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퀴즈

역사 크로스 퀴즈(난이도 : 일반)

  만약 한글이 보이지 않는다면,

  상단의 보기(v) - 인코딩(D)로 들어가서 자동선택 - 한국어(또는 유니코드)로 바꿔주시기 바랍니다.

  빈칸을 클릭해서 문제를 푼 뒤, ok를 눌러서 답이라고 생각한 것을 적어보세요.

  solve를 누르면, 내가 적은 답과 상관없이, 정답이 나오게 됩니다. solve로 정답을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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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퀴즈

역사 퀴즈

Across

  1. 하늘에 새, 땅에 고기라는 뜻으로 아무리 하여도 벗어나기 힘든 경계망
  2. 조선을 건국한 인물
  3. 망이와 망소이가 반란을 일으켰던 곳. 공주***
  4. 고려 말 유학자. 만권당에서 원나라 성리학자들과 교류했었음.
  5. 삼국을 통일한 나라. 발해와 함께 남북국을 형성한 나라.
  6. 청해진을 설치한 사람
  7. 조선 정조 때 만들어진 군대.
  8. 사실에 기초해서 진리를 탐구하는 태도. 청대 고증학의 학문당법론.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탐구방법에 영향을 주었다.

Down

  1. 충청도 공주의 명학소에서 고려 명종 6년 반란을 일으킨 인물들. 공주와 예산 지방을 중심으로 함.
  2. 주원장이 세운 나라
  3. 고려예종 때 만들어진 국학의 장학재단. 조선시대에는 성균관 유생들의 비용을 조달하는 관청.
  4. 1402년 특수청원과 상소를 위해 대궐 밖 문루에 달았던 북. 태종과 영조 때 활용되었다.
  5. 고려와 거란족, 여진족 등 북방민족이 교역을 하기 위해 설치한 무역장
  6. 조선 세종대 과학자. 측우기와 수표를 만들 때 총감독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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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매일 역사퀴즈 (2010. 1. 22. 금요일)

오늘의 출제 범위는 <중국사 일반> 입니다.

  - 반드시 컴퓨터용 수동 마우스를 사용해 주시고, 제출하기를 꼬옥~ 눌러주세요.
  - 점수와 후기를 댓글로 남겨주시면 다음 회 난이도를 조절할 수 있답니다.

1. 다음 지문를 잘 읽고 물음에 답하세요~

- 명을 세운 주원장은 향촌의 유력자들을 이용하여 향촌을 통치하였다.

- 조세 징수 : 이장, 갑수 / 조세운반 : 양장(양장은 향촌의 대지주가 전담한다)

- 교화, 재판, 권농 : 이노인(이노인은 신사층이 주로 담당한다)

 

 

1. 위 표와 지문으로 미루어볼 때, 명나라의 향촌 조직을 부르는 말은 무엇일까요?
① 보갑제
② 이갑제
③ 리장제
④ 갑수제
⑤ 양장제

 

2. 다음 카툰을 보고 물음에 답하세요~

 

2. 뮤직뱅크에만 나오던 애프터스쿨이 드디어 학교에 가서 세계사 책을 보게 되었네요. 위 카툰을 보고 잘못된 역사 지식을 말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① 가회 : 나 오른쪽 사진에 나오는 나라 알어... 장기판에서 빨간색 나라잖아?
② 주연 : 왼쪽 왕은 만리장성 쌓고, 불로장생 외치던 그 아저씨 아냐?
③ 유이 : 오른쪽 사진에 나오는 왕이 오초 7국의 난을 진압하고, 강력한 나라를 만들었잖아? 요즘 케이블 드라마에 나오는 왕이던데...
④ 정아 : 왼쪽 왕한테 반란 일으킨 진승이란 사람이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나>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며?
⑤ 나나 : 오른쪽 왕이랑 패권을 놓고 싸웠던 아저씨는 <사면초가>, <배수진>이라는 유명한 일화를 남겼잖아.

 

3. 다음 카툰을 보고 물음에 답하세요~

 

3. 위 카툰과 관련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을 골라보세요.
① 동아시아에 이러한 문화요소를 전파한 나라는 중국의 당나라야.
② 우리 역사에서는 삼국시대에 이런 동아시아 문화 요소가 유입되었지
③ 일본이 중국 문물을 받아들여서 율령 체제를 확립한 것을 다이카 개신이라고 하지.
④ 베트남은 안남 왕조가 독자적인 길을 걷고 있다가 당송 교체기 때 대월이라고 불리면서 동아시아 문화권에 편입되었지
⑤ 당시 오키나와는 동아시아 문화권에 편입되지 않았어.

 

4. 다음 지문을 읽고 물음에 답하세요~

1. 3황 5제의 시대가 끝나고, 우왕이 치수 사업으로 국가를 건설하였는데, 우왕 이후 선양이 아닌 세습 국가가 시작되었다고 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2. 하왕조는 걸왕은 말희에게 빠져서, 은왕조의 주왕은 달기에게 빠져서, 주나라의 유왕은 포사에게 빠져서, 오나라의 부차는 ________에게 빠져서 나라를 망쳤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유학이 정립된 이후 중국의 사서들은 국가의 폐망을 여인들에게서 찾았다.

