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편>

15화. 평생을 불교와 싸운 유학의 아버지 - 한유

1. 맹신적인 종교가 국가를 망치는 것이다. 

중국 불교를 마무리 하면서 어떤 상징적인 이야기를 꺼내야 쉽게 이해될까 고민하느라 포스트가 지연되었다. 오늘 이야기는 불교를 배척하면서 평생을 살아간 <한유>의 이야기로 중국 불교편을 정리하고자 한다.

중국 당나라 시기... 불교는 최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국가 권력과 밀착한 화엄종, 천태종 등 교종 종파 뿐 아니라, 백성에게 직접 뛰어들어 불교의 대중화를 이끈 정토종, 선종에 이르기까지 불교천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불교의 힘이 너무 강해질 때마다 중국 황제는 종교에 태클을 걸었다. 그 이유는 정치적 목적 때문이다. 국왕이 불교를 용인하는 것은 불교가 왕권 강화에 도움을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황제에게 불교, 도교, 유학의 구분을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만약 종교가 황제권을 넘어서려 한다면 그 종파를 찍어 눌러야만 했다. 특히 유교, 도교, 불교라는 세 종파가 공존하던 중국 고대 사회에서 황제의 선택권은 넓었다. 황제가 불교에 위협을 느낄 때마다 유교, 도교를 이용하여 불교를 탄압하였고, 그것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몇몇 <폐불사건>으로 알려진 것이다.

링크 : 불교편 9화. 서로 우위를 점하려던 도교와 불교의 한판 승부

특히 유교는 불교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대세는 불교와 도교였고, 특히 불교는 당나라 측천황제(측천무후)의 불교 중흥 노력으로 최강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 하지만, 당나라의 국운이 기울던 당 말기부터 불교의 위세는 꺽이게 되었다.

당나라는 측천황제 이후, 불교가 사회를 지배하였다. 황제는 미륵의 화신으로 생각할 정도였고, 귀족들은 스스로가 보살이라고 여기며 성불을 기원했다. 천태종과 화엄종의 <경전>은 귀족들의 교양지침서였다.

공식적인 당나라의 통일 사상은 유학의 일종인 <훈고학>이었지만, 훈고학은 옛 성인들의 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수준이었다. 백성들은 불교를 믿고, 집집마다 향불이 올라왔다.

2. 유학자들의 반격

유학자들은 불교 세력이 성장하자 불교에 대한 비판을 공론화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황제권 강화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첫째, 불교 사원을 짓는다는 것은 막대한 세금을 낭비하는 것이고, 종교 사원은 세금을 내지 않는 특권을 누린다. 그것은 왕권을 강화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둘째, 죽은 뒤 내세가 기다리며, 내세는 현생의 죄업과 연결되어 있다는 <인과응보>에 대해 국가적 차원으로 비판하였다. 유학에서는 현실 사회에 대한 모순을 파악하고, 현실 개혁과 사회 안정에 대한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죽은 뒤 영혼이 어쩌구.. 하는 이야기는 현실성이 전혀 없으며, 백성들을 현혹하는 이야기일 뿐이다. 국왕으로서 당연히 막아야 되지 않겠는가?

셋째, 불교가 왕권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당나라 이전의 불교는 왕권 강화에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불교의 교리가 심화되어 강력한 <종파>가 생겨나자 문제가 발생했다. 불교가 석가모니의 참 뜻을 내세워 중국 전통 사회의 윤리에 도전한 것이다. 유학에서는 충성, 효도를 강조하지만, 불가에서는 출가릃 하여 부모와 국왕을 떠나는 것마저 허용하고 있다. 세금을 내야할 백성들이 줄어들고, 전통 윤리에서 멀어지는 것을 국가가 보고만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넷째, 불교 교단의 승려들이 <국사>가 되어 정치적 힘을 갖게 되었다. 왕권이 약해지는 시점에서는 이것도 골치아픈 것이었다. 백만대군보다 무서운 것이 종교적 힘을 가진 백만 민중 아니겠는가?

결국 당말기 폐불사건은 남북조시대 이후 계속 되어온 왕권과 불법의 대립이 극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남북조와 수나라를 거치면서 여러 차례 폐불을 당해본 불교였지만, 당말기에 대놓고 진행된 폐불에서는 큰 타격을 입었다.

특히, 경전으로 중심으로 귀족층과 밀접했던 <교종>은 교단이 박살날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다. 반면, 간략한 선법 수행과 <믿음>을 강조했던 <선종>은 그 피바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당나라 말기에 살아남은 불교 교파는 <선종>이었고, 결국 선종이 후대 중국 불교를 이끌어가게 된다. 그러나, 불교 자체가 위축된 만큼 불교의 힘은 떨어졌다. 당나라를 이은 송나라는 신유학인 <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삼았고, <교종> 교파는 송대 이후 아무런 힘도 가질 수 없었다.

3. 불교도 싫어, 귀족도 싫어...  NO 만을 외치던 <한유>

당송팔대가의 으뜸이라 불린 한유는, 중국 사회의 문제점을 <불교>에서 찾았다.

백성들이 죽은 뒤 <윤회>를 생각하면서 현실을 암흑으로만 생각하고 있다는 것과, 귀족들이 불상앞에 재산을 기부하면서 사회적 역할을 못한다는 것을 모두 <불교>탓으로 여긴 것이다.

특정 종교에 매달려 모든 것을 버리는 행위가 생긴다면 예나 지금이나 사회적 문제로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종교가 <종파>적 철학까지 잃고 지배층이 맹신하는 상황까지 발생한다면 국가 존립 자체가 위험해진다.

한유는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신유학>을 제시하였다. 노장사상은 허무주의이며, 불교는 현실이 아닌 <내세>의 종교라고 주장하고 다닌 것이다.

한유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나 스스로 제자백가를 독서하고 과거에 합격한 뒤, 특출한 학식으로 승승장구 승진하던 엘리트 관리였다. 하지만, 지배층이 숭배하는 <불교>에 정면 도전하면서 험난한 인생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당나라 덕종에게 지배층의 문란함을 비판하였다가 귀향을 갔었지만, 뛰어난 학식을 인정받아 다시 조정에 들어갔다. 그러나, 또 다시 지배층의 사상을 비판하여 귀향을 가게 되었고, 이것이 그의 일생에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귀향갔다 돌아왔다, 또 귀향갔다 돌아왔다....

특히, 한유가 미움을 받은 것은 당나라 헌종 때 <황제>의 불교 숭배를 비판한 것이 원인이 되었다.

당 헌종이 법문사라는 절에서 석가의 손가락 뼈한마디를 구해 궁궐로 가져온 뒤 제사를 지내고 다시 절로 보낸 일이 있었다. 그것을 본 지배층 인사들과 백성들이 모두 그 뼈한마디를 찾아가 난리를 치는 것이었다. 부자들은 자신의 재산을 그 뼈마디에 기부했고, 백성들을 생업을 포기한채 뼈마디 앞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어찌 인도에서 죽은 석가모니란 인물이 중국 사회 전체를 흔들어놓는단 말인가? 진짜인지 알 수도 없는 석가의 썩어 문드러진 뼈조각이 국가를 망친단 말인가?

한유는 헌종에게 <불교를 신봉한 군주들은 모두 단명했다>는 글을 올리며, 황제를 직접 비판하였다. 그리고 아무 생각없이 살아가는 당나라의 지배층들도 비판하였다. 소위 <귀족>이라고 불리며, 남작, 백작, 자작 등 작위를 받고 살아가는 지배층들은 개념(槪念)이 없다고 비판한 것이다.

그는 지배층들의 문학인 <시문학>까지 정면으로 부정하였다. 사륙변려체 등으로 구절을 맞추어 술자리에서 돌려말하는 싯구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것은 아무 의미없는 유흥일 뿐이다. 문학이란, 현실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있어야 하며, 진정한 <도>를 깨닫기 위한 노력 속에서 나와야 한다.

당나라 지배층이 쓰는 화려하고, 아름답기만 한 문장들은 아무 의미가 없다. 요즘으로 따지면 원더걸스나 빅뱅의 노래가 귀에 착 붙게 반복적인 멜로디로 구성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뜻은 아무 의미없는 것과 같다. NOBODY를 백번 외쳐봐도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한유는 한나라 이전의 고문들을 회복시켜 아무 의미없는 당나라 지배층의 문학을 부정하려고 했던 것이다. 왜 하필 한나라 이전의 고문으로 돌아가자는 고문부흥운동(古文復興運動)을 전개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불교가 한나라 이후에 성행했기 때문이고, 유학이 한나라 때까지 전성기를 누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반지배층 성향을 가진 한유.... 그 결과는? 오랜 시간 귀향살이었다. 그러나, 인생의 절반이 중앙정권에서 배제된 그였기에 백성들과 직접 만날수 있는 기회도 많았고, 많은 친구를 사귈 수도 있었으며, 성리학의 토대가 된 저서들도 적을 수 있었다.

