정치가 활성화되면서 이러한 북진 정책은 중단되었습니다. 그러나, 임진, 병자난 등 국난을 겪으면서 단군을 조상으로 하는 민족 기원 의식은 더욱 강화됩니다. 특히 전쟁 이후 17세기에는 단군에 대한 막연한 <민족 시조> 개념이 아닌, 단군이 어떻게 우리 민족의 기원인지를 논리적으로 증명하려는 수많은 시도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도의 중심에는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실학자들은 싫증적으로 고조선의 존재, 고구려와 발해의 존재까지 증명하여 민족의 기원을 체계적으로 연결하려는 노력을 하였습니다. 이익은 독자적인 <삼한 정통설>을 내세우면서 고조선 - 삼한 - 삼국 - 통일신라라는 개념을 확립하였고, 많은 실학자들이 다양한 기원론을 주장합니다. 유득공은 발해고를 저술하여 발해까지 우리 역사에 포함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하였습니다.

  - 이익의 삼한정통론과 단군 인식

동국의 역대 흥망은 대략 중국민족과 그 기원을 같이 한다. 단군은 중국 요임금과 같은 시기에 흥하였다. 주나라 무왕대에 이르러 기자가 와서 조선왕에 책봉되었다. 그 뜻한 무엇인가? 단군조선의 후예들이 점점 쇠퇴하여 미약하였고, 국가의 임금이 돌아오지 못하였으므로 기자가 와서 새롭게 문을 연 것이다. 여기에 8조의 교를 내리니 지금 전하는 바가 3개조이다. (중략)

무릇 문명의 개화는 실로 기자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후손들이 그 국가의 업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위만이 와서 간사함으로 준왕을 몰아내었다. 준왕은 오히려 군대를 이끌고 남으로 내려가 영토를 다시 넓히니, 준왕에게 복속한 나라가 50여국이었다. 이로서 동쪽 국가의 정통은 끊기지 않게 된 것이다. (중략)

(그 이후..)삼국(고구려, 백제, 신라)은 모두 동서로 나뉘어 있고, 그 정통이 무엇인지 모르게 되었다. 이에 마땅히 강목을 따져 보니, 남북조 시대의 선례를 따져보는 것이 좋겠다.(중국 남북조 시대에 정통이 없는 것처럼 삼한도 정통은 없는 것으로 하겠다는 뜻인 듯 합니다.) (중략)

지금 경주는 진한의 옛 터이며, 그 땅의 지계가 바르게 잡혀있다. 그 땅이 속되지 아니하며, 모자람이 없으니 이것이 어찌 어리석은 오랑캐의 풍속이란 말인가? 나는 이렇게 추론하여 말하겠다. 이것은 필시 기자가 와서 개화한 것의 영향이 큰 것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문헌에 증거가 있다면 내가 능히 밝힐 수 있다고 하였다. 또, 과거 문헌에 그것이 없다면 이것은 가히 추론하여 알아낼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익이 주장한 삼한정통론 -

6. 일제시대에는 진정한 <민족>의 개념까지 정립하게 되다.

조선 말기 이후 외세의 침투 속에서 고조선사에 대한 인식은 더욱 강화됩니다. 사실, 조선시기까지의 단군에 대한 언급은 거의 지배층 위주의 논쟁이었습니다. 왜냐면, 근대사회까지 우리 사회는 양반과 상민, 노비가 존재하는 <신분제 사회>였기 때문에 양반과 노비가 같은 하나의 민족이라는 의식은 공유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중인, 상민, 노비는 민족의식보다는 신분의식이 더 크게 삶을 지배하였습니다. 이들이 민족의식을 발휘하는 때는 <국난, 외침> 등의 국가적 문제가 있을 때였습니다. 실제, 국난이 있을 경우에도 피지배층들은 <민족의식>을 발휘하여 국난을 극복했다기 보다는 <자신의 삶의 터전을 지키고, 공동체적인 향촌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노력에서 <민족의식>처럼 보이는 국가 수호 의식을 발휘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조선 말기 외세의 침략과 일본의 조선 정복 야욕은 신분을 넘어선 전 계급의 단결이 필요하다는 시대적 상황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이제 민족적인 종교인 <대종교>가 등장하여 단군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 기원을 민중에 전파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민족주의적 역사의식이 일본 등 외세에 대한 대응논리로서 확립됩니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역사의 동력을 <정신>으로 보고 정신의 성쇠에 따른 역사의 순환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고조선을 민족의 기원이자, 중흥기로 보았습니다. 중국에서 건너온 기자 조선은 철저히 부정하고, 고조선 이래 고구려-발해 등으로 이어지는 북방 기원도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신채호는 고조선 이래 북방 정신이 쇠퇴한 것은 금국정벌을 주장했던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 김부식 등 문벌보수파에게 진압당한 것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이 사건이 곧 민족적 정신이 쇠퇴하게 된 결정적 계기로서 <1천년래 대사건>으로 인식한 것이죠. 이 사건이래 단군 조선의 민족기운이 쇠퇴하여 결국 일제 식민지 지배기까지 오게되었다고 말합니다.

