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사상의 이해 - 장자 1

 

'장자' 들어가기

  전쟁을 바라보는 관점은 무엇인가?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 어떤 이데올로기도, 윤리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소국들의 입장이었다. 고대 철학은 그 경계선에서 출발한다.

 

사상사의 출발점에는 공통적인 현상 한가지가 있어. 그게 뭐냐구?

 

그것은 철학의 출발점이 '도시국가'가 출현하는 '청동기' 시대라는 것이지.

 

먼저 석가모니!!!

 

석가는 인도의 공화정이었던 소왕국의 왕자 출신으로서 소국들의 대립과 거대 왕국과의 마찰이 있던 브라만 시대의 인물이었어.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당시 인도는 제국을 꿈꾸는 브라만 집단과 작은 소국을 꿈꾸는 공화정 집단들이 대립하고 있었지. 스타워즈의 제국과 공화국의 대립처럼 말야.

 

그런데 브라만이든, 공화정 집단이든 웬지 신라시대 귀족이랑 화랑들 같았어. 골품같은 고정적 신분이 있었지. 브라만교에는 카스트 제도 있는거 알지? 공화정에도 신라의 화백회의처럼 만장일치 귀족 회의가 있었지.

 

다음 공자!!!

 

공자와 장자, 한비자와 같은 사상가들 역시 춘추전국시대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공동된 고민을 했지.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인간이 사는 세상이 정의로운 세상이 될 수 있을까? 밥먹고 그 고민만 했는지 후대에 남긴 어록도 무지 많아.

 

그런데, 그 정의로움을 법에서 찾는지, 도덕에서 찾는지, 자연에서 찾는지, 공리에서 찾는지는 각자 답이 달랐어. 도시국가가 많아서 밥먹고 전쟁하고, 사람 죽고, 또 전쟁하고, 통일한다고 설치고.... 

 

이런 지옥같은 무법천지인 세상을 법으로 다스릴지, 윤리로 다스릴지, 자연에서 답을 찾을지는 생각하는 사람맘 아니겠어? 그러니 철학이 발전하는거지... 철학과 과학기술은 전쟁의 참혹함에 비례해서 팍팍~ 발전한다는 말이 괜히 나온게 아냐.

 

 

 

다음,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와 같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도 도시국가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의 인물이었어. 단지, 그리스 철학의 융성은 다른 지역과 한가지 다른 점이 있었지. 그건 또 뭐냐구?

 

다른 지역의 철학자들이 난세를 걱정했다면, 아테네의 철학자들은 다른 소국을 점령하면서 쌓인 부를 활용하면서 철학이 성장했다는 거야.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은 이렇게 말했어. 정치하는 사람, 장사하는 사람, 농사짓는 사람 등 신분이 있고 역할이 있어야 세상이 돌아간다고. 그래서 아테네의 고귀한 신분들은 식민지 소국 노예와 상인들 덕에 철학에 집중할 수 있다고 말이야. 그런걸 철인정치론이라고 하는데, 이러니 있는 넘들이 모두 싸잡아서 함께 욕먹는거지, 뭐... 철학자가 이러는데, 다른 지배층은 오죽하겠어?

 

 

 

 

그럼 플라톤의 제자는 누구? 그 분도 같은 말을 했겠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길,

 

전쟁이 우리의 승리로 끝나고, 전리품인 노예가 끊이기 않기 때문에 철학자들은 맘놓고 철학을 고민할 수 있다고 했을 정도야. 현자인 아리스토 아저씨도 노예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니, 고대인들이 생각하는 국가관이 뭔지 알겠지?

 

자, 그럼 그 제자도 한번 살펴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가 유명한 알렉산더 대왕인거 알지?

 

매듭 푸는 문제 던져주면 칼로 매듭을 잘라버린다는 그 월드헤비급 챔피언.... 세계 정복왕 말야. 알렉산더는 정복을 거듭하면서 정복지를 서로 연결하는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수십개를 만들었어. 그리고 그 도시도시를 거쳐서 희귀한 동양의 물품들이 스승인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도착하는 시스템을 만들었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들을 부수고, 자르고, 해부하고... 또... 음.... 독극물도 넣어보고 하면서 과학을 발전시켰던 거야. 그가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건 헌신적인(?) 스승님의 지원이 있었던 거지. 지금이라면 독일이나 일본의 생체실험이라고 난리가 났겠지만, 당시에는 엄연한 과학발전 취급을 했던 거지, 뭐....

 

말했잖아... 난세에 철학과 과학이 발전한다고...

 

 

 

 

자, 이제 청동기 소국 시대에 철학들이 융성했던 것인지, 그 이유 중 중요한 몇가지만 간추려서 정리해 볼까?

 

첫째, 문자라는 것이 존재했던 시기와 청동기 후기가 일치한다는 점이 중요해.

 

문자가 존재하기 이 전에도 수많은 철학이 존재했겠지만, 그 기록이 명확하지가 않잖아? 내가 열살 때 상대성 이론을 발견한 적이 있으면 뭐해? 커서 기억도 안나고 기록해놓은 것도 없는데.... 같은 원리야.

 

초기의 상형문자가 있긴 했어. 그런데, 그 수준이 초기 문자라서 초등학생 일기 수준이야. 알지? 아침에 밥먹었다... 친구랑 싸웠다... 엄마가 미워한다... 아빠가 사랑한다.... 선생님이 존경스럽다...

 

 

 

 

당연히 기록을 남기는 것에만 급급했기 때문에 철학적인 생각은 부족했지. 그리고 그 정신없는 기록을 당대 혹은 후대인들이 해석하는 것도 어려웠어.

 

그럼, 철학이 되지 못한 초등 7세 수준의 기록들은 어떻게 이해했을까?

 

초딩들이 사용하는 글쓰기 방법이 있잖아. 엄마한테 혼났는데, 그래서, 아빠한테 갔는데, 그랬더니, 아빠가 칭찬해주는데....

 

그거야. 철학이 되지 못한 이야기들은 접속사를 중심으로 전승되거나 이야기로 엮기게 되지, 그래서 그 이야기들이 뼈대를 잡고 스토리가 되면 신화로 정리되는 거야.

 

홍수가 났어. 그래서.... 다 죽어가... 그래서... 신에게 빌었어... 그랬더니? 다 죽지 말라고 방주 만들어 주더라....

 

뭐 이런 이야기가 성립되는 거지. 그래서 홍수 설화는 수메르 신화, 페르시아 신화, 구약성경 등 같은 지역의 모든 설화에 비슷하게 다 등장하잖아. 접속사만 바꿔서 말이야.... 그래서가 그러므로로 바뀌고, 짜라투스트라가 노아로 이름만 바뀌는 정도?

 

 

둘째, 청동기 시대의 국가가 소국가라는 것에 주목해야해. 

 

거대한 중앙집권적인 국가는 국가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하나의 '철학' 만을 인정하지. 그것이 철학이든 종교든 국가에게 유리하다면 그거 하나면 된거야. 별로 도움되지 않은 민중철학이나, 윤리철학이 국가철학에 도전한다면? 그건 이단, 반역, 마녀, 빨갱이... 등등의 수식어를 붙여서 다 처단해야지, 뭐....  

 

그래서 거대한 국가는 이데올로기에 집착하게 되는 거야.

 

 

 

하지만 다양한 소국가들이 등장해서 자웅을 겨루는 시기에도 하나의 이데올로기만 존재해야 할까? 아니지...  당장 나라가 망할지도 모르고, 전쟁이 날지도 모르는데, 국가의 생존에 유익하다면 어떤 철학과 사상이라도 스카웃 해와야지.

 

당장 코리안 시리즈 우승해야 하는데, 이종범이 광주출신이라고 삼성이 안데려가고, 이승협이 대구출신이라고 기아가 버려야 하나? 돈이든, 명예든, 지도자 자리 하나 던져주든.... 무조건 데려와서 우승하고 나중에 생각해야 할거 아냐? 삼성이 김응룡, 선동열.... 데려가서 우승도 몇번하고, 이제는 지역 출신 감독 쓰잖아.

 

그런데, 팬들은 그렇게 생각 안해. 감히, 이승엽이 광주가서 기아 감독한다고 하면?

 

국민타자고 뭐고 광주에서는 난리날껄? 광주가 가진 명분과 역사가 있잖아...

 

 

 

철학 역시, 그 두가지를 다루고 있어. 소국이 살기 위해 누구든 스카웃하고 부국강병을 한다는 국가관을 지켜야 하면서도, 국민정서와 명분을 따지면서 윤리의식을 생각하는 것.... 그거야.

 

장자를 제일 먼저 소개하는 이유도 그거야. 그의 철학이 실리과 명분, 즉 국가관과 윤리의식이라는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거든. 

 

셋째, 청동기 중기 이후 대대적인 정복 전쟁과 연관이 있지.

 

청동기 시대쯤 되면 생산력이 늘어나서 어느 정도 재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굶어죽지는 않을 수준이 되었어. 뭐 혹시나 굻어 죽을 것 같으면 무기 들고 나가서 약탈하면 되잖아...

 

생산력이 증가하면서 사유재산이라는 개념이 생겼어. 그러자 남의 것을 빼앗아 자신의 욕심을 채울 수 있다는 이기심도 점점 증가했지.

 

전쟁은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였고,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욕심이 생명보다 소중한가라는 근본적이면서도 당연한 의문을 던지기 시작한거야. 

 

 

 

 

그러자 고대 철학자들도 두 흐름으로 나눠졌지.

 

죽이고 빼앗아서 국가가 잘먹고 잘살아야 백성이 잘산다는 부국강병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등장했고, 일단 백성이 안죽어야 농사를 짓던 세금을 내던 할테니 윤리문제부터 집중하자는 사람들도 등장했어. 누군가는 이 두가지를 함께 생각했고, 누군가는 어느 하나에 집중하기도 했지.

 

부국강병을 이루는 방법에서 학파가 여러개로 나눠졌고, 윤리문제를 해결하는 근본 원리에 따라 여러 분파가 생겨서, 수많은 사상들이 '내가 옳소' 라면서 싸우게 되는 거야. 그래서 혼란기에는 철학의 전성기가 열리는 것이지.

 

자, 생각해보자.

 

21세기는 국가관이 윤리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국가주의 사회야.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은 자원을 빼앗기 위해 약소국을 침략해. 그런데 솔직하지 못하지. 

 

침략 명분이 세계평화나 종교윤리, 나쁜 피 제거와 같은 따분한 이데올로기 이야기거든. 뭐,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야? 이쁜 수영복 입었다고 자랑질 한 뒤에 옆의 친구 탈락시키고는, 세계평화를 위해 살겠다고 30년째 외치는?

 

그 뿐인가?

 

에너지를 얻고 문명개발에 박차를 가하려는 국가의 노력은 자국의 땅을 황폐하게 만들고, 자연의 질서를 역행하고 있어.

 

지구온난화와 기상이변.... 가장 심한 곳이 가장 개발이 화려(?)했던 미국 남부잖아. 툭하면 몇백명 이상 사망자가 나오는 허리캐인이 속출하는... 거기에 요즘은 도시 개발의 후휴증으로 도심 곳곳에 발생하는 싱크홀까지 3종 세트가 다 등장했어.

 

도시에 수도관, 가스 등 매설하느라 대부분의 지하가 텅 비어있는 공간이 많아. 거기에 균열이 가면 갑자기 거대한 홀이 생기면서 지하 30미터 짜리 구멍이 뻥 뚫리는 거지.... 잠자다가 갑자기 30미터 아래로 쏙~ 떨어져서 실종되는 미국인들이 많아지고 있잖아.

 

 

 

 

인간이 자연을 몸살나게 하고 있었지만, 자연은 조용히 기다렸지. 이제 인간에게 복수를 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거야.

 

장자는 이렇게 말했어.

 

인류가 스스로 생존하기 위해 위장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인 '개발'은 결국 대자연의 복수를 불러온다고...생존은 개발이 아니라 순응에서 시작한다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남과 싸우고 남의 것을 강탈하려는 대립은 결국 질서의 파괴를 가져오고 모두를 파멸로 이끌 뿐이야.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대립보다는 '상생'을 찾아야 하고, 하나의 길만 달리려는 '획일성' 보다는 자연 속에서 함께 어울릴 수 있는 '다양함'을 인정해야만 자연의 복수를 피할 수 있는 거야. 

 

그걸 모르는 어리석인 인간들의 행동은 모두 무지에서 비롯되는 거야.

 

현대 사회의 환경파괴와 생태계 붕괴, 인간 존엄성의 파괴는 결국 환경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다고 장자님, 아니 장느님이 말씀하신거지. 장자가 21세기에도 중요한 이유는 이 때문이야. 

 

 

 

이제 장자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 해볼까?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편>

16화. 고구려의 불교 이야기

1. 불교가 원시 신앙을 대신하다.

자, 이번 회부터의 불교 이야기는 우리 역사 속의 불교 이야기이다. 그럼 시작해볼까?

한반도의 불교 이야기는 인도나 중국 이야기처럼 재미있는 일화로 구성하기가 힘들다. 특히, 고대 불교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해동고승전 등 일부 자료와 중국측 기록 외에는 남아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가 불교 이야기를 적더라도 거기서 거기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감안해야 한다.

일단, 삼국유사에 따르면 불교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에 전진왕 부견이 승려 순도를 통해 불상과 불경을 전파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2년 뒤 아도화상이라는 스님이 다시 건너오자 성문사에 순도를, 이불란사에 아도를 머물게 하여 불법을 전수받았다고 말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첫 번째 이야기는, 고구려에 전해진 불교가 372년이라는 점에서 추론할 수 있다. 372년은 전진왕 부견이 불도징을 초빙하여 불교가 뭔지를 간신히 깨닫고 있던 시기였다. 아직 도안, 구마라습 등은 불도징의 초빙조차 받지 못한 시기였다.

참고링크 : 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 6화. 현학, 청담에서 시작된 격의 불교 이야기

따라서, 고구려에 전해진 불교는 불교이론이 확립된 도안이나, 구역경을 번역한 구마라습의 시기가 아니라 초기의 원시적인 불교였다고 볼 수 있다. 즉, 주술로 꽃을 피우거나, 도교의 신선 이야기로 부처의 이론을 설명하는 격의불교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불도징, 도안, 구마라습 이야기는 위 6, 7 화 링크를 참조하기 바란다.)

다음으로 주목해야 할 점은, 이런 수준 낮은 불교를 왜 국가가 도입했느냐는 점이다. 그 이유는 고대 민간 신앙에서 추론해볼 수 있다.

고구려 초기의 민간 신앙은 상당히 다양했다. 특정 부족신을 숭배하는 부족신 신앙, 동물을 숭상하는 토테미즘, 다신교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정령숭배사상(애니미즘), 주술사를 통해 하늘과 지상을 이어준다는 무격 사상(샤머니즘) 등이 여기 저기에 존재했다.

다양한 종교 사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만큼 국가 체계가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증거다. 국가에서는 주몽이나 유화부인을 숭배하는 사상(시조신 숭배)을 강조했지만, 각 지역별로 다양한 민간 신앙이 존재했다. 이러한 민간 신앙들은 종교적 역할 뿐만 아니라 일반민들의 사회생활을 지배했고, 심지어 국가가 아닌 지역 공동체에 대한 충성심마저 유발하는 것이었다.

당시 백제에 의해 고국원왕이 죽고, 중국 북조의 압박으로 정치적 입지가 약해진 고구려의 왕실은 부족 통합을 위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불교는 그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알맞은 것이었다.

2. 전진왕과 소수림왕의 정치적 거래

소수림왕 때 들어온 불교는 사실 제대로 된 석가모니의 참 뜻을 이해하기 힘든 불교였을 것이다. 전진왕 부견도 불교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스님은 전쟁의 수호신이거나, 불법으로 국가를 지켜주는 주술사> 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불교를 왜 고구려가 받아들였을까?

첫 번째 이유는, 불교가 이미 고구려 민간 신앙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국가적으로는 소수림왕 당시 불교가 전파되었지만, 민간에서는 이미 불교 신앙이 전파되어 있었다. 해동고승전(석망명전)에는 이미 청담사상가들이나 격의불교를 이해하고 있는 중국 고승들이 고구려 불교인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왕래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기록은 고구려인들이 신선 사상과 불교 사상을 이미 접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두 번째 이유는, 소수림왕의 왕권 강화를 위한 사회적 구심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소수림왕은 태학 설립, 율령 반포 등을 통해 중앙 집권 국가로 나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국왕이 신성하다는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이전보다 약화되어 있었다. 고조선부터 전해내려온 제천의식은 더 이상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동예의 무천, 부여의 영고와 같이 대부분의 군장국가부터, 고구려 내부의 각 부족까지 모두 제천의식을 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신사상과 다른 새로운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위해 불교의 수용은 필요했다.