4. 불교를 비판했으나, 유학도 내 버려두지 않은 한유

한유는 불교, 노장사상 등을 비판했고, 그것을 신봉하는 지배층과 무지한 백성들을 동시에 비판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옛 유학을 그대로 옹호하지도 않았다.

한유는 한나라 이전의 유학들도 비판하기 시작한다. 공자와 맹자의 말씀부터 시작된 고대 유학을 당나라에서 <오경정의>로 압축하였다. 당나라에서는 과거시험의 명경과를 보기 위해 <오경>을 공부해서 암기해야 했다.

하지만, 한유는 그것을 비판한다. 왜 공자와 맹자의 사상을 단순히 암기해야만 하는가? 그들의 사상이 절대적이라고 맹신한다면, 불교를 절대적으로 믿는 이들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어떤 사상에 대한 맹신은 결국 교조주의일 뿐이다.

한유는 불교 자체가 나쁜 것이라 말하지는 않은 듯하다. 하지만, 불교의 교조주의적 성향을 비판하기 위해 평생을 불교와 싸우며 살아갔다. 그의 역사관은 이렇다.

중국의 전설시대에는 인간 윤리를 지키며 살아간 태평한 시기(태평성대)가 있었다. 그러고, 중국인의 전통 윤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면서 <유학>이 등장하였다. 하지만, 한나라 이후 불교라는 외래 종교가 유입되어 황제들이 단명하고, 국가의 전성기도 단축되었다. 위진남북조의 긴 혼란기가 불교의 전성기였으며,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황제는 불교를 견제하면서 국력을 낭비하였다.

따라서 고대 유학을 부흥해야 하지만, 시대가 달라진만큼 새로운 유교 철학이 필요하다. 한유는 새로운 유학 철학을 <성선설>에서 찾았다.

맹자의 성선설은 인간의 성을 인, 의, 예, 지, 신 등으로 구분한 뒤 본성이 착한가를 따지는 철학이었다. 반면, 한유는 성선설, 성악설을 모두 보완하면서 인간의 성품은 3가지로 나뉜다고 말한다.

성 상품

  태어나서부터 선한 성품

성 중품

  선과 악 어느쪽으로나 갈 수 있는 성품

성 하품

  태어나서부터 악한 성품

한유의 책 중에서 널리 알려진 책은 <진학해, 원도, 원성>이라는 3권의 책이다. 진학해는 자서전으로 불교비판에 대한 내용이 많이 실려있고, 원도는 유학의 나아갈 길과 불교의 문제점이 실려있다. 원성에서 성삼품설을 적어두었다고 한다.

5. 불교의 시대가 가고 성리철학의 시대가 오다.

당나라 말, 한유의 출현과 더불어 시작된 성리학의 태동은 불교의 입지를 비좁게 만들었다.

한유의 벗인 유종원은 한유의 철학마저 비판하면서 <유물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는 역사 발전의 핵심을 <세력>으로 파악하였다. 공자, 맹자와 같은 성인이 역사를 좌지우지하지 않는다. 그들은 말 그대로 성인이거나 종교인일 뿐이다. 우주나 음양오행이 인간의 삶을 결정하지도 않는다. 우주는 단순한 음과 양이 모인 기(氣)일 뿐이다. 기(氣)는 살아있지도 않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따라서 우주의 기가 인간행위에 벌을 내린다거나, 복을 준다는 말 자체가 미신일 뿐이다. 결국, 인간 세계를 이끌어가는 것은 역사를 이끌어가려는 <힘있는 인간 집단>일 뿐이다.

유종원과 한유의 후학인 이고는 스승 한유의 철학에 선종 종파의 <수련법>까지 더하였다. 선종계열의 불가에서는 인간이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맹자가 인간의 성이 모두 선하다고 말한 것처럼, 부처 역시 누구나 착한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말한 것이다. 따라서 성인이든, 군자든, 평민이든 모두가 선할 뿐이다. 단지, 우주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외부(기 : 氣)의 영향을 받아서 훗날 선과 악으로 갈릴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모두가 선해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처의 수련법인 <선>을 행해야 한다. 선종의 명상법과 수양법, 좌선과 대화는 학문과 종파를 넘어서 모두에게 유용한 수련법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당말기, 새로운 유학 사상가들은 불교를 비판하면서도, 옛 유학의 참뜻을 자기 나름대로 재해석 하려고 노력하였다.

새로운 유학은 당나라 귀족층들이 농담따먹기 하듯 적어내는 의미없는 글귀나 고사모음이 아니라 인간과 우주의 본성을 연구하는 <뜻>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그것이 고문부흥운동으로 이어진 것이다. 고문부흥운동은 화려한 문구의 시를 벗어나, 현실생활과 관련된 문제들을 철학적 명제로까지 끌어내려는 노력이었다.

당말의 유학자들은 국가 권력이나 지배층과 밀착된 교종 종단을 철저히 배척하였다. 그러나, 신유학 역시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고 뜻을 찾는다는 점에서, 선종 교단의 수련법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하였다.

6. 불가와 도가의 철학이 성리학의 <태극>으로 합쳐지다.

당나라 다음으로 등장한 송나라에서는 성리철학의 틀이 완성되면서 사회 지배철학으로 자리잡은 시기였다.

그 역사적 철학을 <태극>으로 정리한 이가 바로 <소강절>과 <주렴계>였다.

절에서 거주하면서 불교철학과 유학을 두루 공부한 소강절은 불교, 도교, 유학의 철학을 두루 정리하여 태극(太極)이라는 불변의 원리를 만들어내었다.

태극이란, 절대 불변하는 우주의 진리로서, 성리학에서 말하는 이(理)와 같다. 태극은 불변하지만, 그것을 알아채는 인간의 정신(神)이 사물을 파악하는 것을 기(器 : 물질)리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정신과 기는 돌고 돈다. 세상에는 시작점이 있는데, 이것이 정신으로 표현되며, 또 물질로 표현되며 물질이 소멸되면 다시 정신으로 돌아간다. 이것은 불가에서 말하는 <윤회>의 이론과 비슷하다.

또, 돌고돌아 물질이 자연으로, 정신으로 돌아간다는 점은 도가의 무위자연과 추연의 음양오행설과 유사하다.(실제, 소강절이 불교, 도가의 철학을 의도적으로 인용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지만, 돌고돈다는 법칙 자체는 변하지 않고 불변하는 진리로 남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태극>인 것이다. 태극은 모든 자연과 인간, 우주의 근본 법칙이다.

이 사상을 정리한 이는 동시대를 살았던 친구인 <주렴계>이다. 그는 선종 선승들과 직접적인 교분이 있었고, 선종의 수양법으로 자신을 단련하면서 살았던 인물이다. 주렴계는 모든 현상의 근본 법칙인 태극에게 2가지 속성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움직이는 것을 양(陽)이라 하고, 정적인 것을 음(陰)이라고 하는데, 이 음과 양이 돌고 돌아 우주의 법칙을 회전시킨다는 것이다. 음과 양은 오행(화,수,목,금,토)의 상극을 만든다. 양은 남성, 태양 등을 뜻하며, 음은 여성, 달 등을 뜻한다. 불(火)이 양이라면 나무(木)가 음이 된다.

그리고, 이 양과 음이 상호작용하면 우주가 돌게 된다. 만물의 생성을 주도하는 것이 건(乾)이고, 받아들이는 것이 곤(坤)이다. 하늘과 남자가 건이면, 땅과 여성이 곤이다.

주렴계의 철학은 결국 불교와 도교의 철학에서 파생되었다. 선종에서 말하는 공(空) 사상과 도가에서 말하는 무(無) 사상 등의 철학을 유가 형식에 맞춰 <태극>으로 정리한 것이다.

단, 차이점이 있다면 불교와 도가에서는 존재의 근거가 되는 불변의 진리를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논리적인 정신적 개념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러나, 주렴계는 <태극>이 인간 세계에 존재하는 님자, 여자, 하늘 등의 명칭을 가진 물질이라는 점에서 <유물론>적인 관점의 철학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탐구할 수 있는 태극의 실체를 리(理)라고 말하고 있다. (태극도설)

7. 선종 철학을 벗어나 이기론으로 향하는 성리학...

동시기를 살았던 장제는 좀 더 세밀하게 불교 철학과 성리학의 차이점을 설명한다. 불변의 본질인 태극 자체를 리(理)라고 말하면서, <리>는 단순히 변화의 법칙을 설명하는 원리라고 말하였다. 실제 우주를 구성하는 실체는 기운(기 : 氣) 인데, 이것이 바로 눈에 보이는 존재자라고 말한 것이다.