 

4. 위 지문은 중국 고대의 신화와 야사에 관련된 이야기이지만, 정사에 기록된 이야기들입니다. 옳지 않은 것을 하나 골라보세요.
① 위 지문에서 우왕이 세운 나라는 은나라이다.
② 포사는 웃지 않는 미녀였다
③ 위 지문의 빈칸에 들어갈 여인은 <서시>이다.
④ 측천무후나 양귀비 등 여성이 권력에 접근할 때, 나라가 망한다는 이론은 중국 전통 유학자들의 남존여비 사상을 보여준다.
⑤ 위 지문의 <부차>는 <와신상담>이라는 고사성어와 관련이 있는 왕이다.

 

5. 다음 지문을 읽고 물음에 답하세요~

1. 사서대전, 오경대전, 영락대전 등 성리학이 관학화되자, 왕수인은 심즉리와 지행합일을 주장하면서 새로운 유학을 주장하였다.

2. 육구연의 경세치용학파는 실학파로 계승되었는데, 본초강목, 농공전서, 천공개물과 같은 실용서적들이 편찬되었다.

3. 서민 문화가 유행하면서 삼국지연의, 수호지, 서유기, 금병매와 같은 소설과 희곡이 유행하였다.

 

5. 위 내용과 관련있는 왕조는 어느 왕조일까요?
① 당
② 송
③ 원
④ 명
⑤ 청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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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명(明 1368 ~ 1644), 청(淸 1616 ~ 1911)
  원말에 한족의 주권회복을 위해 백련교도나 홍건적의 난 등 수많은 봉기가 있었다. 명의 태조인 홍무제(洪武制) 주원장 역시 이러한 사람들 중에 하나였다. 일단 명이 들어서고, 다시금 중국을 한족이 지배하게 되자, 명은 지난 원나라 때 남아있던 원의 풍습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 우선 과거제를 부활하여 한족 전통 문화를 부흥하고자 하였으며, 재상제를 폐지하고, 율령 정비, 이갑제(里甲制)를 통해 황제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새로 호적인 부역황책과 토지대장인 어린도책(魚鱗圖冊 : 물고기 비늘과 같은 그림의 책)을 만들어 역과 토지세를 부과하였다. 명이 베이징으로 천도해서 보다 중국적인 면모를 갖춘 것은 성조 영락제 때였다. 영락제는 중국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베트남을 공략하고 정화를 통한 원정을 실시하였다. 정화의 원정은 1405 ~ 1433년 7차에 걸친 항해 원정을 말한다. 동남아, 아프리카 동부해안에까지 닿았으며 이러한 활동은 중국의 조공질서를 명확히 하고, 훗날 화교의 동남아 진출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대규모의 원정은 단지 중화주의적인 조공질서를 만들었을 뿐이며, 어느 한 곳 침략해서 식민지화 한 적은 없다. 명은 환관 세력이 점차 득세를 하고 북로남왜(북쪽은 유목민족, 남쪽은 왜구)로 인해 어려움을 겪다가 임진왜란 때 조선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더욱 국력이 소모되었다가 이자성의 난으로 결국 멸망하였다.
  은 처음에는 후금(後金)이라는 이름으로 여진의 누르하치가 팔기 조직을 통해 만주 지방을 지배하면서 성장하였다. 처음 국호를 청이라고 정한 것은 태조로, 태조는 조선을 침략해 정묘, 병자호란을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세조는 이자성을 몰아내고 베이징에 입성하여 중국 통치의 기틀을 다졌다. 청에서 가장 손꼽아 다루는 것은 성조 강희제와, 세종 옹정제, 고종 건륭제이다. 우선 성조 강희제는 삼번의 난을 진압하고 정상공의 난을 정벌하여 타이완을 복속시켰다. 또한 중국 최초의 근대식 조약인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1689)하여 러시아와 국경 문제를 명확히 했다. 그 외에도 외몽골, 칭하이, 티베트를 정복하여 나라를 굳건히 하였으며, 문자의 옥을 통해 사상 탄압을 하기도 하였다(문자의 옥은 강희, 옹정, 건륭제 때 계속 지속된다). 세종 옹정제는 군기처를 독립시키고 러시아와 카흐타 조약을 체결하였다. 고금도서라는 백과사전을 편찬하였으며, 크리스트교가 중국의 문화를 무시하고 포교를 시작하자 크리스트교 포교를 금지시키기도 하였다. 고종 건륭제에 이르러서는 청의 최대의 영토에 달해 만주, 몽고, 한, 위구르, 티베트 지방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고금도서를 보강한 사고전서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중농 정책으로 인해 농업은 여러 발전을 하였다. 관개 시설의 확대, 농업 기술의 향상, 품종 개량을 통해 농업 생산력이 증대하였다. 쌀 외에도 목화 생산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였으며, 고구마, 옥수수, 땅콩 등의 외래 작물이 전해져오기도 했다(* Tip(추가사항)  : 고등학교 국사에선 이러한 외래작물이 유입된 시기를 보통 임진왜란 전후 혹은 이후로 본다). 과거 중국과 명, 청대의 쌀 생산지는 매번 변화하였는데 송원대에는 양쯔강 하류에서, 명대는 양쯔강 중류에서 청대에 와서는 쓰찬 지방에이 쌀의 주산지가 되었다( * Tip(추가사항, 참고) : 오늘날 중국의 쌀 생산지는 만주지역이다. 원래 만주는 농경 / 목축 / 유목이 전부 가능한 비옥한 곳이긴 하였으나, 대규모 농경지로 변화하게 된 것은 근대 이후 우리니라 사람들이 이주하면서부터였다. 