마지막 이유는, 소수림왕의 대외 정책 때문이었다. 소수림왕은 국가안정을 위해 전진왕 부견과의 화해가 필수적이였다. 전진왕 부견은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 고구려와 화해가 필요했다. 소수림왕은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기 위해 그동안 적이었던 중국 북방의 전진왕과 손을 잡았다.

이것은 중국 북방과 동아시아 북방이 화해를 함으로서 각각 자신들의 영토를 통일할 기반을 마련하고자 한 획기적인 외교적 전환이었다. 이제, 이들은 치고 받고 싸우지 않는다. 그 결과 소수림왕의 후대에 광개토대왕, 장수왕, 문자왕이 동북아를 평정할 수 있는 외교적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3. 격의 불교와 호국불교

고구려 초장기 민간에서는 불교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천신 신앙이나, 신선 신앙으로 불교를 이해하려고 햇던 듯 싶다.

이제 주술사(샤먼)의 역할은 스님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명칭만 바뀌었을 뿐 스님이 곧 샤먼이었다. 스님이 손으로 마법을 부려 백성들을 치유하거나, 전쟁에서 수호신 역할을 한다는 믿음은 전진왕 부견 시대의 <불도징>이 불법을 전파하기 위해 활용했던 전략이었다.

주술사들의 웅얼거림과 마법적인 이야기들은 그대로 스님들의 이야기로 전해졌고, 그것이 스님들과 관련된 <향가 이야기>로 전해졌다. 부처와 보살, 미륵을 제대로 구분할 방법이 없었던 고구려에서는 보살을 산신령으로, 미륵을 하늘에서 내려온 지배자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절은 원시신앙에서 제천의식을 행하던 신성한 자리에 건립되었고, 전통적 재래신과 보살은 구분이 애매하였다.

특히 고구려는 산신령이나 도사와 같은 <도가 신앙>이 초기부터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도교 사상으로 불교를 이해하는 격의 불교가 쉽게 전파되었다. 부처의 <색즉시공>은 노자의 <무위자연>으로 이해하였고, 불교의 <해탈, 열반>은 도가의 <신선>으로 이해하였다.

반면 지배층은, 불교를 지배 이데올로기로 활용하는 중국 방식을 철저히 응용하였다. 특히, 불교에서 강조하는 윤회설, 업설 등을 묶어 <인과응보>로 정리하여 지배층의 우월함을 강조하였다.

특히 <업설>은 전생의 행위에 따른 윤회를 강조한 것으로 국왕의 신성함을 극대화 시켰다. 국왕은 전생에 높은 공덕을 쌓았기 때문에 만민의 지배자로 다시 태어났다는 논리를 강조했다. 왕은 곧 부처의 화신이며, 귀족들은 왕을 도와 불국토에서 안락을 누릴 미래의 보살들인 것이다. 노예들은 전생의 악덕함 때문에 현실의 고뇌가 시작된 것이므로 누군가를 탓해서는 안되는 신분이 되었다.

또 하나 왕권 강화를 위해 제시한 것은 <연기설>이다. 연기란, <인연>을 말하는 것으로 불교에서는 모든 만남은 이전의 원인과 결과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내가 누군가와 만난 것은 수십만개의 인연이 돌고 돌아 이루어진 것이다. 즉, 모든 현상은 홀로 이루어진 것이 없으며, 상호 관계 속에서 돌고 돌아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개체는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사실 우주 안에 살아가는 수많은 현상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어떤 원인이 없었으면 지금 너와 나의 만남이란 없다. 따라서 모든 사물은 전체 속에 포함되어 움직이는 것이다.

이것을 왕권에 대입하면? 모든 개인은 국가 속에서 활동하며, 국가의 흥망이 개인의 운명을 좌우한다. 모든 부족들도 왕권이라는 공동 운명체 속에서 인연을 만들어 갈 뿐, 독단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결국, 개인과 부족이라는 개체를 떠나 초부족적인 통합의 법(다르마)이 존재한다. 따라서 국왕의 행동과 국가의 율령은 모든 개체들의 운명을 위해 절대적인 것이 된다.

이것이 고구려의 초기 불교 이념이었던 것이다.

4. 광개토대왕과 불법

광개토대왕, 장수왕, 문자왕은 고구려 최전성기의 3대 태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왕들은 모두 불법의 수호자였다.

소수림왕이 불교를 받아들인 후 다음 왕은 드라마 태왕사신기에 나왔던 <고국양왕>이다. 고국양왕은 소수림왕이 불교를 받아들인 참 뜻을 깨닫고, 광개토(담덕)에게 <불교를 받들어서 복을 구해야 한다>는 충언을 하였다.

광개토대왕은 선대 왕들의 유지를 깨닫고 불교를 통한 국가 보호 사업을 추진하였다. 광개토대왕 2년에 평양에 9개의 절을 지었는데, 그 이유는 선대 왕들을 끊임없이 괴롭히던 강력한 백제군을 부처님의 가호로 막겠다는 뜻이었다.

평양은 남방으로 내려가는 길목이자, 백제군과 계속적인 전투를 벌었던 요지이다. 또 고조선의 수도이자, 대동강을 통한 국제 무역의 공식 루트였다. 광개토대왕의 불심으로 미루어 북방에도 많은 절들을 건립했을 것이지만, 기록에 없으므로 생략하기로 한다.

단, 당시 5세기의 불교는 구마라습의 구역경이 번역되어 전파된 시기이기 때문에, 국왕이 곧 부처라는 북조의 <왕즉불>사상이 전파되었음은 예측할 수 있다. 광개토대왕도 불법의 수호자이자, 자신이 곧 전륜성왕이라는 이념을 생각했을 것으므로, 세계 지도자로서의 불법왕을 생각해보았을 것이다.

5. 장수왕과 불교 첩보전

광개토대왕이 북방으로 영토를 넓혔다면, 다음 왕인 장수왕은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기 위해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고 남진정책을 실시한 왕이다. 장수왕 때에는 불교에 관련된 재미있는 고사가 나온다.

장수왕이 백제에 보낼 간자(첩자)를 찾고 있었는데, 승려 도림이 자발적으로 첩자가 되겠다고 했다. 도림은 고구려에 큰 죄를 짓고 망명한 스님으로 위장하여 백제 개로왕에게 접근을 한다. 개로왕이 바둑을 좋아하자 도림은 왕의 바둑 친구가 되어 왕의 신임을 얻는다.

도림은 개로왕에게 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거대한 건축 사업을 제안한다. 궁궐 보수, 왕릉 개축 등을 위해 백성들을 징발하여 화려한 건물을 짓도록 한 것이다. 이 사업으로 백제의 창고는 비게 되고, 백성들은 고된 노동을 하게 되면서 국가를 원망하게 되었다. 도림은 장수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고, 장수왕은 총공격을 실시하여 백제 수도를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죽였다.

즉, 스님이 첩보활동까지 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몇가지 고구려 불교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

먼저, 불교 스님이 불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국왕을 위해 헌신한다면서 간첩질까지 한다는 점이다. 초기 고구려의 불교가 얼마나 국가 권력에 종속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또, 국가를 지키기 위해 백제의 백성들을 궁지에 몰아넣은 것은, 불교 자체가 성숙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중생 구제라는 참 뜻 조차 파악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두 번째로 불교 전파를 신라가 크게 반대한 이유도 설명이 된다. 신라에서 이차돈의 목까지 잘라가며 불교를 믿으라고 절규할 만큼 불교가 전파되지 못한 점 중 하나가 이런 <불교를 이용한 침략작전> 때문일 수도 있다.

물론, 불교를 전파받는 국가의 지배층은 새로운 사상 자체가 기득권을 흔들 수 있기 때문에 반대한다. 그러나, 그 이유로 <불교라는 종교가 기존 사회체제를 흔들기 위한 선진국가의 함점>이라고 항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이야기는 삼국사기에 나온다.)

6. 장수왕 이후 불법의 참뜻을 파악한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까지의 불교가 왕권에 휘둘리던 호국 불교였다면, 그 이후의 고구려 불교는 진정한 불교의 뜻을 파악하기 시작한 <종파 불교>였다.

부처의 진정한 뜻을 탐구하고자 노력한 고구려 스님들의 노력은 장수왕 말기 <승랑>에서 시작된다.

승랑법사는 중국에서 구마라집이 인도불경을 번역하여 불경의 참 뜻을 해석하자 그의 경전을 읽으면서 불법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북위로 건너가 중국 대승불교의 참 뜻을 연구하였다.

춘추전국시대

위진남북조

5대10국

BC770 -

BC221-

BC206 -

265 -

581 -

618-

907 -

960 -

혼란기

통일기

통일기

혼란기

통일기

통일기

혼란기

통일기

제가백가

법가

유가/불교유입

격의 불교

종파형성

종파불교

유교중흥

유학완성

 

그는 특히 반야(지혜)가 무엇인가를 연구하는 <성실종>을 연구하면서 인도 대승불교의 창시자인 용수의 반야사상을 연구하였다. 그가 연구한 학문을 <삼론학>이라고 한다.

삼론종 7대조 : 구마라집 - 승조 - 법도 - 승랑- 승전 - 법랑 - 길장

특히 승랑은 중국의 성실종과 달리, 오로지 순수한 인도의 대승불교만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삼론종의 계보를 잇는 7대 대사로 이름을 날렸다.

삼론학파란?

중론, 백론, 십이문론의 3가지 이론을 내세우는 불교 학파.

이들은 모든 사물은 원래 실체가 없다는 공(空) 사상을 주장하기 때문에 중관학파(공사상 학파)로 분류된다. 아무 것도 없다는 3론은 다음으로 정리해 본다.

1론 :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집착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집착하지 않는 것이 곧 진리이다. 집착은 언어가 만들어낸 허구적 형상이므로, 결국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불법의 최고 단계이다.

2론 : 만물이 실제한다는 것과 실체가 없다는 것도 언어에 의한 말장난일 뿐이므로, 어느 한쪽에 치우침 없이 중도를 걸어야 한다.

3론 :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탄생도, 소멸도, 영원도, 순간도 없다. 하나도 아니며 여럿도 아니다. 오는 것도 아니며 가는 것도 아니다. (팔부중도)

삼론종은 성실종에서 주장했던 <마음으로 인식하여 언어로 표출>한다는 인식론을 아무 것도 없다는 공 사상으로 체계화하여 정리하였다. 이 삼론종은 중국보다는 고구려에서 더 활성화 되었는데, 수나라 때 길장은 삼론종 7대사에 들어가며, 제자인 혜관은 일본 삼론종을 개창하였다. 이 삼론종은 훗날 법성종으로 불리며 명맥을 이어간다.

반면, 공 사상과 별도로 <유식> 사상을 주장한 이들도 있었다. 중국에서 유식학을 공부한 원측은 눈에 보이는 <본질>이 실제 존재한다는 이론을 주장하였다.

모든 것은 실체가 없는 것인가, 눈에 보이는 본질이 존재하는가의 문제는 <공유논쟁>으로 학문적 논쟁을 야기시켰다. 비록 고구려 불교 교단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지만, 불교 자체가 왕권을 벗어나 스스로 발전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7. 승군으로 활약한 고구려의 불교 교단

점차 독립적인 불교 교단으로 발전한 고구려의 불단은 국가 위기 상황에서 큰 힘을 발휘하였다.

불교에서는 불법을 연구하는 교단도 국가의 위기 상황에서는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관례가 되어있다. 신라 원광 법사의 세속오계, 고구려 불법 단체들의 몽골 항쟁, 임진왜란 등에서 보여준 스님 의병들의 모습이 대표적인 예이다.

불교 단체가 <호법>이라는 이름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이유는 2가지이다.

첫 번째 이유는, 이 땅이 국왕의 땅이기 이전에 진리를 연구하는 불국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처의 땅을 지키기 위해 외적은 반드시 물리쳐야 한다는 호법 사상이 있는데, 이것을 정의를 지키는 정법(다르마 : Dharma)라고 한다.

두 번째 이유는, 국가가 불법을 보장하고 지켜주는 한 불법이 펼쳐지고 있는 국가를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 때문이다. 불법의 <연기설>에 의하면 국가가 없으면 불법도 없다. 국가가 불법을 인정한다면 불교 교단은 국가의 위기에서 국가를 지켜야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고구려에서도 국가의 위기 때 직접 전장에 뛰어든 스님들이 있다.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 우리는 살수대첩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 때, 7 승려들이 살수(청천강) 위를 홀연히 걸어갔는데, 수나라 병사들은 스님들의 행동을 보고 물이 얕다고 생각하여 청천강을 건너기 시작했고, 그 결과 수 많은 군사들이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그 이후 7 스님의 동상을 세워서 공적을 칭송한 절이 바로 <칠불사>이다. (동국여지승람)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 고구려 스님 3만명이 당 군대와 치열하게 항쟁하여 물리친 기록도 있다. (고려서 열전 외전)

그러나, 실제 남아있는 기록 및 유물과는 다르게 삼국사기에는 이러한 기록들이 모두 생략되어 있다. 따라서 몇몇 사료와 남아있는 사원 등을 통해 짐작해 볼 수밖에 없다.

8. 번성한 고구려의 불교와 쇠퇴 과정

점차 독립적으로 발전하게 된 고구려의 불교는 일본에 전파되었다.

혜편은 일본 불교 최초로 비구니를 양성하였는데, 선신, 혜선 두 일본여인을 가르쳐 출가시켰다고 한다. 혜자는 고구려의 공식 사절로서 쇼토쿠 태자의 스승으로 활약하다고 귀국하였는데, 지금도 호류사에는 혜자법사 상에 존경의 예를 표하고 있다.

담징은 법정과 함께 불교와 더불어 종이, 먹 등의 기술을 전파하였고, 호류사의 금당 벽화를 그렸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1949년 화재로 벽화가 타 버린 이후 재현된 모사 벽화에는 담징에 대한 일체의 언급을 빼 버렸다.

혜관은 일본 2대 승정이 되었고, 도현은 일본세기를 저술하였으며, 승륭, 운총 등은 일본 사절로 일본을 방문하여 많은 문물을 전파해 주었다.

그러나 5-6세기 전성기를 맞이했던 고구려 불교는 7세기에 급격한 쇠퇴를 맞이하게 된다. 그 이유는 최고 집권자인 연개소문의 불교 탄압 때문이었다.

중국 불교를 이야기하면서 불법이 고유한 철학을 찾아가게 되면 도교나 유가를 이용한 탄압이 뒤따른다는 점을 언급했었다. 우리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시기에 왕권 강화에 이용되었던 호국 불교가 사라져가고, 불교가 독립성을 주장하자 집권자인 연개소문은 중국 당나라에서 유행하는 <호국 도교>를 이용하여 불교를 배척하였다.

그 결과 많은 스님들이 망명하게 되고, 고구려의 불교가 쇠퇴하게 되었다. 특히, 고구려 말기에는 모든 백성들이 부처가 될 수 있으며, 깨달음은 가까운 곳에 있다는 열반종 사상까지 들어오게 되자 탄압은 더욱 심해졌고, 보덕이 개창한 우리식 열반종은 백제, 신라 등 남방 국가로 이전되어 전파되었다.

반면, 북교 교리가 심화되자 불교 교리를 통합하기 위한 통합 종교들도 유입되었다. 중국에서 사상 통합을 위해 활용되었던 천태종, 화엄종 등의 교리가 고구려에 유입되었고, 특히 천태종은 고구려 말기에 불교 통합 사상으로 등장하였다.

고구려는 연개소문 이후, 급격한 국력쇠퇴와 내분으로 멸망하였고, 고구려의 종파 불교도 그 꽃을 다 피우기 전에 사라졌다. 다음 편에서는 백제, 신라, 가야의 불교 역사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고 넘어가도록 하자.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by 히스


이 이야기를 자세한 내용으로 재미있게 읽고 싶다면?