따라서 장제가 주장한 <주기론>은 불교사 입장에서 보면 아찔한 것이 된다. 불교의 <공>사상이나, 도가의 <무> 사상이 전면 부정되고, 우주에 실제 존재하는 기운(氣)이 명백히 물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장제의 입장에서 <기>란, 우주의 생성부터 현재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이며, 지금 이순간에도 변하고 있는 모든 사물인 것이다. 더 이상 <색즉시공 공즉시색>과 같은 어려운 말은 통하지 않는다. 모든 사물은 우주의 기운(氣)를 받아 생겨나서 살아가다가 사라질 뿐이라고 말하면 끝이기 때문이다. 내세도, 윤회도 이젠 없다. 기운(氣)은 살아있을 때 활동할 뿐이며, 죽은 뒤 사라질 뿐이다.

동시대를 살았던 정이천, 정명도 형제는 장제의 <기> 사상을 우주와 만물의 일치로 끌어올린다. 그들은 모든 만물에 기운이 있고, 그 기운은 우주에서 내려준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만물과 하나가 되는 경지에 이르고, 모든 중화인이 하나의 민족이라는 것을 아는 단계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주의 기운(氣)은 불변하는 원칙인 이치(理)에 의해 움직이므로, 모든 우주의 기운에는 이치가 담겨져 있다고 말한다.(일물일리론 : 一物一理論)

이 이론을 정리하여 성리학을 완성한 이가 바로 성리학의 아버지 <주자>이다. 주자는 이치(理)와 기운(氣)의 상관관계를 정리하고, 그것을 중국민족의 우월성과 정당성으로 규정하면서 새로운 정치철학을 완성했던 것이다.

이 와중에 불교의 교종 철학은 설 자리를 잃었다. 정치철학으로 성리학에 지배권을 빼앗긴 불교는 이미 당나라 지배층이 무너지면서 정치적 실권에서 사라진 것이다. 이제 불교는 민중속으로 파고든 선종과 정토종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송나라를 넘어 명, 청 시대로 이어지면서 서민 불교로 자리잡아간다. 그리고, 송나라 이후 역사적 변환점에 새롭게 자리잡게된 철학은 <유학>이었다.

자, 그럼 이 쯤에서 중국 불교이야기도 끝내고 한반도와 일본의 불교로 넘어가보자.

한반도의 불교는 인도, 중국 불교의 연장선에서 이야기될 것이다. 고조선에서 시작하여 현재의 조계종까지의 불교를 역사와 관련해서 살펴보자. 그리고 일본의 불교는 우리 역사와 비교해서 다루면 좋을 것 같다. 이야기 했듯이 티벳이나 동남아 불교는 동아시아 역사와 큰 관련이 없기 때문에 관련 부분만 조금씩 이야기하려고 한다.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by 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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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5화. 불교의 외침 - 이젠 인도를 떠나고 싶어요 ~

1. 인도에 불교가 없다?

불교의 종주국은 인도이다. 그러나, 기원후 5세기가 지나고 인도에서는 더 이상의 불교 논의가 진행되지 않았다. 오히려 티벳이나 중국, 동남아시아에서 불교의 교리 논쟁이 활발하게 펼쳐진다. 특히, 4세기 이후, 불교가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 지역은 중국과 한반도 등 동아시아이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석가의 가르침이 재정리되어 대승 불교로 정립된 인도의 불교는 아시아 각지로 전파되었다. 그러나, 정작 인도 본토에서는 불교의 힘이 사라졌다. 그 이유는 새로운 정권의 성립 때문이다.

기원전 5세기 마가다 왕국이 불교를 보호한 이래, 기원전 4세기 마우리아 왕조에서는 <왕이 곧 부처의 화신이다>라는 사상으로 불교를 옹호하였다. 대표적인 왕이 스스로 전륜성왕이라고 말하였던 아쇼카 왕이다.

기원후 3세기 까지도 인도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왕조들은 불교를 인정하였다. 기원 전후 인도 남부에 브라만교를 신봉하는 안드라 왕조가 있었으나, 인도 중북부의 대부분 지역은 불교 문화와 간다라 미술을 인정하는 쿠샨 왕조가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 쿠샨 왕조는 쿠샨인(이란인) 계통의 왕조로 다양한 종교를 모두 인정하였다.

<쿠샨 왕조의 불상>

<쿠샨 왕조의 전성기>

쿠샨 왕조의 카니슈카 왕(2c)은 중국-이란-인도를 연결하는 헬레니즘 상권을 장악하면서 상권과 통행세를 받았고, 국경을 넘나드는 불자들을 보호하였다. 특히 동아시아에서 서아시아로 이르는 비단길과 인도를 거치는 바닷길은 불교 전파 경로와도 일치했다. 헬레니즘의 다체로운 문화는 대승 불교의 확대를 촉진하였고, 그 결과 중국, 한반도, 인도에 이르기까지 불교가 널리 전파되었다.

그러나, 4세기 말, 인도의 상황은 급변한다.

브라만 교를 신봉했던 아리아 인들의 강력한 국가가 다시 등장한 것이다. 갠지스 강 유역에서 찬드라 굽타가 건국한 굽타왕조는 쿠샨 왕조를 멸망시키고 북인도 전체를 통일하였다. 그리고, 아리아인 우월주의를 표방하며 이민족들을 추방하기 시작한다.

투르크인, 샤카부족(석가부족), 이란인(쿠샨인)은 아리아인들의 세상에서 설 곳이 없었다. 이제 세상은 고대 브라만의 후손들이 아리아인의 세상이 되었다. 그리고, 아리아인들의 고대 사상의 복구를 꿈꾸며 강력한 인도 민족주의를 주장하기 시작한다.

이민족과 혼혈족, 반브라만 종교는 인도에서 추방되었다.

<4세기 굽타왕조의 영역>

그리고, 고대 브라만의 베다 문학을 재정리 하여 산스크리트 문학이 등장한다. 브라만교에서 유래한 힌두교가 인도 전통 민족 종교가 되었고, 인도인의 율법은 <마누법전>으로 정리되었다. 고대 브라만 민족의 위대함은 <대서사시>로 편집되었다. 그것이 유명한 힌두교 경전인 <마하바라타>, <라마야나>이다.

대서사시는 고대 신인 브라만을 찬양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비슈누, 시바 등 고대적 요소를 갖춘 전통신을 아리아 부족의 현실에 맞게 재편한 것이다. 그리고, 힌두의 신은 인도인을 괴롭혔던 모든 이민족을 물리칠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대세는 <불교>가 아닌 <힌두교>였다.

그럼, 그동안 불교는 뭘하고 있었을까?

불교의 교리는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었지만, 강력한 굽타왕조에 맞설 힘은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특히 인도 북부의 불교 교단들은 이미 큰 싸움으로 지쳐있던 상태였다.

마우리아 왕조에서 쿠샨 왕조까지 이어지는 동안 불교는 북부 지역의 강대국들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반면, 불교 사원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북방 이민족들과 끊임없는 투쟁을 하였다. 특히, 쿠샨 왕조 시기 불교 교단이 주적으로 삼았던 이민족은 <훈족>이었다.

중국의 진시황제가 만리장성을 쌓으면서 중국에서 밀려난 훈족들은 끊임없이 인도 북부 지역을 약탈하였다. 이 훈족들은 동으로는 중국 북부로, 서로는 게르만 사회로, 남으로는 인도로 진출하여 기원후 세계사의 여러 지역에 영향을 준다. 인도의 고대 여러 왕조들이 이 훈족의 침입으로 멸망하였고, 서유럽에서는 서로마의 멸망을 이끌었던 게르만족의 이동까지 훈족의 영향력이 미쳤다.

그나마, 이란인이 세운 쿠샨 왕조가 기원후 4세기 무렵까지 버틴 것은 왕조를 지지했던 불교 교단의 협조 때문이었다. 그러나, 쿠샨 왕조는 망했고, 불교 교단은 훈족과의 투쟁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이제 더 이상 불교는 없었다.

힌두교의 복고주의는 불교 사상을 원시 브라만 주의로 돌려놓았다. 수드라 계급에게 평등은 더 이상 없었다. 바르나 제도의 계급 차별은 확고했고, 모든 직업과 주거, 결혼까지도 계급별로 차등을 두었다. 마누법전은 힌두교를 믿는 아리안 민족만을 위한 법이었다. 하층민에게 <해탈>의 기회는 없었다.

아잔타 석굴 : 인도양식과 이전 양식들이 결합한 인도적인 양식. 동아시아에도 많은 영항을 주었다.

2. 불교는 <밀교>가 되어간다...

아리아 민족 우월주의를 내세운 굽타 왕조는 7세기가 되기 전에 멸망한다. 7세기 무렵, 불교를 옹호하는 바르다나 왕조가 출현하면서 중국 불교와 우호관계를 맺기도 하지만, 대부분 인도의 작은 독립국들은 힌두교를 옹호하였다. 힌두교가 지배층의 종교로서 백성들을 통제하기 편했기 때문이다. 7세기 대부분의 국가에서 불교는 힌두교의 교리에 포섭되어 그 의미를 잃어갔다.