만주 일대의 농경 기술은 대부분 조선족이 가지고 있다고 한다.). 수공업 역시 크게 발전하였다. 명대에는 면직물과 견직물의 직물공업이 16세기 이후 양쯔강 하류지역에서 발달하였는데, 기존에 농민들에 부업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실학의 영향을 받아 이젠 공장을 갖춘 수공업으로 면모하여 자본주의의 맹아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명에서는 과거 원과 달리 초기에는 조공무역의 형태를 띠다가 16세기 중엽 무역이 활성화되면서 대상인들의 활동이 두드러졌으며, 이들은 농산물과 직물, 차, 도자기 등을 수출하여 은을 벌여들었다. 이들 역시 동업 조합인 공소와 동향인 조합이었던 회관을 운영하였다. 명의 수취제도는 기본적으로 양세법을 따랐다. 하지만,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명에서는 은이 가장 구하기 손쉬운 귀금속이 되었으며, 그에 따라 명 정부는 은을 본위로 하는 경제체제를 확립하고, 잡다한 세금을 지세(토지세)와 정세(인두세)로 묶어 은으로 납부하는 일조편법을 시행하였다.
  명, 청대는 여러 분야에서 경제력이 향상되는 시대로 서민 경제 또한 같이 발맞춰 성장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서민경제의 성장은 서민의식의 확대와 성장을 야기하여 서민 운동을 야기하였다. 몇 가지를 소개하자면, 도시에서 일어난 노동자의 권익 옹호 운동인 민변(民變)과 소작인이 소작료의 경감을 요구하는 항조(亢燥) 운동, 노예의 신분 해방운동인 노변(奴變)과 명나라 때 방직 공장에서 직공을 중심으로 부당 징세에 항거한 직용(織傭)의 변(變)(1601)등이 있다.
  청대에는 대상인이 자본을 축적하여 저장 재벌로 성장하였으며, 상인 무역 조합인 방이 있었다. 청대에는 명대의 자유로운 무역과는 달리 특허를 가진 상인만이 무역을 할 수 있었는데, 이를 공행 무역이라고 한다. 18세기 이후에는 광저우만 개항되기도 했다. 청 왕조가 비록 공행을 통해 무역을 했다고는 하지만, 중국의 상품은 값비싼 것이었으며, 청은 이로 인해 막대한 은을 얻었다. 청대 역시 은을 본위로 하는 세금제도가 만들어졌는데, 18세기 초 세종 옹정제는 정은(인두세)를 지세에 포함시켜 징수하는 지정은제가 그것이다. 지정은제는 세금이 일원화 되었다는 의의와 함께 호적 상에 인구가 급증하는 결과를 낳았다.
  명, 청대에 사회 지도층은 향신(鄕紳) 혹은 신사(紳士)였다. 이는 생원(지방학생), 감생(국자감 학생), 거인(향시 합격자), 퇴직 관리들을 일컫는 말로, 민중교화, 각종 사업, 조세 징수 등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은 한족의 전통문화를 이어가기 위해 초기에는 성리학을 관학으로 삼았다. 성리학의 관학화는 유학의 형식화를 초래했기 때문에 명 중기에는 서민의식의 성장과 함께 양명학이 등장하게 되었다. 양명학은 양명 왕수인이 정리한 것으로, 마음이 즉 이치(심즉리心卽理)라는 내용과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주장한 실천적인 유학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양명학도 명나라 후기 때는 비판 받았으며 『본초강목』등의 실학이 발달하여 수공업 등에 영향을 끼쳤다. 명대에는 『삼국지연의』, 『서유기』, 『수호지』, 『금병매』 등이 완성되어 서민문학이 발달하였으며(* Tip(추가사항) : 삼국지연의, 서유기 등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원대이고, 완성된 것은 명대이다. 헛갈리지 말자.), 예수회 선교사였던 마테오리치에 의해 곤여만국지도와 『천주실의』가 전해졌다. 곤여만국지도는 중국인의 세계관 확대에 기여하였다.
  청대에는 문자의 옥, 금서령 등으로 학문의 현실 비판 기능을 억누르자 고전의 객관적인 해석을 근거로 실증적 연구를 하는 고증학이 발달하였다. 고염무, 황종희, 왕부지 등을 중심으로 하였으며 『강희자전』,『고금도서집성』(* Tip(추가사항) : 조선시대 후기 정조는 사고전서가 곧 출판된다는 말에 사람을 시켜 사고전서를 구입하려고 하였으나 사고전서가 늦게 나오는 바람에 할 수 없이 고금도서를 사들였다고 한다. 시기상으로 차이가 있으나, 그렇게 정조 때 고금도서가 들어왔다),『사고전서』 등이 출간되었다. 고증학이 형식화하자, 그에 대한 반발로 공양학이 등장하였다. 공양학은 진보적 발전 사관을 가지고 훗날 변법 자강운동의 사상적 배경이 된다. 청대에는 『도화선전기』,『장생전전기』와 같은 희곡과 구어체 소설인 『홍루몽』, 『유림외사』 등의 서민문화가 발달하였고, 선교사에 의해 서양과학이 전래되기도 했다. 하지만 건륭제 때 크리스트 교리와 중국 전통문화가 마찰이 일었으며, 이를 전례 문제라고 한다. 이러한 전례문제로 인해 더 이상 크리스트교의 포교는 금지되었으며, 청은 쇄국정책을 펼쳤는데, 이는 세계사 흐름에 뒤처지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Tip(추가사항) : 명과 청은 크리스트교에 대해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인다. 명대의 대표적인 선교사는 마테오리치였으며, 아무런 마찰이 없었다. 반면 청대의 대표적인 선교사는 조선 효종의 형인 소현세자와 상당히 친분이 있는 인물인 아담 샬로,  전례문제 때문에 청대의 선교사들은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Posted by 비회원