이야기 고구려왕조사
카테고리 아동
지은이 우리미래역사체험학습 강사진 (청솔, 2008년)
상세보기

불교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최준식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7년)
상세보기

왕초보 불교 박사 되다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석지현 (민족사, 2008년)
상세보기

청소년 불교 입문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 포교연구 (조계종출판사, 2009년)
상세보기

불교가 좋다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가와이 하야오 (동아시아, 2008년)
상세보기

불교란 무엇인가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우룡 (효림, 2007년)
상세보기

한국불교사상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서윤길 (운주사, 2006년)
상세보기

하룻밤에 읽는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소운 (랜덤하우스코리아, 2004년)
상세보기

불교사상사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양훼이난 (정우서적, 2008년)
상세보기

불교사 100장면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임혜봉 (가람기획, 1994년)
상세보기

한국인의 종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윤이흠 (서울대학교출판부, 2001년)
상세보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편>

15화. 평생을 불교와 싸운 유학의 아버지 - 한유

1. 맹신적인 종교가 국가를 망치는 것이다. 

중국 불교를 마무리 하면서 어떤 상징적인 이야기를 꺼내야 쉽게 이해될까 고민하느라 포스트가 지연되었다. 오늘 이야기는 불교를 배척하면서 평생을 살아간 <한유>의 이야기로 중국 불교편을 정리하고자 한다.

중국 당나라 시기... 불교는 최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국가 권력과 밀착한 화엄종, 천태종 등 교종 종파 뿐 아니라, 백성에게 직접 뛰어들어 불교의 대중화를 이끈 정토종, 선종에 이르기까지 불교천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불교의 힘이 너무 강해질 때마다 중국 황제는 종교에 태클을 걸었다. 그 이유는 정치적 목적 때문이다. 국왕이 불교를 용인하는 것은 불교가 왕권 강화에 도움을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황제에게 불교, 도교, 유학의 구분을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만약 종교가 황제권을 넘어서려 한다면 그 종파를 찍어 눌러야만 했다. 특히 유교, 도교, 불교라는 세 종파가 공존하던 중국 고대 사회에서 황제의 선택권은 넓었다. 황제가 불교에 위협을 느낄 때마다 유교, 도교를 이용하여 불교를 탄압하였고, 그것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몇몇 <폐불사건>으로 알려진 것이다.

링크 : 불교편 9화. 서로 우위를 점하려던 도교와 불교의 한판 승부

특히 유교는 불교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대세는 불교와 도교였고, 특히 불교는 당나라 측천황제(측천무후)의 불교 중흥 노력으로 최강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 하지만, 당나라의 국운이 기울던 당 말기부터 불교의 위세는 꺽이게 되었다.

당나라는 측천황제 이후, 불교가 사회를 지배하였다. 황제는 미륵의 화신으로 생각할 정도였고, 귀족들은 스스로가 보살이라고 여기며 성불을 기원했다. 천태종과 화엄종의 <경전>은 귀족들의 교양지침서였다.

공식적인 당나라의 통일 사상은 유학의 일종인 <훈고학>이었지만, 훈고학은 옛 성인들의 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수준이었다. 백성들은 불교를 믿고, 집집마다 향불이 올라왔다.

2. 유학자들의 반격

유학자들은 불교 세력이 성장하자 불교에 대한 비판을 공론화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황제권 강화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첫째, 불교 사원을 짓는다는 것은 막대한 세금을 낭비하는 것이고, 종교 사원은 세금을 내지 않는 특권을 누린다. 그것은 왕권을 강화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둘째, 죽은 뒤 내세가 기다리며, 내세는 현생의 죄업과 연결되어 있다는 <인과응보>에 대해 국가적 차원으로 비판하였다. 유학에서는 현실 사회에 대한 모순을 파악하고, 현실 개혁과 사회 안정에 대한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죽은 뒤 영혼이 어쩌구.. 하는 이야기는 현실성이 전혀 없으며, 백성들을 현혹하는 이야기일 뿐이다. 국왕으로서 당연히 막아야 되지 않겠는가?

셋째, 불교가 왕권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당나라 이전의 불교는 왕권 강화에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불교의 교리가 심화되어 강력한 <종파>가 생겨나자 문제가 발생했다. 불교가 석가모니의 참 뜻을 내세워 중국 전통 사회의 윤리에 도전한 것이다. 유학에서는 충성, 효도를 강조하지만, 불가에서는 출가릃 하여 부모와 국왕을 떠나는 것마저 허용하고 있다. 세금을 내야할 백성들이 줄어들고, 전통 윤리에서 멀어지는 것을 국가가 보고만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넷째, 불교 교단의 승려들이 <국사>가 되어 정치적 힘을 갖게 되었다. 왕권이 약해지는 시점에서는 이것도 골치아픈 것이었다. 백만대군보다 무서운 것이 종교적 힘을 가진 백만 민중 아니겠는가?

결국 당말기 폐불사건은 남북조시대 이후 계속 되어온 왕권과 불법의 대립이 극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남북조와 수나라를 거치면서 여러 차례 폐불을 당해본 불교였지만, 당말기에 대놓고 진행된 폐불에서는 큰 타격을 입었다.

특히, 경전으로 중심으로 귀족층과 밀접했던 <교종>은 교단이 박살날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다. 반면, 간략한 선법 수행과 <믿음>을 강조했던 <선종>은 그 피바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당나라 말기에 살아남은 불교 교파는 <선종>이었고, 결국 선종이 후대 중국 불교를 이끌어가게 된다. 그러나, 불교 자체가 위축된 만큼 불교의 힘은 떨어졌다. 당나라를 이은 송나라는 신유학인 <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삼았고, <교종> 교파는 송대 이후 아무런 힘도 가질 수 없었다.

3. 불교도 싫어, 귀족도 싫어...  NO 만을 외치던 <한유>

당송팔대가의 으뜸이라 불린 한유는, 중국 사회의 문제점을 <불교>에서 찾았다.

백성들이 죽은 뒤 <윤회>를 생각하면서 현실을 암흑으로만 생각하고 있다는 것과, 귀족들이 불상앞에 재산을 기부하면서 사회적 역할을 못한다는 것을 모두 <불교>탓으로 여긴 것이다.

특정 종교에 매달려 모든 것을 버리는 행위가 생긴다면 예나 지금이나 사회적 문제로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종교가 <종파>적 철학까지 잃고 지배층이 맹신하는 상황까지 발생한다면 국가 존립 자체가 위험해진다.

한유는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신유학>을 제시하였다. 노장사상은 허무주의이며, 불교는 현실이 아닌 <내세>의 종교라고 주장하고 다닌 것이다.

한유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나 스스로 제자백가를 독서하고 과거에 합격한 뒤, 특출한 학식으로 승승장구 승진하던 엘리트 관리였다. 하지만, 지배층이 숭배하는 <불교>에 정면 도전하면서 험난한 인생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당나라 덕종에게 지배층의 문란함을 비판하였다가 귀향을 갔었지만, 뛰어난 학식을 인정받아 다시 조정에 들어갔다. 그러나, 또 다시 지배층의 사상을 비판하여 귀향을 가게 되었고, 이것이 그의 일생에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귀향갔다 돌아왔다, 또 귀향갔다 돌아왔다....

특히, 한유가 미움을 받은 것은 당나라 헌종 때 <황제>의 불교 숭배를 비판한 것이 원인이 되었다.

당 헌종이 법문사라는 절에서 석가의 손가락 뼈한마디를 구해 궁궐로 가져온 뒤 제사를 지내고 다시 절로 보낸 일이 있었다. 그것을 본 지배층 인사들과 백성들이 모두 그 뼈한마디를 찾아가 난리를 치는 것이었다. 부자들은 자신의 재산을 그 뼈마디에 기부했고, 백성들을 생업을 포기한채 뼈마디 앞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어찌 인도에서 죽은 석가모니란 인물이 중국 사회 전체를 흔들어놓는단 말인가? 진짜인지 알 수도 없는 석가의 썩어 문드러진 뼈조각이 국가를 망친단 말인가?

한유는 헌종에게 <불교를 신봉한 군주들은 모두 단명했다>는 글을 올리며, 황제를 직접 비판하였다. 그리고 아무 생각없이 살아가는 당나라의 지배층들도 비판하였다. 소위 <귀족>이라고 불리며, 남작, 백작, 자작 등 작위를 받고 살아가는 지배층들은 개념(槪念)이 없다고 비판한 것이다.

그는 지배층들의 문학인 <시문학>까지 정면으로 부정하였다. 사륙변려체 등으로 구절을 맞추어 술자리에서 돌려말하는 싯구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것은 아무 의미없는 유흥일 뿐이다. 문학이란, 현실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있어야 하며, 진정한 <도>를 깨닫기 위한 노력 속에서 나와야 한다.

당나라 지배층이 쓰는 화려하고, 아름답기만 한 문장들은 아무 의미가 없다. 요즘으로 따지면 원더걸스나 빅뱅의 노래가 귀에 착 붙게 반복적인 멜로디로 구성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뜻은 아무 의미없는 것과 같다. NOBODY를 백번 외쳐봐도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한유는 한나라 이전의 고문들을 회복시켜 아무 의미없는 당나라 지배층의 문학을 부정하려고 했던 것이다. 왜 하필 한나라 이전의 고문으로 돌아가자는 고문부흥운동(古文復興運動)을 전개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불교가 한나라 이후에 성행했기 때문이고, 유학이 한나라 때까지 전성기를 누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반지배층 성향을 가진 한유.... 그 결과는? 오랜 시간 귀향살이었다. 그러나, 인생의 절반이 중앙정권에서 배제된 그였기에 백성들과 직접 만날수 있는 기회도 많았고, 많은 친구를 사귈 수도 있었으며, 성리학의 토대가 된 저서들도 적을 수 있었다.

4. 불교를 비판했으나, 유학도 내 버려두지 않은 한유

한유는 불교, 노장사상 등을 비판했고, 그것을 신봉하는 지배층과 무지한 백성들을 동시에 비판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옛 유학을 그대로 옹호하지도 않았다.

한유는 한나라 이전의 유학들도 비판하기 시작한다. 공자와 맹자의 말씀부터 시작된 고대 유학을 당나라에서 <오경정의>로 압축하였다. 당나라에서는 과거시험의 명경과를 보기 위해 <오경>을 공부해서 암기해야 했다.

하지만, 한유는 그것을 비판한다. 왜 공자와 맹자의 사상을 단순히 암기해야만 하는가? 그들의 사상이 절대적이라고 맹신한다면, 불교를 절대적으로 믿는 이들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어떤 사상에 대한 맹신은 결국 교조주의일 뿐이다.

한유는 불교 자체가 나쁜 것이라 말하지는 않은 듯하다. 하지만, 불교의 교조주의적 성향을 비판하기 위해 평생을 불교와 싸우며 살아갔다. 그의 역사관은 이렇다.

중국의 전설시대에는 인간 윤리를 지키며 살아간 태평한 시기(태평성대)가 있었다. 그러고, 중국인의 전통 윤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면서 <유학>이 등장하였다. 하지만, 한나라 이후 불교라는 외래 종교가 유입되어 황제들이 단명하고, 국가의 전성기도 단축되었다. 위진남북조의 긴 혼란기가 불교의 전성기였으며,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황제는 불교를 견제하면서 국력을 낭비하였다.

따라서 고대 유학을 부흥해야 하지만, 시대가 달라진만큼 새로운 유교 철학이 필요하다. 한유는 새로운 유학 철학을 <성선설>에서 찾았다.

맹자의 성선설은 인간의 성을 인, 의, 예, 지, 신 등으로 구분한 뒤 본성이 착한가를 따지는 철학이었다. 반면, 한유는 성선설, 성악설을 모두 보완하면서 인간의 성품은 3가지로 나뉜다고 말한다.

성 상품

  태어나서부터 선한 성품

성 중품

  선과 악 어느쪽으로나 갈 수 있는 성품

성 하품

  태어나서부터 악한 성품

한유의 책 중에서 널리 알려진 책은 <진학해, 원도, 원성>이라는 3권의 책이다. 진학해는 자서전으로 불교비판에 대한 내용이 많이 실려있고, 원도는 유학의 나아갈 길과 불교의 문제점이 실려있다. 원성에서 성삼품설을 적어두었다고 한다.

5. 불교의 시대가 가고 성리철학의 시대가 오다.

당나라 말, 한유의 출현과 더불어 시작된 성리학의 태동은 불교의 입지를 비좁게 만들었다.

한유의 벗인 유종원은 한유의 철학마저 비판하면서 <유물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는 역사 발전의 핵심을 <세력>으로 파악하였다. 공자, 맹자와 같은 성인이 역사를 좌지우지하지 않는다. 그들은 말 그대로 성인이거나 종교인일 뿐이다. 우주나 음양오행이 인간의 삶을 결정하지도 않는다. 우주는 단순한 음과 양이 모인 기(氣)일 뿐이다. 기(氣)는 살아있지도 않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따라서 우주의 기가 인간행위에 벌을 내린다거나, 복을 준다는 말 자체가 미신일 뿐이다. 결국, 인간 세계를 이끌어가는 것은 역사를 이끌어가려는 <힘있는 인간 집단>일 뿐이다.

유종원과 한유의 후학인 이고는 스승 한유의 철학에 선종 종파의 <수련법>까지 더하였다. 선종계열의 불가에서는 인간이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맹자가 인간의 성이 모두 선하다고 말한 것처럼, 부처 역시 누구나 착한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말한 것이다. 따라서 성인이든, 군자든, 평민이든 모두가 선할 뿐이다. 단지, 우주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외부(기 : 氣)의 영향을 받아서 훗날 선과 악으로 갈릴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모두가 선해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처의 수련법인 <선>을 행해야 한다. 선종의 명상법과 수양법, 좌선과 대화는 학문과 종파를 넘어서 모두에게 유용한 수련법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당말기, 새로운 유학 사상가들은 불교를 비판하면서도, 옛 유학의 참뜻을 자기 나름대로 재해석 하려고 노력하였다.

새로운 유학은 당나라 귀족층들이 농담따먹기 하듯 적어내는 의미없는 글귀나 고사모음이 아니라 인간과 우주의 본성을 연구하는 <뜻>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그것이 고문부흥운동으로 이어진 것이다. 고문부흥운동은 화려한 문구의 시를 벗어나, 현실생활과 관련된 문제들을 철학적 명제로까지 끌어내려는 노력이었다.

당말의 유학자들은 국가 권력이나 지배층과 밀착된 교종 종단을 철저히 배척하였다. 그러나, 신유학 역시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고 뜻을 찾는다는 점에서, 선종 교단의 수련법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하였다.

6. 불가와 도가의 철학이 성리학의 <태극>으로 합쳐지다.

당나라 다음으로 등장한 송나라에서는 성리철학의 틀이 완성되면서 사회 지배철학으로 자리잡은 시기였다.

그 역사적 철학을 <태극>으로 정리한 이가 바로 <소강절>과 <주렴계>였다.

절에서 거주하면서 불교철학과 유학을 두루 공부한 소강절은 불교, 도교, 유학의 철학을 두루 정리하여 태극(太極)이라는 불변의 원리를 만들어내었다.

태극이란, 절대 불변하는 우주의 진리로서, 성리학에서 말하는 이(理)와 같다. 태극은 불변하지만, 그것을 알아채는 인간의 정신(神)이 사물을 파악하는 것을 기(器 : 물질)리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정신과 기는 돌고 돈다. 세상에는 시작점이 있는데, 이것이 정신으로 표현되며, 또 물질로 표현되며 물질이 소멸되면 다시 정신으로 돌아간다. 이것은 불가에서 말하는 <윤회>의 이론과 비슷하다.

또, 돌고돌아 물질이 자연으로, 정신으로 돌아간다는 점은 도가의 무위자연과 추연의 음양오행설과 유사하다.(실제, 소강절이 불교, 도가의 철학을 의도적으로 인용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지만, 돌고돈다는 법칙 자체는 변하지 않고 불변하는 진리로 남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태극>인 것이다. 태극은 모든 자연과 인간, 우주의 근본 법칙이다.

이 사상을 정리한 이는 동시대를 살았던 친구인 <주렴계>이다. 그는 선종 선승들과 직접적인 교분이 있었고, 선종의 수양법으로 자신을 단련하면서 살았던 인물이다. 주렴계는 모든 현상의 근본 법칙인 태극에게 2가지 속성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움직이는 것을 양(陽)이라 하고, 정적인 것을 음(陰)이라고 하는데, 이 음과 양이 돌고 돌아 우주의 법칙을 회전시킨다는 것이다. 음과 양은 오행(화,수,목,금,토)의 상극을 만든다. 양은 남성, 태양 등을 뜻하며, 음은 여성, 달 등을 뜻한다. 불(火)이 양이라면 나무(木)가 음이 된다.