인도에서 대승 불교는 점차 <밀교>가 되었다.

힌두교를 믿는 아리아인의 탄압으로 종교 집회는 비밀스럽게 열렸다. 불교도들은 교리를 찾는게 아니라 종교 자체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 점점 종교의 교리는 희박해지고, 절대자나 유일신을 찾는 신비주의 종교로 변질되었다.

초기 논리적인 불교에서 볼 수 없었던 주술 신앙도 등장한다. 미륵이 바람과 불, 홍수를 몰고와 세상을 정화시킨다는 믿음이 등장한다. 또 민간 신앙과 불교의 구분이 사라지면서 민간에서 믿었던 수많은 신들이 불교 안에 들어오게 된다.

그나마, 이런 변질된 <불교>조차 7세기 이후 사라져간다. 7세기 이후 인도에 마호메트의 이슬람교가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이슬람교의 기본 사상은 <평등>이다. 계급간 <차별>을 강조하는 힌두교와는 상극이었다. 하층민들은 <차별>을 강조하는 힌두교가 싫어서 불교를 선택했지만, 이슬람교가 들어오자 이슬람으로 개종하기 시작한다. 어짜피 똑같은 <평등>을 주장하는 종교라면, 힘있는 <이슬람 정복자>들이 숨어지내는 불교도보다야 훨씬 낫지 않겠는가?

10세기 이후 본격적인 이슬람 세계가 된 인도는 또 한번 문화적 격동을 경험한다. 힌두교 사원과 불교 사원은 동시에 파괴되었다. 이래 저래 불상은 정권의 놀림감이 되었다. 16세기 무굴제국이 성립했지만, 무굴 제국은 전통 아리아 종교인 힌두교와, 하층민 종교인 이슬람을 융합시키기에 급급했다. 불교가 설 자리는 없었다.

21세기 현재, 인도에서 불교도의 인구는 전체 인구 비율로 보았을 때 너무나 미미하다. 불교의 종주국은 대승 불교가 정립된 5세기 이후, 한번도 주도권을 잡지 못하고 힌두교와 이슬람교에게 자리를 내어 주었던 것이다.

3. 불교의 최강국으로 자리매김한 중국 불교

5세기 이후, 불교의 종주국 자리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넘어갔다. 중국은 유가, 법가 등 다양한 사상체계가 이미 정비되어 있었고, 굳이 불교가 아니더라도 국가와 사회를 운영하는데 지장이 없는 선진국이었다.

중국과 인도는 전혀 이질적인 문화권이었다. 중국어는 한자(표의문자)이고, 인도어는 범어(표음문자)이다. 중국인들은 유가, 법가 사상등 국가와 인간의 사회적 현상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려는 성향을 가졌다. 반면, 인도의 불교는 인간의 인지구조를 <분석>하려는 특징을 가진 사상이었다. 인도는 수많은 소왕국이 분립하면서 생성과 멸망을 반복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반면, 중국은 춘추전국시대를 제외한다면, 비교적 통일 국가체제를 유지해왔다.

도대체 어떤 과정을 통해서 불교가 중국 사상계를 장악해 버린 황당한 일이 발생한 것일까? 그리고, 중국은 자신과 다른 이 문화와 사상을 어떻게 중국식으로 바꿔 버린 것일까?

인도와 중국이 불교라는 문화를 공유하게 된 최초의 계기는 헬레니즘 문화 때문이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그리스에서 인도에 이르는 광활한 문화권을 만들고 떠난 뒤, 인도는 쿠샨 왕조 카니슈카 왕이 서역 지배권까지 확보하게 되었다. 쿠샨 왕조 자체가 이란계 왕조였던 만큼, 쿠샨 왕조는 동서 교역에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쿠샨 왕조는 동아시아의 중국, 한반도부터 서아시아의 페르시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무역을 전개했는데, 그 과정에서 대승 불교가 아시아 곳곳에 전파된 것이다. 특히, 쿠샨 왕조와 상업을 하던 실크로드 중간 중간의 국가들은 불교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중국의 한 왕조까지 불교가 전파된 것이다. 또, 당시 인도와 중국간 직접 교역로는 바닷길이었기 때문에 <남방 바닷길>을 통해서도 불교 경전이 한 왕조에 전파되었다.

그러나, 불교를 처음 접한 중국의 한족들은 불교를 사상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없었다. 중국의 한나라는 한무제라는 강력한 왕이 <유학>을 국가 사상으로 공포했던 나라였다. 한 왕조에서 출세하기 위해서는 유학을 열심히 공부한 뒤, <구품관인법>이라는 관리 임용에 채용되어야 했다.

한 나라에서 불교는 중국 전통 사상인 도교에도 밀렸다. 한 나라의 지배층은 고품격 품위 유지 사상으로 도교의 <황로사상>을 숭배하였다. 황로사상은 노장사상에서 말하는 <무위자연>의 철학을 지배층의 교양철학으로 받아들인 것을 말한다.

처음 불교를 접한 한나라의 지배층은, 불교를 도교와 같은 교양 철학으로 생각했다. 도교에서 <자연으로 돌아가라, 백성들의 생활을 살펴라>라고 말한 것은 한나라 지배층의 우아한 집권 철학이었다.(물론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고, 말로만 생색내기 위한 교양 철학이었지만....)

불교 역시 같은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대승 불교의 <공> 사상을 접한 한나라의 지배층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공이란, 아무 것도 없는 허무함이겠구나. 아무 것도 없는 상태는 노자가 말한 자연으로 복귀한 상태이다. 공이란 곧, <없다>는 것이 아닌가? 공이란 것이 태초의 허무함이라면, 곧 자연 상태가 아니겠는가? 석가의 가르침은 노자의 가르침과 같은 것이구나....

결국 한나라 지배층이 생각한 불교는 도교와 같은 것이었다. 현실 상태에서 필요한 것은 유학이었고, 교양이나 취미로 알아야 할 것이 도교나 불교 따위였던 것이다. 교양이나 취미는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다. 따라서 도교와 불교는 하나의 패키지 세트로 묶여서 교양철학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심심할 때 생각해보는 교양 철학이 어떻게 유가 사상과 맞먹는 거대한 사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일까? 거기에는 수많은 철학자들의 노력이 있었다. 자, 그럼 그 철학자들 이야기를 한번 시작해볼까?

 

   - 참고할 만한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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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한나라 : 유교를 국교화하여 체계를 정립하다

이번 장에서는 한나라 시기의 가장 큰 업적인 한무제의 유교 국교화를 중심으로 한나라 시기 유교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다루어 보겠습니다.

1. 한나라 초기의 유교 사상

한의 초기, 건국자인 유방은 유교에 무지했습니다. 그리고 건국집단인 유협집단도 수준낮은 의리, 충성 등의 기초적인 이념만으로 뭉친 협객집단이었습니다. 따라서 건국초의 유방은 저명한 학자인 <육가>에게 학문적 교양을 배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육가>는 유명한 말을 하면서 유방에게 유교이념을 받아들일 것을 권합니다.

<말 위에서 천하를 달리며 천하를 얻을 수는 있어도, 말 위에서 국가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육가의 말을 듣고 공자묘를 만든 유방도 아직 유교이념에는 무지했습니다. 그리고, 유방이 죽은 뒤 세력을 잡은 유방의 부인 여씨 일족은 유교를 왜 해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초기의 한에서는 유가보다는 오히려 도가가 유행하였습니다. 특히 도가에 있는 신비주의 사상이 유행하여, 신선이라던가, 불로장생 등의 미신적인 부분이 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흔히 이러한 신비주의적 도가사상을 황로사상이라고 합니다. 또, 왕조 개창의 이념이었던 음양오행설 사상(음양오행의 순환으로 새로운 왕조가 개창되었다는 믿음)이 민간에 유행하여, 인간의 길흉화복을 운명과 자연에 맡기는 경향도 많았습니다.

실제, 한 초기 문제, 경제의 태평천하도 이 음양의 순환 원리에 잘 따랐기 때문이라고 믿기도 하였습니다. 한 문제 시절의 <가의>는 예악으로 풍속을 교화해야지 미신으로 풍속을 교화할 수 없다며 황제에게 유교이념을 수용할 것을 권장하기도 합니다. 가의의 노력으로 일단, 유교가 한나라 사회에 침투할 수 잇는 여건은 마련되었지만, 아직도 한에서의 유교 수준은 미흡했습니다.

2. 한무제 : 강력한 유교주의를 통해 황제권을 강화하다

이러한 미신적인 풍조를 일시에 정리하고, 유교주의에 입각하여 황제지배권을 강화한 사람이 바로 한무제입니다.