이후, 정인보, 안재홍, 손진태 등의 신민족주의 사학자들은 조선 전통의 것을 찾아야 한다는 <조선학 운동>까지 전개하며 민족의 기원인 단군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해방 이후 이들 민족주의 학자들과 사회주의 학자들의 대부분이 월북하거나, 납치당하면서 신민족주의적인 경향의 학풍은 남한 사회에서 대부분 단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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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 이야기는 설화인가, 허구인가?

1. 단군이야기의 기록

단군이야기는 고려시대 일연의 삼국유사, 이승휴의 제왕운기 등에 최초의 기록이 나타납니다. 이 이야기는 하늘에서 내려온 하늘의 자손이라는 선민사상, 곰 부족이라는 토템 등이 나타나는 대표적인 고대 설화입니다. 우리는 보통 단군의 이야기를 신화라고 많이 부르는데, 신화는 실제 역사 이야기와는 별도로, 신비롭고 초자연적인 현상을 신이라는 존재를 통해 이야기하는 것이므로 허구적인 부분이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단군 이야기는 허구적인 이야기보다는 당시 역사상을 사회발전단계에 맞추어 설명하는 이야기이므로 신화보다는 설화가 맞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단군이야기를 허무맹랑한 신화로 보아 단군의 정통성을 부정하려는 논의는 일제시대 식민사관을 주장하는 일반학자들에 의해 조작된 부분이 많습니다. 그럼 일단, 일제시대 식민사관을 주장하는 일본인 학자들의 주요 주장을 적어볼까요?

2. 단군이야기는 허무맹랑한 신화일 뿐이다.

식민사관을 주장하는 일본의 논리는 일본의 한반도 지배가 역사적으로 당연하다는 하나의 논리를 위해 그 <논리> 선상에 모든 한국사를 끼워맞추는 식의 주장입니다. 그 논리는 타율성론, 정체성론, 일선동조론, 만선사관 등 끝도없이 만들어졌지만, 여기서는 단군 관련 논의만 보겠습니다.

단군 시기에 대한 일본측의 가장 큰 주장은 한반도에는 청동기 시대가 없다는 주장입니다. 한반도에는 단군이라는 인물이 없었으며, 이것은 한국인들이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만든 창작물이라는 거죠. 실제 한반도는 위만조선과 한사군 등 중국의 식민지 정권에서부터 출발하므로, 한반도는 애초에 식민지 국가였다는 논리입니다. 이 것에 대한 일본인의 주장을 적어볼까요?

- 조선은 석기시대 없이 위만이라는 중국인이 건너와 중국 한사군에게 멸망하였고, 금속문명이 최초의 문명으로서 고대 조선은 식민지 상태에서 출발한다고 일본인 학자들은 주장한다. -    (한국사특강, 서울대학교 출판부) -

또 일본인들은 단군신화가 만들어진 배경을 대몽항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설정합나다. 몽골침략기에 고려인들이 외세와 싸우면서 국난극복에 도움이 되는 통일 사상이 필요했는데, 여기에 부응하기 위해 단군신화라는 근거없는 신화를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상식적으로만 생각해보아도 일본측의 주장은 이상합니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일본의 신화에는 태양신부터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상한 신까지 더 황당하거든요. 일본건국신화는 더욱 역사적 근거없이 천황가의 신성성을 과시하기 위한 부분이 더 큽니다. 뭐 묻은 자들에게는 뭐 묻은 것만 보인다고, 스스로의 역사가 그런 요소를 가지고 있으니 남의 역사도 그렇게 보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하지만, 역사적인 부분은 역사적으로 반박해야 하므로 단군 설화가 단지 허구가 아님을 밝혀야 되겠죠?