그리고, 이 양과 음이 상호작용하면 우주가 돌게 된다. 만물의 생성을 주도하는 것이 건(乾)이고, 받아들이는 것이 곤(坤)이다. 하늘과 남자가 건이면, 땅과 여성이 곤이다.

주렴계의 철학은 결국 불교와 도교의 철학에서 파생되었다. 선종에서 말하는 공(空) 사상과 도가에서 말하는 무(無) 사상 등의 철학을 유가 형식에 맞춰 <태극>으로 정리한 것이다.

단, 차이점이 있다면 불교와 도가에서는 존재의 근거가 되는 불변의 진리를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논리적인 정신적 개념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러나, 주렴계는 <태극>이 인간 세계에 존재하는 님자, 여자, 하늘 등의 명칭을 가진 물질이라는 점에서 <유물론>적인 관점의 철학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탐구할 수 있는 태극의 실체를 리(理)라고 말하고 있다. (태극도설)

7. 선종 철학을 벗어나 이기론으로 향하는 성리학...

동시기를 살았던 장제는 좀 더 세밀하게 불교 철학과 성리학의 차이점을 설명한다. 불변의 본질인 태극 자체를 리(理)라고 말하면서, <리>는 단순히 변화의 법칙을 설명하는 원리라고 말하였다. 실제 우주를 구성하는 실체는 기운(기 : 氣) 인데, 이것이 바로 눈에 보이는 존재자라고 말한 것이다.

따라서 장제가 주장한 <주기론>은 불교사 입장에서 보면 아찔한 것이 된다. 불교의 <공>사상이나, 도가의 <무> 사상이 전면 부정되고, 우주에 실제 존재하는 기운(氣)이 명백히 물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장제의 입장에서 <기>란, 우주의 생성부터 현재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이며, 지금 이순간에도 변하고 있는 모든 사물인 것이다. 더 이상 <색즉시공 공즉시색>과 같은 어려운 말은 통하지 않는다. 모든 사물은 우주의 기운(氣)를 받아 생겨나서 살아가다가 사라질 뿐이라고 말하면 끝이기 때문이다. 내세도, 윤회도 이젠 없다. 기운(氣)은 살아있을 때 활동할 뿐이며, 죽은 뒤 사라질 뿐이다.

동시대를 살았던 정이천, 정명도 형제는 장제의 <기> 사상을 우주와 만물의 일치로 끌어올린다. 그들은 모든 만물에 기운이 있고, 그 기운은 우주에서 내려준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만물과 하나가 되는 경지에 이르고, 모든 중화인이 하나의 민족이라는 것을 아는 단계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주의 기운(氣)은 불변하는 원칙인 이치(理)에 의해 움직이므로, 모든 우주의 기운에는 이치가 담겨져 있다고 말한다.(일물일리론 : 一物一理論)

이 이론을 정리하여 성리학을 완성한 이가 바로 성리학의 아버지 <주자>이다. 주자는 이치(理)와 기운(氣)의 상관관계를 정리하고, 그것을 중국민족의 우월성과 정당성으로 규정하면서 새로운 정치철학을 완성했던 것이다.

이 와중에 불교의 교종 철학은 설 자리를 잃었다. 정치철학으로 성리학에 지배권을 빼앗긴 불교는 이미 당나라 지배층이 무너지면서 정치적 실권에서 사라진 것이다. 이제 불교는 민중속으로 파고든 선종과 정토종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송나라를 넘어 명, 청 시대로 이어지면서 서민 불교로 자리잡아간다. 그리고, 송나라 이후 역사적 변환점에 새롭게 자리잡게된 철학은 <유학>이었다.

자, 그럼 이 쯤에서 중국 불교이야기도 끝내고 한반도와 일본의 불교로 넘어가보자.

한반도의 불교는 인도, 중국 불교의 연장선에서 이야기될 것이다. 고조선에서 시작하여 현재의 조계종까지의 불교를 역사와 관련해서 살펴보자. 그리고 일본의 불교는 우리 역사와 비교해서 다루면 좋을 것 같다. 이야기 했듯이 티벳이나 동남아 불교는 동아시아 역사와 큰 관련이 없기 때문에 관련 부분만 조금씩 이야기하려고 한다.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by 히스

자세한 내용은 이 책을 참조하세요 ...


한유에서 주희까지:중국근세유가철학 상세보기

한유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노장시 (중문출판사, 2004년)
상세보기

이야기 중국사. 2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김희영 (청아출판사, 2006년)
상세보기

소통의 정치학 상소: 중국편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니우산 (달과소, 2008년)
상세보기

송선생의 중국문학 교실. 둘째권: 송나라부터...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송철규 (소나무, 2008년)
상세보기

한 권으로 읽는 유교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첸파핑 (산책자, 2008년)
상세보기

중국철학사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펑유란 (형설, 2007년)
상세보기

청소년 불교 입문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 포교연구 (조계종출판사, 2009년)
상세보기

불교 교과서 밖으로 나오다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김형중 (운주사, 2008년)
상세보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9화. 서로 우위를 점하려던 불교와 도교의 한판 승부...

1. 이민족 왕조에 뿌리내린 도교

자, 이제 불교의 수준은 <도교>를 벗어나고 있었다. 구마라집이 불경을 번역한 이후, 불교는 진정한 불법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더 이상 도교의 이론을 빌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불교 이론의 다양한 연구는 다양한 학파가 형성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각, 학파들은 도교 이론을 부정하고, 대승 불교 고유의 <공> 사상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그동안 도교는 뭘하고 있었을까? 도교 역시 혼란기를 이용하여 확실한 <도가 이론>을 확립하여, 위진남북조의 혼란기를 이끌어갈 사상으로 성장했다.

<도교의 시존 - 노자>

<도교의 선구자 - 갈홍>

원래 도교는 춘추전국시대 <노장사상>에서 기원한다. 당시에는 여러 제가 백가 중에 하나로서 <무위자연>을 주장하는 <학파>였기 때문에 <도학>, <도가> 등으로 말할 수 있겠다. <도학>은 노자의 <도덕경> 사상을 바탕으로 장자의 현실 철학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럼 도가가 도교로 변한 것은 언제일까? 불교의 <학파>가 성립되는 위진남북조 시대와 일치한다.

동진시대 갈홍이 <도교>의 선구자이다. 갈홍은 <포박자>를 저술하여 도교 발전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했다. 원래 학문적 성격이 강한 <도가>에 신선술과 민간 종교를 모두 종합하여 <도교>를 성립시킨 것이다.

일단, 노자의 사상을 이해하고 자연 속에서 영생을 누리는 <신선>이라는 존재를 종교 안에 포함시켰다. 신선은 노장 사상을 이해하여 속세를 해탈한 귀인으로 표현된다. 또, 신선은 죽지 않고 천수(1000살)를 누린다는 <불로장생> 사상을 포함시켰다. 이렇게 대충 이론이 정립된 것이다.

그러나, 실제 현실에서는 <조직>이 필요하다. 도교는 부적이나 신비술이 가능하다는 <신선술>을 강조함으로서 혼란기 현실에서 고뇌하는 백성들을 포섭하였다. 후한부터 시작된 중국의 혼란기에 많은 민란이 있었다. 대표적인 민란인 한나라 오두미교는 <도교> 조직의 모델이었다.

가난한 백성들도 곡식 5두를 내면 가입이 가능한 <오두미교>는 후한 시기 장각의 태평도로 발전하였다. 이 오두미교를 <천사도>라고 불렀는데, 북위 시대 구겸지가 이것을 <신천사도>로 개편하여 혼란기 중국 북부지방의 조직단체로 개편한 것이다.

남북조 시대 북조를 통일했던 북위는 도교를 국교로 숭배하였다. 위진남북조 시대에 등장한 여러 이민족 왕조들이 중국 고유의 사상인 <유교>를 배척하기 위해 도교를 활용하는 정책을 사용하면서 도교의 교단이 강화된 것이다.

도교를 국가 종교로 만든 사람은 북위의 구겸지였다. 불교가 혼란한 시대를 이용하여 <내세에서의 행복한 윤회>, <해탈>, <인과응보> 등을 강조하면서 사람들을 모은 것처럼 도교 역시 혼란한 시대를 이용하였다.

혼란한 시대를 피해 숨어 버린 한족들도 도교에서 주장하는 <무위자연>을 받아들였다. 특히, 죽림칠현 등 당대 사상가들은 유교의 형식주의가 무질서한 혼란을 가져왔다고 생각했다. 혼란한 난세에 인간의 인격은 존중되지 않는다. 이민족들의 세상에 현실은 너무 암담하다. 역사 속을 살아가는 나는 누구인가?

현실을 탈피하고 싶은 이들은 시간을 뛰어넘어 자연속에서 살아가는 신선을 동경하게 된다. 신비로운 자연에서 살아가는 고고한 존재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백성들 역시 현실을 탈피한 이상적 존재를 그리워하게 된다. 부처이든 노자이든, 이 암울한 세계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누구라도 상관 없지 않는가?

<신선의 뜻을 품은 도가인들 - 풍속화>

이민족의 왕들도 도교를 장려하였다. 북위의 구겸지는 유학과 다른 원리로 <도교>원리를 제시하였다. 중국의 황제가 <천명>을 받들어 즉위하는 것은 유교 방식이다. 고럼, 이민족인 북위의 왕은 <천명>이 없는가?

천명은 <도교>에서 찾으면 된다. 황제가 즉위할 때 하늘에 계신 지고지순한 신선인 <노자>가 축복해준다. 천상노군(노자)는 중국인의 아버지로서 중국의 천하를 이민족이 다스려도 된다는 것을 인정해준다. 이민족들을 <오랑캐>로 여기는 전통 유교 원리와 다르게, 도교는 중국을 다스리는 원리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남북조 시대 북조에서는 유교가 도교에 밀려 버렸다. 그럼 남은 것은 불교 뿐이다. 한참 교세를 확장하고 있던 두 종교는 이제 종교 천하통일을 놓고 한판 싸움을 시작해야 했다.

<도교 사원의 천존상>

2. 패자의 자리를 내준 유가

한나라 시기 국학으로 인정되던 유가는 혼란기에 힘을 잃었다. 전쟁이 지속된 어느 순간부터 모든 학문분야에서 유학은 제왕의 위치를 잃어간다.

삼국시대 초기 위나라의 조조는 유학을 벗어난 문학작품을 쓰기 시작한다. 어느 순간 진수의 <삼국지> 같은 작품이 등장하면서 역사학이 유학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불교가 들어오면서 간다라 미술의 영향을 받은 불상들이 조각되고, 미술과 회화 분야도 유학의 입지가 사라졌다. 천문분야는 도교로 넘어갔으며, 자연과학분야은 수학과 의학 등에게 밀리게 되었다.

모든 학문분야를 총괄하던 유학은 노장사상, 문학, 역사학과 대등한 위치로 전락하였다. 이 4가지를 위진남북조 4학이라고 하며, 불교학을 포함하면 5학이라고도 한다.

정치 원리에서 밀린 유학은 도교 세력에게 참패를 당했다. 특히, 북조에서 도교를 국교화하면서 유교적 통치원리까지 무너진 것이다. 유학은 도교를 미신이라고 몰아세웠지만 이미 힘이 없었다.

유학은 불교도 끊임없이 비판한다. 특히 승려가 출가하는 것은 충, 효를 강조하는 유학과 상극이다. 어찌 국왕과 부모를 버리고 속세를 떠난다는 것인가? 유학자가 보기에 불교는 인륜을 무너뜨린 오랑캐의 종교였다. 그러나, 그 비판도 힘이 없었다. 불교 자체가 국왕을 보호한다는 <호국>의 이념을 가진 시기이기에 유학자들의 비판은 공허한 것이었다.

또, 죽으면 내세로 향한다는 원리도 유교의 현실주의와 상극이었다. 현실 정치와 현실에서의 충효를 중요하게 여기며, 내세를 논의조차 하지 않는 유교 입장에서는 불교가 눈에 가시였다. 내세를 위해, 해탈같은 비현실적인 작업을 위해 어마어마한 불교 사원을 짓는 것은 얼마나 돈과 시간의 낭비인가? 유교주의자들 눈으로 볼 때, 불교 사원을 짓고 부처가 나라를 지켜준다는 믿음은 <덕치주의, 민본주의>와 상관없는 미친 왕의 행동인 것이다. 고대 하, 은 나라가 망할 때 얼마나 큰 사치가 있었고, 백성들의 고통이 있었는가?

내세문제는 불교와 유학의 <정신불멸론> 논쟁으로 격화되었다. 유교에서는 정신과 육체는 하나이고, 육체가 죽으면 정신도 죽기 때문에 내세란 없다고 말한다. 육체가 칼이라면 정신은 칼이 날카로운지, 무딘지를 표현하는 매개체이다. 칼이 부러지면, 칼이 날카로운지는 의미가 없어지며, 칼은 사라지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육체와 정신은 죽은 뒤 분리된다고 말한다. 정신은 육체와 다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이유는 육체가 있어서가 아니라 정신을 가지고 있어서이다. 정신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윤회를 통한 내세, 해탈은 현생을 사는 궁극적 이유가 된다.

그러나, 남북조 시대의 유학은 비판 이상의 현실적 조치가 없었다. 이미 불교세력에게 큰 소리를 칠 힘조차 없었던 것이다. 유학이 불교를 누르기 위해서는 수백년이란 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남북조 시대의 라이벌은 도교와 불교 뿐이었던 것이다. <정신불멸론> 논쟁에서 유학이 승리하기 위한 기다림은 남북조와 수, 당 나라를 넘어 송나라에 이르는 긴 시간이었다. 국가는 철학으로서 유학의 힘을 아직 인정했지만, 지배층들은 이미 불교나 도교를 신봉하고 있었다.

3. 1라운드 - 도교와 유교의 연합작전(1차 폐불사건, 466)

이제 본격적으로 도교와 불교의 쌈박질 라운드에 돌입해보자. 이 두 종교가 마찰을 빚기 시작한 것은, 격의 불교를 뛰어넘어 불교가 도교에서 분리되던 4세기 부터이다. 그 핵심은 부처와 노자 중 누가 우위에 있으냐는 지극히 원시적인 논쟁이었다.

먼저 도교의 도사들이 문제를 제기하였다. 초기 청담사상가들은 유교, 도교, 불교의 성인들은 모두 <도>를 체득한 사람이므로 근본적으로 같다고 말하였다. 여기서 시작한 논쟁은 <노자가 곧 부처다>라는 이론으로 발전하였다. 노자는 <도덕경>을 쓰고 <신선>이 되었다. 그런데, 노자는 신선이 되기 전에 인도가 가서 큰 깨달음을 얻었고, 부처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중국인>이 인도인을 교화한 것이며, <불교>의 근원은 <노자>라는 것이다. 노자와 부처 중 누가 먼저이냐를 <선후논쟁>이라고 말해두자.

불교와 도교라는 2가지 종교를 동시에 인정하여, <유학>을 대신하여 활용하려고 했던 이민족의 <북위> 왕조는 남북조 시기 내내 이 논쟁에 휘말리게 된다. 문제는 북위의 왕들이 불교와 도교라는 종교적 입장을 배려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어느 종교가 왕권 강화에 도움이 되는가, 또 정권을 잡은 귀족들이 어느 종교를 신봉하는가가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남북조 시대 - 북위와 남조의 송>

그 첫 번째 대결은 북위 <태무제> 때였다.

당시 남북조 시대는 이민족 왕조인 <북위>가 중국 대륙의 북부를 차지하고 있었고, 중국 왕조들이 정권을 바꿔가면서 대륙 남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북위 태무제 때의 재상 최호는 <중국인>이었다. 북위는 <선비족>들이 세운 왕조였지만, 전통 한족들을 어느 정도 우대하면서 마찰없이 정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한족 관리들은 <유학>을 신봉하였다. 그가 원한 것은 선비족들도 전통 사상인 <유학>을 받아들여 <유교적 덕치주의>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최호는 도교의 창시자 구겸지와 결탁하여 불교를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유교와 도교가 연합하여 불교세력을 제거하려고 한 것이다. 전혀 성격이 다른 유교와 도교는 불교라는 적 때문에 동맹을 맺은 것이다. 결국 북위 태무제 때 국가에서 불교를 막아 버리는 폐불사건(불교금지령)이 발생한 것이다.