한무제는 군주권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동중서의 <천인상응설>을 받아들이고, 법가적 유교정치를 완성합니다. 또, 유교를 관학화 하여 오경박사, 효렴과, 태학 등을 정비하여 유교질서에 입각한 현실적인 관료군을 육성합니다.

그리고 효제 도덕을 중시함으로서 지방 권력자들에게 일정한 제약을 줌과 동시에, 촌락을 유교 윤리 공동체로 이념화 하여 국가 권력에 대한 충성을 강조합니다.

이 한무제의 유교 관학화 정치는 국가가 유교를 보호하여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삼은 것입니다. 이 윤리는 동아시아 문화의 성격을 유교주의로 만들어 버리는 대 사건이었으며,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가정윤리가 동아시아 사회에 정착되는 큰 사건이었습니다.

3. 유교주의의 시작 : 동중서

동중서의 천인상응설은 너무 많이 이야기해서 이제 지겨울 때가 되었네요. 여기선 간단히 정리해보겠습니다. 천인상응설은 하늘(천)을 중심으로 하여, 지상의 황제(인)을 끌어들인 정치도덕론입니다.

이 이론의 핵심은, 황제는 천의에 따라 정치를 행하므로, 황제가 도가 있다면 하늘이 감응하여 황제의 권위를 신성화 시켜줄 것이고, 황제가 도가 없다면 하늘이 알아서 심판할 것이라는 <천과 인간의 상응>입니다.

이것은 음양의 순환에 따라 왕조와 천자가 바뀐다는 음양오행설을 황제권에 대입한 유교원리로 한무제의 <천자 권위 확립>에 큰 역할을 한 사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음양오행설이 맹자의 <혁명론>을 인정하여 왕조교체를 긍정적으로 보았다면, 동중서의 이론에서는 <황제권을 심판하는 자는 하늘>이라는 개념을 제시함으로서 혁명이나 비정상적인 왕조교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신하와 백성은 유교이념상 아버지인 황제를 벌할 수 없습니다. 황제의 부도덕함은 하늘이 심판할 뿐입니다.

또, 이러한 유교사상의 이념 속에서 동중서는 태학(중앙), 군국학(지방) 등을 정비하고, 스스로 교수가 되어 5경 중심의 유교학을 완성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학문기관의 발달과 함께 인재 등용의 방법도 바꾸기 시작합니다. 원래 한 초기에는 낭관이라고 하여 궁정에서 일하는 관인 후보들을 관인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또는 부호가 재산을 납부하면 관료로 채용하는 자선제도도 있었습니다. 황제는 수시로 특명을 내려 현량한 자를 1인씩 추천하라 하여 관료로 쓰기도 했습니다.

동중서는 이러한 제도들을 하나의 기준으로 통일합니다. 즉, 천거와 선발에 가장 효율적이고, 능력중심적인 방안으로 <효렴과>를 제시했습니다. 효렴과는 지방관이 효렴한 자를 지방에서 1인씩 추천하는 제도입니다. 이것을 동중서가 다시 재편하여 향거리선제라는 제도로 정착했습니다. 이 제도는 추천과 시험을 병용하는 제도로서 지방관이 관료를 선발하고, 현량, 효람한 향촌 자제를중앙에 천거할 수 있게 한 제도입니다.

시험을 봐야 하므로 유교적 소양이 필요하나, 실제는 추천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여, 지방관은 유력 집안의 호족들을 천거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것은 훗날 9품중정제로 이어져 호족이 호족을 추천하는 관례가 제도적으로 정착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4. 금문학파와 고문학파가 등장하다.

초기에 한대 유학을 연구할 때 학자들은 전국시대 이래로 구전되어오던 경전들을 한나라에서 사용하는 예서체로 필사하여 작성한 후 연구하였습니다. 이것은 한나라의 관학으로서 한무제 이래 후한말까지 한나라 유학의 주요 흐름을 이루었습니다. 이렇게 고대 문헌을 한대 글자로 필사한 문헌을 <금문경>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왕망의 신에서는 공자의 옛 터에서 발견된 경전 등 춘추시대 이래 당시 고문체로 쓰인 고본을 직접 연구하는 것을 중시했습니다. 이렇한 고문을 <고문경>이라고 합니다. 이 고문경 연구는 후한 시대 <금문경>의 관학과는 달리 <민간>에서 연구되곤 하였습니다.

이러한 고대 학파의 두 파를 정리하여 완성한 사람이 곧 <정현>입니다. 고대학파(훈고학)은 정현에 의해 사상적 통일이 되었고, 이것이 당나라 시기에는 공영달의 <오경정의>로 완성됩니다. 오경정의란, 고대에 중요한 5경을 정리하였다는 것으로 최소한 당대 이전에는 4서보다는 5경을 중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훈구학의 연구는 <고문경>이든 <금문경>이든 책의 자구 해석에 주력하는 경향이 강하여, 철학이나 사상으로 발전하기 보다는 어문학에 가까웠습니다. 이것은 그 해석된 문구를 그대로 믿어 버리는 폐단을 낳아서 유학이 획일화되고, 합리적이지 못한 결과를 낳습니다. 특히, 국가가 관학화 한 금문경은 고문을 자의적으로 해석함으로서 동중서의 천인상응설, 왕망의 찬탈이론, 참위설과 음양오행설의 유교화 등의 정치적으로 이용되기 딱 좋았습니다.

이러한 유학의 미신화, 정치화에 반대하여 유학도 <과학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한 학자가 <왕충>입니다. 그는 논형이라는 저서에서, 동중서를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즉, 천인상응설이라는 개념에서의 천은 하늘과 인간이 상응하는 주체라고 동중서가 주장했는데, 왕충은 그것이 바보같은 소리라고 말합니다. 왜냐면 하늘은 우주라는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이 인간의 선악에 관여할 수 없고, 자연은 그냥 자연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황제권이 하늘에서 왔다던가, 신이 존재한다던가하는 말들은 모두 인간이 유교를 이용하여 지어낸 거짓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육체가 죽으면 정신도 사라질 뿐 내세도, 지옥도, 천국도 없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또 그는 과학적인 근거를 들어 공자, 맹자마저 평범한 인간임을 주장합니다. 공자를 성인화하여 그의 말을 모두 <신성화>한다면 인간이 만든 또 하나의 신이 탄생할 뿐입니다. 따라서 그는 학문이라는 것은 과학적, 합리적인 측면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의 사상은 위진남북조 시대에 타락한 유학을 비판했던 청담사상 등의 체제비판 사상과 연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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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40 - 황건적의 난과 후한의 멸망

이번 장에서는 후한말기 황건적의 난을 간략하게 다루겠습니다. 이번 포스팅은 짧은 글이 되겠네요.

1. 황건적의 난의 사상

황건적이 일어난 이유는 후한시대 중앙과 지방에서 전면적으로 백성들을 압박하는 지배층 위주의 정치가 지속되었기 때문입니다. 중앙에서는 어린 황제가 계속 등극하면서 국가적 차원의 실제 정치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세금을 걷는 횟수만 많아지고 있었습니다. 환관들은 외척과의 싸움에 몰두하여 민생은 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호족들은 대토지를 사유화하여 백성들을 괴롭했습니다. 거기에 왕조말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천제지변과 기아, 홍수 등의 악조건들이 농민들을 토지에서 유리시키고, 농민들을 초적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황건적의 난은 일단 음양오행사상에 기반을 둔 사회변혁사상에서 이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창천은 가고 황천은 온다>에서 알수 있듯이 화목토수금으로 순행하는 오행의 법칙 상 <푸른 왕조>의 시대는 가고 <황색 왕조>의 시대가 와야 한다는 민란 전통의 오행 사상이 가미된 것입니다. 중국의 민란에는 적미의 난, 황건적, 홍건적 등 앙조의 <색>을 상징하는 명칭의 민란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어려운 우주 오행의 사상을 각각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색>으로 대입하여 철학체계를 정리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

또 당시 서역에서 들어온 일종의 <밀교>도 난에 큰 역할을 한 사상입니다. 이 밀교의 영향으로 각종 주술과 미신, 점성술이 음앵오행사상과 결합하여 독특한 사상체계로 발전합니다. 정각의 태평도를 보면 부적을 태운다던가, 전쟁에 이기기 위한 주문을 외운다던가, 불노장생을 위한 약을 마신다던가하는 부분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장각 스스로가 그러한 사상을 누군가에게서 전수받았다고 나오는데, 이것은 중국 전통의 신앙에다가 서역 어디선가 유입된 밀종 사상이 합쳐진 것으로 보입니다.