3. 단군이야기는 사회상을 담고 있다.

푸코라는 철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신화는 신들의 이야기이지만, 사람들이 원하는 이상적인 신의 모습이 담겨져 있어서 당시 사람들의 생각과 생활을 읽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설화는 인간들의 이야기이므로 그 속에는 인간들의 바람뿐만 아니라 실제 인간들의 삶이 살아 숨쉬고 있다고 말합니다. 단군설화는 신화를 넘어선 설화이고, 설화를 넘어서면 역사적 요소가 보입니다. 단군의 건국 이야기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인용하면, 위나라의 <위서>에서 가져온 이야기라고 합니다. 이 위서가 현재 전해지지 않기에, 우리 주장이 좀더 설득력을 잃어가지만, 단군의 조선 건국은 역사적 배경을 지녔다는 사실은 알 수 있습니다.

일단, 일본이 주장하는 한반도에는 청동기가 없었다는 것은 현재 잘못된 주장임이 밝혀졌습니다. 한반도에는 청동기 시대와 고조선의 유물 뿐만 아니라 신석기, 구석기 유물도 다수 나오고 있으니까요. 또 관자, 산해경, 위략 등의 중국 사서에 고조선과 중국이 접촉한 사실들이 많이 보입니다. 단군이 허구라면 중국 정사들도 다 허구가 되는 것이지요.

일본은 환인이라는 표현이 고조선 당시에는 없던 용어를 고려인들이 만들었기 때문에 이것 자체가 허구이며, 신화 구조 자체가 허구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환인이라는 표현은 고려 당시 <하늘님>을 표현할 때, 종종 쓰는 보통명사이므로, 하늘에 계신 신을 지칭하는 일반 용어일 뿐입니다. 환인은 불교식 용어로 <제석천>이라는 신을 뜻하는 용어인데, 단군신화에서는 단지 하늘에 계신 신을 부르는 용어로 사용 했을 뿐, 허구적으로 만든 말이 아닙니다. 일본의 신 <아마테라스>는 일본 고대사람들이 첨부터 그렇게 불렀을까요? 아마, 아주 고대인들은 다른 용어로 불렀을 것입니다.

또 일본인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자손, 사람과 곰의 결혼 등의 역사성을 부정합니다만, 일본 신화를 보면 일본이 과연 이것을 부정할 수 있을까 생각됩니다. 일본의 신들은 남매끼리 결혼하여 계속 신을 낳고, 임신하고, 또 가족끼리 결혼하기를 반복합니다. 사실, 동아시아에는 곰이 나오는 신화와 하늘에서 신이 지상으로 내려오는 소위 <친신강림(일본 천황가가 주로 쓰는 말입니다.)>은 보편적 이야기입니다. 왜냐면, 당시 동아시아 고대 사회에서는 선민사상을 가진 부족 위주로 정복사업을 벌였고, 곰 등 토템을 가진 타부족과의 항쟁과 연합이 계속되는 역사가 있었으니까요.

단군신화에 나오는 <천강신화>는 하늘에서 신이 내려왔다는 고대 보편적 관념을 따른 것입니다. <인수교혼>이라고 하는 사람과 동물의 혼인은 당시 전쟁과 연합이 계속되는 사회상을 상징하는 것 뿐입니다. 푸코는 이러한 설화의 역사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합니다.

또 단군신화에는 한인, 황웅, 풍백, 우사, 운사 등 유교, 불교, 도교 사상이 들어있다고 일본측이 주장하면서, 허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고대적 사상을 고려인들이 나름대로의 방식대로 풀어 쓴 것일 뿐입니다. 실제, 삼국유사의 단군이야기는 고기, 위서, 본기 등 이전 사서들을 인용하면서, 그 용어를 스님인 일연이 사는 고려시대에 맞게 수정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신화는 시대적 이데올로기를 반영하는 것으로 신화구조 자체로 판단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상식을 일본학자들이 부정하고 있습니다. 단군설화는 <천강신화> - <인수교혼> - <단군의 탄생>이라는 3개의 에피소드 구조로 형성된 하나의 스토리입니다. 이것은 설화 구조 속에서 그 당시 사회상을 파악하고, 이야기를 읽어가면서 민족적 기원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지침서일 뿐입니다. 이것을 액면 그대로 곰과 호랑이가 쑥을 먹었다라고 이해해 버리면, 설화 속에 숨어있는 역사적 맥락은 전혀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4. 단군이야기는 역사적인 증거가 부족하다.