1차 폐불사건으로 불교는 위축되었지만, 큰 타격을 받지 않았다. 유학자인 최호가 <국사필화사건>으로 처형되었기 때문이다.

최호 등 한족들이 편찬한 <국사>는 북위의 창업과정부터 모든 내용들을 적어두었는데, 그것은 모든 사실을 객관적으로 적어두는 <훈고학적 유교사관>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국사에는 북위 지배층들의 잘못과 치부까지 그대로 적혀있었다. 이것은 북위라는 선비족 국가에서 한족과 선비족 중 누가 우월한가라는 논쟁을 불러왔다. 이 대립은 최호 등 한족 관리들이 주살되어 끝나게 된다. 즉, 한족 귀족들보다 선비족과 선비족의 왕이 더 우월함을 보여준 것이다.

구겸지의 도교 창시로 도교가 <국교화>되고 불교는 위기를 맞았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불교는 다시 살아난 것이다.

4. 2라운드 - 도교와 불교의 선후논쟁(520)

1차 폐불 이후, 불교는 다시 도교의 라이벌이 되었다. 북위에서 한화정책으로 유명한 <효문제> 당시를 보면 더 뚜렷해진다. 효문제 스스로가 중국인들의 왕이라 칭하면서 중국식으로 모든 제도를 고치고, 선비족의 개혁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국왕은 유학의 이론을 공부하면서도 도교와 불교 문화를 더 장려하였다.

도교의 제단이 곳곳에 생겼다. 국왕이 불교문화를 장려하여 용문의 석굴사원이 건설되었다. 두 종교는 치열하게 교세 확장과 함께 이론적 논쟁을 다시 시작했다.

520년 두 종교는 또 다시 <선후문제>로 국왕 앞에서 직접 논쟁을 벌였다. 종교간의 논쟁이 아닌 국왕 앞에서의 논쟁은 큰 파장을 불러왔다. 국왕이 손 들어 주는 쪽이 우월한 종교로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도교 도사인 강빈은 노자가 부처를 제자로 삼아 교화했다고 주장했다. 승려인 담무외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두 명이 모두 자신의 주장을 위해 자료를 위조했다는 점이다. 강빈과 담무외는 각각 노자와 부처의 기록을 위조해 효명제 앞에 자신들이 정당함을 주장했다. 효명제는 강빈의 자료가 위조되었다는 것에 분노홰 강빈을 유배보내 버렸다.

이 논쟁으로 불교가 도교보다 우위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이 문제가 논리적으로 해결되지 않고 국왕의 판단으로 해결되었기 때문에 도사들은 기회만 닿으면 불교에 흠집을 내려고 했다.

5. 3라운드 - 도교의 반발(2차 폐불사건, 574)

568년, 북주 무제기에 다시 <선후논쟁>이 불붙는다. 그러나, 이 때의 국왕은 단순히 불교 편을 들지 않았다. 유교와 도교가 침체되자 승려의 숫자가 증가했고, 이것은 국가적으로 낭비였다. 승려는 일하지 않는 자, 세금을 내지 않는 자였다. 또, 사원이 많아지는 것도 국가 운영비에 타격을 주었다. 종종 승려들이 세력화하여 횡포를 부린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도사들은 다시 <부처는 노자의 제자>라고 주장한다. 도사인 위원숭과 장빈은 종교의 순위를 정하였다. 한족의 지침인 유학이 1위, 도교는 2위, 노자의 제자인 부처가 3위가 된 것이다.

당시 종교계에서 큰 세력을 가지고 있던 불교는 반발하였고, 황제에게 부당함을 건의하였다. 사회적으로 세력화한 불교를 규제하려고 한 무제는 도사들의 말을 받아들여 불교를 폐불시켰다. 그러나, 도사들도 제 발을 밟았다고 해야 할까? 도교 역시 사회적으로 무시 못할 종교 세력으로 왕권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었다.  무제는 불교를 폐지시킨 후, 도교마저 폐지시킨다.

불교와 도교를 막론하고, 종교인들을 일하지 않고 논쟁을 하는 자들로 규정하였던 것이다. 오로지 철학으로서 유학만을 남긴 것이다. 그러나, 당시 뿌리를 깊게 내린 종교를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무제가 죽은 뒤 불교는 더욱 발전하게 된다.

6. 위진남북조 시대의 불교가 걸어간 길...

위진남북조 시대의 불교를 정의하자면, <전파된 불교에서 독자적 불교로 나아간 길>이라고 볼 수 있겠다.

처음에는 불법의 뜻도 몰라서 노장사상의 이론에서 불법의 뜻을 해석하곤 했다. 그러나, 구마라집 등이 인도 불경을 해석하고, 도안과 혜원 등이 불교의 참뜻을 전파하기 시작했으며, 법현이 인도에 구법여행을 떠나는 등 승려들의 노력으로 불교의 참뜻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양한 학파들이 생겨나 불교 이론이 논쟁으로 발전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 불교는 <호국불교>였다. 위진남북조라는 유례없는 혼란기에 <불교>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왕권>과의 결탁이 필요했다. 국왕의 보호로 불교는 성장하였다. 그러나, <호국불교>는 양면의 칼이었다. 국왕이 불교를 버릴 때, 불교는 대책없이 탄압당했다. 또한, 왕권에서 자유롭지 못한 불교는 불교의 참뜻을 전파하기에 부족하였다.

여러차례의 폐불을 겪은 불교가 택한 선택은 무엇일까? 점차, 정치에서 독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북위> 정권과 밀착했던 북조 불교는 그런 점을 뼈져리게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 국가 정권의 영향력을 적게 받았던 한족 정권의 <남조 불교>는 큰 탄압이 없었다. 불교가 귀족의 보호를 받았지만, 국가 이념에 정면으로 대항한 적도 없었다. 될 수 있으면 독립적인 종파를 만들어 <이론>을 발전시키려고 한 것이다.

더 중요한 점은 <남조 불교>는 북쪽과 달리 <도교> 영향력이 적었다는 것이다. 구겸지가 창안한 <도교>는 북위 왕조에서 시작되었다. 도교와 피터지는 싸움을 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남북조 시대를 거치면서 불교는 점점 <거대한 사회세력>으로 성장한다. 정토종, 삼론종, 천태종, 율종, 선종은 5대 종파로 성장하였고, 담란의 정토종은 민중 사회로 스며들었다.

민중 사회에서는 읍사가 생겼다. 원래 읍은 북조, 사는 남조의 용어로 <불교를 믿는 마을 단체>를 말한다. 후대에는 합쳐서 읍사로 표현한다. 마을 단위로 불교 단체가 생기고 불상을 만들었으며, 스님들이 거주하였다.

그러나, 불교는 크리스트교와 같은 교구제로 운영하지 않았다. 행정구역과 종교구역을 일원화하지 못했던 것이다. 국가의 행정구역과 실제 마을민들이 느끼는 공동체 단위가 일치하지 않았고, 오랜 전쟁으로 임의로 구성된 공동체가 많았던 점도 있다. 또, 불교단체가 거대한 장원을 운영한다고 해도 그것과 행정구역은 별도였다. 불교 사원 자체가 수양과 깨달음을 위해 마을과 약간 떨어진 곳에 세워진 것도 교구제가 성립할 수 없었던 원인이었다.

길었던 분열의 시대는 끝이 났다. 수나라에 의해 중국 대륙이 통일된 것이다. 이제 통일된 시기의 불교는 어떤 길을 걷게 될까? 수, 당 시대에도 불교와 도교의 싸움은 계속될 것이며, 불교는 독자적인 발전을 계속할 것이다. 이 이야기를 몇몇 인물들로 파악해 보도록 하자.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필자 : 히스)

 

   - 불교사에 대한 이해 : 참고할 만한 책들

처음 만나는 불경 이야기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김장호 (심포지움, 2008년)
상세보기

한 권으로 읽는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우더신 (산책자, 2008년)
상세보기

중국불교사 2:수용기의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카마타 시게오 (장승, 1993년)
상세보기

만화로 보는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히로 사치야 (황금가지, 2002년)
상세보기

불교사전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용하 (불천, 2008년)
상세보기

불교 교양으로 읽다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화령 (민족사, 2007년)
상세보기

불교교양입문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박영옥 (경덕출판사, 2007년)
상세보기

불교가 좋다(개정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가와이 하야오 (동아시아, 2007년)
상세보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6화. 격의 불교 이야기...

1. 중국 불교는 청담에서 비롯되었다.

자, 이제 본격적인 중국 불교 이야기를 해보자. 중국에 불교가 처음 전파된 것은 후한 시대이다. 지난 장에서 설명했듯이 쿠샨 왕조의 적극적인 확장 정책과 외교정책으로 대승 불교가 각지에 전파되었다.

그러나, 중국 한나라에서의 불교는 <교양> 철학 수준이었다. 중국 <한>나라는 가장 전통적인 중국 왕조이다. 중국 민족은 자신들이 <한족>이라고 믿고 있으며, 중국 전통 문화의 원류는 <한나라>에서 기반이 잡혔다고 생각했다. 가장 전통적인 <유학>도 한나라 시기에 완성되었다. 한무제가 <유교>를 국교화하고, <한자>의 정형틀을 완성시킨 것이다.

불교가 한나라에 전파되었지만, 그것은 외국 철학의 일종일 뿐이었다. 지배층이 교양을 쌓기 위해 읽어보는 수준이었을 뿐, 중국 지식인들은 관리 임용을 위해 <유학>을 익혔다.

그럼, 불교가 주목받기 시작한 시기는 언제부터일까?

후한이 멸망할 무렵부터이다. 중국 후한시대는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고, 원소, 조조 등 호족세력들이 판치는 무법천하였다. 백성들은 길고 긴 전쟁의 시대로 막 들어선 것이다.

위, 촉, 오의 삼국시대부터 남북조 시대의 분열까지 길고 긴 분열의 시대는 시작되었다. 서로 치고받고 싸우는 시기가 되기에 윤리적인 측면이 강한 <유학>은 왕따당하기 시작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위진남북조 시대의 중국 국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위진남북조 시대의 국가 먹이사슬>

혼란한 시기에 사람들이 찾는 종교는 <내세>라던가 <자연>을 강조하는 종교였다. 사람들은 유학이 아닌, 도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한나라가 망한 뒤, 실권을 잡은 것은 삼국 중 조조의 <위>나라였다. 위 나라는 강력한 법치주의에 의해 국가 통일을 이루려고 했다. 하지만, 정치가가 아닌 일반 학자, 사상가들은 <도교>에서 혼란의 원인을 찾으려고 했다.

당시 도교는 혼란의 원인을 <인간의 욕심>으로 보았다. 서로 정권을 잡으려고 하는 탐욕자들이 싸우고 죽이는 탓에 백성들만 전쟁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지 않는가?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무엇이란 말인가?

위나라의 학자들은 도가사상의 원리인 <자연으로 돌아가자>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하였다. 이렇게 노자, 장자 등의 철학에서 현실의 문제점을 발견해보려고 노력하는 것을 <현학>이라고 한다.

<현학>은 노자와 장자의 철학에서 우주의 근본 원리를 규명하려는 학문이다. 우주의 근본 원리인 <도>를 <현>이라고도 부르기 때문에 현학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현학은 하안(190-249), 왕필(226-249) 등에 의해 전개되었다.

하안과 왕필 등의 사상가들은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문제점이 무언가를 따지려고 했는데, 이런 대화를 <청담>이라고 한다. <청담>이란 말 그대로 <깨끗한 세계의 담론>이란 뜻이다. 위나라에서 시작된 이들의 <대화>를 역사에서는 <정음시대의 현학>이라고 부른다. 하안은 노장사상으로 논어를 해석하였고, 왕필은 노장사상으로 주역을 해석하였다고 한다.

그럼 이들의 대화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간단하다. 도학에 나오는 사상들이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는지 따져보는 것이었다. 도학의 문구들은 너무나 심오하다. 노자의 <도덕경>은 서양 학자들도 인정하는 동양 최고의 학술서이다. 노자는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무위자연>, 국가는 작을수록 좋다라는 <소국과민>, 가장 행복한 삶은 자연에서의 삶이라는 <자연합치> 등을 주장하였다.

노자의 사상에 맞춰서 모든 사상을 재해석하는 것이 <현학>이다. 유교사상은 현실사회의 직접적인 문제와 인간 윤리를 주로 다룬다. 그러나 후한이 망한 뒤의 세상은 무법 천지이다. 인간 윤리는 이제 <전쟁없는 사회>라는 틀에서 다시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청담 사상가들은 현실의 윤리보다는 <전쟁>의 참혹함, 사후세계는 어떤 것일까라는 내세에 대한 상상, 삶과 죽음과 인간관계에 대한 탐구에 더 집중한다.

그런데, 생각하면 할수록 답은 한가지였다. 대화를 나누던 청담 사상가들은 <전쟁>에 골몰하는 국가를 비판하기 시작하였고, 점점 현실과 떨어져 중국 전통 윤리를 비관하기 시작한다. 자, 그럼 청담 사상가들은 암울한 현실을 벗어나 노자의 세계로 가기 위한 방편으로 어떤 철학을 찾았을까?

불교에 그 답이 있었다. 불교는 만민에 대한 구원, 내세에 대한 윤회와 열반 사상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다는 <공> 사상을 강조하여 <허무주의>를 보여주면서도, 스스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 혼란한 시기에 딱 맞다. 얼마나 맞춤형 철학인가?

2.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해 드립니다.

혼란한 위진남북조 시기의 중국인들은 지긋지긋한 전쟁에 질려있었다. 삼국시대, 위의 조조, 서진시대, 5호 16국의 이민족 시대, 남북조의 분열시대.... 길고 긴 전쟁의 역사는 훗날 <수>나라가 통일국가를 세울 무렵에야 끝나는 것이다.

이 불안한 시기에 불교는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인간은 죽은 뒤 자신의 업보에 의해 <윤회>를 하게 된다. 지금 현상에서의 고난은 전생에서의 죄를 씻는 과정이다. 그 업이 끝나고 현생에 덕을 쌓으면 내세에는 행복한 날이 기다리고 있다. (업설) 지금 전쟁을 일으킨 자들은 많은 죄를 지은 것이고 생이 끝나면 죄를 받을 것이다.(인과응보론) 절망에 빠진 백성들에게 얼마나 딱 맞춤인 철학인가?

그렇다고 지배층과 국가가 불교를 탄압한 것도 아니다. 한나라가 망하고, 조조 일가의 시대가 끝난 뒤 중국은 5호 16국이라는 이민족 사회를 경험하게 된다. 이민족의 왕들은 <유학>에 관심조차 없었다. 오히려 중국인들에게는 생소한 <불교>가 이민족 취향에는 딱 맞았다.

이민족 왕들은 불교를 주술적 방편으로 이용하였다. 흉년이 들면 승려가 주술을 펼쳐주었다. 질병과 재난은 불제자들의 노력으로 극복될 수 있다고 믿었다. 큰 전쟁을 앞두고 학식이 높은 승려들에게 전쟁의 승패를 묻기도 하였다. 또, 인도의 아쇼카 왕이 했던 것처럼 왕 자체가 불법을 수호하는 <불교의 수호신>임을 자청하였다. 왕이 곧 불교의 신이라는 이념은 불교를 믿는 백성들을 한 마음으로 묶어줄 수 있었다.

왜 불교가 민간신앙이나 주술신앙, 국가 호국 불교로 전락하게 되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혼란한 이 당시에는 불법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불교는 왕권 강화를 위한 <사상>으로 충분했다. 혼란기의 각국 지배자는 큰 사찰과 어마어마한 불상, 귀따가운 큰 법회를 열어가면서 왕권이 강하다는 것을 과시하였다.

어렵고 험난한 시기에 불교의 원래 뜻이 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해석하든, 종교는 현실에 도움만 주면 되지 않는가?

3. 대충 때려맞춰서 이해한 격의 불교

초기 청담 사상가인 왕필은 유교, 도교, 불교는 결국 같은 것이라고 말하였다.

왕필은 도교의 기준에 맞춰 다른 종교의 특징을 규정하였다. 노자와 장자가 도가 사상을 창시하면서 우주의 근본 원리와 인간의 행동 가짐을 <도>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공자 역시 큰 <도>를 깨우친 사람이고, 석가모니도 보리수 밑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모든 성인들이 결국 <도>를 깨달았으니, 모든 믿음은 하나가 아니겠는가?

왕필이 주장한 <유,불,도교의 3교 일치설>은 지둔(314-366)에 의해 구체화 되었다.