2. 황건적의 난의 특징

황건적의 난의 특징은 일반 민란처럼 중앙정부에 대한 반기를 들고 이루어진 우발적인 난이 아니라, 정각 등에 의하여 비교적 체계를 잡고, 당시 집권층이었던 모든 제 세력에 대한 비판을 조목조목 하면서 등장한 난이라는 점입니다. 실제 황건적의 난을 보면 농민이 중심이었지만, 그 안에는 사회 체제 속에서 중앙에 편입되지 못한 중소 호족과 중앙정치에 반기를 든 청류파 지식인들이 난의 <지도부>로 활약하고 있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이러한 지도부는 장각을 중심으로 하는 <태평도>라는 종교를 창시하여 조직적으로 국가에 반항합니다. 이 태평도는 음양오행에, 서역 불교 사상을 가미하고, 맹자의 혁명론에, 도가의 저항권 사상까지 가미한 철학적 이념을 가진 혁명적 종교였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우발적이고 지역적인 농민 봉기를 조직적인 반란군으로 전환하는 데 큰 공을 세웁니다.

당시 한나라의 군현 제도에서 가장 기본적인 촌락집단인 <향>은 이미 호족에 의해 그 근거지의 공동체성을 상실하였습니다. 또 황건군이 크게 일어난 곳은 어김없이 호족, 환관, 외척이 대토지를 소유한 지역적 기반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의 난은 붕괴된 촌락질서를 태평도가 흡수하여 가장 적극적인 국가체제 전복 운동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난은 장각이 원소, 조조 등 호족연합군에게 패하면서 사그러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오두미교 등이 하북에서 20년간 전쟁을 지속하면서 농민군을 유지했지만, 호족 세력에 의해 격퇴되었고 결국 이 황건적의 난을 통해서 사회의 주도권을 잡은 자들은 혼란기의 영웅으로 추앙받을 수 있는 대규모 호족 세력들이었습니다.

즉, 이를 통해 볼 때 후한이라는 나라는 호족들이 연합해서 세운 정권으로서, 호족들이 지방 주도세력으로 쭈욱 군림해 오다가, 호족들에 대한 반항으로 민란이 일어나고, 호족들에 의한 민란이 진압되었으며, 호족들이 다음 세대의 주도권을 잡고 새시대를 열어가는 주체가 되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호족>을 키워드로 공부하면 쉽게 이해가 되는 나라입니다.

이 호족들이 서로 군공을 세우고, 때론 대립하면서 삼국지에 나오는 위, 촉, 오 삼국시대가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삼국지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아마 후한 대 황건적의 난에 대하여 제 포스트보다 훨씬 더 자세히 알고 계실 것입니다.

간단히 요약하면, 하북 호족 원소가 중앙의 환관 세력을 주살하고 정권을 잡았지만, 서북 호족 동탁에게 주도권을 넘겨주게 됩니다. 이후 하북지방 호족들이 연합하여 동탁을 토벌하였고, 이후 하북 호족 세력인 원소와 조조가 서로 대립합니다. 이후 호족 세력들은 각기 자신의 영역을 수성하는 군웅할거 시대를 맞이하다가 조조의 아들 조비 대에 호족세력을 통일하여 <위>나라를 건국합니다.

조조가 통일할 수 있었던 기반은, <중화>사상에만 의존하지 않는 개방적 정책과 함께, 오환, 흉노 등 북방계 유목민도 포섭할 수 있는 정략적 우월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청주병으로 대표되는 둔전민을 육성하여, 유민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황무지 개간을 통한 군사비용을 충당하고, 화북의 재건을 단기간에 이루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정사인 진수의 삼국지에서는 조조를 한의 정통으로 보고 있지만, 소설인 나관중의 삼국지에서는 제갈량의 이야기와 <유비의 정통성>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삼국지는 이문열 삼국지랑 장정일 삼국지를 비교해 보면 재미있는데, 이문열 삼국지는 생생하게 그 상황을 묘사하면서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반면, 장정일의 삼국지는 딱딱하게 흘러가지만 실제 역사적 상황을 그려가면서 자세히 묘사한게 특징인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최근에는 삼국지라는 책을 굳이 읽을 필요성이 없다는 점이죠. 중국 역사에서 재미있는 역사적 교훈을 얻는 것보다도 더 재미있는 우리 역사서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중국 삼국지보다 우리 고대 역사를 다룬 <삼한지>를 읽으세요. 더 큰 도움이 될 듯 싶네요.

별로 쓸말도 없는 황건적의 난을 포스팅 주제로 잡으니 잡담만 하다가 포스팅이 끝나게 되네요. 다음부터는 이런 중요하지 않은 파트는 사전식으로만 정리해 버리고 끝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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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시대의 사상 1 - 유가사상

1. 유가 사상의 특징

유가 사상은 춘추시대의 공자로부터 출발하여 그 제자들인 맹자, 순자로 계승된 사상입니다. 이 사상의 가장 핵심은 인간을 정치, 사회, 역사의 주체로 놓고 인간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가에 대한 철학적 논의를 통해 삶의 원리를 발견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따라서 이 사상은 인간이 살면서 지켜야 할 윤리적인 측면을 강조하며, 윤리란 자연적인 것이 아닌 인간이 만들어가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이 사상은 자연속에서 진리를 찾는 도가적인 관찰자 역할을 무책임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법가적인 강압주의는 인간의 윤리를 근본적으로 깨닫는 이치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유가사상가들은 자연과 강압의 가운데에서 <중용>을 통해 윤리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사후세계보다는 현실 속에서 인간이 살아야 할 방향을 탐구하였으며, 그것은 곧 정치 윤리로 연결되어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치국은 무엇인가를 연구하는 방향으로 나갑니다. 따라서 유가주의자들의 논의는 상당히 지배계급의 이상적 당위성과 치국의 방법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또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내적인 윤리와 도덕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예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서주시대의 봉건적 질서와 예작제도를 중시하였으며, 그 원리에 따라 예법을 만들고 제시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이들은 군주는 덕치를 바탕으로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윤리라고 말하면서도, 그러기 위해서 군주가 지켜야할 행동가짐은 예치로 규정해 놓습니다. 그리고 군주는 흔들리지 않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데, 이것은 어느 한쪽에 치우침이 없다는 중용의 논리와도 일통합니다. 즉, 예치, 덕치, 중용에 입각한 덕치주의, 예약정치, 왕도주의는 군주의 필수 항목으로서 이러한 항목을 군주가 지켜가야 혼란한 시기를 구원하고 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유가주의는 당시 공자 이래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면서 중삼-자사-맹자 계열, 자하-순자 계열의 사상이 달라집니다. 이들은 인간이 예법을 지키고 살아가는 이치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는 유가의 핵심 원리는 인정하면서도, 인간의 본성은 선한가, 인간은 스스로 사회를 개척할 수 있는가, 패도는 받아들일 수 있는가 등의 구체적인 부분에서 계열이 갈리게 됩니다.

2. 공자의 사상

공자의 사상은 한마디로 <인> 사상입니다. 어질게 사람이 사는 것이 곧 인간의 도리이자 윤리라고 주장하면서, 이 어진 삶을 실현하는 것이 바로 효, 제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인 - 효 - 제라는 핵심 도리를 말함으로서 이 도리가 가족윤리적임을 밝힌 것입니다. 즉, 가부장권을 옹하하면서 그 가족제도가 인간 삶의 기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효도와 우애를 국가적으로 확장하면 국왕에 대한 충성으로 확대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사상이었습니다. 국가에서도 국왕은 아버지가 사랑으로 가족을 감싸듯이, 덕으로서 백성들을 위무해야 합니다.

또 공자는 이렇게 인 - 효 - 제를 지켜가면서 윤리적으로 사는 이상적인 사람을 <군자>라고 지칭했습니다. 군자란 우애와 효도를 통해 <수신제가>를 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세상을 평안하게 할 수 있는 마음 가짐을 가지고 <치국평천하>를 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래서 공자가 말한 이상적 군자의 모범은 <수신제가 치국평천하>입니다.

그는 군자란 윤리적인 측면이 강한 인물로서, 교양을 갖추되, 그 교양의 바탕에는 올곧은 지식을 근간으로 합니다. 따라서 정치의 목표는 소인배들을 군자로 끌어올라는 것이 곧 목표입니다. 공자는 바람직한 인간상을 4가지로 분류하였는데, 이것을 4등론이라고 합니다. 즉, 인간은 성인 - 현인 - 군자 - 소인이 있으며, 보통의 사람들은 소인이 되지 않고 군자가 되는 것이 곧 삶의 지향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현인은 군자의 단계를 넘어선 지식과 정신을 겸비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성인은 선천적으로 성인의 천성을 타고난 사람이 올라갈 수 있는 극한의 경지라고 말합니다.

공자의 이 4등론은 한나라 시대 한고가 인간유형을 9등으로 다시 세분하였고, 훗날 위진남북조 시기에 구품관인법을 실시해서 관인을 선발할 때의 기준으로 쓰입니다.