(한토막 역사 14화) 3가지 이야기 : 일본의 구석기 유적지 조작사건 등

1. 구석기 유적지 조작으로 망신당한 일본의 자존심

한토막 역사 3화에서 연천 전곡리 유적의 발견으로 우리 나라의 구석기 유적지가 세계 구석기 이론을 뒤집는 쾌거를 이룬 적이 있음을 이야기했었습니다. 연천 전곡리의 양면핵석기 발견으로 기존 구석기 이론이 뒤집히며 아시아 구석기가 유럽에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였죠.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항상 우리나라보다 선사시대가 앞선다고 주장한 일본이 다급해진 것이죠. 일본은 조선을 침략한 제국주의 시대부터 조선에서는 석기시대가 아예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석기 시대 유적지가 발견되면서 일본의 주장이 바뀌었습니다. 한국의 석기는 일본(남방)으로부터 전파된 것이라는 이론이었죠.

자존심이 상한 일본은 전세계적인 사기극을 시작합니다. 연천 전곡리 유적이 발견된 1970년대 이후 일본에서도 전기 구석기 유적이 출토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후지무라라는 사람의 주도로 시작된 일본 구석기 유적 발굴은 놀라운 성과를 보입니다. 1981년 일본 미야기현 유적에서는 4만년 전 구석기가 발굴되었고, 그 이후 20만년전, 40만년전, 50만년전의 유적지가 계속 발굴된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70만년전 유적지 까지 발굴되었습니다.

일본의 구석기는 중국, 한국의 역사보다 오래되었다는 것이 입증되었고, 일본인들은 세계 역사 속에 일본 역사의 유구함과 우월성을 내보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 세계는 계속 일본을 주목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치에 맞지 않는 유적지의 계속된 발굴로 일본에 의심을 가지는 사람들도 하나 둘 늘었습니다.

2000년 드디어 20년 이상 계속된 자작극이 탄로나고 말았습니다. 일본 마이니찌 신문은, 후지무라씨가 미야기현에서 가짜 석기를 파묻는 장면을 몰래 카메라로 찍어서 폭로한 것입니다. 결국 20년간 후지무라씨가 발굴한 모든 구석기 유적은 엄청난 조작이었음이 드러났습니다.

일본 구석기 연대가 70만년이라는 것도 거짓이었고, 그 연대를 바탕으로 작성된 모든 논문과 학술 연구도 모두 허사가 되었습니다. 일본 고고학계는 오랜 기간 계속된 이 엄청난 조작 사건의 후유증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고 합니다.

2. 교과서에 나오는 <몽고>는 잘못 표기된 글자 - 몽골이 맞습니다.

교과서에서 <몽고>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한 오류입니다. <몽고>가 아니라 몽골이 맞습니다. 몽골이란, <몽> 부족민들이 세운 나라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몽골인들이 스스로 그렇게 부는 말이며, 한자어가 아니기 때문에 한자로 표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이러한 주변민들의 용어를 한자로 바꿔부를 때 격하시키곤 하였습니다.