지둔은 불교 스님이다. 왕필이 도교 기준으로 종교를 통합했다면, 지둔은 불교 사상을 중국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였다.

예를 들어보자. 중국 전통 사상은 <리기론>이다. <리>란, 우주의 근본 질서나 계절을 의미하는 불변의 진리를 말한다. 지둔은 이렇게 말한다.

<리>가 절대불변의 원리인 것처럼 불가에서 말하는 반야(지혜>는 영원 불변의 <깨달음>이다. 즉, <리>는 불가의 <절대적 깨달음>을 말한다.

다른 것도 대입해볼까?

불가의 <공>사상은 <만물은 돌고 돌아 그 형체를 알수 없다>는 뜻이다. 보이는 것은 곧 사라지고, 사라진 것은 다시 생겨난다.(색즉시공 공즉시색) 이 심오한 원리를 이해하기 쉽게 도교의 <무>로 설명한다. 사라진 것이니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부처가 <열반>한다는 것은 도교의 <무위>로 해석한다.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하는 보살들을 도교의 <도>로 해석한다. 불가의 <진리>는 도교의 <근본>으로 해석해 버린다.

전쟁에 지친 사람들에게 얼마나 간편한 해석법인가?

이러한 불교 이해 방식을 격의 불교 방식이라고 한다. 격의란, 불교의 난해한 개념들을 중국 전통 사상에 이미 존재하는 비슷한 개념들을 인용하여 설명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쉽게 이해된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불교의 원래 뜻을 왜곡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 방법을 중국 곳곳에 알리고 다닌 이는 축법아였다. 그러나, 4세기 이후 불교의 승려들은 축법아의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한다.

격의 불교는 불교의 참 뜻을 알 수 없기에, 지배층들이 마음대로 해석하여 불교를 정권의 하수인으로 만든다. 또, 일반 백성들은 토착신앙과 신비주의를 불교와 구분하지도 못하고 멋대로 불교를 이해한다. 이것이 과연 정상적인 것인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5-6세기 남북조 시대의 대립상황>

4. 불도징을 초빙하다.

불도징은 위진남북조의 혼란이 시작된 초기 인물이었다. 그는 서북인도와 관련된 구자국이라는 곳의 은거하는 불학자였다. 그가 70여살이 되었을 때, 중국의 백성들이 <위진시대>의 혼란기에서 희망없이 산다는 말을 듣고, 제자들과 중국으로 건너왔다. 드디어 불교가 뭔지 제대로 알고 있는 정통 <인도산 스님>이 중국을 방문한 것이다.

그런데, 불도징은 <불교의 참뜻>을 전파하지 못하였다. 당시는 혼란중에 혼란기인 5호 16국 시대였다. 5개의 이민족이 16개 국가를 세워 중국 대륙은 어딜 가나 전쟁 뿐이었다. 불도징은 후조 왕국의 석륵, 석호 부자에게 불법을 설파하였는데, 석륵은 불교를 아주 우습게 보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3-4세기 : 5호 16국 시대의 후조 왕국 위치>

사용자 삽입 이미지

<5호 국가들의 민족 분포와 국가 창업자>

불도징은 불교 교리에 대한 철학 강의를 했지만, 석륵은 시큰둥했다. 결국 불도징은 교리로서 불법을 보여주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겼다. 불도징은 주문을 외워서 항아리에서 연꽃이 나오게 하는 등 신비로운 주술로 석륵을 감동시켰다. 결국 이 당시 불교 수준은, 뭔가 위대한 부처의 힘을 보여줘야 비로소 믿을까 말까 한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불도징은 큰 뜻을 품고 중국 대륙에 왔지만, 단 한권의 책도 쓰지 못하였다. 이민족의 왕들이 원하는 건 신비로운 주술과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지에 대한 궁금증 뿐이었다. 스님과 주술가, 점쟁이를 구분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나마 석륵의 아들, 석호는 이 신비로운 스님을 존경하였다. 불도징은 석호에게 <국왕>이 해야 할 일을 설교하면서 중국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였다.

1. 살행을 금지하고 죄없는 사람을 살해하지 말 것
   2. 포학한 행동을 피하고 자비심을 가지고 보시할 것
   3. 부처를 섬기는 데 있어 깨끗한 마음과 자긍심을 가지고 해야 할 것

불도징은, 인도에서 건너온 선구자라는 것 외에 크게 남긴 것이 없다. 중국 대륙에 자리잡은 이민족들은 불법이 뭔지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중국 불교사를 바꿀 만한 거목들을 제자로 키웠다. 그들의 이름은 도안, 혜원 이였다.

중국 대륙에서는 부처의 참뜻이 제대로 전해질 수 있을까?

다음장에서는 도안부터 시작되는 <불교 알리기> 프로젝트에 대해 이야기 해 보겠다. 중국 스님들이 제대로 된 불교를 알리고자 했던 노력은 수백년 동안 계속된다.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필자 : 히스)

 

   - 참고할 만한 책들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중국여행지 50
카테고리 여행/기행
지은이 조창완 (랜덤하우스코리아, 2008년)
상세보기

만화로 보는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히로 사치야 (황금가지, 2002년)
상세보기

중국불교철학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팡리티엔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출판부, 2006년)
상세보기

부처님 나라(1 인도 중국편)(윤승운의 불교만화)
카테고리 아동
지은이 윤승운 (동쪽나라, 2003년)
상세보기

중국의 종교와 사상(보충교재)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편집부 (예지각, 2008년)
상세보기

불교사상사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양훼이난 (정우서적, 2008년)
상세보기

하룻밤에 읽는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소운 (랜덤하우스코리아, 2004년)
상세보기

한 권으로 읽는 불교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우더신 (산책자, 2008년)
상세보기

거침없이 빠져드는 역사 이야기: 불교 편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황푸차이 (시그마북스, 2008년)
상세보기

2500년 간의 고독과 자유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강성률 (형설, 2005년)
상세보기

영원한 자유:성철스님법어집1집6권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성철 (장경각, 1988년)
상세보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5화. 불교의 외침 - 이젠 인도를 떠나고 싶어요 ~

1. 인도에 불교가 없다?

불교의 종주국은 인도이다. 그러나, 기원후 5세기가 지나고 인도에서는 더 이상의 불교 논의가 진행되지 않았다. 오히려 티벳이나 중국, 동남아시아에서 불교의 교리 논쟁이 활발하게 펼쳐진다. 특히, 4세기 이후, 불교가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 지역은 중국과 한반도 등 동아시아이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석가의 가르침이 재정리되어 대승 불교로 정립된 인도의 불교는 아시아 각지로 전파되었다. 그러나, 정작 인도 본토에서는 불교의 힘이 사라졌다. 그 이유는 새로운 정권의 성립 때문이다.

기원전 5세기 마가다 왕국이 불교를 보호한 이래, 기원전 4세기 마우리아 왕조에서는 <왕이 곧 부처의 화신이다>라는 사상으로 불교를 옹호하였다. 대표적인 왕이 스스로 전륜성왕이라고 말하였던 아쇼카 왕이다.

기원후 3세기 까지도 인도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왕조들은 불교를 인정하였다. 기원 전후 인도 남부에 브라만교를 신봉하는 안드라 왕조가 있었으나, 인도 중북부의 대부분 지역은 불교 문화와 간다라 미술을 인정하는 쿠샨 왕조가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 쿠샨 왕조는 쿠샨인(이란인) 계통의 왕조로 다양한 종교를 모두 인정하였다.

<쿠샨 왕조의 불상>

<쿠샨 왕조의 전성기>

쿠샨 왕조의 카니슈카 왕(2c)은 중국-이란-인도를 연결하는 헬레니즘 상권을 장악하면서 상권과 통행세를 받았고, 국경을 넘나드는 불자들을 보호하였다. 특히 동아시아에서 서아시아로 이르는 비단길과 인도를 거치는 바닷길은 불교 전파 경로와도 일치했다. 헬레니즘의 다체로운 문화는 대승 불교의 확대를 촉진하였고, 그 결과 중국, 한반도, 인도에 이르기까지 불교가 널리 전파되었다.

그러나, 4세기 말, 인도의 상황은 급변한다.

브라만 교를 신봉했던 아리아 인들의 강력한 국가가 다시 등장한 것이다. 갠지스 강 유역에서 찬드라 굽타가 건국한 굽타왕조는 쿠샨 왕조를 멸망시키고 북인도 전체를 통일하였다. 그리고, 아리아인 우월주의를 표방하며 이민족들을 추방하기 시작한다.

투르크인, 샤카부족(석가부족), 이란인(쿠샨인)은 아리아인들의 세상에서 설 곳이 없었다. 이제 세상은 고대 브라만의 후손들이 아리아인의 세상이 되었다. 그리고, 아리아인들의 고대 사상의 복구를 꿈꾸며 강력한 인도 민족주의를 주장하기 시작한다.

이민족과 혼혈족, 반브라만 종교는 인도에서 추방되었다.

<4세기 굽타왕조의 영역>

그리고, 고대 브라만의 베다 문학을 재정리 하여 산스크리트 문학이 등장한다. 브라만교에서 유래한 힌두교가 인도 전통 민족 종교가 되었고, 인도인의 율법은 <마누법전>으로 정리되었다. 고대 브라만 민족의 위대함은 <대서사시>로 편집되었다. 그것이 유명한 힌두교 경전인 <마하바라타>, <라마야나>이다.

대서사시는 고대 신인 브라만을 찬양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비슈누, 시바 등 고대적 요소를 갖춘 전통신을 아리아 부족의 현실에 맞게 재편한 것이다. 그리고, 힌두의 신은 인도인을 괴롭혔던 모든 이민족을 물리칠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대세는 <불교>가 아닌 <힌두교>였다.

그럼, 그동안 불교는 뭘하고 있었을까?

불교의 교리는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었지만, 강력한 굽타왕조에 맞설 힘은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특히 인도 북부의 불교 교단들은 이미 큰 싸움으로 지쳐있던 상태였다.

마우리아 왕조에서 쿠샨 왕조까지 이어지는 동안 불교는 북부 지역의 강대국들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반면, 불교 사원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북방 이민족들과 끊임없는 투쟁을 하였다. 특히, 쿠샨 왕조 시기 불교 교단이 주적으로 삼았던 이민족은 <훈족>이었다.

중국의 진시황제가 만리장성을 쌓으면서 중국에서 밀려난 훈족들은 끊임없이 인도 북부 지역을 약탈하였다. 이 훈족들은 동으로는 중국 북부로, 서로는 게르만 사회로, 남으로는 인도로 진출하여 기원후 세계사의 여러 지역에 영향을 준다. 인도의 고대 여러 왕조들이 이 훈족의 침입으로 멸망하였고, 서유럽에서는 서로마의 멸망을 이끌었던 게르만족의 이동까지 훈족의 영향력이 미쳤다.

그나마, 이란인이 세운 쿠샨 왕조가 기원후 4세기 무렵까지 버틴 것은 왕조를 지지했던 불교 교단의 협조 때문이었다. 그러나, 쿠샨 왕조는 망했고, 불교 교단은 훈족과의 투쟁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이제 더 이상 불교는 없었다.

힌두교의 복고주의는 불교 사상을 원시 브라만 주의로 돌려놓았다. 수드라 계급에게 평등은 더 이상 없었다. 바르나 제도의 계급 차별은 확고했고, 모든 직업과 주거, 결혼까지도 계급별로 차등을 두었다. 마누법전은 힌두교를 믿는 아리안 민족만을 위한 법이었다. 하층민에게 <해탈>의 기회는 없었다.

아잔타 석굴 : 인도양식과 이전 양식들이 결합한 인도적인 양식. 동아시아에도 많은 영항을 주었다.

2. 불교는 <밀교>가 되어간다...

아리아 민족 우월주의를 내세운 굽타 왕조는 7세기가 되기 전에 멸망한다. 7세기 무렵, 불교를 옹호하는 바르다나 왕조가 출현하면서 중국 불교와 우호관계를 맺기도 하지만, 대부분 인도의 작은 독립국들은 힌두교를 옹호하였다. 힌두교가 지배층의 종교로서 백성들을 통제하기 편했기 때문이다. 7세기 대부분의 국가에서 불교는 힌두교의 교리에 포섭되어 그 의미를 잃어갔다.

인도에서 대승 불교는 점차 <밀교>가 되었다.

힌두교를 믿는 아리아인의 탄압으로 종교 집회는 비밀스럽게 열렸다. 불교도들은 교리를 찾는게 아니라 종교 자체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 점점 종교의 교리는 희박해지고, 절대자나 유일신을 찾는 신비주의 종교로 변질되었다.

초기 논리적인 불교에서 볼 수 없었던 주술 신앙도 등장한다. 미륵이 바람과 불, 홍수를 몰고와 세상을 정화시킨다는 믿음이 등장한다. 또 민간 신앙과 불교의 구분이 사라지면서 민간에서 믿었던 수많은 신들이 불교 안에 들어오게 된다.

그나마, 이런 변질된 <불교>조차 7세기 이후 사라져간다. 7세기 이후 인도에 마호메트의 이슬람교가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이슬람교의 기본 사상은 <평등>이다. 계급간 <차별>을 강조하는 힌두교와는 상극이었다. 하층민들은 <차별>을 강조하는 힌두교가 싫어서 불교를 선택했지만, 이슬람교가 들어오자 이슬람으로 개종하기 시작한다. 어짜피 똑같은 <평등>을 주장하는 종교라면, 힘있는 <이슬람 정복자>들이 숨어지내는 불교도보다야 훨씬 낫지 않겠는가?

10세기 이후 본격적인 이슬람 세계가 된 인도는 또 한번 문화적 격동을 경험한다. 힌두교 사원과 불교 사원은 동시에 파괴되었다. 이래 저래 불상은 정권의 놀림감이 되었다. 16세기 무굴제국이 성립했지만, 무굴 제국은 전통 아리아 종교인 힌두교와, 하층민 종교인 이슬람을 융합시키기에 급급했다. 불교가 설 자리는 없었다.

21세기 현재, 인도에서 불교도의 인구는 전체 인구 비율로 보았을 때 너무나 미미하다. 불교의 종주국은 대승 불교가 정립된 5세기 이후, 한번도 주도권을 잡지 못하고 힌두교와 이슬람교에게 자리를 내어 주었던 것이다.

3. 불교의 최강국으로 자리매김한 중국 불교

5세기 이후, 불교의 종주국 자리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넘어갔다. 중국은 유가, 법가 등 다양한 사상체계가 이미 정비되어 있었고, 굳이 불교가 아니더라도 국가와 사회를 운영하는데 지장이 없는 선진국이었다.

중국과 인도는 전혀 이질적인 문화권이었다. 중국어는 한자(표의문자)이고, 인도어는 범어(표음문자)이다. 중국인들은 유가, 법가 사상등 국가와 인간의 사회적 현상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려는 성향을 가졌다. 반면, 인도의 불교는 인간의 인지구조를 <분석>하려는 특징을 가진 사상이었다. 인도는 수많은 소왕국이 분립하면서 생성과 멸망을 반복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반면, 중국은 춘추전국시대를 제외한다면, 비교적 통일 국가체제를 유지해왔다.

도대체 어떤 과정을 통해서 불교가 중국 사상계를 장악해 버린 황당한 일이 발생한 것일까? 그리고, 중국은 자신과 다른 이 문화와 사상을 어떻게 중국식으로 바꿔 버린 것일까?

인도와 중국이 불교라는 문화를 공유하게 된 최초의 계기는 헬레니즘 문화 때문이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그리스에서 인도에 이르는 광활한 문화권을 만들고 떠난 뒤, 인도는 쿠샨 왕조 카니슈카 왕이 서역 지배권까지 확보하게 되었다. 쿠샨 왕조 자체가 이란계 왕조였던 만큼, 쿠샨 왕조는 동서 교역에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쿠샨 왕조는 동아시아의 중국, 한반도부터 서아시아의 페르시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무역을 전개했는데, 그 과정에서 대승 불교가 아시아 곳곳에 전파된 것이다. 특히, 쿠샨 왕조와 상업을 하던 실크로드 중간 중간의 국가들은 불교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중국의 한 왕조까지 불교가 전파된 것이다. 또, 당시 인도와 중국간 직접 교역로는 바닷길이었기 때문에 <남방 바닷길>을 통해서도 불교 경전이 한 왕조에 전파되었다.