공자는 내적인 윤리(덕)와 외적인 예(예절)이 균형잡힌 사람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봅니다. 지식과 정신의 겸비를 다시 강조한 말이죠. 그리고 이러한 지와 정을 고루 갖추어 한곳에 치우침이 없는 것을 중용이라고 합니다. 중용은 관용과 타협정신을 가진 것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어 중국문화의 사상적 기반으로 작용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중용을 실시함에 있어 격식에 맞게 행하는 것은 서주의 예에 맞는 것으로, 예악정치도 강조합니다.

3, 맹자의 사상

맹자는 공자의 제자로서 공자 사상을 더욱 심화시켰습니다. 그는 일단 인간 윤리에 대한 전제로 인간은 선하게 태어난다는 <성선설>을 주장합니다. 인간의 선한 마음은 그 처음의 본성을 유지하기 위해 지켜나가야 할 것으로 파악하고, 본성을 지키는 것이 곧 유교 윤리의 핵심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인간에게는 기본적으로 부여된 4가지 본성이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를 사단이라고 합니다. 4단은 측은지심(인), 수오지심(의), 사양지심(예), 시비지심(지)입니다. 그리고 이 4단이 발하는 것은 인간의 욕정 때문인데, 이것을 희, 노, 애, 락, 애, 오, 욕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이러한 4단에 맞추어 인간은 다섯 가지 도리를 지키며 살아야 선한 본성을 유지할 수 있는데, 이것은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 이라는 5륜입니다.

맹자는 부국강병을 위한 정치이론으로는 <덕치주의>를 바탕으로 한 <왕도정치>를 주장하였습니다. 왕도주의란, 국왕이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 한점 부끄럼도 없이 정의에 의해 다스려야 함을 말하는데, 이것은 4단 중에서 <수오지심>과 관련된 것입니다. 즉, 의 = 정의를 뜻하는 것이지요.

제왕이 수오지심에 의거하여 정의로 백성을 다스리면, 천명은 자동으로 따라오는 것으로서 하늘이 스스로 제왕을 돕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천명은 곧 하늘의 정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덕이 없는 군주가 정치를 한다면 이것은 하늘의 정의를 버리는 일이고 백성들은 새로운 하늘의 정의를 세울 수 있음을 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맹자의 사상 속에는 <혁명론>의 근거가 숨어있습니다. 이러한 혁명론적 사상이 내포되어 있기에, 맹자는 살아생전에 크게 존경받으면서도 군주들이 꺼려하는 유가사상가였습니다. 또, 이러한 천명의 변화라는 개념은 후대 <선양>이라는 선례의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법가사상가들은 맹자의 사상은 너무 이상적이고,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4. 순자의 사상

순자의 사상은 유가주의이면서도 기존의 학설과 많이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단,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고 규정하는 성악설을 배경으로 하는 철학입니다. 따라서 공자, 맹자가 인간의 본성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가족윤리를 주장할 때, 순자는 인간의 본성은 악하므로 예절을 통해서 억눌러야 된다며 맹자를 적극 비판합니다.

인간에게는 4단이라는 윤리가 내제한 것이 아니라, 절대 악이 내제되어 있습니다. 이 절대악을 누르기 위해서 예악정치, 인간윤리가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순자의 사상은 유교적 도덕관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그 실현 방법에 있어서는 약간 패도적인 법가주의를 받아들입니다. 맹자의 어머니는 아들의 교육을 위해 이사를 3번 하면서 교육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면, 순자는 아마도 자식의 교육을 위해 잘못된 길로 갈때 마다 체벌과 정신교육, 토론을 계속 할 것입니다.

또 순자는 공자가 주장하는 인효제라는 가족윤리는 허망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순자는 가족 윤리는 작은 것이며, 이 작은 것을 지키는 것보다 더 큰 윤리가 있는데, 이것은 곧 <의>를 따라 정의롭게 행동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의>를 따라 산다는 것은 소속한 사회, 또는 국가를 위한 헌신 등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러한 순자의 견해를 <충의론>이라고 합니다.

5. 유가를 비판하기 시작하다.

그럼 여기서 순자 외에 공자 사상을 비판한 수많은 제가 백가들의 비판 내용을 한번 볼까요?

도가에서는 공자의 유교사상을 도덕관념에 너무 얽매여서 인위적으로 구성된 모순덩어리의 사상이라고 말합니다. 또 유교사상이 인간 윤리적인 측면을 강조하다보니, 국왕권과 밀착된 현생문제에만 몰두하여 인간이 가진 내면의 본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도가에서는 전제군주제를 비판하고 <자연으로 돌아가라>, <소국과민>을 추구하라라고 말합니다. 도가는 국가의 단위는 최소한 작은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유가는 절대군주권을 옹호하면서 지배층의 이념만을 정당화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법가는 유가사상을 허무한 형이상학적 이념이라고 비판합니다. 유가 사상은 도덕과 윤리로 사회를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너무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이여서 과연 그것이 정치이념이 되었을 때, 실제 전쟁으로 굶고 있는 백성에게 무슨 도움이 될까를 이야기 합니다. 실제, 유가 사상은 부국강병책과는 거리가 멉니다.

묵가사상가들은 가장 신랄하게 유가를 비판합니다. 유가가 왕권이 강한 중원지역의 학맥을 가지고 있다면, 묵가는 가장 남방의 초나라 권역에서 발생하였습니다. 유가가 중원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인 원리를 정당화하는 학문이라는 것에 묵가는 크게 반발합니다. 묵가는 유가의 인-효-제의 가족윤리는 자신들만 챙기는 이기적인 윤리이고, 그것을 확대한 가부장적인 군주관은 절대군주권을 옹호하는 지배층만의 사상이라고 비판합니다. 묵가는 가족애는 <차별애>이므로, 만민이 모두 평등할 수 있는 <겸애>를 실현하는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또 유가에서 말하는 <예절과 예악>은 허례허식일 뿐이며, 그런 절차가 과연 무슨 생산력 발전에 도움을 주느냐고 비판합니다.

묵가 사상가들이 유가에 대하여 비판한 부분은 너무 많습니다. 왕위를 세습하는 것은 차별적인 관습이다, 3년상은 허례허식이다, 예악정치는 낭비이다, 가족윤리는 차별애이다, 또 현세적인 유교적 치국주의는 노동력을 중시하는 생활상과 맞지 않는다 등입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도가, 법가, 묵가의 사상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다음 장으로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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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토지제도의 기반 - 정전제도를 알아보자.

1. 정전제도

서주에서 파생된 대표적인 토지제도는 정전제도입니다. 이 정전제도는 중국 수천년의 역사를 흘러가는 가운데, 중국 토지제도의 기본틀로서 인식되었고, 유가주의자들은 이 제도 이상의 완벽한 제도는 나올 수 없을 것이라고 극찬하기도 하였습니다. 실존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이 제도의 특징을 한번 설명해 보겠습니다.

<맹자>라는 저서에서는 정전제라는 제도를 중국의 이상적인 제도로 설명해 놓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경작할 900무의 땅을 일단 9등분을 합니다. 9등분하면 한자로 井자의 모양으로 9토막이 납니다. 그래서 井田제도입니다. 이렇게 9등분한 토지의 한가운데 100무는 공전으로 만들어 국가 땅으로 합니다. 이 한가운데 100무는 농민들이 공동 경작을 해서 국가에 세금으로 바칩니다. 나머지 800무는 각각 8집에 100무씩 나누어줘서 농민들이 경작하여 먹고 사는 땅으로 합니다.

즉, 이 내용을 보면 이 당시 토지 경작은 토지를 공유하여 경작함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동아시아의 전통 토지 모델로서 <공유하면서 균분한다>라는 토지원칙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실제 맹자에 나온 이 균전제도는 정전제가 구체적으로 어떤 제도였다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니라, 정전제도에 공유와 균분이라는 좋은 이상이 나온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정도로 파악됩니다. 실제, 주나라 시기의 토지에서 집단경작을 하였다는 것은 증거상으로도 많이 입증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정전제도>가 진짜 그렇게 이상적으로 운영되었다라는 논의보다, 훗날에 미친 영향이 아주 큰 제도라는 점입니다.

이 제도에서 보여준 <공유와 균분>이라는 고대 사상은 국가가 모든 토지를 관리한다라는 <왕토사상>과 결합하여 동아시아 전통의 토지모델로 정착했습니다. 특히, 동아시아 문화권이 완성되는 시기인 당나라에서는 이 정전제를 기반으로 균전법을 실시하였습니다. 균전제는 모든 땅은 왕의 땅이지만, 모든 백성이 왕의 땅을 똑같이 가지고 자신의 땅을 경작한다는 <계구수전>의 원칙에 입각하여 백성들에게 땅을 <균분>하였습니다. 균전제는 이러한 <공유와 균분>의 원칙에 하나를 더 더했는데, 그것은 공유하고 균분했던 땅이라도 그 당사자가 죽으면 다시 국가가 환수한다는 <환수>의 개념입니다. 즉, 공동체적인 사회구조와 관련하여 시작된 정전제도는 농민에게 토지를 지급하고, 다시 국가가 환수하는 방향으로 보완됩니다. 또, 이러한 제도는 <균분>의 원칙을 중요하게 생각하므로, 지배층이 독단적으로 토지 소유를 확대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들을 계속 내놓게 되는 것이 특징입니다. 실제, 중국의 토지제도 역사를 보면, 지배층이 대토지를 확대할 때마다 정전법의 이념을 내세워 토지소유를 제한하려는 움직임이 항상 있었습니다.