예로 <몽고>라는 말은 몽매한 옛날 놈들(蒙古)이라는 한자로 표기합니다. 흉노라는 민족은 원래 선우를 중심으로 하는 훈족이지만, 이를 중국에서는 흉노로 표기합니다. 흉노(匈奴)란, 끔직한 노예들이라는 뜻이지요. 투르크 족인 돌궐도 한자로 좋은 뜻이 아닙니다. 돌궐(突厥)은 까칠한(시끄럽게 날뛰는) 투르크족들이라는 뜻이지요. 중국을 잠시 점령한 적이 있는 선비(鮮卑)족은? 물론 저속하고, 비루하다는 뜻이 풍겨지지요. 동이족도 동쪽에 활을 잘 쏘는 사람이 아니라, 동쪽의 오랑캐로 말하곤 하죠.

중국은 중원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의 모든 민족을 오랑캐로 파악하곤 하였습니다. 그 전통이 지금에 와서는 <세계의 중심국가 중국을 재건>하려는 움직임으로 다시 나타나고 있죠. <몽고>라는 말은 오기입니다. <몽골>이 맞습니다. 과거 우리 국가의 사람들이 <조센징>이 아닌 <조선인>이었듯 말이죠.

3. 신밧드의 모험과 정화의 이야기

신밧드의 모험은 아라비안 나이트(천일야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투르크족의 수도 바그다드에 살던 신밧드가 겪은 모험담에 대한 이야기지요. 이 이야기는 당시 중국  - 인도 - 서아시아로 이어지는 바닷길 루트가 유럽의 문명을 훨씬 앞서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서양에서 말하는 <신항로 개척 : 대항해 시대>는 서양의 입장에서 세계사를 기술한 것이고, 아시아에서는 아시아 나름의 무역 구조가 있었습니다.

만약 에스파냐의 무적함대와 이순신의 거북선이 싸운다면? 생각해 보셨나요? 컴퓨터 그래픽으로 재현해보면 조선, 중국 명나라의 선박이 압승을 거둔하고 하는군요.

신밧드의 모험에 나오는 신밧드는 중국 명나라에서 조공무역을 위해 파견한 <정화의 원정>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정화>의 아명은 <싼바오 : 三保>인데, 서양에서는 이 아명을 Sinbao라고 부릅니다. 신밧드(Sinbad)는 Sinboa라는 이름이 아랍권에 전해질 때 유래된 이름이라고 합니다.

중국 정화의 원정은 29년동안 7차례나 이루어졌습니다. 그럼 정화가 유럽에서 말하는 <신항로 개척>과 맞먹는 먼 길을 돌고 돌아 여행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유는 명나라의 해금정책 때문입니다. 중국은 명 영락제 시기에 세계 최고의 해군력을 갖춘 나라였습니다. 주변의 국가들은 명과 친선정책을 유지하였고, 명의 해군력에 대항할 나라는 당시 없었습니다. 그러나, 명나라가 해적 소탕을 철저히 하면서 사무역, 밀무역을 금지하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공적인 무역 이외의 다른 무역에서 명이 아시아 국가들 사이에서 소위 말하는 왕따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아시아의 국제 무역은 동남아 - 일본 - 조선- 명 - 인도 - 서아시아를 잇는 해상루트가 활발했는데, 명은 스스로 사무역을 금지함으로서 무역권에서 소외당한 것입니다.

지금 중국은 <동북공정> 등 역사 체계화 작업을 실시하면서 정화의 원정에 대한 관심을 크게 보이고 있습니다.

그 첫 번 째 이유는 정화가 동아시아에서 아프리카 북단까지 여행하는 동안 항성 평화를 추구하였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정화는 에스파냐가 아메리카 원주민을 학살한 것과 같은 전쟁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정화의 원정은 주변국과의 조공 질서를 확립하고, 평화를 위한 것였습니다. 이것을 강조함으로 중국의 마인드가 세계 평화에 기여한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죠.

다음으로 중국이 미국과 맞설 군사 강국이 되기 위해서는 강력한 해군 시설이 필요하고, 모든 해상 시설을 현대화해야 합니다. 정화는 이러한 중국의 코드에 딱 부합하는 역사적 인물입니다.

또 중국이 차기 강국이 되기 위해서는 중동 지역에 에너지를 수송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정화가 다녀간 항로가 중요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중국 입장에서는 정화의 원정이 21세기 중국 강대화에 앞선 선구적인 여행으로 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동아시아 불교 전파사 - 8장. 당나라 종파불교의 발전

지금까지 전개한 위진남북조와 수대의 불교사는 인도의 불교를 중국이 가져와서 그 참 뜻이 무엇인가를 밝히기도 전에 왕법에 의해 불법이 위축되었던 시기의 불교를 포스팅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당나라 시기의 불교는 다릅니다. 당이라는 나라 자체가 국제적이고 귀족적인 문화를 가진 개방성을 큰 특징으로 하는 만큼, 불교에 대한 입장도 이전과 많이 달라졌습니다. 불교는 이제 왕법에 의해 탄압받기만 하는 호국불교를 뛰어넘어 불법의 참 뜻 자체를 연구하고, 불법에 따라 석가의 모든 사상을 이해하고 중국식으로 완성해가는 단계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 포문을 연 사람이 바로 현장법사(삼장법사)입니다.