그러나, 불교를 처음 접한 중국의 한족들은 불교를 사상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없었다. 중국의 한나라는 한무제라는 강력한 왕이 <유학>을 국가 사상으로 공포했던 나라였다. 한 왕조에서 출세하기 위해서는 유학을 열심히 공부한 뒤, <구품관인법>이라는 관리 임용에 채용되어야 했다.

한 나라에서 불교는 중국 전통 사상인 도교에도 밀렸다. 한 나라의 지배층은 고품격 품위 유지 사상으로 도교의 <황로사상>을 숭배하였다. 황로사상은 노장사상에서 말하는 <무위자연>의 철학을 지배층의 교양철학으로 받아들인 것을 말한다.

처음 불교를 접한 한나라의 지배층은, 불교를 도교와 같은 교양 철학으로 생각했다. 도교에서 <자연으로 돌아가라, 백성들의 생활을 살펴라>라고 말한 것은 한나라 지배층의 우아한 집권 철학이었다.(물론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고, 말로만 생색내기 위한 교양 철학이었지만....)

불교 역시 같은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대승 불교의 <공> 사상을 접한 한나라의 지배층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공이란, 아무 것도 없는 허무함이겠구나. 아무 것도 없는 상태는 노자가 말한 자연으로 복귀한 상태이다. 공이란 곧, <없다>는 것이 아닌가? 공이란 것이 태초의 허무함이라면, 곧 자연 상태가 아니겠는가? 석가의 가르침은 노자의 가르침과 같은 것이구나....

결국 한나라 지배층이 생각한 불교는 도교와 같은 것이었다. 현실 상태에서 필요한 것은 유학이었고, 교양이나 취미로 알아야 할 것이 도교나 불교 따위였던 것이다. 교양이나 취미는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다. 따라서 도교와 불교는 하나의 패키지 세트로 묶여서 교양철학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심심할 때 생각해보는 교양 철학이 어떻게 유가 사상과 맞먹는 거대한 사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일까? 거기에는 수많은 철학자들의 노력이 있었다. 자, 그럼 그 철학자들 이야기를 한번 시작해볼까?

 

   - 참고할 만한 책들

인도사
카테고리 대학교재
지은이 조길태 (민음사, 2000년)
상세보기

대월지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오다니 나카오 (아이필드, 2008년)
상세보기

불교사의 전개(만다라총서 3)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도변조광 (불교시대사, 1992년)
상세보기

단숨에 읽는 세계사
카테고리 청소년
지은이 역사연구모임 (베이직북스, 2007년)
상세보기

청소년을 위한 동양미술사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지은이 이석원 (두리미디어, 2005년)
상세보기

근본불교와 대승불교의 회통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한갑진 (한진출판사, 2007년)
상세보기

인도사 108 장면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박금표 (민족사, 2007년)
상세보기

이야기 인도사(개정판)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김형준 (청아출판사, 2006년)
상세보기

인도사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정병조 (대한교과서주식회사, 2005년)
상세보기

고대 인도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마릴리아 알바네스 (생각의나무, 2003년)
상세보기

인더스 문명과 인도사 ( 역사만화 18)
카테고리 아동
지은이 허순봉 (효리원, 2002년)
상세보기

유네스코 세계유산(아시아.오세아니아편)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편집부 (중앙M&B, 2000년)
상세보기

중국불교철학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팡리티엔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출판부, 2006년)
상세보기

중관불교와 유식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일지 (세계사, 2005년)
상세보기

논쟁으로 보는 불교철학(연구총서 14)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이효걸 외 (예문서원, 1998년)
상세보기

중국 그 거대한 행보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레이 황 (경당, 2002년)
상세보기

중국철학사상사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김백현 (차이나하우스, 2006년)
상세보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동아시아 불교 전파사 - 4장. 위진남북조에 불교가 유행하다

네 번째 이야기에서는 이제 중국으로 넘어간 불교에 대하여 이야기하겠습니다. 인도 불교는 4세기 까지가 주요 흐름이었고, 중국 불교는 2세기부터가 본격적인 불교시작부분입니다.

1. 왜 위진남북조에서 불교가 유행했는가?

중국에 불교가 전파된 것은 전한 말 실크로드를 통해 서역에서 흥미로 들어온 것이 기원입니다. 그러나 한나라의 불교는 한무제의 <유교국교화> 정책에 의해 억압받았고, 후한이 망할 때까지 불교사상이 중국에서 제대로 이해된 적이 없었습니다.

실제 중국에서 외래 종교인 불교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이민족 왕조인 5호 15국 시대 부터입니다. 하지만, 불교에 대한 관심은 학문적인 심오한 철학에 대한 것이 아니였고, 단지 혼란한 사회상에 불교의 <윤회, 내세>라는 부분이 중국인들에게 공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위진남북조 시대의 치열한 혼란은 중화사상이 쇠퇴하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중화의 이념은 이제 <이민족도 중화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호한병립의 사상으로 바뀌었고, 어떤 이민족의 종교나 관습도 국가에 따라 인정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

불안한 난세에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도 모를 불교의 교리에 흠뻑 빠져들기 시작합니다.

불교의 윤회삼생사상은 <죽은 뒤 내세>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며 고통스런 현실의 도피처를 제공합니다. 지금 현세에서의 고난과 나의 수행이 곧 전생에서 내려온 것이자, 내세에 영향을 주어 <3생>이 결정된다는 이론은 <혼란기의 절망감과 죽음의 공포>에서 백성들을 구원하기 딱 좋았던 것이죠. 윤회, 삼생, 인과응보론은 곧 <업>사상과 연결되어 사람들에게 환영받게 됩니다. 위진남북조에서는 불교, 도교 등의 신비주의적 사상이 크게 유행한 이유가 여기 있었던 것이죠.

2. 호국불교로서 자리잡은 중국의 초기 불교

또 하나 불교 유행의 이유는 바로, 인도에서부터 전개되어 온 <호국불교>사상의 영향입니다. 아쇼카왕의 <전륜성왕>사상으로 대표되는 불교의 호국 개념은 <국가통치이념>으로 딱 맞아떨어졌습니다. 중국 대륙이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각국의 왕들은 불교의 주술적인 측면을 최대한 이용하여 백성을 현혹하고, 왕법이 곧 불법이라는 이론을 내세워 백성들을 통치하는 이데올로기로 불교를 활용한 것입니다.

인도에서의 불법은 카르마(정법관념)로 이루어집니다. 샤크라란 세속세계와 불법세계를 연결하는 고리란 뜻인데, 이 고리는 현실과 이상을 연결해주기는 하나, 서로간의 간섭은 배제하는 고리였습니다.

쉽게말하자면, 카르마는 모든 사람들에게 생활의 기준이자, 정치의 기준이고, 인간사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고리입니다. 하지만, 국왕권이 이 카르마의 법을 변형할 수는 없고, 단지 카르마의 정법에 따라 올바른 정치를 하는 것만이 가능합니다. 따라서 인도에서는 왕권이 불법에 간섭하는 경우가 없었고, 불법은 곧 카르마와 공존하면서 지상 세계에 자비와 관용을 베풀게 됩니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이러한 논리를 알지도, 알 필요도 없었습니다. 위진남북조의 국가들은 단지 불교가 <전륜성왕>의 이념을 가진 호국적 성격의 이민족 종교라는 것만을 이용하려 하였습니다. 불법은 왕법이 간섭하는 것을 막으려 하였지만, 불법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왕들은 <불교를 왕권으로 지배>하려고만 하였습니다. 불법이 본래 이론을 내세워 왕권에 대항하려 하면, 국왕은 <폐불사건>을 일으켜 불교를 탄압해 버리면 그만이었습니다.

따라서 중국에 전래된 초기의 불교는 국가종교적인 성격이 강하였습니다. 국가는 대사찰, 대법회를 열어 불교를 장려했지만, 그 목적은 국가지배자의 위상을 높이고, 권력의 지원을 확보하여 호국사상의 기반을 마련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특히, 이민족 왕조인 북조는 철저하게 불교를 이용하려고만 하였습니다.

3. 불교의 참뜻이 무엇인지는 알지도 못하였다.

초기 위진시대의 불교는 불교 본 뜻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격의불교>였습니다. 위나라의 정음시대 학자들은 불교에 대하여 논의하려고도 하지 않았지만, 논의한다고 하더라도 불교를 <도교사상>에 끼워 맞추어 논의하는 정도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당대 청담사상도 그 내용이 대부분 도교 사상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으므로, 불교에 대해서도 도교적인 수준에서 해석하는 것에 머물렀습니다. 사실 당대학자들이 인도에서 건너온 불교에 대하여 아무런 자료도 없이 그 참 뜻을 알아낸다는 것이 불가능했으니까요.

정음시대 하안, 왕필은 노장사상에 불교 이해를 때려 맞추었습니다. 노장사상에서 대표적인 이론인 <무위자연>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한 것이지요. 석가모니와 공자 등의 성인들은 모두 노자가 주장한 <무위, 도>를 터득하였기 때문에 성인이라고 인식하였습니다.

이들은 불교, 유교, 도교는 모두 하나의 이론이라고 생각하면서 불교의 난해한 사상들은 모두 도교의 논리 속에 포함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예로 불교에서의 <공사상>은 아무 것도 없다는 뜻으로 해석하여 도교의 <무>로 이해합니다. <열반>은 깨달음을 얻어 자연으로 귀속한다는 뜻으로 도교의 <무위자연>로 이해합니다. 불교의 <보살>은 도교에서의 <도>로 이해하며, <진여>는 <본무>로 이해하였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불교가 뭔지도 모르면서 단지 불교사상의 부분적인 부분들을 자의적으로 뽑아서 이해한 것에 불과하였습니다. 따라서 불교의 참 뜻은 알 수도 없었고, 실제 불교의 참 뜻을 알기 위해서는 직접 인도로 가는 방법 밖에는 없었습니다.

따라서 위진시대 중반이 되어 <북위정권, 남조안정기>에는 적극적으로 인도에 진출하거나, 서역의 고승을 중국으로 모셔오는 변화가 활발하게 진행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불교가 무엇인지를 아주 조금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국가정권은 불교이해도와는 상관없이 불교를 국가정책으로만 이용하려 하였고, 그 결과 <여러번의 폐불사건>을 경험하면서 불교가 정착되어 갑니다.

그럼 다음 장에서는 실제 불교교리를 이해하려고 한 사람들과 남북조 시대의 불교 이해정도에 대하여 포스팅하고, 인도불교와 비교해보겠습니다.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1. 이 글에 대한 관련 사료는 이 사이트 검색창에서 자유롭게 검색가능합니다.(관련 검색어로 검색하세요)
   2. 이 글을 가져가실 때는 반드시 댓글을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3. 관련 글 모음
방 : http://historia.tistory.com/category/동양사이야기/중국사이야기

<http://historia.tistory.com 역사전문블로그 히스토리아>

신고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위진남북조의 난세 속에서 등장한 현학과 청담의 달인들

이번 장에서는 위진남북조의 문화를 다루겠습니다. 그 첫 번째로 청담사상에 대한 포스트를 해볼까 합니다.

1. 귀족문화 시대가 도래하다!

위진남북조 시대의 지배층은 <귀족>입니다. 이 귀족들은 한대의 호족계층이 점차 성장하면서 이루어진 계급입니다. 한나라 이후, 지속적으로 대토지와 사병을 양성하면서 성장한 호족들은 혼란한 시대를 맞이하면서, 중앙 관료로 급속히 진출하게 되었고, 이들이 귀족사회를 형성하게 됩니다.

이들 귀족들은 이제 단순히 <토지와 사병>을 가진 지방의 실력자가 아니라 <다양한 학문과 교양>을 가지고 존경받는 계급으로 성장합니다. 지배계급인 귀족이 우월감을 과시하기 위해 몰두한 <교양과 취미> 생활은 곧 위진남북조 시대의 문화로 정착되었습니다.

중국의 문화 특징은 서양과는 달리 전문가 집단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중국에서는 지배층이 곧 학자이고, 지배층이 전문가이며, 지배층이 곧 관료인 사회입니다. 따라서 지배층의 수준에 따라 당대 문화가 결정되는데, 위진남북조의 문화는 수당대까지 이어지는 가장 귀족적이고 화려하며, 국제적이면서도, 이민족의 색채까지 가미된 문화였습니다. 당대 지배집단이 <북방 이민족 왕조>와 <남방 한족 귀족 왕조>였으니까요.

위진남북조의 문화의 특징을 말하자면, 이민족 침입에 의하여 서방 문화가 급속히 전래된 가운데, 아주 다양한 문화가 각지에서 꽃핀 시기입니다. 호한체제가 구축되면서 북방문화는 중국문화에 융합되었고, 이것은 전통의 <중화사상> 속에 다양함이 융합된 새로운 문화를 양산하게 됩니다. 외래 종교인 <불교>와 다양한 종교가 유행하였고, 불안한 시대 속에서 염세주의적인 사상이 크게 융성합니다.

특히, 심한 격동기의 중국은 인생에 대하여 노장사상, 불교사상 등을 통하여 혼란의 원인을 찾으려 하였습니다. 유교는 이러한 혼란기에 제 역할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귀족문화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인간중심적인 문화였고, 유교의 전체주의적 윤리나 왕권강화윤리와는 반대되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북조왕조가 이민족 중심의 왕조로서 서역문화와 한문화가 섞인 문화라면, 남조왕조는 한족이 중심이 되어 <화려하고 우아한> 남조 귀족만의 독특한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남조문화는 북조문화보다 훨씬 더 귀족적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귀족문화는 결코 서민적이지는 못하였습니다. 이들 문화가 개성적이었다면, 그것은 귀족만의 독특한 특권에 의한 것이었고, 이들 문화가 국제적이었다면 이민족 왕조의 등장에 의한 특수한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 문화가 다양하다는 것은 귀족적 취미와 교양이 다양하다는 것이지 결코 대중적인 다양성을 확보한 것이 아니였습니다. 귀족문화는 그들만의 문화에 머물렀습니다.

실제, 서민문화가 출현하는 것은 귀족계급이 몰락하고, 사대부 계급이 성장하는 <송대 이후>입니다. 송, 원, 명, 청의 문화는 각각 문화적 특색을 달리하지만, 모두 <서민적 문화>를 존중하였다는 특색이 있습니다. 그러나 <위진남북조에서 수, 당>의 귀족문화에는 이러한 서민문화에 대한 배려가 없습니다. 이것으로 고대와 중세를 구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2. 현학 사상이 발전하다

현학사상이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유가사상이 쇠퇴하고 호족들이 대두하기 시작한 <삼국시대>부터입니다. 위나라 시대 이래 위진남북조의 혼란기에 사람들은 현실사회의 직접적인 문제와 인간 윤리보다는, 사후세계와 생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유가의 충효 원리>보다는 <노장사상과 불교>의 공사상, 무사상 등에 더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입니다.

위나라에서는 <정시의 음> 시대라고 하여 하안, 왕필 등이 <정음시대의 현학>을 논하였습니다. 현학이란, 도가사상의 철학인 노자, 장자, 주역 등을 논하면서 우주의 근본 원리인 <현 : 도>가 무엇인가를 논하는 사상을 말합니다. 이것의 핵심은 노장사상으로 주역이나 논어같은 심오한 사상을 연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도가에 나오는 무위자연, 소국과민, 자연합치 등을 이용하여 <유교, 음양오행> 등을 도가식으로 해석하는 것이죠.

하안은 노장사상으로 논어를 해석하였고, 왕필은 노장사상으로 주역을 해석하였다고 합니다.

3. 개인주의와 은둔주의 사상이 대두하다.

위진시대의 혼란한 사회상은 은둔주의 사상이 대두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특히 지방의 호족들과 아슬아슬한 시대에 태어난 2세대 관료군들은 중앙집권시대와는 다른 새로운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전제군주나 관료제도에 의한 재배체제를 벗어나서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하였습니다.

그들은 죽림칠현과 같이 은둔하려고 하였고, 어떤 경우에는 장자의 <무정부주의> 사상을 가지기 까지 하였습니다.

특히, 죽림칠현은 유교의 예교적 형식주의에 반발하여 유교를 적극 비판하고, 개인주의적인 사상을 강조하였습니다. 죽림칠현은 난세의 인간이 무엇인가를 연구하면서 고독한 인간존재를 철학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은 인간의 존재를 현상계를 초월한 <시공을 초월한 존재>로 여기는 <신선사상>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신선사상은 곧 노장사상에서 말하는 <자연합치>사상과 연계되어 세속을 탈피한 생활이 가장 안정된 삶이라는 이론으로 전개됩니다.