단군이야기의 가장 큰 문제점은 현재, 그 역사성의 고증 문제입니다. 단군의 건국은 기원전 2333년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실학자인 이익 등이 <단군의 연대는, 중국 고대 태평성대 시기의 요, 순 전설시대와 맞먹는 것이다>라는 주장에 부합하기 위해 내세운 연대인데요. 실제, 중국에서는 전설 시대인 황제, 곡, 요, 순, 하나라 시대를 자신의 역사라고 주장하지만, 하나라 정도까지만 역사적으로 밝혀졌습니다. 우리 역시 단군의 역사성이 아직 확연히 드러나지 못하였음은 중국가 마찬가지네요.

학교 교과서에서 우리는 청동기 시대의 상한선을 기원전 10세기라고 배웁니다. 어떤 역사학자도 청동기를 기원전 2333년까지 보진 않습니다. 그 정도 상한선의 유물은 발굴된 적이 없으니까요. 즉, 우리 민족과 관련된 청동기는 아무리 올려잡아도 고조선 건국기까지 나오지 않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삼국 정립기에야 겨우 고대 시기가 정착되었다고 말하며, 고조선은 고대 국가가 아니라 석기를 쓰는 원시국가였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결국, 우리가 단군신화에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것은 발굴되지 못한 청동기 유물의 부족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고고학적 기술은 아직도 수준이 낮고, 지금까지 발굴된 것도 풍납토성 등 아주 초보적인 유물만 발굴되었습니다. 더 깊이 말하자면, 우리는 확실한 역사적 근거로 우리 역사를 복원해야 하는데, 현재 수준이 그렇지 못한 관계로 알 수 없는 역사는 비워두고 있는 실정입니다. 비어있는 부분의 역사가 많다보니 고대사에 대한 각종 루머들이 너무 많습니다. 단군시대의 족보가 나돌기도 하고, 단군시대 한반도 남부에는 전설의 고대 국가가 있었다고 까지 주장하기도 합니다. 실제, 한국사에서는 단군의 고조선 시기 남쪽 진국이라는 국가에 대해서는 교과서에 설명조차 없습니다. 그 때 남쪽 진국은 고조선과 무역을 했다면, 뭔가 수준있는 국가였을텐데요. 우리는 단군조선이 중국 요임금기에 건설했다는 사실을 부정해서도, 긍정해서도 안된다고 봅니다. 중국에서도 증명되지 않은 전설시대인만큼, 우리 역시 차분히 다 연구하고 조사해서 진실이 숨겨져 있는 역사적 자료들을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단군왕검을 보통 해석할 때, 단군은 제사장으로, 왕검은 정치적 수장으로 이해하여 제정일치의 군장 칭호라고 보통은 여기죠. 그러나 우리 고대사가 거의 가설 수준이듯 이것도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한국고대사는 역사적 사실을 확실한 근거를 제시하여 이야기 하기에는 너무 자료가 빈약합니다. 사람들이 고대사를 놓고 소설을 쓰는 이유가 이 증거의 부족때문이죠.

5. 단군이야기의 기록들과 주요 내용들

단군설화는 삼국유사에 나오지만, 삼국유사 역시 단군 설화를 고대 사서에서 인용하였습니다. 고기, 본기, 위서 등에서 인용하였음을 제시하면서 이야기가 전개되죠. 중국 사서인 위서가 단군의 존재를 주장한다면 사실일 가능성이 무척 높습니다. 그러나 위서는 지금 중국에 남아있지 않고, 안타깝게도 소실되었습니다.

제왕운기의 본기에서 단군설화는 삼국유사랑 조금 다릅니다. 삼국유사의 단군이야기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그 이야기이고, 제왕운기는 단군설화를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 차이점만 보죠.(일연은 스님이교, 이승휴는 유교영향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상기하면 그 차이점이 이해됩니다.)

제왕운기에서는 환웅과 웅녀가 아니라, 단웅천왕의 손녀와 단수시이 결합하였다고 말합니다. 환웅은 단군과 연결시켜 단웅이라 적었습니다. 유학자들은 중세 유교적이고 합리적인 역사관을 추구하였던 사람들이다보니, 사람이 곰에서 태어났다는 말을 그대로 적지 않고, 좀더 현실적으로 각색한 것입니다.