또 당나라 이전 불법에 대한 대탄압인 <폐불사건>을 여러번 거치면서 불교계는 이전 단계보다 많이 성숙해져 있었습니다. 불교계는 호국적인 성격으로 왕권에 봉사하는 자신들을 반성하면서, 불법의 독립성과 불교계 혁신운동이 중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불법의 본 뜻인 석가의 참 뜻이 무엇인가를 놓고 체계적인 불법을 만들어가는데, 이러한 불법 완성 속에서 여러 교단 종파가 탄생하게 됩니다.

1.수많은 종파가 과연 진정한 석가의 참 뜻을 아는가?

중국에서 성립된 종파불교는 사실 모두 석가의 참뜻이 무엇인가를 놓고 우물안에서 싸우던 개구리들아였습니다. 우물에서 바라본 하늘이 어떤 하늘이고, 어떤 크기인지 알 수 없듯이 중국 내부에서 바라보는 석가의 삶과 불법의 참뜻을 아는 자는 없었습니다. 7장에서 자세히 다룬 지의의 천태종은 수많은 불교종파를 통합하여 하나로 융합하려 노력하였고, 그 결과 법화경을 중심으로 하는 남방 불교로 발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천태종 역시 대립하는 불법을 융합하려는 시도의 종파였지, 불법의 참 의미를 찾던 종파는 아니였습니다.

실제, 당 초기까지 어떤 종파도 석가모니의 참 뜻을 이해했다고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면, 석가의 참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도에서 가져온 석가의 경전을 번역하여 읽는 것만으로는 그 심요한 원리를 알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석가의 참 뜻을 알기 위해서는 직접 서역이나 인도로 가서 불법을 공부해야만 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선진국에 유학가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죠. 서울에서 아무리 혼자 영문법책을 읽어도 영어발음이 좋아지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석가의 참 뜻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채 경전만을 읽고 석가를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많았던 것이죠.

따라서 당대에는 서역의 불경을 번역하는 작업보다는, 직접 서역에 가서 불법을 공부하고, 불법의 원리를 깨닫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이 사명을 다한 것이 소설 서유기에 나오는 삼장법사(현장법사)입니다.

2. 현장의 구법 여행이 시작되다!

중국 당나라에서 불교의 전성기가 시작되면서 천태종, 화엄종, 정토종, 선종 등 수많은 종파가 생겼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종파들은 각각 자신들이 말하는 경전을 석가의 참 뜻이라고 주장할 뿐, 석가의 참 뜻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밝혀내지 못합니다.

수문제 때 태어난 현장은 어느 한 종파에 만족하지 못하고, 수많은 문파를 오가며 불법을 공부했습니다. 그는 중국의 불경이 너무나 부족하고, 사상적인 체계도 완벽하지 못하며 불경의 해석도 제 각각인 것에 실망하였습니다. 현장은 <장님이 코끼리 만지면서 코끼리를 설명하는> 중국 불교를 믿을 수가 없어서, 인도에 가기로 결심합니다.

당시 인도에 가는 것은 너무도 험하고 어려운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정부에서 국외로 출관하는 중국인을 처벌하였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장은 <내가 지옥에 가지 않으면 누가 지옥에 가랴?>라고 말하며, 인도로 향합니다. 그 유명한 <대당서역기>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며, 그에 대한 소설인 <서유기>의 시작도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그는 인도로 가는 동안 수많은 나라를 거치며 죽을 위기를 겪기도 하고, 고승으로서 환대를 받기도 합니다. 그는 결국 인도로 도착하여 석가가 수련했다는 보리수 밑에 이르게 됩니다. 그는 <앞서간 사람들을 볼수 없듯이 뒤따라 올 사람을 만날 수도 없구나>라고 말하며 불법을 생각하다가, 인도 난타사에 머물었다고 합니다.

그는 난타사에서 1만의 수도승 중 최고 대우를 받으며 5년간 불법을 연구하고, 강론하였습니다. 인도에서는 그를 최고 고승으로 생각하여 구마라왕이 그를 데려오기 위해 전쟁을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는 16년간의 인도생활을 마치고 중국 장안으로 돌아와 <대당서역기>를 저술하였습니다.

또한 인도에서 가져온 수많은 범어 경전을 해석하여 1335권을 번역하였다고 합니다. 중국에서는 구라마습과 현장의 불경 번역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여, 구라마습 이전의 경전을 고역경, 구라마습이 번역한 경전을 구역경, 현장이 번역한 경전을 신역경이라고 말합니다.