이것을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조금 다릅니다. 우리나라는 지배층의 토지소유를 제한한다는 원칙보다는 지배층에게 땅에서 조세를 걷을 수 있는 <수조권>을 부여해서 지배층이 토지소유보다는 <수조권 확대>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유인하는 경향이 있었죠. 물론 조선시대에는 마지막 수조권 제도인 <직전법>이 폐지되어, 그 이후에는 우리나라 역시 지배층의 토지소유제한을 추구하려는 움직임이 실학자들 사이에서 나타납니다.

2. 그럼 실제 서주의 토지제도는 그 이상과 같았을까요?

실제 서주의 토지제도는 중국인들의 연구 결과 정전제도와 유사했다고 합니다. 서주에서는 읍에 하는 읍민들이 스스로의 경지를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공동생산을 하여 공납을 내는 공유지도 존재했다고 하네요.

문제는 이러한 서주의 토지제도는 서주 초기와 서주 말기가 상당히 다르다는 점입니다.

서주 초기의 토지제도는 씨족 공동체적 생활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에서 읍 내부의 계층분화가 없었기 때문에, 단일 영주의 지배 속에서 토지경작을 하였습니다. 또, 공동체가 경작하는 토지는 한 개인의 소유권이 아니라 공동체의 소유이기 때문에 토지를 분배하거나 교환한다는 것은 공동체 전체의 지배권이 바뀐다거나, 공동체 내부의 수취권이 이동함을 뜻하게 됩니다.

그러나 서주 말에는 왕실 근처의 토지를 중심으로 이러한 공동체적 원칙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서주 후기에는 읍 내부의 씨족공동체적 생활이 많이 무너지면서 토지의 소유가 복수 영주의 지배체제화 됩니다. 즉, 땅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공동체의 땅이 쪼개지게 되므로, 땅 주인을 자임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게 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제 토지를 매매한다고 하는 것은 공동체 전체의 동의하에 점유권이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소수 집단에 의한 토지의 점유권이 넘어가는 것을 말하게 됩니다. 이것은 씨족공동체의 몰락과 토지분할이라는 사건이 동시대에 일어남을 상징합니다. 이렇게 다수 영주지배체제에서 공동체가 와해되면서 일반민들은 가진 자와 못 가진자로 계층이 분화됩니다. 가진 자들은 유전민이 되고, 못가진 자는 무전민이 되며, 그 가운데에서는 역민이 토지를 얻기 위해 일하는 형세가 됩니다. 그리고, 농민들의 토지는 공동체의 점유가 아니라, 일부 집단들의 분할 점유 형태가 됩니다.(분할점유란 몇몇이 토지의 경작권을 가진 것을 말합니다. 1인이 토지를 소유하는 소유권의 개념은 이 당시에 없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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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에서 서주라는 시대를 인정해야될까?

1. 서주라는 시대를 인정해야 하는가?

서주라는 시대는 공자나 맹자와 같은 유교 사상가들이 가장 이상적이 평화로웠던 시대라고 규정한 시대입니다. 중국 문화의 기본 틀은 봉건제도, 정전제도, 종법제도 등이 이 시대에 나왔고, 실제 이 시대에서는 이러한 이상적인 틀들이 이상적으로 잘 지켜진 시대라고 유교사상가들은 말합니다.

전통적인 중국의 유교주의자들은 옛날 문헌의 모든 사실들을 그대로 사실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서주는 봉건제도를 완성한 중국의 이상사회로서, 가장 가치있는 시대의 경험이라고 말이죠. 반대로 말하자면, 이러한 이상시대인 서주를 멸망시킨 춘추전국시대란, 암흑시대요, 저주의 시대가 시작된 것으로 볼 수 도 있는 것이죠.

그러나 중국 신문화운동기를 주도했던 근현대 사학자들은 서주시대의 이상을 철저하게 비판합니다. 중국의 현대화를 위하여 중국 전통 사상인 유교의 문제점을 하나하나 끄집어 내었던 사람들은 서주라는 시대가 유가주의자가 만들어낸 허구 시대라고 말합니다. 삼황오제의 전설은 제자백가시대에 창작된 창작물에 불과하며, 유교적인 이상이 실현될 수 있는 국가는 실제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하죠. 이들은 아예 서주 및 중국고대사들을 하나하나 비판하면서 서주 이전의 역사기록들이 전혀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실제, 역사에서 서주의 유물은 거의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전 시대인 은나라의 유물이 더 많죠.

2. 그래도 서주 시대는 중국사의 기본틀이다.

문제는 서주 시대를 인정하든, 하지 않든 간에 서주시대가 중국사에 미친 영향이 너무 크다는 점입니다. 실제, 중국역사를 통털어 서주시대의 제도, 문물의 영향을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받지 않은 시대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서주시대는 중국 역사에 있어 창업, 개혁, 제도정비 등의 모델로 자리잡았죠. 예를 몇가지 들어볼까요?

일단 중국 역대 왕조들 중에 <주>라는 이름의 국가들은 상당히 많습니다. 북주, 후주, 무주 등등이 그렇지요. 또, 왕망은 <신>이라는 국가를 창건할 때, 국가의 이상적 모델로 서주의 제도들을 적극 수용하였습니다. 또, 전단계국가를 멸망시키고 다른 국가를 세울 때 하늘의 계시를 받아 나라를 세운다는 <역성혁명>의 이론도 주나라의 왕조교체에서 나온 것입니다.

거기에 중국식 시호제도, 봉건제도, 종법질서, 정전제도, 가족질서 등은 모두 서주의 모델을 근거로 하여 체계적으로 확립되었습니다.

지리적으로 보면 중국 대부분의 통일왕조는 모두 서주의 근거지인 <위수분지>를 거점으로 창업하였습니다. 유일하게 위수분지가 아닌, 중국남부에서 창업한 나라는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명>나라 밖에는 없습니다. 이 위수분지는 농사짓기에 최적의 위치이자, 이민적을 막기에 천연의 요새지이고, 동서교류의 요충지로서 서주 이후의 국가들은 이 곳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3. 은에서 주로 교체되는 시기의 논쟁

은나라가 망하면서 주나라로 교체되는 시기의 <역성혁명>에 대해서도 역사적인 평가가 많이 갈라집니다.

은나라가 망한 것은 걸왕의 폭정 때문이며, 주를 세운 무왕은 <하늘이 새로운 뜻>으로 자신을 택하였다는 <역성혁명>의 이론으로 주를 세웠습니다. 이 <역성혁명>이란 것은 주나라가 <하늘>에 대한 개념을 새롭게 정립한 것을 뜻합니다.

은나라에서의 천명사상은 <신성함> 그 자체입니다. 은의 황제는 하늘의 자손으로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신성불가침>한 존재이며, 선천적으로 절대자입니다. 그러나 주나라의 천명사상은 하늘의 뜻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은나라 왕이 폭정을 했기 때문에, 그를 처단하고 새로운 하늘의 뜻을 보여준다는 <역성혁명 : 성을 바뀌어 새로이 하늘의 뜻을 대신함>은 후천적이고 가변적인 천명입니다. 이러한 주의 <천명사상>은 후대 왕조가 바뀔 때마다 이용됩니다. 실제, 삼국지를 보면 위나라 조조의 아들 조비가 나라를 세울 때, 황제가 나에게 <쳔명>을 양보하여 황제가 바뀐다는 <선양의 예>에 따라 황제가 등극하는 예를 보여줍니다. 그 이후 이 천명사상은 중국사에서 가장 중요한 왕조교체의 논리로 이용됩니다.

문제는 이러한 주의 왕권 교체가 과연 혁명적이였는가에 대한 논쟁입니다.

보통 혁명성을 인정하는 사람들은 주나라가 혁명을 일으켜 나라를 세움으로서 봉건제도, 종법제도라는 중국적 제도를 완성했으므로, 은주혁명은 아주 획기적인 혁명이라는 입장입니다.

반대로, 서주의 등장은 은나라의 체제를 계승한 국가로서 혁명이 아니라 사회구조를 계승한 국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서주시대의 봉건제, 종법제, 읍제국가체제는 이미 은나라 말기에 있었고, 서주는 은말체제를 계승한 것이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주장을 하는 것은 유교주의자들이 서주를 위대하게 보는 것을 깔아내리려는 신문화운동기 학자들의 의도가 어느 정도 내포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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