이러한 단군이야기는 그 시기나 저자에 따라 조금씩은 달라집니다. 조선시대 응제시주, 세종실록 지리지, 동국여지승람의 단군신화가 각각 조금씩 명칭이 다릅니다. 그러나, 단군이야기의 존재나 사실성을 부인하는 내용은 없습니다.

중국 산둥성의 무씨 사당은 단군신화가 중국내에서도 존재하였다는 것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유적입니다. 그 벽화에는 삼부인이 등장하며, 풍백, 운사, 우사가 보이고, 곰과 호랑이가 등장합니다. 이 무씨사당은 기원후 2세기에 제작된 것이니, 이 무렵 단군설화의 골격이 되는 이야기는 이미 고대부터 존재하였고, 이런 기원의 설화를 가진 민족들이 시베리아 남부, 중국 대륙 일부, 한반도에 널리 분포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치우설화에서도 단군과의 연계성이 잘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 내용은 다음 책을 참조하여 서술해보겠습니다. (뿌리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 1권, 솔출판사 참조)

치우는 중국 3황 5제 중 맏형격 되는 황제가 신농씨를 정벌할 때 살았던 인물입니다. 용어하도와 산해경을 보면, 치우의 근거지는 난하유역이라고 하는데, 이 지역은 훗날 고구려인인 맥족 세력의 근거지입니다. 참고로 제시한 책을 보면, 치우 형제가 81인이라는 기록은 치우 세력이 형제적 질서를 가졌음을 보여주는데, 후대 고구려의 간등이 형, 대형 등 형계열의 조직과 유사합니다. 또, 고구려 말로 무신을 주류라고 하는데, 이것이 치우라는 어원이 되었다고도 주장하네요.(좀 신방성 없어보이긴 합니다. 대한민국 최고 교수님들이 이런 상상력으로 주장을 전개하시다니...)

치우설화에서는 풍백, 우사 등이 보이는데, 풍백은 공기, 우사는 물과 관련된 농경사회의 개념이라고 합니다. 특히 운사는 번개, 벼락 등의 개념으로 치우설화에서 빠진 것을 단군설화에 넣은 것이라고 하는데, 이 운사는 벼락의 개념을 통해 당시 사회가 공식적으로 형벌을 부과할 수 있는 국가 사회로 나아감을 상징한다고 합니다.(이것도, 좀 이해가 안가기는 합니다만.... 최고 교수님들이 쓴 것이니... 그런가보다하고 이해합시다.)

여기까지 제가 정리할 수 있는 단군이야기를 쭉 한번 적어보았습니다. 이제 단군신화는 그만 넘어가고, 실제 역사로 잠입해보죠... 고조선 역사로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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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에서의 민족교체론과 민족연결론의 논쟁

1. 청동기 시대의 민족교체론 주장 근거

한국사에서 일단 구석기인들은 현재 우리 민족과 연관성이 없다고 봅니다. 빙하기 대의 이동생활과 이, 모발 등의 형태로 보아 민족일 가능성은 희박하죠. 또, 당시 한반도와 일본이 분리되지 않은 사실도 민족이 아니라는 신빙성을 더해줍니다.

민족교체론은 신석기인들에 대한 이야기로 출발합니다. 신석기인들은 북방계통의 시베리아에서 새로 내려온 사람들입니다. 우리 민족은 이들을 모체로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지요. 이들은 시베리아 지역의 신석기 문화를 이룩하고 내려온 고아시아족이라고 보통 보며, 빗살무늬토기를 사용한 민족이라고 봅니다.

문제는 이어 청동기 때 내려온 민무늬 토기인들입니다. 민무늬 토기는 우리나라 전역에 분포하며, 반달돌칼 등 새로운 도구가 한반도에서 출토됩니다. <민족교체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이들 청동기인들이 이전의 신석기인들과 다른 민족적 구성을 가졌다고 주장합니다.

즉, 신석기인들과 청동기인들은 일단 <거주 장소와 생계수단>이 다릅니다. 강가와 구릉지대라는 거주 장소가 다르고, 신석기 문화와 청동기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같은 민족으로 볼 수 없다고 합니다. 즉, 한반도 청동기 문화는 단순히 문화 전파가 아닌 주민들의 이동으로 이루어졌으며, 우리는 이들을 다른 민족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죠.