현장이 완성한 불법의 요체는 <나의 본체와 불법의 본체는 모두 머릿속에서 비롯된 것에 불과하며 그 실체가 진실한 존재가 아니다. 실체는 실제 존재하나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따름이다. 우리는 머릿속에 그린 아집과 법집을 깨뜨리고, 진정한 실체를 발견해야만 성불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이러한 견해를 불교에서는 <유식론>이라고 합니다.

유식론의 특징은 실체는 아무것도 없다는 <공사상>과 대립하는 <유식사상>으로, 부처의 진정한 말씀은 <아무것도 없다는 공사상이 아니라, 실체가 존재한다는 유사상이었음>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현장의 교리는 <법상종>이라는 종파로 체계화되고, 현장은 법상종의 시조가 됩니다. 이 법상종은 오랜 기간동안 종래 <공사상>에 기반을 둔 다른 종파들과 치열하게 논쟁을 벌이게 되는데, 이것을 훗날 <공유논쟁>이라고 합니다.

현장은 일대 유학생이라고 보기에는 인도, 중국에 미친 영향이 너무 큽니다. 인도에서도 수백년에 나올까말까한 고승으로 추앙받았고, 중국에서는 진정한 불법을 전파한 종파 불교의 아버지격이었으니까요. 명나라 오승은인 이러한 현장의 유학 생활을 소설로 발전시켜 <서유기>를 저술하였습니다.

3. 선종이 등장하다.

(이미 전에 선종을 설명했지만, 당대 혜능을 설명하기 위해 다시 한번 포스팅 합니다.)

선종은 원래 석가의 <염화시중의 미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석가가 인도에서 전도할 때, 어느 날 아무 말 없이 꽃 한송이를 여러 사람에게 보였습니다. 모두가 무슨 일인가 어리둥절 할 때, 마하가섭이라는 제자가 석가에게 웃음으로 그 뜻을 이해했음을 알렸습니다. 이것을 보고 석가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내 마음 속에 있는 정법과 원리가 이미 가섭에게 전달되었구나"

이렇게 이심전심으로 파악할 수 있으며, 눈빛만으로 그 뜻을 깨닫는 설법이 <염화시중의 미소>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심전심의 깨달음으로 창시된 종교가 선종이고, 마하가섭이 바로 인도 선종의 창시자가 되었습니다.

즉, 선종이란 내적 관찰과 자기 성찰로 등장한 불교 종파입니다.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을 내세우며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을 주장합니다. 선종에서는 언어나 문자를 거치지 않고도 바로 부처의 마음이 중생의 마음으로 와 닿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불심종(佛心宗)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선종에서는 인간이 본래 지닌 성품이 부처의 성품이라는 것만 알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대중적인 희망을 던지는 종교였습니다.

선종에서는 복잡한 문자도 필요없으며, 단지 깨달음만으로 모든 선을 강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선종은 묵가식의 노동을 중시하고, 유교식의 수양을 강조하며, 도교식의 민중화를 추구하는 다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섭 이후의 선종은 그 후계자 전법에 있어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단순한 몇 마디 말로 불법을 전하였는데, 이 몇 마디 말을 <게어>라고 합니다. 게어란, 어떤 경전으로 정해진 말이 아니라 마음으로 뜻을 전하기 위해 짧막하게 적은 <작은 심어>를 말합니다. 이것은 <모든 것은 무이고, 공이다>와 같이 짧은 언어 속에 많은 뜻을 함축하므로, 사람마다 알아듣는 이해도가 각각 다릅니다.

선종에서는 게어를 이해한 사람에게 의발을 전함으로서 후계자를 뽑습니다. 의발이란, 중들이 입는 가사와 바릿대로 달마가 제자에게 이 두가지 물건을 전했다는 것에서 유래된 말로서 선종의 후계자의 징표를 상징합니다.

선종은 28대 조사인 보리달마에 의해 중국에 전해졌습니다. 보리달마는 소림사에서 9년간 면벽수련을 하고, 혜가라는 제자에게 의발을 준 뒤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에 대해서는 남아있는 기록이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도 인도에서처럼 말로 전법을 전하였기 때문에 초기 선종의 기록이 남아있는 것은 없다고 합니다. 오히려 달마에 대한 이야기는 무협지에 많이 나오는 듯 싶죠. 몇십년을 수련한 강호의 고수들이 동경하는 대상이 바로 달마대사로 나오니까요.

4. 혜능에 와서 북종선, 남종선이 완성되다

선종의 5대조인 흥인선사기에 제자를 뽑기 위해 제자들에게 <게어>를 적으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 가장 총명한 제자인 신수가 <몸은 보리수요, 마음은 명경대와 같구나. 때때로 부지런히 마음을 갈고 닦아 티끌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자꾸나>라는 게어를 남겼습니다.

그러나, 방앗간에서 일하는 소공인 혜능이란 자가 이것을 보고는

<보리는 원래 나무가 아니다. 명경 또한 집이 아니다. 본래부터 아무것도 없는 것인데 어디서 티클이 생간단 말인가?> 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혜능은 글을 모르는 무식한 소공인 관계로 글을 아는 자가 이 말을 옮겨적어 게어로 만들었습니다.