4. 완적의 자연주의 사상

죽림칠현이란 진나라 시대 대나무 숲에서 청담으로 세월을 보내던 7명의 노장사상가들을 말합니다. 이들의 이름은 완적, 혜강, 왕융, 향수, 완함, 유형, 산도 등 7명입니다.

이중 완적은 귀족가문의 유력자로 많은 사람들에게 관직을 권유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관직에 나가는 것이 곧 생명을 단축하는 미친 짓이라고 말하곤 하였습니다. 진나라에서 조비의 충신 <장제>가 관직을 권하였어도 완적을 거부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마의>의 정변으로 조씨 일가가 몰락하고 <사마씨>의 세상이 오자 세상 사람들은 모두 완적에게 선견지명이 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사마소가 완적을 사위삼으려고 하자 완적은 미친 듯이 술을 마셔 인사불성이 되어 사마소의 청탁을 거부한 적도 있었답니다. 사마소가 강제로 그를 관직이 앉게 하자 그는 곧바로 관직을 이용하여 말을 타고 유람을 떠나 버렸다고 합니다.

완적은 형식과 예법을 완전 거부하였습니다. 그래서 예법에 얽매인 사람이 완적을 찾아오면 눈동자의 <흰자위>를 드러내어 무섭게하고, 거문고나 술로 맞이하는 사람에게는 호의적으로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완적의 태도에서 <백안시> <청안시>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남을 업신여겨 냉정히 째려보는 것은 백안시, 남을 호의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청안시라고 합니다.

그는 상중에도 술과 고기를 맘껏먹고, 유교 예법을 거슬르는 행동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당시 집권자인 사마씨들과 대립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완적의 사상은 만물은 천지에서 나오고, 천지는 자연(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에서 나온다는 자연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연을 본받아 도가 변화하므로 군주가 도를 지키면 만물은 저절로 변화하여 조화로울 것이라 말하였습니다.

그는 자연과 봉건적 신분질서를 결합하여 <윗사람이 되어서 아랫사람을 능멸하지 않고 비천한 신분에 처하여도 귀한 이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5. 혜강과 광릉산의 악보 이야기

죽림칠현인 혜강의 아버지는 조조군대의 모사였고, 그의 아내는 조조의 친척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귀족이었지만, 항상 음악에 심취하여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날 혜강이 스스로 자부하는 거문고를 타고 있는데, 어느 노인이 그 거문고에는 <감정>이 없다고 말하면서 <광릉산>이라는 곡을 연주해주었습니다. 혜강은 광릉산 곡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흘리며, 항상 거문고를 탔다고 합니다.

광릉산 - 전국시대 진나라가 통일을 하기 위해 한을 공격하려고 하자 한의 대신 협루가 진과 내통하여 돈과 관직을 받고 한을 팔아넘기려 하였다. 이 때 대신 엄중자가 이에 분개하여 제나라로 망명하였는데, 이 때 백정출신인 섭정을 만났다. 섭정은 엄중자의 간청을 받아 한나라로 가서 협루를 죽인 뒤 자신의 얼굴을 못알아보게 하려고 자신의 얼굴과 신체를 으깬 뒤 죽었다. 한나라는 그 시체를 길에 버리고 누구인지 밝히려고 하였다. 이 때 섭정의 누이는 목숨을 걸고 시체옆에서 울어서 그 시체가 자신의 동생 시체임을 알리고, 동생이 <대의>를 행하였음을 알린뒤 자결하였다.

죽림 칠현은 나중에 사마씨의 회유책에 의해 해산되었으나 혜강은 같은 고집쟁이는 의연히 사마씨의 세력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혜강은 그 정신적 고통을 달래기 위해 시작과 회화에 몰두하고 그래도 울분이 풀리지 않으면 거문고를 탔습니다. 그리고, 대장장이가 되어 쇠를 두들기면서 울분을 풀곤 하였답니다.

 어느 날 혜강은 불에 군 쇠붙이를 두들기고 그의 친구 향수는 대장간의 풀무를 손으로 움직이고 있을 때 사마씨의 심복인 종회가 발문해 왔습니다.  종회는 혜강의 학식과 명성을 사모하여 그와 교제하기 위하여 방문했던 것이지만, 혜강은 종회가 온 뜻을 훤히 알고 있으면서도 짐짓 모르는 척 방약무인한 태도로 탁탁 쇠붙이만 두들기고 있었습니다. 종회도 또한 혜강의 뜻을 훤히 알고 있으면서도 쉽게 그 곳을 떠나려 하지 않았고, 서먹한 분위기가 오래 계속되자 참다못한 종회가 부아를 내면서 일어서 나갔습니다.

 혜강은 그제서야 비로소  입을 열었습니다.  "무슨 소문을 듣고 왔다가 무엇을 보고 가는 거요?"

 종회가 홱 돌아서며서 응수하였죠.  "들을만한 소문을 듣고 왔다가 볼 만한 것을 보고 가오."

 당시 조정의 권력을 제멋대로 휘두르던 사마씨는 완적과 혜강을 자파의 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갖가지 회유책을 썼습니다. 완적은 술과 익살스런 말로 그때 그때의 위기를 무난히 모면하였으나 혜강은 끝까지 사마씨 일파와 직설적으로 대결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희생되고 말았습니다. 사마씨 일파들은 혜강의 죄를 나조하여 그를 형장으로 끌고 갔답니다.

 혜강은 형장에서 한나라의 간신을 척살한 섭정의 행동에 깊은 감동을 느끼면서도 간신을 제거하지 못하고 도리어 그들의 술책에 빠져든 자신의 무력함에 회한과 통한의 분노를 삼켰습니다. 혜강은 그 자리에서 거문고를 빌어 '광릉산' 한 곡조를 탄주하였습니다. 자신의 온 생애를 바쳐 갈고 닦아온 그 곡조를 거문고에 실어 이승과의 마지막 작별을 고하는 그의 비장한 멜로디가 흡사 장송곡처럼 온 형장 안에 울려 퍼지자 주위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혜강은 거문고를 손에서 내려놓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였습니다.

"내가 죽는 것은 하나도 억울하지 않다. 그러나 '광릉산'아 , 너는 이후부터 세상에서 사라지게 되었으니 그것이 원통할 뿐이로다!"

그러나 서른 아홉에 혜강은 죽었지만, 광릉산은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 사실 제가 읽은 김용의 소설중에서 가장 감명깊었던 작품중의 하나가 <소오강호>였는데, 거기에서 유정풍과 곡양장로가 광릉산 악보를 발견하여 둘이 음악으로 맺어진 친구로 나오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가장 감명깊었던 장면중에 하나이고, 눈물나는 장면중에 하나였죠. 그 장면에 감동받아서 김용작품의 시리즈를 군대에서 반년 만에 모두 완독했던 적이 있습니다. 월나라 월녀검법에서 청나라 녹정기까지 모두요....

6. 청담이란 무엇인가?

청담사상은 중국 위진남북조 시대에 귀족사회에서 유행하던 탈속적인 논담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청, 담은 말 그대로 세속을 떠난 깨끗한 이야기를 말하지요.

이것은 역과 노장사상, 인물비평등을 토론형식을 빌어서 논하는 것이었는데, 초기 이러한 노장사상적인 논쟁을 <현학>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점차 현학적인 기풍은 비현실적인 공론으로 기울어졌고, 나중에는 죽림칠현과 같은 무정부적이고, 자연주의적인 논쟁으로 기울게 됩니다.

이들은 세속적 가치를 초월한 철학적인 논쟁을 좋아했고, 예술적인 가치를 중시하였습니다. 완적의 철학사상과 혜강의 광릉산은 그 대표적인 예로서 제시한 것입니다. 이들은 인간 현실에 대한 비관적 현실을 떠나 우주론적인 최고 원리의 경지가 무엇인가를 토론하였습니다.

이 청담 사상은 초기에는 노장사상과 탈세속적인 사상, 정부 비판 사상이었지만,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뷸교>사상 쪽의 청담 이야기로 변환됩니다. 위진의 노장사상 - 남북조의 도교사상 - 수, 당에서의 불교 사상으로 이야기의 논의가 변화되면서, 점차 불교사상을 이해하는데 주력하게 됩니다.

실제 중국 초기 불교는 불교사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노장사상을 도용합니다. 불교의 <공> 사상은 도교의 <무위>사상으로 이해하였고, 불교의 <열반>의 개념을 도교의 <신선>개념으로 이해하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은 청담이 진행된 과정을 보여주는 일례이자, 초기 불교 수준이 너무 낮아 노장사상이나 현학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노장사상은 청담사상과 함께 발전하였지만, 점차 불교적 색체를 띄게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노장, 청담, 불교사상의 유행은 전통 유학자들에게는 비판의 대상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상에 대한 반발로 <숭유론>이 유행하고, 유교부활을 말하는 자들도 많았지만, 그들의 견해는 대부분 묵살되었다고 합니다. 위진남북조의 혼란기는 유교적 도덕원리가 통하기에는 너무 어수선한 사회였으니까요.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1. 이 글에 대한 관련 사료는 이 사이트 검색창에서 자유롭게 검색가능합니다.(관련 검색어로 검색하세요)
   2. 이 글을 가져가실 때는 반드시 댓글을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3. 관련 글 모음
방 : http://historia.tistory.com/category/동양사이야기/중국사이야기

<http://historia.tistory.com 역사전문블로그 히스토리아>

신고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중국춘추전국시대의 사상 2. 도가와 묵가

이번 장에서는 중국 춘추전국시대 사상의 2번째 편으로 도가와 묵가를 간략히 다루어 보겠습니다. 이 두 사상은 전편에 다른 유가와 정면적으로 충돌한 사상으로, 유가와 비교해서 해석하면 재미있습니다.

1. 도가

도가의 기원은 노자, 장자의 노장사상을 흔히 말합니다. 도가는 유가와 함께 중국 2대 사상으로 발전하지만, 그 사상은 유가에 대한 반발적 경향이 강합니다.

도가 사상의 핵심은 유가에서 말하는 <도덕원리>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합니다. 그들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도덕이라는 것은 인간의 자연성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또, 가부장권을 이론적 근거로 하여 전제군주권이 당연하다고 말하는 유가는 국가주의적인 기형아적 사상이라고 봅니다.

그들은 춘추전국의 혼란은 인간이 욕심을 부려서 일어난 <인재>라고 보고, 인간이 욕심을 떠나서 자연 그대로의 삶을 보고 배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소위 <무위자연>이며, 도가에서는 국가생활을 떠나 자연생활에서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보통 이러한 현실 부정의 사상은 중국 남부의 초나라 등에서 시작되었으므로, 인도 등 남부 지역의 자연주의 사상이 중국에 전파된 것이라 보는 입장도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사상의 기원이 아니라 도가 사상이 실제 자연중심적이고, 자연과 인간이 서로 조화를 이룬다는 중국 사상의 기반을 이룬다는 점이죠.

도가에서는 국가란 것의 규모가 커질수록 인위적인 사회라고 말합니다. 국가는 될 수 있으면 인간 생활에 필요한 만큼의 최소 단위인 것이 좋으며, 국가의 규제보다는 자연의 법칙이 더 커질 때 진정한 자유가 생긴다고 합니다. 이것을  <소국과민>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죠. 따라서 국가가 만약 일반 백성의 삶을 지나치게 규제한다면, 백성들은 국가에 대하여 저항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도가에서는 <저항권>의 개념이 은연중에 나타나는 것이며, 중국 민란의 사상적 근거의 대부분이 훗날의 <도교>에서 비릇된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다.

2. 도가의 사상가

도가 하면 일단 노자를 떠올릴 것입니다. 도가의 창시자이자 무위자연, 소국과민이라는 용어도 노자에게서 비롯되니까요. 그는 전제군주제를 비판하였고, 백성들의 저항을 인정하였으며, 유가의 인위적 질서를 비판하였습니다. 그의 사상은 거의 전해지지 않습니다. 다만, 노자가 은둔하기 직전 국경검문소 병사의 요청으로 그 자리에서 적어주었다는 <도덕경>만이 남아 있는데, 이 도덕경의 심오함은 계몽주의 시대 서구 사상가들마저 감탄하여 필독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장자는 도가사상에 종교성을 주입하여 <도교>를 확립하는데 기여한 철학가입니다. 그는 진리의 상대성을 주장하여, 어떤 진리도 절대적 근원은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가, <내가 꿈 속에서 나비가 되었던 것인가, 내가 나비인데 지금 인간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라고 말한 부분은 진리의 상대성을 명확히 드러내주는 말입니다.

3. 묵가 사상

묵가는 묵자가 창시했는데, 유가의 형식주의와 불평등주의를 전면적으로 반발하고 나온 제자백가입니다. 묵가는 전국시대 당대에는 가장 활발했던 학파로서, 당대 사상을 이끌었던 핵심 제자백가입니다.

묵가가 유가를 비판한 내용은 다양합니다. 일단 유가의 윤리성이라는 것이 너무 형식적이고, 비실용적이라는 점입니다. 묵가의 입장에서 유가를 바라볼까요?

유가에서의 예악정치란, 속마음을 숨기고 형식으로만 상대를 조롱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왕위세습이라는 것은 지배층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만든 사회적 제도 장치입니다. 유가가 말하는 어짐, 효도, 우애는 자신들의 가족만을 위한 가족윤리로서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겸애사상에 맞지 않습니다. 묵가에서는 유가의 사랑을 <차별애>라고 하며 비난합니다. 또, 삼년상이란 쓸데없는 허례허식으로, 그 시간에 노동을 해서 이웃과 더불어 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유가가 말하는 정치철학은 너무 현세주의적이라 내세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서 다수 <백성>들의 삶에 위안이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 반대의 사상이 묵가 사상의 핵심입니다.

묵가사상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겸애, 모두가 평화롭게 살아야 한다는 비공, 모두가 평등하다는 상동, 모두가 일한 만큼 똑같이 나누어 가진다는 교리, 위인을 존경한다는 상현, 왕위와 높은 직책은 능력에 따라 열심히 일한자에게 준다는 선양 등을 주장합니다.

따라서 사람에게 꼭 갖추어야 하는 본성은 <가족윤리>가 아니라 <노동의 자세>라고 말합니다. 노동은 곧 생활이자, 사회적 능력이자, 이웃에 대한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온정인 것입니다.

묵가사상에서 본 정치는 노동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공정한 능력 사회입니다. 이 공정한 사회를 위해서는 국가의 역할이 너무나 크다고 묵가는 말합니다. 즉, 국가는 정치를 공정하게 할 수 있는 인물을 선거(선양)하여 그 인물이 모든 노동자들에게 혜택을 주어야 합니다.

국가의 부강함, 인구의 증가는 모두 공정한 정치에서 나오며, 공정한 정치란, 노동자들에게 생산, 노동, 절약의 정신을 심어주고 가난한 자를 없애주는 정치를 말합니다. 특히 국가가 해야 할 일을 <3환의 제거>라고 말하는데, 3환이란 백성들이 굶주리는 것, 추위게 입을 것이 없는 것, 일하는 자에게 휴식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묵가는 묵자 이래 거대한 교단을 형성하여 사회 노동조직이자, 종교적 성향을 지닌 사학 집단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들은 이웃에 대한 절대적 겸애를 바탕으로 한 <공리주의>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사랑>을 핵심 덕목으로 하는 사상체계였습니다. 그리고 철저한 노동과 금욕주의를 통하여 생산력과 개인의 능력을 끌어올리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으므로, 게으른 자에 대한 귄위주의적 체벌과 훈련, 노동에 대한 복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묵가의 강력한 노동 중심의 권위주의는 묵가의 몰락을 초래합니다. 춘추전국시대 가장 강성했던 묵가가 몰락한 원인은, 그 사상이 너무나 철두철미하여 <중용>을 강조하는 중국사람들에게는 어려운 과업이었다는 것에 있습니다. 이후의 묵가 교단은 중국 역대 왕조에서 두각을 나타낸 적이 없습니다.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1. 이 글에 대한 관련 사료는 이 사이트 검색창에서 자유롭게 검색가능합니다.(관련 검색어로 검색하세요)
   2. 이 글을 운영자 허락없이 불펌할 경우 티스토리에서 제공하는 <CALL BACK>기능이 자동으로 삽입됩니다.
   3. 관련 글 모음
방 : http://historia.tistory.com/category/동양사이야기/중국사이야기

<http://historia.tistory.com 역사전문블로그 히스토리아>

신고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