이것은 우리 교과서에서 일부 반영된 논리입니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학자들은 빗살무늬토기인은 고아시아족, 민무늬토기인은 예맥족으로 분리해서 봅니다.

2. 청동기 시대의 민족연결론 주장 근거

민족연결론은 민족교체론이 틀렸음을 조목조목 따져서 보여줍니다.

먼저 생계수단의 차이가 주민집단의 차이라고 볼 수 없다는 점입니다. 사람은 환경이 바뀌면 생활이 바뀌기 마련이므로, 생계수단이 바뀐 것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했음을 뜻한다고 이들은 말합니다. 또, 한국의 신석기 문화가 시베리아 고아시아 문화라는 증거도 없고, 그 문화와 뿌리가 같다는 증거도 없다고 이들은 말합니다. 즉, 민족교체론이 지나친 비약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이들은 빗살무늬인과 민무늬인들은 다른 생업경제를 꾸려갔을 뿐, 결과적으로 같은 계통의 사람들이라고 주장합니다. 빗살무늬인들이 민무늬 토기로 점진적으로 발전했을 가능성은 계속 높아지고 있으며, 신석기인중에 민무늬 토기를 받아들여 청동기 문화를 흡수한 이들이 분명 있을 것이라는 점도 강조됩니다.

이 논쟁은 아직, 한반도에 충분한 유적이 발굴되지 못하여 소모적인 논쟁으로 지속되고 있습니다.

3. 실제 민족이 형성된 시기는?

위 논쟁에서 한가지 중요한 점은 민족연결론이든, 교체론이든 간에 우리 청동기 문화는 신석기 시기와는 달리 단일 계통의 주민들이 번영시킨 문화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독자적인 집단으로 청동기인은 존재하지 않았고, 청동기인들은 다양한 계통에서 유입되었습니다. 청동기의 기원지가 많은 만큼, 아직 우리나라로 유입된 청동기의 정확한 전파지역도 너무나 다양하여 딱 꼬집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청동기 유이민들이 하나의 우리 민족이라고 여기게 된 시기는 세형동검이라는 동류의 문화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라고 보통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를 공유하던 우리 민족을 기록에서는 <예맥>족이라고 합니다. 중국기록에는 예맥을 <동이족>이라고도 합니다.

동이족은 은주교체기에 한족과 처절한 싸움을 벌이다가 한반도로 많이 유입된 자들이 주류를 이룬다고 합니다. 또, 이동하지 않고 중국대륙에 남아서 한나라 시기까지도 동이족 문화를 중국에 전파하기도 합니다. 대표적으로 산둥반도의 <무씨사당벽화>에는 단군 신화와 거의 흡사한 내용의 신화가 벽화로 남아있습니다. 백제가 근초고왕기에 중국에 진출하여 요서, 진평 2군을 설치하였다는 기록은 이 무씨사당벽화와 연결하면 아주 허구는 아닌 듯 합니다.

그러나 이 청동기 시대는 민족의 주류가 형성된 시기일 뿐, 민족이라는 자각을 우리 스스로 느끼기까지는 엄청난 시간이 걸립니다. 삼국통일기에 같은 민족을 통합하였다는 <일통삼한의식>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싹튼 동류의식은 고려시대 <몽골>과의 항쟁에서 민족적 조상은 <단군>이라는 정확한 개념을 도출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에서 <민족>이라는 단어 자체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사실, 민족이라는 용어 자체가 근현대 이후에 만들어진 개념입니다. 조선시대 국난이 있을 때, 실학자들은 단군, 고구려, 발해 등을 같은 부류로 여기고 국가 개념을 확장하였습니다. 이것도 국가 개념의 확장이지 민족 개념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아닙니다. 단지, 뿌리가 같다는 동류의식의 확인이었지요. 신분제 사회에서는 민족이라는 개념보다 신분이라는 개념이 더 크게 작용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민족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은 일제시기 민족주의 사학자들이었고, 이 개념은 일본에 대한 저항의식을 담고 있는 개념입니다. 반제국주의 운동, 반봉건주의 운동이라는 개념 속에 민족이라는 개념이 탄생하였고, 이 민족이라는 개념은 신분차별을 초월한 일치된 공동체의 힘을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그 개념은 해방이후에는 남북통일을 위한 <한민족> 개념으로, 독재시설에는 경제 개발을 위해 뭉친 <민족 전사>의 개념으로 사용되어 지금까지 내려왔죠. 반공헌장을 외운 세대와, 국민교육헌장을 외운 세대, 서태지 노래를 듣던 세대, 월드컵을 보면서 길거리에서 민족의식을 공유하는 세대는 다르지만, 민족개념은 아직까지도 우리 가슴 속에 남아있습니다.