홍인선사는 혜능의 말에 감동받아 그에게 선종 6대조의 의발을 물려주었습니다. 선종이 비록 이심전심과 불립문자를 통해 이루어진 <마음 수양만을 강조하는 종파>라고는 하지만, 글을 모르는 소공이 선종 조사가 된 일은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이 후 선종은 가장 총명한 후계자였던 신수의 북종선과, 글을 모르는 소공출신인 혜능의 남종선으로 갈리게 됩니다. 북종선은 선종교파 중에 비교적 지식을 강조하는 종파였고, 남종선은 오로지 <마음 외에는 없다>라는 심성수양을 강조하는 파였습니다. 북종선은 이후 당나라 측천무후 정권에 협력하면서 성장하였고, 남종선은 글을 모르는 대중속으로 파고들어 대중적인 기반을 마련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선종 중 대중적인 남종선은 우리 나라 선종에 큰 영향을 줍니다. 나말 여초의 호족세력과 6두품, 그리고 반신라 지식인들의 종교가 선종이었고, 고려 불교의 큰 흐름도 왕권의 교종과 민중적인 성향의 선종이 대립하며 주도해 나갑니다. 이 혜능의 남종선은 훗날 <심성수양>을 강조하는 성리학에도 영향을 주며, 시문 등 감정이 필요한 문학에도 큰 영향을 줍니다. 남종선은 마음으로 믿는 다는 실천도덕이 지배층에도 환영받았으며 행사규칙인 백장청규를 마련하여 대중적 토대를 확실하게 합니다.

5. 법장의 화엄종 : 모든 것은 하나의 진리 세계로 통한다.

법장은 당나라 최고의 여걸 여황제 측천무후기에 활동하면서 <화엄종>이라는 교단을 완성한 고승입니다. 화엄종은 법장이 주장한 <진심>이라는 단어를 모든 것의 근원으로 보는 종파입니다. 이러한 진심을 정리한 경전이 바로 <화엄경>입니다.

법장은 현장의 <유식론>에 대하여 심한 불만을 가졌습니다. 도대체, <석가의 참 뜻이 존재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실체는 다르고, 실체는 있으나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실체가 아닐 수 있다>라는 말이 무엇인가?

법장은 모든 것을 규정하는 하나의 <진심>이 있다고 말합니다.

비우컨대 이 금사자의 본체는 금이라고 하는 질료이고 사자의 모습은 현상에 불과합니다. 금사자의 형상은 허무하여 실제가 없고 변동합니다. 진실로 존재하는 것은 한 무더기의 금 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똑같은 한 무더기의 금으로 고양이나 개, 호랑이의 형상도 만들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것은 바로 오늘의 홍안이 내일의 백발로 되어 버림을 우리가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지, 수, 화, 풍 등 네 개의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현상으로서의 사건은 비록 변할지라도 볼질로서의 그 원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사자의 모습이 늙어갈지라도 그 본질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물의 본질이란 결국은 그 현상을 통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마치 금사자의 형상이 없다면 그 존재마저도 알 수 없음과 같지요. 마찬가지로 육체라고 하는 껍데기가 없다면 인간의 본질이라 할 정신도 발휘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과 그 원리는 상호 의존하고 보완되어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위 말은 법장이 화엄의 원리를 측천무후에게 설명한 글입니다. 즉, 금사자의 눈도, 코도, 입도 금사자라고 부를 수 있고 금사자 전체를 금사자라 부를 수 있지만, 그것은 사실 금덩어리라는 본질로 이루어진 실체이며, 녹으면 본질인 금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금이라는 <진심>은 영원합니다. 인간의 육체는 살덩어리이지만, 그 본질인 영혼은 바뀌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하나의 원리 속에 흘러갑니다.

예로 산이 있으면, 그 산에 나무가 있고, 토끼가 있고, 돌맹이가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봅니다. 나무를 본 사람은 나무가 진실이고, 토끼를 본 사람은 토끼가 진실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본 것을 토대로 불법을 설명하면서 종파를 만듭니다. 그러나, 산 전체를 보고 산이 어떻게 시간에 따라 흘러가고, 산이 어떤 모습으로 바뀌며, 그 변화에 따라 나무와 토끼는 어떻게 될 지를 포괄적으로 보는 종파가 바로 화엄종입니다. 화엄이란, 모든 것을 하나의 둥근 원 속에서 파악한다는 <원융 사상>의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당대 이러한 종파 불교의 성립이 중국사 전체에 가지는 역사적 의의와 이후 불교가 동아시아에 전파되는 과정, 그리고 이러한 불교가 중국에서 단절되듯 침체되고, 한반도에서 융성하게 되는 과정을 포스팅하겠습니다. 이제 한국 불교사로 넘어갈 때가 된 듯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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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