이 파티는 민족개념에 대한 파트가 아니라, 민족교체론 논쟁 파트이므로 여기까지만 정리할께요. 민족개념에 대한 정리는 근현대사 할 때 자세히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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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신화                              

고기(古記)에 이렇게 전한다. 옛날에 환인(桓因)의 서자(庶子) 환웅(桓雄)이 항상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몹시 바랐다. 아버지는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 태백(三危太伯)을 내려다 보매 인간 세계를 널리 이롭게 할 만한지라, 이에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어 내려가서 세상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은 그 무리 3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太伯山) 꼭대기로 내려왔다.[즉 태백이란 지금의묘향산이다.]신단수 아래에서 이곳을 신시(神市)라 불렀다. 이 분을 환웅 천왕이라 한다. 그는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 수명, 질병, 형벌·선악 등을 주관하고인간의 삼백예순 가지나 되는 일을 주관하여  세계를 다스려 교화시켰다

이 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굴에서 살았는데 늘 신웅(神雄, 곧 桓雄)에게 사람되기를 빌었다 때마침 신(神, 桓雄)이 신령한 쑥 한 심지와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말했다.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는다면 곧 사람이 될 것이다곰과 범은 이것을 받아서 먹었다

기(忌)한 지 21일〔三七日〕만에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범은 능히 기하지 못했으므로 사람이 되지 못했다

웅녀(熊女)는그와 혼인할 상대가 없었으므로 항상 단수(壇樹) 아래에서 아이 배기를 축원했다  환웅은 이에 임시로 변하여 그와 결혼해 주었더니 그는 임신하여 이름을 단군 왕검(檀君王儉)이라 하였다.

단군은 요(堯) 임금이 왕위에 오른 지 50년인 경인년(요 임금의 즉위원년은 무진이니 50년은 정사이지 경인은 아니다. 아마 그것은 사실이 아닌 것 같다.)에 평양성[지금의 서경]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조선(朝鮮)이라 불렀다 또다시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阿斯達)에 옮겼다. 그 곳을 궁홀산(弓忽山) --- 혹은 방자(方字)로도 되어 있다.---또는 금미달이라 한다  그는 1,500 년 동안 여기에서 나라를 다스렸다 주(周)의 무왕(武王)이 왕위에 오른 기묘년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매 단군은 장당경으로 옮기어었다가 후에 아사달에 돌아와 숨어 산신(山神)이 되었는데 그 때 나이가 1천 9백 8세였다.

                                                                                         - 삼국유사  -

사료해석 : 단군신화는 해석하고자 하면 끝도 없고, 해석도 너무 다양하기 때문에 교과서적인 것만 언급하겠습니다. 단군신화에 대한 교과서적 해석은 다움과 같습니다.

청동기 시대로 접어들면서 농업이 발달하여 잉여생산물이 축적되고 정복활동으로 사유 재산과 계급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분화는 더욱 심화되었고, 평등사회는 계급사회로 바뀌어 갑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권력과 경제력을 가진 지배자가 등장하였는데 이들을 군장(족장)세력이라고 합니다. 이들 중에서 세력이 강한 군장은 주변의 여러 사회를 통합하고 점차 권력을 강화하여 나라를 세우는데 이러한 단계의 국가를 군장 국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군신화에 보이는 바람, 비, 구름 등을 주관하는 풍백, 우사, 운사의 존재는 이 사회가 농경사회였음을 알수 있게 합니다. 또 곡식, 생명, 형벌, 선악 등을 중시하는 것으로 보아 사유 재산과 계급이 분화된 사회였다는 것도 알 수 있죠. 한편 단군은 제사장, 왕검은 군장의 의미를 가진다는 점에서 고조선은 제정 일치 사회라고 볼 수 있구요. 자신의 조상을 하늘에 연결시켰다는 점은 선민사상을 가졌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곰 토템이 보이는 것은 다 아실거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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